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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0/02/04
    그녀들의 무모한 도전(2)
    나랑
  2. 2010/02/04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자의 죽음
    나랑
  3. 2010/02/02
    모란공원 다녀온 날(3)
    나랑
  4. 2010/01/25
    조금 색다른 총회(7)
    나랑
  5. 2010/01/20
    그녀는 야근 중.(14)
    나랑
  6. 2010/01/13
    지속가능한 상근활동을 위한 10가지 과제(21)
    나랑
  7. 2010/01/03
    나의 새해 소망 리스트(4)
    나랑
  8. 2009/12/30
    20대를 부르는 시민단체의 '사람냄새'(5)
    나랑
  9. 2009/12/09
    민우회에 지각생이 떴다!(18)
    나랑
  10. 2009/12/04
    빵의 추억(8)
    나랑

그녀들의 무모한 도전

제 5회 성폭력생존자 말하기 대회를 끝내고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식지 '나눔터'에 기고했던 글.

친구들이 보고푸다^^

 

 

그녀들의 무한 도전

  

글쓰기 워크샵에서 처음 만난 우리. 처음 한달 동안 그녀들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듣고 그녀들을 받아들이는 일에 집중했지. 그녀들의 주관적 진실을 믿어주기.

 

난 몸 워크샵이 참 좋았어. 몸 워크샵이 끝나고 나면 뭉치고 굳어있었던 목과 어깨도 사르르 풀려 있더라구. 고통을 견디느라, 세상과 사람들을 경계하느라 늘 경직되어 있었던 몸이 이완되면서, 내 몸이 너무 좋아라 하는 걸 느꼈지. 또 ‘표현한다’는 것의 자유로움과 해방감, 그 ‘맛’을 처음 알고 빠져들게 되었다고 할까?^^ 서로 마사지 해 주고 함께 춤추면서, 그리고 그 날의 기분을 몸짓으로 표현하면서 우린 더 가까워진 것 같아. 한 친구와 파트너가 되어 눈 감고 춤을 췄을 때, 그녀의 깔깔대는 천진한 웃음소리가 아직도 생생하게 들리는 것 같네.^^;

 

그래, 지금 막 생각난 건데 말하기대회를 준비하면서 내내 느꼈던 기분은 ‘내가 존중받는다’는 느낌, 그리고 ‘느끼는 대로 표현할 수 있다’, ‘나도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새로운 경험에 눈뜸. 내가 우울하다고 했더니 모두 달려들어서 마사지를 해 주었을 때, 내가 했던 말 기억나? “내가 어디 가서 이런 대접을 받겠니?”ㅋㅋ

 

내가 쓴 가사로 노래가 만들어지고 거기에 내가 제목을 붙이고 나의 감정대로 불렀지. 내가 말한 키워드를 갖고 함께 이야기 나누고 그 과정에서 우리의 협동으로 연극이 만들어졌지. 무언가를 창조해 내는 나 자신을 보면서 내 안에 새로운 힘이 사르르 도는 걸 느꼈어. 그렇게 표현하고 창조할 수 있었던 건 눈치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나를 표현해도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신뢰감과 편안함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아.

 

연습하는 내내 굉장히 유쾌하고 긍정적인 에너지가 가득했었지. 배가 아프고 광대뼈가 저릴 정도로 깔깔대며 웃고 뒤집어지고... 어떤 공동체 속에서도 이렇게 많이, 사심 없이 웃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아.

 

막판에 연습이 빡세게 돌아가면서 육체적으로 힘들었고 알 수 없는 우울함이 문득 문득 나를 덮치곤 했어. 일주일에 이틀 혹은 그 이상의 시간동안 ‘생존자’로서의 나와 대면해야 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 작업이었나봐. 생존자라는 정체성에서 이제 쫌 벗어나고 싶다, 지겹다는 생각. 이산이 말한 것처럼 이건 좋은 징조일까?^^

 

말하기대회 당일, 나의 불안증상 응가를 한번 해 주고, 막상 무대에 섰을 때 무진장 떨리긴 했지만 그다지 불편하진 않았어. 노래할 때 또 말할 때 나의 감정과 눈물을 억압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었던 것 같아. 그냥 나 자신에게 충실했지.

 

내 말하기가 끝나고 나서 다음 노래를 할 친구가 내 손을 꼭 잡아주었어. 무대에서 내려왔을 땐 오매가 오랜 시간 포옹을 해 주었지. 수천마디의 말보다 더 깊고 따뜻한 위로와 지지. 그동안의 애씀, 부대낌, 설움들이 눈 녹듯 사라지는 것 같더라.

 

그나저나 어쩜 그렇게 실수도 안 하고 다들 멋지게 잘 해낼 수가 있니? 앙큼한 것들ㅋㅋ 우리가 결국 해냈다는 게 지금도 믿기지가 않아.

 

성폭력 경험 이후 세상에 대해, 사람들에 대해 내가 얼마나 방어적인 자세를 취한 채 살아가고 있는지 요즘 새삼 느끼고 있어. 숨죽이고 웅크리고 경직되고 경계하고 무표정하고...

 

하지만 말하기 친구들과 함께 하면서 자유롭게 내 감정을 표현하고 유쾌하게 웃고, 나 스스로의 힘과 가능성을 확인했던 그 시간들로 이제 좀 더 용기를 낼 수 있을 것 같아. 용기를 내서 세상 속으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

 

말하기대회는 나의 애도 과정, 치유의 여정에서 가장 유쾌하고 즐거웠던 작업으로 기억될거야. 나와 함께 해 준 여러분, 참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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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자의 죽음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자의 죽음

- 용산에서 노무현 그리고 김대중까지 죽음과 기억의 정치학>

 

당대비평 기획원원회 엮음. 산책자

 

2009년

사람들은 노무현은 그토록 애도하면서

왜 용산 열사들과 쌍용차 노동자들의 죽음은 그토록 쉽게 잊는 것인가?

 -나의 물음에 답을 던져 준 책

 

P.66

대안이 부재한 상황에서 스스로 저항과 운동을 조직할 자율성이 이전에 비해 약화된 대중들은 촛불 시위와 같은 간헐적인 시위 이외에 자신을 조직화하지 못했다. 여전히 대중들은 자신들의 '또 다른 구원자'와 '대변자'를 갈구했던 것이다. 이런 와중에 발생했던 노무현의 죽음은 대중들로 하여금 '민주주의의 순교자', '서민의 대변자'로 그를 불러냄으로써 상황을 반복했다.

