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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중....

왜, 늘 항상 누군가에 집착하는 걸까...

이 집착을 버리는 것도 너무 힘겨웠지만, 버리고 나서의 공허함을 견디는 것도 만만챦게 힘겹다.

게다가 집착을 버려야겠다고 생각한 계기도 집착하고 있던 한 사람의 영향 때문이었다...

 

쟝, 그니는 말끔한 신사였다.

하하하...이리 써 놓고 보니 더 말끔하게 느껴진다.

그이만큼 쿨하면서 진정성을 겸비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혹은 누군가와 이야기하면서 "일치" 에 대한 운명을 느낀 적도 처음이었다.

소설 속의 연인들이 말하는 운명적인 만남이 무슨 뜻인지 - 로미오나 쥴리엣이 죽음을 불사하면서 혹은 안나 카레리나가 숭고한 희생으로 함께 하는 여정 속에서도 제대로 말로 표현한 적이 없으므로 - 그들이 왜? 그토록 상대를 갈구했는지 알 수 없었으나 나는, 그와 동조하고 공감하고 일치했기 때문에 운명을 느꼈다.

그는 팀의 리더였다. 그의 팀은 나와 다른 층에 위치했으므로 직접 그의 활약을 볼 순 없었으나 다른 리더들이나 사원들 사이에서 긍정적으로 호평되는 그에 관한 이야기들은 그가 매우 공명정대하면서 상사에게 대범한 반면 동료들에겐 매우 온화하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의 업무처리능력도 뛰어나서 우등그룹의 사원들보다 150%이상 성취해내곤 했기 때문에 사원갈구기를 전문으로 하는 과장도 시빗거리를 찾지 못 해 입맛만 다시기를 반복했다.

또한 누구보다도 먼저 동료들의 고충을 세세하게 알아차렸지만 혼자서 조용히 도와줘야 할 지, 여럿이 함께 업무분담을 할 지, 상사를 방문하여 협상을 시작해야 할 지에 대해 그이만큼 정확하게 간파해내고 해법을 제안하는 이도 없었다.

당연히 그는 인기캡이었다.

그의 지인들은 오늘은? 내일은? 그럼 주말저녁은 어때? 하면서 술 한 잔 하기를 청했고 보통 2주 후까지도 그의 저녁 스케쥴은 꽉 차 있었다. 한 마디로 그는 술 마시며 환담을 나누는 것에 매일매일을 바쳤고 회사에서 가까운 한, 두 집을 정해두고 외박을 하였지만 다음날은 말끔한 모습으로 출근했다.

내가 그를 본격적으로 만난 것은 회사가 도산하면서였다. 아니 도산 직전에 인수합병되었지만 기존의 회사와 이후의 회사는 모든 면에서 일대쇄신을 보여주었기에 우리들이 수 년간 다녔던 회사는 없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새로운 회사의 새로운 경영과 관리방식에 대응하기 위해 회의는 연일 이어졌고 뒤풀이도 계속 뒤따라다녔다. 자연히 그의 저녁 술자리는 한 곳으로 집중되었고 그의 술자리 파트너는 아니었지만, 회의석상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내가 일찍 집에 가지 않는 한 대부분의 마지막 차주...까지 지키는 그와 주석을 함께 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물론 그닥 교제범위가 넓지 않고 세 명이상을 한꺼번에 만나는 자리에서 존재감이 미미했던 나는 처음에는 뒤풀이에 자주 빠졌었다. 혹은 1차에서 돌아가는 초기그룹에 묻어 나왔었다.

그러나 어느날의 회의 이후 나는 술자리의 끝까지 남았다. 그가 회의에서 한 발언 때문이었다.

" 외부인 참석은 반대야."

그는 약간 망설이다가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항상 선배들보다 늦게 이야기하고 반론을 펼 때는 논지를 객관화시켜 목소리 높인 사람들의 기분을 감안해 주곤 했던 그였기에 좌중은 그의 단호한 목소리에 주의를 집중했다.

"조언을 구하는 건 괜찮지만 직접적인 참가는 아니라고 생각해. 주체와 연대가 구분한다고 구분되어지고 합친다고 합쳐지는게 아니쟎아. 각각의 위치에서 소통하는게 맞다고 생각해. ...회의 구조를 이분화시킬게 아니라면."

