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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2007/05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요한 1:14
14 말씀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보니 하나님 아버지의 외아들의 영광이었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는 하나님이 세상에 사람의 육체를 입고 오신 분이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심으로
말씀이 구체적으로 인간들의 내면이나 삶에 영향을 주며,
그 말씀안에서 사람들이 자기변화와 개선과 완성을 이루어간다.

만물의 중심인 그 말씀은 우주창조의 원리이며 또한 우주보존의 원리이기도 하다.
그를 통하여 모든 만물이 조성이 되었으며,
그의 통치의 영역안에 모든 만물이 놓여 있다.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모든 영역에로 그의 손길이 미치고 있다.

인생이 알아야 할 사실은 말씀의 존재의 선재성이나,
우주의 중심성이나, 만물의 목적성등에 대해 연구를 하므로,
그 말씀의 근본적인 위치와 영향력등 일것이다.

말씀을 알고 말씀을 받아들인 인생들은
자신속에 있는 소우주에 근본적인 변화를 통해
질서와 조화의 세계를 이루어 가는 것이다.
창조의 순서의 원리는 먼저 혼돈과 무질서가 있는 가운데에서,
채움과 질서의 조화를 통한 새로운 세계의 원리가 이루어 진다.

말씀이신 주께서 너희가 내 말에 거하라고 하셨다.
주의 말씀에 거하는 것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그 말씀안에 자신의 변화나, 자기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그안에서 자신의 인생의 집을 지어가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말씀은 철학이며, 논리이며, 신앙이며,
처세관을 이루는 인간의 근본을 새롭게 창조하는 역활을 한다.

말씀의 내면화를 통해 말씀이 사람속에 오셔서,
그의 인격성이 자신의 내면에 영향력을 주어,
말씀안에서 사람 자신의 새로운 성품이 조성이 되고,
옛사람의 타락한 성품이 변화되어,
새로운 성품의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어간다.
그것을 이루는 것은 사람들의 내면의 생각이나,
성향등에 영향을 주는 말씀의 영향력 때문이다.
인간의 내면은 자아와 생각과 성향등이 마음이라는 곳에 어우러져
인간의 소우주의 세계를 이루며,
그 내면의 조성에 따라 외부의 환경과 사람이 표현하는 행동이나 습관에 영향을 주며,
자신이 만들어내는 인생의 생활을 이루어 간다.

고로 무엇보다도 자신의 소우주인 내면의 세계를
생명이신 말씀으로 마음의 집을 잘 조성해 가야 할 것이다.
마음은 인간의 영혼을 담은 그릇이다.
그 마음안에는 사람의 심령이 임재하는 곳으로
거기에서 말씀이 인간의 심비에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인
영생의 생명의 창조와 사람의 성품변화를 이루어가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에 심어진 그의 말씀은 그의 인격의 영향력이며,
그의 존재의 임재의 표시이다.
그의 말씀이 어느 사람에게 심겨졌다는 것은
그 말씀의 영역안에 자신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 사람자신이 말씀이 가져오신 하나님의 영원한 세계에 동참하게 된다.

사람속에 이루어지는 말씀의 구체화는
말씀이신 그분의 임하심이 구체적인 육체를 입고,
우리가운데에 머물러 있듯이 자신의 내면이나 인생의 중심에
구체적인 자신의 집(장막)을 그 안에 짓듯이 머물러 계신다.
이스라엘의 광야의 생활에 주님은 이스라엘인들의
천막들 중심에 있는 장막(하나님의 성막)에 거하시며,
그 백성들과의 만남을 가지셨다.
그 만남의 장막에서 그들을 대면하여,그들에게 말씀하시고,
그들의 광야생활의 진행을 인도하셨다.
고로 말씀이 인생의 갈길에 구체적인 교훈과 삶의 이치와 원리를 담고 있다.

말씀이신 예수는 인생의 걸어가는 삶을 살아가셨다.
그는 하늘의 말씀으로 그가 이땅을 밟고 살므로써,
구체적인 인생의 모델의 자취를 남기셨다.
그를 따르는 이들은 그의 발자취를 더듬어 그가 걸어가신 삶의 흔적들을 찾으며,
그안에서 진정한 인생의 교훈과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여,
그가 가신 그길의 뚜렷한 삶의 과정을 따르는 것이 그의 하나님의 나라에 동참하는 것이다.

말씀을 모신 사람들에게는 또한 그 말씀의 능력화가 이루어진다.
말씀은 그 자체에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권위와 능력을 갖고 있다.
세상은 그 말씀을 통해 창조되었다.
그 말씀이 하나님의 입에서 선포되어지므로,
말씀의 창조력은 혼돈과 무질서한 우주에 창조의 사역이 시작되었다.
창조력을 가진 말씀안에는 사람들속에서
다시 죽은 심령들을 살려내는 생명력이 있다.
그 말씀이 사람들에게 비쳐질때마다
생명력이 나타나 죽은 사람들을 살리며,
사람속에 있는 소우주의 모든 요소들을 질서있게 하며,
어둡고 죽어가는 상태들을 소생케하는 능력이 있어, 그 마음을 새롭게 한다.

그 말씀안에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이 있으며,
그영광은 만물의 주인으로서의 영광이며,
우주안에 있는 모든 인생들을 포함한 보이는 존재나 보이지 않는
모든 존재로부터 받는 영광이 있다.
그의 영광은 사람들에게 비쳐주는 영광이며,
사람들을 영광스럽게 하는 생명의 창조의 영광이 있다.

그는(말씀) 하나님의 영광의 본체가 있다.
그 말씀은 하나님의 존재의 방식을 이해하는 통로로 나타나며,
그 말씀으로 하나님은 자신을 드러내신다.
그리고 그 말씀안에서 인류에게 약속하신 모든 예언의 성취를 바라본다.

그 말씀안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충만으로 존재한다.
그 말씀안에 하나님의 인간에게 베푸시는 모든 좋은 요소들과 혜택을 담고 있으며,
그가 사람들에게 수여하는 각종의 지혜와 축복의 은총을 포함하고 있다.
그 말씀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며,
그것을 깨달으며, 확인하며, 그것을 추구하여,
자신속으로 끌어들이는 사람에게 은혜의 전달이 이루어진다.
말씀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충분하게 존재하고 있으며,
사람에게 필요한 모든 축복의 요소들을 갖고 있어
사람에게 부여하는 주님의 손길을 통해
사람들에게 충분한 공급으로 은혜가 베풀어 진다.

그 말씀은 만물이 통하는 우주의 진리가 있으며,
진리안에는 인생의 마땅한 도리가 있으며,
방황하는 영혼들을 이끌어 주는 확실한 생명의 길이있다.

고로 진리는 하나님의 원리이다.
그 진리를 통해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에게 이르며,
하나님안에 머물게 된다.
그 진리는 하나님의 온전함과 완전함을 드러내며,
하나님이 인간에게 약속하신 모든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사람들은 그 진리안에서 하나님앞에서
자신의 위치와 하나님의 정하신 때와 장소에 자신의 도달해야 하는 결과에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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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은 어떤 진행형의 삶인가?

로마서 1:16-17
16. 나는 이기쁜소식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처음에 유대인에게만 해당되었으나 이제는 이방인에게도
전파되어 모든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17. 이 기쁜 소식에는 오직 믿음으로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된다는
것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의로운 사람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라고 쓰인 말씀과 같습니다.

기쁜 소식은 모든 사람에게 좋은 소식이며,
많은 사람들을 기쁘게 할 만한 놀라운 뉴스라고 할수 있다.
바울은 이 기쁜소식에 대해 즉 자신이 전하는
그 복음에 대해 자신이 갖고 있는 확실한 사실과
자기 경험에서 온 진리의 증거가 있다.

기쁨의 소식이란 사람을 살리는 구원의 뉴스이다.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에게, 그병을 치료할수 있는 약이나 처방에 대한 뉴스는
그 사람을 살리는 놀라운 소식이다.
사람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으로 자신의 인생을 만들어 간다.
지식의 힘은 사람의 삶에 영향을 준다.

자기가 확신하는 것이 무엇인가?
자신의 인생을 변화시켜준 그 무엇이 그이의 삶을 받쳐주는 것이 아닌가?
각자는 자신의 인생에 영향을 준 그 무엇을 가지고 살고 있다.
어떤 사람의 가르침혹은, 사상이나, 영향력등일 것이다.

자신에 대해, 자신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느 사람에게는 자신의 학문일수 가 있으며, 어느 경우에는 자신의 재능이나,
혹은 배운 기술일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나 자질은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밑거름이 되며,
자신이 세운 인생관은 자신의 삶의 방향에 영향을 준다.

자신의 자질은 자기가 배우고 터득한 좋은 경험들이나
개발된 재능으로 인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신의 실력인 것이다.
자신의 자질은 무엇을 할수 있는 자격이 될만한 능력이나
혹은 무엇을 이룰수 있는 자기의 기본적인 실력이다.
이 능력이나 실력은 사람의 자신의 본질에서 나오는 것이라 생각할수 있다.
사람의 본질을 형성하는 것이 타고난 것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끊임없는 자기훈련의 지속적인 노력이 따라야 하는 것인가?
두가지를 다 생각해볼수 있다.

