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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존 러스킨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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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인간적인 얼굴의 경제학 (서울=연합뉴스, 한미희 기자, 2007-12-13 07:06) 
  
"나는 인간에게 뼈대가 없다고 가정한 체조학의 전제조건에 관심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경제학의 전제조건에 관심이 없을 뿐이다." `인간은 이기적인 동기에서 합리적으로 행동한다'는 정통 경제학의 기본 전제를 정면으로 거부한 존 러스킨의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김석희 옮김.느린걸음 펴냄)는 너무나 인간적인 얼굴을 가진 경제론을 담고있다. 마지막까지 일자리를 찾기 위해 인력시장을 떠나지 못하는 노동자에게 국가는 노동에 필요한 교육을 충분히 제공하고 숙련된 노동자는 차별없는 대우를 받는 것이 러스킨이 꿈 꾼 이상 사회였다.
 
그는 강제로 어렵고 힘들고 비천한 노동을 해야 하는 사람은 능력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일이 싫어서 일을 거부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또 노동자가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해 최대의 이익을 창출하는 것은 감시나 높은 보수가 아니라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 `최대한의 애정'을 발휘할 때라고 강조했다.
 
일반적인 경제학 책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도덕'이나 `정직', `애정', `신뢰', `영혼'과 같은 단어들이 그의 사상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 굶주린 어머니와 아들이 한 조각의 빵을 놓고 이를 차지하기 위해 싸우지는 않는 것처럼 다른 인간 관계도 무조건 적개심을 품고 경쟁하는 것으로 가정할 수는 없다는 논리를 깔고 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보다 7년 먼저 세상에 나온 '나중에…'는 애덤 스미스와 맬서스, 리카르도, 존 스튜어트 밀로 이어지는 정통파 경제학과 배척점에 섰다는 점에서는 자본론과 동일하다. 그러나 러스킨은 사회주의 경제학에 대해서도 `파괴와 죽음의 경제학'이라고 일갈했다.
 
'나중에…'는 그가 잡지에 연재한 논문 4편을 묶어 펴낸 것으로 연재 당시 세간의 온갖 비난 때문에 서둘러 마무리됐으며 정작 그가 `나중에 논할 작정'이라고 한 중요한 사항들은 끝내 연재되지 못했다. 러스킨은 버나드 쇼가 마르크스보다 더 혁명적이라고 꼽았던 인물로, 간디와 영국 노동당 의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그의 저서중 예술 비평서 등 몇 권만이 번역돼있다. 부잣집 외아들로 태어나 화려한 예술 비평가로서 명예로운 삶을 살다 너무나 인간적이어서 혁명적이었던 그는 결국 심각한 조울증을 앓다가 숨을 거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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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존 러스킨 지음 (서울, 이문영기자, 2007-12-14  22면)
애정·정직·생명… 인간을 보듬는 경제학
 
다양한 시대를 통해 수많은 인류의 마음을 지배해온 갖가지 망상들 가운데 아마도 가장 기묘한-어쩌면 가장 명예롭지 못한-망상은, 사회적 행동의 규범은 사회적 애정의 작용에는 아무런 관계도 없이 결정되는 것이 유리하다는 관념에 바탕을 두고 있는, 소위 경제학이라는 근대의 학문일 것이다.”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존 러스킨 지음, 김석희 옮김, 느린걸음 펴냄)에 실린 존 러스킨의 첫 번째 논문 ‘명예의 근원’ 첫 문장이다. 러스킨에게 과거부터 지금까지 주류의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경제학은 늘 ‘먼저 온 사람들’을 위한 경제학이었다.
 
러스킨은 ‘나중에 온 사람(포도밭 주인이 저녁에 나와 일한 사람에게도 아침에 나와 일한 사람과 동일한 보수를 줬다는 성경 비유에서 따온 말)’을 배제하지 않는 ‘인간적 경제학’을 주창한다. 그에게 먼저 온 사람에게 모든 기회가 집중되는 경제학은 ‘파멸의 경제학’일 뿐이었다. 러스킨은 마르크스의 ‘자본론’ 출간 7년 전인 1862년에 이미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를 펴내 사회·경제적 약자를 옹호했던 선구적 사상가였다. 명망 있는 시인과 예술평론가로 이름을 떨치기도 했던 러스킨은 공황, 실업, 빈부격차, 고용불안 등 19세기 당대의 폭발하는 자본주의 이면에 주목했다.
 
