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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07/25
    한인세대들의 정체감과 사고방식
    목동
  2. 2007/07/24
    가장 큰 계명
    목동
  3. 2007/07/23
    나를 치료하는 생명의 빛
    목동
  4. 2007/07/19
    인생의 진정한 도움은?
    목동
  5. 2007/07/17
    한인이민자들의 필요에 대한 목양
    목동
  6. 2007/07/12
    인생의 노래
    목동
  7. 2007/07/07
    신앙과 묵상
    목동
  8. 2007/07/06
    하나님의 약속
    목동
  9. 2007/07/01
    예수는 생명의 물이다
    목동

한인세대들의 정체감과 사고방식

미국에있는 한인사회에서 한인 1세대는 한국어를 쓰고
한국식 사고방식을 따라 살아가는 기성세대이다.
그들은 미국에서 오래살았어도 여전히 그들의 의식속에는
한국적 문화와 사고방식을 벗어나지 못한다.
미국에 살고 있지만 그들은 여전히 한국적인 사고방식으로
미국의 다문화권에서 자신들의 뿌리를 중시하며 살고 있다.
그들의 의식속에는 늘 고국에 대한 뉴스와 정보에 눈과 귀가 열려 있으며,
고국의 향수에 늘 젖어 있다.
미국안에 살고 있지만 그들의 관심은 늘 고국에 대한 것들이다.
뉴스나 정보에 대한 습득은 주로 한글로 기록된 인터넷, 신문, 그리고 잡지에 의존한다.

이 세대는 한인가정의 주도세력으로 현재의 생활에 금전적으로나 역활적으로도
한인문화권안에서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나, 한인 문화권을 넘어,
미국주류문화나 타 이민문화권에 깊이 연류되지 못하고 다만 피상적인 접촉을 할 뿐이다.
언어적인 한계로 인하여 미국민들과의 소통에도 한계가 있으며,
미국에서 태어나 자라는 2세와의 소통이나
문화적인 사고방식의 차이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며,
그들의 자녀들과의 교제나 의사소통에 일정한 벽을 느끼며
미국의 타문화권과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한민족 끼리의 한인문화권의 자리매김에 중요한 역활을 하며 영향을 주도 하고 있다

청소년시기중에 미국에 건너온 이 세대는
그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문화의 기존양식에 이미 젖어있어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는 것은 단지 겉모양만이 그들의 문화에 접할 뿐이다.
그들의 속은 여전히 한국적인 사고태도와 기존전통적인 습성에 젖어지낸다.
이런 한인1.5세는 한국문화와 미국문화를 함께 겪으며,
자신들의 정체감을 새롭게 하는 세대이다.
한국어와 영어를 섞어 가며 쓰는 세대로,
그들의 배움에서 영어로 사고하는 방법을 배우면서도,
한국에서 습득한 문화나 사고시스템에 여전히 영향을 받는 세대이다.
이 세대가 2세와 1세를 연결해주는 연결고리로서의 한인문화에 중요한 역활을 하고 있다.
한인사회에서 이들에 대한 관심과 돌봄을 통해
미국사회에서 자신들의 정체감을 세우고 적응할수 있는 역량을 키워주는 일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들은 양 문화적인 차이에서 오는 자기세대로서의 갈등을 겪고 있다.
오히려 때로는 이들의 정체감이 가장 미흡하고 불안한 양상을 띠기도 한다.

한인2세들은 미국식문화에 익숙하며, 미국문화와 언어를 배우면서,
그들의 사고방식까지 미국화가 되어 있다.
이들은 미국 땅에서 태어나 그들의 성장이나 배움의 환경은
오로지 미국적인 것만이 있는 세대이다.
이들속에는 체계적이고 깊은 한국적인 사고방식은 없고,
다만 가정안에서 다른 세대의 가족들로부터 피상적으로 경험하는
복합된 한국적인 사고체계를 가지고 있다.
그런 한국적인 사고는 그들에게는 오히려 이질감을 갖게 한다.
부모세대에서 배운 한국적인 지식은 제한되고
변질된 문화적인 인식으로 그들에게 한국문화가 알려져 있을 뿐이다.
다만 그들의 정체감은 한국인이라는 의식을 갖고 있지만,
그들의 사고방식은 미국적 문화체계로 세워져 있다.
이들의 경험하는 세계에서는 미국적인 것이 자연스러우며,
한국적인 것이 이질적일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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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계명

마태복음 22:35-40

35. 그들중에 한 율법학자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36. “선생님, 모세의 법중에 가장 큰 계명은 어느 계명입니까? “하고 물었다.
37.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38. “이것이 제일 중요한 계명이다.
39. 그 다음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이다.
40. 모든 율법과 예언자들의 가르침은 이 두 계명에서 나온 것이다.”

예수님의 교훈중에 가장 중심이 되는 교훈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은 하나님의 자녀로 삶을 살아가는 중심계명이다. 이 계명은 성경의 전체의 가르침을 반영하는 것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들의 삶의 계율이다.

사랑의 계명은 하나님과 사람을 잇는 가교의 계명이며, 인간사회를 구원하는 신의 의지의 반영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하신 사람을 사랑하사 그들로 하여금 그의 사랑안에서 새롭게 그들의 잃어버린 지위와 권세를 회복하기를 원하신다.
사랑의 계명은 그의 삶의 정신에서 나오는 교훈이다. 그는 사람들을 사랑하시며, 사랑의 정신으로 그가 수행하신 사명을 감당하셨다.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을 판단하는 기준은 그들이 서로를 사랑하는 가를 보면 알수 있다. 교회공동체나 신앙적인 모임안에 이 사랑이 존재하고 있을 때에 그곳은 그의 나라의 실현을 이루어 가는 것이며, 인간관계의 이상적인 분위기를 세울수 있을 것이다.

율법학자는 율법을 정통하였던 사람들로 그들은 항상 율법을 생각하며, 연구하며, 그것을 지키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율법의 핵심의 의미를 소홀히 하여, 그법에 매여 법으로 이웃의 모든 행위를 판단하는 역활을 하였다. 이 본문에서 가르치는 내용은 율법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 학자들이 율법의 눈으로 인류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예수그리스도를 시험하려는 어리석은 시도라고 할수 있다.

율법학자들은 율법을 통해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기를 기대한다. 그들의 모든 생활이 근간이 되는 율법을 통해서만 자신들의 종교와 윤리의 기준을 세운다고 생각한다. 고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율법은 자신들의 삶의 기준을 삼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율법을 실천하는 일에 있어서는 그 율법의 본질적인 진위를 모르고 피상적인 이해와 형식적인 법적용에 머물러 있다. 고로 그들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그의 성품과 속성의 근저는 그 사랑하심에 있다. 그는 사람을 향해 그 사랑의 화신으로서 사람에게 다가 오신다. 그의 인간에 대한 사랑은 인간구원의 근간을 이루며, 하나님의 자기의지의 표상으로 인간이 하나님에게 다가갈수 있는 그의 성품이며, 그의 속성의 본체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기 위해 이땅에 오셨다. 그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길을 보여주셨다. 그의 생애 그 자체는 하나님 사랑의 화신으로서 사셨으며, 그의 삶의 목적은 오로지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향한 지극한 삶이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알려주시고, 그 길을 보여주셨다. 사람이 살아가는 목적이나 삶의 표현방식은 하나님 사랑에 도달하면 온전한 사람의 모습을 갖게 되며, 가장 고상한 사람의 성품에 도달한다. 사람이 갖고 있는 영이나 혼이나, 마음이나 정신이나 생각에 있어, 하나님사랑하는 표현이 나타나면, 그 사람 속에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형상과 그의 선하신 뜻이 실현되는 것이다.

