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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9/13
    또 고민하기...
    외딴방
  2. 2010/09/13
    펌>고교자퇴한 민다영 씨(1)
    외딴방
  3. 2010/09/08
    창작 중....
    외딴방

또 고민하기...

무섭다.

사는 게, 내가 주도하기는 커녕 정상적인 소통도 하지 못 한 채 휘둘려사는 이 삶의 방식이 싫다.

남편은 가사에 치여 짜증부리는 내게 그럼 이혼하라는 말이나 던지면서 화나게 하지 말라고 내 입을 틀어막는다.

그와의 이혼, 별거 혹은 투명인간처럼 무시하고 살기... 이 중에서 고민하느라 하루밤 하루낮을 또 보내고 있는 와중에...

한 예슬보다 조금이라도 희생을 줄이겠다는 듯 고교를 자퇴한 18세 민 다영씨의 이야기를 보면서 나 자신의 학창시절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학교생활을 하고 있는 청소년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여...

내가 원하는 삶을 살지 못 할 것을 알면서 이 사회의 체제내적인 삶에 진입했던 것이 실수라면 실수일 것이다.

몰랐던 것이 아닌데, 결혼이 인생의 무덤이라는 것을 대학 가기 전부터 알고 있었고 그래서 스스로를 타의에 의한 독신주의자라고 공언해 왔으면서, 대학도 자퇴했던 내가 왜 결혼이라는 무덤을 용감하게 들어간 것일까...그리고 이제와서 내 인생도 당당하게 살지 못 하고 있는 판국에 딸들의 인생이 이 체제 속에서 길들여갈 것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도시를 떠나는 것, 그건 단순히 공기 좋은 시골을 찾아간다는 것 이외에 훨씬 많은 것을 함축하게 될 수도 있겠다.

교육적 이주를 결심하고 실행에 옮기는 것,  대안학교나 혁신학교를 찾아 땅과 집을 구하는 것, 생계와 조율이 안 되어 한시간 이상의 통근거리를 감수하거나 아니면 국내에서 기러기아빠가 된 사람들도...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내가 양평으로 가자는 것에 남편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 일축했다.

그는 자신의 부모형제가 있는 전라도로 가고 싶어 한다. 일견, 그도 나쁘지 않을 수 있겠다 싶어 지난 여름, 휴가 대신 늘 가는 시부모님과 시아주버님의 집에서 형님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60호였던 마을의 가구 수는 30여 호로 줄어들었다 한다. 그 중 아이들이 있는 가구는 형님네를 포함하여 두 집 뿐이었다. 시골에서 셔틀버스를 타며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다니고 있는 조카들은 아침 8시에 나가서 11시에 들어온다, 한밤중에 말이다.  열 댓명 있는 학급에서 10등을 왔다갔다 하는 성적을 올리기 위해 학교 정문에서 픽업해서 밤 10시까지 국영수를 반복하다가 20키로를 달려 집앞에 떨구고 가면 형님은 5시에 일어나서 9시에 잠드는 시골생활의 리듬을 깨고 한밤중에 자다말고 일어나서 아이들의 간식꺼리를 챙긴다.

나는 정말이지...어이가 없었다. 지난 여름, 유심히 지켜본 시골살이 10년 차의 형님과 조카들의 생활을 보면서.

 

형님은 서울이 고향인 사람이다. 의류공장에서 미싱을 하다가 같이 미싱을 하는 큰 시누이의 소개로 결혼을 했다고 한다. 딸을 셋 낳고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나서 남편은 정관수술을 하고 왔다고 한다. 건축현장의 소장인 남편이 허리를 다쳐 시부모의 집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연년생의 아이 넷을 거느리고 남편 수발을 할 수 없기도 했겠지만...이후 계속 시골에 눌러 살게 되어 세 아들 중 두번 째이지만 큰 며느리의 역할을 홀로 다 하고 있다. 집에는 두어달에 한 번씩 오는 남편이 전국의 공사현장을 떠돌다 보니, 기실 아이 넷을 키우는 것도 혼자 감당해야 할 판이니, 형님은 도대체 집 밖을 나갈 수가 없어 시부모님과 함께 살게 되었다고 하였다. 하긴... 나도 아이 둘을 키우면서 평범한 노동자인 남편의 월급으로 두 아이 키워내기 벅찬 걸 느끼면서 아이 넷을 데리고 서울에서 살기는 어려웠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내가 아이들이 경쟁 중심의 공교육 체제에서 자라게 될 것을 두려워하는 데에 반해, 그 공교육도 변변히 다니지 못 하여 장학금 받고 다닌 기숙사형 공고를 졸업하자 마자 생계전선에 뛰어들어 마흔 네살의 지금, 25년 째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남편은...아이들의 피아노학원비도 아까워하며 교육비가 너무 많이 드니 육성회비 이상 돈 들이지 말고 늦은 일곱살인 딸아이를 조기입학시키자고 하였다.  그는 자신이 60세가 되어도 아이들이 대학을 채 졸업하지 못 할 것에 두려움 없이 딸들은 시집만 잘 가면 되니까 굳이 대학가지 않아도 된다고 얘기한다.  