‘인간은 언제나 이기적이고 합리적으로 행동한다.’는 이른바 ‘정통 경제학’의 대전제는 그에게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국가적 파멸이 있을 따름”인 ‘가짜 경제학’이었다. 그가 창출한 ‘진짜 경제학’의 근간은 정통 경제학이 외면한 애정, 정직, 정의, 생명 등 인간적 가치들이다. “진짜 경제학은 생명을 향해 나아가는 물건을 열망하고 그 때문에 일하도록, 그리고 파멸로 이끄는 물건을 경멸하고 파괴하도록 국민을 가르치는 학문이다.”
 
러스킨의 ‘비과학적’ 경제학이 과학적 논리로 포장된 오늘의 한국사회에 주는 울림은 적지 않다.“금전적 보수는 그가 오늘 우리를 위해서 쓰는 시간과 노동에 대해 나중에 그가 요구할 때는 언제든지 그를 위해서 그것과 동등한 시간과 노동을 제공하거나 알선해주겠다는 약속.”이란 러스킨 주장에 비춰볼 때 만연하는 비정규노동 체제는 부도덕할 뿐이다. 출간 당시 엄청난 비난을 받았던 그의 책은 이후 간디, 버나드 쇼, 톨스토이 등의 삶을 통째로 바꿀 만큼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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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경제만 살린다면 도덕성은 없어도? (머니투데이, 머니위크 이재경 기자 | 2007/12/20 11:44)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존 러스킨 지음/김석희 옮김/느린걸음 펴냄/223쪽/1만2000원
 
경제만 살려준다면 지도자의 도덕성 따위는 문제삼지 않겠다는 우리 사회의 기묘한 기류에 일침을 놓는 책이 발간됐다.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느린걸음 펴냄)는 자본주의의 폐해와 정통파 경제학의 모순을 목도한 19세기 한 지식인의 고뇌와 철학이 고스란히 담긴 경제사상서다. 19세기 영국의 대표적 지성인 존 러스킨은 자본주의의 폐해와 정통 경제학의 모순 앞에서 '악마의 경제학' 대신 '인간의 경제학'을 하라고 설파한다. 러스킨은 단호하게 "도덕 없이는 경제도 없다"고 선언한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나중에 온 사람'은 사회경제적 약자이 또다른 이름이다. 자본주의에서 사회경제적 약자의 소외는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숙제일지도 모르며 동시에 사회전체를 와해시킬 수도 있는 심각한 사안이다.
 
러스킨은 "나중에 온 사람에게도 먼저 온 사람과 동등한 보수를 지불해야 한다"는 해결책을 제시한다. 인간이 이기심에만 경제시스템을 맡기면 결국 장기적으로는 사회적 부가 감소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은 경제학에도 인간의 영혼이 담겨야 한다는 것을 일깨운 명저로 평가받고 있다. 또 위대한 사회개혁 사상가들에게도 영감을 불어넣은 고전이다. 변호사 간디도 이 책을 읽고 마하트마 간디가 됐다. 존 러스킨은 당대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고 현재도 영국 사회사상계의 지도적 위치에 있다. 하지만 국내에는 오랫동안 제대로 소개되지 못했다. 건축이나 예술과 관련해서 간헐적으로 소개된 것이 전부다. 이 책은 예술비평가가 아닌 사회사상가로 러스킨을 국내에 소개하는 최초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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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세상. 깊이읽기]‘사람’ 그 자체가 경제 목적 (경향, 손제민 기자, 2007-12-21-16:35:32)
 
성경 구절을 딴 이 책의 제목이 모든 것을 함축한다. 예수가 천국을 비유할 때 나오는 구절(마태복음 20장)이다. 포도밭 주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한 일꾼과 나중에 합류해 조금만 일한 일꾼에게 똑같이 품삯을 쳐주자 아침부터 일한 일꾼이 불평했다. 그러자 주인이 “나는 너를 부정하게 대한 것이 아니다. 너는 나와 1데나리우스(화폐단위)로 합의하지 않았느냐. 약속한 너의 품삯을 받아 돌아가라.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unto this last)’ 너에게 준 것과 똑같이 주는 게 내 뜻이다. 내가 후하기 때문에, 그게 거슬리느냐?”라고 대답했다.
 
