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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콕> 일산주민과 만나다

라오스 국경을 넘어 태국쪽 국경도시인 총멕에서 방콕행 버스를 타니 12시간을 꼬박 달려 다음날 새벽에야 북부터미널에 내려준다. 같이 국경을 넘은 일본인 커플과 택시를 같이 타고 카오산에 도착하니 6시가 조금 넘어 있다. 이 시간에도 체크인이 가능할까 하면서도 일단 위치도 좋고 좀 깨끗한 게스트하우스들부터 하나씩 들어가 보기 시작한다. 그러나 좀 그럴듯한 게스트하우스들은 죄다 방이 풀이란다. 카오산 로드는 벌써 성수기가 시작된 모양이다. 예닐곱 군데를 돌아도 빈 방은 단 하나가 없다. 그나마 좀 친절한 곳은 체크아웃이 12시이니 11시쯤 다시 와 보라는 말이 고작이다. 먼저 아침을 먹고 숙소에 붙은 카페에서 방이 나기를 마냥 기다린다. 10시가 지나 11시가 되어도 원하는 방은 나오질 않는다. 결국 12시가 훌쩍 넘어서야 트윈룸이 하나 나온다. 방은 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그냥 체크인을 하고 나니 방이 좀 작은 듯도 하다. 하지만 그나마 방을 잡은 것만 해도 어디냐 싶다.


한잠을 자고 일어나 가방을 찾고 빨래도 맡기고 인터넷에 여행기까지 올리고 나도 아직 일산주민이 오기까지는 서너 시간이나 남아있다. 술을 마시기도 뭣해 그저 방에서 음악이나 듣다가 조금 빨리 약속장소로 나가본다. 밤1시가 넘은 카오산 거리는 그야말로 가관이다. 낮에 의자가 놓여 있던 길거리에 어느새 비닐 장판 비스름한 것이 깔리고 그 위에 족히 백명은 넘어 보이는 서양애들이 퍼질러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게 아닌가.. 어이구 인간들아 늬들 상태도 과히 좋지는 않아 보인다 하면서도 대체적으로 과거에 우리가 술마시던 모습이 겹쳐져 피식 웃음이 나온다. 일산주민은 예상과는 달리 혼자 우아하게 택시를 타고 등장한다. 뭐 아무리 찾아도 신혼여행 온 부부만 백여 쌍 봤을 뿐 배낭여행자는 없어서 그냥 혼자 타고 왔다는데 막상 만나니 뭐 어제보고 다시 본 듯 그만그만하다.


첫날 좀 늦기는 했어도 그냥 넘길 수 없어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와 마신다. 뭐 익숙한 이름들이 오가는 방에 같이 있으니 일산주민 왈, 여기가 방콕인지 가라뫼인지 구별이 안 간단다. 하긴 방분위기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고 딱 가라뫼다 해가며 낄낄거리다 잠이 든다. 담날은 뭐 당연하게도 늦게 일어난다. 오후가 시작될 무렵 왕궁 근처와 사원 두 개을 들렀다 보트를 타고 다시 돌아오니 어느새 저녁이다. 담날은 버스를 타고 방콕 시내를 다녀온다. 여기도 시내에는 크리스마스트리도 있고 산타클로스도 보이긴 하는데 날씨 탓인지 영 연말분위기가 나는 것 같지는 않다. 방콕이라는 도시가 딱히 볼 것이 있는 것도 아니라 그저 내키는 대로 다니다 뭐 먹을까 고민이나 하고, 심심하면 타이 맛사지도 받았다가, 얼굴마사지도 받았다가, 내친 김에 머리도 자르고 나니 어느새 이틀이 지나있다.


방콕에 더 이상 머무를 이유도 없어 일단 북부 쪽으로 먼저 갔다가 남부 쪽 해변으로 가기로 루트를 정하고 치앙마이로 가는 밤차를 예약해 둔다. 대략 치앙마이-치앙라이-아유타야-끄라비-피피-방콕의 일정이 될 듯한데 크리스마스는 북부에서, 새해는 남부에서 보내게 되는 일정이다. 일산주민이 돌아가는 날은 1월 9일이지만 그전에 앙코르와트를 들렀다 돌아갈 예정이니 1월 5일 경에는 헤어져야 할 것 같아 1월 6일자로 미얀마 비행기표도 같이 조정해 둔다. 사실 일산주민이 오지 않았다면 치앙마이 정도는 몰라도 남부 쪽으론 얼씬도 안했을 텐데 태국을 두루두루 볼 수 있게 된 것도 고마운 일 중의 하나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뭐 가장 고마운 것은 썰렁하기 이를 데 없는 연말을 같이 보낼 술친구가 생겼다는 사실이지만 말이다^^


 


기억나나.. 태국여행에서 같이 먹었던 푸퐛퐁 커리와 홍합탕. 그 집에 한글간판과 한글 메뉴도 생겼다는 사실을 함께 전한다.


방콕에서 찍은 사진이 없이 치앙마이에서 같이 찍은 사진을 올린다. 뭐 한 일주일만에 상태 나빠진 일산주민의 모습을 보라..


사실 방콕 여행기는 일산주민이 쓰기로 했는데 계속 게으름을 부리는 통에 먼저 써버렸으니 이어지는 치앙마이 여행기를 안숙이 쓰라는 캠페인이라도 벌여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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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판돈> 시간이 멈추다

씨판은 4천, 돈은 섬이란 뜻으로 씨판돈은 라오스말로 4천개의 섬이란 뜻이다. 메콩강이 라오스 남부로 오면서 강 하류가 넓어지면서 여러 개의 섬을 만들어 낸다고 하는데 그 수가 사천개에 달한다는 것이다. 물론 하롱베이처럼 그 섬들이 눈앞에 펼쳐지는 건 아니고 그냥 섬의 개수가 4천개라니까 그런가 보다 하는 거지 그냥 봐서는 그저 육지인지 섬인지도 구별이 되지는 않는다. 여튼 강이 만들어낸 지형의 영향으로 오랫동안 외부의 영향을 벗어나 살고 있는 이곳은 지금도 강을 따라 시간과는 상관없는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이 4천개의 섬 중에 여행자들이 머물 수 있는 섬은 단 3개인데 그중 큰 섬이 돈콩이라는 섬이다. 돈콩으로 가기 위해 짬빠삭에서 빡세로 나가는 길을 되짚어 오다가 갈림길에서 버스를 내린다. 빡세는 북쪽이고 돈콩은 남쪽이니 갈림길 어귀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트럭버스를 기다린다. 뭐 몇 시에 오는지도 모르니 그냥 하염없이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한 30분을 기다리고 있으니 버스 한대가 서곤 돈콩 타라고 소리를 지른다. 그저 배낭만 들고 있으면 말 안해도 어디 가는지 다 써있는 모양이다^^. 잽싸게 버스에 올라타니 사람들이 반갑게 맞아준다. 라오스 사람들은 눈만 마주치면 싸바이디하고 인사를 하는데 서양애들의 으례적인 핼로우와는 달리 제법 순박한 미소까지 전해진다. 사실 어느 나라를 가거나 그 나라 인사 정도는 외워가기 마련인데 거의 쓸 일이 없는 경우가 많은 데 라오스에서 만큼은 싸바이디란 인사가 입에 붙어 다닌다.