 

P.67

나는 노무현의 죽음을 슬퍼하고 그를 지키지 못해 미안해하는 대중들을 힐난하거나 비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대안 없이 주어진 조건에서 가능한 선택지였다. 다만 대중들의 슬픔을 이해하는 것과 별개로, 우리는 '아름다운 순교자'를 기억하는 것이 결코 대안이 아님을 인식해야 한다. 대중 그리고 대중운동에 필요한 것은 구원자가 아닌, 새로운 정치를 구성하기 위한 자기 조직화이다.

 

P.101

마땅이 애도되어야 할 대상이 애도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엉뚱하게도 바로 옆의 어떤 것이 누가 봐도 너무 과하게 애도되고 있다면, 그 과열된 애도 행위의 배후에는 정작 애도해야 할 것을 애도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한 슬픔이 감춰져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

혹시 용산참사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은 애도의 (의식적)미수행이 아니라, 애도의 (무의식적) 불가능함에서 비롯된 일종의 정신적 방황은 아니었을까.

 

P.105

한국사회 대중들이 갖고 있었던 뉴타운이라고 하는 애정의 대상은 더 이상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환상에 불과한 것임이 용산 참사로 인해 생생히 드러났다. 한데 문제는 대중들이 이러한 상실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 있었다. 대중들은 한번 품은 뉴타운에 대한 환상과 애착을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 용산을 직시할수록 뉴타운의 꿈이 신기루였음을 인정해야만 하기에, 대중들은 용산이라고 하는 현실과 정면으로 마주하기를 거부한다.

 

P.121

물론 이 상실감은 노무현으로 표상되고 있는 , 그러나 노무현이 아닌 노무현, 곧 민주공화국의 이상이다. 그래서 대중들이 진정으로 추구하는 것은 잃어버린 노무현이 아니라 실은 민주주의의 부재이며, 이 민주주의가 여전히 현존하지 않는 한 그것은 앞으로도 계속 점유를 향한 우울증자의 충동을 추동하는 힘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민주주의를 향한 우울증적 충동이 점점 한국사회에서 애도 의식이나 촛불집회와 같은 집합 의례의 형식으로만 살아남아 단지 광장에서 대중들이 모였을 때만 현존할 뿐, 그것이 현실의 구조를 변화시키는 정도로까지 힘을 행사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P.124

우리에게 광장의 애도는, 그래서 여전히 의심스럽다. 이 애도가 만들어낸 사회적 현실이라는 것이 노무현 때처럼 두 세계의 갈등이든 아니면 김수환이나 김대중 때처럼 한 세계를 향한 화해와 통합이든, 이 모든 애도의 광장에는 '종교'만 있을 뿐, '정치'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더 이상 '죽음'만이 아니다. 이제는 '애도'역시 우리에게 문제이다.

 

P.223

생각해보면 오히려 추모받아야 하는 이들은 노무현이나 김대중이나 용산 철거민 열사들이 아닌 살아있는 우리들인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의 궁핍과 무지와 나약함인지도 모른다. 살아서도 도대체 살아있다는 실감을 느끼지 못하고 사는, 그래서 어떤 우상이 필요한, 어떤 허위가 필요한, 어떤 감상이 필요한, 어떤 대리만족이 필요한, 우리 시대 모든 이들의 죽음이 추모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죽음들을 기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단 하나 그 모든 죽음의 수행자인 이 시대의 지배적 구조인 신자유주의 질서에 저항하는 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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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공원 다녀온 날

어제 휴가를 쓰고 모란 공원에 갔다.

민우회 소식지에 용산 관련한 글을 기고하기로 했는데

잘 안 써졌다.

추모제에 가지 못한 죄책감 때문인가...

시간을 내서 찾아뵈어야 겠다고 생각했었다.

 

강남역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천마산 수련원에서 갈아탔다. 다른 날보다 유독 멀미가 심하게 올라왔다.

 

<모란공원 입구>

 

학교 다닐 때

우리 과에서는 3월에 전 학번이 함께 가는 엠티를

대성리로 오고

다음날 아침 다같이 걸어서 모란공원까지 와서

참배를 하고 청량리로 돌아가곤 했다.

그땐 전태일 열사와 김귀정 열사(아리따우시다고 남성선배들이 좋아했음둥;;)밖에

잘 몰랐는데...

 

오랜만에 찾은 모란공원은

왜 이렇게 넓은 것인지... 

열사가 이토록 많았던가, 순간 어지럽다.

 

 

<민주열사 추모비>

 

"의로운 것이야말로 진실임을, 싸우는 것이야말로 양심임을, 이 비 앞에 서면 세상 알리라...

지나는 이 있어 스스로 빛을 발한 이 불멸의 영혼들에게서 감가 불씨를 구할지어니"

<추모비에 비친 내 모습>

 

모란공원 터줏대감 전태일 열사를 먼저 찾아뵙는다.

눈을 마주치며 마음 속으로 괜히 넋두리를, 하소연을 해 본다.

'나 힘들어요.... 어쩌구 저쩌구...;;'

말없이 들어주시는 전태일 열사.

 

이제 용산 열사들을 찾는다.

그런데 쉽게 찾아지지가 않는다. 눈에 확 띌 거라고 생각했는데...

산 이라서 그런지 눈도 다 녹지 않아서

미끄러운 길을 살금살금 걸으면서 찾는데

도대체 어디 계신건지...

 

혹시 지도에 써 있을까? 다시 입구로 가서 지도에서 찾다가 발견했다.

 

 

다시 산길을 올라간다.

번듯하게 묘비도 있고

아직 시들지 않은 국화꽃도 가득할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겨울이라서 그런가?

용산 열사들의 봉분에는 아직 잔디도 묘비도 없었다.

흙으로 덮은 봉분 위에 비닐이 씌워져 있고

그 위에 눈 녹은 물에 축축히 젖은 국화꽃 몇 송이.

 

괜히 서러워서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봉분이 다섯 개여서 용산열사들인지 알았차렸지

정말 못 찾을 뻔도 했다.

 

다른 열사의 유가족이신지

가까운 묘에서 부부가 열심히 눈을 치우신다.

