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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10/24
    태풍 지난 월요일아침
    파란 하늘
  2. 2005/09/03
    이런 생각 저런 생각
    파란 하늘
  3. 2005/08/09
    7월 17일 청계밀림을 가다
    파란 하늘
  4. 2005/07/12
    체의 마지막 일기
    파란 하늘
  5. 2005/07/12
    밀린 숙제
    파란 하늘
  6. 2005/05/15
    나 그리고 느림보 컴퓨터
    파란 하늘
  7. 2005/05/03
    산재로 숨진 여종엽동지 누님의 글
    파란 하늘
  8. 2005/05/03
    4월 30일 부산 - 김진숙지도위원 연설
    파란 하늘
  9. 2005/02/25
    "정규직은 비정규직의 하늘입니다"
    파란 하늘
  10. 2005/02/20
    내게 큰 힘주는 여성노동자들
    파란 하늘

태풍 지난 월요일아침

월요일 출근할 때는 "근로복지공단 앞 아침 선전전을 참가해야 하나?"며 마음의 짐을 짊어지고 오다가는 막상 자리에 앉아서는 다른 사람들의 분위기를 보아하니 나갈 생각않는데 "나만 혼자 나가서 뭐하냐?"며 핑계거리 만들어서 그냥 눌러 앉는다.

 

지난 두 주동안 영등포 대영빌딩은 한마디로 혼란의 도가니였다. 민주노총 수석이 직위를 이용해 사용자에게 돈을 받아 착복해놓고 구속 될 때까지 "사용자에 의한 탄압 운운"하면서 방어막을 쳐오다가 덜미를 잡혔으니....민주노총은 쑥대밭이 됐다. 사회적으로 어용노총, 비리 집행부란 멍에를 뒤집어섰다. 그런 상황에서 집행부는 현명치 못하게 '투쟁조직을 위해서'란 명분아닌 명분으로 남아있으려고 하다가 결국 꼴상 사납게 내려갔다. 민주노총이란 권력, 얼마나 내놓기 싫었으면....

 

이제 비상대책위가 꾸려지고 맞이하는 첫 월요일이다. 전재환 연맹 위원장이 비대위원장을 맡은 민주노총도 지난 주에 처리됐던 사무처사직 문제 등 남아있는 숙제가 산더미같을 것이다. 혼란스럽고...태산같은 숙제는 연맹도, 금속노조도 마찮가지.

지난 주 금요일 계약해지된지 1년이 되는 하이닉스매그나칩. 용케도 조합원들 결속해서 열심히 싸워오고 있는데 지회장이 경찰에 연행되고 말았다. 오늘 아침 출근해보니 하이스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새벽에 현장을 점거했다는 소식이 올라왔다. 비정규직 사업장들 중에 제대로 풀린 곳 하나없이 꼬이고 꼬인 채 어려운 투쟁을 하고 있다.

전국노동자대회를 전후로 금속이 중심이 되어서 풀어야 할 문제다. 비정규확산법 저지와 함께 그 전에 힘을 모아야 할 것이 1년째 질질 끌어오고 있는 비정규직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할 건가. 마음의 짐이 무겁기만 하다.

 

얼마전 하이닉스매그나칩지회의 한 조합원이 돈이 없어 세방에서 나와 천막에 짐을 놔두고 몸뚱이만 아는 형님네 집에서 붙이기로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전국비정규연대회의가 출범한 다음 날 정부는 기륭전자 비정규직 현장에 경찰병력을 투입했다. 이들의 투쟁과 고통 앞에 어떻게 함께 해야 할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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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 저런 생각

