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2007/04

24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04/30
    사람을 죽게하는 것과 살게하는 것
    목동
  2. 2007/04/28
    영적성장에 대한 도전
    목동
  3. 2007/04/27
    우울증(4)
    목동
  4. 2007/04/25
    박스터의 목양신학(5)
    목동
  5. 2007/04/24
    유익한 사람과 쓸모없는 물건
    목동
  6. 2007/04/23
    박스터의 목양신학(4)
    목동
  7. 2007/04/23
    하나님의 계시와 독생자의 영광
    목동
  8. 2007/04/22
    박스터의 목양신학(3)
    목동
  9. 2007/04/21
    박스터의 목양신학(1)
    목동
  10. 2007/04/21
    박스터의 목양신학(2)
    목동

사람을 죽게하는 것과 살게하는 것

에스겔18:26-32

26. 만일 의로운 자가 그 의를 떠나 죄를 범하고 죽으면 그는 자기가 범한 죄때문에 죽는 것이며
27. 만일 악한 자가 그 악에서 떠나 법을 지키고 옳은 일을 행하면
그는 자기 생명을 구원하게 될 것이다.
28. 그는 자기가 행한 일을 깨닫고 그 죄에서 돌이켰으므로 분명히 살고 죽지 않을 것이다.
29. 그런데 너희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가 공정하지 못하다’ 하고 말한다.
이스라엘백성들아, 어째서 내가 공정하지 않느냐? 오히려 너희가 공정하지 못한 것이 아니냐?
30. “나 주 여호와가 말한다. 이스라엘백성들아, 너희가 행한대로
내가 너희 각 사람을 심판하겠다. 너희는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모든 죄에서 떠나라.
그러면 너희가 죄때문에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31. 너희는 지금까지 범한 모든 죄를 버리고 마음과 심령을 새롭게 하라. 이스라엘백성들아,
너희가 어째서 죽으려고 하느냐?
32. 나 여호와가 말한다. 나는 그 누구도 죽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너희는 회개하고 살아라.

유다백성들은 계속하여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그릇된 길에서 자신들의 살길을 찾으려고 안간 힘을 쓰고 있다.
사람이 망해가는 법을 좇아, 살길을 찾는 길은 어리석은 현상이다.
인생이 성공하는 소원이 가득히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하는 방법이나, 처세를 가지고 살아가면,
성공보다는 실패하는 예가 더 많이 자신의 주변에서 나타난다.

이스라엘이나 유다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선민으로서,
그들은 자신들의 사명(하나님에 대한 유일신 신앙을 지키며,
주변인들에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내는 일을 할 사명)이 있었다.
그것은 자신들의 신앙에 근거한 옳은 삶을 통해서 였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유일신신앙의 순결에서
이방나라들의 풍습이나 삶의 흔적을 좇아가서,
어리석은 우상숭배의 죄에 빠지게 되었다.

하나님은 항상 현재를 중시하고,
현재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 가를 살피신다.
사람의 삶도 현재가 중요하다.
과거에 어떻게 살았든 그것은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이다.

자신이 과거에 아무리 선한 일을 많이 하였다 하더라도
지금자신이 하는일이 옳지 않다면,
그 일이 자신을 더럽히고, 그일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자신이 지금 하는 일이 중요하며,
자신이 지금 만나는 사람이 자신이 결코 소홀히 대할수 없는 사람이며,
현재 자신의 모습이 어떠 한지를 살피는 일이 필요하다.
사람은 과거에 살지를 않는다. 다만 현재 주어진 시간안에 살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 잘한 사람은 그 잘한 일에 도취되어
현재에게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등한히 하기 쉽다.

악한 자가 과거에 지은 죄로 괴로워 하겠지만,
그러나 과거에 범한 허물이나 죄가 더이상 영향을 주지 않도록,
현재에 개관천선하여, 오늘 자신에게 주어진 새로운 기회를 선용하여
바르게 살기로 다짐하고 현재를 바르게 살아간다면,
그에게는 자신의 생명을 구원할 기회를 얻는 것이다.
과거에 받은 상처나, 지나친 과거지향주의는
현재를 살아가는 자신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날마다 자신을 새롭게 하는 일은 자신을 건강하게 살아가는 비결이다.
악인이 자신이 저지른 과거의 행적에 대해,
후회하고 슬퍼만하지 말고,
현재에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이나 현재를 올바르게 살려고 하면,
그는 자신의 일을 잘할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사람이 자신의 삶에 대해 하늘에 대해 불평하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다.
사람이 각자가 가지고 태어난 분복이 있다.
어느 사람에게는 부를 받아, 부한 가운데에서 살고,
어느 경우는 건강하게 사는 경우도 있으며,
어느 경우는 불행하게 사는 경우도 있다.
어느 사람은 행복한 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다.
처음에는 하늘에서 주어진 것을 살다가,
점점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결국에는 자신이 만들어가는 생애를 살아간다.

공정하게 모두에게 골고루 혜택을 받고 살아가도록 한
하나님은 언제나 사람들 각자에게 공정한 심판을 행하신다.
사람이 억울한 일을 만났을때에 자신의 처지나
문제해결에 대한 하소연이 들어지지 않을 때에,
그사회에 대해서, 여러 사람들에 대해서, 부당하다고 생각하기 쉬워진다.

이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시간을
살아가는 한에서는 공정한 인생을 살아간다.
인생의 후반에 가서는 자신이 심은 것을 거두는 생을 살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들을 공정하게 판단하며,
그의 공정한 저울로 사람들을 심판하신다.
하나님의 판단은 항시 현세와 내세의 삶의 판단의 저울로 사람들을 평가하신다.

하나님의 공정성의 판단에 대한 극단적인 경우를 예로 든다면,
현세에서 의로왔지만 힘들고 고통스럽게 살았던 인생들은
내세에 마련한 영생과 영광의 복으로 살게 하신다.
그리고 현세에서 악하게 살며 사람들을 괴롭혔지만
그러나 편안하게 살았던 인생들은 나름대로
그들이 당하는 고통의 현장(형벌)을 통해 평가하신다.

사람은 자신이 행한대로 자신이 심은 것을
거두도록 되어있는 원리안에서 살아간다.
자연의 원칙안에 있는 세상은 무엇이든지 심은 것을 거두게 되어 있다.
하나님은 이세상을 이 원칙위에 다스리신다.
그가 사람들의 행위에 대해 반드시 그들이 행한대로 갚으시고,
그들에게 자신들이 행한 행위에 대한 합당한 결과를 얻게 한다.

개과천선이라는 말은 지난 일들의 잘못된 인생의 방향을 바로잡기 위해
지난날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전혀 새로운 방향의 삶을 살기로 다짐하는 것이다.

항상 현재의 기회를 바로 사용하려면 구태의연한 태도를 버리려는 결단이 필요하다.
항구에 정박에 있는 배가 목적지를 향해 항해를 하려면,
정박해있는 부두에 붙들어 매둔 밧줄(자신을 댕기는 과거의 끈)을 끈고
항해에 나서야 할 것이다.

죄에서 벗어나는 길은 두가지로 생각해볼수 있다.
하나는 지은 죄에 대한 청산하려는 결단의 태도와
또하나는 자신안에 죄를 지으려는 성향들을 고치는 태도이다.
이것은 사람의 회개를 통해서 가능하다.
회개는 죄의 결과에 대한 준엄한 자신의 평가에 따르는 통한의 태도이며,
그리고 자신의 그릇된 죄질의 성향의 방향전환의 결단을 포함한다.

인생이 죄에 대해서 왜 생각해야 할 것인가?
죄는 인간의 모든 생활에 전반적으로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교통법규를 위반한 사람은 그 위반한 행위에 대한 댓가를 치른다.
그리고 법을 어긴 사람들은 그 범법한 행위에 대한 법적인 구속을 받는다.
그것을 벗기전에는 모든 일에서 자유할수 가 없다.
그 위반이 자신의 활동하는 몸이나 생활을 영향을 주는 구속을 주기 때문이다.
(경범과 중범의 차이는 있지만, 법위반에 대한 것은 자신을 자유롭지 못하게 한다)

인간의 죄의 시작은 인류의 시조인
처음인간(아담, 하와)의 범죄에서 부터 시작이 되었다.
그들은 인간의 대표적인 사람들로
그들의 허물과 범죄가 그들의 후손인 모든 인간들 속에 영향을 주어,
그들과 같은 성향의 죄의 성향을 갖고 태어난다.
그들의 피가 온인류의 몸안에 흐르고 있는
죄를 짓게하는유전인자와 악한 성향등으로 나타난다.

고로 인간의 죄는 먼저는 원죄이다.
그리고 그들속에 있는 그 악한성향이 나타나
자신이 짓는 자범죄와 그리고 그에 따르는 모든 종류의 죄악이다.

인간의 법은 행위와 영향력에 대한 죄를 묻고,
드러난 죄의 결과를 판시하여, 죄에 대한 형벌의 대가를 치른다.
하나님의 법은 인간의 외형의 죄뿐 아니라,
내면의 죄와 타고난 인류의 원죄와
그죄의 영향력까지 사람을 살피시고 있는 그의 심판의 잣대가 있다.
고로 사람이 진정으로 자신이 죄에 대해 자유로우려면,
자신을 만드시고 존재케하신 하나님앞에 가서 해결을 받아야 할 것이다.

사실 죄의 시작이나 근본은 외형적인 죄의 행위에 있지않고,
죄를 짓게하는 내면의 태도나 성향이 더 문제인 것이다.
어느 사람이 남의 물건을 훔치는 기질이 있다면,
언제가는 타인의 물건을 도둑질할 것이다.
또한 마음속에 품고 있는 자신의 성향이 거짓되고, 오만하고,
악한 것으로 가득차 있다면,
언제가는 그런 것들이 외부로, 혹은 자신의 주변로 분출되어 나타날 것이다.
고로 인간을 고치려면, 즉 사람이 죄의 문제에서 자유로와 지려면
자신의 내면의 상태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먼저는 사람의 마음이다.
그곳은 인간의 의지와 감성과 이성이 함께 어울러져,
자신이 어느 성향의 사람의 자아이든 그 자신의 자아의 지배를 받는 곳이다.
그 마음안에 두 주인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
그 두주인은 인간의 옛자아와 새로운 자아이다.

먼저는 옛자아(타락한 이후에 갖고 태어난 인간의 죄의 성향과
그영향력의 지배를 받는 자아성)의 세력을 통해 자신의 마음이 지배를 받는다.
또한 새로운 자아(주 예수를 초청함으로 즉그가 영으로 마음의 세계에 들어가심으로
그 소우주의 혼돈과 무질서를 새롭게 변화시켜,
진정한 인간의 온전성을 세워가는 자아)이다.