그 분들에게 들릴까봐 숨죽여서 한참을 울었다.

 

전태일 열사 묘처럼

플라스틱 박스가 놓여있을 줄 알고

민우회 빼지도 챙겨 왔는데

놓을 곳이 없다.

용산열사들의 묘 사진을 찍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냥 찍지 않기로 했다.

 

한참을 울다보니 해가 이동해서

용산열사들 계신 곳에 햇볕이 따뜻하게 비춘다.

왠지 마음이 놓이고 조금 차분해져서 모란공원을 떠날 수 있었다.

 

<눈 덮인 모란공원>

 

돌아오는 길에 서점에 들렀더니

<내가 살던 용산>이라는 만화책이 출시되었길래

한권 샀다.

 

죽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잘 살지도 못하는 인생.

 

더 낮은 곳으로 가고 싶다,

더 절박한 싸움의 현장에 함께 하고 싶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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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색다른 총회

23일에 민우회 정기총회가 있었다.

회원과 함께 하는 총회,

조금 색다른 총회를 만들어보고자 노력했고

반응도 좋아 다행이었다.

 

색다른 총회 1. 문자 총회

 

번호를 지정해서 그 번호로 문자를 보내면 무대 위 화면에 뜬다.

요렇게 문자로 질문도 하고, 의견도 내고, 서로 격려도 하고...

2009 시민활동가대회에서 이런 방식을 썼길래

알아봤더니 프로그램 사는 데 돈이 든다고 해서

우리는 나름 돈 안드는 방식으로...(대신 품이 많이 들었지만;;)

회원들이 되게 재미있어 하셨다.

문자 보느라 정작 총회 내용에 집중이 안 되었다고 말씀하신

회원님들도 계셨다.

<화면에 뜬 질문과 의견을 메모하는 우리의 의장 벤즈아민>

 

<미디어운동본부에서 재정적 어려움에 상근자들이 활동비를 반납했다고 하자,

회원들이 안타까움을 표하신다.>

 

<"총회가 지루하단 편견은 그만~~">

 

색다른 총회 2. 사업공모

 

12월부터 회원들에게 사업아이디어를 받았고

심사위원이 선정한 3개의 아이디어를 놓고

총회 당일 투표를 진행했다. 물론 문자 투표~ㅎㅎ

그리고 그 사업을 민우회가 한다!

박빙의 승부 끝에 20대 여성들과의 만남, 소통의 방법을 제안하신

회원님의 사업이 채택되었다.

<저 손의 주인이 바로 반짝반짝 아이디어상을 수상하신 회원님!

상품은 맛난 곶감~ㅋㅋ>

 

색다른 총회 3. 깜짝 이벤트- 즉석 스크래치 카드

 

폐회를 선언하고

다같이 인증샷을 찍고 난 후,

회원님들께 카드를 한 장씩 나누어 드렸는데

요것이 바로 즉석 스크래치 카드란 말씀이다.

동전으로 긁으면 경품아닌 경품에 당첨된다.

<요 카드를>

 

<동전으로 봑봑 긁으면...

"사무처 활동가 *와 같이 자전거 타기 쿠폰에 당첨되셨습니다!">

 

<내 껀 뭐였냐고?

"바자회 물품 시간 외 구매권에 당첨되셨습니다!"

첨엔 바자회 물품을 그냥 준다는 줄 알고

신나서 "야! 나 이거 받았어" 했더니

주변 사람들이 다 웃는다.

알고보니 '구매권'이다. 호호호(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

 

아기자기한 즐거움을 준 민우회 총회가 끝났다.

꼬박 3개월을 준비해 온 총회.

보이는 곳에서 또 보이지 않는 곳에서, 활동가들 다들 너무 고생 많았다.

이제 민우회의 2010년이 진짜 시작되는 것인가?

총회에서 결정된 올해의 사업을

보다 면밀하게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집행해야겠지.

 

 

<저 동물이 곰인지 개인지 잠시 문자 논쟁이 불붙었다능;; ㅋㅋ>

 

<나팀장과 내가 만든 총회 자료집. A4자료집이 백과사전 같다고해서

 B5로 편집했음. 이쁘게 나오니 뿌듯.>

 

<어려움 앞에서 두려움없이 발랄하게 극복! 2010년에도 발랄상큼하게!>

 

개인적으로는

사업감사 선생님의 일갈이 기억에 남는다.

 

"호시절에도 여성운동의 역할은 차별과 불평등에 맞서 쓴소리와 저항의 실천을 하면서

대중적인 정당성을 얻고 신뢰를 얻어왔습니다. 한동안 경험해 보지 못했던 갑갑함과 위축은

여성운동의 진로에 상당한 타격을 주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시대적 상황의 가변성에도

불구하고 늘 운동의 목적을 유지하려고 애쓴다면 당장은 아니더라도 우리들의 진심과 노력이

통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경제 위기와 정치적 보수성을 현재 여성운동의 조건과 배경으로 설명하기에는 벌써 2년의 시간이

경과되었습니다. 지난 2년동안 성찰과 조직보존의 노력을 밑거름으로 하여, 보다 적극적인 활동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민우회가 대중운동을 지향하면서 지역을 기반으로 열심히 활동해왔지만, 창립 당시부터 줄곧 유지되어온

전체 여성운동 내에서의 리더쉽을 앞으로는 적극적으로 발휘했으면 좋겠습니다."

 

활동의 위축과 약해져가는 대중적 기반을 MB 탓으로 돌리기에는 벌써 2년이란 시간이 지났다는,

이제 더 이상 핑계일 수 없다는 쓴소리.

우리들의 진심과 노력은 반드시 통할 것이라는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2010년에도 엣지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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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야근 중.

지금 시간 9:47

민우회 사무실에는 4명의 활동가가 일하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 4명의 활동가는 1층 카페에서 소모임을 진행하고 있다.

 

총회 총괄자를 처음으로 맡아 몸이 열 두개라도 모자랄 지경인 나팀장.

그녀는 올해 들어 자신의 이름이 너무 많이 불린다며 심란해 한 적이 있다.

요새 신경성 위염이 도져 고생 중이다.

일상의 사소함에서 즐거움을 찾는 그녀의 발랄함이 다시 살아나기를.

 

밤 10시는 야근 축에도 못 끼게 만들어버린 싱팀장.

