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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04/16
    메신저들과 청중들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들
    목동
  2. 2007/04/15
    목적이 있는 삶
    목동
  3. 2007/04/13
    낙심을 극복하려면
    목동
  4. 2007/04/13
    감정이입이라는 말을 생각하며
    목동
  5. 2007/04/12
    교만은 인생을 망하게 한다
    목동
  6. 2007/04/10
    절망속에서 희망을 걸고
    목동
  7. 2007/04/09
    부활사실에 대한 단상
    목동
  8. 2007/04/08
    인간사역의 우선순위
    목동
  9. 2007/04/07
    신뢰의 대상; 하나님과 사람의차이
    목동
  10. 2007/04/06
    위기가운데에서 구원받음
    목동

메신저들과 청중들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들

에스겔 3:16-21
16. 7일이 지난 다음에 여호와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17. “사람의 아들아, 내가 너를 이스라엘 민족의 파수꾼으로 세웠다.
너는 내가 하는 말을 듣고 내 말로 그들을 경고하라
18. 내가 악인에게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하고 말할 때에
네가 만일 그에게 경고하지 않거나 잘 타일러 그를 악한 길에서 돌이켜
그를 살게 하지 않으면 그 악인은 자기 죄로 죽겠지만
나는 그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너에게 물을 것이다.
19. 그러나 네가 만일 그 악인을 경고하고 타일러도 그가 악한 행실과
죄를 버리지 못하면 그는 자기의 죄때문에 죽을 것이며,
너에게는 아무 책임이 없을 것이다.
20. “또 의로운 자가 의를 저버리고 악을 행하면 내가 그 앞에 장애물을
놓을 것이다. 네가 만일 그에게 경고하지 않으면
그는 자기 죄때문에 죽게 될 것이며 그가 전에 행한 일도
기억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너에게 묻겠다.
21. 그러나 네가 만일 그 의로운 자를 깨우쳐 그가 네 경고를 듣고
범죄하지 않으면 그가 살게 될 뿐만 아니라 너도
네 생명을 보존하게 될 것이다.”

메신저들(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사람)은 청중(그 말씀을 들을 사람)들에게 전달할 사명이 있다.
메신저들은 말씀을 먹음을 통해 자신이 먼저 말씀에 용해되어
그 말씀에 푹 젖어 있어야 할 것이다.
말씀에 대한 경험이 없이 말씀을 풀어 설명할수 없다.
말씀에 대한 경험은 그 말씀이 자신안에 육신화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말씀과 더불어 함께 하는 습관이 몸에 베어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말씀을 경험하는 단계는 몇가지 단계로 생각해보면,
먼저 말씀을 이해하고, 연구하고 그 이해와 연구의 과정을 통해,
말씀의 의미를 깨닫고, 그 다음으로 말씀을 묵상하여,
그 묵상을 통해 말씀의 세계를 경험하고,
그 말씀안에 들어가 자신을 변화시켜,
말씀의 지시하는바를 따라 말씀이 주문하는 명령이나 지시를 충실히 이행하는 단계로 나아가,
그 말씀을 통해 자신을 조절하며, 말씀의 인도에 순응하여,
그 말씀과 더불어 함께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파숫꾼의 사명은 선견하는 일,
즉 먼저 앞서 시대의 미래를 볼줄 알아야 할 것이다.
미래에 일어날 일을 먼저 살펴보고,
그 일에 대한 대비를 하도록 전할 사명이 있다.
메신저들은 청중들의 길을 판단하고 그들의 삶을 평가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파수꾼이 하는 일은 백성(사람)들에게 경고하는 일이다.
앞으로 일어날 재앙이나 위급한 일에 대해 경고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경계심을 갖고 대비하도록 할 것이다.
예언자(파숫꾼)는 백성들이 갈 방향(하나님이 명하시는 것)을 지시하는 일이다.
고로 그들이 갈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일을 해결할 대안을 제시하여,
그것을 따르도록 그들을 인도해야 한다.

예언자는 메신저와 청중들의 관계를 이해하고,
먼저 그들중에 악인에 대한 경고를 해야 할 때도 있다.

왜 인생이 악으로 달려가는 가? 그것은 자신들의 악한 성품때문에 그럴것이다.
악은 모양이라도 버려야 할 것인데, 그렇지 않으면 그 악은 사람들을 오염시켜,
그 악의 세력안에 이끌려 죄를 범하게 한다.
악의 근원은 악한 존재에게서 시작이 되었다.
세상에 악을 뿌리는 악한 존재는 사단과 그의 하수인들인 악한 영들이다.

그들이 뿌린 악은 사람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죄짓는 데로 유인하여,
사람은 죄악을 순간적이든지 혹은 의도적이든지 행하는 허물을 범한다.
즉 사람이 악에 물들면, 의의 율법을 듣는 양심의 기능이 마미가 되어,
스스로 그리고 적극적이고 의도적으로 죄를 짓는 악인으로 변한다.
고로 자신의 안과 밖에 있는 모든 악의 흔적이나 찌꺼기등을 깨끗이 물리쳐야 한다.
이미 범한 죄에 대해서는 그것을 없애는 방법(회개, 용서, 그리고 정결)들을
실천해야 악의 세력에서 벗어날수 있다.

메신저(예언자)들은 의인에 대한 격려를 해야 할 때가 있다.
의인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에 대해 자신감을 갖고 있도록 격려해야 한다.
의를 행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자신감도 필요하다.
자기가 믿는 바에 대한 확신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의인은 의인의 삶의 원칙을 따를때에 만들어진다.
성경은 의인을 하나님을 믿고 그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의인은 그의 말씀을 따라 그가 명하시는 바를 순종하는 자이다.
그리고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은
그분이 명하는 믿음의 원리를 좇아 살아가는 사람이다.
보이는것에만 의존하지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그의 영적세계의 원리를 따르는 삶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에게 말씀하실때에,
그의 말씀은 인간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주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예언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선지자의 사명을 주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들은 그 말씀이 명하는 바를 들을줄 알아야 하며,
그 말씀의 의미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사람들은 그의 편에 선 하나님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과 함께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예언자에게 사람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말씀하시며,
그 예언자의 자신의 정체감을 일깨워 주고 있다.
그 예언자가 활동하는 시기는 유다나라와 예루살렘이 멸망하였으며,
참담한 국가나 그사회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하는 사명을 받아서,
그 가운데에서 심판과 아울러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는 자신의 처지를 나타내어주는 의미가 있는 직명이다.

하나님은 그 예언자를 이스라엘민족의 파숫꾼으로 세우셨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을 당하는 이스라엘민족은 망하고
다시 건설되어지는 과정을 통해,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문제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는 사명을 받았다.
하나님의 말씀은 당시를 살고 있는 각 시대를 분석하고 진단하고
판단하는 경고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각시대의 파숫꾼은 먼저 자신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시대에 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사명이 있다.
각각의 삶의 현장에서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은
즉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그 주변사람들에게 영적인 파숫꾼의 사명이 있다.
그들의 말과 언행을 통한 삶을 통해,
그 주변사람들에게 특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알려지게 하는 사명이 있다.

사람이 악에 빠지는 것은 여러가지 요인이 있을 것이다.
주위의 환경의 영향을 받아서, 혹은 나쁜 가르침의 영향으로 인하여,
혹은 악인의 모델을 봄으로, 혹은 자신스스로 택한 악한 길에서 등일 것이다.
성경은 악에 대해 반드시 그악에 따르는 댓가를 치를 것이며,
불의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고 있다.

그래도 사람이 살면서 자기가 원치 않게 악에 물들어,
옳고 의로웠던 과거의 행적과는
전혀 다르게 변질된 사람이 있는가하면,
반면에 어제까지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자신의 결단의 의지를 통해 새로운 바른 삶을 살아가는 경우도 있다.

의인은 주변인들에게 자신의 옳음을 통해
법의 준수의 필요성과 선함을 좇아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므로써,
옳지 않은 삶을 사는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줄수 있을 것이다.

각사회마다 법을 이행하는 사회적인 규범이 있는데,
법의 집행을 위해 경찰이나, 권위자들이 있다.
그리고 법을 위반한 사람들에게 댓가를 치르게 하는 법원이나 교도소등이 있다.
사회가 건강하다는 것은 법의 옳은 시행과
그 법을 따르고 준수하는 시민정신이 건전하면 그사회는 밝아질 것이다.
사회를 밝게하는 데는 부정적인 방법으로
법을 어긴 사람에 대한 처벌로 법의 엄격성을 알려
사람들로 하여금 옳은 일을 하도록 유도하지만,
긍정적인 대안으로는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도덕이나 종교의 역활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시대의 양심이며,
건강한 사회의 척도를 가늠하는 바로미터의 역활을 하였다.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일에 대해서는
왕이나 평민이나 할것없이 모두가 예언자들의 경고와 심판의 메시지와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을 선파하였다.
메신저들은 하나님의 의와 심판을 선포를 통해
그 시대의 사회와 그리고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옳은 길을 인도하는 사명이 있다.

신언(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사람들(종교인들, 사명자들)에게는
주변인들에게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기준을 알려주고,
악인은 그악에서 돌이키도록 하며, 의인에게는 더 옳은 일에 대한 격려를 하는 것이다.
그런 일들을 통해 사람들이 사는 사회를 밝게하고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다.

사회적인 책임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잘못을 범하며,
그 잘못은 더 엄격하게 처리되며,
그 일에 대해 종교인들의 바른 전언을 통해
사회적인 지도자들이나 혹은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이 보다 조심하며,
자신들의 위치에서 바른 길을 걸어 갈 것이다.

그런데 만일 종교인들이나 사회의 양심의 기능을
다해야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사명에 소홀히 하게 되면,
그 영향은 사회 전체에 어두운 영향을 주게 된다.

이스라엘이 망하게 된 원인들 중에 하나가,
제사장이나 예언자들이 자신들의 사명을 소홀히 하고,
자신들에게 주어진 하나님과 백성들사이에서,
각시대의 사회를 향해 도적적이고
영적인 파숫꾼(파숫꾼은 군대나 혹은 나라의 안전을 지키는 첨병혹은 보초병이다)
의 사명을 바로 하지 않아서 패망하게 되었던 것이다.

