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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서 비판 - 『행복 중독자』『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자기계발의 덫』

 

[책과 삶]1936년에 출간된 자기계발서, 2012년엔 어떻게 달라졌을까 (경향, 고영득 기자, 2012-02-03 20:26:55)
▲행복 중독자 | 올리버 버크먼 지음·김민주·송희령 옮김 | 생각연구소 | 359쪽 | 1만3000원
영국 가디언 기자인 올리버 버크먼은 이 “한물간” 성공 지침서를 삐딱하게 본다. 상대에게 실제로 관심을 보이라는 게 아니라 최대한 관심 있는 척하라고 말하는 것 같다고 한다. 그는 카네기식 배려를 친절을 가장해 상대의 환심을 사려는 의도로 해석한다.
행복은 전 지구적으로 삶에서 구체화해야 할 과제가 됐다. 다만 사람들은 인생의 목표가 무조건 행복한 감정만 가지고 사는 것이라는 긍정적 사고의 최면에 걸리게 됐다. 이에 책은 염세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더 행복하게 산다는 연구결과 등을 소개하며 긍정적 사고의 덫과 한계를 짚는다.
자신이 제시한 조언만이 최고라고 주장하는 자기계발서와 지은이는 일단 의심해보라고 말한다. 가장 위대한 인물에게만 전수된다는 막강한 비밀을 담은 <시크릿>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이유는 모든 것을 “거저 먹으려는” 인간 심리 때문이라고 한다.
책은 ‘성공=완벽’ 등식을 과감히 부순다. 불완전하고 투박한 상태에서 아름다움을 찾으라고 한다. 단순하게 불완전한 것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 데 그치지 말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불완전한 것을 창조하고 즐기려고 노력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인생을 한순간에 획기적으로 변화시키겠다는 거창한 의지보다 작지만 알찬 변화를 가져오겠다는 결심을 가장 중요한 자세로 꼽는다. 그러면서 불완전하고 평탄치 않은 발전을 인정하고 참아내는 인내심 그리고 일이 잘못돼도 좌
절하지 않는 태도를 갖출 것을 당부한다.

 


 

서점가 점령한 뻔뻔한 유혹, 그 실체는… (프레시안, 최태섭 문화연구자, 2011-08-19 오후 7:14:41)
[프레시안 books] 미키 맥기의 <자기 계발의 덫>
자기 계발이라는 곤경