마치 의자와 하나가 되어버린 듯 우직하게 일하는 싱팀장.

그녀는 새벽 5시까지 일하고 집에 가서 씻고 또 9시 반까지 출근하는 기염을 토한 바 있다.

그러면서도 지친 기색 없는 그녀,

오직 터진 입술만이 그녀의 지난 밤 노동을 짐작하게 할 뿐.

그 비결은 무엇일까 궁금하다.

 

하루 12시간 노동을 생활화하고 있는 나의 쁘렌 시P.

그녀는 며칠 전, 꿈에서 일을 하다가 생시에서 위경련을 일으켰다.

한 번 죽을 사 먹더니 죽에 중독되었는지 요새 매일 죽만 먹는다.

공들여 만든 동영상을 다시 만들어야 했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꼬.

참, 쫌 전에는 재택 야근을 하는 ㄲ가 시P에게 전화를 하여 하소연을 했더랬다.

 

생각해보면

노동현장에 있었을 때엔

지금보다 더 바빴다.

주야간 맞교대를 하면서 남는 시간에 활동을 했었고

파업을 하면 주간조, 야간조 가리지 않고 거의 24시간을 꼬박 지샌 적도 많았다.

주말에도 늘 회의였다.

 

그런데 난 왜

요즘 들어 새삼 바쁘다, 정신없다는 생각이 자꾸 들고

이렇게 바빠도 별로 뿌듯하지 않냐 이 말이다.

바쁜 것 자체보다는

일의 성격이 나와 맞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변한 것일까.

 

내가 변했을 수도 있다.

이제는 조직도 중요하고 세상을 바꾸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의 몸과 마음을 보살피는 것도 나에겐 아주 중요한 일이 되었으니까.

 

그리고 일의 성격도 참 다르긴 하다.

현장에 있을 땐 조합원을 만나는 일,

투쟁을 조직하는 일, 소모임 활동을 하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신생노조여서 정해진 형식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우리가 만들기 나름이었고

또 투쟁을 안 하는 시기가 별로 없을 정도로 투쟁 중심이어서

일상활동에 수반되는 실무가 (상대적으로) 적기도 했을 것이다.

 

어째꺼나 저째꺼나

나는 노동운동을 그만두었고

이제는 민우회에 적응을 해야 하는데

(사실 적응한 걸로 속단했었지...)

어쩌란 말이냐.

 

어떻게 살아야

충만함을 느끼는 순간들이 더 많아질 수 있을까.

 

-일터에서 가족 공동체를 바라지 말 것

-의도와 표현 사이의 간극을 조심할 것.

 상대는 내 의도를 전혀 모른다는 전제 하에 가장 효과적인 표현방법을 찾을 것.

-내가 가진 불만은 양날의 검이다.

불만이 긍정적으로 발전하면 더 민주적인 조직으로 가는 거고

불만이 부정적으로 발전하면 갈등은 커지고, 나는 투덜이 스머프로 고립.

-감정적인 반응과 위축, 양극단을 경계할 것.

 

긴 호흡으로,

지구력을 갖고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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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가능한 상근활동을 위한 10가지 과제

내가 하고 있는 정보 업무에는

온, 오프 자료 정비 업무도 포함되어 있다.

작년 말, 2달에 걸쳐서 전 정보 활동가와 함께

민우회 열람실, 자료실 자료를 정리하였다.

 

뭐, 거의 노가다였지만

20년 전, 민우회가 만들어졌을 때

갱지에 타이핑해서 만들었던 자료들을 볼 때의 감격과

함께 작업했던 활동가와 가까워지는 재미에

그리 힘들지는 않았다.

 

정리 마지막 날에

버릴 자료 중에서 내가 볼 만한 것들을 추리는데

2002년 12월 상근자포럼에서 논의되었던 '지속가능한 상근활동을 위한 10가지 과제'라는

A4 1장짜리 자료가 눈에 띄었다.

 

 

<지속가능한 상근활동을 위한 10가지 과제>

1. 정시 출퇴근

 

2. 상근활동비의 현실화

 

3. 조직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구조 마련

 

4. 쾌적한 근무환경: 환기팬, 흡연실 이용, 사무기기의 교체

 

5. 운동가로서의 자기 점검 필수

 

6. 스스로 공부 열심히!

 

7. 무슨 말이든 할 수 있어야 한다(의사소통의 문제)

 

8. 민우회 내의 순환근무: 전체 상근자 역량 키우는 구조, 운영방식 있어야

 

9. 생활 속에서의 차별 철폐: 직함이나 연령, 기미혼...

 

10. 안식년을 낮추자.

 

각 항목마다 구체적인 설명도 붙어있는데 생략;;

 

민우회에 갓 들어왔을 때

좋았던 건

10번.

재충전을 위한 휴가제도가  정착되어 있다는 것(3년차 되면 얼마간 휴가, 5년차 되면 얼마간 휴가 등),

그리고 8번.

순환근무를 통해서 한 사람이 한 업무만 장기간 맡음으로써 생기게 되는 문제들

-개인의 소진일 수도 있고, 그 '사람'의 공백이 그 '일'의 공백으로 이어지는 현상-을

사전에 방지하는 것.  

민우회의 오랜 역사 속에서

거듭된 논의와 고민의 결과물일테지.

 

 

하지만 나는 요새

1번. 정시 출퇴근과

6번. 스스로 공부 열심히! 가 절실하다.

 

정시 출퇴근에서

출근보다는 퇴근을 쫌 정시에 하고 싶다.

총회를 앞두고 있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1년 사업계획을 세울 때

욕심이 생기고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또 잘하고 싶고 하니까

가진 역량 이상의 계획을 세우게 되고

그걸 다 하려고 하다보니

야근을 밥먹듯이 하게 되는 건 아닌지...

 

사업을 줄이자니 포기가 안 되고,

사람을 뽑자고 요구하자니 재정이 맘에 걸리고, 딜레마다.

 

주40시간 노동은 언감생심 꿈도 못 꾸고

1년동안 30권의 책을 읽겠다는 야심찬 포부는

정녕 태백산맥 10권과 토지 20권으로 퉁쳐야 하는 것인가... 우어어~~~

 

12월까지만 해도

아침엔 출근하는 게 즐겁고

저녁엔 퇴근하는 게 뿌듯했는데

요샌

야근을 하고 늦게 집으로 돌아갈 때 별로 행복하지가 않다.

