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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에서 소수자, 잡민으로!

  • 등록일
    2005/03/12 13:25
  • 수정일
    2005/03/12 13:25
저도 한 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민족주의란 시대적, 상황적, 공간적 맥락에 따라 해방의 동력을 가질 수도 있고 또 수구보수의 논리도 될 수있다고 말입니다. 또 "민족"이란 일종의 초월적 표식으로써 그 표식 안에 여러가지 의미들이 서로 싸우면서 공존하면서, 때로는 한 의미가 다른 의미를 누르고 표식의 모든 영역을을 장악하기도 한다고 말입니다.
또 민족을 국가와 달리 인위적인 것이 아닌, 자연스럽게 생겨난  "공동체"의 개념으로 끌고 가는 것도 가능하다고도 생각했구요. 이웃으로 태어나 비슷하게 먹고 입고 말하고 사랑하는 자연적 공동체로 말입니다.

그래서 민족을 부정해 버리는 것은 이론적으로도 실천적으로도 어리석은 일이라고도 생각했습니다. 또 민족이 내뿝은 엄청난 아우라와 "대중 동원력"을 생각할 때, 무슨무슨 다른 주의들을 막론하고 운동가들에게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개념이기도 했죠.

하지만, 민족 개념 안에 포섭될래야 포섭될 수 없는 성노동자의 관점에 서면, 민족 개념 안에 포섭될래야 될 수 없는 이주 노동자의 관점에 서면, 또 가사라고 불리는 재생산영역에 묶여 사회적으로 보이지 않게 되버린 우리 할머니, 엄마의 관점에 서면, 남성의 혈통에 근거한 가족을, 그 기본 단위로 삼는 가부장적 민족주의의 건전한 결혼을 거부하는 "히스테릭한" 노처녀의 관점에 서면, 동성연애자들의 관점에 서면, 여러 이러저러한 소수자의 관점에 서면, "대중동원"의 편리한 수사를 포기하고 보다 더 근본적인 해방과 자유의 관점에 서면,

더이상 "민족"이라는 관념에 매달리지 않게 된더군요.

또 민족주의가 항상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민족"적 상황이 우리 삶의 실체이고 현실이기 때문에 거부한다고 거부되어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현실론", 혹은 "운명론"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이렇게 얘기하고 싶습니다.
"민족"은 실체가 아닌 관념이며, 더 정확히, 실체와 현실을 조작하고 거기에 힘을 가하려는 권력자들의 관념이라구요. 한마디로 "현실론"을 조작하는 관념이라구요. 더 간단히 이 데 올 로 기 라구요.

현재 이곳 코리아에서 민족 개념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정체를 계속해서 승인하고 합법화하는 허구적 "현실론"을 조장할 뿐입니다. 이제는 길에서도 흔히 만날 수 있는 피부색이 좀 더 검은 사람들을 "현실"로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편파적 "현실론"의 기반이기도 하구요. 민족의 자랑, 월드컵의 함성 속에 명동 성당 한켠에서 단식 농성을 하던 그들, 이주노동자들을 보이지 않게 만든 것의 주범도 "민족"이라는 관념을 기반으로 민족주의입니다. "국익"이라는 "현실"을 위해서 이라크에 파병을 해야한다는 논리도 "운명공동체"인 "우리" 민족을 위한 것이라는 논리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우리"와 "저들"에 대한 구분은 원초적인 것일지도 모릅니다. 태어나며 자라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나"와 "너" "그들"이라는 개념을 인식의 바탕에 두게 되니까요. 하지만 "현실론"을 조작하는 관념론인 민족주의와 이러저러한 민족중심담론은 단지 상대적 개념일 뿐인 "우리"와 "저들"을 수직적이고 위계적인 개념으로 전환시키는 놀라운 마술봉을 숨기고 있습니다. 정말 무시무시한 위력을 가진 마술봉이죠.

"민족'이라는 관념과 민족주의에 미련을 내비치는 학자, 엘리트, 운동가들은, 제 생각에, 이 마술봉의 힘에 대한 집착을 은연중에 가진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해봅니다. 그래서 '민족이라는 개념은 재고해야한다', '민족주의는 반역이다', '민족주의는 나쁘다'고 하면서도 또 계속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되뇌이게 되는 것입니다.

어쨋든, 민족의 개념과 민족주의로 이제 더이상 해방과 자유를 추구해야 하는 시기는 지난 것 같다는 게 저의 진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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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라부지

  • 등록일
    2005/03/12 13:23
  • 수정일
    2005/03/12 13:23
어제 할아버지에게서 밤 늦게 전화가 왔다.  할아버지의 목소리에 스며있는 고독과 맬랑꼴리로 내 마음도 고독과 맬랑꼴리로 가득차 버렸다. 할아버지는 우리 떼거리들과 무언가를 갖이 하고 싶다고 늘쌍 말씀하신다. 내가 할아버지를 만난건 근 3년. 사람들을 만날 때 마다 늘 대뜸하시는 말씀이 "너 밥은 어떻게 먹니?"하는 거였다. 한마디로 이 놈(혹은 년이) 이 지 밥벌이는 지가 하면서 독립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인가에 대한 물음이자 훈계인 거다.
몇몇의 젊은 사람들은 할아버지 말투에서 80년대 풍의 권위와 훈계조를 발견하곤 대뜸 반발심을 느끼곤 하지만, 나는 할아버지가 스스로 권위를 덜어내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곤 때론 외경감을 느끼기도 한다. 하긴 몇십년 동안 몸과 마음에 길들여져 있는 권위적 사상의 잔재들을 완전히 떨쳐내는 것이란 누구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오히려  90년 대 초(이미 이순을 훨씬 넘긴 나이에)에 '과감히' 자신을 공산주의자나 맑시스트가 아닌 아나키스트로 부르기 시작한 할아버지의 변신은 어떤 운동가나 사상가도 하기 힘든 일이다.

할아버지에게도 단점은 많다. 자신이 가진 이념과 사상의 지도를 어떠한 맥락도 고려하지 않은채 대뜸 들이미는 태도라든지, 아니면 상대방을 그것에 의해 쉽게 '재단'하거나 쉽게 '신뢰'하는 것이라든지, 아니면 '너의 생각을 들어보자'하면서 끝내는 할아버지 자신이 모든걸 얘기해버리는 식이라든지. 그래서 때론 할아버지와 냉랭한 관계를 유지한 적도 있지만, 어쨌든 할아버지만큼 철두철미하게 '자신'인 사람은 본적이 없고, 또 철두철미하게 약속을 지키는 사람도 보지 못했다. 한마디로 스스로 조직화된 하나의 커다란 세계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할아버지와 만나면 느슨한 마음을 다잡을 수 있고 또 어떤 영감 같은 것을 받기도 한다.

할아버지는 지누집레이블 공연이 있는 그 시간에 상봉이와 묘아에게 열댓번 전화를 했고 전화가 통하지 않자 마침내는 경찰에게 수소문, 할아버지는 결국 경찰차를 타고 드럭까지 가셨단다. 그리고 장터가 열리는 장소에도 찾아봤으나 헛수고, 홍대 근처를 1시간 30분동안 헤맨 끝에 결국 외로운 발걸음을 집으로 돌렸다고 한다. 우리가 사이트 상으로 정보를 교환하는 사이에 이렇게 소외되는 사람도 한 두명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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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행동이란 무엇인가?

