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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경의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10071945205&code=900308
[책과 삶]기득권층 불편하게 하는 ‘것’들의 의미와 가치 (경향, 김종목 기자, 2011-10-07 19:45:20)
철학에서 존재론은 엄숙한 것이었다. 후기 하이데거로 대표되는 존재론에서, 인간만이 존재 의미에 접근할 수 있는 ‘존재자’였다. 저자 이진경(48)은 기존 존재론의 밑동을 뽑아낸 그 자리 위에 새로운 존재론을 정립한다.
이진경의 존재론에서 ‘존재자’들은 ‘볼온한 것들’이다. 이 불온한 존재자들은 ‘남에게 폐 끼치는 자’로 여겨지는 장애인, 반정부적이거나 반골 기질로 가득한 사람들일 뿐만 아니라 ‘인간도 아닌 것’ ‘미천한 것’ ‘하등한 것’으로 천시받는 것들이다. 이진경은 사이보그와 박테리아까지 ‘존재자’들의 범주를 확대해 존재 문제를 탐구한다.
불온함, 불온성은 무엇일까. 이 불온성은 “어떤 뜻밖의 만남에서 느끼는 ‘저들’의 기분”이다. ‘저들’은 “자신이 세상의 주인이며 세상을 지배한다고 믿는 자들”이다. 볼온한 존재자들은 고귀한 존재자들이 말하는 인간·민족·국가 같은 엄숙한 것들에 낙서하는 자들이며, 탁월한 자들의 빛나는 시선을 ‘생까는’ 자들이다.
이진경은 추상적 철학 개념에서 “그 불온한 것들에서 가지를 쳐나가는 현실의 구체적 사태들”을 이야기한다. 존재론이란 추상의 장에서 가장 정치적인 사유의 장을 펼쳐나간다. 조직력이 형편없던 1970년대 노동조합과 힘·영향력이 막강한 1990년대의 노동조합 중 어느 쪽이 불온한가. 불온하고, 미천한 존재자들은 ‘우리’와 다른 존재가 아니다. 우리 모두는 ‘남에게 폐를 끼치는 장애인’이다. 우리가 먹고 입고 하는 것은 누군가에게 폐를 끼친 덕이다. 노동자들은 타인을 위한 노동을 중지할 때, 즉 남들이 끼치는 폐를 받아주길 중단할 때 세상의 불편을 초래하는 자로 비난받으며 불화한다.
교환이 지배적인 사회에서 노동자는 지불수단이 없어 폐를 끼치는 걸 자각하며 살지만, 재벌은 그 지불수단으로 폐를 망각하고 산다. 재벌의 부는 수많은 노동자가 과로에 시달리며 상품을 생산하지 않았다면 있을 수 없다. 세금으로 움직이는 관료와 ‘졸개’가 없다면 권력 또한 있을 수 없다. ‘공적자금’이라는 거대하고 실질적인 민폐조차 자본가들은 폐로 느끼지 못한다. 남에게 폐를 끼친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재벌과 권력자들이 더 많이 남들에게 폐를 끼치며 사는 것이다. 존재론으로 돌아가면, 존재란 “어떤 존재자가 다른 무수히 많은 존재자에, 우주 전체에 기대어 살고 폐를 끼치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 자체인 것이다.
이진경은 미물의 존재 문제를 인간의 영역으로 연장한다. 동물 신체에서 이루어지는 면역계에 빗대 이주노동자 같은 ‘무력한 외부자’와 장애인 같은 ‘결함 있는 내부자’를 배제하고 추방하는 체제 문제를 비판한다. 면역이란 뜻의 ‘임무니스(immunis)’는 ‘증여’ ‘의무’의 ‘무니스(munis)’에 ‘면제’를 뜻하는 ‘임(im)’이 붙은 말이다. 배제와 추방은 바로 면제를 통한 자기보호이며 개체성을 위협하는 외부 타자들의 침입에 대한 자기방어다. 이 면역개념은 ‘적들을 퇴치하는’ 군사주의적 통념과 인접해 있다.
이진경은 인간에게 고기를 제공하기 위해 사육되는 소·돼지나 닭에서 수단으로 존재하는 것들을 사유하고, 암세포를 갖고 태어나는 온코마우스(종양생쥐·종양을 뜻하는 onco와 mouse의 합성어)에서 시뮬라르크 문제를 사고한다.
책은 철학과 윤리학, 정치학을 아우른다. 이진경은 문학적 글쓰기를 시도했다. 그는 “설명하고 해석하는 기존의 사유와 글쓰기를 과감히 버리고, 압축적이고 응축적인 글쓰기를 하려고 했다. 강하고 밀도 있는 저 자신의 문체를 찾아가는 첫 시도”라고 말했다.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1110/h2011100721024286330.htm
사이보그·박테리아·프레카리아트… 우리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존재 (한국, 이윤주기자, 2011.10.07 21:02:42)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이진경 지음/휴머니스트 발행·368쪽·1만8,000원
"인간 통해 인간을 사유한다? 우월하다는 특권 의식일 뿐
타자를 보는 관점 바꾸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 생기죠"

사상가 발터 벤야민은 지적이면서도 아름다운 문장으로 이름을 알렸다. 그는 '지금 여기'에서 철학적 장면을 포착해 예민한 글로 남겼는데, 이 방법은 역설적으로 현재의 한국 독자들이 그의 글이 난해하다고 생각하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우리는 벤야민처럼 1930년대 파리 아케이드를 거닐 수 없으니까.
