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창작중-여.우.사.이

의외로.

혜정을 만나 한가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학교가 다르다는 것이 이렇게나 불리한 조건일 줄을 중학교 때는 몰랐다. 반이 다르다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는데...윤 진은 지난 시절이 아쉽게 느껴졌다.

우연을 가장하지 않고 그 애의 학교 앞에 갈 수 있었지만 한 번 가 보니 다시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교 후 외대 앞에서 보자니 도착하면 저녁시간이 되어버렸다. 한국사회에서 학생신분으로 산다는 것은 직장인으로서 사는 것과 다르지 않다.  아침자율학습은 수당없는 조출이었고 야간자율학습은 제 돈내고 밥 사 먹으면서 매달리는 성과를 위한 야근이었다. 실적을 내지 못 하면 여지없이 열반으로 좌천되거나 경쟁에서 열외로 밀리는. 황금같은 주말에도 피곤에 지친 몸을 일으키지 못 한 채 방바닥에 붙어있다가 하루 해가 뉘엿뉘엿해져서야 정신이 돌아오지만 월요일을 생각하면 외출은 한참 고심한 끝에야 감행할 수 있는 사치였다. 뭐...이런 싸이클에 혜정이 충실했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한국의 고등학생들에게 주어진 일상의 규제와 스트레스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 오늘은 야자 있는데. "

반포까지 가는 피아노레슨이 있는 날을 피해 혜정의 학교 앞에 왔지만 도무지 하교하는 학생을 볼 수 없어 들어가본 교정에서 들은 말이었다. 그렇게 말한 여자애는 무거워 보이는 배낭을 메고 정문에서 바로 바라다보이는 2층짜리 교사 안으로 쏙 들어갔다. 교실이 있는 것 같아 보이지 않는데? 국기가 게양된 조회대 뒤의 현관으로 들어서니 커다란 거울을 가운데 두고 왼쪽 오른쪽 2층을 가리키는 화살표 옆에 서무실, 교무실, 도서실 등의  팻말이 써 있었다. 대부분 입실을 끝낸 듯 몇 안 되는 남녀 학생들이 각자의 짐을 지고 바쁜 듯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따라서 가 보니 2층의 왼쪽에 양호실, 그 뒤로 피아노실이란 팻말이 붙어있다. 가 볼까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지만 혜정과는 인연이 없는 곳이다. 문득, 미션스쿠울이었던 중학교에서 해마다 있었던 합창대회가 생각났다. 그 애는 엘리야의 하나님이란 노래에서 하이소프라노파트를 맡았었다. 엉망이었다. 연습 때 반주를 맡은 아이가 결석을 해서 윤 진이 대신 피아노를 치면서 보았던 지휘를 맡은 아이도 지도를 하던 음악선생님도 그 곤혹스러움을 참는 표정이란 !  아이들이 꺼려하는 하이소프라노에서 그 애를 뺄 수 없었다는 것이 문제였고 계속되는 불협화음에 그 애는 아이들이 첫음을 시작한 후에 슬쩍 섞여드는 수법을 쓰더니 점점 목소리가 작아졌고 대회날에 이르러서는 그냥 입모양만 보여주는 것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어떻게 할 수 없는 음치라고나 할까....그러기도 쉽지 않았을텐데...개인적으로 친했던 음악선생님은 기말고사 성적을 정리하면서 " 이 애는 필기는 백점인데 실기점수를 합산하니 평균 이하로 떨어지네...이거 참 내가 준 점순데 츳츳....." 하면서 상위권에 랭크된 우수학생의 평균을  자신이 끌어내리는 것 같다며  미안해 했다.  빙긋 미소를 떠올리며 윤 진은 도서실 문 안을 들여다보았다. 감독선생이 아직 들어오지 않은 듯 여기저기 의자를 끌고 책들을 늘어놓는 아이들이 눈에 띄였다. 그 속에서 나는 딴세상이요 하듯 고개를 쳐박고 열공 중이거나 사색? 중인 아이들로 구성된 도서실 야자의 수용자들은 그래도 영수 열반으로 편재되어 교실에서 야자를 하는 것보다는 낫다는 우월감으로 위로받고 있었다. 혜정의 말에 의하면 그랬다. 부산하게 수다를 주고 받는 패거리 들 속에서 일어나는 혜정은 옆엣 아이들에게 웃으며 뭐라고 말하더니 문 쪽으로 나왔다. 가슴에 교과서는 아닌 듯한 책 몇 권을 껴안고 있었다. 윤 진을 보고 깜짝 놀란다. 저번처럼 더듬진 않는다. 야자 있는 날이라고 방금 아래층에서 들었던 말을 한다.

