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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들

궁색했던 집.

항상 결핍을 느꼈던 어린 시절로 추억된다.

그 집이 있는 동네, 삼십년 전의 장위동이다.

벗어나기 위해 어른이 되고 싶어했던 십대를 벗어나자 마자

미친듯이 거리를 누볐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아니, 단지 쏘다니고 싶어서 그러나 데먼스트레인션에 참여하고 있다는 훌륭한 이유 속에 숨어서.

 

집은 홈도 아니었고 하우스도 되지 못 해서 나는 가정이나 가족의 진정한 뜻을 사전적 의미 이상으로 실감해 보지 못 했다. 사람에게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지를 묻는 톨스토이를 의아하게 쳐다보면서 교도소의 독방 만큼의 사적 공간도 없는 초라하고 위험한 사춘기를 보냈다.

사흘이 멀다 하고 고함 소리 속에서 매맞는 엄마와 함께 귀뚤귀뚤 귀뚜라미 우는 연탄보일러가 있는 지하실에 숨어서 어둠과 벌레들로 인한 공포를 아빠보다는 낫게 여겼던 어린 시절이 지금은 모르는 사람들이 사는 초록색 기와지붕 얹힌 작은 단독주택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 집, 아이들을 돌보지 못 하고 아빠와 가게에서 장사하기에 바빴던 엄마를 기다릴 수 없어 서툴게 라면을 끓여주던 오빠와 그 때도 말 안 듣고 늘 빗나가기만 했던 귀여운 구석 없는 남동생 사이에서 나는 성 역할 사회화가 잘 안 되던 아이였다. 줄창 혼자 놀고 혼자 싸돌아다니며 닥치는 대로 책만 읽었었다. 일어설 수 없이 천정 낮은 다락에 혼자 숨어 만화책을 보다가 다락의 작은 유리창을 깨고 아빠한테 뺨을 맞았던 일-아빠는 단지 깜짝 놀라고 어이가 없어서 때렸다고 나중에 말했다, -컴컴하고 무서웠던 지하실,  늘 속 시원히 말대꾸 하고 더 시원하게 두들겨맞았던 엄마가 답답하기만 했던 일 그런 류의 기억들이 그 낡은 단독주택을 보면 생각난다. 그 집 주인이 구청의 지원금을 받고 담장을 허물어 그 비좁은 마당을 드러내 놓고 있기에 그 집의 추억은 더욱 잘 생각킨다. 그 지하실의 입구가 마당의 작은 베란다 아래로 음험한 그늘 속에 숨어서 나를 내다 보곤 한다. 그 집 앞을 지나는 게 너무나 싫다.

 

이십대의 중반을 넘기지 않고 나는 집을 나왔다. 몇 번의 가출 경험이 있기에 스물 다섯의 가출은 거의 완벽한 출가, 아니 분가 아니 자주독립의 수준이었다. 모아놓은 돈은 없었다. 그러나 내 가출의 이유를 너무나 잘 이해하는 오빠가 모아놓은 돈으로 허름한 월세방을 얻을 수 있었다. 오빠는 나의 몇 번의 다짐에 잘 부응하여 평소의 오빠 답지 않게 엄마아빠의 우격다짐에도 내가 있는 곳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 전의 가출에서 있는 곳을 추적당한 경험이 있는 나는 오빠를 완벽히 내 편으로 만든 것 만으로 내 독립된 생활이 지속될 수 있슴에 놀라워했다. 그 후로  장위동에 다시 돌아가는 일이 있으리라곤 생각지 않았었다.

그 집 앞을 지나서 아이들을 데리고 돌아온다. 어린이집을 갈 때는 차량을 이용하지만 올 때는 피아노 학원을 들러 오기 때문에 아이들을 직접 데리고 그 집 앞을 지나 조그마한 빌라인 우리 집으로 돌아온다.

이 동네가 철거되길 기다리며, 철거시에 받을 이런 저런 이득을 건져보고자 주민등록의 실제 거주자임을 지키기 위해 장위동으로 돌아와있기 때문이다.

결국 궁색함이 나의 가정에서도 이어지기 있다는 말이다.  내 궁색함은 내가 남편으로 삼은 이의 지독한 가난과 그 가난에 습성화된 궁색함에 강화되고 더욱 강제되고 있다.

이렇게 몇 푼을 위하여 몇 년을 궁색한 동네에서 살 필요는 없는데....나의 아이들에게 나와 똑같은, 내유년의 궁색함이 여기 저기 묻어있는 낡은 동네에서의 생활환경을 제공해 주고 있다. 아니 더 나빠졌고 이건 우리가 이 동네를 떠나기 전까지 개선될 수 없는 생활환경이다. 철거예정지구이기 때문이다.  

나는 개천을 건너 야산으로 놀러다녔었는데 우리 아이들은 자동차들 사이를 갈짓자로 걸어야 하는 골목을 누비고 다닌다. 서울의 변두리, 아이들은 놀 곳이 없다. 나도, 우리 아이들도.