‘꼴찌들이 첫째가 되고 첫째들이 꼴찌가 되는’ 그런 사회가 바로 천국이라는 비유다. ‘합리적 이기주의자’를 가정하는 주류·비주류를 막론한 애덤 스미스 이래의 근대 경제학적 사고에 익숙해진 우리들로는 도무지 이치에 닿지 않는 소리다. 마르크스와 비슷한 시기에 영국에 살며 산업화하는 영국 사회를 비판적으로 지켜본 저자는 자본론보다 7년 앞서 이 책을 내놓았다.
 
이 책은 자본주의의 모순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며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필요성을 논했던 마르크스의 사상과 달리 너무 ‘온건했기’ 때문에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아니 온건했다기보다 근본적이었기 때문에, 성공한 상인이었던 그의 부친을 포함한 당시대 사람들을 불편하게 했고, 그래서 외면받았다. ‘브레이크 없이’ 전진을 거듭하는 중이었던 당시 영국인들은 ‘근대 화가론’를 쓴 바 있는 저명한 예술평론가인 저자의 입을 통해 예의 그 고상한 미술론 같은 얘길 듣고싶어 했다.
 
저자 스스로 이 책을 ‘부(富)의 정의’와 ‘정직의 회복과 유지’를 궁구한 글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그의 경제사상의 핵심은 ‘사랑’과 ‘정직’, 곧 ‘사람’이다. 그렇다고 도덕 교과서에 나오는 뻔한 말씀을 늘어놓은 것은 아니다. 그는 ‘부유함’이라는 것이 과연 절대적인 것인지 묻는다. 경제학은 결국 ‘모두 다 부자가 되기 위한’ 학문이라고 하지만 실은 부는 상대적이다. 내 주머니 속 1만원의 힘은 내 이웃의 주머니 속에 1만원이 없다는 사실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저자는 “보통의 상업적 경제학자가 말하는 부자 되는 기술은 필연적으로 내 이웃을 계속 가난 속에 방치해두는 기술”이라고 말한다.
 
상업적 경제학이 타인의 노동에 대한 법률적 청구권이나 지배력을 개인의 수중에 축적하는 것이라면 정치적 경제학은 단순히 유용하거나 쾌락을 줄 수 있는 사물을 가장 적당한 때와 장소에서 생산하고 보존하고 분배하는 것이다. “적당한 시기에 건초를 베어 들이는 농부, 단단한 목재에 대못을 단단히 박는 목수, 잘 이긴 회반죽에 양질의 벽돌을 쌓아올리는 건축공… 이들이야말로 궁극적 의미에서 진정한 정치적 경제학자이고, 자신이 속한 국가의 부와 행복에 끊임없이 이바지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는 ‘부’라는 명목 하에 사람들이 실제로 욕심내는 것은 부 그 자체보다는 본질적으로 타인에 대한 지배력이라고 본다. 그것은 “단순한 의미에서는 하인이나 상인이나 예술가의 노동력을 자기 자신을 위해 이용하는 힘이고, 좀더 넓은 의미에서는 국민대중을 다양한 목적으로 이끌어가는 권위”일 뿐이다. 진짜 경제학은 “생명을 향해 나아가는 물건을 열망하고 그 때문에 일하도록 가르치는 학문”이다. 노동자가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해 최고의 이익을 내는 것은 결코 강한 압력이나 높은 보수를 받을 때가 아니라, ‘최대한의 애정’이 발휘될 때라고 한다.
 
우리는 근대 경제학과 함께 너무 많이 와버려 이런 얘기에 귀기울이는 것이 사치스럽다고 여길지 모른다. 하지만 ‘정직’ ‘애정’ 등 인간의 정신적 요소를 합리적 결정을 교란시키는 우발적인 요인이라고 보는 근대 경제학은 옳은 것인가. 효율적이면 다 좋은 것인가. 우리는 이따금 너무도 당연시 여기는 것들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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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손’ 거부한 애정의 경제학 (한겨레, 한승동 선임기자, 2007-12-28 오후 08:50:47)
영국 사회사상가 존 러스킨의 혁명적 사상
부는 ‘제로섬’…‘정의와 애정’이 최선 낳아
“생명 향한 열망 담아야 진짜 경제학” 역설
 
