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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의 노래

해마다 삼월이 오면 미처 답하지 못 한 편지를 숙제처럼 안고 있었다.

윤 진이 그 애를 안 것은 중학교 들어가자 마자 바로였다. 교실 뒷문에서 빼곰히 고개를 내밀던 수줍음 많던 그 애는 늘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작은 어깨 만큼이나.

복도의 반대편 끝에 있는 그 애의 교실에 갈 일은 그리 많지 않았고 그닥 중요하지도 않았다. 친구들은 함께 졸업한 동창생들에서 새로운 학교의 새로 사귄 아이들로 교체되어 가고 있었고 이상하게도 주변은 친하지 않아도 항상 아이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윤진이 보기에 자기 반에 있는 그애의 동창생은 그애와 별로 어울리지 않는 타입이었다. 터울 많은 언니, 오빠 그리고 강아지 얘기를 엄마 얘기보다 더 많이 늘어놓는 그 애의 동창생은 늦동이 막내답게 마냥, 밝고 화사했고 꼭 그만큼 철이 없었다. 담임의 수학수업을 좋아했고 그보다 더 신출내기 남자영어선생을 좋아했지만 원하는 만큼의 성적이 나오지 않아 시험날에는 싱글벙글 웃고 있다가 한참 뒤 성적표를 나눠주는 날에 눈물을 찔금거렸다. 대체로 자신과  비슷비슷한 부류의 아이들 속에서 총각선생들 중 누가 가장 멋진가를 두고 열을 올렸으며  하교 후에는 정문 앞의 떡볶이집에서 한참을 떠들다가 버스를 타고 사라지곤 했다.  혼자 있거나 책을 읽는 것은 본 적이 없었지만 체육시간엔 외모에 어울리지 않게 아주 부진했다. 윤 진은 같은 학교 출신으로 무척 친한 듯 보이는 그 애의 교실에 갈 때마다 혼자 오도카니 앉아 뭔가를 열심히 읽고 있는 그 애가 눈에 들어왓고   같은 시간대에 운동장을 나와 체육수업에 참여하는 그 애가 전력질주하는 모습을, 누구보다 오래 매달려있는 것을 발견하곤 했다.

" 제법, 악바리야... "

윤진은 그 애와 마주 서서 손을 흔드는 그 애의 동창생 뒤에서 중얼거렸지만 뒤를 돌아본 그 애의 동창생은 무심히 윤 진을 지나쳐 소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네들의 왁자한 수다 속에는 그 애도, 윤 진도 감히 스며들기 어려운 험담의 릴레이와 자기 변호에 교묘히 섞인 자화자찬, 그리고 방어적인 집단주의가 있었다. 윤 진의 주변에서 기쁜 듯 웃고 얼굴 붉히면서 친하고 싶다고 말하는 솔직함, 사람에 대한 순수한 호감의 표현을 그네들에게선 느낄 수 없었다. 마치 공동주택의 연합한 주부들처럼 경쟁과 시기와 질투를 이면에 둔 채 우리는 하나라며 손 잡고 연대를 과시하며 다른 모든 타인들을 자신들과 맞선 집단으로 규정하는 것을 통해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하는, 그런 집단주의가 있었다. 아무도 그네들을 인정하지 않았고 주시하지도 않았는데도 그랬다.

오히려 그 애가 울음을 터뜨려 흐느끼고 있는데도 그 애의 동창생은 공연히 쪽 팔리고 있다는 표정으로 대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애매한 몸짓으로 엉거주춤했다.

