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암리차르> 그나마 다행이다

암리차르로 가는 버스에서 결국 문제가 생긴다. 다람살라에서 암리차르로 가기 위해선 중간도시인 빠탄곳에서 버스를 갈아타야 하는데 버스를 갈아타기 위해 버스 지붕에 올려 둔 가방을 꺼내보니 친구의 배낭 어깨끈 부분이 예리한 칼로 반쯤 찢겨져 있고 허리벨트 부분이 전부 망가져 있다. 누군가가 중간에 버스 위로 올라 가 가방을 가져가려 한 모양인데 첨엔 다른 짐들 사이에 있으니 있는 힘껏 당겼을 테고 -허리벨트는 이때 망가진 게 아닌가 싶다. 다행히 허리벨트 부분은 버스 프레임에 묶여있었다- 그게 여의치 않자 어깨끈 부분을 잘라내려 한 모양이다. 여행 떠나기 전 간혹 가방이 통째로 없어지는 경우가 있으니 트렁크에 넣든지 지붕 위에 올리든지 할 때는 버스 정차 시간에 꼭 가방의 이상 유무를 살피라고 했던 말이 생각난다. 거의 10개월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 잊고 있었는데 누가 인도 아니랄까봐 다른 나라에서 일어나지 않던 일이 일어난다. 친구의 가방에는 카메라가 무려 세대나 들어 있었는데-그나마 한대는 들고 있었다는^^- 아마 가져갔다면 누군가는 팔자를 고쳤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상한 건 그 옆에 내 배낭도 있었는데 그건 건드리지도 않았다는 거다. 도둑들한테는 배낭속이 들여다보이는 모양이다^^

 

거의 40도가 남는 더위에 에어콘도 없는 만원버스를 타고 게다가 난도질 된 가방을 들고 암리차르에 들어서니 녹초가 된다. 황금사원에는 여행자들을 위한 무료 숙소와 무료 급식을 하는 곳이 있다. 사실 여행자들을 위한 시설이라기보다 순례객들을 위한 시설인데 이 한켠에 여행자를 위한 시설도 함께 마련해 둔 것이다. 하지만 무료 시설이라는 게 보지 않아도 뻔하지 싶어 그냥 일반 숙소를 찾아간다. 론리 첫 줄을 장식하고 있는 숙소임에도 시설이 열악하기 그지 없다. 열악하면 가격이라도 싸면 좋으련만 심지어 가격까지 만만치 않다. 별 수 없이 짐을 풀고 저녁을 먹으러 나간 식당은 게다가 채식 식당이다. 씨크교도들은 거의 채식주의자라 도시 전체에서 고기를 찾아보기가 싶지 않다고 한다. 에구 오래 머물 곳은 아니다 싶다. 다행히 식당은 에어컨도 나오는 것이 제법 깨끗하다.


황금사원 입구, 건물이 흰색이어서 누구는 데려다 준 릭샤왈라에게 여기가 아니라고 박박 우겼다는데.. 들어가면 황금색 사원이 있다.


이거다.

 

씨크교는 약 500년 전 구루 나닥이 힌두교의 카스트 제도에 불만을 품고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장점을 모아 만들었다는 종교인데 그러다 보니 이슬람과 힌두교 양쪽으로부터 받은 박해의 역사도 만만치 않다. 특히 1980년대에는 이곳 암리차르를 중심으로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인도 정부는 황금 사원까지 탱크를 몰고 들어와 피의 진압을 하게 된다. 이 시기에 인도 전역에서 수천명의 시크교도들이 힌두교도들에게 테러를 당해 사망하기도 했다는데 어디서나 민족 문제와 종교 갈등은 분쟁의 씨앗인 모양이다. 씨크교도 남자는 머리에 터번을 쓰고 머리와 수염을 깍지 않기 때문에 외면적으로도 다른 힌두교도들과는 확 구별이 된다. 아니게 아니라 이 도시에는 거의 모든 남자들이 터번을 두르고 있다. 반면에 여자들의 복장은 다른 인도 여성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씨크교도들만 물안에 들어갈 수 있다.

 

저녁을 먹고 황금 사원을 들러본다. 이곳은 씨크교도의 성지라 그런지 거의 새벽의 두어시간을 제외하고는 문을 닫지 않는다. 게다가 입장료도 없다^^제약이 있다면 반드시 머리에 스카프를 쓰고 들어가야 하는 건데 별 수 없이 친구와 사원 앞에서 싸구려 손수건을 하나씩 사서 쓴다. 70년대 장보러 나온 가정부 같은 모습이다. 사원 입구에 신발을 맡기고 흐르는 물에 발을 씻고서야 사원 안으로 들어선다. 이곳이 황금사원이라 불리는 이유는 중앙에 있는 사원의 지붕이 750kg이나 되는 금박으로 입혀져 있기 때문이라는데 그 주변이 물로 둘러싸여 있어 저녁 무렵에는 제법 선선한 기운이 느껴진다. 사원 안은 성지를 찾은 씨크교도들과 그저 관광하러 온 인도 여행객들로 부산하다. 천천히 경내를 한 바퀴 둘러본다. 한켠에는 예의 무료급식소가 보이고 조금 더 들어가니 무료 숙소도 보인다. 게다가 사원 코너에서는 순례객과 관광객들에게 무료로 마실 것을 나눠 주기도 한다. 씨크교도들이 인도 경제의 상당 부분을 장악하고 있다더니 이를 통해 종교 확장과 사회 환원을 동시에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황금사원의 야경


사원에서 만난 인도소녀와 함께 

 

결국 암리차르에서 하루를 머물고 인도의 국경 마을인 와가로 가는 버스를 탄다. 인도에서 한달을 머물렀지만 간 곳이라고 바라나시, 델리, 다람살라가 고작이다. 뭐 다른 사람들처럼 인도에 대한 이런저런 환상을 품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왠지 아쉬움이 남는다. 여행 끝 무렵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님 나중에 다른 기회가 닿으면 천천히 다시 한 번 둘러보고 싶다. 인도가 좋아서라기보다는 넓으니까.. 못 가본 곳이 많으니까.. 그저 그것뿐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다람살라> 월드컵 축구 보다

다람살라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다람살라에서 차로 약 30분가량 떨어진 곳에 자리잡은 맥그로드 간지는 티벳 망명 정부가 있는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달라이 라마를 따라 많은 티베탄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이주해 와 마을을 이루고 살아 인도 속에 작은 티벳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특히 인도 북부에 자리잡고 있어 레, 마날리와 더불어 여름철에는 더위를 피해 올라온 많은 여행객들로 붐비는 곳이기도 하다. 오후 4시에 빠하르간지를 떠난 여행자 버스는 델리 외곽의 티베탄 마을인 티베탄 꼴로니에서 거의 두시간을 정차해 사람을 태우더니 주변이 어둑해서야 델리를 벗어난다. 떠나기 전 버스 뒤 트렁크에 짐을 싣더니 짐 싣는 값을 따로 달라기에 어이가 없어 그저 코웃음을 치고 말았더니 정차하는 사이에 다시 차에 올라와 돈을 안주면 짐을 내리겠다는 둥 행패가 가관이 아니다. 인도에서는 종종 이런 일이 생긴다는데 그냥 관행이라고 생각하고 줘야 하는지 아니면 싸워야 하는 건지 잘 가늠이 서질 않는다. 결국 달라는 돈의 반을 주고서야 실갱이는 끝이 난다. 뭐 이것도 지들 말대로 디스 이즈 인디아라고 생각해야 하는 모양이다.

 

아침에 자다 일어나 보니 어느새 차는 맥그로드 간지에 들어서고 있다. 여튼 아무데서나 잘 자는 거 하나는 타고 난 듯 친구는 물론 같이 타고 온 신혼부부도 머리를 아주 창밖으로 내놓고 주무시던데요 하며 놀려댄다. 뭐 창문이 열려 있으니 그럴 수도.. 하고 생각해보지만 약간 민망하기는 하다^^ 숙소를 찾아 들어가는 길에서 전통 복장을 한 티베탄이며 라마승들이 눈에 띄는데 그래서인가 아무래도 인도가 아닌 다른 곳에 온 것 같다. 거리도 인도의 다른 곳보다는 깨끗하고 무엇보다 살만한 건 기온이 제법 선선하다는 건데 아무래도 고도도 높은데다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탓이지 싶다. 방을 잡고 나서 보니 바라나시와 델리에서 연이어 만났던 가이드와 여행자 커플의 옆방이다. 원래 다람살라에 올 계획이 아니어서 인사까지 다하고 헤어졌는데 결국 다시 만나 버린 것이다. 원래 혼자 다닐 때는 기피 여행자 1호가 커플인데 이상하게 둘이 다니니 신혼부부랑 이들 커플까지 주변에 커플들이 꼬인다^^


맥그로드 간지 전경


거리의 과일 가게

 

맥그로드 간지는 티벳 사원 주변의 코라를 산책하거나 주변 마을 두어 군데를 다녀오는 것 이외에 크게 볼거리가 있는 곳은 아니다. 그저 하루 한군데씩 박수 마을이니 다람콧 마을이니 하는 곳을 산책삼아 다녀온다. 하지만 이곳도 그리 안전하지는 않은 듯 론리에도 밤에 혼자 다니지 말라는 경고가 나와 있고 한국식당 주인에게도 한 달 전에도 영국여행자가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며 조심하라는 얘기를 들으니 대낮에 다녀도 조금 불안한 것이 사실이다. 대낮에도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시간에만 움직인다. 나머지 시간은 그저 티비를 보거나 수다나 떨면서 지낸다. 숙소의 전망이 좋아 굳이 밖으로 나가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는다. 털실을 한 뭉치 사다가 뜨개질을 해 본다. 거의 10년 만에 뜨개질을 해보는 것 같다. 한때는 조끼 같은 것도 떴던 것 같은데 지금 기억나는 건 목도리밖에 없으니 이 더운 날 별 소용도 되지 않을 게 뻔하지만 그냥 떠 본다. 뜨다 보면 훌쩍 몇 시간이 흘러 있다. 참 여행도 오래 하다 보니 가지가지 다해보는 것 같다.