인생이 힘쓰고 애써야 할 일은 하나님 사랑하는 것을 배우고, 알고, 터득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일에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일이야말로 인간구원이나 승리의 보장을 받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가르침이나 생활이나, 삶의 흔적들이 오직 그 계명 즉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의지와 정신의 실현에 있으셨다.

주님은 강조하신다. 하나님 사랑하는 계명이 제일 근본이 되며 사람을 사람답게 하며, 가장 고귀한 존재로서의 사람을 세우는 것임을 알려주신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그의 성품을 부여받은 존재로 이세상에 태어났으며, 존재한다. 그러나 인간속에는 자신 스스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이나 표본을 따르지 않고 자기 중심의 세계를 추구하려는 시도에 의해 그 하나님의 수준을 벗어나, 어리석은 사람의 그릇된 길에서 방황하며, 자기혼란안에 빠져 버렸다.

사람이 원래 하나님이 만드시고 원하시는 위치로 돌아가는 길은 그분을 진정으로 사랑하려는 의지와 실천을 통해 이루어진다. 인간의 생활이나 삶의 평생의 과정이나 흔적들은 그 계명의 실천과 그 실천안에 있는 인간의 자기사명과 자기 수행을 진행할 때에 사람은 자기가 가야 할 바른 길을 가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웃도 그의 모습안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아, 그의 돌보심과 주관하심을 받는 사람들이다. 이웃의 모습안에 있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그의 이메지를 간직하고 있는 것을 보며, 이웃을 바라보는 눈이 사랑의 하나님의 관점을 통해 바라볼때에 그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랑의 하나님의 대상이 되며, 이웃도 바로 그의 사랑의 대상인 것이다.

이웃의 모습안에서 자신과 비슷하며 자신을 반영하는 속성이나 자신과 똑같은 인간의 성품을 가진 사람들의 형상을 본다. 고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태도의 연장으로 바라보게 되며, 자신을 사랑하고 애착하듯, 이웃을 향한 자애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웃은 바로 나 자신의 연결고리로 이어진 하나님의 지으신 창조세계안에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안에서 이웃은 나 자신과 떨어질래야 떨어질수 없는 공동운명체의 부분이며, 함께 그의 형상을 받고 나눈 혈연이며, 글로발 가족의 한 일원 인 것이다. 고로 이웃사랑의 범위나 실천적인 영향력의 대상은 민족이나 국가의 테두리를 벗어나 확대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간사회를 향한 뜻과 의지의 실현이 율법을 통해 계시로 나타난다. 하나님이 주시는 율법은 인간의 삶을 보호하며, 인간사회안의 사람들사이의 상호 합리적인 관계와 질서있는 생활의 기준의 법으로 제시되며, 그 율법의 중심에는 십계명이 있다. 그 십계명의 정신에는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율법을 받은 인간사회는 하나님의 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사회를 향하여 계속하여 예언자들을 보내셔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세우신 법을 지키도록 하셨다. 예언자들을 통해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인간사회에 알리시며,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지적받으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도록 인도를 받는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뜻은 그의 백성들을 돌보며 인도하시는 큰 테두리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계명을 실천하는 것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사랑하는 것과 이웃사랑하는 것을 배웠다. 개인의 역사를 통해서도 하나님은 각자 개인의 삶을 통해서 그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을 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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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치료하는 생명의 빛

말라기 4: 1-6

말라기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적 무관심에 대해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잘못된 성전예배와 성도의 의무에 대해해서 언급하며,
그리고 하나님께 잘못된 태도를 갖고 있는 죄를 지적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서 노예생활을 한 이후에
그들의 죄는 주로 영적인 게으름이나 혹은 안일하게 편하게 믿는 편리주의입니다.
이런 불신안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 하였습니다.
이 예언서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 사이에 있는 계약관계에서 오는 축복에 대해
백성들이 하나님앞에서 계약 충실을 지킬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불성실한 신앙생활에 대해 말라기는 백성들의 사고방식을 새롭게하며,
그들의 잃어버린 소망을 다시 세우게하며,
계약백성으로서의 신앙생활을 성실하게 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1 절에 하나님의 날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정하시는 날은 심판과 구원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인생의 시간도 심판받고 어려움을 당하는 시기가 있는가 하면,
인생에게는 또한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때가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6:2에 지금은 구원의 때요, 은혜받을 만한 때요,
그리고 하나님의 사역이 시작하는 때라고 증거합니다.
그러나 교만한 자나 악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한다고 합니다.

2절에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백성에게는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이름을 경외한다는 말은 하나님께 경이러움과 두려움을 갖으며,
그리고 순종하는 자세를 통해 지속적인 믿음안에서 사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이들에게는 구원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들에게 치료와 회복이 일어나며, 생활에 활력을 얻습니다.

2절에 그들에게 의의 태양에 대해 언급합니다.
페르샤에서는 날개가 달린 태양신을 숭배하였다.
그들은 축복과 보호를 주는 신으로 생각합니다.
의의 태양은 주님을 가리킵니다.
예레미야 23:5,6/ 다윗의 후손가운데에 한 의로운 자를 일으킬 것이다.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고 불러질 것이다.
시편 84:11/ 여호와 하나님은 태양이시요 방패이시며 우리에게 은혜와 영광을 주시고
올바르게 사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않는 분이십니다.

의의 태양이 내안에 떠오르게 하려면
즉 자신의 마음이나 인생안에 의의 태양이신 주님이 높임을 받고
들림을 받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안에서 의의 태양이 떠올라야 합니다.
그러러면 예수님을 믿되 이렇게 믿는 것입니다.
1. 선택의 기준에 있어서 /
마태 6: 24, "사람이 두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수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2. 우선순위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예수를 소중히 여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누가 복음14: 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3. 주님과의 관계성립에 있어서는 /
요한 1: 12, "영접하는 자 그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4. 주님과의 교제에 대해서는 /요한 15:4, 포도나무비유에서
"내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안에 거하리라"고 합니다.
5. 주님을 믿되 그분을 늘 바라보는 법칙으로 살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12: 2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고 합니다.
6. 자신의 신앙의 실천방안에 대해서는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
마가복음 8: 34,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합니다.
7. 마지막으로 그분을 깊이 생각하는 묵상의 축복을 통해
의의 태양이신 주님이 내안에서와 생활을 통해 나타납니다
히브리서 3:1 에,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치유의 광선이란 말은 빛의 유익에 대한 것으로,
태양의 영향력으로 만물에 생동함이 오며, 활기참이 옵니다.
태양의 광선은 비쳐주는 곳마다, 살아 숨을 쉬며, 활동을 하며 생기가 있게 됩니다.

주님의 치유의 사역을 받은 사람의 상태는
본문의 송아지처럼우리안에 갇혀있던 송아지가 넓은 열린 들에 내놓아
막 뛰어다니듯이 축복이 옵니다. 그 송아지에게 자유와 만족의 기쁨속에 뛰어다닙니다.
그것은 자유롭게 들판에 나다닐수 있다는 .자유의 행복입니다.
현재 자신의 상태가 즐겁습니다.
그리고 들판에 나가 마음껏 풀을 뜨고 다닐수 있는
미래에 대한 만족감과 거기에 대한 기대감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빛으로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1: 5, "그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합니다.
그는 생명의 빛입니다. 죽음을 맞이하는 인생들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앞에 죽은 목숨에서 구원받았습니다.
그리고 또한 빛의 역활은 어두움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 빛은 어둠속에 있는 나를 치료하는 광선입니다.
그리고 나를 새롭게 하는 광선이며, 구원의 빛입니다.

