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2012/02

7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2/02/25
    그녀의 일상
    외딴방
  2. 2012/02/25
    그녀의 일상
    외딴방
  3. 2012/02/25
    그녀의 일상
    외딴방
  4. 2012/02/24
    그녀의 일상
    외딴방
  5. 2012/02/23
    그녀의 일상
    외딴방
  6. 2012/02/16
    그녀의 일상
    외딴방
  7. 2012/02/14
    그녀의 일상
    외딴방

그녀의 일상

bar 는 작고 좁다랗다. 카운터 옆으로 내츄럴풍의 화장실이 있다는 것만이 유일한 장점이다. 이층엔 더 많은 테이블이 있다지만 예인은 올라가 본 적 없다. 올라가는 사람도 내려오는 사람도 본 적 없는 이층이 왠지 음흉해 보인다고 예인은 생각하며 땅값 비싼 동네에서 혼자 술 장사하기 힘들어. 야. 하면서 투정부리는 친구를 좋게 볼려고 애썼다.

" 우리가 친했나요? "

" 말 놓지. "

" 선배, 웃겨. 내가 먼저 말 놓으라고 해야 하는 거였는데? "

" 내 맘대로 놓아서 화나면 너도 놓으라구. 대학때 한두학번 차이가 뭐 대수라고. "

" 하긴 나이로 치면 내가 더 빠르지 않나? 선배, 생년월일이 어떻게 되지? "

" 사주 보니..."

예인은 어쨌든 서류를 검토하게 되는 사장 입장이었다. 당연 선배의 나이를 알고 있었다. 한살 연하였다. 황당하게시리...그럼 그녀하고는 어떻게 되는 거냐....예인은 연상연하커플이네. 하고 혼자 웃고 말았다. 어쩐지 선배가 맨날 잡혀있는 것 같더라니. 하면서. 질투와 시샘으로 스무살의 연정을 끌고 가기에 우리들의 사십대는 너무 무겁다. 결혼을 하지 않았는데도. 결혼하여 가정사에 지친 그녀가 열정을 잃고 있기 때문일까. 여전히 싱글이 선배도, 예인도 새삼 연애를 하기엔 뭔가 홀가분하지 않은 것이다. 왜...

" 유 선생님, 시나리오 작업하시는 거 귀찮아하셔. "

선배는 뜽금없이 말한다. 아니, 아까 하다 만 얘기인가 보다.

" 그래? "

예인은 더 해 보라는 듯 가볍게 받으면서 병맥주를 들고 한 모금 마셨다. 병도 작은데 따라 먹긴 좀 우습구만. 우리 선배, 갈수록 멋대가리 없어지는 구나. 하는 생각을 예인은 떠올리고 있었다.

" 혜정...이 작가한테 소설 넘기시면서 작업해달라고 하셨어. "

" 그래? 언제부터? 촬영 시작한지 얼마 안 되었쟎아. 대본 다 된 거 저번에 확인했는데? "

" 반년 전부터. "

예인은 어이가 없다. 이런 걸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고 하는 거다.

" 그럼 울회사랑 계약하기 전부터 작업하고 있었다는 거 아냐? 왜 말 안했어. 누가 유 선생님 각본 아니면 안 찍을까봐? 유선생님 그렇게 인지도 없어. 특히 영화판에선. 아님 조금이라도 작가료 더 받을라구? 이작가님, 유선생님하구 그정도로 세밀한 각본 짜긴 그림이 좀 안 나오는데... "

선배는 맥주잔을 안 비운다. 심각한 상황인가, 지금이...예인은 주

 

 

선배가 작가들을 싫어한다는 걸 예인은 처음 알았다. 그럼 여지껏 드라마는 어떻게 찍었나...

" 유선생님, 혜정이 고등학교때 선생님이야. 담임도 했던...국어선생. "

" 그래요? 대단한 인연이네? 고교시절 선생님이랑 지금까지? "

" 유선생님이 문단 데뷔해서 알게 된거야. 것도 한참 뒤에. "

" 그렇구나. 근데 왜 선배는 불만스러워 보이지? "

그렇다. 불만스러워보인다. 선배는 유현경 선생의 소설을 영화화한다는 것에 처음부터 반대였다. 작품에 대해 실컷 토론 다 해놓고 막상 영화화한다니깐.

" 소설을 어떻게 영화로 만들어. "

" 무슨 소리야. 선배. 당근 각본 새로 짜지. 편집 감독도 붙고. 지금껏 소설..."

" 유선생, 그딴 거 안 해. "

" 선배? "

예인은 감독이 작가들 인맥 많다는 것에 놀라지 않았다. 선배가 누군가를 그토록 싫어한다는 것이 놀라웠다.

" 왜 그래? "

선배는 대답하지 않았다.

왜...그 여자를 싫어할까. 이혜정의 고등학교때 선생이라서? 왜 그래서?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그녀의 일상

하나를 얻기 위해 다른 것도 딸려오게 하는 일은 흔하디 흔하다. 오죽하며 끼워팔기로 내는 순익이 본품의 그것보다 더 많다는 말이 있을까. 정말인지는 모르겠으나 예인은 그래서 딸려온 원두커피 박스 안의 비스켓을 튿어 금장 접시에 담아 내어놓는 것에 거리낌이 없어졌다. 손님들은 대접받는 다는 기분을 더욱 한껏 느끼며 잘 차려입은 양장 위로 과자가루가 떨어지는 것에도 아랑곳 않고 비싸 보이는 비스켓 하나를 꼭 집어들곤 하였다. 그리고 어지간해도 협상이 인연끊을 만큼의 결렬로 끝나는 일도 없게 되었다. 회사 입장으로선...하면서 예인을 향해 호감어린 미소를 지어보이는 영업팀장들은 꼭 다음 약속을 남기곤 했다. 그래 그러니까...

예인은 감독을 영입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어도 이혜정 작가 자체로 예인엔터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하긴 그런 타산이 다 무엇일까. 오직 냉정한 비즈니스로 이 감독을 영입한 것도, 아니 기획사 자체를 차려낸 것도 아니었으니 세세한 자기합리화까진 필요 없을 것이다. 결국 인생은 제가 원하는 대로 틀어가게 되는 법이다. 그녀가...