항상 각 시대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의인들로 부터 시작이 된다.
종교인들 즉 사회적인 정신적인 지주역활을 하는 이들이
제 역활을 하지 못하면, 먼저 자신들이 경고를 받고 심판을 받는다.

파숫꾼이 자신이 해야 할일들은 악인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고,
의인에게는 그들이 행하는 의를 칭찬하며,
더 큰 선을 향하여 나갈수 있도록 그들을 격려하는 일이다.
메신저(설교자혹은 예언자 혹은 진리의 실천자)의 경고를 듣고도 그 경고를 무시하면,
악을 행하는 악인에게는 자신이 한 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빛은 어둠이 짙게 깔려 있을때에 더 불빛이 필요하듯,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비밀을 아는 사람들(의인과 예언자)의 역활은
자신의 언행으로 자기에게 비쳐진 빛이 잘반사되어져 비치도록
자신을 가꾸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엎어져도 코가 깨진다는 말이 있다.
세상에서 별수 없이 살다가 그만 악의 길로 물들어 살다가,
자신의 처지가 더 암담해지는 어려운 일들을 만나는 경우이다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어려움을 통해 그 악에서 돌이키기를 원하신다.
악을 행하는 것이 어려워 지는 것도 자신에게는 고맙고 유익한 배려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악을 짓는 악인의 삶으로 향하여 나가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나,
어느 인생에게는 그것이 식은 죽 먹듯이 쉽게 저질러 지는 경우도 있다.

세상에 안타깝고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들은
옳은 일을 행하던 사람이 갑자기 악을 행하는 쪽으로 방향을 트는 일이며,
선한 일을 주로 하던 사람들이 그 일에 지쳐 자신의 의와 선을 포기하고,
악에 타협하는 일이다.
어제까지 옳은 일을 하고, 지금 자신이 주변의 악에 물들어 간다면,
어제의 선행은 아무런 의미도 없고,
오늘의 변질된 자신을 고쳐 돌이키는 데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자포자기, 좌절, 변절, 배신, 타락등은 인간생활에 사람들이 경험해서는
안되는 안좋은 인간의 상태이다.
신앙생활에도 낙심, 변절, 배교, 퇴보등은
자신의 인생기록에 있어서는 안될 인간의 못된 자기변화이다.
그런 상태로 빠져 들어가는 것은
파멸로 자기를 더 밀어넣는 어리석은 행동이며, 그릇된 경향이다.
그것의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는결과를 낳게 된다.

세상 살다보면, 사람들을 흥겹게하고 힘나게 하는 것은
인간자신들에 대한 소망적이며,
개선적이며, 발전적인 뱡향으로 나가는 것일 것이다.
그런 예를 구체적으로 든다면,
인생의 도(생명을 얻는 진리)을 구하는 구도자가 그 길을 발견하는 것이며,
또한 과거까지 악을 줄달음질하다가,
생명의 빛의 진리를 듣다가 깨달아,
자신의 어리석은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삶의 뱡향으로 옮아가는 일이다.

사람들중에 강도가 변하여,
새삶을 살아가고, 인생의 쓸모없는 놈팽이라고 자신을 여기는 사람들이
유익한 사람으로 변화되어, 타인에게
격려와 자극을 주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뉴스가 되는 것이다.

부모의 입장에서 이제까지 어리석게 고집스럽게
부모의 교훈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더럽게 악을 범하며,
살던 자식이 마음을 고쳐먹고
새로운 삶을 살기롤 결심하는 사건은 모든에게 청량제와 같은 시원함을 주는 소식이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들은 혹시 자신의 인생에 대한 책임의식을 갖고,
부모된 입장의 신앞에서 자신의 변화에 대한 결심을 고백하며,
자신의 개선과 발전의 결과가 나타내도록 힘쓰면
그것은 참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다.
이런 일은 누구나 할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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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이 있는 삶

로마서 1:1-7
1.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이 된 나 바울은
하나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 거룩하게 구별되었습니다.
2. 이 기쁜 소식은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해 성경에서 미리 약속하신
3. 그의 아들에 관한 것입니다. 그분으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시고
4. 거룩한 영으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임이 인정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5. 우리가 그분을 통해 은혜와 사도의 직책을 받은 것은
모든 나라사람들이 믿고 순종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6. 여러분도 그들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7.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성도가 된 로마의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그도의 은혜의 평안이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인생 자신의 삶의 근거가 되는 것이 무엇이 있는가?
그것은 자신의 궁극적인 삶의 목적이며, 삶의 방향이다.
자기의 정체감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사람을 자기 인생의 길안에서
자신의 해야 할 사명에 대한 인식을 갖게 한다.
고로 자기가 해야 할 고유한 일과 그일에 대한
천직적인 소명감이 자신의 삶의 근거가 된다.

그런 과정을 거친 사람은 자기 인생의 한걸음 한걸음씩
걸어가는 과정들이 모여 목적있는 자신의 삶을 이루어 낸다.
그래서 자신의 성취목표가 자신의 삶을 움직이는 동력이 된다.

여기에 나타난 바울은 자기의식이 투철한 사람이다.
그는 자기사명에 대해 분명한 자기정체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아는 그 사람은 정녕 행복한 인생을 사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해야 할일이 자신의 사명으로 삼아,
그일을 가장 중요한 일로 여기고
그일에 자신의 전생애를 투자하여 그일에 매진하고 있다.

힘들고 슬픈소식이 넘쳐나는 인생들의 삶의 현장에
하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바울의 사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을 통해
그는 바로 하나님의 일꾼으로 나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주님의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먼저 그 기쁨의 소식은 바울을 구원한 소식이며,
동시에 그는 이 소식을 전할 사명을 받은 사람이다.
그 기쁜 소식이 하나님의 사역자들을 통해 사람들에게 전달된다.
예언자들은 핍박가운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고난과 역경가운데에 그의 말씀을 전달하였다.
그들은 오실 메시야를 위해 끊임없이 역사속에서 전파하였다.

복음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에 대한 뉴스이다.
그는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스라엘의 민족안에 태어나셨다.
그리고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메시야이시다.
왜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나?
그는 다윗의 하나님과의 언약에 근거한 메시야이시다.
다윗은 하나님앞에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하였던 왕이다.
메시야는 이상적인 왕의 통치의 약속에 대한 기대감으로 오신 분이다.

하나님의 영은 거룩이라는 하나님의 속성으로
세상의 것들과 구별되는 사람들에게 오시므로 그들을 구별된 존재들로 세운다.
그 영이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를 다시 살리시므로
그 부활의 능력을 나타내었다.
그 영은 생명의 영이며, 죽은자를 살리는 하나님의 영이다.
그 영의 역사안에서 십자가의 예수가 부활의 예수로
죽음을 이기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통해 사람은 자신의 자신됨과
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알게 된다.
사람이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이 장차와 영원가운데에 어떻게 되어야 하는 지를 알아간다.
그리고 자신의 신분을 깨닫고, 그 신분의식에 의해 자신이 위치를 발견하고,
그위치에서 자신이 할일을 찾아, 그 일을 하게 된다.

사람은 먼저 자신이 되고 나서 자신이 할일을 하는 것이 순서이다.
자신이 되지 않고 직책이나, 사역을 하러 나선 경우는
일을 하면서 많은 문제점을 발견하게 된다.

바울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았고, 그분안에서 자신의 변화를 경험하였다.
과거에는 종교적인 지식이나 관습에 의해
자신이 유대교의 선생으로 사람들에게 군림하여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주는 사람으로 지냈으나,
이제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해
변화된 그의 고귀한 성품이나 인격은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은혜를 좇아,
여러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고 사람들을 살려야 할 책임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그가 바로 만인에 대한 봉사자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고 맡은 사람으로 만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 말씀을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발견하고,
그리스도안에서 되어야 할 사람들로
사람들에게 그 비결을 갖고 전하는 사람으로
바울은 자신(바울자신이 먼저 변화된 사람)을 그렇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을 올바르게 되도록 하는 가르침은 그것을 사람들이 받을때에,
그 진리가 자신들을 변화시키고, 새롭게 할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진리안에서 자신을 새롭게 변화시킨 사람만이
다른 사람에게 진리의 자기경험를 통해 영향을 줄수 있다.
진리는 사람을 변화시키고 사람의 인생에 막강한 좋은 영향을 주기 때문에
변치않고,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진리가 사람들의 삶을 이끌어 갈 뿐 아니라,
사람들 자신들이 속해 있는 사회에서 인생의 삶을 빛나게 하는 역활을 한다.

복음을 받은 사람들은 자신들도 바울처럼
그리스도의 부르심과 그분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의 부름에는 사람들을 향한 그의 사역의 목적을 제시한다.
그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안에서 온전한 사람들로 세우는 것이며,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예수께서 사람들이 되어갈수 있는 길을 먼저 열어놓으셨다.
그리고 그 목적을 위해 사람들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불러냄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에 의해 세상에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은
그들이 자신들에게 이미 임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경험한 사람들이다.
성도란 하나님의 거룩한 무리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거룩이란 하나님에게 붙어있는 것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함이다.
세상에서 따로 구별된 존재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각 지역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그곳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면,
그것은 자신의 영원한 영적인 고향에 들어가는 첫 관문이다.
그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다만 자신의 처지나 직업이나,환경안에서
거기에 있는 자신으로서 그의 부름을 따라 살면 되는 것이다.
농부는 농부로서, 기술인은 기술인으로서, 전문인은 전문인으로서,
혹은 가족의 일원으로서, 단체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소명(하나님의 부름)을 이루어 가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음은 하나님나라의 초청을 받는 것이며,
그가 인간을 위해 마련한 모든 영광과 축복의 자리에 동참하는 권한을 부여받게 된다.
부름에는 그의 깊은 예정과 섭리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의 부름안에 있는 그의 예정은 만세전에 작정하신 뜻이며,
그가 자신의 백성으로 선택한 무리들을 영원전에
이미 작정하신 계획의 일로 부름이 시작된 것이다.
그의 섭리는 그의 부름을 각자의 인생들속에
그의 기이한 손길로 보이게 혹은 보이지 않게 역사하신다.