2000년대 독자가 벤야민의 문장을 이해하려면 길잡이의 도움이 필요한데, 가장 탁월한 길잡이로 미국 이론가 수전 벅 모스가 손꼽힌다. 1970,80년대 벤야민 연구로 이름을 알린 그는 1990년대 이후 벤야민을 넘어서 자신만의 독특한 이론을 펼치고 있다. 국내 번역된 에세이 <꿈의 세계와 파국>은 그 터닝 포인트가 된 책으로, 미국 월트 디즈니 이미지 분석을 통해 포스트모던 사회의 정치를 말한다. 이제 그는 자신만의 목소리를 갖게 됐지만, 당연하게도 이 목소리의 언저리에는 벤야민의 숨결이 남아 있다.
철학자 이진경씨를 소개하며 생뚱맞게 벤야민과 벅 모스를 소개한 것은 신간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이 꼭 벅 모스의 <꿈의 세계와 파국>과 닮은 꼴이기 때문이다. 철학자 이진경은 이 책을 통해 자신만의 사유를 펼치고 있지만, 동시에 이 책에는 그를 있게 한 마르크스와 들뢰즈의 사상이 깨알처럼 녹아 있다. 6일 연희동 '수유너머N'에서 만난 그는 "이제 도제 생활은 끝났다"고 말했다.
그의 돌파구는 하이데거다. "하이데거의 위대한 점이 존재를 의심하는 '존재자'의 발견이잖아요. 하지만 인간을 통해서 인간을 사유하려는 시도에는 인간을 다른 존재보다 우월하다고 여기는 일종의 특권의식이 있는 셈이죠. 저는 인간이 아닌 것들로 인간을 사유하는 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요컨대 저자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전복하며 사상의 아버지들을 넘어서려는 것이다. 이 책의 핵심인 이진경 식의 존재론은 책 2장에 담겨 있다.
책의 또 다른 키워드는 '불온함'인데, 들뢰즈의 '탈주' 개념이 변형된 꼴로 읽힌다. 그는 "불온함이란 통념이나 분명한 구별들이 깨질 때 발생하는 불안감과 결부되어 있다. 그것은 확실하다고 믿던 것들을 와해시키고 그 경계를 횡단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저자는 책 1,2장에서 불온함과 존재론의 개념을 정리한 후 3~8장에서 사이보그, 박테리아, 프레카리아트(파견, 하청, 계약직 등 극도로 고용이 불안정한 노동)같은 불온함을 지닌 존재자들을 소개한다. 존재자의 범위를 인간보다 넓혔기 때문에 책에서 '장애인'은 '장애자'로 썼다. 이씨는 "이들의 공통점은 중간적인 존재자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기존의 존재자, 즉 인간의 구획에 따라 명료하고 뚜렷하게 구별된 것들이 아니라, 반대로 그런 구별을 깨거나 와해시키거나 중간에 끼어 있는 존재자를 의미한다.
"사이보그는 인간도 기계도 아니지만 동시에 인간, 기계이기도 합니다. 박테리아는 생물이라고 할 수도 없고, 생물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죠. 프레카리아트 역시 노동자이면서 노동자가 아니기도 합니다. 이 중간적 존재자들이 기존의 경계를 해체시킵니다."
이씨는 "마르크스의 위대한 점은 프롤레타리아를 착취 당하는 불쌍한 사람이 아니라 사회를 전복시킬 수 있는 주체로 보았다는 것"이라며 "타자를 보는 관점을 바꿀 때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 나온다"고 말했다. 우리 사회의 마이너리티인 장애자, 프레카리아트 등은 불쌍한 존재가 아니라 사회의 결핍을 보여주어 기성 체제를 전복시키는 존재자라는 설명이다.
