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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중-화이트데이

윤 진은 불쾌함을 뚝뚝 떨어뜨리며 학교에서 인기를 잃어갔다. 겨울방학이 시작되기를 학수고대했다는 듯,  연락을 뚝 끊고 집에 처박혔다. 아이들에게 성을 바꾼 것에 대해 설명하기도 귀찮았다. 엄마는 취직을 생각하는 듯 날마다 무슨 수험서같은 걸 들여다보고 있었고 사춘기의 성에 눈 뜬 듯, 동생 이수도 하루종일 말이 없었다. 방학 전부터 눈에 띄게 친절함을 싹 거둔 윤 진의 태도에 여자아이들은 질색을 하며 아우성을 쳤지만 부모의 이혼이라던가 복잡한 가정사에 대한 소문을 동정어린 쑥덕거림으로 확장해 가며 조용히 멀어져갔다.

여자애들의 동경이란게 뭐 그 정도인게지, 윤 진은 상처받을 일 없다는 듯이 피아노레슨 시간을 늘리면서 이쯤에서 진로를 결정해야 하나 하는 고민에 머리가 아팠다. 피아노 학원 선생은 예대 입시를 전문으로 하는 학원이나 개인교습을 해 줄 만한 교수를 소개시켜주겠다며 엄마에게 연락을 달라고 했다. 엄마, 지금 그럴 상황 아니거든요 !  윤 진은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짜증이 났다. 자신의 일을 혼자서 처리할 수 없다는 것이 화가 나고 답답했다. 결혼 후 한 번도 직장생활을 한 적 없는 엄마가 이제와서 취직을 한다는 게......그걸 그냥 두고 볼 수 밖에 없다는 것, 어떻게 해도 한계선 안에 있는 자신을 직시하는 것이 괴로웠다. 이럴 때 남자아이들은 엄마를 대신해 학교를 그만 두고 취직을 한다. 흔히 보아왔던 드라마 속에서 보던 것처럼, 자신이 그럴 수 없다는 것이 속상했다.

긴 겨울이었다.

윤 진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우울이란 걸 알았다. 한없이 외롭고 쓸쓸했다. 독립적이라는 것과 고독하다는 것이 같은 말이 아니라는 걸 비로소 깨달았다. 혜정, 그 애가 말 없이 학교를 다니면서 과연 외로와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랬다면 그 정도의 편지를 던져두고 그냥 참아낼 수 있었을까? 세상에 혼자 밖에 없다는 듯 까칠하게 아이들과의 친교에 담을 쌓고 지내던 그 애가 자신에게 편지를 보낸 이유가 뭘까? 외로워서? 그래서 남자친구를 만들고 싶었을까? 윤 진은 확 치밀어오르는 스트레스를 느끼며 책상 서랍을 열었다 다시 닫았다. 젠장...

발렌타인데이 쵸컬릿을 주겠다며 정원이 만나자고 했다. 롯데리아에서 만났다. 연방 얼굴을 붉히면서도 끊임없이 수다를 떤다. 정자와 민희가 나이트에서 부킹을 했다는 얘기, 자기도 남자애들에게 붙잡혔지만 금방 빠져나왔다는 얘기, 거기서 그 후까시의 남학생들이 그 멤버 그대로 각자 여자아이 하나씩을 끼고 왔더라며, 그 중에 곱슬머리 애는 천연파마인게 분명하다며 걸려도 학생주임도 뭐라 못 할 꺼라는 얘기, 윤 진은 더 듣고 싶지 않았다. 정원은 늘 누군가의 약점을 들춰 비웃으며 자기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뭐 ! 그렇게 파마가 하고 싶어서 맨날 아침마다 고데기로 지져 머리끝을 다 태우고 다니냐, 너는?

새학년 새학기가 되어 정원과 한 반이 되지 않은 걸 그나마 다행이라 여기며 이제 그만 여자아이들의 아이돌을 졸업하고 싶은 맘으로.  "공부해야 돼" 라는 말로 오는 전화를 모두 끊었다. 새로 입학한 1학년들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지만, 주변에 여자아이들이 모이는 일은 없어졌다. 다른 애들처럼 자율학습으로 학교에 남지도 않았고, 예대 준비를 하고 있다는 걸 선생들도 다 알고 있었기에 수업이나 시험에 예민하게 굴지 않았다. 피아노 학원을 옮기진 않았지만 1주일에 두 번, 엄마의 친구의 친구라는 음대교수의 레슨을 받기로 하였다. 반포 서래마을까지 왕복 2시간을 길거리에 뿌리며 윤 진은 이제 습성이 되어가는 사색에 잠기기 좋은 기회로 삼고 있었다. 삼월 첫 주가 가고 있었다.  