박수마을 가는 길에서 만난 아이들


다람콧 마을의 공사현장, 일은 여자들만 하더만^^

 

다람살라에는 한국인 여행자가 많다. 고로 당연히 한국 식당이 있다. 것도 두개씩이나.. 그 중 한 식당에서 월드컵 중계를 같이 보기로 한다. 저녁 6시에 시작된 토고와의 경기를 보기 위해 다람살라에 있는 한국여행자는 모두 모인 듯 그리 크지 않은 식당에 탁자와 의자를 치우고도 거의 빽빽하게 사람들이 들어선다. 한국에서 가져 왔는지 몇 년 전 보았던 그 빨간 티셔츠를 입고 온 커플도 있다 -대단한 분들이시다^^- 사실 2002년 그 월드컵 광풍 때 광화문 사거리에 있는 사무실에 앉아 쏟아져 나온 인간들을 보고 다들 미쳤나보다 냉소를 보냈는데 4년 뒤에 내가 한국도 아닌 인도에서 월드컵 보겠다고 이러고 있을 줄을 몰랐으니 사람일이란 한치 앞도 모르는 법이다. 뭐 같이 보니까 재미는 있더구만^^ 경기가 시작되자 독일경기장 한국응원석이 비춰진다. 누군가의 <역시 유럽 배낭여행하는 여자들은 물이 좋구만>하는 소리에 졸지에 물 안좋은 배낭 여행자가 되어버린 인도 여성여행자들의 한바탕 야유는 연이은 응원 소리에 묻혀진다. 전반전 어느 시간대인가 10분가량 정전이 된 걸 제외하고는 경기는 순조롭게 끝나고 한참 응원에 열을 올리던 사람들은 결국 누군가의 방에 모여 축하주를 한잔씩 마시고서야 일어선다.

 

결국 토고전만 보고 떠나기로 했던 일정이 프랑스전까지 보고 떠나는 걸로 바뀐다. 프랑스전은 거의 자정을 넘긴 시간에 시작된다. 결국 경기 시작 전 두어 시간을 술을 마시면서 경기가 시작되기를 기다린다. 이날은 이상하게도 케이블TV가 나오지 않는다. 그것도 한국인들이 많이 가는 숙소와 한국 식당이 있는 블록만 나오지 않는 거다. 초조해진 식당 주인이 여기저기 전화를 해 거의 경기 시작 이삼전 분에 TV가 나오기는 했으나 이 역시 10분을 못 버티고 다시 끊어진다. 결국 조그만 영화관-말이 영화관이지 액정 하나 걸어놓고 비디오 보여주는게 고작인-으로 자리를 옮겨 일인당 40루피-천원정도인데 평소에는 30루피란다-를 주고 경기를 본다. 재미있는 건 먼저 보고 있던 프랑스 여행자들과 몇몇 티베탄들이 경기를 보고 있다가 한국인들이 들이닥치니 얘네들, 경기보다 우리들 하는 짓이 더 재미있는지 구경하느라 여념이 없다. 믿거나 말거나 그날의 케이블티비 불방 사태는 이 영화관 주인인 인도인이 저지른 일이라는데.. 글쎄 어떻게들 생각하시는지? 뭐 이것도 역시 디스 이즈 인디아인 것이다.


먹는 것도 일이다. 한국 식당에 앉아 뭘 먹을까 고민 중

 

결국 예정을 훌쩍 넘겨 다람살라에 열흘 가까이 머물고 나서야 암리차르로 떠난다. 신혼부부는 마날리로, 또 다른 커플은 델리로, 그리고 나와 친구는 인도의 마지막 도시가 될 암리차르로 떠난다. 암리차르는 파키스탄으로 넘어가기 위해 들러야 되는 곳이기도 하지만 씨크교도의 성지인 황금 사원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오래 머무르진 않겠지만 이곳은 인도의 여느 도시들처럼 다시 40도를 오르내리는 곳이니 다시 당분간은 잠 못 이루는 밤들이 시작되려나 보다. 가이드북을 찾아보니 인도와 파키스탄은 5,6월이 가장 덥고 이란은 7,8월이 가장 덥다. 어째 이 더위는 당분간 피할 길이 없어 보인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델리> 더위는 여전하다

 

저녁 6시 30분에 바라나시 출발해 아침 8시 경이면 델리에 도착한다던 기차는 12시가 다 되어서야 뉴델리역에 들어선다. 인도에서 기차 연착이란 대단한 화젯거리도 못 되어서 누구는 자고 일어났는데도 기차가 아직 안 떠났더라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저 담담한 걸 보면 4시간 연착 가지고야 명함도 못 내밀 일이긴 하지만 에어컨도 없는 기차에서 이유도 모른채 그냥 몇시간씩 갇혀 있어야 하는 일은 그저 황당한 일을 당할 때 여행자들이 위로랍시고 하는 말들-여긴 인도잖아요^^-로는 용서가 안 되는 맘이다. 그래도 어쩌랴.. 그저 배낭을 메고 내리니 델리의 더위 역시 만만치 않다. 다행히 델리의 여행지 거리인 빠하르간지는 뉴델리역 바로 앞에 있어 릭샤들과 실랑이는 안해도 되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혼잡하기 그지없는 역을 빠져 나와 역시 혼잡하기 그지없는 빠하르간지로-대체 인도에는 무슨 사람이 이리 많은지 모르겠다-로 들어서니 이곳 거리 역시 쓰레기며 오물 천지다.


바라나시의 한국인들이 추천해 준 숙소에 짐을 푼다. 날이 더워 에어컨을 쓸까도 했지만 인도는 이상하게 같은 방이라도 에어컨을 사용하는 경우에 그냥 팬만 쓰는 것의 두 배 이상의 방값을 요구하는 지라 그냥 팬으로 견뎌보기로 한다. -이를테면 내가 쓴 객실의 경우 팬만쓰면 6,000원 가량인데 에어컨을 틀면 거의 14,000원 정도를 내야 한다- 그러나 팬에서 더운 바람만 나오고 방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삐질삐질 흐르는 더위를 견디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밥 먹으러 찾아간 한국인 식당들도 대부분 그냥 건물 옥상에 있는 곳들이라  더위를 고스란히 견디는 것 외엔 도리가 없다. 밥을 먹고 돌아와 물을 한바가지 뒤집어쓰고 그냥 방에서 지낸다. 그날 일기 예보에서 알려준 델리의 온도는 무려 42도다. 말이 42도지 아마 사우나를 제외하고 일상에서 느껴 본 가장 높은 온도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잠시 스친다. 여튼 추위도 문제지만 더위도 여행엔 만만치 않은 적수다.


델리의 여행자 거리, 빠하르간지


지금은 인도는 망고가 제철이다.


그래도 담날에는 비자 신청을 위해 일찌감치 길을 나선다. 다행히 아침부터 비가 조금 내리더니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분다. 먼저 이란 비자를 받기 위해 필요한 레터를 받으러 한국대사관으로 간다. 네팔의 한국대사관에서는 한국인 직원은 코빼기도 볼 수 없더니 이곳 델리에서는 한국 직원이 나와서 친절하게 안내를 해준다. 콜라도 한잔 얻어 마시며 잠시 기다리는 사이 간만에 한국TV도 보고 여튼 편안한 분위기다. 한국인 직원은 레터를 건네주며 집에 자주 전화라는 말도 잊지 않는다. 한해에 인도대사관에만 150여건의 실종신고가 들어오는데 대부분 집에 전화를 안 해서 생긴 일이라면서 주변 여행자들에게도 꼭 전해달란다. 흐믓한 맘으로 한국대사관에서 나와 이번엔 중국대사관으로 향한다. 친구는 파키스탄에서 다시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이니 중국비자를 받아야 한다. 중국 대사관은 비교적 한산하여 금세 일이 끝난다. 다음은 이란대사관이다. 이란대사관 역시 신청서 두장을 작성해 사진과 함께 제출하니 다음주 금요일에 오란다. 여튼 대충 비자 신청은 끝낸 셈이다.


비자를 찾는 날까지 대략 일주일이 남았으니 좋으나 싫으나 델리에서 일주일은 보내야 하는데 그래도 델리는 수도라 그런지 이곳저곳 갈 곳은 많다. 유적지도 찾아보면 이래저래 꽤 되는 모양이지만 이 더위에 나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결국 여행자 거리에서 가까운 델리 중심가인 코넛 플레이스에 나가 냉방장치가 된 커피숍이며 레스토랑, KFC, 맥도날드 등만 찾아다닌다. 인도 물가를 생각해 보면 만만치 않은 가격이지만 한국 가격으로 환산해보면 여튼 한국보다는 싼 게 사실이라 큰 부담은 없다. 이곳에는 영화관도 있어서 하루는 인도 영화를 보러 간다. Fanaa라는 영화인데 대략 우리나라의 쉬리와 비슷한 내용이다. 어느날 델리, 스리나가르에서 온 여자가 어떤 남자가 만나 사랑에 빠졌으나 남자는 인도에 투입된 파키스탄의 스파이였던 것이니.. 결국 남자는 폭탄테러의 임무를 완수한 뒤 죽음을 가장해 떠나고 여자는 고향으로 돌아가 남자의 아이를 키우고 있었는데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작전 중 부상을 당한 남자가 우연히 그 집 앞에 쓰러지고.. 하는 그렇고 그런 얘기다. 힌디로 대화가 진행되지만 내용상 줄거리를 이해하는데 지장이 없고 인도 영화 특유의 흥겨운 뮤지컬들이 삽입되어 세시간이 넘는 시간이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다만 아쉬운 것은 극장이 너무 좋아서인지-우리나라 멀티플렉스 저리 가라다- 영화를 보면서 노래도 따라 부르고 심지어 춤도 춘다는 인도 영화팬들을 볼 수 없었던 것인데 그건 좀더 작은 도시에서나 가능하지 싶다.


하루는 길거리에서 헤나를 해 본다, 손바닥


손등, 한 열흘이면 거의 지워진다.


델리에서 딱 하루, 그래도 왔으니 유명하다는 곳 한두 곳 정도는 가봐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에 가이드북을 뒤져 붉은성(레드포트)과 그 근처에 있는 자마 머스짓을 보러 간다. 레드포트는 붉은 사암으로 지어서 성전체가 붉은 색을 띄고 있어 붙여진 이름인데 타지마할을 지은 샤 쟈한이 수도를 아그라에서 델리로 천도하기 위해 지은 성이라고 한다. 결국 그는 천도를 채 끝내지 못하고 아들인 아우랑제브에 의해 폐위되어 아그라성에 유폐되고 말아 결국 아우랑제브가 이 성의 주인이 된 셈인데 그가 무글제국의 마지막 왕이니 그 영화가 오래 가지는 못했던 듯싶다. 게다가 인도가 영국을 대상으로 항쟁을 계속할 때 영국군의 공격으로 페허가 되다시피 했다니 지금으로서야 온갖 보삭으로 치장되었던 그 당시의 모습은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그래도 아직 남아 있는 대리석 건물의 흔적만으로도 그때의 화려함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더위를 피해 느즈막히 출발했건만 햇살은 여전히 따가워 한시간 여 만에 레드포트를 빠져 나와 인도 최대 규모의 모스크라는 자마 머스짓으로 걸어간다. 모스크는 서쪽으로 넘어가는 해를 배경삼아 장대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막상 도착하니 이미 입장 시간이 지나 있어 모스크 안으로는 들어갈 수가 없단다. 좀 아쉽긴 하지만 인도만 지나면 보이는 건축물들이 죄다 모스크일텐데.. 위안하면서 숙소로 돌아온다.