버스는 돈콩 건너 강변에 나를 포함한 두 명의 여행자를 내려주고 간다. 다시 배를 타고 강을 건너니 걸을 필요도 없이 선착장 근처에 게스트하우스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아.. 라오스 남부를 일컬어 시간이 멈춘 곳이라더니 여기도 여행자만 몇 명 눈에 뛸 뿐 심하게 조용한 동네다. 짐을 풀고 강변을 따라 조금 걷고 나니 벌써 할 일이 없다. 게다가 이곳엔 정말 인.터.넷.도 없다. 다행이라면 나머지 두개의 섬에는 안들어 온다는 전기가 있다는 정도일까.. 저녁을 먹고 앉아 있는데 으악.. 짬빠삭에서 만났던 스페인 처자 엘사가 아는 척을 한다. 투어를 신청했냐고는 묻더니 5명 이상이 되어야 투어가 가능하니 같이 보트 투어를 하잖다. 그래서 나머지 사람들은 누구냐고 했더니 잉글리쉬 커플과 저먼 커플이란다. 죄다 다시 만나 버린 것이다. 그 사람들이 주위에 모여들고 다시 지난밤의 악몽이 재현된다. 이번에 영국아저씨에게 여행 다니려면 영어공부 열심히 해된다는 충고도 듣는다--:;


돈콩에 있는 두개의 마을 중 여행자들아 머무는 므앙콩


오토바이에 실려 다녀온 반대편 마을 므앙센의 일몰


돈댓과 돈콘이라는 나머지 두개의 섬은 서로 다리로 연결되어 있는데 폭포와 이제는 흔적도 없고 기차만 덩그러니 서 있는 철로-프랑스 식민지 시절 화물수송을 위해 만들었다는데 여튼 인도차이나 반도는 죄다 프랑스 식민 잔재가 관광자원화 되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메콩강에 서식한다는 희귀 동물인 이라와디 돌고래 구경 정도가 볼거리인데 엘사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관광 후에 그냥 돈댓이라는 섬에 머물기로 해 이른 아침과 늦은 저녁 그것도 배를 타고 더 나가야 볼 수 있다는 돌고래는 포기하고 그냥 보트로 두 섬을 돌아보기로 한다. 담날 선착장에 나가보니 어제의 6명이 투어 인원의 전부이다. 이제 거의 체념이 되는 게 차라리 맘이 편하게 느껴진다^^. 돈콘에서 폭포와 철로를 보고 돌고래를 보러 나갈 때 이용한다는 선착장에 들렀다 돈댓으로 보트를 타고 이동한다, 돈댓에서 내려 일부는 방을 정하고 엘사와 나는 잠시 돈댓을 둘러보고 다시 돈콩으로 돌아오는 일정이다.


돈콘에 있는 쏨파밋 폭포


선착장, 여기서 배를 타고 나가면 강에 사는 돌고래를 볼 수 있단다.


돈댓은 열대야자수가 가득한 섬으로 강변을 따라 방갈로가 들어서 있는데 하루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해먹에 누워 강만 바라보는 인간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잠시 내일은 여기나 와 볼까 하는 생각도 했으나 전부 공동욕실에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다는 말에 그냥 돈콩에 있기로 한다. 한가함.. 낭만.. 이런 것도 밖에서 볼 때나 좋은 거지 막상 겪어보면 보통 심심한 게 아니란 걸 이제 나도 안다. 게다가 사람들에 치이고 일에 치여서 죽어도 쉬어야 되는 상태가 아닌 나 같은 사람에겐 더욱 괴로운 법이다. 살짝 가볼까 하는 마음을 이성적^^으로 누르고 다시 돈콩으로 돌아온다.


방갈로,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강을 바라보며 해먹에 누워 흔들거린다


돈댓, 십년이 가도 아무 일도 일어날 것 않다

그러고도 아직 비자 만료까지는 이틀이나 시간이 남아 있다. 비자야 만료 전에 나가도 누가 뭐랄 사람은 없지만 얼마 전 확인한 일산주민의 메일엔 암웨이 인간들이 삼천명이나 태국으로 출국하는 바람에 오기로 한 날보다 하루 늦게 도착한다고 되어 있었으니 비자 만료날에 나가야 방콕에서 일산주민과 바로 만날 수 있다. 물론 방콕에 가서 하루 이틀 기다려도 되지만 카오산 로드는 너무 번잡하고 혼자 있으면 좀 이상해지는 곳이라 차라리 여기서 날짜를 채우고 나가는 것이 나을 것 같다. 그렇지만 여기서 뭐하고 이틀을 보내나 그저 한숨만 나온다.


하루는 여행기나 정리하면서 보낸다. 자전거 타기도 지겨워져 오토바이에 실려 마을의 반대편까지 갔다 와도 시간은 지천으로 남아있다. 설상가상 e-book은 윈집이 기간이 만료되었다나 어쨌다나 하면서 열리지도 않는다. 나머지 하루를 더 버티기가 싫어져 그냥 빡세로 떠날까 생각도 해본다. 그나마 빡세에서는 인터넷도 가능하고 라오 커피도 한 번 더 마실 수 있고 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냥 빡세로 가야겠다 싶은데 오토바이를 태워준 라오아저씨와 빡세에 같이 가기로 한 약속이 떠올라 그냥 돈콩에 머무르고 만다. 자전거 타기 귀찮아 실려간 오토바이 아저씨가 이것저것 묻더니 모레 자기도 빡세 시장에 간다며 같이 가자고 해 그러지고 한 것이다. 왜 같이 가자고 했는지야 알 수 없지만 것도 약속은 약속이니 일방적으로 깰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도 시간은 흐르고 흘러 드디어 떠나는 날이 온다. 국경을 넘어 밤버스로 하루만 더 가면 일산주 민과 만나는 날이 온다. 마침 그날은 내가 여행을 시작한 지 100일이 되는 날이기도 하다. 일산주민과 함께 백일주나 마셔야겠다. 근데 백일주는 디데이 백일 전에 마시는 술인 것 같은데.. 아닌가 에라 모르겠다. 언제는 핑계가 없어서 못 마셨나 여튼 일산주민이 과음하게 해 주겠다고 장담했으니 믿어보는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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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빠삭> 영어가 웬수다

 

짬빠삭은 왓푸라는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 있는 메콩강변의 조그만 마을이다. 사실 빡세에서 30km쯤 떨어져 있는 곳이라 빡세에서 하루 정도 시간을 내어 다녀오면 되는 곳이지만 어차피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이니 굳이 다시 돌아오기도 번거로운데다 있는 거라곤 시간뿐이니 그냥 짬빠삭에서 하루이틀 묵어 가기로 한다. 정보에 따르면 9시와 11시에 남부터미널에서 사람이 다 차는대로 트럭버스가 떠난다고 하니 대충 9시 경에 터미널로 나가본다. 뭐 터미널이래야 흙먼지 풀풀 날리는 벌판에 버스 몇 대와 좌판 몇 개 벌여놓은 게 다긴 하지만 그래도 남부로 가는 차들은 죄다 이곳에서 떠난다는 교통의 요지다.


물어물어 찾아간 짬빠삭행 버스는 제법 큰 트럭버스다. 언제 출발하냐고 물었더니 땅바닥에 11이라고 쓴다. 아직 9시도 채 안됐는데 9시 버스는 벌써 떠났는지 흔적도 없고 이 버스는 11시에 떠난다니 그 시간 동안 뭘하나 하며 터미널 주변을 기웃대고 있는데 30분도 채 안 지나나 갑자기 기사가 타라고 손짓을 한다. 나 하나 싣고 떠날 리는 없고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싶어 그냥 타고 보니 온 길을 되짚어 시내 근처의 시장 쪽으로 간다. 그러더니 트럭 지붕에서 끝도 없이 짐을 내리고 또 싣는다. 이 버스의 기능은 단지 사람만 수송하는데 있는 건 같지는 않다^^. 그러더니 사람이 하나둘 타기 시작한다. 게스트하우스에서는 남부터미널이 출발지라고 했는데 어찌된 노릇인지 모르겠다. 바닥은 어느새 각종 보따리와 비닐봉지도 가득찬다. 그러더니 정말 11시가 조금 넘어서 출발한다.


빡세의 남부터미널, 물론 북부터미널도 따로 있다^^


대략 사람이 이 정도는 차줘야 차가 떠난다.


한시간이나 달렸을까.. 이번에는 강이 가로막는다. 차를 배에 싣고 내리는데 한시간.. 결국 30km 떨어진 마을까지 오는데 4시간이 걸린 셈이다. 마을 입구에서 하염없이 짐을 내리는 것을 바라보며 이번엔 또 언제 가나 하고 있는데 사람 좋아보이는 아저씨가 말을 붙인다. 손님 픽업 나온 게스트 하우스 주인이다. 이름을 들어보니 가이드북에 있는 이름인 건 같아 얼른 내린다. 아저씨의 뚝뚝을 타고 메콩강이 바라보이는 숙소에 짐을 푼다. 방값은 2달러, 비록 더운물은 안 나오지만 그래도 개인 욕실이 달려 있는 방이다. 짬빠삭은 워낙 작은 마을이라 픽업당해 온 1km 남짓한 길이 메인도로이자 마을의 전부이다. 동네 구경이나 나가야지 하고 갔다가 그저 골목의 집들만 실컷 보고 돌아온다.  


선착장, 이곳에서 차를 배에 싣고 강을 건넌다.


