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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정의 친구들

옛날 옛날에

바닷가 작은 마을에

이녹 아덴이라는 아이가 살았습니다....

 

이건 꽤 어린 시절에 들은 이야기이다.

책도 읽었지만 이야기를 먼저 들었다. 분명 초등학교 시절이었다. 아마 6학년 때 였을 것이다.

나의 6학년은 꽤 괜찮았나보다. 50명은 기본으로 넘는 콩나물 시루같은 교실에서 작지도 않은 6학년 아이들을 데리고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담임선생님이 내겐 있었다. 아, 내가 57번이었다. 근데 키순은 아니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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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시절의 기억이 그닥 또렷하지 않은데 6학년 담임선생님이 여자였고 비교적 좋아했었고 (열두살 이후로 좋아했던 선생님은 한명 혹은 두명 뿐이다, 오히려  나는 선생님들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졸업할 때 석별이란 노래 때문인게 크긴 하지만 무척 울었던 걸 보면 6학년 담임샘을 싫어하진 않았던 것 같다. 초등학교, 아니 나에게 있어선 국민학교인 그 시절에  아이들이 1년 내내 하루종일 보고 있어야 하는 선생님은 담샘 뿐이었으니 담임선생님을 좋아하는가 그렇지 않은가는 인생이 행복한가 그렇지 않은가를 추단하는 문제였다.

그럼에도 6학년의 기억은 그것 뿐이다. 이녹 아덴을 들은 것.

친구들이라 하면, 단지 만화를 같이 좋아했기 때문에 이야기를 조금 나눴을 뿐인 동급생이 하나 있었고, 별로 중요치 않은 친구가 하나쯤 더 있었던 것 같고, 매우 '중요한 타인'으로 분류될 수 있는 벗이 한 명 있었다.

벗! 열 두살 즈음부터 그 친구를 알았고 사귀었고 그미에게 편지를 쓰면서 벗이라는 단어를 자주 썼었다.

그애는  열 두살부터 중학시절까지의 일기장에 거의 매일처럼 등장하는 친구였다.

 

 

혜정이가 학교 가는 날이다.

그냥 학교 가는 날이 아니라  중학교 입학하고 처음 등교하는 날이다. 바로 어제 입학식을 하고 담임선생님과 배정된 반의 교실만 보고 그냥 왔으니 수업을 받고 점심을 먹고 6교시가 끝나는 오후 세시까지 계속 있어야 하는 학교생활은 오늘부터 시작이다. 화요일인 오늘과 내일은 6교시지만 목요일은 7교시까지 있어서 네시나 되어야 교실에서 나올 수 있다. 

혜정은 한없이 우울했다. 오후 3시나 4시까지 자신이 들어간 반의 교실에서 나올 수 없다니...교실은 그냥 감옥의 다른 이름 같았다.  그 중에서도 독방이나 다름없는 지독한 외로움과 슬픔과 기댈 곳 없이 막막한 공간이었다.

 

'6학년 때도 그애와 함께 있을 수 없어서 슬펐는데 중학교가 같은 곳으로 배정되어 뛸듯이 기뻐했던게 얼마전인데 이게 뭐람...1학년의 반이 왜 이리 많은거람....아이들은 왜 이리 많담.....왜 그애와 같은 반이 되지 못했을까...'

 

운명은 자신을 비켜가고 있다는 생각에 혜정은 너무나 우울했다.  중학 3년동안 그애와 같은 반이 될 날이 없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들었다. 2학년 때는 될 꺼라는 생각이 확신처럼 들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1년이나 남았다. 앞으로 1년 이라는 긴 시간을 그애 없이 학급 생활을 해야 한다는게 끔찍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시간동안 그애의 마음이 내 곁에 있을까...'

 

왜 이런 생각을! 혜정은 도리질을 쳤다.

작년에도 같은 반이 아니었지만 매일 만났고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길을 늘 함께 했고 거의 매일처럼 그애의 집에 들러 더 머물렀으며 일요일에도 곧잘 그애의 집을 찾아 함께 지내지 않았던가.

문득 지난 주 일요일에 그애의 집에서 함께 먹었던 맘모스빵이 생각났다. 달콤한 사과잼이 숨어있는, 보솜한 소보루가 듬뿍 얹어진 커다란 맘모스빵은 가로세로 네모지게 등분하여 그애와 나와 그애 오빠가 함께 먹고도 충분하여, 남은 걸 다시 봉지에 넣어 샛노란 금색테이프로 다시 잘 묶어 봉해졌었다. 그애의 집에서 우유 한 잔과 혹은 그냥 보리차 한 잔과 함께 먹는 맘모스빵은 정말 맛있었고 또 평화로왔다.