레드포트


자마 마스짓, 역광이라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는..


이렇게 며칠을 빈둥거리다 날짜가 되어 비자를 찾으러 다시 대사관으로 간다. 비자피만 은행에 내면 그 날로 발급해 줄줄 알았더니 비자피 영수증을 챙긴 대사관 직원은 다시 월요일에 다시 오란다. 금요일에 비자를 받을 줄 알고 토요일 밤차를 끊어 놓았다며 예매한 기차표까지 보여줘도 원래 2주 걸리는 걸 특별히 월요일에 해 주는 거라며 대사관 직원도 막무가내다. 별 수 없이 돌아와 수수료까지 물고 예매한 기차표를 환불한다. 원래 기차표는 암리차르행으로 델리 거쳐 바로 파키스탄으로 가는 일정이었는데 이렇게 되면 월드컵 축구를 무척 보고 싶어하는 친구의 일정에 왕창 차질이 생긴다. 결국 월드컵 축구 한국전을 보기 위해-물론 같이 다녔던 신혼부부의 꼬임에 넘어간 탓도 있지만- 암리차르행을 포기하고 다람살라행 버스를 끊는다. 다행히 월요일에는 비자가 나와준다. 그날 저녁 결국 국경도시인 암리차르가 아닌 티벳 망명정부가 있다는 다람살라행 버스에 몸을 싣는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바라나시2> 조금씩 무심해진다

 

바라나시의 평균 온도는 대략 40도를 오르내리는 듯 도무지 낮에는 돌아다닐 엄두가 나지 않는다. 담날 아침부터 생각나는 단어는 무거움이나 아득함이 아니라 그저 덥다이다. 그랬던 것 같다. 그저 담담해지려고 나가 본 강가도, 익숙해지려고 나간 골목길도 도무지 다니기 힘든 온도가 계속된다. 더워더워 하다가 그저 숙소로 돌아온다. 물론 숙소도 시원하진 않지만 그나마 볕이라도 안드니 그래도 바깥보다는 조금 낫다. 이곳 숙소에는 한국 음식을 파는 식당이 있어서인지 꼭 이곳에 묵지 않더라도 다양한 한국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데 지금은 인도 여행의 비수기인 5월임에도 불구하고 꽤 다양한 연령층의 한국 사람들이 눈에 띈다. 인도에서 3년 동안 살았다는 남자와 첫 여행에서 그 남자를 가이드로 만나 사랑에 빠져 두 번째 인도로 온 여자, 인도로 신혼여행을 온 새내기 부부, 도로공사에서 회사 연수차 왔다는 직원 일행, 그리고 시따르, 따블라, 반수리 등의 인도 전통 악기를 배우는 바라나시 죽순이 언니들이 끼니때마다 바꿔가며 얼굴을 보인다. 이곳 인도는 장기 여행자 아니면 수차례 다녀간 여행자들이 많아서 인지 적당히 수다를 떨고 적당히 정보도 나누다 또 적당하게 일어서는 미덕이 몸에 배인 듯 그저 편안한 분위기다.


아침에만 여는 4루피(100원)짜리 탈리집


꽃불(디아)을 파는 부자


가끔은 더위를 피해 아침이나 저녁나절에 보트를 탄다. 강가에 다가면 거의 예외 없이 구걸하는 아이들이나 물건을 팔려는 사람, 마사지를 권하는 사람 아님 그냥 저팬? 코리아?를 묻는 사람들로 도무지 심심할 틈이 없는데 그 중 가장 말을 많이 건네는 사람은 보트를 타라고 권하는 사람들이다. 마담, 보트, 베리 췹 프라이스, 보트 호객꾼들은 지치지도 않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성별에 따라 마담이나 써 혹은 마이프렌드로 호칭만 바꿔가며 보트 탈 것을 권한다. 바가지로 악명이 높은 이곳에서도 그들이 부르는 가격은 그리 높지 않다. 대체로 4인 정도가 1시간가량 타면 50에서 60루피 정도를 주는데 뭐 우리 돈으로 1500원이 넘지 않는 가격이다. 아침에 해가 막 떠오르는 때나 해가 뉘엿뉘엿 질 때 즈음 아무 생각없이 보트에 앉아 강변에 있는 사람들을 구경하면 그저 시간이 흐른다. 결국 한시간 가량 보트를 타다보면 어김없이 화장 가트를 지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시신이 운구 되어 오거나 뽀얀 연기로 피어오르는 모습도 무심히 보게 된다.     


가트에서 목욕하는 사람들


여자들은 옷을 입은 채로 들어간다


그러다 하루는 혼자 걸어서 화장 가트쪽으로 가본다. 아직 한낮이라 강변에는 호객꾼 몇을 제외하곤 순례객도 그리 많지 않다. 화장가트인 마니까르니까 근처에 가니 사람 타는 냄새가 바람에 실려 온다. 차마 가트 안까지는 들어가지 못하고 근처에서 화장하는 모습을 바라본다. 피어오르는 연기로 봐서 서너 구의 시신이 화장되고 있는 것 같다. 화장하는 사이사이로 오가는 사람, 구경하는 사람, 그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근처를 서성이는 사람들로 화장터는 그저 다른 가트와 별 다를 바가 없다 여기서 돌아설까 좀더 가까이 가볼까 고민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다가온다. 사진을 찍으면 안된다, 화장을 하는 것은 가족만 볼 수 있다, 여기에 있지 마라, 하지만 나는 화장터가 잘 보이는 곳을 알고 있다. 나를 따라 와라, 인터넷에서 이미 읽은 전형적인 사기 수법이다. 따라가면 죽음을 기다리는 노인들이 모여 있고 그들에게 박시시(기부)를 하라며 거의 협박조로 돈을 뺏는다고 하는데 그 돈이 결국 그 노인에게 가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에고.. 역시 예외는 없는 듯.. 귀찮아.. 하면서 사진은 안 찍었다. 화장터는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으로 안다. 하지만 난 더 이상 보고 싶은 맘이 없다. 하면서 돌아선다. 굳이 누군가 화장되는 모습을 꼭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던 것도 아닌데 굳이 실랑이까지 하면서 앉아 있고 싶은 생각은 없다. 결국 화장가트 입구에서 그냥 돌아선다.


오후가 되면 갠지스강가에서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수영교실이 열린다


수영을 배우는 아이를 지켜보고 있는 엄마들


이렇게 한차례 실랑이라도 하고 나면 저녁 무렵에는 맥주 생각이 더욱 간절해지는데 정작 인도에서는 허가를 받은 식당이 아니면 술을 팔지 않는다. 물론 여행자 식당 같은 데에서는 몰래 술을 팔기도 하지만 모든 몰래가 그렇듯 가격이 장난이 아니다. 인도에서 술을 먹을 수 있는 방법은 주류 판매점까지 릭샤를 타고 가서 직접 사오는 방법이 제일 저렴한데 이 또한 더위 때문에 쉬운 일이 아니다. 맥주를 사와도 얼음이나 냉장고가 없으니 곧 식어버려 차가운 맥주를 먹을 수가 없는 것이다. 가방에 꽁꽁 싸온 맥주를 다시 수건으로 말아 마셔도 도무지 시원하지를 않으니 이번엔 인도위스키를 사다가 찬 콜라나 소다와 섞어 마셔 본다. 그래도 갈증은 쉬 가시지 않는다. 결국 하루는 릭샤를 타고 나가 주류 판매점 앞에 쭈그리고 앉아 맥주 한 병을 마시고 돌아온다. 오가는 인도 사람들을 죄다 쳐다보고 골목에는 파리가 들끓는데 시원한 맥주 한 병 마셔 보겠다고 한 짓이라니.. 그래도 뭐 시원하기는 했다^^


어느 날 저녁에는 누군가의 주도로 인도 전통 음악 공연을 보러간다. 그저 게스트 하우스 옥상에서 한명이 따블라를, 다른 한 명이 시따르를 연주하고 나머지 하나가 인도의 전통춤인 까딱댄스를 잠시 보여주는 공연인데 인원이 일정 정도 되면 의뢰를 해서 만들어지는 공연이다. 한국사람 열대여섯 명이 우르르 공연을 보러간다. 밤에도 덥긴 마찬가지여서 옥상으로 바람이 통함에도 불구하고 땀이 비오듯 흐른다. 싯따르의 연주에 이어 따블라가 이어지고 그 다음은 댄스가 이어진다. 인도의 까닥댄스는 남자가 여장을 하고 하는 경우가 많은 모양인데 여성스러운 손동작에 비해 현란하면서도 힘이 많아 들어가는 발동작을 보니 남자 무용수들에게 전수되는 까닭을 알 것 같기도 하다. 한시간반 가량 되는 공연을 보고 다시 밤길을 걸어 우루루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온다. 같이 다니니 밤에는 나갈 엄두가 나지 않던 가트도 그리 무섭지 않다. 그렇게 또 하루가 간다. 