  • 등록일
    2005/03/12 13:22
  • 수정일
    2005/03/12 13:22
직접 행동이란 무엇인가?
- 매닉

자기의 문제를 자기가 좋아하는 방법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미즈타 후

일본의 한 아나키스트 아줌마는 직접행동을 이렇게 쉽게 정의한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렇게 쉬운 말이 실제로는 굉장히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 각자는 각기 다르면서도 또 어찌 보면 비슷비슷한 문제들을 안고 살아간다. 이성 문제, 입시에 대한 고민, 가정 문제, 성 폭력, 군대 내에서의 욕설과 구타, 학교제도 속에서의 억압, 직장 상사에 의한 스트레스 등등. 대개 사람들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견디고’ 있지만 이러한 문제에 정면으로 부딪혀 해결해 보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들도 싸우는 과정에서 보람을 느끼기 보다는, 직접행동이 불가능한 사회의 부조리를 체험한다.
개인의 직접 행동을 막는 사회의 장치들을 열거하면 끝도 없을 것이다. 경찰, 군대, 사법 제도, 행정 제도, 선거 제도 등등의 온갖 사회 제도들은 우리의 문제를 그들이 대신 해줄 것처럼 약속한다. 도둑과 강도의 위험에서 우리를 지켜주고, 우리를 해코지한 사람들을 대신 혼내주고, 다른 나라의 침략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고 빈곤으로부터 구제해 줄 것을 약속한다. 우리는 그저 그들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 우리는 이미 어릴 때부터 가정에서 학교에서 그리고 매스 미디어를 통해 이러한 것에 길들여져 있다. 부모는 자식에게, 선생은 학생에게, 정부는 국민에게 내 말만 잘 들으면 다 잘될 것이라고 말한다. 말을 듣지 않는 경우 엄청난 제재와 폭력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직접 행동은 어렵고 힘들다. 그러나 오히려 이러한 상황에서 직접 행동은 빛을 발할 수 있다. 자신이 한 직접 행동으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들은 그때서야 비로서 자신을 둘러싼 사회의 폭력적 실상을 파악하게 되고 자기 행동의 가치를 알게 된다. 그래서 직접 행동을 통해 직접행동을 배운다는 동어반복적 명제가 가능해진다. 다시 말해 자기의 문제를 자기가 좋아하는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사회를 꿈꾸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럼 지금부터 자기의 문제를 자기가 좋아하는 방법으로 해결한다는 말에는 함축된 두 가지 직접 행동의 조건을 살펴보자. 첫째, 자신의 문제는 자신이 해결하라. 남이 해결해줄 거라고 믿는 것은 나의 의지를 다른 사람에게 떠 넘겨주는 것이다. 이것은 나의 의지를 부모에게, 선생에게, 경찰에게, 정당에게, 법관에게, 때로는 노조에게 그리고 각종 리더에게 넘겨주는 것이다. 자기 보다 큰 조직에게 자신을 맡김으로써, 그것이 자신을 대신해 말하고 행동하고 또 자신을 억압하고 착취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국가의 폭력체계가 작동하는 기본 원리이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라고 허울좋게 떠들고 있는 미국의 사이비 민주주의를 보라. 얼마나 많은 젊은 이들이 전쟁에서 죽고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사람들을 죽여왔는지를. 이것이 모두,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모든 사람이 코웃음을 칠 것이다.    
둘째, 자기가 좋아하는 방법으로 해결하라. 때로는 많은 사회 운동가들이 더 큰 ‘대의’를 위해 스스로에게 폭력을 가한다. 자신의 문제에서 출발했지만 종국에는 자신의 문제따위는 잊어버리고 조직이 내세우는 대의를 위해 조직이 원하는 방식대로 움직이게 된다. 그래서 때로는 자기 몸에 신나를 끼얹고, 단식 투쟁을 벌이는 등의 자해가 만연하게 된다. 이러한 투쟁 방법은 그때는 잠시 효과를 볼 수 있겠지만 넓게 보면 매우 영웅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러한 자해적 방식은 조직내의 개인들에게 일종의 암묵적 강요로 까지 번질 수 있다. 그래서 자해가 일종의 통과의례가 되어버리고, 극한 자기 고문을 이겨낸 사람만이 지도자의 위치로 부상하게 된다.
80년대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생겨난 수많은 ‘열사’들의 정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보다 평범하고 약한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저항 방법들을 모색해야 할 시점이다. 그러한 점에서 이번의 촛불시위는 운동권 중심의 과격시위를 넘어서 비폭력 평화 시위를 활성화 시킨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평화 시위라는 이름으로 여러 가지 다른 가능성들을 차단해서도 안될 것이다.
결국 이것이 직접 행동이고 저것이 직접 행동이다 라고 일반적으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직접 행동은 그때 그때의 상황에 따라 개인이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 친구는 군대를 거부하고 감옥을 택할 수 있고 또 한 친구는 여자친구의 가발을 빌려 신체 검사 중에 쇼를 할 수도 있다. 또 한 친구는 군대에 가서 비로소 군대내의 폭력을 체험하고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다. 어쨌든 이 셋 다 징병제라는 문제에 대한 각각 나름의 직접행동이라고 말하고 싶다. 어떠한 효과적인 직접행동이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각 개인의 상상력과 판단력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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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통령은 우리가 무엇을 잊어버리길 원하는가?(번역)

  • 등록일
    2005/03/12 13:21
  • 수정일
    2005/03/12 13:21
미국 대통령은 우리가 무엇을 잊어버리길 원하는가?
-Robert Fisk 2002 10.9
(infoshop.org에서 펀글)