어제 밤 사무실에서 나머지 숙제를 하고 있을 때 한 동지가 "(연락하고,통계내고) 이런 일하는 데 굳이 여기 있을 필요 있을까?" "빠릿 빠릿한 젊은 친구와서 하라고 그만 두는 게 낫겠어"혼잣말 하듯 중얼거렸다. 내 나이 마흔. 연맹에 온지 이제 만 5년을 넘었지만 느즈막히 왔기에 전노협에서 구금속을 거쳐 연맹 터주대감격인 동지들과 같은 부류로 분류된다. "나이 들면 좀 그만 두지."하는 얘기들으면 그렇게 미울 수 없었다. 그래서 속으로'그래 너희는 나이 안드나 보자.' 씩씩 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갈수록 내 마음 속에서 자신감이 떨어지는 걸 느낀다. 한번 가야할 곳에 안가는 것 같고, 챙겨야 하는 데 그냥 두는 것 같고. 예전에 다른 사람들이 그러는 것을 눈 뜨고 못봐서 이리 저리 챙기다 실 전체를 혼자서 챙겨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던 적도 있었는데...(물론 그 때가 잘 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다가 결국 선택은 다른 사람 탓을 댄다. 쟤도 그러는 데 나도 이러면 뭐 어때? 사람의 심보가 고약하다는 것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겠지. 생각해보면 비민주적이고, 일방적인 것들이, 분하고 억울하지만 내가 그동안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생각해보면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런 형태와 그런 유형에 어쩔 수 없이 '부화뇌동'하지 않았는지 곱씹어 볼 일이다. 해를 더해 갈수록 조직의 상태가 건강성을 잃어가니 하는 말이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버티고 있는 것을 보면 한편으로 참 용하다. 그러나 또한편으로 비참하다. 요즘처럼 젊은 얘들이 치받아 오를때는 더 그렇다. 자기 주장이 분명하고 논리의 앞뒤가 맞고, 치밀하게 계산적이고...상근하는 30대들의 공통적인 모습 아닐까. 그네들 얘기는 걸 듣고 있으면 맞는 얘기인 것 같으면서 왠지 공허하다. 항상 색깔을 구분하며 더 선명한 것을 찾으려든다. 또는 자기가 만든 틀을 들이대며 주변을 재단한다. 이런 걸 두고 오만방자하다고 하는데...이런 저런 생각이 들어 문제를 던지려고 하면 통하지 않는다. 논리의 정합성을 따지면 왜 이런 생각과 문제제기를 하는 지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문제는 거기에 있다. 그 만큼 고민하지 않는다는 거다.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기 때문일까. 경험이 다르기 때문일까. 아니면 젊고 패기가 있기 때문일까. 내가 선배들에게 혹시 이렇게 하지는 않았던가. 나는 어느덧 전후사정과 조건과 분위기를 고민하는데...일단 밀어붙이고 보는 태도와 충돌할 수 밖에. '미래는 과거로부터 온다'고 한다. 오늘 이렇게 현재에서 흘려버리는 과거는 미래를 불안케 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오늘 내가 제대로 서야 하는데 어떻게 서는 게 올바른 것인지 항상 혼동스럽다. 여기서 버티고 있는 게 좋은 지 아니면 새로운 일을 찾아 떠나는 게 좋은 지. 우리 조직이 '할머니의 가설'을 증명하게 하는 그런 곳이었으면 한다. 할머니 (노인)의 경험과 지혜가 아이들을 기르듯이 오랜 활동과 경험을 가진 동지들의 경험과 지혜가 조직을 발전케 하는 불쏘시개가 되었으면 한다. 어쩌면 나는 경계인지도 모르겠다. 신입과 경력의 중간에 끼어 관망자로 있지는 않았는지. 실천이 항상 생각을 못따르면서 그때 그때 느낌으로 살아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신영복선생의 '강의'책 앞줄부터 온갖 상념이 일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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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7일 청계밀림을 가다

인천지역일반노조 7월 산행계획 [청계산 4시간 코스]라는 공지를 보고 ‘설악산 대청봉도 올라갔는데 이 까짓 것 식은 죽 먹기’라 여겼다. 인천에서 가평까지 약 두 시간 채 못 걸려 도착한 청계산 밑은 계곡에 불어난 물이 깨끗하고, 저수지가 꽤 크다는 인상을 받았다. 산행을 시작할 때 눈앞에는 울창하게 자란 활엽수 숲이 펼쳐졌다.

5분이나 갔을까 계곡이 나왔고 우리는 계곡을 따라 올라갔다. 바위엔 푸른 이끼들이 착 달라붙어있고, 쑥쑥 자란 고사리들이 많았다.(나는 고비라고 주장했지만 집에와서 틀렸다는 걸 알았다. 사람들이 먹는 것은 어린 고사리며, 그 과정을 지나면 잎에 커진다. 고비는 모양이 꼬부라진 게 별로 본 적이 없었던 듯싶다.)

울창한 밀림같이, 숲을 헤치고 나갔다. 계곡을 따라 오른 시간이 약 1시간 반 정도 지나자 하늘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길도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땀은 비옷 듯 쏟아지고, 땀이 나자 기쁨도 함께 샘솟았다. 이런 걸 희열이라고 하나. 쉬고 싶지 않아 계속 올라갔다. 유찬이 약간 힘들어했으나 정상부근에선 나보다 앞서 갔다. 조광호 위원장님 다음으로 우리 가족이 1등을 했다.

(..재)정상에 올라 점심식사를 하는 데 빗방울이 떨어지더니 가늘지만 옷을 적실 만큼 됐다. 급하게 비옷(잠바)를 입고, 산악회 리더인 종수씨가 가져온 후라이(?)를 치고 둘러앉아 각자 가져온 음식을 먹었다. 우리가 준비해온 계란과 감자는 출발하기 전에 아침으로 먹었고, 수박은 정상에 도착하자마자 동이 났다. 사온 김밥을 먹었는데 4줄은 좀 많았다. 다음부터는 3줄을 넘기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커피도 얻어 마시고, 기념 사진도 찍고, 정상 길목을 막고 약 1시간 가량 있었다.

배가 좀 차니, 돌탑 앞에 청계산을 설명하는 안내판이 눈에 들어왔다. 청계는 닭을 외양간에 넣는다는 뜻이라,...에서 보면 ...쪽이여서 청룡을 뜻한다. 청계는 푸른 계곡이 아니다. ..좀 이해가 안되지만 ‘계곡’이 들어간 의미는 아니다는 정도에서 이해했다.

하산 길은 역시 어렵다. 설악산에선 가파랐기에 발에 힘을 주다가 기운이 빠졌는데, 이번에는 비가 내리는 가운데 이끼낀 미끄러운 바위, 작은 바위가 이리저리 뒹굴고, 왼쪽 오른쪽 낭떠러지 옆으로 길이 나있어 바짝 긴장하며 내려갔다.