사람들이 각자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분명한 확신과 자기 사명에 투철하여,
평생을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한 목적의식아래에 사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의 인생 앞에 놓인 과정들이 고난과 역경이 다가오더라도
자기가 가는 길을 후회없이 그리고 나약하게 진행하지 않으며,
일관된 자세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갈수 있을 것이다.
이런 사람은 바로 자신의 인생을 목적이 있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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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심을 극복하려면

우리네 인생살이에서 어느 경우에 있어서도
스스로 자신에 대해 낙심하는 것은 가져서는 안될 자신의 태도이다.
신앙인의 생활에도 낙심은 금물이다.
하늘나라를 향하여 전진만 하는 영적인 순례의 인생의 길에서
낙심은 신앙인들을 뒷걸음을 치게 하며,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위태하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고로 신앙의 현상중에 가장 나쁜 것은 낙심이다.
믿음이 없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이 신앙인의 낙심이다.
절망적인 태도가 낙심을 가져오며,
그 태도는 또한 자신의 모든 것을 허물어 뜨려 놓는다.

그 낙심은 부정적인 생각에서 비롯되며,
자신의 마음속에 절망감이 들어오면서,
낙심하여 자기스스로 힘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낙심을 잘하는 사람은 똑같은 환경이나 경험을 하여도
다른 사람들과 달리 거기에 부정적으로 쉽게 반응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긍정적으로 그 일들을 보고 어려움을 감당하는데,
낙심하는 사람들은 그 어려움에 짓눌려 더욱 절망감에 빠진다.

고로 낙심은 주변환경을 보고 체념하여 생기는 자신안에 있는 부정적인 관점이다.
절망적인 상황이 펼쳐지면,
누구나 마음이 낙담이 되어 절망감에 빠진다.
그렇지만 지금은 낙심하는 상황에 처해있지만,
자신의 마음을 지켜, 굳게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으면
그런 절망적인 상황들을 극복할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낙심은 인간자신의 나약함을 강화한다.
자신감을 결여하게 여기게 하는 낙심하는 마음은
자신을 자신할수 없는 사람으로 인정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그/.그녀는 쉽게 낙심에 빠져서,
자신을 그 문제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하여,
더욱 그런 좌절된 상태에 자신을 내던져서 거기에 머물러 있다.

위대한 믿음의 선진들중에도 낙심을 경험한 이들이 있다.
대표적인 경우는 구약의 엘리야예언자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위대한 하나님의 예언자로,
온나라가 우상을 섬기는 상황하에서
수백명이 더 되는 우상을 섬기는 선지자들과 영적인 대결을 하여 승리하며,
이스라엘백성들을 하나님신앙으로 돌아오게 하는 역활을 하였지만,
당시 이스라엘의 악한 왕이나 왕비의 자신을 죽이려는음모에 자신이 두려움에 휩싸이면서,
자신에 대해 낙심을 경험하게 되었다.

대개 자살하는 경우는
자신에 대해서나 자신이 살아야 하는 인생의 사명에 대해 스스로 낙심하여
자신과 자신의 생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런 경우는 가장 큰 낙심의 비애의 경우이다.
그 낙심은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스스로 자신의 생명이나 인생의 삶에 대해 주관자로 나서는 것으로,
자신의 불행과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는 것이다.
어떤 연유로도 자신과 자신의 생을 스스로 포기하는
극단적인 낙심의 경우인 생을 포기하는 일은 일어나서는 안될 것이다.

믿다가 낙심하는 것은 안믿은 만 못하다.
하나님은 끝까지 자신을 믿어주는 것을 좋아하신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귀하게 여기시며, 그를 자신의 친구라고 하셨다.
아브라함은 75세에 자녀의 약속을 받았지만, 100세에 가서 자녀를 받았다. 그 사이에 수십년을 사는 동안 그는 낙심할수 있는 상황이나,
일들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자녀를 갖는 일에 결코 낙심하지 않았다.
그는 끝까지 자신을 낙심하게 하는 자신의 상태나 환경을 극복하였다.
고로 아브라함의 가진 믿음은 불멸의 믿음이라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말씀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실것을 바라보고,
자신에 대해 낙심하여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다.

낙심을 극복하는 것은 낙심의 원인을 살펴보고,
낙심케하는 원인을 제거하는 노력을 가져야 한다.
낙심의 원인이 외부의 환경이나 혹은 일등 자신의 밖에서 오는 것이라면
그런 원인들을 잘 다루어 자신의 마음을 다독이며,
그 원인들이 지나가면,곧 낙심하는 데서 자신을 극복할수 있다.

그렇지만, 낙심의 원인이 자신안에서 나오는 것이면,
그것은 그 낙심을 유발하는 자신의 부정적인 성향이나,
혹은 심적인 태도, 그리고 심령의 상태에 대해
전문인의 도움(두뇌의 이상기능의 영향 때문에 올수도 있으므로
약물로 치료가능할 수 있음 혹은 묵상이나 명상적인 훈련참여)을 받는 것이 필요하다.

낙심이 들때에 항상 그 낙심하는 마음이면을 볼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 이면은 낙심과 정반대의 요소인 자신감이 있다.
우리 마음의 상태가 동전의 양면과 같이
낙심을 이기는 길은 쉽게(마치 동전의 이면에서 저면으로 돌리듯)
자신이 자신에 대해 자신감을 갖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을 갖기가 쉽지 않을때에
자신이 처해있는 환경의 변화의 참여(여행이나 혹은 운동이나
혹은 자신을 격려시켜주는 독서나 취미할동)나,
혹은 주변인의 도움(조언이나 상담등 타인과의 필요적절한 대화)으로
자신의 낙심의 상태를 극복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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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이입이라는 말을 생각하며

영어로 empathy 라는 말이 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감정이입”이라는 말이다.
인간관계에서 이 말은 참으로 중요한 말이다.
이 말을 영영사전에서 보면, 크게 두가지로 설명을 해준다.
하나는 자신을 상대방과 동일시하는 것이며,
이 해석의 뜻을 좀더 풀어본다면 상대방과 대화나 교류를 할때에
상대방의 감정에 대해 자신의 감정이해를 통해 동일시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

또하나는 동정심이나, 연민으로 이해한다.
그것은 사람의 상대방에 대한 사랑이나 애정이
상대방에 대한 관심의 표현으로 나타나는 것일 것이다.

인간의 대화를 많이 주고 받았다 할지라도
서로의 감정을 나누지 않는 대화에는 한계가 있다.
친한사람과의 서로의 정을 나누는 것은
이 감정이입을 잘소통이 되었을때에 가능하다.
이처럼, 사람과 사이의 관계나, 교제나 대화에 있어서,
서로의 감정을 주고받는 일처럼 중요한 것은 없다.

상대방간에 두뇌의 이성으로 서로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되어도
감정에 앙금이 남아 있으면,
상대방과 진정한 대화나 교제가 이루어졌다고 할수 없다.

최근에 나는 이 말의 중요성을 다시한번 상기하는 경험을 하였다.
부부간에 진정한 감정교류나 배우자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서로에 대해 진정한 마음과 마음의
관계나 교제가 이루어 지지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부부간에 대화에 있어서 서로의 감정이입이 잘되면
그 부부는 다정한 부부가 되며,
부부사이에는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따스한 인간의 정이 흐르고 있는 것이다.

부부생활을 하는 중에 가장 힘든 때는
서로에 대해 상대방을 이해를 못하고,
상대방의 이해를 받아주지 못할때이다.
경제적인 어려움이나, 혹은 가족대소사에 일어나는 힘든 일이나,
혹은 직장에서 퇴직하는 일등,
여러가지 부부나 가족의 생활을 힘들게 하는 게 있다.
그러나 부부생활에서 가장 힘들어지는 하는 것은
부부가 서로 마음과 마음을 주고 받지 못하고
즉 서로가 감정이입이 되지않아
감정소통이 잘 되지 않을 때이다.
그때에는 서로 대화를 하여도 서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으며,
서로의 감정적인 상태를 무시하게 된다.

요즘은 E.Q(감성지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모든 인간관계에 있어서 감정의 차원은
이성적인 차원의 영향보다도 더 깊이 영향을 주고 받는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안정된 감정생활을 하게 하는 교육은
어느 교육보다 더 중요하다.
보통 부모들은 아이들이 공부를 잘하는 것에 관심을 갖고,
그일에 매달리는 경우가 많으나,
건강하고 행복한 자녀들의 삶을 바라는
부모들은 자녀들의 감성교육이나 개발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실질적으로 자기와의 관계에 있어서나
더 나아가서 대인관계나 사회생활에 있어서
감성지능이나 풍부한 감성의 소유의 능력이나 활용은
더 중요한 인간의 가지는 자질이다.

감성적인 차원에서 인간과 인간의 교류안에서 막힘이 없는 감성의 흐름은
모든 인간관계의 자연적인 조화를 가져오는 결과를 낳는다.
평소에 인간관계에 대해 생각해보면,
지인과의 대화를 할때에, 혹은주변사람들과의 교제를 할때에
단순히 소통의 차원에서 정보나, 인식적인 문제에만 생각하고 소통을 한다.
그런 경우에는 인간관계가 공식적이며 사무적이고,
더 이상의 관계로 발전하지를 못한다.
그렇지만 마음과 마음을 주고받는 대화은
감정이입이라는 소통을 통해서
보다 깊고 영향력이 있는 인간관계나 교제가 이루어진다.

전문적으로 상담을 하는 일이나
혹은 청중들에게 영향을 주는 연설가등은
연사와 청중간에 서로의 감정을 주고 받지 못할때에도
진정한 상담이나 연설의 효과가 일어나지 않으며,
피상담자나 청중들에게 전혀 영향을 줄수가 없을 것이다.
거기에 감성의 흐름의 중요성을 파악하고,
그 일에 관심을 갖고 자신을 개발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모든 인간관계나 대화의 교류에서 사람의 감정적인 부분을 파악하고,
감성의 흐름을 인지하고,
감정적인 영향력을 고려할때에,
보다 효과적이고 영향력있는 인간관계나 교제를 이루어 낼수 있다.