산책 나갔다 만난 동네 아이들, 정신이 하나도 없다.


작은 마을에 오니 사람들도 착해지는지 저녁을 먹으려고 혼자 앉아 있으니 일군의 다국적 인간들이 같이 저녁을 먹자고 권해 온다. 영국인 부부, 호주 아줌마, 스페인 처녀 그리고 독일 커플이다. 이름도 수에 파멜라에 그레이엄에 엘사까지 뭐 영화에나 나옴직함 이름들이다. 그나마 처음에 여행 영어를 할 때는 이래저래 묻기도 하고 대답도 되더니 점점 일상 대화로 흐르니 말도 무지무지 빨라지고 대략 내용의 30% 정도 밖에 들리지 않는다. 그것도 내가 이런 내용일거야 짐작한거지 사실인지 아닌지야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저녁 먹는 두세 시간 고문 아닌 고문을 당하고 있다가 새삼 영어 공부 안하고 뭐 했는지 후회가 밀려온다. 하지만 후회는 후회고 현실은 현실인터 내일 저녁 먹을 때는 저 사람들을 꼭 피해서 먹어야지 다짐해 본다^^.

 

다음날은 자전거를 타고 왓푸에 다녀온다. 앙코르와트를 만든 크메르인들이 만들었다는 이 사원은 앙코르와트보다 이른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탑을 쌓아 올린 것이 아니라 산을 따라 지형을 높이하면서 만든 독특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 곳이다. 짬빠삭에서 왓푸까지는 8km 떨어져 있는데 자전거로 1시간쯤 걸린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길 사이로 벼베기가 끝난 논들이 펼쳐져 있고 중간 중간에 그림 같은 마을들을 지나친다. 다행히 구름이 약간 끼어 있어 햇살도 그리 뜨겁지 않다. 왓푸도 여느 유적들이 그렇듯 원래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무너져 있다. 그나마 앙코르와트는 세계 각국의 도움이라도 있어 계속적인 수리를 하고 있지만 여기는 그냥 더 이상 안 무너지게 대충 갈무리만 해 놓은 듯 여기저기 잔해들이 굴러다닌다. 몇 개의 계단을 올라 중앙 성소에 이르니 힌두석실 안에 금박을 입은 부처상이 자리를 잡고 있다. 국교가 힌두교에서 불교로 바뀌면서 생긴 현상이라는데 그러보니 앙코르와트에도 여기저기 불상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하게 앙코르와트의 불상은 그렇지 않더니만 이건 금박이라 그런지 이상하게 이물감이 느껴진다.


왓 푸, 얘도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 유산이다


중앙 성소로 오르는 길


중앙 성소에서 바라본 왓 푸


왓푸는 왓푸 자체보다 중앙 성소에서 바라보는 전망이 근사하다. 가깝게는 욋푸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고 멀리는 메콩강도 보이고 넓은 라오스의 평원이 한 눈에 들어온다. 천몇백년 크메르인 누군가가 깍았을 돌 위에 한참을 앉아 있는다. 앙코르와트처럼 관광객이 떼로 몰려 다니는 곳이 아니라 조용하게 앉아 쉬기에는 그만이다. 내려오는 길에 그저 구색이나 맞추려고 지은 듯한 박물관에 잠시 들렀다 다시 자전거를 타고 돌아온다. 어둡기 전에 돌아오려고 조금 서두른다. 도로는 평평한데 군데군데 길이 패여 어두워지면 자전거를 타기가 쉽지  않을 듯하다. 숙소에 돌아와 보니 어제 본 일군의 인간들은 모두 떠났는지 보이지 않는다. ㅎㅎ 다행이다. 주인아저씨에게 다음 행선지인 돈콩 가는 길을 물어보고 일찌감치 잠자리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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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빡세> 다시 길을 떠나다

빡세로 가는 여행자 버스가 풀이라 로컬버스를 탄다. 예약을 미리 해두긴 했지만 픽업을 하러 오는 게 아니라 남부터미널까지 직접 나가야 한단다. 시내에서 거의 10킬로 떨어진 곳까지 닛이 오토바이를 태워준다. 기름값이나 하라고 얼마간 쥐어주긴 했지만 언니 언니하며 데려다준 그 마음이 고맙다. 다시 라오스에 올거라고 그때 다시 보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닛은 영어가 안되고 나도 라오스말이 안되니 그저 꼭 껴안았다 놓는 걸로 말을 대신한다. 닛을 보내고 버스를 탄다. 빡세로 가는 밤버스는 로컬버스긴 해도 V.I.P버스라 그런지 시설도 좋고 도시락이랑 물도 준다. 이전 밤버스의 경험으로 긴팔을 입고 차에 있는 담요까지 뒤집어 썼는데도 추워서 잠이 오질 않는다. 아무리 에어컨 버스라도 그렇지 날씨가 이리 쌀쌀한데 에어콘을 끝까지 틀어대는 이유는 정말 알 수가 없다. 자다깨다 바라본 창밖에는 쏟아질 듯 별들이 반짝인다. 내 생전 저렇게 많은 별들을 본 적이 있을까. 별들은 밤새도록 버스를 따라 온다.


라오스 남부의 중심도시인 빡세에 도착하니 중심 도시 같지 않은 한가함이 느껴진다. 그저 여느 도시에 도착해서 하는 것처럼 강가도 거닐어 보고 사원도 들러본다. 어디를 가도 조용하고 느긋한 시간들이다. 트래블 게릴라에서 봐둔 커피집을 찾아간다. 베트남 커피뿐 아니라 라오 카피도 질이 좋기도 유명하다는데 그 대부분이 이 남부 지방의 볼레본 고원에서 생산되는 것이라 한다, 어디나 맛있는 집이 그렇듯 이집 커피도 다른 커피에 비해 대략 두배 쯤 되는 가격을 받고 있는데 두배 아니라 세배를 줘도 아깝지 않을 만큼 맛이 탁월하다. 베트남  커피도 집마다 다 맛이 달라 정말 맛있는 곳은 두세 곳에 불과했는데 그 집들보다 나으면 나았지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것 같다. 시간이 되면 다시 한 번 들르고 싶지만 아무래도 그건 쉽지 않을 것 같아 아쉬운 마음으로 숙소에 돌아온다. 나가기 전에 신청해둔 볼레본 고원투어가 인원이 안 되서 무산되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내 뒤로 4명이 더 신청되어 있다.


세돈강 다리에서 바라본 빡세 시내


다음날 일찍 볼레본 고원 투어를 간다. 현대 1톤 트럭 뒤에 지붕을 씌우고 좌우에 의자를 만들어 앉을 수 있게 해놓은 이른바 트럭버스를 탄다. 뒤 칸에 투어신청자 여섯명과 가이드가 함께 타고 흔들리면 산길을 간다. 4개의 폭포와 차와 커피 플랜테이션 그리고 소수민족마을 한 곳을 돌아보는 일정이다. 대략 고원이란게 다 비슷한 환경인건지 베트남의 고원지역인 달랏에서도 폭포며 커피, 소수민족 마을 등이 주 여행상품이었는데 여기도 비슷하다. 그래도 산이 국토의 대부분인 라오스는 동남아의 다른 나라에 비해서 폭포가 좀더 많은 것 같은데 종류도 다양해 흔히 볼 수 있는 폭포부터, 협곡으로 냅다 떨어지는 놈, 옆으로 퍼져 다양한 물줄기를 만들어내는 놈, 대여섯개가 아기자기 모여 있는 놈 등 꽤 볼만한 거리를 만들어낸다. 차 재배지나 차 만드는 과정의 경우는 우리나라에서도 볼 수 있는 풍경이라 그리 신기할 건 없지만 커피의 경우는 흔하게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라 그런지 제법 눈길을 끈다.  


볼레본 고원


4개의 폭포 중 하나, 이름은 도무지 기억할 수 없다.


