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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노동운동 ( 네이버 지식인에서 )

1990년대 노동운동

파워 boolingoo
2007.02.25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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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말 경기가 침체국면에 들고 노동집약적 산업에 대한 구조조정이 본격화되면서, 경제위기 노동자 책임론과 함께 무노동 무임금, 인사경영권 참여금지 등 노동운동에 대한 정권과 자본의 공세가 강화된 가운데 1990년 1월 22일 전노협이 결성됐다. 이날 경찰은 전노협 결성을 봉쇄하려고 갑호 비상령을 발령했다. 이미 노조운동은 퇴조기에 접어들고 있었으며, 가맹노조들은 탄압과 구조조정으로 상당이 와해되어 있었다. 더구나 1월 22일은 노태우의 민정당, 김영삼의 민주당, 김종필의 공화당이 3당 합당을 선언한 날이었다. 전노협의 운명은 탄생부터 험난하였다.

정부는 전노협을 불법단체로 규정하고 가입노조에 대한 탄압에 집중했다. 지도부에 대한 구속 수배는 물론이고 소속 노조에 대한 탈퇴강요, 행정관청을 동원한 업무조사,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파업사업장 공권력투입 등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이 와중에 90년 5월 전노협 탈퇴를 거부하다가 구속된 한진중공업노조 박창수 위원장이 교도소 안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하기도 하였다. 전노협은 비록 14개 지역협의회, 2개 업종협의회에 456개 노조 16만 6,307명에 불과했지만 정권의 탄압에 총파업 등으로 완강하게 저항했다. 전노협은 숱한 탄압을 받으면서도 1995년 공식해산까지 1989년 결성된 업종회의, 대기업노조들과 더불어 민주노총 결성의 산파 역할을 했다.

정부가 1991년 10월 UN과 ILO에 가입을 추진하고 있는 것에 발맞춰 전노협과 업종회의는 ILO기본조약 비준 및 노동법개정을 위한 전국노동자공동대책위원회(ILO공대위)를 결성했다. ILO공대위는 자주적 단결권 확보를 중심으로 한 노동법의 실질적 개정과 민주노조 총 단결을 목표로 공청회, 국민청원운동, 전국노동자대회 등의 투쟁을 벌였다. 결국 정부는 ILO로부터 노동법개정 권고를 받았다. 이것은 한국의 민주노조운동이 처음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은 사건이었다.

전노협 결성과 때를 같이하여 1989년 말 집행부가 바뀐 7개 대기업 노동조합이 전국대기업노조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했으나 그해 임투과정에서 발생한 직권조인 파동으로 와해되고, 그해 12월 9일 민주파로 교체된 대기업 노조들이 연대를 위한 대기업노동조합회의(연대회의)를 결성했다. 사회적 파장이 큰 주요 대기업이 포함된 연대회의를 정권이 그냥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1990년 12월 전노협 중앙위원회 회의장에 경찰이 난입했고, 1991년 2월에는 연대회의의 공동간부수련회장에 경찰이 들어와 참가자 67명 전원을 연행, 구속시켰다. 대우자동차를 비롯한 연대회의 소속 노조들이 전노협과 함께 대정부투쟁을 벌였으나 정권의 집요한 탄압에 연대회의는 결국 와해되었다.

그러나 이미 대기업 노조들의 민주화는 막을 수 없는 대세였다. 대기업 노조들의 투쟁과정에서 노조 간부들이 대거 구속, 수배되면서, 상당수 노조에서 보궐선거가 실시되었지만 여전히 민주파가 당선되었다. 1993년 6월에는 이들 대기업 노조와 전노협, 업종회의가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전노대)를 결성하여 민주노총 건설작업에 들어갔다. 이들은 이제까지의 민주노조운동이 마치 ‘봄 소풍과 가을운동회’처럼 상반기에는 임금, 단체협약 투쟁, 하반기에는 노동법 개정투쟁을 으레 진행해온 문제점을 반성하면서, 사회개혁 투쟁을 적극적으로 전개하기로 했다. 이를 기반으로 1994년 11월 13일 전국노동자대회에서 민주노총준비위원회를 공식발족하고, 업종별 연맹이 모인 업종회의, 지노협이 모인 전노협, 그룹별로 모인 대기업을 산업별연맹과 지역본부라는 두 축으로 재편해, 1995년 11월 11일 마침내 ‘전국민주노조총연맹(민주노총)’이 창립되었다. 861개 노조 40만 조합원에 15개 업종, 10개 지역본부, 2개 그룹협의회를 가맹조직으로 둔 민주노총의 창립으로 한국노동조합운동은 50년 동안 유지됐던 대한노총, 한국노총 단일체계에서 비로소 벗어났다.

