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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06/30
    계시가 주는 의미
    목동
  2. 2007/06/27
    믿음의 세계
    목동
  3. 2007/06/24
    자녀의 감정교육
    목동
  4. 2007/06/22
    인간이해와 상담
    목동
  5. 2007/06/21
    믿음의 시련
    목동
  6. 2007/06/19
    고난의 유익
    목동
  7. 2007/06/16
    하나님의 날은 어떤 날인가?
    목동
  8. 2007/06/15
    걱정을 극복하려면
    목동
  9. 2007/06/15
    영적인 족보
    목동
  10. 2007/06/14
    용서(3)
    목동

계시가 주는 의미

계시록 1:1-3
1.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하신 것을 기록한 책입니다. 하나님은 곧 일어날 일을 자기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이 계시를 그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그의 천사를 자기 종 요한에게 보내

   이 일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2.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증거하신 것, 곧 자기가 본것을 다 증거하였습니다.
3.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사람과 듣고 그 가운데 기록된 것을 지키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이 예언들이 이루어질 때가 가까왔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계시의 말씀이다. 성경말씀은 하나님의 자기계시를 의미하며 그 자기계시의 말씀을 기록한 내용이다. 고로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적인 의도와 계획을 알려주고 있다. 종말에 있을 역사에서 일어날 많은 일들이 그의 계시를 통해 알려지고 있다.

 

계시는 감추어지고, 알려지지 않는 것들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이다. 성경의 계시는 하나님의 알려진 계시와 하나님의 알려지고 있는 계시가 있으며, 아직 나타나지 않은 하나님의 계시도 있다.

구약과 신약에서 나타난 그리스도를 정점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는 구원의 길을 완전하게 보여준 온전한 계시로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상실한 인간이 그 계시의 길을 따라 구원을 얻는 지식을 얻으며, 또한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인간회복의 길을 얻게 된다.

 

하나님의 알려지고 있는 계시는 역사를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섭리와 혹은 개인에게 개인적으로 임하는 하나님의 사역으로서의 드러냄이 있다. 이 계시는 사람에 따라, 자신이 알고 경험하는 하나님의 계시라고 하기 보다는 하나님이해의 표현이다.

 

아직 나타나지 않은 계시는 종말에 이루어질 내용을 이미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외에 그 종말의 일련의 사건속에서 이루어 질 다가올 계시적인 사건과 그리고 이세상을 넘어가는 영원한 세계의 상징으로서 알려질 계시를 기다리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하늘의 계시는 장차 이루어질 세상에 대한 것과 그가운데에 하나님의 나라의 역사가 나타난다. 하늘의 계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지는 과정을 보여주며, 전 역사를 통해 나타나는 파노라마와 같이 전개된다.

 

하나님께서 마지막에 일어날 일들을 그를 섬기는 그의 백성들을 위해 그의 계시를 보여주셨다. 그의 종들이 그의 계시를 통해 교훈을 받으며, 그 미래를 준비하도록 하게 하신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받는 제자로 그에게 종말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 주님의 계시를 알려주었다. 주님의 계시와 그의 하시는 비밀은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에 충실한 사람들에게 전달되어진다. 주님의 말씀은 그를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충실히 지키는 자에게 주어지며, 그들에게 주님의 신실한 말씀의 은총과 말씀의 복을 부어주신다.

 

주님의 증인으로 사는 성도들은 그들의 삶과 생활을 통해 주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을 증거할 책임이 있다. 증인의 삶은 주님의 사명을 짊어지고 사는 생활이다. 주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은 가롯유다를 제외한 모두가 다 자신의 목숨을 다하여 주님의 말씀을 증거하였다. 그들은 거의 모두가 순교로서 자신들의 증인으로서 책임을 감당하였다. 이 계시의 말씀을 증거하며 전달하는 요한은 마지막순간까지 말년의 세월들을 밧모섬에 유배되어 순교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으며, 하늘로부터 종말에 일어날 주님의 계시를 받아 증거하고 있다. 주님의 천사의 인도를 받아 사도 요한은 종말에 있을 주님의 예언적인 일들과 하늘의 비밀들을 증거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의 운명을 좌우할 모든 일들에 예언하고 있으며, 그 말씀은 인류의 운명을 판가름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 각개인은 물론 그 말씀에 의해 그들의 삶이 판단을 받으며, 심판을 받고 멸망받기도 하지만, 그 말씀을 통해 구원을 받으며 새로운 영광의 길로 나가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계시로서 알려지는 주님의 영언이다. 영언으로서 말씀은 사람들의 영혼에 임하는 생명의 언어로 역사한다. 이것은 그분의 말씀이 사람들 개인에게 주님이 열어보여주는 계시로서의 역사를 통해서만 그 말씀의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그 말씀의 세계를 바라볼수 있으며, 말씀이 주는 의미를 깨달아 알수 있으며, 말씀이 명하는 바를 따라 자신들의 삶과 생활을 영위할 기초와 가치관내지 인생관을 세워 갈수 있다.

 

예언의 말씀으로서의 하나님의 말씀들은 모든 인류와 각 개인에게는 생명의 소식이며, 그 말씀들은 인류의 미래와 개인의 미래와 세계의 종말과 새세계의 도래를 선포하고 있다.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이 명하는 바를 준비하고, 말씀을 통해 주신 그분의 약속들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축복을 받으며, 그분의 예언하신 모든 놀라운 일들이 정한 때와 시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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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세계

히브리서11:1-3
1.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에 대한 실물이며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증거입니다.
2. 옛날 사람들도 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3. 믿음으로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으며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압니다.

믿음은 자신이 바라는 것을 바라보고, 목표있는 삶을 살게 한다.
믿음은 목적지향의 형의 인생철학을 갖게하여,
그 목적을 따라 자신의 인생방향을 뚜렷이 설정하고 살아간다.

먼저 믿음을 따라 사는 것은 바라봄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무엇을 향한 기대감은 그것에 대한 성취를 바라보며, 그것을 얻고자 하는 미래지향적이 태도이다.
믿음을 통해 바라봄이란 실현가능한 것을 기대하며 살아가게 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보이지 않은 것에 대해 증거를 찾으려는 것인데,
보이지 않는 것은 가시적이지 않아서,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지,
그것의 존재나 현재성은 엄연히 실현가능한 것이다.

믿음은 약속된 것을 바라보게 한다.
하나님의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그의 약속하신 바를 믿고 바라보며 살게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이루어질 일에 대한 계시를 통해 그의 약속하신 바가 이루어지며,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그의 약속은 미래의 세계에서 이루어 질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그 미래의 약속되어진 바를 바라보고 살아간다.

믿음은 미래의 세계를 바라보는 눈을 열어준다.
그래서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은 미래의 것을 바라본다.
미래는 다가오지 않았지만 약속된 시간에 이루어 지는 현재이다.
미래는 약속된 것으로 그 약속을 현실로 받아들고 살아가는데 믿음이 필요하다.
앞으로 이루어 질것을 미리 알려진 것에 대한 기대감을 통해,
그 실현가능한 일들이 벌어진다.

믿음은 사람이 바라는 것을 추구하게 한다.
즉 이말은 사람이 자신이 바라는 바에 대해 믿음으로 나가며,
그 바라는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해서 믿음을 견지하여
결국에는 자신이 바라는 것을 소유하려는 것이다.
즉 믿음은 지금은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았으나,
그것이 미래의 언제가에는 이루어지는 것이다.

아이들이 어릴때에, 자신이 커서 무엇이 되겠다고 꿈을 가지고 살면,
나중에 성인이 되어 자신의 그꿈대로 이루어져
실제로 자신이 꿈꾼대로 된 인물이 되어진다.

꿈과 비전은 믿음이라는 바탕위에 세워진 인간삶의 희망의 동기부여의 밑거름이 된다.
꿈은 나이든 사람이 잠을 잘때에 꾸는 것처럼,
노년의 삶에도 꿈이라는 것을 가지고 그 꿈을 바라보면, 소망스럽게 살게 된다.
꿈이란 사람의 생각에서 보다는 영적인 주체에 의해 주어지는 경우가 많다.
꿈이란 이상향을 바라보며 나가는 사람의
마음의 이상을 이루어 가는 구체적인 대상이라 할수 있다.
꿈이 있으면 사람은 살아갈 동기부여를 갖고 살아가게 한다.
비록 하루를 살더라도 그 꿈안에서 삶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다.