예수님이 내안에 오시기 전에는 우리는 갈길을 알지 못하는 어둠에 처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진리의 빛입니다.
그분은 영원한 진리를 갖고 와서 나에게 인생의 가야할 길을 알려주셨으며,
모든 눌림이나 억압에서 인간을 자신을 자유하게 하는 진리를 주셨습니다.
고린도후서 4: 6, "어두운데서 빛이 비치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아직도 어둠에 있는 사람들은 마치 이렇습니다.
고린도후서 4: 4, "그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예수님은 모든 인생에 대해 소망의 빛으로 다가 오십니다.
절망속에 있는 인생들에게 소망을 주십니다.
소경 바디매오은 거지같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는 남에게 구걸하며, 구차하게 살던 그에게 어느 날,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그의 소경을 고쳐주어, 바디매오는 새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요한복음 9: 5, "내가 이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나면서 소경이 된 사람에게 실로암못가에서 씻으라고 하십니다.
요한복음 11: 9-10, "낮이 열두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사람안에 없는고로 실족하느니라."

이사야 57: 19, " 하나님께서 그들을 모두 고칠 것이다"라고 합니다.
2절의 본문에 나오는 광선은 날개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시편91:1, 4, 날개아래에 모으는 닭이 날개로 그 새끼를 모으듯이
주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돌보아 주십니다.
이사야 30:26, "여호와께서 자기백성의 상처를 싸매시고
고치시는 날에 달이 해처럼 밝을 것이며, 햇빛은 7배나
더 밝아 7일 동안의 광량에 맞먹는 빛을 낼 것이다."

이사야 52:5,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의 질병에서부터 마음의 병을 고치며,
그리고 육체의 병도 고치십니다. 더더욱 망가진 인간성을 회복합니다.
죄로부터 구원을 받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이 되며,
자신 자신이 건강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변의 사람들과의 인간관계가 회복이 되어,기쁘고 행복한 생활을 하게 합니다.

주님의 치유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이루어지며,
또한 성령의 역사를 통해 치료의 축복이 나타납니다.

성도가 주님의 치유를 받으려면
믿음의 용어에, 춧쯔파라는 말은 이디쉬어의 속어로서,
‘강심장, 철면피’ 라는 뜻이다.
“어떤 행동에 있어서 극단적인 확신”을 의미합니다.
그 믿음이 흔들림이 없는 확신하는 믿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누가복음 8: 43- 48에 혈루증 앓는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기만 해도 낫는 다는 믿음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그 여자는 몸에서 흘러나오는 피로 인하여 부정하였으며,
그래서 예수님을 만지는 것은 율법을 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여자는 은밀히 만지기로 작정하고, 그 여자는 치유되었습니다.

사람에게 있는 질병은 크게 네가지 질병의 유형이 있습니다.
주님은 이 질병들을 치유하십니다.
1)영의 질병이 있습니다. 그것은 개인적인 죄로 인해 영혼이 병이듭니다.
영의 치유는 회개를 통해 치유가 이루어 집니다.
죄에 대한 회개는 영혼의 치유를 가져옵니다.
주님은 여러곳에서 사람들을 치유하실때에 동시에 죄에 대한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마가복음 2장에 중풍병자가 친구 4사람에 의해 들려왔을때에,
주님은 네 죄사함을 받았으니라 선포하셨습니다.

2)감정의 질병이 있습니다.
이 질병은 때로는 영적인 병을 일으키기도 하며, 또한 육체적인 질병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과거의 고통스러운 감정적인 상처로 인하여 발생합니다.
예를 들면, 분노로 인하여 상한 감정과 정서적인 문제를 겪습니다.

자신에게 상처를 준 원수를 용서함으로 마음의 상처를 치료받습니다.
어떤 여인이 늘 몸에 병이 있는데,
병원에 가면 원인을 모르는데, 기독교 상담가에서 상담을 받다가
이런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오래전에 그여인이 이웃집여인에게 깊은 상처를 받은 것이 있었는데.
그것에 붙잡혀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그것을 용서해주자. 그 병에서 고쳐 졌습니다.

누가복음7: 44-50에,
시몬의 집에 들어가신 예수님에게 발에 향유를 부으며, 머리로 씻엇습니다.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주님에 대한 사랑은 자신을 새롭게 하는 치유의 능력이 됩니다.
그녀의 상처받은 과거와 자아가 고쳐져 새로와 졌습니다.
주님을 통한 자신에 대한 치유은 영적인 건강과 생활의 회복입니다.
또한 하나님앞에서 의를 회복케하는 능력을 갖었습니다.

의외로 신앙인들에게 우울증의 현상들이 있습니다.
생활에서 오는 염려, 불안이나 근심이 신앙인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며,
웬지 모르게 자신안에 병든것처럼 마음의 슬픔에 빠지는 일입니다.

고로, 영혼의 기쁨을 회복해야 합니다.
요한복음17: 13 주님의 기쁨이 저희 안에 있게 기도하십니다.
내가 주는 기쁨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을 피하여 우물가에 물을 길러 온 사마리아여인은 예수님을 통해
그녀는 놀라운 영혼의 기쁨을 받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변화된 모습으로
여러 사람들에게 전도를 하였습니다.

3)육체적인 질병입니다.
흔히 말하는 몸의 병으로 질병의 원인이나 혹은 사고로 병이 발생합니다.
의사들은 육체적 질병의 50 %가 내적인 스트레스와 긴장에 의해 생긴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4:24에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자, 귀신들린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를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몸의 질병에 대해 주님에게 치유를 위해 간청하며 간구해야 합니다.
병의 치유는 지금도 일어남을 믿습니다.

4)귀신들의 속박에서 오는 질병이 있습니다.
그것으로부터 갇힌 영혼들을 구출하는사역을 해야 합니다.
귀신의 영향에서 오는 질병으로 극단적인 정신적인 병들이 해당됩니다.
이런 병에 대한 치유는 능력치유입니다.
귀신의 세력을 물리치는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믿는 자에게 그 세력을 물리칠 능력을 주셨습니다.
누가 복음9:1에,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불러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시고,"
주님은 그들에게 병을 고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마가복음 16: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 즉 나으리니라 하시니라" 고 기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단과 그의 하수인들인 귀신들의 인간을 괴롭히는 것을 없애기 위해
이세상에 오셨습니다.
요한 일서 3:8에,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는 것은 마뒤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주님의 치유를 통해 사람들은 영적으로 회복되고,
망가진 인생들을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입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육체적 치유뿐아니라 또한 영적인 치유를 얻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영적인 자유와 행복의 축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삶을 새롭게 하는 은혜입니다.

결론.
주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여러분에게
주님은 여러분의 마음과 생활속에서 의의 태양으로 떠올라,
날마다 치료의 광선을 발하십니다.
여러분은 우리안에 갖혀있었던 송아지가 그 얽매임에서 풀어나 자유를 얻어 기뻐하는 것처럼 ,
날마다 여러분에게 주님이 주시는 영적인 치료와 마음의 치료
그리고 몸의 치료를 통해 자유와 축복을 받는 삶을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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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진정한 도움은?

