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홉스봄, 2012년 10월 1일 세상을 떠나다

 

체 게바라 대신 룰라를 택한 역사가
 
타고난 반골이었으며 반평생 공산당적을 유지한 구좌파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 세상을 떠났다. ‘아래로부터의 역사’라는 구호를 내걸고 노동사와 사회사의 새 시대를 열어젖힌 거장의 생애를 살펴본다.

 

기사입력시간 [265호] 2012.10.15  09:51:19 천관율 기자 | yul@sisain.co.kr

 

 

10대 때부터 취향이 독특한 ‘조숙한 별종’은 어느 시대에나 있다. 록 음악의 역사를 섭렵하거나, 전문가 뺨치는 컴퓨터 마니아가 되거나, 혹은 마르크스를 흠모하고 혁명의 역사에 푹 빠져들거나.

마지막 종류의 별종들은 대학에서 거의 백이면 백 영국 역사가 에릭 홉스봄을 만났다. 그가 쓴 책 <혁명의 시대>는 국내에 첫 번역된 1984년 이후 ‘마르크스 보이’ ‘혁명사 마니아’라면 한번쯤 꼭 들춰보는 필독서 대접을 받았다(끝까지 읽었는지는 물론 다른 문제였다. 제목과 달리 읽어서 피가 끓어오르는 책은 아니어서 오히려 ‘혁명사의 쓴맛’을 알려주는 경우도 많았다).

홉스봄 본인부터가 ‘조숙한 별종’이었다. 러시아 혁명으로 소련이 탄생한 1917년에 태어난 그는 열다섯 살에 공산주의자가 되었고 열아홉 살에 공산당에 들어가 거의 50년 동안 당적을 유지했다. 지성계의 일급 시민권자 중에서 스탈린의 만행이 폭로(1956년)된 이후로도 공산당에 남은 사람은 그가 거의 유일하다. 1980년대에 영국 공산당이 해산한 후로도 평생을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로 살았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이 역사학의 거장이 10월1일 숨을 거뒀다. 향년 95세. 주저인 19세기 3부작(<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을 비롯해 고전으로 기억될 숱한 저작을 남겼고, ‘이중혁명’ ‘장기 19세기’ ‘만들어진 전통’ 등 역사 해석의 새로운 틀을 여럿 제시했다. 거의 모든 저서가 우리말로 번역되는, 역사가로는 유례가 없는 인기를 누렸다. 한국에서도 그를 거쳐간 ‘피 끓는 청춘’이 많았다는 뜻일 것이다.

정치사의 헤게모니를 부수다

1980년대 한국의 진보적 역사 연구자와 지식인들은 홉스봄이 주도한 역사방법론의 혁명에 열광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홉스봄이 속한 영국 마르크스주의 역사가 그룹은 ‘아래로부터의 역사’라는 구호를 내걸고 노동사와 사회사의 시대를 열어젖혔다.

무슨 왕이 몇 년도에 어디를 정복했다는 식의 정치사가 역사의 본령으로 여겨지던 시대에, 홉스봄은 ‘진짜 사람들’의 역사를 연구했다. 산업혁명과 대공장 노동이 이름 없는 노동자의 삶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노동자들이 어떤 모자를 썼고(‘앤디 캡’이라는 납작한 모자가 영국 노동계급의 상징이 되었다), 뭘 먹었으며(악명 높은 영국 음식 ‘피시 앤 칩스’도 노동계급 음식이었다), 무슨 오락을 즐겼는지(오늘날 세계적 스포츠가 된 프로 축구는 원래 노동계급의 오락으로 성장했다) 연구해 ‘노동자들’이 언제 어떻게 왜 ‘노동계급’으로 한데 뭉쳤는지(혹은 끝내 뭉치지 못했는지)를 밝혔다. ‘왕과 기사의 영웅담’에 가려진 사회사의 물줄기를 찾아냈다.

사회사 혁명은 대성공을 거뒀다. ‘아래로부터의 역사’는 20세기 역사학의 가장 유명한 구호가 되었다. 정치사에 천착하던 정통파는 퇴조했고, 영국 마르크스주의 역사가 그룹은 프랑스의 아날 학파와 더불어 20세기 역사학을 양분했다(아날 학파는 정치사에 관심 없기로 한술 더 떴다). 

한국의 역사 연구자들에게 ‘아래로부터의 역사’가 준 충격은 상당했다. 광복 직후 한국 역사학 1세대들이 찾아 헤매던 핵심 화두가 ‘발전’이었다면(선진국의 발전 경로 연구가 초창기 국내 사학계의 주류였다), 민주화 요구가 높아가던 1980년대 신진 연구자들의 화두는 ‘변혁’이었다. ‘아래로부터의 역사’는 이들에게 꼭 맞는 무기였다.
 

80학번인 이용재 전북대 사학과 교수는 “홉스봄은 변혁의 시대, 역사학도들의 바이블이었다”라고 회상했다. “변혁을 꿈꾸는 연구자라면 누구나 사회사·노동사를 하는 시대였고, 홉스봄은 최고의 길잡이였다. 마르크스주의 텍스트가 해금된 후 가장 많이 읽히는 역사가 중 하나였다.”