그래...그렇다. 나는 그가 5남매를 키워낸 시부모님이 세째 아들인 그를 중학교 보내는 것도 벅차했고 그가 시커멓게 탄 누룽지를 먹으면서 주린 배를 달랬다는 사실을 들어 알고 있으며 그가 열 아홉부터 직장 생활을 시작한 이래, 파업을 하거나 2년에 한 번씩 해고될 때 쉬는 한 두 주를 제외하곤 일을 손에서 놓아 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에게는 절대적으로 안식이 필요하다. 7년에 한 번씩의 안식은 커녕, 25년 동안 지속된 노동생활이 그는 50세를 넘어 60세까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에 절망한다.

...그는 50세 은퇴를 주장하고 있다. 큰 아이가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할 나이고, 작은 아이는 그렇지도 못 할 나이다. 딸들의 중학교나 고등학교나 입시 따위에 관심이 없다, 그는.

나는 사교육 스케쥴을 어떻게 짜서 입시에 성공해야 하나 하는 고민을 할 기본 토양도 되지 않는 것이, 그의 형제자매들 중 대학까지의 교육을 마친 사람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들이 아니라 그들의 자녀들을 말이다. 그가 그렇듯 그의 형제자매들은 자식들의 기천만원이 넘는 대학학비를 대기엔 너무 빈약한 생계수단을 가지고 있고 그러한 경제적 수준 하에서 아이들은 입시경쟁의 하위라인에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출발선이 다르다.

이 말을 나는 80년대의 학창시절에 들었었다. 아직 전교조가 생기기 전이었는데, 간첩 혐의로 잡혀갔던 지리 선생님에게서 들었는 지, 공립고교의 교장교감과 늙은 선생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면회를 다녔던 국어선생님에게 빌린 책에서 봤는지는 모르겠다.

자유경쟁을 떳떳이 얘기하기에 자본주의사회는, 특히 한국자본주의는 너무나 얄팍하고 허술하며 뻔뻔스럽다.

이런 표현은 강남신화를 옛이야기 들려주듯 보여주고 있는 드라마 자이안트에 더 잘 어울린다. 말죽거리 잔혹사의 시대와 멀지 않은 내 중학시절의 친구는 아빠가 없었는데, 그런 집이 흔히 그렇듯 오빠의 대학 진학에 온 힘을 소진하여 그는 상고를 갔다. 그것도 당시 최고라 불렸던 서울여상 다음의 동구여상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외국계 은행에 취직했다는 얘기를 나는 데모를 하던 대학 시절에 풍문으로 들었었다.

그는 나의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다. 내 입시경쟁의 기억은 기독사립학원이었던 중학시절에 더 가열찼는데, 전교석차를 교실 복도에 붙이면서 담임들은 학급의 10% 이내, 자신의 "엘리트" 들이 전교 석차에 어떻게 랭크되는 가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들은 가출로 출석일수를 못 채워 유급한 소위, "날라리"들이 공부를 하던 말던, 수업을 땡땡이치는 것을 체크하는 것조차 귀찮아하면서 보다 더, 근묵자흑의 손해가 날까봐 신경썼다. "근묵자흑" - 이 4자성어를 나는 중학교 1학년 담임선생님에게 교무실에 불려가서 들었다. 날라리인 짝궁과 그의 엘리트였던 내가 친하게 지낸다는 걸 알고 내게...그리 하지 말라면서 들려준 사자성어였다.

날라리 친구와 헤어지고 열심히 사귄 친구가, 나와 다른 몇 명과 함께 상위 10% 내의 서열다툼을 열나게 벌이다가 고교입시의 일종이었던 연합고사 성적을 가지고 동구여상으로 가 버렸다.  

 ... 그건 반칙이었다. 우리들은 모다 인문계 고등학교를 가야했다. 중하위권 성적군의 아이들과는 친구도 안 했던 엘리트들은 모다 인문계를 가서 또다시 3년 동안 열나게 대입준비를 하여 서울 4년제의 어느 대학을 가느냐를 놓고 경쟁을 해야 했다. 그런데...

내 중학시절 유일하게 마음을 주고 받으며 선의의 라이벌이었던 내 친구는 오빠를 간신히 인하대에 입학시키고 자기는 상고를 갔다. 나는 그 친구와 집이 가까웠기 때문에 고등학교 초기에도 자주 만났었다.

출발선이 다른 상태에서 그와 나의 경쟁은 공정하지 않다. 나는 그 친구를 만나면서 늘 뭔가 불편하고 미안하고 내가 죄 지은 사람처럼, 적어도 불의에 타협한 비겁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는 나보다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되었다.  이전에 나는 학교에 치맛바람을 날리며 드나드는 전교학생회장의 엄마라든가, 걸 스카우트나 영어경시대회의 입상을 만드는 열성엄마가 없었던 우리 집의 가난을 비관했었고 그들의 공부만 잘 하는 것이 아닌, 피아노 콩쿨과 학교 외부의 수상을 위해 뜨거운 뙤약볕의 조회시간에 연단에 오르는 영광을 부러워했었다. 그들의 우수성을 지지하고 있는 브랜드 점퍼와 나이키신발은 내겐 넘을 수 없는 격차였다. 그들은 10미터 앞의 스타트라인에 서 있었고 나는 상고를 간 내 친구보다 1미터 앞에 있었다. 나는 1미터 뒤에 있는 내 친구를 잃어버림과 동시에 10미터 앞에 선 자들에 대한 부러움도 치워버렸다.

