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글 목록
-
- 네이트온 메신저가 안깔려서^^
- 파란 하늘
- 2009
-
- 나는 어데로 가고 있는가
- 파란 하늘
- 2009
-
- 밭에 가는 두번째 날
- 파란 하늘
- 2009
-
- 고래 도서관에서
- 파란 하늘
- 2009
-
- 2009/04/23
- 파란 하늘
- 2009
40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월요일 출근할 때는 "근로복지공단 앞 아침 선전전을 참가해야 하나?"며 마음의 짐을 짊어지고 오다가는 막상 자리에 앉아서는 다른 사람들의 분위기를 보아하니 나갈 생각않는데 "나만 혼자 나가서 뭐하냐?"며 핑계거리 만들어서 그냥 눌러 앉는다.
지난 두 주동안 영등포 대영빌딩은 한마디로 혼란의 도가니였다. 민주노총 수석이 직위를 이용해 사용자에게 돈을 받아 착복해놓고 구속 될 때까지 "사용자에 의한 탄압 운운"하면서 방어막을 쳐오다가 덜미를 잡혔으니....민주노총은 쑥대밭이 됐다. 사회적으로 어용노총, 비리 집행부란 멍에를 뒤집어섰다. 그런 상황에서 집행부는 현명치 못하게 '투쟁조직을 위해서'란 명분아닌 명분으로 남아있으려고 하다가 결국 꼴상 사납게 내려갔다. 민주노총이란 권력, 얼마나 내놓기 싫었으면....
이제 비상대책위가 꾸려지고 맞이하는 첫 월요일이다. 전재환 연맹 위원장이 비대위원장을 맡은 민주노총도 지난 주에 처리됐던 사무처사직 문제 등 남아있는 숙제가 산더미같을 것이다. 혼란스럽고...태산같은 숙제는 연맹도, 금속노조도 마찮가지.
지난 주 금요일 계약해지된지 1년이 되는 하이닉스매그나칩. 용케도 조합원들 결속해서 열심히 싸워오고 있는데 지회장이 경찰에 연행되고 말았다. 오늘 아침 출근해보니 하이스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새벽에 현장을 점거했다는 소식이 올라왔다. 비정규직 사업장들 중에 제대로 풀린 곳 하나없이 꼬이고 꼬인 채 어려운 투쟁을 하고 있다.
전국노동자대회를 전후로 금속이 중심이 되어서 풀어야 할 문제다. 비정규확산법 저지와 함께 그 전에 힘을 모아야 할 것이 1년째 질질 끌어오고 있는 비정규직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할 건가. 마음의 짐이 무겁기만 하다.
얼마전 하이닉스매그나칩지회의 한 조합원이 돈이 없어 세방에서 나와 천막에 짐을 놔두고 몸뚱이만 아는 형님네 집에서 붙이기로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전국비정규연대회의가 출범한 다음 날 정부는 기륭전자 비정규직 현장에 경찰병력을 투입했다. 이들의 투쟁과 고통 앞에 어떻게 함께 해야 할 건가.
인천지역일반노조 7월 산행계획 [청계산 4시간 코스]라는 공지를 보고 ‘설악산 대청봉도 올라갔는데 이 까짓 것 식은 죽 먹기’라 여겼다. 인천에서 가평까지 약 두 시간 채 못 걸려 도착한 청계산 밑은 계곡에 불어난 물이 깨끗하고, 저수지가 꽤 크다는 인상을 받았다. 산행을 시작할 때 눈앞에는 울창하게 자란 활엽수 숲이 펼쳐졌다.
5분이나 갔을까 계곡이 나왔고 우리는 계곡을 따라 올라갔다. 바위엔 푸른 이끼들이 착 달라붙어있고, 쑥쑥 자란 고사리들이 많았다.(나는 고비라고 주장했지만 집에와서 틀렸다는 걸 알았다. 사람들이 먹는 것은 어린 고사리며, 그 과정을 지나면 잎에 커진다. 고비는 모양이 꼬부라진 게 별로 본 적이 없었던 듯싶다.)
울창한 밀림같이, 숲을 헤치고 나갔다. 계곡을 따라 오른 시간이 약 1시간 반 정도 지나자 하늘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길도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땀은 비옷 듯 쏟아지고, 땀이 나자 기쁨도 함께 샘솟았다. 이런 걸 희열이라고 하나. 쉬고 싶지 않아 계속 올라갔다. 유찬이 약간 힘들어했으나 정상부근에선 나보다 앞서 갔다. 조광호 위원장님 다음으로 우리 가족이 1등을 했다.