감정이입이라는 말을 잘 이해하고 경험적으로 실천하게 되면,
자신과 만나는 사람의 슬픔과 기쁨과
혹은 분노와 싦음에 대한 감정등에 대해 민감하게 잘 반응하며,
그런 감정적인 교류전달에 관심을 가져 메마르지 않는 인간관계를 유지하며,
자신안에서 일어나는 감성의 상태등을 잘 파악하여 건강하게 대처하게 된다.
그리고 보다 나은 풍부하고 즐기는
인간관계나 교제의 대화를 이루어 낼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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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만은 인생을 망하게 한다

2007/04/11 오후 11:50 | 메시지

예레미야13:15-18
15. 너희는 들어라. 귀를 기울여라. 교만하지 말아라
16. 그가 흑암을 일으키시기 전, 어두운 산에서 너희가 비틀거리기 전,
너희가 바라던 빛을 그가 캄캄한 흑암으로 바꾸시기 전에 너희는
너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
17. 그러나 너희가 듣지 않으면 너희 교만때문에 나의 심령이
외롭게 흐느낄 것이며 여호와의 양떼가 사로 잡힌 것 때문에
내가 눈물을 흘리며 통곡할 것이다.
18. 여호와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왕과 그의 어머니에게
‘너희는 높은 자리에서 물러나 앉아라.
너희 영광의 면류관이 떨어졌다’하고 말하라.

교만은 인간실패의 지름길이다.
인간이 자신을 실패하는 자로 여기려는 데는
자신이 얼마나 교만한가를 알게 되며,
그 일로 나중에 자신의 망하게 되는 요인를 발견하게 된다.
교만한 그 사람은 처음에는 잘 되는 것 같아도, 결국 얼마 안있다가,
자신의 삶이 실패하게 되든지 혹은 곁길로 빠져 망하게 된다.

교만은 넘어짐의 앞잡이라,
선줄로 생각하는 자에게 넘어질까 조심해야 하듯,
인간에게 교만은 쉽게 가지게 되는 인간의 성향이다.
조금 높여주면 교만이 하늘높이 솟아 올라,
사람들의 마음의 어리석음을 자신만의
바벨탑(성경의 고대에 있는 사람들이 인류가 흩어지지 않고,
함께 모여 자기들만의 세계를 유지하고,
하나님을 대적하여 탑을 쌓았다가 그 탑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무너져 내린 탑)
의 세계를 쌓아놓는다.

하나님은 인간의 교만을 가만두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교만은 인간자신을 무너뜨리고,
인간의 위치에서 인간 자신들을 망하는 쪽으로 향하는 역활을 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신에게 바른 소리를 하는 말을 듣기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귀에 달콤한 말을 주고,
자신에게 아첨하는 말에 솔깃하여 그말에 속아간다.
그렇지만 바른 소리를 하고 진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그 마음이 정직하여, 자신을 낮추고 자신을 올바르게 만드는
그 정직한 말에 귀를 기울인다.

지혜로운 자녀들은 부모의 교훈과 책망을 달게 받으며,
그 부모의 교정하는 가르침에 순종한다.
그러나 불순종하는 자녀들은 부모의 말을 거역하고,
자신들이 하고 싶은 대로 행한다.
그리고 잘못된 길로 접어들어도 자신들의 잘못된 것을 깨닫지 못한다.
듣고 깨닫는 사람들이 지혜로우며, 또한 겸손함 사람들이다.

어리석은 인생이 갑작스런 자기위치변화나
소유변화가 있을 때에 빠지기 쉬운 교만의 함정이 있다.
그들은 일시적인 자기의 교만의 태도로 인하여,
오히려 자신의 삶에는 안좋은 결과를 낳게 한다.
그런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사람의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지 않았었으면 좋았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나중에 서야 자신의 가지고 있는 그 교만의 태도나 자세가
자신의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경험이 없고 젊은 사람을 지도자로 내세울때에나,
못사는 사람이 갑자기 부자가 되는 그런 경우에 그런 교만에 빠지기 쉽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성향이 자신을 교만하게 하는 경우나,
잘못된 부모의 교육으로 자신을 교만하게 여기며 지내는 경우도 있다.
부모가 지나치게 자녀들을 그들 중심의 인생관을 갖도록 유도하게 될때에,
자녀들이 쉽게 자기 도취에 빠지거나,
혹은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 즉 자기가 속해있는 모든 환경에서 자기중심적으로 판단하며,
모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자기를 위해서만 존재한다고 여기고
그들을 자기의 욕구를 달성하는데 이용만 하는 경우에
다른 사람이 보기에 교만한 인생으로 비쳐 줄수 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소유물이 없었던 사람이나,
혹은 낮은 자리에 있을때에는 겸손하던 사람이
갑자기 많은 소유물을 갖게 되었을때에나,
혹은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쉽게 자기 교만에 빠져 안하무인으로 주변 사람들을 대하게 되는 경우도 잇다.

유명인들중에 자신의 인생이 특별나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그자신은 자신도 모르게 사람들에게 교만한 사람으로 보여지기 쉽다.
어느 일에 업적을 남기거나, 혹은 어느 단계에서 훈련의 효과를 본 사람들이
자기가 이룬 것을 보고 자기 도취에 빠져, 자기 교만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을 싫어하신다.
그 교만이 아름다운 영적인 영물들(천사들)이 자기의 위치에서 떨어져
하나님을 대적하는 존재로(귀신들) 변화되어,
결국에는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더러운 존재들이 되었다.
그 교만은 이상적인 인간(창조주가 창조후에 보기에 좋았던 인생들)을 타락시켰으며,
그들을 복잡한 문제에 휩싸인 존재로 전락하게 하였다.

교만한 인생의 앞길에는 망하게 하는 요소들만 있다.
사람이 교만하게 되면, 하나님이 그 잘 나가는 인생도 그의 손길 앞에서 무너져 내리게 한다.
교만한 사람이 자신의 형통한 것을 자랑하고,
그것을 누리다가 언제인부터인가 그의 밝던 인생의 현장에 어둠이 깃들일때에,
자신의 삶이 비틀거리는 상황에 부딪치게 된다.
그 인간의 교만은 사람들을 고집스럽게 하며, 의를 추구하지 않게 한다.
더 나아가 그런 교만한 사람들이 많아지면,
인간사회에서 악을 조장하며,
악의 세력으로 횡횡하게되어,
사회가 어두워지며, 어렵게 되어서
결국에는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는 상황으로 나가게 한다.

자신의 교만에 대해 지적해주는 충정어린 사람들의 충고를 외면하고,
주변사람들의 권면을 무시하게 되면,
그 교만한 사람은 더 나쁜 사람으로 나가게 되며,
그 주변사람들은 마음이 아프고,
그들의 심령에 안타까운 심정이 들어 그 교만한 사람의 삶을 탄식하게 된다.

교만한 사람들이 그들의 교만의 고집스러움으로 인하여,
자신들이 이미 잘못을 저질러 놓고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일이나 상황을 더 나쁜 쪽으로 만들어 버리며,
자기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더 괴롭히게 된다.
교만한 사람으로 인하여 자신도 힘들어 지게 괴롭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지만,
그 어리석은 교만으로 일을 저지른 결과에 동참하는 사람들은
억울하게 그 고통에 참여하며 그것을 감내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교만한 인생들을 거부하신다.
그들의 오만과 거드름을 피우는 것을 미워 하신다.
그 자리가 아무리 높고, 그사람들의 위치가 아무리 견고해도
결국에는 하나님에게 버림받고, 자신의 삶이 버림받은 자의 위치로 전락하게 된다.

사람들이 모여사는 사회에 온유한 사람이
결국 자기가 원하는 땅(자리, 소유)을 차지하며,
겸손한 사람들이 사람들사이에서 환영을 받는다.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도 기뻐하신다.
겸손, 겸손, 겸손은 인생을 잘사게 하는 자신의 좋은 자산이며,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을 높여주고 가치있게 해주는 덕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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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속에서 희망을 걸고


예레미야 애가 3:22-27
22. 여호와의 크신 사랑때문에 우리가 소멸되지 않았으니
그의 자비가 영원하구나.
23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는 정말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24 내 심령이 말하는구나 ‘여호와는 나의 전체이시므로 내 희망을 그에게 두리라.’
25 여호와 께서는 자기에게 희망을 걸고 자기를 찾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26. 여호와의 구원을 조용히 기다리는 것이 좋고
27. 사람이 젊었을때 인내를 배우며 훈련하는 것이 좋다.

유다의 멸망을 바라보며 슬픈노래를 부르는 예레미야는
그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바라며,
그에게 희망을 두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유다나라는 자신들의 범죄와 허물로 심은대로 멸망을 거두고 있다.
절망가운데에 있으면서 희망을 생각하는 것은 인생을 힘있게 살아가는 비결이다.
절망에 빠지게 하는 상황에서는 자신이 힘을 잃는 것은 어쩔수 없는 처지이지만,
그 상황은 언제나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곧 잠시 있으면 다시 새로운 희망을 통해 자신의 삶을 꽃피울수 있는 기회가 다가오는 것이다.

고난가운데에 있으면서 그 고난을 참고 견디며,
교훈을 되새기며, 자신을 가다듬는 기회를 삼고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은 복이 있다.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힘을 잃지 않고 꿋꿋히 서있는 모습은 아름답다.
고난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들며, 자신들을 돌아보게 하며,
주어진 환경들을 통해 없는 것 가운데에서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의 가치와 유익을 찾으며,
그것을 통해 그 시절들을 극복하는 재료를 삼아,
이후에는 그들은 더 강한자, 그리고 지혜로운 자로 만들어 지게 된다.

실패를 당하면서도 성공할 것을 생각하며,
실패의 원인을 분석하여 새로운 시도를 향해 힘찬 발걸음을 내딛는 사람은
반을 성공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실패는 자신의 삶을 정리하게 하며, 자신의 하는 일을 돌아보게 한다.
성공을 이룬 사람들은 실패를 많이 거쳐 본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 실패를 싫어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그것을 교훈삼아 성공하는 자신을 가꾸는 밑거름으로 삼았다.