더 이상 공정한 경쟁이란 없었다.

상고를 간 동생 덕분에 집안의 재정적 지원을 한 몸에 받을 수 있었던 그의 오빠는 인천 5.3사태의 얘기를 내게 해 주며 복사본으로 묶은 시집 한 권을 내게 주었었다. 김 남주의 " 나의 칼 나의 피"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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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고교자퇴한 민다영 씨

고교자퇴한 민다영 씨
 

 

초·중·고생들의 여름방학이 시작될 무렵인 지난 7월 20일 자퇴서를 낸 학생이 있었다. 경기도 의정부에서 고등학교 2학년에 다니던 민다영씨가 학교를 떠나기로 결심한 것이다. 학교에서 쫓아내듯 강요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막연했지만 어려서부터 고민했던 문제들을 실행에 옮길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란다. 이미 부모님과는 여러 차례에 걸쳐 자신이 고민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 생각을 나누어 오고 있었기에 자퇴에 따른 부모님의 반대는 없었다.

 

다영씨는 어려서부터 막연하게나마 "내가 이렇게 공부해서 경쟁의 승리자가 돼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가면 행복할까 고민했다, 그런 삶은 살기 싫었다, 직장 책상에서 평생을 바치다 죽기는 싫다고 생각"했다. 고교에 진학한 이후 그 고민이 깊어졌고 인권동아리에서 활동을 하면서 윤곽을 그릴 수 있었다. 부모님이나 학교 선생님과도 진지하게 생각을 나누었다. 그리고 결정했다. '고교 자퇴'.

 

다영씨는 중학교 때는 전교 1등을 한 적도 있고 고교에서는 반에서 1등도 해 봤다. 하지만 "학교에서 하는 공부는 대학가기 위한 것일 뿐"이었다.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위해 하는 즐거운 것이 아니었"다. "자기 가치관을 찾을 수 있는 여유를 주지 않고 성적과 입시로 내모는 교육 현실에 발목 잡혀 원하지 않는 삶을 살기보다는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관심분야도 모르는데 대학 가려는 친구들, 안타깝다"

 

자퇴를 한 이후 아침에 일어나 자전거를 타고 시립도서관에 가기도 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면서 오히려 시간을 효율적으로 쓸 수 있게 되었다며 인터뷰 내내 환하게 웃었던 민다영씨. 국제기구나 국제엔지오에서 세상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삶을 살고 싶다는 그를 지난 8월 말 만났다.

 

- 자퇴 결심에서 실행까지 얼마나?

"오래 안 걸렸다. 고민하는 시간은 많았지만 적극적으로 실행하기까지는 한 달 정도 걸렸다. 부모님과 선생님께 자퇴하겠다는 말씀 드리고 최종 결정했다."

 

- 자퇴한다고 했을 때 부모님의 반응은?

"처음에 자퇴한다고 바로 말씀 드린 게 아니고 자퇴하고 싶고 다른 길 찾아 가고 싶다고 계속 대화를 했다. 엄마 말씀이 다른 길 찾겠다고 만날 여러 가지 이야기 할 때는 심장이 너무 떨렸다고 하셨다.(웃음) 하지만 여기저기 다른 길을 알아보면서 자퇴하겠다는 결심을 했을 때는 같이 생각해보자며 동의하셨다. 많이 믿어주신다. 부모님이 이야기는 안 했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아마도 부모님도 어렸을 때 나처럼 하고 싶었던 일이 있었을 텐데 지금은 생계를 위해 일을 하니까 나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를 바라시는 것 같다."

 

  
"우리나라 학교에서는 입시 말고는 다른 길을 찾도록 준비해주지 않는다."
ⓒ 유영민
자퇴

 

 

- 고교 졸업 후 다음 단계를 생각할 수도 있었을 텐데?

"생각해봤는데, 우리나라 학교에서는 입시 말고는 다른 길을 찾도록 준비해주지 않는다. 입시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입시를 포기하면 고등학교에 다닐 이유가 없다. 입시를 포기한 아이들이 학교에서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 학교가 입시 아닌 자기 길을 찾아주는 과정이라면 좋겠는데 그게 아니라서 안타깝다. 그래서 결심한 거다."

 

- 학교를 떠나 지내보니 어떤가?

"아직까지 재밌다. 자퇴하니 시간을 제일 효율적으로 쓸 수 있게 됐다. 원하지 않는 삶이 아니라 나의 길을 찾아가는 게 좋다. 내가 지금 하는 공부는 자발적으로 내가 목표를 세워 하는 것이다. 하지만 학교에서 하는 건 대학 가기 위한 것일 뿐이다.

 

나는 자퇴했지만 친구들은 계속 학교에 있다. 친구들 보면 안타깝다. 하고 싶은 일도 없고, 가고 싶은 과도 없고, 관심 있는 분야도 모르겠는데 대학은 가야겠고…. 생각이 있는 친구들도 있지만 막연하게 대학 생각만 하는 친구들이 더 안타깝다. 입시 때문에 자기를 알아가는 시간, 생각해보는 시간이 없는 현실이 슬프다.