본 건물은 금연건물입니다. 라는 표지가 입구와 계단 층마다 붙어있었다. 그렇다고 주로 촬영현장으로 쓰이는 스튜디오들 안에서 금연을 지키게 하기는 어렵다. 카메라에 냄새가 담기지는 않으니...자고로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담배를 피기 마련이다. 오죽하면 스모킹이라는 영화제목까지 나왔겠는가. 그렇다 해도 예인은 하얀 빵모자와 돗트프린트의 쉬폰스카프가 어울리는 그녀가 담배를 피우는 모습은 잘 연상이 되지 않았다. 저기, 복도의 끝에 화재대비용으로 설치된 발코니에 한쪽 어깨가 보이는 것이 분명 그녀일 것이라고 확신을 해도 말이다. 그녀를 지키듯 발코니로 나가는 문 한 가운데 서서 역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은 선배이다. 그녀의 어깨 높이에 머리가 있는 것을 보니 발코니 바닥에 쭈구리고 앉아있는 것이 틀림없다. 오피스텔 안에도 작지만 베란다가 있는데. 예인은 왜 그들이 굳이 저기 나와 있는 지를 모르겠어서 잠시 멈춰 서 있었다. 복도의 반대쪽으로 갈까. 아님 주거용 오피만 있는 탑층에 제가 올 일이 없는데 마주치면 난처하니 얼른 도로 내려갈까....하지만 발코니에 나와 앉은 그들은 뒤를 돌아보거나 금방 나올 것 같지 않다. 그녀가 의자에 앉아 있는 것 같으니, 그건 일부러 집 안에서 들고 나왔다는 것일테니...

예인은 항상 그녀를 볼 때마다 뭔가 속이 걸린 것처럼 느껴졌다. 낯빛이 비교적 희거나 화색이 돌때도 그녀는 표정이 가볍지 않았다. 이십대의 그 거리에서도 그늘없이 쨍한 여름태양 아래서도 그녀는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기거나 고민을 계속하고 있는 듯 했다. 그런데 사십대의 지금도 여전히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를 안고 있는 것처럼 웃어도 다 웃지 않은 채 입꼬리를 내리고있는 것이다. 그리고 담배도 끊지 않은 것이다. 이십여년을 계속한 흡연으로 안색은 늘 산화아연의 파우더를 칠한 듯 창백하다. 담배 끄트머리에서 고개를 내민 손톱, 반이 잘려있는 것을 본 적도 있다. 잘못해서 그리 된 것이 아니라 부식하듯 떨어져나가고 있는 손톱, 얇고 하얀 핏기라곤 찾을 수 없는. 그 얼굴, 귓볼, 목덜미 어디  한 곳에서도 불그레한 생기라고 찾아볼 수 없었다. 헤어용 오일을 사용한 듯 차분히 가라앉은 머리카락조차 윤기없이 바삭해 보였다. 그녀는 전반적으로 비타민이 부족하다. 혹은 영양결핍이다. 푸석해 보이는 피부. 그렇게나 건조해 보이는 입술. 예인은 그녀의 입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이감독의 시선을 되짚어 따라가 보기도 했다. 그 눈, 고정된 시선의 강한 눈빛. 그 속에 담겨있는 게 무얼까. 욕망?  글쎄.

이십년 전보다 훨씬 불건강해보이는 애인을 바라보는 눈길 속에 담긴 것이 연민인지 애틋함인지, 조금은 변질된 분노나 고통어린 애증인지 알 수 없다. 따로이 가정을 갖고 있는 그녀를 소위 직장을 매개로 하여 다시 만나고 있으면서 불붙을 지도 모르는 애욕을 경계하기에 선배의 눈빛엔 너무나 열정이 없다. 선배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예인은 선배가 피아노를 칠 때도, 노래를 할 때도 그리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두문불출하고 있거나 작품을 다시 해석하면서 연인에 대한 감정을 새로 돋는 신록처럼 화면 가득 펼쳐 보일 때도 항상 열정을 갖고 있었다.  오랫동안 찾던, 그리하여 갈구하던 애인을 다시 만났으면 상황과 조건이 어떻든 기뻐하거나 적어도 생기가 돌아야 하는 거 아닐까. 예인은 선배가 날이 갈수록 처지고 또 느려지고 있는 것엔 그녀가 원인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지금, 발코니에서 나와 복도로 들어오는 그녀의 발걸음은 어찌나 느리고 기운이 없는지. 불현듯 그녀가 지체장애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힘없는 시선, 시계에 들어오는 사람이 아는 얼굴이라는 것을 나중에 인식하는 듯 표정이 느리다. 그녀의 얼굴을 보다가 그제야 함께 시선을 드는 선배, 똑같이 힘아리 하나 없는 얼굴에 활기없는 몸짓, 저게 감독의 얼굴인가? 선배의 사랑은 선배에게 독이 아닌가.

그런 문장을 만들어놓고 흠칫 하고 있는 예인에게 그녀가 손짓을 한다.

" 여기 오신 거죠? 저 가는 참인데, 감독님도 잡아 줘요. 배웅나온다 해서 말리는 중이거든요. "

" 이 작가님, 왜 벌써 가요. 아직 한 낮인데. 애들 올 때 안 되었쟎아요? "

" 금요일이라 장 봐야 해요. 나중에 애들만 두고 나갔다 오기 뭐 해서. 감독님, 쓸데없이 따라온다해서 떼는 중이에요. 요즘은 동네마트도 다 배달해 주거든요. 우리가 뭐 자취하는 대학동기들도 아니궁. "

" 아, 그거 저번에 대본에서 본 거 같은데. 이번 작품 하시는 유선생님이랑 같이 작업하세요? 대본 바뀐대서 유선생님 댁에 가신 줄 알았더니. "

" 예인이 너, 나 만나러 온거야? 그럼 좀 안에서 기다리구. 밑에까지만 내려갔다 올테니. "

그녀를 대신해 말을 친 선배는 그껀은 나중에. 라고 흘리며 그녀와 함께 엘레베이터를 타러 간다.

