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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하게 일하고 싶다

  밤을 꼴딱 새서 연구보고서 심의본을 넘겼다.

워낙 겁이 많은 사람이라 지난 봄에 퇴원한 이래 행여 몸이 부서질까 아끼고 또 아껴 조금만 이상 신호가 와도 하던 일을 중단하고 쉬곤 했었다. 그랬더니 연말에 이 난리를 친다. 

  전공의시절에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세미나 발표를 했는데 아이들 돌보느라 늘 시간이 부족하다 보니 밤샘을 하지 않고서는 해낼 수 없었다. 사실 소싯적의 나는 잠 한 숨 안자고 무엇인가 한 뒤 아침이 다가올 때의 명료함을 좋아한  적도 있다. 그 무엇인가가 깔끔하게 인쇄되어 나오면 기분이 더 상쾌해졌었다. 하지만 이젠 그저 많이 아프지 않고 일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오늘 한 남자가 찾아왔었다. 얼마전 방문했던 화장품회사 물류작업자로 입사한 지 9개월만에 허리가 삐끗한 이후 일년 동안 악화와 호전을 반복하는 요통으로 현재 20일째 병가중이다. 이렇게까지 증상이 나빠진 것은 충분히 회복되지 못한 상태에서 작업을 했기 때문인 것 같다.

 

 회사의 이사는 이 남자가 일년내내 아프다고 물리치료받으러 다니고 급기야 장기 요양에 들어갈 태세이니 골치가 아프다고 아예 산재처리를 하겠다고 한다. 세상에, 무재해 5배수(10년)를 달성한 사업장에서 그걸 희생하고 산재처리를 하겠다는 것을 보면 이 남자에게도 회사로서도 오죽하면 그럴까 싶은 구석도 있었다. 회사로서는 이 남자가 드러누워 일년이고 이년이고 아프다고 안나올까봐 두려운 것이다. 회사는 어찌나 겁이 났던지 이 남자의 주치의가 쓴 의사소견서에 첨부된 영문으로 된 방사선 소견을 자체 번역한 뒤 참고문헌까지 찾아놓고 이 남자가 불치의 병에 걸렸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환자는 좀 어눌한 사람이었고 들어올 때부터 미운털이 박혀있다. 입사당시 도의원, 시의원, 시청직원, 국회의원 등 온갖 종류의 인사들이 이 남자를 취직시켜달라고 청탁을 했다고 한다. 중소기업에는 이런 종류의 인간들이 취직을 부탁하느라 보낸 서류가 산더미같이 쌓여있기 마련이다. 웬만하면 다음에 다음에 하면서 거절하면서 버티는데 이 남자의 경우 지역 국회의원이 화를 버럭내며 강압적으로 나오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취직을 시켰는데 들어와서 보니 일도 잘 못하고 동료들간의 관계도 썩 좋지 못하고(소심함)...... 그런데 아프기까지 하니!

 

  사실 환자가 일했던 물류팀은  우리 보건관리팀의 입장에서 보면 소위 모범사례였다.- -;; 우리가 작업장 순회점검을 하다가 물류팀 작업자들의 요통호소에 대해서 회사에 보고하고 나서 얼마 안되어 지게차를 사주었고 그를 제외한 다른 작업자들의 증상은 좋아졌던 것이다. 상황이 좋아졌다는 말에 기분이 좋아서 이 남자의 작업에 대해 보다 면밀한 평가와 조정을 놓친 것이 마음에 걸린다. (담부턴 그렇지 말아야지. 엉덩이가 무거우면 꼭 뭔가를 놓친다)

  내 추측에 소심한 그는 미련하게(!) 일했을 것이다. 안전한 작업에 대한 교육을 받은 적도 없는 상황에서 바쁜 날은 하루에 15-24Kg짜리 제품을 700박스쯤 드는 데 그는 조금 더 들었을 것이다(1000박스를 셋이서 2번씩 운반함). 지난 5월에 사업장을 방문했을 때 그에 대해서 정밀진단과 적극적인 요양치료가 필요하다고 회사에 권고했지만 이제서야 엠알아이를 찍었다. 추간판 탈출증이다.  

 

  나이가 서른 두살이며 미혼인 환자는 어머니와 같이 왔다. 환자가 바라는 것은 허리에 부담이 가지 않는 작업으로 배치받고 얼른 복귀하는 것었다. 아버지가 절대 산재를 하지 말라고 했다고 산재하면 큰일나는 줄 알고 있었다. 집에서 20일 있으니까 미칠 것 같다고 일하고 싶다고 했다. 우리의 목표는 안아프고 계속 일할 수 있는 것임을 강조하고 보다 적극적으로 치료를 받도록 격려했다. 이 경우 환자가 가질 수 있는 권리와 의무를 설명하고 중요한 것은 충분한 회복된 상태에서 작업에 복귀하는 것임을 강조하고 회사측과 의논해보라고 돌려보냈다.  

 

  이사와 통화를 했다. 이사는 지난번 사업장을 방문했을 때처럼 이 남자에 대한 원망을 늘어놓는다. 듣다 듣다 못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어느 회사나 그렇게 주변머리 없는 사람이 있잖아요?  우리 과 직원중에도 그런 사람있거든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한 식구인데....... 일단 기회를 주시는 걸 고려해보시어요"  요통이 적절한 치료와 재활로 회복가능한 것이라고 희망적으로 말했다. 이사는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내가 잘 하고 있는 지는 모르지만 환자의 의견을 충분히 반영하여 두달정도 공상으로 열심히 치료하고 상태가 나쁘면 산재신청을 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냈다.

 

 어쨌거나 그와 나는 안아프고 일하기를 바란다는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다.

분명히 상대적으로 안정된 전문직업을 가진 나와 이제 떨려나면 다시는 일할 수 없을 것 같은 불안을 가지고 있는 그의 바램에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가 겪을 일들이 험란할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복잡하다. 그가 나에게 심리적으로 깊이 의존할까봐 덜컥 겁이 나기도 하는 것이 사실이다. 전문가가 취해야 할 바람직한 태도, 적절한 거리를 유지한다는 게 정말 어렵다는 것을 느낀다.

 

  나는 그가 교과서적인(원칙적인) 재활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성공적인 사례는 많지 않으며 내 경험도 제한적이다. 일단 부딪혀보는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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