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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05/30
    자기상실에서 벗어나려면
    목동
  2. 2007/05/29
    창조사역의 우선순위
    목동
  3. 2007/05/28
    자아의식과 자기연출
    목동
  4. 2007/05/26
    말씀의 전달자와 청취자
    목동
  5. 2007/05/23
    용서(2)
    목동
  6. 2007/05/23
    내적치유의 필요성
    목동
  7. 2007/05/22
    내적치유
    목동
  8. 2007/05/20
    고난가운데에 자라는 믿음
    목동
  9. 2007/05/15
    열심히 자라는 아이처럼 거룩함에 이르는
    목동
  10. 2007/05/15
    하나님의 의인으로 살아가기
    목동

자기상실에서 벗어나려면

왜 나는 버림받은 존재로 살아가야 만 하는가?
인간이 요람에서 무덤까지 가는 동안 시종일관 이런 태도로 삶을 살아간다고 생각하면,
누구든지 그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가려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사람은 태어나서, 자기가 어디에 소속되는 것과
자기자신에 대한 자존감과 자기가 꼭필요한 존재로 여기고,
그리고 나서 자기 성취감을 갖고서 살아야 바람직한 삶을 사람답게 살아간다.
누구에게나, 이런 욕구가 기본적인 인간의 의식주를 해결하려는 욕구나 태도보다
더 필요한 인간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삶의 요구이며 자세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왜 나는 거부당하며 살아야 하는가 라고
생각이 들도록 한 요인들을 살아오면서, 부정적이고, 힘든 일들을 겪는 경우가 많이 있다.
한때는 그런 청소년 시절을 보내면서,
부모에게 반항하기도 하고, 어른이 되어서는 왜 사회는 나에게 외면하는가?
항변하며, 사회악을 조장하려는 유혹에 빠지기도 한다.
왜 주변사람들은 나를 무시하는가? 라고 좌절하며, 고통스러워 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신의 인생을 행복하게 살려면,
자기자신에 대한 생각에 대해, 자신은 버려진 존재로가 아니라,
받아들여진 존재로, 자신을 인정받는 일이 필요하다.

자신을 인정하는 일에 대해 생각해 볼때,
우리는 나는 받아들여진 존재라 여기는 옳은 인생철학을 가져야 하는데,
그 철학의 근저에는 신과의 관계로서의 자신을 먼저 생각하게 한다.
신을 생각하는 일은 그만큼 우리의 일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어릴때부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은
누구나 신에 대한 개념을 갖고서 살게 되며,
그 신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가 어떠함에 따라, 자신의 삶을 이루어 간다.
먼저, 자신의 생각하는 신개념은 모든 인생에 대한 자세와 철학의 영향을 미친다.
긍정적이고 바람직하게, 신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은
모든 사건이나 일에 대해, 창조적이며, 건설적인 태도로 대하게 되며,
설사 고통스럽고, 힘든일들과 같은 외부적인 어려운 일들을 당해도,
그것들을 극복할 힘이 있으며,
결국에는 그런 어려운 상황을 오히려 반전시키는 전화위복이나,
그런 도전에 대한 자신의 긍적적인 자기 응전으로 새로운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있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누구나 자신이 버림받았다는 생각이나,
그런 종류의 경험을 갖고 있다.
특히 사랑하는 관계이며, 신뢰하는 경우에 당하는 자기 거부나 자기 상실은
자신에게 많은 좌절과 불안으로 내면적인 고통을 겪게 하며,
그런 현상들은 자신이 조정할수 없는 정신적인 불안정으로 발전하고,
일생을 통해 자신의 현재의 삶과 미래에 대한 태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사람은 자기자신에 대해 자신을 인정하는 존재로 여기고,
이 세상에 필요한 존재로 태어나고, 살아간다는 의식을 갖아야 할 것이다.
그러러면, 자신이 자신에 대해 받아들여진 존재로 여기는 건강한 자아상을 갖추어야 하는데,
이런 건전한 자아개념은 자신의 존재의 근원을 있게 한
신에 대한 자세나 태도가 결정되어 진다고 생각한다.

신안에서 만 자기만족이나, 자아완성(구원)을 이룰수 있는 인간은
신을 떠나서는 자신을 바로 세울수 없다고 감히 단언하는 것은 존재의 근원이며,
자신의 존재의 의미의 근저가 바로 신 앞에 있을때에,
자신을 신의 혜택안에서, 용납된 자신으로 여기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것이 문제이다. 누구나 사람이 태어나면서
신과의 단절가운데에 있는 상태로 지내기 때문에,
그 신을 알지도, 찾지도, 그리고 발견하지도 못하므로,
신과의 바른 관계를 맺기도 쉽지 않다.
누군가가 나에게 그 신을 알려주면, 그신에게 찾아가, 그를 알고,
그와 의 정상적인 관계를 맺을텐데, 라고 생각하는 것이
인간의 가지고 있는 딜레마 중에 가장 큰 것이라 할수 있다.
스스로 그것을 이룰수 없으니,
다만 신만이 자신을 알려주는 신자신 혹은 신의 대리자를 통해 그 신에게로 다가갈 수 있다.

역사속에서, 극한 거부나 유기를 통해 인간의 당할수 있는
모든 고통을 다 당한 한 인생이 있다면,
그는 인간의 모든 문제에 대해, 우리가 그에게 찾아가, 상의하고,
그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겠다.
왜냐하면 그는 인생의 문제에 대해 근본적으로 알고 있다고 우리가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만일, 신이 인간의 문제에 대해, 그것을 몸소 경험으로 그런 일들을 겪었다면,
우리는 우리와 같은 처지의 경험을
그 신에게 다가가 우리의 사정을 아뢰고, 그분의 상담과 조언을 구할 것이다.

어려움을 당하거나, 좌절을 겪는 인생이 자신에 대해 생각할때에,
나는 세상에 대해 버려진 존재가 아니라, 버려진 존재로 여기는 자신이 문제인 것이다.
세상을 붙드는 신이 존재하는 것을 인정하는 한,
인생을 이 세상에 있게 한 신이 결코 인간을 버려지도록 놔두지 않고,
무엇인가를 인간을 위해서 하였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신에게 당연히 도움을 구할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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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사역의 우선순위

창세기 1:2
흑암이 깊음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의 창조사역이 만물 가운데에 시작되기 전에
모든 것이 혼돈된 상태로 있으며,
그 위에 흑암이 혼돈된 상태의 존재로 우주안에 깃들이고 혹은
우주는 깊은 무질서의 상태에 있었다.

하나님의 창조는 그의 영이 수면에 운행하시므로 시작된다.
우주는 그의 창조의 대상이며,
수면은 하나님의 창조의 은혜를 의미하며,
모든 만상에 그의 신이 운행하심으로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행하심이다.
성령의 창조사역은 혼돈된 우주에 질서를 세우는 일을 먼저 하신다.
성령은 창조사역시에 그는 만물의 공허와 혼돈의 상태를 새롭게 하기위해,
그혼돈된 상태의 우주에 하나님의 창조의 손길로 운행하시며 사역을 하신다.

생명의 우선순위
만물의 모든 생물들속에 성령의 창조사역으로 인하여 그안에 생명이 주어졌다.
생물이 살아있는 동안에 생명이 있다. 성령의 창조의 사역을 운행하시므로
그는 만상에 생명의 창조를 시작하셨다.
그의 창조사역은 창조의 명령를 따라, 질서를 세우며,
우주의 혼돈을 질서로 바꾸며. 그위에 생명의 창조를 하신다.
그의 창조사역은 생명을 지음으로 시작한다.
엿새동안을 창조하신 모든 생물을 창조하신 후에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생명을 창조하신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음은
그의 성령을 통하여 이루어졌으며,
그들은 성령의 창조생명의 역사로 살아있는 생령(즉 하나님의 생명과 교통할수 있는 영)이 되었다.