이사야 31: 1-9

1. 도움을 얻으려고 이집트로 내려가는 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말과 전차와 마병과 같은 이집트의 막강한 군사력은 의지하면서도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지 않고 그의 도움을 구하지도 않는다.
2. 여호와께서도 지혜로우시므로 재앙을 내리실 것이다.
    그는 자기 마음을 바꾸지 않으시고 일어나셔서 악을 행하는 자기 백성을 치시며
    또 그들을 돕는 자들을 벌하실 것이다.
3. 이집트 사람들은 인간에 불과할 뿐 신이 아니며 그들의 말들도 고기 덩어리일 뿐 영이 아니다.
    여호와께서 손을 뻗치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고 도움을 받는 자도 쓰러져 다 함께 멸망할 것이다.
4. 여호와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자가 먹이를 덮치고 으르렁거릴 때
    목자들이 몰려와서 아무리 소리를 치고 떠들어 대도 사자는 놀라거나
    당황하여 달아나지 않는 다. 이와같이 전능한 나 여호와도 시온산에서 싸울 것이다.
5. 새가 둥지위를 맴돌며 자기 새끼를 보호하듯이 나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지키고 보호할 것이다.”
6. 이스라엘 백성들아, 너희가 하나님을 거역하고 범죄하였으나 이제는 그에게 돌아오라
7. 너희가 은이나 금으로 만든 죄악의 우상들을 다 집어 던질 날이 올것이다.
8. 앗시리아는 멸망할 것이나 사람의 칼이 아니라 여호와의 칼에 망하고 말 것이다.
    앗시리아의 사람들은 그 칼앞에서 도망할 것이며 그들의 젊은이들은 노예로 잡혀갈 것이다.
9. 그들의 황제는 놀라 달아날 것이며 그들의 장군들도 공포에 질려
    그들의 군기를 버리고 달아날 것이다. 이것은 여와와의 말씀이다.
    그의 분(분노)은 지금도 예루살렘에서 타고 있다.

모든 인생들 중에, 크게 두 종류의 삶을 생각해 볼수 있다.
그 한부류는 역천자로 사는 자로 하늘의 뜻을 거스리고 사는 경우인데,
하늘을 거스리는 자는 결국 자신의 인생을 파멸로 이끌어 가게 한다.
자연의 환경에서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도 자연의 원리를 거역해도 해를 당하며 어려움을 겪는다.
반면에, 하늘의 뜻에 순응하는 순천자는 그의 인생이 흥하는 길을 살아간다.

고로 하늘을 향해 겸허히 살아가는 자는 하늘의 순리에 따르며, 하늘의 이치를 무시하거나,
거역하지 않고 살므로 그의 사는 인생이 평탄하게 된다.
더 나아가 우리는 늘 듣고 지내는 이야기 가운데에 하늘은 스스로를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을 한다. 자신의 인생을 돕는 길은 하늘의 뜻을 따르며,
그 하늘의 도움을 의존하는 것을 마다 하지 않는 것이다.
더 나아가, 하늘의 존재를 바라고 믿고 신뢰하고 사는 길이 자신의 인생을 돕는 지혜로운 처신이다.

인생을 살아갈때에, 신의 도움을 외면하고 사는 것은 어리석음 그 자체이다.
신을 외면하고 사는 자신이 세상에서 도움을 구하려고 하는 것에,
인생이 당하는 어려움은 대개 자신으로 부터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인생에 도움이 될만한 것들은 사람이 아니다.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좌우하지 못하는 한계의 존재이다.
더 나아가 죽은 자에게는 인간의 도움이나 돌봄이 쓸데없다.
살아있을때에 도움이 필요하며, 그 도움은 자신에게 유익이 된다.

이스라엘은 나라가 약해져 스스로 생존하기가 힘든 상황이며,
주변에 쳐들어 오는 적을 막을 힘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
나라가 약하여 주변의 강한 나라에 도움을 구하는데,
다른 나라가 더 강하게 쳐들어오는 상황이라면, 그도움은 쓸모가 없다.

이스라엘이 주변의 강대국을 의지하면서도,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으며,
그에게 도움을 구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자기의 죄악으로 인하여
강대국의 침략을 받아 위기에 처해 있으면서도
하나님에게 도움을 구하지 않는 어리석음에 빠져있다.

인간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인간의 악에 대해 반드시 징벌하신다.
그가 정한 심판을 피할수 있는 길은 그에게 나와 잘못을 뉘우치고
그에게 선을 구하며,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징계로 고통을 받는데서 구원받는 길은 그에게 나오는 길밖에 없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에게 나오지 않으며, 그분을 찾지 않는 허물을 범하며,
자신들의 악을 뉘우치지도 않는다. 다만 자신들이 당하는 어려움과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주변의 다른 강대국을 의지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악을 행하는 자기백성을 징벌하시고,
그들을 돕는 나라들도 함께 어려움에 처하도록 하신다.

인생이 도움을 구하려고 여러가지를 시도하지만, 인생이 알아야 할 사실은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 의해 좌우된다는 사실을 먼저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자신이 도움을 얻으려는 것을 그것에 매달리는 것보다
자신의 문제의 원인을 먼저 살펴보는 일이 중요하다.

지름길을 제쳐놓고, 먼길을 돌아가는 어리석음이나, 문제를 해결할수 있는 길을 버리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일에 매달리고 있으면,
그일로 인하여 더 자신을 분요하게 만들 것이다.
인생이 자신의 일에 대해 잘 살펴보는 것과 자신의 문제에 대해 잘 분석하여,
그문제의 원인을 알고, 그것을 해결하려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스라엘은 지금 자신들의 악한 행실로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고 징계를 받는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으며,
자신들의 문제를 하나님을 제치고 다른 데서 찾으려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를 의지하여 강대국의 침략을 물리치려 하였으나,
이스라엘이나 그를 도울려는 이집트도 모두 패망하게 된다.

사자가 먹이를 덮치려고 할때에, 양들을 보호하는 목자는 더 강해야 그 사자를 물리칠수 있다.
그러나 그사자보다 강하지 않으면 그 사자를 이길수 없다.
인생의 일도 그들을 괴롭히는 문제를 해결할수 있는 능력자라야 그 문제를 해결할수 있다.
인생을 잡고 있는 죽음의 문제나, 죄의 속박에서 벗어날수 있는 길은
그것을 해결한 사람(메시야, 구세주)에게 오는 것이며,
그것을 위한 해결의 길은 그에게로 나아오는 것이다.

하나님에게 도움을 구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새가 둥지위를 맴돌며,
자기새끼를 보호하듯 자기의 도움을 받을 자들을 도우신다.
변변한 군대나 기병이 없었던 예루살렘성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강대국 앗수르의 침략을 물리칠수 있었다.
당시 앗수르의 군대는 18만 5천의 군대로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그 성을 무너뜨리려 접근하였으나, 하나님의 보내신 천사로 인하여,
그들은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전쟁터에서 패전하는 결과를 맞이하였다.
하나님이 보호하시겠다고 여기시면 누구도 그의 손에 있는 그의 백성들을 쳐부수지를 못한다.

