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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앞에 장사없다

  천안을 수도권에서 출퇴근할 수 있는 '남방한계선'이라고 부르기도 한단다. 서울 천안 출퇴근을 하던 시절, 카이로스는 나를 만날 때마다 장거리 출퇴근에 대해서 묻고 한숨을 쉬었다. 언젠가는 "매앞에 장사없다는 말이 있잖아요?"라는 말도 했다.   카이로스는 하루 3-4시간을 길에서 보내면서 직장에 다닌다는 건 육체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일임을 몸으로 깨닫고 수원으로 이사를 왔다.



이번 주는 출장검진을 4일 했다. 그러면 금요일에는 몸과 마음이 다 녹초가 된다. 그런데다가 화수목은 서울가서 세미나도 하고 이런저런 미팅도 한 두개씩 있었으니. 수요일부터는 월경까지 해서 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웠다. 금요일 아침 검진하러 가서는 말도 하기 싫은 상태가 되었다.

 

어제 가서 검진을 하는데 마구 마구 짜증이 났다. 첫번째 수검자는 40대 후반 여성이었는데 그 전날 침을 잘못 삼켜서 숨 막혀 죽을 뻔 했고 그런 일이 자주 있어서 그럴 땐 응급조치를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어보려고 검진 날을 기다렸다고 한다. 사실 이런 질문 받으면 난감하고 짜증 나지만 어제부터 기다렸다는 데 어쩌겠나. 얼마나 자주 그런 증상이 있는지 물어보니 일생에 세 번이란다. 맥 빠진다. 정말. 생명에 위협을 초래할만한 질병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질문들을 해보고 나서  '침 잘 못 삼켜서 죽지는 않으니 안심할 것. 음식물이나 딱딱한 것이 기도를 막는 경우는 어쩌구 저쩌구.... 숨 못 쉬는 상황이면 응급실 가셔야.." 이해가 잘 안 간다 해서 반복 설명까지.

 

감정조절이 힘들어졌다. 

다행스럽게도(?) 그 뒤에 20명정도는 젊고 일한 지 얼마 안되는 필리핀 노동자들이었고, 그들과 대충 짧은 영어로 별 문제없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통과, 통과 하는데 한 남자가 손을 들어 보여준다. "작년 10월, 한국에 온 지 한 달만에 손이 잘려서 봉합 수술을 했는데 계속 아프다. 이걸 어찌해야 할 것인가?" 그런 뜻인 것 같은데 그에게 어떤 도움이 필요한 지 파악하기 힘들었다. 담당 간호사를 불러서 사측 담당자랑 셋이서 이야기해서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고 해결 좀 해주라 하고 같이 내보낸 뒤 다시 검진에 몰두.

 

나중에 담당자한테 들어보니 수술후 재활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 한 게 문제라고 하고 안그래도 장애판정때문에 병원에 한 번 데리고 갈 생각이었단다. 그런데 환자가 자가물리치료를 잘 안 하고 자꾸 문제제기만 한다고 볼멘 소리로 말한다. "생각해봐라, 너라면 이국땅에 온 지 한 달만에 손이 짤렸는데 제 정신이겠냐, 의사소통도 잘 안되니 얼마나 답답하겠냐, 환자의 마음을 좀 이해하고 형같은 마음으로 좀 도와주면 좋겠다."고 하자 고개를 끄덕끄덕 하는 담당자 얼굴이 착해보여 다행이다. 

 

세척작업을 4년 했다는 40대 중반 남자를  신경행동기능검사를 하라고 보냈는데 얼마뒤에 간호사가 수검자와 함께 나타나 검사를 거절했다고 한다. 좀 어눌하다 싶긴 했는데 알고보니 경도의 정신지체가 있어 숫자외우기 같은 검사가 진행이 안된다는 것이다. 에구구. 어딜가나 유해작업은 취약계층의 몫이구나. 한숨이 나온다. 세척작업은 세 명이 하는 데 그 중의 한명은 정신지체, 한 명은 필리핀 이주 노동자이다. 왜,왜,왜, 그들이 이런 일을 도맡아서 해야 하냔 말이다. 그들이 무쇠인간도 아닌데.

 

검진이 끝났다.

에구 오늘 50명밖에 되지 않아 정말 다행이다. 검진끝나고 책상을 정리하러 온 학교 졸업하고 갓 병원에 들어온 새내기 간호사한테 물었다. "매앞에 장사없다는 말 알아?". 그랬더니 화들짝 놀라며 "때려야 말을 잘 듣는다"는 뜻이라 한다. 옆에 있던 보건관리 간호사가 막 웃는다. 얘는 볼수록 귀엽다, 정말. 이런 애기한테 이것 저것 가르치려고 인상쓰고 무섭게 했으니......앞으론 무섭게 하지 말아야겠다.

 

 빨리 병원에 복귀해야 할 일이 있어 서둘러 나오려다가 세척작업이 마음에 걸려 둘러보았다. 다시 확인하니 사용물질이 IPA가 아니란다. 며칠전부터 H430인가 하는 상품명의 새 세척제를 쓰는데 벽에 붙여놓은 물질안전보건자료를 읽어보니 독성이 그렇게 강한 물질은 들어있지 않았다. 법적인 국소배기시설 설치대상 물질인지는 자료를 더 찾아봐야 알겠지만 일단 방독마스크를 쓰는 게 좋지 않을까 했더니 담당자가 그러면 더워서 일 못 한다고 한다.

 

그 때 어디선가 현장의 중간관리자가 나타나서 이 세척제는 지난 번보다 덜 독한 것으로 바꾼 것인데 혹시 무슨 문제가 있으면 검토해서 해결하겠다고 했다. 뻐꾸기, 물질교체가 더 근본적인 해결책이라는 그의 말에 감동했다. 어쩌면 그렇게 훌륭한 생각을 했냐, 당신같은 사람이 현장을 관리하니 우리도 안심이 된다 어쩌구...

 

그런데 대처능력이 떨어지는 정신지체자와 이주노동자가 이 작업을 하고 있어 마음이 걸린다. 소기업의 공정은 변화무쌍하여 오늘 괜찮은 작업이 내일은 어떻게 될 지 모르니. 담당 간호사에게 앞으로 방문때 마다 세척공정을 자주 돌아보고 영문 물질안전보건자료를 구해서 필리핀 노동자에게 주라고 했다.

 

아침에 매앞에 장사없다는 말을 떠올리고 노과장한테 전화해서 신규 의사 티오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물어보았더니 비관적이란다. 상반기 검진이 이제 이틀 남았다. 에구구, 시간이 왜 이리 더디 가는 거냐, 에이 모르겠다. 하반기부터는 일주일에 3번만 할꺼야. 내가 뭐 무쇠인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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