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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2/25
    그녀의 일상
    외딴방
  2. 2012/02/25
    그녀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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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12/02/25
    그녀의 일상
    외딴방

그녀의 일상

bar 는 작고 좁다랗다. 카운터 옆으로 내츄럴풍의 화장실이 있다는 것만이 유일한 장점이다. 이층엔 더 많은 테이블이 있다지만 예인은 올라가 본 적 없다. 올라가는 사람도 내려오는 사람도 본 적 없는 이층이 왠지 음흉해 보인다고 예인은 생각하며 땅값 비싼 동네에서 혼자 술 장사하기 힘들어. 야. 하면서 투정부리는 친구를 좋게 볼려고 애썼다.

" 우리가 친했나요? "

" 말 놓지. "

" 선배, 웃겨. 내가 먼저 말 놓으라고 해야 하는 거였는데? "

" 내 맘대로 놓아서 화나면 너도 놓으라구. 대학때 한두학번 차이가 뭐 대수라고. "

" 하긴 나이로 치면 내가 더 빠르지 않나? 선배, 생년월일이 어떻게 되지? "

" 사주 보니..."

예인은 어쨌든 서류를 검토하게 되는 사장 입장이었다. 당연 선배의 나이를 알고 있었다. 한살 연하였다. 황당하게시리...그럼 그녀하고는 어떻게 되는 거냐....예인은 연상연하커플이네. 하고 혼자 웃고 말았다. 어쩐지 선배가 맨날 잡혀있는 것 같더라니. 하면서. 질투와 시샘으로 스무살의 연정을 끌고 가기에 우리들의 사십대는 너무 무겁다. 결혼을 하지 않았는데도. 결혼하여 가정사에 지친 그녀가 열정을 잃고 있기 때문일까. 여전히 싱글이 선배도, 예인도 새삼 연애를 하기엔 뭔가 홀가분하지 않은 것이다. 왜...

" 유 선생님, 시나리오 작업하시는 거 귀찮아하셔. "

선배는 뜽금없이 말한다. 아니, 아까 하다 만 얘기인가 보다.

" 그래? "

예인은 더 해 보라는 듯 가볍게 받으면서 병맥주를 들고 한 모금 마셨다. 병도 작은데 따라 먹긴 좀 우습구만. 우리 선배, 갈수록 멋대가리 없어지는 구나. 하는 생각을 예인은 떠올리고 있었다.

" 혜정...이 작가한테 소설 넘기시면서 작업해달라고 하셨어. "

" 그래? 언제부터? 촬영 시작한지 얼마 안 되었쟎아. 대본 다 된 거 저번에 확인했는데? "

" 반년 전부터. "

예인은 어이가 없다. 이런 걸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고 하는 거다.

" 그럼 울회사랑 계약하기 전부터 작업하고 있었다는 거 아냐? 왜 말 안했어. 누가 유 선생님 각본 아니면 안 찍을까봐? 유선생님 그렇게 인지도 없어. 특히 영화판에선. 아님 조금이라도 작가료 더 받을라구? 이작가님, 유선생님하구 그정도로 세밀한 각본 짜긴 그림이 좀 안 나오는데... "

선배는 맥주잔을 안 비운다. 심각한 상황인가, 지금이...예인은 주

 

 

선배가 작가들을 싫어한다는 걸 예인은 처음 알았다. 그럼 여지껏 드라마는 어떻게 찍었나...

" 유선생님, 혜정이 고등학교때 선생님이야. 담임도 했던...국어선생. "

" 그래요? 대단한 인연이네? 고교시절 선생님이랑 지금까지? "

" 유선생님이 문단 데뷔해서 알게 된거야. 것도 한참 뒤에. "

" 그렇구나. 근데 왜 선배는 불만스러워 보이지? "

그렇다. 불만스러워보인다. 선배는 유현경 선생의 소설을 영화화한다는 것에 처음부터 반대였다. 작품에 대해 실컷 토론 다 해놓고 막상 영화화한다니깐.

" 소설을 어떻게 영화로 만들어. "

" 무슨 소리야. 선배. 당근 각본 새로 짜지. 편집 감독도 붙고. 지금껏 소설..."

" 유선생, 그딴 거 안 해. "

" 선배? "

예인은 감독이 작가들 인맥 많다는 것에 놀라지 않았다. 선배가 누군가를 그토록 싫어한다는 것이 놀라웠다.