마음의 끝(가장자리혹은 연결고리)은 인간내면의 두방향성에 의해 연결이 되어 있다.
그 방향성이란 육으로 가는 길과 영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다.
육신으로 가는 길에는 인간의 몸에서 요구하는 육의 본성과
그 본성의 욕구충족의 추구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는 세계가 있다.
그 세계에서는 본능과 인간의 타락한 본성의 욕구충족이 지배하는 세계로,
자주 혼돈과 고뇌에 사람을 빠지게 한다.
영으로 가는 길에는 인간의 고귀한 성품이 맞닿는 곳으로
그 끝에는 하나님의 영이 인간의 영과 연결되는 연결고리의 체계가 있어,
영적세계로 나가는 길이다.

그 영적세계에는 하나님의 인간속에 심은 인간성(종교성)이
비록 타락으로 변질되었지만,
인간속에 있는 하나님의 성품(영성)과 자질(하나님을 닮아가는 기질)이 있어,
그것을 통해 하나님과 연결이 되며,
관계가 성립이 되고, 교제가 이루어 진다.
그리고 영적인 세계의 질서를 통해,
내면과 마음의 혼돈과 공허를 새롭게 재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영의 도움으로 사람의 상태는
점점 질서와 창조의 채움으로 이어지게 되어 건강한 자아를 형성하며,
건전한 자신의 소우주를 만들어 간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에 따르는 댓가를 치루어야 한다.
그 죄에 따르는 결과는 인간에게 죽음의 현실이 다가온다는 것이다.
그 죽음에 대한 인간의 불안과 절망은
모든 사람들 속에 있는 죽음에 이르는 병과 같이 사람들을 괴롭힌다.
그번민과 고통속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었던
그리고 짓는 죄의 결과로 사람들은 죽어가는 것이다.

그렇듯 인간의 죄는 인간을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타락한 인간세계의 필연의 악이다.
그 필연의 악을 제거하기 위해,
죄악로부터 자유를 얻는 길을 발견하는 일이 중요하다.
죄에 대한 형벌을 벗어나는 길은 그 죄에 대한 형벌의 채무를 이행하면 될 것이다.

인간이 당해야 할 죄의 형벌은 이미 인간의 대표로 나타나신 인간예수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가 인간의 몸을 입고 이땅에서 사람으로 살았던
오직 한가지 가장 중요한 목적은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었다.
그가 해결하신 인간의 죄는 그가 모든 인간을 대신하여
인간들이 짓는 죄의 성향이나 모든 행위에 대해
형벌의 댓가를 치르심으로 해결될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셨다.

죄있는 사람들은 그앞에 나아가 그의 형벌치름을 의존하여,
죄와 그 죄에 대한 형벌의 영향으로 부터 자유할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죄에 대한 회개를 통해
자신의 죄짓는 성향이나 악으로 빠지기 쉬운 혼돈된 내면을 새롭게 할수 있다.

살기 위해 살길을 찾아나서는 것은 당연한 사람사는 도리이다.
누구도 인간의 죄와 그에 따르는 죽음의 형벌에서 자유로울수 없다.
오직 그 형벌을 벗어나는 길은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나는 길 밖에 없다.
그 길은 자신을 날마다 자신을 새롭게 하는 회개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영적성장에 대한 도전

베드로후서 1:3-8

3. 그리스도께서는 신적인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영광과 선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분을 우리가 알게 될 때 얻어지는 것입니다.
4. 이것으로 그리스도는 아주 소중하고 중대한 약속을 우리에게 주셨으며
이 약속을 통해 여러분이 세상의 파괴적인 정욕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도록 하셨습니다.
5. 그러므로 여러분은 최선을 다하여 여러분의 믿음에 선을, 선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7. 경건을, 경건에 형제우애를, 형제우애에 사랑을 더하십시오.
8. 이런 것들은 넉넉히 갖춘다면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더욱 풍부해 질것입니다.
9. 그러나 이런 것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앞 못보는 소경이며 자기의
옛 죄가 깨끗해진 것을 잊어버린 사람입니다.

거룩한 성도들(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무리)에게는 하나의 주어진 사명이 있다.
그것은 거듭나는 순간부터 계속해서 주님앞에 설때까지
자신이 영적성장을 하여야 하는 것이다.

인간의 생명이 살아있는 다는 것은 성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이들은 계속하여 자라고 성장한다.
어른은 성장이 멈춘 상태라고 할수 있으나,
육체적인 성장은 멈추었어도,
정신적인 성장이나 영적인 성장은 계속적으로 자라가야 한다.

성장은 인간생활의 자연적인 활동이다.
성장발육이 되지 않는 것은 성장저해 증후군에 빠지며 성장하지 않고 나이만 먹어간다.
아이어른은 성장하지 않는 사람을 가리킨다.
나이는 어른인데 자라지를 않아 아이의 상태의 몸을 가지고 있다.

이렇듯 성장저해증후군은 비단 육체의 일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나 영적인 현상에도 같은 현상들이 일어난다.
영적인 성장에도 제대로 성장하지 않으면, 영적저능아의 증후군에 시달린다.
영적인 아이의 상태에서 누군가의 돌봄을 받아야 하는
늘 기대어 살아가는 영적인 지체아들이 있다.
특히, 영적인 성장을 이루어가는 신앙생활에는
영적인 지체아의 증후군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있다.

아이들이 I.Q, E.Q, S.Q. 등 인간의 자체능력의 기능의 지수들이
지속적으로 발전되어야 비로소 어른으로서 성숙한 사회적인 존재로 생활 할수 있다.
아이큐는 지능적인 활동으로 이성적인 기능이 자라게 된다.
이성적인 차원에서 생각하는 사고능력이나, 문제해결의 능력을 개발한다.

이큐는 인간의 감성의 차원에서 인간의 마음을 다스리는 능력을 개발하며,
인간과 인간사이에 전자파와 같이 흐르는 감정적인 흐름을 파악하여,
그 감성의 영향력을 배워가는 능력이다.
에스큐는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를 파악하여,
사람들과의 교제나, 사회생활에 적응해가는 능력을 개발한다.

사실 가장 인간에게 중요한 능력은 Spirituality Quotient (S.Q.: 영성지수)이다.
그것은 영적인 기능의 자질로, 영적인 센스나, 영감있는 능력을 개발하며,
영적인 능력도 인간의 영적인 세계의 감지하는 능력이나,
영적인 세계와 교류하며, 현상세계에 영향을 주는
영적인 존재와의 접촉이나 교제하는 능력의 자질을 개발한다.
이 자질은 그 방향성이 중요하다(영적인 세계로 나아가는 데는 안내자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적세계가 인간의 경험과 이성의 판단의 경지를 넘어가는
미지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주 예수의 부르심에 의해 택함을 입은 그에게 속한 사람들은
그와 함께 신의 능력안에 참여하는 권한과 능력을 부여받는다.
크리스챤들은 그들의 성품이 인간의 성품에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권리를
예수, 신의 아들, 즉 하나님을 통해 얻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가져온 인간의
신의 자녀로 변화되어 가는 부름을 받고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생명이며, 그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살리는
생명을(운명적인 죽음의 세계에서 부활하는 생명을 얻는,
불안의 고통의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는, 좌절과 절망의 상태에서 회복시켜주는) 가지고 있다.
그안에서 사람들은 생명을 발견하고 얻고,
생명이 주는 혜택을 누리며 살아간다.

경건은 하나님을 닮아가는 인간의 가장 최고의 고상한 성품이다.
경건에의 순례는 하나님의 거룩의 속성을 따라,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인간이 도달할수 있는 신의 경지에 나가는 길의 과정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닮아가며,
그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은 잃었던 인간의 온전한
것들(이상적이고 성장하는 자아에서 오는 믿음, 소망, 사랑등 )을 회복하는
자기 성품 개선내지는 자기 완성 개발의 지속적인 일생의 과정이다.

이렇게 사람이 자신을 개선하고 개발하는 것은
자기가 만들어져 가는 것이 결국 자신의 자신됨의 결과를 낳는다.
그 결과는 인생의 일생의 과정의 결과로,
자기가 가야할 영원한 미래의 상태나 위치를 결졍해준다.
그것은 인간에게 더없는 영광이며,
자신이 도달해가는 미래에 갖추어야 하는 진정한 선한 자신의 모습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하늘나라의 약속을 주셨다.
그것은 세상사람들이 이세상에 썩어질 육신의 것에서
썩지 아니할 하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된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하늘의 권한을 허락하시며,
잃어버힌 사람들의 명예와 영광을 회복시키신다.
사람들은 자신이 원죄의 후손으로 죄와 죽음의 그늘에서
살아가도록 되어있는 운명에서 벗어날길이 없다.
아무리 도의 철학이나 지식의 방법으로 혹은 도덕이나 수양의 능력으로
그러한 인간의 굴레(죄와 죽음의 속박)를 벗어나게 할수는 없다.

다만 그안에서 사람들은 자신을 점점 죽이며,
파괴케하는 세상의 영에 의해,
절망스런 상태에서 연명하며 살아가는 길밖에 없다.
그런 인생은 소망도 없고, 가능성도 없는 자신안에 갇혀
절망과 탄식의 자리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그런 인간의 굴레들을 벗을 길을 마련하여 놓으셨다.

그의 십자가의 죽음은 인생들의 속박을 풀어내어,
자유롭게 하늘에의 영광에 동참하는 길을 열어놓으셨다
사람들은 그를 통하여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부여받아,
그안에 있는 누구나 다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여, 하늘의 영광에 오르게 된다.

이길은 하나님의 생명을 품고 그것을 가꾸고 성장시키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살아있는 생명체는 자라고 성장하듯,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사람들은 그들의 영적인 생명이 자라간다.
성장의 엔진을 달고, 지속적으로 자기변화와
자기 성장을 그분(예수)의 도달한 상태에 까지 목표를 향하여 부단히 진행한다.

신앙생활은 자신의 영혼의 유익을 위해,
그리고 자신의 인생의 생명의 날의 풍성을 위해 열심히 주어진 일들을 하는 것이다.
그 분안에 있는 사람들은 사는 것의 목적이 분명하고,
자신이 해야 할일에 대한 자기사명이 투철하여,
그들은 무엇이든지, 그들 자신을 통하여,
자신들을 영광스러운 자리로 초정하여
그의 아들 그리스도와 같이 영광스럽게
만들어주시는 하나님이 영화롭게 되어지는 것을 원한다.