"(…) 최근의 조언서들이 변화하는 사회경제적 환경에 독자들이 대응할 수 있도록 돕고 있기는 하지만, 내용이나 형식면에서 많은 혁신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지난 30년간의 자기 계발서들을 개관해보면, 대부분 새로움보다 구태의연함이 드러난다. 사실, 책을 자세히 살펴보면 대부분, 특히 여성에 특화된 것이 아닌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책들은 기존의 책을 그대로 베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80쪽)
자기 계발서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뻔뻔함이다. '간절하게 원하고 노력하면 언젠가는 이루어진다'거나, '그게 언제가 될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기회가 오면 놓치지 말고 잡아라. 그러면 너도 부자가 될 수 있다' 같은 내용을 갖은 방법으로 늘려서 기어코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놓는 뻔뻔함. 책 내용 대부분을 이미 수 백 번 반복되었거나, 하나마나한 얘기로 채워 넣는 뻔뻔함. 그리고 이런 것들을 세상에서 처음으로 발설되는 어마어마한 비밀이라도 되는 양 포장하고 단장해서 기어코 팔아치우는 뻔뻔함.
자기 계발서들이 서점가를 점령하다시피하고, 그 폐해가 차곡차곡 쌓여왔음에도 이에 대한 본격적인 비평이나 비판이 존재하지 않았던 배경에는 이 압도적인 뻔뻔함 앞에서 느끼는 무력감이 있을 것이다. 사실 자기 계발서의 주장들을 논박하는 것은 전문적인 식견이나 지식 같은 고도의 지적능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는 어떤 반박에도 불구하고 반복되고, 증식하는 구태의연함의 생명력이다. 그리고 이 무지막지한 번성 앞에서 비판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그래서 너무 뻔하고, 때문에 섣불리 말할 수 없는' 식의 곤경 속에 붙잡혀있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구태의연함에도 불구하고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자기 계발이 굳건한 존립근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보장의 해체, 노동유연화, 실질임금의 정체와 평생직장의 붕괴와 같은 변화들에 의해서 등장한 "새로운 불안정성"(21쪽)이 바로 그것이다. 이 변화들은 개인의 삶을 한치 앞을 바라보기 어려운 예측 불가능의 안개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자기 계발은 이 안개 속 개인들의 불안과 공포에 말을 걸며 그 가지를 사회 속으로 깊숙하고 넓게 뻗어나간다. 실제로 저자는 미국의 자기 계발 시장의 급격한 성장세가 경제적 불안정성의 증대와 궤를 같이하고 있다고 말한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어서 비정규직화와 금융위기 등으로 나날이 불안정성의 기록 갱신을 이어가고 있는 오늘날 자기 계발을 향한 범사회적 열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뜨겁다.
당신의 불안을 위하여
대체 왜 자기 계발인가? 국가는 민영화 혹은 사유화를 통해서 거의 대부분의 기능을 시장으로 이전하고 있고, 기업은 경영혁신을 이유로 정리해고와 노동의 비정규화를 단행하는 중이다. 가족은 개인을 보호하는 울타리로서의 기능을 점점 상실해가고 있으며, 대안 세력들이 빈사상태에 빠진 것은 벌써 오래전 일이다. 너도 나도 빌라도의 황금 대야에서 손을 씻으며 '이것은 나의 책임이 아니다'를 반복하고 있는 상황에서, 자기 계발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주겠다고 호기롭게 공언하는 거의 유일한 분야다. 보호와 속박으로부터, 그리고 삶에 대한 기준들로부터의 '해방'을 맞이한 개인들에게 자기 계발은 바로 그 기준들을 '판매'하는 것을 자신의 사업으로 갖는다. 스티븐 코비의 촘촘히 짜인 계획과 소명이든, 뉴 에이지를 비롯한 마인드파워의 영적이고 긍정적인 활력이든, 국가와 사회와 정치가 더 이상 제공해주지 못하는 삶의 기준들이 은혜로운 시장의 힘에 의해 우리에게 나타나게 된 것이다.
"미국인들은 좌절의 시기에 영감을 얻기 위해, 자신의 삶을 경영하는 방법에 대한 특별한 지혜를 얻기 위해, 그리고 거대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변동 앞에서 확신을 얻기 위해 자기 계발 장르에 몰두하지만, 이 장르가 그들의 근심을 가라앉히기는커녕 오히려 키우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역설적이다." (29쪽)
그러나 자기 계발은 냉혹한 사업이다. 이것은 기존의 불안들을 해소시키기보다는 새로운 수요, 다시 말해 새로운 불안을 창출하는 것에 더욱더 집중한다. "자기 계발서들은 독자들을 불완전한 존재로, 미, 건강, 부, 취업, 애정, 혹은 특정 분야의 기술적 지식 등 어떤 근본적 요소가 결여된 존재로 정의하면서 자신을 해결사로 자처한다."(30쪽) 덕분에 혼란을 줄여보고자 자기 계발에 손을 뻗은 이들은 자기 계발에 몰두하면 할수록 자신의 부족함만을 발견한다.
자기 계발과 열정노동
자기 계발이 가장 천착하는 분야는 단연코 노동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대부분의 사람이 노동을 통해서 경제적 생활을 영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자기 계발이 미치고 있는 가장 큰 해악이기도 하다. 요컨대 자기 계발은 그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부자들과 더 큰 부자들을 위해 노동자들을 해체하는데 앞장서왔다.