점심을 먹고 다시 비포장도로를 한참이나 달려 도착한 곳은 무슨 무슨족이 사는 소수 민족 마을이다. 투어 중에 들르는 소수 민족마을이란 게 무슨 동물원에 동물 구경 가듯 사람 구경 가는 것 같아 썩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내린다. 사실 지들은 소수민족이라지만 내가 보기엔 옷 좀 다르게 입고 있는 것 말곤 다 똑같아 보이는 것도 이유 중에 하나라면 하나겠다. 파인애플 등을 팔고 있는 마을 입구를 지나니 마을 어귀에 학교가 보인다. 학교가 파한 시간인지 아니면 휴일인지 학교에는 몇 명의 아이들만 놀고 있다. 아이들에게 뭔가 주려거든 돈은 주지 말고 펜이나 교육에 필요한 것을 주라는 가이드의 말이라도 들었는지 아이들은 따라 다니면서 펜을 달라고 한다. 사진을 찍은 댓가로 펜이라도 주면 좋으련만 라오스에 가기 전에 펜이라도 몇 개 가져가라던 사람들의 충고를 무시한 것이 후회가 된다.


마을 어귀의 학교


칠판에 낙서하는 아이들은 어디나 있다^^


마을 안으로 들어서니 대나무로 얼기설기 엮은 집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른바 스모킹 빌리지라는 이 마을은 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대나무 파이프로 된 담배들을 피우는데 열두어살 된 여자애들이 담뱃대를 물고 있는 모습이 묘한 느낌을 준다. 스모킹 빌리지라는 관광 자원을 놓칠 수 없어서 그런건지 아님 정말 마을의 전통인건지 알 수 없지만 사람들은 여기저기 앉아 담배를 피우는 일 말고 아무 할 일이 없는 사람들처럼 앉아 있다. 일상이 멈춘 것 같은 이 마을에도 학교도 있고 아이들이 자라는데 이 아이들이 어른이 될 무렵 이 마을은 어떻게 되어 있을지 마을을 돌아 나오는 맘이 그리 가볍지는 않다.


여자 아이가 들고 있는 것이 담배 파이프다


마을에서 만난 아이들


마지막으로 폭포를 하나 군데 더 보고 돌아 나오는데 당연한 수순처럼 차가 퍼진다. 모든 라오스 여행기에는 차가 퍼지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예외는 없는 모양이다. 누군가가 농담처럼 쓴 글에 차가 퍼지고 한참을 기다려도 다른 차가 안 오길래 항의하려다가 니네 나라 차가 퍼져서 그런달까바 암말도 못했다더니 아니나 다를까 이 차도 현대 트럭이다. 우리나라에서 폐차 직전까지 시달리다가 라오스까지 팔려와 성형 수술까지 당하고 수명 이상의 기능을 하고 있는 트럭이며 버스들에게 경의라도 표해야 할 것 같다. 다른 차가 오기까지 꼬박 두 시간을 기다린다. ㅎㅎ 데리러 온 차는 일제 토요타다. 트럭 뒤에 앉아 추위에 떨면서 쏟아질 듯한 별들을 보며 다시 숙소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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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앙짠2> 발목이 잡히다

 

라오스로 가는 길은 두 번째라 그런지 별 설레임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밤을 달려 새벽 무렵에 태국 쪽 국경도시인 농카이에 도착한다. 다시 툭툭을 타고 국경에 도착하니 7시가 조금 넘어있다. 국경에서 비자를 받는데 수수료가 31불이다. 어라 비자는 30불에 지금은 업무외 시간도 아닌데 왜 1불을 더 받나 물어 봤더니 이럴 수가.. 오늘이 라오스 독립기념일이란다. 고로 라오스의 휴일인 것이다. 아.. 꼬인다.. 라오스가 휴일이면 미얀마 대사관도 휴일이고 내일은 토요일, 모레는 일요일.. 비자는 삼일 뒤인 월요일에나 신청이 가능한데다 라오스에 있는 미얀마 대사관은 급행이란 것도 없어 발급까지는 꼬박 이틀을 더 기다려야 한단다. 그렇다면 죽으나 사나 위앙짠에서 6일이나 있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오는데 별로 볼 것도 할 것도 없는 동네에서 뭐 하고 지내나 막막해진다.


다행히 위앙짠에는 한국인 게스트 하우스가 있어 도미토리에 짐을 풀고 책이나 읽다가 책 읽는 것도 지겨우면 사람들 구경이나 하면서 보낸다.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방콕에서 밤을 달려 도착해선 하루를 묵고 방비엥으로 가버리기 때문에 별로 이야기할 기회가 없지만 두어 명 장기 여행자로 보이는 사람들과 사장과 친분이 있어 보이는 몇몇 라오스 거주 한국인들이 게스트 하우스 죽돌이 비슷하게 진을 치고 있어 별로 심심하지는 않다. 하루 이틀은 서먹하더니 이삼일이 지나니 자연스럽게 저녁마다 만들어지는 술자리에 끼게 된다. 참 이상한 게 한국 여행자 없는 곳에서는 나랑 조금 다른 사람을 만나도 그러려니 금방 친해지는데 오히려 한국 사람들 많은 곳에서는 말 건네기도 더 조심스러워지는 것 같다. 그저 옆에 앉아서 고개나 끄덕이고 있는다. 왠지 낄 자리가 아닌데 끼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냥 편한 것 같기도 하고 그냥 그런 몇 날이 흘러간다.


그 와중에 게스트 하우스 앞마당에 두개의 가게가 오픈 한다. 앞마당이라야 그저 게스트하우스 입구에 있는 한평 남짓한 진입로가 다긴 하지만 어느 날 아침에 나가보니 선반이며 파라솔 등이 놓여 있고 간단하게 조리가 가능 한 취사도구들도 갖춰져 있다. 이전에 게스트 하우스에서 일했다는 여자친구 둘이서 사장의 동의 하에 하나는 죽이며 국수를 다른 하나는 쉐이크를 팔기로 했다는 것이다. 오픈한 집 개시는 해줘야 할 것 같아서 죽과 쉐이크를 시켜 먹는다. 제법 김치 비슷한 곁들이도 따라 나온다. 한참 맛있게 먹다보니 헉 닭죽이다. 하도 조류독감, 조류독감 해서 가급적이면 닭 하고는 친하게 안 지내볼려고 했는데 뭐 할 수 없지.. 계속 맛있게 먹는다^^.  볶음밥도 국수도 지겨운 판에 잘됐다 싶다. 쉐이크도 처음 만드는 솜씨치곤 그럴 듯 하다. 이날 오후부터 주변의 권유로 국수집의 메뉴엔 라면도 두 종류나 추가가 된다, 신라면과 너구리다.


왼쪽이 국수집, 오른쪽이 쉐이크집


이 두 가게가 오픈하니 뒤론 안 그래도 게으른 인간이 더욱 게을러지는데 그나마 밥이나 먹으로 걸어 나가던 것도 중단하곤 그저 삼시 세때 커피며 쉐이크까지 죄다 이 두 집에서 해결한다. 그렇게 끼니를 때우다보니 국수집 주인인 닛과도 친해진다. 하루는 닛이 김치거리 사러 시장에 가지 않겠냐고 해서 오토바이 뒤에 매달려 다녀온다. 일반적으로 외국인들이 구경가는 시장이 아니라 말그대로 로컬시장이다. 뭐 어릴때 익숙하게 보던 우리네 재래시장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 배추며 당근, 고추 등의 김치거리를 사서 돌아오는데 주면 사람들이 잘 됐다면서 닛에게 김치 담는 법을 가르쳐주란다. 헉 나라고 김치를 담아봤나.. 게다가 그 김치 내가 담은 거 보다 낫더구만.. 그저 옆에 앉아서 간이나 보고 구경이나 한다.