게스트 하우스 옥상에서 열린 작은 콘서트


그러다 어느 날 델리로 떠난다. 바라나시와 델리 사이에는 타지마할이 있는 아그라가 있건만 이 더위에서는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다. 처음에는 델리에서 그래도 시원하다는 북부를 돌아볼까 하는 생각도 안 한 건 아니지만 흔히 가는 코스인 다람살라-마날리-레-스리나가르 코스가 대략 티벳이나 안나푸르나와 비슷하다는 소문에 것도 그냥 건너뛰기로 한다. 그래도 스리나가르는 한 번 가보고 싶은 곳이었는데 이곳은 여전히 파키스탄과 분쟁 중인데다 얼마 전 반군이 공공연히 외국인에 대한 살해를 공언한 곳이라니 아무리 가고 싶어도 참아 주어야 할 것 같다. 결국 바라나시 찍고, 델리 찍고, 암리차르 찍고 파키스탄을 넘어가는 일정이 될 것 같은데 인도가 아무리 아쉬워도 이 날씨에 다른 곳으로 움직이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는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바라나시1> 미음이 무겁다

 

열차가 바라나시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 5시경임에도 주위는 어느새 환하게 밝아 있다. 이곳 날씨도 만만치 않겠다는 생각이 드는 게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기차 안은 이미 한낮의 더위를 방불케 한다. 역시나 지저분하기 이를 데 없는 철로와 사람들로 발디딜 틈도 없는 역사를 벗어나니 이번에는 릭샤들이 떼로 몰려든다. 경험 있는 일행들이 흥정을 하고 오토릭샤 두 대에 나눠 타고 여행자들이 묵는다는 고돌리아로 향한다. 릭샤를 내리자 뭐 당연한 수순처럼 가격이 원래 흥정했던 것에서 두 배로 오른다. 재밌는 건 일행의 반응인데 거의 못 들은 척 혹은 농담도 잘하네 하는 반응을 보이며 그냥 약속했던 돈만 건넨다. 그럼 또 그것만 받고 두 말은 없다. 나중에도 꽤 여러 번 이런 일을 겪게 되는데 일단 좀 더 달라고 해보는 게 거의 습관이 된 것 같은 느낌이다. 좀만 더 줄래 뭐 아니면 말고..하는 식인 것이다.


친구가 이전에 묵었던 게스트하우스를 찾아간다. 이전엔 인도인 가족이 운영하던 곳이었다는데 지금은 그 둘째 아들이 여행 왔던 한국 여자와 결혼을 해 거의 한국인 게스트하우스처럼 운영되고 있는 곳이라고 한다. 숙소를 찾아 들어가는 골목길은 여기저기에 개와 소가 널부러져 있고 온통 오물과 쓰레기투성이다. 그 쓰레기 위로 날아다니는 파리 떼며 진동하는 지린내로 숨을 쉬기도 쉽지 않다. 익히 들었던 이야기이긴 하나 직접 보니 한숨이 나온다. 밖에서 본 숙소들 상태도 말이 아니어서 여기에 어떻게 묵나 싶었는데 그나마 이 게스트하우스는 얼마 전부터 공사를 시작해 실내가 비교적 깨끗한 편이다. 일단 숙소에 짐을 풀고 잠시 막막해진다. 가장 인도답다는 바라나시에 오긴 왔는데 대체 덥고 더럽다는 첫 인상 외에는 아무 감흥이 없다. 아니 도무지 이 도시가 좋아질 것 같지가 않다. 하긴 뭐 꼭 좋아해야하는 건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도시라는데 그 이유나 알았으면 좋겠다 싶다. 그저 편견없이 며칠을 지내보기로 한다.


골목길의 소, 이상하게 사진으로 보면 그래도 조금은 깨끗해 보인다


골목길의 개, 낮에는 널부러져 있던 개들이 밤이 되면 늑대^^로 변한다.


도착한 첫날 저녁 사람들을 따라 강가로 나가 본다. 힌두교도들의 성지, 갠지스강. 살아 이곳에 몸을 씻으면 모든 죄업이 사라지고 죽어 이곳에 뿌려지면 윤회의 업이 끊긴다고 하여 모든 힌두교도들이라면 한 번쯤은 오고 싶어 한다는 곳이다. 강을 따라 돌계단-가트라고 부른다-이 이어져 있고 그 주변으로는 사원이며 게스트하우스들이 늘어서 있는데 각 구획마다 가트의 이름이 붙어 있다. 대부분은 목욕 가트이지만 그 중 두 군데는 화장 가트이다. 화장터라야 그저 노천에 장작을 쌓아 놓고 시신을 태우는 것이 고작이다. 그 장작이 다 탈 때까지 때우다 미처 태우지 못한 시신은 그저 강가에 흘러 보낸다고 한다. 해질녁에 배를 타고 먼저 강 건너로 가 본다. 강 건너에는 부정한 땅이라고 하여 사람이 살지 않는다는데 그저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다. 사공이 손짓하는 곳을 보니 강기슭에 시신 한 구가 보인다. 화장을 하지 않는 사람-사두, 어린아이, 임산부, 코브라에 불린 사람 등등-이나 돈이 없어 화장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종종 그냥 강에 버려지는데 그중 바다로 흘러가지 못하고 물 밖으로 밀려 나오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멀리서 보긴 했지만 영 기분이 좋지 않다.


옥상에서 본 바라나시 전경


보트에서 바라본 가트


배를 타고 강 하류 쪽 화장가트 가려 하는 걸 친구가 말린다. 멀리서 나마 시신을 보고 난 내 표정이 영 말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일행 중엔 그 곳으로 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을 텐데 그 사람들에게 미안해져 친구에게 괜한 짜증을 부린다. 배안의 분위기는 싸해지고 친구도 맘이 상했는지 말이 없다. 강 건너에서는 하루 한번씩 강의 신에게 드린다는 제사 의식인 뿌자가 한창이고 그 옆으로는 밤낮없이 화장하는 사람들로 인해 끊임없이 뽀얀 연기가 피어오르는데 그저 사람들은 그 물을 마시고, 목욕을 하고, 기도를 드리고 자신의 소원을 담아 디아라고 하는 꽃불을 띄워 보낸다. 결국 다시 강을 건너와 뿌자 의식을 구경하다 숙소로 돌아온다. 그저 다른 도시들처럼 느끼는 대로 보면 될 것을 인도에 아니 바라나시에 괜한 의미를 부여하려 해서인지 오히려 맘만 무겁고 보이는 것들이 전부 가라앉아 있는 것 같다. 괜시리 우울한 마음이 들어 이곳에서 보낼 일이 아득해진다. 어차피 친구가 사진을 찍었던 곳이고 다시 찍고 싶어 하는 곳이라 한동안은 이곳에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어쩌랴.. 그저 조금씩 익숙해지면서 조금씩 가벼워지기를 바라는 수밖에..


강 건너편은 마치 사막 같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고락푸르> 기차표 사다 죽을 뻔 했다

룸비니를 떠나 소나울리 국경에 도착하자 먼저 정신이라곤 하나도 없는 국경 모습에 기가 질린다. 네팔은 거의 모든 물자를 인도에서 들여온다는데 그 물자를 수송하는 화물차가 도로를 가득 메운 사이로 양손에 짐을 가득 든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간다. 육로 국경이라면 제법 넘어본 편인데도 내가 본 가장 혼잡한 국경인 태국 캄보디아 국경 저리 가라다. 일단 네팔 쪽 출입국신고소에서 출국 신고를 한 뒤 남은 네팔 루피를 인도 루피로 환전한다. 대충 맞춰서 썼기 때문에 환전 금액은 그리 크지 않다. 대신 인도에서 넘어 온 한국 사람에게 이미 인도 루피를 얼마간 환전해 두었기 때문에 ATM을 찾을 수 있을 때까지는 대충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혼잡은 인도로 들어서자 더 심해진다. 거리도 훨씬 더 지저분한데다 이미그레이션 마저 따로 사무실이 있는 게 아니라 처마 밑에 책상 하나 두고 있는 것이 전부다. 인도 비자는 카트만두에서 이미 받아두었으니 출입국 절차라야 입국신고서 한 장 쓰고 비자에 도장하나 찍으니 끝이긴 하지만 이런 이미그레이션은 또 처음이다. 


다시 혼잡한 거리를 걸어 바라나시 가는 버스를 알아본다. 이곳 소나울리에서 바라나시까지는 버스로 대략 10시간 걸리는 거리이고 일찍 출발한 덕에 아직 오전이니 버스를 탈 수만 있으면 저녁 늦게 바라나시에 도착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다. 하지만 거짓말인지 진짜인지 만나는 사람마다 하나같이 바라나시 가는 버스는 이미 떠났으며 다음 버스는 오후에나 있다고 입을 모은다. 오후 버스를 타면 한밤중에 도착하게 되는데 아무리 일행이 여럿이라도 그 악명 높은 바라나시에 한밤중에 도착하는 건 아무래도 내키지 않는다. 결국 가장 가까운 도시인 고락푸르로 이동해 버스를 알아보거나 아니면 한밤중에 출발해 바라나시에 새벽에 도착하는 기차를 타거나 하기로 하고 일단 고락푸르행 버스를 탄다. 버스는 두 시간여를 달리더니 다행히 고락푸르 기차역 바로 앞에 선다. 룸비니에서 같이 떠난 일행은 모두 일곱 명, 그중 다섯 명은 바라나시 갈 예정이고 둘은 델리로 떠날 사람들이다. 고락푸르에 도착해 버스를 알아봐도 역시 저녁에 떠나는 버스뿐이다. 일단 기차표를 끊어보기로 한다.


고락푸르역은 상당히 큰 규모임에도 불구하고 지저분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는데다 누가 인도 아니랄까봐 그 혼잡한 대합실에 개가 누워 자고 있지를 않나.. 떡 하니 소가 버티고 있지를 않나.. 게다가 개와 소 사이에는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누워 있지를 않나.. 한마디로 무슨 난민수용소 같은 분위기다. 그 틈을 비집고 창구마다 표를 사려는 사람들의 줄이 길게 늘어서 대합실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다행히 그 중 한 창구가 외국인과 여성 전용 창구라고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그 창구는 무늬만 외국인과 여성 전용 창구인지 현지 남성들까지 버젓이 줄을 서 있는데다 남녀가 유별이어서 그런지 창구는 하난데 줄은 남자줄 여자줄 해서 모두 두 줄이다. 일단 남자줄이 좀 짧아 보여 남자줄 뒤에 일행 하나가 줄은 선다. 그러나 줄은 창구 가까이 갈수록 엉망이 되는데다 중간에 새치기하는 사람, 아는 사람에게 표를 부탁하는 사람 등등 때문에 전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표 파는 속도는 왜 이리 느린지 한사람 표 파는데도 부지하세월이다. 


음식점 옥상에서 본 고락푸르역


기차시간을 기다리며 죽치고 있었던 음식점 옥상, 무지 더웠다.


두 시간쯤 기다려도 도무지 줄이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아 결국 일행들을 동원해 새치기 정리에 나선다. 일행 하나는 줄을 서고 나머지가 창구 옆을 지키고 있다가 슬며시 끼어들려는 사람들이 있으면 슬쩍 팔로 막거나 그래도 안 되면 내놓고 뒤에 가서 줄을 서라고 한마디 해준다. 사람들이 아직은 순진한 건지 대부분은 멋쩍은 듯 뒤에 가서 줄을 선다. 그 와중에 매표소 직원과 표사는 남자 하나가 말다툼을 하는지 언성이 높아지더니 결국 경비원인 듯 한 사람이 와서 창구 앞에 서 있는 현지 남성들을 모두 쫓아낸다. 멀쩡하게 표 팔때는 언제고 수틀리니까 쫓아내는 것도 황당한데 모두 항의 한마디 못하고 비실비실 쫓겨난다.