오늘날 성령의 사역은 항상 생명우선순위의 원칙을 따라 사람들속에 역사하신다.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 그 생명을 상하고 병들었으면,
고치고 새롭게 하는 재창조의 사역을 하신다.
십자가의 죽은 예수를 다시 부활의 생명으로 살린 생명의 영이
죽은 인간의 영혼속에 들어와 그 생명들을 살리는 일을 하신다.

고로 사람이 사는데 모든 일을 행하기에 앞서서 인생의 지혜를 얻는 비결은
사람에게 가장 중시할 것은 생명경외를 깨닫는 일이다.
자신의 생명은 자신의 부나 권력보다 중요하며,
자신의 몸은 자신의 의복이나 명예보다 중요하다.
그리고 자신의 수명(신이 정해준 인생의 시간)에 대한 이해는
자신의 건강이나 취미에 대한 관심보다 중요하다.

영혼의 우선순위
성령은 하나님의 영으로 인간의 영에 들어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형성하며,
그를 통해 교제가 이루어지는 일을 하신다.
죽은 영을 가진 이들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수도 없고 교제할수도 없다.
그의 영이 인간에게 들어와 인간의 영을 살려
그의 생명의 연결을 통해 하나님과의 교제가 이루어진다.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 영혼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살게 되면
인간의 생명은 그의 영혼이 육체안에 머물러 있기에, 육체의 생명을 유지한다.
고로 사람은 자신의 영혼을 먼저 돌봄을 받아야,
사람이 그 영혼이 잘되므로 자신의 육체의 생명을 비롯한 인생의 모든 것이 잘되는 것이다.

복음서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어리석은 부자에 대한 비유에서
부자의 육체와 영혼에 대한 비교를 말씀하신다.
부자가 자신의 육체적인 삶을 위해서는 많은 부를 쌓아놓고,
자신의 인생을 즐기려고 하였지만,
어느 날 부자에게 찾아오신 주님의 사자가 그 영혼을 취하여 가므로,
그에게 주어진 육체의 생명의 기간은 끝이 났다.
그래서 그의 영혼이 떠나는 순간에 그의 육체의 생명도 멈추게 되었다.

사람의 영혼이 몸안에 있는 동안에만 사람에게 인생의 삶이 주어진 것이다.
사람이 자신의 영혼의 일을 등한히 하고, 자신의 인생을 유지할수 없다.
육체의 몸이 자신을 주장하고 자신을 이끌어 오는 대로 살겠거니 생각하면서 살았으나,
어느 날 그의 영혼이 육체를 떠나는 날,
사람은 자신의 인생을 유지할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고로 사람에게 영혼의 존재는 곧 자신의 생명과 연결된 근본으로
육체의 필요도 중요하지만
영혼의 필요는 더욱 자신에게 근본적인 문제로 채워야 할 문제이다.
육체의 필요는 몸의 유지를 위한 먹고 배고픔에 대한 음식의 문제이지만,
영혼의 배고픔은 자신의 생명의 유지를 위한 영적이고 정신적인 양식의 채움이다.
몸은 단지 영혼을 담는 그릇이나 몸을 유지하고 활동하게 하는 영혼은
항상 몸을 조절하고, 인간의 모든 사고 활동에 영향을 주는 생명의 근본이다.

신앙의 우선순위
성령은 믿음의 영이다. 인간속에 들어와 믿음을 심으신다.
믿음의 문제는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신뢰가 금이 간 이후에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위해, 사람들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태도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에 실패하여,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여, 자신의 인생을 자기주장대로 이끌어 가려고 한다.

그런데 성령이 오셔서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게 하며,
하나님의 성품과 사역과 섭리를 이해하고 신뢰하도록 인도한다.
고로 성령은 인간속에 하나님께 대한 믿음, 신뢰심을 심으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은 믿음이라는 그 바탕위에 선 사람들속에
또한 신의 성품을 만들어가는 인간 재창조의 사역을 행하신다.

믿음은 모든 세계와 하나님의 세계섭리에 대한 모든 사역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사람들의 세계관이 되어,
사람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신의 세계를 바라보게 하며,
세상에 사역하시는 신의 흔적을 찾아 가게 한다.
이것은 성령께서 사람에게 믿음의 능력을 심어,
사람들 속에 있는 그 믿음의 눈으로 세상에 임하시는 하나님이해의 길과
하나님경험의 세계로 인도하시는 이유이다.

고로 인간에게 있어 모든 인생의 경험이나 물질로 된 것들은
결국 사라질 제한된 시간안에 있는 인간의 소유이지만,
믿음을 좇아 행하는 인간의 행동이나 사역은 영원히 남아
장차 하나님앞에서 갖고가서 남을 수 있는 유일한 불멸의 자산이 되는 것이다.
또한 그 믿음은 인간이 하나님과 유일하게 계산할수 있는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크레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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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의식과 자기연출

자기자신에 대한 자아의 표현나 행동표출은 자아에 대한 이해에서 근거한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 어떻게 표현하는 지를 모르고 살아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더 나아가 매일 살아가면서 표현하는 자아는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자기 실체의 방향타의 역활을 하며 자기성취의 결과를 이루어 간다.

자신을 표현하는 자아의 실체는 무엇인가? 자아의 존재에 대한 의식이나,
자아의 영향력에 대한 이해는 어떤가?
이런 자아에 대한 사실이나 현상등을 이해하면
자신을 바로 알고 자신을 개선하며 자기발전을 이루어 갈수 있는 단계로 나아가게 된다.

그리고 사람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자라오는 과정안에서 자신을 형성하며,
자기 자아에 대한 인식을 갖게 된다.
자아의 이해하는 수준과 판단하는 능력도 나이가 먹으며,
후천적으로 습득하는 지식을 통하여 건전한 이성의 판단력을 갖게 된다.
그리고 자아표현에 있어 미숙하거나 모호하지 않고
자신의 성장하고 성숙한 자아의 연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자아에 대한 깨달음은 중요한 인간의 자기발견이며 자기를 이해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불교의 불자가 자아에 대한 깨달음을 통한 득도를 했다거나,
혹은 데카르트와 같이 철학하는 자신을 통해
인간속에 생각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등은
인간의 자아의식에 눈을 뜨는 경우일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자신안에 있는 자기의지의 표현이나 자기연출을 자기(자아)를 통해 나타낸다.

그 자신안에 있는 자아의 종류에는 특히 신앙인의 세계에서는
거듭남의 과정에서의 새자아와 옛자아의 구분이 있고,
자기 성화의 단계에서는 실질적인 자아와
이상적인 자아등 자신의 성장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인격을 표현한다.

또한 사람속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이중적인 표현양식이나
이율배반적인 모습의 참자아와 거짓자아의 현상들이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많은 경우에 있어서,
자신안에 있는 거짓된 자아의 영향으로 인하여 혼란되며,
자기기만에 빠지기도 한다.
거짓된 자아위에 세운 지식이나 자기연출등은
마치 사상누각의 건축물처럼 밑바진 독에 물뿌기식으로
자신의 건설적인 자아표현이나 연출에 장애를 가져오며,
자아표현의 헛된 망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신앙의 자아의식은 자신속에 있는
자기의 이런 두자아의 모습의 상태를 잘 분별을 하여
건강한 자아형성이나 표현을 이루어 낸다.

대표적인 자신의 자아의 방향성은 두가지로 대변할수 있다.
하나는 영의 사람으로 나가는 자아의 성향은 영적인 기질로,
인간의 깊은 곳에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영적인 존재와의 소통과 교제를 가능케 하며,
그 영적인 자아는 영의 양식을 먹으며 성장한다.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과 그로 영양공급을 통한
영성의 질과 양의 성장과 그리고 믿음, 소망, 사랑의 성품개발을 이루어 간다.