(..재)정상에 올라 점심식사를 하는 데 빗방울이 떨어지더니 가늘지만 옷을 적실 만큼 됐다. 급하게 비옷(잠바)를 입고, 산악회 리더인 종수씨가 가져온 후라이(?)를 치고 둘러앉아 각자 가져온 음식을 먹었다. 우리가 준비해온 계란과 감자는 출발하기 전에 아침으로 먹었고, 수박은 정상에 도착하자마자 동이 났다. 사온 김밥을 먹었는데 4줄은 좀 많았다. 다음부터는 3줄을 넘기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커피도 얻어 마시고, 기념 사진도 찍고, 정상 길목을 막고 약 1시간 가량 있었다.
배가 좀 차니, 돌탑 앞에 청계산을 설명하는 안내판이 눈에 들어왔다. 청계는 닭을 외양간에 넣는다는 뜻이라,...에서 보면 ...쪽이여서 청룡을 뜻한다. 청계는 푸른 계곡이 아니다. ..좀 이해가 안되지만 ‘계곡’이 들어간 의미는 아니다는 정도에서 이해했다.
하산 길은 역시 어렵다. 설악산에선 가파랐기에 발에 힘을 주다가 기운이 빠졌는데, 이번에는 비가 내리는 가운데 이끼낀 미끄러운 바위, 작은 바위가 이리저리 뒹굴고, 왼쪽 오른쪽 낭떠러지 옆으로 길이 나있어 바짝 긴장하며 내려갔다.
얼마 전 체가 볼리비아 혁명을 위해 밀림에서 생활했던 기간에 쓴 일기에 적혀있던 ‘밀림’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다지 크지 않은 산에 이렇게 울창한 숲이 우거지고 마치 밀림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하며 걸었다. 나뭇잎에 하늘을 가리고, 줄기들이 이쪽 저쪽 길게 늘어져 있어 몇 번이나 머리에 부딪혔다. 약간 후텁지근 했지만 모험의 세계를 즐겼다. 낭떠러지 길 옆에 자란 풀들이 위험을 가리고 있어서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수다’가 없어지고 앞과 뒤 간격이 좁혀졌다. 조광호 위원장님을 제외하고 선두는 가면서 자주 쉬어줬다. 그러다가 나는 보지 못했지만 유찬이가 미끄러져 거꾸로 떨어졌는데 다행히 낙엽이 쌓여 다행히 다치지 않았다. 수풀을 헤치고 나오는 과정에서 나는 모기(?)에게 물려 엄청 아팠다. 전체로 보자면 마지막에 길을 확인하다가 종수씨와 헤어져 내려온 것.
산은 결코 만만하게 봐서는 안된다는 진리를 다시 못박아준 산행이었다. 또한 우리나라 산이 이렇게 울창하다는 걸 알았다.
오늘 나의 몸 상태는 잠이 부족했지만 다행히 괜찮았다. 처음 올라갈 때만 빼고.
마지막 맛난 것도 먹었다. 허브나라-뫼우리-꽤 알려진 곳인듯하다. 온실을 만들어 허브를 키우고, 그것을 상품으로 만든 온갖가지 것들을 전시 판매하고 있다. 내가 먹은 새싹비빔밥도, 유찬이가 먹은 돈까스도 맛있었다.
식사를 마칠 때 쯤 빗줄기가 굵어졌다가 인천으로 출발할 때부터는 비가 멈췄다. 계곡 물에 발담갔던 설악산과 다른, 사람들이 붐비었던 유명한 산들고 다른, 비오는 날 여름 산행의 모험을 즐긴 하루였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청계산을 한바퀴 다 돌았다. 길잡이가 중간으로 내려오는 길을 잃어서라고 하는데 우리는 훈련당한 것 같은 느낌이다.
다음 산행은 추석 지나고 9월 25일경 우악산으로, 10월 넷째주경에는 금요일 밤차타고 일요일에 올라오는 2박 3일 코스의 지리산이다. 작년 9월 산행이었으니 함께 산에 다닌 지 1년 가까이 되면서 산악회 사람들과도 많이 친해졌고, 손꼽아 기다리는 산행으로 내마음에 즐거움으로 들어와 있다.
2000년인가 사무실에 있는 캐비넷에 체게바라 사진을 붙였다. 담배를 피우는 약간 우수에 젖은 듯한 모습으로 잘생긴 얼굴. 가끔씩 시선을 보내며...체게바라평전도 읽었다.