먼저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인생관이 중요하다.
자기가 세운 뚜렷한 자기만의 삶의 철학은
자신의 삶을 지탱해주는 중요한 버팀목 역활을 해준다.
후회없는 인생은 자신이 확신하는 바를 따라 살아가는 인생일 것이다.
자기가 확신하는 것을 좇아,
자신이 해야 할일을 하면서 살면 그사람은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자신의 성품이나 인격에 있어서 자신에 대해 부끄럽지 않게 여기며,
자신이 하는일에 대해서도 흔들림이 없는 자세로 살아가면
그의 삶을 통해 많은 열매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놀라운 것들이 있다.
어느 사람에게는 그것이 건강일수 있으며,
어느 사람에게는 그것이 자신의 성실함이 있을 수 있다.
어느 사람에게는 잘하는 한가지 기술이 있어,
그것을 통해 자신의 일을 잘하는 사람이 있다.
그렇지만 보다 더 중요한 자신이 갖고 있는 놀라운 것은
자신에 대해 확신하는 바를 추구하며,
그 추구를 통해 자신의 삶을 투자하며 살아가는 경우일 것이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타락한 본성으로 인한 인간의 심적상태에 대한 고민이 있다.
그것들 중에 죄책감과 수치심이 있다.
죄책감은 구체적인 죄나, 죄짓는 자신의 일면에 대한 것이라면,
인간이 가지는 수치심은 인간의 마음의 전체적인 상태를 표현한다.
그 수치심에는 건강한 수치심이 있는 가하면 해로운 수치심도 있다.
건강한 수치심은 좋은 마음의 기능을 가진 인간의 양심에서 나오는 것으로
자신이 그릇된 일을 할 때에나 자신속에 양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할시에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게 되어, 자신을 돌아보게 하며,
자신을 고쳐서 바른 일을 하려고 노력을 하게 한다.

해로운 수치심은 행동하는 구체적인 것보다는 행동하게 하는 자아에 치중하는 것으로
지나친 자기연민에 빠지게 하는 자기비하나,
혹은 자기모멸에 가까운 상태의 자아학대에 해당한다고 할수 있다.
그것이 지나치면, 병적인 상태의 자아가 형성이 되어,
무엇이든지 자신의 눈으로 모든 사물에 대하는 자신을
지나칠 정도로 병적으로 부끄럽게 여긴다.

그러나 하늘에 대해서나 자신에 대해서나
더 나아가 이웃에 대해서 부끄럽지 않는 태도로 살아가는 인생의 철학을 갖고 산다면,
그것은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일 것이다.
여기 복음을 전하는 이가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가 가지고 있는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명은
이러한 분명한 인생의 방향을 통해,
후회없이 살아가는 자신임을 증거하고 있다.
그는 시인 윤동주의 시처럼 하늘을 향해 한점 부끄럽지 않는 인생의 삶을 살아간다.

그는 복음을 위해 살아가는 것으로 인하여 그 행복감과 자신감을 피력하고 있었다.

그러면그가 가졌던 복음은 무엇인가?
그가 소유하고 전했던 그 복음에는 사람을 살리는 능력이 있다.
그안에 생명력이 있다.
그안에 죽음을 맛본사람들을 살리는 구원의 능력이 있다.

죽음을 맛본 사람들 어떤 사람일까?
죽고싶은 심정을 경험한 사람들이며,
죽음이라는 것을 피부로 느끼며 사는 경우일 것이며,
물에 빠진 사람의 심정이 되어
무엇이든지 붙잡으려는 다급한 상황하에 있었던 경우일 것이다.

사람은 죽을 운명안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키에르 케고르는
인간의 절망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병으로
인간속에 있는 죄가 인간을 끝임없이 절망의 나락으로 내몰아,
수도 없이 인간은 한계상황에서 오는 절망,
존재불안에서 오는 절망, 죄의 깊은 영향력으로 인한
절망적인 자신으로 인한 좌절감과 불안감으로 살아가는 경우일 것이다.
삶에 대한 존재의 불안에서 겪는 위기는
사람으로 하여금 죽고 싶은 심정으로 내몰게 한다.

삶의 각종의 스트레스는
시시각각 사람들에게 불안과 우울이라는 절망적인 상황으로 내몰기도 한다.
이렇게 어둠속에서 헤매이는 인생들에게
이세상에 생명의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절망에서 소망으로 불안에서 평안으로
무의미에서 가치있는 삶으로 바꾸어 가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은 죽은 사람을 살리며,
병든 인생을 고치며, 상한 심정들을 새롭게 하여,
밝은 광명의 빛으로 사람들을 인도한다.

하나님안에는 사람을 창조하신 창조의 힘이 있는 것과 같이
병들고 상하고 망가진 인생들을 고쳐 새롭게 하는 재창조의 능력도 있다.
그안에서는 모든 인생들이 새롭게 변화될수 있으니,
하나님은 사람들을 치유하는 인생들의 진정한 의사이며,
비틀거리며 시달린 인생살이를 살아가는
수 많은 인생들의 유능한 조련사이다.
그는 사람들을 옳은 길로 인도하며,
사람들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끌어 내신다.

기쁨의 뉴스는 사람들의 마음에 충격을 줄만한 놀라운 사실과
거기에 모두를 기쁘게 해주는 반가운 소식이 담겨있는 것이다.
지난 날에 기뻐하고 즐거웠던 기억들은
우리의 삶에 행복으로 다가오는 일이나 사건이다.
어느 날 사랑하는 여인으로부터 사랑한다는 말을 듣 는 것이나,
혹은 고대하고 기다리던 입시합격의 통보나,
혹은 취직시험을 치루고 난후에 입사통지를 받는 소식등이다.

이렇게 지난 세월에 여러가지 자신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는 소식이 있었다.
나자신에게는 행복해하고 좋아해하며, 그소식에 감격해 하던 기억들,
나에게는 하나님을 만난 일이 가장 자신의 생애에 의미있는 행복을 가져다 주었다.
복음은 기쁨을 담고 있는 좋은 뉴스이다.
한국이 지난 날 2002년에 있었던 월드컵에서 준우승(4위)을 한 소식은
모두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는 뉴스였다.

복음은 누구에게나 행복과 기쁨을 가져다 주는 복있는 소식이다.
그소식은 만인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아름다운 소식이다.
망망대해에서 난파를 당한 조각배에 타고 있는 사람에게
구원선이 가져다 주는 목마른자에게 시원함을 주는 기쁜소식이다.
누구나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을 받고,
죄때문에 죽어야 할 자신에게 형벌과 죽음에서 해방을 얻는 기쁨을 맛본다.

다만 사람에게 한가지 필요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사람들이
그것을 수용할수 있는 믿음이라는 그릇이다.
믿음만이 사람이 하나님앞에서 내세울수 있는 인간의 가치를 인정받는 길이다.
그 믿음은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인간을 향한 구원의 약속들에 대한 신뢰를 의미한다.
그 믿음으로 하나님에게 나아가 그분을 찾으며,
그분이 믿음으로 그분을 찾는 인생들에게 당연히 돌아갈 생명과
그에 따르는 축복의 상급을 주시는 분이다.

무엇이 사람을 바르게 하는가?
도덕인가, 인생의 수양이나 혹은 고고한 철학적 가르침인가?
도덕은 인간에게 바른 행동을 할 것을 요구한다.
도덕이나 율법은 사람의 마땅한 길을 제시하나 인간을 도와 줄수는 없다.
그 도덕률을 지키면, 그 사람은 올바르게 될수 있으나,
그런 것들을 다 따라 행하기에는
인간의 능력이 한계가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아니면 인생을 바르게 건강하게 수양하는 것으로 극기하며,
자신을 수련하여, 고도의 훈련의 과정을 통해
어느 수준의 고양된 인격은 소유할 수 있으나,
그것으로 사람이 온전해 질수는 없다.

또한 고고한 철학적인 지식도 사람에게 희망의 능력을 줄수 없는 것은
그 지식들에 대해 플라톤이 말한 것처럼,
어두운 동굴들에 갇힌 사람들이 그 동굴들을 헤쳐나올 지식을 소유한다 하더라도,
그 철학적인 지식은 끊임없이 막연한 우주의 원리의 선상에서
무엇을 잡아야 할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살아있는 인격신인 하나님과 잇닿을 수없는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 밖에 없다.

오직 우주를 창조한 신이 인간에게 찾아와 그신을 통해 인간이 가져야 할 진리와
그 진리를 따르는데 필요한 힘과
그것을 통한 인생에게 주어진 진리를 통하여 얻은
결과에 대한 신의 배려로 인하여
모든 것이 순간속에서 사라지는 현재의 시간을 살아가는 중생들에게 주는 영생의 길과
그 인생길에서 결국 다가오는 인생의 죽음을 이길수 있는 생명의 길만이
사람들을 살리는 진정한 능력이다.
그 능력이 죽음을 이긴 주 예수님에게 있으며,
그의 오심과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이
바로 사람들을 살리는 복음이며, 기쁜 소식인 것이다.