1990년 4월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골리앗 투쟁, 1990년 5월 KBS노조 파업은 1990년 상반기를 뒤흔들었다. 또 1991년에는 한진중공업노조 박창수 위원장의 의문사에 항의하여 벌어진 전국적 투쟁뿐만 아니라 전국택시노련의 서울, 광주, 인천, 여수 지부 등이 총파업을 벌였다. 이들 지부들은 이후 전국민주택시연맹의 핵심동력이 되었다.

김영삼 정권은 초기에는 개혁적인 노동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총액기준 임금가이드라인 4.7%를 깨고자 하는 현대그룹노동조합총연합(현총련)의 공동 임투를 계기로 정부 내 강경파와 자본의 공세가 강화되면서, 김영삼 정권의 개혁적 노동정책은 좌초되었고 노동계에 대한 공세는 그 이전보다 훨씬 강화되었다. 1994년 6월에는 서울지하철노동조합, 부산교통공단노동조합 그리고 1988년 기관사들의 파업 이후 철도노조민주화운동의 구심이 된 전국기관차협의회(전기협) 등 궤도노동자들이 참여하는 전국지하철노동조합협의회(전지협)가 변형근로제 폐지를 위한 연대총파업에 들어갔다. 이 연대총파업은 김영삼 정권의 선제공격에 의해 발생했다. 파업예고 날짜를 나흘이나 앞둔 6월 23일 새벽 3시 30분 김영삼 정권은 용산 전동차사무소를 비롯해 전기협의 20개 사무소에 경찰병력을 투입해 농성 중이던 611명의 철도기관사들을 연행했다. 이에 전지협이 그날 새벽 4시를 기해 총파업을 선언하게 된 것이었다.

파업 건수는 전년도에 비해 줄었지만 1995년도 노동자들의 투쟁은 그 어느 때보다 완강하고 치열했다. 민주노총준비위가 전국투쟁을 주도한 1995년에는, 연초에 본조 위원장과 지방본부장 선거를 동시에 실시해 민주파를 당선시킨 한국통신노조가 정부의 선제공격을 당해 투쟁을 벌이다가 39명이 구속되고, 31명 해고, 3천여 명이 징계를 받았다. 김영삼 정권은 이때 한국통신 지도부가 농성을 벌이고 있는 명동성당과 조계사에 경찰병력을 투입시켜 노동자들을 연행함으로써 종교계를 비롯한 시민사회운동의 거센 반발에 처하기도 했다.

전노협과 업종회의 그리고 대기업 노조들의 투쟁은 한국노총 내부의 변화를 추동해냈다. 유신헌법에 대한 지지부터 시작하여 전두환 정권 말기 4?13호헌 지지선언까지 독재정권에 무릎을 꿇어왔던 한국노총은 6월항쟁, 노동자대투쟁을 겪으면서 심각한 내부 충격과 혼란에 빠졌다. 밑에서는 개혁의 목소리가 시끄러웠으나 위에서는 크게 달라지지 않은 가운데 1988년 11월 9일 대의원대회에서 개혁을 표방한 박종근 위원장이 당선되었다. 박종근 집행부는 부당노동행위 규탄대회(1988년 11월29일), 노동악법개정 및 경제민주화촉구대회(1989년 11월5일) 등을 개최하는 등 이전과 다른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민주노조운동과 경쟁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는 한국노총은 복수노조 금지조항, 제3자개입 금지조항 유지 등을 골자로 하는 노동법개정 청원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한국노총의 내부 변화는 1992년 정부의 총액임금제 실시방침과 노동유연화를 위한 노동법개정 움직임이 본격화되면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박종근 위원장의 단식농성, 20개 산별위원장과 15개 지역본부의 철야농성, 연이은 집회와 시위 등의 투쟁 속에서 이탈조직을 재흡수하기 위해 대우조선, 서울지하철, 현총련 등 민주노조진영과 유대와 협력을 강화했다.