고로 그들 자신이 할일의 목표가 구체적으로 분명하고,
그 구체적인 목표를 이루려는 노력을 부단히 하게 된다.
하나님의 길은 차선이 아니라, 항상 최선의 길을 좋아하신다.
하나님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최선의 것을 이루어 가신다.
그러하신 주님의 부름을 받은 우리도 당연히 최선을 향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믿음은 잃어버린 인생의 모든 것들을 회복시켜주고,
더 나아가 하나님안에 있는 인생들을 영화롭게 하는 하나님과
생명의 관계를 맺고, 그를 따르고 신뢰하게하는 사람이 소유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그 믿음은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하여, 자신을 살리고,
영화롭게 하실 하나님과의 연결고리역활을 하기 때문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로 자신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로 이루어졌으며,
그분이 약속하신 것들을(인간의 회복과 영광의 자리,
그리고 영생과 축복의 권한등) 바라보며,
그것들을 우리 손안에 넣을 수 있는 능력을 얻는다.

믿음은 사람들에게 인생의 모든 일들과 경험들을 합력하여,
가장 좋은 상태의 선을 이루어 내는 것을 바라본다.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실때에,그것을 기대하시며,
각 사람을 인도하신다. 우리가 도달해야 할 선은
원래 하나님이 사람들을 지으셨을때에 보시기에 좋았던
온전하고 완벽한 상태의 아름다움을 의미한다.
사람으로서 가장 이상적인 상태의 모습은 우리가 도달해야 할 선의 상태이다.

그리고 그 목표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그러한 이상적인 선을 바라보고,
자기가 하는 일에 아름다운 선을 이루어가려고 한다.
선을 이루어가는 길에는 사람들이 생각하고
궁구하는 여러가지 길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서 나온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을 가게 된다.
그 길을 바로 가려면, 정확한 안내를 받아야 하며,
사람들이 가지고 있어야 할 올바른 지식이 요구된다.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다.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주신 영생의 생활은 그를 알고
경험하는 지식의 성장에 따라 그분이 부여하신 생명의 풍성을 얻을 수 있다.
그 지식은 계시로 알려진 내용을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며,
그 계시의 말씀의 의미와 능력를 깨닫고 체험케 하도록 사람들에게
그 지식의 빛으로 조명해주시는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은 다 유용한 것이 아니다.
개중에는 우리를 그릇되게 인도하는 거짓된 지식도 있으며,
사람들을 허왕되게 하는 어리석은 지식도 있으며,
지식은 지식을 추구하는 방향성의 안내를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지식은 사람으로 하여금 교만하게 하며, 어리석게도 하기 때문이다.

지식을 따라 행하는 일에는 질서가 있으며,
조절된 태도에 의해 좌우되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원자폭탄의 힘을 만들고 생산하는 과학적지식은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의 종교성에의 인도와 안내를 받아야
파괴적이지 않고 유용하게 쓰여질수 있다.

영적생활에도 무모한 영적인 세계의 지식추구는
때로는 위험할수 도 있다 (이상한 영적인 세계를 추구하는 경우나
사람의 생명에 도움이 안되고 해로움만을 주는 헛된 영적인 정보).
지식을 얻고 지혜로와 지려고 하는 인간의 시도는
원래 선악과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절제는 질서를 따라 하는 습성을 갖고 있다.
지식추구에는 절제를 해야 할 것이다.
끊임없이 공부하는 것은 사람을 피곤하게 한다고 한다.

우리들 주변은 요즘 많은 지식이나 정보의 홍수에서 지내고 있다.
우리가 접한 지식들은 우리의 두뇌에 각인도 되기전에
새로운 지식에 의해 우리의 두뇌의 수천억의 두뇌세포에 저장되곤한다.
지식도 정제된 그리고 절제된 지식이 필요하다.
무분별한 지식추구는 사람을 혼란케하고, 피곤하게 한다.
지식이 다 좋은 아닌 것은 우리 모두가 안다.
사람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고, 더 나아가 자신을 더럽게 하는 지식도 있다.

자동차를 운전하다보면, 자주 인내하기 힘든 일을 만난다.
함부로 운전하다든지, 새치기를 하는 경우, 혹은 신호위반,
그리고 다른 차량이 진로를 방해했을때에
바로 우리의 성질을 표현하여, 상대방에게 불쾌한 감정을 표하곤 한다.
그런 경우에 절제와 인내가 필요할 때가 많다.

사람을 절제하게 하는 훈련을 받은 사람은
인내를 가져야 할 일에도 잘 적응하게 한다.
인내는 절제된 사람을 통해, 모든 일에 인내하는 것이 쉬울 것이다.
사람을 대하는 일이나, 일을 추진하는 것에나, 공부를 하거나, 사업을 하거나,
사람이 자신을 통해 이루려는 업적은
인내를 갖지 않고서는 성취할수 없다.

꾸준히 착실하게 무슨일이든 하는 사람은 모든 일에 자신을 가질수 있다 .
왜냐하면 힘들고 참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신의 의지의 활용을 통해 인내를 갖고서 일을 대하기 때문이다.
인내할수 있는 사람은 모든 것을 가질수 있으며,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은 인생안에서 인내의 법을 배우고,
모든 일에 그 열매를 거둘수 있다.

하나님을 닮아가는 경건의 생활에는 믿음이 있어야 하고,
그리고 믿음을 이끌어주는 지식도 가져야 하며,
선을 이루고저 하는 향한 열정도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을 조절할줄하는 절제와 인내하며,
일을 성취할수 있을때에 참 경건에 이를수 있다.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려면
신앙인의 성품속에는 이런 여러요소들이 필요하다.

하나님을 닮아가는 사람이 사람다와 질수 있으며,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대할때에,
사람의 생명과 인격의 존귀함을 알고
한 사람 한사람의 가치성을 알고, 사람들을 정중히 대하게 된다.
왜냐하면 사람들을 누구나
자신안에 하나님을 닮은 하나님의 형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닮아가는 인간의 속성은
가장 인간을 고상하게 하며, 가치있고 품위있게 한다.

이런 영적인 성품들을 사람들 속에 충분히 개발하면,
그 성품들은 더 자신을 성장하고 성숙시키는 길로 나가게 한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다 자기 이상이 있으며, 자기 목표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신앙인의 믿음의 주이며, 도달해야 할 목표이다.
그는 온 세상인들의 흠모의 대상이다.

요즘은 세상에서는 신문지상을 통해 접하는 뉴스를 통해,
윤리나 도덕의 능력에 대해 의문을 갖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며,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옳은 사람이 되라는 도덕군자들의 철학이나
인생의 가르침의 지식에 대한 능력을 상실해 가는 세태에 살고 있다.

사람이 사람이 되신 예수를 항상 생각하고 바라보면,
그는 자기 자신을 참 인간됨을 만들어 갈수 있으며,
그 예수안에 있는 하나님의 본질의 참된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세상에 많은 지식중에 자신을 살리고 풍성하게 하는 지식은
예수를 알아가는 지식이다.
예수는 만물의 주인이며, 만물의 중심이며, 모든 인생들의 중심에 존재하신다.
그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우리에게 생명을 가져오며,
우리의 가치를 높이며, 나중에는
결국 우리 자신들을 영광스럽게 할 놀라운 정보인 것이다.

인생의 방향성을(빛으로 나아갈것인지, 아니면,
어둠안에 그대로 주저 앉아 있을 것인지 아니면
회색지대에 머물러 살고 싶은지, 즉 대략 3가지 갈랫길이
인생들 앞에 놓여있는 것같다) 아직 설정하지 못하고,
인생의 시작과 끝과 과정을 모르고,
돌고 돌아가는 지구처럼, 계속하여 방향도 없도 진행도 없이 살아간다면,
아직 그들은 자신의 위치와 방향성 설정에 고심을 해야 할 것 같다.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길잡이가 필요하다.
그들이 지팡이를 의지하는 것은
그것이 그들의 길잡이 노릇을 하도록 의지할수 있기 때문이다.

빛이 비치는 밝은 세계로 나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어둠을 그리워하며, 회색지대에 빛과 어둠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경우는
자신의 영적인 현주소(하늘에 속했는지 아니면 땅에 속했는지)가
어디에 있는 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런 경우에 영적인 성장동력엔진(회개나 자기결단등의 충격요법)을 발동하여,
자신을 앞으로 전진할 수 있도록 방향을 잡아야 할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우울증(4)

우울증의 원인들(1)
우울증에는 여러가지 요인에 의해 나타난다.
어떤 경우는 단순한 원인이 강화되어 일어나기도하고
어떤 경우는 복합적인 원인들이 서로 어울러져 나타난다.

우울증을 일으키는 원인을 크게 두가지 측면에서 살펴볼수 있다.
첫째는 유전적이고 생물학적인 요인에 의해 일어난다.
또 하나는 심리적이고 정신적인 요인에 의해 일어난다.
우울증은 자주 육체적인 요인에 의해 일어나곤 한다.
수면부족이나, 부족한 운동이나 마약의 부작용이나,
육체적질병이나 혹은 부적합한 다이어트등은 우울증을 일으킬수 있다.

대개 많은 경우에 여자들은 매월 월경증후군으로 우울을 경험하기도하며,
아이출산이후에 오는 산후증후군으로 우울을 겪기도 한다.
다른 육체적인 원인들은 두뇌의 종양이나,
두뇌신경세포의 역기능이나, 몸의 엉끌어진 분비샘등은
보다 복잡한 우울의 증상을 일으킨다.

어떤 우울증은 가계에서 혹은 유전적인 요인에 의해 생겨한다.
이런 우울의 요인에 대한 연구들은 결론을 내기가 쉽지않으며,
어떤 연구들은 정반대의 이론을 주장하기도 한다.
때로는 항우울증의 약물로 변형된 우울의 현상도 있다.

아치발드 하트는 엘리야의 우울에 대해 우상선지자들과의 영적인 싸움의 대결로
극한 격정의감정대립을 겪은 엘리야는
후 아드레날린(격한 감정을 겪을 때 나오는 호르몬)증후군의 우울증에 걸렸다고 생각한다.
사람의 몸에 높은 아드레날린의 호르몬이 많이 나오는 데는
긴급한 사태의 일들, 여러사람앞에서 연설하는 경우,
정해진 시간에 가져야 하는 긴박한 모임등을 할때이다.

아드레날린의 호르몬이 소모되다가, 폭풍이 지나고 난후, 고요를 겪는 것처럼,
감정의 흐름이 정지된 현상의 경험들을 겪고난후에 후유증으로 우울증이 온다.
사람들은 대부분, 우울증을 경험한다.
그것은 우리의 몸이 휴식을 요구하는 것으로
관심적인 일들에 소모된 우리의 에너지가
회복의 기간동안 을 거치면서,원기를 회복한다.
우리의 몸이 에너지를 쓰고 관심을 갖는 일에 몰입하는 기간이 길면,
회복하는 기간도 길어야 한다.
우리가 나이가 들수록 우리의 아드레날린의 시스템의 기능이 덜 활력적이어서,
높은 아드레날린의 경험을 하고난후에, 우울을 겪기가 쉬운 것이다.