여튼 덕분에 창구 앞까지 가는 데는 성공했는데 창구 앞은 대략 아수라장이다. 그동안 현지 남성들 때문에 표 살 엄두를 못 냈던 여성들 줄이 한꺼번에 몰리면서 너도나도 창구 안으로 손을 집어넣으려는데 아귀다툼이 따로 없다. 결국 남자 일행으로는 힘들 것 같아 그 줄에 내가 가세를 한다. 뒤에서 미는 여자들의 힘이 장난이 아닌데다 큰소리 반, 사정 반의 목소리가 계속 들린다. 자기가 먼저 표를 사야겠다는 것이다. 나도 두시간 이상 기다렸다니까 자기들은 세시간 넘게 기다렸단다. 사실 나도 누구 사정을 봐 줄만한 상황은 아니다. 지금 당신들 사정 봐줄 때가 아니거든요 속으로 중얼거리며 그냥 무시한다. 몸싸움이라면 뭐 내가 인도 여자들 보다는 한수 위다. 다행히 주먹 하나 밀어 넣는데 성공은 했으나 그 창구에는 이미 내 것까지 주먹이 세 개이다. 다행히 내 신청서를 먼저 받아든다.


인도에서는 기차표를 사기 위해 먼저 신청서를 작성해야 하는데 여기에는 행선지, 이름, 나이 등을 명기해야 한다. 문제는 열차편을 써 넣어야 하는데 이곳 타임테이블에는 바라나시행 열차편명이 나와 있지 않아 빈칸으로 두었더니 대뜸 열차 편명을 적어 오라며 신청서를 집어 던진다. 뒤에서는 빨리 나오라고 아우성인데 여기서 나갔다간 다시 두어 시간을 더 기다려야 하는 판이니 열이 확 뻗치기는 하지만 다시 웃으면서 사정을 해본다. 열차편명을 모르겠으니 좀 알려주면 안 되겠냐고.. 한사람을 처리하고 나선 마지못해 열차편명을 불러준다. 여전히 창구에 왼손은 집어넣은 채로 오른손으로 열차편명을 쓴다. 다시 이리저리 신청서를 살펴보던 매표원이 이번에는 주소를 쓰라며 다시 신청서를 집어 던진다. 으.. 열받어.. 하지만 어쩌랴 아쉬운 건 난데.. 다시 나는 여행자고 인도 주소가 없다고 했더니 한국 주소를 쓰란다. 참 나.. 한국주소는 알아 뭣하게.. 하면서도 다시 한손은 왼쪽 창구에 박은 채로 한국 주소를 대충 적어 준다. 그동안 뒤쪽에선 다시 몰려온 현지 남성들이 빨리 비키라고 툭툭치고 뒤에서 밀고 장난이 아니다. 다행히 일행인 남자들이 뒤에서 아직 안 끝났다, 밀지 말라며 계속 싸운다. 결국 바라나시행 2등 침대칸 표를 받아쥐니 어느새 3시간이 훌쩍 지나있다. 옴 몸은 땀으로 젖어 있고 거의 모든 진이 다 빠진 것 같은 상태가 된다. 에고 기차표 두 번만 샀다간 탈진할 것 같다^^


늦은 점심을 먹고 기다리다 밤10시 45분발 바라나시행 열차를 타러 간다. 기차역은 여전히 사람들로 발디딜 틈 조차 없다. 결국 물어물어 열차가 들어오는 플랫폼 넘버를 찾아간다. -인도에서는 열차가 들어오기 얼마 전에야 그 열차가 몇 번 플랫폼으로 들어오는지 알 수 있다고 한다. 뭐 가끔 그래놓고도 다른 곳으로 들어오는 경우도 있단다^^- 간신히 기차를 찾고보니 이번엔 칸찾기를 해야 한다. 인도 기차는 등급이 다른 경우 기차칸과 기차칸 사이를 막아 놓기 때문에 아무 칸에나 올라타면 안된다는 거다. 어떤 경우는 칠판에 백묵으로 대충 써놓기도 한다는데 그래도 이번 기차는 플라스틱으로 된 표지를 걸어놓긴 했다. 대신 기차가 아주 길기 때문에 만약의 경우 짐들고 죽어라 뛰지 않으려면 조금은 여유 있게 역에 도착하는 편이 좋다. 간신히 기차칸을 찾아 올라탄다. 바라나시에서 출발하는 기차라 다행히 자리는 비어있다. 3층으로 된 침대가 마주 보고 있는 모양은 중국 기차와 비슷한데 통로 쪽에 두개의 침대가 더 있다. 뭐 좀더 많은 인원을 수용하는 셈이다. 인도 기차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은 이미 들을 만큼 들었지만 그래도 일행이 여러 명이니 조금은 맘을 놓아도 될 것 같다. 중간 칸에 배낭을 묶어 놓고 덜컹거리는 기차 안에서 인도에서의 첫 밤을 보낸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룸비니> 공짜밥에 늘어지다

 

룸비니는 네팔과 인도 국경이 근접한 곳에 있는 불교 성지로 부처님이 탄생한 곳이다. 어..부처님은 인도에서 태어나신 거 아닌가 싶은데 여튼 룸비니는 부처님 태어날 당시에야 인도땅이었는지 모르나 현재는 엄연히 네팔 땅이다. 그렇다면 이곳은 베틀레헴이나 메카같은 순례자들로 가득한 땅이 될 법도 한데 불교도들은 덜 극성스러운지 아님 경전에 평생에 한 번은 거길 꼭 가야 한다든지 뭐 그런 말이 없어서인지 그저 한적한 시골 동네같은 분위기를 여전히 가지고 있다. 다만 각국에서 그 나라 특색에 맞는 절들을 세워 놓고 부처님 태어나신 성지임을 기념하고 있는데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라 대성석가사라는 한국절도 당당히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가 룸비니에 들르기로 한 이유는 오직 하나 한국절에서는 공짜로 재워주고 삼시 세때 먹여 준다는 말에 혹해서 이다. 게다가 삼시 세때가 전부 한국 음식이라니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갈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말이다. 사실 완전히 공짜라기보다는 나갈 때 모두들 적당한 기부금을 내기는 하지만 안낸다고 누가 뭐라는 것도 아니니 여행자들에게는 쉼터같은 곳이라 할 수 있다.


룸비니에 가기 위해 네팔과 인도국경이 있는 소나울리행 버스를 탄다. 로컬버스와 여행자버스 두종류가 있다는데 당근 여행자버스가 좀더 비싸다. 결국 마찬가지일 거란 주위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여행자 버스를 탄다.-미리 고백한 바와 같이 이젠 가능하면 좀더 편하게 가고 싶은 맘이 더 크다^^- 그러나 로컬버스가 어떤지야 알 수 없지만 여행자 버스도 현지인으로 가득하고 여기저기 내키는 대로 정차해 사람들을 태우고 내린다. 게다가 남부로 내려갈수록 날은 점점 더 뜨거워진다. 급기야 소나울리 조금 못 미친 사거리에서 내려 룸비니로 가는 버스를 갈아탈 즈음이 되어서는 거의 40도에 육박하는 온도가 된다. 이 온도가 인도에서는 평상시 온도려니 생각하니 그냥 인도를 건너뛰고 싶어진다. 땀을 비오듯 흘리며 들어선 한국절은 여전히 공사 중임에도 불구하고-삼년전인가 와 본적이 있다는 친구의 말에 따르면 그때도 공사 중이었단다- 편안한 잠자리를 내어준다. 바닥에 이불을 깔고 자게 되어 있는 제법 큰 방인데 천장에 선풍기는 물론이고 모기장까지 달려 있다. 게다가 방마다 욕실이며 화장실까지 붙어 있다.


여전히 공사중인 대성석가사


식당, 원하는 만큼 먹고 설거지는 각자 해야 한다.


포카라에서 만났다가 먼저 떠난 사람들이 몇 명 보인다. 그저 하는 일 없이 쉬다가 밥 먹으라는 종소리가 울리면 밥 먹으로 가는 게 낙이라며 언제 시간이 가 저녁을 먹나 하는 얼굴이다. 공양 시간은 아침 6시, 오전 11시 30분 그리고 저녁 6시라는데 하긴 주위는 그저 다른 나라의 절들을 제외하곤 온통 숲들뿐이니 딱히 할일도 없겠다 싶긴 하다. 씻고 방에서 노닥거리다 보니 어느새 저녁 식사 종이 울린다. 식당에 가보니 스님과 보살님 세분, 한국인 칠팔 명 그리고 외국인 서너 명이 오늘의 식사 인원의 전부이다. 서양애들의 경우는 자기 나라의 절이 없으니, 일본애들은 자기 나라 절의 규율이 엄격해서 종종 한국절로 온다는 소문이다. 저녁 메뉴는 국수와 된장국이다. 식당에서 먹는 음식처럼 감칠맛은 없으나 그저 어느 집 밥상에서나 볼 수 있는 소박한 맛이 입맛을 끈다. 국수와 밥을 배터지게 먹고도 모자라 아무나 타먹어도 된다고 쓰여 있는-심지어 가지고 가도 된다고 되어 있어 한봉지 챙겨오기도 했다^^- 미숫가루까지 한사발 마시고 나서야 저녁 식사는 끝이 난다. 결국 절밥에 마음이 동해 다음날 떠나려던 일정을 연기하고 하루 더 머물기로 한다.