그런데 이번에 체가 직접 쓴 일기를 보면서 어쩌면 화려한 추앙 뒤에 감춰진 현실을 본 듯한 느낌을 갖는다. 여기에는 체가 서른 여덟, 아홉 나이에 볼리비아의 어느 깊은 산골짜기에서 체포되고 총살 당하기까지 살아온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위대한 영웅으로 포장되었지만 사실상 때론 동지로, 때론 적으로 치열한 현실 속 대립을 피하고 혁명을 위한 게릴라로 삶을 선택했던, 어쩌면 할 수 밖에 없었던 개인의 판단까지가 보인다. 동맹군이라 믿었던 소련의 믿을 수 없는 태도, 남미 혁명가들의 판단의 차이 등...
소수 게릴라부대가 볼리비아를 해방시킬 수 있다는 낙관적인 판단은 어디서 나왔을까. 마치 해방직전의 빨치산을 보는 듯하다. 고립되어 산화해간 혁명가들. 하나뿐인 목숨을 역사에 바친 이들. 체는 그렇게 서른 아홉에 죽었다. 죽은 체가 볼리비아 민중들을 흔들고 있다는 말이 흘러나올 정도로 쿠바의 카스트로는 체를 영웅적으로 만들어냈다.
휼륭한 게릴라. 그러나 사상가는 아니었다. 마르크스 사상을 믿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 온 몸을 던졌을 뿐이다.
가끔은 산길을 걸으며 치열하게 이보다 더욱 험한 산맥을 오르내리며 혁명투쟁을 한 체가 생각이 날 것이다. 갔다가 다시 내려오는 산인데, 그 속에 여러 삶이 그려지는 것처럼.
내가 두살이 되던 해인 1967년 10월 9일 체는 갔다. 그 뒤 사십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볼리비아 혁명에 헌신한 맑은 영혼을 기리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차베스, 브라질의 룰라, 그리고 쿠바의 카스트로... 남미는 아직도 혁명 중이다.
그동안 미뤘던 글을 써야 한다. 게으름을 부리며, 미루고 또 미뤘던 일들이 내 발목을 잡고 있다. 마음 속에 남은 숙제를 해결하지 않고 다른 일을 하기 힘들다는 것을 내 스스로 느낀다. 특히 비디오를 만들자고 제안했던 내가 대본과정에서 말만 지껄이고 대안을 제시하지 않고 있으니 일이 진척되지 않음을 느낀다. 그렇다. 이것은 내가 해야 할 일이다. 다시 한번 되새기자. 이번 주에 내가 하지 않으면 누구도 하지 못한다. 더는 다른 사람 탓을 하지 말자. 다만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 가를 보여 주자.
[편지]내 가족! 내 형제! 우리의 동료들! 지킬 수 있을 때 지키고 힘이되어 주십시요 |
- 2004년 11월 5일 산재치료의 고통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산재노동자 고 여종엽 동지의 누이 여미선님이 우리 동지들께 보내온 편지입니다. 동지 여러분들 그동안 안녕 하셨습니까? 기억하실 런지 모르겠지만 작년 11월 5일 날 사랑하는 동생을 머나먼 곳으로 떠나보낸 한 못난 누나를 아실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지면으로 인사를 드리게 되어 대단히 죄송스럽습니다. 하지만 그간 동생의 아픈 몸과 마음 우리 가족들의 간절한 마음과 안타까운 심정들을 수많은 전국의 산재노동자들과 아픈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리고 동참하고 싶은 마음에 이렇게 멀리서 인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동생이 근 몇 년을 아파 오면서 육체적 또한 정신적 고통으로 전전긍긍해 이렇게 크나 큰 악마가 불어닥칠 줄은 꿈에도 상상할 수 없었고고 지금도 온가족이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아픈 마음을 호소할 길이 없습니다. 그로 인해 한 가정의 단란한 행복은 그림자처럼 멀어지고 남은 것은 피멍이 든 병든 가슴과 눈만 뜨면 흘러내리는 눈물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겨우내 땅속깊이 숨어있던 새싹들도 이 밝은 세상을 보기 위해 모진 기를 쓰고 고개를 내미는데 하물며 우리 인간세상에서 안되는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살기위해서 좀 더 편하고 행복해지기 위해서 죽기 살기로 했던 결과가 인간대 인간으로 대접을 받지 못한다면 이 세상 어디가서 마음 편히 발 붙이고 살겠습니까? 