" 어, 아냐. 그럼 같이 내려가서 커피숖 가지 뭐. 그냥 딴 생각하다가 올라와버려서 짐 전화하려던 참이었어. "

그녀는 연신 한 쪽 손을 내 저으며 따라오지 말라 한다. 커피숖 가라구. 저는 엘리베이터 더 타구 내려가서 지하철 연결통로로 나갈 꺼라구.

" 작가님은 왜 차 안 갖구 다니세요? "

" 글쎄요. 워낙 잡념이 많아서랄까..."

얼버무리듯 말하는 그녀. 운전하면서 신경 곤두세우는게 싫다고. 공주님 체질이라 기사대동하지 않으면 자가용 못 탄다고 농담하면서 떠난다. 아쉬운 듯 그녀를 보내는 선배. 하지만 표정은 왠지 더 어둡다. 다른 걱정이 있는듯.

" 커피 안 마셔? "

예인은 후발 브랜드임에도 불구하고 연일 좌석을 메우고 있는 고급 커피전문점의 메뉴판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 계속 마셔서. 너 괜찮으면 맥주 마실래? "

" 웬일이야? 선배가 나한테? 맨날 문전박대하더니. "

벌써 몸을 일으키며 예인은 자리를 옮길 준비를 한다.

" 여기 호프집은 분위기 쫌 그런데. 선배, 그냥 바로 가자. 내 친구 하는 데 가까이 있거든. 근데 배도 고프고..."

그러고 보니. 하면서 선배도 맞장구를 친다.

" 계속 커피하고 담배만 해서. 요기 될 만 한거하구...병맥주 먹자. "

예인은 이게 선배의 대산가 싶어 고개를 들고 마주 바라보았다.

" 왜 그러니? "

" 선배, 좀 이상하네. "

" 뭐가? "

" 날 너무 가깝게 대하네. "

" 좋다는 거야? 싫다는 거야?  대표 대접해달라구? "

" 학교 때부터 쫓아다녔는데 그렇게 곁을 안 주더니, 요즘 왜 이래. 늙었나? "

병맥주를 컵을 달래서 따라 마신다. 선배, 폼 안 나는데..

" 폼 잡고 사는 거 힘들어서 늙는다. 너라도 나 좀 쉬게 해 주라. "

예인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그예 묻고 있었다.

" 애인 만나서 즐거운 줄로 알고 있는데. 의외의 대사네? 오늘도 땡땡이 치구 오피에 쳐 박혀 놓구선. "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그녀의 일상

조감독을 붙잡고 뭐라고 하소연하는 이윤정을 뒤로 하고 예인은 맥이 풀린 채 촬영장을 나왔다.

하얗게 새로 지은 건물, 건물 중앙에 전망용 엘리베이터를로 만들고 로비를 이층까지 높였다. 외장에 씨블랙을 입히겠다는 예인의 말에 설계사무소장은 안경을 치켜올리며 쳐다보았었다. 수지타산 안 맞춰도 되면 맘대로 하라면서. 안그래도 주상복합으로 빼면서 타산이 안 맞고 있는데 부채비율이 위험수윈데 하고싶은 거 다 하려다가 아예 아무것도 못 하게 되는 수가 있다며 진심어린 충고를 하는 지라 예인은 더 주장할 수가 없었다.

모 아니면 도라구...예인은 블랙을 포기할테니 크리스탈로 바꿔달라고 해서 겨우 확보한 것이 지상 2층까지의 전면유리창이었다. 투명한 큐브 안에서 바라보는 세상의 풍경. 예인은 이층에 내려 거리를 바라보았다. 거칠 것없이 내려다보이는 사람들, 차들, 인도의 행상들...그 어디 쯤에 선배와 그녀가 걷고 있을 것 같았다.

훌쩍 큰 선배의 팔꿈치에 어깨를 스치며 종종 거릴 것 같은 그녀. 무릅을 덮는 폭넓은 치마를 입고 앵글부츠로 한껏 키를 늘이곤 갈색머리칼을 삐죽이 내민 채 회색 베레모를 쓰고 물방울무늬의 쉬폰 목도리를 여왕의 러플칼라처럼 칭칭 감고 나타나곤 했었다. 예인엔터빌딩의 준공식 이후 바로 입주한 선배의 오피스텔을 찾아서. 12월 초겨울 한파가 기승을 부렸던 어느땐가 예인은 이층의 지금 이자리에서 거리 쪽이 아닌 로비 안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익숙한 그림자의 선배가 코데즈컴바인의 야상을 반쯤 어깨에서 흘러내린 채 그녀의 팔꿈치를 부축하느라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 그러게, 굽 높은 거 신지 마라니깐. "

" 그럼 마중 나오지 마 ! 너랑 길 가는 거 힘들단 말야. "

" 누가 쳐다 본다구 그래? "

" 힘들다구...쪽 팔린게 아니라... "

엘레베이터를 타도 될텐데 그들은 굳이 이층으로 올라오는 에스컬레이터에 몸을 실었다. 그녀가 한 계단, 아니 두 계단 쯤 올라갔나보다. 180을 육박하는 선배와 눈높이가 비슷해졌다. 그녀가 웃고 있었다. 해사하게.

" 내가 더 올라가면 너두 목 아플 껄. "

" 앞이나 봐..."

선배는 미소 띤 얼굴로 마주 보고 있었다. 생생한 표정으로.

예인을 알아보지 못 한채 선배는 시종일관 그녀의 옆구리를 낀 채, 발끝이나 손끝 아니면 그녀의 이마 쪽을 쳐다보면서 이층에서 엘레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오피스텔이 있는 탑층까지. 엘레베이터 안에서도 그녀를 위해 한쪽 팔을 뻗어 가드를 해 주는게 보였다.