 
산업혁명으로 최성기를 구가하던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예술비평가요 사회사상가인 존 러스킨(1819~1900)은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Unto This Last)〉(느린걸음)에서 애덤 스미스에서 토머스 맬서스, 데이비드 리카도, 존 스튜어트 밀로 이어진 자본주의 정통 경제학의 전제조건들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그는 고용주와 노동자를 포함한 경제 주체들에게 최선의 결과를 가져다 주는 것은 “정의와 애정”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모든 당사자가 저마다 자기 이익을 꾀한다고 가정”(밀)하면서, 이기적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보이지 않는 손”(스미스)의 역할을 낙관한 정통 경제학과는 전혀 다른 접근이다. 정통 경제학자들은 예컨대 집주인은 가능한 한 하인들이 빈둥거릴 짬을 주지 않고 그들이 견딜 수 있는 한도 내의 빈약한 음식과 형편없는 방을 주고 다른 데로 떠나가지 않을 한도 내에서 무리한 요구를 하며 매사에 한계점까지 밀어붙이는 것이 주인과 사회, 나아가 하인에게도 최대의 이익을 안겨주는 합리적인 행위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러스킨은 기계와 달리 “영혼을 동력으로 삼는” 하인이 최대한 많은, 질 높은 일을 하게 만드는 것은 보수나 강한 압력이 아니라 의지나 정신, 친절과 신뢰, 정의, 공평무사, 한마디로 애정이라고 말한다. 공장주와 노동자, 장교와 병사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러스킨은 숙련 노동자와 미숙련 노동자에 대한 보수도 같아야 한다며, 의사나 교회 목사에 대해서는 그들 솜씨가 좋든 나쁘든 똑같은 사례를 지불하면서 노동자들에겐 왜 그렇게 하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노동력에 대한 대가에 차등을 두게 될 때 미숙련 노동자가 싼 값으로 숙력 노동자의 자리를 빼앗거나 임금을 깎아내리고 무한경쟁에 돌입함으로써 대다수가 망하는 파괴적인 결과가 초래된다.
 
조지 버나드 쇼가 카를 마르크스보다 훨씬 더 “혁명적”이라고 했다는 러스킨 사상의 급진성은 부(富)에 대한 그의 생각에 집약돼 있다. 러스킨은 일정한 가르침을 따르기만 하면 누구나 다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근대경제학자들의 절대적 개념의 부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에게 부는 제로섬과 같다. 누구 주머니에 든 1기니라는 돈의 힘은 이웃의 주머니 속에 1기니가 없다는 사실과 그 이웃이 돈을 원한다는 사실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부자가 되는 기술은 재산을 모으는 기술일 뿐만 아니라 이웃이 자기보다 적게 소유하도록 획책하는 기술이기도 하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자신만을 유리하게 하기 위해 최대한의 불평등을 확립하는 기술인 것이다.”
 
러스킨은 식민지경영과 불평등 교역을 통해 전세계로부터 부를 빨아올리며 자연을 파괴·오염시키며 국가간, 그리고 국가내 차별과 불평등을 심화시켜가던 대영제국의 작동방식과 그것을 뒷받침한 근대경제학의 원리를 근본적으로 비판했다. 나라 안팎을 넘나드는 주식투자와 신종 펀드들이 난무하고 부동산 투기 등 ‘재테크’가 일상화한 21세기 한국사회는 당시 영국사회와 닮은 구석이 많다. 그런 재테크는 새로운 부를 창출하는 게 아니라 부의 이전과 집중에 따른 불평등을 창출한다. 그것은 내부 양극화뿐만 아니라 전세계 차원의 국가간·지역간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강자들간의 도박게임과 같은 속성을 지닌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나오기 7년 전에 발간된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는, 말하자면 150년 전에 거기에 이의제기를 한 것이다. 근대경제학은 그런 불평등을 긍정한다. 그 바탕 위에서 각자 최대의 이익, 이윤을 짜내는 걸 정당화한다. 오늘날 세계와 한국사회를 풍미하고 있는 신자유주의는 그 연장이자 필연적 귀결이다.
 