그애의 집은 학교와 혜정의 집 사이에 있었다. 말하자면 혜정에게는 학교를 가거나 오는 길에 지나갈 수 있는 곳이었다. 혜정은 아침이면 조금 일찍 나와 가능하면 그애의 집 앞에서 그애를 기다리는걸 좋아했다. 시간은 조금 일찍이어야 그애가 대문을 나오지 않았거나 아담한 그집 대청마루에서 신을 찾고 있거나 하는 짧은 시간을 골목께에서 기다리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혜정은 그 역할을 아주 좋아했다.

어쩌다가 그애의 집에 도착했는데 이미 학교에 가 버린 후 일 때도 있었다. 그땐 너무너무 속상했다.  그애가 먼저 가 버린 걸 나무라진 않았다. 그러나 그런 일은 거의 없었다. 한 번 외에는.

혜정은 그러나 중학교는 초등학교와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번에는 거꾸로 혜정의 집이 학교와 그애의 집 사이에 있게 되었다. 그리고 결코 걸어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특히 아침 등교시간에는 더욱이나.

중학생들은 한껏 폼을 재며 버스정류장에 옹기종기 모여 서서 웅성댔고 생전 처음 입는 교복들을 어색함도 없이 언니오빠들 사이에서 언제부터 중학생이었던 양 익숙하게 입고 나래비 서서 버스에 올라탔다.

혜정은 혼자 버스를 타고 혼자 어색함과 민망함으로 상기된 얼굴을 창 쪽으로 돌리고 섰다. 여중이 있는 곳은 버스로 네 정거장 정도였다. 다섯 정거장까지 가는 버스를 타면 교문 바로 앞에서 내릴 수 있지만 기다릴 여유가 없는 상급생들은 학교 어귀의 큰 길에서 지나가버리는 버스를 타고 갔다가 내리자마자 교문까지 냅다 뛰었다. 교문에는 지각과 용모단정을 체크하는 학생지도부 선생님과 완장을 두른 깔끔외모의 선도부가 있었다. 때문에 걸릴 만한 뭔가를 숨긴 이들은 최대한 많은 인파가 교문을 통과하는 시간을 이용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혜정은 그게 문제가 아니라 버스가  지나는 길에 있는 또 하나의 중학교, 그 남자중학교의 학생들이 함께 버스를 타는 것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익숙해지지도, 관심도 가지 않는 이 오빠들이 마냥 눈에 가싯거리였다. 뭐 글타구 누가 눈길 하나 주는 것도 아니긴 했지만.

남자도, 여자도, 사람도 많은 것이 싫은 건지도 몰랐다. 혹은  혜정은 그냥 그애와 함께 할 수 없는 이 삼십여분의 등교시간이 하냥 싫고 또 싫었다.

쉬는 시간마다 단짝친구를 찾아 그애의 교실에 가게 될 것 같았다. 그애의 교실은 불행히도 복도의 맨 끝에 있었고  혜정의 교실은 반대편 끝이었다. 그나마 같은 1층에 있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했을까, 2층에도 1학년의 11반과 12반이 있었다. 그 옆으로 2학년 교실이 이어지는 2층에 갈 일은 없었다. 혜정은 같은 초등학교에서 올라온 아이들을 자기 교실에서 몇 명 발견하긴 했다.  아니 그네들이 서로 아는 척하며 물어보고 대답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저절로 알게 된 것에 불과했다. 혜정 자신이 아는 얼굴은 없었다. 친해보자고 인사하는 친구도 없었다. 혜정은 내성적인 성격이라고 초등학교 내내 담임선생님의 통신란에 써 있었던 대로 침묵과 작은 목소리로 하는 최소한의 대답으로 중학교 시절을 시작하고 있었다. 3월, 이 다사로운 삼월의 하루 하루를 혜정은 단짝친구를 자주 볼 수 없음에 슳어하며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유년의 행복은 일찍 끝났다. 그 삼월이 다 가기 전 어느날이었다.