비전은 꿈보다는 좀더 구체적인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 이상적인 바램이다.
비전에는 구체적인 목적이나 목표가 있으며,
그 목표를 이루어 가는 과정에 대한 시간적인 계획과 노력의 시도들이 있다.
비전은 장래의 시간을 많이 가지고 있는 젊은이들이
가질수 있는 이상적인 바램과 그 시도들이다.
비전있는 젊은이들은 힘있고 활력있는 인생으로 살아갈수 있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안에 구체적인 계획과 어느 가능성을 이루어내는 힘이 있다.
고로 비전을 갖고 살아가는 인생이 그렇지않은 인생보다는
많은 가치있는 것들을 이루어 낼수 있다.

이러한 꿈과 비전을 이루어내는 사람의 투자하는 시간이나 노력의 밑거름에는
그것들에 대한 사람들의 신념이라는 것이 있다.
그런데 인간의 신념에는 인간의 계획이나 목표하는 바램에 대한 것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인간의 능력이나 한계를 넘어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약속이나 목적이나
혹은 신의 계획에 대해 바라는 것을 확신하는 믿음이다.
그 믿음은 믿음의 대상의 확실함이나 그 존재의 신실함에 의해
그 믿음은 절대불변의 확고한 것이 있다.

또한 믿음에는 보이지 않는 것의 실체를 보게한다.
보이지 않는 것이란 현실의 세계에서 보지 못하는 영적인 실체들에 대한 것들이다.
영적인 실체들에는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계시고,
그의 창조의 영적의 세계안에 있는 영물들이 있다.
그 영적인 존재들은 크게 선한 존재들인 천사들과
그반대세력인 악한 영적인 존재(귀신)들이 있다.
믿음의 눈을 가지고 세상의 나타나는 일들중에 알수 없는 현상들에 대해
이해할수 있는 안목을 갖게 되며,
그 현상의 배후에 있는 세력들의 영향력을 보고 그 현상들을 이해력으로 살필수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이란 인간세상에서 아직 나타나지 않은 미래나
영원한 일에 대한 것을 현재의 실체로 바라보게 하는 안목을 주는 것이
또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믿음이다.
고로 이러한 믿음은 인간세상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것들을 보며
주관하시는 신에 의해 주어진다.
사람에게 주어지는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가 믿어지며,
그의 하신 일들과 하고 있는 일들과 앞으로 하실 일들을 바라보고 이해할수 있다.
그리고 그 믿음은 그가 약속하신 바를 특히 장래에 대한 것들에 대해
그의 절대성만큼이나 확실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믿을수 있는 믿음이다.

역사속에 살았던 많은 인물들은 그들이 자신들이 신으로 부터 받은 그 믿음으로
하나님을 믿고 살면서, 자신들의 모든 삶의 영역안에서 그분의 존재를 인정하며,
그분과 더불어 살았던 삶의 발자취들을 남겼다.
그래서 후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신앙의 귀감으로 알려지고 있다.

예를들어, 로마가 세계를 지배했던 기독교 초기의 시대에는
그리스도인들은 두려워하게하는 위협과 무서운 핍박속에서 믿음을 지켰다.
그때에, 폴리갑이라는 교부는 당대에 그가 살았던 그의 믿음의 발자취가
모든 이들에게 귀감이 될만했던 것은 그의 말년에 그가 고백한 신앙고백때문이다.
그는 신앙때문에 화형당하는 순간에 그가 믿는 구주에 믿음을 포기할 것을 강요받았으나,
그는 그의 신앙때문에 순교라는 길을 선택하였다.

그는 자신의 삶 76년의 생애에서 한번도 하나님께 대한 불신이나 의심을 할만한 일이 없었기에
그는 신실하신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실한 믿음의 고백을 따라 순교하였다.
그의 삶과 죽음을 통해 믿음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앞에서 있는 유일한 삶의 세계관이며 인생의 가치관이다.
믿음은 모든 세계와 그안에 있는 모든 역사에 대해 창조시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모든 세상종말에 대한 것에 대해
하나님이 이루어가시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세상은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는 진화에 의해 우연이나
혹은 그것의 돌연적인 발전에 의해 생겨난것이 아니라,
이 세상은 하나님의 계획속에 이루어진 그의 창조에 의해 이루어 진 것이다.
그의 창조사역은 그의 전능하신 말씀을 통해 이루어 졌다.
그 말씀은 우주의 창조의 원리이며, 우주의 섭리의 중심에 있다.

그 말씀은 하나님자신이며, 하나님이 세상에 보내신 그의 메시야이다.
하나님이 그의 아들이신 말씀을 통해 세상을 창조하며, 세상을 다스리며,
그의 심판과 구원을 이루어 가신다.
모든 세상의 권력이나 세력의 힘이 다 하나님에게서 나온다.
모든 것이 그의 영향아래에 놓여 있다. 고로 그는 세상을 다스리는 왕중의 왕이시다.

믿음으로 보는 안목이 인생 현장의 모든 일들과 현상들에 대해 이해할수 있게 한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의 실제들을 보게하며,
그 세계의 현상들과 그 영향력에 의한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과 현상들을 이해하게 한다.
그리고 지금은 이해할수 없는 일들도 믿음으로 바라보는 안목을 통해
장래에 가서 이루어질 일들을 바라보며 이해한다.

믿음과 그 믿음을 따라 살게하는 소망은 인간의 삶의 방정식의 한축을 이루어 간다.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은 믿음안에서 그들의 소망을 안고 살아갔다.
삶의 원리중에, 심는 것과 거두는 것의 상관관계를 통해
인생은 자신이 심은 것을 거두어 들인다.
고로 믿음은 정확한 인생의 가치있는 삶의 원리이다.
그리고 믿음은 인생현장의 철학의 기초를 제공하는 신앙인의 귀중한 자산이다.
더 나아가 그 믿음은 인생의 현장에 나타날 성도의 무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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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의 감정교육

부모로서 자녀들을 잘 키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많은 희생과 사랑에 따른 수고가 있어야 한다.

우리 가정에는 두 아들이 있다.

이 아이들이 자라기 까지 아빠인 나는 여러가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아이들을 돌보아 왔다.

집사람은 아이들이 자기몸에서 나은 자식이라 그런지,

그들과 일체감이 있고, 집사람은 아이들과 곧 잘 지내곤 한다.

 

그러나 나는 아빠로서 그들과의 사이에 내 몸에서 나오지 않아 그런지,

그들의 내면이나 감정표현을 직접적으로 느끼지 못하는 거리감을 느낀다.

그들이 사춘기를 맞이한 아이와 아직 유소년기에 있는 아이들로 자라기 까지,

아빠로서 후회스러운 것은 가끔 그들에게 원치 않는 상처를 주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이 잘못했을때에 지나치게 꾸중을 하다든지,

아니면 나의 지나친 감정의 발상으로 인해,

그들이 나에게서 감정적인 상처를 입는 경우가 있었다.

특히 아빠로서 아이들에게 감정적인 이입내지는

그들의 감정에 쉽게 동화하지를 못하는 한계로 인하여 그런 것이다.

이럴때에 아이들을 어떻게 감정적으로 잘 대할수 있을까를,

아이들 교육에 대해 좀 늦었지만,

다음과 같은 Gottman의 감정적 순화교육을 할수 있지 않을까를 생각해본다.

미국의 결혼상담학자 Gottman이 아이들을 어떻게 올바른 감정적인 교육을 통해

그들을 양육할것인가를 여러단계로 효과있게 할것을 가르친다.

먼저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아이들을 대할때에,

고양된감정보다는 낮은 상태의 감정을 유지하며 아이들을 대하는 것이다.

나를 포함한 어떤 부모들은 웃사람으로 쉽게 높은 감정적인 상태로 나가

바로 그것을 표현하는 경향이 있다.

