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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업의 유기화합물 노출

 7월11일

 오늘 오전에 8시부터 11시반까지 검진한 곳은 특수인쇄업체로 수검대상이 약 130명이다. 약 2년전 공장을 우리 지역으로 이사를 하면서 보건관리를 시작하고 검진을 하게 되었다. 고부가가치 사업이라 한다. 연말에 생산직이 지급받는 특별 보너스만 수백만원 이라 하고 직원들 복지에 나름대로 신경을 쓰는 회사이다.



 

워낙 인쇄업이 기술을 익히고 배우는데 시간이 걸리는 업종이기도 하지만 포장과 같은 공정에서도 십년이상 일하는 작업자들이 많고 수도권에서 이쪽으로 이사온 공장을 따라서 함께 내려온 기혼 여성 노동자들도 십여명 되는 것으로 보아 대우가 꽤 좋은 편인 회사임을 짐작할 수 있다. 넉넉한 임금을 받는다는 것은 건강상담을 하다가 증상이 조금만 있어도 수십만원짜리 임상검사들을 별 망설임 없이 하는 사람들도 꽤 만난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회사 보건관리의 어려운 점은 경영진의 미묘한 태도이다. 보건교육을 하자 하면 일단 관리감독자 교육부터 하자고 하고 공장장과 주요 인사들 대여섯명이 나타난다. 의사방문때 마다 주요 현안에 대해 브리핑도 하고 토의도 하는데 노동자들에게 안전보건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을 꺼린다는 인상을 받는다.


내가 마지막으로 방문한 것은 지난 가을인데 그 때는 십년이상 서서 일했던 여성노동자들의 하지정맥류에 대해서 관심을 촉구하고 예방적인 조치와 치료를 당부했었다. 맞교대라는 인쇄업의 특성상 이 회사 노동자들은 밥먹는 시간 빼고 12시간을 꼬박 일하는데 그 시간을 한 자리에 서서 일하니 다리가 안 아플 수 없고 하지 정맥류가 안 생길 수 없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오늘 가보니 수도권에서 같이 내려왔던 십년이상 일했던 여성노동자중 반이상이 그만두고 새로 더 많은 여성 노동자를 채용했다. 언젠가 담당했던 간호사로부터 아무리 돈을 많이 받더라도 집안 살림 놓아두고 내려와 주말부부하면서 일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라 하더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오늘 보니 하지정맥류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새로운 작업자들에게 자주 다리를 움직이고 고탄력 스타킹을 신고...... 등등 간단한 예방적 조치들을 설명하고 교육자료를 나누어주면서 통과, 통과.......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으니 다들 안 아프다.


 그런데 한 중년 여성 노동자의 얼굴이 말이 아니어서 물어보았더니 원래 아토피 피부염이 심했는데 회사에 들어와서 더 심해졌다고 한다. 그 공정은 완성된 제품을 포장하는 작업으로 직접적인 화학물질 노출도 없고 인쇄공정과도 격리되어 있다. 하지만 제품에 약간 남아있는 화학물질이 휘발하면서 피부를 자극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회사에 알려진 알레르기 유발물질이 하나 있긴 한데 그게 원인인지 자극성 접촉피부염인지 확실치 않다. 그걸 규명하기 위해서 첩포시험을 해야 할 것인가? 아닌 것 같다. 첩포시험을 통해 알레르기 유발물질을 규명하는 것이 환자에게 유익한 경우는 산재보상목적 또는 작업전환의 근거가 필요할 때.  이 회사에는 지금 일하는 공정이 화학물질 노출이 가장 적은 곳이다. 이미 알고 있는 아토피 피부염에 회피불가능한 작업환경이다. 그녀의 선택은 본인도 말했듯 그만두거나 참거나.......그래도 고민이 된다. 일단 저농도 화학물질에 대한 피부노출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더 알아보고.


 한편 상반기 작업환경측정에서 유기화합물 노출기준 초과가 3건, 소음 초과가 한 두 건 발생했다는 보고를 받았는데 다행히 사업주측에서 큰 문제제기 없이 초과를 인정해서 그냥 보고서가 나갔다고 한다. 오늘 38명의 유기화합물 노출자에 대하여 신경행동검사를 하고 노출감소를 위해 걸레를 아무데나 두지 말고 유기용제 용기 뚜껑을 잘 닫고 압통 닦을 때는 반드시 방독마스크를 쓸 것. 정기적인 특수건강진단을 받고 몸의 변화를 감시할 것 등을 일일이 붙들고 설명했다.