유다즉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들의 범죄로 온나라가 멸망을 당하는 과정을 통해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종교와 인생의 교훈을 배웠으며,
이후에 유다는 세계에 흩어지며,
고난 당하는 민족으로 호된 시련의 세월을 겪지만,
그 고난가운데에 세계에서 적응하는 것을 배우며,
자신들의 생존이나 번영을 생각하며,
후손들에게 좋은 인생의 지침과 올바른 신앙의 전통을 물려주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이 잘못에 대해 분명히 판단하며,
그들의 죄를 심판하지만, 결코 인간자체를 파멸로 이끌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항상 살길을 열어주시고, 멸망으로 인도하지 않으신다.
다만 사람이 망해가는 것은 자신들의 잘못이나 어리석음,
혹은 파멸하게 되는 원인이 오만한 모습이나 고집스런 악한 태도때문이다.

인간이 범죄하여 그들의 잘못으로 댓가를 치르는 중에도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자비를 베푸신다.
하나님은 세상 모든 사람들을 사랑할수 있는 크신 분이다.
그는 온우주와 그가운데에 존재하고 있는 만물의 모든 것을 지으셨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돌보신다.
비록 인간들이 잘못하여, 범죄해 빠져 있어도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사랑이며, 자비이다.

죽음이라는 것은 소멸을 의미하지 않는가?
육체와 영혼의 분리를 통해 사람은 죽어간다.
그리고 이 지상에서 소멸되어간다.
그렇지만 육체를 떠난 인간의 영은 영원한 세계로 향하여 나아간다.
다만 그길이 두 갈래길에서 갈라지만
그영혼들은 영생을 얻는 미래와 영벌을 당하는 미래로 나누어진다.

하나님의 자비는 죽음을 맞이할 인간의 운명에 대해 안타가워 하신다.
그의 사랑은 그들을 향해,
항상 자상한 어머니의 모습을 가진 아버지와 같은 분으로 다가온다.
모든인생들,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는 한사람,
그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무시하거나 잊을수 가 없다.
그가 한사람의 영혼을 향한 열정은 유일한 자신의 아들인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혀 죽도록한 그 사랑에 있다.
그 사랑은 항상 망해가는 사람들을 향해 바라보는 하나님의 마음을 그들에게로 향하게 한다.

하나님의 자비가 새롭게 삶의 호흡을 시작하는 아침마다 사람들에게 신선하게 다가온다.
저녁에 사람들의 낮에 분주한 활동으로 고된 육체을 쉬게 하고,
잠을 통해 다시 자신들의 육체가 힘을 얻게 하고,
그들의 마음이나 영혼이 생기를 얻게 된다.
밝게 빛나는 아침의 햇살을 맞으며, 새롭게 다가오는 신선한 공기처럼,
하루를 살아가는 자신들에게 하나님은 신실하게
그의 자비와 헤택을 누리며 살게 한다. 아침마다 우리는 희망을 품고 하루를 시작할수 있다.

인생의 많은 날들주에 자신들이 젊은 날에나, 혹은 무엇이나 시작하는 순간에
모두가 새로운 소망에 마음을 푸근하게 할수 있다.
그리고 새롭게 자신을 시작할수 있다.
그것은 그런 하나님의 자비와 베푸시는 혜택으로 인함이다.
그는 우리들 자신의 구원과 영광의 하루의 날을 이루기 위해
천년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신실한 분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비로우며 신실하다는 이사실을 명심하여,
자신들의 영혼을 향해 항상 내가 그의 자비하신 손길에
나의 희망을 걸리라는 다짐을 통해,
사람이야말로 자신들의 모든 것이 그의 손길에 달려있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희망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
사람이 신에게서 그것을 찾아 발견하고 그것을 자신의 것을 삼아,
인생을 힘있게 그리고 가치있게 그리고 의미있게 살아간다.

인생의 좌절이나 고통중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아 나설때에
하나님은 그들의 모습을 좋아하신다.
하나님의 부르는 초청의 음성에 불러냄을 받아
이미 하나님의 집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보다,
아직도 그의 부르는 음성을 외면하며 살고 있는 인생들에게 마음을 쓰신다.
그들도 마찬가지 신의 품안에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때로는 어떤 인생들은 좌절과 번민과 고통속에서 신의 음성을 듣고 그에게로 나온다.
어느 사람들은 진리를 구하고,
변치않는 삶의 원리나 자신이 살고 있는 인생의 세계를 바라보고,
자신을 살게한 신을 찾아나서는 사람들도 있다.
어떻게 해서든지 누구를 통해서든, 하나님은 자신을 찾는 자들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어떤 여유에서든지 신을 찾아 발견하고 그에게 나아와
자비와 사랑을 기대하며, 인생의 축복을 기대하며,
절망속에서 희망을 얻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은혜를 주신다.

사람이 일이 안되고 인생이 힘들때에는 잠시 삶을 살아가는 손을 놓고,
하늘을 바라보며, 하늘에 계신 분을 생각하는 것은
지치고 나약해진 자신들을 돌보고 힘있게 하는 신의 손길을 기대할수 있다.
때로는 세상은 사람들을 분주하게 하고 정신없게
만들어 쓸모없는 일들로 시간을 낭비하게 한다.
그렇지만 자신의 인생을 값있게 살아야지 생각하는 사람들은
잠시 조용히 자신들을 돌아보는 기회를 가져보는 것도
좋은 날이나 좋은 일을 만날수 있는 계기가 된다.
나에게는 나의 많은 인생의 날들중에
가장 감격스럽고 기뻤고, 의미있었던 날은 나에게 그분이 찾아온 날이다.

사람이 젊을때에 힘을 낭비하지 않고,
자신의 정력을 쓸데없는 일에 소모하지 않고 살면
인생을 사는 지혜를 얻으며 살아갈수 있을 것이다.
젊음은 사람들을 분주하게 하며,
왕성한 의욕이 자신을 휘둘러 마치 오래살고
기회가 많다고 여기고 사는 사람처럼 만들어 버린다.
때로는 젊은 날에 일들의 실패와
힘든 인생관계의 상처와 인생의 아픔과 삶의 좌절감을 맛보는 것이
그가운데에서 인내하는 법을 배우며,
이후의 자신의 삶에 값진 교훈이나
유익하고 힘있는 인생을 살게 하는 저력이 될수 잇다.
절망속에 희망을 걸고 이 삶의 원칙은
하나님에게 있고, 그를 찾는 자신에게도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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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사실에 대한 단상

빈무덤은 예수님의 부활을 대변한다.
모든 인류는 이땅에 육체를 입고 와서 살았다.
그리고 자신들의 몸을 이룬 육체가 육체의 죽음을 통해, 땅의 먼지로 변하게 된다.
모든 인간들이 자신들이 살았던 육체의 껍테기를 이지상에 남기고, 그들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들의 몸의 DNA의 흔적들을 남기고 이세상을 떠난 것이다.

세상에 살았던 사람들중에 죽음을 보지 않고, 이 지상에서 사라진 에녹과 엘리야(성경구약에 나타난 두 인물: 에녹은 신과 동행하는 삶을 살다가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다.
엘리야는 하늘로 올리움을 받았다)를 제외하고 모두가 육체의 죽음을 통해, 그들은 무덤을 남겼다.

십자가에서 죽었던 예수는 무덤에 들어가 시체가 되어 3일간을 그곳에 있었다.
그의 몸에는 상처투성이와 머리에 가시면류관을 쓰신 상처의 흔적(이것은 인간의 두뇌가 항상 생각하는 것에 죄의 영향하에 있었음에 예수그리스도의 죄의 댓가를 치름)과
두손(손을 짓는 인간의 모든 죄에 대한 댓가를 치름)과
두발(악을 행하고 죄를 범하는 일로 분주했던 인간의 발걸음의 댓가를 치름)에 못을 박히고,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예수,
그 십자가의 예수를 향해 로마의 병사가 옆구리를 찌르니
그곳에서 물과 피가 쏟아져 내렸다
(예수의 옆구리 상처는 인간의 심장 어딘가에 있을
인간의 마음에 죄를 담았던 흔적들에 대한 댓가를 치름).
그리고 십자가에서 자신의 일을 다 마치시고 숨을 거두셨다.
그는 죽었다. 그의 육체는 다른 사람들처럼 죽음이라는 세력에 휩싸여 버렸다.

그러나 떠오르는 동녁하늘에 환히 비쳐주는 빛처럼, 죽어있던 그의 육체는
죽음에서 다시 살리시는 생명의 하나님의 역사로 인하여,
즉 죽음에서 생명으로 살리는 생명의 영의 역사로 십자가의 예수는 다시 살아났다.
그의 몸을 죽음에서 다시 살리는 생명의 영이 임하므로,
그의 죽은 몸이 살아난 것이다.
그리고 죽었던 예수, 즉 그 십자가의 예수가 부활예수로 변화된 것이다.
예수는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모든 인류를 언제나 무겁게 짓누르고,
억압하는 죽음의 권세를 깨뜨렸다.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등 3여인은 죽은 예수의 몸에 바를 향료를 구하여,
그 무덤에 갔으나, 예수님을 찾지 못하여 있을때에, 그녀들은 어리둥절해 있었다.
갑자기 빛나는 옷을 입은 두사람이 나타나 그들 곁에 섰다.
여자들이 무서워서 얼굴을 땅에 대자 그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였다.
“왜 살아 계시는 분을 죽은 사람가운데서 찾느냐?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
전에 갈릴리에 계실 너희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해 보아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경험한 사람들은 놀람과 경이로움과 큰 기쁨으로
그들은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것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통해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모든 인류는 죽음앞에 두려워 하며,
항상 죽을까 하는 불안함이 있는 것이다. 죄로 인한 댓가로 누구에게난 죽음이 찾아 온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를 통해 그 죽음에서 생명의 부활을 믿고
그가 약속하신 바를 의지하는 사람들은 비록 육체의 기간이 끝나 죽음에 이르지만,
그들은 그 약속을 믿음으로 언제가는 예수님처럼
그들의 죽어 썩어 흙이 되어 버린 그들의 몸이 다시 살아,
예수님처럼 영광의 몸체를 입을 날이 다가 올것이다.

십자가에 죽은 예수를 다시 살리신 생명의 하나님의 영은
예수를 믿는 이들마다의 마음속에 그생명의 약속을 보장하심으로
그들속에 생명으로 역사하신다.
그 영은 믿는 이들속에서 함께 하여, 그들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안고 살게 한다.
그 영은 때로 믿는 이들속에 믿음을 심어 주기도하며,
그들가운데에서 모든 분야에서 그들을 돕는 분으로 함께 하신다.
그 생명의 영은 사람들속에 하나님의 생명의 혜택안에서 살도록 하며,
죄와 죽음의 권세의 세력으로부터 그들을 풀어주고 자유하게 하며,
비록 육체안에 살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복(평안, 목적있는 삶, 영생에 대한 보증을 통한 영혼의 안식등)을 누리며
살게한다.