러스킨에게 “진짜 경제학”은 “생명을 향해 나아가는 물건을 열망하고, 그 때문에 일하도록, 그리고 파멸로 이끄는 물건을 경멸하고 파괴하도록 국민을 가르치는 학문”이다. 자립적 소농경제 쪽을 지향한 마하트마 간디가 러스킨한테서 큰 영향을 받았던 것도 이 부분일 것이다. 자본도 “생명에 유용한 어떤 물건을 공급하느냐, 생명을 보호하는 어떤 구조물을 짓느냐”를 기준으로 봐야 하며 그런 일을 하지 않는 자본의 증식은 아무짝에도 쓸모 없고, 그런 자본은 아예 없느니만 못하다. “가장 부유한 나라는 최대다수의 고귀하고 행복한 사람을 양성하는 나라이고, 가장 부유한 사람은 자신의 생명의 기능을 최대한 완벽하게 하여 그 인격과 재산으로 다른 사람들의 생명에 유익한 영향을 최대한 널리 미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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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신동아, 하종강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 인천대 강사, 2008-02-25 10:3)
 
대학 수업시간에 한 경제학자를 초청해 한미FTA에 관한 특강을 하도록 한 적이 있다. 세계와의 경쟁을 통해 선진 사회로 진입하기 위한 한미FTA가 경쟁에 살아남은 대기업에만 유익할 뿐, 농업의 피폐와 비정규직 양산 및 사회 양극화 현상을 초래할 수도 있으니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두 시간에 걸쳐 강의한 경제학자는 다음과 같은 말로 마무리를 했다. “휴머니즘보다 더 위에 있는 경제학은 없습니다.”
 
이러한 주장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제기가 뒤따른다. 휴머니즘에 바탕을 둔 경제학이 사회적 약자뿐 아니라 사회적 강자를 포함한 사회 전체 구성원 모두에게 유익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다. 이러한 의문에 대한 완벽한 정답일 수는 없지만, 2003년 ‘Nature’에 소개된 미국 조지아 주립대학의 브로스넌(Sarah F. Brosnan)과 에모리 대학의 왈(Frans B. M. de Waal)이 진행한 실험 하나가 눈길을 끈다. 연구팀은 한 무리의 흰목꼬리감기원숭이(Capuchina)가 태어나자마자 일체의 학습 경험을 차단한 채, 우리에 가둬 사육했다. 원숭이들을 두 집단으로 나눠 일정한 양의 조약돌을 준 다음, 원숭이들이 사람에게 이 돌멩이를 건넬 때마다 그에 대한 보상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실험을 진행했다.
 
양쪽 원숭이 집단에 모두 오이를 보상으로 제공했을 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한쪽 집단에는 오이를, 다른 쪽 집단에는 잘 익은 포도를 제공하자 오이를 받은 원숭이 무리 중에서 제 먹이를 땅바닥에 패대기치거나 우리 밖으로 내동댕이치면서 저항하는 개체가 나타났다. 상황을 바꿔 여러 방식의 실험을 해본 결과, 욕심이나 좌절 등 다른 요인이 아닌 ‘차별적 처우’에 대한 불만이 이 같은 행동을 야기한다는 것을 최종적으로 검증했다. 연구팀은 평등의식이나 정의감이 ‘학습’ 이전에 인류 진화 과정에서 발달한 ‘본능’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애정에 입각한 경제원리
먹이를 공유하는 등 협동적인 종(種)들은 불평등을 혐오하도록 진화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얘긴데, 이는 그런 정의로운 개체들의 평등을 구현하는 행위가 공동체 전체 구성원에게 유익한 결과를 가져다주기 때문이리라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른바 ‘최후통첩 게임(Ultimatum Game)’ 등을 통해서도 우리는 비슷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인간에게 불평등을 거부하고 서로 협동하는 이타적 본성의 유전인자가 있을 가능성이 있고, 경제적 인간형(Homo Economicus)에 대비되는 호혜적 인간형(Homo Reciprocan)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주류 경제학 교과서의 ‘자유 경쟁’ 원칙이 항상 맞는 것은 아니다.
 