" 왜 그래? "

선배는 대답하지 않았다.

왜...그 여자를 싫어할까. 이혜정의 고등학교때 선생이라서? 왜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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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일상

하나를 얻기 위해 다른 것도 딸려오게 하는 일은 흔하디 흔하다. 오죽하며 끼워팔기로 내는 순익이 본품의 그것보다 더 많다는 말이 있을까. 정말인지는 모르겠으나 예인은 그래서 딸려온 원두커피 박스 안의 비스켓을 튿어 금장 접시에 담아 내어놓는 것에 거리낌이 없어졌다. 손님들은 대접받는 다는 기분을 더욱 한껏 느끼며 잘 차려입은 양장 위로 과자가루가 떨어지는 것에도 아랑곳 않고 비싸 보이는 비스켓 하나를 꼭 집어들곤 하였다. 그리고 어지간해도 협상이 인연끊을 만큼의 결렬로 끝나는 일도 없게 되었다. 회사 입장으로선...하면서 예인을 향해 호감어린 미소를 지어보이는 영업팀장들은 꼭 다음 약속을 남기곤 했다. 그래 그러니까...

예인은 감독을 영입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어도 이혜정 작가 자체로 예인엔터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하긴 그런 타산이 다 무엇일까. 오직 냉정한 비즈니스로 이 감독을 영입한 것도, 아니 기획사 자체를 차려낸 것도 아니었으니 세세한 자기합리화까진 필요 없을 것이다. 결국 인생은 제가 원하는 대로 틀어가게 되는 법이다. 그녀가...

본 건물은 금연건물입니다. 라는 표지가 입구와 계단 층마다 붙어있었다. 그렇다고 주로 촬영현장으로 쓰이는 스튜디오들 안에서 금연을 지키게 하기는 어렵다. 카메라에 냄새가 담기지는 않으니...자고로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담배를 피기 마련이다. 오죽하면 스모킹이라는 영화제목까지 나왔겠는가. 그렇다 해도 예인은 하얀 빵모자와 돗트프린트의 쉬폰스카프가 어울리는 그녀가 담배를 피우는 모습은 잘 연상이 되지 않았다. 저기, 복도의 끝에 화재대비용으로 설치된 발코니에 한쪽 어깨가 보이는 것이 분명 그녀일 것이라고 확신을 해도 말이다. 그녀를 지키듯 발코니로 나가는 문 한 가운데 서서 역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은 선배이다. 그녀의 어깨 높이에 머리가 있는 것을 보니 발코니 바닥에 쭈구리고 앉아있는 것이 틀림없다. 오피스텔 안에도 작지만 베란다가 있는데. 예인은 왜 그들이 굳이 저기 나와 있는 지를 모르겠어서 잠시 멈춰 서 있었다. 복도의 반대쪽으로 갈까. 아님 주거용 오피만 있는 탑층에 제가 올 일이 없는데 마주치면 난처하니 얼른 도로 내려갈까....하지만 발코니에 나와 앉은 그들은 뒤를 돌아보거나 금방 나올 것 같지 않다. 그녀가 의자에 앉아 있는 것 같으니, 그건 일부러 집 안에서 들고 나왔다는 것일테니...

예인은 항상 그녀를 볼 때마다 뭔가 속이 걸린 것처럼 느껴졌다. 낯빛이 비교적 희거나 화색이 돌때도 그녀는 표정이 가볍지 않았다. 이십대의 그 거리에서도 그늘없이 쨍한 여름태양 아래서도 그녀는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기거나 고민을 계속하고 있는 듯 했다. 그런데 사십대의 지금도 여전히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를 안고 있는 것처럼 웃어도 다 웃지 않은 채 입꼬리를 내리고있는 것이다. 그리고 담배도 끊지 않은 것이다. 이십여년을 계속한 흡연으로 안색은 늘 산화아연의 파우더를 칠한 듯 창백하다. 담배 끄트머리에서 고개를 내민 손톱, 반이 잘려있는 것을 본 적도 있다. 잘못해서 그리 된 것이 아니라 부식하듯 떨어져나가고 있는 손톱, 얇고 하얀 핏기라곤 찾을 수 없는. 그 얼굴, 귓볼, 목덜미 어디  한 곳에서도 불그레한 생기라고 찾아볼 수 없었다. 헤어용 오일을 사용한 듯 차분히 가라앉은 머리카락조차 윤기없이 바삭해 보였다. 그녀는 전반적으로 비타민이 부족하다. 혹은 영양결핍이다. 푸석해 보이는 피부. 그렇게나 건조해 보이는 입술. 예인은 그녀의 입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이감독의 시선을 되짚어 따라가 보기도 했다. 그 눈, 고정된 시선의 강한 눈빛. 그 속에 담겨있는 게 무얼까. 욕망?  글쎄.