얼마 전 체가 볼리비아 혁명을 위해 밀림에서 생활했던 기간에 쓴 일기에 적혀있던 ‘밀림’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다지 크지 않은 산에 이렇게 울창한 숲이 우거지고 마치 밀림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하며 걸었다. 나뭇잎에 하늘을 가리고, 줄기들이 이쪽 저쪽 길게 늘어져 있어 몇 번이나 머리에 부딪혔다. 약간 후텁지근 했지만 모험의 세계를 즐겼다. 낭떠러지 길 옆에 자란 풀들이 위험을 가리고 있어서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수다’가 없어지고 앞과 뒤 간격이 좁혀졌다. 조광호 위원장님을 제외하고 선두는 가면서 자주 쉬어줬다. 그러다가 나는 보지 못했지만 유찬이가 미끄러져 거꾸로 떨어졌는데 다행히 낙엽이 쌓여 다행히 다치지 않았다. 수풀을 헤치고 나오는 과정에서 나는 모기(?)에게 물려 엄청 아팠다. 전체로 보자면 마지막에 길을 확인하다가 종수씨와 헤어져 내려온 것.

산은 결코 만만하게 봐서는 안된다는 진리를 다시 못박아준 산행이었다. 또한 우리나라 산이 이렇게 울창하다는 걸 알았다.

오늘 나의 몸 상태는 잠이 부족했지만 다행히 괜찮았다. 처음 올라갈 때만 빼고.

마지막 맛난 것도 먹었다. 허브나라-뫼우리-꽤 알려진 곳인듯하다. 온실을 만들어 허브를 키우고, 그것을 상품으로 만든 온갖가지 것들을 전시 판매하고 있다. 내가 먹은 새싹비빔밥도, 유찬이가 먹은 돈까스도 맛있었다.

식사를 마칠 때 쯤 빗줄기가 굵어졌다가 인천으로 출발할 때부터는 비가 멈췄다. 계곡 물에 발담갔던 설악산과 다른, 사람들이 붐비었던 유명한 산들고 다른, 비오는 날 여름 산행의  모험을 즐긴 하루였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청계산을 한바퀴 다 돌았다. 길잡이가 중간으로 내려오는 길을 잃어서라고 하는데 우리는 훈련당한 것 같은 느낌이다.

다음 산행은 추석 지나고 9월 25일경 우악산으로, 10월 넷째주경에는 금요일 밤차타고 일요일에 올라오는 2박 3일 코스의 지리산이다. 작년 9월 산행이었으니 함께 산에 다닌 지 1년 가까이 되면서 산악회 사람들과도 많이 친해졌고, 손꼽아 기다리는 산행으로 내마음에 즐거움으로 들어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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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의 마지막 일기

2000년인가 사무실에 있는 캐비넷에 체게바라 사진을 붙였다. 담배를 피우는 약간 우수에 젖은 듯한 모습으로 잘생긴 얼굴. 가끔씩 시선을 보내며...체게바라평전도 읽었다.

그런데 이번에 체가 직접 쓴 일기를 보면서 어쩌면 화려한 추앙 뒤에 감춰진 현실을 본 듯한 느낌을 갖는다. 여기에는 체가 서른 여덟, 아홉 나이에 볼리비아의 어느 깊은 산골짜기에서 체포되고 총살 당하기까지 살아온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위대한 영웅으로 포장되었지만 사실상 때론 동지로, 때론 적으로 치열한 현실 속 대립을 피하고 혁명을 위한 게릴라로 삶을 선택했던, 어쩌면 할 수 밖에 없었던 개인의 판단까지가 보인다. 동맹군이라 믿었던 소련의 믿을 수 없는 태도, 남미 혁명가들의 판단의 차이 등...

소수 게릴라부대가 볼리비아를 해방시킬 수 있다는 낙관적인 판단은 어디서 나왔을까. 마치 해방직전의 빨치산을 보는 듯하다. 고립되어 산화해간 혁명가들. 하나뿐인 목숨을 역사에 바친 이들. 체는 그렇게 서른 아홉에 죽었다. 죽은 체가 볼리비아 민중들을 흔들고 있다는 말이 흘러나올 정도로 쿠바의 카스트로는 체를 영웅적으로 만들어냈다.

휼륭한 게릴라. 그러나 사상가는 아니었다. 마르크스 사상을 믿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 온 몸을 던졌을 뿐이다.

가끔은 산길을 걸으며 치열하게 이보다 더욱 험한 산맥을 오르내리며 혁명투쟁을 한 체가 생각이 날 것이다. 갔다가 다시 내려오는 산인데, 그 속에 여러 삶이 그려지는 것처럼.

내가 두살이 되던 해인 1967년 10월 9일 체는 갔다. 그 뒤 사십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볼리비아 혁명에 헌신한 맑은 영혼을 기리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차베스, 브라질의 룰라, 그리고 쿠바의 카스트로... 남미는 아직도 혁명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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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린 숙제

그동안 미뤘던 글을 써야 한다. 게으름을 부리며, 미루고 또 미뤘던 일들이 내 발목을 잡고 있다. 마음 속에 남은 숙제를 해결하지 않고 다른 일을 하기 힘들다는 것을 내 스스로 느낀다. 특히 비디오를 만들자고 제안했던 내가 대본과정에서 말만 지껄이고 대안을 제시하지 않고 있으니 일이 진척되지 않음을 느낀다. 그렇다. 이것은 내가 해야 할 일이다. 다시 한번 되새기자. 이번 주에 내가 하지 않으면 누구도 하지 못한다. 더는 다른 사람 탓을 하지 말자. 다만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 가를 보여 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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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그리고 느림보 컴퓨터