사무실에 아직 남아있는 다른 활동가들도 맘에 걸리고

이러다가 빨리 소진되는 건 아닌지 걱정되기도 하고

암튼 싱숭생숭하다.

 

무엇보다도

여유가 있을 땐

동료 활동가들과 재잘재잘 수다도 떨고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고

이런저런 고민과 감정들을 교류했는데

다들 일에 치이다보니 

"내 고민 들어줘!" 말하기도 대략 난감;;

그러면서 서로 멀어지는 느낌.

 

대안을 말하면서도

정작 내 삶, 내 생활은 대안이 되지 못하는 것은

활동을 하는 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인 것일까.

 

 싱숭생숭한 고민을

 어떻게 생산적인 고민으로 전환시켜낼까, 문제로다.

 행복해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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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새해 소망 리스트

내가 가입해있는 카페에서

이걸 쓰면 선착순으로 책을 주는 이벤트를 해서

써보게 되었는데, 나름 의미있다^^

 

나의 새해 소망 리스트

 

1. 이루고 싶은 소망

 

1)건강하게 살기

-목 디스크 초기라는데, 꾸준한 운동과 생활습관으로 목과 어깨의 통증에서 자유롭고 싶다.

-소식하기

 

2)변화하는 민우회, 신바람나는 민우회

-여성들과 더 많이 더 깊이 만나는 민우회 되게 하시옵고

내가 만들 민우회 블로그 대박나게 하소서!!!  

-민우회를 나와 나의 동료 활동가들이 '일하고 싶은 조직'으로 만들기

 

3)내 마음의 소리에 늘 귀 기울여주기

- 인정욕구, 질투, 미움, 분노, 자기비하 등의 감정들을

억누르고 쌓아뒀다가 한꺼번에 엄한 곳에서 터뜨리지 말고

그 감정들을 받아들이고

그 감정들이 보내는 사인을 알아차리기

-슬플 수는 있지만 고통스럽지는 않게. 

 

4)30권의 책 읽기, 그리고 독서노트 쓰기

-독서와 글쓰기는 성찰과 사색의 최고 수단

-나의 운동이 눈 감고 하는 돌팔매질이 되지 않도록 늘 깨어있기, 그러기 위해서 꾸준한 독서를.

 

5)'나답게' 살기

-내가 하고 있는 일에서 나의 강점과 재능이 발현될 수 있도록, 나의 강점과 재능 찾기. 관찰과 탐색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도구 찾기

 

 

2. 꼭 해보고 싶은 일

1)상반기

-지금 배우고 있는 피아노 1년 내내 쭉~~~. 뭐든 3개월만 하면 의지 떨어지는 악습을 이번엔 엎자.

-여성들의 치유연극, 생활연극 '나쁜년 클럽'

-몸살림 운동

-비폭력대화 수업 듣기

 

2)하반기

-인문학적 글쓰기 수업 듣기

-여성주의 칼럼 정기적으로 써 보기 훈련

-민우회 내 소모임 만들기

-아티스트 웨이 해보기

 

 

3. 절대 하고 싶지 않은 일들

-스스로를 검열하고 억압하는 행위

-타인을 쉽사리 평가, 규정하고 고치려는 행위

 

4. 올 한해 나의 좌우명은?

- "나답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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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를 부르는 시민단체의 '사람냄새'

연말에 활동 평가를 하면서 회원 연령층 분석을 했는데

20대 회원이 너무나 적은 것에 적잖이 놀랐다.

20대와 어떻게 소통할 수 있을까 화두만 가지고 있었고

그들에 대해 깊이있게 분석하거나 어떤 전략을 세우지는 못하던 차에

괜찮은 글을 보게 되었다.

 

민우회 회원이신 오디 님이 전에 어떤 포럼에서 발제하신 글인데

시민단체의 강점인 '사람냄새'를 매개로 어떻게 20대와 만날 것인가

에 대한 오디님의 고견^^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읽었음둥.

(밑줄은 내가)

 

2008년 02월 15일

20대를 부르는 시민단체의 사람냄새

 

(희망청에서 열렸던 포럼에서 내가 발표한 발제문.)

 

시민단체와 20대가 소통을 못 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나는 시민사회단체가 현재 20대와 어떻게 소통하고 있는지에 대한 분석과, 그들이 20대와 함께 연대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조직해야 할지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한다.

 

민주화가 항상 앞으로만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끊임없는 진보의 노력을 하지 않으면 오히려 후퇴할 수도 있다. 87년 민주항쟁이 성공했으므로 어느 정도는 나아지지 않았냐는 말. 나는 바로 그 말에 의문을 제기한다. 87년 이후에 오히려 우파진영은 각성하고 20대 뉴라이트 조직화에 힘을 쏟은 것에 반해, 진보진영에서는 다른 부분에 너무 열심이었던 것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를테면 통일문제에만 집착을 했다거나, 노동형태가 매우 다양해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현대자동차 공장 같은 대단위 공장노동자만을 ‘노동자’로 본 노동운동 같은 것이다. 그래서 여러 다른 형태의 노동을 하게 될 20대가 그 노동운동이 이야기하는 구호가 자기와는 관계없다고 여기게 되면서 20대와 진보진영의 거리가 점점 멀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자본주의가 심화되면서 사회는 점차 부르주아적 세련, 깔끔함을 추구하게 되었다. 이런 도시화를 긍정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안에서 자라난 젊은이들에게 변함없는 투박한 양상의 운동은 오히려 ‘빨갱이’같다는 거부감을 증폭시킬 뿐이다. 자극적이고 단색으로 써진 플래카드, 남성적인 싸움들, 그리고 운동의 서열화나 가부장성 같은 것은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며 점차 20대들로부터 관심을 잃어가게 되었다.