처음에 제자들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났다는 그녀의 증거를 믿지 않았다.
그러는 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이 모인 집에 오셨다.
그의 부활을 보여주셨다. 그런데 그 제자들중에 도마라는 제자가 그곳에 있지 않았다.
그는 다시 살아나신 예수를 만났다는 그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예수님의 손에 못자국에 손가락을 넣어보며,
예수님의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의 마음에 가득 의심이 쌓여 있었다.

인간이 소유하는 믿음은 그 믿음을 갖게해 주는 사실을 바탕으로 형성된다.
고로 믿음의 대상이나 확실한 사실에 의해 사람에게 믿음이 생성이 되며,
의심을 이기고 자신안에 믿음의 확신에 이르게 된다.
부활하신 예수나 그 예수의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로 부터 나타난 증거는
그 증거를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엄연한 사실로 이해되며,
그 사실에 대한 자기확신의 경험에 이르게 된다.

8일이 지난후에 다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거기에는 의심하는 도마도 있었다.
예수님이 의심하는 도마를 향해
“네 손가락을 내밀어 내 손바닥에 넣어보고 네손을 내밀어 내옆구리에 넣어보아라.
그리고 믿음없는 자가 되지말고 믿는자가 되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도마는 “나의 주님이시며 하나님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부활을 의심하였던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그에게는 충격적이고 극적인 경험을 하게 되었다.
도마는 평소에 사실확인을 좋아하는 스타일의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는 언제나 자기가 경험하지 않고서는
어떤 사실에 대해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었을 것이다.
사실 누구에게나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사실을
누가 자기에게 이야기 해준다고 그 들은 이야기를 통해서만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신앙의 신비에는 사실이나 이성의 이해방식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현상들이 있다.
사람의 두뇌의 이성을 통한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다.
인간 삶의 현장에 일어나는 일들은 보통 사람들이 상식을 통해
그 사실을 납득하고, 이해하게 된다.
그 상식이라는 것은 사람이 자신이 평소에 알고 있는 이성활동(감각에서 얻은 정보에 대한 이해)을 통한 지식습득이나 혹은 자기 이해관점안에서의 경험에서
얻은 견해를 자기의 세계관이나 인식관(자기판단)으로 여기고 살아간다.

그런데 인생의 일어나는 일들중에는 그 상식이해의 경계를 넘어서는 일어나는 일들이 있다.
신앙에는 많은 요소들이 그 경계들을 넘은 부분들에 대해 다루고 있다.
증명해 보이지 않는 영혼의 존재, 육체의 감각의 눈으로 인지 하기가 쉽지 않는 신의 손길,
죽음넘어의 사후세계, 영원한 차원의 세계,
보이지 않는 영적인 존재들의 영향과 현상, 원인을 알수 없는 일어난 현상들,
인간 자신의 두뇌의 활동이나, 자기 내면의 영역안에서의 이해와 활동들(마음, 정신, 영혼)등 많은 것들이 인간의 이해나 경험의 경계들을 넘어서 일어날수 있는 일들이 있다.

무엇이든지 자기경험을 통한 이해방식을 통해, 자기이해에 이르게 된다.
현대인의 세계관이나 이해방식은 증거나 증명에 의해, 사실을 받아들이며,
그 사실에 대한 자기경험의 과정을 통해 확신에 이르게 된다.
더우기 현대적인 사고방식안에서 사람들은 절대적인 원칙이나, 가르침을 외면하고,
자기의 판단이나 경험이외의 일들에 대해, 가치를 부여하기를 싫어한다.
그렇지만, 상대적인 사람들의 판단이나 기준에 의해
엄연히 존재하는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하신 일들과
그가 인류에게 약속하신 사실이나 내용들은 변치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지구를 비롯한 모든 우주의 질서에 관여하시고 보존하고,
시간의 길이를 정해놓아, 그의 계획에 따라,
모든 인생들은 각자가 자신들의 삶의 길을 살아가고 있으며,
언제가는 정해진 시간에 그들의 삶을 결산하기를 정해놓았다.
하나님이 정해놓은 인간 구원을 위해 보낸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그의 부활은 변함이 없이 받아들여야 할 사실로 사람들에게 다가온다.

고로 죽음에서 부활한 예수의 사실은 모든 인간에게 이해되고 받아들여야 할 사실이다.
그 부활의 사실은 죽음을 향해 가는 모든 인류에게 확실한 소망과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시는 영생과 구원에 대한 약속을 보장하고 있다.
그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부활한 예수는 지금은 영원한차원(하나님의 세계)의 존재안에서 우주를 다스리고 있으며,
정해진 시간에 다시 오리라는 약속을 하였다.
(누가복음24: 1-6, 요한복음20: 2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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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사역의 우선순위

행전1:1-8
4. 예수님은 사도들과 함께 모인 자리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가 전에 말한 대로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선물을 기다려라.
5.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얼마 안가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
6. 그후 예수님이 다시 나타나셨을 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님
이스라엘 나라를 다시 세우실 때가 지금입니까?” 하고 묻자
7.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 권한으로
정하신 것이니 너희가 알것이 아니다.
8. 그러나 성령님이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

인생에 있어서, 지혜롭게 살아가는 일은 날마다 자기가 해야 할 일중에
무엇을 가장 우선시하고 살며,
또한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안에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행할때에,
그 날들의 하루하루가 충실히 모아질때에, 충실한 인생을 살아갈수 있으리라.

사람은 어릴때에 하는 일과 청소년이 되어 하는 일과,
어른이 되어 하는 일이 각기 일이 달라진다.
그리고 일을 처리하는 기술이나 방법도 점점 성숙해지고 능력을 발휘한다.
그렇지만 인생의 각 단계마다 성장이나 성숙에는 변화나 전이로 인한
새로운 도전이나 거기에 응하는 자기 변화내지는 개선되는 자기정체감을 가져야 할 것이다.

여기 모인 제자들은 모두가 예수라는 역사적인 신적인 존재인
그분에게 자기 인생의 모든 것을 걸고,
자신에게 속해있는 모든 것을 내어 던지고,
그가 자기들에게 가르쳐왔던 바람직한 인생의 가르침과 하늘나라의 도리를 따르며,
그가 세울 이상적인 나라인 하나님나라에 대한 기대를 갖고 따라왔다.

그런데 스승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그들이 가졌던 목표나 그들의 기대는
그들의 삶의 모델이었던 그분의 죽음을 통해
다 날려가버린 허탈감에 있었으며,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방황하게 되었다.

사람이 자기가 세운 목표나, 방향이 갑자기 사라지면 당황하고,
갑자기 모든 것이 무너지는 듯한 기분과 더불어,
앞으로는 무엇을 해야하나 하는 고민에 빠지게 된다.
오늘여기에 나타난 제자들은 바로 그런 인생의 딜레마에서,
자기들의 세우고 따랐던 인생의 삶의 목표수정이나
혹은 궤도이탈로 인한 방황을 통해
앞으로 자신들앞에 전개될 새로운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부활하신 스승 예수를 만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제자들과 다른 차원의 삶인 생명의 부활로 살아나셔서 나타심으로,
그들에게 다가가 그가 지상에 있을시에 가르쳤던 하늘나라의 가르침과
인생을 살릴 좋은 뉴스에 대해 그의 자상한 교육을 통해
제자들이 온전히 이해하여, 확신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이제는 그들과 함께 할수 없지만,
그가 약속하신 그의 분신이신 그의 영을 보내심으로
그 제자들을 새롭게 하며, 강하게 하며,
새로운 예수의 제자의 신분으로 살아가기를 기대하시고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40일을 제자들과 함께 지내시는 중에 계속해서 제자들과 함께하신다.
주님이 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하셨을까?
그렇지만, 제자들이 생각할때에, 예루살렘은 끔직한 곳이다.
자신들의 스승이자, 지도자인 예수님을 잃은 곳이다.
모든 희망을 걸고 예수님을 따라다녔는데,
모든 직업과 재산을 다 버리고, 예수님만 따라 갔는데,
그가 갑자기 죽음과 함께 자신들과 함께 할수 없는 처지가 되었으며,
그래서 이제는 제자들은 고아들처럼, 방황하며,
애써, 공허하고 실망한 마음을 참으며, 그나마, 죽음에서 부활하여 다른 차원의 생명이신
자신들의 스승을 만나, 그 분으로 부터 직접 이야기를 들으며,
위안을 삼고 지내고 있었다.

예수님도 죽으셨고, 그들의 따르는 사역도
모두 물거품으로 공중에 붕뜬 느낌을 가지고 사는 요즘의 제자들은
아직도 자신들이 겪는 변화무쌍한 현실에 안주를 못하고 지내고 있었다.
어디서 새로운 희망이 생길까?
하는 기대감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따라 나섰다.

제자들은 차라리 요한을 따라 나설걸 하고 생각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이미 세례요한도 민중들속에 순교한 예언자로 기억되고 있지만,
이제는 어디서 하늘의 메시지를 들을 것인가?
(이후에는 그들이 하늘의 메신저들이 되어야 할 사명을 안고 있는 것이다)

요한이 와서 외쳤던 회개하라 주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느니라
외친 메시지의 메아리가 아직도 그들의 귓가에 맴돈다.
이스라엘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요단강가에 모여들어,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죄씻는 표를 확인하였지만,
예수님은 하늘나라의 메시지를 들고오셔서,
죄를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선물인 성령을 부어주신다.
예수님의 보내신 성령은 만물을 소성케하며,
멸망가운데에 있는 영혼들을 살리는 생명의 영이시며,
그분을 받으들여, 영생을 얻게 되며, 하나님의 영원한 자녀로 인침을 받게 된다.

아직도 자기민족에 대한 희망을 품고, 망국의 한을 살아가는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나아가, 주님에게 간청한다.
언제쯤이면, 조국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주시나요.