담날에는 다시 시장에 가잔다. 이번에는 중국 시장이다. 그전에 신라면과 너구리를 다섯 개들이 한봉지씩 사왔는데 신라면이 다 떨어져 라면을 사러 가는 길이란다. 이 시장에선 중국에 만든 한국 라면을 판다. 신라면과 김치라면을 하나씩 사려는 걸 그저 한국 사람은 그저 신라면이라고 그냥 신라면만 두 봉지사라고 권한다. 라면 종류 많아봐야 성가시기 밖에 더하겠는가. 안 그래도 꼬들하게 끓이라는 사람, 퍼지게 끓이라는 사람, 물이 많다는 사람, 적다는 사람.. 한국 사람들의 90%는 자칭 라면 전문가들이라 한 종류라도 입맛 맞추기가 쉽지 않은 터에 말이다. 나 같으면 그저 니가 끓여드세요 하겠더구만 그럴 수도 없는 걸 종류까지 늘려 사서 고생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참고로 여기 너구리에는 다시마가 없다는 슬픈 소식도 함께 전한다^^


국수집 주인 닛


쉐이크집 주인 띠아


이 두 가게의 하루벌이가 대략 십불은 되는 모양인데 재료비랑 이것저젓 빼면 반정도가 남는단다. 그럼 이 추세로 나간다면 한달에 백불에서 백오십불쯤은 벌 수 있는 셈인데 이곳 공장에서 일하는 라오스 여자들의 벌이가 50불 정도라니 제법 괜찮은 장사인 셈이란다. 라오스 거주 한국인들이 옆에서 들려준 이야기다. 국수집 주인인 닛과 쉐이크집 주인인 띠아는 그래서 그런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하는데도 얼굴에 웃음이 떠나질 않는다. 밤에는 제법 두둑한 돈주머니를 꺼내놓고 뭔가를 쓰고 계산기도 두드리는데 뭘 하는지 한참을 그러고 있다. ㅎㅎ 저건 내 전공인데 김치 담그는 거 말고 저거나 가르쳐주라고 하지..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해 본다. 여튼 이 두 집 덕분에도 며칠 심심하지 않게 지낸다.

 

이래저래 시간이 흘러 비자 나올 날짜가 되어가고 다시 떠날 준비를 한다. 미얀마 남쪽은 예정에 없던 곳이라 별다른 준비도 안 되어 있고 가이드북에도 별다른 정보가 없는 곳이다. 트레블 게릴라에서 몇 군데 정보를 내려받고 론리 플래닛 지난 버전 하나를 구입하고 저녁에 빡세로 떠나는 버스표를 예약해둔다. 다행히 미얀마 비자가 별 문제 없이 나와 준다. 역시 미얀마 전산은 아직 내 편인 것 같다^^. 앙코르와트에서 방콕, 또 이곳 위앙짠까지는 거의 한국 사람들 틈에서 지낸 것 같다. 며칠 안 보이면 어디 한국사람 없나 싶다가도 또 많아지면 이래저래 심경이 복잡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이제 한 열흘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지내게 된다. 좋기도 하도 다시 막막하기도 하지만 뭐 이게 여행이 아니겠는가.. 남부를 한바퀴 돌고 방콕으로 돌아가면 나도 일행이 생긴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조금은 덜 외로운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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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앙짠1> 일정이 꼬인다

 

방콕의 카오산 로드는 벌써 성수기가 시작된 건지 아님 일년 내내 그런 건지 거리마다 사람들로 넘쳐난다. 이전에 왔을 땐 태국이 좀 못사는 나라라고 생각했는데 웬걸 베트남이나 캄보디아에 비하면 여긴 거의 선진국 수준이다^^. 느닷없이 시골에서 서울로 상경한 아이처럼 세븐일레븐도 있고, 버거킹도 있네.. 하면서 새삼 신기해하며 거리를 다닌다. 원래는 방콕에 도착해 한 일주일 빈둥거리면서 12월 초에 태국으로 온다는 일산주민이나 기다리려고 했는데 막상 연락을 취해 보니 일산주민의 일정이 열흘 정도 늦추어진단다. 어라, 그럼 대략 보름을 빈둥거려야 한다고 생각하니 대략 난감이다. 일산주민은 태국이든 말레이시아든 아무데나 갔다 오라지만 태국이야 일산주민과 같이 다니는 것이 일정상 훨씬 낫고, 말레이시아 쪽으로 가자니 물가도 만만치 않은데다 볼만한 관광지가 죄다 해변이라 별로 내키지 않는다. 고민 끝에 일산주민에게 일정을 사오일 더 늦추라고 하고 미얀마를 먼저 다녀오기로 한다.


그렇게 결정하고 나니 갑자기 바빠지기 시작한다. 일단은 비행기표와 비자가 필요한데 비행기표는 원하는 날짜에 다행히 있다. 문제는 비자인데 대행하면 4일이 걸린단다. 하지만 그 4일이란 게 휴일을 제외한 기간이라 토요일, 일요일 하고도 하필이면 월요일이 태국 국왕 생일이라 공휴일, 이렇게 휴일 삼일을 더하니 이래저래 비자 발급에 일주일이나 걸리는 셈이다. 안 그래도 미얀마에 머물 수 있는 기간은 삼주 남짓인데 방콕에서 일주일이나 시간을 잡아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홍익여행사 사장님이 직접 대사관에 가서 급행으로 처리하면 하루만에도 발급이 되니 직접 가보라고 한다. 그러지 뭐.. 대행료도 굳히고 오히려 잘 됐다 싶어 직접 대사관으로 가기로 한다.


비자 신청은 일반적으로 오전에만 업무를 본다고 하니 아침 일찍 숙소를 나선다. 접수하러 왔다갔다, 찾을 때 왔다갔다, 네 번을 택시 타면 비자 발급 비용보다 택시비가 더 나오지 싶어 물어물어 버스를 탄다. 다행히 버스에서 헤매지는 않았지만 태국의 악명 높은 트래픽 잼에 걸려 업무 시작 시간보다 20분 늦게 도착한다. 미얀마 대사관 안은 벌써 사람들로 가득하다. 관광비자 신청용지를 작성하고 접수줄을 찾아보니 사람들이 그냥 의자에 앉아 있는 게 아니라 의자를 따라 줄이 이루어져 있다. 끄트머리에 앉아 사람들의 숫자를 헤아려 보니 대략 삼사십 명 수준이다. 업무 시간이 12시까지니까 대략 오전에 접수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앉아서 기다리는데 웬걸 처리 속도가 장난이 아니게 느리다. 한 시간에 다섯 사람이 안줄어드는 데 이건 황당 그 자체다. 다시 가만히 살펴보니 비자 접수하는 사람의 대부분은 여행사 대행 업자들로 보이는데 이 사람들이 한번에 이삼십 명분을 접수시키니 컴퓨터도 없이 수기로 처리하는 창구에서 저 정도 하면 느린 것도 아니다 싶다.


결국 오전 업무가 끝나고 줄 선 순서대로 이름을 적더니 점심 먹고 한 시간 후에 오란다. 사람이 많아서 오후에도 업무를 보나 하면서 이름을 적는다. 21번이다. 1시에 시작된 오후 업무는 3시가 되자 마감이 된다. 다시 이름을 적더니 다음날 오란다. 이번엔 13번이다. 두 시간 동안 8명이 줄어든 셈이다. 한시간당 평균 네 명쯤으로 계산해 보면 오전 업무 시간이 세 시간이니 내일 오전에도 가능할지 말지 한 상황이다. 하지만 뭐 별다른 방법이 있나.. 그저 오라는 대로 다시 올 수밖에.. 홍익여행사에 돌아가 상황을 설명하니 사장님도 황당해 한다. 이런 경우는 거의 없었다는데 뭐 어찌 된 노릇인지 파악이 되질 않는다. 여튼 담날에는 비자 접수가 될 테니 오전에 접수되면 오후에, 최악의 경우 오후에 접수가 되더라도 그 다음날 오전에는 찾을 수 있을 테니 안전하게 그 다음날 저녁 비행기표를 끊어 놓는다.


다음날은 트래픽 잼을 감안해 꼭두새벽에 길을 나선다. 여덟시 반경에 대사관에 도착하니 벌써 대여섯 명이 줄을 서 있다. 이러다가 대기번호가 무용지물이 되는 건 아닌가 싶어 얼른 끄트머리에 가서 줄을 선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대사관 문이 열리자 어제 대기 번호대로 줄이 정렬된다. 다시 지루한 시간이 이어지고 이번에는 좀 편안한 마음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니 사십 줄의 한국남자 하나가 비자 신청서를 쓰고 있는 게 보인다. 차림새로 보니 여행자는 아닌 것 같은데 사업차 미얀마에 가나 싶어 말을 건네 본다. 미얀마에서 6년째 선교를 하고 있는 목사님인데 늘 비자를 대행시키다가 일정이 급해 직접 왔다고 한다. 내 경우를 미루어 보면 이 목사님 지금 줄을 서봐야 낼 오전 접수도 힘들지 싶어 내 것과 같이 접수를 시켜주겠다고 한다. 뭐 일종의 새치기라고 보면 된다^^다행히 내 앞에는 개인여행자가 몇 명 있어 오전에 접수가 된다. 목사님의 비자신청서도 다행히 같이 접수가 된다. 오후 4시에 비자를 찾으러 오라기에 점심이나 먹고 시내 근처를 어슬렁거리다 비자를 찾으러 다시 대사관으로 간다.   