 

그런 친구들을 보면서 '왜 그럴까' 생각하다가 그런 여유를 주지 않는 현실이 안타깝고 이러다 어른이 돼서 '내가 살아온 게 이 길이 아니네'하게 될까봐 무섭기도 했다. 무의미하달까. 경쟁에서 승리자('승리자'라는 표현이 좀 그렇지만)가 되면 좋은 결과를 차지하고 남들이 말하는 엘리트 돼서 좋은 대학 나오고 좋은 데 취직하는데 그런 게 바람직한 삶일까.

 

나는 행복한 삶을 살고 싶은데 그런 건 아닌 거 같다. 당장 10~20년 후를 준비하고 자퇴를 한 건 아니다. 자발적으로 준비할 수 있는 계획과 시간이 있는 것만으로도 지금은 충분하다. 지금 시점에서 자퇴한 게 좋다. 나를 알아가는 시간도 많고 관심 분야도 많다. 여기저기 계속 찔러보며 제 길을 찾아가는 게 의미 있다. 그러다 제 길 찾는 거다. 그런 시간이 아깝지 않다."  

 

"국제기구나 국제 엔지오 등에서 일하고 싶다"

 

- '여기저기 계속 찔러본다'는 게 어떤 의미인가?

"이렇게 내가 하고 싶은 것도 하면서 읽고 싶은 책도 읽고 사람들도 만나고 차근차근 공부하고 준비해서 21살쯤 프랑스로 유학을 갈까 생각중이다."

 

- 왜 프랑스로 유학을 가려는 건가.

"한국 대학에 가기 싫어서다. 우리나라 대학은 학문의 전당이 아니라 취업 준비 하는 곳이다. 그게 이해 안 간다. 취업을 위한 수단이고 도구인데 4년이란 시간을 그렇게 해야 하나 싶어서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는 외국 대학을 찾아보게 됐다.

 

그래서 여기저기 알아봤는데 영미권은 학비가 장난 아니더라. 그리고 미국엔 우리나라 사회에서 주류되려는 사람들이 유학 많이 간 걸로 안다. 그런 사람들과 함께 공부하는 게 싫었다. 그래서 유럽 쪽을 찾다가 프랑스를 알게 됐다. 프랑스는 학비도 비교적 저렴하고 생활비는 지방으로 갈수록 한국 대학비랑 비슷해서 (부모님 도움 없이) 내가 충당하면서 다닐 수 있을 것 같다. 영미권은 불가능하다. 나중에 국제기구나 국제 엔지오 등에서 일을 하고 싶은데 프랑스어를 하면 아프리카에서 그런 활동을 하기에 좀 더 도움이 클 것 같다. 프랑스에 있는 대학을 가고 싶다거나 미래에 대한 확신이 있는 건 아니지만 잘한 선택이라 생각한다."

 

- 그럼 21살까지는 어떻게 보낼 건가.

"친구들도 자주 만날 것이고 선생님들도 학교 자주 오라고 했다. 대학 청강 들으며 준비하고 학교 다니며 못했던 일, 하고 싶었던 일 하며 준비하게 될 것 같다. 지금 매우 재미있다. 단조롭고 무미건조한 학교생활이 아니라 만날 다른 일상을 살고 다른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하는 게 즐겁다. 굳이 여행 가지 않아도 여행하는 듯한 기분이다. 엄마랑 주말마다 도서관 가는 것도 좋다. 이번 주말엔 황학동 벼룩시장에 가기로 했다. 친구들 선물도 살 거다."

 

- 준비·계획한 대로 안 될 수도 있는데?

"그런 두려움보다는 내가 너무 소수의 길을 가는 데 따른 두려움은 있다. 하지만 어떻게 가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았고 어느 방향이든 결국 그 일을 하게 될 거라는 믿음이 있다. 그래서 자퇴한 거니까 후회 안 한다."

 

"비정상적 한국 입시 시스템서 자유로워져서 좋다"

 

  
"모든 걸 내가 챙기고 결정해야 하니 불안한 것도 있다. 하지만 지금이 의미 있는 시간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래서 소중하고 좋다."
ⓒ 유영민
고교 자퇴

 

 

- 자퇴 후 학교 다닐 때랑 하루 일과가 다를 텐데.

"아침에 일어나서 인터넷 뉴스 검색하고 자전거 타고 도서관 가는 날도 있고 아닌 날도 있다. 도서관이 자전거로 30분 거리다. 자전거 타고 시립도서관 가는 길이 강변인데 참 좋다. 집에 와서 어학 공부하고 책도 읽고…. 매일 똑같은 일상은 아니고 날마다 조금씩 일과가 다르게 펼쳐진다. 단체 활동도 많다. 어학공부는 꾸준히 만날 한다.

 

날마다 똑같은 일상이 될까봐 탈학교모임 등에 가서 여행하는 프로그램 신청도 했다. 여행 계획 세워서 제출하면 경비의 반 지원해주고 나머지는 내가 내야하는데 거기서 아르바이트도 주선해서 경비 마련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 학교 다니는 친구들보다 늦게 일어나도 되겠다.