인생의 길에도 그의 보호하심에 있을 때에만이 진정한 안정된 삶을 영위할수 있다.
사람들이 자신의 생명에 위협을 주는 일이나,
환경의 위협이나, 주변의 원수들의 공격으로부터 그는 보호하시며 그 인생들을 지켜주신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앞에 범죄하여 파멸의 길에 있었으나,
그들이 하나님에게 돌아가야만 살길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의 힘을 의지하여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그들이 점점 약해져 가게 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저버리고,
신이 아닌 우상을 섬기는 이웃나라의 풍습을 좇아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게 되었다.
결국 그들은 그들의 우상숭배의 행위가 헛된 것임을 알게 되었다.

다행이 당시 유다를 다스리는 나라에 신실한 왕이 있어서,
강대국의 침략을 그의 신앙과 그에 응답하신 하나님의 개입으로
그들의 침략을 물리치고 나라가 파멸의 위기에서 구출되었다.

유다를 침략을 한 앗수르는 18만 5천이라는 대군을 이끌고 왔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칼에 모두가 전멸되다 시피 하였다.
하나님이 보내신 죽음의 천사가 그 막강한 군대를 힘도 쓰지 못하고 패전하게 하였다.
결국 앗수르는 군대를 이끌고 온 왕은 그의 군대를 제대로 활용하지도 못하고
자신의 고국으로 돌아가 그후에 그는 죽게되고 그나라는 약하게 되었다.

그 앗수르의 왕과 그의 군대는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교만하게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고
그의 존재에 대항하여 악을 행하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맞아 파멸하고 말았다.
이렇듯이 하나님의 분노는 인간의 죄와 악을 향해 그의 심판으로 나타나신다.
고로 인간들의 악한 상태와 죄악의 행위에 대해 심판하시며 파멸하신다.

하나님앞에서 선하게 살며 그의 도움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인생들은 그의 도움을 받고 살아간다.
고로 모든 인생의 문제에 대해 그로부터 해결을 받고 살수 있다.
모든 불행의 역경이나 고통의 시련가운데에서도
그의 도움은 능히 인생들을 마음편히 살수 있게 하는 것이다.
반면에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그의 돕는 손길을 외면하고 사는 것은
어리석은 인생의 수치와 파멸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요인이 되게하는 것이다.
고로 자신의 인생의 진정한 도움이 어디서 오는 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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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이민자들의 필요에 대한 목양

한인이민자들은 이민의 생활의 안정을 추구한다.
그들의 이민의 삶은 한마디로 모판에 갖다심은 볍씨들과 같이
한민족으로서 동질성의 하나의 문화의 토양에서 자라난 그들은
자신들이 경험하는 이질적인 문화안에서 총력을 다해, 성공적인 이민 생활을 기대하며
그들의 삶의 뿌리를 새로운 문화적인 토양에서 내리고,
다양한 문화와 사회적인 구조들이 공존하는 생활현장에 자신들의 정체감을 바로 알고,
그 정체감안에서, 자신들의 생존의 터전이 내려지기를 기대한다.

영적인 욕구충족:
성도들 자신이 영적인 만족을 얻으려고 한다.
영적인 바람은 자신들의 영성이 뛰어나기를 바람.
목회자가 어떻게 성도들의 영적인 충족을 채월줄수 있을 것인가?
그들의 영적인 욕구는 그들의 정체감과의 관련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아상의 정립이나,
가치관 정립그리고 자기실현에 대한 기대와 목표그리고 구체적인 단계별 연습이 필요하다.
지속적인 반복적인 영적인 생활을 통해, 자기변화를 이루어가면,
영적인 욕구의 만족을 얻으며, 그안에서 자기정체감을 갖기를 원하며,
자기안정에 기여되기를바란다.

내면의 변화기대:
자신들이 사는 삶의 현장에 부딪치는 갖가지 문제중에서,
그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들이 변화하는 내면을 바라보는 것이다.
내면의 변화는 가치관과 영적인 감동에 의해 이루어진다.
내면의 변화는 내면의 상처를 치료하는 것과,
자신의 생각패턴이나 가치관의 시스템의 조직적인 교육이나
변화를 추구하는 상담의 단계를 거쳐야 성장을 가져올 것이다.
그들에 대한 목회는 그들이 당면하는 가족간의 관계와
이민생활의 여러가지 이슈에 대한 조언이나,
그리고 더 나아가 그들의 내면에 있는 정서적인 것이나
문화적인 스트레스에 대한 것들을 다루어 내면의 안정을 갖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한인문화의 정립
미국과 한국, 동서양의 가치관의 중립지대에서 한인만이 독특한 문화가 존재하고 있다.
다문화권이면서, 주류문화에 대한 부속문화권적인 현상아래에 머물러 있다.
미국문화의 거대한 영향권안에서 한국인의 정서와
생활양식의 전통을 따르는 이율배반적인 구조안에 있다.
그렇지만 그들의 이중적인 구조안에서의 자기들 나름의 문화적인 토양을 세워가도록
교회와 그의 사역들은 그들이 함께 만나며, 어울리며,
독특한 자신들의 표현을 할 수 있는 문화의 장으로서의 역활이나
이민사회나 문화양식에 구심점으로서 기여를 바라는
그들의 기대를 이끌어 주는 주도적인 위치가 되도록 활동의 목표를 세워 나가야 할 것이다.

생활의 향상:
그들은 자신들의 생활의 모든 면에 있어서,
전진과 성장을 통해 개선되어지기를 기대한다. 조언을 얻고자 하는 바램:
그들은 인생의 모든 문제에 있어서, 상담과 지혜를 얻고자 기대한다.
영적감동을 받고자 하는 목마름: 자신들을 육체적인 편함보다는 영적인 도전을 받기를 원한다.
새로운 메시지를 얻으려는 기대감:
그들은 자신들의 생활에 삶의 철학이나
인생의 변치않는 원리를 갖고 적용하며 살기를 소망한다.
그래서 그들이 터득한 영과 육의 이중구조안에서의 영적 우선주의의 삶과
미국문화와 한인전통의 통합적인 구조안에서
이민자로서의 건강한 생활이 형성되어가는 것을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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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노래

예레미야 애가 1:15-20

15. 여호와께서 나의 모든 용사들을 짓밟으시고 큰 군대를 모아 나의 젊은이들을
     부수시며 내 백성을 포도즙틀의 포도처럼 밟으셨다.
16. 그래서 내가 울지 않을 수 없으니 내 눈에서 눈물이 쏟아져 내리는 구나.
     나를 위로할 자가 내 곁에 없고 내 영혼을 소생시킬자가 멀리 떠나고 말았네.
     원수들이 나를 이겼으므로 내 자녀들이 처량하게 되었구나.
17. “내가 손을 내밀어도 나를 도와주는 자가 없다. 여호와께서 내 주변에 있는
     자들을 내 대적이 되게 하셨으므로 그들이 나를 더러운 물건으로 취급하는구나.
18. “여호와는 의로우신 분이신데도 나는 그의 명령을 거역하였다. 너희 모든
     백성들아, 내말을 듣고 나의 고통을 보아라. 나의 처녀들과 청년들이 다
     사로잡혀갔단다.
19. “내가 내 사랑하는 자들을 불렀으나 그들이 나를 배신했으며 나의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목숨을 이으려고 먹을 것을 구하다가 성 안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20. “여호와여, 나의 고통을 보소서 내가 주를 거역한 죄 때문에 이처럼
     번민하며 괴로워 하고 있습니다. 거리에는 칼이 사람을 기다리고
     집안에는 질병과 죽음이 있습니다.

