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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5/06
    용서에 대해(1)
    목동
  2. 2007/05/06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묵상
    목동
  3. 2007/05/06
    미국인의 고민: 가정과 자녀교육의 문제
    목동

용서에 대해(1)

용서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

사람은 어릴때 태어나면서 많은 주변인들과 관계를 맺으며,
그 인간관계안에서 자신을 키우며, 성장한다.
자신을 형성하는 부분에 인간관계를 통해,
자신의 대인관이나, 가치관이 정립이 되어간다.

어린 시절에 자신을 가누지 못하며
자아에 눈을 뜨지 않을때에 경험하는 것은
자신의 의식세계에서 보다 무의식세계의 심층에 남아,
자신도 모르게 자아형성에 많은 영향을 준다.

그 형성되어지는 자기가 이해하는 인간관계에서
어린 시절에는 자신이 가해자라기 보다는 피해자로
많은 영향을 받으며 자란다.
자신에게 상처를 주거나,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주변인들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다.
그런 기억들은 자신의 자아의 형성에 뿐 아니라,
현재의 자기표현에 있어서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왜곡되고 상처난 인간관계의 기억들에 대해
피해자로서 자신은 가해자들에 대해 일정한 자기대응을 하게 된다.
그런데 과거의 상처에 잡힌 자신은 그 가해자를 용서하기가 쉽지 않다.
사람과 사람과의 용서의 문제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가 성립되는 사회적인 환경에서 발생이 된다.

인간관계에서 서로에게 용서하는 것은
잘못된 인간관계의 상태에서 화해와는 것과는 다르지만,
대체로 용서가 안되면 상처난 인간관계의 화해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상대방에 대한 자신의 용서에는 상대방에 대한
자신의 화해주도적인 입장에서 필수적이나,
자신을 용서하는 것이나 상대방을 용서하는 일에는
반드시 인간관계의 화해가 필수적이지 않다.
이말은 타인에 대해 화해가 이루어질때,
상대방에 대한 용서와는 상관없이 인간관계를 어느 정도 정상화할수 있다는 의미이다
( 이말을 현실에 적용해서 생각해보면,
자신과 원수관계에 있는 상대방에 대해 용서가 안되지만,
부득이 현실적이고 필연적인 인간관계에서 용서를 접어두고,
그와의 화해를 하게 된다).

자신의 인간관계의 처세에 대해 생각해보면,
과거에 대한 부정적인 인간관계의 기억은
현재의 생활에서 부딪치는 인간관계의 처세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
고로 현실의 인간관계를 잘 하려면,
과거에 자신에게 해를 입힌 사람들에 대한 용서를 하지 못하고
자신의 내면에서 자아가 잡고 있는 그무엇
(holding the negative propensity like anger, rage, etc)을 풀어내어 치워 버려야 할 것이다.

구약 성경에 쓰이는 용서의 의미를 가진 “샤락”이라는 단어는
“현재를 방해하는 것, 과거의 것들을 옮겨 놓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이 자신에게 해를 입히고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 그것을 잡고 있으면,
자신이 그것의 영향을 받게 되며,
자신의 정신적인 활동이나 혹은 현재의 대인관계의 처세나 성향에서
좋지 않은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런 극단적인 예도 있다.
어느 나이가 중년이 미국인 주부가 어깨통증과 신경통으로 여러 해를 고생하였다.
그것을 고치려고 약을 먹는다든지
병원에 가서 의사의 처방을 받았지만,
뚜렷한 병명을 알아내지 못하고
그 증세는 점점 더 나빠지게 되어, 고생을 하였다.
그녀는 그문제로 고민을 하게 하다가,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전문 상담인을 찾아가 상담을 하게 되었다.
그 문제에 대해 상담하는 중에
그 여인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깊은 굴곡의 상처난 흔적이 떠올라,
그것을 생각해보니 오래전에 자신에게 해를 입히고 상처를 준,
그 원수같은 사람에 대한 극단의 미움의 감정이
자신의 내면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상담하는 과정에서 그 문제를 끄집어 내어 다루는 중에
그 문제에서 자신이 놓여 나게 되자.
그 통증도 사라지게 되었다.
그것은 용서하지 않는 자신의 내면에 있는 부정적인 감정을 처리하자
문제가 해결된 경우이다. 필자도 그런 비슷한 경험이 있다.