아침에 왜관에서 부산으로 가려했던 계획을 취소할 수 밖에 없었다. 너무 늦었기 때문이다. 요며칠 잠을 제대로 못 잔 탓에 뒷풀이하면서 눈이 껌벅껌벅 감기니 가서 자라는 한 동지의 말에 얼른 가서 잤는데 알람소리도 못듣고 깨보니 7시30분이었다. 그런데 얼른 챙겨서 나가면 되었을 텐데 나의 느림보가 작동했다. 대충 1시간 반정도면 가겠지하면서 아침밥먹고, 오전 8시30분 지나 차 국장의 강의가 시작되서야 맘놓고 가방을 둘러매고 나왔다. 그런데 쫌 늦었다. 그래도 차얻어 타고 왜관역에 가서 부산에 내려 가신 아빠에게 전화했다. "11시40분이 되어야 부산에 도착하겠는데요" 그랬더니 아빠께서는 "그럼, 너무 늦으니 볼일 보고 그만 올라가라"하신다. 그래도 표 끊고 동대구역까지 가서 아빠에게 또 전화를 드렸다. "어디야, 너무 늦고, 다 끝났어. 집에 가라"하신다. 결국 부산에 가는 것을 그제서야 포기하고 동대구터미날에 가서 인천행 티켓을 끊었다. 그 자리에서 곰곰히 생각해보니 '이게 나구나'란 생각을 했다. 굳어질 대로 느림보가 되어 버린 나. 마음만 있는 거 가지고 되는 게 아닌데...느려터져서는 할일을 제대로 못하고, 늦게 불붙어서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동원해서 부리나케 정신없이 달려가거나, 아니면 제대로 끝내지 못하고는 항상 뒤에서 고치고 또 고치거나 속상해 하는 내 버릇. 여유가 없는 이유를 다시 알거 같았다. 정확한 내 자신을 진단을 하지 못하는 거, 내 생각 욕심이 너무 많아 이것 저것 많은 것들을 담아 놓고는 제대로 꺼내지 못하는 거, 막연히 잘 되겠지하는 안일함. 이런 게 똘똘뭉친 느림보 아닌가. 오는 길에 한겨레21에서 읽은 글쓰기의 힘이란 특집에서 보았듯이 내 일기장에도 후회와 후회가 산처럼 쌓여 있다. 어쩌면 나는 글쓰기를 통해 잘못을 속풀이하면서 자기 위안을 삼아왔기 때문에 그것이 고쳐지기 보다는 원래 그런거로 고착화되는 게 가는 게 아닌가 싶다. 노동운동을 하겠다고 길 나선지 십오년이 남짓...나의 일기장에는 항상 "나는 무엇을 할까"를 써왔더랬다. 내가 뭘할지 노력하지 않고 말로만 떠든 격이다. 그래서 요모양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내가 한참을 걸려 컴퓨터 커고, 메일검색하고 하는 데 1시간반 넘게 지났다. 오랜 구닥다리 컴퓨터를 끼우고 고치고 해서 기능은 다 되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느려터진 내 모습같은 컴퓨터. 업그레이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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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재로 숨진 여종엽동지 누님의 글

[편지]내 가족! 내 형제! 우리의 동료들! 지킬 수 있을 때 지키고 힘이되어 주십시요

- 2004년 11월 5일 산재치료의 고통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산재노동자 고 여종엽 동지의 누이 여미선님이
우리 동지들께 보내온 편지입니다.


동지 여러분들 그동안 안녕 하셨습니까?

기억하실 런지 모르겠지만 
작년 11월 5일 날 사랑하는 동생을 머나먼 곳으로 떠나보낸
한 못난 누나를 아실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지면으로 인사를 드리게 되어 대단히 죄송스럽습니다.

하지만
그간 동생의 아픈 몸과 마음
우리 가족들의 간절한 마음과 안타까운 심정들을
수많은 전국의 산재노동자들과 아픈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리고 동참하고 싶은 마음에
이렇게 멀리서 인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동생이 근 몇 년을 아파 오면서
육체적 또한 정신적 고통으로 전전긍긍해
이렇게 크나 큰 악마가 불어닥칠 줄은
꿈에도 상상할 수 없었고고
지금도 온가족이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아픈 마음을 호소할 길이
없습니다.

그로 인해
한 가정의 단란한 행복은 그림자처럼 멀어지고
남은 것은
피멍이 든 병든 가슴과 눈만 뜨면 흘러내리는 눈물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겨우내 땅속깊이 숨어있던 새싹들도
이 밝은 세상을 보기 위해 모진 기를 쓰고 고개를 내미는데
하물며
우리 인간세상에서 안되는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살기위해서
좀 더 편하고 행복해지기 위해서
죽기 살기로 했던 결과가
인간대 인간으로 대접을 받지 못한다면
이 세상 어디가서 마음 편히 발 붙이고 살겠습니까?

동생의 아픔으로 인해
산재의 요청, 불승인, 재심, 승인이 나기까지 과정들을 쭉 지켜보면서
아직까지도 노동자들 세계에서는
억울하게 그들의 아픔을 제대로 밝히지도 못하고
죽어간다는 것을 많이 느꼈습니다.
난생 처음 근로복지공단이라는 곳도 가 보았습니다.
전 정말 기절할뻔 했습니다.