1980년대의 황혼기에 터진 두 사건,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1991년 소련 붕괴는 한국의 진보적 지식인 사회에도 큰 숙제를 던진다. 지적 혼란의 시기에, 평생을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로 살아온 홉스봄은 일종의 ‘고정된 좌표축’ 구실을 했다. 다시 이용재 교수의 회상이다. “홉스봄이 그냥 고집 센 마르크스주의자였으면 시대 변화를 못 따라간 늙은이 취급을 받았겠지만, 그는 사학계에서 누구도 부인 못할 업적을 쌓아올린 거장이었다. 반평생 공산당원이었지만, 학문적으로는 단 한 번도 교조주의자였던 적이 없었다. 그러니 그의 학문이 시대 변화를 견뎌냈고, 후학들에게도 지표가 되었다.”

역설적이게도, 50년을 공산당원으로 살았던 홉스봄의 책 대부분은 정작 소련에서 금서였다. 소비에트의 악명 높은 ‘공식 역사관’을 철저히 무시했기 때문이다. 그는 또 유대인이면서도 이스라엘에 비판적이어서 유대인 주류사회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이쯤 되면 태생이 반골이다. 

“세계 혁명의 희망과 탯줄로 이어진 세대”

하지만 이 위대한 반골에게도 ‘자기 검열’은 있었다. 자서전에서 그는 “20세기에 대한 소련의 공식 견해가 엄존하는 한 1917년(러시아 혁명) 이후의 역사를 썼다가는 정치적 변절자로 매도당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직업 역사가로서 나의 역사는 1914년(1차 세계대전 발발 연도)에서 끝났다”라고 고백한다. 그래서 그는 19세기 연구자가 된다. 그의 주저인 ‘19세기 3부작’은 1914년까지의 이야기다.

자기 검열은 1991년 소련 붕괴 후에야 풀린다. 1994년 홉스봄은 20세기사를 다룬 <극단의 시대>를 내놓는데, 이 책은 40개 언어로 번역되어 가장 널리 읽힌 역사서 중 하나가 된다. 사학계에는 “오래 사는 것도 역사학자의 중요한 재능이다”라는 농담이 있다. 홉스봄은 1991년을 넘기며 오래 산 덕에 20세기사를 다룰 기회를 얻은 셈이다. 이 책을 우리말로 번역한 이용우 동덕여대 교수(85학번)는 “1994년에 쓴 이 책에서도 소련에 대한 애잔함은 은근히 묻어 있던 기억이 인상적이다”라고 말했다.
 


1956년은 공산주의자들에게 역사의 분기점이었다. 소련 공산당의 새 총서기 흐루시초프는 이 해에 대량학살 등 스탈린의 만행을 고발한 연설로 전 공산권을 충격에 빠트린다.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소련이 헝가리를 침공한다. 한때 혁명의 전위로 존중받았던 소련 공산당의 위신은 돌이킬 수 없이 떨어지고, 공산주의 지식인들의 탈당 러시가 벌어진다. 공산당에 남은 일급 지식인은, 학문 분야를 통틀어서도 홉스봄 하나 정도였다. 그는 소련의 헝가리 침공을 비난했지만, 탈당은 하지 않았다.
이후 그는 평생 동안 인터뷰를 할 때마다 어김없이 “왜 그때 탈당하지 않았나?”라는 질문을 받게 된다. 자서전에 나온 그의 답은 두 가지다. “제아무리 소련을 회의한다 해도, 정서적으로 나는 러시아 혁명과, 세계 혁명의 희망과 탯줄로 이어진 세대에 속한다.” 두 번째는 더 홉스봄스럽다. “자존심. 공산당원이라는 멍에를 벗어던지면 틀림없이 더 잘나갈 것이었지만, 냉전의 한복판에서 공산주의자로 성공해 스스로를 증명하고 싶었다. 그래서 남았다.”

이 타고난 반골은, 묘하게도 학문 세계에서는 확고한 정통파였다. 그가 주도한 사회사 혁명은 어느 순간 ‘정통’이 되어버렸다

 

한국 사학도들이 홉스봄에 열광하던 그 즈음부터, 정작 사회사는 후학들의 거센 도전을 받았다. 문화사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정통 마르크스주의자 홉스봄의 경제 중심적 해석(경제 환원론까지는 분명 아니었으나)은 점차 인기가 떨어졌다. 21세기 들어서는 프랑스 혁명이나 제국주의에 대한 홉스봄식 해석이 다시 소수파로 고립된 듯한 인상을 준다.

현실 세계는 더 가혹했다. 소련 붕괴 이후 마르크스주의는 강단의 소수파 외에는 의미를 찾기 힘든 이념으로 전락했다.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계보도 거의 끊기다시피 했다. 진보 세력도 더 이상 마르크스에서 답을 구하지 않는다. 이에 맞서 홉스봄은 2011년 <어떻게 세상을 바꿀 것인가 :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를 숙고하다>를 낸다. 그의 나이 아흔넷이었다. 마지막까지 그는 반골이었고 투사였고 정통 마르크스주의자였다.
 