성경신약에는 용서라는 말로 쓰이는 헬라어 “아피에미”라는 말은
“보내는 것,혹은 면제하다.감면하다.”는 의미로 쓰인다.
자신안에서 자신을 잡고 있는 그것을 내어 보내는 것이라 하겠다.
이스라엘나라에는 7년이 안식년이나 49년이 지나 50년 째되는 희년마다
그 나라에서 서로 빚을 진 사람들을 빚을 탕감, 면제해주는 일들이 있다.
그래서 7년마다 혹은 50년마다 상처난 사회적인 상태나 국가적인 차원에서
그런 면제의 은혜를 통해 인간관계를 새롭게하는 일들을 하여
사회를 새롭게하고 민족의 삶을 유쾌하게 한다.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는 보통 부모가 자녀들에게 여러가지 규율을 세워 놓고,
그 규율이나 법칙으로 자녀를 가르치고
혹은 훈련하거나 때로는 매를 대거나 벌을 가하기도 한다.
그런데 자녀들이 만족을 하는 그리고 부모에 대해
좋은 부모관을 갖고 있는 자녀들은 자녀들에게 관용하는 부모일 것이다.

때로는 부모된 필자의 입장에서도 자신의 자녀들에게
자신도 지키지 못하는 높은 수준이나 엄격한 규율을 적용할 때가 많다.
그리고 그 규칙의 위반이나, 잘못된 아이들의 행동에 대해
쉽게 분노하거나 벌로 대하는 경우가 있다.

아이와 부모와의 관계에서 아이가 부모의 정해놓은 규율을 어길 때에
아이들은 부모에게서 용서를 기대한다.
그리고 자녀들은 항시 부모들이 자신들에게
관용하는 부모가 되어주기를 좋아한다.

이런 용서하는 마음이나 관용하는 태도는
부모가 자녀의 입장만 되어 보면 어렵지 않게 자녀들에게
그런 태도로 대할수 있을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시행착오나, 쉽게 오르는 화를 다스리지 못하기도 하지만,
자녀들을 대하는 기본철학에 있어서는
그런 넓은 마음에서 나오는 교육의 정신을 가지면 될 것이다.
멀리 내다보는 부모의 자녀교육의 귀중한 지침이 될수 있다.

원래 인간사회나 대인관계에서 서로 용서해주는 습성은
인간을 지으시고, 정해진 테두리안에서 살도록 되어있는
인간의 현실을 스스로 박차고 나가,
허물을 범하며,죄를 지은 인간에 대한 용서를 하였고,
그 용서를 통해 관계회복을 바라는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용서하시는 것으로
자신의 인간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셨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으며, 받고 있으며,
앞으로 그 용서를 받을 사람들인 사는 사회나
그들의 인간관계에서의 서로 주고받는 용서의 문제는
언제나 빨리 풀면 좋을 성 싶은
아주 중요한 풀어야 할 인간의 숙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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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묵상

사람의 주된 삶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다.
영광을 돌리는 일은 두가지로 생각해보는데,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것이며,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에는 그의 속성으로서의 영광의 측면이 있고,
신성으로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다.
그가 영광스럽게 되지 않으면 그는 하나님이 아닌 것이다.

대통령이나 왕은 그들이 법적인 기간동안에 대통령으로서 영광이 있으나,
하나님은 그 자신이 영광의 존재의 본질이다.
하나님은 그의 영광을 다른 존재에게 주지 않으며,
영광이 하나님의 속성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하게 돌려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즉 하나님에 의해 그의 자녀로 택함을 받은
즉 하나님을 섬기는 이들인 사람들은 자신들의 몸과 영으로 하나님을 높여 드린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는 4가지 측면이 있다
(appreciation, adoration, affection, and subjection)

먼저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인식적인 태도에서
하나님을 시인하고 인간의 숭고한 생각안에서 하나님을 탁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두번째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그분을 경배하며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예배에는 두요소를 생각해볼수 있다.
하나님의 인격에 대한 존경이며, 그리고 그분을 통치자(왕)로 경배하는 것이다.