 고속터미널 역에서 유난히 꽃다발을 짐처럼 싸안고 가는 사람들이 많은 걸 이상하다 생각하다 보니 교실에서 아이들이 화이트데이 어쩌고 하던 게 생각났다. 아, 발렌타인데이......초컬릿회사의 상술이라더니 그럼 이번엔 사탕공장의 상술인가? 어쨌든 꽃집은 또 한 번의 씨즌을 맞겠군. 윤 진은 지하철 맞은 편 자리에 지친듯 앉아 제 몸보다 큰 두 다발의 꽃들을 무릎으로 버텨놓은 채 잠들어 있는 젊은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가씨처럼은 안 보였지만 아줌마스럽지도 않아서 꽃집을 생계로 하느라 꾸밀 틈이 없는 듯 화장기 없이 파리한 안색을 하고 있었다.  드라마에 흔히 나오는 미혼모나 애딸린 이혼녀를 연상시키는 그 얼굴이 신문지로 둘둘 말았슴에도 그 희고 작은 꽃송이송이들을 연두빛 가는 가지들과 함께 환하게 내어놓고 있는 안개꽃 무더기 속에서 스러질 듯 안타까왔다. 윤 진은 외대 근처 그 애의 학교가 어디쯤인가를 더듬었다. 생긴지 얼마 안 되는 그 애가 다닌다는 고등학교는 우리들의 중학교 앞을 흐르던 개천을 뒤에 두고 막 흐드러지고 있는 개나리로 덩쿨담을 진 뚝방길의 끄트머리, 굴다리 건너 동네 안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학교 앞엔 조그마한 책방과 문방구 하나, 그 외엔 학교 주변다운 점이 별로 없어 그냥 한적한 주택가처럼 보이는 그 골목 어디께에서 윤 진은 정문에서 하교하는 남녀 고교생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피아노 악보를 넣고 다니는 캔버스가방 하나만 달랑 어깨에서 흔들거리며 구멍가게 앞 아이스크림 냉장고 앞에 서 있자니 여학생들은 흘끗흘끗 돌아보며 지나가고 남학생들은 수상한 눈초리로 흝고 간다. 오래 서 있긴 좀 쪽팔리는군...어쩐다 하며 고민을 시작할 때 쯤 한무더기의 왁자한 여자애들 수다패가 눈 앞을 홱 지나간다. 그 구석에 팔짱에 팔짱을 끼고 웃음소리 속에 묻혀 스러질 것 같은 그 애의 옆얼굴이 보였다. 한 명만 뻬고 키도 다 그만그만해서 작은 축이었던 그 애는 뒷모습도 다 보이질 않는다. 재가 저렇게 크게 웃고 떠들며 몰려다니던 애였던가? 윤 진은 지난 가을, 일일찻집 앞에서 보았던 그 애의 모습에 이어 나이트에서 짝을 지어 춤을 추며 맥주를 마시는 그 애의 모습이 주말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머릿속을 지나갔다. 이쁘지도 않은 것들이 끼만 있어서 저렇게 넷이서 한 패인 것처럼 보이는 여자애들은 누구도 발걸음 한 번 흐트리지 않고 버스정류장으로 나가기 전 코너에 자리잡은 떡볶이집 안으로 곧장 사라졌다. 윤 진은 골치가 아프다는 생각을 하며 스트레스가 확 올라오는 걸 억누르며 그 자리를 떠났다. 그 자리를 지킨지 3일 째, 그 애가 혼자 나오는 걸 발견했다. 표정없는 얼굴로 그 애는 정문에서 바로 꺽어져 학교 담장을 따라 죽 이어지는 골목길로 쏙 사라졌다. 서둘러 뒤를 쫓았다. 아, 뒤를 밟는 거 이렇게 하는 건가 보군. 그 길을 가는 애들은 별로 없었다. 중학교 앞 인도를 두고 굳이 뚝방길을 따라 걷는 애들이 별로 없었던 것처럼. 그 애는 중학교 때와 별로 다르지 않은 뒷모습을 하고 있었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중단발, 하나도 자라지 않은 것 같은 작은 키, 가을에 입었던 것을 봄에도 똑같이 입는 듯 체크무늬의 플레어스커트, 가방만큼 큰 보온도시락통을 촌스럽게 어깨에 메고 혼자 타박타박 걷고 있는 게 어제, 그제의 떡볶이집 패거리 속의 그 애와는 영판 다른 아이처럼 보였다. 반쯤 고개를 푹 숙인 듯 그 애의 머리가 반토막 밖에 안 보여서 더 작아 보였다. 윤 진은 금세 그 애의 걸음을 따라잡았다. 저만치 골목이 끝나는 지점에 횡단보도도 없는 찻길이 보였다. 행인들이 많아질 것 같은 느낌에 윤 진은 별로 준비도 없이 " 야, 이 혜정 - " 하고 불렀다.

화들짝 놀란 듯 그 애의 등이 심하게 움찔했다. 뭔 생각을 저리도 골똘히...츳...

돌아본 그 애는 금방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알아보는 것이 틀림없었다.