이십년 전보다 훨씬 불건강해보이는 애인을 바라보는 눈길 속에 담긴 것이 연민인지 애틋함인지, 조금은 변질된 분노나 고통어린 애증인지 알 수 없다. 따로이 가정을 갖고 있는 그녀를 소위 직장을 매개로 하여 다시 만나고 있으면서 불붙을 지도 모르는 애욕을 경계하기에 선배의 눈빛엔 너무나 열정이 없다. 선배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예인은 선배가 피아노를 칠 때도, 노래를 할 때도 그리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두문불출하고 있거나 작품을 다시 해석하면서 연인에 대한 감정을 새로 돋는 신록처럼 화면 가득 펼쳐 보일 때도 항상 열정을 갖고 있었다.  오랫동안 찾던, 그리하여 갈구하던 애인을 다시 만났으면 상황과 조건이 어떻든 기뻐하거나 적어도 생기가 돌아야 하는 거 아닐까. 예인은 선배가 날이 갈수록 처지고 또 느려지고 있는 것엔 그녀가 원인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지금, 발코니에서 나와 복도로 들어오는 그녀의 발걸음은 어찌나 느리고 기운이 없는지. 불현듯 그녀가 지체장애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힘없는 시선, 시계에 들어오는 사람이 아는 얼굴이라는 것을 나중에 인식하는 듯 표정이 느리다. 그녀의 얼굴을 보다가 그제야 함께 시선을 드는 선배, 똑같이 힘아리 하나 없는 얼굴에 활기없는 몸짓, 저게 감독의 얼굴인가? 선배의 사랑은 선배에게 독이 아닌가.

그런 문장을 만들어놓고 흠칫 하고 있는 예인에게 그녀가 손짓을 한다.

" 여기 오신 거죠? 저 가는 참인데, 감독님도 잡아 줘요. 배웅나온다 해서 말리는 중이거든요. "

" 이 작가님, 왜 벌써 가요. 아직 한 낮인데. 애들 올 때 안 되었쟎아요? "

" 금요일이라 장 봐야 해요. 나중에 애들만 두고 나갔다 오기 뭐 해서. 감독님, 쓸데없이 따라온다해서 떼는 중이에요. 요즘은 동네마트도 다 배달해 주거든요. 우리가 뭐 자취하는 대학동기들도 아니궁. "

" 아, 그거 저번에 대본에서 본 거 같은데. 이번 작품 하시는 유선생님이랑 같이 작업하세요? 대본 바뀐대서 유선생님 댁에 가신 줄 알았더니. "

" 예인이 너, 나 만나러 온거야? 그럼 좀 안에서 기다리구. 밑에까지만 내려갔다 올테니. "

그녀를 대신해 말을 친 선배는 그껀은 나중에. 라고 흘리며 그녀와 함께 엘레베이터를 타러 간다.

" 어, 아냐. 그럼 같이 내려가서 커피숖 가지 뭐. 그냥 딴 생각하다가 올라와버려서 짐 전화하려던 참이었어. "

그녀는 연신 한 쪽 손을 내 저으며 따라오지 말라 한다. 커피숖 가라구. 저는 엘리베이터 더 타구 내려가서 지하철 연결통로로 나갈 꺼라구.

" 작가님은 왜 차 안 갖구 다니세요? "

" 글쎄요. 워낙 잡념이 많아서랄까..."

얼버무리듯 말하는 그녀. 운전하면서 신경 곤두세우는게 싫다고. 공주님 체질이라 기사대동하지 않으면 자가용 못 탄다고 농담하면서 떠난다. 아쉬운 듯 그녀를 보내는 선배. 하지만 표정은 왠지 더 어둡다. 다른 걱정이 있는듯.