엘리야는 자신의 몸에 원기를 회복할때까지휴식을 취하며 잠을 잤었다.
하나님도 높은 아드레날린의 경험을 한 엘리야를 쉬도록 하셨다.

심리적이며, 정신적인 요인들로 인하여 우울증이 생겨난다.
보통 인구의 4-10%정도는 정신건강의 문제가 있다.
특히 젊은 이들사이에서 빠르게 우울증현상들이 나타난다.
대학생들의 25%가 우울증으로 고생하며,
그중에 우울증으로 인하여 학교를 떠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미국의 경우).
이런 현상들이 인간의 발달과정에서,
심리적인 문제에서, 인간관계의 문제에서 영적인 문제에서,
그리고 다른 육체적인 영향들이 우울을 일으키는 기초가 된다.

게린 콜린스의 크리스챤카운셀링에서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박스터의 목양신학(5)

현대 목회상담과 박스터의 목회상담의 비교

현대의 목회상담은 심리학적인 영향을 많이 받고 있으나,
박스터는 당시 퓨리탄의 인간의 영성이해의 근거에서
목회상담으로 접근하고 있다.

당시 퓨리탄들은 사람들의 심령변화와 영혼의 치료에 관심이 많았다.
그들은 사람들의 영혼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결하려고 하며,
그들은 사람들의 진정한 개종이나 거듭남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설교를 통해, 사람들을 변화시키려고 하였으며,
그래서 그들의 설교는 대개 깊이있는 말씀의 증거나
사람들의 영혼을 접촉하는 영적인 가르침들로 가득차 있다.
그런 배경에서 박스터의 목회상담은
체계적인 지속적인 교리문답공부와 설교를 뒤받침하는
폭넓은 영성강의로 당시 교회안에 있는 사람들의 심령의 문제에 접근하였다.

그렇지만 박스터의 인간영혼의 문제에의 접근을 하는
또 다른 그의 심리학적인 이해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인간이해와
목회상담의 심리적인 측면들을 다루었다.

그의 인간이해는 심리적인 접근에서
현대의 상담의 원조라 할수 있는 심리적인 묘사나,
슬픔이나 걱정에 대한 진단적인 개념은 사람을 영적으로만 보지 않고
심리적인 문제로 이해하였던 것이다.

심리적인 문제의 원인이 인간의 죄로 기인되어졌으며,
그죄의 영향력은 사단의 세력으로 인하여
인간의 마음속에 복잡한 상태로 발전시켜,
정신적인 문제에 빠지게 한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고로 목회상담은 인간의 죄와 영적인 영향력의 문제에서
해결될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사역을 존중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사역의 밑바닥에는 인간의 개종이나
신앙의 유뮤가 관건이며,
신앙의 성장과 영혼의 건강은 서로 연결된 상관관계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

드러난 정신적인 (심리적인) 문제를
영적인 문제의 원인을 통해 생겼다고 이해하므로,
영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신앙의 문제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마음의 태도에 대해 연구하고 있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실제적인 신앙의 성장과
개종과 영적인 성장이 자신들의 영혼의 건강이나
정신적인 건강에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퓨리탄의 인간이해에 대한 이원론적인 접근법은
사람들을 통합적으로 보는 현대의 상담과는 다른 접근법을 갖고 있다.
그접근범은 인간을 단순히 영과 몸을 분리하여 보는
성과 속에 지나친 거룩과 세속을 구분하는 신앙의 이분법적인 행태를 가져오는 약점도 있다.

다른 일반 현대의 일반 심리상담과는 달리,
박스터의 목회상담은 성경적인 영혼사역의 기반으로
성령의 조명과 말씀을 통한 치료와 심리의 문제를
신앙적인 문제의 해결을 통해 사역하려는 성경적인 목회상담의 특징을 갖고 있다.

박스터의 상담신학의 상담목회의 적용
박스터의 상담신학과 사역은 현대의 목회상담에 적용하는데,
경험적이며, 영성의 기본이해를 통해
목회상담학적인 입장에서 인간해결과 영적인 문제해결에 도움을 주고 있다.

그의 영성적인 목회 상담은 상담자의 영성강화와
목회의 영성적인 부분을 강화하는 데 도움을 주며,
그의 영성이해와 인간이해는 목회상담으로 하여금,
영적인부분의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에 집중하여,
인간의 심리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기독교의 건전한 영혼돌봄의 사역의 기초가 되었다.

박스터는 건전한 신학자이며, 영혼사역에 눈을 뜨고 있는 목회자이며,
심리학적인 문제를 보면서 사람들의 영혼을 돌보는 탁얼한 목회상담자이다.
그의 영성학은 자신의 영성이해와 더불어
자신의 영성의 개발을 통해
그의 영성목회의 뿌리가 되었다.

그의 목회학은 퓨리탄의 목회철학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전인 적인 목양의 돌보을 실천하게 하는 영혼사역의 도전을 주고 있다.

현대의 심리학의 지나친 심리적인 문제로만 여겨
사람들의 정신적인 문제를 심리적으로만 다루는 현대심리학이나
목회상담자들의 영적인 치료에만 의존하는 문제점을 보완 하며,
그것들의 한계를 배우게 하고,
상호보완을 통해 그것들을 극복하게 하는 영혼치료의
목회자의 목회상담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유익한 사람과 쓸모없는 물건

예레미야13:1-9
1.여호와께서 나에게 ‘너는 가서 베띠를 사서 네 허리에 두르고
그것이 물에 닿지 않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2. 그래서 나는 여호와의 말씀대로 베띠를 사서 허리에 둘렸다.
3.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다시 나에게 말씀하셨다.
4. “너는 그 베띠를 가지고 유프라테스 강가로 가서 그것을 그 곳 바위 틈에 숨겨 두어라.”
5. 그래서 나는 여호와께서 명령하신대로 가서 그것을 유프라테스 강가에 감추어 두었다.
6. 여러 날이 지난 후에 여호와께서 나에게 “너는 유프라테스 강가로 가서
그 베띠를 끄집어내 보아라”하고 말씀하셨다.
7. 그래서 내가 유프라테스 강가로 가서 그것을 감추어 둔 곳을 파고 띠를 꺼내 보니
썩어서 못쓰게 되어 있었다.
8. 그 때 여호와께서 나에게 다시 말씀하셨다.
9. 이와같이 내가 유다의 교만과 예루살렘의 큰 교만을 쓸모없는 것이 되게 하겠다.

사람이 쓰는 물건에는 어디나 쓸모있는 것이 있고 쓸모없는 것이 있다.
물건을 샀을때에는 유용하다 싶어 샀는데,
사서 놓고 보니 쓸모없게 된 경험을 많이 가졌을 것이다.
물건은 비싼 것이나 싼 것이등, 유용하게 쓰이는 것이 제일일 것이다.

명품은 대부분 유행을 통해 혹은 인간의 소유욕을 충족시키는 도구로 이용이 된다.
명품보다는 그래도 물건이 소비자에게 가치있는 제품은
쓸만하고 소비자가 쓰기에 흡족하면
그 물건이 명품다운 제품이 된다.
아무리 유행이나 사람들의 평가로 유명한 제품이라도
자기가 쓰기에 불편하면 그것은 명품이 아니다.

쓸만한 물건을 가게에서나 쇼핑센타에서 보았을때에,
그것이 아무리 비싸도 사고 싶은 것은
그 물건이 유용하다고 생각이 들어 그물건을 구입하려고 하는 것이다.

새물건을 사는 것도 좋지만 중고품의 유익함을 가져보는 것도
그물건을 쓰는데 유용하다면, 그물건을 잘 산 것이다.
물건의 새것인지 혹은 중고의 것인지 하는 것만 가지고
제품의 품질을 평가하지 않는다.
그물건의 쓰임새가 있으면, 그물건은 유용한 것이다.

미국에는 자동차 중고시장은 거대한 시장으로 활발하게 매매가 형성이 된다.
자동차뿐만이 아니라,
집에 쓰는 모든 가정용품에 대해
그들은 가라지(창고)세일이나, 야드(뒷뜰)세일로 자기들이 쓰던 물건을
잘 손질하여 내다 팔고 그것을 사서 쓰고 있다.

사람들 중에도 타인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유익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있으나 마나한 무익한 사람도 있으며,
더 나아가 남에게 해를 끼치는 해로운 사람도 있다.

사람은 자리보다 높이 평가된 사람은
보다 귀한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 그자리를 빞낼수 있다.
그런데 자리값을 하지못하는 제능력에 버거워 하는 경우는
자칫 그자리에서 제대로 자기역활을 하지못하는 경우도 있다.

사람이 적법한 시기에 적당한 사람으로 적합(유용)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유익한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상징적인 행동을 하게 하여, 이스라엘에 교훈을 주신다.
그것은 당시 사람들이 옷을 입을 때에 사용하던 허리띠를 가지고,
그 허리띠의 유용성이나 혹은 허리띠가 썩어져 가는 과정을 통해
무용하게 되어 버리는 교훈을 주고 있다.

물건을 상하지 않게 하려면 그 물건을 잘 보관을 해야 할 것이다.
사람도 쓸모있는 사람이 되려면 좋은 환경에서 좋은 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다.
대개 사람을 버리는 것은 자기주변의 안좋은 환경이나
나쁜 사람들 혹은 잘못된 가르침이나 지식이다.
사람을 버리지 않도록 하려면 좋은 환경이나
좋은 사람이 많이 있는 곳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사람이 주변의 사람이나 환경에 쉽게 동화되기 때문이다.

사람을 교육하는 데 모방교육이
가장 큰 교육의 효과가 있으며 영향력이 있다.
사람은 따라하면서 배우는 존재이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하는 행동을 따라 하므로 어른들을 닮아간다.

그 모방교육은 교육적 환경에 좌우 될때가 많다.
백노야 까마귀 놓는데 가지마라.
자녀들을 훌륭하게 키우는 것은
좋은 것, 옳은 것, 유익한 것들을 많이 보게 하고,듣게 하고,
느끼게 하고,체험하게 하는 것일 것이다.
맹모삼천지교의 교훈등은
인간의 교육에 현장의 중요성과 모방교육의 영향이나
효과등을 알려주는 교훈적인 이야기이다.

쓸모있는 경우는 자신이 쓰기에 합당한 물건이 되었다.
쓰는 동안 유익하며, 쓸모있으면, 좋은 물건이다.
사람도 언제나 어디에서나 쓸만한 사람은 유익한 사람이다.