요즘은 매일매일, 전쟁광 조지 부시가 내뱉는 상상을 초월하는 말들을
듣고 살아야 한다. 어제는 부시가 Cincinnati에서 “핵무기에 대항하는
신성한 전사들nuclear holy warriors”라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었다. 부시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사실들을 잊어줄 것을 요구하는 것 같다. 이라크에 핵무기가 있는 것이 아직 증명되지 않았다는 사실, 최근 부시와 블레어의 말에서 드러나는 불명료한 “그럴지도 모른다”, “만약 ~한다면” “그럴 가능성이 크다” 뭐, 이런 것들이 다 말장난이라는 것, 그리고 오사마 빈 라덴이 핵무기를 손에 넣었다면 맨 먼저 사담에게 사용했을 거라는 것 등등.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잊어야 한다.
또 우리는 잊어야 한다. 어제 부시가 연설하기 바로 몇 시간 전에 이스라엘 군에 의해 14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죽었다는 사실, 그리고 사망자 안에는 12살 난 아이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 또 이스라엘 총리 샤론이 7월에 9명의 팔레스타인 아이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했을 때, 부시 입에서는 “샤론은 평화적 인물, 그는 위대한 사람이다”라는 말이 나왔다는 사실을.
테러라는 말을 그는 후세인, 오사마 빈 라덴, 야셀 아라파트에게만 사용한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과 미국에 대항하는 사람들에게만 적용하는 것이다. 부시는 어제 연설 30분 동안에 30번 이 말을 사용했다.
그러나 이제 좀더 정확하게 우리가 그를 지지할 때 반드시 잊어야 할 것들의 명세서를 작성해 보자. 먼저 우리는 1983년 12월에 레이건이 사담 후세인에게 특사를 파견한 사실을 잊어야 한다.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에서 우리는 반드시 이 사실을 잊어야 한다. 첫째, 사담은 아란과의 전쟁에서 이미 독가스를 사용한 바 있다. 그 때 레이건은 그 사실을 눈감아 주었다. 그런데 새삼스레 지금에 와서 생화학 무기 운운하며 전쟁을 벌이려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둘째, 그 때 이라크에 특사를 보낸 건 이라크와의 재수교를 위한 것이었다. ‘바그다드의 백정’ 후세인과 무역과 경제에 대한 긴밀한 협조를 목적으로 만난 것이다. 셋째로, 그 특사는 바로 다름이 아닌 도널드 럼스팰드(Donald Rumsfeld)였다. 따뜻하게 악수까지 했던 사람이 실제로는 악마라는 것을 이제 와서 우리에게 밝혀주기라도 하겠다는 것인가? 그런데 이상하게도 럼스펠드는 그 일에 일언반구도 없다. 1984년 3월 럼스펠드가 이라크의 타릭 아지즈와의 회담하고 있던 기간에 사담이 이란에 독가스를 사용했다는 보고서가 날아들었다. 그럼에도 미국의 미디어는 그저 잠잠하기만 했다. 아마도 우리가 꼭 잊어야 할 사실이었음에 틀림없다.
또 잊어야 할 것들이 있다. 1988년 사담이 가스로 수 만 명의 쿠르드인들을 사살했을 때 – 부시, 체니, 블레어, 쿡, 스트로 등의 말을 인용하자면 “자기의 국민들에게 가스를 사용했을 때” – 아버지 부시는 UN 정부 보조금이라는 명목으로 미국의 농산물을 사는 대가로 그에게 5억 달러를 지급했다. 또 사담의 쿠르드족 인종청소가 끝난 그 다음해에는 아버지 부시는 보조금을 10억으로 늘렸다. 탄저균 종자, 헬리콥터, 생화학 무기로 사용할 수 있는 물질들의 지원과 함께 말이다.
아들 부시가 이라크 국민들에게 후세인이 제거된 후의 “새로운 희망의 시대”와 민주주의를 약속 할 때, 우리는 또 잊어야 할 것들이 많다. 우리는 1980년에 소련군을 물리치면 희망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파키스탄과 팔레스타인에게 한 미국의 약속을 잊어야 한다.
우리는 또 아버지 부시가 1991년에 이라크 국민들에게 사담을 제거하면 새로운 희망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약속하고는 아무것도 해주지 않은 것을 잊어야 한다. 또 1993년에 소말리아에게 새로운 희망을 시대를 약속하고는 “Black Hawk Down”(?) 이후에 그 나라를 완전히 포기한 것을 잊어야 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작년 아들 부시가 아프카니스탄을 폭격하기 전에 기필코 아프카니스탄을 지켜주겠노라고 약속한 것을 우리는 또 잊어야 한다. 그 후로 그 나라는 마약상들과 전쟁광들, 혼란과 공포의 소굴이 되어 휘청거리고 있다. 그런데 어제 연설에서 그는 아프카니스탄이 “해방”되었다고 떠벌렸다.
또한 우리는 석유에 대해서도 잊어야 한다. 석유는 아들 부시가 그의 ‘석유 동지’인 체니, 라이스, 그리고 다른 각료들과 함께 가장 잘 알고 있는 분야이다. 한번도 그들의 입에서 언급되지는 않지만 말이다.
어제 부시의 대 이라크전에 대한 30분 연설에는 이라크에는 사우디 보다도 더 많은 석유가 매장되어 있을 지도 모른다는 것, 그리고 미국의 석유 회사들이 전쟁 후에 엄청난 돈을 긁어갈 생각에 침을 질질 흘리고 있다는 것 등등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반드시 잊어야 할 사실들이다. 전쟁에 나서기 전에 반드시 무시하고 넘어가야 할 일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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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내에서 여성의 당파성은 “보지”다?

  • 등록일
    2005/03/12 13:21
  • 수정일
    2005/03/12 13:21
자본주의 내에서 여성의 당파성은 “보지”다 라는 아나키75의 주장에 대해

이것은 자본주의 내에서의 노동의 내러티브를 성(보지)의 내러티브로 간단하게 바꾸고 변주한 것이입니다. 자본주의 내에서 여성의 보지는 곧 여성의 노동 상품이다라고. 따라서 여성은 자신의 노동 상품을 전유(전유:자기 것으로 만들다)하고 적극적으로 그 자리에서 투쟁해야 한다. 그럴 듯한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되면 다른 노동 상품과 달리 성 상품이 가지는 구체적인 결들을 놓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임금 노동의 경우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을 직접적으로 상품화하지는 않습니다. 노동은 자본가 측에서 보면 비용에 속하는 것이고, 상품은 그 노동의 결과물입니다. 노동자가 소비자앞에서 직접 자신의 노동을 보여주고 호객하는 것은 아니죠. 반면 성매매(여기서 저는 단순히 매매춘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성의 성이 상품화 전반을 의미합니다.)는 노동 그 자체가 상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몸을 보여주고 꾸미고 치장하는 여성의 몸 그것 자체가 상품입니다. 따라서 스스로 자기자신을 객체화시켜서 고객의 욕구에 부흥하는 상품을 만들어야 하죠. 여기서 여성의 몸을 상품으로 만드는 사회적 가치에 대해서도 언급을 해야겠네요. 사회적 가치란 아름다움, 섹시함, 귀여움, 착함 등등이겠죠. 섹스를 하고 싶게 만드는 것은 단순히 “보지”가 아닙니다. 이러한 온갖 잡다한 관념들과 환상들이 여성의 몸에 다닥 다닥 붙어있죠. 이러한 관념들과 환상들은 단순히 “자본주의적”인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굉장히 구시대적이고 전통적이고 가부장적인 가치들이죠. 이러한 비자본주의적인 것들이 자본주의의 생산양식과 맞물리게 된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 문화 현상은 자본주의 생산양식 그 자체만으로는 정의할 수 없습니다. 많은 좌파들이 이것을 망각하고 곧잘 경제주의적 환원론에 빠지죠) 따라서 여성의 해방은 이러한 비자본주의적인 것들에 대한 투쟁도 함께 병행되어야 하죠.
두 번째 여성이 보지를 자기의 것으로 전유하지 못하게 하는 사회적 장벽이 있습니다. 이것또한 굉장히 비자본주의적인 것입니다. 그 장벽이란 자본주의 생산영역과 그 법의 테두리에서조차 소외된 가정이고, 뒷골목이고, 포주, 기둥서방들로 대표되는 남성들입니다. 단적으로 여성의 성 매매는 뒷골목에서 이루어지죠. 그래서 최근들어 공창화 논란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젠 법의 테두리에서 노동매매와 같이 성매매를 관리하겠다는 것이죠. 노예해방, 농노해방으로 이루어진 도시 임금 노동자 집단의 출현처럼 성매매가 합법화 된다면, 즉 “창녀”들이 해방된다면 자연스럽게 성노동자집단이 당파성을 가지고 출현하게 되겠죠. 제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당파성이란 그냥 가진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사회적 조건 하에서 가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성의 성노동은 이렇듯 다른 임금노동과는 달리 이러한 몇겹의 장벽들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단순히 임금노동의 내러티브를 그대로 성노동의 내러티브로 번역해내는 것은 일견 타당하지만 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 아직 한국에서 성매매 노동자는 그 당파성을 가지지 못하고 있는지 그 사회적 조건을 먼저 따져봐야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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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없으면 안해!!!