동생을 두 번 죽이기 싫어서 저도 수많은 동지들과 동참했었습니다.
차디찬 시멘트 바닥에서 온몸을 불사르면서
목청을 높여도 눈도 깜짝하지 않고 두 다리 펴고있는 그들을 보면서
정말 내 혈육이고 피붙이였다면 그렇게 냉정한 판단을 내렸을까 하는
마음이 들더군요
정말 오기가 생기더군요
노동자들을 위해 있어야 할 근로복지공단이
노동자들 마음을 헤아려 주기는커녕 서로 목청 높여 싸워야함이
너무나 한심했습니다.
이 나라가 누구 때문에 살아가는데 그들이 누구 때문에 그런 위치에
존재하는데
정말 우리 노동자들이 비참하고 불쌍했습니다.

전 그때 생각했습니다.
힘이라도 있고 목소리라도 커야 사람 대접을 받겠구나 라는 것을 요

동지 여러분들
그래도 전 살아나갈 희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의 크나 큰 힘과 끈끈한 우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1차 불승인은 났었지만
끊임없는 여러분들의 응원에 재심을 거쳐 이번에 산재승인을
받았습니다.
감사 드립니다.
여러분들이 안 계신다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 듭니다. 
저는 산재승인 소식을 듣고 기쁜 마음도 마음이지만
너무나 가슴이 아파 울었습니다.
동생이 살아 생전 이 소식을 접했다면
얼마나 기뻤을까? 하는 마음에 너무나 서글펐습니다.

한사람을 떠나보낸 그 빈자리는
그 어떤 무엇도 바꿀 수도 채울 수도 없는 것 같습니다.
문득 문득 떠오르는 기억들은
아파하다 정신까지 잃어
자기 자신을 포기해버린 생각들로 가슴이 아프기만 합니다.

동지들!
힘을 내시고 내 가족, 내 형제, 우리의 동료들
지킬 수 있을 때 지키고 힘이 되어 주십시오
떠나고 나면
일억 천금 만금 종이 한 장에 지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몸 건강 정신 건강인데
아무리 건강했던 사람도
병마는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는
물음표 인 것 같습니다.

아직까지도 사회적 여건이
노동자들 뜻을 다 다듬어주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저도 이번 계기로 인해 많은 것을 깨우치게 되었고
좀 더 우리 노동자들의 틈새에 끼여
많은 아픔과 고통이 없는 세상에서
눈높이를 같이하고 싶습니다.

저에게 또 이런 기회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모두들 건강하시고
두 번 다시 동생처럼 이렇게
억울하고 고통 받아 가는 부당한 일이 없었으면 하는게
저의 마지막 바램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노동 동지 여러분들
감사의 말씀을 끝으로
멀리서나마 파이팅을 빌겠습니다.

대구에서 고 여종엽의 누나 미선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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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30일 부산 - 김진숙지도위원 연설

부치지 못하리란 걸 알면서도 밤새워 쓰는 편지도 있고 오지 않으리라는 걸
알면서도 기다려지는 편지가 있습니다. 돌아오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기다리게 되는 사람이 있고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보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기다리지 않아도 밤은 자꾸 오고 술마저 취하지 않는 밤.
새벽이 얼마나 더디 오는지 새벽을 견뎌 본 자는 압니다.

그런 밤, 신내린 무당처럼 산에 올라 부를수록 상처가 되는 이름을 목놓아
부르는 일은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언제나 늦게 오던 사랑. 다시는 볼 수 없을
때가 되어서야 그게 사랑이었음을 깨닫는 일은 얼마나 쓸쓸합니까?


내가 스물 하나 일 때 박창수도 스물 하나였고 내가 스물 셋일 때 스물
하나였던 김주익을 만났던 언제나 거기서부터 떠오르는 이 형벌같은 기억들은
얼마나 잔인한 일입니까?

참 잘 자란 용찬이가 지 에미가 가슴속에 눈물의 저수지를 파놓고 그 물 떠
먹여가며 그 물로 씻겨서 키웠을 용찬이가 우리가 처음 만났던 스물 한 살.
소나무처럼 푸르른던 그 때 그 애비의 나이가 되었건만 아직도 죄스럽기만 한
우리는 준엽이 그 아이가 그 애비만한 나이가 될 때 그 때 우린 그 아이 앞에
무엇이 되어 서 있을까요?

내게 남은 시간들을 다 내주고 그들이 단 하루를 더 살 수 있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 하루동안 아이들만이라도 볼 수 있게 했어야 했습니다.
그 따뜻하고 보드라운 것들을 비벼보고 만져보고 빨아도 보고 부서지도록
안아도 보고 그랬어야 했습니다. 미안하다는 너무너무 미안하다는 그 말이라도
했어야 했습니다.


감빵안에서 징벌방에서 그리고 대공분실에서 혼자 당하는 일의 처절함, 혼자
견뎌내야 하는 그 참혹함을 알면서도 하나는 감방 안에서 하나는 크레인
위에서 하나는 도크바닥에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 보내는 게 아니었던
겁니다.

박위원장이 주익씨를 만나지 않았기를 빌고 또 빌었습니다. 저승에도
북극이란게 있고 남극이란 것도 있어서 그들의 거리는 천리나 만리나 되게
멀어서 그들이 우연히라도 마주치는 일이 없기를 예수님께 빌고 부처님께도
빌었습니다.