물건을 보관하게 하는 것은 물건의 질을 유지하는 것이다.
물건을 상하게 만들어버리는 곳에 물건을 보관하면
물건이 썩어서 못쓰게 되거나, 망가지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사람도 자신의 자질을 높이고 그 질을 유지하는 것은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다.

좋고 명품의 물건인줄 알고, 아끼고 두어다 놓다가
나중에는 그물건을 쓸수 없는 경우도 있다.
사람의 자랄때에 배우는 시기에 공부를 하지 않거나,
하다가 나중에는 어느 날 갑자기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있다.
그렇지만 그런 일들은 오랜 세월의 반복의 과정의 결과에서 생겨난다.

지금이라도 유익한 사람이 되려면 자신을 가꾸고 배우게 하는 일에
투자하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배우는 시기를 놓쳐서 공부하려면 많은 노력과 희생이 따른다.

물건을 쓰지 않고 오랜 시일이 지나도록 그냥 놔두면,
그 물건을 못쓰게 상하게 되었다.

사람도 상하거나 버림받은 상태로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거나,
혹은 게으름이나 무책임에 방치하면,
사람은 아무리 과거에 뛰어나고 훌륭한 일을 한 사람일지라도
자신을 항상 관리하지 않으면
쓸모없게 되고 망가지는 것은 아주 쉽게 일어나는 일이다.

사람이 쓸모없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주 손쉽게 할수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신의 시간을 낭비하거나
무익한 일에 매달리다보면
나중에는 자신에게 남는 것은 없고 후회스러움만 남아 무익한 사람이 되어버린다.

좋은 환경에 있어서도 자신을 가꾸고 교육하지 않으면
좋은 인물을 만들수 없으며,
아무리 좋은 자리에 있거나 여건이 좋아도
자기노력이나 애씀이 없다면 가치있는 일들을 남길수 없다.

하나님은 인생들에게 유용한 교훈을 반복적으로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재차 언급하실때에
그 말씀의 이면에 뜻하는 깊은 의미가 내포되어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한번에 단순하게 생각하여 이해할수 없는 말이다.

교육의 효과도 반복할때에 나타난다.
바이올린이나 피아노교육혹은 수학테스트나 언어교육은
반복연습을 해야만 교육적인 효과가 나타나 점점 잘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진다.
수백번, 수천번, 수만번을 반복하여 연습하면,
두뇌에 강인하게 입력이 되어,
닦고 닦은 익힌 기술을 자동적으로 나타낼수 있을 것이다.

쓸모없는 것과 쓸모있는 것의 차이는 쓰는 사람의 판단에 따른 것이다.
사람이 못쓰게 되는 경우는
대개 지나쳐서 쓸모가 없고 유용하지 않게 되는 경우가 많다.

배워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자기지식에 대한 지나친 절대화하는 태도가
자신을 교만하게 하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을 다른사람에게 유익하게 나누지를 못한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교만하면,
자리에서 오는 유익만을 취하려고 하다가
사람들에게 비판을 받거나 버림을 받는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교만으로 나가면,
그 힘이 사람들을 살리고 유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괴롭히고 압박하는 도구로 변해버린다.

자신이 쓸모있는 사람으로 여기며 사는 것과
자신에 대해 전혀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사는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쓸모있는 사람이 있고 쓸모없는 사람도 있다.
그렇지만 그는 모두에게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를 명시하였으며,
그것을 따라 사람을 만들어갈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

물건이나 사람이나 쓸모있는 것이 좋다.
시장에 가서 그 물건이 좋아보여 사놓고,
그것을 실지로 써보면 쓸모가 없는 것이 있다.
그런데 하찮게 여기고 산 물건이 이외로 쓸모있게 쓰는 경험도 가졌을 것이다.

사람은 좋아보이나, 사람을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사람을 그 자리에 쓰기에는 적합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어느 사람은 보기에는 쓸모없어 보이다가
막상 자기 자리에 있게되면 진가를 발휘하는 사람도 있다.

사람은 외모로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고 판단하신다.
사람은 사람의 속을 들여다 볼수 없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속뿐 아니라 전체를 다 볼수 있으니,
그가 옳은 판단을 하시는 것이다.
성경은 사람과 그의 어떠함을 평가한 하나님의 판단을 담은 글이다.

사람은 겪어봐야 알수 있고,
겸허하게 자신을 가꾸는 일에 충실하게 노력하는 사람이
결국 나중에는 유익하고 가치있는 사람이 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박스터의 목양신학(4)

박스터의 영혼의 치료

묵상을 통한 영성사역
묵상으로 가장 완벽한 대상 즉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깊이 생각하고
또한 말씀의 세계에 몰입하는 것을 통해 오는 영혼의 치료와
그로인한 영혼의 휴식을 갖게하므로써
사람들의 영혼의 모든 힘들고 어려운 상황들을 치유하고
그들의 영혼을 건강한 상태의 모습으로 우고
엄숙하게 하는 목적을 행하게 한다.

사람들의 감성들을 북돋우기위해 이성의 이해를 사용하며,
두뇌의 기능의 효율적인 도움을 의지하여
사람들의 마음에 영혼에 대한 강한 영향력의 불을 질러
그 마음에 성령의 빛이 비추어 지도록 한다.

묵상을 제대로 하면 감성의 이해가 발전하며,
이성과 마음을 연결하는 영성에 좋은 영향을 준다.
상상력을 통한 묵상은 이성과 감성의 연결을 통해,
우리의 영성을 강화시켜준다.

은혜의 사역
회개는 사람들의 만족을 하나님에게로 돌리는 것이며,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이며
과거의 죄를 짓는 우상의 상태에서 돌아서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순종하는 데로 회복하는 것이다.
회개를 통해 사람들은 온전하게 하나님에게 맞추어지는 사람들이 된다.

사람의 구속과 회복은 그리스도를 통한
신적인 속성의 충분한 나타냄이며,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사역을 더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다.
마지막 단계의 분석에서 사람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이유있는 행하심이다.

영혼들의 알림(자신의 영혼에 구원의 진리를 습득하여 구원에 이름)과
재알림(계속하여 구원얻은 심령이 말씀 교육을 통하여 성화를 이루어 가는 방법)은
필요한 과정이다.
구원얻은 영혼들에게 기본적인 진리를 가르치고
재교육하는 과정은 필요한 것임을 의미한다.
진실한 영적인 재생산을 경험한 인격은
보다 깊이 있게 죄의 생각이나 혹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느끼며 경험하게 한다.

영혼의 돌봄과 성장
자신들의 영혼들에게 철저하게 사역하는 구원의 은혜의 사역은
사람들의 영혼들에게 충분한 하나님의 목양사역이다.
하나님은 그의 은혜를 통해 사람들의 영혼들을 치료하며,
회복하며, 돌보며, 성장시키는 사역을 하신다.

목회적인 감독의 궁극적인 도달은 우리의 삶의 궁극적인 목적들과 연관이 되어 있다.
즉 목회자들의 영적인 돌봄과 목양을 통해 회중들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주며,
그들의 인생을 개발시키고, 보다 전진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밑거름이 되게 한다.

목회적인 돌봄은 모든 회중에게 있으며,
연합적으로 혹은 개인적으로 영혼들을 돌보아야 한다.
즉 목회자들은 그들의 설교를 통해 회중들을 영적으로 돌보기와
개인상담을 통해 개인의 영혼들을 돌보는 일들을 함께 추진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목양의 두 수레바퀴와 같이
목회자의 교회의 목회를 움직여 가는 두가지의 영혼의 돌봄이다.

박스터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언급하고 있다.
사람은 자기-신뢰와 영혼의 휴식 문제를 그리스도에게 약속된 것을 통해
실질적인 신뢰라고 이야기 한다.
새로운 생명의 역동성은 사람의 영혼에 대한 믿음안에서
확립이 되며 표현되어진다고 여기고 있다.
믿음을 통한 영혼의 문제를 접근하며,
영성을 이루는 근거를 하나님을 믿는 신뢰에 두며,
그에 대한 신뢰를 통해 사람들의 영혼의 문제를 해결하기를 기대한다.

박스터는 말씀치료에 대해 설교로 찌르기를 통한 종합적인 강의와
기도의 모임을 통해 회중들의 거룩하게 교화하는 일에 필수적임을 강조하고 있다.
목회자들은 설교를 통해 회중들을 말씀으로 그들의 심령을 해부하며,
그리고 성경이해의 종합적인 강의나 가르침을 통해
그들의 영혼들을 돌보고, 치료하고, 신앙을 회복하는 일에 힘써야 할 것이며,
그들의 영혼들을 강화시키는 기도모임을 선도해야 할 것이다 .

박스터는 주장한다. 회중들은 자신들의 들음에 통해
그들의 구원을 이루는 일과 근본적인 진리들즉 죄, 자비, 구속, 개종의 성격과
방법등에 대한 자기들의 이해를 갖고 있어야 할 것이다.
회중들은 기독교의 기본적인 진리에 대해 자기이해와
그리고 더 나아가 자기수용을 통한 경험신앙으로 발전되도록
목양은 그들의 영혼들을 돌보야 할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하나님의 계시와 독생자의 영광

히1:1-6
1.옛날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가지 방법으로 수없이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2. 그러나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을 모든 것의 상속자로 삼으시고 또 아들을 통해 우주를 창조하셨습니다.
3.그 아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며 하나님의 본성을 그대로 나타내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능력있는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며 죄를 깨끗게 하시고
하늘에 계시는 위대하신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
4.그래서 천사들보다 더 뛰어난 이름을 받으시고
그들과는 비교할수 없을 만큼 위대한 분이 되셨습니다.
5.하나님께서는 어느 천사에게도 “너는 내 아들이다.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라고 말씀하시거나
또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6.그러나 하나님께서 맏아들을 세상에 보내실때 “하나님의 모든 천사들은
그에게 경배하여라:”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계시를 통해 자신을 알리신다.
하나님의 자기알림은 역사를 통해 발전되어 왔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사람들의 역사에 개입하셔서
자신의 사역을 통해 자신을 알려오신 분이다.
감추어진 세계,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열린 문을 통해 알려지는 것이 계시의 의미이다.
비밀의 뜻을 푸는 것은 그것을 푸는 해결(이해의 안목)의 열쇠를 얻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성경의 계시를 점진적으로 알리신 것처럼
각 개인에게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계시도 또한 일생의 과정을 통해 점진적으로 알려진다.
이성의 세계에서 즉 기록된 말씀안에 알려지신 지식의 내용을 아는 단계에서
알려진 그 하나님의 성품과 사역을 인생의 삶의 경험을 통해
인생의 경험의 세계에서 그분의 감추어진 부분들을 계시로 알아야 할 것이다.