예인은 선배의 그런 모습을 멀리서 보는 것에 익숙했다. 대학의 강의실에서보다 주로 캠퍼스의 어느 나무 그늘이나 벤치 근처, 혹은 정문을 빠져나가 직선거리 100미터면 도달하는 타 대학교로 가는 은행나무 많은 인도의 어디쯤에서. 선배는 그녀가 다니는 학교로 출퇴근을 했다. 그럴꺼면 뭐하러 이쪽 학교에 입학했담. 예인은 선배를 몰라도 되었을 것이라며 그녀의 대학에 음대가 있는지 없는지까지 확인한 적이 있었다. 그녀가 무슨 학과인지 그 학과가 자신과 선배가 다니는 우리 학교에 있는지 없는지도 확인하려다가 그만 두었다. 선배는 예인의 존재 조차 모르고 있는데. 선배는 다른 사람을 사귀고 싶은 생각은 아예 없는 듯 했다. 학과의 동기들이나 동문들과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시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와 함께 거리의 포장마차에서 나오는 것을 발견하거나 창문에 물이 흐르도록 장치해 놓은 호프집 안쪽에서 마주 앉은 두 사람이 눈에 띄는 것을 예인은 어쩌지 못했다. 선배는 멋있는 사람이었고 피아노를 칠 때도 치지 않을 때도 음악적인 분위기가 감돌았으며 그냥 옆에 서 있기만 해도 우쭐해 질 것 같은, 그런 사람이었다. 선배의 곁에서 지나가는 길이 아닌 동행으로 함께 걷거나 말 나누거나 손을 잡고 있는 것은 물론. 언제나 그 녀 뿐이었다. 어느 여름엔 짧은 고수머리를 하고 목덜미가 훤히 드러나는 드레시한 셔츠에 발목이 넓은 카고 팬츠를 입어 더욱 작아보이는 그녀와 마주쳤었다. 혼자 서 있는 그녀의 가까이로 다가가면서 예인은 처음으로 근거리에서 보는 그녀의 피부가 어린애처럼 말갛고 투명하다는 걸 알았다. 한창 화장에 열을 올리던 대학 신입생들 속의  예인으로선 뭐 저런 촌스런...하는 말을 속으로 뇌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대학생이란 걸 알고 있지 않았다면 중학생으로 오해할 수 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대낮의 캠퍼스 앞 거리를 우왕좌왕하는 중고생들은 모다 날라리일 것인데...

" 혜정아 ! "

뒤에서 휙 앞으로 내달리듯 성큼성큼 걸어가는 뒷모습은 역시 선배였다. 그녀는 한 손을 들어 보였다. 든 채로 뒷머리를 슬쩍 쓰다듬으며. 쑥스러운듯 미소를 흘렸다.

" 머리 잘랐어? 왜 이케 짧게 ! 시원하긴 하겠네? "

" 어려 보여서 완전 망했어. "

" 그럴 줄 몰랐어? "

" 멋일어 보일라 그랬는데. "

예인은 선배가 그렇게 길게 말하는 것도, 시종 웃음을 흘리면서 농담처럼 떠드는 것도, 누군가의 앞에서 허리를 구부정하니 흔들면서 눈높이를 맞추려고 애쓰는 것도 처음 보았다. 그때, 그녀는 신발 같은 거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키높이구두나 운동화, 힐이나 샌들 뭐 그런게 아니었다. 그냥...뭐였지. 암튼 굽이 있어보이진 않았다. 유난히 하체가 짧아 보였으니까. 키가 큰 선배와 같이 있어서 더 그래 보였을 텐데, 그녀는 고개를 약간 숙이거나 시선을 아래로 까는 버릇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선배가 한쪽 어깨를 기울이며 걷고 있는데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보는 사람은 불편하다. 저렇게 키 차이 나는 커플..

그 때도, 그 이후에도 또 지금도 선배는 변함없이 그녀를 가드하듯 몸을 기울인 채 옆에서 걷곤 한다. 마치 그녀의 호위기사라도 된 듯. 왜...선배는 그 자신이 그렇게 아름다운 직모를 가지고 있으면서 머리를 길러 찰랑거리게 하지 않는 걸까. 넓은 어깨 만큼 풍부한 바스트와 쭉 뻗은 허리, 8등신의 몸매에서 월등히 높은 하체 비중을 가졌음에도 항상 루즈하게 걸치고 다니는 사파리, 점퍼, 롱셔츠 뭐 그런것들 때문에 제대로 드러나질 않곤 했다. 그녀를 신경쓰는지 신발은 늘 굽낮은 플랫슈즈 아니면 스니커즈, 어떨땐 슬리퍼를 끌고 다니기도 했다. 뭐...그런...

그렇게 멋있는 선배 옆에서 함께 걷고 있는 그녀는, 그녀도 옆사람이 자랑스러운 듯 흘낏 지나치는 사람들의 시선을 확인하곤 했다. 마주친 시선에서 부러움을 발견했을까? 얼른 시선을 비키는 그녀. 예인보다 그녀가 더 무안해하는 듯 표정이 긴장했다.

" 왜? "

" 응, 아니. "

" 뭐 불편해? 어디 들어갈까? "

" 아냐, 더운데. "

" 그러니까 시원한데 들어가면 되지. "

" 추워, 에어컨은. 저 위에 가서 떡볶이 먹을까... "

그녀는 시선을 멀리 두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가까이서 보니 한쪽 팔에 두꺼운 책 한 권을 끼고 있다. 표지의 제목이 잘 안 보이는 양장본의 홑껍데기 책. 중간에 책갈피가 끼어 있다. 그녀는 항상 촌스러운 고시생같은 분위기다. 그녀의 어떤 점이 좋은 걸까. 선배는.

예인은 이층에서 엘레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전망용인 값을 하느라 서울 시내를 한 눈에 내려다보게 해 준다. 탑층에서 내려 긴 복도를 지나 끝까지 갔다. 선배의 오피스텔은 중간 쯤에 있다. 골라도 된다구 했는데 번잡스럽게 엘레베이터 가까운 쪽을 선택했다. 왠지 그것도 이제는 나이 들어 산책하기 보다 한 곳에 자리잡아 앉아있기를 더 선호하는 그녀를 위해서인 것 같이 느껴졌다. 장엔터의 사무실이 있는 건물에 주거용 오피를 구입해 들어온 것도 그녀가 입사한다는 게 확정되었다는 것을 알고서였으니 충분히 그럴 것이다. 예인은 선배를 설득하기 위해 떠들었던 수많은 말들 중 무엇이 주효했는지를 또한 전혀 객관성없는 이유로써 알고 있다. 방송국보다 영화가 낫다, 월급감독보다 자기꺼만들면서도 더 많은 연수익을 보장하겠다. 홍보나 흥행 모든 것은 회사가 알아서 할 것이다. 작가 선택권도 주겠다 등등...예인은 소속 작가들을 나열하다가 결국 덧붙였다.

