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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고민하기...

무섭다.

사는 게, 내가 주도하기는 커녕 정상적인 소통도 하지 못 한 채 휘둘려사는 이 삶의 방식이 싫다.

남편은 가사에 치여 짜증부리는 내게 그럼 이혼하라는 말이나 던지면서 화나게 하지 말라고 내 입을 틀어막는다.

그와의 이혼, 별거 혹은 투명인간처럼 무시하고 살기... 이 중에서 고민하느라 하루밤 하루낮을 또 보내고 있는 와중에...

한 예슬보다 조금이라도 희생을 줄이겠다는 듯 고교를 자퇴한 18세 민 다영씨의 이야기를 보면서 나 자신의 학창시절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학교생활을 하고 있는 청소년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여...

내가 원하는 삶을 살지 못 할 것을 알면서 이 사회의 체제내적인 삶에 진입했던 것이 실수라면 실수일 것이다.

몰랐던 것이 아닌데, 결혼이 인생의 무덤이라는 것을 대학 가기 전부터 알고 있었고 그래서 스스로를 타의에 의한 독신주의자라고 공언해 왔으면서, 대학도 자퇴했던 내가 왜 결혼이라는 무덤을 용감하게 들어간 것일까...그리고 이제와서 내 인생도 당당하게 살지 못 하고 있는 판국에 딸들의 인생이 이 체제 속에서 길들여갈 것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도시를 떠나는 것, 그건 단순히 공기 좋은 시골을 찾아간다는 것 이외에 훨씬 많은 것을 함축하게 될 수도 있겠다.

교육적 이주를 결심하고 실행에 옮기는 것,  대안학교나 혁신학교를 찾아 땅과 집을 구하는 것, 생계와 조율이 안 되어 한시간 이상의 통근거리를 감수하거나 아니면 국내에서 기러기아빠가 된 사람들도...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내가 양평으로 가자는 것에 남편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 일축했다.

그는 자신의 부모형제가 있는 전라도로 가고 싶어 한다. 일견, 그도 나쁘지 않을 수 있겠다 싶어 지난 여름, 휴가 대신 늘 가는 시부모님과 시아주버님의 집에서 형님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60호였던 마을의 가구 수는 30여 호로 줄어들었다 한다. 그 중 아이들이 있는 가구는 형님네를 포함하여 두 집 뿐이었다. 시골에서 셔틀버스를 타며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다니고 있는 조카들은 아침 8시에 나가서 11시에 들어온다, 한밤중에 말이다.  열 댓명 있는 학급에서 10등을 왔다갔다 하는 성적을 올리기 위해 학교 정문에서 픽업해서 밤 10시까지 국영수를 반복하다가 20키로를 달려 집앞에 떨구고 가면 형님은 5시에 일어나서 9시에 잠드는 시골생활의 리듬을 깨고 한밤중에 자다말고 일어나서 아이들의 간식꺼리를 챙긴다.

나는 정말이지...어이가 없었다. 지난 여름, 유심히 지켜본 시골살이 10년 차의 형님과 조카들의 생활을 보면서.

 

형님은 서울이 고향인 사람이다. 의류공장에서 미싱을 하다가 같이 미싱을 하는 큰 시누이의 소개로 결혼을 했다고 한다. 딸을 셋 낳고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나서 남편은 정관수술을 하고 왔다고 한다. 건축현장의 소장인 남편이 허리를 다쳐 시부모의 집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연년생의 아이 넷을 거느리고 남편 수발을 할 수 없기도 했겠지만...이후 계속 시골에 눌러 살게 되어 세 아들 중 두번 째이지만 큰 며느리의 역할을 홀로 다 하고 있다. 집에는 두어달에 한 번씩 오는 남편이 전국의 공사현장을 떠돌다 보니, 기실 아이 넷을 키우는 것도 혼자 감당해야 할 판이니, 형님은 도대체 집 밖을 나갈 수가 없어 시부모님과 함께 살게 되었다고 하였다. 하긴... 나도 아이 둘을 키우면서 평범한 노동자인 남편의 월급으로 두 아이 키워내기 벅찬 걸 느끼면서 아이 넷을 데리고 서울에서 살기는 어려웠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내가 아이들이 경쟁 중심의 공교육 체제에서 자라게 될 것을 두려워하는 데에 반해, 그 공교육도 변변히 다니지 못 하여 장학금 받고 다닌 기숙사형 공고를 졸업하자 마자 생계전선에 뛰어들어 마흔 네살의 지금, 25년 째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남편은...아이들의 피아노학원비도 아까워하며 교육비가 너무 많이 드니 육성회비 이상 돈 들이지 말고 늦은 일곱살인 딸아이를 조기입학시키자고 하였다.  그는 자신이 60세가 되어도 아이들이 대학을 채 졸업하지 못 할 것에 두려움 없이 딸들은 시집만 잘 가면 되니까 굳이 대학가지 않아도 된다고 얘기한다.  

그래...그렇다. 나는 그가 5남매를 키워낸 시부모님이 세째 아들인 그를 중학교 보내는 것도 벅차했고 그가 시커멓게 탄 누룽지를 먹으면서 주린 배를 달랬다는 사실을 들어 알고 있으며 그가 열 아홉부터 직장 생활을 시작한 이래, 파업을 하거나 2년에 한 번씩 해고될 때 쉬는 한 두 주를 제외하곤 일을 손에서 놓아 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에게는 절대적으로 안식이 필요하다. 7년에 한 번씩의 안식은 커녕, 25년 동안 지속된 노동생활이 그는 50세를 넘어 60세까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에 절망한다.