 

97년 외환위기 당시 지금의 20대들은 초, 중, 고등학생이었다. 그 때 우리가 부모세대로부터 배운 교훈은 이 사회는 ‘승자독식’사회라는 것이었다.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우리들의 ‘꿈’이 되었다. 그리고 학내 분위기를 보면, 97년 외환위기 이후에 진보성향의 동아리는 급격하게 쇠퇴했다. 청년실업 및 경쟁과열화체계가 고착화되면서 대학 1학년생마저 학점과 취업준비를 위한 대학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선후배 사이의 괴리도 증폭되었다. 3년 이상 회장을 연임하는 동아리도 있었고 문을 닫는 학회도 늘어갔다. 그런데 한편, 한나라당은 비록 여당 집권에는 실패했지만 외환위기 이후의 청년들의 변화된 욕구를 정확히 읽었다. 우파 세력은 대학가, 청년계층, 종교에까지 침투해가며 20대들에게 신자유주의와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역설하기 시작했다.

 

전경련이 후원하는 YLC와 EIC. 뉴라이트청년연합과 뉴라이트대학생연합. 기업에서 운영하는 청년동아리 영삼성과 영현대. 여기에 가입하려는 20대의 수는 해마다 늘어가고 있고, 각종 기업에서는 ‘인턴’을-알고 보면 무임금 착취인 것을- 대학생들의 취업경력의 일환이라는 명목으로 모집한다. 신자유주의시대의 ‘정치’에도 능한 청년들을 배양하기 위함이라는, ‘한나라당 대학생 정치캠프’도 있다. 봉사활동 점수를 필요로 할 때는 삼성복지재단, LG복지재단, ktng복지재단에서 열리는 봉사프로그램에 참여하면 경력과 봉사점수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도 있다. 그리고 지난 17대 대선, 이명박 공개지지를 선언한 총학생회장들의 명단을 보면 새삼 우파진영이 20대를 모으는 것에 성공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 20대들이 처음부터 우파였던 것은 아니다. 투표권도 처음 쥐고 비로소 성인이라 인정받은 20대, 그들이 제 앞길에 대해서 이제 막 고민을 시작했을 때 눈에 뜨인 것이 바로 앞에서 소개한 단체들이었다. “대학생활+α”. 대학생들은 그 α로서 다양한 문화활동, 자치활동들을 꿈꾼다, 그렇지만 진보진영에서 그런 자리를 만드는 것을 소홀히 하다 보니 주어진 선택지가 우파가 만들어낸 것이 대다수이다. 그리고 사실 진보진영에 남아있는 단체들은 자기 정체성도 매번 고민할 만큼 역량이 떨어진 것이 현실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이를 메울 방법을 모색해봐야 한다. 지금의 대학생들이 설령 고등학교까지는 돈밖에 몰랐다고 할지라도, 지금부터라도 그 물꼬를 틀어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나는 한국여성민우회에서 2달간 상근자원활동가를 했다, 그런데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은 시민단체라면 수많은 평범하고 관심 없는 ‘다수’들을 설득해야 하는데, 아쉽게도 활동가들은 하루하루 이슈 파이팅조차 너무 버거워서 그 관심 없는 다수에게 다가갈 여유가 별로 없는 듯 했다. 20대 자원활동가들을 시민단체 내에 조직하면 좀 상황이 나아질 것 같은데 그들에게는 자원활동가를 조직해서 관리하는 것도 업무 부담이 되었던 듯하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엔 봉사활동 점수도 경력이 되어서 수요가 많은 것에 비하여 막상 봉사활동을 모집하는 시민사회단체는 별로 없다. 그래서 학생들은 안타깝게도 점점 기업재단으로 몰린다.

 

민우회에서 자원활동을 하던 당시에 나는 ‘평등한 호칭문화를 만들기 위한 호락호락 캠페인II’라는 것을 함께 꾸리게 되었다. 이 때 나는 대학생들을 조직해서 ‘캠페인 지기’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 전에 했던 ‘캠페인I’에 대한 누리꾼들의 횡포가 너무 심해서 활동가들이 전적으로 이것에만 매달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생각해낸 제안이었다.

 

대학생들은 생각보다 쉽게 모였다. 개인적인 친분으로 온 친구도 있었고, 봉사점수 준다고 해서 온 친구도 있었고, 시민단체 구경 간다고 온 친구도 있었고, 소위 ‘꼴펨’이라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가진 친구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운동권’이나 ‘꼴펨’에 대한 오해와 편견은, 그들이 민우회라는 장소에 ‘직접 방문해보는 경험’, 그리고 활동가들과 술한잔 하는 경험으로 충분히 깰 수 있었다.

 

운동에 대해서 20대들이 걱정했던 것 중 하나는 정죄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러나 사실 활동가들 누구도 정죄하지 않는다. 한 후배는 나중에 나에게 ‘여성단체 갈 때는 미니스커트 입으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날 모임 갈 때 걱정했었다.’라며 자신의 편견을 조심스럽게 고백했다. 이는 단지 여성단체 뿐만 아니라 다른 시민단체에 대한 상상력이 깨지는 순간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생각해왔던 ‘시민단체스러움’을 많이 깨면서 거리를 좁혀갔다. 나는 이런 변화에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여기에 우리의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20대가 시민단체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조중동과 TV언론+자신의 상상력이 전부이다. 아직까지는 괜찮다. 그러나 시민단체가 이대로 그들의 상상력이 극대화되도록 내버려둔다면, 머지않아 시민단체와 시민의 소통은 정말 단절될 것이다.

 

기존 회원들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들에게만 기대를 건다면 ‘시민단체의 노령화’는 걷잡을 수 없이 심화될 것이다. 끊임없는 운동을 하고 싶다면 평범한 20대들과 소통할 자리를 계속 마련해야 한다.

 

시민단체 중에서 메이저급이라 불리는 참여연대는 다른 단체에 비해 회원이 아닌 시민들도 참여 가능한 프로그램을 많이 여는 편이다. 토론회나 간담회, 4-5회 정도 지속되는 테마강좌, 시민운동 현장체험, 책 저자와 함께 하는 자리 등. 모두 좋은 프로그램들인데, 그 중 20대의 참여율이 가장 높은 프로그램은 ‘시민운동 현장체험’이다. 청년들을 모집 대상으로 하고, 한 달 코스로 교육 및 직접행동을 함께 했던 이 프로그램은 다수의 20대 청년들이 참여연대에 발길을 들여놓을 수 있게끔 다리를 놓아준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이번에 참여연대에서 처음으로 대학생 인턴제도를 도입했는데, 20명을 뽑는 것에 무려 70여명이 지원했다고 한다.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20대들이 우경화되고 보수적이 된 것은 아니다. 좀 더 잘 살고 싶고, 행복하게 살고 싶은 욕구는 분명히 있는데, 그런 주제를 가지고 기업과 대화할 기회는 많았어도 시민단체에 다가갈 통로는 마땅치 않았던 것이다.