경제학 분야의 이러한 고민을 누구보다 앞장서 개진한 사람이 바로 ‘존 러스킨’이다.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 제 1권이 세상에 나오기 7년 전, 일찍이 존 러스킨은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책에 실린 네 편의 논문을 통해 ‘애정’에 입각한 경제 원리를 주장했다. 애덤 스미스 이후 맬서스와 리카도를 거쳐 존 스튜어트 밀에 이르는 정통 자본주의 경제학에 대한 준열한 도전이라는 점에서 마르크스와 러스킨은 공통점을 갖는다. 그러나 러스킨은 시종일관 인간의 영성과 사회적 애정에 입각해 있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와 구별된다.
 
러스킨이 보기에 근대 경제학은 “인간이 뼈대만으로 구성돼 있다 가정하고” 그 토대 위에 진보의 골격을 세우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두개골과 상박골로 기하학적 형태를 수없이 조립하고 뼈로 만들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보여준 뒤, 미립자로 이루어진 이들 구조물 사이에 영혼이 다시 나타나면 얼마나 불편한지를 성공적으로 입증해 보이는 것”에 불과하다. “집 안에 빵이 한 조각밖에 없다고 해서 가족들 간에 ‘적대관계’가 형성되거나, 힘이 제일 센 어머니가 빵을 차지하는 결과가 생기지 않는 것처럼” 인간의 사회적 관계에 대해 눈앞에서 벌어지는 “득실의 균형에서 행동의 법칙을 연역하려는 노력”들은 한낱 헛수고가 돼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필연적 불평등?
러스킨이 이 책에서 시종일관 관철하려는 것은 일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끊임없는 애정이다. 이 책의 제목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는 신약성경의 천국을 비유하는 설명에서 따온 것으로 현재 우리 사회 비정규직 노동자의 또 다른 이름이다. 인력시장에서 일거리를 구하다가 가장 마지막에 포도밭에 일하러 온 일꾼에게도 다른 일꾼과 같은 품삯을 지급하는 것이 바로 천국의 경제 질서라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이 있을 수 없다. ‘나중에 온 사람’도 동등하게 대우받는 ‘조화로운 불평등’의 사회가 훨씬 더 큰 사회적 부를 생산하게 된다는 것이 러스킨의 주장이다.
 
“빈자는 부자의 재산을 침해할 권리가 없다는 것은 오래전부터 주지되고 공언되어왔지만, 동시에 부자 역시 빈자의 재산을 침해할 권리가 없다는 사실도 주지되고 공언되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것이나 “북쪽이라는 말이 반드시 남쪽이라는 반대말을 연상시키는 것처럼 ‘부유’라는 말도 반드시 그 반대말인 ‘빈곤’을 연상시키는 상대어라는 사실”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경고 역시 ‘인간적인 얼굴을 한 경제학’의 한 단면이다.
 
자신의 그러한 생각이 극단적인 평등주의라는 비난에 대해서 러스킨은 “대령도 병졸과 같은 봉급을 받아야 한다고는 말하지 않았고,…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 일을 적게 하는 사람과 같은 보수를 받아야 한다고도 말하지 않았다.… 다만 사람을 고용하여 부리는 이상 일이 서툴러도 일을 잘하는 사람보다 적은 보수를 주면 안 된다고 말했을 뿐이다”라고 반박한다. “경제학에 널리 퍼져 있는 오류의 대부분은 이런 불평등이 필연적으로 유리할 수밖에 없다는 경솔하고도 불합리한 억측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러스킨이 150년 전에 한 주장이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있는 현재 우리 사회의 현실에 놀랍도록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 감탄스럽다.
 
따지고 보면, 힘 있고 돈 많은 사람들을 편드는 지식인들의 주장은 어느 시대에나 있어왔다.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에도 “도구에는 말하는 도구와 말 못하는 도구가 있다. 노예는 말하는 도구이다. 따라서 병든 노예를 버리는 것은 고장 난 호미를 버리는 것과 같다”는 철학자들의 명쾌한 삼단논법이 귀족들로 하여금 병든 노예를 유황광산 밖에 내다버리면서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게 하는 데 기여했다. “노예도 같은 인간이다”라는 주장을 편 철학자들은 감옥에 갇히는 수모를 겪었다. 하지만 결국 노예제도는 철폐될 수밖에 없었으니 인류 사회의 변화를 긴 호흡으로 바라보면 인간의 얼굴을 한 주장의 타당성을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러스킨의 말을 감히 흉내 내자면 ‘인간의 얼굴을 한 경제학’이 타당한 것은 ‘정직’이 언제나 옳은 덕목인 것이나 마찬가지다.
 