삶이란 다양하게 진행되는 항상 현재진행형이다.
무엇으로 사는 가에 따라 그 진행형이 어디로 향하고 있으며,
그 진행은 무엇이 지탱해고 있는 것인가?
그것이 세상의 방식으로 물질의 힘으로 움직여 가는 대로 살아가는 것인가?
보이는 현상에 의해 존재하는 물질만이 의미이며,
가치있다고 여기며 살아가는 것은
자신의 보이는 육체의 추구하는 것만을 따라가는 것이다.
물질주의, 육체적인 욕구, 현재적인 현상,
그리고 일시적인 상태의 추구등일 것이다.

어떻게 살아가든지 사람들에게는 항상 삶의 진행형안에서 존재한다.
그 진행형은 다만 일직선상의 전진만이 있고
후진할수 없는 시간의 한계선의 삶이다.
사람들은 과거에서 현재로 와서 미래로 나가지만,
다시는 과거로 돌이킬수 없으며,
그 미래도 자신에게 현재로 다가올때만이 가치가 있는 것이다.

사람의 삶의 진행형은 시간이라는 제한 속에 있지만,
그 제한 속에서 제한을 넘어가는 영적인 세계와
영원한 차원의 세계를 따라 움직여 갈수 있는 길이 있다.
그것이 바로 여기서 말하는 믿음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의 진행형이다.

인생의 삶이란 자신의 인생관에 의해 움직여지며,
자신을 살게하여, 자신의 현재의 모습을 이루어간다.
그리고 장래에 그것의 결과로 결정된 것을 맞이한다.

무엇을 따라 살아가는 가?
어느 경우는 철을 따라 유행을 좇아 살아가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유행에서 사라지면, 자신이 좇은 그유형이나 스타일은
사람들이 찾지도 않는 옛날 방식이 되어버린다.
그것은 보이는 대로 살아가는 경우일 것이다.
수없이 왔다가 사라지는 유행처럼,
한때에는 그것이 자신에게 소중했던 것 같은데,
사라지는 시간과 더불어 없어지며
자신의 삶의 종착인 영원한 세계에 잇닿아지는 때에는
그런 것(일시적이고 현세적인 것)들이 다 무용지물로 남아있게 된다.

자신의 삶의 진행형에 사라지지 않을 것들을 추구하는 살아가는 방식으로는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인도를 따라 살아가는 믿음의 방식만이
사람이 하나님앞에서 설수 있게하는 유일한 길이다.
그 믿음의 방식만이 사람이 하나님에게 다가가며,
시간과 영원을 잇대으며, 일시적인 것에서 영원한 것을 추구하게 하며,
사라질 물질세계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가치를
창출하며 살아갈수 있는 근거의 인생의 삶의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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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부르짖음과 하나님의 응답

예례미야 33:1-3-9

1. 내가 아직 궁중 감옥에 갇혀 있을때에 천지의 창조자이신 여호와께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3. 너는 나에게 부르짖어라. 그러면 내가 너에게 응답할 것이며,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놀라운 일을 너에게 보여주겠다.

기도는 하나님앞에서 자신의 아픔을 드러내는 영혼의 탄식이다.
때로는 기도는 대화이상이며,
언어표현이상이다. 그것은 하나의 영혼의 절규이다.
그것은 또한 상한영혼의 고통의 하소연이다.
인간의 갇혀진 영적인 상태에서 벗어나
자유로이 부르짖는 영혼의 울부짖음을 하나님은 때로 요구하시며,
그 절규에 응답하신다.

내면의 소리에 얼마나 귀를 기울이고 살아가는 가?
영혼의 탄식은 인간의 깊은 곳에서 우러 나오는 자기 표현의 음성이다.
하나님은 그 인간의 깊은 곳에서 나오는 그 소리를 들을수 있다.
때로는 사람이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모를때에,
자신도 모르는 것을 구하며, 살아가기도 한다.

사람의 나약함이란 어리석음은
자신의 내면에서 나오는 영혼의 소리도 외면하며,
자기자신을 바로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경우에서 나온 말이다.
하나님은 그의 영을 통해 인간속에 새로운 마음을 심고,
인간의 깊은 곳과 연결되게 하는 그의 영을 통해
인간의 가장 필요한 영혼의 소리를 대변할때도 있다.

사람이 감옥에 갇혀 있을때에 가장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를 잘 기울일수 있다. 한곳에 갇혀서 자신을 돌아보게 되며,
자기한계에 갇힌 그 속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기속에서 나오는 것을 추구하게 된다.
감옥에서 사람들은 깊은 사색이나, 연구나,
혹은 사람들의 깊은 속에 있는 인생의 깊은 생각을 길어낼수 있다.

대표적인 경우는 천로역정을 쓴 존 번연은 평신도로
사람들에게 설교하였지만
국가에서 설교를 허락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는 자신이 한 설교때문에 그는 감옥에 13년을 갇혀 있으면서,
유명한 천로역정(하늘나라 가는 영적의 순례의 길)을 썼다.
그는 감옥에서 깊은 사색과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신앙인들이 살며 겪을수 있는 여러가지 경우들을
보여주는 신앙인의 인생순례를 보여준다.
그 책은 성경다음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며,
사람의 인생사는 걸음을 인도하는 지침의 역활을 하였다.

일본시대에 기독인의 모델이 되었던 주기철목사는
감옥에서 자신의 일사각오의 순교적인 신앙을 다지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신앙의 절개를 지켜 나갔다.
신사참배의 위협에서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절개있는 믿음과
애국의 독립적인 자세로 감옥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한국기독교의 귀감이 되는 믿음의 발자취를 남겼다.

마틴루터킹 목사는 알라바마의 감옥에서
그는 자신의 비폭력 운동의 타당성에 대한 글을 쓰며,
자신의 하는 인간의 기본권보장을 위한
흑인 민권운동을 전개하는 철학적인 에세이를 쓰기도 하였다.

참담한 상태의 현실에서 그것을 타개하는 길은
자신의 마음속에 새로운 기대를 갖고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궁중감옥에 갇혀 현실이 암담하였다.
갇힌 그에게 희망이란 보이지 않으나,
그가운데에서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하신다.

자신의 삶에서 아무런 희망적인 징조나,
혹은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감이 사라질때에,
하늘을 바라보며, 창공의 하늘에 대한 기대로 자신을 향해,
이세상을 있게 하신 그 신이시 하나님이 나의 희망이다.
그분, 하나님이 나의 전부이다라는 생각에 부르짖으며,
그에게로 다가가며 자신의 울분을 토하며 나아간다.

영혼의 절규는 사람이 할수 있는 가장 강력한 자신의 간구이며,
자기절규에서 나오는 하소연이다.
때로는 세상을 주관하는 하나님은
사람들의 깊은 속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고 응답하며,
역사를 바꾸기도하며 혹은 역사를 새롭게 하신다.

새로운 기대를 가지고 미래를 위해
부르짖어 기도하라고 약속하신다.
기도는 미래를 여는 창조의 사역이다.
기도는 인간의 역사속에 사역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초청하는 것이다.

어두움의 역사가 깊은 곳에 희망찬 새날에 기대가 고조된다.
암담하고 참담한 현실에서 절망하지 않고
새로운 기회와 축복의 날을 기대하며,
바라보는 눈이 새로운 미래를 열것이며,
비록 마음 깊은 곳에서 탄식하는 영혼의 소리에는
새로움에 대한 기대로 가득차 있다.

예언자는 비록 감옥에 갇혀 고통을 받고 있지만,
멸망해가는 조국의 현실을 향해 동족들의 죄에 대해 탄식하며
그들의 잘못에 대해 책망을 하며 회개를 촉구하면서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다가오는 심판 넘어의
새로운 희망차고 축복된 민족의 미래의 번영을 바라보고 있다.

지금 인생이 힘들고 고통스럽다고 여기며 사는 경우라면,
그 인생에 대한 자신안에 있는 괴로움이
영혼의 탄식으로 변하여 도움을 주실 신에게로 향하다면,
자신이 당하는 어려움이나 고난은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다.

인류역사속에서 고난이라는 도전과 거기에 대한
사람들의 용기와 희망의 기회라는 응전으로 하여
문명을 발전시켜왔다.

사람사는 곳에 눈물이 흘러내리는
뼈아픈 현실을 맞이하는 때도 있으니,
그런 상황하에서도 꿋꿋이 자신의 인생을 지탱하며,
살아갈 힘을 자신의 영혼의 탄식의 소리에
응답하는 하나님의 손길을 통해 얻기를 기대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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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초등학교의 학예발표회

어느 저녁날 초등학교(1-6학년)에서
“Go to west” 라는 연극과 노래가 곁들인 서부 대사극을
전 학년이 다 함께 참여 하였다.
서부개척시대의 시대를 배경을 가지고,
아이들은 그 시대의 사람들로 분장하여,
각기 자기가 맡은 역을 하며, 서부로 향하여 가는 여러가지 에피소드를 연출하며,
그 시대에 일어난 일들을 담고 있었다.
미국의 개척자의 정신을 반영하며, 미국의 정신을 대변하는 극이 었다.
그 개척의 정신은 새로운 세계를 향해,
기회와 가능성을 바라며, 진출하는 미래정신으로
미국을 건설하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또 어느 저녁날 학부형을 초청하여,
한 미국의 기독교 계통의 사립학교에서 갖는 학예발표를 하는데,
1학년, 3학년, 5학년이 연극을 하였다.
저녁시간에 학예발표회를 가졌는데,
교장이 장황하게 학교에 대한 광고를 하고 나서, 학년별로 학예발표를 가졌다.