박위원장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사람을 어떻게 이렇게 보냈냐고 주익이를
어떻게 이렇게 보냈냐고 얼마나 원망을 하겠습니까? 그 착해빠진 사람이
혼자서 목에 밧줄을 걸 때까지 니들은 도대체 어디서 뭘했던 거냐고 물으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산 자는 누구나 죄인이었던 그 날 이후. 우리는 각자의 양심에 검은 리본을
달았었고 스스로에 대해 반성이란 것도 했습니다. 129일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목매달아 죽은 시신의 얼굴이 편안해 보였을까? 함께 하지 못했던 자책감에
몸부림을 했었고 우리 모두의 죄를 혼자 뒤집어쓰고 속죄한 재규형 때문에 한
동안 서로 눈을 마주치는 일조차 두려워했습니다. 누구나 복수를 다짐했었고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맹세도 했습니다. 그들이 남기고 간 새끼들 또래의
아이들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살가죽이 불에 닿는 느낌이었고 키가 큰 사람을
보는 것 만으로도 숨이 턱 막히고 했었습니다.

연대해야 더 이상 죽지 않는다고 수 천번도 더 외쳤고 값비싼 댓가를 치르고
깨달은 노동자는 하나란 사실을 다시는 잊지 말자 했습니다. 우리 그 때
그러지 않았습니까? 우리 그 때 다들 그러지 않았습니까? 부산 노동자도
그랬고 울산 노동자도 그랬고 여성노동자도 그랬고 남성 노동자도 그랬고 늙은
노동자도 그랬고 젊은 노동자도 그랬습니다. 정규직도 그랬고 비정규직
노동자도 그랬고 금속노동자도 그랬고 병원노동자도 그랬고 밖에서 일하는
노동자도 그랬고 안에서 일하는 노동자도 그랬습니까


그 일로부터 20년이 지나고 200년이 지난 것도 아닌데 그토록 철폐를 외쳤던
신자유주의는 우리들의 자연스런 일상이 되어 있습니다.

비정규직은 먹고 살기 위해 잔업철야를 해야하고 정규직은 짤리기 전에 한
대가리라도 더 하려고 잔업특근에 목숨을 겁니다. 연대투쟁 열심히 하는
집행부는 재선에 실패하고 임금 많이 올리고 성과급 많이 따내는 집행부는
인정받습니다.

성과급 받아서 차 바꾸고 그 차 값 할부금 때문에 잔업을 또 하고 뼈골 빠지게
잔업한 돈 모아서 큰 집으로 이사했으니 융자 갚고 관리비 감당하려면 특근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큰 아이 학원비는 점점 늘어나는데 작은 아이마저
학원을 시작해야 하고 그렇게 키운 새끼들을 죄다 비정규직이 되고 비정규직과
실업자는 각자 알아서 알맞은 방법으로 자살하고 정규직은 과로사와 산재로
죽습니다.

열 사람 하던 일을 다섯 사람이 해도 충분하다는 걸 우린 점점 늘어나는
과로사와 근골격계를 감수하면서 입증해줬고 그렇게 우리는 저들의 구조조정을
합리화 시켜줬습니다. 결국 다섯 사람이 하던 일을 세사람이 해도 된다는 또
다른 구조조정의 무덤을 우린 우리 손으로 열심히 파고 있습니다.


이제 자본가들은 더 이상 그들의 손으로 덫을 놓지 않습니다. 노동자들 스스로
덫을 만들고 그 덫에 걸릴 순서를 알아서 정하고 1번 비정규직, 2번 여자, 3번
늙은이 순으로 차례대로 그 덫에 밀어넣습니다.

공장 한쪽에서 비정규직은 투쟁하고 그 코앞에서 정규직들이 탁구를 치고
족구를 하는 것도 더 이상 낯선 광경이 아닙니다.

비정규직의 숫자가 정규직을 넘어선 공장에서 노조간부들이 사무실에 앉아
각자 등돌리고 게임에 몰두하는 모습도 이제 자연스런 일상이 돼버렸고 에어컨
빵빵한 노조 사무실 소파에서 노조간부들이 연예인 X파일을 논할 때 엉덩이
붙이고 앉을데라곤 화장실 바닥 밖에 없는 청소용역 아지매들에겐 회사의
냉대보다는 노조의 무관심이 더 뼈저리게 다가옵니다.

이은주의 자살에 대한 관심만큼 이용석의 죽음에 우리들이 관심을 쏟았더라면
박일수는 안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아직도 저는 합니다. 최희섭이나
박주영에 대한 관심의 반만이라도 우리가 과거사법, 사립학교법에 대해서
가진다면 자식을 먼저 보낸 늙은 부모님들이, 줄줄이 돌아가시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전교조 동지들이 그들끼리만 거리를 헤매는 수치스런
일만큼은 막아낼 수 있다고 저는 여전히 믿습니다.

농민들이 제 손으로 키운 과일을 불태우며 울면서 싸우는데 수입과일을 사먹는
노동자가 어찌 세상의 주인일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쏟은 오물을 청소용역
아지매를 전화로 불러 치우게 하는 노조간부가 누구의 존경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규정이라는 이유로 역 구내에서 노점상 할머니와 노숙자를 눈물 한 방울도
없이 쫓아내는 노조간부가 집회에 나와서 외치는 평등과 해방은 얼만큼이나
진실입니까?