육적인 자아는 육의 사람으로 육의 양식(세상(일시적인)의 추구,
본능적인 욕구, 옛사람의 기질의 죄의 성향)등을 먹는다.
대체로 그 육의 자아는 인간본능의 육체의 욕구를 좇아가 욕망이 추구하는 바를 따른다.
더나아가 육의 자아는 자신의 형성의 배경이 된 비롯된다.
혈통이나 조상적인 경향, 부모들의 기질과
세계관의 영향과 자라면서 경험되어진 교육적인 습득으로 인한 자연적인 본성형성을 이룬다.
또한 죄의 본성아래에 있는 인간의 육적인 상태는
인간성품의 쓴뿌리(부정적인 관점, 상처난 자아관, 왜곡된 판단등)에 뿌리를 두고,
그릇된 기질이나 혹은 자신을 오도하는 어둠의 영향을 받는 곳이다.

사람의 자아는 영혼과 육체의 상관관계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잡고 인생을 주장한다.
자아는 자기의지의 표현이다. 자아는 인생방향의 키를 갖고서, 사람들을 주장한다.
그런데 자아가 왜곡된 상태로 있는 경우나, 병든 자아도 생각해볼수 있다.
병들고 왜곡된 자아는 자신을 표현하고, 연출할 때에 문제를 일으키고,
그릇된 방향으로 삶을 이끌어 갈 것이다.

영혼은 영과 혼의 관계를 통해, 영이 정신세계를 인도하며,
인간의 영은 하나님의 영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교제하는 매체로서
인간의 다른 부분인 육을 지배를 할때에
질서있고 조화있는 인간의 자아관을 형성하고 올바른 자아표현을 할수 있으며,
자기성취를 위한 자아발전을 이루어 간다.

신앙안에서 인간이 표현하는 자아의 표현방식은 다음과 같다.
자기자신에 대해 먼저 의식하는 자아를 생각한다.
의식하는 자아는 자아의 자기 깨어남을 의미하며,
자아에 눈을 뜬 상태에서 자기를 인도하는 방향을 바르게 잡아갈수 있다.
그 의식하는 자아는 영적인 거듭남에서 자신의 영의식을 갖게 되지만,
항상 자신의 의식활동에서 그 영의 의식을 좇아가지 않고,
자주 육의 내재적인 자신의 불완전한 자아의식으로 자기를 연출하며,
때로는 혼돈과 고뇌에 쌓이기도 한다.

다음에는 신앙안에서 판단하는 자아를 생각한다.
신앙을 통해 사물을 인식하는 자아는 자기가 받은
신앙적인 정보에 대한 판단에 의해 옳고 그릇된 것을 분별하며,
선과 악을 구별하고, 그리고 신앙이란 인간의 이상적인 상태를 지향하는 가치관으로
사람들은 신앙안에서 자신의 세계관이 그릇되거나 왜곡되지 않는 한
세상사람들의 상식을 무시하지 않고,
오히려 보편적이고 타당성이 있는 판단을 내린다.

다음단계에서는 신앙안에서 결단하는 자아를 생각한다.
믿음의 눈을 통해 모든 사물이나 사건을 보고 판단하고 결단하는데는
신앙의식하는 자아를 통해 형성된 세계관과 가치관을 통해
자신의 하는 일에 대해 성경적인 견해에 의한 올바른 결단을 내릴 수 있다.
이런 올바른 자기결단을 통해 결국
의미있는(신앙의 가치연출을 위한) 자기행동으로 연결되어,
자신의 하는 모든 일에 대해 자신의 삶에
충실한(신앙을 갖지 않고서는 충실한 인생을 살아가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신앙은 사람들의 하는 모든 일에 대해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기준으로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신앙이라는 가치기준을 갖지 않으면 가치판단의 혼돈이나
가치결정의 모호함에 빠짐) 열매맺는 행동하는 자신을 연출한다.

마지막으로 신앙인의 행동하는 자아를 생각한다.
그 행동하는 자아는 영적인 의식(사람에게 약간의 요구와
부담감이 주는 긴박한 의식)속에서
판단하고 있는 내용을 무시하지 않고
혹은 자신이 신앙안에서 당연히 해야 하는 영적인 일을 게으르지 않으며,
더 나아가 신앙의 동기를 통해 주는 행동방식에 의해
자기 성취를 주는 직접행동으로 나타내게 된다.
그런 행동하는 자아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후회없이 할수 있는 결과를 나으며,
자신이 할수 있는 의미와 가치를 창출하는 열매를 낳는다.

이렇게 신앙하는 의식의 자아를 좇아 살아가면,
결국 인생의 종국에 가서는 하나님의 판단앞에서
자신이 의식하고 판단하고 결단하고 행동하여
온 모든 자아연출에 대해 인정받는 은총을 얻게 된다.
인생의 모든 일에 있어 자아표현(연출)은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는 데 있어
근본적인 영향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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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전달자와 청취자

신명기18: 14-22
14. 여러분이 쫓아낼 민족들은 점치고 예언하는 자들의 말을 듣지만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여러분이 그렇게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15. 여호와께서는 여러분을 위해 여러분의 동족 가운데서 나와같은 예언자  
      한 사람을 세우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의 말에 순종해야 합니다.
16. 이것은 여러분이 시내산에 모이던 날에 여러분이 직접 여호와께
      구한 것입니다.
17. 그러자 여호와께서는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의 말이 옳다.
18. 내가 그들 가운데 너와 같은 예언자 한 사람을 세워 백성들에게 전한 말을
      그에게 하겠다. 그러면 내가 명령하는 모든 것을 그가 백성들에게
      전할 것이다.
19. 그가 전하는 내 말을 듣지 않는 자는 누구든지 내가 직접 벌하겠다.
20. 그러나 내 이름을 빌려 내가 명령하지도 않은 것을 제멋대로 말하는 예언자나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는 예언자는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다.
21. 여러분은 예언자의 말이 여호와께서 주신 말씀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느냐고
      속으로 생각할지 모릅니다.
22. 만일 어떤 예언자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을 해도 그것이 이루어 지지 않으면
       그가 말한 것은 여호와께서 주신 말씀이 아니라 그가 제멋대로 지어낸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으 그런 자를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사명자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과 의도를 나타내야 할 것이다.
어느 시대에나 어느 사회에나 거기에는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시려고
말씀의 일꾼들을 택하셨다.
하나님의 그런 의도안에서, 어느 때에는 예언자로 혹은 제사장으로
혹은 한 부족의 족장으로 혹은 사사로 혹은 정치적인 왕으로
그의 메시지를 전할 사람들이 영적인 리더로 나타났다.

사람들은 무엇인가에 의지하며, 그것에서부터
자신의 인생의 중요한 것들에 대해 교훈이나 혹은 지도를 받으려 한다.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서 사람들은 모든 상황이나 사건에서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이나 혹은 결정하는 것이나
혹은 행동하는 것에 대한 지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사람들은 자신들의 의식속에 있는 신의 음성즉,
양심의 소리 혹은 영혼속에서 나오는 신의 음성을 듣고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을 있게 한 창조주인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야 존재이기 때문이다.

세상사람들은 점쟁이를 찾고, 사주팔자를 고치려고 관상자를 찾는다.
점치는 일, 미래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인간의 심리는
선악과를 따먹으려는 심보와 비슷하다.
사주팔자보는 일, 관상을 보는 일등은 점괘로 사람의 운명을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이 아니다.
인간의 미래를 아는 일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다.
인생은 자신의 앞 길을 알수 없는 채 살아간다.
그것이 인간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미래를 알아서 미래를 변화시킬 만큼 능력이 없는고로
알아도 그것에 대해 유익을 가질수 없다.
다만 미래를 예측하고 준비하는 것이 지혜의 자세이다.

인생에게 주는 종말에 대한 메시지는 분명하다.
세상은 종말을 향해 가고 있으며,
자신의 인생도 마지막을 향하여 한걸음 내딛고 있는 것이다.
인생의 주인의식이나 책임의식이 중요하다.