" 근데 넌 어디 가? "

" 아, 아직 시작 전이거든, 얼른 교무실에 다녀올려구. 선생님한테 빌린 책을 갖다드려야 해서. "

슬쩍 들여다본 책의 제목은 들어보지 못 한 것이었다. 머나먼 쏭바강? 제 2의 성? 이게 뭐지? 윤 진은 선생님이 빌려 준 책이니 의심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뭔가 껄적지근한 것이.... 그 애를 따라가서 교무실 앞에서 기다렸다. 오후 5시가 다 되어가는데  종례를 마치거나 감독을 들어가거나 하는 선생님들이 오락가락 하면서 교무실은 한창 분주한 판이었다. 열려진 교무실 문 사이로 그 애가 젊지만 세련되어 보이지는 않는 여선생과 얘기하는 모습이 보였다. 윤 진은 그런 옆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밝고 편안한 표정으로, 보통의 선생과 제자 사이에선 발견하기 어려운 유대, 신뢰, 호감과 애정 같은 것이 그들 사이에 흘렀다. 교무실을 나오는 그 애의 가슴엔 또 다른 책이 한권 소중히 품어져 있다. 8억인의 나라...이건 또 뭔가요? 윤 진은 그 애가 중학시절과 다르지 않게 교과서 아닌 책들을 읽는 걸 계속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근데 인문계고교에서 학생에게 문학서적도 아닌 책을 대 주는 선생이라?

" 넌 야자시간에 혼자 책 보냐?"

" 하하...그게...수업시간에 실컷 본 교과서를 또 들여다본다는게 지겨워서..."

암기로 되는 과목들이라면 모를까 고교에서 시험기간에 공부하는 것으로 좋은 성적을 내기는 어려울텐데 하고 윤 진은 생각했지만 중학시절 최상위와 최하위를 오르내렸던 그 애의 석차를 알고 있는 윤 진은 여전하군 하는 생각을 했다.

" 입시, 걱정 안 돼? "

" 글쎄....내가 상정한 목표가 아니라...  "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고 혜정은 말했다. 저렇게 독서에만 열중하다가 소설가라도 되려나 했더니 아닌게 아니라 시를 쓰고 있다고, 국어선생님이 봐 주신다고 한다. 친해 보였다. 보통, 여학생들은 젊은 남자선생을 좋아하는데, 좀전에 교무실에서 핑크빛 베개를 책상 위에 떡하니 올린 채 하얀 얼굴을 파묻고 자고 있던 남자선생도 무척 젊어보였다.

" 하하하, 그 선생님 대학 졸업하고 처음 부임한 영어선생님인데, 인기 캡이야. 얘들이랑 뒤밟아서 집도 아는데 단칸방에서 자취하고 있더라고. "

이 혜정, 너 스토커냐? 뒤 밟는거 습관된다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슬쩍 기분이 나빠지는 윤 진이었다. 야자를 땡땡이치라곤 차마 할 수 없어서 윤 진은 다른 친구 얼굴이나 보고 가겠다며 혜정과 도서실 문 앞에서 헤어졌다.  땡땡이를 칠까 말까를 고민하는 듯 관리 안되는 표정으로 혜정은 문 안으로 떠밀리듯 들어갔다. 그 애의 자리 근처에서 예의 그 ' 네 명'의 멤버들인 게 분명한 아이들이 손짓하는 게 보였다. 중학 때와는 달라진 혜정의 일부였다. 곧 그 애들에게 뭐라고 하면서 웃음을 떨구고 있는 혜정, 그다지 자연스러워보이진 않는다.

중학시절 혜정이 패거리 속에 있는 건 본 적이 없었다. 그 애의 초등학교동창생말고 친하게 지내는 한, 두명이 있다는 건 강당이나 체육시간에 반복적으로 곁을 지키던 얼굴을 보아 알고 있다. 그 중 한 명이었던 학교의 유명한 날라리는 학년이 바뀌자 그 애의 곁에서 보이지 않았고 혜정이 그 날라리친구들 속에 묻혀다닌다는 얘기도 없어서 은근한 걱정을 털어버렸던 생각이 났다. 그리고 졸업할 때까지 그 애는 혼자 중학교의 교문을 총총히 빠져나갔었다. 하교길에서 보았던 그 애의 어깨 혹은 옆얼굴은 늘 심각한 가정문제라도 있는 양 굳어있었고 조그마한 입을 꾹 다물고 발밑만 응시하고 걷는 고집스러운 모습이었다.