1학년은 예수님의 탄생과 의미에 대해
기독교적으로 연극을 하고, 찬송을 부르고, 말씀을 암송하는 것으로 마쳤다.
베들레헴에 태어나신 아기예수로부터 해서,
십자가에서 처형을 받고,
죽음과 그리고 나서 다시 살아나는 부활이야기까지 극화로 한다.

3학년은 서부극에 서 은행강도와 그들의 일당이
개과천선하여 나오는 무대를 꾸미고 연극을 진행하였다.
서로 총질하는 것이나,
총으로 당시 서부사회의 법과 정의의 구현 행세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연극한다(이 연극을 보면서
미국인들이 자기들이 조상적부터 총기를 소지하는 문제가
전통적으로 이어져 오고 있음을 알수 있었다)

5학년은 시인의 연가집을 극화하여,
여러 아이들이 각기 그 시인의 아이들을 위한 삽화에 대해, 연극을 한다.
아이들이 부모에 대한 것이나,
혹은 자기들끼리의 대화를 말하며,
부모사회의 사회극을 풍자적으로 표현하면서 아이들이
자기들 세계에서 통용되는 어린이 사회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공립학교에서는 사립학교의 경웅하는 달리, 개인의 특성발표에 더 중점을 둔다.
개인의 독립성이나 개인의 권리나 자유의 존중은
미국교육의 정신이나 시민 정신의 저변에 깔려 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아이들이 저마다
자신들의 악기 연주나, 장기자랑으로 연출한다.
유행하는 가수의 흉내를 내며, 각자 자신의 장기나 특성을 살려,
자기의 리사이틀 시간을 갖는 경우도 있으며,
이런 내용들이 비슷하게 개인적인 장기자랑으로 발표하는 아이들도 있으며,
자신이 연주하는 악기를 통해 자신의 장기 자랑을 하는 학예회였다.

공립학교와 사립학교의 차이는 공립학교는 국가에서 의무교육으로 정부에서 관히 하는 경우로,
대개 학교시설이나, 일반적인 교육은 공립학교가 낫게 가르치고 있다.
그렇지만, 교육에 대한 일관된 교육철학이나 인성교육은
각 사립학교의 특성에 따라, 공립학교보다는 건강한 인성교육을 실시한다고 생각한다.

사립학교중에는 유대교 계통의 학교도
좋은 학교들이 있으며, 주로 많은 경우는
기독교계통이나 카톨릭 게통의 학교가 주류를 이루지만,
때로는 개인이나 세속단체에서,
공부의 특수한 환경조건하에서,
부모들이 사교육비를 들여가면서 시행하는
각종의 대안학교의 계통의 학교들이 미국내에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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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에 대해(1)

용서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

사람은 어릴때 태어나면서 많은 주변인들과 관계를 맺으며,
그 인간관계안에서 자신을 키우며, 성장한다.
자신을 형성하는 부분에 인간관계를 통해,
자신의 대인관이나, 가치관이 정립이 되어간다.

어린 시절에 자신을 가누지 못하며
자아에 눈을 뜨지 않을때에 경험하는 것은
자신의 의식세계에서 보다 무의식세계의 심층에 남아,
자신도 모르게 자아형성에 많은 영향을 준다.

그 형성되어지는 자기가 이해하는 인간관계에서
어린 시절에는 자신이 가해자라기 보다는 피해자로
많은 영향을 받으며 자란다.
자신에게 상처를 주거나,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주변인들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다.
그런 기억들은 자신의 자아의 형성에 뿐 아니라,
현재의 자기표현에 있어서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왜곡되고 상처난 인간관계의 기억들에 대해
피해자로서 자신은 가해자들에 대해 일정한 자기대응을 하게 된다.
그런데 과거의 상처에 잡힌 자신은 그 가해자를 용서하기가 쉽지 않다.
사람과 사람과의 용서의 문제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가 성립되는 사회적인 환경에서 발생이 된다.

인간관계에서 서로에게 용서하는 것은
잘못된 인간관계의 상태에서 화해와는 것과는 다르지만,
대체로 용서가 안되면 상처난 인간관계의 화해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상대방에 대한 자신의 용서에는 상대방에 대한
자신의 화해주도적인 입장에서 필수적이나,
자신을 용서하는 것이나 상대방을 용서하는 일에는
반드시 인간관계의 화해가 필수적이지 않다.
이말은 타인에 대해 화해가 이루어질때,
상대방에 대한 용서와는 상관없이 인간관계를 어느 정도 정상화할수 있다는 의미이다
( 이말을 현실에 적용해서 생각해보면,
자신과 원수관계에 있는 상대방에 대해 용서가 안되지만,
부득이 현실적이고 필연적인 인간관계에서 용서를 접어두고,
그와의 화해를 하게 된다).

자신의 인간관계의 처세에 대해 생각해보면,
과거에 대한 부정적인 인간관계의 기억은
현재의 생활에서 부딪치는 인간관계의 처세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
고로 현실의 인간관계를 잘 하려면,
과거에 자신에게 해를 입힌 사람들에 대한 용서를 하지 못하고
자신의 내면에서 자아가 잡고 있는 그무엇
(holding the negative propensity like anger, rage, etc)을 풀어내어 치워 버려야 할 것이다.

구약 성경에 쓰이는 용서의 의미를 가진 “샤락”이라는 단어는
“현재를 방해하는 것, 과거의 것들을 옮겨 놓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이 자신에게 해를 입히고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 그것을 잡고 있으면,
자신이 그것의 영향을 받게 되며,
자신의 정신적인 활동이나 혹은 현재의 대인관계의 처세나 성향에서
좋지 않은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런 극단적인 예도 있다.
어느 나이가 중년이 미국인 주부가 어깨통증과 신경통으로 여러 해를 고생하였다.
그것을 고치려고 약을 먹는다든지
병원에 가서 의사의 처방을 받았지만,
뚜렷한 병명을 알아내지 못하고
그 증세는 점점 더 나빠지게 되어, 고생을 하였다.
그녀는 그문제로 고민을 하게 하다가,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전문 상담인을 찾아가 상담을 하게 되었다.
그 문제에 대해 상담하는 중에
그 여인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깊은 굴곡의 상처난 흔적이 떠올라,
그것을 생각해보니 오래전에 자신에게 해를 입히고 상처를 준,
그 원수같은 사람에 대한 극단의 미움의 감정이
자신의 내면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상담하는 과정에서 그 문제를 끄집어 내어 다루는 중에
그 문제에서 자신이 놓여 나게 되자.
그 통증도 사라지게 되었다.
그것은 용서하지 않는 자신의 내면에 있는 부정적인 감정을 처리하자
문제가 해결된 경우이다. 필자도 그런 비슷한 경험이 있다.

성경신약에는 용서라는 말로 쓰이는 헬라어 “아피에미”라는 말은
“보내는 것,혹은 면제하다.감면하다.”는 의미로 쓰인다.
자신안에서 자신을 잡고 있는 그것을 내어 보내는 것이라 하겠다.
이스라엘나라에는 7년이 안식년이나 49년이 지나 50년 째되는 희년마다
그 나라에서 서로 빚을 진 사람들을 빚을 탕감, 면제해주는 일들이 있다.
그래서 7년마다 혹은 50년마다 상처난 사회적인 상태나 국가적인 차원에서
그런 면제의 은혜를 통해 인간관계를 새롭게하는 일들을 하여
사회를 새롭게하고 민족의 삶을 유쾌하게 한다.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는 보통 부모가 자녀들에게 여러가지 규율을 세워 놓고,
그 규율이나 법칙으로 자녀를 가르치고
혹은 훈련하거나 때로는 매를 대거나 벌을 가하기도 한다.
그런데 자녀들이 만족을 하는 그리고 부모에 대해
좋은 부모관을 갖고 있는 자녀들은 자녀들에게 관용하는 부모일 것이다.

때로는 부모된 필자의 입장에서도 자신의 자녀들에게
자신도 지키지 못하는 높은 수준이나 엄격한 규율을 적용할 때가 많다.
그리고 그 규칙의 위반이나, 잘못된 아이들의 행동에 대해
쉽게 분노하거나 벌로 대하는 경우가 있다.

아이와 부모와의 관계에서 아이가 부모의 정해놓은 규율을 어길 때에
아이들은 부모에게서 용서를 기대한다.
그리고 자녀들은 항시 부모들이 자신들에게
관용하는 부모가 되어주기를 좋아한다.