동생의 아픔으로 인해 산재의 요청, 불승인, 재심, 승인이 나기까지 과정들을 쭉 지켜보면서 아직까지도 노동자들 세계에서는 억울하게 그들의 아픔을 제대로 밝히지도 못하고 죽어간다는 것을 많이 느꼈습니다. 난생 처음 근로복지공단이라는 곳도 가 보았습니다. 전 정말 기절할뻔 했습니다. 동생을 두 번 죽이기 싫어서 저도 수많은 동지들과 동참했었습니다. 차디찬 시멘트 바닥에서 온몸을 불사르면서 목청을 높여도 눈도 깜짝하지 않고 두 다리 펴고있는 그들을 보면서 정말 내 혈육이고 피붙이였다면 그렇게 냉정한 판단을 내렸을까 하는 마음이 들더군요 정말 오기가 생기더군요 노동자들을 위해 있어야 할 근로복지공단이 노동자들 마음을 헤아려 주기는커녕 서로 목청 높여 싸워야함이 너무나 한심했습니다. 이 나라가 누구 때문에 살아가는데 그들이 누구 때문에 그런 위치에 존재하는데 정말 우리 노동자들이 비참하고 불쌍했습니다. 전 그때 생각했습니다. 힘이라도 있고 목소리라도 커야 사람 대접을 받겠구나 라는 것을 요 동지 여러분들 그래도 전 살아나갈 희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의 크나 큰 힘과 끈끈한 우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1차 불승인은 났었지만 끊임없는 여러분들의 응원에 재심을 거쳐 이번에 산재승인을 받았습니다. 감사 드립니다. 여러분들이 안 계신다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 듭니다. 저는 산재승인 소식을 듣고 기쁜 마음도 마음이지만 너무나 가슴이 아파 울었습니다. 동생이 살아 생전 이 소식을 접했다면 얼마나 기뻤을까? 하는 마음에 너무나 서글펐습니다. 한사람을 떠나보낸 그 빈자리는 그 어떤 무엇도 바꿀 수도 채울 수도 없는 것 같습니다. 문득 문득 떠오르는 기억들은 아파하다 정신까지 잃어 자기 자신을 포기해버린 생각들로 가슴이 아프기만 합니다. 동지들! 힘을 내시고 내 가족, 내 형제, 우리의 동료들 지킬 수 있을 때 지키고 힘이 되어 주십시오 떠나고 나면 일억 천금 만금 종이 한 장에 지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몸 건강 정신 건강인데 아무리 건강했던 사람도 병마는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는 물음표 인 것 같습니다. 아직까지도 사회적 여건이 노동자들 뜻을 다 다듬어주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저도 이번 계기로 인해 많은 것을 깨우치게 되었고 좀 더 우리 노동자들의 틈새에 끼여 많은 아픔과 고통이 없는 세상에서 눈높이를 같이하고 싶습니다. 저에게 또 이런 기회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모두들 건강하시고 두 번 다시 동생처럼 이렇게 억울하고 고통 받아 가는 부당한 일이 없었으면 하는게 저의 마지막 바램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노동 동지 여러분들 감사의 말씀을 끝으로 멀리서나마 파이팅을 빌겠습니다. 대구에서 고 여종엽의 누나 미선 드림 |
"누가 비정규직입니까?" 어떤 이는 하청업체 노동자를 정규직이라고 말한다. 비정규직은 처음부터 업체로 들어 왔으니 "차별은 당연한 거 아니냐"는 얘기다. 허나 본질을 놓치고 하는 소리. 정규직으로 들어오는 게 하늘의 별 따기란 걸 모르지 않을 텐데... 어쩌면 그들의 차별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싶다는 정규직, 내 안의 차별이 아닐까? .
그래서일까? 현대차회사가 비정규직 노동자들 1백여 명을 계약해지하고, 노조위원장을 백주 대낮에 납치 구타한 뒤 경찰에 넘기는 등 천인공로 한 짓을 서슴지 않는데, 분위기가 냉랭하다. 비정규직 여성노동자가 알몸까지 드러내며 수치심보다 무서운 자본의 폭력에 저항하지만 아직까지 정규직 노조의 연대는 기대에 못 미친다.
지난 해 현대자동차가 2조원 순이익을 냈다. 정규직 노조는 성과급을 따냈지만, 비정규직의 정규직 채용을 요구하진 않았다. "우린 어떻게 되냐"며... 되레 회사가 떠드는 논리에 갇혀 있으니...이를 뚫을 수 있는 노조 간부들, 활동가들의 앞선 고민과 투쟁이 절실하다.