" 커피 안 마셔? "

예인은 후발 브랜드임에도 불구하고 연일 좌석을 메우고 있는 고급 커피전문점의 메뉴판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 계속 마셔서. 너 괜찮으면 맥주 마실래? "

" 웬일이야? 선배가 나한테? 맨날 문전박대하더니. "

벌써 몸을 일으키며 예인은 자리를 옮길 준비를 한다.

" 여기 호프집은 분위기 쫌 그런데. 선배, 그냥 바로 가자. 내 친구 하는 데 가까이 있거든. 근데 배도 고프고..."

그러고 보니. 하면서 선배도 맞장구를 친다.

" 계속 커피하고 담배만 해서. 요기 될 만 한거하구...병맥주 먹자. "

예인은 이게 선배의 대산가 싶어 고개를 들고 마주 바라보았다.

" 왜 그러니? "

" 선배, 좀 이상하네. "

" 뭐가? "

" 날 너무 가깝게 대하네. "

" 좋다는 거야? 싫다는 거야?  대표 대접해달라구? "

" 학교 때부터 쫓아다녔는데 그렇게 곁을 안 주더니, 요즘 왜 이래. 늙었나? "

병맥주를 컵을 달래서 따라 마신다. 선배, 폼 안 나는데..

" 폼 잡고 사는 거 힘들어서 늙는다. 너라도 나 좀 쉬게 해 주라. "

예인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그예 묻고 있었다.

" 애인 만나서 즐거운 줄로 알고 있는데. 의외의 대사네? 오늘도 땡땡이 치구 오피에 쳐 박혀 놓구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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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일상

조감독을 붙잡고 뭐라고 하소연하는 이윤정을 뒤로 하고 예인은 맥이 풀린 채 촬영장을 나왔다.

하얗게 새로 지은 건물, 건물 중앙에 전망용 엘리베이터를로 만들고 로비를 이층까지 높였다. 외장에 씨블랙을 입히겠다는 예인의 말에 설계사무소장은 안경을 치켜올리며 쳐다보았었다. 수지타산 안 맞춰도 되면 맘대로 하라면서. 안그래도 주상복합으로 빼면서 타산이 안 맞고 있는데 부채비율이 위험수윈데 하고싶은 거 다 하려다가 아예 아무것도 못 하게 되는 수가 있다며 진심어린 충고를 하는 지라 예인은 더 주장할 수가 없었다.

모 아니면 도라구...예인은 블랙을 포기할테니 크리스탈로 바꿔달라고 해서 겨우 확보한 것이 지상 2층까지의 전면유리창이었다. 투명한 큐브 안에서 바라보는 세상의 풍경. 예인은 이층에 내려 거리를 바라보았다. 거칠 것없이 내려다보이는 사람들, 차들, 인도의 행상들...그 어디 쯤에 선배와 그녀가 걷고 있을 것 같았다.

훌쩍 큰 선배의 팔꿈치에 어깨를 스치며 종종 거릴 것 같은 그녀. 무릅을 덮는 폭넓은 치마를 입고 앵글부츠로 한껏 키를 늘이곤 갈색머리칼을 삐죽이 내민 채 회색 베레모를 쓰고 물방울무늬의 쉬폰 목도리를 여왕의 러플칼라처럼 칭칭 감고 나타나곤 했었다. 예인엔터빌딩의 준공식 이후 바로 입주한 선배의 오피스텔을 찾아서. 12월 초겨울 한파가 기승을 부렸던 어느땐가 예인은 이층의 지금 이자리에서 거리 쪽이 아닌 로비 안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익숙한 그림자의 선배가 코데즈컴바인의 야상을 반쯤 어깨에서 흘러내린 채 그녀의 팔꿈치를 부축하느라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 그러게, 굽 높은 거 신지 마라니깐. "

" 그럼 마중 나오지 마 ! 너랑 길 가는 거 힘들단 말야. "

" 누가 쳐다 본다구 그래? "

" 힘들다구...쪽 팔린게 아니라... "

엘레베이터를 타도 될텐데 그들은 굳이 이층으로 올라오는 에스컬레이터에 몸을 실었다. 그녀가 한 계단, 아니 두 계단 쯤 올라갔나보다. 180을 육박하는 선배와 눈높이가 비슷해졌다. 그녀가 웃고 있었다. 해사하게.

" 내가 더 올라가면 너두 목 아플 껄. "

" 앞이나 봐..."

선배는 미소 띤 얼굴로 마주 보고 있었다. 생생한 표정으로.