"일과 노동자에 대한 오래된 모델들, 즉 경기 선수, 전사, 개척자, 그리고 모험가는 지속될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에 가장 이상적으로 어울리는 모델은 기업가와 예술가로서의 노동자, 예술가-기업가라는 신참이다." (214쪽)
이는 내가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한윤형·최태섭·김정근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펴냄)에서 시도했던 일련의 작업들, 특히 "열정노동"이라는 개념과 상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노동자가 스스로를 예술가이자 기업가로 여길 때 다른 무엇보다도 자본을 기쁘게 하는 것은 "그들은 무보수로 일한다."(202쪽)는 점이다. 자기 계발은 노동권과 관련된 거의 모든 부담을 노동자들에게 전가하고 있다. 이를 위한 "하나의 해결책은 모든 노동자들이 자신의 '커리어'를 책임지게 함으로써 고용 안정에 대한 부담을 개별 노동자에게 지우는 것이다."(208쪽) 이 '예술가이자 기업가인 노동자'는 일이 주는 '즐거움' 그리고 '경험'과 자신의 경제적 보상을 기꺼이 맞바꾼다. 인턴, 재능기부, 자원봉사, 아르바이트, 비정규직 등등 다종다양한 곳에서 노동은 헐값에 팔려나간다. 이제는 심지어 내가 한 '삽질'과 내가 받은 보상간의 손익계산을 마치기도 전에 "좋은 경험으로 생각하라"는 말을 먼저 듣게 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나날이 뻔뻔함을 더하는 우리시대의 자본 앞에서 잘 길들여진 예술가-기업가들의 자선행위는 계속되고 있다.
자아라는 강박을 넘어서
"자아를 자율적인 것, 즉 서구의 급진적 개인주의 사상의 영향 하에 있던 경향처럼 대체로 스스로 형성되고 스스로 통제되는 자아로 본다면, 자아실현의 이상은 어쩔 수 없이 보수적이고 남성적인 개념이 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자아의 이상은 거의 여성의 몫이었던 다른 자아를 형성하는 데 기여한 돌봄 노동을 은폐하기 때문이다." (38쪽)
이 모든 사태의 궁극적인 해결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결국 어떠한 종류의 결집 혹은 연대라고 할 수 있다. 무언가를 바꾸어내기 위해서는 어찌되었든 일정한 수의 사람들이 공통의 인식과 목적을 가지고 모이고, 행동하는 수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기 계발서를 관통하는 하나의 법칙을 꼽는다면 '결국 모든 것이 너의 선택이며, 너의 책임'이라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을 터다. 분명히 작금의 자기 계발이라는 체제는 모든 것을 개별적이고 개인적인 것으로 돌림으로서만 존속가능하다. 그리고 이것의 효과는 사회를 '지금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다. 이러한 효과는 사회변화를 도모하는 이들이 자기 계발을 전적으로 부정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했다.
그러나 저자는 "자기 계발 문화는 저항의 전(前) 정치적 형태, 즉 정치적 참여로 물꼬를 돌릴 수 있는 개인적 불만의 존재증거"(39쪽)라고 주장한다. 물론 이것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전제가 필요한데, 그것은 "첫째, 각 개인의 형성에 타인의 노동이 투여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새로운 자아 및 자아형성의 모델을 개발"하는 것이고, "둘째, 자아실현의 욕구는 더 이상 자기애적 자기중심주의의 증거나 반문화적 해방충동이 아니며, 오히려 노동시장 참여를 위해 요구되는 '비물질 노동'의 새로운 형태(정서적, 사교적, 감정적 과제들)로 점점 더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39-40쪽)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들의 자아가 서구의 "진정성"개념에 근거한 독창적인, 고유한, 독립된 자아의 상이 아니라, 주로 여성들에 의해서 행해져왔던 "돌봄 노동"과 타인의 영향 속에서 상호적으로 형성된 자아임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저자는 "각자의 차이보다 육체적으로 체현된 존재로서 우리가 겪는 공통의 취약성에 주목"(289쪽)하고, 점점 사멸해 가고 있는 공론의 장을 확보(290쪽) 할 것을 요청한다. 이는 최근 기후변화와 자연재해, 핵 발전의 위기 같은 사건들과 함께 새삼 다시 부상하고 있는 "위험사회"에 대한 논의와 만난다. 서로의 의존성과 취약성을 인정하고, 상호호혜적인 인정의 관계를 구축해야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위험사회에 대한 논의가 가지고 있는 맹점을 마찬가지로 가지고 있다. 가령 오늘날의 극단적인 양극화는 위험에 대처하는 능력의 어마어마한 차이를 의미한다. 위험은 보편적일지 모르나 대응은 천양지차이고, 거기에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것은 공통의 취약성이라기보다는 계급성이다. 나아가 돌봄(노동)은 이미 3세계에서 1세계로, 약자에게서 강자로 빨려 들어가고 있으며, 그에 따른 돌봄의 양극화 역시 점차 심해지고 있다. 공론의 장은 그 장의 규칙과 언어를 누가 만드는가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스피박의 유명한 주장 즉 '하위주체는 말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 이런 것들에 대한 고려가 없이 이루어지는 상호호혜는 결국 강자들을 위한 게임으로 흘러가게 될 공산이 크다.