각시대에나 혹은 사회에 혹은 자신이 살고 있는 삶의 때에나
주변의 환경안에서 자신에게 하나님이 보내시는 사람의 전하는 내용을 들으라.
그것이 하나님이 자신에게 향한 그분의 원하는 생각이다.
사람들은 그의 보낸 설교자 혹은 전도자,
혹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종
(아무리 작은 자인 자신의 집에 있는 어린아이라 할지라도)들로 부터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하며,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영원한 세계의 모습을 현재 보고 싶어한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은
증거의 부족이 아니고, 하나님께 향한 사람들의 마음의 태도가 문제가 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난 경험을 전해도,
자신이 평소에 갖고 있는 상식의 관점안에서
현실세계를 초월하는 영원세계에 대한 인식을 쉽게 바꿀수 없다.
평소에 자기 주변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여러 대변자(설교자, 전도자, 영적인 리더)들을 통해 하나님의 메시지를 듣는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에 대해
혹은 보이지 않는 신의 존재에 대해 자신들의 확신하는 바를 전한다.
그들은 그들의 메시지안에 보이지 않는 믿음의 세계에 대해
사람들에게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수 있는
그 세계(영적인 세계, 혹은 하나님의 통치의 나라)를 제시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 영적세계의 눈으로 보면,
존재하시는 하나님과 그의 하시는 사역을 이해할수 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모든 백성으로부터 지도자라는 존경을 받고,
그의 리더쉽은 이스라엘 사람들 모두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그런데 여기에 모세와 같은 예언자를 세우시고,
그를 통해 이스라엘이 나갈 길을 예언하신다고 약속하신다.
리더는 영적인 지도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며,
백성의 대표로서, 중보의 역활을 한다.
하나님의 뜻안에서 책임있게 자신에게 주어진 중개하는 역활을 잘해야 할 것이다.

지도자 한 사람의 인도는 백성들의 삶에 큰 영향을 주며,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을 잘 따르며 나가야 하는데,
그 중간에 리더의 역활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이 책임이 막중한 것이다.

그때 여러분은 죽을까 봐 두려워서 다시는 여러분의 음성을 듣지 않게하고
그 무서운 불을 보지 않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사람이 하나님을 직접대면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죄성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신을 찾으려는 추구는 결국 인간의 자기한계의 부딪치며,
그런 시도를 통해 성공한 경우는 참으로 드물다.
대개의 경우에 신이 인간을 찾아오는 형태로
사람들에게 신의 뜻을 계시하며, 자신을 알린다.

인간의 자신의 처지를 옳게 보는 것은 자신들의 한계를 바로 깨닫는 것이며,
자신들의 한계에서 자신들이 할수 있는 것을 해보는 일이다.
그들은 직접 하나님을 대면하기가 두려워서,
모세를 통해 하나님과 대화하기를 원하였다.
때로는 따르는 사람들의 의견을 지도자가 들을 필요도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처지와
그리고 자신들의 필요를 따라 제안을 하였기 때문에,
지도자가 그것을 분별하여 그 제안을 받아들이면 따르는 사람들은
지도자를 인정하고 더욱 지도자의 지도에 따를 것이다.

사람이 사는 곳에 많은 따르는 사람들이 있는 가하면,
그 가운데에 사람들을 인도하는 지도자들이 있기 마련이다.
지도자는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경우도 있으며,
사람들이 세우는 지도자도 있으며,
하늘에서 택하여 세우는 지도자도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사람들을 통해 백성들에게 전달된다.
왜냐하면 그의 말씀을 그들의 입에 두어,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의 백성들을 인도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위해 택함을 입은 사람의 사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없이 그의 뜻이 손상되지 않고,
분명하게 전달하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모세가 여기서 예언한 예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가 이 지상에 오셔서 사역하실때에
모든 일을 아버지의 뜻을 좇아 하셨으며,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보다는 아버지의 의도를 이루려는 충정으로 사역하셨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로서
가장 하나님의 뜻에 충실하셨으며,
하나님아버지의 의도를 이루려는 것으로 충만한 마음으로 사역하셨다.
주의 사역자들도 자신을 회중들에게
그의 말씀을 전하도록 세움을 입은자로서
주님의 의도를 충실하게 전달할 사명이 있다.

하나님이 세운 사람들, 즉 그의 말씀을 대변하는 종들의 입에서
나오는 메시지가 백성들에게 전달되었는데도
그들은 그의 말들을 무시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과 똑같은 죄를 범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은
사실 듣는 청중들 자신에게는 하나님의 사역이 이루어 지는 것이다.
듣고 믿음으로 마음에 심는 사람에게는 자신들에게 구원과 축복으로 주어진다.
그 유익은 더 나아가 자신들의 인생의 바른 지침이나 방향설정이 되며
자신이 행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 옳은 판단의 기준이 된다.

그러나 듣고도 그것을 마음에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것은 자신에게 유익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말씀의 선포하는 내용이 자신의 삶에 있어 심판으로 작용할수 도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이 선포된 대로
그냥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그 말씀의 영향력이 말씀의 삶의 지도나 인생의 안내나
혹은 사람들의 행동에 대한 평가나 판단이나
혹은 그 말씀을 듣고 따르는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성취의 효과가 사람들에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사명을 받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처지가 하나님의 대변인으로 어떻게 하든지,
그의 뜻을 전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만일 예언자가 자기 멋대로 말씀을 전달하게 될때에
하나님의 버림을 받으며, 그런 자는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설교자들도 같은 이치로 심판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집안에서 선생된 자,
혹은 지도자로 세움을 입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판단과 평가는
더욱 엄중하며 정확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는 일은 설교자를 통해 선파된 내용이
옳은 지를 살피고, 또한 그내용이 신빙성있게 실현되는지를 살펴야 한다.
설교는 설교자의 삶과 그의 행위의 열매로 판단되며,
그 말씀이 실효성있게 전파되기 위해
설교자자신이 메신저로 그의 메시지의 신실성을 입증해야 할 것이다.

회중은 설교자의 설교의 진위를 판단하고,
그들의 메시지의 신실성을 판단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설교를 듣는 자신들은 자신들의 영혼에 대한 것이나,
혹은 인생의 삶에 여러방향으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설교를 제대로 하기란 쉽지 않으며,
사실 스스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할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말씀을
영감으로 기록한 하나님의 영의 도움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그들의 설파하는 내용은 인정을 받지 못할 뿐 아니라,
듣는 청중들의 영혼에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리고 자신도 그 선파된 메시지안에서 혼동이나,
혹은 자신도 모르는 내용에 의해 오도되는 진리의 미로에 빠지기 쉬운 것이다.

사람들에게 들여지는 하나님의 예언은 전적으로 인간의 운명에 영향을 주는 말씀이며,
인간의 운명을 가르는(축복이나저주 혹은 구원이나 심판) 진리의 잣대이다.
그리고 그 말씀의 의도는 전적으로 인간이 얻을 수 있고
혹은 도달할수 있는 인간의 유익과
하나님앞에서 그들의 잃어버린 영광과 인간으로서의 명예회복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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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2)

용서하지 않는 태도를 치료하기

내면치유와 용서는 깊은 관계를 갖고 있다.
쓴뿌리와 부정적인 사고시스템에는 용서라는 큰 주제가 놓여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정상적으로 회복하는데 방해되는 것이
용서하지 않는 자신의 태도에 있다고 하겠다.

먼저 자신의 정신적인 건강이나 대인관계를 원만하게 하기 위해
자신이 주도하는 용서를 통해
자신의 내적인 측면에 대한 깊은 차원의 치유를 하여
자신에게 있는 쓴뿌리와 같은 부정적인 사고 시스템을 수정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용서하지 않는 태도가 대인관계에 있어서
자신의 사고시스템이나 감정조절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내면치유의 장애요인은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의 앙갚음이나
혹은 섭섭함이나 혹은 괘씸한 생각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런 자신의 부정적인 성향들은 더 나아가 분노를 촉발하고,
자신도 원치않는 상한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용서하지 않은 마음을 계속유지하면,
육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자신의 내면에 큰 부담감을 가지고 살게 된다.
고로 자신안에서 마음의 평안과 사고하는 태도에 있어, 자유를 얻지 못한다.
용서하지 않는 상처들 그리고 상한 감정들은 자신속에 더 뿌리를 내려,
용서하지 않는 마음에서 나오는 분노에 의한 원수 갚은 태도로
짓는 죄를 범하게 하며,
앙금된 마음에 고착이 되어,
그 상한 감정들이 자신속에 중한 부담감과
마음의 평안을 해치는 상시적인 불안을 가중케 하는 역활을 한다.