" 드라마작가하시다가 오신 분들도 많아요. 이윤정 작가 뿐 아니라 아직 신인이지만 이혜정 작가, 그리고 또... "

" 이혜정 작가가 왜? "

형식적으로 문답만 하고 있던 선배가 먼저 물어오는 순간이었다.

" 왜라뇨? 당연히 데뷰했으니 차기작을 내야죠. 드라마국에서 그 경력, 그 스펙으론 힘들어요. 나이도 있고. 이윤정 작가랑 팀 짜기로 했어요. 베테랑들은 대본 작업 혼자 안 하는 거 알쟎아요. 이혜정 작가도 혼자 작업해서 완성도 맞추기는 힘드니까. "

그리고 또 뭐라고 예인은 설명을 덧붙였었다. 이어서 감독대우의 세세한 프로모션까지.

" 들어갈께. "

" 정말 ! 선배, 그럼 계약하는 거에요!! "

예인은 계획대로 되는 것에 기뻐해야 할 것인데 꼭 그럴 수가 없었다. 이젠 이혜정 작가를 섭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냥 알바라니깐 ! 하고 황당해하는 이윤정에게 이런저런 이유를 만들어붙였다. 울 회사에 하청, 비정규직 이런 건 없다. 작가팀 소속으로 일단 이름 올려라. 뭐 그런...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그녀의 일상

염색을 했지만 금방 자라는지 그녀의 머리카락은 이미 희어지고 있는 뿌리부분을 내보였다. 귀밑을 훔쳐보다가 문득 야릇한 생각에 예인은 혼자 얼굴이 붉어지는 듯 했다. 유난히 길고 가는 목이 쇄골의 끝을 보인 채 라운딩프릴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 속 어딘가 흔적이 남아있지 않을까.

 

" 오늘 촬영 왜 접는 거야? 조감독은 일정변동 없을 꺼라구 했는데. "

이윤정은 촬영장으로 들어가며 묻고 있다.

" 조감독에게 물을 껄, 왜 나한테 물어? "

로비의 엘리베이터 앞에서도 계단 쪽을 살펴도 보이지 않았던 선배와 그녀의 뒷모습을 생각하면서 예인은 흘려말하고 있었다.

" 아까 너두 봤쟎아. 갑자기 혼자 결정한 것 같지 않았어? 마치 우리가 뭘 잘못 한 것처럼...누가 어쨌다구 갤 그렇게 챙겨 달아나냐구 ! "

예인은 발걸음을 멈추며 이윤정을 돌아봤다.

" 왜 과장하구 그래? 스케쥴 변동이 있으니까 그런거지, 아무리 감독님이 공사구분 않구 그랬을라구. 현장에서 쓸데없는 소리 좀 하지 마. "

" 어머머...너 화내니? 감독님 챙기느냐구우? "

말끝에 콧소리를 넣으며 한 발 떨어지는 이윤정은 어쨌든 예인의 눈치를 살피고는 보겠다는 품이다.

 

" 오늘 중지났어요. 오후 씬은 대본이 바뀔 것 같다구. "

조감독은 멀리서 예인을 보자 마자 달려와서 일러준다.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의 예인은 그래도 조금 놀란 표정을 지어준다.

" 대본이 왜? 촬영 중에 바뀌는 게 어딨어. 작업일정 다 잡혀있는데, 우리 하루 제작비가 얼마씩인지 몰라 그래? "

" 감독님은 어차피 제작사 요청으로 인터뷰 일정 빼놓은 거 있으니까 그거로 대치하라던데요. 오늘이나 내일이나 별 차이 없을꺼라구. "

예인은 뒤미처 온 이윤정을 슬쩍 돌아보았다.

" 그거야 뭐 베테랑 작가님이 알아서 잘 하시겠지...이윤정 작가님. 인터뷰 준비 해 오셨죠? "

" 어머, 진짜 오늘 하라구? 아, 뭐 물론 하면 되지, 준비랄께 뭐 있나..."

" 오늘 배우들, 주연이랑 준주연이랑 다 있는 날이니까 어지간한 내용은 다 수집할 수 있을꺼에요. 말씀 주시면 제가 코디랑 스탭들도 주선할께요. 야외촬영할 때 하는 것보다 여기서 인터뷰하시는 게 훨 편하실꺼구요. "

" 친절한 조감독님, 근데 정작 중요한 감독님 인터뷰는 어케 하나요. 현장 안 들어오신 것 같은데..."

" 대본 땜에 작가님 만나러 가셨어요. 안 들어오실텐데. 글구..."

조감독은 이윤정과 예인을 번갈아 보며 실쭉 웃는다.

" 감독님, 인터뷰 안 하시는 거 알쟎아요. 지난 십년 동안 조그만 사진 하나 나가는 거도 허락 안 하셨어요. "

" 어머, 우리끼리 하는 건데 뭘 그래. 자료수집용인 거 알쟎아. 사진 안 찍어두 돼. 그냥 미팅 한 번이면 된다구! "

" 금방... "

조감독은 예인을 쳐다보며 말했다.

" 감독님이랑 같이 식사하고 오신 거 아네요? "

" 그게 무슨 미팅이야, 인터뷰 미팅, 단독 대담해야 한다구 ! "

마지못한 듯 이윤정을 쳐다보며 조감독, 웃지 않으려 애쓰듯 묘한 표정으로 말한다.

" 이혜정작가님이랑 하고 있다는데요...이윤정작가님이랑은 저보구 하라구..."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그녀의 일상

예인은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할 수 없지. 머릿속에서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라는 문장이 떠 올랐다. 눈을 부릅뜨고 현실을 직시하구...

그녀는 선배의 애인이다.