호혜적 노사관계
19세기 후반 영국 사회에서 러스킨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영혼을 가진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노동당 국회의원들은 그들의 생애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책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거의 모든 의원이 ‘러스킨의 책’이라고 답했다. 변호사로 일하던 마하트마 간디는 열차 안에서 이 책을 읽고 인생의 방향을 바꾸었다. 오래전, 백남준의 작품 ‘첼로’가 실제로 한구석에 전시돼 있는 여의도의 찻집 ‘첼로’를 찾은 사람들은 주인의 높은 안목 덕분에 르 코르뷔지에의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자신의 어린 시절을 “물질주의 속에서 익사하는 시대”라고 참혹하게 표현한 르 코르뷔지에 역시 “우리의 어린 시절은 러스킨에 의해 훈육되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더욱이 필자에게 이 책이 특별한 것은,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인도주의적 경향의 예술평론에 일가를 이룬 러스킨이 노동교육을 통해 노동자들을 만나면서 경제적 구조와 그 운용의 병폐에 통감하기 시작했다는 점 때문이다. 노동자들에게 리카도의 글을 읽어주다가 한 여성 노동자가 그에게 질문을 던지는 장면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필자는 27년쯤 전의 필자 자신의 모습이 생각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인간이 자신의 최대 유익을 위해서만 행동한다면, 기업은 노동자에게 최소한의 임금을 주고 최대한 노동을 시키려고 할 것이고, 노동자는 최소한의 노동만 제공하면서 최대한 임금을 받으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기업이 노동자에게 높은 임금을 보장하고, 노동자는 더 많이 노력해 답하는 선물교환(Gift Exchange) 방식, 곧 ‘인간의 얼굴을 한’ 호혜적 노사관계가 모두에게 유익하다는 현대 경영학의 귀중한 깨달음 역시 그 뿌리를 러스킨에서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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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을 여는 책]러스킨의 인도주의 경제학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내일, 박순철 칼럼니스트, 2009-12-18 오후 12:18:19)
‘불평등 기술’ 가르치는 자본주의 통타
사람 중심으로 부(富) 개념 새롭게 정립 … 양극화 사회 되볼아보게 해
존 러스킨 지음/ 김석희 옮김/ 열린책들/ 1만2천원

 
이 책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읽기를 포기했다. 20년쯤 전의 일이다. 분배론을 전공한 어느 선배의 연구실을 찾았을 때 그는 얄팍한 책 한 권을 내밀었다. ‘Unto This Last''''-우선 그 책 제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옮긴이는 이를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로 번역했다. 좋은 번역 같다. 이 고풍스런 제목은 이 책이 제사(題詞)로 삼은 성경 구절에서 인용한 것이다. 포도밭 주인이 일할 사람들을 고용하면서 오후 늦게 부른 일꾼에게도 아침 일찍부터 일한 일꾼과 똑 같은 임금을 지불한 이야기다. 주인은 불평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한다.
“친구여, 나는 너를 부당하게 대한 것이 아니다. 너는 나와 1 데나리우스로 합의하지 않았느냐. 너의 품삯이나 받아 가지고 돌아가라.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너에게 준 것과 똑같이 주는 게 내 뜻이다.”
 
이런 계산법은 2천 년 전 이스라엘 땅에서도 천국의 우의(寓意)라는 문맥 속에서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국부(國富)의 명분 아래 개인의 무한한 탐욕을 정당화한 19세기 영국 지식층의 반감은 당연했다. 잡지에 연재된 러스킨의 글에 대해 비난이 쏟아졌다. 네 편의 논문이 한 권의 책으로 엮어졌을 때 그 초판은 10년 동안 겨우 880 권이 팔렸다.
 