세번째는 하나님께 대한 감성적인 표현으로 온 마음을 다해,
그리고 온전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거룩한 사랑으로 대한다.
그럴때에 인간은 가장 고귀한 감정의 소유자가 된다.
마지막으로는 하나님께 복종하므로 그분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헌신을 통해 그분을 영광스럽게 한느 것이다.

그러면 왜 인간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가?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존재를 있게하신 분이며,
그를 영화롭게하는 목적이 인간의 존재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물이 그분의 영광을 위해 창조하였기 때문에
그분은 모든 만물가운데에서 영광을 받는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은 그분의 고유한 가치이며
하나님의 탁월함의 존재의 양식이다.
또한 창조물들은 하나님을 높이기 위하여 지음을 받았으며,
당연히 그분에게 돌아가야 할 영광을 드리는 것이
그의 피조물로서 마땅한 도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을 영광을 돌릴수 있는가?
1. 사람이 순수하게 자신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에 있을때에
그분을 영화롭게 할수 있다
(여기 그 목적하는 바의 3가지우리의 인식을 가질수 있다.
1. 자신의 삶을 통해 무엇보다 우선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을 좋아하는 인식.
2 . 비록 고난이 있어도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에 만족하는 인식.
3. 자신에게 가지고 있는 자질이나, 재능을 통해 하나님을 영광스럽게하려는 의지의 인식)

2. 사람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므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을 영광스럽게 한다.
3. 사람은 자신이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린다.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수 있다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회복에 있어서 신뢰하는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4. 하나님의 영광을 흠모하므로써 그분을 영광스럽게 한다.
5. 사람이 신실해지므로 즉 인생에서 선하고 좋은 열매를 맺으면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한다.
6.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만족해 하는 것으로 그분을 영광스럽게 한다.
7.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안에서 활동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8.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으로 그분을 영광스럽게 한다.
9. 인생을 기쁨으로 살아가는 것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10. 하나님의 진리에 굳게 서서 살아가는 것을 통해 그분에게 영광을 돌려 드린다.
11. 하나님을 찬양하므로 그분을 영화롭게 한다.
12.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열정을 갖고 살므로 그분을 영화롭게 한다.
13. 우리의 일상의 모든 일(시민으로서, 혹은 사람으로서 하는 일들)에서
하나님에게 우리의 눈을 고정시켜, 그분을 통해 활동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14.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에게 인도하므로 (전도) 그분을 영화롭게한다.
15. 하나님을 위해, 그리고 복음을 위해 고난받는 일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한다.
16.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통해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17. 우리의 거룩한 생활 (구별된 태도) 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Thomas Watson의 “A Body of Divinity”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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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의 고민: 가정과 자녀교육의 문제

이혼이라는 가정의 문제는
미국인들사이에서는 50년대 이후 부터
베이비부머시대의 사람들이 자라면서
그들의 부모세대가 이혼을 하기 시작하는 가정으로 나타난다.
그전까지 즉 미국은 2차세계대전을 치루기전까지
건전한 가정이라는 국가적인 축복의 자산을 갖고서
세계를 리더하는 국가로서 선진국가혹은
남을 도와주기 좋아하는 기독교국가의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후 공립학교에서의 기독교교육의 장의 상실,
즉 성경을 가르치지 못하게 하고 기도하지 못하게 하여,
공립학교 교육은 악화일로로 교육을 받는 자녀들이나
교육을 하는 부모세대는 함께 종교적이며 윤리적인 혼란을 거듭하게 된다.
그 배후에는 미국의 실용주의 교육의 영향을
준 죤 듀우이같은 이들의 무신론적인 교육철학의 영향으로
그러한 결과가 나오게 된것이다.