예인을 알아보지 못 한채 선배는 시종일관 그녀의 옆구리를 낀 채, 발끝이나 손끝 아니면 그녀의 이마 쪽을 쳐다보면서 이층에서 엘레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오피스텔이 있는 탑층까지. 엘레베이터 안에서도 그녀를 위해 한쪽 팔을 뻗어 가드를 해 주는게 보였다.

예인은 선배의 그런 모습을 멀리서 보는 것에 익숙했다. 대학의 강의실에서보다 주로 캠퍼스의 어느 나무 그늘이나 벤치 근처, 혹은 정문을 빠져나가 직선거리 100미터면 도달하는 타 대학교로 가는 은행나무 많은 인도의 어디쯤에서. 선배는 그녀가 다니는 학교로 출퇴근을 했다. 그럴꺼면 뭐하러 이쪽 학교에 입학했담. 예인은 선배를 몰라도 되었을 것이라며 그녀의 대학에 음대가 있는지 없는지까지 확인한 적이 있었다. 그녀가 무슨 학과인지 그 학과가 자신과 선배가 다니는 우리 학교에 있는지 없는지도 확인하려다가 그만 두었다. 선배는 예인의 존재 조차 모르고 있는데. 선배는 다른 사람을 사귀고 싶은 생각은 아예 없는 듯 했다. 학과의 동기들이나 동문들과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시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와 함께 거리의 포장마차에서 나오는 것을 발견하거나 창문에 물이 흐르도록 장치해 놓은 호프집 안쪽에서 마주 앉은 두 사람이 눈에 띄는 것을 예인은 어쩌지 못했다. 선배는 멋있는 사람이었고 피아노를 칠 때도 치지 않을 때도 음악적인 분위기가 감돌았으며 그냥 옆에 서 있기만 해도 우쭐해 질 것 같은, 그런 사람이었다. 선배의 곁에서 지나가는 길이 아닌 동행으로 함께 걷거나 말 나누거나 손을 잡고 있는 것은 물론. 언제나 그 녀 뿐이었다. 어느 여름엔 짧은 고수머리를 하고 목덜미가 훤히 드러나는 드레시한 셔츠에 발목이 넓은 카고 팬츠를 입어 더욱 작아보이는 그녀와 마주쳤었다. 혼자 서 있는 그녀의 가까이로 다가가면서 예인은 처음으로 근거리에서 보는 그녀의 피부가 어린애처럼 말갛고 투명하다는 걸 알았다. 한창 화장에 열을 올리던 대학 신입생들 속의  예인으로선 뭐 저런 촌스런...하는 말을 속으로 뇌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대학생이란 걸 알고 있지 않았다면 중학생으로 오해할 수 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대낮의 캠퍼스 앞 거리를 우왕좌왕하는 중고생들은 모다 날라리일 것인데...

" 혜정아 ! "

뒤에서 휙 앞으로 내달리듯 성큼성큼 걸어가는 뒷모습은 역시 선배였다. 그녀는 한 손을 들어 보였다. 든 채로 뒷머리를 슬쩍 쓰다듬으며. 쑥스러운듯 미소를 흘렸다.

" 머리 잘랐어? 왜 이케 짧게 ! 시원하긴 하겠네? "

" 어려 보여서 완전 망했어. "

" 그럴 줄 몰랐어? "

" 멋일어 보일라 그랬는데. "

예인은 선배가 그렇게 길게 말하는 것도, 시종 웃음을 흘리면서 농담처럼 떠드는 것도, 누군가의 앞에서 허리를 구부정하니 흔들면서 눈높이를 맞추려고 애쓰는 것도 처음 보았다. 그때, 그녀는 신발 같은 거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키높이구두나 운동화, 힐이나 샌들 뭐 그런게 아니었다. 그냥...뭐였지. 암튼 굽이 있어보이진 않았다. 유난히 하체가 짧아 보였으니까. 키가 큰 선배와 같이 있어서 더 그래 보였을 텐데, 그녀는 고개를 약간 숙이거나 시선을 아래로 까는 버릇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선배가 한쪽 어깨를 기울이며 걷고 있는데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보는 사람은 불편하다. 저렇게 키 차이 나는 커플..