" 고등학교 와서 새친구들은 많이 사귀었어? "

" 응...글쎄...."

혜정은 1학년 때 짝궁과 지금도 자주 만난다고 했다. 자기는 절대로 갈 수 없는 이과를 선택해서 다시 한 반이 될 수 없었다고 말하면서 실의에 찬 표정을 보였다. 넌...친구 따라 강남가냐...하는 생각을 하며 개랑 많이 친한가 봐? 하고 떠보자 교환일기도 썼다고 한다. 윤 진으로선 흉내도 못 낼 일이었다. 아무리 하기 어려운 말이라도 걍 면전에서 얘기하는 게 낫지, 편지는 커녕 수업시간에 종횡무진 날아다니던 쪽지 한 장에도 제대로 된 문장을 써 본 적이 없었던 윤 진이었다. " ? " 아니면 " OK "  혹은 쌩까는 게 윤 진이 하는 대답의 다였다. 혜정이 중학시절 유일하게 조회대에 올랐던 것도 교내 백일장에서 입상을 했을 때였다. 그 애는, 윤 진이 초등학교시절 숙제검사로 겨우 썼던 일기를 지금도 매일 쓰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하릴 없이 교정을 돌아보았다. 개교 3년 차의 학교답게 새 건물, 깨끗한 벽이었다. 본관 뒤에 있는 ㄷ 자 모양의 교사는 공주사대의 건축물을 모방한 것이라더니 2층까지 뻥 뚫려 시원해보이는 회랑은 자못 넓어서 중학교 때 강당건물의 천정 높은 홀을 생각나게 하였다.  강당건물의 홀을 나오면 잘 손질된 화단과 작은 연못도 있는 야트막한 언덕이 고등학교 교사를 지나 야외음악당까지 이어져있는 중학교의 넓은 교정을 혼자 걷고 있는 혜정을 점심시간이나 때로는 아이들이 다 하교한 시간에도 발견할 수 있었다. 피아노연습을 하고 나오다가,  그 애가 학교의 뒷산으로 가는 건 아닐까 하고 윤 진은 한참이나 지켜보았었다. 그 애는 그렇게 혼자 산책하기로 학교에서의 모든 자유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그러나 교실의 의자에 붙박히지 않을 수 있는 시간들을 다 때우기에 이 공립고등학교는 너무 작은 부지 위에 세워져있었다. 게다가 운동장을 포함하여 학교의 한쪽 면은 높이 솟아있는 가림막으로 둘러쳐져 있었는데 그 얇은 천은 알알이 박힌 검은 가루로 잿빛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건강을 위해서라도 산책하면 안될 것 같은 교정이었다.

정말 의외였지만 고등학교에서 혜정은 꽤나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평소에는 네 명의 패거리와 하교길을 함께 하더니  그 패와 또 다른 공식적인 써클활동도 하고 있었다. 스카우트 입단식이 있다며 1박 2일 엠티를 간단다.물론 그 앤 걸스카우트다. 그런데 당연할 수도 있겠지만 보이스카우트와 함께 간다는 것이었다. 윤 진은 골치가 아팠다. 일일찻집 앞에서 길거리 헌팅을 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남녀공학에서 써클활동을 하는 아이들의 진짜 목적은  건전한 이성교제의 공간을 허가받는 거라고, 여고에서 국제로타리활동을 하는 애들과 함께 싸잡아 비난하던 정원의 말이 떠올랐다.  혜정이 학교의 남학생들 얘기를 하는 걸 본 적은 없었지만, 걸스카우트 대장이 그 책을 빌려주던 국어선생님이라는 것 또한 들어 알았지만, 공부도 잘 하고, 운동도 잘 하고 스카우트 활동까지 하는 혜정이 남학생들의 주목을 받거나 적어도 자연스럽게 남학생들을 만날 기회가 많을 것은 쉬이 예측되는 일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예측이 빗나갔다는 것을 윤 진은 여름방학 때쯤엔 확신할 수 있었다. 혜정은 나날이 떨어지는 성적과 함께 담임의 관심을 잃어갔고 체력장의 윗몸일으키기나 달리기 같은 데서 강단으로 승부하는 기록치 외에 모두가 어울려 하는 피구나 발야구에서의 순발력은 제로 수준이라는 걸 드러내면서 아이들의 관심에서도 멀어져갔다.그리고 써클활동을 하는 아이들의 부티나는 의상과 소지품, 화젯거리에 어울리는 흉내도 낼 수 없었던 혜정은 보이스카우트는 고사하고 걸 스카우트의 동기들 사이에서도 경원시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혜정은 여름방학 때는 스카우트에서 지리산을 간다고 했다. 그건 5박 6일이나 되는 일정이었다. 거길 가기 위해서 아빠와 한참을 싸웠다고도 했다. 부모님 두 분 다 가게에 매여 하루 종일 일하면서 삼남매를 키우는 혜정의 집에서 고등학교 써클활동은 쉽지 않은 사치이기도 했다. 혜정은 정말로, 단지, 스카우트 대장을 맡고 있는 사람이 그 국어선생이기 때문에 써클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게 더 나쁘다는 걸 오래지 않아 윤 진은 느꼈다.