물론 그럼에도 저자는 불안과 불만이라는 이 시대의 "정치"의 출발점을 올바르게 지적하고, 자기 계발이 이것의 여러 표현 방식중 하나라는 중요한 통찰 역시 제공하고 있다. 또한 우리가 서로를 돌보지 않는다면 그 어떤 것도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리라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이 책은 자기 계발이라는 좀처럼 상대하기 버거운 대상에 대해서 상세하고 꼼꼼한 분석을 제시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들의 암중모색에서 반드시 필요한 자원을 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인상 깊었던 이야기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네 아이를 기르며 부족한 시간과 빠듯한 살림살이에 고달파하는 에이미가 오프라 윈프리 쇼에 출연한다. 그 자신이 자기 계발의 화신 같은 존재인 오프라 윈프리와, <당신의 삶을 위해 시간을 내라>의 저자인 셰릴 리처드슨을 만난 에이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도 상점에 가서 잔돈을 세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저도 상점에 가서 애들이 원하는 것을 신용카드 안 쓰고도 살 수 있으면 좋겠어요. 매일 돈, 돈, 돈 하는 것도 진저리가 나네요."(166쪽) 이에 대해 리처드슨은 자기만의 시간과 공간을 가져야 한다는 상투적인 조언을 던지지만, 이것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결국 두 자기 계발의 달인은 에이미의 사례를 어정쩡한 태도로 회피해버린다. 에이미의 이야기는 "미국인의 생활이 중산층의 빈곤이라는 현상으로 치닫고 있다는 경제적 실"(167쪽)을 날것으로 보여준다. 자본주의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중간층의 몰락과 함께 불만과 불안의 증가세는 가파르다. 이 불안과 불만이 어떤 방향으로 가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스스로를 '대안세력'이라고 여기는 이들에게 중요한 것이 있다면, 이 "진저리"에 담겨있는 일상의 처절함을 직시하면서도, 그것을 뛰어넘는 전망을 끊임없이 모색하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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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삶]자기계발서는 왜 도움이 안될까 (경향, 고영득 기자, 2011-07-29 20:52:30)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을 설파한 스티븐 코비가 파산했을 때 한 기자가 물었다. “성공학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성공의 영감을 안겨줬는데 왜 파산하게 됐나.” 코비는 답했다. “내가 쓴 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읽는 것보다 실행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얘기로 들리겠지만, 자기계발서대로 한다고 누구나 인생의 변화를 가져올 수는 없다는 건 뻔한 이치다. 사회학자이자 문화비평가가 쓴 이 책은 성공을 보장한다는 자기계발서가 오히려 자아를 괴롭힌다고 주장하는 또 다른 자기계발서다.
난무하는 자기계발서의 허와 실을 파헤치며 불안에 떠는 현대인의 암울한 초상을 그린다. 고대 그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가 자기계발 문화의 뿌리를 더듬는다. 왜 자기계발이 유행이 됐나, 자기계발 운동이 개인과 사회 그리고 노동현장에 어떤 영향을 줬는가, 자기계발 역사에서 여성과 남성은 어떻게 생각이 달랐나 등을 설명한다.
책의 배경은 미국이지만 남의 얘기가 아니다. ‘자본주의’라는 공통분모가 자리하고 있어서다. 신문, 서적, TV 토크쇼, 인터넷 등에서 자기계발 담론이 급증한 것은 20세기 초 광고의 증가와 궤를 같이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면서 ‘변신문화’가 근심을 가라앉히기는커녕 오히려 키우고 있는 현실을 꼬집는다.
자기계발서들이 종교적 흐름과 연결돼 있다는 주장에 눈길이 간다. 성경 등의 단어만 살짝 바꿨을 뿐 전혀 새로운 얘기가 아니라는 점을 주목한다. “상상력이 부족하고 다른 작품을 직접적으로 베껴 쓰는 것에 의존하기 때문에 새로운 어휘의 개발, 새롭고 더 진취적인 질문을 도출하는 데 기여하지 못했다.”
특히 ‘시달리는 자아’ 개념이 돋보인다. 자기계발의 당위성을 부정할 사람은 없지만 자기계발의 덫에 빠져 현대인의 자아가 혹사당하고 있다는 얘기다. 노동자들은 악화되는 고용전망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항상 취업 가능한 수준을 유지하도록 끊임없이 자신을 가다듬으라는 요구를 받고 있는 게 현실이다. 저자는 자기계발서의 강박적 조언을 맹목적으로 따르다보니 기쁨과 행복은 실종되고 공허와 피로, 불안만이 엄습하게 된다고 강조한다. 그가 자기계발서를 ‘함정’이나 ‘덫’으로 묘사하는 이유다.
승자가 있으면 패자가 있는 법. 게임, 정글, 전쟁터로 묘사되는 이 세상에서 자아는 부단히 전투태세를 갖춰야 한다. 이에 자기계발서는 고립적이고 탈정치화된 관점에 기반하고 있고 자율성이라는 미명하에 사회통제의 권력장치로 기능하고 있다고 저자는 역설한다.
그렇다면 진정한 자기계발은 어떻게 가능한가. 책 내용을 자기 삶의 목표로 삼을 것이 아니라 어떠한 가치를 자기 삶의 목표로 삼을지를 스스로 결단할 것을 저자는 주문한다. ‘왜?’라는 질문을 던져 어떤 기준으로 세계와 자신을 돌아볼 것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하라고 덧붙인다.
일반 자기계발서처럼 요약된 행동강령을 찾으려면 책을 덮는 게 낫다. 뚜렷한 결론은 없다. 다만 ‘시달리는’ 현대인들이 새로운 자아실현을 모색하는 데 길잡이가 될 것이라는 출판사 측 설명에는 토를 달 수 없겠다. 삶은 저마다 다르니 ‘당신 자신이 되라’는 메시지로도 들린다. 김상화 옮김.