 

민우회에 함께 갔던 한 남자친구는 ‘해방감을 느꼈다’고 했다. 여성주의가 남성도 해방시켜준 것이다. 참여연대에서 만난 한 친구는 ‘아직 돈 걱정이 좀 되긴 하지만, 돈 걱정만 없으면 진짜 여기서 일하고 싶다.’ 고 말한다. 파편화된 요즘 세상 속에서 시민단체의 ‘사람냄새’가 그들을 감싸 안은 것이다.

 

시민단체 내에 대학생 조직을 만들면 어떨까. 가뜩이나 외환위기 이후로 동아리가 흔들리고 있는 때에, 학교 당국의 학내 동아리에 대한 처우도 나날이 안 좋아지고 있다. 이런 위기를 기회 삼아서, 시민단체에서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시민단체의 특성을 주제로 한 대학생자치기구를 만들어도 좋을 것 같다. 그렇게 함으로서 시민단체와 대학생 조직이 상호 소통하면 더 발전적인 방향으로 흐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이미 시민단체에서 20대 조직에 대한 시도를 안 했던 것은 아니라는 것 잘 안다. 그러나 시민단체가 이들에게 비전을 제시해주지 못하고 ‘노동’만 시키면 결국에는 남들 토익공부할 때 자기만 시간 버렸다는 회의감과 함께 취업전선에 한발 늦은 선수처럼 고달프게 빠져들게 된다. 이들과 함께 새로운 운동에 대해 같이 고민하고, 또한 시민단체에 종사하는 이들이 어떻게 사는지, 대학생 때 어떤 고민을 하다가 이러한 진로를 갖게 되었는지에 대해 20대들과 좀 더 깊고 친밀한 소통이 있었다면 이렇게 안타까운 인연의 단절은 없었을 것이다. 요즘 20대들은 관계가 파편화되었다고 하지만, 오히려 파편화되었기 때문에 작은 관심에도 크게 감동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내가 민우회에서 보낸 시간을 알차다고 느끼는 이유를 위의 사례들과 비교해보자면, 캠페인 의사결정에 참여했었다는 점이 큰 차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그 조직에서 의미 있는 한 명이라고 생각이 들 때 더 동기부여가 되면서 열심히 할 수 있는 것 같다.

 

우파진영에서 잘 하는 것 중의 하나는, 멘토가 잘 형성되어있다는 것이다. YLC를 예로 들면 산발적인 1회성 강연회로 끝을 맺는 것이 아니라 체계적인 멘토링과 지속적인 취업컨설팅을 해준다. 시민단체에서도 시민운동의 효과적인 방안을 함께 모색할 멘토를 형성하면 좋겠다.

 

참여연대 같은 큰 조직의 경우는 의사수렴 방식이 너무 체계적이어서 20대가 참여하기 다소 어렵기도 하다. 이런 경우에는 대선 때의 ‘100인 유권자 위원회’처럼 각종 부서별로 ‘20대 위원회’를 두어서 그들과 참여연대 활동가들이 함께 시민단체의 발전적 방향에 대해 소통할 수 있게끔 자치기구를 만들어보면 좋겠다.

 

요즘 20대를 설득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건 내 문제야’라고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내가 환경운동을 해야 하는 이유, 반전운동, 여성운동을 해야 하는 이유가 알고 보니 다 나를 위한 것이로구나. 내가 잘 살기 위해 저들과 경쟁하는 것은 결국에는 개미지옥 싸움이구나. 그럼 우리는 지금 서로 싸우기보다는 연대해서 다함께 현실에 맞서 싸워야겠구나.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게끔 하는 것이다.

 

사실 진보진영에서 이야기하는 등록금 문제, 학벌 문제, 비정규직, 신자유주의. 이 모든 것은 20대에게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문제들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정작 당사자인 20대에게 인식시키지 못한다면, 진보진영에서 외치는 투쟁은 한낱 허공에 맴돌 수밖에 없다. 20대들이 ‘우리 편’이 되도록 설득을 해내는 것이 시민단체들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박봉에, 매일같이 야근을 해도 일이 끝나지 않는 시민사회단체의 애로사항을 절대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렇지만, 언제까지 이 ‘소수’들만 운동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는가. 20대들을 조직해야 한다. 함께 싸울 이들, 미래를 짊어질 이들을 조직해야 한다.

 

시민사회단체와 20대의 발전적인 네트워킹을 기대하며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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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우회에 지각생이 떴다!

지각생님의 [느린 컴퓨터 춤추게 하기 : 가난한 활동가들에게] 에 관련된 글. 
 

 

11월 어느 날, 날라온 방가운 메일 한 통.

'지각생' 이란 분께서 자신의 재능을 나누시고자

단체를 방문하여 컴퓨터와 주변 기기의 문제들을 무료로 해결해 주시겠다는 내용.

나처럼 의욕만 있고 기술은 없는 정보 활동가를 둔 민우회에게는

너무나 방갑고 소중한 재능나눔 소식이었다.^^;

 

드뎌 엊그제 민우회를 방문하신 지각생님!

힙합 스타일로 나타나신 능력자  지각생님!ㅎㅎ

나의 노트북을 먼저 봐주셨다.

익스플로러 6에 바이러스가 먹어서 그랬다는;;;

알약으로 청소하고 익스플로러 8 깔고 나니

쌩쌩 잘 돌아간다~

<지각생님의 손길로 샤방해진 나랑의 노트북이에요^^>

 

 

다음은

계속 사용할 수 있는지 없는지 도무지 무슨 문제인지 알 수가 없어 

방치한 노트북 2대.

<노트북을 분해하시는 지각생님, 그대는 진정한 능력자!> 

 

 

2대 중 1대는 팬에 먼지가 많이 껴서 작동이 안 되었던 것으로 드러남.  하~ 쪽팔려...

1층 카페에서 작은 진공청소기를 빌려다

먼지를 쓸어내고 다시 조립하니 작동 되었다는;;

 

 

마침 이 날이 민우회 활동가 너선생의 생일이어서

생일파뤼에 사절단으로 급파견된 지각생님.ㅎㅎ

 

<케익을 드시는 지각생님>

 

케익칼에 묻은 크림까지 싹싹 발라드신 지각생님.