두루뭉실하니 산발한 머리가 보였다. 가까이 갈수록 갈색으로 보인다. 염색했나. 얼굴을 들고 쳐다본다. 빛에 반사되어서일까 은빛으로 희끗희끗하다. 뒤로 손을 돌려 머리를 동여묶으며 일어서는 여자. 키도 작네.

누구? 하는 얼굴로 인사를 할까 말까하는 표정으로 엉거주춤. 소심한 에이형이군.

시선을 맞추는 것에 응하며 눈인사를 한다. 먼저 입을 떼지는 않을 품새.

" 안녕하세요? 작가님이시죠? "

" 아, 네...안녕하세요. 별루 작가는..."

수줍게 웃으며 슬쩍 몸을 돌린다. 자긴 별로 잘난 사람 아니라는 듯?

" 취재중이시라구요? "

" 네에...저기 같이 하는 분 있는데, 이 윤정 작가님이라구...그 분이 다음 작품 기획하시는 거구요. 전 참고로요. "

" 같은 팀 아니세요? "

" 아, 그렇긴 해요. 근데 전 아직 보조 수준이라. "

" 데뷔하셨쟎아요. "

" 네? "

그녀는 깜짝 놀라며 쳐다본다. 자기 작품을 봤다는 거에?

" 작년 연말에 청소년 프로그램 하신 걸로 아는데요? 제목이....뭔지 모르겠네. 직접 본건 아니라서. "

" 아, 네에. 뭐...그냥... "

스스로 말해 줄 생각은 없는 듯. 완전...내성적인 성격이구만.

예인은 이 여자가 선배의...하는 문장으로 머릿속이 꽉 찬 채, 자신의 표정이나 말투를 인식하지 못 하고 있었다. 그러나 뒤에서 걸어오고 있는 선배의 발소리는 들을 수 있었다.

" 어, 선배. 작가님, 소개 좀 시켜 줘. "

그녀의 표정이 변했을까? 뒤통수가 쭈볏쭈볏...그녀의 얼굴이 선배의 눈 속에 담겼다.

" 혜정아, 쉬는 시간이야. 밥 먹게. "

" 응...아니. 저기.. "

하면서 예인과 이감독을 번갈아보는 여자. 예인은 소개시켜주기를 기다리는 청부업자같다.

" 선배, 작가님이랑 친하다며? 나두 같이 가. 나, 작가님들하구두 친해야 한다구. "

" 알쟎아. 이혜정작가님, 그리구 여긴 예인 엔터의 장예인사장님. 밥은 저기 오시는 이윤정작가님이랑 해. "

" 왜? 다 같이 가지. "

그녀의 손을 잡고 앞장서서 가는 이감독의 뒤에서 예인은 차마 졸졸 따라갈 수가 없어 명랑하게 말했다.

" 응? 뭐야, 장 대표? 점심 먹으러 가는거야? "

해죽해죽 웃으며 다가와 팔짱을 끼는 이윤정, 예인은 이작가와 대학동창이라는게 별루다. 선배와 함께 다닌 대학이 아닌, 나중에 편입한 예전이었기에.

 

테라스가 넓은 이태리 레스토랑이었다. 창가로 자리잡았다. 이감독이 그녀를 에스코트한다. 의자를 빼주며. 돌아와서 마주 앉는다. 뒤따라 들어오고 있는 예인과 이윤정작가를 신경쓰고 있는 건 물론 그녀이다. 선배작가를 쳐다보며 합석을 권유해도 될지, 그냥 눈인사만 할지 방황하고 있다. 똑바로 다가오고 있는 예인의 걸음걸이에 표정이 정리되는듯.

" 이작가님, 이쪽으로 오세요. 저기 대표님랑. "

"  감독님. 우리 같이 앉아도 되죠? "

" 선배, 이런데 좋아했어? 언제는 맨날 국밥만 먹더니. "

예인이 옆에 와 앉자 이감독은 할 수 없이 건너편으로 앉는 이윤정감독에게 어서 오세요. 한다.

" 뭐 시켜? 파스타? 스파게티? 선배, 느끼한 거 잘 못 먹지 않아? "

그녀가 옆으로 메뉴판을 밀어준다. 

" 비프스테이크도 있어요. "

" 아냐, 나는 점심 간단한게 좋아. 파스타 어때? 감독님은 뭐 좋아하세요? "

" 혜정아, 뭐 먹을꺼야? "

" 응..."

이윤정은 슬쩍 메뉴판을 다시 밀어준다. 슬쩍 사시를 뜨며.

" 아뇨, 이윤정 작가님, 보세요. 전 맨날 먹는거 있어요. "

" 이혜정 작가님이 맨날 먹는게 뭔데요? 나두 그거 먹을까 봐. "

" 에, 그냥 파스탄데요. "

그녀는 이윤정 작가가 까르보나리를 시키자 오늘은 저도 그걸로 하겠단다.

" 왜? "

" 이윤정작가님 따라 하고 싶으니까? "

웃으며 애교떨 듯 선배작가를 쳐다보는 그녀. 점점 수선을 피우며 말이 많아지는 이윤정 옆에서 그녀는 희미해진다. 그녀를 따라 까르보나리를 시키는 선배, 그녀처럼 해물을 추가한다. 예인은 똑같이? 아님 이윤정처럼 그냥 크림으루?

" 전 비프 줘요. 많~이. 느끼하신분들 한 점씩 뺏어먹어야 하니깐. "

화기애애하게 웃음꽃이 피는 점심자리인데 선배는 별로 웃지 않는다. 불청객이 싫다는 듯.

그녀는 조금씩 천천히 먹는다. 느끼함을 덜려는 지 중간 중간 해물을 먹으며. 선배가 조개에서 살만 꺼내어 그녀의 접시 위에 놓아준다. 짐짓, 못 본체 했지만 이윤정 작가는 너스레를 떨며 어머! 애지중지한다더니 정말이네...

그녀는 불편한 표정으로 애써 웃음을 지어보인다. 선배의 눈길이 그제야 이윤정에게고 가 꽂힌다.