이런 용서하는 마음이나 관용하는 태도는
부모가 자녀의 입장만 되어 보면 어렵지 않게 자녀들에게
그런 태도로 대할수 있을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시행착오나, 쉽게 오르는 화를 다스리지 못하기도 하지만,
자녀들을 대하는 기본철학에 있어서는
그런 넓은 마음에서 나오는 교육의 정신을 가지면 될 것이다.
멀리 내다보는 부모의 자녀교육의 귀중한 지침이 될수 있다.

원래 인간사회나 대인관계에서 서로 용서해주는 습성은
인간을 지으시고, 정해진 테두리안에서 살도록 되어있는
인간의 현실을 스스로 박차고 나가,
허물을 범하며,죄를 지은 인간에 대한 용서를 하였고,
그 용서를 통해 관계회복을 바라는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용서하시는 것으로
자신의 인간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셨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으며, 받고 있으며,
앞으로 그 용서를 받을 사람들인 사는 사회나
그들의 인간관계에서의 서로 주고받는 용서의 문제는
언제나 빨리 풀면 좋을 성 싶은
아주 중요한 풀어야 할 인간의 숙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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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묵상

사람의 주된 삶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다.
영광을 돌리는 일은 두가지로 생각해보는데,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것이며,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에는 그의 속성으로서의 영광의 측면이 있고,
신성으로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다.
그가 영광스럽게 되지 않으면 그는 하나님이 아닌 것이다.

대통령이나 왕은 그들이 법적인 기간동안에 대통령으로서 영광이 있으나,
하나님은 그 자신이 영광의 존재의 본질이다.
하나님은 그의 영광을 다른 존재에게 주지 않으며,
영광이 하나님의 속성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하게 돌려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즉 하나님에 의해 그의 자녀로 택함을 받은
즉 하나님을 섬기는 이들인 사람들은 자신들의 몸과 영으로 하나님을 높여 드린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는 4가지 측면이 있다
(appreciation, adoration, affection, and subjection)

먼저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인식적인 태도에서
하나님을 시인하고 인간의 숭고한 생각안에서 하나님을 탁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두번째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그분을 경배하며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예배에는 두요소를 생각해볼수 있다.
하나님의 인격에 대한 존경이며, 그리고 그분을 통치자(왕)로 경배하는 것이다.

세번째는 하나님께 대한 감성적인 표현으로 온 마음을 다해,
그리고 온전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거룩한 사랑으로 대한다.
그럴때에 인간은 가장 고귀한 감정의 소유자가 된다.
마지막으로는 하나님께 복종하므로 그분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헌신을 통해 그분을 영광스럽게 한느 것이다.

그러면 왜 인간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가?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존재를 있게하신 분이며,
그를 영화롭게하는 목적이 인간의 존재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물이 그분의 영광을 위해 창조하였기 때문에
그분은 모든 만물가운데에서 영광을 받는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은 그분의 고유한 가치이며
하나님의 탁월함의 존재의 양식이다.
또한 창조물들은 하나님을 높이기 위하여 지음을 받았으며,
당연히 그분에게 돌아가야 할 영광을 드리는 것이
그의 피조물로서 마땅한 도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을 영광을 돌릴수 있는가?
1. 사람이 순수하게 자신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에 있을때에
그분을 영화롭게 할수 있다
(여기 그 목적하는 바의 3가지우리의 인식을 가질수 있다.
1. 자신의 삶을 통해 무엇보다 우선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을 좋아하는 인식.
2 . 비록 고난이 있어도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에 만족하는 인식.
3. 자신에게 가지고 있는 자질이나, 재능을 통해 하나님을 영광스럽게하려는 의지의 인식)

2. 사람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므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을 영광스럽게 한다.
3. 사람은 자신이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린다.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수 있다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회복에 있어서 신뢰하는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4. 하나님의 영광을 흠모하므로써 그분을 영광스럽게 한다.
5. 사람이 신실해지므로 즉 인생에서 선하고 좋은 열매를 맺으면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한다.
6.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만족해 하는 것으로 그분을 영광스럽게 한다.
7.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안에서 활동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8.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으로 그분을 영광스럽게 한다.
9. 인생을 기쁨으로 살아가는 것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10. 하나님의 진리에 굳게 서서 살아가는 것을 통해 그분에게 영광을 돌려 드린다.
11. 하나님을 찬양하므로 그분을 영화롭게 한다.
12.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열정을 갖고 살므로 그분을 영화롭게 한다.
13. 우리의 일상의 모든 일(시민으로서, 혹은 사람으로서 하는 일들)에서
하나님에게 우리의 눈을 고정시켜, 그분을 통해 활동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14.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에게 인도하므로 (전도) 그분을 영화롭게한다.
15. 하나님을 위해, 그리고 복음을 위해 고난받는 일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한다.
16.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통해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17. 우리의 거룩한 생활 (구별된 태도) 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Thomas Watson의 “A Body of Divinity”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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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의 고민: 가정과 자녀교육의 문제

이혼이라는 가정의 문제는
미국인들사이에서는 50년대 이후 부터
베이비부머시대의 사람들이 자라면서
그들의 부모세대가 이혼을 하기 시작하는 가정으로 나타난다.
그전까지 즉 미국은 2차세계대전을 치루기전까지
건전한 가정이라는 국가적인 축복의 자산을 갖고서
세계를 리더하는 국가로서 선진국가혹은
남을 도와주기 좋아하는 기독교국가의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후 공립학교에서의 기독교교육의 장의 상실,
즉 성경을 가르치지 못하게 하고 기도하지 못하게 하여,
공립학교 교육은 악화일로로 교육을 받는 자녀들이나
교육을 하는 부모세대는 함께 종교적이며 윤리적인 혼란을 거듭하게 된다.
그 배후에는 미국의 실용주의 교육의 영향을
준 죤 듀우이같은 이들의 무신론적인 교육철학의 영향으로
그러한 결과가 나오게 된것이다.

공립학교의 교육적인 도덕(기독교교육의 훌륭한 전통)성이 무너지며,
교육의 세속화는 사회적인 가치기준의 역활에서
기독교의 가치나 윤리범주를 벗어나,
그 세대에서 교육을 받은 자녀들은
전세대의 무신론적 교육철학의 영향으로
자연스레 그 세대에서 이혼이 사회적인 이슈로 등장하여
보통 가정에서 이혼이라는
가족문제의 현상이 폭넓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그 철학은 현재의 미국의 개인주의적인
철학적인 풍조의 영향과
맛물려, 현재의 탈근대적인 가치(절대주의 가치기준의 상실)로
발전하여 왔다.
그런 교육적 결과의 영향으로 사람들의 가치기준에 혼선이나타나며,

그 여파로 건전한 많은 미국인의 가족의 전통적인 가치들을 잃게 되며,
오히려 가정의 이혼하는 현상은 보통가정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이혼은 미국인 가정의 보통현상의 하나로
모든 가족관계의 표시란이나,
개인의 가정란에는
이혼을 통한 복잡한 부모와 자녀의 비정상적이고 역기능적인 관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포괄적인 사회적인 현상이 되었다.

그 현상은 결혼하는 가정의 반이 이혼에 이르며,
이혼하는 부모세대는 이혼하는 자녀세대로
역기능적이고 부도덕한 가정의 유산을 물려주고 있다.
이제 이혼하는 가정의 현상은 사회적인 정착단계를 거쳐
광범위하게 미국사회의 인간관계의 비윤리적인 상태로 빠뜨려,
그런 상태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은
건전치 못한 복잡한 구조의 가정안에서 자라난다.

이혼한 아버지가 이혼한 어머니와 사는 경우에
양쪽의 가정의 자녀들이 서로 형제간으로 연결되어
서로 얽히는 가운데에 복잡한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된다.
스텝파더(의붓아버지)는 부인의 전남편의 자녀들을 돌보며,
그 자녀들은 전혀 생소한
엄마의 사람인 새로운 법적인 아버지를 두게 된다.
정상적인 부모와의 관계안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부모의 이혼과 더불어 싱글어머니나
혹은 부모가 아닌 제삼자(조부모의 슬하에서)에 의해
자라나게 된다.

자녀들과 스텝파더의 사이의 관계는 그렇지 않아도,
힘든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를 더 힘들고 복잡한 상황으로 이끌어 간다.
부모와 자식간에 법적인 관계안에서의 가족관계가 성립이 된다.
자연적이고 혈통적인 관계가 아니라,
법적으로 단지 하나건너 엄마를 사이에 두고,
서로의 관계는 소원하기만 하다.

청소년기의 아이들의 부모, 즉 결혼한지
보통 10년을 전후한 부부가 서로 이혼하는 경우가 많으며,
그런 이혼은 아이들의 상태를 아주 힘든 상태를 만든다.
그 나이에 벌써 남녀관계의 복잡한 인간관계를 배우고,
자녀들을 보호해야 할 가족이라는 테두리가 무너지며,
고유한 가족이라는 전통적인 관계가 무너지며,
아이들은 허물어진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복잡하고 힘든 사회라는 곳으로 방치되어,
아이들은 방황하면서, 반항아로 사회에 대해 울분
혹은 스트레스에 의한 불량적인 자녀로 만들어지기가 쉬워진다.