아직도 예수님이 전하신 하늘메시지가 마음에 와 닿지 않고,
현실적인 문제에 골몰하여,
이스라엘 자기 민족들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관심이 모아져 있다.

사람들의 관심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 까하며,
그리고 어떻게 성공하며 출세를 할까에 관심이 있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그 사람들 자신의 영혼에 있다.
사람들의 관심과 하나님의 관심은 자주 인간이 사는 삶에 일어나는 딜레마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사람들이 자신을 입히는데 관심이 있고
자기를 먹는 일에 관심있고, 자신이 소유하는 일에 관심에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사람의 생명에 있다.
그의 관심은 하나님의 소생인 사람들 자신이다.
사람들이 달라졌으면 하는 바람안에서 사람들을 고치고, 살리고,
새롭게 하는 일에 하나님의 관심이 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속한 이스라엘 민족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촛점이 모아져 있다.
로마의 압정하에 자기민족이 해방을 얻는 일에 관심이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심은 죽음과 멸망으로 향하는 인류구원에 있으며,
예수자신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복음이 다 증거되면, 그제야 인류역사의 끝이 오면
모든 민족을 살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사람의 때와 다르며, 사람의 기준과는 다르게 움직인다.
당시 제자들은 자신들의 고국 이스라엘의 운명에 대해 걱정을 하고
하루 속히 로마의 지배를 벗어나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관심을 넘어서는 더 큰 계획의 전개를 바라보신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시각은 인간들의 역사속에서 항상 가장 최선의 시기에,
이룰 그의 역사의 때와 기한을 주장하신다.
주님이 다시오시는 시간도 주님만이 아신다.

그의 때와 시간은 완벽하게 준비하신다.
인생도 지혜롭게 살아가는 비결은 자신의 때를 아는 지혜인데,
자신의 지혜는 자신의 인생안에 있는 하나님의 때를 준비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정해준 기한내에 자신의 때를 살아가는 것은 자신의 책임이다.
오직 인생의 때와 기한은 그에게 달려있다.
그리고 인류의 시간표도 그의 권한안에 있다
그의 권한에 의해 모든 때가 시작이 되며 과정이 되며 완성이 되어진다.

그의 때를 준비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그의 분신이신 영을 보내신다는 약속을 하셨다.
그리고 그의 약속에 따라 예수그리스도가 보내신 성령이 제자들에게로 오신다.
인간속으로 생명과 능력의 영으로 오신다.
하나님이 인간의 영혼속에 그의 영으로 임하신다.
하나님의 영은 인간을 살리는 영이다.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는 영이다.
그 하나님의 영은 인류창조와 재창조의 영이며, 능력과 지혜의 영이다.
그의 영이 임하시면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이 되며,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한다.

성령의 역활은 인간의 능력을 능가하여 새로운 일들을 추구하여 이루어 낸다.
인간의 능력의 한계에서 오히려 성령의 역사는
새롭게 시작하며 인간의 한계를 넘어가며,
그리고 인간속에 있는 나약함이나 부정함이나 불가능함을 극복하고,
인간갱신이나 생명변화를 통한 인간구원의 보증자가 되셔서
인간속에서 인간들과 함께 하며 주님의 때까지
인간구원을 완성하시는 하나님의 영으로 역사하신다.

인간들을 구원하고 살리는 생명의 전도에는
그 전도의 시작과 진행 역사의 사이클이 있다. 그 시작과 끝이 있다.

인간들속에 들어와 생명의 시작을 이루어 가는 성령의 역사는
인간의 나약함이나 부정함의 딜레마를 딛고
그가운데에 인간속에 전혀 다른 새로운 하나님의 생명의 씨앗을 심어,
그것을 가꾸고, 성장케 하여,
결국에는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과 권한을 회복케 하는 결론을 이루어 내신다.

딜레마에 빠진 인간을 살리는 주님의 복음의 전파는
성령이신 그의 영으로 시작이 되며 앞으로 그 끝의 완성을 이룰을 것이다.
이말은 두가지를 의미한다. 하나는 성령을 받아들인 각자 인생의 인생구원의 시작이며,
또하나는 죽음이라는 운명안에 처해있는 온인류에 대한 인간구원의 완성을 이루어 가는
두 명제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인류나 그 인류에 속해 있는 인생 각자 한사람, 한사람에게
그분의 영을 통해 지금은 그분의 구원의 은혜받을 때요,
그분의 생명의 복음을 전할때이다.
지금은 그의 복음을 전하며, 혹은 듣고 받아들이고 구원을 얻을때이다.
그일이 각 개인이나 인류전체가 해야 할 일중에 가장 우선시해야 할 일이다.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여러가지 일들이 항상 놓여 있다.
일상적인 일들, 필요한 일들, 정해진 생활의 규칙을 따라 해야 할 일등,
주변의 사람들과의 관계나 교제를 위해 해야 할일,
가정의 대소사등 일을 처리해야 할 일들이 항상우리 앞에 널려 있다.
그런중에도 사람이 자신의 생명이나 영원한 미래에 대한 투자를 위한 영적인 일들은
항상 자신의 일중에서 최우선의 일인 것을 알고 거기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인생을 바람직하게 살아가는 비결중에 하나는 우선순위의 결정에서 지혜를 얻어야 하며, 지금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확신과 일의 순서등을 자신의 사역의 우선순위를 바로 정하므로, 인생의 자신의 중요한 사역에 대한 노하우를 가진자로서 질서있는 인생사역의 주인공이 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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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의 대상; 하나님과 사람의차이

예레미야 17:5-8
5.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사람을 의지하고 나 여호와를 떠난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6. 그는 사막의 가시덤불 같을 것이며 아무런 희망도 없이 사람이 살지 않는
사막의 메마르고 염분이 많은 땅에서 살게 될 것이다.
7.그러나 나 여호와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다.
8.그는 물가에 심겨져서 그 뿌리를 시내로 뻗어 더위가 와도 두려워 하지 않고,
그 잎이 언제나 푸르고 싱싱하며, 가뭄이 심한 해에도 걱정이 없고,
항상 열매를 맺는 나무와 같은 자이다.

사람이 무엇을 의지하는 가에 자신이 믿는 바의 믿음의 대상이 달라지며,
그 의지하는 경우에 따라 인생의 삶의 차이가 있다.
무엇을 의지하는 가는 그 사람의 삶의 철학에 많은 영향을준다.
물질(돈)을 의지하는 사람은 자신의 가지고 있는 소유물로(돈이나 소유품) 모든 것을 판단한다.
세상의 것을(명예, 부귀, 권력, 권한) 의지하는 사람은 그것으로 모든 것을 좌우하려고 한다.

사람을 의지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인간이상의 존재에 대해 무시하며,
자신안에 갇혀서 사람의 한계에 부딪쳐 그 이상의 것을 보지 못하고 살아간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사람이 볼수 없고,
이해할수 없고 가질수 없는 부분에 까지,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고, 자신을 보고, 이웃을 보면서,
자신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가능성을 가지고 살아가며,
그분을 의지하며, 무한한 그분의 자원을 활용하며 살아간다.

사람을 의지해서는 안될이유는 사람은 자신의 운명을 주장할 수 없다.
그것은 자신의 능력이 제한이 되어있고,
사람의 지혜나 모략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미래의 한치 앞을 예견할수 없는 인간의 자기한계는
인간자신을 의지하기에는 연약한 실체라는 것을 부인할 수없다.

사람은 의지할 대상이 아니라 도움을 주어야 할 대상이다.
사람에게서는 도움을 기대하기 보다는 도움을 주는 대상으로 여기고,
그들에게 대하면 사람사는지혜를 얻는 것이다.
사람을 의지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는 말은 사람을 의지하다가
자신을 맡길만한 신뢰의 대상이 아님을 알게되어,
그것을 통해 사람을 의지하는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이 한계이며,
좌절을 안겨다 주기 때문일 것이다.

인생의 세력이나 권한은 인생의 자신의 호흡이 끝나면
주변인생의 도움을 의지하는사람을 돕는 그들의 삶도 끝이 나고만다.
그런경우에 사막에 심겨진 풀처럼, 갈급한 상태와
위급한 상태가 연속되는 경우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일시적인 안락이나, 희망을 기대할수 있지만,
결국에는 그인생들이 자신을 기댈만한 힘이나, 세력이 되지를 못한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캄캄한 밤길을 걷는 것과 같다.
왜 하나님을 떠나는 가? 바른 길이 싫어서, 의로운 생을 미워해서,
자신 마음대로 살고 싶은 자유를 누리고 싶어서 그렇게 살게 된다.
그러면, 자기조절을 잃고, 방황하며, 결국 방탕의 길로 접어 들게 된다.
그리고 그런 삶의 모든 과정이나 결과을 통해 자신에게 영향을 주며
그 사람 자신스스로가 모든 것에
(인생의 자기한계를 넘어가는 것 까지/ 예: 미래, 죽음등)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래서 사람을 의지하는 인생은 사람의 자기한계에 부딪치게 된다.
그는 사람의 지혜나 능력을 신뢰하지만,
그런 사람은 자신의 호흡조차 마음대로 조절할수 없는 나약한 존재이다.
사막에서 가시덤불은 쓸모없는 가치를 나타낸다.
사막에는 물이 없는 곳이라, 사람들이 마실수 있는 물이 있는 오아시스여야 하는데,
그 신기루가 보이지 않아, 절망에 빠뜨리게 한다.
절망스런 환경이란 물 한방울 없는 삭막한 사막에 있는 가시덤불같은 경우일것이다.

인생의 종착역에 죽음이라는 것은 사람에게 절망을 가져다 주며,
더이상의 소망을 기대할수 없게 한다. 죽음만이 기다리는 곳에 소망이 없다.
죽음뒤에 있는 새로운 생명에 대한 소망이라야 그 죽음을 이길수 있다.
사막에는 사람이 살수 없다. 사람이 살수 있는 곳은 물이 있는 곳이라야만 합니다.
물이 없는 사막은 사람이 살수 없다.

왜 하나님을 의지해야 만 하나? 그는 창조주이며 만물의 주관자이기 때문이다.
그가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다.
태어나 사는 것은 전적으로 보내어진 존재로 인생은 살아간다.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고 사는 삶이 많이 있다.
자신의 근원이 어디서 왔다는 것을 모르고 지내므로,
창조주를 모르고 살기에 그의 길을 찾을수 없으며,
그의 길을 거스리다가, 결국 나락의 길을 가게 된다.