" 우린 식사 오래 하는데, 다 먹었으면 먼저 가지? "

" 커피 마실꺼니깐 괜찮아. 누가 뭐랬다 그래. 천천히 드셔들. "

이윤정은 혜정을 돌아보며 감독의 눈치를 보듯 흘끗거리며 여전히 너스레 떨듯 떠들어댄다.

그녀는 식사를 다 하지 않고 밀어둔다.

" 빵이랑 같이 먹게 우리도 커피 시키자. "

선배는 말은 안 하지만 심기가 불편해 보인다. 예인은 애써 무시했다. 우린 같이 일하는 동료들이 함께 밥 먹고 있는 거라구...누가 누구랑 데이트하는데 끼어든게 아니구...

빵도 조금씩 먹는 그녀. 커피도 홀짝 거린다. 아...저거 성격인가. 예인은 궁싯궁싯 심술이 난다.

" 진짜 오래 드시네. 말씀도 별로 안 하시면서. "

예인은 시계를 쳐다보며 현장 들어갈 때 되지 않았냐구 걱정스레 이감독을 쳐다보았다.

그래. 하는 선배. 이윤정을 향해 그만 떠들고 일어서죠. 한다. 농담으로 받아야지한는 얼굴로 마주 보는 이윤정.

" 응, 그래. 오늘 또 촬영이 많은 편이죠? 오늘 내일쯤엔 인터뷰 들어갈까 했는데... " 표정이 일그러지며 감독을 바라본다. " 감독님, 인터뷰도..."

" 오늘 촬영 끝이에요. 배우들이랑 스탭들 시간 많으니깐 인터뷰 하세요. "

벌떡 일어나더 테이블을 한 바퀴 돌아 예인과 이윤정을 지나쳐 그녀의 뒤로 간다. 의자 빼 주러.

" 가자. "

" 응. 같이 가야지. "

" 촬영 끝이라니깐. 인터뷰하는데 방해하지 말구 퇴근해. "

" 왜에에? "

예인은 이윤정과 함께 식당을 나오며 저만치 앞서 걷는 이감독과 그 애인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 야, 장사장 !  저거 뭐니? 이감독이랑 재, 애인사이라더니 정말 그런거야?

" 언닌, 재...가 뭐야... "

" 어머, 재, 나한텐 까마득한 후배야. 겨우 작년에 데뷔해서 울 회사 들어온지 한 달 밖에 안 되었어. 내가 델구 다녀주는 거나 마찬가진데...근데 앤, 묻는 말엔 대답 안 하구? 이 감독 태도 봤지, 삐져서 계산도 안 하구 가는거. "

" 원래, 계산은 사장이 하는 거야. "

" 애 좀 봐? 넌 질투도 안 나? 너 이감독 쫓아다녔잖아. 아니 지금도 쫓아다니구 있지. 근데 이감독은 맨날 재만 챙긴다, 애... "

" 언니, 그만 해. 언니네 팀인데, 호칭이 그게 뭐야. 나이도 있는 사람을. "

이윤정은 갑자기 멈춰선다. 이미 저만치 가서 행인들 사이에서 뒷모습도 찾기 힘들어진 이감독 옆의 그녀를 가리키며.

" 너보다 나이 많지? 얼굴도 네가 훨씬 더 젊고 예쁘다. 키도 작고, 화장은 저게 뭐 하다 말았냐...볼꺼 없는데..."

예인을 곁눈질하는 표정으로 말하고 있는게 뭘까.

" 근데 너하고는 딴판으로 귀염성있지? 친절하구. 착하구. 예쁘구. "

" 언니...재...좋아했어? "

" 아이, 뭐, 사람 괜찮다구. 누가 이감독처럼..."

황급히 입을 다무는 이윤정. 잽싸게 예인을 훔쳐본다. 못 본 척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는 예인. 그들이 간 거리 속으로 시선을 둔 채 속으로 되뇌었다.

알 놈은 다 아는군. 그녀는 선배의 애인이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그녀의 일상

예인은 할 수 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선배의 시선끝에 있었고 그 시선이 움직이지 않고 있으니.

" 뭐야, 저거...산발을 해 가지군... "

예인은 말을 먼저 하고 동공에 들어온 영상을 머리로 옮겼다. 느리게. 생각하기를 하긴 싫었지만 의식 속에서 이미 언어로 형상화되었다.

' 얌전하게 생겼네...'

안 그럴 것 같았는데. 예인은 이 진 선배의 여친이 그저 수수하고 평범한 여자라는 것이 얼른 이해가 안 갔다. 선배처럼 루즈하거나 아님 대조적으로 화려한 미인이거나 뭐 적어도 몸매라도 잘 빠진...

' 작은 여자구나...이쁘장하니...'

예인은 대학시절 즈음에는 훨씬 더 젊고 예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안미모. 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촬영장의 한쪽, 밀어둔 테이블과 의자들 너머로 쌓아둔 카메라와 기자재들 사이에 그녀가 있었다. 무언가에 걸터앉은 듯, 한참 키가 작아 보인다. 배우들을 직접 본다는 것에 흥분했는지 뺨을 살짝 물들인채 가끔 무언가를 적기 위해 노트를 얹은 무릎 위로 고개를 숙였다. 다시 볼 때마다 맨 먼저 셋트 안을 보고 연기 중인 배우들이 보이지 않으면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면서 중간중간 지긋이 바라보았다. 저 스탭은 무얼 담당하는 사람일까? 하는 표정으로.

 

 " 취재를 하려면 인터뷰를 하지, 왜 저렇게 앉아만 있대? "

예인이 던지듯 묻자 조감독은 뭐? 누구? 하는 표정으로 멀뚱히 쳐다보더니 곧 알아먹었다는 듯이 이마를 편다.

" 나중에 하겠대요, 며칠은 그냥 보기만 하겠다고. "

" 며칠이나? 왜? "

" 글쎄요. 뭐, 탐색기같은 거겠죠. "

뭔 탐색을 그리 오래 하누? 했더니 이제 이틀째이니 내일은 안 할지도 모르지만. 하면서 조감독은 싱긋 웃는다.

" 누구랑 틀려서 느긋한 성격인가 보더라구요. "

예인은 댓거리할 생각 없다는 듯, 조감독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그녀의 일상

예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대학시절부터 이감독을 알고 있었다. 이감독은 몰랐지만.