아이들이 잘못했을때나, 야단을 칠 경우에

부모가 감정을 억제하고 대해야 아이들에게 감정적인 상처를 주지않게 된다.

설사 옳은 일을 훈계하거나 가르치는 경우라도

차분한 교육자의 입장에서 아이들을 대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감정적인 문제가 발생할때에,

부모는 화를 내지 않고, 그 감정적인 문제를

아이들과 친분을 나눌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할것이다.

부모와 자녀사이에 감정적인 긴장이 있을때에,

부모가 오히려 순화된 감정표현을 유도하여,

아이들과 더 깊은 긍정적인 좋은 감정의 관계로 발전시킬수 있다.

그렇지만 아이들이 화가 났을때에는

예를들어 부모에 대한 불공정하다고 혹은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태도로 부모에게 대들때에,

그들의 감정을 인정해주어야 그들이 그들의 감정을 자유롭게발산하고,

안좋은 감정을 표현하고도 더 좋은 관계로 발전시키는

대인관계의 기술을 부모와의 관계훈련을 통해 발전시킬수 있다.

또한 그런 불편하고 억울한 감정이 그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오랫동안 상처로 남지 않을 수 있게 감정을 순화할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부모는 구체적으로 아이들이 부모에 대한 억울한 감정문제를

말로서 표현하도록, 부모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아이들의 감정표현을 받아 주어야 할 것이다.

감정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방법도 아이들의 의견을 존중하여,

아이들이 제안하는 방법을 따라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 부모는 아이들이 문제를 해결하는 단계로

나오기 까지 기다려 줄줄도 알아야 할것이다.

아이들의 그릇된 행위나 습관은 받아주지 않을지라도

그들의 잘못된 감정표현은 될수 있는 한 받아 주어야 할것이다.

그것은 감정표현 자체를 억압하지 않게 하는 부모의 배려이다.

억울한 일을 당했을때에 아이들이 남에게 감정이 격하지 않게

부정적인 자기 감정을 표현하고, 문제제기를 할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녀들에게 자신들의 한계를 정하여 문제해결에 있어, 어떤 원칙아래에서 자신들을 표현할수 있도록, 선택의 여지를 제공해야 할것이다.

그리고 가능하면 자녀들과 타협하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부모가 아이들의 그릇된 행동에 대해 아이들에게 화가 나는 일이 있을때에,

왜 화가 났는지를 설명해주어, 스스로 아이들이 그 좋지 않은 행동을

그만두도록 유도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모든 감정표현내지는 감정순화교육의 모든 해결의 실마리가

양육과정안에서 진행되도록 아이들을 인도해야 할 것이다.

감정교육에 있어서, 부모는 어떻게 아이들에게 대화 할것인가?

부모는 판단하는 말로 보다는 설명해주는 언어표현으로

아이들의 인격자체를 무시하는 "바보다, 멍청이다, 나쁜애다.게으르다"등을 써서는 안될것이다.

부모가 자녀에게 감정순화교육을 하는 경우가 안좋은 때는,

다른 외부인이 있을때에든지, 부모가 지쳐있거나 피곤한 경우,

부모가 즉각 감정적인 불만을 아이들에게 발산할때에는 피하는 것이 좋다.

부모가 되는 길이 쉬운 길이 아닌것이 분명한 것 같다.

그렇지만 부모에게 아이들을 바르게 양육할 책임이 있는 것은

부모에게 자녀들은 가장 값진 선물이며, 보화이기 때문 일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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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해와 상담

인생을 카운셀링을 하는데는 4가지 측면으로 사람을 볼 필요가 있다.
제일 먼저, 그 사람의 생물학적인 측면을 보는 것이다.
그의 두뇌기능과, 그것으로 인한 몸의 변화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자동차사고를 당하고 난뒤에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사람의 두뇌에 충격을 받아,
그 두뇌가 그것을 기억하고 있기때문에, 두려움이나, 불안을 느끼는 것이다.

 

또한 사람은 원래 홀로 살도록 태어나지 않았다.
태어날때부터 부모로부터 돌봄을 받고 태어나,
일정기간의 양육기간을 거쳐야 건강한 인생으로 자라게 된다.
아기가 태어나, 초기 1,2년 사이에 갖는 인간관계는
그아이의 인생의 앞으로 관계를 맺고 사는 모든 인간관계의 기본적인 틀을 형성하게 된다.
아기가 부모의 돌봄을 받고, 서로 사랑하는 관계안에서 자신이 형성되어지면,
그는 나중에 다른 사람과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며 살수 있지만,
그 기간에 다른 사람과 혹은 소홀히하는 사람과의 교제안에 있을때에,
그 아이는 자라면서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일이 힘이든다.

사람은 사회적인 유기체로 다른 이와의 만남, 관계형성,
그리고 교제를 통해서 사람이 영향을 받고, 자신이 되어가는 것이다.

사람을 상담할때에, 이부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어떻게 만들어 가고 있는가?
사람과 사이에 관계는 일정한 규범을 가지고 있어야 바른 관계를 맺으며 살수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우리가 사람을 대할때에,
그 사람의 가지고 있는 윤리적인 기준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어느 사람이 타인의 물건이나,
소유물을 훔쳤다고 했을때에,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을 전혀 죄의식으로 여기지 않는 사람이 있는 가 하면,
일반사회에서 통념되는 상식적인 기준이 있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죄의식으로 여겨 지는 것은 윤리적인 사고방식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을 바라보고 조언을 해 줄때에, 이부분을 또한 간과 할수가 없는 것이다.
항상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 문제가 있다는 것은
그사람의 다른 사람과의 일정거리의 사회적인 거리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자신도 모르게 그것으로 인하여,
짐을 지거나, 혹은 다라른 사람과의 마찰에 의해, 원치않는 억압된 생활을 하게 된다.
이런 억압이나, 스트레스나, 문제의 발생은
인간속에 늘 가지고 있는 자기 상실감에서 온다고 할수 있겟다.

인간의 자기 상실감은 자기 정체에 대한 바른 인식이나 관점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자기가 자신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자기가 세운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불만과 불안의 인간존재의 탄식안에 늘 있게 되는 것이다.

불안은 인간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며,
그 불안은 인간이 자기의 안정된 위치에서 탈선하여 있는 현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불안과 비정상을 가리켜 인간의 타락된 본연의 실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사람을 살피고 그를 도와주려고 할때에,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바로 이 점이다.
그 불안, 그 죄등은 바로 인간을 있게 한
창조주와의 관계가 빗나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어는 누구도 이런 인간의 실존을 벗어나 자유로울 수는없는 것이다.
사람에게 문제가 생겨나고,
자신안에 뒤틀려진 삶의 그림자가 드리워 져 있을때에,
이 면을 살펴보고, 그 사람으로 그것을 벗어나는 해결의 길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가장 중요한 면이라 할수 있는 영적인 측면인것이다.

그 영적인 면은 인간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기에는 인간이 제한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고,
거기에서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과 바로 자신을 있게 한 근본적인 관계를 재설정하며,
그관계안에 있을때에, 참된 인생으로 세워지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상실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방황하는 영혼들에게 대한
우리의 카운셀링은 여기에 귀착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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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시련

베드로전서 1:3-9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시다. 그분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살 희망을 갖게 하셨으며
4. 썩지 않고 더럽혀 지지 않고 시들지 않는 하늘에 간직한 축복을 여러분이
    받도록 하셨습니다.
5. 여러분은 마지막때에 나타나도록 예비된 구원을 얻기 위해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6. 그러므로 여러분이 여러가지 시련으로 잠시 근심할수 밖에 없으나 그래도
     여러분은 크게 기뻐하고 있습니다.
7. 시련을 겪은 순순한 믿음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받게 됩니다.
8.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나 사랑하고 있으며 지금도 보지
    못하지만 그분을 믿고 말로 다 표현할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으로 즐거워
    하고 있습니다.
9. 그것은 여러분의 영혼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당하는 시련과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은
사람들의 삶의 반복되는 과정을 통해 사람들속에서 역사하신다.
인간의 시련가운데에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있다.
그리고 사람의 고통받는 현장에 하나님의 귀가 열려 있다.