" 이 혜정 맞지? 영광중학교 나온. " 이건 준비한 멘트다. 윤 진은 자신이 탤런트로 나가도 되겠다는 생각을 하며 천연덕스럽게 우연을 가장했다.

" 아......윤......"

" 어, 놀랐어? 본 듯한 얼굴이어서, 너 나 기억해? "

그 애는 금방 말을 잇지 못 했다. 길거리에 우뚝 서 버린채 건너다보는 그 애의 얼굴을 낯빛 하나 안 바꾸고 윤 진은 마주 바라보며 서 있었다.

" 윤 진......여긴 어떻게... "

" 친구 만나고 가는 길인데? 너도 여기 다니는 구나? " 아, 이것도 준비한 멘트인데 해 놓고 보니 그 애의 편지 속에 학교 이름이 있었다는 생각이 났다. 순간적으로 그 애의 얼굴이 파래졌다가 곧 하애졌다.

" 집에 가는 길이야? "

윤 진은 서둘러 말을 이으며 걸음을 떼었다. 그 애도 덩달아 가던 길로 걸음을 옮기며 응 하고 대답한다.

" 너는? 어디 가? "

" 글쎄, 올 때는 시내에서 오느라고 몰랐는데 집에 가려니 버스를 어디서 타야 하는지 헷갈려서. "

" 버스 정류장 이 쪽 길 아닌데 " 하며 그 애는 정문 쪽을 돌아보았다, 너무 많이 왔다고 생각하는 지 다시 앞을 보며 " 저 쪽 옆으로 돌아 죽 나가면 버스 지나는 큰 길이야. "

" 넌 어느 쪽으로 가는데? "

" 난 아무데로나... 걸어서 가, 집 별로 안 멀어. " 

" 그래? 중학교 때보다 가까운가 보네? 맨날 걸어다녀? "

" 버스 타면 한 정거장 밖에 안 돼. 내려서 또 걸어가야 하니까. "

중학교랑 우리 집 정도 되나 보군. 윤 진은 혜정이 똑같은 생각을 하지 않을까 해서 슬쩍 그 애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계속 자라고 있는 윤 진으로서는  살짝 숙인 그 애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 키도 쪼끄만게 맨날 고개는 푹 꺽고 다니니...원

니네 학교엔 중학교 때 아이들이 많은가 어쩐가 문과랑 이과 중 어느 쪽을 택했나 하는 류의 떠올리기 쉬운 질문을 주고 받으며 버스 다니는 큰 길에 이르자 혜정은 횡단보도 앞에서 잠시 고민을 하는 듯 이쪽과 저쪽을 번갈아 보았다.

" 왜? "

" 버스 정류장, 일루 가나 절루 가나 비슷한데...."

이 쪽은 학교가 있는 방향인데? 학교 앞 버스 정류장을 말하나 보군. 그럼 저쪽으로 가야지. 혜정의 집으로 가는 길이 학교 쪽일리는 없을 테니.

" 나 땜에 버스정류장 쪽으로 온거야? 너네집은 어디로 가는데? "

" 아냐, 나두 여기 찻길 따라서 가. 저 쪽으루 "

" 그럼, 글루 가. 저 쪽 버스정류장에서 타면 되지. 온 방향으로 다시 돌아가는 건 손해보는 것 같쟎아. "

잘 모르는 동네였지만 혜정의 집 쪽이면 중학교도 멀지 않을 테고 윤 진의 집과도 그럴 것이었다. 근데 학교에서 집까지 한 정거장 밖에 안 된다면 저쪽 정류장 근처인가 본데 흠....너무 짧은데.

하지만 중학 3년 내내 이만큼 많이 얘기를 나눠본 적도 없었다는 것에 윤 진은 만족스러웠다. 얘기 나눠보니 중학교 때랑 하나두 느낌이 다르지 않은 것이 일일찻집이며 나이트며 떡볶이집에서 수다떨던 그 애는 그 애가 아닌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 애와 헤어져 집에 오는 길에 꽃집에 들렀다. 화분을 빼면 꽃보다 사탕이 더 많아서 이게 꽃집 맞나 하는 느낌이 들었지만 하얀색, 분홍색, 주홍색, 노랑색 장미들과 색색가지 리본들 사이에 서 있자니 괜시리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사탕을 빨아먹는 그 애의 모습은 도대체 상상이 안 되어서 안개꽃 한다발을 품에 안고 한참을 서 있자니, 중년의 꽃집 아줌마 나름 코디를 해 준다는 듯 연초록 가지 사이에 도롱도롱 작은 애기사탕을 매달고 있는 연분홍 장미 몇 송이를 안개꽃 속에 꽂아주며 이럼 어떠누 하신다. 좋네요. 하며 윤 진은 반짝이 포장지로 폭 싸 안고 돌아와 제 방의 유리화병에 물을 담아 꽂았다. 근데 이걸 어쩌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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