공립학교의 교육적인 도덕(기독교교육의 훌륭한 전통)성이 무너지며,
교육의 세속화는 사회적인 가치기준의 역활에서
기독교의 가치나 윤리범주를 벗어나,
그 세대에서 교육을 받은 자녀들은
전세대의 무신론적 교육철학의 영향으로
자연스레 그 세대에서 이혼이 사회적인 이슈로 등장하여
보통 가정에서 이혼이라는
가족문제의 현상이 폭넓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그 철학은 현재의 미국의 개인주의적인
철학적인 풍조의 영향과
맛물려, 현재의 탈근대적인 가치(절대주의 가치기준의 상실)로
발전하여 왔다.
그런 교육적 결과의 영향으로 사람들의 가치기준에 혼선이나타나며,

그 여파로 건전한 많은 미국인의 가족의 전통적인 가치들을 잃게 되며,
오히려 가정의 이혼하는 현상은 보통가정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이혼은 미국인 가정의 보통현상의 하나로
모든 가족관계의 표시란이나,
개인의 가정란에는
이혼을 통한 복잡한 부모와 자녀의 비정상적이고 역기능적인 관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포괄적인 사회적인 현상이 되었다.

그 현상은 결혼하는 가정의 반이 이혼에 이르며,
이혼하는 부모세대는 이혼하는 자녀세대로
역기능적이고 부도덕한 가정의 유산을 물려주고 있다.
이제 이혼하는 가정의 현상은 사회적인 정착단계를 거쳐
광범위하게 미국사회의 인간관계의 비윤리적인 상태로 빠뜨려,
그런 상태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은
건전치 못한 복잡한 구조의 가정안에서 자라난다.

이혼한 아버지가 이혼한 어머니와 사는 경우에
양쪽의 가정의 자녀들이 서로 형제간으로 연결되어
서로 얽히는 가운데에 복잡한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된다.
스텝파더(의붓아버지)는 부인의 전남편의 자녀들을 돌보며,
그 자녀들은 전혀 생소한
엄마의 사람인 새로운 법적인 아버지를 두게 된다.
정상적인 부모와의 관계안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부모의 이혼과 더불어 싱글어머니나
혹은 부모가 아닌 제삼자(조부모의 슬하에서)에 의해
자라나게 된다.

자녀들과 스텝파더의 사이의 관계는 그렇지 않아도,
힘든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를 더 힘들고 복잡한 상황으로 이끌어 간다.
부모와 자식간에 법적인 관계안에서의 가족관계가 성립이 된다.
자연적이고 혈통적인 관계가 아니라,
법적으로 단지 하나건너 엄마를 사이에 두고,
서로의 관계는 소원하기만 하다.

청소년기의 아이들의 부모, 즉 결혼한지
보통 10년을 전후한 부부가 서로 이혼하는 경우가 많으며,
그런 이혼은 아이들의 상태를 아주 힘든 상태를 만든다.
그 나이에 벌써 남녀관계의 복잡한 인간관계를 배우고,
자녀들을 보호해야 할 가족이라는 테두리가 무너지며,
고유한 가족이라는 전통적인 관계가 무너지며,
아이들은 허물어진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복잡하고 힘든 사회라는 곳으로 방치되어,
아이들은 방황하면서, 반항아로 사회에 대해 울분
혹은 스트레스에 의한 불량적인 자녀로 만들어지기가 쉬워진다.

이제 미국사회에 이혼은 악순환의 고리를 갖고 있다.
부부관계가 극단적인 경우를 넘어서는 것으로
서로의 인간관계의 끝을 보았기에 이혼의 가정은
사회적인 문제의 기본단위로 자리잡아,
자녀의 문제, 혹은 사회적인 범죄의 기본적인 제공처로
역기능적인 가정이라는 것을 갖게 된다.

앞으로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인 가정의 가치가 무너지면
건전한 방향의 사회나 국가 건설은 지장을 받기 마련이며,
그것이 또한 사회나 국가 발전에 큰 장애요인으로
전반적인 사회의 이탈문화적인
(사회발전을 역행시키는) 현상이 될 것이다.

(이글은 필자의 경험에서 얻은 결론에 의해 쓴 사견임을 밝히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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