  • 등록일
    2005/03/12 13:18
  • 수정일
    2005/03/12 13:18
밑에 아나클랜 시위에 대해서 엄숙하지도 진지하지도 않은 모습으로 묘사를 했는데, 나는 이말이 그렇게 나쁘게 들리지만은 않는다.
예전에 게시판에서 "재미"에 관한 논쟁이 생각난다.
어떤 사람들은 진정성 타령을 하며 재미를 찾는 건 자기만족을 위한 마스터베이션이 아니냐고 지적하기도 한다.
하지만 "재미있게 운동하자"라는 것이 과연 운동의 소위 말하는 "진정성"에 위배되는 것일까...
나는 오히려 "진정성" 운운하는 것보다는 운동의 지속성 차원에서 재미의 당위성을 끌어내고 싶어진다.

즉, 조직도 없고, 지도자도 없는 !!!

그러한 운동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첫째, 나 스스로가 즐겁지 않으면 안된다.
둘째, 내가 즐겁기 위해서는 늘 새로운 뻘짓들을 창조해야 한다.
셋째, 뻘짓이 늘 즐거운 건 아니다. 그 중에서도 반응이 좋은 뻘짓이야 말로 나에겐 샘솟는 기쁨이 아닐수 없다. 그러므로 반응이 좋은 뻘짓들을 집중 개발해서 업그레이드 시킬필요가 있다.

바로 "재미"란 조직도 지도자도 없는, 또한 조직도 지도자도 반대한는, "한 사람으로서의 조직"인  "나"들의 행동방식이고, 또한 운동을 재미로써 확산시키는 나름의 '전술'이다.

아, 물론 모든 사람이 똑같은 걸 다 재미있어하는 건 절대 아니다.
재미가 서로 다르다는 것, 바로 그 점이 우리들이 다양한 재미를 계속해서 만들어내는 원동력이 된다.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재미없으면 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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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국적포기각서에 서명하는 이유

  • 등록일
    2005/03/12 13:17
  • 수정일
    2005/03/12 13:17
이 글은 제가 한겨레 웹사이트의 "왜냐면"에 기고한 글입니다


내가 국적포기각서에 서명하는 이유
- 매닉

    반전 인간방패로 이라크에 머물렀던 배상현씨와 임영신씨의 국적포기선언이 사람들에게 충격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들의 국적포기선언의 배경에는 강대국 자신들의 국익을 위해 다른 나라의 주민들을 살상하는 반인륜적인 행위에, 한국이 또한 "국익"이라는 이름으로 동참하는 것에 대한 비참함과 분노가 놓여져 있다. 인간방패로 위험을 무릅쓰고 이라크에 가서 인종, 민족, 국가의 굴레를 모두 던져 버리고 이라크 주민들과 함께 생사를 같이한 이들의 입장을 생각한다면 그러한 선택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분명 이들은 그 곳 주민들과 각 국에서 온 인간방패들과 민족, 국가, 인종을 뛰어넘어 같이 호흡하고 연대하면서 전쟁을 일으키고 전쟁에 동조하는 국가주의, 애국주의라는 집단 이기주의를 넘어서는 보다 근본적인 인간적 감수성을 발견했으리라.
   파병 논란과 그에 따른 이들의 국적포기선언, 또 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서 나는 우리나라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거의 모든 담론들이 국가와 민족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고 또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파병 찬성도 국가와 민족을 위한 것이고 파병 반대도 국가와 민족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심지어 배씨와 임씨의 국적포기선언 또한 어떤 애국심을 담보로 할 때만이 정당한 것으로 여겨진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이러한 편협한 국익을 위한 행위가 타 국민을 상대했을 때에는 "그들"을 위한 무언가가 된다는 것이다. 중동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이라크를 침공하면서 겉으로는 그들의 민주화를 위한 해방전쟁이라고 떠들어대는 미국의 이번 대 이라크 전이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어찌되었건 전쟁의 폭력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것은 힘없는 이라크 주민들, 그들뿐이다. 언제까지 우리는 일반화된 국가폭력의 역사를 잘 알면서도 편협한 애국심을 조장하는 위정자들에게 우리들 자신을 맡겨야만 하는가! 노엄 촘스키의 말처럼 그들에겐 국민은 없는데도 말이다.

국적포기의 의미

    먼저 실질적으로 국적포기가 가능한 것인지에 대해서 얘기해보자.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태어나자마나 출생신고를 통해 대한민국 국적을 가지게 된다. 국적을 포기하기 위해서는 법적으로 다른 국적을 취득했다는 증빙서류를 제출해야 한다. 따라서 내가 알기론 국적 자체의 포기, 소위 무국적자가 되기 위해서는 아예 출생신고를 하지 않는 방법 이외에는 어떤 방법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국적이란 하늘이 내린 숙명과도 같아서 국적포기를 선언한다는 것은 현실적이라기 보다 매우 상징적이라 할 수 있다. 그 상징성에 대해서,
    첫째, 국적 포기 선언은 배씨와 임씨처럼 국가의 부도덕한 행위에 대한 반대의 의미를 담고 있을 수 있다. '나는 평소 대한민국 국민임을 자랑스러워했으나 이번 파병으로 인해 배신감과 분노를 느낀다. 따라서 나는 대한민국의 국민임을 포기하겠다'는 말이다. 이 이면에는 국가의 존재란 도덕적이고 합리적인 행위를 통해 정당화된다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다시 말해 국가 존재의 정당성은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라 조건적이라는 것이다. 배씨와 임씨의 선언에 충격을 받은 일부 사람들이 인터넷을 통해 그들이 매국노라느니, 진짜 국적을 포기하는지 두고 보겠다느니 하는 욕지거리로 그들을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에 대한 이러한 알맹이 없는 비판은 독재 정권 시대부터 전략적으로 심어져와서 이제는 그 뿌리조차 보이지 않게 깊이 박힌 무조건적 애국심을 반증할 뿐이다. 왜 국적을 포기하는가 하는 그 배경과 조건에 대한 논의보다는 국적을 포기하는 것 자체가 신성모독이고 불쾌할 뿐이다.
    둘째, 국적포기는 국가가 보장하는 권리를 포기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배씨와 임씨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국적이 없으면 합법적으로 일자리를 가질 수가 없다. 또 여권과 비자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다른 나라로의 여행도 불가능하다. 언뜻 보기에 국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이렇듯 여러 가지 권리 (노동할 수 있는 권리, 여행할 수 있는 권리 등등)를 보장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말이 권리이지 구속력에 다름이 아니다. 국적이란 근본적으로 스스로를 자승자박하고 그것을 권리라고 칭하는 모순을 내포하지 않을 수 없다. 구속력이 마치 권리인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것이 매우 배타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 나라의 국적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은 그 나라에서 자유롭게 여행할 수도 일할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수십만의 이주 노동자들을 생사의 궁지에 몰아넣고 탄압하는 근거가 된다. 이렇게 소수자를 배제하고 억압해서 얻어낸 권리라면 그것이 폭력배가 한 동네를 차지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통행세를 뜯어내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따라서 국적포기선언은 이러한 배타적 권리, 다시 말해 "국익"이라고 일컬어지는 집단이기주의에 대한 도전이다.