 


 

http://www.yes24.com/24/goods/4964769?scode=032&OzSrank=1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새로운 명령
한윤형,최태섭,김정근 공저 | 웅진지식하우스 

 

꿈 쫓아 하는 일이니 노동착취 당해도 된다고? (한겨레, 임종업 선임기자, 2011-04-22 오후 09:02:00)
영화인·게이머·IT 프로그래머 등 근로계약서도 없이 고된 일 허다
정부선 “꿈꾸라”며 사실상 방치, 열정 노동자들 정체성 자각 필요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한윤형·최태섭·김정근 지음/웅진지식하우스·1만3500원

영화인, 프로게이머, 정보기술 프로그래머, 큐레이터, 파티시에, 소믈리에, 네일아티스트. 열정으로 일하는 직업군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즐겁게 살겠다’는 젊은이들이 취미와 일의 경계 없이 일하는 ‘행복한 영역’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한꺼풀 들여다보면 ‘좋아서 한다’라는 이유로 저임금에다 장시간 노동이 정당화되는 곳이다. 이 책은 꿈을 착취당하는 젊은이들에 대한 보고서다. 이름하여 ‘열정 노동자’.
이들은 “한 가지만 잘해도 대학 간다”는 이른바 ‘이해찬 총리 세대’들이다. 당시 대학들이 앞다퉈 만든 애니메이션학과, 게임학과, 영화과를 나왔고 다음 세대를 이끌 ‘문화콘텐츠 기술’ 전공자들이다, ‘신지식인’이다 뭐다 해서 잔뜩 고무됐고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과 <제빵왕 김탁구> 등에서 ‘연애도 하고 일도 하는’ 것으로 미화된 젊은이들이다. 그 상당수가 ‘88만원 세대’다.
외환위기 이래 일자리는 줄어들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간극은 넘을 수 없이 넓어졌다. 정부에서 해주는 것은 사실상 없다. 열정노동자 예비군을 향해 텔레비전 공익광고는 정부를 대신해 말한다.
극소수의 ‘성공한 사람’을 내세워 허황한 꿈을 부추긴다. 기성세대들은 자기계발서들을 통해 한술 더 떠 미치라고 한다. <대한민국 20대 재테크에 미쳐라> <20대, 자기계발에 미쳐라> <어려울수록 기본에 미쳐라>. 정부의 배려를 굳이 꼽자면 학자금 대출이다. “등록금 걱정 말고 취업준비나 열심히 하세요.” 마이너스 수천만원 통장을 쥐고 사회에 첫발을 디디게 한다. 직장을 구하지 못하면 연체료에다 신용불량자가 된다. 그래서 나온 또다른 혜택이 ‘취업 후 상환’이다.
결과는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씨, 인디음악가 ‘달빛요정 역전 만루홈런’의 죽음으로 귀결된다.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책을 읽고 나면 답답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열정 노동의 원인과 실태를 들려주지만 답까지는 제시 못한다. 지은이들은 열정 노동자들을 향해 노동자임을 자각할 것을 주문한다. 그리고 사회를 향해서는 의미심장한 경고를 던진다.
“워킹 푸어에 해당하는 빈곤층, 차상위 계층뿐만 아니라 부동산 투기 막차에 잘못 탑승하여 하우스 푸어라 불리게 된 수백만 가구의 중간층까지 삶이 나아질 거라는 희망을 잃게 되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달을 수 있다.”