배차 시간 때문이란걸 알지만 장애인이 온 힘을 다해 손을 드는데 그냥
지나치는 버스 노동자가 자신들이 투쟁할 때 누구에게 당당히 연대를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지율스님의 그 일관된 진정성이 김주익의 그것과 너무나 닮아 있다는 그
생각을 왜 우리는 안합니까?

이주노동자들에게 제일 먼저 가르칠건 빨리빨리와 씨발놈이 아니라 연대와
인간의 가치입니다.


1300만 중에 840만이 비정규직이 되는데 10년이 채 안 걸렸습니다. 비정규직과
정규직은 무궁화와 고속철이 아니라 같은 열차의 앞칸과 뒷칸일 뿐입니다.
1호차부터 10호차까지 비정규직을 인질로 태우고 지옥으로 돌진하는 이 죽음의
고속철을 11호차부터는 정규직이 실려있고 자유석엔 우리 아이들이 실려
달려가고 있는 겁니다. 300KM로 달리는 고속철에서 혼자 뛰어내릴 수
없습니다. 다 죽지 않으려면 멈춰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게 콩 한쪽뿐이라 하더라도 그걸 나눌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진정한 연대입니다. 대우자동차 창원 공장처럼 부산은행처럼 정규직이 나서서
비정규직을 조직하는 일부터 합시다. 비정규직이 불쌍해서가 아니라 다 죽지
않으려면 그래야만 합니다.

스물 한 살 용접공 제게 그 때 가장 두려웠던 건 아침이 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매일 그런 아침을 맞을 비정규직들에 실업자들에게 우리가
희망이 돼야 하지 않겠습니까?

14년째 되풀이하는 다짐이지만 내년에 좀더 달라져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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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직은 비정규직의 하늘입니다"

"누가 비정규직입니까?" 어떤 이는 하청업체 노동자를 정규직이라고 말한다. 비정규직은 처음부터 업체로 들어 왔으니 "차별은 당연한 거 아니냐"는 얘기다. 허나 본질을 놓치고 하는 소리. 정규직으로 들어오는 게 하늘의 별 따기란 걸 모르지 않을 텐데... 어쩌면 그들의 차별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싶다는 정규직, 내 안의 차별이 아닐까?   .

 

그래서일까? 현대차회사가 비정규직 노동자들 1백여 명을 계약해지하고, 노조위원장을 백주 대낮에 납치 구타한 뒤 경찰에 넘기는 등 천인공로 한 짓을 서슴지 않는데, 분위기가 냉랭하다. 비정규직 여성노동자가 알몸까지 드러내며 수치심보다 무서운 자본의 폭력에 저항하지만 아직까지 정규직 노조의 연대는 기대에 못 미친다.
지난 해 현대자동차가 2조원 순이익을 냈다. 정규직 노조는 성과급을 따냈지만, 비정규직의 정규직 채용을 요구하진 않았다. "우린 어떻게 되냐"며... 되레 회사가 떠드는 논리에 갇혀 있으니...이를 뚫을 수 있는 노조 간부들, 활동가들의 앞선 고민과 투쟁이 절실하다.

 

친구나 가족처럼 다가가기

 

"20년 전 통근버스를 타면 자리는 젊디젊은 관리들 차지였다. 이들에게 받았던 설움과 모멸감을 지금 비정규직이 우리에게 느끼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봐야 한다"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의 말이다.
솔직히 말해 우리는 부끄러운 짓도 많이 했다. 1998년 정리해고법과 파견법을 막아내지 못했다. 열심히 투쟁했지만 죽기로 싸워내지 못했다. 혹시 제아무리 법이 바꿔도 단체협약이 있기에 끄덕 없으리라 여기지 않았을까. 그 결과 840만 비정규직 시대, 비정규직이 정규직보다 많은 일터가 됐고, 노조의 조직력도 바닥을 긁고 있다. 

"형으로서 그런 사정을 모른 것도 부끄럽지만 지금 현재 어떻게 해주지 못하는 심정, 정말 죽고 싶다" 정규직형이 노조게시판에 올린 글.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비정규직인 동생이 일요일도 없이 뼈 빠지게 일하는 데 고작 한 달 1백 여 만원 받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는 고민을 하는 글이다. 진실로 가슴 아파했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런 마음이 아닐까. 같은 노동자를 향해 닫혀있던 마음을 열고 비정규직들을 친구나 가족같이 생각하는 마음. 자본의 속성이 경쟁과 분열이라면, 노동은 일할 때처럼 단결과 화합 아닐까.

 

올해 뭔가를 저지르자

 

우선 일상의 차별을 없애자. 말은 않지만, 비정규직들은 임금, 노동조건, 산재 등에서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 수두룩한 차별, 하나 씩 줄여가자. 그러자면 임단협 요구로 가져가야 할 것이다. 비정규직 노동자 임금인상과 처우개선을 내걸고 연대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둘째, 정규직으로 닫혀 있는 규약을 여는 것이다. 같은 현장에서 늘 함께 일하는 노동자들,소속에 상관없이 모두 조합원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현대자동차노조는 지난 해 대의원대회에서 규약개정하기로 결의했고, 금속노조는 올해 지회 규약을 바꿔 일터에서 함께 일하는 비정규직부터 조직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셋째, 비정규직도 노동3권을 갖게 하자. 정규직 노조의 '든든한 연대'가 눈에 띈다. 현대차노조 전주지부 얘기다. 1년을 하청노동자 조직화에 힘썼다. 비정규직 주체를 꾸려 모임을 만들다. 드디어 23일 지회를 결성해 금속노조에 가입했다. 가입대상의 2/3가 가입했다. 이들은 결성식이 끝난 뒤 평소보다 두시간이나 늦었는데 '대기'한 통근버스를 타고 퇴근 할 수 있었다. 정규직이 어떻게 하냐에 달렸다는 말이 빈말이 아니다.
이 밖에 불법파견 투쟁, 신규채용 100% 정규직화 등 노조의 현실과 자본의 계획을 철두철미하게 분석해서 비정규직 비율을 줄여나가자.