인류의 역사의 시작에서부터 하나님께서 메신저들을 보내셔서
자신의 성품과 사역을 알리셨다.
여러가지 방법으로 하나님은 자신의 계시를 알리셨는데,
그 방법들 중에는 하늘의 천사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개입의 기적적인 현상으로,
사람에게 찾아오셔서, 사람을 선택하셔서, 사람과 동행하심으로,
국가의 흥망성쇠의 과정을 통하여,
그리고 지도자들을, 사사들을, 예언자들을 통하여,
개인적인 관계와 교제를 통하여등 다양한 방법으로 알리셨다.
특히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반복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리셨다.
그분의 의로움에 대해, 그분의 신실하심에 대해,
그분의 정확한 약속성취를 통해,
그리고 인간의 잘못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와 심판을 알리셨다.

그분의 알린 계신 중에 단연 가장 큰 계시의 중심에는
그분의 독생자를 보내시는 것이었다.
보내실 메시야에 대한 계시는 가장 긴 역사의 단일한 주제로
끊임없이 하나님은 인간사회에 말씀하셨다.
인류의 세초에서 부터, 인간의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님의 거대한 계획으로, 그의 예수 그리스도의 임하심이 었다.
하나님이 역사의 중심에 오시는 사역이었다.

하나님의 계시의 정점은 독생자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그분의 독생자를 보내시는 사역으로
그 계시의 완성을 이루신다.
그가 이루시는 계시는 그분의 아들 독생자를 통해
다시 인류에게 다가올 미래에 대한 계시로 알려지도록 하신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통해 세상을 창조하시고 세상을 그의 통치아래에 두시고,
모든 것의 주인으로 세우시고,
모든 만물에 대한 주권을 행사하는 통치자로 그의 이름을 높이신다.
모든만물이 다 독생자 예수의 발아래에 있으며, 그의 지배와 다스림을 받는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가진 독생자는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소유권, 지배권, 통치권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행사하신다.

이제는 독생자가 이땅에 오셔서 알려주신 종말계시의
단계적인 성취실현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의 주인으로 인류역사속에서,
그 통치의 점진적인 과정을 통하여,
그 독생자의 통치하심이 온전하게 완성되는
어느 정점을 향하여 인류의 역사는 진행이 되고 있다.

만물의 주인이 인류역사속에 계시의 주체자로 사역하심과 같이
각개인의 인생의 삶의 현장안에서도 그분의 통치의 영역이며,
그분은 모든 그를 구주로 인정하고,
자신들의 인생가운데에 그분을 자신들의 주인으로
영접한 인간들 속에서 온전하게 다스리시는 주님으로 드러나기를 기대하신다.

인간들안에 알려진 독생자의 계시는 하나님자신의 모든 것을
그 독생자의 중보의 역활을 통해 알려지고 알게 되어진다.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앎은 그분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분은 인간속에 오신 알려지신 하나님으로 인간들의 인생을 친히 경험하여,
그 인생들과 동화된 그분의 성품과 사역을 통한 아들의 계시의 역사는
각개인에게 지금도 재창조(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듯
지금은 인류각자에게 새로운 인생의 성품을 만들어가시는 사역)의 사역으로 진행이 되고 있다.

독생자는 하나님의 영광의 중심이며, 그 독생자는 인류에게 알려지신 하나님이시다.
그분을 통해 인간들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의 모습을 본다.
그분안에는 하나님이신 본성이 있다.
왜냐하면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분은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 본성중에 가장 분명한 계시된 성품은 인류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본성이다.
그분은 온몸으로 인류를 사랑하여,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서 희생하여,
인생들에게 생명과 인간본연의 영광된 위치로 올라가는 길을 마련해 놓으셨다.
그분은 영원태초부터 계신 말씀으로 그분은 만물의 원리의 중심에서
만물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하신다.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그 말씀을 통해 지금도 보존하시며 통치하신다.
인류가 하나님의 통치와 사역을 이해하려면 그분의 통치의 차원으로 들어가야 알수 있다.
그것은 인간의 일차적인(육체의 감각으로 이해하는) 혹은
이차적인 차원(생각이나 명상)이 아니라 삼차원(영적인 세계: 영물들의 사역하는 차원)을 지나
하나님의 고유한 통치의 영역안(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와
교제안에서의 믿음과 창조의 차원)에서 이해와 경험을 할수 있게 된다.

오늘도 독생자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그의 만물의 통치의 주인으로 다스리신다.
그리고 인생들을 새롭게 하시는 일에 관여하며,
그분이 이땅에서 흘리신 피의 사역을 통해 이루어지는
인류를 깨끗이 죄에서 씻어내는 일을 하신다.
그분의 보혈은 인류를 죄와 죽음의 세력에서 자유하게 하는 유일한 구원의 길이며,
죄를 속하는 속죄의 방법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비로소 하나님앞에서 진정한 사람의 모습을 갖출수 있다.
왜냐하면, 인류는 역사의 시초에 범한 죄로 인하여 변질된 상태가 되어있기 때문이다.

독생자는 유일한 하나님의 광채이다. 그분을 통해 하나님의 모습을 본다.
그분은 하나님안에서 나온 분으로 다른 하나님의 창조물인 영물과는 차원이 다르다.
다른 영물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존재들로 지음받고 세움을 입었으나.
그분 독생자는 모든 영물들의 사역의 봉사를 받으시는 분이다.
그분은 모든 만물들이 돌리는 하나님의 영광이며,
그 영광중에 찬미를 받으시는 분이다.
왜냐하면 그 독생자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인생들이 믿고 따르는 독생자는 하나님이기에 인생의 존재는
모든 만물의 존재들중에 뛰어난 존재의 위치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과거에는 타락하여, 자신의 위치에서 떨어졌으나.
인생들은 그분안에서 얻을 영광을 바라보는 존재로 다가올
그분의 때에 그분의 영광받으신 것처럼
그분안에 있는 인생들은 영광을 함께 누린다.

하나님은 그분 독생자와 더불어 영광과 존귀와 찬양받으심을 공유하며,
만물의 통치에서 공유하시며,
하나님의 모든 세계의 영역안에서 주님으로서 공유하신다.
그리고 그 독생자의 피의 공로로 구원얻은 각개인의 삶에서도
하나님의 통치와 영광받으심을 공유하신다.
구원얻은 인생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그리고
아들로 모실 한분의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통치와 인도하심을 받는다.

독생자의 세상에 오실때에 수만만의 천군과 천사들이 함께 하늘에서 영광이며,
땅에서는 하나님과의 인류의 화해를 나타내는 평화의 사도로 독생자가 임하셨다.
하나님의 모든 영물들은 그분의 탄생을 기쁨으로 찬양하며,
그분에게 돌아갈 영광을 돌리며,
그영물들의 영광돌림과 찬양속에 독생자는 이세상에 오셨다.
그분의 사역은 하늘에는 영광이며,
이땅에는 진정한 하나님의 평화의 은총을 가지고 오셨다.

그분안에서 인류는 기쁨으로 하나님의 품안에 안길수 있으며,
인류는 하나님을 자상한 어머니(자녀사랑의 화신)같은 아버지로 모시고
하나님의 통치아래로 다시 자신들의 잃어버린 명예와 영광을 회복한다.
그 독생자의 영광안에 인류의 영광과 축복이 담겨있다.
그분의 영광의 통치안에서 인류는 평안과 안식과
그리고 썩지 아니할 영광의 축복을 얻는다.

고로 독생자 예수님은 만물중에 으뜸이다.
하나님께서 인류역사를 통해 여러모양으로 말씀하셨지만,
나중에는 그 독생자 아들로 말씀하셨다.
그 아들은 알려지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로 말미암아 만물이 조성이 되었고 인류가 구원과 영광의 길을 찾았고,
그분 독생자를 모신 인생들이 그분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얻는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박스터의 목양신학(3)

박스터의 상담의 진단과 치료방법

그의 상담진단해석은 심령의 문제에 대해
다각적인 접근과 인간의 영성이해에 기초하고 있다.

그와같이 박스터는 전문가들은 이성적이고
심리적인 치료에만 만족하지말아야 할 것은
왜냐하면, 좋은 설교나 위로의 메시지를 통해,
사람들의 병적인 상태에서 혹은 상한 심령들이
자신들의 정신적인 병적인 상태를 치료하는데,
다른 육체의 질병처럼 영적인 변화가
자신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질병이 영적인 문제라고 여긴다면,
거기에는 사단의 공격이나, 혹은 고백하지 죄,
그리고 하나님의 주신 일시적인 영적인 유기에 빠져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사단에 의해 미혹(사단은 사람에게 자신을 따르도록
거짓것을 믿게 하거나, 기만전술로 다가온다)에 걸리면,
나중에 그의 소유가 되어가는 경향이 있다.

마음의 걱정과 불안은 사람의 살아가는 정해진 습관(대개 어릴때의 부모의 부정적인 사고습관:
죽고 싶다. 혹은 어떻게 해, 걱정이야등)에 의해 이루어 진다.
두려움이나, 걱정의 말등은 마음의 지속적인 기질을 좌절케 한다.
걱정이 많으면 마음의 병이나, 약함그리고 몸의 질병을 일으키며,
어떤 평안한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는 영혼의 상태가 된다.

인간의 걱정에 대해서 생각할때에
사람을 죄있는 상태에서만 그렇다고 여기지 말고,
생활에서 얻은 영향들로 인해,
그런 사고습관은 좋든 나쁜든 마음에 영향을 준다.
그리고 마음의 걱정은 어떤 크고 자은 고질적인 죄의 죄책감을 일으킨다.
걱정에 휩싸인 인간의 양심은 다만 지각하는 것에 머물고
그런 상태를 벗어나지 않을때에
어떤 외부의 변화의 도전에 대해 반응을 잘하지 못해
(복음을 듣는 인간의 마음의 상태를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씨뿌리는 비유중에
세상의 염려에 대한 언급을 한 가시떨기가 있는 마음의 밭)
자신의 영혼이 거듭나지 않으며,
죄를 사랑하고 아직도 두려움에 빠져 있게 되는 것이다.

박스터의 마음과 영혼의 병에 대한 이해
굳어진 마음의 재앙은 죄로 인하여 우리의 양심을 무감각하게 하며
혹은 우리의 죄책의 영혼은
위대하고 영원한 것들에 대한 관심을 위험하고, 불행하게 한다.
굳어진 마음은 멜랑코니(일종의 우울증)와
불신자의 불행을 가져오며,
부드럽고 순전한 마음은 복음을 받아들여,그리스도의 새로운 성품을 닮게 한다.
멜랑코니의 병은 사람의 몸안에 있는 마음에 자연적(심리적)으로 영향을 주는 것이며,
어느 것은 예외일수 있지만, 그것을 다룰수 있고 고칠수 있다고 말한다.