그러나 김영삼 정권 때인 1994년 ‘중앙노사임금 및 정책, 제도 개선을 위한 사회적 합의’를 체결하면서 한국노총은 다시 한번 심각한 위기를 맞았다. 산하 단위노조로부터의 비판과 반발은 물론 조직이탈이 일어났고, 민주노조 진영에서는 합의분쇄를 목표로 강력한 투쟁을 벌였다. 결국 한국노총은 1994년 11월 사회적 합의 포기선언을 발표하고 내부에 노총발전특별위원회를 설치하여, 자주성, 민주성 확립 강화와 노동운동대통합 등의 발전전망을 발표하고, 시민사회운동 진영과 교류 협력을 추진하였다.

이런 흐름은 박종근 위원장이 집권여당인 신한국당의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하면서 중단되었으나, 1996년 3월 정기대의원대회에서 한국노총 내에서 개혁적인 사람으로 평가받던 박인상 금속노련위원장이 당선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현장과 함께 강한 노총건설’을 표방했던 박인상 위원장은 지속적인 노총 개혁과 노동계통합을 강조했으며, 그간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던 복수노조 금지조항의 철폐를 공식 결의했다. 내용적으로는 민주노총을 인정한 것이다. 이런 가운데 고 김말룡 의원 사회노동장을 민주노총과 공동으로 집행하면서, 양대 노총은 대중적 공조의 길을 텄다. 이같은 한국노총 내부의 개혁 움직임은 96년 말 신한국당이 노동법개정안을 날치기 통과시켰을 때 이에 맞서 총파업을 선언하고 민주노총과 공동투쟁을 벌일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

1996년 12월 26일은 한국 노동운동사에 새로운 기록이 씌여진 날이었다. 그 불길은 김영삼 정권과 여당인 신한국당이 지폈다. 이날 새벽 영등포에서 집결해 단체로 국회 본회의장으로 출석한 신한국당 국회의원 154명은 노동법, 안기부법 개정안 등 총 11개 법안을 단 7분 만에 날치기 통과시켰다. 이날 아침 출근과 동시에 민주노총은 소속노조 전체에 즉각적인 총파업을 시달했으며 이튿날인 27일 한국노총도 총파업을 선언했다. 이미 24일부터 전국노동법개정투쟁본부 대표자회의를 통해 전체 단위노조가 비상대기를 하고 있던 터였다. 이후 약 1달여에 걸친 노동계의 총파업이 시작되었다.

김영삼 정권은 집권초기 새로운 노사관계 정립을 위한 노동법 개정에 착수했다. 첫 노동부장관이었던 이인제는 노조의 정치활동과 복수노조를 허용하는 법개정을 검토하고, 전교조 해직교사와 해고노동자 복직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하는 등 이전과는 다른 노동정책을 제시했다. 그러나 현총련의 공동임투를 계기로 정권 내 강경파와 자본은 노골적인 불만을 터뜨리며 경제 활성화를 볼모로 잡고 나섰다. 수세에 밀린 이인제가 교체되었고, 노사관계에 대한 중립, 합법적 노조활동 보장이라는 두 축을 내용으로 한 김영삼 정권의 개혁적 노동정책은 하루아침에 돌변했다. 노동법개정 시도도 물거품이 되었다.