인생의 시련은 인간을 나약하게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을 찾게 한다.
시련은 사람을 강하게 하지만, 하나님의 교훈을 배우게 한다.
시련은 사람에게 소망을 주며, 좌절하지 않는 하늘의 끈을 잡게 한다.
시련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단련하여
더 강한 신뢰심으로 바꾸어 놓는다.

사람들이 겪는 시련은 그들에게 새로운 기회의 사람으로 만드는 재료로 제공된다.
시련을 통해 사람은 어떤 일을 맡겨도 힘든 일들을 감당할수 있는 자질과 성품을 키워준다.
삶에서 겪는 시련은 사람을 만드는 필연의 도구이며,
인생훈련의 기회의 장으로 쓰여진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는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그의 아들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이시므로 우리를 살리셨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의 고통을 경험하는 시련을 경험하셨다.
그는 사람들에게 모든 인류의 희망을 잃게 하고 두려워 하게하는 죽음의 길을 통과하셨다.
그의 시련은 죽음을 이기고 죽음이라는 시련을 겪으므로
사람들에게 죽음을 이기는 길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죽음의 절망의 세계를 벗어나 부활의 희망을 갖고 살도록 하셨다.
사람들은 십자가의 죽음의 예수를 보면서 죽음의 현실을 알게 하고,
그의 죽음을 극복하는 부활의 역사를 통해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다시 사는 거듭남의 삶의 길로 인도하신다.

사람들에게 주는 살 희망이란 무엇인가?
어떤 죽음의 현실에서도 살아갈 희망을 얻고,
죽음너머에 있는 생명의 세계를 바라보며 살수 있는 힘을 제공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시련이라는 것은 사람들을 단련하고 값지게 하는 것임을 보여주셨다.
사람들이 당하는 시련은 그 시련을 통해 새로운 기회의 시간을 살게 하며,
새로운 성품의 사람으로 살게하는 단련됨을 제공한다.

시련은 당장에는 힘들고, 괴로움을 주지만,
그것은 인간의 연약함을 강하게 인간속에 있는
악한 성품들을 정제시키는 도구로 활용된다.
제련소에 들어가는 불순물이 더덕 더덕 붙어 있는 쇠덩이가 불같은 제련으로 정화되듯이,
시련은 사람들을 정화시킨다.

천국을 들어가려면, 시련을 많이 겪어야 한다는 것은
시련을 통해 정화된 인격을 만들어 천국시민이 되게 한다.
고난은 사람을 연단하는 도구로 활용되고,
고난속에서 인내를 배우며, 인내를 통해 연단된 성품을 갖게 되어
살 희망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으로 세운다.
천국에 대한 소망은 사람들에게 사라지지 않는 꿈과 비전을 심어준다
천국은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켜 줄 것들로 차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가질 존귀와 영광에 대한 축복이다.

천국은 썩지 않는 생명의 씨로 거듭난 사람들이 들어가는 곳이다.
그곳에 쌓아가는 보화는 썩지 않는 영원한 것을 갖고 있다.
그곳에는 죄와 악이 있는 더러움을 갖고서는 들어갈수 없다.
죄와 악을 벗어던지고, 정결된 심령이 들어가는 곳이다.
천국에서 보장되는 새로운 삶의 축복은
이세상의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수 없는 놀라운 것들로 가득차 있다.
인간의 영혼을 만족케하는 생명의 강에서 나오는 생명수와 함께
그곳에서 사람들은 영원히 누릴 자기조화와 자기 완성을 맛보는 축복을 얻게 될 것이다.

사람들의 죄와 그 영향으로 인하여 모든 만물이 더러워 져 있으며,
만물이 인간의 죄로 인하여 신음하며 새로움을 더 입으려고 한다.
그가운데에 더렵혀 지지 않은 것은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바라고 있는 하늘나라에서 살 영원한 삶의 기업이다.
그 기업은 하늘나라에서 얻을 영광된 인간의 삶을 보장한다.
그곳에서 생명의 은총과 영광을 받으며,
사람들은 그곳에서 완벽한 조화와 이상적인 곳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말세에 나타나는 구원을 받기위해 믿음으로 준비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은 인간의 상태와 필요를 채워주는 축복을 가지고 있다.
죄와 죽음의 세계에서 벌거벗긴채
온몸으로 그러한 죄와 죽음의 절망을 안고
탄식과 한숨과 허무의 늪에서 살아가는 인생들에게
절망과 저주와 파멸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능력은
희망과 축복과 새로운 삶의 건축을 세우며 살게 한다.

세상 말세에 나타나는 여러 환난과 시련에서의
보호받는 하나님의 도움심이나,
혹은 사람들의 개인적인 종말의 시기에
겪는 절망과 두려움에서 희망과 내일에 대한 확신을 주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 살아갈수 있다.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를 받는 것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는 믿음의 눈을 가진 자에게
보이지않는 하나님과 그의 능력이 실질적으로 역사하여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 보호와 도움을 받게 된다.

신앙안에서 시련을 당하는 것은 신앙인에게 유익이 된다.
시련은 고통스럽고 힘들지만, 그 과정을 통해 더 강한 신앙인이 될수 있다.
시련이나 고난이나 고통은 때로는 사람들을 약하게 하고 절망케도 하지만,
그것은 결코 그것만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의지하여
자신이 더 강해지며, 더 유익한 존재가 되고,
사물이나 사건을 생각하는 자신의 견해나 인생을 보는 관점을 더 깊이있게 해준다.

고난의 시련을 통과하는 자에게는
자기성장과 자기성숙의 열매가 있으며,
고난과 시련속에서 땀과 눈물과 피흘림을 가질만한 노력을 한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서나 인생에 대해서 승리하는 기쁨을 맛보게 된다.

신앙안에서 겪는 시련은
신앙인이 갖기 쉬운 거추장스런 형식주의와
무가치한 종교의식의 불순물을 벗겨버리는 일을 한다.
신앙인들은 신앙때문에 겪는 삶의 시련을 겪으면서
순수한 신앙외에 갖기쉬운 무가치하고 쓸데없는 것(인본주의위주의 공로사상,
인간의 진실한 것을 덮어버리는 외형지상주의내지는
하나님앞에서의 비인간적인 태도, 등등) 들을 버리고,
하나님앞에서 진솔한 사람들이 순수하고 정제된 금보다 더 귀한 신앙을 갖게 된다.
그래서 신앙의 핍박받는 지역에서 목숨을 내걸고
신앙하는 사람들이 그러한 순전한 황금같은 신앙을 소유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당하는 신앙의 시련은
이후에 하나님앞에서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는 결과를 가져온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그분의 모든 것(성품, 약속, 섭리, 역사 등등)을 신뢰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었으나,
2000년 전후 즈음에 이스라엘 이라는 조그만 지역에서 33년이라는 짧은 세월을 보내셨다.
그분은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보내심에 의해 오셔서
몇몇 사람들에게(수백만보다 적은 수의 사람들) 자신을 알리셨다.
역사속에서 그분을 구주로 믿는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그분을 직접 대면하지 않았으나,
그분의 삶과 그가 하신 사역에 대한 사실의 소식에 접하였다.
그분을 믿고 그분을 모시고 믿음의 선배들은 살아왔고,
지금의 신앙인들은 살고 있다.

신앙인들은 그분을 보지 못했으나,
그분의 존재와 역사하심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그분을 인격적으로 사랑하며,
그분의 베푸시는 개인적인 사랑하심과 은총을 베풀어 주심에 응답하며
개인적인 관계와 친분을 맺고 살아가고 있다.
그분과의 개인적인 친밀함 속에서
약속하신 영적인 축복과 그 축복안에서 맛보는 영생의 기쁨을 맛보며
그 기쁨안에서 영혼의 만족과 더불어 마음의 평안과
그분을 믿는 신앙생활의 가치와 의미안에서 즐거워 하며 생활한다.

인내를 통해 좋은 결과를 기대하듯, 믿음을 통해 약속하신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들인다.
그 하나님의 선물은 그의 약속하신 구원이 있으며,
그 구원안에는 사람을 고치고 살리고 새롭게하여
영광스럽게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모든 은총과 축복이 담겨 있다.