  물론 환기를 철저히 하는 게 우선이다. 맨 마지막에 나타난 관리부장과 공장장은 노출초과건에 대해서 새 공장 이전하면서 건물과 환기시설을 잘못 설계해서 그런 것 같다고 개선을 검토 중이라 했다. 제품의 특성상 날파리가 들어가면 안되기 때문에 지나친 밀폐를 추구한 것이 화근이었을 것이다. 환기는 지금보다는 나아질 것이다. 돈도 자존심도 있는 회사니까.


  성수동 시절 소규모 인쇄업체에 다년간 다녀본 나의 경험으로 인쇄업의 유기화합물 관리는 국소배기시설이 가장 중요하지만 작업습관도 매우 중요하다. 기술을 배우는데 수년씩 걸리는 인쇄업 종사자들은 자존심이 강하고 자신의 일이 몸에 크게 해로울 것이라고 생각하기 싫어하는 태도를 보일 때도 있다. 강도 높은 12시간 맞교대 작업을 하다보면 유기 화합물 노출로 인한 만성적인 건강영향이 나타나기도 전에 조기에, 40대 중반이전에 일터를 떠나게 되기 때문에 경각심도 별로 없다. 또 일의 특성상 수시로 열고 닫아야 하는 용제뚜껑을 제대로 닫는다는 것이  귀찮기도 하지만 주어진 물량을 맞추기 위해서 그런 것에 신경쓸 여유가 없다는 이야기들도 한다.


  불행히도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해 본 경험은 아직 없다. 내가 접한 인쇄작업자들은 성수동의 영세사업장에서 일했고 사업주들은 작업환경개선의 의지도 능력도 없었으니 공학적 개선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는데, 그런 상황에서 노동자 개인의 작업습관이라도 고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라는 것은 나의 생각이고 당사자들에게는 씨알이 먹히지 않았다. 또 소규모 사업장은 국고로 기술지원사업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서로 신뢰가 쌓일 만큼의 만남을 갖기도 어려웠다. 인쇄업종에 대한 경험은 전문의 따고 처음 했던 일이었기에 가졌던 애정만큼 아쉬움도 많았기에 이 회사를 처음 방문했을 때 잘해보아야지 했었는데.......


 그런데 일한지 2년 이내의 작업자들 중에 천식이 의심되는 사람이 3명 있어 고개를 갸우뚱 했다. 자료를 다시 검토해보니 이소시아네이트 화합물을 극소량 쓰고 있었다. 성수동의 옵셋인쇄업종에서는 그런 것을 쓰지 않아서 놓칠 뻔 했다. 메타콜린 유발 검사를 하기로 했고, 천식발작의 가능성을 경고하면서 조사가 완료되어 결론이 명확해지기 전까지 반드시 방독마스크를 착용하고 일하라고 했다. 


 유기용제 공정 38명중 갓 입사하고 아무 증상이 없는 사람 2명을 빼고 모두 신경행동검사를 냈다. 직업성 피부질환 의심도 두 세 건 있어 추가검사를 냈다. 검진비용이 꽤 좀 나올 것이라고 관리부장, 공장장한테 말해두었다. 이번에 작업환경측정초과를 한데다 그동안 여러번 직업성 질환예방에 대해서 브리핑도 하고 토론도 한 게 효과가 있었는지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특수검진은 사업주가 돈을 내는 것이기 때문에 사업주의 부담능력도 고려할 수 밖에 없는데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괜히 비용문제로 말이 나면 특수검진 결과의 사후관리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회사는 특검에서 관찰대상이나 직업병자가 나오면 검진수가가 비싸서 검진기관을 다른 데로 옮기겠다는 식으로 빠져나간다. 한편 작업환경측정 초과가 보고되면 지방노동사무소에서 점검을 나오는데 그 때 사업주가 직업병 예방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는 것도 중요한 고려대상이니 우리가 적극적으로 검진하는 것이 이 회사에 도움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서울에서 일이 있어 서둘렀더니 11시반에 끝났다. 3시간 반에 130명이라.......너무 빨리 끝났네. 이 회사 공정에 대해 잘 알고 있고 별 문제 없는 신입사원이 2-30명쯤 되니 가능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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