그러나 당연히 발급될 줄 알았던 비자는 발급이 거절된다. 목사님과 나 둘 다 거절이란다. 나의 거절 사유는 직업난에 회사 이름을 미디어센터라고 썼다는 것인데 미얀마에서는 기자나 저널리스트 등의 미디어관련 종사자에게는 비자 발급이 안 된다는 것이다. 참 미디어 관련된 일이 기자만 있나 원.. 짧은 영어로 미디어센터가 그런 일을 하는 곳이 아니라고 설명해 봐야 신청서에 붙어 있던 사진과 발급 비용을 돌려주곤 그만이다. 그 사이 다른 담당자와 미얀마말로 이야기를 하고 있던 목사님도 상황은 마찬가지인지 그대로 돌아선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으니 이 목사님은 탈북자 문제랑 연관되어 미얀마에서 추방된 상태였다고 한다. 다시 들어가는 데 문제는 없을 거라고 한국대사관과는 이야기가 되었다는데 그 이야기가 미얀마 정부랑은 안 되었던 모양이다^^ 거절 사유가 내 직업 때문인지 아님 그 목사님과 일행으로 보였기 때문인지는 아님 둘 다인지는 알 수는 없지만 일년에 한두 건 있을까 말까한 사건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갑자기 막막해진다. 비행기표는 할인항공권이라 환불도 안 되는데다 꼼짝없이 방콕에 이십일이나 발이 묶여 있어야 하나 심란하기 그지없다. 홍익여행사로 돌아가 일단 비행기표를 연기시켜 놓는다. 다행히 비행기표는 환불은 안되도 유효 기간은 넉넉한 편이라 다른 방법으로 미얀마 비자를 받을 방법을 알아본다. 홍익여행사 사장님이 라오스에도 미얀마 대사관이 있다고 귀뜸해 준다. 라오스는 비자 기간이 십오일이니 비자를 받고도 남부 지역을 한바퀴 둘러볼 만한 시간이 된다, 문제는 태국에서 거절당한 비자를 라오스에서 발급해 줄까 인데 밑져야 본전인데다 미얀마의 전산이 그리 훌륭하지 않다는데 기대를 걸어보기로 한다. 부랴부랴 일산주민에게 다시 연락을 취해보니 다행히 아직 항공권을 끊지는 않은 상태다. 사오일 늦추었던 일정을 다시 앞당겨 16일경에 만나기로 하고 12월 1일 밤버스를 탄다. 위앙짠 도착이 금요일 아침이니 당일로 미얀마 비자를 신청하고 바로 라오스 남부로 떠나야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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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여행경비정리

 

제목에서 차이를 느끼셨을지 모르겠지만 이번엔 총정리가 아니라 그냥 정리다. 달랑 13일밖에 안 있었으니 뭐 정리랄 건 없지만 그래도 안 할 수는 없으니 짧게 쓴다. 하지만 여행 중 가장 황당했던 경우도 캄보디아여서 ATM이 없다는 소리는 들었으나 설마 했는데 정말 ATM이 없는 것이다. 부랴부랴 뒤져보니 달러라야 베트남에서 환치기-뭐 별건 아니고 ATM으로 동을 찾으면 달러 가지고 왔던 여행자랑 바꾸는 건데 중간에 수수료 떼는 사람 없으니 뭐 서로 나쁠 것 없는 거래다-한 150달러가 전부더라는 것이다. 예정이 대략 15일이니 하루 20불만 잡아도 300달러는 있어야 할 텐데 방법은 고율의 수수료를. 서비스 비용은 또 따로 주고 현금서비스를 받는 것 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러다 비상금에 생각이 미친다. 가기 전 투덜이 사인해서 준 100달러 지폐가 배낭 구석 어딘가에서 잠자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앗싸 하며 배낭을 뒤진다. 하하 그대로 있다. 원래 비상시가 아니면 돌아갈 때까지 안 쓸려고 했는데 그런게 어디 있나.. 그냥 250달러로 캄보디아를 돌기로 한다. 이래저래 신경이 쓰여 아껴썼더니 마지막엔 태국에서 필 답배 두 보루 사고도 10불 남았다. 정말 인간 승리다.


먼저 비자피는 25달러로 베트남에서 받았다.


1등은 보나마나 숙박비다 생각했으니 예상을 깨고 식대 및 간식, 음료비가 차지했는데 막판에 너무 많은 한식을 먹은 게 원인인 것 같다. 한국 음식이 현지 음식보다야 비싸다. 60 달러(*1000=60,000원)

2등은 상식적으로 숙박비 아니겠나.. 캄보디아에선 뭐 따로 한게 없으니..  56달러(*1000=56,000원)

3등은 입장료 및 투어비다. 앙코르와트 20달러와 보꼬투어 10달러가 커서 그렇지 다른 것 고만고만하다. 45달러(*1000=45,000원)

4등은 교통비로 도시간 이동은 많지 않았는데 교통비가 캄보디아 물가 대비 싸지는 않다. 29달러(*1000=28,500원)


그 외 잡비들

담배 및 맥주 37,5(=37,600)

캄보디아는 담배가 면세점보다 싸서 사재기 하느라고 든 비용이다.

인터넷 3.5(=3,500)

생필품 6.0(=6,000)

말 그대로 잡비 : 세탁, 전화 등등 3.0(=3,000)


캄보디아는 관광객 숫자가 적어서 그런지 물가가 그 나라 대비 싸지 않다. 특히 여행자 식당의 먹거리는 베트남보다 월등히 비싼데다 맛도 없다. 게다가 체류기간이 짧아서인지 생각보다는 조금 더 든 것 같다. 그래봤자 하루 2만원도 안되긴 하지만 말이다.

 

 


캄보디아에서는 내 사진을 너무 많이 올린 것 같아 나와 열흘을 같이 다니다 프놈펜에서 헤어져 이제는 한국에 있을 두 여인네를 공개하기로 한다. 왼쪽은 일본어 가능이고 오른쪽이 영어 가능이다. 나? 물론 둘 다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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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엡리업2> 앙코르와트에서 퍼지다.

 

브라보 빌라-씨엡립에서 유명한 한국게스트하우스-에는 한국인으로 가득하다. 한국인들이 없는 곳에서는 심지어 단체 관광객에게도 넙죽넙죽 인사만 잘했는데 막상 숫자가 많아지니 오히려 말 붙이는 게 쉽지 않다. 게다가 보통은 앙코르와트 3일권을 끊은 뒤 아침 일찍 나가서 저녁 늦게야 들어오니 같이 투어라도 다니면 모를까 그냥 책이나 보면서 하루를 보낸다. 다행히 많지는 않아도 만화책이며 잡지 등이 있어 무료하지는 않다. 그러다 로비에서 수다를 떨고 있는 한 무리의 한국인들 틈에 낀다. 밖에서 보기엔 다들 일행인 듯 보였는데 막상 이야기를 나눠보니 그렇지도 않다. 간만에 수다로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수다의 반을 차지하는 내용은 자칭인지 타칭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세 명의 젊은 사장 중에서 이제는 홀로 남아 게스트 하우스를 운영하고 있는 롱다리 사장이란 사람에 관한 얘기다. 다리가 롱다리인지야 모르겠지만 키가 많이 큰 이 젊은 부산 남자는 부산사투리 특유의 톤으로 말끝마다 “미쳤어요”를 달고 다니며 손님들을 괴롭히는데 이상하게도 손님들은 그 구박을 즐기는 눈치다. 뭐 이를테면 욕실에 형광등이 깜빡거린다고 하면 “때려서 쓰세요 아님 그냥 쓰든지.. 나이트 분위기도 나고 좋네” 하는 식인데 그 이야기거리가 무궁무진하여 이삼일 먼저 온 사람이 그 뒷사람에게 일화를 전수해주는 데만도 하루 저녁이 부족하다. 이제 제법 지쳐보이는 롱다리 사장에 대한 뒷담화의 대단원은 대략 이렇게 장사해서 얼마냐 남겠냐.. 이거 오래 못 간다.. 빨리 장가를 들여야 유지가 되지.. 하는 걱정으로 마무리가 된다.