망루에서 바라본 주변 풍경


다음날도 비슷한 하루가 계속된다. 종이 울리면 밥을 먹으러 가고 끼니시간 사이엔 식당에 비치되어 있는 몇 권 안 되는 책 중에 그나마 읽을 만한 걸 골라 책을 읽거나 숙소 옥상에 있는 망루에 올라가 주변 경관을 바라보거나 그도 저도 지치면 낮잠을 자거나 하면서 하루를 보낸다. 주변에 부처가 태어난 곳이며 부처가 태어나기 직전 그 어머니인 마야 데비가 목욕했다는 연못 등이 있다고는 하나 무더운 날씨 탓에 어느 한 곳도 선뜻 내키지가 않는다. 그저 절에서는 금연이니 담배를 피우기 위해 한 번씩 절 밖으로 나서는 때를 제외하곤 그저 하루종일 뒹굴거린 셈이다. 결국 마지막날 아침까지 꼬박 챙겨먹고-사실 아침 6시 공양이라면 차라리 잠을 잘 것 같은데 내가 아는 한 아침을 굶은 한국인은 하나도 없었다^^- 국경으로 떠난다. 가능하다면 오늘 중으로 아니 늦은 밤중이라도 바라나시에 도착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 조금 서둘러 길을 나선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포카라> 아무 것도 안했다

 

트레킹 이후 포카라에선 그 유명한 페와 호수에서 단 한차례 배를 탄 것이 우리가 취한 액션의 전부이다. 그저 밥때가 되면 부지런히 걸어 한국인 식당에 가서 오늘은 뭘 먹나 행복한 고민 끝에 된장찌개며 비빔밥, 제육볶음 등을 시켜먹었으며 나머지 시간의 대부분은 하루 한차례씩 어김없이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숙소 베란다에서 맥주를 마셨다. 사진을 단 한 장도 찍지 않았다는 사실을 포카라를 떠날 때가 되어서야 문득 깨달았다. 블로그 업데이트가 걱정이 되어 혹시 사진 찍어둔 거 있냐고 친구에게 물었더니 자기 홈피에 삼년 전에 찍어 둔 사진이 있으니 퍼다 쓰란다. 이 친구 어째 갈수록 뻔뻔해지는 경향이 있다^^ 여튼 포카라에선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도시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앞으로 가게 될 룸비니에서도 바라나시에서도 사실 아무 것도 하지 않을 계획인데 이래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뭐 할 수 없지.. 별로 하고 싶은 일도 없는데 쩝!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안나푸르나 트레킹2> 본격적인 트레킹이 시작된다

 

트레킹 4일(따또빠니-가사)


이날은 대충 7시간 정도 걸으면 되는 여정이긴 하지만 중간에 상당히 가파른 길을 한시간 이상 올라야 하는 난코스가 도사리고 있다. 아니게 아니라 첫날과는 달리 제법 오르막길이 이어진다. 첫날은 시간이 좀 많이 걸려서 그렇지 경사는 거의 없다시피 했는데 이날은 긴 오르막과 짧은 내리막이 계속된다. 그냥 이삼일 기다리더라도 그냥 비행기를 타고 올라갔어야 하나 하는 후회가 밀려온다. 뭐 후회해본들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다 안가겠다는 일행을 꼬셔서 올라온 죄로 싫은 내색도 못하고 그저 묵묵히 걷는다. 중간 마을인 룩세에서 점심을 먹는다. 산을 조금씩 오를수록 음식값이 조금씩 비싸진다. 볶음밥이며 국수 따위의 가장 간단한 음식도 이천원 돈이고 맥주는 한병에 거의 삼천원 돈이다. 물값도 만만치 않아서 한병에 거의 천원정도 하는데 그것도 하루에 두세병 정도 마시면 꽤 부담스런 금액이 된다. 그나마 가사부터는 안나푸르나 보존계획이라는 곳에서 정수한 물을 세이프티 워터라는 이름으로 약 500원 정도에 팔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여튼 비싸도 먹을 건 먹어야 하는 법이니 맥주 한 병을 나눠 마시고 다시 길을 떠난다. 점심 이후로 슬슬 오르막의 난이도가 높아지더니 결국 마의 오르막이 나타난다. 어느 마을부터인가 끝없이 계단이 이어지더니 계곡 옆으로 난 길이 어느덧 사라지고 높디높은 언덕이 버티고 있다. 별 수 없이 그저 꾸준히 걷는다. 땀은 비오듯 쏟아지고 숨소리가 핵핵거리다 못해 쌕쌕거리는 지경이 되어서야 오르막은 끝이 난다. 그래도 한국의 산처럼 끊임없이 올라가야 하는 건 아니라서 생각보다는 조금 수월한 것 같다. 다시 평지를 두어 시간 걸으니 이날 숙소로 점찍어 둔 가사가 나타난다. 전날보다 조금 이른 5시 경에 숙소에 도착한다. 그나마 좀솜-묵디나뜨 구간은 전기도 들어오고 숙소도 제법 번듯한 편이라 상대적으로 트레킹하기에는 환경이 괜찮은 편이다. 이른 저녁을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든다.



가사 가는 길, 저 멀리 가야할 길이 보인다.


차가 다니지 않는 갈은 사람이 음식물을 지고 나른다.


  

트레킹 5일(가사-투쿠체)


오늘도 변함없는 9시간의 여정이다-현지인들에게 물어보면 천천히 가도 6시간에 간다는데 우리에겐 가능한 일이 아니지 싶다- 중간 마을인 레떼까지는 변함없는 오르막길인데다 어느 여름에 무너져 내린 길인지 길은 온통 공사 중이다. 뭐 공사라야 포크레인 이런 게 동원되는 게 아니라 쇠꼬챙이 하나., 새끼줄 단 삽 하나가 고작이라 어느 천년에 공사를 마칠지 알 수 없으나 여튼 남녀를 막론하고 십수명씩 모여 공사를 계속하고 있다. 가사를 지나고 나서부터는 멀리 설산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기후도 조금씩 쌀쌀해지기 시작해 어제까지 입던 반팔 대신 긴팔을 입고 걸어도 그다지 덥지 않다. 고도도 2500 정도가 된다. 아직 숨이 찰 정도로 높은 건 아니지만 슬슬 풍광이 달라지니 트레킹에도 새로운 재미가 생기기 시작한다. 레떼에 도착해 점심을 먹고 나니 이제 평지만 남았다 싶은 게 한숨이 돌려진다. 중간에 들린 마을에서 결혼식이라도 올리는지 춤과 음악이 한창이다. 한참을 구경하다 공짜로 짜이도 한잔 얻어 마시고 나서 길을 재촉한다. 계곡은 상류로 올라갈수록 수량이 적어져 마을을 향해 나 있는 굽이길보다 강바닥으로 가는 게 시간이 단축되는데 결국 조금 빨리 가려다 한시간 이상을 헤매는 삽질을 한다. 다리를 건너야 하는 상황에서 다리는 저 언덕위에 있고 우리는 강바닥을 걷고 있다가 그냥 강을 넘어보기로 한다. 그리 깊지 않은 강을 신발까지 벗고 건너가 보니 건너편 가에 다시 강이 흐르는 게 보인다. 이번엔 물살이 장난이 아니다.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봐도 방법이 없다. 결국 다시 신발을 벗고 물길을 건너 제자리로 되돌아와 언덕 위로 올라가 다리를 건넌다. 이 삽질을 하느라 한 시간 헤매느라 다리를 건너고 나니 벌써 4시가 훌쩍 지나 있다. 다리를 건너니 또 풍광이 확 달라진다. 아래에서부터 계속 이어지던 계곡은 이제 거의 시내물이 되어 흐르고 메말라 버린 강바닥 옆으로는 나무 하나 없는 산들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멀리 목적지인 투쿠체 마을이 보이긴 하는데 걸어도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바람도 만만치 않다. 결국 황량한 강바닥을 걸어 걸어 6시가 다 되어서야 목적지인 투쿠체에 도착한다.  


중간 마을인 레떼, 마을 너머로 설산이 보인다.


저 다리가 문제의 다리다. 


트레킹 6일(투쿠체-좀솜)


투쿠체에서 좀솜까지 대략 4시간.. 하지만 다음 목적지인 묵디나트까지 가기엔 시간이 부족하고 오후에는 내려가는 비행기편도 알아봐야 하기 때문에 일찍 도착해 그냥 좀솜에서 쉬기로 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숙소를 나선다. 좀솜까지는 거의 평지로 산사이로 난 길을 따라 그냥 걷기만 하는 곳이다. 이번에는 현지인들의 움직임을 면밀히 살피면서 강바닥으로 걷는다. 현지인들이 안 간다면 안가는 게 좋다. 그 경우 거의 100% 건널 수 없는 강이 도사리고 있게 마련이다. 길은 편안한데 바람이 장난이 아니다. 다행히 뒤에서 앞으로 불기에 망정이지 반대로 불었다면 한 발자국 걷기도 쉽지 않을 것 같다. 간단할 거라 생각했던 길에서 사진작가 친구의 발이 말썽을 부린다. 이삼일 전부터 물집이 잡혀 조금씩 절기는 했지만 오늘은 특히 심한지 거의 걸음 걷는 것이 고역인 듯 보인다. 나야 이미 두어 번 물집이 잡히고 터져서 이젠 어지간한 길에서는 견딜 만 한데 이 친구 원래 많이 걸으면 발상태가 좋지 않다고 한다. 게다가 좀솜에서 비행장 근처에서 숙소를 잡자는 걸 비행장 근처가 아닌 좀솜 마을이 아주 예뻤다는 소풍의 여행기가 생각나 발 아픈 친구를 끌고 좀솜 마을에서 숙소를 잡자며 끌고 올라간다. 하지만 좀솜 마을의 숙소 상태는 보던 중 최악이어서 다시 비행장 근처로 돌아온다. 거의 절다시피 숙소에 도착하는 그 친구에게 미안한 맘뿐이다. 그나마 좀솜은 비행장이 있는 동네의 숙소 상태가 훨씬 좋다. 점심을 먹고 사흘 뒤에 내려가는 비행기를 예약하고 난 뒤 푹 쉬어준다. 이번에는 양심상 도저히 같이 올라가자고 꼬실 수가 없어 혼자 묵디나뜨까지 다녀올테니 여기서 기다리던지 아니면 결국 포카라로 먼저 내려가라고 말한다. 근데 이 친구 묵디나뜨까지 같이 가겠단다. 왜 맘이 바뀌었냐고 물어보니 이때까지 경치다운 경치를 하나도 못봐서 억울해서라도 가볼 참이란다. 여튼 묵디나뜨까지 같이 동행하기로는 헀는데 저 발 상태로 제대로 걸을 수나 있는 지 걱정이다.


그래도 마을에는 보리가 누렇게 익어가고 있다.


이제 풍광이 완연히 달라진다.