이제 미국사회에 이혼은 악순환의 고리를 갖고 있다.
부부관계가 극단적인 경우를 넘어서는 것으로
서로의 인간관계의 끝을 보았기에 이혼의 가정은
사회적인 문제의 기본단위로 자리잡아,
자녀의 문제, 혹은 사회적인 범죄의 기본적인 제공처로
역기능적인 가정이라는 것을 갖게 된다.

앞으로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인 가정의 가치가 무너지면
건전한 방향의 사회나 국가 건설은 지장을 받기 마련이며,
그것이 또한 사회나 국가 발전에 큰 장애요인으로
전반적인 사회의 이탈문화적인
(사회발전을 역행시키는) 현상이 될 것이다.

(이글은 필자의 경험에서 얻은 결론에 의해 쓴 사견임을 밝히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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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치유와 내면의 변화

누가 24:13-35(21후-28 빠짐)

13. 바로 그날 두 제자가 예루살렘에서 11킬로미터쯤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내려가면서.
14. 최근에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하여 서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15.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토론하고 있을 때 예수님이 가까이 가셔서
그들과 동행하였다.
16.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했다.
17. 예수님이 그들에게 “너희가 길을 가면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슬픈 표정을 지으며 멈춰섰다.
18. 그때 글로바라는 사람이 예수님께 “당신은 예루살렘에 있으면서
최근에 일어난 일을 모르고 계십니까?”하였다.
19. 그래서 예수님이 “무슨 일이냐?” 하고 다시 물으시자 그들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 나사렛 예수님에 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나님과 모든
백성들앞에서 행동이나 말씀에 능력있는 예언자였습니다.”
20.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우리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주어 사형 선고를 받게
하고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21. 우리는 그분이 이스라엘을 구해 주실 분이라고 잔뜩 기대했었는데 말입니다.
29. 그들이 강력하게 권하며 “저녁 때가 되어 날이 이미 저물었습니다.
우리와 함께 묵었다가 가십시오” 하였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묵으려고 따라 들어갔다.
30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아 빵을 들고 감사 기도를 드리신 후에
떼어서 그들에게 주시자
31.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 보았다. 그러자 예수님은 순식간에
사라져 보이지 않으셨다.
32. 그들은 “길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말씀을 설명해 주실 때
우리 마음이 속에서 뜨겁지 않더냐?”하고 서로 말하였다.

그날은 주님이 부활하신날,
그 두제자는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었다.
아마 주님을 따라 나섰던 이들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처형당하시자,
실의와 좌절속에서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최근에 일어난 일, 소문이나 뉴스는 사람들사이에 퍼지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일은 그들에게 주된 관심이며,
자신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야기이다.
십자가 처형의 현장에 있었던 증인들이 었을 것이다.
십자가 죽음의 처형의 선고를 받고, 십자가를 지고 가신 일,
십자가에서 처형받는 일등,
예수님의 처형소식을 이야기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겪는 일들을 이야기하며,
사건에 대한 문제들을 토론하며, 열띤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의 대화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였다.
왜 예수님이 죽으셨는가?
혹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하는 이야기들을 나눈다.
그때에 예수님이 그들에게 다가가셔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

사람들의 대화의 주제가 무엇인가?
사람들의 문제가 무엇인가? 먹고 사는 문제인가 아니면, 자녀들 문제는
혹은 부부간의 문제등, 가족들의 이야기인가?
사업의 문제인가?
아니면 자신들이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어느 일에 흥미를 느끼는 가?
저마다 이야기의 주제는 다르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의 모든 일에 있어 중심이다.
그는 모든 이들의 관심의 대상이며,
그는 모든 인간사에 개입하시는 주님이다.
그는 모든 삶의 문제에 있어 중심에서
그 문제들을 바라보며, 해결하신다.
자녀의 학업문제에 있어서도
그가 문제해결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를 보통 사람으로 생각하였다.
부활예수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
부활예수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그는 평범한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그의 부활은 보통사람의 육체를 입음으로
그의 몸은 정상적인 육체를 갖고 있으셨다.
동시에 그의 몸은 영광을 입은 몸체이다.

예수님은 오직 그를 알아보는 사람에게만 주님으로 나타나신다.
세상사람들은 그를 한낮 스승정도로 생각하기도 하고,
그는 위대한 철학가나 도덕의 교훈가로 생각하지만,
그는 믿는 이에게 하나님이시다.
그는 자신들을 구원하신 능력의 주이시다.
생명과 죽음그리고 사람들의 화와 복의 모든 일들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의 질문은 그들에게 자신들이 고민하고 걱정하는 문제의 핵심으로 인도한다.
질문법은 답변을 추구하는 것을 통해,
그 질문에서 대답을 얻는 것을 전제하고, 질문을 던진다.
자신의 관심사가 지금 무엇인가?

관심사는 자신의 인생의 중심에 무엇을 두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그 두제자는 자신들의 관심이 온통 십자가의 예수와 그의 부활이야기에 있다.
자신들이 섬기고 따랐던 스승에 대한 관심은 그들의 삶이 온통, 그분에게 맞추어 져있다.
그렇지만 이제는 그 구심점을 잃고, 방황을 하고 있다.
자신들의 관심의 타겟이 사라지자
그들은 절망스러운 인생의 기로에 서있다.
슬픔이 그들의 마음을 누르고 있다.

글로바는 누구일까? 그의 이름이 거명된 것을 보면,
그는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중에서,
제자들 다음으로 예수님에게 속한 사람인 것 같다.
글로바는 예수님에게 최근에 소문에 대한 질문을 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문제와 그것의 소문에 대한 답답함으로 질문을 하며 의아해 하고 있다.

사람들의 관심하는 일로 인해 그들의 삶을 볼수 있다.
세상사람들은 세상뉴스에 관심이 많다.
세상의 뉴스는 인생들을 세상으로 관심을 끌게 하여,
그안에서 분주하게 하며, 그안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관심을 갖게 한다.
슬픔이나, 혹은 안타까움이나, 범죄의 일이나, 고통의 소식들이 있다.

그러나 경건한 사람들은 하나님나라의 뉴스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그들의 흥미는 그의 나라의 전달이나 실현에 있다.
하늘뉴스은 소망과 기쁨이 있다.

예수님의 질문에는 예수님의 의도가 있다.
상담가의 질문은 피상담자로 하여금 그이슈에로 빠져들게 한다.
그리고 상담의 재료로 삼게 된다.
그리고 함께 마음과 마음이 연결되어(감정이입의 능력으로)
피상담자의 문제를 해결해간다.
많은 경우에 피상담자 자신에게 문제의 해결이 있다.

그들이 보는 예수관은 그들은 스승 예수를
아직은 사람의 지도자나, 선생으로 생각한다.
세상사람들도 예수를 보는 관점에 있어 예언자나,
애국의 지도자로 본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을 변화시키려면,
예수님을 보는 관점이 달라져야 한다.
그들의 신앙, 세계관, 처세술이 달라져야 한다.

동족들에 의해 팔려가신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의 모략이나 질투로 인하여
로마의 총독에게 사형판결을 받으셨다.
그리고 십자가에 처형을 당하셨다.
이런 사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한 인간들의 의도나,
반응이 악의적이며,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죄악이었다.

이스라엘 인들은 당시에 나라잃은 슬픔과 고난의 세월에서 나라의 독립이나
과거에 나라와 민족의 영광을 얻었던 날들을 그리워하며,
그런 날들이 다시 오기를 고대한다.
메시야를 기다림은 그런 나라의 복을 기대하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누구나 민족의 해방이나 독립에 목말라 하였다.
예수께서 유대나라에 나타나셨을때에 사람들은
그에게서 나라의 장래의 희망을 보고 크나큰 기대를 가졌었다.
그러나 그 예수는 오히려 비참한 죄인의 모습으로 자신들앞에서 죽어갔으니.
그들의 실망이나 좌절은 큰 것이었다.
특히 그를 따라 나섰던 따르는 무리에게는 거의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두제자도 그 일로 인하여 깊은 상심과 좌절속에 방황하며,
미래에 대한 암담한 마음을 가눌지를 못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그일로 인하여 평소에 예수님이 그들에게 가르치고 전하셨던
부활의 기대는 전혀 갖지를 않았다.

예수님과 동행하던 그 두제자는 예수님을 함께 동행하기로 생각하고,
예수님과 함께 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간청하였다.
그들의 요청은 예수님에게 받아들여져,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묵으려고 따라 가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제는 누구에게나
자신을 영접하고 모시는 인생들에게 오셔서 동행하기를 원하신다.

지상의 예수는 이제 부활하셔서 생명예수가 되어
온 지구에 그를 믿고 따르는 무리들의 생애속으로 들어 가시며,
그들과 동행하는 사역을 이루어 가신다.
예수를 처음 믿을 때에 누구나 예수님을 통해 하늘나라의 부름을 받고,
하나님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간다.
그 시민으로 살기위해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생애 한복판으로 그를 초청하여 그를 모시고 동행하며 살아간다.