국익이라는 허상

   그렇다면 너도나도 떠들어대는 국익, 이 전쟁이 부당하다는 걸 알지만 힘이 없으니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들이대는 이 국익의 정체는 무엇인가? 국익이란 정작 누구의 이익인가? 국익은 결국 모든 일반 국민의 이익으로 돌아가는가? 국익은 보통 사람들이라고 하는 택시, 버스 운전사, 길거리의 노점상, 일반 노동자들, 회사원들, 소규모 자영업자에게도 돌아가는가? 몇 년 전 우리는 IMF라는 힘겨운 시기를 보냈다. 당시 김대중 정부는 구조조정과 신자유주의 정책은 필연적이고 오히려 국가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국민들을 설득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잘리고 그 동안 군사 독재시대를 참아가며 국민이 묵묵히 일구어놓은 국가 기간 산업들이 송두리째 탐욕스런 자본의 손에 넘어갈 지경에 놓였다. 국가와 기업 경쟁력을 위한 이른바 노동 유연화 정책으로 비정규직 노동자가 50 퍼센트를 넘어서게 되었다. 국민 대다수가 박봉에다 언제 어떻게 잘릴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높은 금리 덕에 돈놀이해서 재미를 본 사람들은 그 부를 주체하지 못할 지경이다. IMF와 신자유주의정책으로 심화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보고도 우리는 국익을 내세우는 국가의 정책이 국민 대다수를 위한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 IMF로 직장에서 잘리고 노점상을 차렸다가 다시 거리 환경미화를 이유로 거리에서조차 내몰릴 수밖에 없는 사람에게, '월드컵은 바로 국익을 위한 것이다. 그러니 당신이 희생하라'고 말할 수 있는가? 도대체 얼마를 희생해야 국익은 바로 나의 이익으로 돌아오는가? 미군에 의해 두 여중생을 비롯한 여러 사람이 희생 당하고있는 상황에서 국익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미국과 계속 공생할 수밖에 없다고 우리의 위정자들은 말하는데, 그들에게 묻고 싶다. 도대체 얼마나 기다려야 우리는 미국의 식민지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체제 보장만이 유일한 목표인 것처럼 보이는 북한의 김정일 정권과 우리의 대한민국의 정치가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다른가?

국가는 절대선도 필요악도 아니다.

    내가 서명하는 국적포기각서의 의미는 어쩌면 배상현씨와 임영신씨와 다를 수도 있다. 나는 국가와 국민에 실망하고 분노하는 차원이 아니라 앞에 열거한 모든 이유에서 국가 존재는 필요악도 될 수 없다는 입장에 있다. 나에겐 나 자신과 나 자신을 둘러싼 이웃들이 소중하다. 나와 나의 소중한 이웃과 친구들이, 우리를 보호하고 그 이익을 보장해준다는 국익이라는 허상에 넘어가 온갖 가진 자들을 위한 정책에 동조하며 근본적인 도덕적 의지와 비폭력적 감수성을 죽이고 또 전시에는 전쟁기계의 부속품이 되어 희생되기를 원치 않는다. 나는 그동안 아나클랜(anarclan.net) 친구들과 이러한 입장에서 전쟁과 군대를 반대하고 파병을 반대해왔다.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친구들도 많이 있고 또 어떤 사안에 대해서는 나의 의견에 반대하는 친구들도 있다. 하지만 전쟁이란 국가가 그 폭력적 본질을 스스로 드러내는 사건이라는 점에서는 모두들 동의할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그러한 국가의 전쟁기계를 멈추기 위해서는, 국력을 키워 전쟁을 억제하자는 차원도 아니고(이러한 주장은 미국과 똑같이 되어 "방어전쟁"을 하자는 말이다) UN과 같은 국가와 국가 차원의 협의기구도 아닌, (이미 UN은 전쟁을 억제하지 못한다.) 오직 "국민도 시민도 노동자도 나 자신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잡민"들의 광범위한 연대만이 진정한 길이라는 사실에 동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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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에서 펌]힐러리에게 암소를

  • 등록일
    2005/03/12 13:16
  • 수정일
    2005/03/12 13:16
약골이 퍼 놓은 글을 보려고 녹색평론에 들어갔다가 이 글을 읽게 됬습니다. 집에 가다가 꼭 이 책을 사야 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마리아 미즈라고 하면 반다나 시바와 함께 <에코페미니즘> 이라는 책을 낸 적이 있지요. 여성과 어린아이, 자연을 다소 물신화시켜 바라보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감동적인 글들이었던 기억이 나네요.


힐러리에게 암소를 - 세계화 경제를 넘어 '자급'의 삶으로
마리아 미즈/베로니카 벤홀트-톰센

     이 글은 최근 국내에《에코페미니즘》의 공저자 중의 한사람으로도 소개된 바 있는 독일의 생태여성주의 사상가이자 활동가인 마리아 미즈(Maria Mies)가 그 동료 베로니카 벤홀트-톰센(Veronika Bennholdt-Thomsen)과 함께 집필한 새로운 책 Eine Kuh für Hillary:Die Subsistenzperspektive(1997)의 영어판 The Subsistence Perspective:Beyond the Globalized Economy(1999)의 서문을 옮긴 것이다. "Subsistence Perspective"는 성장 . 개발 . 세계화 경제의 이데올로기의 지배 밑에서 지금 벼랑끝으로 치닫고 있는 세계에 필요한 진정하게 대안적인 삶의 방식으로서 근년에 유럽, 특히 독일의 생태운동가들 사이에 관건적인 화두로 등장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 책의 저자들은 이 새로운 개념이 근본적으로 제3세계 풀뿌리 민중의 삶의 방식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열쇠말인 subsistence는 기초적인 생존수준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잠정적으로 '자급의 삶'으로 번역하였다.

