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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일의 중요성

  7시10분 출발, 7시 55분 도착.

검진장소인 교육장에 가서 보니 직원들이 준비해놓은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출장검진 준비에서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수검자들이 의사와 상담할 때 사생활이 보장되고 편안한 분위기에서 대화를 나룰 수 있는 환경인가, 그리고 배경소음이 적어야 하는 청력검사, 신경행동검사 장소가 적절한가이다. 오늘은 유기용제 노출 초과 사업장이고 10년 이상 노출된 사람들이 많은 사업장이었다. 그런데 신경행동검사 장소를 따로 마련하지 않고 회의실 한 구석에서 검사준비를 해 놓았더라. 



 

 실질적인 검진팀장 역할을 하는 정선생한테 접수대를 교육장 밖으로 빼고, 회의실을 하나 더 열어달라고 해서 신경행동검사 장소를 마련하라고 하고, 내 자리를 돌아보니 책상배열이 잘 못되어 내가 다리를 뻗을 수가 없게 되어 있다. 담당 간호사한테 “내가 그렇게 미워? 다음에 또 그러면 네 시간동안 다리 못 펴고 앉아있도록 할 꺼야”했더니 어쩔 줄을 모른다. 나는 이 신규 간호사한테 무슨 일을 하든지 관심을 가지고 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고 가르치고 싶은 것이다.

 

 내가 인턴때 수술방 일을 많이 했다. 인턴이 하는 무수한 잡일 중에 수술 환자를 시간맞추어 올리고 내리고 수술하기에 가장 좋은 자세를 잡아놓고 시술하는 의사를 기다리는 일이 있었다. 단순해 보이는 그 일도 사전에 환자 챠트 한 번 주욱 훎어보고 영상활영사진을 걸어놓고 시작해야 한다. 무슨 수술인가에 따라 포지션이 다르고 준비해야 할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여간 수술방 인턴을 하면서 칭찬을 많이도 받았는데 그 이유는 수술시작시간을 정확하게 맞추고 필요한 물품을 제때 제때 건네주었기 때문이다. 잡일을 너무 체계적으로 열심히 하려는 게 내 단점이긴 하지만 긴장하고 신경을 집중해서 수술하는 의사가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 중요하다.


  출장 검진할 때 자리 배치하는 일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중요하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접수처럼 사람이 몰려서 웅성웅성하는 업무를 검진장소 문 앞으로 빼고, 혈압을 잴 때 가장 정확하게 잴 수 있는 자세를 잡도록 책상과 의자의 각도를 맞추도록 하는 일, 앞서 상담하는 사람과 의사의 대화내용이 들리지 않도록 하고 사람들이 떠들지 않도록 스크린을 치고 적절한 거리에 대기의자를 한 줄로 길게 배열하는 일은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검진을 위해 필요한 일이다.


 집단 검진의 어려운 점의 하나는 짧은 시간에 여러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다. 특수검진의 경우, 유해인자 노출에 관한 질문을 할 때 감을 잡으려면 초기에 상당히 신경을 집중해야 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집중력이 떨어지면서 놓치는 것이 생긴다. 그래서 내 집중력을 떨어트리지 않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상반기 내내 검진준비하는 것에 대해서 잔소리를 했다. 잔소리를 해도 그 때만 달라지는 것을 보면서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많이 들었다. 신경을 많이 쓰니 시름시름 아프기도 했으니.


 자화자찬하는 것 같아 쑥스럽긴 하지만, 얼마전 출장검진할 때마다 나와서 점검을 하는 의료보험공단 직원이 검진후에 나를 찾아왔다. 내가 성의껏 자세하게 상담을 해주어서  공단직원으로서 깊은 감사를 드린다 하더라.


 그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아니 좋을 수 없지만 생각해보면 그 칭찬은 내 몫만은 아니다. 나더러 다른 병원의사들처럼 매일 하루 100명씩 검진하라 하면 지금처럼 하겠는가? 못 한다. 우리 검진팀이 시작시간보다 거의 40분전에 도착해서 장소를 세팅하는 것을 제대로 안 하여 돗때기 시장 같은 환경에서 검진한다면 내가 수검자와 차분하게 대화를 할 수 있을 것인가? 역시 아니다. 현장에서 신속한 검사를 하고 그 결과에 기초한 건강 상담을 할 수 있도록 검진팀이 무거운 검사장비를 끌고 다니지 않는다면 수검자들이 나에게 고맙다는 말을 지금처럼 많이 할까? 아니, 아니다.


 그러고 보니 2002년에 비해서 정말 많이 달라졌다.

처음 이 병원에 왔을 때 싸구려 검진이라고 아무렇게나 준비해서 무조건 많이 하기만 하고 검진결과도 제 때에 통보하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지난 3년간 검진의 물적 조건을 마련하느라 고생한 노과장의 수고가 없었다면, 나한테 잔소리 듣으면서 새벽같이 나와서 고생한 검진팀이 없었다면 변화도 없었겠지.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이번 상반기에 내가 검진팀한테 칭찬에 인색하고 좀 심하게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작정하고 잔소리하고 야단치고 그랬다. 처음엔 두 달만 그렇게 하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길어졌다. 아직까지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이 있긴 하지만 이제는 좀 웃고 칭찬도 하고 그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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