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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리고 멍한 아침

  아침 7시에 검진시작. 어제 꽤 잤는데도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꼼짝도 하기 싫고 입을 열기도 싫지만 그렇게 앉아만 있을 수 없는 게 나의 일이라 억지로 입에 힘을 주고 말을 하는데 점점 더 말하기 싫어졌다. 단협에 따라 연 2회 특검을 실시하는 곳인데 사람들이 검진을 너무 많이 해서 그 자체를 귀찮아 한다. 그러니 나도 할 말이 없다.  



하는 사람은 너무 많이 하고 못 하는 사람은 못하고.....모든 게 다 그래. 아, 정말 싫어. 싫어......

 

   더 의미있고 보람있고 즐거운 일들도 많은데 귀찮아 하는 사람들 붙들고 검진하느라 이른 새벽부터 나와야 하다니, 기분이 점점 가라앉았다. 나오면서 담당 간호사한테 보건교육일정을 잡으라고 했다. 괜히 사측에 검진 한 번만 하라그러면 노조에서 오해하니 다 불러다 놓고 일년에 한 번씩만 검진하고 그 돈 아껴서 좋은 데 쓰라고 꼬셔야겠다.

 

  들어오는 길에 뭐 물어보려고 옆 방 손가락 선생님 방에 들어갔다. 지난 번에 쓴 논문 을 revision 했는데 40분 늦어서 등록을 못 시켰다고 속상하다고 투덜투덜. 뻐꾸기도 이 논문의 공저자여서 빨리 게재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언제 어디에 게재될 지 모르는 국면에 접어들었다니 흑흑.  그런데 이번엔 임팩트 팩터가 더 쎈 저널에 다시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훌륭한 논문을 쓰는 과정에 대한 수다가 한 판 벌어졌다.   

 

  갑자기 나도 논문이 너무 너무 쓰고 싶어졌다. 쌓아 둔 데이타들속에서 울고 있을 사실과 진실들이여! 흑흑 특검하면서 배우는 것도 많고 그 덕분에 요즘엔 강의할 때도 옛날 보단 똑똑해진 것 같아서 좋긴 한데, 그래도 역시 논문을 쓸 때의 기분과는 다른 것. 

 

  하지만 밤잠 안 자가며 주말 가리지 않고 학문에 열중하는 동료선후배 업계 종사자들을 보면서 그렇게는 못 살겠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일단 너무 피곤해. 그날 그날 검진하고 강의하고 이런 저런 실무적인 일 처리하다보면 어느새 집에 가야 할 시간. 저녁밥먹고 애들하고 어쩌구 저쩌구 하다보면 어느새 잘 시간. 옛날엔 애들 재우고 뭐 꼼지락 꼼지락 거리기도 했지만 이젠 퇴근하고 집에 돌아가면 웬만큼 급한 일 아니면 재부팅이 안 되거든.  

 

  그래, 세상은 공평해. 잠 못 자가며 열심히 하면 논문도 쓸 수 있는 것이고 나처럼 결단코 잠은 자고 살아야 한다 하면 논문 쓸 시간이 없는 것이고. 열심히 한 사람들이 좋은 논문 쓰는 걸 질투하지 말지어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있는데 본과 2학년 학생들이 찾아왔다. 지난 번 예방의학회 예비연구자 상 수상자들이다. 쭈빗쭈빗 선물을 내미는데 묵직하다. 술이냐 물어보니 건강식품이란다. 화장품이 아닌 게 다행이다.  그래, 그래 고맙다, 이거 먹고 힘내서 앞으로 더 열심히 가르치마. 이런 인사를 하는데, 마음속에서 앗 그런 지키기 어려운 말을 하다니 하는 소리가 들렸다. 

 

  강의녹화및 평가대상으로 선정되었는데 왜 촬영안하냐는 전화를 교학과로 부터 받고 임상과 교수들은 병원진료에 바빠서 강의시수 자체가 적으며 대부분 팀 티칭으로 이루어지는 관계로 어쩌구 저쩌구 사유서를 쓴 게 바로 어제인데 말이야.  

 

  어쨌든 올 겨울엔 논문을 좀 열심히 써야지 하고 벼르고 있다. 올해는 12월 20일 경에 프로젝트 마감을 다 할 생각이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동안 특검에서 추가검사도 많이하고 직업병 유소견자도 많고 그리고 우리 검진팀이 불친절하고 등등의 사유로 많은 회사가 떨어져 나가서 검진이 12월 초면 끝난단다.  

 

  에구에구. 진한 커피 한 잔 더 마시고 얼른 일해야겠다. 힘내라 힘, 뻐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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