 

어느 비정규직이 꼭 하고 싶어했던 말 

 

한진중공업 비정규직 노동자의 죽음이 말하듯 오늘 날 비정규직은 '죽기보다 싫은 하류인생'이다. 그러나 이들은 20년 전 지금 정규직의 모습과 너무 닮았다.  
지난 1월, 어느 수련회장에서 하청노동자가 따뜻한 연대를 당부하며 한 얘기가 가슴을 쳤다. 
"정규직은 비정규직의 하늘입니다" 정규직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비정규직을 살게 하고, 차가운 냉대가 우리를 주눅들게 한다고 평소 이 말을 꼭 하고 싶었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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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제를 겨우 마쳤다. 마감을 이틀이나 넘겼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3일이다.

그동안 고민을 많이 하게 했다.

조선노동자들이 어떻게 사는 지 몰랐고, 함께 일하는 비정규직이 어떠한지.... 무슨 얘길 해야 할 것인가. 그래서 읽고 여운이 남는 글이 될까. 그러나 글을 쓰면서 내내 내가 비정규직에 대한 뭘하는 가 아는 게 실상은 다 판에 박힌 것 같은 사건과 사실 말고 그들의 삶과 고민을 하나 하나 함께 느끼지 못했음을 알게 됐다. 한참 멀리서 기사를 써왔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내 주변에도 비정규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데  평소 대화를 못하고 그냥 살았다. 쓰고 싶었던 생활글을 포기하고 해설기사처럼 쓴 데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과 고민 가까이 서려하지 있지 않기 때문이다. 거꾸로 나를 반성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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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큰 힘주는 여성노동자들

10년 전 동지들이 모였다. 인천에서 제일 큰 옷공장 미싱사들이. 백아무개 어용노조 몰아내고 민주노조를 만들자고 꿈만 가졌던 사람들. 쪽수도 능력도 못되어 노동자들에게 '작은 파문'만 던지고 해고되거나 정리했던 언니, 동생들. 살다보니 그렇게 인연을 맺고 산 10년지기가 됐다. 언니는 낭군 하늘나라 보내고 애비 쏙 빼닮은 딸내미와 함께 살고 있다. 조건부 기초수급자다. 미싱탈때 얻은 직업병으로 허리가 망가진 채 가진 재산 하나 없어 다행히 정부의 큰 혜택(?)을 받는다. 자활센타에서 일한다. 그런데 정부는 12개월 중 1월 한달은 고 퇴직금 안줄려고 놀린다. 굶던지 어쩌던지 알게 뭐냐식이다. 2월부터 다시 가보니 인원은 팍 줄이고, 6명 가지고 월100만원 수익 내겠다고 난리란다. 언니는 발목부터 약10센티가량이 너무 아프다고 호소한다. 동생 하나는 몇 년만에 인천에 와서 사는 얘길 하고 갔다. 자기 주장 분명하고 마음이 아주 착한 동생이다. 결혼하고 애둘 낳고 보수적이고 제멋대로였던 남편을 180도 바꿔냈다고 한다. 그 몇년전보다 예뻐지고 살이 붙은 이유였다. 빚이 8천만원. 시댁에 보태고 남편 차 때문에 생긴 거란다. 그 때문에 일을 나갔고, 지금 너무나 힘든 일을 해서 근력이 세졌다나. 키고 작고 제 몸무게보다 많은 50Kg짜릴 나르고, 도배, 미장, 물품운반 등 그냥 막노동꾼과 다름없는 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 내색 일절 않고 자다가 끙끙앓고 하니 그런 모습을 보며 남편이 차츰 변했다고. 뼈마디 마디 성한 데 없지만, 집에 돌아오면 애들 보랴 집안 치우랴 그렇게 산다고. 그래도 밝았다. 다른 동생하나는 공부방 선생님이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방송통신학교로 10년 공부하고 있다. 올해 여름에 학사모를 쓴다. 싹싹하니 곰살 맞은 예쁜이다. 그런 예쁜이가 민주노동당 활동하느라 생활비 한푼 못 가져다주는 남편땜에 속을 끓인다. 바가지 안긁는 편이다. 나처럼 관심을 끊고, 공부방에서 버는 몇십만원으로 2005년을 사는 알뜰 주부다. 20대 젊은 노동자들이 30-40대 중년 노동자로 바뀐 모습들. 그러나 여전히 착하고 순진하다. 가진 것 없는 고통, 어려움, 꿋꿋이 이겨내며 산다. 나를 가슴까지 노동자로 만들어 줬던 나의 동지들...그들이 오늘 나를 살게 한다. 조만 간 얼마 전 두 동생들, 멀리 마산 사는 언니까지 1박2일 회포를 풀기로 했다. 그들 사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내게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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