 

문화적으로도 그는 굳이 새로운 유행을 따라가지 않으려는 정통파였다. 어릴 때부터 재즈 팬이었던 그는 프랜시스 뉴턴이라는 필명으로 재즈 평론을 썼다. 1950년대 록 음악이 떠오르자 그는 록을 일시적 유행으로 치부하는 오판을 했다. 록이 확고한 주류로 자리매김한 후에는 “미국 대중음악에 존속살인이 일어났다. 록이 재즈를 죽였다”라는 가시 돋친 논평을 쓰기도 했다. <옵저버>는 “이 표현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홉스봄이 역사를 이렇게 쓰지는 않아서 다행이다”라고 했다. 그는 1960년대 신좌파의 아이콘 중 하나였던 청바지를 한 번도 입지 않았다.

이른바 ‘68 혁명’으로 대표되는 1960년대 신좌파의 물결에 구좌파 중의 구좌파 홉스봄이 얼마나 시큰둥했는지는 유명하다. 홉스봄은 축제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믿는 정통파 혁명가의 정서를 여전히 갖고 있었다. 그의 책 중 하나가 68 세대의 필독서로 간주된다는 말에 그는 뿌듯해하기보다 놀라고 당황했다. “나이든 좌파인 내 입에서 나온 첫마디는 ‘이 친구들은 정치적 목표를 이뤄내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였다.”(자서전)

68 혁명의 ‘문화적 해방’에 냉소

젊은 시절 늘 스스로를 혁명 활동가로 생각했던 그는 신좌파가 정치적 목표 대신 문화적 해방(그의 눈에는 ‘사이코드라마’에 가까워 보였다)에만 관심을 두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극단의 시대>에서 홉스봄은 특유의 삐딱한 영국식 유머로 이렇게 쓴다. “학생들이 정부의 타도나 권력 장악과 같은 하찮은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68 세대의 아이콘이었던 남미의 혁명가 체 게바라에 대해서도 홉스봄은 냉소적이다(“그것은 극적으로 잘못 구상된 전략이었다”). 반면 그는 브라질의 룰라를 “구좌파의 마음을 훈훈하게 해준다”라며 집권 전부터 주목했다. 무장 게릴라 특유의 낭만주의를 배척하고 제도권 정당을 통한 집권 가능성을 높이 평가하는 그의 태도는 그가 ‘실제로 세상을 바꾸는 일’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보여준다. 분명 그는 낭만주의자는 아니었다(외모 콤플렉스가 있었던 홉스봄이 게바라를 싫어하는 건 당연하다는 농담 같은 논평도 있기는 하다). 1968년에 51살이었던 홉스봄은 자신은 68 세대를 이해하기에 너무 늙었다고 생각했는데, 훗날 토니 주트와 같은 68 세대 출신 역사가도 홉스봄의 ‘68 무용론’에 동참한다.

‘정통파 반골’ 홉스봄은 한국에서도 1990년대를 거치며 일종의 ‘제도권 편입’을 겪는다. 그의 책으로 공부한 연구자들이 홉스봄을 강단으로 들여왔다. 사회사·노동사·19세기 유럽사에서 홉스봄은 필수 커리큘럼이 됐다. 사학도들 사이에서는 “군대에 책을 들고 들어갈 때 <혁명의 시대>는 혁명이라서 걸리고 <자본의 시대>는 자본이라서 통과된다더라” 하는 농담이 자연스러워질 만큼 익숙한 텍스트가 되었다.

묘하게도, 그때부터 다음 세대의 ‘조숙한 별종’들은 이 ‘강단의 텍스트’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당시 학생운동에 투신했던 강상구 진보신당 창당준비위 부대표(91학번)는 “우린 더 빨갛고 불온한 거 보느라(웃음) 홉스봄은 볼 시간이 없었지”라고 말했다. 199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마르크스 보이’와 ‘혁명 마니아’의 공급도 예전 같지 않았다. 사학도들에게 홉스봄은 두 가지 의미로 ‘교과서’ 대접을 받았다. 익숙해졌지만, 1980년대만큼 열정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았다.

러시아 혁명의 해에 태어나, 독일에서 나치를 피해 영국으로 망명했고, 20세기를 지배했던 이데올로기 경쟁의 한 축을 대표하는 역사가로, 1991년 소련 붕괴까지 목격한 그는 20세기의 화석이자 압축파일이다. 홉스봄은 그 특유의 역사 구분법으로 1917년 러시아 혁명에서 1991년 소련 붕괴까지를 ‘단기 20세기’라고 부르는데, 이 “별스럽고 끔찍한 세기”의 증인으로 그보다 어울리는 사람을 떠올리기는 무척 어렵다. 정말로 여러 가지 의미로, 다시 나오기 힘든 역사가가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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