하지만 러스킨은 영혼이 있는 인간을 못 박았던 자본주의 경제학의 밑그림에 지울 수 없는 의문부호를 던졌다. ‘마지막 사람’의 관념은 같은 빅토리아 시대의 작가 디킨즈가 크리스마스 정신과 대조시켰던 수전노, 스크루지를 닮은 ‘호모 에코노미쿠스’(경제인)의 통념에 도전한 강렬한 상징이었다.
그러면 그건 상징에 불과한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임금을 고정시켜야 한다는 것은 러스킨의 중요한 주장 가운데 하나다. 그가 수요와 공급이 임금을 결정하는 걸 당연시하지 않았다는 건 중요한 쟁점이다. 다만 그것은 부(富)의 정의를 중심으로 하는, 자본주의 전체에 관한 그의 폭넓은 관점에서 살펴볼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 ‘사람’을 보았다.
 
여기에서 잠시 경제학은 가정(假定)의 학문이라는 걸 상기할 필요가 있다. 유명한 농담 가운데 이런 게 있다. 무인도에 표류한 배고픈 사람들이 음식이 든 깡통을 찾았는데 따개가 없었다. 그 가운데 경제학자가 말했다. “자, 깡통따개가 있다고 가정합시다.” 경제학의 본질을 짚어낸 통렬한 풍자다.
경제학의 화려한 건물은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편리한 가정 위에 서있다. 러스킨은 묻는다. 만일 체조학에서 뼈대 없는 사람을 가정해서 사람을 둘둘 뭉쳐 환약처럼 만들거나 케이크처럼 납작하게 누르거나 밧줄처럼 길게 잡아 늘이면 몸에 좋을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그 걸 실제적으로 적용할 수 있겠는가? 그에겐 인간의 영혼을 부정하는 가정 위에 전개된 경제학의 이론도 다를 바 없었다.
 
특히 생산자를 대표하는 상인은 이익의 인간일 따름이고 명예나 도덕의 인간은 아니라는 전제에 대해 러스킨은 강력히 반발한다. 그는 설교단만이 아니라 시장에서도 순교가 있을 수 있고, 전쟁만이 아니라 장사에도 영웅적인 행위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군인이나 의사, 목사나 법률가에게는 엄격한 도덕의 잣대를 들이대면서 모든 사람의 일상생활에 누구보다 큰 영향을 미치는 상인에 대해서는 인간의 온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베니스 상인’ 같은 역할을 맡기고 만족한다는 건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러스킨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말한 이야기들은 모두 이상하게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이 문제에서 정말로 이상한 단 한 가지 점은 이 이야기들이 이상하게 들려야 한다는 사실 그 자체다.”
 
톨스토이는 “러스킨은 가슴으로 생각하는 희귀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고 평가했다. 그는 시대의 밖에 서서 마취된 시대의 쾌락과 고통을 보았다. 이렇게 해서 가슴으로 생각하는 희귀한 책이 태어났다.
 
이 책에는 한 마디로 선지자의 통찰이 있다. 경제학은 근본적으로 물질이 아닌 인간의 학문이라는 깊은 울림이 있다. 이 책의 핵심은 러스킨 자신이 밝히듯 부에 대한 정의지만 그것은 인간의 행복에 관한 전인적인 이해에 근거한 것이다. 부는 단순한 물질이 아니다. 러스킨이 주목한 것은 타인에 대한 부의 지배력이었다. 그런데 부가 지배력으로 작용하려면 누군가 자기를 위해 일해 줄 가난한 사람이 필요하다. 경제학이 가르치는 부자 되는 기술은 “자신만을 유리하게 하기 위해 최대한의 불평등을 확립하는 기술”인 것이다. 행복학이 아닌 불행학의 씨앗이 내재한다.
 
부의 본질이 타인을 움직일 수 있는 힘에 있다면 소유한 부의 영향권 안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그리고 그들이 고귀한 사람일수록, 부가 커진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니까 사람이야말로 ‘부의 광맥’이다. “모든 부의 최종적인 성과와 완성은 원기왕성하고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행복한 인간을 되도록 많이 생산하는 데 있을 것이다.”
 
러스킨은 자본주의 경제학을 속류 경제학으로, 사회주의 경제학을 파괴의 경제학으로 비판했다. 옮긴이는 이렇게 말한다. “요컨대 경제학의 천하를 삼분하여 그 하나를 차지한 촉나라 같은 느낌을 띠는 것이 러스킨의 인도주의적 경제학일 것이다.” 이 얇은 책의 역사적 의미는 그만큼 무겁다. 많은 화가들의 영감을 자극했던 성경의 한 장면을 상기시키며 이 글을 끝내고 싶다.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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