...그는 50세 은퇴를 주장하고 있다. 큰 아이가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할 나이고, 작은 아이는 그렇지도 못 할 나이다. 딸들의 중학교나 고등학교나 입시 따위에 관심이 없다, 그는.

나는 사교육 스케쥴을 어떻게 짜서 입시에 성공해야 하나 하는 고민을 할 기본 토양도 되지 않는 것이, 그의 형제자매들 중 대학까지의 교육을 마친 사람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들이 아니라 그들의 자녀들을 말이다. 그가 그렇듯 그의 형제자매들은 자식들의 기천만원이 넘는 대학학비를 대기엔 너무 빈약한 생계수단을 가지고 있고 그러한 경제적 수준 하에서 아이들은 입시경쟁의 하위라인에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출발선이 다르다.

이 말을 나는 80년대의 학창시절에 들었었다. 아직 전교조가 생기기 전이었는데, 간첩 혐의로 잡혀갔던 지리 선생님에게서 들었는 지, 공립고교의 교장교감과 늙은 선생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면회를 다녔던 국어선생님에게 빌린 책에서 봤는지는 모르겠다.

자유경쟁을 떳떳이 얘기하기에 자본주의사회는, 특히 한국자본주의는 너무나 얄팍하고 허술하며 뻔뻔스럽다.

이런 표현은 강남신화를 옛이야기 들려주듯 보여주고 있는 드라마 자이안트에 더 잘 어울린다. 말죽거리 잔혹사의 시대와 멀지 않은 내 중학시절의 친구는 아빠가 없었는데, 그런 집이 흔히 그렇듯 오빠의 대학 진학에 온 힘을 소진하여 그는 상고를 갔다. 그것도 당시 최고라 불렸던 서울여상 다음의 동구여상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외국계 은행에 취직했다는 얘기를 나는 데모를 하던 대학 시절에 풍문으로 들었었다.

그는 나의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다. 내 입시경쟁의 기억은 기독사립학원이었던 중학시절에 더 가열찼는데, 전교석차를 교실 복도에 붙이면서 담임들은 학급의 10% 이내, 자신의 "엘리트" 들이 전교 석차에 어떻게 랭크되는 가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들은 가출로 출석일수를 못 채워 유급한 소위, "날라리"들이 공부를 하던 말던, 수업을 땡땡이치는 것을 체크하는 것조차 귀찮아하면서 보다 더, 근묵자흑의 손해가 날까봐 신경썼다. "근묵자흑" - 이 4자성어를 나는 중학교 1학년 담임선생님에게 교무실에 불려가서 들었다. 날라리인 짝궁과 그의 엘리트였던 내가 친하게 지낸다는 걸 알고 내게...그리 하지 말라면서 들려준 사자성어였다.

날라리 친구와 헤어지고 열심히 사귄 친구가, 나와 다른 몇 명과 함께 상위 10% 내의 서열다툼을 열나게 벌이다가 고교입시의 일종이었던 연합고사 성적을 가지고 동구여상으로 가 버렸다.  

 ... 그건 반칙이었다. 우리들은 모다 인문계 고등학교를 가야했다. 중하위권 성적군의 아이들과는 친구도 안 했던 엘리트들은 모다 인문계를 가서 또다시 3년 동안 열나게 대입준비를 하여 서울 4년제의 어느 대학을 가느냐를 놓고 경쟁을 해야 했다. 그런데...

내 중학시절 유일하게 마음을 주고 받으며 선의의 라이벌이었던 내 친구는 오빠를 간신히 인하대에 입학시키고 자기는 상고를 갔다. 나는 그 친구와 집이 가까웠기 때문에 고등학교 초기에도 자주 만났었다.

출발선이 다른 상태에서 그와 나의 경쟁은 공정하지 않다. 나는 그 친구를 만나면서 늘 뭔가 불편하고 미안하고 내가 죄 지은 사람처럼, 적어도 불의에 타협한 비겁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는 나보다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되었다.  이전에 나는 학교에 치맛바람을 날리며 드나드는 전교학생회장의 엄마라든가, 걸 스카우트나 영어경시대회의 입상을 만드는 열성엄마가 없었던 우리 집의 가난을 비관했었고 그들의 공부만 잘 하는 것이 아닌, 피아노 콩쿨과 학교 외부의 수상을 위해 뜨거운 뙤약볕의 조회시간에 연단에 오르는 영광을 부러워했었다. 그들의 우수성을 지지하고 있는 브랜드 점퍼와 나이키신발은 내겐 넘을 수 없는 격차였다. 그들은 10미터 앞의 스타트라인에 서 있었고 나는 상고를 간 내 친구보다 1미터 앞에 있었다. 나는 1미터 뒤에 있는 내 친구를 잃어버림과 동시에 10미터 앞에 선 자들에 대한 부러움도 치워버렸다.

더 이상 공정한 경쟁이란 없었다.

상고를 간 동생 덕분에 집안의 재정적 지원을 한 몸에 받을 수 있었던 그의 오빠는 인천 5.3사태의 얘기를 내게 해 주며 복사본으로 묶은 시집 한 권을 내게 주었었다. 김 남주의 " 나의 칼 나의 피"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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