사람에게는 만물보다 귀한 것이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영혼이다.
만일 사람이 온천하를 얻고도 자신의 영혼을 잃어버리면,
그는 자신에게 속한 모든 것을 잃은 것과 동일하다.
그것은 또한 자신이 항상(시간과 영원의 차원속에서)
누릴 자신의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은 이치임을 의미한다.
고로 믿음은 자신의 영혼이 고귀한 것처럼
자신이 하나님앞에서 갖고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이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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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유익

고난은 인생을 강하게 한다.
고난은 평범한 삶에 도전을 주는 시련이며, 인간을 힘들게 훈련받게 한다.
고난은 당하는 사람들에게는 힘든 것이며,
그것을 통해 자신의 약함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고난이 없는 인생은 참사람의 되어가는 과정을 모르는 사람의 삶과 같다.
그것은 인생의 질곡을 거치지 않고,
스쳐지나가는 세월속에서 무의미와 무가치함으로 지나게 한다.

그런데 고난이나 시련은 평범하고 안일한 삶에 도전을 주어,
인생을 긴박하게 하며, 자신안에 있는 능력을 이끌어 내어
그도전을 극복하고저 노력을 하게 한다.
그리고 그 시련이나 고난의 때를 지나고 난후에
사람은 자신에 대해 강해지며,
인생을 바라보는 데 있어서도 자신감을 강화시켜준다.

강한 군인은 험한 전투에서 살아남아,
더 강인한 군인이 되며, 경쟁에서 이긴 사람들이 경기에서 승리할 수 있다.
새의 왕이라 할수 있는 독수리가 자기 새끼를 강하게 키우는 비결은
계속적인 강한 독수리로 자라도록 험악하고 고된 시련의 훈련을 받게 한다.

고난은 인생에 역경을 가져다 준다.
고난당하는 것은 때로는 삶을 불편하게 하고 지치게 한다.
인생은 고난으로 인하여, 힘들어지고, 자신의 앞길을 막는 것으로 나타난다.
고난이 오면 인생이 움추려들며,
시련의 계절에 사람을 위축시키기도 하지만,
그런 가운데에 그것을 벗어나고자 하는 자기노력을 배가하게 한다.

역경의 세찬바람앞에 선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의 여행을 고되게 하고 있지만,
그 일로 인하여 그 도전에 대해 반응을 강화시키므로
자신을 강하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고난은 인생을 겸손하게 한다.
고난은 사람으로 겸허하게 신을 의지하게 한다.
어려움을 당하면 그 어려움에 의해 사람은 겸손하게 자신의 주장을 버리고,
신을 찾고, 그의 도움을 구한다.
오만하고 안일하게 살던 사람도 고난이 닥치면 겸손하게 되며,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위해 주변을 돌아보며,
그리고 자신의 근본을 생각하게 되며,
그 인생의 밑바닥에서 신을 찾는 영혼의 울부짖음의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리고 자신과 자신의 인생에 대해
더이상의 힘든 상태로 발전되지 않게 하기위해
겸허하게 신의 도움을 구하는 자세로 나서게 된다.

반면에 어느 경우에는 고난과 시련속에 자기포기에 빠져 헤매이며,
자신에 대해 저주하며, 자신의 근본에 대해서도 거부하는 자세로 일관하다가,
자신의 인생의 절망의 상태에 그대로 머물러 있게 된다.
그 상태에서 사람은 절망을 느끼며 점점 죽어가는 자신으로 인하여 자신을 포기하게 된다.
그리고 그 시련의 세파에 떠밀려 세상을 원망하고,
그러한 상태에서 나약한 자신의 모습으로 변하여 간다.
이럴때에는 자신의 반응하는 자세에 변화를 줄 필요가 있다.
원망이나 포기하는 자세에서
그 역경의 때를 벗고저 하는 생존에 대한 강한 애착심과 더불어
자신을 쇄신할 만한 요인(성품의 변화, 생각의 변화, 반응의 변화)이나
사람(자신에게 상담이나 조언을 줄 사람)이나,
사건(자신의 환경이나 처지를 변화시킬 새로운 일)들을 찾아나선다.

고난은 인생을 살만하게 한다.
자신의 삶에서 늘 상 평탄함만을 맛보며 살아간다면
자신의 인생을 안일하게 한다. 그리고 권태로움을 준다.
여행중에 있는 나그네가 이곳저곳을 돌아보며,
지나가는 여행길에 대해 무심히 지나치듯
무료한 인생의 날들은 사람들을 무가치하게 하거나
혹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시련이나 고난은 인생을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며,
그문제의 도전을 받아, 그것을 헤쳐나가는 동안에 인생의 깊은 것을 맛보게 한다.
시련은 사람의 깊이를 더하게 한다.
사물이나 사건에 대해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감정으로 느끼는 것이나,
혹은 타인을 이해하는 면에서 탁월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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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날은 어떤 날인가?

말라기 4:1-6

1.전능하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보라! 용광로의 불과 같은 심판의 날이 올 것이다.
   그날에는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가 다 지푸라기처럼 타서 없어 질 것이다.
    그들 중에는 하나도 살아 남는 자가 없을 것이다.
2.그러나 내 이름을 두려워하는 너희에게는 의의 태양이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할 것이며
    너희는 나가 외양간에서 풀려나온 송아지처럼 뛰어다닐 것이다.
3.내가 이것을 행하는 날에 너희가 악인을 짓밟을 것이며 그들은 너희 발밑에 있는 재와
    같을 것이다.
4.“너희는 내가 시내산에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내 종 모세에게 준 법과 규정을 기억하라.”
5. 보라! 나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와 같은 예언자를

   보내겠다.
6.그는 아버지의 마음이 자녀들에게 돌아서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이 아버지에게 돌아서게

   할 것이다. 만일 그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가서그들의 땅을 저주로 치겠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선포하신다.
그의 날이 심판을 행하는 날로 임하리라는 것을…그리고 심판가운데에서
하나님은 또한 구원의 역사를 행하신다는 것을 알수 있다.

만일 불순물이 끼어있는 쇠덩어리가 용광로에 들어가면
그속에 타오르는 불이 모든 더러운 것을 사르고,
모든 찌꺼기들을 불로 태워 버리며, 하나도 건지지 못하게 된다.
용광로의 제련되는 쇠덩어리처럼 하나님의 심판의 불같은 역사가
사람들 속에 붙어있는 죄와 악과 같은 불순물들이 다 사라지게 된다.

하나님의 심판이 용광로의 불로 비유한 것은
그의 심판이 인간의 모든 더러운 요소들을
불로 태워 없애버리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죄악을 행하는 인생들은 거기에서 살아남을 길이 없이
다 타서 없어지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경에 예언한 대로 주님의 심판을 받은 존재들은
지옥불의 감옥에 들어가,
그들은 시련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지옥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시행하는 장소로
하나님에게 대적하며,
그의 심판을 받을 것을 자초하는 인생들은 모두가 다 거기에 가게 될 것이다.

주님의 심판은 악을 행하는 자, 그리고 죄악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자들에게 임한다.
그의 심판은 엄격하고 정확하게 시행될 것이다.
주님이 돌리시는 심판의 멧돌은 천천히 돌아가는 것처럼 움직이지만,
반드시 모든 악의 요소들을 다 갈아버리는 심판을 행하신다.
콩을 넣어 멧돌을 돌리면 콩이 다 바스러져서 콩물이 흘러내리게 된다.
그것처럼 인간의 죄악도 그의 심판의 멧돌에 모두가 갈아버리게 된다.

주님의 심판이 선포되고 시행되는 것과 같이
또한 주님의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다.
그의 심판을 피하고 면하는 길은 그가 행하신 그의 구원을 통해 이루어진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그의 구원을 나타내신다.
하나님의 구원은 사람들을 살리는 역사로 나타나,
상한 영혼들을 치료하며,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며, 병든 영혼들을 고친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람들을 치료하는 의의 태양이 나와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여
사람들이 그빛에 쬐이면 치료받게 된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지으셨기에 그는 인간의 문제와 질병을 치료하실수 있다.
그의 손길은 사람들을 새롭게 하는 데 촛점이 모아지고 있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로 온전하게 창조되었으나,
불순종과 범죄이후에 사람들에게 많은 문제가 일어났다.
하나님을 닮아가는 신성의 좋은 성품이 변질되어,
그들속에 죄의 흐름을 따라 살아가는 육체의 본성으로
저주와 절망적인 상황하에 살아가게 되었다.