그의 마지막 말은 일타였다. 주창자들에게 미리 동조했었던 성미 급한 한 동료가 뭐라 말하려는 순간, 의장 역할을 맡고 있던 대표가 말했다.

" 물론이지. 회의 구조를 이분화시킬 수는 없어. 당연히 회의하면서 사회자가 두 명일 수도 없지. 이 얘기는 아닌 걸로 하고. 지금까지처럼 필요할 때 조언을 듣고 와서 전달해주면 참고하고 그러면 되지."

대표는 주창자들을 쓱 한 번 건너다보곤 바로 다음 얘기를 하자고 했고 이의는 제기되지 않았다.

나는 덕분에 불편하고 힘든 얘기를 하기 위해 입 한 번 벙긋할 필요가 없었다.

대표의 논거는 그다지 논리적이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그리 될 수 밖에 없을 꺼라는 상황을 직감적으로 수긍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기에 또, 그리될 것을 의도한 제안이었나? 하는 의구심을 순간적으로 솟구치게 하는 즉문즉답이었기에 좌중은 은연 숨을 죽인 듯 했다. 그 후의 회의는 소소한 의결 외에 대책에 부심하는 것으로 시간을 채우고 마무리되었다. 사람들은 고뇌와 걱정으로 시작한 회의를 피로와 짜증으로 치워버리고 술을 마시러 갈 생각에 흥을 돋워 새로이 기운이 나는 듯했다.

늦은 시간 때문인지 1차에서 대거 탈락하고 단골호프집에 모인 사람은 네 명 뿐이었다.

" 야, 아까 너 말 잘 했다. 내 입장상 걍 자를 수도 없고, 난감했는데 참... 갸들은 왜 그런지... "

대표는 남은 자들이 다 제 편도 아닌데 속내를 툭 펼쳐놓으며 쟝에게 말했다.

" 뭐? 뭐 말이야? 응? 그나 저나 취하네..나 오늘 어디서 잘까? "

신입사원 주제에 대책회의에 참석하고 있는 1과의 양호는 입사 초기부터 바람을 일으킨 독특한 스타일과 재담에다 유능함과 진보적 성향까지 겸비하였지만 그 성향이 논리적 깊이를 갖기에는 좀 역부족인 듯  눈치가 없었다.

 " 글쎄... "

쟝은 없는 사람들을 놓고 뭐든 말하기가 불편한 듯 대답이 시원하지 않다. 다혈질처럼 보이지만 눈치 백단으로 민심을 휘어잡고 있는 대표는 쟝에게 더 푸념하지 않고 화살을 돌렸다.

" 넌 어케 생각하냐? 그거. "

취해 있는 신입사원을 집으로 데리고 갈 냥인 듯 제 옆자리에서 소파 구석으로 쭉 밀어부치면서 대표는 흘끗 나를 쳐다보았다.

" 그렇지...회의 구조가 이분화될 수 밖에 없어, 보내고 나서 다시 이야기해야 하니까..."

외부인의 주도대로 회의가 끌려가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던 나는 속내를 슬쩍 덮으며 대표의 자존심에 기를 보태주었다.

"그렇지, 다시 얘기해야 하지, 결국 우리가 결정하고 우리가 행동해야 하는 거니까...누가 책임지는데...다 내가 책임지게 될게 뻔한데 ! "

대표로 추대되면서 한 점 이의도 받지 않았지만 정작 자신은 늘 자리가 부담스러웠던 이대표였다. 누군가 정확하고 바르게 지침과 해답을 제시해 주면 좋겠지만 그건 우리 모두의 희망사항일 뿐, 혼돈의 시기, 힘없는 우리들은 쪽수를 모아 권리를 지키는 데 무엇을 더 동원하고 어떤 행동으로 한 발을 내딛어야할 지에 고민만 많았다.

" 뭐 좋은 방법이 없을까? 회사의 의도를 미리 알 수 있거나...."

이대표는 또 나를 건너다본다. 쟝이 아이디어를 내지 않기 때문일까?

" 연구소에 경영분석을 의뢰해보는 건 어떨까? 요즘 구조조정 들어가는 회사들에서 많이 하는 것 같던데?"