 

앙코르와트는 그냥 자전거를 타고 하루만 다녀온다. 11월이라 그런지 찌는 듯한 더위는 아니라서 그럭저럭 자건거를 타는데는 무리가 없다. 단지 자전거를 서양애들 기준으로 만들었는지 아님 이 동네에는 롱다리만 사는지 페달에 발이 간신히 닫는다. 천천히 앙코르와트 쪽으로 달리니 그리 오래 가지 않아 앙코르와트가 눈에 들어온다. 내가 이렇게 빨리 이곳에 다시 오게 될 줄은 떠날 때는 몰랐었는데 사람일이란 그래서 뭐든 장담할 건 못 되는 것 같다. 앙코르왓 꼭대기에서 한나절을 보내고 다시 앙코르 톰으로 간다. 이년 전 공사중이던 왕궁은 아직도 공사중이다. 두어시간을 앙코르톰에서 보내고 나니 딱히 더 할일도 남아 있지 않아 일몰 포인트인 프놈바깽에 잠시 들렀다가 해지기 전에 서둘러 내려온다. 해지고 난 뒤 전기사정도 좋지 않은 이곳 도로를 자전거를 타고 갈 수야 없는 노릇이다. 


앙코르왓. 연못에 연꽃이 활짝 피어 있다.


앙코르톰, 바이욘의 미소라는데 많이들 보셨을 게다


프놈바깽, 일몰직전


숙소로 돌아오니 프놈펜에서 잠시 만났던 한국인 여행자 둘이 도착해 있다. 전직 사회복지과 공무원이자 고등학교 친구 사이인 두 명의 여자여행자인데 1년 반 예정으로 여행 중이란다. 그 복잡한 원월드 티켓도 끊어서 왔다는데 친구가 아니라 자매 아닌가 싶을 정도로 얼굴과 행동이 닮아 있다. 그 친구들이 중국에서 같이 다니다 잠시 헤어진 또다른 언니를 찾아와서(?) 넷이서 저녁을 먹는다. 간만에 먹는 한식이다. 씨엡리업에는 한국 식당도 꽤 많은데다 메뉴도 떢볶이에 순대까지 없는 것이 없다. 안 먹을땐 모르겠더니 먹기 시작하니 한식만 찾게 된다. 결국 한식 먹고, 한국말로 수다떨고, 한글로 된 무협지나 읽으면서 사나흘을 보내고 넷이서 함께 국경을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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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엡리업1> 오징어 드실래요

 

깜뽓에서 프놈펜으로 돌아와 하루를 더 묵고 앙코르와트가 있는 씨엡리업행 버스를 탄다. 씨엡리업은 한 번 기본 곳이기도 하거니와 여행 이후 처음으로 한국인 숙소를 찾아갈 예정이어서 여느 때보다 편한 마음이 된다. 숙소에 짐을 풀고 로비에 나가봐도 그 말많은 한국인 여행자들에게서 꽤 좋은 평판을 얻고 있는 주인도, 다른 한국인 여행자도 보이지 않는다. 기억을 더듬어 공원 쪽으로 나가본다. 거리는 제법 큰 건물들이 들어서 있고 도로도 말끔이 포장되어 있다. 음.. 여행 많이 다닌 인간들이 여기는 너무 변해서 어쩌구 저쩌구 하는 마음을 알 것도 같다. 공원은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그리 크지도 예쁘지도 않다. 인간이 참 간사한 게 내 기억 속의 그 공원은 한번쯤은 책이라도 들고 뒹굴거리고 싶은 공원의 전형처럼 기억되어 있는데 막상 보니 조금 실망스럽다. 그래도 벤치에 조심스럽게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며 혼자 놀고 있는데 누군가가 말을 시킨다.


아까 거리에서 잠깐 눈이 마주쳐 하이하고 지나쳤던 동양남자다. 서른 너댓이나 되었을까..여행자 같지는 않은 게 세상이 지겨워 죽겠다는 표정을 짓고 서 있다. 앉아도 되겠냐고 해서 그러라고 했더니 여행자 대화가 시작된다. 일본인이냐고 물었더니 타이완 차이니즈란다. 사업차 이곳에서 9달을 살았는데 9년은 된 것 같단다. 어딘가 나른해 뵈는 인상이 그런대로 호기심을 유발한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레드피아노를 아냐고 묻는다. 물론 안다-안젤리나 졸리도 다녀간 씨엡리업의 유명한 카페다-고 했더니 자기가 살테니 맥주나 한 잔 하러 가잖다. 잠깐 망설여지긴 했지만 아직 대낮인데다 여긴 길도 알고 있고, 술값이야 뭐 사기당해야 맥주일테고.. 하는 생각이 든다. 호기심반 음주욕구반에 따라 나선다. 뚝뚝을 타고 카페에서 내려 맥주를 시킨다.


의심점1. 뚝뚝을 타고 가는데 내릴 때 1달러를 주는 게 보인다. 보통 그 거리면 현지에서 오래 살았다면 1/4정도만 주는 게 정상이다. 뭐 그냥 돈 많은가보다 하고 넘어간다.


순식간에 맥주 2병이 비워진다. 어.. 이건 거의 한국남자랑 먹는 수준인데 싶을 만큼 속도도 빠른데다 꼬박꼬박 잔도 채워 주지.. 매번 건배도 하자고 하지.. 게다가 안주도 먹겠냐고 물어보지.. 아 타이완이랑 우리랑 그냥 문화가 비슷한가 보다 싶다가도 너무 익숙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결국 둘이서 거의 한시간만에 앙코르비어 큰병 6병을 죄다 비우고 나니 이번엔 노래 좋아하냔다. 노래야 안 좋아하지만 그래도 앙코르와트에 가라오케라니 신기해서 한국노래도 있냐니까 중국노래, 영어노래, 캄보디아 노래 다 있단다. 그래.. 가보자 가봐.. 설마 뭔일이야 있겠어.. 내가 나이가 몇갠데.. 정 안되도 주머니에 칼도 있겠다^^너하나 정도는 내가 무력제압이 가능하겠다는 생각까지 하면서 줄래줄래 따라간다.


의심점2. 술값을 낼 때 내껀 내가 내겠다고 하니 극구 사양하면서 남자가 술값을 내는 게 동양의 문화 아니겠는냐고 하는데 내 보기에 뭐 동양이 다 그런거 같진 않다. 그러나 그냥 대만은 그런가보다 한다.


다시 뚝뚝을 타고 카라오케로 옮기는데 거의 100m도 안되는 거리다. 그냥 걷지 하면서 돈을 낼려고 하니 이번에도 지가 낸다. 이번에도 1달러다^^ 웨이터들은 어디나 비슷한지 아님 이 아저씨 여기 단골인지 매우 친한 척을 하고 수선을 피우더니 방으로 안내를 한다. 가라오케는 한국의 노래방처럼 생겼는데 룸이 제법 큼직한 게 어찌 보면 변두리 룸살롱처럼 생긴 게 분위기가 묘하다.


의심점3. 웨이터들이 내가 들어서니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한다. 이 아저씨야 대만사람이니 일단 나한테 한 거라고 봐야 하는데 내가 한국인이요하고 써 붙인 것도 아닌데 어찌 알았을까 싶긴 했지만 씨엡리업에 한국사람이 워낙 많으니 그냥 그런가보다 한다.