인생에는 여러가지 노래가 있다. 인생의 여러가지 경험들을 통해 사람들은
자신들의 즐거움이나 기쁨을 표현하는기쁨의 노래가 있다.
그 기쁨의 노래는 인생의 일들중에 축하와 감격이 있는 때에 영혼속에서 기쁨이 솟아난다.
기쁨은 감격과 벅찬 감정에서 나오는 것으로 사람들의 감정을 환하게 밝게 피어나게 한다.
반면에 인생에는 슬픔의 노래도 있다.
슬픔의 노래는 삶의 절망과 좌절속에서 나오는 고백으로 사람들이
자신들이 삶의 현장에서 겪는 인간의 마음의 고통을 표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본문은 고통의 울부짖음과 같은 멸망을 바라보는 시인의 고백은 처절하기 짝이 없다.
주변 강대국의 침략으로 인하여, 전쟁의 도탄에 빠져있는 것을 바라보며,
예레미야는 자신의 조국이 파멸되어가는 것을 비애의 노래로 표현하고 있다.
유다 국가는 온국민이 죄악에 빠져 하나님의 심판으로서의 전쟁을 통해
모든 나라의 요소인 사람들과 땅과 그들의 재산들이 모두가 다 쑥밭이 되었다.

고통스럽고, 암울한 처지에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자기비애에 빠지는 경우 일 것이다.
자기연민, 자기애증, 자기 탄식, 자기번민등 인생을 살아갈때에,
깨닫게 되는 자신에 대한 느낌들이다.
고통의 노래는 인간영혼의 신음하는 소리이며, 깊은 내면의 절규와 같이 내뱉는 탄식의 고백이다.

하나님은 유다의 죄를 물으시고 그민족을 주변의 강대국을 들어, 심판하여,
그들의 나라에 속한 군대들을 패배시키신다.
나라를 지키는 용사들인 젊은이들이 전쟁의 와중에서 죽어가며,
백성들은 보호와 방패막이가 없어져,
전쟁의 패전으로 인하여 약탈을 당하며 고통을 당하고 있다.
자신의 삶이 마치 이렇게 전쟁에서 패전하여 무참히 짓밟히는 처지와 같이 어려운 상황이라면,
앞을 보아도 갈길이 막막하고 옆을 보아도 소망이 없는 경우가 아닌가?
마구 짓밟히는 듯한 경우라도 결코 자신의 삶이나 처지를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가운데에서라도 우리의 생은 살아야 할 순간들임을 잊지말며,
그런 속에서 값진 교훈들을 발견할수 있다.

예레미야는 조국의 형편이 암담해지며, 동포들이 당하는 어려운 처지를 바라보며
동족들의 아픔에 대한 애끓는 심정이다.
자신의 민족에 대한 사랑으로 비통한 심정을 위로받을 길이 없으며,
선민 이스라엘의 민족의 중심이신 하나님의 심판을
온 몸으로 받아야 하는 동족들의 어두운 현실을 안타까워 하고 있다.

자신이나 동족들의 처지를 회복시킬 만한 요소는 없고,
심판으로 인해 소망이 없는 절망적인 상황만이 놓여 있다.
자신들의 원수들인 악한 강대국의 침략으로 패배의 쓴 잔을 마시며,
패전의 처지에서 온갖 약탈과 잔악한 행위의 희생양으로
당하는 민족의 처지에 마음깊은 곳에서 고통의 탄식을 울부짖고 있다.

사방이 꽉막힌 듯한 처지에 있는 자신의 생활을 두고 울고 싶은 심정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고 있을 때에,
주변에 도움을 얻을 수 없다면 참담함이 극심할 것이다.
그때에는 비통의 눈물을 흘릴수 밖에 없지만,
비록 자신을 위로할 자가 없어도 자기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연약하고 병든 자신을 돌보아 줄수 있는 존재를 찾을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어려울 때에 우리를 사람을 알아볼수 있다.
자신의 친척이나 혹은 친구들이나 우인들이 자신의 어려운 처지에 대해 반응하는 것을 보고
나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알게 된다.
그리고 인생의 교훈을 오히려 힘든 일을 만났을 때에 더 값진 것을 배우게 된다.
더 나아가 어려운 이웃의 처지를 이해하게 되고
항상 남을 돕는 자로 살아가려고 노력할 것이다.

예레미야의 처지는 자신의 민족인 유다민족의 처지와 비슷하다.
유다민족은 강대국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하는 처지이듯이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동족들,
특히 지도자들에게 말씀을 전해도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순종치 않으며, 자기의 고집이나 주장대로 살아간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인 예레미야를 핍박하며,
그를 더러운 물건 취급하듯 그를 괴롭히며, 고통을 준다.
유다나라도 주변의 침략국에게 힘없는 자들처럼 침략의 약탈에 방치되어
패전국의 당하는 갖은 수모를 겪는다.

자신의 어려움을 당할때에 특히 마땅히 도와 주어야 할 사람이
자신을 외면하게 될 때에 배신감도 들고, 모멸감이나 허탈한 심정이 된다.
더 나아가 자신을 버림 받은 존재로 혹은 죄지은 사람모양 죄인취급하는 경우도 있다.
그럴때에는 참을 수 밖에 없으나, 그 때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며,
그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의지와 더불어 주변인들에게
다시 재기하는 오뚜기 인생의 진면목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인생의 일들은 업보로 인하여 생겨나고 어려운 일을 당한다고 사람들은 흔히들 생각한다.
인생의 당하는 고민이나 고통의 경험은 인생의 잘못에서 비롯되었으며,
그가운데에서 비롯 어려운 가운데에 있지만, 인생의 희노애락을 경험하며,
자신의 고통을 통해 그 당시에 살아가는 인생의 의미와
자신의 정체감이나 가치를 알아가게 된다.
인생에서 겪는 고통은 인생의 다른 어떤경험보다도 인생에 교훈이나 가치를 주는 것이다.

예레미야가 자신이 당하는 민족이나 개인의 고통스런 경험을 통해
그는 비록 힘든 일이라도 그 가운데에서 신실한 주변의 사람들을 찾았으나,
그런 사람들을 없을 뿐 아니라, 찾아도 자신을 배신하는 사람들 뿐이다.
왜 사람들사이에 서로 배신하는 일들이 일어날까?
그것은 인간속에 서로에게 신뢰를 줄 만한 신실한 모습이 없기에 그렇지 않을까?
타락된 인간성속에서 자신에게도 신뢰를 얻을 만한 요소가 없는 것이 인간의 딜레마이다.
자신을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거북하지만
사람은 사실 그런 존재의 상태라는 것을 부인할수 없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에 그런 불신이나 배신의 일들이 비일비재 일어난다.
그런 와중에서 사람들은 서로 저마다 제 살길을 찾으며,
자기 생존에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자기 인생의 생존에 대한 노력은 자기 생명에 대한 가치추구이상 사람들의 관심사이다.
그러나 실상은 인생에 있어서 자기 생명문제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인생의 생존에 관심이나 염려에 집중하는 것이어야 하나
아니면 자신의 인간생명에 대한 의미와 가치발견에 노력을 기울여야 하나?

인간의 번민이나 고통은 신앞에 범죄한 인간의 버림받은 상태에서 오는
필요악으로서 인간의 생활에 자주 등장하는 삶의 고통이며, 인생의 딜레마이다.
이런 곤고하고 답답한 인생의 길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살길을 찾아 나서지만,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줄 길은 보이지 않고,
자신을 점점 나약하게 하며, 병들어 가는 자신의 절망속에 빠져들 뿐이다.
이런 자신에 대한 자각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전조의 시작이 된다.
그때부터 사람은 자신의 인생의 문제의 해결자이신 신에 대한 목마름의 여행을 떠나게 된다.