트레킹 7일(좀솜-묵디나트)


상류로 올라올수록 높아진 고도 탓인지 나무 하나 보이지 않는 황량한 풍경이 이어진다. 등산로는 여전히 계곡을 끼고 나 있지만 건기라 그런지 이제 계곡물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현지인들을 따라 강바닥을 그냥 걸어간다. 눈앞에는 나무 하나 없는 거대하나 산들만 첩첩히 버티고 있다. 눈앞에 빤히 보이는 거리를 가는데도 이삼십분은 족히 걸리는 것 같다. 강바닥을 따라 한시간 반을 걷다가 다시 산길을 타고 한시간 쯤을 걸으니 묵디나트 가는 오르막의 시작점인 에클로버티가 나타난다. 묵디나트로 가는 길은 에클로버티에서 바로 가는 길과 그림 같은 마을이라고 명성이 자자한 커크베니로 돌아가는 길 두가지가 있는데 이 돌아가는 길이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소문에 커크베니는 돌아오는 길에 들르기로 하고 바로 묵디나뜨 가는 길로 접어든다. 그런데 분명히 윗길로 올라왔음에도 가다보니 자꾸 커크베니가 가까워진다. 지나가는 현지인도 하나 없어 지도를 살펴보고, 시계에 있는 나침판도 살펴보던 친구가 한숨을 쉰다. 더 윗길로 올라갔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세히 보니 우리가 가던 길 위로 길이 하나 더 나 있으면서 그 길을 따라 전신주가 연결되어 있다. 오던 길을 되돌아가 윗길을 타기엔 너무 많이 와 버린 우리는 아랫길에서 윗길로 난 벼랑을 그냥 오르기로 한다. 어차피 길도 없으니 가장 만만해 보이는 경사로를 택해 한발씩 올라간다, 고도가 높은 곳이라 약간의 오르막에도 숨이 거칠어지는데 경사가 거의 70도에 가까우니 100m 정도의 높이를 오르는데도 턱이 숨에까지 찬다. 결국 윗길까지 올라가선 기진맥진 상태가 된다. 그러나 묵디나뜨까지의 오르막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다시 계속된 오르막을 두시간 남짓 걸으니 멀리 묵디나뜨 가는 마지막 마을인 자르코트와 묵디나뜨가 한눈에 들어온다. 보이긴 눈앞에 보이는데 현지인들에게 물으니 아직 두시간은 더 걸어가야 한단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제부터의 경사지는 그리 높지 않다는 정도일 것이다. 결국 묵디니뜨에 도착해 숙소를 잡으니 그제서야 주변 경관이 눈에 들어온다. 설산이 눈앞에 펼쳐지고 산 아래에서 구름이 하얗게 피어오르는 것이 장관인 풍경을 연출한다. 그래 올라오길 잘 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처음으로 든다. 해가 지는 마을 한 바퀴 돌고 별이 뜰 때까지 숙소 난간에 앉아 멀리 설산을 바라본다. 설산은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제 빛을 발하고 있다.


묵디나뜨 가는 길


묵다나뜨의 아침


트레킹 8일(묵디나트-좀솜)


이제 내려가는 일만 남겨두고 있으니 마음이 편안하다. 게다가 좀솜가는 길은 어제 올라온 길이니 길도 알겠다, 대략 내리막이겠다 걱정할 일이 전혀 없는 듯 하다. 새벽 일찍 일어나 묵디나뜨 사원을 둘러보고 일찌감치 길을 나선다. 그리 먼길은 아니지만 빨리 내려가 쉬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지금이 5월이라 그런지 황량한 산들에 비해 근처 마을은 사과나무를 비롯해 각종 밭작물들이 파랗게 자라고 있다. 바쁠 것도 없으니 등산로를 벗어나 근처 마을로 이어지는 오솔길로 들어가 본다. 눈 쌓인 설산을 배경으로 자라난 푸른 나무들이 한 폭의 그림같다. 사진작가 친구도 연방 셔터를 눌러대며 떠날 줄을 모른다. 한참을 마을에서 놀다가 다시 산을 내려온다. 커크베니에서 점심을 먹는데 창밖으로 부는 바람이 심상치 않다. 어제와 방향이 같다면 이는 분명 맞바람일터 다시 두시간 가까이 강바닥을 걸어야 하는 우리로써는 대략 낭패인 상황이다. 옆에 있는 현지인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커크베니-좀솜 구간은 일년내내 이렇게 발람이 부는데다 아침 10시부터 5시까지는 거의 멈추는 법이 없다고 한다. 그 말대로라면 바람이 잦아지길 기다릴 수도 없어 그냥 길을 나선다. 식당 입구를 나서자마자 만난 바람은 거의 몸을 가누기가 힘들 정도의 강풍이다. 게다가 바람이 일으키는 흙먼지 때문에 숨쉬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그냥 걷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다. 한시간 쯤을 걸으니 거의 죽을 것 같다. 바람이 너무 세니 어디 앉아서 쉬기도 마땅찮아 그냥 걷기만 했더니 평지인데도 어깨며 다리가 안 아픈 데가 없다. 결국 만만한 길이란 건 하나도 없구나 깨달을 즈음에야 간신히 좀솜에 도착한다. 그래도 다행히 묵디나뜨 올라갈 때에는 숙소에 노트북이며 옷가지를 빼놓고 왔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중간 어디쯤에선가 나 못가 하고 주저앉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여튼 다시 숙소에 돌아와 씻고 나니 드디어 트레킹이 끝났다는 안도감이 든다. 뭐 내일 비행기가 떠야 완전히 끝나는 것이긴 하지만 설마 두 번씩이나 비행기가 안뜨겠어 하는 마음은 들지만 바람은 저역 늦게까지 그 기세가 잦아들 줄을 모른다. 


내려오는 길에 만난 마을


점심을 먹은 커크베니


트레킹 9일(좀솜-포카라)


좀솜에서 포카라로 가는 비행기는 바람이 그나마 덜 부는 이른 아침에 뜨는 것이 보통이다. 3분 거리에 비행장이 있건만 그래도 7시에 뜨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5시 30분부터 서두른다. 표 파는 아저씨도 6시 10분까지는 나오라고 했는데 막상 공항이라고 가보니 시골 버스대합실만도 못한 크기다. 그래도 할 건 다 하는 데 일단 짐검사 -일일이 가방을 열어 보여야 한다-를 하고 항공권을 좌석표로 바꾸고, 짐도 무게를 재어 따로 부치고-짐 재는 저울이 옛날 목욕탕에서 보던 눈금 저울인데 아저씨에게 허락을 얻고 슬쩍 몸무게도 재어 본다- 마지막으로 남녀가 구분되어 있는 방으로 들어가 몸수색까지 마치면 모든 절차가 끝이 난다. 비행기는 좌석이 달랑 두 줄로 되어 있고 한 20명 쯤 탑승 가능한 경비행기다. 그래도 스튜어디스까지 있어 사탕이며 솜뭉치 등을 나눠준다. 비행기가 이륙하자 오른쩍으로 안나푸르나의 설산들이 펼쳐진다. 경비행기라 고도를 많이 높이지는 않는지 설산이 아래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대략 옆에서 보인다. 아래로는 며칠에 걸쳐서 땀나게 걸은 것이 분명한 길들이 희미한 점선처럼 보인다. 이륙한 지 15분 만에 비행기는 포카라 공항에 도착한다. 고작 15분 걸릴 길을 몇날며칠을 걸어올라 갔나 싶은 게 조금 허무한 생각이 든다. 포카라에는 추척추적 비가 내린다. 더울 줄 알았던 날씨도 비 탓인지 제법 선선하다. 숙소도 잡아야하고, 맡겨 놓은 짐도 찾아야 하고, 렌트했던 장비도 반납해야 하는데 만사를 제치고 한국 식당으로 달려간다. 쇠고기 국밥을 시켜 허겁지겁 먹고 나니 이제야 트레킹이 끝났다는 실감이 든다. 이제 당분간은 아무 것도 하지 말고 탱자탱자 놀아야겠다^^

 


우리가 탄 비행기다.


묵디나뜨의 숙소에서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안나푸르나 트레킹1> 비행기가 안떠도 간다

 

그린 라인이라는 외국인 전용버스를 타고-차비도 달러로만 받는 나름 고급버스인데 어찌된 일인지 여행이 길어질수록 점점 더 편한 것만 찾게 되는지 모를 일이다^^- 다섯 시간 만에 포카라에 도착하니 날은 한참 더 더워진다. 이제 제법 아열대 기후로 접어든 것 같은데인도를 여행하는 사람들이 더위를 피해 온다는 포카라가 이 정도니 40도가 종종 넘는다는 인도는 얼마나 더울지 벌써부터 슬며시 걱정이 된다. 먼저 간 일행이 묵고 있는 한국인 게스트하우스를 찾아가 보니 일행들이 이미 비행기표를 끊어 놓고 기다리고 있다. 이제 트레킹용품 몇 가지를 빌리고 시장만 보면 내일부터 트레킹이 시작된다. 일행은 티벳 랜드크루저팀 네 명과 먼저 떠난 짠돌이 대학생까지 모두 다섯 명이다. 산에 올라가면 물가가 한참 비싸진다는 말을 들은 짠돌이 대학생의 제안으로 감자 5kg와 계란 두 판을 사서 숙소에다 삶아달라고 부탁한 뒤 우비며 스틱 등 트레킹에 필요한 물품을 사거나 빌리니 어느새 한밤중이다.


자세히 쓴다고 해도 도무지 어디가 어디인지 모를 것이 뻔한 트레킹 루트를 설명하는 일은 대략 난감이다. 지도를 올리면 좀더 쉬울 순 있겠으나 내 경우 여행 준비하면서 지도까지 상세히 나와 있는 하우아시아의 사이트를 아무리 들여다봐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이래가지고 트레킹이나 제대로 하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 지도를 올린다고 크게 나아질 것 같지도 않다. 그래도 정 궁금하면 하우아시아에 가서 네팔 트레킹편을 참고하시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는 있겠다^^ 여튼 아주 간단히 언급하자면 네팔에서 할 수 있는 트레킹은 대략 3가지 정도의 코스가 있다고 한다. 즉 세 종류의 다른 산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면 되는데 랑탕트레킹, 에베레스트 트레킹 그리고 안나푸르나 트레킹이 그것이다. 앞의 두 개의 트레킹 코스는 사실 나도 잘 모르겠고 내가 갈 예정인 안나푸르나 트레킹만 간단히 설명하도록 한다.


첫째, 안나푸르나 트레킹은 약 15일이 걸린다는 라운eld 코스-뭐 높은 산을 가운데 두고 산주변을 한바퀴 돈다고 보시면 되겠다-, 둘째, 약 10일이 걸린다는 히프 라운딩코스-산을 반만 도는 건데 이 경우 갔던 길을 돌아와야 하기 때문에 내려가는 길 또는 올라가는 길 중 한번은 경비행기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셋째, 삼사일 정도 걸린다는 푼힐코스-전망이 아주 훌륭하다는 푼힐에서 일출만 보고 내려오는 코스로 시간이 없는 사람들이 많이 이용한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한국 시람들이 가장 좋아한다는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코스-안나푸르나 등반을 위한 베이스캠프가 있는 곳까지 갔다오는 코스인데 거의 북한산을 방불케 하리 만큼 한국 사람들이 많단다-의 네 가지 정도로 구분되는데 뭐 이 네 코스를 이래저래 섞어서 가는 경우도 종종 있는 모양이다.