철학 책을 자주 접하지 않았던 독자라면 이 책이 버거울 것이다. 분량도 300여 페이지나 된다. "일반인들이 읽기에 부담스럽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저자는 "어려운 책이 꼭 안 팔리는 건 아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제가 읽은 책 중에 가장 아름답고 충격적인 책이 <벽암록>이에요. 처음부터 끝까지 한 글자도 이해가 안 가는데도 손에서 책이 안 떨어지더라고요. 놀랍지 않아요? 이해되지 않는데도 끌리는 책. 이 책이 그런 매혹을 주는 책이기를 바랍니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499835.html
결국엔 평화를 불러오는 ‘불온함’의 두가지 정체 (한겨레, 최원형 기자, 20111007 21:21)
질문을 던져보자. 100만명의 조합원을 자랑했던 1990년대 전국적 규모의 노동조합 총연맹이 불온한가? 아니면 1970년대 단칸방에 몇 안 되는 사람들이 모여 손글씨로 대자보를 쓰던 1970년대 노동조합이 불온한가? 전반적인 사회 개혁이나 체제 전복을 내세웠던 90년대의 노동조합보다, ‘근로기준법 준수’ 등 지금의 눈으로 볼 땐 훨씬 수위가 낮은 목소리를 냈던 70년대의 노동조합이 훨씬 더 ‘불온성’의 상징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외부’와 ‘탈주’의 철학자로 불리는 이진경씨가 최근 펴낸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은 제목 그대로 ‘불온한 것들’을 통해 사유하는 존재론이다. 지은이가 활동하고 있는 인문학 공동체 수유너머엔(N)에서는 올해 초 ‘불온한 인문학’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학문 활동을 시작한 바 있다. 자본과 국가의 권력에 의해 순치된 현재의 인문학은 인문학 본연의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를 회복하기 위해 인문학에 담긴 불온성을 다시 끄집어내야 한다는 것이 주요 취지다. 같은 맥락 위에 놓여 있는 이 책은 이런 문제의식을 전개해나가기 위한 철학적 기반을 다진다는 의미도 갖는다.
흔히 정부에 대한 비판, 체제에 대한 비난 등을 불온함의 근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지은이는 불온함이 과연 어디에서 비롯되는 정서인지 더 깊은 곳에서부터 따져본다. 그는 “불온함이라는 감정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에서 오며, 공감과 반감이 뒤섞인 불안을 가져다준다”고 한다. 우리의 사고나 행동을 규제해왔던 어떤 틀이나 경계를 무너뜨리는 무언가가 나타났을 때 우리는 당혹스러움을 느끼는 한편, 내가 그것에 의해 뜻하지 않았던 어딘가로 빨려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예감을 갖게 된다. 이런 측면에서 당혹과 예감은 불온성의 두 가지 성분이다. 낯설고 불편한 것에 대해 단지 반감만 있다면 그저 외면하고 잊어버리면 그만일 것이다. 그러나 지은이는 “그 속에는 쉽게 떨칠 수 없는 무의식적인 공감이 있어서, 우리를 기존의 낡은 감각에서 벗어나도록 만든다”고 한다.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부신 빛이나 칠흑 같은 어둠은 우리의 현행적 감각을 지워버리고, 우리가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게 해준다.
불온함에 대한 이런 풀이는 존재론과 어떻게 연결될까? 지은이는 “위대한 것을 모델로 하는 보편화, 탁월한 것에서 시작하는 보편화는 모든 존재자를 포괄하는 일반성에 결코 도달할 수 없다”며 장애인, 박테리아, 사이보그, 온코마우스(암 실험을 위해 나면서부터 암을 가지게 만든 실험용 쥐), 페티시스트, 프레카리아트(극도로 불안정한 노동자층) 등을 들어 존재론을 펼친다. 어떤 존재자의 탁월성이나 위대함을 기초로 삼는 존재론은 필연적으로 그렇지 못한 것들과 위계를 만들어내기 마련이다. 지은이는 여기에서 벗어나고자 “미천한 것, 별 볼 일 없는 것, 인간도 아닌 것들의 가치와 의미를 밝히는” 작업을 벌인다. 겉으로 보기엔 불온해 보이지 않지만, 장애자나 박테리아, 사이보그 등등은 ‘인간은 탁월한 존재’라는 낡은 통념을 깨고 인간을 미천하고 소소한 것으로 끌어내린다는 점에서 모두 ‘불온한 것들’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장애인에 대해 흔히 ‘남에게 폐를 끼치는 존재’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모든 존재는 다 다른 존재에게 폐를 끼치며 산다는 점에서 장애인이다. 자신이 선택한 기계에 의해 변이된다는 점에서 인간은 또 사이보그와 다르지 않다. 자신의 개체성을 넘어 무언가에 이끌려 사랑하는 한 우리 모두는 페티시스트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처럼 지은이는 우리에게 낯익은 통념들을 깨는 대신 저 불온한 것들을 우리와 함께 엮어주려고 한다. 이 세상은 ‘친구 아니면 적’이라는 이름의 ‘보편성’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끝없는 적대와 대결의 굴레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다. 그렇다면 나 스스로가 낯설고 불편하게 여겼던 존재, 곧 불온한 것이 되자는 제안이다. 지은이는 인간의 자긍심으로 동물을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서 벗어나 동물이 되고, 이주노동자와 불법체류자를 추방하기보다는 나 스스로 그들의 자리에 서는 것처럼 미천하고 보잘것없고 버려지는 것들의 끄트머리에 가서 설 때, 비로소 평화와 평온을 발견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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