고로 사람은 기쁨의 노래가 있는 결혼식에 가서 보다는
서글픔의 노래가 있는 초상집에 가서 더 많은 인생의 의미와 가치의 교훈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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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묵상

신앙인의 묵상은 그의 신앙에서 나온다.
신앙인은 두차원에서 살아가는 현실을 갖고 있다.
하나는 나타난 보이는 현상을 보면서 살아간다.
나타난 보이는 현상은 사람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경험하는 세계이다.
태어나서, 살고, 살면서 생각하는 습관은 살면서 경험하는 현상세계를
사고의 세계안에서 정리하며,
더 나아가 자신의 생각의 세계안에서 보이지 않는 영적실체를 음미한다.
그리고 경험의 세계안에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다.

신앙의 세계에는 보이지 않는 또하나의 사실(하나님과 그분의 약속들)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현상세계를 넘어가는 또 다른 차원의 삶의 현실이 있다.
그 신앙적인 세계안의 관점은 자신으로 하여금
현실세계에서 살아가는 자신이 보이는 대로 살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을 엄연한 존재의 사실로 받아들이고 사는 것이다.
고로 신앙인은 보이지 않는 영적실체를 늘 묵상안에서 생각하며,
그 실체를 인정하고, 영적으로 깨어 지각하는 상태에서 살아가면,
그의 신앙은 더 역동적인 활력을 얻을 것이다.

신앙은 약속에 대한 보증을 잡고 사는 것이다.
신앙의 활용은 신용카드의 사용에 따라 자신에게 유익이 된다.
믿음의 카드를 사용하여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을 얻으며,
자신이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신앙의 현실이나 상태를 묵상이라는 영적인 생각안에서
현실세계와 접목하여 영적인 사람으로 자신의 삶을 신앙이라는 관점을 살게 한다.

신앙은 자신의 손에 잡힐듯 하면서도 스스로는 결코 잡을 수 없는
하나님과의 공유되어 있는 속성이 있다.
고로 영적생각이라는 묵상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이나 그의 역사를 이해하며,
그가 신앙인에게 약속하신 권세와 능력과 성품의 축복들을 음미하며,
그것을 현실세계에 적용하여 그축복의 영역을 확대하며,
그안에서 신앙인의 삶의 자리를 펼쳐나가야 할 것이다.

크리스챤의 신앙은 하나님에게서 출발하고 그것을 완성하는 것도 그의 손에 있어 가능하다.
신앙인은 다만 그 과정안에서 하나님의 제안과 인도와 결과에 대해 수용하고
순응하고 따라 가므로 도달하게 된다.
그 과정안에서 성도의 묵상의 습관은
자신속에 심어주신 하나님의 약속들과 그의 능력의 범주안에서
자신을 그리스도안에 있는 건강한 자아로 세우며,
자신안에 심겨진 그의 성품이 자신안에서 내면화되어 가면서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로 날마다 새로와지며,
영적인 건강과 능력안에서 신앙인의 자긍심을 키워 갈수 있다.

요즘 나는 묵상의 세계에서 만나는 하나님을 기대한다.
신앙인의 묵상이란 막연한 생각의 상상을 펴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며, 실제적인 자신의 영성에 잇닿아있는 하나님과
그의 영적세게에 접목되어 자신의 삶의 영역으로 펼쳐나가는 힘의 근원을 공급받는다.
자신의 묵상안에서 무한한 가능성의 하나님을 만나며,
자신의 삶을 지탱해주며, 보호하며,
인도하시는 그의 손길을 느끼고 체험하는 믿음의 세계로 나가게 한다.

나는 오늘도 자신의 묵상의 세계안에서 새롭게 다가오시는 그분의 자비와 능력을 경험하며,
그가 베풀어 주시는 오늘 내가 삶을 살아가는데 나에게 필요한 은총을 기대한다.
그 은총은 그분의 영의 만져주시는 기름부으심을 통해,
그의 성품안에서 나오는 사랑의 경험을 통해,
온 세상에 편만해 있으며, 개인적으로 가장 자신의 깊은 곳에 까지 임재하시는
그분의 재창조사역의 능력을 통해, 나는 날마다 새로워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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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약속

에스겔 16: 59-63
59. “나 주여호와가 말한다. 네가 약속을 무시하고 계약을 깨뜨렸으므로
      네가 행한 것 만큼 내가 너에게 갚아 주겠다.
60. 그러나 네가 어렸을 때 내가 너와 맺은 계약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계약을
     세우겠다.
61. 네가 네 자매인 사마리아와 소돔을 맞아 들이게 될 때 네 행위를 기억하고
     부끄러움을 느낄 것이다. 내가 그들을 너에게 딸로 줄 것이나 너와
     세운 계약때문은 아니다.
62. 내가 너와 새로운 계약을 세울 것이니 네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 것이다.
63. 네가 행한 모든 일을 내가 용서할 때에 너는 그 일을 기억하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네 입을 열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나 주여호와의 말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창조하신 후, 그들이 이지상에서 생육하고 창성하기를 축복하셨다.
그러나 인간들은 하나님의 세운 법칙을 깨뜨리고, 그들은 세상에 내 좇김을 받았다.
그후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새로운 언약을 주시며, 그들이 회복될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

하나님은 약속을 제시하는 분이며, 반드시 그 약속을 이루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약속을 주셨다.
하나님의 말씀인 구약과 신약의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하신 약속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의 약속은 그의 전체의 메시지를 통해 역사를 통해 이어져 시작부터 과정을 거쳐,
완성을 향하여 나가고 있다. 이미 그의 약속하신 많은 내용이 실현이 되었으며,
그리고 지금도 그약속하신 바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앞으로 이루어질 많은 약속이 예언으로 남아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그들이 자신들의 인생에서 하나님에게 나아오며,
그분이 사람들을 위해 준비하신 많은 축복의 약속을 하신 것을 받는다.

하나님은 약속을 하시고 이루어 가시는 분이나,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파기하고 그것을 지키지 못하는 속성이 있다.
하나님께서 인류의 시조인 사람들에게 그의 명령과 함께 약속을 주셨으나,
그들은 그약속을 지키지 못하여 허물을 범하였다.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약속으로 인간들과 계약을 맺으시고, 그들을 축복하신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으며, 그의 약속은 신실하신 그의 성품에 기초한다.
그리고 그는 그 약속을 반드시 실천하신다.
성경은 세상의 시작에서 부터 세상의 종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담은 계약문서이다.
그가 사람을 부르실때에 그의 약속을 주셨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에 그를 통해 하나님의 축복을 주시려고 약속을 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백성들은 그 하나님의 계약을 어기고
그들은 그의 명령을 소홀히 하며, 이방신들을 따르는 삶을 살았다.
그것은 선민으로서의 그들의 삶을 실패하는 것이 되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그들의 실패한 역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의 약속을 유지하며, 그들의 실패를 넘어가,
인류전체를 향한 구원의 확대로 그의 약속을 제시한다.