" 그런게 있냐? 너두 알아? "

대표는 쟝에게 확신을 구하듯 돌아본다.

" 응, 들어본 적 있어. 책도 나오던데. 아는 사람이 거기 연구원이 친구라고 했었는데."
과연 발 넓은 쟝, 바로 인맥의 힘을 발휘한다.

" 그래? 다음 회의때 의논해 보자. "

다음 회의에서 나의 의견은 별 근거없이 폄하되었지만 쟝이 찬성을 표시했고 다른 제안도 없었기에 일단 알아보자는 차원에서  연구소 상담을 받아보기로 하였고, 상담 이후 역시 다른 대책도 없는 상태에서 회사의 경영상황을 제대로 알아보자는 차원에서 경영분석을 의뢰하고 보고서를 받기로 하였다. 담당은 나와 쟝이 되었다.

쟝은 다른 동료들과 달리 연구소 뿐만 아니라 단체들과 조류들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서로 아는 얘기들이 더 많이 오가게 되었고 회의에서 의견의 일치를 보는 일도 더 잦아졌다.

나는 업무능력도 평균 이하였지만 사교성도 별로였고 두드러진 재능이나 매력도 없는 편이었다. 그저 착하고 성실하고 다소 내성적이었지만, 기존의 리더가 좀...싸가지가 없는 편이어서 내가 리더로 선출되었다.

나의 내성적인 성격은 왜소한 체구에서 비롯된 바도 커서 추우면 말이 없어지고 더워도 말이 없어지는 것으로 잘 견디는 편이었는데 내 옆자리에 있던 리더는 덥다고 연신 화를 내더니 초연해보이는 나를 보면서 나 때문에 더 열 받는 것 같다고 짜증을 냈다. 그의 짜증에 팀원들은 은근 불만을 쌓아가더니 해가 바뀌자 입사연수도 짧은 나는 리더로서 쟝과 함께 회의에 자리하게 되었다. 회의는 그다지 생산적이지 않았지만 기본적인 활동을 수행하기 위한 업무를 만들어냈고 학창시절 글쓰기를 좋아했던 쟝과 나는 편집부의 주축이 되었다.

편집부란, 어느 기관이든 단체든 수작업이 많은 부서이고 강도는 낮지만 노동밀도와 빈도가 높은, 장시간 늘어지는 노동분야이어서 나는 쟝과 함께 해야할 크고작은 일들이 많았으며 길게 혹은  짧게 자주 만나야 했으며 오가는 와중에서 주고 받는 이야기도 늘어났다. 그리고 어쩌다 술 한 잔 하게 되면 과거사도 뭉덩뭉덩 들려주고 관심사도 시시콜콜 나누게도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와의 많은 면에서 닮은 점을 발견하였고 대부분의 사안에서 의견의 일치와 공감대를 형성했다. 그리고 과거의 한 자락에서 우리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놀라운 충격 속에서 서로 같이 아는 지인의 이름을 말해보라고 다그치고는 아, 우리가 같은 뿌리였구나 하는 걸 알았다.  

 " 그때, 장청대회에서 문산까지 행진했었쟎아. 대열도 컸지만 열기도 대단했었지. 그때 사회보던 사람이 말야..."

쟝은 내가 함께 공부했던 그룹의 선배와 같은 교회를 다녔었고 80년대말과 90년대 초의 거리를 공유하고 있었다. 깨진 보도블럭과 안개 속의 숨막힘, 눈물과 그리고 피로 물들었던 그 거리를 말이다.

그리고 그는 나와 같은 지점에서 비판을 시작했고 같은 사고와 인식 속에서 노선을 변경했다. 우리가 이십대의 후반에 같은 현장에서 만난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후....

우리가 헤쳐나가야 할 역경들은 천로역정의 그것이었다.

새로운 밀레니엄의 세기에서 기업구조조정은 사회를 바꾸는 신호탄이었고 아이엠에프는 세태의 격변을 부채질하는 데 불과했다.

지금 그는 다르지만 여전히 열악하고 눈물많은 기층의 민중들이 살아가는 현장에 있고 나는 후퇴한 채 머물러있다. 일찌기 진보란, 역사가 필연적으로 나아가는 흐름이라고 생각했던 내게 머무름이란 퇴보의 다른 이름에 다르지 않았으나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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