 

[책과 삶]자본이 깔아 놓은 잔인한 덫 ‘젊음의 열정’ (경향, 문학수 선임기자, 2011-04-22 21:06:37)
ㆍ“배고파도 하고 싶은 일을 하라” 교묘하게 착취 당하는 청춘들
저자들은 “(박카스) 광고들이 주는 불편함의 정체는 뭘까?”라고 묻는다. 그 광고들은 열심히 일하는 젊은이들을 응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현실의 청년들은 그것으로 결코 위로받을 수 없다”는 것이 저자들의 판단이다. 게다가 광고의 소재들은 하나같이 사회적으로 민감한 사안들이다. 예컨대 병역, 노동 시간, 학벌주의, 성에 대한 보수주의, 불안정 노동 같은 것들이다. 저자들이 보기에, 그 엄중한 사안들은 결코 “힘냅시다 여러분!”으로 얼렁뚱땅 넘어갈 수 있는 문제들이 아니다.
저자들은 책의 서두에서부터 “현실의 문제를 은폐하고 봉합하는 언어들”에 칼끝을 들이댄다. “박지성은 평발이었다” “강수진은 연습벌레였다” “안철수는 평범한 의대생이었다”는 카피를 내세운 광고도 마찬가지다. 강렬한 사운드의 음악, 비보이들의 역동적인 춤, 다양한 분야에서 ‘열심히’ 일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차례로 등장한다. “용기, 패기, 혈기, 호기, 끈기”가 “젊음의 오(五)기”라는 자막이 따라붙는다. 이어서 “네 꿈을 펼쳐!”라는 외침이 들리고 “꿈꿔라 청춘아, 힘내라 청춘아, 너희의 꿈을 활짝 펼쳐라!”라는 노래가 울려퍼진다. 이 광고의 마침표는 ‘공익광고협의회’라는 일곱 글자다.
저자들은 “이것이 청년 실업에 대한 정부의 공식적 답변”이라며 “상당히 의미심장하다”고 말한다. 국가가 청년실업을 사회적 맥락보다는 개개인의 문제로 치부하는 태도가 여실히 드러난다는 뜻이다.
우리 사회는 젊은이들에게 “꿈과 열정을 강요하고 있다”는 것이 저자들의 판단이다. 배를 곯더라도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부추기면서, 꿈을 이루려고 달려드는 청년들을 교묘하게 착취한다는 이야기다. 저자들은 “가치 있는 일에 도전하라”는 자본과 권력의 부추김을 “노동의 미학화”라고 설명한다. 거기에 현혹된 청년들은 스스로를 곧 유명해질 예술가, 혹은 대박을 터뜨릴 사장님이라고 믿는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청년들은 당연하게 ‘탈노동자화’된다는 것이다.
저자들이 “열정 노동”이라고 부르는 이 부추김과 착취의 구조는 언제 어떻게 생겼는가? 저자들은 그것이 1990년대 후반에 싹을 틔웠다고 바라본다. IMF외환위기, 신자유주의 유입과 궤를 같이한다는 주장이다. 이를테면 김대중 정부가 주도했던 문화산업 육성 정책이 저자들의 도마에 오른다. 1999년 김대중 정부는 ‘문화산업 진흥기본법’을 제정해 강력한 지원책을 추진하기 시작했고, 98년에 168억원에 불과했던 문화산업 부문 예산은 2002년 1958억원으로 증액된다. 특히 정부는 ‘신지식인’이라는 개념을 앞세워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사람이야말로 새로운 지식인이라는 관점”을 널리 퍼뜨렸으며, 그동안 다양한 분야에서 3580명을 신지식인으로 선정했다. 이렇게 지식과 문화를 통해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려는 시도는 의외로 발빠른 가시적 효과를 불러오기도 했는데, 이른바 ‘한류’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저자들은 “네가 하는 일은 노동이 아니”라는 신자유주의의 속삭임, “세계화 시대를 맞아 진취적인 도전 정신으로 가득찬 인재가 필요하다”는 꼬드김은 자본이 ‘노동 유연화’를 달성하기 위해 펼쳐낸 전략일 뿐이라고 단언한다. 특히 그것이 한국사회에 ‘주둔한’ IMF의 핵심적 요구사항과 일치했다는 것이 저자들의 지적이다.