그런 죄의 성향들은 자신의 마음에 펴져있는 영적인 배설물이나
쓴 뿌리역활을 하는 자신의 고착된 부정적인 사고나 병든 성향의 흐름을 지배한다.
고로 그런 불안이나 내면의 병든 성향을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내면의 상태를 전환하도록 자신의 상태를 살펴볼줄알아야한다.

용서는 인간관계를 푸는 열쇠이며,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주요한 이슈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용서는 복음의 핵심으로
죄인인 우리들이 구원받는 근거는 하나님의 용서하심에 있다.

용서에 대한 메시지는 성경여러 곳에 나오고 있다.
마태5:22-24에서 형제에게 이유없이 화를 내는 것도 죄이며,
주님앞에 나가기 전에 형제와의 화해를 시도하는 것이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만일 서로가 풀어야 할 인간관계의 악화나,
증오된 상태라면, 상처를 준 사람이나
상처을 입은 사람 모두가
서로 화해를 갖는 것이 그들의 신앙행위에 어떤 일보다 우선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들을 용서해 준 것처럼
우리 죄를 용서해 주소서” 주님이 가르쳐 주신 모델기도에 용서가 큰 주제이다.
마가복음11:25-26에 기도할때에,
어떤 사람에게 서로 마음상한 것이 있으면 용서하라고 하셨다.
그러면 용서하는 그사람도 하나님 아버지의 용서를 받을 것이다 라고 한다.

이제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용서하지 않는 태도이다.
그 태도를 고치는 것은 먼저 자신이
용서하지 않으려는 마음의 죄를 고백하며( 마태복음 5:23, 요한일서 1:9)
그 마음의 약함이나 악함을 자인하며,
그안에서 벗어나기를 힘쓴다.
그러러면 먼저 하나님의 용서를 배울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용서는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안에서 배울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모든 용서의 모델과 근거가 된다.
그는 자신을 저주하며 모함하며, 사형을 가하는 사람들을 용서하신다.

자신이 하나님의 용서를 배우고 받아들이고,
그분의 도움을 의지하여, 자신이 받은 상처와 용서치 않으려는 태도를 고쳐야 한다.
이 용서치 않으려는 태도를 넘어가는 길은
상처를 준 사람에 대한 축복을 비는 마음과
그 사람을 용서할수 있는 하나님의 영의 도움을 의지하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사실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먼저는 자신이 받은 상처나 용서치 않으려는 태도에서 벗어나도록
자신이 영향을 받은 마음의 상처를 발산하는 자기 나름의 감정표현방식도
상처난 자기감정을 조절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렇게 용서하는 것은 하루 아침에 배우는 것이 아니고,
시간을 두고 자신의 마음을 다스릴수 있는 길과
상한 감정을 다루는 것이나,
병든 마음의 상처들을 치유하는 내적치유의 과정들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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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적치유의 필요성

내적치유사역은 변화와 성숙을 위한 기도와 상담사역이다.
내적치유는 마음에 상처받은 것이나, 과거의 기억치유를 의미할뿐 아니라,
효과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과 그안에 있는 풍성한 생명을 경험토록 돕는 사역이다.

내적치유사역에 있어서, 그 사역의 지향하는 목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성장할수 있도록 치유하고 돕는데 있다.
에베소서4:19에 “오직 사랑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 까지 자랄지라.”
더나아가 내적치유는 신앙인의 불신앙적인 요소들을 돌보는 것인데,
그들이 갖고 있는 부정적인 생각들과 상처입은 감정들,
그리고 왜곡된 관점들을 새롭게 고치는 사역이다.

즉 믿는자들안에 있는 믿지않는 요소들에게 치유사역을 통해
복음이 효과적으로 신자들속에 선포하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5:17에 예수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지만,
그러나 실상은 아직 변화되지 못한 많은 요소들을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갖고 있는 것이다.

내적치유사역은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의 딜레마나
여러가지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해 시간을 두고
그리스도인들의 전생애의 모든 분야에
구원의 효력이 나타나도록 도와주는 기도와 상담사역이다.

왜 우리는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행하지 않는가?
그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장애가 되는 데는 여러가지 요인이 있기 때문이다.
그 요인들중에 자신의 속에 있는 깊은 어두운 내면에서 나오는 부정적인 생각시스템이나,
무의식적인 영향등에 의해,
자신의 병든 이미지에나 생각의 굴절 현상으로 인하여,
자신의 영적성장이나, 영적인 표현양식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

우리자신안에 형성되어온 부정적인 사고시스템이나,
왜곡되어 있는 자아정체감이
자신안에 있는 과거의 상처와 좋지 않은 기억가운데에
자신의 무의식속에 들어가 있는 자신속에 있는
쓴뿌리와 같은 요소들이 있어 자신의 신앙형성이나 발전에 장애를 주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흔한죄를 갖고 있는 것은
남에 대한 쓴 뿌리 판단과 쓴 뿌리 기대로서
과거에 비슷한 경험에서 얻은 정보에 따라
현재의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어
자신의 대인관계에 장애요인으로 작용한다.

지난날에 쉽게 어떤 일이나 사건에서 상대방에 대해
혹은 자신에 대해서 자신안에다 대고 하는 내적맹세는
끈질기게 자신의 생활에 영향을 준다.
예를 들어, 죽어도 무엇을 안한다든지,
혹은 자신을 무엇에다 맹세로 자신을 제한하게 한다.
그런 내적맹세는 자신의 자유로운 의사표현이나 자기성취에 여러가지 장애를 준다.

역기능부모에서 얻은 상처들과 부정적인 경험들도
자신의 정상적인 신앙생활에 방해를 준다.
예를 들어 아버지에 대한 부적합한 아버지역활로 받은 영향으로
자신이 갖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왜곡된 태도나
비뚤어진 아버지상으로 인하여
하늘 아버지에 대한 자신의 그릇된 개념으로 발전하기 쉽다.

이러한 여러요소들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가장 기본적으로 먼저는 자신의 많은 영역이나 분야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신뢰하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그들이 하늘 아버지가 주시는 진정한 영혼의 평안이나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세상사람들처럼 여전히 근심과 불안으로 인하여
그들은 쉬지 못하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나
혹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때에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마음이 돌같은 마음을 갖게 된다.
또한 신앙인들의 문제는 자신들의 그 좋은 영적인 유산이나
신앙이 주는 넉넉한 은총를 통해 인생을 즐기지 못하고,
심지어 작은 즐거움조차 누릴줄모른다.

신앙안에서 자신도 평안이나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신앙의 율법으로 남을 조종하며,
주변인들에게 바리새인(이들은 예수님 당시에 철저한 종교의식이나
종교행위를 하면서 남을 판단하는 위치에서
남을 정죄하는 경향을 가진 사람들) 의 역활을 하기가 쉬어진다.

내적치유는 이러한 요소들을 다루어
그런 문제들을 해결되도록 힘쓰며,
기도와 상담사역을 통해 성령(하나님의 영)의 치유사역에 동참하여,
사람들을 고치고 새롭게 하고 그리고 성장하도록 돕는다.

John & Mark Sandford의 A Comprehensive Guide to Deliverance and Inner Healing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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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적치유

크리스챤의 영적인 치유와 심리적인 치유를 접목한 독특한 형태의 치유로,
크리스챤이 가지기 쉬운 영적인 함정이나,
정신적인 슬럼프에서 벗어나,
진정한 영적 자유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다.

내적치유는 영적인 치유에 중점을 두는 경향과
심리적인 치유에 주안을 두는 경우와
크리스챤의 자기 아이텐티티의 회복을 통해,
자아치유를 하는 경향으로 나뉜다.

