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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후기]칼의 노래, 김훈

김훈의 '자전거 여행'과 '밥벌이의 지겨움'을 그의 표현력에 혀를 내둘렀었다. 어쩜 같은 장면을 보고도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가 하면서 말이다. 그의 표현은 결코 화려한 수사에 의지하지 않고 응시와 관찰의 힘이라는 생각을 했다. 뒤늦게야 읽은 그의 소설은 대서사의 굵직한 선의 느낌이 아니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은 시대의 무게감이 느껴졌다.

 

"무기력한 만큼 격력하게 비분강개했다."

=>정말 그렇다. '비분강개'는 무력한 자의 정서일 뿐이다. 방책이 있는데, 굳이 비분강개하며 시간을 죽이고 있겠는가 말이다.

 

"칼을 빼자 햇빛이 튕겨져 나갔다."

=>김훈은 이 표현이 갑작스레 떠올랐을까? 분명 아닐 것이다. 몇 번이고 칼을 빼들거나, 그 장면을 깊이 응시하고 관찰했을 것이다. 글이란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응시하고, 오래도록 다듬어져서 나오는 것이 아니겠가...

 

"삶은 집중 속에 있는 것도 아니었고, 분산 속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모르기는 하되, 삶은 그 전환 속에 있을 것이다."

=>교직 10년에 여차한 이유들로 힘겨웠고, 지금도 여전히 힘들지만, 전환, 새로운 다른 것을 해보려는 버둥거림은 어쨌든 나의 삶이고 의지이다.

 

"먼 수평선 쪽에서 비스듬히 다가오는 저녁의 빛은 느슨했다. 부서지는 빛의 가루들이 넓게 퍼지면서 물 속으로 스몄고, 수면은 스치는 잔바람에 빛들은 수억만 개의 생멸로 반짝였다. 석양에 빛다는 먼 섬들이 어둠 속으로 불려가면 수평선  아래로 내려앉은 해가 물 위의 빛들을 거두어 들였고, 빛들은 해지는 쪽으로 몰려가 소멸했다."

=>해지는 바다를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김훈의 힘인 것 같다. 화려한 수사가 아니라 '응시'에 의해 획득한 생경한 표현,하지만 이 표현은 단지 '표현'이라는 의미에만 멈추지 않는다. '칼의 노래'에서 충무공은 당대의 정치사회적 상황을 주도할 수 있는 '영웅'은 아니었다. 스스로 '죽을 만한 자리'를 찾아야했을 정도로 상황에 끌려다녀야 했다는 것이 사실일 것이다. 그런 인식에서인지 작가는 배경 표현은 주로 '피동적 표현'으로 이뤄지고 있다. '빛'은 '해'에 의해 거둬지는 것이다. 충무공은 '빛'이었고, 임금은 '해'였다. 빛은 해에 의해 거둬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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