고로 인생들은 자신들의 주인(창조주)의 지시에 따라야 행복하게 살수 있다.
그는 인생의 발걸음을 주장하시며, 인생의 미래를 인도하신다.
그는 인간의 쌓아놓은 업적을 허물기도 하시고,
분토에 앉은 인생을 높이 올리기도 하신다.
인생의 높고 낮은 자들의 자기위치를 세우며, 내려 앉으며, 인생의 자리를 인도하신다.

나무가 물이 많은 곳에 심겨지면, 깊이 뿌리를 내리고 수액을 빨아들여,
나무의 근력이나 세력을 펼쳐나가,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며,
물이 없어 말라 비틀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무가 자라는데 가장 필요한 것은 나무가 푸르청청할수 있는 수자원이 풍부해야
나무가 건강하게 자랄수 있다. 사람도 마치 나무와같이
자신의 삶의 뿌리를 내릴만한 근본적인 인생의 철학이나, 가르침에 따르면,
자신이 살게 되고, 더 나아가 자신의 삶을 풍부하게 하는 길을 터득하게 된다.
사람들의 삶에 더위가 오는 경우는 물을 고갈시키는 일들이
사람들의 주변의 삶에서 무수히 일어난다.

정상적인 생활의 상태에서도 사람에게는 필요한 것들이 있어야 한다.
자신을 키우고 자라게 하는 삶의 가치와 의미,
건강한 생활의 원리나, 방법들, 인간관계에서 오는 사랑과 소망, 믿음에 관한 것들일 것이다.

이런 여러 필요한 요소들이 인간의 평범한 생활에서 고갈되는 요인들이 일어난다.
자기상실이나, 좌절케하는 인간관계(자신을 남용이나오용하거나,
자신에게 배신이나 상처를 주는, 마땅히 받아야 대상
(부모나 부부의 가족이나 혹은 친구, 우인등)으로부터 자신의 기대치에 못미치는,
쓸데없는 것에 소모케하는 낭비를 통한 자원의 고갈(시간, 건강, 열정, 상식적 자세의 상실등),

잎이 언제난 푸른 청정한 것은 나무에서 뻗어간 가지에서 자라는 잎들이
충분한 영양이나 수분을 공급받으면 무성하게 자라는 과정을 겪으며,
그 잎이 항상 푸르청정하게 된다.
사람도 올바른곳에 삶의 뿌리를 내리면,
자신의 삶의 철학이 일관성이 있다.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며 갖게되는 믿음이라는 것은
자신의 인생철학에 성공할 수 있는
흔들리지 않는 원칙이나, 원리들을 제공한다.

그래서 사람은 그 원칙이나 원리에 따르다 보면,
그 사람 자신이나 그의 삶의 모든 부분들은 잎이 항상 싱싱한 것처럼
항상 건강한 상태를 유지한다.
그 말은 사람이 자기에게 맞으며, 충분하며,
만족할만한 상태의 자신이나 그의삶을 유지하게 된다.

가뭄이 심한 해에도 걱정이 없다.
즉 인생을 살아갈때에 위기를 경험할때에,
거기에 휩싸여 빠지지 않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공급받게 된다.
인간관계의 위기, 소유물의 상실, 자기 표현이나 성취의 과정에서의 실패나
그로인한 절망스런 상황,
자기 기대나 소원의 무산이나 목표도달에 미달되는 경우등,
그런 위기에서 다시 재기할수 있는 삶의 의미와 가치와 능력을 공급받는다.
그래서 그것을 극복하여 더 강하고, 성숙하고, 보다 나은 사람으로 변화되게 된다.

나무나 잎을 잘 돌보아 주면, 정해진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그 잎을 통한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항상 열매를 맺는 것이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
건강한 나무나 잎에서 열매를 기대할 수 있듯이
좋은 사람, 혹은 건강한 사람, 더 나아가 자신있고
충실한 사람에게서 아름다운 열매를 기대할 수 있다.

사람이 맺는 열매에는 시간과 노력과 기회가 합쳐질때에, 나타나게 된다.
이 세가지는 사람의 생사화복을 주관하는 창조주의 도움을 통해 얻을 수 있다.
창조주께서 사람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시간이라는 선물을 주셨다.
그 주어진 시간안에 노력하는 일은 사람 자신의 몫이다.
그렇지만, 노력하는 과정에도 그의 도움없이는 진행할수 가 없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들의 모든 삶의 모든 경우에 적당하게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셨다.
그 기회는 준비한 사람혹은 기회를 잡는 사람에게 주어진다.
그렇지만 평소에 늘 자신의 삶에 충실한 사람에게는 기회,
즉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자신의 삶을 통해 열매는 따라 오게 되어 있다.
그말은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는
창조주의 세계안에 있는 자연과 인생의 이치인 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복을 받는 다. 그 말은 창조주를 바라보며,
그분을 의지하는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그가 마련한 삶의 형통한 원리나 이치를 통해 복을 받게 된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약속하셨다.
하나님 자신을 찾고, 그분에게 와서
상(축복)을 기대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분으로 부터 풍성, 충만하고,
넉넉하고, 넘치도록 있고, 그의 열심히 담겨있는 인생의 복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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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가운데에서 구원받음

예레미야 35:18-19

18. 그때 나는 레갑집안 사람들에게 전능하신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일러 주었다. “너희는 너희 조상 요나답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의 모든 지시에 따르고 그가 명령한 것을 다 행하였다.
19. 그러므로 전능한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레갑의 아들 요나답에게 나를 섬길 후손이 영원히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위기는 기회라는 말이 있다.
인생에서 위기를 당할때에, 그 위기를 잘극복하면,
오히려 전화위복으로 더 좋은 기회를 잡을 수 있는 것이다.
취직시험이나 입시를 앞둔 수험생은 다가올 시험이라는 위기를 보고,
그것을 자신을 업그레이드할수 있는 좋은 기회를 잡아,
힘들게 자신을 극복하므로, 그 준비하는 시기를 통해
자기가 원하는 학교에 진학하거나,
혹은 보다나은 직장에 들어갈수 있는 기회를 잡는 것이다.

남왕국 유다나라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모든 국민이 나라의 패망을 눈앞에 보며,
파멸해가는 조국의 운명과 함께 모두가 고통을 당하고 온 나라가 위기를 겪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운데에 하나님께서 그 심판속에서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가족을 구원하고 있으니,
심판이 있는 곳에 동시에 구원의 역사가 있음을 본다.
그 가족은 대대로 조상이 섬긴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온 후손들이 가훈으로 그 명령을 잘 지켜오고 있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길이며,
하나님의 구원과 축복을 받는 비결이다.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는 조상의 명령에 순종했던 레갑집안 사람들,
그들은 조상의 명령에 순종하는 자세를 가졌다.
35:6절에 “포도주를 마시지 않고, 집도 짓지않고, 파종도 하지 말며,
포도원을 만들어 포도를 재배하지 말고 항상 천막에서 살아라.
그러면 이 땅에서 장수하게 될 것이다.” 라는 조상의 지침을 받았다.

조상의 지침을 지켜왔던 그들은 생활의 불편이나,
삶의 고됨도 극복하고 그 명령에 따르는 신실함을 보여주었다.
한 가족이 이렇게 명령을 지키고 따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닌데,
그들은 그 명령을 지켰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시켜서, 성전으로 그들을 불러,
한 방에 모이게 하여, 포도주와 잔을 내어 놓고,
그것을 마시라고 하자, 그들은 그것을 마시지 않았다.
그만큼 그들은 자신들의 신실함을 지켰던 것이다.

사람의 신실함은 자신들이 받은 명령이나,
일관된 철학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하겠다.
신실한 사람은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며,
법을 준수하는 사람이라 하겠다.
법을 존중하고 법을 지키는 사람들이 많은 나라나 사회가 건강하며,
사람이 살기좋은 곳를 이루게 된다.

신앙은 자신의 신실함을 지켜가는 것이다.
하나님앞에서 자신의 믿음을 지키고,
그가 명하신 바를 충실히 따르는 것,
그것이 자신의 신앙의 발판이며,
하나님에 대한 신뢰심의 근거가 된다.
신실함을 지켜가는 길은 결국 자신의 신앙의 신실함을 세우는 길이다.
하나님앞에서 자신의 신실함을 지키므로
자신의 믿음이 신실함을 보여주게 된다.

이스라엘은 온나라가 하나님의 명령을 저버리고,
우상을 섬기며, 그들은 범죄한 백성으로 살고 있다.
그런 이스라엘 나라는 멸망을 당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거기에 살고 있는 레갑집안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실함을 지켜오고 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제사장의 집안의 축복이 대대로 끊어지지 않을 것이라 축복하셨다.
그 멸망중에도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신실한 백성들을 돌보시는 분이다.

위기나 어려움이 있을때에 성실하게 자신의 일을 묵묵히 잘하는 사람들이 많으면,
그런 어려움들을 이길수 있다.
어려움가운데에서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면 신실하게 사는 것이 힘들다.
허지만 그런 신실한 가운데에 위기를 극복하려는 노력은
결국 자신앞에 놓인 그 어려운 과정을 넘어가는 때가 다가올것이다.
또한 우리의 힘에 한계에 도달할때에 좌절하기 쉽지만,
그때에도 다시한번 자신에 대해 원칙을 살펴보고,
자신이 세운 그 규칙을 향해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자신의 일에 충실하기를 바라야 할 것이다.

사람이 자신의 약점이나 부족함에 스스로 한하지 말고
자신의 인간됨의 불성실함에 대해 스스로 포기하지 말고,
그 신실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의 신실하심을 바라는 것은 그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이며,
또한 신실하신 분으로 자신이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실천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분의 신실함에 인간의 연약함을 극복하는
자신에 대한 신실함을 회복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랄 것이다.

하나님앞에서 인간의 의로움은 제한이 있으며,
자기 자신의 의로서는 한계에 부딪친다.
고로 자신의 진정한 상태를 살펴보고,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따르며
그분의 의에 의존하는 신앙을 지켜가야 하지 않을 까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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