영적인 치유에는 성령의 전적인 의존에 의한 인간영성의 치유로,
영적인 영향(악한 영이나,
왜곡된 인간 자신의 영적인 혼란 상태)으로부터 자유를 얻도록 하는데 있다.

심리적인 치유는 감정치유나,
기억치유를 통한 인간성안에 있는 억압된 모순이나 불합리를 제거하여
정신적인 건강을 얻는 것을 목표하는 치유이다.

자아치유는 참자아와 거짓자아사에서 갈등하는 자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은혜와 회복의 치유를 통해,
자신의 왜곡된 자아가 거듭나며,
새로와 진 자아상으로 태어나,
영적인 건강과 성장차원의 삶을 영위하도록 하는데 목표를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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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가운데에 자라는 믿음

데살로니가후서 1:3-12

3. 형제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에 대해서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당연한 것은 여러분의 믿음이 점점 크게 자라고
여러분이 서로를 극진히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4. 그러므로 우리는 여러분이 온갖 박해와 고난을 참고 견디며 믿음을 지키는
일을 하나님이 여러 교회에서 자랑합니다.
5.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옳다는 증거입니다. 그 결과 여러분은 하나님의
나라에 알맞은 사람으로 인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여러분은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6. 하나님은 공정하신 분이므로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에게는 고통으로 갚아
주시고
7. 고난을 겪는 여러분에게는 우리와 함께 평안히 쉬게 해 주실 것입니다.
주 예수님이 그의 능력있는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8. 불꽃가운데 나타나셔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우리 주 예수님께 대한
기쁜 소식을 순종치 않는 사람들을 처벌하실 것입니다.
9. 그들은 영원한 형벌을 받고 주님앞에서 쫓겨나 그의 능력있는 영광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10. 그날에 주님이 오셔서 모든 성도들에게 영광과 찬양을 받으실 것이며
여러분도 우리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으므로 그 성도들 가운데 포함될
것입니다.
11.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여러분을 그의 부르심에 적합한 사람으로 여기시고
여러분의 모든 선한 목적과 믿음의 일을 그분의 능력으로 이루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12. 그것은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이
여러분에게서 영광을 받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고난을 당하는 것을 통해 크리스챤들 자신의 믿음을 자라게 한다.
고로 그들은 고통받는 현실에 대해 낙심하지 말고,
그 고난을 감수하며, 보다 나은 자신의 내일을 만들어 가게 할 것이다.

고진감래라는 말은 고난스럽고 힘든 일 다음에는 반드시 좋은 일,
달콤한 유익하고 축복된 일들이 다가온다는 의미이다.
인생의 고난을 겪으며 자수성가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경험한 도전과 어려운 과업들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자기 세움이나 성장에 있어 다른 이들보다
더 강한 자기정체감을 갖고 있으며,
다가오는 미래의 어떤 일에도 용감히 대처해 갈수 있다.

고난당하는 과정을 통해 영혼을 가진 사람들의 믿음은 성장한다.
그리고 그 믿음을 소유한 영혼들을 돕는 일은
그들의 믿음을 키우는 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역이다.

그 영혼사역에 있어서, 사역자가 교우들을 위해
항상 그들의 영혼을 맡은 자로서 하나님앞에서 살것은
그의 사역을 통해 귀한영혼들의 추수와 열매맺음을 이루어 가기 때문이다.
사역자의 영혼사역에 대한 자세는 사역의 질을 만들어 간다.
사역자의 열정과 정성을 통한 사역을 통해 사람의 심령에 접근하여,
그들의 영혼을 돕는 일들을 수행할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자신의 영혼에 대한 사역에 대해서도
자신의 영혼에 대한 태도(진지함, 열정혹은 영혼의 가치에 대해 깨어있음의 의식)에 따라
그의 영혼이 살든지 죽든지 혹은 병들든지, 건강하게 되는 것이다.
영혼사역에 임하는 사역자의 자세는
이렇듯 사역을 통해 자신이나 타인에게 중대한 결과를 만들어 낸다.

영혼을 위한 사역은 영혼들의 믿음을 통해 온전하게 이루어진다.
사람의 영혼에 영향을 주는 믿음은 어디서 오며,
그것은 어떻게 자라는가?
그 믿음은 영혼에 양식이 되며,
영혼을 가진 사람과 그의 마음에 하나님께 대한 이해와 신뢰심을 심는 말씀을 통해 오게 된다.

그 믿음이 자라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 믿음이 자라도록 하려면,
그 믿음의 생명력을 유지함이 필요할 것이다.
믿음의 생명력은 믿음의 적응력과 창조력이 함께 어울러져,
그 믿음이 깊이 사람들 속에 뿌리를 내려,
그들의 생활에서 영향력을 나타내게 될때에 그들의 믿음은 성장하게 될 것이다.
그 믿음을 갖기 위해 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믿음의 역사에 순응하는 것과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따라 경험하는 자기헌신이나 희생적인 수고가 따라야 할 것이다.
그러한 성장을 위한 노력은
지속적인 영적생활:자신의 영혼을 키우고 먹이는 것:
말씀의 섭취와 영혼의 호흡(기도)과 영혼의 운동(믿음의 자기증거)등을 추구하는 것일 것이다.

영혼을 맡은 사역자가 영혼을 가진 사람들의 믿음을 키우기 위해 해야 할일은 무엇인가?
즉 그는 그들의 영혼을 위한 기도의 수고와 영혼을 움직이고 감동케 하는 사랑의 헌신과
영혼을 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 영향력을 줄수 있는
열정적인 가르침의 노력등으로 이루어진다.

사람들의 영혼을 돕는 신앙에는 여러종류나, 여러 스타일의 신앙이 있지만,
가장 생명력이 있으며, 살아있는 믿음의 실체는
고난과 박해가운데에서 지켜가는 순교적인 신앙일 것이다.
지금도, 세계 여러나라에는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며,
기독교신앙을 가지는 것을 법으로 금하는 나라들이 있다.
그런 어려운 조건하에서 신앙을 지킨 사람들의 믿음은
생명이상의 고귀한 신앙의 숨결이 있다.
신앙은 고난가운데에 고귀한 가치를 드러낸다.

고난을 참고 견딘 믿음은 고난을 통한 시련을 겪은
마음의 단련으로 금보다 더 귀한 정결한 믿음을 소유하게 된다.
믿음을 지키려고 할때에 어려움이 오는 것은 오히려 자신에게 유익이 된다.
하나님앞에서 영적으로 훈련을 받는 길에서
고난을 당하는 것보다 더 유익한 것은 없다.
고난은 신앙을 세련되게 하며, 강화시키며, 성장하게 하며,
자신의 안목의 차원이나 깊이를 넓혀준다.

예수 이름때문에 받는 고난은 자랑스러운 것이며,
그것이 현재의 자신의 영성을 높이며, 자신의 신앙의 정체감을 강화시켜,
신앙의 가치와 효력를 높여준다.
그리고 나중에는 그 고난의 흔적이 주님앞에서 자신의 상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고난을 받은 것은 자신의 영혼의 유익을 위한 위함이며,
자신을 단련하는 시련과 훈련의 기회로 여기게 한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이들에게는
그것이 심판으로 나타날 것이기에
그들에게는 그것이 하나님에게서 받을 엄정한 심판의 원인을 제공하게 한다.
그러나 고난을 감당하는
주의 자녀들은 그것으로 인하여
자신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나타나게하는 영광의 기회를 제공한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려면 자신의 믿음을 강화케하는 고난의 과정과
자신의 성품을 단련하는 시련을 겪는 통과를 거치게 된다.
하나님 나라는 훈련된 사람들,특히 고난을 통해 이들이 들어가게 된다.
그들이 받은 고귀한 사명과 영광된 미래의 기업을 위해
현재의 당하는 어려움과 고난은 그들을 더욱 귀한 존재로 세우게 하며,
하나님 나라의 귀하고 좋은 것들을 받기게 부족함이 없는 자들로 만들어 준다.