의상학과를 때려치고 연극영화과에 입학하기 위해 중퇴를 결심했을 때, 미련이 없었던 것도 순전히 그가 졸업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때까지 그가, 같은 단대에서 부지런히 강의실을 중복시키고 매점이며 식당을 찾아다니고 피아노과의 연주회란 연주회는 모다 참석하며 얼굴 부딪히기를 시도하던 예인을 알아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지금처럼.

예인은 촬영장의 한 쪽 구석에 서서 노려보듯 이감독과 이감독의 시선을 쫒았다.

지금도 이감독은 시선을 멀리 두고 있다. 곁을 더우기나 뒤는 결코 돌아보지 않는 감독의 시선.

그는 왜 주변을 돌아보지 않을까.

이 감독 외에 누구나, 누구나 ! 알고 있었다.

예인이 그를 좋아한다는 것을. 그가 있는 모든 곳에 예인은 다가갔다. 그를 아는 많은 사람들이 예인을 동시에 알고 있었다. 그가 말 거는 사람들에게 예인도 인사를 했고 관계를 가졌으며 지속적인 우정을 과시했다. 하지만 이 감독은 예인에게 아는 체를 하지 않았다. 그는 늘 바빴다.

피아노과의 정기연주회에 불참하기 시작했고 학점을 이수하지 못 해 5년째 대학에 머물렀다. 학적부상으로만. 그는 항상 캠퍼스를 빠져나가 점심때가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으며 언젠가부터 인근의 거리에서도 술을 마시거나 까페를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발견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무엇을 쫓고 있는가?

그를 잃어버리고 예인은 학교를 떠났다. 의상학과에서 더 할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으므로.

대학로의 연극단을 쫓아다녔던 오년 동안 예인은 그의 소식을 접할 수 없었다. 이미 드라마의 엔딩크레딧에서  그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지만 예인은 연상시킬 수 없었다.

" 말도 안돼 !! "

 극단의 스탭이었던 옛날 대학동기한테서 정말 몰랐냐고 재차 질문받으면서도 예인은 믿을 수가 없었다.

" 어떻게 이 진 선배가 드라마 연출을 한단 말야? 전혀 관계없쟎아. 선배는 피아니스트라고 ! "

" 졸업연주회 간신히 통과했쟎아. 난 그 선배, 피아노 치는 거 한 번도 본 적 없어. 2학년 땐가 이후로는. "

동기는 잠깐 예인과 함께 들었던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의 피아노 & 락밴드의 공연을 떠 올렸다. 중간 이후 난장판이 되기 전까지 울려퍼졌던 선배의 피아노 독주. 거기서 뻑 간 이후 몇 년을 쫓아다녔던가.

" 선배가 감독이 되나니! "

예인은 운명적이라고 느꼈다. 같은 길을 걷고 있었다고 생각되었다. 당연히 다시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니...정확히는 이번에야말로 그에게 자신을 알려야 한다고 결심했다.

삼년이 지나지 않아 예인은 충무로에서 성공까지는 아니더라도 비교적 안정적으로 정착했다. 배우생활을 때려쳤지만 별로 미련 없었다. 원래 그렇게 소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인정할 수 있었다. 괜찮다. 중요한 건 감독을 영입할 수 있는 기획사를 차렸다는 것이다. 물론 예인의 아버지가 극장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에 크게 힘입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모두에게 다 좋은 일이었다. 아들들을 믿을 수 없었던 아버지에게 후계자 인정을 받은 것도, 비위 맞추기 힘든 아버지와 함께 집안을 다 내어맡기는 것에 큰 올케는 좀 서운해했지만 워낙 통크게 경제적 지원을 해 주는 시누이에게 어깃장을 놓을 수는 없는 일. 예인은 영화관을 소유한 프로덕션의 오너가 되었다.

왜? 당연히 드라마국에서 월급감독으로 찌들리고 있는 선배를 스카웃해 오기 위해서였다.

한참 걸렸다. 방송국에 진출해 있던 대학로 시절의 선배들에게 욕도 어지간히 먹었다. 뭐 어떠랴. 예인은 중요하지 않은 타인과의 관계가 망가지는 것엔 쉽게 대범해졌다. 처음 방송국 미팅룸에서 이감독을 만났을 때 한 시간 동안 쉬지 않고 떠들었다. 드라마 외주 제작을 협의하려던 국장도, 대외협상팀의 부장도 거의 대화를 나누지 못 했다. 기획부터 광고수주에 이르는 드라마제작의 전과정을 혼자 프리젠테이션 하는 예인을 이감독은 흥미롭다는 듯 주시했다. 그 후 작가와 공동작업을 주선하고 캐스팅, 오디션, 셋트제작, 협찬물 계약 등 모든 장면에서 예인은 적극 개입했고 수시로 감독과 의견을 조율했다. 방송국 드라마에선 최고의 자율성과 재량권을 보장해 주었다.

"그래도 부족하면 얘기해요. "

예인은 이감독과의 모든 대화의 끝에서 이렇게 말했다.

" 네. "

이감독이 그리고 나서 한마디만 더 하면 스카운제의를 할 참이었다.  방송국에선 한계가 있으니 충무로로 나오라고. 곧 그렇게 될 판이었다. 예인은 낙관하고 있었다. 촬영을 시작한 이번 드라마의 시청률이 어떻게 나오던 그걸 빌미로 이 감독을 빼낼 것이었다. 잘 나오면 후한 계약금을 걸고 보다 자유로운 작품활동을 권유하면서. 못 나오면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지 않아도 되는 매니악의 작품활동을 보장하겠다고 큰 소리치면서.

" 같은 대학이었구나. "

 하면서 이감독이 말을 낮췄을 때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언제부터 바래왔던 관계인가. 선후배 사이.

그런데 이게 뭐람 !

예인은 소리질렀다. 촬영 중인 셋트와 배우들과 모형인형처럼 움직이고 있는 스텝들, 그 모두를 한 눈에 넣고 있는 이 감독의 시선을 쳐다보면서 조용히 속으로, 이를 악 물었다. 여전히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지 않은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