"학교 다닐 땐 6시나 늦어도 6시 30분에는 일어나야 했다. 7시에 일어나면 지각이다. 요즘엔 8시30분에 일어난다. 학교 다닐 땐 누군가 안 깨워주면 못 일어날 거라 생각했다. 자퇴하고 나서 내 기상시간을 알게 됐다. 신기했다. 그런 거 생각하면 내 기상시간은 8시30분인데 학교는 8시부터 시작하니까 학교가 이런 것에 대한 배려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혹사시키기만 하고. 자는 시간은 학교 다닐 때랑 비슷해서 12시쯤 잔다. 아침이 상쾌하다."

 

- 자퇴 후 제일 먼저 한 일은?

"소박한데… 하루 종일 잤다. 공부해야 한다는 압박 없이 자유롭게 맘 편히 있어보고 싶었다. 하루 정도는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지내야겠다 싶어 책 읽고 영화 다운 받아 보며 지냈다. 학교에서는 시험 끝났다고 해도 여전히 수능이 남아 있고 친구들과 노래방 가고 맛난 거 먹고 해도 입시에 대한 압박이 있었다. 그렇다고 공부를 안 하거나 대학을 안 간다는 건 아니고 비정상적인 한국 입시 시스템에서 자유로워 졌다는 것이 좋다."

 

- 성적 압박이 친구들보다 강한 편이었나?

"성격이 스트레스 받고 끙끙 앓는 편이 아니다. 학교에서 하라는 건 다 했다. 중학교 때는 전교 1등도 해 봤고 고교에서는 반에서 1등도 했다. 물론 톱은 아니다."

 

"자퇴한 거 김상곤 교육감이 알면 씁쓸해 할지도..."

 

  
지난 3월11일 오후 서울시 성북구 고려대학교 정경대학 후문에 자발적 퇴교를 앞둔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3학년 김예슬씨의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는 제목의 대자보가 붙어있자 지나가던 학생들이 발길을 멈추고 글을 읽고 있다.
ⓒ 유성호
김예슬

 

 

- 대학생 김예슬씨가 자퇴를 선언한 적 있다.

"그 글을 직접 봤다. 친구 과외 선생님이 고려대생이라서 친구랑 같이 고려대 갔는데 정경대 앞인가 마침 그 대자보가 붙어 있었다. 그래서 직접 봤다. 그러고 집에 왔더니 인터넷에 막 나오더라. 언니(?) 생각에 많이 공감했다. 그게 (나의) 자퇴에 영향을 준 건 아니다."

 

- 정말로 꿈꾸는 삶은 어떤 것인가?

"옛날부터 하고 싶었던 게 국제기구에서 일 하는 것이었다. 국제기구나 국제엔지오에서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내가 그 일을 함으로써 사회가 점점 변화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런 게 원하는 삶이다. 아직 더 이상 구체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인권에도 관심 있다."

 

- 학교 다닐 때 인권동아리 회장하면서 김상곤 교육감에게 인권상 줬다던데?

"(인권동아리 활동이) 학교생활 중 가장 좋았다. 다시는 못 누릴 추억이고 즐거움이다. 김상곤 교육감님이랑 셀카도 찍었다. 교육감님이 자퇴 사실 알면 씁쓸해 하실 지도 모르겠다. 학교는 입시를 치르기 위한 곳이 아니라 여러 가지 생각의 공간을 만들어주는 곳인데 그렇지 못한 학교 현실에 안타까워하시지 않을까. 학교가 다양한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 됐으면 좋겠다."

 

-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성적 잘 받아오면 부모님이 자랑하고 다니셨는데 그걸 못하게 돼서 죄송하다. 또 자퇴생이라는 사람들의 시선도 (부모님께) 죄송하다. 모든 걸 내가 챙기고 결정해야 하니 불안한 것도 있다. 하지만 지금이 의미 있는 시간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래서 소중하고 좋다. 이런 시간 없었다면 후회했을 것 같다."

 

 

"어딘가에 있을 나의 생생한 행복을 찾기 위해 자퇴한다"

민다영 학생이 자퇴서를 내고 온 날 쓴 일기

자퇴를 결심했다. 중학교 3년 지독하게 공부를 했었다. 조금 벅찬 경쟁이지만, 그 경쟁에서 승리자가 되는 것이 즐거워 공부를 했었다. 남들에겐 시기의 대상이자 부러움의 대상인 '전교1등'도 했었고 항상 경쟁에서 승리자였기 때문에, 그 달콤한 '승리자'의 기분을 잃고 싶지 않아서 외고, 자사고 보다는 좀 더 '승리자'가 될 수 있는 확률이 큰 일반고에 왔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내가 하고 있는 이 경쟁에 회의가 오기 시작했다. 나는 왜 이 경쟁에서 승리자가 되려 하는가? 경쟁에서 승리자가 되면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일까?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기가 막히게 그 와중에도 불확실한 경쟁을 놓을 수 없었다.

 

 이 경쟁에서 승리자가 된다면 내가 바라던 인생은 어떻게 펼쳐질지 생각해보았다. 명문대 입학해서 또 다른, 더 심한 경쟁에서 이겨내고 대기업에 들어가 아파트 평수 늘려가는 것에 만족하며 살던가 아니면 외무고시를 통과해서 외무공무원이 되어 살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평범한 회사원으로 사무실 책상에서 죽지는 않겠다고 생각해 왔으니 대기업의 회사원이 된다면 난 내가 원하지 않은, 행복하지 않은 인생을 살 것이다. 외무공무원은 내가 꿈꿔오던 직업이었으나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경로엔 '경쟁에서의 승리'말고도 조건이 하나 더 필요하다.