이러한 사람들의 상태에 대한 하나님의 치료는
사람들의 죄로 인한 절망적인 상태를 새롭게 하여
소망적인 인생으로 살아가기를 가능하게 한다.
저주받은 상태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로
그들을 주님이 주시는 은혜안에서 축복의 삶으로 살아가게 한다.
고통받는 상태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죄와 죽음의 상태를 벗어난 평안과 상쾌속에서 살아간다.
하나님의 치료는 영혼과 육체의 치료로 사람들의 몸의 질병을 치유하며,
그리고 마음의 병과 정신적인 질환에 대해 새롭게 하신다.

하나님의 치료는 그의 보편적인 방편으로서의 은혜로
사람들에게 주어진 모든 의료기술과 인간적인 치유수단을 통해 이루어지며,
특별하신 은총의 수단으로 사람들의 질병에 대해,
치유의 기적과 혹은 하나님의 임재와 기름부으심과 만져주심으로 치료하신다.

모든 사람들에게 비쳐지는 하나님의 치료의 광선은
사람들을 고치고 살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치료를 의미하며,
그의 은혜의 빛은 해가 비치는 곳마다 어둠이 물러가듯
비쳐주는 생명의 빛으로 인하여 사람들의 어두운 부분들을 밝히신다.
그리고 죽음의 상태에서 생명의 환희의 은총의 능력안에서 살게 하신다.

어린 송아지가 자유롭게 뛰어다니기를 좋아하지만,
그 송아지가 어딘가에 매여있으면 그얽매임에 의해 억압이 되어있다.
송아지가 억압되었다 풀려나 마음 껏 자유를 누리는 것처럼,
사람을 억압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주려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이다.
하나님의 품안을 떠난 인생들은
그의 품을 떠나는 때부터 모든 것에 억매여지낼수 밖에 없다.
하나님의 사랑의 고리를 풀어 죄의 사슬에 매인 인생은
모든 죄의 영향력의 속박에 매이게 된다.
질병, 상처, 고통, 저주, 불행, 좌절, 절망, 멸망당함등
인간을 억압하고 죽이는 모든 것에서 매여 지내게 된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살고 죽이지 않는 법을 주셨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주신 법을 지키지 못하여
법에서 정한 규정을 어겨서,
그들은 그것으로 인하여 죄로 인한 저주와 고통이 따르는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모든 삶의 문제는 인간의 죄와 그에 따른 결과로 인한 원인으로 인하여 생겨났다.
예수그리스도께서 태어나면서 소경이었던 사람에게
그가 그렇게 태어난 것이 부모의 죄도 아니고 자신의 죄도 아니었다라고 하셨지만,
사람이 그렇게 태어날수도 있는 것자체가
인간현실의 모순과 고통의 현실임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고통받는 인간의 현실을 외면치 않으신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의 문제에 대해 깊이 관여하시고,
자신의 독생자를 희생하면서 까지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기를 원하신다.
인간에게 고통이 있은 즉 하나님의 위로와 나음이 있고,
상처가 있은 즉 하나님의 치유의 역사를 통해 그것을 아물게 하신다.
시련과 역경속에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지만,
그 눈물이 있는 인생의 눈물을 씻기시는 주님의 자비가 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회복시키실때에
그의 백성들이 다시 회복되어 자신들을 괴롭혔던 악인들을 대적하여 승리를 거두게 된다.
이스라엘의 역사에 하나님은 그들의 잘못과 허물을 심판하고
그들을 벌하기 위해 주변의 강대국을 일으켜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그 백성들을 괴롭히고 상하게 하게 하셨다.
그것은 그들의 죄와 허물이 그런 일들을 자초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하고
그들의 허물을 사면하며, 그들을 다시 축복하게 될때에
그들은 주변에 있는 원수인 나라들을 대적하여 싸우고,
그리고 그것을 정복하고 지배하였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이 반복되는 역사였다.

사람의 일생도 심판과 구원의 역사가 반복된다고 할수가 있다.
인생이 고통스럽고 힘든 날들이 있는 가하면 기쁘고 형통한 날들이 있다.
상하고 병들고 힘들어 질때가 있으면 치료하고 회복하고 나아지는 날들이 있다.
그런 과정을 반복하면서 사람들은 살아가는 일생을 통해
자기들의 성장과 성숙을 이루어 간다.

하나님의 예언자이며 메시야의 선구자인 엘리야의 사명은
아버지와 자녀들의 관계를 다시 회복케하는 데 있다.
세례요한의 사명은 메시야가 오셔서 하나님나라를 선포하시기전에
그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맞이할 준비인 사람들의 죄와
회개의 촉구의 메시지를 전파하였다.
그 선구자는 회개하고 메시야를 맞이할수 있도록
즉 마음을 고쳐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나라의 구원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게 하는 일을 하였다.

하나님의 구원의 날, 축복의 날은 사람들에게 화합과 일치를 가져와
가족이나 사회를 새롭게 하여 회복케 하신다.
하나님의 은총은 특별히 가족간의 문제에 개입하여,
사람들의 망가진 관계들을 치료하신다.
가정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축복과 구원의 역사는 가족들이 하나가 되는 때이다.

가정안에 가장 연약하고 취약한 인간관계는
아버지와 다른 가족들과의 관계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고로 보통 가정마다 아버지와 자녀들의 마음이 갈라지기 쉽다.
아버지와 자녀들의 관계가 상하기쉬운 관계이다.
부모중에 어머니보다는 아버지가 자녀들을 상하게 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나빠, 자녀들의 삶에 좋지 않은 영향을 받는 일들이 일어나기 쉽다.
가정의 문제에서 아버지의 역활의 중요성의 강조와
그 아버지와 가족간의 관계의 회복을 통해
가정문제의 많은 경우에 해결되는 일들이 필요하다.

어머니는 자녀들을 몸으로 낳아서
자녀들에 대한 깊은 사랑과 돌봄의 마음이 있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녀들에 대해 애뜻한 애정이나 관심의 돌봄을 주는 것은
아버지로서의 역활을 잘하지 않으면 그렇게 되지를 않는다.

모든 사회의 문제의 발단은 통치자 혹은 지배자가 피지배자를 억압 할때에 일어난다.
지도자혹은 지배자는 남을 돕는 위치에 있을때에 제 역활을 할수 있다.
그러나 남을 지배하려고만 하는 자세는 남을 상하게 하기 쉽다.
지배를 받는 사람들에게 안좋은 영향을 주기 쉽다.

사람이 사는 땅이 저주받는 것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죄와 악한 것들 때문이다.
그들이 죄인의 모습을 갖고 있으며, 스스로 죄악을 자행하고 있어서
특히 사람들이 자신들이 죄를 짓고도 회개치 않으면
그들의 삶에 저주스러운 현상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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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을 극복하려면

일상적인 걱정에 휩싸여 살아가는 것이 우리네 인생살이이다. 그런데 이 걱정에서 벗어나 일정한 자세에서 살아갈수 있는 길이 없을까? 인간이 생명을 가지고 존재하는한 걱정이 쉬일 날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걱정이란 우리가 살아온 과거의 삶의 패턴에서 터득한 하나의 두뇌에서 활동하는 감정적인 부분이다. 스트레스가 쌓이고, 여러가지문제에 부딪치며 살아오면서, 자연히 걱정하는 패턴이 하나의 관념으로 형성되어진다. 그리고 걱정이 심하게 되면, 패닉이 일어나는 공항을 경험하게 된다.

 

걱정의 종류에도 여러가지 형태가 있는데, 먼저 걱정에 짐지며 살아가는 상태가 있는가 하면, 일반적인 걱정에 대한 비정상적인 태도, 걱정이 심하게 되어 발전되는 패닉되어지는 공황이 지속되면,정신적인 문제가 생기게 된다. 현실적인 것들에 정상적인 반응을 할수가 없게 된다.