일단 내가 가려고 하는 코스는 하프라운딩 코스인데 일단 비행기를 타고 좀솜이라는  지역까지 올라가서 신들의 성지라는 묵디나뜨로 올라갔다가 포카라까지 가는 버스가 다니는 베니까지 천천히 아래로 내려오는 코스로 일단 내려오는 길이라 길이 힘들지 않을 거라는 얄팍한 계산이 이 코스를 결정하는데 큰 작용을 하게 된다. 다른 일행들도 이 코스에 큰 이견이 없어 일단 좀솜까지 가는 비행기를 타기로 하고 배낭을 꾸린다. 좀 지저분한 데로 그냥 살기로 마음먹고 배낭은 따로 빌리지 않고 중국에서 산 보조가방을 그냥 들고 가기로 한다. 일행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노트북까지 챙겨 넣고 나니 침낭이 들어가질 않는다. 다른 일행들은 침낭을 두고 간다는데 추우면 만사가 싫어지는 내 성향을 고려해 배낭위에 다시 침낭을 달아맨다. 대략 오륙킬로쯤 되는 것 같다. 뭐 카메라 세 개들고 가는 사람도 있는데 이 정도면 아주 양호한 편이다^^


대략 이런 차림으로 길을 나섰더랬다


트레킹 1일차(포카라-베니)


다음날 일찍 공항으로 나간다. 아침에 비오면 비행기 안 뜰 확률이 90%라는데 다행히 날씨가 화창하다. 하지만 항공사 직원은 오늘은 날이 안 좋아서 비행기가 뜰지 안뜰지 확실치 않단다. 이렇게 화창한 날도 안뜨면 대체 비행기가 언제 뜬다는 거냐 해가며 기다려 보았지만 결국 좀솜 쪽에 바람이 많이 불어 비행기는 캔슬되고 만다. 제일 싼 국영 항공기인 로얄 네팔 표를 샀더니만 이놈의 비행기는 일주일에 세 번만 운행하는 스케줄이라 다음 비행기가 뜨는 토요일까지 무려 사흘이나 하릴없이 기다려야 할 판이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짜가 잡혀 있는 작가 아저씨가 먼저 결단을 내린다. 버스타고 베니까지 가서 걸어 올라가겠단다. 짠돌이 대학생과 대구 청년이 동의한다. 원래 트레킹에 큰 뜻이 없었다가 내 꼬임에 넘어가 길을 나선 사진작가 친구는 전 안갈래요, 다녀오세요, 저는 포카라에서 기다리고 있을께요 하며 천하태평이고 정작 나는 걸어서 올라가는 건 영 자신이 없어 결정을 못 내리고 있다가 이왕 짐도 싸서 나왔지, 장비도 빌렸지, 심지어 2000루피나 주고 퍼밋도 받아놨는데 예서 말수는 없다는 생각에 간단히 푼힐이나 다녀오자고 맘을 바꿔먹는다. 포카라에서 쉬겠다는 사진작가 친구를 다시 꼬셔-내내 툴툴거리기는 하지만 일단 꼬시면 잘 넘어오긴 한다^^- 푼힐이나 다녀오기로 한다. 단 푼힐가는 길을 조금 에둘러 일행과 같이 베니까지 간 뒤 온천이 잇는 마을인 따또빠니까지 갔다가 일행들은 계속 올라가고 우리는 푼힐을 들러 내려오는 코스이다.


비행기표를 환불하고 버스 정류장으로 가본다. 비행기표를 환불한 여행사에서는 이미 버스는 끊겼으니 택시나 지프를 대절해 베니까지 가라고 꼬셨지만 시간이 이fms 편이라 그냥 터미널로 나가 본다. 다행히 베니까지 가는 버스가 있다. 버스는 푼힐 등산로 입구인 나야풀을 지나 두시간 남짓 비포장도로를 달리고서야 우리를 베니에 내려 준다. 우리가 베니에 sols 시각은 다섯시가 가까워 오는 시간이다. 그러나 내려오는 비행기도 안뜰지 모르니 걸어서 내려오겠다는 세명이 마음이 바쁜지 일단 다음 마을까지 그냥 걸어가겠다는 의사를 밝힌다. 우리야 어차피 온천이 있는 따또빠니 까지만 가면 그만이니 굳이 서둘러 움직일 생각이 없다. 결국 일행들과 헤어지고 베니에 숙소를 잡는다. 다섯명이 함께 가기로 한 트레킹은 결국 3대 2로 찢어진다. 같이 가면 재미있을 것 같기는 한데 또 한편 여러 명이 같이 다니니 의견 조율하기도 쉽지 않아 차라리 잘 됐다 싶은 생각도 든다. 여튼 일행과 헤어지고 첫날을 베니에서 묵는다. 


트레킹 루트의 초입이자 마지막 마을이기도 한 베니는 상당히 큰 마을이다. 베니까지는 멀쩡하게 차가 다님에도 불구하고 물가는 트레킹 지역에 준하는 요금 체계로 되어 있다. 즉 방값은 비교적 저렴한데 비해 저녁은 그 숙소에서 먹어야 하는 시스템으로 음식값은 물론 상당한 가격이다. 물론 상당한 가격이라는 일반적인 네팔 물가에 비해서인데 대략 방값이 우리 돈으로 2000원 정도인데 비해 음식은 간단히 먹어도 일인당 2000원은 줘야 하니 대략 하루 비용으로 만원은 잡아야 하며 맥주라도 한잔 먹으려면 그 이상을 생각해야 하는 셈이다. 베니에서는 숙소에서 간단하게 저녁만 먹고 아침으로는 수도 없이 남았으나 안 먹으면 상할 게 분명한 계란양과 감자군을 꾸역꾸역 우겨 넣고 길을 떠난다.


마을에서 만난 아이들1, 큰놈이 먼저 자세를 잡으니 작은 놈이 어느새 따라서 자세를 잡는다.


마을에서 만난 아이들2, 찍은 사진을 보고 좋아라 하더니 그뒤에도 한참을 뭐라고 재잘거리며 쫓아온다.  


트레킹 2일차(베니-따또빠니)


이날 여정은 대략 9시간을 걸어야 하는 일정인데 맘먹고 걷기 시작한 지 한 시간만에 이 길이 버스-트럭을 개조한 썽태우 비스름한 것이긴 하지만-가 다니는 길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당근 트레킹에는 전혀 뜻이 없는 사진작가 친구가 버스를 타고 가자고 조르기 시작한다. 물론 나도 버스 타면 편한 거야 알지만 그래도 트레킹인데.. 조금 망설여진다. 좀 걷다가 나중에 힘들면 타자고 다시 꼬드긴다. 물론 넘어온다^^ 하긴 타자고 합의를 했어도 버스가 만원이라 다음 버스까지 한참은 기다려야 했을 것 같긴 하다. 계곡을 따라 한참을 걸어보지만 버스가 다니는 길이라는 데서 짐작이 가듯 그만그만한 풍경이 이어진다. 점심도 남아있는 감자군과 계란양으로 때운다. 비닐봉지가 모자라 둘을 동침시킨 탓인지 감자에서도 온통 계란 냄새다. 이제 당분간 삶은 계란은 쳐다보기도 싫을 것 같다. 갈섶에 앉아 점삼을 먹고 다시 걷기 시작한다. 결국 여섯 시간 쯤 걸어 목적지 이전에 있는 마지막 마을에 도착한다. 슬슬 비도 내리기 시작하니 걷는 것이 조금씩 고역이 된다. 이제 버스를 타기로 하고 버스 시간을 물어보니 허걱 이제부터는 버스가 못 다니는 길이란다. 버스 타자고 할때 탔어야 한다는 친구의 지청구를 들으며 다시 빗 속을 걷는다. 마지막 한시간 정도는 거의 폭우기 쏟아진다. 우비를 입으면 사우나 속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더운데 중국에서 산 보조가방은 방수가 전혀 안되는 배낭이니 별수 없이 계속 우비를 입고 걸을 수밖에 없다. 결국 세시간을 더 걸어 어둑어둑해진 뒤에야 목적지인 따또빠니에 도착한다.


따또빠니 가는 길, 아직은 풍경이 그만그만하다.


갈길도 바쁜데 양떼가 길을 막는다


트레킹 3일(따또빠니에서 온천)


올라오기 전부터 아니 티벳에서부터 온천, 온천 노래를 부르던 사진작가 친구 덕분에 꼭두새벽부터 계곡 어귀에 있는 노천 온천을 찾아 간다. 옆으로는 계곡이 흐르고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이 유황 온천에는 이른 시간에도 현지인들이 제법 모여 있다. 아마 날씨가 더운 탓에 아침저녁에 사람이 더 많은 것 같다. 입장료 20루피(약 300원)을 내고 들어가 보니 입고 들어갈 옷이 마땅치 않다. 트레킹이라 생각하고 반바지 하나 챙기지 않은 탓인데 결국 어찌어찌 반바지를 하나 빌린다. 물 온도는 적당히 따뜻하다. 물에 들어갔다 나왔다 한시간여를 보내다가 탕옆에 앉아 때도 말고 빨래도 하며 여유있는 시간을 보낸다. 에구 이걸 트레킹 마치고 하면 얼마나 맘이 개운할까 싶은데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담날 푼힐로 갈까 생각해보니 푼힐 가는 길도 어차피 이틀은 더 자야 하는 길이니 그냥 좀솜으로 갔다 비행기 타고 내려가는 게 어떨가 의사를 타진해 본다. 오는 길에 푼힐로 갈라지는 갈림길에서 엄청난 오르막을 목격한 친구도 슬며시 맘을 바꾼다. 일단 좀솜까지 올라가기로 한다. 묵디나트는 나 혼자 다녀오겠다고 한다. 여튼 맘을 바꿔준 친구가 고마워 저녁엔 소원대로 다시 한 번 온천에 다녀 온다. 밤하늘에 떠 있는 별을 보며 온천물에 몸을 담그고 있는 것도 괜찮은 기분이다.     


온천이 있는 따또빠니 마을  


따또빠니 온천, 이런 탕이 두 개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