개종(마음을 복음으로 변화시켜, 마음의 진정한 신앙고백을 통한 자기변화)
의 사역하에서 영혼들을 일깨움을 받으며,
그들이 슬픔에 결코 빠지지 않으며,
마음의 굳어짐의 위험에 놓이지도 않으며, 지나친 슬픔에 휩싸이지도 않는다.
비록 죄의 영향이 있지만, 두려움이나 슬픔에 대한 위험도 없으며,
크나큰 실수라 할수 있는 불안한 불만을 토로하는 일도 없다.

슬픔(이 슬픔은 일반적인 의미의 슬픔보다는 병적인 슬픔의 상태)
이 지나치면, 상처를 입기쉽고, 마음이 극도로 나약해져,
몸의 건강이나 정신적인 건강에 해를 끼치게 된다.

슬픔과 마음의 걱정은 건강한 이성의 활동을 억압한다.
그리고 마음의 판단을 왜곡시켜 사람을 타락되게 하고 ,
신뢰할 만한 하지 못하게 하며,
결국 들끓는 분노에 마음의 더 큰 걱정에 싸이게 한다.
그러나 그런 태도는 마치 자신의 일에 대해
과장된 열정을 가진 것으로 나타내게 한다.

과도한 슬픔에 빠지게 하는 사람의 생각들이나,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생각들은 사람을 죄스럽고,
걱정적인 상태(병적인 불안감)로 만들어 버리며,
믿음을 방해하고 삼킬정도로 엄습한다.
지나치게 열정적인 슬픔은
믿음을 방해하여 복음의 은혜와 약속에 이르지 못하게 한다.

고로 필요한 평안을 통해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슬퍼하는 상태를 거부하고
슬픔, 분노를 누그러뜨리게 하여야 할 것이다.

세가지 질병들이 지나친 슬픔을 일으킨다.
이세가지는 자연적인 힘으로 참을수 없는 격렬한 고통과
본성적인 나역함, 무기력하게 하는 요인과,
그리고 두뇌의 생각의 능력과 상상력이 무너져 기능마비로 인하여,
멜랑코니의 상태의 병이 되어버린다.

이런 경우는 고치기가 쉽지않다.
지나친 걱정과 병적인 슬픔의 본성적인 기질은
사람을 항상 수치심과, 불안감과 두려움에 빠져,
자신에 대한 불만족이나 슬픔을 지속하게 한다,
그런 상태가 결국에는 자신을 미쳐버린 상태와 멜라코리의 상태로 발전시켜,
결국 그 병적인 상태가 자신의 본성적인 기질화하여,
그 마음의 병은 그 사람에게 자신에게 생활의 재난을 키운다.

쉽게 안달하며 조급해하는 습관은 정신적인 질병에 원인이 되기 쉽다.
세상을 무절제하게 사랑하는 것을 이기기 위해
보다 자신을 신앙으로 절제하는 일에 부지런하도록 하여야 한다.
죄가 얼마나 지대한영향을 주는지를 연구하며,
자신안에 있는 인생의 지혜와 의지를 키우고,
하나님의 섭리대해에 거스리는 불만족스런 상태에서
올바른 자신의 의지와 바람(기대)들을 세우며,
우리가 하나님의 역활을 하는 대신에
우리의 의지를 내세우는 것(자신을 절대시하는 태도)을 살펴야 한다.
그리고 병적인 슬픔이나 죄를 짓는 습관에 빠지지 않도록 할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당황하게 하며(혼란스러울 정도로 마음이 복잡한 상태:
이런 상탠은 병적으로 바꾸어 지기가 쉽다),
종교에 대해 혹은 영혼의 상태에 대해 무관심하며,
과거에 지은 죄들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를 두려워하는 것이나,
자신의 신실함(신앙을 가진)이나 구원에 대해 의심하는 일등은
자신을 망치는 재난을 가져올 만한 상태가 되어
자신에게 비난을 받을 만한 요인이 된다.

만족과 지복의 극치로서
하나님, 그리스도, 하늘에 대한 교리적인 이해 대해 만족함이 없다면,
더 그것을 연구하며 그 진리에 대해
바른 이해와 깨달음을 가지면 자기확신에 이를 것이다.
영혼과 몸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들의 축복의 구주이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이
자신들의 인생의 의미에 대한 확신과 가치 추구임을 깊이 음미해야 할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박스터의 목양신학(1)

박스터의 신학의 개괄적인 이해에 대해

리차드 박스터는 대표적인 퓨리탄의 신학자였으며,
영혼의 치유와 영적인 돌봄을 행하였던 목회상담가였다.
박스터의 목회적인 돌봄은 영혼의 돌봄과
크리스챤 심리학의 목회상담적인 접근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그의 신학적인 이해와 퓨리탄의 신학과 목회철학에 기초하고 있으며,
그의 인간이해와 영성신학을 통해 목회상담을 시행하고 있다.

박스터는 그의 목회를 영성관리와 심리학적접근에 위한
영성을 돌봄을 주된 목적으로 그의 사역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그의 신학과 심리학적이해는 그의 목회사역의 철학적 근거가 되며,
그의 목회상담학적인 접근은 당시 퓨리탄니즘의 인간이해와
영성이해의 바탕에 근거를 두고 있다.

박스터는 탁월한 신학자이다.
그의 신학은 당시의 퓨리탄의 대표로 그는 종교개혁의 신학적인 전통과
퓨리탄의 영성중심의 신학을 추구하고 있다.
박스터는 또한 영혼을 돌보는 목회자이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목양을 하는 목회자로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목회자이다.
사람들의 영혼을 돌보며, 그들의 영혼의 문제를 치료하며,
그들의 신앙생활을 성장시키는 영혼사역의 실천자이다.

박스터는 목회상담자이다.
그는 목회에 상담을 접목을 시도하였으며,
퓨리탄의 목회적인 유산을 대표할 만한 목회상담자이며,
그는 영혼을 돌보는 일에 영적인 사역과 동시에
인간의 마음의 병적인 상태를 진단하고,
그것을 치료하는 과정을 상담을 통해 영혼의 회복을 추구한다.

박스터의 인간이해와 영성이해는 근대 목회상담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인간이해와 영성신학은 그의 목회상담학의 근거가 되며,
그는 철저한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사역과
그리고 인간의 개종과 변화와 성장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는 목회상담가이다.

그의 목회상담학을 연구하는 것은 그의 영성학이나 인간학을 이해하며,
그리고 퓨리탄의 목회학을 살펴보며,
그의 목회론을 이해하면 퓨리탄의 목회학을 살펴볼수 있다.
그의 질병학을 통해, 그가 인간의 영혼을
마음과 몸의 관계를 통해 이해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그리고 그런 관점을 통해 목양의 방법이나,영혼치료의 방법들을 사용한다.

그의 목회학의 영적인 유산들을 현대목회에 적용하여,
현대의 목회자들이 진정한 회중의 영혼들을 돌보는 의사로서,
영성과 치료의 목회를 통해 이상적인 목회상담을 실천할수 있을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박스터의 목양신학(2)

퓨리탄의 신학은 하나님경험의 신학과
영성신학에 대한 구체적인 접근을 목표로 하고 있다.
박스터는 이런 퓨리탄의 신학적인 바탕에
자신의 목회상담을 접근하고 있다.
그의 신학연구는 3가지 분야로 나누어 연구한다.
즉 박스터는 과학, 감성, 실천으로 신학적인 연구를 한다.

목양에 대한 접근은 과학적이며, 심리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갖고 있어야 하며,
신학적인 진리들에 대해 감성과 이성에 대한 상관관계를 통해 이해하며, 그 진리들을 실천하는 실질적인 방법으로 신학을 연구해야 할 것이다 .
박스터는 그의 저서에서 가장 첨예하고
센스티브한 치료의 방법들을 만족하게 강구하는 목회자이며
그는 17세기의 의 가장 뛰어난 작가중에 하나이다.
신학자체 다음으로 박스터는 심리학과 모든 자연과학을 포함하는 물리학을 생각한다.

박스터의 인간학
박스터는 머리를 이해하는 지식과 마음을
이해하는 지식을 통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긴다.
박스터는 인간을 두뇌와 마음의 연결을 통해 종합적인 이해를 알고 있다.
물질과 영에 대한 퓨리탄이중개념은
배교의 상태와 은혜의 상태를 날카롭게 구분하는 노력에 기여한다.
사람들에 대한 이해를 이원론에 입각하여 이해하지만,
성속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분명한 영성신학에 대한 개념을 갖고 있으며,
퓨리탄들은 그런 관점에서 지속적인 자기표현을 통해
하나님 경험의 신앙을 갖게 되어진다.

박스터는 사람이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
자신의 마음을 차겁게(사람이 이미 가지고 있는 지식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가 쉽지않은 상태로 굳어지는 낳는 지식의 남용의 결과)하는 것으로
사람의 마음의 안좋은(교만이나 편견)
상태로 머물러 있게 하며 새로운 지식(이론)을 받는 것에 거부나 두려움을 갖게 한다.

자기지식은 모든 자기경험이 자신의 삶의 패턴을
결정하는 걱정(관심)에의 표현이다.
퓨리탄들의 관심은 회중들에게 궁극적인 수준
(만족할 만한 영적인 신앙적인 이상적인 상태)에 이르지 못한 영혼들을 돌보는
지속적인 필요에 목양의 응답을 하기를 원한다.

박스터가 이해하는 육체의 자아(영적인 자아의 반대개념)는 무절제하며,
자기중심적인 모든 욕심과 성질의 총체로 유혹하는 의도의 시도를 잡고,
무질서하게 탐욕에 굶주리는 것과
죄로부터 소원된 감성의 마음을 통해 외부의 자기기만의 표현을 하면서
영적인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는 영적인 성향은 비이성적인 성향이 아니다 라고 이해한다.
그 성향은 오히려 우리의 이성을 더 밝게하며,
두뇌의 활동을 건강하게 만들어 준다고 그는 생각한다.

박스터는 또한 크리스챤 윤리는 마음의 일과 함께 한다고 이해하는데,
크리스챤의 생활의 시작에서 끝까지 모든 윤리적인 판단을
그리스도인들의 행동보다는 마음의 상태에 더 유념한다.
이것은 마음의 사역의 만족할 만한 주된 증거로서
박스터의 그리스도의 법의 개념이다.
그는 건전한 영혼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에게 가까이 갈수 있는것이며, 하나님의 지식에 이를수 있다고 본다.