 

 돈! 짧으면 3년 길게는 몇년이라고 장담할 수 없는 고시공부를 하기 위해 필요한 돈. 만만치가 않다. 서민 혹은 그 이하인 우리 집에는 존재 하지도 않고, 나에게 투자될 수도 없는 돈이다. 어떤 자는 나에게 돈 벌면서 공부하면 되지 않겠느냐?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개천에서 용난 대표 케이스,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의 ○씨도 고시공부 하는 동안에는 돈을 벌면서 공부한 것이 아니라 돈을 받아서 공부하지 않았는가. 설사 그런 돈이 수중에 있다 해도 고시통과를 위해 기약 없는 3+α년의 준비기간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

 

그럼 날 이 확률 적은 경쟁으로 내몬 것은 무엇인가? 성적순위를 가지고 엎치락뒤치락 했던 경쟁자들? 경쟁에서 잠시 뒤처졌을 때마다 나를 벌레 보듯 바라보았던 L선생님? 경쟁의 승리자(1등급)에게만 주어진 특별교육, 쓸모없던 수학․ 영어심화 동아리? 뭐가 그리 궁금한지 매번 모의고사 성적으로 전교 50등까지의 명단 확보에 열 올리는 여자 교감?

 

 나를 이렇게 내몬 것은 어느 하나가 아닌 그 모두 다인 것이다. 대한민국 모두가 날 이렇게 내 몬 것이다. '대학 입시'라는 이 경쟁에 참여해야하는 목적도 이유도 모른 채... 이렇게 날 경쟁 속에 내몰았다. 이 경쟁에서 승리해야만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처럼 그들은 나에게 회유하고 강요했다. 그래서 난 그저 행복한 인생을 살기 위해 누리고 싶었던 것들과 누려야 했었던 것들을 포기하며 기계처럼 공부를 해 왔던 것이다.

 

결국은 그 입시 경쟁이 모두 헛 된 것임을 판단하고 이렇게 자퇴를 하게 되었지만, 내 결단에 대한 후회는 없다. 대부분이 걷지 않는 소수에 길에 대한 두려움만 조금 있을 뿐이지, 후회하지는 않는다. 더 이상 학문의 전당이 아닌 취업하기 위한 하나의 스펙뿐인 대학에 4000만원에 가까운 등록금과 4년이라는 긴 시간을 투자하기도 아깝고, 대학을 나온 후에도 자기 길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오히려 내 선택이 옳았음을 느낀다.

 

 18살. 세상 물정 모르고 마냥 즐거운 학창시절을 보내야 하는 나이에 말도 안 되는 현실에 회의감을 갖게 해준 모든 것에 분노하며... 지금이라도 어딘가에 있을 나의 생생한 행복을 찾기 위하여 나는 자퇴계를 썼다!

 

2010.7.20 자퇴계를 낸 직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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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중....

왜, 늘 항상 누군가에 집착하는 걸까...

이 집착을 버리는 것도 너무 힘겨웠지만, 버리고 나서의 공허함을 견디는 것도 만만챦게 힘겹다.

게다가 집착을 버려야겠다고 생각한 계기도 집착하고 있던 한 사람의 영향 때문이었다...

 

쟝, 그니는 말끔한 신사였다.

하하하...이리 써 놓고 보니 더 말끔하게 느껴진다.

그이만큼 쿨하면서 진정성을 겸비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혹은 누군가와 이야기하면서 "일치" 에 대한 운명을 느낀 적도 처음이었다.

소설 속의 연인들이 말하는 운명적인 만남이 무슨 뜻인지 - 로미오나 쥴리엣이 죽음을 불사하면서 혹은 안나 카레리나가 숭고한 희생으로 함께 하는 여정 속에서도 제대로 말로 표현한 적이 없으므로 - 그들이 왜? 그토록 상대를 갈구했는지 알 수 없었으나 나는, 그와 동조하고 공감하고 일치했기 때문에 운명을 느꼈다.

그는 팀의 리더였다. 그의 팀은 나와 다른 층에 위치했으므로 직접 그의 활약을 볼 순 없었으나 다른 리더들이나 사원들 사이에서 긍정적으로 호평되는 그에 관한 이야기들은 그가 매우 공명정대하면서 상사에게 대범한 반면 동료들에겐 매우 온화하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의 업무처리능력도 뛰어나서 우등그룹의 사원들보다 150%이상 성취해내곤 했기 때문에 사원갈구기를 전문으로 하는 과장도 시빗거리를 찾지 못 해 입맛만 다시기를 반복했다.

또한 누구보다도 먼저 동료들의 고충을 세세하게 알아차렸지만 혼자서 조용히 도와줘야 할 지, 여럿이 함께 업무분담을 할 지, 상사를 방문하여 협상을 시작해야 할 지에 대해 그이만큼 정확하게 간파해내고 해법을 제안하는 이도 없었다.

당연히 그는 인기캡이었다.