각종 미디어가 ‘젊은이들의 열정’을 부추겼음은 물론이다. IMF 이후 각종 자기계발 도서들이 쏟아졌다. 교보문고의 최근 11년간 누적 판매에서 1위를 차지한 책은 <시크릿>이었다. “청년들은 뻔한 내용인 줄 알면서도 자기계발 도서들을 읽으며 동기를 부여받았다”는 것이 저자들의 설명이다. <내 이름은 김삼순> <커피 프린스 1호점> <제빵왕 김탁구> 같은 드라마를 비롯해 <신의 물방울> 같은 만화들도 젊은이들의 환상을 부채질하긴 마찬가지였다. 저자들은 ‘열정 노동의 전도사들’이 지금도 여전히 같은 말을 반복한다고 주장한다. <아프니까 청춘이다>의 김난도는 “청춘들에게 먼 미래를 내다보고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조언”하며, 소설가 김영하는 “신춘문예에 당선되지 않고도 소설은 쓸 수 있다”며 “‘작가적 자의식’으로 곤궁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청춘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열정적으로 도전한 젊은이들은 어떻게 됐는가? ‘열정 노동’이라는 개념이 확산되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를 일(직업)로 선택하려는 젊은이들이 눈에 띄게 늘었지만, 그 결과는 약이 아니라 오히려 독이 됐다는 것이 저자들의 지적이다. “벤처의 꿈은 좌절됐고, 노동 강도는 한층 높아졌으며 처우는 형편없는” 현실을 감내하는 것만이 청춘들에게 주어진 운명이라는 주장이다. 또 그 젊은이들에게 돌아온 것은 “네가 좋아서 선택한 일이니까 이 정도는 감수해야지”라는 답변뿐이라는 것이다
책에는 ‘열정 노동’의 틀에 갇힌 다양한 청년들과의 인터뷰도 수록돼 있다. 프로게이머, 운동선수, 노예 계약에 휘둘리는 연예인, 영화산업에 종사하는 젊은이들, 파티시에, 소믈리에, 네일 아티스트 같은 직종의 청년들이 숱하게 등장한다. 그들은 “드라마가 보여주는 판타지와는 완전히 다른” 현실을 토로한다. 그들의 고백은 저자들의 주장에 적잖은 설득력을 부여한다. 커리어를 쌓아준다는 명분으로 쥐꼬리만 한 인건비를 겨우 받거나, 아예 떼이는 일도 다반사다. 퇴근을 반납하고 열정을 불태우는 IT업계 사무실은 “월급 90만원이면 20대들이 몰려드는 곳”일 뿐이다. 저자들은 안타깝게 세상을 등진 시나리오 작가 최고운이 “시나리오 작업을 다섯 번이나 계약했지만 한 번도 영화가 만들어지지 않은 현실”에 대해 “5타수 무안타”라는 말로 자조했다고 전하기도 한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책의 말미에 이르자, 저자들은 “열정의 본래 의미”를 회복하자고 주장한다. “열정의 착취로 인해 생긴 이 순환을 끊어내기 위해 ‘새로운 열정’을 불러와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일종의 ‘정치적 선언’이다. 그들은 “정치를 통한 변혁은 지금의 우리에게 불가능해 보이”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해서 혼자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은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지난해 12월 튀니지의 작은 도시에서 일어났던 일을 이야기한다. 노점상 청년 모하메드 부아지지가 단속 경찰에게 매를 맞고 손수레와 과일을 빼앗겼던 ‘작은 사건’이 수많은 청년들을 일어서게 했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이다. 공저자 중 한윤형은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 <진보의 재탄생> 등에 저자로 참여했던 사회비평가며, 최태섭은 성공회대 사회학과 대학원에 재학하면서 문화비평과 문화이론을 공부하는 청년이다. 김정근은 e스포츠 칼럼니스트로 활약하고 있다. 모두 ‘열정’적인 청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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