  1995년 4월 북경에서 '유엔 세계 여성회의'가 열리기 몇달 전 미국의 퍼스트레이디 힐러리 클린턴이 방글라데시를 방문하였다. 그녀의 방문목적은 방글라데시 시골마을들에서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들어온 '그라민은행'(Grameen Bank=풀뿌리 민중의 자립적 삶을 지원하기 위해 가난한 시골마을 사람들, 특히 여성들에게 소액의 사업자금을 무담보로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설립 . 운영중에 있는 은행 ― 역주)의 사업이 정말 소문대로 잘되고 있는지를 몸소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그라민은행의 소액대출은 방글라데시에서 농촌여성들의 상황을 놀랄 만큼 향상시켜온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클린턴 부인은 정말 이 여성들의 힘이 소액대출 때문에 커졌는지를 알고 싶었다. 그라민은행이나 개발지원 기관들에게는 '여성의 힘이 커진다'는 것은 한 여성이 자기자신의 소득을 가지고, 얼마간의 자산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힐러리 클린턴은 마이샤하티 마을을 방문하였고, 거기서 그곳 여성들의 상황에 대하여 몇몇 여성들과 회견을 가졌다. 여성들은 대답하였다. "네, 우리는 이제 우리 자신의 수입이 있어요." 그들은 얼마간의 '자산'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암소, 닭, 오리 등이라고 했다. 아이들도 학교에 다니고 있다고 그들은 말했다. 이러한 대답을 듣고 클린턴 부인은 만족스러웠다. 마이샤하티 마을에서 여성들의 힘은 분명 커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질문하는 사람이 방글라데시 여성이 되고, 힐러리 자신이 대답을 해야 될 차례가 되었을 때 미국의 퍼스트레이디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질문과 대답은 다음과 같이 이루어졌다.
  "아파[자매님], 당신은 암소가 있어요?"
  "아뇨, 나는 암소가 없는데요."
  "아파, 당신은 자기 소득이 있어요?"
  "실은, 전에는 내가 직접 벌었는데요, 그런데 남편이 대통령이 되어 백악관으로 옮긴 다음부터는 내가 직접 돈버는 일을 그만두었답니다."
  "아이들은 몇 있나요?"
  "딸 하나예요."
  "아이들을 더 갖고 싶진 않나요?"
  "네, 하나나 둘쯤 더 갖고 싶긴 해요. 하지만 우리는 우리 딸 첼시와 함께 행복하게 지내고 있어요."
  마이샤하티 마을 부인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참 안됐네! 힐러리 부인은 암소도 없고, 자기 소득도 없고, 아이도 딸아이 하나뿐이라는군." 방글라데시 농촌여성들의 눈에 힐러리 클린턴은 결코 힘이 있는 여성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녀에게 동정심을 느꼈다.

  암소 한마리와 닭 몇마리와 아이들이 있다고 해서 스스로 힘이 있다고 느끼는 방글라데시의 농촌여성들과 힐러리 클린턴 사이의 인터뷰 이야기는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방글라데시의 '가난한' 여성들이 어째서 힐러리에게 동정심을 느끼는가? 힐러리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모두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닌가? 방글라데시의 농촌여성들은 단지 순진하거나 무지한 것인가?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여성들은 클린턴 부인이 '부유한'나라에서 왔고, 많은 돈을 갖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위의 에피소드는 힐러리 클린턴과 방글라데시 마을 부인들이 갖고 있는 관점의 차이를 요약적으로 드러낸다. 이 여성들은 미국의 퍼스트레이디와 전혀 다른 시각에서 세상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시각은 '밑으로부터의' 관점, 즉 자급의 관점이다. 이런 시각에서 세상을 볼 때, 모든 사물과 관계는 전혀 다르게 보인다. 특히 무엇이 좋은 삶을 만들어 내는지에 대한 개념이 달라진다. 그것은 좋은 삶이 가능하려면 돈이 많아야 되고, 물건이 많아야 되고, 사치품이 있어야 하며, 이러한 좋은 생활은 북반구의 부유한 나라와 세계도처의 부유계층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클린턴 부인을 포함한 대부분의 북반구의 부유한 여성들의 관점과 전혀 다른 것이다.
  아마도 방글라데시 시골에서의 그 회견은 클린턴 부인에게는 일종의 문화적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십중팔구 시골마을 부인들이 공손한 태도로 얼마간의 사업자금을 요청하고 이 세계의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진 남자의 아내인 자신을 우러러보리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시골마을 여자들은 힐러리의 '위로부터의' 관점을 갖고 있지 않았다. 인터뷰 동안, 그들은 부와 가난에 대해 전혀 다른 개념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수입상품으로 가득찬 슈퍼마켓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들은 서구인들이 갖고 있는 빈곤과 부와 좋은 삶에 대한 개념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드러내주었다.
  아마도 클린턴 부인은, 생애 처음으로 자신의 인생에서 무엇인가 결핍된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지 모른다. 자기 나라의 엄청난 부에도 불구하고 무엇인가 본질적인 것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것은 방글라데시의 여성들이 아직 갖고 있는 어떤 것일 것이다. 자부심, 위엄, 자기 힘으로 살 수 있는 능력 ― 우리가 무엇이라고 부르든지 우리는 그것이 '자급의 관점'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자급의 관점은, 스스로의 생명(삶)을 생산하고 재생산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서며, 자기 목소리로 말할 수 있는 능력의 모태이다.
  우리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도 이러한 자급의 관점이다. 우리도 힐러리 클린턴처럼 부유한 국가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부의 모델을 더이상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그것이 전세계적으로 일반화될 수 없는 것이라는 이유뿐만 아니라 이런 형태의 '좋은 삶'의 욕구가 초래하는 파괴 ― 자연의 파괴, 외국인의 파괴, 민중의 자립과 존엄성의 파괴, 아이들의 미래의 파괴, 그리고 인간적인 모든 것의 파괴 ― 때문이다. 우리는 항구적인 상품, 서비스, 돈의 성장을 노리는 '위로부터의' 관점으로는 이 시스템이 만들어낸 궁지에서 우리가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지배적인 패러다임과의 근원적인 단절과 새로운 관점, 새로운 비젼의 모색이 불가피하다.