그의 지인들은 오늘은? 내일은? 그럼 주말저녁은 어때? 하면서 술 한 잔 하기를 청했고 보통 2주 후까지도 그의 저녁 스케쥴은 꽉 차 있었다. 한 마디로 그는 술 마시며 환담을 나누는 것에 매일매일을 바쳤고 회사에서 가까운 한, 두 집을 정해두고 외박을 하였지만 다음날은 말끔한 모습으로 출근했다.

내가 그를 본격적으로 만난 것은 회사가 도산하면서였다. 아니 도산 직전에 인수합병되었지만 기존의 회사와 이후의 회사는 모든 면에서 일대쇄신을 보여주었기에 우리들이 수 년간 다녔던 회사는 없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새로운 회사의 새로운 경영과 관리방식에 대응하기 위해 회의는 연일 이어졌고 뒤풀이도 계속 뒤따라다녔다. 자연히 그의 저녁 술자리는 한 곳으로 집중되었고 그의 술자리 파트너는 아니었지만, 회의석상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내가 일찍 집에 가지 않는 한 대부분의 마지막 차주...까지 지키는 그와 주석을 함께 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물론 그닥 교제범위가 넓지 않고 세 명이상을 한꺼번에 만나는 자리에서 존재감이 미미했던 나는 처음에는 뒤풀이에 자주 빠졌었다. 혹은 1차에서 돌아가는 초기그룹에 묻어 나왔었다.

그러나 어느날의 회의 이후 나는 술자리의 끝까지 남았다. 그가 회의에서 한 발언 때문이었다.

" 외부인 참석은 반대야."

그는 약간 망설이다가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항상 선배들보다 늦게 이야기하고 반론을 펼 때는 논지를 객관화시켜 목소리 높인 사람들의 기분을 감안해 주곤 했던 그였기에 좌중은 그의 단호한 목소리에 주의를 집중했다.

"조언을 구하는 건 괜찮지만 직접적인 참가는 아니라고 생각해. 주체와 연대가 구분한다고 구분되어지고 합친다고 합쳐지는게 아니쟎아. 각각의 위치에서 소통하는게 맞다고 생각해. ...회의 구조를 이분화시킬게 아니라면."

그의 마지막 말은 일타였다. 주창자들에게 미리 동조했었던 성미 급한 한 동료가 뭐라 말하려는 순간, 의장 역할을 맡고 있던 대표가 말했다.

" 물론이지. 회의 구조를 이분화시킬 수는 없어. 당연히 회의하면서 사회자가 두 명일 수도 없지. 이 얘기는 아닌 걸로 하고. 지금까지처럼 필요할 때 조언을 듣고 와서 전달해주면 참고하고 그러면 되지."

대표는 주창자들을 쓱 한 번 건너다보곤 바로 다음 얘기를 하자고 했고 이의는 제기되지 않았다.

나는 덕분에 불편하고 힘든 얘기를 하기 위해 입 한 번 벙긋할 필요가 없었다.

대표의 논거는 그다지 논리적이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그리 될 수 밖에 없을 꺼라는 상황을 직감적으로 수긍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기에 또, 그리될 것을 의도한 제안이었나? 하는 의구심을 순간적으로 솟구치게 하는 즉문즉답이었기에 좌중은 은연 숨을 죽인 듯 했다. 그 후의 회의는 소소한 의결 외에 대책에 부심하는 것으로 시간을 채우고 마무리되었다. 사람들은 고뇌와 걱정으로 시작한 회의를 피로와 짜증으로 치워버리고 술을 마시러 갈 생각에 흥을 돋워 새로이 기운이 나는 듯했다.

늦은 시간 때문인지 1차에서 대거 탈락하고 단골호프집에 모인 사람은 네 명 뿐이었다.

" 야, 아까 너 말 잘 했다. 내 입장상 걍 자를 수도 없고, 난감했는데 참... 갸들은 왜 그런지... "

대표는 남은 자들이 다 제 편도 아닌데 속내를 툭 펼쳐놓으며 쟝에게 말했다.

" 뭐? 뭐 말이야? 응? 그나 저나 취하네..나 오늘 어디서 잘까? "

신입사원 주제에 대책회의에 참석하고 있는 1과의 양호는 입사 초기부터 바람을 일으킨 독특한 스타일과 재담에다 유능함과 진보적 성향까지 겸비하였지만 그 성향이 논리적 깊이를 갖기에는 좀 역부족인 듯  눈치가 없었다.

 " 글쎄... "

쟝은 없는 사람들을 놓고 뭐든 말하기가 불편한 듯 대답이 시원하지 않다. 다혈질처럼 보이지만 눈치 백단으로 민심을 휘어잡고 있는 대표는 쟝에게 더 푸념하지 않고 화살을 돌렸다.

" 넌 어케 생각하냐? 그거. "

취해 있는 신입사원을 집으로 데리고 갈 냥인 듯 제 옆자리에서 소파 구석으로 쭉 밀어부치면서 대표는 흘끗 나를 쳐다보았다.

" 그렇지...회의 구조가 이분화될 수 밖에 없어, 보내고 나서 다시 이야기해야 하니까..."

외부인의 주도대로 회의가 끌려가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던 나는 속내를 슬쩍 덮으며 대표의 자존심에 기를 보태주었다.