어느날, 지리선생님이 잡혀갔다고 우울해하던 혜정은 학교가 난리가 났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 했다. 아침 자율 학습에 늘 턱걸이하는 시간에 도착하던 혜정은 칠판 위 태극기 액자 옆과 천정에 붙어있던 몇 장 밖에 못 보았지만 온 학교에 총학생회장 직선제를 요구하는 벽보가 나붙었다는 것이었다. 학생주임과 교련, 생활지도부선생을 주축으로 한 우악스러운 포스의 남자선생들이 몽둥이를 들고 그 벽보를 뜯어내며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느라 뛰어다닌 끝에 겨우 소란이 가라앉았지만 학교는 오랫동안 귀엣말과 숨은 회합 속에서 긴장과 분주함을 이어나갔다. 그런 것 같다고, 3학년 선배들의 민주 어쩌고 하는 조직에 맨날 꼴찌를 도맡으면서도 관동별곡을 가르치는 시간에 이 험한 산중에서 가마를 메고 진땀을 흘리는 하인들에게 수려한 산천경개가 눈에 들어왔겠냐며 꼬집던 작문선생님이 연루되었고 더불어 그 국어선생님도 딸려갈지도 모르겠다며 혜정은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 옆얼굴엔 입시공부에나 매여있어야 하는 자신을 한심스러워하는 자괴감이 깃들어있었고 혜정은 그 우울과 소외감 속에서 국어선생님에게 시가 아닌, 장장 10장에 이르는 편지를 써 보냈지만 아무 답변도 받지 못했다며 슬퍼했다. 그리고 간첩혐의로 잡혀갔던 지리선생님을 면회하고 온 국어선생님에게서 곧 나올 수 있을 것 같다고 증거도 없는 조작사건이라는 말을 들었다며 그러나 다시 교단으로 돌아오지는 못 할 것 같다면서 혜정은 고통스럽게 말했다.  

" 지리 선생님의 그 표정이 잊혀지지 않아..."  끝없이 떠들거나 진도나가 달라고 요구하는 학년톱의 부잣집 아이와 같은 교실에 있다는 것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지긋이 자신들을 쳐다보던 지리선생님 앞에서 너무나 부끄러웠다는 얘기를 혜정은 비감하게 읊조렸다.

그 후 고 3이 되어 입시준비를 하겠다던 혜정은 대학을 가지 않으려면 취직을 하거나 시집을 가라고 아빠가 말했다면서 주변을 정리했었다. 뭉쳐다니던 패거리 중에 키가 큰 한 친구는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가정형편이 어려워져 인문계고교 3학년에 특별학급으로 편성된 취업반으로 갔다가 2학기부터는 공장을 다닌다고, 전국이 데모로 들끓었던 여름 이후 계속되는 노동자파업의 물결 속에서 그 애가 어찌되었을 지 모르겠다며  혜정은 답답해 죽겠다며 눈물을 흘렸다.그리고 입시가 끝난 그 겨울 그 애가 다니는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며  소식을 뚝 끊었던 혜정은 대학 1학년을 마치기 전에 잠적했다.  이 혜정, 여기서 우리가 사랑을 이야기하기에 대한민국의 고등학교는 너무나 척박하구나....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