친구나 가족처럼 다가가기
"20년 전 통근버스를 타면 자리는 젊디젊은 관리들 차지였다. 이들에게 받았던 설움과 모멸감을 지금 비정규직이 우리에게 느끼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봐야 한다"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의 말이다.
솔직히 말해 우리는 부끄러운 짓도 많이 했다. 1998년 정리해고법과 파견법을 막아내지 못했다. 열심히 투쟁했지만 죽기로 싸워내지 못했다. 혹시 제아무리 법이 바꿔도 단체협약이 있기에 끄덕 없으리라 여기지 않았을까. 그 결과 840만 비정규직 시대, 비정규직이 정규직보다 많은 일터가 됐고, 노조의 조직력도 바닥을 긁고 있다.
"형으로서 그런 사정을 모른 것도 부끄럽지만 지금 현재 어떻게 해주지 못하는 심정, 정말 죽고 싶다" 정규직형이 노조게시판에 올린 글.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비정규직인 동생이 일요일도 없이 뼈 빠지게 일하는 데 고작 한 달 1백 여 만원 받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는 고민을 하는 글이다. 진실로 가슴 아파했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런 마음이 아닐까. 같은 노동자를 향해 닫혀있던 마음을 열고 비정규직들을 친구나 가족같이 생각하는 마음. 자본의 속성이 경쟁과 분열이라면, 노동은 일할 때처럼 단결과 화합 아닐까.
올해 뭔가를 저지르자
우선 일상의 차별을 없애자. 말은 않지만, 비정규직들은 임금, 노동조건, 산재 등에서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 수두룩한 차별, 하나 씩 줄여가자. 그러자면 임단협 요구로 가져가야 할 것이다. 비정규직 노동자 임금인상과 처우개선을 내걸고 연대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둘째, 정규직으로 닫혀 있는 규약을 여는 것이다. 같은 현장에서 늘 함께 일하는 노동자들,소속에 상관없이 모두 조합원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현대자동차노조는 지난 해 대의원대회에서 규약개정하기로 결의했고, 금속노조는 올해 지회 규약을 바꿔 일터에서 함께 일하는 비정규직부터 조직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셋째, 비정규직도 노동3권을 갖게 하자. 정규직 노조의 '든든한 연대'가 눈에 띈다. 현대차노조 전주지부 얘기다. 1년을 하청노동자 조직화에 힘썼다. 비정규직 주체를 꾸려 모임을 만들다. 드디어 23일 지회를 결성해 금속노조에 가입했다. 가입대상의 2/3가 가입했다. 이들은 결성식이 끝난 뒤 평소보다 두시간이나 늦었는데 '대기'한 통근버스를 타고 퇴근 할 수 있었다. 정규직이 어떻게 하냐에 달렸다는 말이 빈말이 아니다.
이 밖에 불법파견 투쟁, 신규채용 100% 정규직화 등 노조의 현실과 자본의 계획을 철두철미하게 분석해서 비정규직 비율을 줄여나가자.
어느 비정규직이 꼭 하고 싶어했던 말
한진중공업 비정규직 노동자의 죽음이 말하듯 오늘 날 비정규직은 '죽기보다 싫은 하류인생'이다. 그러나 이들은 20년 전 지금 정규직의 모습과 너무 닮았다.
지난 1월, 어느 수련회장에서 하청노동자가 따뜻한 연대를 당부하며 한 얘기가 가슴을 쳤다.
"정규직은 비정규직의 하늘입니다" 정규직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비정규직을 살게 하고, 차가운 냉대가 우리를 주눅들게 한다고 평소 이 말을 꼭 하고 싶었다며...
--------------------------------------------------------------------------------
숙제를 겨우 마쳤다. 마감을 이틀이나 넘겼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3일이다.
그동안 고민을 많이 하게 했다.
조선노동자들이 어떻게 사는 지 몰랐고, 함께 일하는 비정규직이 어떠한지.... 무슨 얘길 해야 할 것인가. 그래서 읽고 여운이 남는 글이 될까. 그러나 글을 쓰면서 내내 내가 비정규직에 대한 뭘하는 가 아는 게 실상은 다 판에 박힌 것 같은 사건과 사실 말고 그들의 삶과 고민을 하나 하나 함께 느끼지 못했음을 알게 됐다. 한참 멀리서 기사를 써왔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내 주변에도 비정규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데 평소 대화를 못하고 그냥 살았다. 쓰고 싶었던 생활글을 포기하고 해설기사처럼 쓴 데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과 고민 가까이 서려하지 있지 않기 때문이다. 거꾸로 나를 반성케 했다.
최근 댓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