처음에 하나님은 이스라엘민족을 부르사 그들과 계약을 맺어,
선민으로 살도록 하여 그들을 통하여 영원한 하나님의구원의 계획을 이루고저
그들과 영원한 계약을 세우는 일을 하신다.
그것은 만민을 위하여 세상을 구할 메시야를 보내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유다백성은 사마리아의 혼혈민족의 정통성에 대해 의문시하며, 그들을 배척하였다.
사마리아와 소돔은 윤리적으로 악한 상태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듯,
유다백성에게도 하나님의 심판은 엄격하게 적용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새언약을 통해 택한 백성들을 새롭게 하시며,
새로운 계약을 통하여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신다.
특히 이과정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본연의 마음속에 부패한 상태를 간파하시고,
인간의 내면의 타락된 상태를 회복케 하기 위해 그의 영을 인간의 마음에 보내
그들이 영적인 교통으로 하나님과 교류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속에 자신의 영을 보내시는 약속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지극한 창조주와 인간의 부모로서의 관심과 사랑을 통한 구원의 역사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속에 심으시는 하나님의 형상의 진정한 회복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영의 내주로 인하여 그들은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며,
그분과의 관계를 회복할 뿐아니라 진정한 교제가 이루어 지는 것이다.

인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약속은 메시야를 보내시는 것과
그 메시야가 이룰 구원의 길을 통해 오는 그 하나님의 영의 인간에 대한
새로운 창조의 길이 열린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영을 통해 사람마다 그분의 영을 받아들이게하여,
하나님을 이해하게 하며, 그분의 인간구원을 위한 약속에 참여하게 된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신들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 ,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도,
그들의 행위에 대해 자신들의 잘못은 부끄러운 상태를 보여준다.
사람들이 하나님앞에서 범죄하므로 그의 약속과 인간에 대한 성실함이 문제시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그의 약속을 이루기를 원하며,
그 약속을 따라 인간을 새로운 차원의 길을 열어주신다.
그 약속은 인간에게는 새로운 기회이며,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는 축복의 기회가 되는 것이다.
인간이 약속하시는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을 통해 그분의 약속에 참여하게 되며,
인간의 장래와 그들의 안녕과 구원을 위해 약속하시는
하나님은 그의 약속을 통해 인간의 미래와 역사의 종말에 대해
신의 정해진 계획에 따라 인간의 운명이나 장래를 인도하신다.

인간과 인간의 약속도 인간사회에 중요한 관계를 형성하며,
인간의 언약을 통해 인간관계를 유지한다.
개인과 개인의 사이의 관계에서 있는 약속은 중요한 인간사의 중요한 일들을 결정한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결혼을 통해 부부가 서로 장래를 약속하며,
미래의 가정생활에 대한 안정과 번영을 기약한다.
사회나 기관이나 각각의 단체규약을 통해
상호약속을 지키므로 사회적관계와 질서를 유지한다.
국가와 국가간의 계약이나 약속도 국가간의 상호생존이나 번영을 위해
서로에게 상호유익을 위해 약속을 유지한다.

그러나 인간사회에서 상호간의 약속은 언제든지 깨어지기 쉬우나, 하나님이 인간을 위한 그의 약속은 결코 변치 않는 그의 성품과 같이 여전히 인간에게 구원과 축복을 주는 약속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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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생명의 물이다

물이 사람의 몸의 전부로 의루어 졌다고 과언이아니다.
물이 몸의 90% 이상을 차지함은 물이 우리 몸의 구성요소의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할수 있으며,
몸을 지탱하고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근원이 물에 있다고 과언이 아니다.

물은 만물의 근원을 형성하는 기본으로 인간생활의 음식에 모든 영양의 근본을 제공한다.
물맛이 좋아야 한다. 물이 기본이다. 물의 자질이 좋아야 한다.
가장 맛있는 음식은 물이다.

또한 하늘에서 내려오는 물인 비는 사람들이 짓는 농사의 근원을 이루어 간다.
그 비는 인간생활에 필요한 물로 생물을 자라게 한다.
구약의 엘리야는 비오지 않기를 위해 기도하고, 비오기를 또한 기도하였다.
하늘의 물을 받지 않고서는 땅의 농사를 지을수 가 없다.

언제 마시는 물이 제일 맛있을까? 일을 하고서 혹은 운동을 하고 하고서
진한 땀을 흘리고 난후에 마시는 물맛은 갈증을 해소케 하는 맛있는 물이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피는 물로 이루어졌다.
피는 인간의 혈육을 의미하는 관계적이며,
인간의 삶에 쏟아붓는 인간의 노력이나 혈통적인 관계를 생각나게 하나,
물은 신이 주시는 모든 사람들의 목을 축이는 생명의 생존에 필요한 기본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사, 피와 물까지 다 쏟아내셨다.
그몸에 있는 모든 것을 인류를 위해 다 내어놓으셨다.
그가 가지고 있는 자신의 모든 것을 인류구원과 바로 우리들 자신을 위해
그분은 자신의 전부를 희생하신 것이다.
그가 쏟은 물은 인류를 구원하는 생명의 물이며,
그 물을 마시는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영생의 삶을 보장한다.
그 생명수는 영생을 누리는 그의 나라에서 마음껏 마시지만,
목마른 삶을 살아가게 하는 이생의 삶에도 그 물은
사람들의 갈증(삶의 의미와 가치, 생명의 분여의 축복) 을 해소한다.

물은 경계선이다. 모든 육지의 대륙을 갈라놓은 경계선의 역활을 하여,
사람들 사는 곳의 거주의 한계를 정함에 대해 물은 한 몫을 하고 있다.
캘리포니아의 레돈도 비취에서 바라보는 바다의 물길을 따라 닿을 고국인
대한민국의 땅이 맞닿는 곳은 서로 물로 경계로 이루어 져 있다.
물은 인간의 삶의 한계를 설정하고 있다.

홍해는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구분을 내었다.
노예와 자유민으로 사는 경계선의 역활을 물이 하였다.
요단강을 건너는 길에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순간에
그들의 발이 밟는 곳에 흐르는 물이 멈추어 섰다.
노예로 살았던 땅과 이제 자유민으로 살아갈 이스라엘의 삶의 현장을 갈라놓는 것이
바로 그 홍해의 물이었다. 그것을 통해
그들은 광야로 들어가 하나님이 백성들이 되어가는 순례의 길을 가면서,
그들은 자신들을 새롭게 하는 세례(과거의 삶을 저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하는 이정표로서의 죄를 씻는 의식)의 의미로서,
광야에서 어두운 과거의 때에 살았던 풍습이나 의식과 사고방식을 새롭게 하였다.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가 살았던 에덴 동산에서 흘러 나오는 강에서 여러줄기로 나오면서,
세상을 적시는 강물들로 나누어 졌다.
그 물의 한 분지는 생명수를 마실수 있는 천국의 샘이 있는 주변이 있었으나,
인간의 범죄로 인하여, 그 생명수를 마시는 것이 차단이 되었다.
물론 생명나무에 접근하는 것도 제한이 되었다.
생명의 물은 생명의 근원을 이루는 것이었었다.
그 생명의 물은 이제 인류에게 생명을 가져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 생명의 물을 마실수 있게 되어 있다.

고로 인간생활에 물은 생명선이다. 예수는 생명의 물이다.
그에게 나오는 사람마다 그를 통해 다시 목마르지 않게 하는 물을 주리라 하셨다.
그 생명의 물은 인간의 갈증을 해소하는 역활을 한다.
목에 갈증을 느낄때에 물한잔을 마시면 마른 목을 축이듯,
자신의 영혼에 목마름을 해갈하는 그 생명수는
언제나 예수그리스도안에 있는 자신의 심령속에서 솟아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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