노동법개정 논의가 다시 활기를 띤 것은 1996년 4월 국회의원 총선 직후였다. 김영삼 정권은 노사관계개혁위원회(노개위)를 설치하여 노사정이 참여하는 노동법개정 논의를 진행했다. 그 내용은 복수노조 금지조항과 제3자개입 금지조항의 철폐, 교사와 공무원의 노동3권 허용 등 집단적 노사관계법과 자본 측에서 지속적으로 요구했던 변형근로제, 정리해고제, 파견근로제 등 개별적 노사관계를 맞바꾸는 것이었다. 경총,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정부가 참여해 줄다리기를 벌인 노동법개정 논의에서 정부 개혁파가 노동계 안에 적극적인 입장을 취해 긍정적인 방향에서 논의가 이뤄지는 듯 했었다. 그러나 법안논의가 구체적으로 진행되면서 정부 경제팀의 목소리가 강화되었고, 이에 반발해 민주노총이 노개위를 탈퇴했다. 결국 98개 합의안과 미합의 공익안 43개항에 대한 정부의 수정을 거쳐 12월 11일 법안이 국회에 상정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양대 노총의 반발이 거세지기 시작했고, 민주노총은 총파업 시점을 놓고 격론을 벌였다. 그런데 신한국당이 정부안보다 더 개악된 안을 만들어 12월 26일 새벽 기습 처리한 것이다.

26일 아침 전체 단위노조에 총파업 지침을 내린 후 민주노총 지도부는 명동성당에서 무기한농성에 들어갔고, 기아자동차노조가 가장 먼저 전면파업에 들어갔다. 오전 10시였다. 오후 1시부터는 현총련 소속 현대그룹 노조들이 전면파업에 들어갔다. 이날 85개 노조 14만 명이 파업에 들어갔고, 오후 4시부터는 12개 지역에서 집회가 열려 연 10만여 명이 참가했다. 둘째 날에는 21만 명이, 28일에는 173개 노조 22만 명이 파업에 들어갔다. 서울지하철도 멈춰 섰으나 시민들은 불편을 참았다. 고문수사로 악명 높은 안기부에 수사권을 돌려준다는 안기부법의 날치기 통과에 시민들도 분노하고 있었다.

문제는 연말연시였다. 서울지하철노조 등이 내부 사정으로 파업을 지속하기 어려운 상황이었고, 연휴에 이어 주말이 붙어 있었다. 민주노총은 일단 1997년 1월 3일 2단계 총파업을 재개하겠다고 발표했다. 김영삼 정권은 노동자들이 한풀이로 파업을 며칠하고 연말연시를 경과하면서 기세가 꺾일 것으로 예상했다. 민주노총도 그 점을 염려하고 있었다. 그런데 꺼지려는 불꽃을 김영삼 자신이 되살려 놓았다. 1월 7일 연두기자회견에서 김영삼은 “선진국 어느 나라에 노동쟁의가 있느냐?”며 신경질적인 어조로 말하고는 기자들의 질문공세에 “질문 그만하라”며 나가버렸다. 원인무효까지는 아니더라도 사과라도 해야 한다는 국민들의 기대를 정면으로 저버린 것이다. 총파업 13일째인 이날 언론노련 산하 방송4사 노조, 병원노련 24개 노조 그리고 사무금융노련이 파업에 가세하는 등 범국민적 투쟁으로 발전하는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고, 정권은 민주노총 지도부에 대한 사전영장 발부, 압수수색 등 강경하게 대응했다. 이미 전국 각지의 시민사회단체와 종교계, 지식인들이 대책위원회를 꾸려 노동법, 안기부법 전면 무효 서명운동에 들어간 상황이었다. 3단계 총파업이 시작된 1월 15일에는 388개 노조 35만 명이 참가하였다. 1단계 투쟁으로 단위노조별 규탄집회, 토론회 등을 벌였던 한국노총의 2단계 총파업도 이날 시작되어 1,510개 노조 38만 조합원이 참가했다. 1월 26일에는 양대 노총이 공동으로 여의도 둔치에서 약 15만 명이 참가하는 공동 집회를 개최했다. 결국 김영삼 정권은 1월 말 종교지도자와의 만남과 영수회담을 거쳐 국민에게 사과하고, 2월에 임시국회를 열어 3월 10일 노동법, 안기부법을 다시 개정했다. 극히 부분적인 재개정이었지만 명실 공히 6?25전쟁 이후 첫 정치총파업을 통해 노동자의 요구를 정치적으로 관철시킨 것이다.