 

걱정은 사실 현실적인 사실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실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라 할수 있다. 건강한 정신을 갖고 살면, 사실에서 오는 도전을 잘 극복하며 살수 있다. 자기관리를 잘 하는 사람은 건강한 정신을 소유하며 살아갈수 있다. 먼저 스트레스가 일어날때에 그 걱정을 잘 처리하는 기본적인 테크닉만 알아도 훨씬 우리의 생활을 건강하게 살아갈수 있다.

 

자기의 영혼을 잘 돌보고, 자기안에 웰빙이 되는 평안한 상태를 유지하면, 걱정에서 오는 마음의 흩트러진 상태를 회복할수 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어떤 걱정에 사로잡혀 있으면, 집중력이 떨어지고, 사려분별을 상실하게 되며, 그 걱정을 떨어버리려고, 먹는 습관에 이상이 생겨, 술로 해결한다든지, 과식등을 통해 자신의 걱정하는 상태를 해소하려고 하지만, 그것은 우리 몸에 이상을 가져다 줄 뿐이다.

 

요즘 비만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현대인들이 이런 걱정하는 습관이나 태도에 의해 생겨난 과식내지는 정상적이지 않는 식생활때문이다. 나의 이웃에 어느 미국인 부부가 살고 있었다. 그부인이 남편과의 관계에서오는 스트레스가 쌓여, 그것이 일반적인 걱정하는 태도에 의해 그녀의 과식하는 식생활습관으로 점점 그녀의 몸이 비대해 지는 것을 볼수 있었다.

 

걱정하는 습간을 떨어버린 방법 중에 쉽게 우리가 할수 있는 것은 우리몸을 그 정신적인부담으로 부터 우리의 관심을 몸의 활동으로 돌리면 된다. 그것이 운동을 통해, 많은 부분의 정신적인 부담감을 줄일수 있고, 우리의 정신적인 상태를 건강하게 회복할수 있다.

 

우리의 영혼(마음)과 육체를 건강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이 두 실체의 조화를 꾀하며 살아갈때 가능하다. 마음과 육체의 조화는 건강한 자신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형성하게 한다. 이런 것을 갖추는데, 좋은 길은 일관된 세계관내지는 인생관을 유지하고 살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것을 갖는 지름길은 종교에 귀이하거나, 신앙심을 갖고 살아가면, 일상적인 걱정에 벗어나 휠씬 건강한 생활을 할수 있다. 이런 신앙심을 통해, 나 자신에 대한 일반적인 큰 그림을 그리며 살아갈때에, 건강한 자신을 형성할수 있다.

 

그 위에 우리가 걱정을 벗어나는 구체적인 습관들을 형성하게 되면, 휠씬 우리는 건강하게 살아갈수 있다. 먼저는 하나의 일관된 삶의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다. 걱정하는 일이 있을때에 우리몸의 긴장을 풀게 하는 가벼운 운동이나, 스트레칭을 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그리고 걱정스런 일들이 발생할때에, 그 걱정을 가져다 주는 현실적인 사실이나, 정체를 잘분석하여, 그 걱정을 조정하는 자세를 가지면 그 걱정하는 태도를 해소할수 있다. 그리고 그 걱정이 어떤 것인지 명료화하여, 걱정을 주는 근거를 해소할수 있는 것이면, 그것을 처리하고 나면, 휠씬 마음이 가벼운 상태에서 살아갈수 있다.

 

혹은 또한 예를 들면 “지금 이 세상이 망하게 되면, 혹시 전쟁이 일어나면,” 등을 생각하는 쓸데없는 걱정을 떨쳐버리고 사는 것이다. 그리고 더나아가서, 그 걱정에 대한 반응하는 나의 몸의 느낌이나 감정을 조절하는 것이다. 걱정하는 감정에 휩쌓이지 않도록, 감정순화내지는 감정변화를 줄수 있는 여행이나, 그 걱정하는 습관에서 벗어나게 하는 취미활동을 하면 가능하다. 그리고 걱정하는 감정을 대처하며 우리의 마음을 집중하게 하는 마음의 평안이나 고요를 유지하는 음악듣기등도 좋은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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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족보

2007/06/15 오전 12:01 | 메시지

에베소서 1:1-6

1.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가 된 나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에게
2.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분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우리를 자기자녀로
    예정하셨습니다.
3. 이것은 우리가 그분이 사랑하시는 아들안에서 우리에게 거저주신 은혜와 영광을 찬양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안에서 하늘의 모든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려 주셨습니다.
5. 하나님은 우리가 자신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세상을 창조하시기전에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6.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안이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세상에서 알려지는 가계나 가문의 족보는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핏줄과
그에 따른 후손들의 내력이 있는 역사이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자신이 속해있는 가계의 배경을 가지고 있다.
자신이 속한 가계의 조상들의 과거에 대한 기록은
현재의 자신의 소속에 대한 정체감에 영향을 준다.
사람들은 그 족보나 가계를 통해
자기가 어디에 속해있는 가 하는 자신의 소속감에 의해
자신의 정체감을 아는 자기 이해를 갖추게 된다.

자신의 영적인 족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믿음의 사람들에게 있어, 족보있는 신앙은
조상적부터 믿음의 유산을 물려받은 가치있는 자산이 된다.
족보있는 사람은 좋은 가문에서 효력있는 가훈과
부모의 가르침이 살아있는 가정에서 자란 사람으로
훌륭한 모범을 보인 부모들의 삶이 그들의 지침이 된다.
그래서 자기가 속해있는 가정을 통해 자신들의 삶의 고귀함과
자존감이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성도들은 세상의 가문이나 가계혈통과는 전혀 다른 가족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형제자매사이와 부모자녀간의 혈통이나 민족을 넘어가며,
인간적인 관계를 벗어나는 영적인 나라의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뜻하심에 의해 이루어진 영적인 족보이다.
하나님의 뜻과 정하심은 창세전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마스터 플랜 가운데에 나타난다.
그의 계획아래에 모든 인류들중에서
여러 인생들을 그의 자녀이며 백성으로 삼으시는 것이다.
이것을 개인적으로 적용해본다면 그에게 속한 무리의 반열에 드는 것은
그의 전적인 택하심이며 그의 선하신 은혜이다.

성도들 자신의 삶에 있어 하나님의 뜻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하나님의 뜻은 그가 원하시는 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의 뜻에는 두가지로 생각해볼수 있다.
영원불변하는 그의 속성과 더불어
그가 정하신 뜻은 지속적으로 변함없이 시간과 역사를 통해
영원하신 그의 계획하심이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루어 져 가는 것이다.

또 하나의 그의 뜻은 시간과 역사속에서 상대적인 인간의 생각과
다른 환경적인 요인에 의해 발생하는
유동적인 변화에 대처해가는 유연한 그의 뜻이 있다.
각자의 인생에게 주님은 그의 정하신 뜻이 있다.
그는 사람들은 공의와 사랑이라는
대원칙아래에서 자신들의 삶을 영위하기를 원하신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에 명제적인 하나님의 뜻하심이 있다.
인생들이 마땅히 가야할 길을 제시하고 있다.
근본적인 인생의 죽음의 상황이나 위치에서 생명을 얻는 길,
혹은 선하고 정의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등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각자의 인생들을 구체적으로
그의 뜻하심(영원한 것과 일시적인 것)안에서 그들을 인도하신다.

성도들은 영적인 족보의식을 통해
자신이 속한 그 가문에서 오는 자신의 정체감을 갖는 것은
자기신분의 근본적인 요소로 자신의 신앙생활에 중요하다.

내가 누구이며, 당신들은 누구인가?
여기서 사도는 자신이 하나님의 뜻으로 자신이 사도가 되었음을 확신하고 있다.
성도들도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녀임에 대한 확신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들이 그의 자녀가 된 것이 하나님의 뜻하신 바에 의해 이루어 진것이다.
이 과정에서 성도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에게 속한 자이며,
그의 뜻에 구별된 사람, 혹은 선택된 사람들이다.
그들은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통해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이며,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구세주로 믿는 사람들이다.