윤 진은 그 애가 눈에 자꾸 걸렸다. 하지만 같은 반이 아니었고 눈에 걸린 횟수만큼 말을 나눠볼 기회는 좀처럼 없었다. 왜 그 애가 자꾸 눈에 띄지? 하고 윤진은 잠시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지나가는 말이라도 한번 걸어보기엔 그 애는 항상 너무 멀찍이 있었다. 복도의 저 뒤에서 걷고 있거나, 운동장의 저 끝에 서 있거나,  강당 근처의 구석진 화단 옆에 앉아있거나 하는 그 애를 볼 때마다 윤 진은 ' 재가 혼자 저기서 뭐하는 건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눈길이 마주쳐 아는 체라도 한 번 할라치면 이미 그 애는 다른 데를 쳐다보거나 생각에 잠긴 듯 아래를 보고 있거나 들고 있던 책을 펼치곤 했다.  ' 뭐 딱히 할 말도 없는 데...' 윤 진은 애써 그 애의 근처까지 가지는 않았다. 그러기엔 윤진의 손을 잡고 있는,  팔짱을 끼고 있는 동급생들이 항상 너무 많았다. 윤진은 자신을 둘러싼 친구들에게 관대했고 그들의 히어로가 되는 것에 나름 보람도 느끼고 있었다. 자신에게 기대감을 갖고,  사소한 친절에 행복해하는 걸 보는게 즐겁고 뿌듯했다. 여자아이들이 자신의 보이쉬함을 크게 보고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지만 뭐 어떠랴 싶었다. 윤진이 생각하기에 예쁘장한 여자아이들은 충분히 사랑받고 보호받아야 하며 그 섬세하고 보드라운 정서를 맘놓고 표출하며 사는게 좋을 것 같았다. 케사르가 제대로 했다면 클레오파트라의 이집트가 굴욕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고 그랬으면 그 아름다운 처자가 몸을 던져 나라를 구한 것도 모자라 죽음에까지 이르렀겠는가...로미오가 우물쭈물하지 않았다면 오드리 헵번으로 하여금 어둠침침한 무덤에서 일어나 독약을 먹는 일 역시 없었을 것이다. 윤진은 얼마전에 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나온 비비안 리가 잊혀지지 않았다. 그렇게 아름답고, 위풍당당한 그녀가 사랑을 하는 모습은 얼마나 귀엽고 애달펐는지 !   윤진은 애슐리같은 타입이 정말 싫었다. 그가 사랑하는 것이 멜라니라구? 그건 자기기만이었다. 그는 그저 용기가 없거나 아니면 안주적일 뿐이었다. 레트 버틀러가 속좁게 굴지 않았다면 비비안 리는 정말 행복하게 자신의 우수성을 조잡한 남편만들기작전에 허비하지 않고 탁월한 농장경영주로서 발휘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윤진이 들어본 금언 중에서 가장 이해가 안 가는 말은 "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남자, 그러나 그 남자를 지배하는 것은 여자" 라는 것이었다. 도대체 무슨 뜻인지...알 수 없는 것은 '여자들' 이었고 사랑스러운 것은 자신의 감정과 능력을 표현하는 '그녀' 였다.  윤진은 자신이 노력해서 안 되는 일은 없다고 생각하는 타입이었다. 여자이기 때문에 안된다? 그런 말을 엄마한테서 들은 적은 한번도 없었다. 윤진은 아들과는 다른 딸로서 키워지지도, 그렇게 대해지지도 않았다. 그가 재능을 보인 피아노를 엄마는 아주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죽 하게 해 주었지만 그걸 공부와 연관지은 적은 없었다. 성적을 잘 받아오면 칭찬을 해 주셨지만 못 했다고 해서 꼭 잘해야 한다고 비난하지도 않았다. 윤진은 공부나 독서에 열의나 흥미가 있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잘 하고 싶었다. 엄마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그러고 싶어서였다. 자신이 아는 한, 위인전의 모든 위대한 인물들은 꼭 학교성적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분야에서 탁월한 성취를 이루어냈다.  그리고 그것에 힘입어 그들은 자신의 인생을 자신의 뜻대로 항해했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도 열심이었으며 또 당당했다. 비록 연인을 잃거나 사랑의 보답을 받지 못 하는 일도 없지 않았으나 그건 그들이 정직하고 성실한 노력을 다 했다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윤진은 위대한 인물이 되고 싶었고 엄마도 그리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엄마가 이혼하는 일이 발생했을 때도 그건 별로 흔들림이 없었다. 엄마는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 온 것 같았다.  이혼하기 수년 전부터 별거가 계속 되었고 아빠에겐 아빠의 인생이 있는 거니까라고 엄마는 말해왔었다. 아빠가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해야하게 되었다고 엄마가 말하면서 이혼수속을 밟을 때 엄마는 좀 힘들어보였다. 윤진은 왜 자신이 엄마의 상담자가 되지 못 하는 지를 알 듯 하면서도 몹시 서운했다. 엄마에게 자신은, 학교에서 발렌타인쵸컬릿을 선물하는 여자애들에게보다 더...든든한 기사가 되고 싶었다.

발렌타인데이, 윤진은 지금도 책상 서랍 안 고즈넉히 잠자고 있는 발렌타인데이의 초컬릿상자와 편지를 생각했다. 그 애는 자신의 집을 어떻게 알았을까...한번도 마주 앉아 얘기해 본일이 없는데...그렇게 늦은 밤까지 그 애는 대문 앞에서 초인종을 누를것인가 말것인가를 두고 고민했던 것일까? 추워보였던 얼굴, 찬기가 확 끼쳤던 손가락, 그 애는 윤진이 얼결에 초컬릿상자를 받아들자 마자 휙 돌아서서 어두운 골목 속으로 사라졌다. 아...혼자 가기엔 위험한데...윤진은 그리 생각하여 내내 마음에 걸렸지만 방학이 끝나고 바로 이어진 졸업식 후 그 애를 다시 만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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