"그렇지, 다시 얘기해야 하지, 결국 우리가 결정하고 우리가 행동해야 하는 거니까...누가 책임지는데...다 내가 책임지게 될게 뻔한데 ! "

대표로 추대되면서 한 점 이의도 받지 않았지만 정작 자신은 늘 자리가 부담스러웠던 이대표였다. 누군가 정확하고 바르게 지침과 해답을 제시해 주면 좋겠지만 그건 우리 모두의 희망사항일 뿐, 혼돈의 시기, 힘없는 우리들은 쪽수를 모아 권리를 지키는 데 무엇을 더 동원하고 어떤 행동으로 한 발을 내딛어야할 지에 고민만 많았다.

" 뭐 좋은 방법이 없을까? 회사의 의도를 미리 알 수 있거나...."

이대표는 또 나를 건너다본다. 쟝이 아이디어를 내지 않기 때문일까?

" 연구소에 경영분석을 의뢰해보는 건 어떨까? 요즘 구조조정 들어가는 회사들에서 많이 하는 것 같던데?"

" 그런게 있냐? 너두 알아? "

대표는 쟝에게 확신을 구하듯 돌아본다.

" 응, 들어본 적 있어. 책도 나오던데. 아는 사람이 거기 연구원이 친구라고 했었는데."
과연 발 넓은 쟝, 바로 인맥의 힘을 발휘한다.

" 그래? 다음 회의때 의논해 보자. "

다음 회의에서 나의 의견은 별 근거없이 폄하되었지만 쟝이 찬성을 표시했고 다른 제안도 없었기에 일단 알아보자는 차원에서  연구소 상담을 받아보기로 하였고, 상담 이후 역시 다른 대책도 없는 상태에서 회사의 경영상황을 제대로 알아보자는 차원에서 경영분석을 의뢰하고 보고서를 받기로 하였다. 담당은 나와 쟝이 되었다.

쟝은 다른 동료들과 달리 연구소 뿐만 아니라 단체들과 조류들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서로 아는 얘기들이 더 많이 오가게 되었고 회의에서 의견의 일치를 보는 일도 더 잦아졌다.

나는 업무능력도 평균 이하였지만 사교성도 별로였고 두드러진 재능이나 매력도 없는 편이었다. 그저 착하고 성실하고 다소 내성적이었지만, 기존의 리더가 좀...싸가지가 없는 편이어서 내가 리더로 선출되었다.

나의 내성적인 성격은 왜소한 체구에서 비롯된 바도 커서 추우면 말이 없어지고 더워도 말이 없어지는 것으로 잘 견디는 편이었는데 내 옆자리에 있던 리더는 덥다고 연신 화를 내더니 초연해보이는 나를 보면서 나 때문에 더 열 받는 것 같다고 짜증을 냈다. 그의 짜증에 팀원들은 은근 불만을 쌓아가더니 해가 바뀌자 입사연수도 짧은 나는 리더로서 쟝과 함께 회의에 자리하게 되었다. 회의는 그다지 생산적이지 않았지만 기본적인 활동을 수행하기 위한 업무를 만들어냈고 학창시절 글쓰기를 좋아했던 쟝과 나는 편집부의 주축이 되었다.

편집부란, 어느 기관이든 단체든 수작업이 많은 부서이고 강도는 낮지만 노동밀도와 빈도가 높은, 장시간 늘어지는 노동분야이어서 나는 쟝과 함께 해야할 크고작은 일들이 많았으며 길게 혹은  짧게 자주 만나야 했으며 오가는 와중에서 주고 받는 이야기도 늘어났다. 그리고 어쩌다 술 한 잔 하게 되면 과거사도 뭉덩뭉덩 들려주고 관심사도 시시콜콜 나누게도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와의 많은 면에서 닮은 점을 발견하였고 대부분의 사안에서 의견의 일치와 공감대를 형성했다. 그리고 과거의 한 자락에서 우리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놀라운 충격 속에서 서로 같이 아는 지인의 이름을 말해보라고 다그치고는 아, 우리가 같은 뿌리였구나 하는 걸 알았다.  

 " 그때, 장청대회에서 문산까지 행진했었쟎아. 대열도 컸지만 열기도 대단했었지. 그때 사회보던 사람이 말야..."

쟝은 내가 함께 공부했던 그룹의 선배와 같은 교회를 다녔었고 80년대말과 90년대 초의 거리를 공유하고 있었다. 깨진 보도블럭과 안개 속의 숨막힘, 눈물과 그리고 피로 물들었던 그 거리를 말이다.

그리고 그는 나와 같은 지점에서 비판을 시작했고 같은 사고와 인식 속에서 노선을 변경했다. 우리가 이십대의 후반에 같은 현장에서 만난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후....

우리가 헤쳐나가야 할 역경들은 천로역정의 그것이었다.

새로운 밀레니엄의 세기에서 기업구조조정은 사회를 바꾸는 신호탄이었고 아이엠에프는 세태의 격변을 부채질하는 데 불과했다.

지금 그는 다르지만 여전히 열악하고 눈물많은 기층의 민중들이 살아가는 현장에 있고 나는 후퇴한 채 머물러있다. 일찌기 진보란, 역사가 필연적으로 나아가는 흐름이라고 생각했던 내게 머무름이란 퇴보의 다른 이름에 다르지 않았으나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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