 

혜정은 다 친해지지 않은 옆자리의 짝궁과 수업 종료 후 청소시간을 함께 하고 있었다.  옆자리 짝궁은 혜정 이외에도 초등학교 동창이거나 한것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벌써 친해진 같은 분단의 아이들과 수다를 떨면서 칠판을 지우고 있었다. 혜정은 자신이 속한 칠판 앞 교단 구역을 쓸고 대걸레를 찾아서 닦으려고 했다. 짝궁도 함께 속한 구역이었다. 분단의 다른 아이들은 각기 자신의 짝궁들과 함께 책상들이 즐비한 1분단 구역, 2분단 구역, 3분단 구역...그리고 교실 뒤쪽 구역을 맡고 있었다. 하지만 짝궁들과 함께, 같이 맡은 구역을 청소하고 있는 아이는 눈에 띄지 않았다. 칠판을 지우면서 낙서를 하고 지우개를 던지고 분필가루를 사방에 흩날리고 있는 일단의 무리들이 바로 청소를 담당하는 분단의 아이들이었기 때문이었다. 혜정은 그네들을 한심하게 생각했고 쉽게 경멸했으나 오래 생각키지는 않았다. 빨리 청소를 끝내야 귀임의 반에 갈 수 있다는 생각 뿐이었다. 아까 쉬는 시간에 알아본 바에 의하면 우연하고도 다행히도 그애도 오늘 청소당번이었다. 혜정은 청소를 다 해도 다른 아이들과 함께 청소검사를 다 맡아야만 교실을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바로 그 하나의 이유 때문에 청소시간을 마냥 자유시간인 양 허비하고 있는 아이들이 미웠다. 밉고 미웠지만 구역마다 청소를 하고 있는 아이들이 짝궁없이도 거개 끝내가고 있었기 때문에 무시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분단장이 빨리 담임선생님한테 가서 청소가 끝난 사실을 알리고 담임이 교실을 한번 둘러보러 오거나 아니면 그대로 돌아가도 좋다는 허락만 떨어지면 그 뿐이었다.

 

" 야, 이 지우개도 좀 털어와."

 

짝궁은 대걸레를 빨러 교실문을 향하는 혜정의 등 뒤에서 소리쳤다.

혜정은 내가 왜 ! 하고 속으로 외쳤다. 미간을 찌푸리며 뒤돌아보았지만 그닥 친하고 싶지 않은 짝궁에게 할 말은 아무것도 목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다. 

 

" 너도 칠판 담당이쟎아, 내가 지웠으니까 니가 털어오라구. "

 

혜정은 뭐라 뭐라 조목조목 할 말이 많았다. 칠판은 이 교단 구역의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구, 여길 다 쓸고 닦고 있는 내가 안 보이냐구, 내가 허리 굽혀 먼지 속에서 빗자루질을 하고 우리반의 2개 밖에 없는 대걸레를 교실 뒤쪽 구역의 아이가 가져가기 전에 교실 중간구역을 맡은 아이들한테서 받아오느라  얼마나 힘들게 눈치를 봤는지...얼른 빨아와서 얼른 닦고 가야 하는데...지는 한 것도 없으면서... 이 모든 말이 목구멍 안에 걸려 있었다.

 

" 야아...이거 가져가라니깐..."

 

짝궁은 힐끗 보고 다시 뒤돌아가려는 혜정의 등을 향해 지우개 하나를 가볍게 던졌다. 교실 문을 나가기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혜정의 목 뒤를 스쳐간 지우개 덩어리는 가속도가 붙어 교실 문을 막 들어오는 윤 진을 기겁하게 만들었다.

 

" 어 ! 어...어어엇...!"

 

윤진은 키가 컸다. 지우개를 피하려던 윤 진의 어깨 즈음이 혜정의 코에 콱 받혔고 혜정은 아픔과 함께 그 곳이 코라는 사실, 코가 벌개져 우스울 것이라는 생각에 눈물이 왈칵 솟았다. 왜 이렇게 억울한 지 모르게 눈물이 샘솟았다. 순식간에 아이들이 와 하고 몰려들어서 더 창피했다.

윤 진은 괜찮으냐고 물었고 짝궁은 지우개를 가슴에 안은 채 다가와 미안하다는 말을 연신 주워대며 당황해 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혜정이 우는 모습에 깜짝 놀라 어떻게든 이 말수 적은 동급생을 위로해 주고 싶어했다.

 

"흑...흑흑흑..."

 

혜정은 고개를 푹 숙이고 아이들의 팔 사이를 빠져나가 그 길로 자신의 단짝친구네 반으로 달려갔다. 아니 달려가고 싶었지만 눈에 띌까봐 빠른 걸음으로 막 걸어갔다. 머릿속은 오직 그애를 만나야한다는 생각 뿐이었다.