일단 과일 안주가 들어오고 술이 탁자위에 놓인다. 드디어 이 시점에서 문제가 발생하니 어디선가 들리는 또렷한 한국말 <오.징.어. 드.실.래.요.> 잠시 귀를 의심하다 이 아저씨를 쳐다보니 대략 난감한 얼굴이다. 내가 정색을 하고 묻는다. 가만있어 봐요. 지금 한국말 했죠. 한국말 할 줄 알아요?. 그러더니 다시 영어로 딴소리다. 한국말 아는 거 같으니까 한국말로  물을께요. 당신 한국 사람이예요? 했더니 그제서야 한국말을 한다. 한국 사람은 아니고 화교인데 한국에서 열여덟살까지 살았단다. 그때 기억이 안 좋아서 한국말은 하기 싫다고 하면서 주섬주섬 증명서 같은 걸 꺼내 보인다. 순간 술이 확 깬다. 사기꾼이구나 싶다. 마음 한켠으로 이 말이 사실이면 좀 미안하다는 생각도 든다. 다시 묻는다. 당신 사기꾼이에요? 다시 대답은 영어다. 내가 뭘 사기를 치겠느냐면서 여기 술값? 하더니 미리 계산하겠다고 웨이터를 부른다. 그래서 먼저 계산을 시킨 후 여기는 막힌 공간이라 내키지 않는다고 일단을 밖으로 나가자고 한다. 밖에서 한 잔 더하자고 하곤 가방을 들고 나오다 그 사람이 화장실에 간 사이 오토바이를 잡아타고 숙소로 돌아와 버린다. 덕분에 공짜술만 엄청 먹었다^^담날 정신을 차리고 곰곰 생각해보니 그 자식이 나한테 사기를 친 게 아니라 내가 그 자식한테 사기를 친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봐도 올릴 사진은 없고 안 올리자니 서운하고 그래서 골랐다. 앙코르톰의 부조인데 웬지 약오르지? 하는 거 같은 느낌이라 하나 붙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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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48979;> 보꼬국립공원에 가다

시하눅빌에서 깜뽓으로 가는 방법은 택시를 합승하거나 픽업트럭에 얹혀 가는 것 정도가 있다고 하는데 둘다 다운타운에 있는 버스정류장에서 기사와 흥정을 해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숙소에 보니 택시 서비스가 있다. 가격을 물어보니 4불이다. 직접 흥정할 경우 3불이나 그 이하로도 갈 수 있다고는 하지만 뭐 흥정도 잘 못하는데다 어차피 오토바이를 타고 버스정류장까지 간다면 절약할 수 있는 돈이래야 일불도 안되는 것 같아 그냥 숙소에서 택시를 신청한다. 성수기에 앞에 기사까지 네 명, 뒤에 네 명, 심지어 트렁크에 두 명, 도합 열 명도 타고 갔다는 택시는 픽업하러 올 때 보니 손님이 하나도 없다, 설마 다른 숙소에서라도 픽업당해 오겠지 하고 있는데 정말 나 하나란다.


기사는 나를 태우고 버스정류장으로 가더니 하염없이 손님을 기다린다. 하지만 현지인만으로 승객이 채워지기를 기다리리다보니 한 시간이 지나도 손님 하나가 늘지 않는다. 뭐 안되면 하루 더 있다 가지하는 맘으로 앉아서 기다리는데 한 시간 반 정도가 지나자 기사가 다가오더니 두 시간이 될지 세 시간이 될지 모르니 10불만 더 주면 나 혼자 태우고 깜뽓으로 가겠단다. 뭐 깜뽓에 기다리는 님이 있는 것도 아닌데 10불씩이나 더 주고 빨리 갈 이유도 없어 그냥 기다리겠다고 한다. 두어 시간을 더 기다리니 앞자리에 스님 한분, 옆자리에 할머니 한분 그리고 손자로 보이는 아이 하나가 타고 차가 떠난다. 떠나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막상 출발하고 나니 두 시간도 안 되어 차는 깜뽓에 들어선다.


깜뽓을 가로지르는 뜩주강, 자세히 보면 서로 다른 다리 세 개가 하나로 붙어있다.


깜뽓은 조그마한 시골 동네인데 깜뽓 그 자체를 보러 오는 사람보다 주로 그 근처에 있는 보꼬국립공원에 가기 위해 들르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면 보꼬국립공원은 또 뭐하는 곳이냐.. 식민지 시절 프랑스가 비교적 기후가 선선한 이곳 보꼬산에 자신들의 휴양 도시를 건설했는데 지금은 페허로 변한 건물들의 잔해가 흩어져 있는 곳이다. 이런저런 설명보다 그저 알포인트 촬영지라고 하면 더 간단하게 이해가 될 지도 모르겠다. 여튼 기사가 내려준 미얼리첸다라는 게스트 하우스는 상태가 좀 안 좋기는 해도 따로 여행자 거리가 있는 것도 아닌 동네를 배낭 메고 헤매기도 싫어 그냥 방을 잡고 투어를 신청한다. 이 투어는 베트남에서 했던 열 개 남짓의 투어들을 제치고 가장 기억에 남는 투어가 되니 역시 베트남보다는 음식 맛이 좀 떨어져서 그렇지 캄보디아가 인간적인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보꼬산으로 가는 지프차는 앞자리에는 여자들을, 뒷자리 트럭칸에는 남자들을 싣고 굽이굽이 산길로 들어서는데 빽빽한 나무들 사이로 군데군데 웅덩이가 패여 있기는 하지만 포장도로의 흔적이 남아있다. 이 도로가 프랑스 식민지 시대에 그들이 휴양지를 오가기 위해 만든 도로라니 어디나 식민지 백성의 고충은 별로 다르지 않았나 싶다. 짚차는 두시간을 달려 한때는 황제의 별장이었다는 곳에 잠시 쉬어간다. 차에서 내리니 제법 차가운 공기의 기운이 느껴진다. 폐허가 된 별장은 한 눈에 봐도 산 아래 도시며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게 전망이 끝내주는 곳에 세워져 있다. 멀리 바다 너머로 베트남의 영토인 푸꾸억섬이 보인다. 가이드의 설명으로는 그 섬이 원래 캄보디아 영토였다는데 전쟁 이후 베트남에게 빼앗겼다는데 그 섬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하도 비장(?)하여 나중에 영토분쟁이라도 생기면 꼭 캄보디아 편을 들어야겠다는 쓸데없는 마음이 생긴다.


황제의 별장에서 바라본 풍경, 멀리 푸구억섬이 보인다. 

 

차는 다시 산길을 달리더니 작은 오솔길 앞에 우리를 내려준다. 이제부터는 한시간 반동안 트레킹이란다. 분명 처음 투어 설명을 들을 땐 차를 타고 가든지, 걷든지 선택할 수 있다고 들은 것 같은데 뭐 다들 걸으니 차타고 갈래요 하기도 머쓱해 그냥 따라 걷는다. 산길을 걸으며 가이드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무슨 말인가 끝에 대학을 나왔냐기에 그렇다니까 나보고 행운아란다. 자기는 어부의 아들이라고, 몇 년전까지는 자기도 어부였다고, 집도 어렵고 동생도 있어 공부를 더 할 수 없었다는데 넌 대학 나온 나보다 영어도 잘 하잖아^^ 할 수도 없고 뭐라고 대답할 말이 없다. 그는 대화 짬짬이 뒤쳐지는 사람이 없는지 기다리고, 험한 곳에서는 일일이 손도 잡아주고, 산나무에서 오디같은 열매를 따서 먹어보라고 권하기도 한다. 베트남의 뺀질이 가이드들만 봐서 그런지 웬지 순박한 얼굴의 그에게 마음이 쓰인다.


여기저기 폐허로 흩어져 있는 휴양지의 건물들의 잔해를 지나 알포인트의 주촬영지인 호텔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교회니 폭포니 하는 몇 가지 코스를 더 둘러본다. 폭포에서 물장난을 치고 있는 가이드의 사진을 몇 장 찍는다. 디카로 보이는 자신의 사진을 보고 어린애처럼 좋아하는 그에게 메일 주소를 주면 사진을 보내주겠다고 하니 자신은 메일은 없고 친구의 메일을 적어주겠단다. 그러면서 몇 번이고 사진을 받을 수 있냐고 물어봐서 꼭 보내주겠다고 손가락까지 걸어준다. -그러나 저녁에 친구의 이메일주소라고 건네준 쪽지에 친구의 이름만 덜렁 적혀 있는 걸로 봐서 이 친구 아무래도 아직 컴퓨터를 써 본적이 없는 것 같아 태국쯤에서 인화를 해서 보내줘야겠다는 생각으로 그냥 숙소 주소를 적어온다-


지금은 폐허가 된 호텔, 알포인트의 주 촬영지다.


보꼬산은 거의 우리나라 가을 정도의 기온이다.


다시 덜컹거리며 산길을 내려오니 이번에 바다 길을 돌아 숙소로 돌아간다며 배로 갈아타란다. 배를 타니 맥주를 한 캔씩 준다. 점심때 공짜로 음료수를 주는 투어도 처음이었는데 맥주씩이나.. 사람들의 입이 벌어진다. 맥주를 마시며 저녁 노을을 지는 바다를 건너, 강을 건너 숙소로 돌아온다. 벌써 주위는 캄캄해지고 어느새 하늘에는 별이 두어개 빛나고 있다.


배에서 본 노을


가이드 Negth과 함께.. 얼굴색깔이 거의 비슷하다.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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