그러나 불과 1년이 지나지 않아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전 국민들에게 뜻하지 않은 재난이 찾아왔다. 1997년 11월 터진 외환위기였다. IMF는 구제금융조건으로 긴축정책과 구조조정, 개방화, 국공유기업의 민영화를 조건으로 내걸었고, 대통령에 당선된 김대중은 인수위 시절 IMF체제 극복을 위한 노사정위원회 구성을 제의했다. 국가위기 앞에서 노동자에게 이른바 고통분담은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로 강요되었다. 1998년 2월 노사정 합의로, 총파업까지 벌여가며 막으려고 했던 정리해고제와 파견근로제 등이 법제화되었고 대신 상급단체부터 단계적인 복수노조 허용, 교원의 단결권과 노동조합의 정치활동 허용 등의 내용이 포함된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사회협약’이 잠정합의 되었다. 그렇지만 이튿날 열린 민주노총 임시대의원대회에서 이 협약은 부결되었고, 민주노총 지도부는 총사퇴했다. 비상대책위 주관으로 총파업을 선언했지만 성사되지 못한 가운데 정리해고제는 국회를 통과했고, 양대 노총은 노사정위 참가와 철수를 반복하는 혼란에 빠졌다. 그 사이 구조조정은 거침없이 진행됐다. 전국적으로 ‘고용보장이냐, 임금삭감이냐. 택하라!’는 자본의 공세에 단체협약도 후퇴했다.

‘너희는 조금씩 갉아먹지만 우리는 한꺼번에 되찾으리라’는 노동운동가요의 가사는 자본가의 노래가 되었다. 1987년 이후 10년 동안 조금씩 개선해 온 근로조건과 권리를 한꺼번에 자본에게 되돌려준 것이다. 현대자동차가 6월 29일 4,830명의 정리해고 신고를 낸데 대해 노조가 파업으로 맞섰지만 정리해고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만도기계, 기아자동차, 인천제철, 한양공영, 서울지하철, 대우조선, 쌍용자동차, 금융권과 공공부문 그리고 대우그룹 워크아웃까지 구조조정은 거침이 없었다. 노동자는 온 힘을 다해 저항했지만 공권력에 의해 구속, 수배만 될 뿐이었다. 수만 명의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신자유주의의 광풍이 몰아치면서 노동자들은 혹한의 거리로 내몰렸다. 거리마다 실업자와 노숙자가 넘쳐흘렀다.

이 시련을 겪으면서 노동자들은 비로소 정치세력화의 필요성에 대해 자각하기 시작했다. 총파업기간 동안 매일 계속된 집회에서 노동자들은 자연스럽게 ‘권영길을 청와대로! 노동자가 국회를!’ 등의 구호를 외쳤다. 그해 하반기 민주노총은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진보정치연합 등과 함께 ‘민주와 진보를 위한 국민승리21(국민승리21)’을 결성하여 권영길 민주노총위원장을 대통령 후보로 내세웠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많은 노동자들이 ‘운동방침은 권영길, 투표방침은 김대중’이었고, 한국노총은 정책연합을 추진하여 김대중 후보를 지지했다. 그러나 한국노총과의 정책연합은 김대중 당선 이후 곧 파기되었고, 외환위기는 고통분담이 아닌 노동자에 대한 고통전담을 통해 해결되었다. 김영삼 정권 때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인원이 구속, 수감되었다. 반면 자본가들에게는 천문학적 액수의 공적자금이 투여됐고 각종 규제가 풀렸다.

1997년 대선이후 민주노총은 본격적으로 진보정당 건설을 추진하여 독자적인 정치세력화의 길로 들어섰다. 국민승리21에 대한 배타적인 지지, 지원을 결의했고, 2000년 1월 30일에는 민주노동당을 창당했으며, 4년 뒤에는 50년 만에 진보정당의 원내진출을 이뤄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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