예수님은 부활이후에,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빵을 떼시며,
상징적으로 그의 몸을 생각하는 애찬을 나누셨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신 구원은
우리 자신들의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경험하며,
그 구원의 실제적인 경험으로
그분의 몸의 희생을 기념하는 주님의 성찬에 참여한다.
예수님의 성찬은 예수님의 몸을 기념하면서
그분안에 있는 영원한 하나님의 구원의 축복을 미리 맛보는것이다.

예수님께서 이들 두사람과 함께 어느 하숙하는 집
식당에 함께 앉아서 음식을 나누게 되었다.
타인과의 음식을 나눔은 대화를
한결 부드럽게 하며 깊은 교제가운데로 인도한다.

그들의 식탁에서의 대화와 교제는 예수님의 성찬의 은총으로 나가게 하였다.
예수님이 빵을 들고 과거에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유월절 식탁에서 앞으로 자신의 몸을
죽음으로 희생제물로 드리는 때를 기다리며, 성찬을 나누었지만
이제는 그분은 모든 사람들의 죄의 희생제사의 제물이 되어,
죽음을 맛보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생명의 주님으로 그들과 함께 식탁을 나눈다.
이제는 주님과 함께 하는 성찬의 식탁은 단순한 애찬이 아니라
주님의 몸을 나누는 기념을 통한 주님의 식탁에서
주님과 함께 하나됨을 경험하며 비로소,
주님을 믿는 사람들이 그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의도안에서 주 예수에게 붙은 자들로
이제는 예수님과 함께 한 운명의 공동체가 되어
장차 주님이 누릴영광의 축복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주님의 성찬은 자신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다.
죄와 사망의 세계에서 절망하는 사람들이 주님의 몸을 통해,
새로운 창조의 세계, 그분이 영원히 통치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여,
그나라에서 얻는 영생과 영광의 축복을 맛보게 되었다.
성찬을 대할 때 마다 이런 주님의 은총을 경험한다.
주님의 성찬을 맞이할 때 마다 자신안에 있는 주님의 몸을 경험한다.
주님의 몸은 자신의 몸안에서 녹아들어
예수를 믿는 자신이 그 분의 영생의 공동체의 일부분임을 알게 하며,
그분안에서 누리는 구원의 능력과 하나님의 축복의 은혜를 경험한다.

왜 빵을 받아 먹었는데, 그들의 눈이 열렸을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음식을 먹으면 몸이 힘을 얻는 다.
배고프면 눈이 감긴다.
주님의 몸은 썩어질 양식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영생의 양식이며,
생명의 음식이다. 그들이 주님이 주는 빵을 받아 먹을 때에,
그들은 옛날 주님이 자신들에게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수천의 사람들이 모여, 함께 하늘의 식탁을 맛보았을때에
감격을 되살리며, 그분을 바라보게 되었을 것이다.

그들의 눈에 그분이 바로 자신들이
애타게 사모하는 주 예수의 얼굴의 모습이 아닌가?
그제야 그들은 주 예수, 그분을 알아보게 되었다.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어갔던 예수가 이제는 부활하여,
제자들과 어디에서나 함께하는 생명예수가 되셨다.
주 예수께서 말씀하시던 대로 세상 끝날까지
주님을 따르는 무리들과 함께 하신다는 말씀대로
그는 지금도 따르는 무리들 가운데에 살아계시며, 그들과 동행하신다.

예수님을 알아보는 그들의 시야에서
육체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곧 사라지셨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생명이 되신 예수가 함께 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경험하였다.
그래서 그들 마음속에 계신 그분의 영이
그들의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경험을 하게 하였다.

이미 예수님이 그들에게 자세히 성경,
즉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자세히 풀어 설명하실때에
그들의 마음에서 예수의 영의 역사가 나타나,
그들의 마음이 새로운 경험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다.
차디차있는 실망과 좌절의 마음이 따스한 생명의 입김으로 인하여
그들 속에서 희망과 용기와 그리고 열정의 마음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성경을 읽거나 공부하거나 듣거나 할때에
그 말씀을 이성으로 이해하는 것과
마음으로 경험하는 것의 차이는 내면의 변화에서 나타난다.

사람의 두뇌를 번뜩이는 놀랍고 영향력이 있는 정보가
자신의 의식속에 뿌리를 내리면,
몸안에 있는 마음의 세계는 요동치며 감격해하는
인간의 마음을 팽창케하고 감격으로 벅차오르게 하는 감성의 시스템이 있다.
그 놀라운 정보의 영향력은 마음전체를
뒤흔들어 놓는 의식과 감각의 종합적인 영향으로
마음을 지배하여, 그 마음 전체에
강력한 천둥이나 번개의 충격과 같이 전달되어진다.

그 제자들은 마음이 뜨겁다라는 것을 인식하여,
그들의 마음이 벅차오르는,
감격적인 깨달음으로 인한 새로운 영적인 세계를 경험 하였다.
그 마음안에서 일어나는 영적인 부흥은 자신의 심령과
삶의 현장안에서의 충격적이고 지속적인 변화를 일으킨다.
그래서 자신의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역사가 이루어 진다
( 예: 어거스틴의 회개하는 마음의 경험이나 존 웨슬리의 새로운 마음의 영적체험).

이렇듯 말씀을 풀어 강해로 설명하였을때에, 성령이 역사하신다.
그들은 사경회의 부흥을 경험하였다.
진정한 영적인 부흥은 말씀의 깨달음에서 출발한다.
진정한 말씀의 선포는 말씀을 풀어내어
그말씀이 스스로 외치는 바를 드러내는 강해설교의 힘에서 나타난다.

마음이 속에서 뜨겁다라는 경험은
여러 단계의 마음의 경험이 동시에 일어나는 과정이 일어난 것이 아닌가?
하나님의 말씀을 담는 그릇이 사람들의 마음이 아닌가?
말씀이 마음밭에 뿌려져 마음이 변해되어가는 과정은
마치 예수님의 네가지 밭의 비유에서 사람의 마음이
사람들이 많이 다녀 땅이 굳어 있는 길가와 같은상태
(말씀이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무관심, 냉담, 저항감)에서
그것을 깨뜨려, 말씀의 씨앗이 내려 꼳히는 상태로 변화되어,
더나아가 마음의 돌짝밭에 있는 거친돌들(교만,고집 부정적
시각)이나 씨들의 뿌리내림에 방해되는 요소들을 걸러 버릴 뿐 아니라,

자신의 마음밭안에 있는 가시떨기와 같은 자신을
유혹하는 세상에 대한 애착심이나
혹은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온갖 걱정이나,
자신의 본성 에서 끝임없이 나오는 근심이나, 의심,
그리고 집중력을 방해하는 온갖 찌꺼기
(이중적인 마음의 상태, 정신적인 불안등을 일시에 갈아 엎어,
말씀의 씨앗들이 떨어져 심겨지기 좋은 마음의 옥토로 변하여 가는 과정을 겪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모든 인생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감추어져 있다.
자연그대로, 혹은 자신의 본성이 가는 대로 가는
인간의 마음에는 그의 메시지가 전달되지 않는다.
그 두제자에게 말씀이 열려 졌다는 강해설교자이신 예수님의 설명을 통해서,
그분의 생명있는 강해설교를 통해,
그들은 말씀이 열려지는 감격의 경험을 하였다.

그가 말씀을 풀어주니, 그들의 마음에 말씀이 착상되었으며,
말씀이 그들의 의식속에서 역사를 일으켜,
그들의 마음이 새로와 지며, 실망에서 희망으로 답답함에서 시원함으로,
냉냉한 그들의 마음이 뜨거운 생명의 열을 받아,
열정적인 사람들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이렇듯 사람의 심령속에 일어나는 영적부흥은 마음에 말씀의 적용으로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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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론의 원인과 극복

신에 대한 존재을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적인 배경에 대해서 몇가지 방향으로 생각해볼수 있다.

먼저 신에 대한 불신을 자초하는 무신론이 있다.
자신의 삶에 대해 신은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야 편하게 죄를 짓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살수 있다고 생각한다.
평소에 규범을 따르지 않고, 규율을 벗어버리는 습성이 몸에 배어서,
질서를 무시하는 자유분방한 태도에 머물러 있기를 좋아한다.
그러다보면 무신론의 영향을 받기가 쉬워진다.

또한 사람은 여러가지 동기로 무신론의 철학을 갖게 된다.
부모들의 무신론적인 배경을 통해서,
혹은 조상들의 범죄에 연루되어 자신도 모르게 불의한 삶을 추구하다보면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리고 부정적인 인간관계(지독한 상처받은 경험이나 비운이나 재난에 가까운 역한 경험)를 통해,
혹은 자신에게 영향을 준 어느 시기에 특정의 사람
(주변에 유독하는 인생관이 부정적인 관점을 가진 인물)으로 인하여,
자신에게 심어진 부정적인 세계관을 통해,
신과의 관계설정에 있어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이다.

또 하나는 무신론적인 철학을 습득을 통해 무신론을 익혀가기도 한다.
세계적인 철학자들중에
대표적인 무신론자들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무신론에 빠진다.
복잡한 사상이나 이상한 가르침을 통해 무신론의 세력이 강화된다.
주변에 무신론에 빠진 사람을 보면
반드시 그 배후에는 그 사람에게 영향을 준 무신론적인 가르침이나 사상이 있다.