한글도 모르던 나이 때부터 만화방을 들락거렸다고 엄마는 나중에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나는.... 책이 있는 곳이 거기 밖에 없었기 때문이라고....그리고 우리 삼남매가 언제 집에 맘 편히 있을 수 있는 날이 있었냐고 속으로 뇌까렸다.

 

두 칸의 점포 안 쪽에는 두 개의 방이 있었다. 아니 거실처럼 쓰는 가게에서 바로 이어지는 작은 방 안쪽으로 길고 좁은 작은 방이 하나 더 있었다. 거실방엔 티비가 있었고 밥을 먹는 곳이자 엄마아빠가 잠자는 곳이었다. 다른 하나의 조금 더 큰 방이 오빠와 남동생이 쓰는 방이었으므로, 나는 엄마아빠가 잠자는 방 안쪽의 기다란 방에서 혼자 자야했다. 오빠는 고등학생, 나는 중학생이었다. 삼남매가 한 방을 쓸 수 있는 나이는 아니었고 엄마아빠의 잠자리 옆에서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는 어린애도 아니었던 나는 내 방이 너무나 갖고 싶었다. 그 사무치던 욕구, 그 결핍과 단지 불편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가난에 대한 분노는 사춘기시절 내 방을 갖지 못 함으로써 뼈에 사무치도록 각인되었다. 가난이 싫고 미웠고 저주스러웠다. 궁색함도,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근검절약도, 촌지를 받으며 대학을 가야한다고 너불대는 고등학교의 담샘도 증오스러웠다. 돈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의 반감은 대학을 들어가자 마자 나를 데모꾼으로 만들었다. 자구발 하나만 읽고도 나는 완벽히 맑스주의자가 되었다. 이미 사춘기를 지나 십대말에 이르렀을 때 가난이라던가 가정의 누추함이라던가 불행한 가족관계라던가 하는 것에 영향받고 휘둘리는 것을 모면하고 다소 위험하긴 했지만 빗나가지 않고 무사히 성장했던 나는 사회과학과 내 개인사를 혼동하진 않았다. 그러기엔 나의 인문학적 소양이 너무 깊었다. 고교시절 실존주의에 심취했던 내게 꼬뮤니즘을 이해하는 것은 너무 쉬웠다고나 할까.... 고교시절 제 2의 성을 읽으면서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길러지는 것이다라는 말에 충격을 받았던 나는  사회과학세미나 써클에서 경제학, 역사학을 다 보고 정치사회학을 공부할 때 쯤 곁다리로 본 여성학 텍스트에서 시몬느 보봐르를 만나는 것에 너무 익숙해있었고, 고교시절 존경하는 선생님이 당신의 캐비넷을 열고 빌려준 마가렛 미드의 문화인류학관련 서적을  읽었던 내게 가족의 기원을 공부하는 것은 인식의 나선형 발전구조를 몸소 체험하는 형국이었다. 맑스주의는 내 유년의 결핍을 사회구조적으로 밝혀주었고 60년대 이농한 도시빈민이었던 내 아빠의 굶주림과 공포와 분노, 그리고 가부장적 폭력의 연원을 밝혀주었다. 이해했으므로 더 이상 미워하지 않았다. 다만 비판적이 되었다. 나는 매우 비판적이었고, 이 사회구조 속에서 인간으로서도 여성으로서도 제대로 올곧게 살아갈 수 없었으므로, 그 토대를 만드는 반자본주의 운동이 내 삶의 내용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운동...십년에 걸친 내 운동이 패배하지 않았다면 적어도 동지들을 잃지 않았다면 아주 작은 조직이라도 유지할 수 있었다면 내가 장위동으로 돌아올 일은 절때 없었을 터인데....

길을 잃고 돌와왔다. 마뜩챦은 남편과 아이들을 데리고....

그 점포의 방들은 다 없어졌지만, 그 가게의 한 켠에서 엄마아빠는 일흔의 나이에도 가게를 지키고 있다. 달리 할 것이 없으므로 말 그대로 지키고 있다. 못 먹고, 못 입고, 죽도록 고생만 하면서도 골병이 들도록 두들겨맞았던 엄마는 제대로 거동을 못 하신다. 가게에 커다란 평상을 놓고 거기서 먹고 자고 하신다. 그 가게의 위 층에 방 3개와 너른 거실이 있는 살림집이 있지만 엄마는 언젠가부터 그 이층으로 가는 가파른 계단을 오르내리지 못 하게 되었다. 근검절약의 최후단계에 이르러서 엄마는 그 축저된 돈을 사용할 수 없는 몸이 된 것이다. 나는 분노한다. 내 엄마의 생을, 내 엄마에게 자신의 분노를 쏟아부었던 아빠를, 그 가게를 아침마다 가는 것이 또 하나의 고통이다. 내 아이들의 어린이집 차량이 엄마아빠의 그 먹고 자는 것을 해결하는 가게 앞에 서기 때문이다. 나의 궁색한 집이 있는 골목 안쪽까지 어린이집 차량이 들어오기엔 여기저기 처박혀있는 자동차들이 너무나 많은 철거예정지구이다, 장위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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