나는 이렇게 힘든 일을 겪고 있다고, 내게 이런 일이 생겼다고 호소하면서 혜정은 단짝친구의 위로를 받고 싶었고 사건을 공유하고 싶었고 그래서 보고하러 간 거였다.

 

'우리는 그날 그날의 모든 일을 서로 잘 알고 있지 않았던가. 6학년 시절 같은 반이 아니어서 우리는 매일매일 쪽지를 썼고 쉬는 시간마다 쪽지를 교환했으며 처음 친구가 되었던 5학년 때의 같은 반 때보다 더 서로를 잘 알고 이해하고 서로에게 할 말이 넘치지 않았던가.'

 

이런 정도의 큰 일은 당연히 단짝 친구가 먼저 알아야 했고 바로 그애로부터 먼저, 가장 크게 위로를 받아야만 하는 것이었다. 

길지도 않은 복도의 끝에 있는 그애의 교실까지 가려면 건물의 중앙에 있는 현관 홀을 지나야 했고 거기서는 사람들의 시선이 더 많이 집중되는 것 같아서 혜정은 눈물이 멈추지 않아 더욱 벌개지고 있는 얼굴을 푹 숙이고 한 손으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휙 지나갔다. 윤 진이 그 뒤를 따라 가고 있었다.  혜정의 단짝친구네 반 아이인 그애는 혜정의 반으로 자신의 친구들을 만나러 오곤 했었다. 오늘도 청소시간이 어찌되었는지,  저의 친구를 보러 들어오다가 혜정과 맞부딪힌 것이었다. 키가 큰 윤 진은 외모만큼이나 성격도 시원시원해서 남의 반 교실도 서슴없이 들어오곤 했다. 혜정이 늘 단짝친구네 반의 교실 뒷문께에서 뒷쪽에 앉거나 서 있는 누군가에게 예의바르게 누구 좀 불러줄래 하고 말하던 것과 달리.

단짝친구는 늘 자기 자리 근처에서 별로 떠나지 않은채 주위의 아이들과 떠들고 있었다. 교실 뒷문 쪽에 가까이 앉는 날이 아니면 혜정으로서는 목소리를 크게 내어 친구를 부르기가 어려웠지만, 키가 큰 윤 진은 어쨌든 뒷쪽에서만 맴돌았고 자주 혜정이의 부탁을 받게 되었으며,  받지 않아도 뒷문에서 빼곰히 고개를 내민 혜정을 볼 때면  큰 소리로 혜정의 친구이름을 불러제꼈다. 그애는 보지 않아도 반 아이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으리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혜정의 관심은 자신의 단짝친구 밖에는 없었다. 혹은 단짝친구가 있기 때문에 다른 여자아이들처럼 그 애를 좋아할 필요가 없었다.

 

윤 진의 반은 청소를 끝내고 담샘이 검사하러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혜정의 단짝친구도 다른 아이들과 함께 기다리면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애는 어쩌면 그리도 빨리, 그리도 많은 아이들을 친구로 사귈 수 있었을까...혜정은 그애가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웃고 떠들고 있는데 자신이 불쑥 들어가는 것이 너무나 불편했다. 자신의 울어서 벌개진 얼굴, 벌개진 코, 흐트러진 앞머리에 가려졌지만 눈물이 그렁해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이 단짝친구만이 아니라는 것이 너무나 불편하고 분했다. 자신이 왔는데 왜 그애는 뛰어나와 맞이해 주지 않는 걸까. 혜정은 여느때와 달리 교실의 뒷문께에서 멈추지 않고 친구를 발견하자 바로 걸어들어갔다. 그리고 놀라고 있는 그애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눈물이 계속 나서가 아니라 자신의 얼굴을 다른 아이들이 보는게 싫어서.

아이들은 갑자기 휙, 울면서 들어와  딘찍친구의 품에 안기는 혜정의 모습에 깜짝 놀라는 듯 했다. 그리고 뒤미처 들어온 윤 진이 상황을 설명하자 많이 아프냐고 걱정스레 물었다.

아픔 따위, 눈물 따위 그애를 둘러싸고 있는 아이들을 보자 마자 단번에 잊어버렸고 그쳐버렸다.

혜정은 더 이상 자신의 단짝친구가 자신 만의 친구가 아니라는걸 뼈저리게 절감했다.

이 다사로운 봄날, 제 인생의 처음 사랑이 속절없이 허물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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