그 때도, 그 이후에도 또 지금도 선배는 변함없이 그녀를 가드하듯 몸을 기울인 채 옆에서 걷곤 한다. 마치 그녀의 호위기사라도 된 듯. 왜...선배는 그 자신이 그렇게 아름다운 직모를 가지고 있으면서 머리를 길러 찰랑거리게 하지 않는 걸까. 넓은 어깨 만큼 풍부한 바스트와 쭉 뻗은 허리, 8등신의 몸매에서 월등히 높은 하체 비중을 가졌음에도 항상 루즈하게 걸치고 다니는 사파리, 점퍼, 롱셔츠 뭐 그런것들 때문에 제대로 드러나질 않곤 했다. 그녀를 신경쓰는지 신발은 늘 굽낮은 플랫슈즈 아니면 스니커즈, 어떨땐 슬리퍼를 끌고 다니기도 했다. 뭐...그런...

그렇게 멋있는 선배 옆에서 함께 걷고 있는 그녀는, 그녀도 옆사람이 자랑스러운 듯 흘낏 지나치는 사람들의 시선을 확인하곤 했다. 마주친 시선에서 부러움을 발견했을까? 얼른 시선을 비키는 그녀. 예인보다 그녀가 더 무안해하는 듯 표정이 긴장했다.

" 왜? "

" 응, 아니. "

" 뭐 불편해? 어디 들어갈까? "

" 아냐, 더운데. "

" 그러니까 시원한데 들어가면 되지. "

" 추워, 에어컨은. 저 위에 가서 떡볶이 먹을까... "

그녀는 시선을 멀리 두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가까이서 보니 한쪽 팔에 두꺼운 책 한 권을 끼고 있다. 표지의 제목이 잘 안 보이는 양장본의 홑껍데기 책. 중간에 책갈피가 끼어 있다. 그녀는 항상 촌스러운 고시생같은 분위기다. 그녀의 어떤 점이 좋은 걸까. 선배는.

예인은 이층에서 엘레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전망용인 값을 하느라 서울 시내를 한 눈에 내려다보게 해 준다. 탑층에서 내려 긴 복도를 지나 끝까지 갔다. 선배의 오피스텔은 중간 쯤에 있다. 골라도 된다구 했는데 번잡스럽게 엘레베이터 가까운 쪽을 선택했다. 왠지 그것도 이제는 나이 들어 산책하기 보다 한 곳에 자리잡아 앉아있기를 더 선호하는 그녀를 위해서인 것 같이 느껴졌다. 장엔터의 사무실이 있는 건물에 주거용 오피를 구입해 들어온 것도 그녀가 입사한다는 게 확정되었다는 것을 알고서였으니 충분히 그럴 것이다. 예인은 선배를 설득하기 위해 떠들었던 수많은 말들 중 무엇이 주효했는지를 또한 전혀 객관성없는 이유로써 알고 있다. 방송국보다 영화가 낫다, 월급감독보다 자기꺼만들면서도 더 많은 연수익을 보장하겠다. 홍보나 흥행 모든 것은 회사가 알아서 할 것이다. 작가 선택권도 주겠다 등등...예인은 소속 작가들을 나열하다가 결국 덧붙였다.

" 드라마작가하시다가 오신 분들도 많아요. 이윤정 작가 뿐 아니라 아직 신인이지만 이혜정 작가, 그리고 또... "

" 이혜정 작가가 왜? "

형식적으로 문답만 하고 있던 선배가 먼저 물어오는 순간이었다.

" 왜라뇨? 당연히 데뷰했으니 차기작을 내야죠. 드라마국에서 그 경력, 그 스펙으론 힘들어요. 나이도 있고. 이윤정 작가랑 팀 짜기로 했어요. 베테랑들은 대본 작업 혼자 안 하는 거 알쟎아요. 이혜정 작가도 혼자 작업해서 완성도 맞추기는 힘드니까. "

그리고 또 뭐라고 예인은 설명을 덧붙였었다. 이어서 감독대우의 세세한 프로모션까지.

" 들어갈께. "

" 정말 ! 선배, 그럼 계약하는 거에요!! "

예인은 계획대로 되는 것에 기뻐해야 할 것인데 꼭 그럴 수가 없었다. 이젠 이혜정 작가를 섭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냥 알바라니깐 ! 하고 황당해하는 이윤정에게 이런저런 이유를 만들어붙였다. 울 회사에 하청, 비정규직 이런 건 없다. 작가팀 소속으로 일단 이름 올려라. 뭐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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