하나님은 모든 인생들에게 공평하게 대하신다.
그는 현재일이나 장래일의 이루어 질 일 가운데에 사람들을 택하며,
혹은 분별하여, 사람들이 행한 대로 공정하게 심판을 행하시며, 상급을 내려주신다.
그의 자녀들을 힘들게 하고 고통을 끼친 자들을 결코 가만두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상응하는 형벌과 고통으로 댓가를 치루게 하신다.

고난을 겪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언제나 그들을 위로하시고,
그것을 이길 힘을 주시며, 그것을 극복할 만한 힘이나 노하우의 지혜를 주신다.
그후에 또한 고난 뒤에 얻는 세상에서의 일시적인 평안과
장차 들어갈 고난을 겪는 이들이 얻을 영광에 이를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는 은총을 입게 된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고난을 당하신 주로,
그는 갖은 수모와 고난을 당하시며,
마지막에는 자신의 몸을 제물로 희생당하시므로,
고난당하는 자의 모델이 되셨다.
그는 고난 당하는 모든 이들을 이해하며,
불쌍히 여기시는 긍휼하심과 그들을 이끌어 내시는 능력을 소유하고 계시며,
결국에는 그들을 영광의 자리로 올리실 것이다.
그 주님은 고난당하는 이들을 위로하며 상급을 주시기 위해 다시 오실 것이며,
그때에는 영광의 주로 임하시며,
그를 호위하는 많은 권능있는 천사들이 함께 할 것이다.

주 예수의 재림의 날은 모든 일들을 판단하고 심판하는 때인고로,
어둠의 일들이 드러나게 되며,
하나님앞에서 그분을 인정하지 않는 모든 인생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을 알고도 그를 준비하지 않고,
하나님을 모르고 산 사람들은 그에 상응하는 심판을 받으며,
주 예수의 전파되어진 그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의 메시지를 거부한 인생들은 자신들을 구원할 근거가 없어,
결국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그때에는 시간은 영원에 속하게 되며,
인간의 모든 행위가 백일하에 드러나, 모든 것의 시시비비를 가려,
심판의 저울이 모든 인생에 적용이 된다.

모든 피조물이 다 창조주에게 나왔으나,
그들의 존재와 생명의 근원이신 그분을 거부한 인생들은
하나님이 정하신 영원한 고통의 벌을 받아,
하나님과 영원히 단절되는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모든 은총을 받는 것에서 박탈당하여,
영원한 감옥의 형벌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그를 인정하고 그의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의 찬란한 영광의 자리에 초청을 받으며,
그가 준비하신 모든 영광의 자리에 참여하게 된다.

주님의 날이 복음을 믿지 않은 자들에게는 심판의 날이지만,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은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날이며,
주님과 성도들이 함께 하늘 나라 잔치에 참여하게 된다.
그때에 주님은 그의 택함입은 성도들로 부터 영광을 받으시며,
세상에서 올곧은 신앙을 지켜온 그의 백성들의 찬양을 받으신다.
그 주님의 백성들은 거룩한 무리가 되어
거룩하신 주님에게 붙어있는 사람들로 그의 영광에 함께 참여하여,
그들의 누릴 영광을 바라보며, 기뻐하게 될 것이다.

현재 그의 성도들이 누구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되 그 말씀의 증거를 믿어,
그 말씀과 함께 삶의 운명을 함께 하는 그들이 아닌가?

성도들을 택한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이
그들을 온전한 그의 사람들을 만들기 위해
주님은 마련하신 은혜와 은사의 부르심을 통하여 이루어 가신다.
그의 불가항력적인 은혜는 할수 없는
성도들의 영적생활[의인의 상태유지:
날마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분의 공로(주님의 의의 전가)에 힘입어
주님으로부터 용서와 의의 인정을 받는다.
성화의 삶: 그의 거룩하신 영의 도움을 힘입어
날마다 거룩함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이루어 가는 은혜를 입는다 ]을 가능하게 한다.

더 나아가 그분이 그들에게 주시는 능력과 영향력의 은사들은
그분의 영광의 나타내심을 위하여, 성도들에게 자유롭게 공급이 되어진다.
그래서 그들의 영혼사역을 온전하게 하며,
또한 사역의 열매를 맺게 하며,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도구들로 쓰여진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성도들의 온전함과
그들이 추구하는 목적지향의 삶을 가능하게 하며,
그리고 성도들 자신이나 사역자들의 기도의 협력으로 인하여
언제나 그분의 의도를 따라 살아갈수 있게하는 능력을 힘입는다.

하나님의 능력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의 자녀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약속과 축복이 보장된 것으로
주님의 자녀들이 기도의 응답이나 효과를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그들의 사역에 만족할 만한 성취와 업적을 이룬다.
그래서 그 기도는 그의 이름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온다.
고난가운데에 자라는 믿음도
그 고난을 이기려는 강한 의지와 하나님의 선한 도우심과
그분의 능력을 간구하는 가운데에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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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자라는 아이처럼 거룩함에 이르는

성화에 대한 묵상

칭의(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의 의를 통해
죄인들을 의인으로 여기는 진리의 도)의 의미를 깨달은 날이
자신에게 영적인 생일날이라면,
성화의 과정을 터득하는 시기는 마치 첫 돌맞은 아이가
혈기왕성한 성장을 보여주어
이제 부모님들앞에서 열심히 자라가,
그들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듯,
하나님앞에서 주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자기 변화혹은
개선이나 완성의 사명을 향해,
한걸음씩 그의 발자취를 흠모하며,
그분의 분량까지 나가는 도전적인 거룩한 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성화의 길 그 끝에는 그분과 함께 누릴 영광스러운 미래가 놓여있다.
거룩한 무리들이 도달하여 들어갈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기를 바라며,
날마다 성화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성화는 자신속에 배태되어 있는 생명의 씨인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닮아가는
자신의 변화되어 가는 과정이라 할수 있다.

요즘 나는 기도하는 시간을 갖으면서,
자신의 변화되어가는 성화의 과정이야말로
자신의 임무중에 가장 중요한 업무라는 것을 새삼 인식하게 된다.
자신의 인생의 어떤 이루어 야 할 업적이나 맡은 어떤 일을 하는 것보다,
자신을 만들어가는 성화의 과정은
하나님앞에서 평생 자신이 이루어 가야 하는 숭고한 자기 사명이다.

하늘의 생명(주님이 주신 영생)으로 부터 거듭난 자신은 하나님께 구별된 자로,
날마다 죄로부터 벗어나는 회개의 과정을 지내며,
마음을 새롭게하는 말씀의 새창조의 역사에 따라 가는 것이리라.

성화는 초월적인 주님의 사역이다.
사람 자신안에 새사람들을 만들어가는 재창조의 사역이다.
구원된 자신이 신의 성품에 참여하여,
날마다 주님을 닮아가는 성품을 이루어 간다.

마음안에 아직도 나는 변화되어야 하는 많은 불순물이 있다.
질투, 시기, 미움, 분노, 걱정등,
바람잘낫없는 세월의 풍상에서 자신의 찟겨지고 상한 모습을 돌아보면,
아직도 하는 생각이 든다.
덜 되어있는 자신의 상태는 생의 과정을 사는 동안은
계속해서 자기변화를 일구어야 할 것이다.

날마다 새롭게 갱신하며 재창조하는 주님의 영적세계안에서
자신의 영적인 변화를 통한 신의 고상한 성품을 점점 닮아가는
지속적인 과정을 통해 날마다 새로와지는 자신이 되기를 소망한다.

성화를 이루는 일에 방해되는 것은
도덕적이고 형식적인 종교행위와 미신적인 요소들에 휩싸여있으며,
그리고 왜곡된 인간적인 신앙인의 모습들이다.
종교인들의 비신앙적인 모습속에서
기독교의 신앙인에 대한 자기회의와 그들의 영적인 퇴보를 극복케하는
새롭게 도전되는 성화의 길을 가련다.

자신의 거룩한 변화의 과정의 사명의 길에서
생명없는 형식적인 종교의 너울들을 벗고,
영성의 알맹이 있는 생명있는 신앙인으로 새롭게 자라갈 것을 생각해본다.

