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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의사로 산다는 것

   의사가 되고 싶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고, 시시때때로 변한 것 같다. 교회에 다닐때는 슈바이처와 같이 뭔가 훌륭한 일을 하면서 살게 될 운명이 아닌가 착각을 한 적이 있었고, 여자대학을 다녔던 언니들로 부터 여성도 직업이 있어야 인간답게 살 수 있다는 가르침을 받았기에 안정적인 직업으로 괜찮다고 생각한 것도 있다. 한편 서머셋 모옴을 보고 의사가 되면 인간에 대한 이해가 넓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했던 기억도 있다.



 내가 의사가 될 것이라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꾸준히 공부하는 스타일이 아니고 여기 저기 궁금한 게 많아서 돌아다니다 보니 성적이 바닥이어서 과연 졸업을 할 수 있을 것인가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도 내 눈 앞에 보이는 의사의 삶이 도대체 좋아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어찌저찌해서 삼년만에 본과 1학년으로 복학하면서  의사가 되어야겠다 결심했을 땐 좀 우울했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새로운 경험이 쌓이고 그에 따라 더 넓은 세계가 보여 좀 나아졌다. 본과 4학년 때 중앙도서관 옥상에서 놀다가 만난 낙타한테서 산업의학 전문의제도가 생겼다는 말을 들었을 때 '아, 그거 해야겠다' 생각하면서도 좀 망설여졌다. 나는 그 때 '구체적으로 유용한 사람'이 되는 것에 골몰했었는데 당시에는 산업의학이 예방의학의 한 분과였고 실제로 현장을 누비고 다니면서 일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좀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산업의학 수련을 받으면서 만족스러웠던 것의 하나는 나무만 쳐다보는 것도 아니고 숲만 내려다보는 것도 아닌 점이었다. 집단을 대상으로 한 보건사업과 개인에 대한 예방적 중재를 동시에 할 수 있다는 것은 진료실에 앉아서만은 가질 수 없는 재미니까. 펠로우를 하면서 보건관리를 맡아서 했는데 오호, 이렇게 재미있을 수가. 지금 생각하면 내가 지식과 경험이 좀 있었으면 더 잘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그래도 그 때만 해도 젊어서 열정으로 돌파했었지.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더라.  

 

 집에 돌아가면 올망 졸망한 아이들이 나만 쳐다보고 있으니 밖에서 힘 다 쓰고 집에 오면 안 된다는 현실을 뼈저리게 깨닫고 나니 이게 내가 지속할 수 있는 일인가 하는 회의도 들더라. 또 한 가지, 웬지 마음 한 구석에서 허한 느낌이 있었는데 그 때 읽은 소설이 '아름다운 의사 삭스'이다. 그걸 읽으면서 그래, 그래, 나는 이런 의사가 되고 싶었지, 그런데 지금 나는 얼마나 메마른 사람인가.....이런 생각을 했다.

 

  천안에서 일한 지 4년 째, 요즘 검진을 하면서 사는 재미를 느낄 때가 많다. 며칠 전에는 어떤 수검자가 진찰실에 들어오자 마자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선생님, 얼굴이 많이 좋아지셨네요'하더라. 오늘은 검진하러 갔더니 "앗, 여기 숨어있으셨네. 난 또 연차 올라가서 이젠 출장 안 나오는 줄 알았네"하면서 반가와 하는 사람도 있더라. 나보고 반갑다는 사람이 늘었다.....

 

  위암투병중인 부인의 우울증 치료에 대해서, 안구암을 수술한 장인을 보살피는 문제에 대해서, 아픈 아기의 진료를 어디서 받을 것인가에 대해서, 약국에서 일하는 동생의 천식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 자신 뿐 아니라 가족들의 문제까지 상의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좋다. 이럴 땐 의사라는 직업이 참 좋다는 생각이 든다. 

 

 대장암 수술한 시모의 병간호를 떠맡은 중년 여성의 하소연을 듣거나, 만성피로를 호소하던, 육아휴직후 복직한 여성 노동자의 어려움을 들어주면서 해결방법에 대해서 의논할 때 그 억울함에 맞장구치면서 너무 착하게만 살면 몸도 마음도 아프니까 자신을 돌보는 일을 잊으면 안된다고 말하면서 누군가의 하소연을 한 순간이라도 들어 줄 수 있다는 게 기쁘다. 힘들 때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던 친구들을 떠올리는 것이다. 

 

 검진에서 내 역할은 아프고 속상한 일을 들어주고 문제해결을 위한 방법을 제시하는 것인지라 하다보면 목도 아프지만 더이상 퍼줄 감정도 없을 때도 생긴다. 그러다가 누군가 이렇게 스스럼 없이 안부를 묻거나 반갑게 맞이 해 주면, 누군가의 마음에 위로가 되었다는 것에 나 역시 위안을 받는다. 내 마음도 다시 조금씩 차 오른다. 

 

 오늘 지난 몇 년동안 꽤 자주 갔었던 회사의 검진하고 왔다. 하루종일 154명을 만나면서 힘이 들었지만 그래도 정신적으로는 많이 피곤하지 않았다. 서로 무엇인가를 주고 받는다는 게 참 소중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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