  우리가 자급의 관점의 윤곽을 그려나가려는 노력에 있어서, 방글라데시 농촌여성들은 우리의 스승이 된다. 그들이 힐러리 클린턴과 나눈 대화는 비단 그들뿐만 아니라 세계도처의 모든 사람들의 '좋은 삶'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독립적인 생존을 확보하는 일이다. 우리는 방글라데시 부인들에게서 5가지 교훈을 얻는다.
  첫째, 밑으로부터의 관점이다. 우리가 현실을 볼 때, 어디로 가고,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분명한 지침을 얻으려 할 때, 우리는 여성의 관점 특히 남반구의 농촌여성과 가난한 도시여성들의 관점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서, 우리는 일상생활과 그 정치, 삶의 지속을 가능하게 하는 여성들의 전략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러한 밑으로부터의 관점은, 사회 '꼭대기층'의 삶과 라이프스타일이 현실적으로 가장 좋은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추구해야 할 삶의 이미지라고 하는 믿음이 얼마나 그릇된 망상인가를 알려준다. 이러한 망상에서 벗어나옴으로써 우리는 이런 식의 이른바 좋은 삶이라는 것은 오직 소수에게만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나아가서, 그것도 타자 ― 자연, 타인, 여성, 아이들의 희생 위에 가능할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둘째, 방글라데시의 여성들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자급의 관점은 돈, 교육, 지위, 특권이 아니라 기초적 생존수단, 즉 한마리의 암소, 몇마리의 닭, 아이들, 땅, 그리고 얼마간의 독립적인 현금수입을 확보함으로써 일차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외부의 힘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삶을 꾸려나갈 수 있는 공동체 역량이다.
  셋째, 바로 이러한 독립적인 생존능력을 스스로 갖고 있다는 데 대한 깨달음이 마이샤하티 마을의 여성들에게 미합중국의 퍼스트레이디를 단지 그들의 '나이든 자매'로서 대등하게 대할 수 있는 자부심과 위엄과 용기를 부여한 것이다. 그들은 남의 도움으로 빌어먹는, 비굴한 거지가 아니다. 그들은 스스로의 발로 서있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배운 네번째의 교훈은 이 여성들의 인터뷰를 통해 엿보이는 정신자세는《가족, 사유재산 및 국가의 기원》의 끝에서 프레데릭 엥겔스가 언명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말을 그들이 믿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낸다. "지배계급에게 좋은 것은 그 지배계급이 속한 사회전체에 좋은 것이 되어야 한다." 오히려 방글라데시 여성들의 질문은 그 반대를 가리킨다. 즉, "방글라데시 마을 여성들에게 좋은 것은 전체사회에 좋은 것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뜻하는 것은, 사회주의적이고, 성차별이 없고, 비식민주의적이고, 생태적이며, 정의롭고 좋은 사회는 지배계급의 생활양식 ― 예컨대, 모든 사람이 빌라와 캐딜락을 소유한 ― 을 모델로 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그런 유토피아는 모든 사람들이 자급에 토대를 둔 기초적 생존양식에 근거하지 않으면 안된다. 엥겔스의 유토피아를 실현시키고자 했던 역사적 기획이 현존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결국 붕괴로 귀결되고 말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다섯째, 우리는 세계를 '제1'과 '제3' 부분으로 나누는 정신분열 증상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방글라데시 여성들도 이러한 구분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게 아니다. 그들은 그들과 미합중국의 퍼스트레이디 사이를 갈라놓는 간극을 의식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구분과, 이 구분에 따르는 갖가지 차별을 자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힐러리 클린턴은 무엇보다도 '나이 든 자매'이자 한사람의 여성이며, 따라서 근본적으로 그들 자신과 마찬가지로 기본적 삶의 필요와 욕구 ― 즉, 자급적 삶의 수단('암소')과 얼마간의 독립적 소득(남편으로부터 독립된)과 아이들 ― 를 가지고 있는 사람일 뿐이다. 그들은 이러한 자급의 입장이 그들 자신뿐 아니라 힐러리 클린턴에게도 좋은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우리는 방글라데시 마을여성들과 같은 의견이다. '자급의 관점'은 이른바 개발도상국들과 낮은 계층의 사람들에게만 좋은 것이 아니다. 이른바 선진국들과 높은 계층의 사람들에게도 꼭같이 타당하다면 그것은 '새로운' 관점일 수밖에 없다. 이원적으로, 위계적으로 나뉘어진 두개의 경제는 더이상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발언은, 물론 이른바 '경제'라는 것에 대한 우리의 통념에 도전한다. 만약 '경제'가 산업의 끊임없는 팽창, 상품의 생산 및 소비, 자본축적의 계속적인 확대를 목표로 한 시스템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러한 '경제'는 자급의 관점과 양립할 수 없다. 베를린장벽 붕괴 이후 이 시스템은 경제를 조직하는 유일하게 가능한 모델로서 장려되어왔다. 우리는 흔히, "대안이 없다"라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이러한 '대안부재'의 신드롬에 감염되기를 거부하면서, 우리는 이 책에서 새로운 '경제' 개념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자 한다. 이것은 여성과 타인들과 자연에 대한 계속적인 식민화에 토대를 둔 자본주의적 가부장적 경제시스템보다도 더 오래되고 동시에 더 젊은 경제개념이다. 이 새로운 경제는 생명과 이 지상에서의 삶의 산출과 유지에 필요한 모든 것을 경제 및 사회활동의 중심에 두지, 돈이라는 죽은 물질의 끝없는 축적을 중심에 두지 않는다.
  '자급'이라는 개념은 보통 가난과 후진성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우리는 자급이 의미하는 것은 생존의 가장자리에서의 고된 노동과 삶뿐만 아니라 삶속의 기쁨과 행복과 풍요로움이라는 것을 밝히고 싶다. 이런 식으로 '자급'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람들 특히 여성들이 스스로의 것 ― 일, 문화, 자기자신의 능력 ― 을 과소평가하는 습관을 멈추고, 또 좋은 삶이란 '꼭대기'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라는 관념을 버려야 한다. 물론, 자기자신의 것에 대한 이러한 과소평가의 습관은 강요된 식민화와 천격화의 결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여성들을 포함하여, 모든 식민화된 사람들의 마음속에 내면화되어왔다. 스스로 자신의 것을 낮게 보는 이러한 습관은 나아가서, 우리가 '따라잡기 개발'과 '따라잡기 소비주의'라고 부르는 또하나의 환상으로 유지되고 있다. 이 환상은 사회적 피라미드의 밑바닥에 있는 모든 식민화된 사람들도 때가 되면 꼭대기의 사람들 수준까지 이르게 될 것이라는 약속에 뒷받침되어 있다. 이 책에서 우리는 점점더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따라잡기' 경제모델을 거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세계화되고, 계속 팽창하는, 가부장적 자본주의 경제의 밑바닥으로부터 보는 관점은, 어떤 사람들이 우려하듯이, 절망감을 낳는 게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진정으로 좋은 삶이란 과연 무엇이며, 그러한 삶을 위해 필요한 진정한 힘의 원천이 어디에 있는가를 성찰하도록 도와준다. 방글라데시와 기타 다른 남반구 국가들의 농촌여성들은 백악관이나 그밖의 다른 부유한 세계로부터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들은 강한 여성들이다. 그들이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것은 그들의 등에서 억압자들이 떨어져나가는 일이다. 자기 사회내부의 가부장적 남성들, 다국적기업들,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강요하는 세계은행과 IMF, 그리고 이러한 국제자본의 후견인들의 지시를 충실히 따르는 자국내 관료들이 바로 그러한 억압자들이다.
  우리의 자립적인 삶에 필요한 진정한 힘은 우리 자신과, 우리 자신의 내부와 둘레에 있는 자연과의 협력 속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 이 힘은 돈이라는 죽은 물질로부터 오는 게 아니다. 그것은 상호의존 속에 있지, 경쟁속에 있는 것이 아니며, 우리의 자주적인 행동에 있지, 수동적인 소비생활에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너그러움과 함께 일하는 것의 기쁨 속에 있는 것이지, 개인주의적 이해관계와 시기심 속에 있는 게 아니다. 또한, 이 힘은 지구상의 모든 생물체가 우리의 친척이라는 우리 자신의 깨달음 속에 있다.
  우리가 이 책에서 독자들과 우리 자신들에게 상기시키고자 하는 것은, 현재의 지배적 경제시스템이 결코 어떤 불변의 자연법칙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수세기 전 사람들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며, 따라서 변경될 수 있는 것이다. '대안부재' 신드롬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들더러 믿으라고 하는 것처럼 대안이 결코 없는 게 아니다. 우리는 자급의 관점이야말로 대안이라고 믿는다. 게다가, 오늘날 이른바 경제의 세계화라는 것은 전적으로 새롭고 특이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의 필수요건을 구성해왔던 식민화와 '원시적 축적'의 불가피한 연장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오늘날 이 계속되어온 식민화와 그 파장은 북반구의 산업국가들에서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이 사실은 북반구에 있어서의 점증하는 빈부격차뿐만 아니라, 지금 산업화된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금융 . 경제위기 속에서도 분명히 나타나 있다.
  갑자기, 북반구 산업국가들에서 사람들은 그들 자신이 방글라데시의 농촌여성들로부터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아직 커다란 양적인 간극이 있지만, 그러나 구조적으로 볼 때 북반구의 가난한 사람들의 상황은 남반구의 가난한 사람들의 상황과 더이상 다르지 않다. 이러한 갑작스런 깨달음 앞에서, 대부분의 북반구 사람들은 사실을 부정하려 들거나 아니면 공포를 느끼고 있다. 경제전문가들과 정치가들은 늘 그들에게 자본주의 이외에 대안이 없다고 말해왔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자본주의 경제시스템은 북반구나 부유한 사람들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언젠가는 따라잡기 개발을 통해서, 남반구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도 '지속가능한' 부에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이 따라잡기 개발이란 것이 하나의 신화일 뿐이며, 한쪽의 부와 진보, 다른쪽의 빈곤과 퇴보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있고, 둘 사이의 간극이 갈수록 넓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배우지 못했다.
  그러나, 현재의 위기상황에서 사람들은 지배적인 경제시스템의 안정성이라는 게 결국 대부분 허풍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갈수록 소수의 손에 부가 집중되는 현실에 수반하여, 필연적으로 북반구에서조차도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점점더 빈곤해지고, 일자리를 잃게 되어간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아시아와 러시아의 금융 . 경제위기를 통해서 사람들은 돈과 자본이 안전한 삶을 위한 견고한 토대가 못된다는 것을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 토대는, 최근의 타일랜드에서처럼, 하루아침에 붕괴할 수 있고, 은행가라 할지라도 일시에 거지로 만들어버릴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생계를 금전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이 세계의 대부분의 도시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앞에 블랙홀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경제의 붕괴는 세상의 종말, 물질적 안전의 끝을 의미한다. 방글라데시의 여성들과 달리, 그들에게는 의지할 수 있는 암소 한마리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방글라데시 마을여성들 ― 세계의 대다수 사람들을 대변하는 ― 의 시각으로 세계를 본다면 우리는 그러한 종말론적 절망의 기분에서 벗어나 있게 된다. 그런 절망감은 북반구의 소수 응석받이들의 사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절망감은 그들로 하여금 현재의 상황을 냉철하게 평가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특히 그들이 누려온 특권이 약탈에 기초해 있으며, 모두에게 좋은 삶이란 ― 즉, 자급적인 삶 ― 그러한 특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도록 한다. 자급의 관점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또한 외부나 위로부터의 힘으로부터 커다란 사회적 변화가 일어날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가진 힘을 의식하고, 그에 따라 개인으로서 또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행동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책에서 자급의 관점에서 세계를 보는 일이 반드시 필요할 뿐만 아니라 ― 생태적, 경제적, 여성주의적, 반(反)식민주의적 관점에서 ― 또한 이 새로운 관점이 이미 다양한 방식으로 세계도처에서 시작되어왔다는 사실을 밝히고자 한다. 우리는 나아가서 이 새로운 관점이 언젠가는 '모든' 기본적 사회관계 ― 남녀간, 세대간, 도농간, 여러 계급들 및 사람들 사이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 ― 를 변화시키는 데 이바지할 것이라는 점을 명확히 하고 싶다.
  모든 경제 및 사회적 활동의 중심적 관심사가 죽어있는 돈을 쌓는 일이 아니라 이 지구상에서 삶을 창조하고 유지하는 것이라면, 지금과 같은 상태가 계속되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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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국가의 가장 완벽한 상태