신앙인의 비신앙적인 요소(강신술, 영육분리사상, 변질된 예언및
저급한 영성화에 의한 영매숭배주의,
점괘와 기복만능의 비역사성등)들가운데에서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이기적인 신앙의 변질되고 왜곡된 모습에서
신앙의 맹점을 발견하고,
더 나아가 인간적인 종교관(공적주의, 업적주의, 형식주의등)에서
영적인 불순물들을 극복하고
자신의 건강한 영성화를 추구하여
자기사명의 성화를 이루는 일을 위해
이런 장애되는 요소들을 극복하여야 할 것이다.

자신속에 말씀으로의 구체화의 성취를 이루려고
날마다 성경을 읽고 묵상(깊이 생각, 또 생각하는, 그리고 계속해서 집중적으로 생각하는)하여,
그 말씀의 능력과 영향력안에 거하기를 힘쓴다.
자신에게 새겨진 그 말씀이 내게 가까와
그 주어진 말씀을 통해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그 말씀과 더불어 주시는 거룩함의 은혜를 통해
성스럽게 변화되어가는 자신을 발견할수 있을 것이다.

주님의 성품을 본받으려고, 주님을 묵상하는 중에
그의 흘리신 보혈이 자신의 죄를 깨끗케 하며,
그리고 모든 부정과 불의에서 자신을 구원해주는
죄의 고백을 통해 주님이 주시는 성결의 은총을 받아,
정화된 영성화에 이르려고 한다.

내안에 오신 성령은 날마다 탄식하듯
내영혼이 거룩함의 성품을 닮아가려는 꺼지지 않는 열정을 불러일으킨다.
계속해서 내안에서 타오르는 불꽃같은 성령을 통한
거룩함의 과정은 그의 내주와 인도와 충만으로
자신의 점점 그의 사람으로 변화되어감을 맛볼수 있다.

기도를 통해 자신은 날마다 주님을 배우며,
주님과 사귀며, 주님의 길을 걸어가는 자신이
되어감을 바라며 영적인 땀을 흘리기를 힘쓴다.

그리고 기도를 통해 접하는 영적세계의 은혜안에서
새롭게 형성되는 자신의 영적인 센스의식이나,
영적인 민감한 기질이 그분의 뜻안에서
그의 인도를 받아 그의 길을 좇아 가기를 힘쓴다.
내 뜻로 마옵시고 주님의 뜻을 발견하려는 기도의 노력은
어린아이같은 생각이나 바램에서
점차로 자신의 바램이나 생각이 점점 변화되어,
자신의 뜻이 주님에게 맞추어가는 성장하는 장성인로 변해간다.

무수히 변개되는 자신의 기도제목과
고쳐지는 기도의 바램들이 어느 덧 주님의 뜻을 품는 자로 변화되어
자신의 영성을 강화하며,
자신안에 자라는 그의 거룩함의 성품을 이루어 간다.

귀중한 기도의 파트너나 혹은 영적인 동지들을 만나,
그들의 영성이나 감화력을 배우며,
그들의 삶의 향취를 맡아본다.

그리고 이미 세상에서 사라졌지만,
그들의 영성의 삶이 아직도 우리 주변에 살아있는 고전의 저자들을 만나서
그들의 영성과 신앙을 배운다.

예를 들어, 존 번연의 주님의 사랑의 깨달음의 깊이를 보며,
영적인 순례의 길을 발견하고,
존 뉴톤의 주님의 은혜의 폭넓은 영역을 밟아보며
그들의 신앙의 깊이를 맛보고,
리차드 박스터의 영적인 영혼의식의 탁월함에
자신의 영성의 질을 높이는 계기로 삼는다.

이렇듯 먼저 이 세상에 살아간 믿음의 많은 선진들의 발자취를 더듬고,
그들이 쌓은 영적인 상아탑을 바라보며,
그들이 보여준 신앙의 아름다운 흔적을 좇아
그들과 닮은 꼴로 살려는 의지가운데에
성화하는 믿음의 순결함으로의 승화는 계속 전진되리라.

자신의 거룩한 성품의 개발은 자기의 상한 조각난 모난 성품이라도,
그안에서 주님의 거룩케하심을 바라보며,
그분의 은혜의 역사안에 있는 평생을 통해
자신의 못난 것이라도 귀한 조각품으로 빚어 가시는 창조주의 솜씨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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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의인으로 살아가기

칭의에 대한 묵상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며,
그분안에서 살기로 다짐하는 성도들에게 칭의는
하나님의 자유롭게 베푸시는 은혜로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다.
예수믿은 자신에게 주신 그 선물은 내가 예수안에 있을 때에 시작이 되었다.
고로 죄인이었지만, 이제는 죄의 용서를 받은 의인이 된 죄인으로 살아간다.
자신은 본성으로 죄를 짓지만,
그의 공로의 은혜로 죄가 용서받으며,
그 용서안에 주시는 의인의 칭호의 특혜를 받으며 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통해, 죄인들을 용서하시며,
그 공로를 믿고 따르는 죄인들을 의인으로 여기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죄인이 자신이 비록 본성은 타락한 상태에 있지만,
그리스도의 의의 공로로 의롭게 여기심을 받는 은총을 힘입어,
의인의 반열에 세움을 입었다.

이제는 자신은 의인으로 자신이 누구인가를 생각한다.
자신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는 하나님의 어엿삐 보시는 긍휼하심을 의지하여
자아를 온전한 사람이라 여긴다.
나는 그리스도안에서 새로 태어난 의인이다.
그리스도의 의의 빛을 받은 죄인은
그와 같이 의인으로 빛된 삶을 살아간다.

칭의는 법적인 용어로 재판정에서 쓰는 것으로
법을 어긴 죄인들을 사면하여 의롭다고 여기는 것이다.
자신은 이미 하나님의 법정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대신해서 사형받은 죄인으로 형벌을 받으셨다.
고로 나는 형벌받는 죄인의 신분에서 형벌을 면한 사면받은 사람으로 살아간다.
예수께서 죄인들을 위해 스스로 죄인으로 형벌을 받으시므로
하나님은 그의 공로를 통해 죄인들을 용서하여,
의인으로 여기는 복을 예수믿은 내가 받은 것이다.

인간의 본성이 악하고, 그의 죄성이 그대로 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의롭게 여기는 행위로 아무리 악한자라도,
그가 예수안에 믿음을 견지하면,
혹은 그의 믿음은 연약할 지라도
믿음의 근거를 통해 죄인들을 하나님은 의인으로 여기는 것이다.
자신의 믿음의 효력의 근거는 그분의 칭의의 선언의 약속위에 있다.
그 약속은 자신의 상태와는 상관없이
그 약속을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복에 참여한다.

하나님의 의 선언과 그 칭의의 행위는
절대자 하나님의 법을 통해 이루어 지기 때문에,
한번 의롭게 여김을 받은 죄인들을
결코 그의 의롭게 여겨주심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이렇게 하나님의 의로움을 여김을 받은 이들은
하나님의 복을 받은 이들로,
그들 속에 하나님의 의로움을 심어,
그의 의로움안에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었다.
그분의 성품안에 있는 그분의 거룩하심안에서
사랑, 기쁨, 평안, 인내, 친절, 선, 신실함, 온유, 절제의 열매를 맺어 간다.

하나님의 의롭게 여기심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의의 전달로 죄인들에게 베푼 것으로
하나님의 의의 수준에 도달하게 한다.

칭의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심에 있으며,
또한 의롭다 여김을 받은 사람들을 영광을 주기 위함이다.
칭의는 받은 자들에게 그들의 양심안에 의의 평안을 맛보며,
성화를 이루어가는 근거가 된다.

자신안에 있는 자아의 불안과 상태의 부조화와
신분에 대한 불합리의 모순의 세계는 사라지고,
그분안에 있는 평안과 상태의 조화와
자기 신분에 대한 확신의 세계안에서
자신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자신으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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