사도는 여기서 성도와 신자들을 구분하는 것일까?
그것은 그들의 정체감을 두가지로 표현하는 것일 것이다.
신자는 예수님과 그의 복음을 믿는 사람이며
자신들의 믿는 것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삶의 특징은 한마디로 믿음으로 이루어 진 인생이다.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보시는 관점안에서 자신과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며,
자신의 주어진 삶의 여건이나 생활을 긍정적으로 인정하고
그것들을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성도는 거룩한 무리이다.
하나님의 뜻에 의해 세상에서 구별된 사람으로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들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통치와 그의 다스리심을 기뻐하는 사람들이다.
그의 품안에서 만족해 하는 삶을 사는 것으로 기뻐한다.
그리고 장차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함께 누릴 영원한 기업의 기약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다.

성도이며 신앙인 그들은 신앙을 통해 하나님으로 부터 여러가지 복을 받는 다.
그중에 그들에게 주시는 하늘의 축복은
그들에게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받으며
그리스도와 살아계신 하나님아버지와의 관계를 회복하며,
그분과 교제하는 복을 받는다.
그것을 통해 그들은 은혜와 평안의 복을 받는다.

은혜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선물이며, 특별한 혜택이다.
세상에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원중에 인간이 쓸수 있는 자원은
거의 유한 할수 밖에 없고 제한이 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속한 것은 그 자원이 무한한다.
하나님의 주시는 은혜는 무한하신 자원에서 나오는 그의 축복이며,
사람들에게 주시는 값지고 멋진 선물이다.
그의 은혜안에는 사람들을 살리고, 치료하고, 회복케하는 능력이 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은 사람의 마음의 고향에서 얻을수 있는 평화가 깃들인다.
사람들의 불안과 방황은 그들의 마음의 고향(죄의 상태와 영향력)에서
얻은 그 평화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의 그 상태가 다시 회복되기를 원하신다.
주님이 이세상에 오셔서 잃어버린 인간의 마음의 평안을 되돌려
그들에게 진정한 마음의 평안을 주신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온 세상에 있는 인간생명들을 살리기 위해
이땅에 그의 독생자를 보내신 아버지이다.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심을 찬양드리며,
그분은 마땅히 영광을 받으실 분이다.
하나님아버지는 모든 은총을 그의 아들을 통해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그가 베푸시는 축복, 특히 하늘에 속한 복들을 부어주신다.
그의 아들을 통해 하나님의 충만하신 은혜를 받는다.
그의 영적인 복들은 자녀들을 삼아주심을 통해,
장차 얻을 하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과 더불어,
영적인 상속인에게 주시는 영적인 기업에 참여하는 것이다.

성도들은 만세전에 하나님의 예정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무리들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것은 그의 선하신 뜻안에서 이루어 진 것이다.
고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자신들의 존재가 이미 창세전에
하나님의 고귀하신 계획을 통해 세워진 무리라는 인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자신의 근본, 자신의 위치, 자신의 장래는
자신을 선택하신 하나님의 손안에 있음을 또한 인지할 필요가 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된 사람들로 택함을 받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의 축복의 은혜를 통해 이루어 진 것이다.
이제 선택받은 무리들은 하나님의 거저주시는 은혜안에서
그의 자녀의 반열에 세워졌으며,
그의 자녀에게 베푸시는 그의 크신 능력과 축복안에서 살아간다.

하나님의 자녀의 위치는 그의 권세와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리는 특권이자 그의 영광에 대한 자녀의 참여이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죄와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자유와 구원을 받으며,
절망과 허무로부터의 소망과 가치의 삶을 살며,
그의 자녀로서 그분을 즐거워하며 높이는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자녀의 책임적인 삶을 요구한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통해 주님은 높임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들의 평생의 헌신과 충성을 통해 주님은 영화롭게 되기를 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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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3)

하나님의 용서와 건강한 자아

사람이 자아에 대해 건강하게 되려면
자신안에 있는수치심과 죄책감에 대한 해결을 받아야 할 것이다.

사람의 내면 생활에서 자신에 대한 용서는
자신이 죄로부터 갖게 되는 죄책감과
자신의 본성안에 있는 수치심을 극복하는 근거가 된다.

먼저, 자신안에 있는 죄책감은 용서를 구하는 구체적인 범죄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며,
수치심은 자신의 자아 전체의 경향으로 타인에 의해 보는 관점이 수치심으로 작용한다.
용서하는 자신에 대해서 이두가지를 행해야 한다.
우리 자신(자아본성)을 위한 하나님의 용서는
우리의수치심과 죄책감을 아울러 해결해 주신다.

그러나 자신을 용서하지 않는 병적인 수치심은 자신에게 독소로 작용한다.
자신에 대한 낮은 자존감을 갖게 하여, 무엇에 대해서든지 자신을 멸시하려 든다.
우리의 자아안에 있는 수치심이 계속적으로
자신의 자아상을 훼손하며 더 깊은 병적인 상태의 센티멘탈리즘에 빠지게 하여,
쓸데없는 정신적인 부담감을 안고 살게 한다.

우리의 수치심은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에
그들은 자신들의 몸의 상태에 대해 수치스럽게 생각하여,
무화과나뭇잎으로 그들의 수치를 가리우려 했지만
그것으로는 그들의 수치심을 극복할 수 없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양을 죽여 피를 흘리고 난후에
그 양의 가죽옷을 지어 입혀주시므로 인간의 수치심을 가리우셨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가?
인간의 죄로 인하여 오염된 인간성의 상태가
죄로 인하여 수치스러운 존재가 되어 버렸다.
자신을 바라볼 때에 누구나 자신에 대해 수치심을 느낀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자아를 해결하는 것으로
즉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회복케하는 은혜로
죄를 해결하신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에게
새로운 창조된인간으로 선언하시고 수치심을 극복할수 있도록 하셨다.

죄책감은 인간에게 끊임없이 정죄의 감정을 느끼게 한다.
죄를 지은 인간이 그죄의 여파로 자신의 생각이나 행위에 대해 정죄를 받고 있는 것이다.
인간에게 죄의 유혹을 걸어 죄를 짓도록 유도한 사단은
사람속에서 계속하여 죄책감을 느끼게 만든다.
그는 할수 만 있으면 우리를 죄에 계속매여 있도록
죄를 해결할수 있는 죄의 고백을 하지 못하도록 한다.
그리고 이미 고백하고 용서받은 죄에 대해서도
계속하여 죄책감을 느끼게 한다.
더 나아가 인간관계안에서 일어난 문제로 인한
우리의 행위에 대해서도 죄책감을 느끼게 한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의 복음(용서와 구원의 메시지)안에서
사람들을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므로써
그들을 수치심과 죄책감으로부터 자유케 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케 하고 소원케 했던 죄의 문제는
하나님편에서 해결의 길을 열어주셨다.
사람들은 그 해결의 차원에서 자신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고
그의 은혜안에서 얻게되는 수치심과 죄책감으로부터
진정한 자유를 경험하여야 할 것이다.
그것은 인간편에서 하나님에게 어떻게
그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가에 따라,
인간에게 있는 죄의 영향력인 수치심과 죄책감을 극복하게 된다.

하나님의 용서에는 용서받은 사람의 의인의 행동보다는
그들의 상태를 보시고 그들을 용서하신다.
그의 용서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사람들의 상태와
그들의 전부를 용납해 주시는 것이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사이를 단절시키며,
서로를 원수시 하는 관계로 만들어 버렸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안에 있는 죄의 영향력을 벗어나도록 인도하시므로,
그들을 용서하시는 은혜를 베푸신다
.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자신의 죄에 대한 용서를 받으면
자신안에 있는 죄의 영향력과 그로 인한 정신적인 부담감에서 벗어나며,
비로소 자신안에 있는 자아는 건강한 상태로서
생각하고, 느끼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한다.
그런 자아의 상태의 모습은 자기표현이나 자아실현하는 과정에
긍정적인 작용을 하여, 자신에게 자신감을 갖게 하며,
자신의 내면의 삶을 안정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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