그가 이해하는 인간이해는
사람의 몸(수동적인 연합의 실체)과영(능동적인 연합의 실체)의 주된 개념을
자기의식의 자료로 쓰임을 받는다고 이해한다. 즉 그뜻은 영의 능동적인 역활이 잘 이루어지므로, 그 영의 영향을 받는 몸의 수용성의 연합의 조화를 통해 자신의
즉 몸과영의 자기이해는 자기를 알고 인식하는 일에 도움을 준다.
박스터는 영혼의 본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이해하기를
사람이 가진 영혼의 목적은 사람속에 있는 자아를 만들어 가는
인간의 인상(자기표현)을 나타내고 자신을 이해하게하는
중요한 성향(종교성이나, 영성)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퓨리탄목회학
퓨리탄목회자들은 상담과 조언을 교인들에게 줌으로써
그들의 마음의 상태에 접근하고 있다.
그들은 마음을 다루는 영적인 상담가로서
회중들에게 상담을 통해 영혼의 문제를 해결하며,
그들의 크리스챤 생활에 필요한 권면을 주어,
그들의 영적인 성장을 이루어간다.
퓨리탄 목회자들은 상한영혼들을 위로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의 영혼의 고통의 상태의 원인을 죄로 보고 다룬다.

퓨리탄의 그 일반적인 이해에 더나아가
박스터는 사람의 문제를 심리학적인 측면에서 이해하며
정신적인 이상현상에 대해 사람이 깊은 디프레스(우울증)에 빠지는 것으로 본다.
그 상태를 메라코니상태로 말하고,
그 병적인 심리적인상태에 영적인 치료들을 적용하는 것이 효과가 없다는 것을 인식한다.

퓨리탄목회자들은 자신들을 하나님의 도구로서의 이해는
퓨리탄 자신의 자기실현에 공헌하며 그 자기실현을 통해 목양에 기여하게 된다.
이 말은 목회자가 자신의 정체감을 바로 가지므로서,
목양을 통한 성취에 충실할수 가 있는 것이다.

퓨리탄에게 있어, 자기 시험(이말은 자기를 점점하는 과정, 즉 목회자들이 자신을 살펴서 자신의 영혼의 문제나 정신적인 문제에 대한 자기 해결의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게하는 것)은
목회자자신의 이전(과거)의 목적하는 바(소명시에 받은 목적)의
자질들을 발견하는 일에 유익하다.
즉 목회자가 자신을 점검하므로써 자신이 목회적인 목적이나,
목양에 대한 거룩한 목표들에 대한 전반적인 자기이해를 갖고
그 목적들을 실현할수 있다.

퓨리탄 목회자들을 확신하게 하는 지속적인 흐름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자기점검의 기술이나,
그들 자신의 필요를 분별하고 처방해주는 역활을 해야 할 것이다.
퓨리탄목회자들은
오늘날 목회적인 심리학이란 불리우는 철저한 영혼의 돌봄이나
심리학적인 사역을 필요로 하는 목회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박스터의 목양학
일반적으로 목회자의 사역은 특별한 일들에 대한 것을 다룬다.
즉 확신하게 하는 것, 신앙에 진보를 가져오는 것,
신앙의 보존하는 것, 그리고 신앙을 회복하는 일에 주력한다.
목회자는 성경적인 지식, 진단의 분별,
그리고 상담의 스킬등을 통해,
영적인 전문 의사로서 사람들의 영혼들을 다루어야 할 것이다.

영혼의 돌봄은 회중들의 영혼들의 신앙에 대한 목회적인 돌봄을 전제하고 있다
회중들이 자신들의 신앙에 도움을 받을때에 그들은 자신들의 영혼들이 건강하며,
자신들의 신앙생활에 유익을 가져온다.
목회자들은 회중들의 영적이고,
육체적인 건강등 전반적인 그들의 상태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목양의 사역의 전반적인 과정은 회중들에게 사랑의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다.
목회자의 목양은 회중들,그들의 유익을 위해 봉사하며,
그들의 최선의 것을 유지하도록 도우며,
그들의 상처들을 살펴주는 것이다.

박스터는 다양한 청중들과 개인적이며,
공식적인 관계를 맺으며, 교육을 받은 사람이나 받지 않은 사람이거나,
혹은 시골에 있는 사람이나,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성화에 많은 진전을 가진 사람이거나 혹은 아직 개종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목회자는 접근할 수 있어야 하며,
그 자신은 그런 모든 이들의 목회자로 사역을 담당하였다.

박스터의 교회론
박스터는 어거스틴의 교회적인 전통,
즉교회는 진정한 성화를 이루는 개종자들과 이름뿐인 개종들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는 이론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박스터는 교회를 교화함이 없는 혹은 개종에 대한 노력이 없는
어거스틴식의 교회이해에 대해서 망설여 생각한다.
그것은 교회는 계속적이 교회의 교화의 노력과
지속적인 회중들의 변화를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함을 강조하는 것을 뜻한다.

박스터는 교회를 보이지 않는 교회,
혹은 승리한 영적인 교회로 이해한다.
보이는 교회안에 속해 있는 회중들 중에 개종하지 않은 자들은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며,
하나님의 진정한 평화와 위로를 받지 못한 자들이며,
오히려 아직도 사단의 노예로 머물러 있는 자들이 많이 있음을 인정한다.
고로 교회는 보이지 않는 영적인 교회의 이상적인 상태를
목표로 하는 보이는 교회의 회중들로 하여금
진정한 개종과 거룩한 성화의 발전을 도움으로
그들의 보이지않는 교회에 개입하는 수가 늘어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교화(가르쳐서 깨우쳐주는 교육적인 과정)는
퓨리탄의 삶과 신앙에 대한 바울적인 개념이해이다.
설교를 섭취하여 공동체의 믿음을 세우고,
주요한 가르침들을 암송하고,
마음으로 진정으로 기도하는 모임에 참여함과
성도들의 친교에 의해 이상적인 퓨리탄의 회중들을 만들어 내는 일이 교회의 사명이다라고
박스터는 이해한다.

박스터는 또한 다음과 같이 교회적인 확신을 강조한다.
환자들이 육체적인 질병에서 회복되듯이
회중들이 자신들의 고질적인 영적인 병에서
목회상담적인 훈련을 통해 영적인 건강을 회복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여,
성도들로 하여금, 보다 깊고 성숙한 성도들의 교제를 즐길수 있도록
거룩한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것이라고 여긴다.

박스터는 교회의 진정한 변화는 구조적인 변화보다는
개종을 통한 개인들의 변화를 인정한다.
이것을 이루기 위해, 목회자들의 중요한 사역의 요소들로는
각 개인들을 개인적으로 혹은 공공적으로 말씀진리 (교리문답)의 교육과
일관된 영적인 훈련
그리고 성도들간의 공동체의 일치를 주장한다.

박스터의 개종론
박스터는 개종(칭의의 소유와 성화의 시작의 상태:
진정한 구원을 경험하게 하는 인간변화의 상태)은
교회의 사역의 궁극적인 가장 중요한 사역이라고 여긴다.
회중들을 진정으로 개종케 하여 자기변화를 이루어
거룩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가는 일이야말로 교회의 가장 큰 임무이다.

그런 관점에서 박스터는 교리문답을 교육하는 것이 중요한 목회적인 요소가 되며,
그는 그것이 영혼들의 개종을 도울수 잇는 가장 중요한 수단임을 강조한다.
교리문답의 교육을 통해 개종한 사람들을 질서있게 세워주며,
이미 들은 설교를 통해 얻은 영적인 지식(단편적이고 부분적이기 쉬운 지식)에 대한
회중들의 습득에 대한 보다 더 깊고 나은 이해를 가질수 있도록 한다.

공동체의 개종한 무리들에 대한 목회의 또 다른 부분은
떨어진(신앙의 퇴보나 혹은 배교에 가까운 영적인 좌절을 경험하는 상태)
그리스도인들이 회복할수 있는 그들의 필요에 응하는 것이다.
회중안에 있는 개종한(이미 믿은)사람들중에서 그들을 돌보는 목회의 사역은
특히 영적인 문제에 대해 불안한 자들에게 개선적이고 치료적인 지식의 위로를 주는 것이며,
사람들의 영혼들에게 평화를 주며,
그들에게 안전하고 지속적인 영적인 돌봄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목양은 활력있는 영적이 돌봄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개종의 사역은 두부분으로 이루어 진다.
먼저는 종교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필수적인 원리안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알리며,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의 효용성을 통해
사람들의 진정한 변화를 이루어 가는 것이다.
타인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것과 그것에 대한
하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은 성도들 자신들에게 많은 도전과
목양자들을 고무시키는 사역이다.

박스터의 성령론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영적인 긴장과 하나님께 대한 신뢰는
하나님의 성도들을 포용하시는 성령충만한 사랑의 표식이다.
영적인 고양된 상태를 긴장으로 유지하는 것과
죄에 대한 승리의 전쟁참여와
그리고 정신차린 상태의 확고한 신뢰와
하나님의 비전과 온전한 순수함에 대한 잘 조성된 희망을 갖고 있는 것은
성령충만한 상태의 사람이 가져야 할 요소들이다.

하나님의 영은 성화의 사역을 이루어가는데,
사람들속에서 사람들과의 연합을 격려함과 사람들의 노력을 자극하여
그 성화의 사역을 이루어간다.
성령은 사람들의 마음을 유도하여 하늘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게하며,
사람들속에서 죄의 행동들의 진행을 막으며
그것들을 대체하는 은혜들을 사람의 의식이나 마음에 접목하는 일을 하신다.

박스터는 성령이 하나님의 선택된 자에게
임재하시는 교리의 실질적인 중요성은
신자들을 지상에서 하늘의 것들을 맛보게 하는 역활을 한다.
성도들의 주관적인 경험은 성령의 영향을 통해
그 영의 의도적인 변형이 자신들에게 미치는 것으로 증거한다.
그와 같이 그는 성령을 통해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친교할수 있다고 믿으며,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성례전, 영혼의 말씀, 생명이신 그리스도 자신안에서
성도들이 믿은대로,
성령이 자신들안에 생명을 가지고 오는 삶을 살도록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해
개종은 사람의 마음과 의지의 의식적인 작용으로 복음에 순종하며,
그 궁극적인 원인은 그리스도의 성령이 그안에서 효과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성령의 개화(개종의 변화)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심어주는 일에 필요한 것이다.
그 변화의 과정에서 성령의 비쳐줌은 사람들의 심령을 밝히며,
사람들을 진리(예수)에게로 인도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