이게 바로 음식을 소중히 여기는 빈집 스따~~일이라는 거.

 

친구와 약속이 있어서 일찍 퇴근했는데

지각생님은 밤 10시까지 사무실에 남으셔서

문제가 있는 컴퓨터들을 손 봐 주셨다. 느무느무 감사해요!!!

지각생님! 담에 맛난 밥 한번 꼭 같이 먹어요!

 

진보단체에서 '웹기획' 일을 하고 싶으시다는 지각생님은

정보활동가들의 네트워킹도 꿈꾸고 계신다. 꼭 꿈이 이루어지시길 바라요~^^

나도 평가 인터뷰하면서

다른단체의 정보활동가를 만났을 때 참 좋았다.

여성단체 정보활동가들끼리 모여서 고충과 애환이라도 나눌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볼까나.

 

원하는 단체마다 직접 방문하셔서 무료로

컴퓨터를 손 봐주신다고 하니

가난한 단체들, 활동가들은 어여 어여 신청하세~

올해가 가기 전에 묵을 때를 벗겨보세~

 

마지막으로 지각생님이 블로그에 올리신 글 '느린컴퓨터 춤추게 하기'를 요약해 보았다.

 

1. 먼지털기

-문구점에 가면 컴퓨터 먼지제거제 팝니다.

 

2. 각종 보안 소프트웨어 아무 것도 깔지 말자.

-알약이면 충분함

-알약 실행해서 시스템 정리로 가서 일반모드 검사 후 삭제,  고급모드로 가서 active X(바이러스 온상) 제거

 

3. 제어판의 프로그램 추가/삭제로 가서 불필요한 프로그램 과감히 지우기

 

4. 윈도우나 즐겨쓰는 응용 프로그램 업데이트

-윈도우는 6개월에 한 번씩 다시 깔아주는 게 좋다고...

 

5. 왠만하면 리눅스로 갈아타라.

-인터넷 뱅킹 빼고 다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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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의 추억

나는 2009년 1월 1일을 수원구치소에서 맞았다.

아침에 쇠고기 떡국이 나왔던 것 같은데

나는 1월 1일부로 단식을 시작해서 떡국을 못 먹었고 냄새만 맡았다.

 

새해 아침을 그 곳에서 맞았기 때문인가.

2009년을 돌아보니

가장 먼저 구치소가 떠오른다.

경찰서에서 이송되어 구치소에 입소한 첫날 밤,

첫날이라 내복도 없고 두꺼운 이불도 없어서

추위에 오돌오돌 떨며 서러워 하고 있는데

옆방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건 뭥미?

 

알고보니 옆방 언니가 임신한 채로 구치소에 들어왔다가

병원에서 애를 낳고 다시 들어온 것이다.

3살이 되기 전까지는 구치소 안에서 애를 키울 수 있기 때문에

바깥에 애 키울 사람이 없는 사람은 데리고 들어 올 수 있다.

당시 4개월이었던 그 아이 이름이 '김요한'이었는데

요한이는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웃고 씩씩하게 잘 컸다.

 

내가 출소하던 날,

그 언니는 청주교도소로 이송되었고

그 때 요한이는 보행기를 탈 정도로 커 있었다.^^

 

운동할 때 요한이 보는 재미(하루에 한 번 운동시간이 있다),

일주일에 두 번 과자 받아서 먹는 재미(일주일에 두 번 물품을 신청하고 물품이 들어온다),

그동안 읽고 싶었던 소설 실컷 읽는 재미,

드라마 '바람의 화원'과 '그들이 사는 세상' 보는 재미(뉴스만 빼고 모두 녹화방송을 틀어준다.),

등등으로 지루한 하루하루를 때웠던 것 같다.

오늘은 목욕하는 날, 오늘은 머리감는 날, 오늘은 물품 들어오는 날, 오늘은 패떳하는 날

하루하루 의미를 부여하면 괜히 시간이 좀 빨리가는 것 같기도 했다.

 

 

 

<빵에서 신었던 운동화. 끈 사용이 금지되어 있어서 이렇게 찍찍이 운동화만 신을 수 있다.>

 

 

 

나는 '공안'관련 범죄자라서 독방에 있었는데

1.7평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옆방은 나와 같은 평수에 마약 언니 2명이 살았으니까 참 불편했을 것이다.

독방에서 2개월 넘게 지내다보니

나중에는 사람의 온기와 사람냄새가 참 그리웠다.

그래서 내 옷에 배인 내 체취를 킁킁 맡아보기도 했다. 킁킁~ ㅎㅎ

9명, 11명이 한 방에서 지내는 재소자들은

싸움이 잦아서 방을 자주 옮기곤 했다.

 

나는 보석으로 출소해서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지만

함께 투쟁했던 동지들은 실형을 선고받고

아직 수감되어 있기에

빵은 나에게 아픈 공간이다.

 

하지만 나 개인적으로는

그 안에서 강해졌다거나 

또는 너무 힘들었다거나

그런 느낌은 없다.  

예상했고 각오했었기에

받아들였다.

 

1년 6개월간의 수배생활에 지칠대로 지쳐 있었고

노동운동을 그만두기로 이미 결심하고 있었던터라

재소자 처우 등 관련해서 싸움을 만들지도 않았다.

그냥 조용히 견뎠다.

 

빵에서 얻은 성과가 있다면

부모님이 나를 완전히 포기했다는 것(?) ㅋㅋ

출소한 이후로 부모님은

내가 뭔 짓을 하든 빵에 가는 것보다야 낫겠지 하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뭔 짓을 하든 간섭하지 않는다.

 

거의 매일 면회를 와 준 현장의 조합원들과

학교 동기와 애인이 하루도 빼놓지 않고 보내 준 이메일이

(바깥에서 법무부를 통해 이메일을 보내면 출력해서 검열한 후 나에게 갖다준다.)

큰 힘이 되었었다.

그러고보면 참 많은 사람들의 보살핌과 배려가 있었기에 내가 그 곳에서 잘 견딜 수 있었나보다.

현장 조합원들을 이제 만날 수는 없지만

그분들께 마음으로 감사를 전한다.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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