  • 등록일
    2005/03/12 13:15
  • 수정일
    2005/03/12 13:15
19세기에 T.G Green은 전쟁이란 ‘불완전한’ 국가를 표현한다고 말한 바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전쟁이란 국가가 가장 완벽한 상태에 있는 것을 표현한다. 전쟁은 국가의 건강함을 의미한다. 1차 세계대전중에 Randolph Bourne은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국가는 어떤 무리가 그와 비슷하게 조직된 다른 무리들에 공격적 혹은 방어적으로 대항하기 위한 조직체이다. 전쟁은 목적과 활동의 물줄기를 무리의 가장 낮은 수준, 가장 외떨어진  가지들로 흘려보낸다. 사회의 모든 활동은 중앙 정부의 군사 작전과 신속하게 연결된다. 그야말로 전쟁을 통해 국가가 평화시 그토록 열망하던 이상적 상태가 되는 것이다. 나태와 불경기는 사라지고 저항세력은 퇴장한다. 국가는 천천히 육중하게 그러나 가속화되고 통합된 힘으로 움직인다. 위대한 목적, 전시(戰時)의 평화로움을 향해...

출처: , Colin W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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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어슐라 르귄의 <빼앗긴 자들>

  • 등록일
    2005/03/12 13:15
  • 수정일
    2005/03/12 13:15
어제 서점에 갔다가 우연히 어슐라 르귄의 <빼앗긴 자들>이
번역되어 나온 걸 보았습니다.
원제는 . 장르를 따지자면  SF 소설.  
내용자체가 상당히 아나키적 아이디어를 많이 담고 있어서
영미권 아나키스트들이 즐겨 읽는 것으로 알고 있구요..
작가가 아나키스트인지 아니면 실제로 그거 비슷한 사상을
가지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혹자는 오히려 굉장히 보수적인 사람이라고도 하더라구요.

어쨌든 소설의 대강의 세팅을 살펴보면, 두개의 행성이 있는데,
하나는 고도로 문명화되고 기술과 자본, 사유 재산제가 지배하는
테크노크라시라고 할까요. 국가간에는 언제나 분쟁이 빈번하고
가진자들의 부유한 동네의 후미진 그늘에는 못가진 자들의 게토가 존재합니다. 마치 현대의 지구와 같죠.
이 행성의 옆에는 한편 100년전에 봉기했던 아나키스트들이
그 지구와 같은 행성으로부터 망명해 아나키적 공동체를 이루며 사는  
불모의 행성이 있습니다.  
이야기는 이 과학자가 이 두 행성을 오가며 겪는 사건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가상의 두 공간을 설정하고 아나키즘을 실험하고 있는 인상을 짙게 풍깁니다.
문체는 SF이니 만큼 좀 건조하긴 하지만 유치하지는 않습니다.
결말이 다소 "계몽적"인게 흠이라면 흠일까...
딱딱하고 고루한 사상서나 기사투 문체에 싫증이난 분들께 강력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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