마지막으로 어둠의 영들의 미혹에 의해 사람들이 무신론적인 경향을 갖게 된다.
영적인 존재들중에 사람들의 마음을 어둡게하여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한다.
진리이신 신(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도록 유도한다.
진리와 거짓의 차이를 분간하지 못하며,
신의 존재에 대한 이해를 갖지 못한다.

무신론의 영향에는 다음과 같다고 할수 있다.
먼저 무신론적인 태도는 사람을 어리석게 한다.
신을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적인 태도는
인간의 마음안에 있는 양심적인 기능의 한부분이 마비되는 것이나
혹은 인간속에 있는 인간의 영적인 기능(신과의 접촉을 가능케하는)이 정지된 것처럼
그 의식이 그 마음안에 자리잡고 있어,
자신의 사고시스템에 이상현상이 나타난다.
그런 마음이 사고하는 형태는 지극히 상식적인 것데 대해서도
신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는 왜곡된 시각을 갖고 있게된다.
그런 어리석은 태도는 사람의 눈을 흐리게 하여 밝게 사물을 보거나,
사람을 대하지 않게 만들고 자신을 부정적인 시각에 잡히게 한다.

무신론은 사람을 교만(방자)하게 한다.
무신론에 빠지면, 자신도 모르게 자신속에 고집이나 편견에 사로잡혀 있어,
자신의 사고나 태도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의견을 절대화하여,
자신을 어리석에 과장하려는 경향을 가지게 된다.
자기를 절대시하게 되면,
자기가 자기인생에 대해 절대자 노릇을 하려고 한다.
그리고 다른 절대적인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무신론은 사람을 어둡게 한다.
무신론은 마치 따사롭게 비쳐주는 태양빛의 존재앞에
그 태양을 등지고 지내는 것 처럼 자신의 그림자에 드리워진 상태로
그 그늘속에서 자신을 즐기고 있는 것과 같다.
해를 등지고 따스한 햇살이 주는 혜택을 받기가 곤란한 것은
그 해살의 비쳐주는 강인한 따사로움이 사람들을 거동하게 하며,
빛이 주는 능력으로 사람의 몸의 온 구석을 두루 비쳐주어
몸의 세포가 다시 생성되고,
몸의 요소들이 마치 식물이 해빛의 영향으로 광합성 작용을 하여,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듯,
사람도 햇빛의 주는 광선으로 생동있게 존재한다.
그러나 무신론에 빠진 사람은 이런 혜택을 스스로 거부한다.

무신론은 절망하는 인생을 더욱 불안한 모습에 푹 눌려 지내게 하며,
마치 그것이 자신의 숙명인양,
그 상태를 받아들이고 불안이 주는 마음의 공허나
혹은 공항을 겪으며 살게 되며,
늘 불안한 자신속에 있는 삶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살게 한다.

무신론을 극복하려면, 먼저 유신론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신의 존재와 개입을 인정해야 한다.
신의 존재는 불가지론자의 경우처럼 신을 알수 없다고 가정하지 말고,
신은 언제나 찾는 사람들에게 만나주는 존재이며
다만 신을 구하는 채널이나 창구가 잘못이 되어
다만 자신의 눈으로 보기에, 신의 존재가 알려지지 않을 뿐이다.

신은 언제나 누구에든지 골고루 자신의 존재와
자신의 의도를 노출시키고 있는데,
그런경우는 자연적인 사건을 통해서,
그리고 역사적이고 기적적인 개입을 통해서,
혹은 개인의 특별한 사건이나, 기이한 순간에 신은 자신을 나타내신다.
때로는 신은 가장 무신론적인 입장에서
살았던 인물들에 의해서도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무신론의 대표적인 철학자였던 볼테르는
자신의 생전에 신을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적인 태도를 갖고 살았는데,
신은 그의 집을 성서(신의 말씀)를 발행하는 집으로 활용하였다.

신의 노출로 인하여 사람들은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신을 믿고 따르는 믿음을 갖게 된다.
그렇게 신의 존재를 믿은 사람은 자신의 믿음으로 그는 자신의 인생을 만들어 갔다.
구약의 아브라함, 그는 무신론적인 고대의 세계에서 믿음의 아버지가 되어,
모든 믿는 이의 조상이 되었으며, 믿는 자들의 표본이 되었다.
그가 발견한 믿음은 그가 믿는 신에 대한 인격적인 믿음이다.

믿음은 그 믿음의 대상에 따라 질적으로 다르다.
인격신에 대한 믿음, 유일신에 대한 믿음,
자연신에 대한 믿음, 거짓 신에대한 믿음등이 다 다르다.
아브라함이 신의 부름을 깨닫고 자신의 응답을 통해 경험한 신은
바로 인격신에 대한 경험이며,
개인의 역사속에 개입해 들어오는 신의 인도를 따라 가는 믿음의 발자취를 남기게 되었다.

유신론적인 사고의 시스템안에서 무신론적인 태도는
얼마든지, 외형적인 신앙적인 형태의 생활에서
전혀 신을 의식하지 않고,
그를 기만하는 태도로 사는 경우도 있다.
외형적인 종교적 지식만으로는 인간의 내면의 일을
다 헤아리는 신의 의도를 다 알수 없다.
오히려 외형적인 종교적인 지식이
더 큰 무신론적인 사고의 형태로 종교인들에게 남아있을 수 있다.
그런 면에서는 덜 종교적인 사람이 오히려 신에게 가까이 이를 수 있다.

신에 대한 믿음은 인간의 신에 대한 가장 충실한 인간의 자기표현이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낳고 자라게 하며,
젊은 시절의 여러 인생의 노정에서,
베풀어준 부모의 보살핌이나 보호가 있다.
자녀들을 돌봐주는 부모의 마음은 늘 자식에게 있다.
그 부모의 태도는 자녀들이 자신을 믿어주고 신뢰하며,
자라고 성장하기를 기대한다.
그것처럼 사람과 신과의 관계도 부모와 자녀의 관계의 유형으로 볼수 있다.

그렇지만 부모에 대한 부정적인 기억이 있는 경우에는
그것은 신에 대한 믿음을 갖는 일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반면에 부모와의 관계가 건강하고, 올바르게 형성된 사람은
자기와의 관계나 타인과의 관계,
더 나아가 신과의 관계에서 좋은 태도와
인생관을 가질수 있는 능력이 다른 사람보다 많을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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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퓨리탄 목회자의 생애와 목회

플레블
(한달전 저의 블로그에 플레블의 하나님의 섭리를 묵상하기를 올렸었다).

1527년에 퓨리탄 목회자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공부하기 위해 옥스포드대학에 갔다.
1650년 4월에 영국의 드본에서 보조목회자가 되었다.
6개월후에 지역 장노회에서 목회자로 안수를 받았다.
1656년에 그는 다스모스에 목회자로 부름을 받았고,
6년후에 2000명의 퓨리탄 목회자들처럼 주거제한의 압박을 받았으나,
그는 할수 있는대로 목양에 힘썼다.
그의 부모들이 런던에 있을 무렵에 그는 잡혀서 뉴게이트 감옥에 갇혔다.
거기에는 전염병이 창궐하여 그의 부모들은 죽었다.

퓨리탄에 대한 핍박은 1672년의 자유의 선언으로 누그러졌다.
그는 다스마우스로 돌아와 목양을 했으나
그의 사랑하는 사람들로 부터 격리를 당했다.
그는 1687년에 다시 목회자로 1691년 죽을때까지 목양에 힘썼다.
그는 4번의 결혼을 하였지만, 3사람의 부인을 사별하는 고통을 받았다.
그중의 첫째부인은 아이를 놓다가 죽었다.

퓨리탄 목회
플레블이 이해하는 퓨리탄 목회는
경건한 목회자와 신실한 설교자로
교회를 영적으로 목양하는 것으로
그는 설교모델을 웨스트민스터의 신앙선언
(퓨리탄시대에 성경적인 신앙강령으로 내세움)에서 채택하기도 하였다.

그의 설교모델들은 다음과 같다.
1.성경본문으로 안내하기
2. 가르치려는 주된 요소들을 분석하기

3. 이 진리들을 강해설교로 발전시키기:
특이한 본문으로 부터 진리를 정확하게 설명하기,
본문안에서 바른 교리에 대해 설명을 하며,
선택된 본문을 통해, 할수 있는대로 그 진리들을 확증하기,
본문을 돕는 예화를 활용하는 원리,
청취자들의 마음에 일어나는 어떤 어려운 교리들을 센스있게 다루기.

4. 적용하기: 지적인 잘못을 다루는 것,
가르치는 것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 지를 설명하는 것,
본문에서 알려진 죄의 문제들을 보여주며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들을 제안하기.
본문이 어떻게 고통을 당하고, 두려워하거나
혹은 의심하는 크리스챤들을 도와주는 것을 보여주기,
이 본문이 어떻게 설교자 자신에게 혹은 설교자를 위해
가르쳤는지를 알고있는지를 보여주기,
평이한 문장으로 듣는 청중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설교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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