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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린 크라우치, 『왜 신자유주의는 죽지 않는가』서평기사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30215155739
수명 다 한 신자유주의, 호흡기 누가 줬어? (프레시안, 박수형 동덕여자대학교 강사, 2013-02-15 오후 6:20:23)
[프레시안 books] 콜린 크라우치의 <왜 신자유주의는 죽지 않는가>
순리에 맞지 않는 신자유주의

세상엔 언뜻 보기에 순리에 맞지 않는 일들이 꽤나 많다. 사랑한다고 평생을 함께 하겠다며 결혼한 남녀가 툭하면 부부 싸움을 벌이는 일도 그렇고, 가창력도 외모도 그저 그래 보이는 가수가 월드 스타로 각광 받는 일도 그렇고, 현임 대통령에 대한 불신이 어느 때보다 높은 선거에서 야당 후보가 패배한 일도 그렇다. 그리고 영국 출신의 저명한 사회학자 콜린 크라우치에겐 경제 위기 후에도 꿋꿋이 살아남아 있는 신자유주의가 그런 경우이다.
2008년 미국 발 금융 위기와 잇따른 유럽 재정 위기는 신자유주의 경제 모델의 총아인 규제받지 않는 금융 시장이 한 나라는 물론 전 세계에 걸쳐 얼마나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오는지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위기를 야기한 금융 기업과 관련 당사자들에게 책임을 묻고 그런 활동을 뒷받침한 경제 이론에 수정을 가하는 게 순리에 맞는 일이다. 하지만 월스트리트의 적지 않은 거대 금융 회사들은 시장 원리에 따른 파산이 아닌 정부 구제 금융으로 살아남았고, 그들 회사의 직원들은 위기 이전 수준에 버금가는 수익을 챙기며, 신자유주의는 경제를 이해하고 운용하는 지배적 관념의 지위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콜린 크라우치의 책 <왜 신자유주의는 죽지 않는가>(유강은 옮김, 책읽는수요일 펴냄)은 바로 이 문제, '신자유주의의 이상한 죽지 않음'을 다룬다.
신자유주의 해부 1 : 시장 실패
신자유주의는 다른 무엇보다 정부 규제로부터 자유로운 시장의 가치를 강조한다. 개인들이 물질적 이익을 극대화하는 자유 시장은 인간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최선의 수단이며, 그런 시장은 좋게 봐줘야 비효율적일 뿐이고 최악의 경우 자유를 위협하는 국가와 정치보다 더 선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척이나 단순하고 쉬운 개념이지만, 이러한 경제 원칙의 문제와 한계를 지적하면서 동시에 왜 그것이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지 설명하는 것은 전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크라우치는 이 과제를 두텁지 않은 분량의 책에서 효과적으로 그것도 독자가 쉽게 이해하는 방식으로 해결하고 있다.
책의 1장 '자유주의를 배반한 신자유주의'는 먼저 신자유주의가 어떤 기원에서 출발해 어떻게 발전했는지 조명한다. 여기에선 누구나 한번쯤 궁금했을 법한 질문들,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는 어떻게 다른지, 전후 자본주의 황금기의 지배적 경제 원칙이었던 케인스주의가 어떤 까닭으로 신자유주의에 자리를 내주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밀턴 프리드먼으로 대표되는 시카고학파 경제학자들은 어떤 역할을 담당했는지에 대한 답이 나와 있다.
2장 '순수 시장이라는 불가능한 꿈'은 신자유주의가 신성시하는 자유 시장의 특징과 한계를 설명한다. 신자유주의자들은 흔히 국가 공공서비스는 무능하고 교만한 데 반해, 자유 시장은 소비자 선호에 민감하고 경제적 자원도 효율적으로 배분한다고 말한다. 크라우치가 보기에도 그런 주장이 전혀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장이 그와 같은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는데, 그럴 수 없는 '시장 실패'의 경우 정부의 시장 관여는 불가피할 뿐만 아니라 정당한 일이 된다. 아래 표는 크라우치가 지적한 순수 시장을 위한 요건과 관련된 시장 실패를 요약한 것이다.

신자유주의 해부 2 : 국가·시장·거대 기업의 안락한 동거
이렇듯 시장 실패 영역이 광범하고 정부 관여가 불가피하다면, 시장 만능의 신자유주의는 진즉에 힘을 잃고 다른 대안이 모색되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그런 일은 여전히 나타나지 않고 있다. 왜 그럴까? 3장 '시장을 집어삼킨 거대 기업'과 4장 '공기업 민영화의 불편한 진실'은 그 답이 '거대 기업'에 있음을 보여준다. 어떤 이념이든 그것이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려면 그로부터 혜택을 받는 주요 사회 집단의 지지가 필수적이다. 지난 세기 중반의 케인스주의가 중산층과 노동계급의 지지를 바탕에 둔 경제 이념이었다면, 신자유주의의 핵심 지지 집단이자 수혜자는 거대 기업이다.
경제 문제에 관한 논쟁은 흔히 국가와 시장 간의 대립적 관점에서 전개되곤 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시장과 국가 뒤에는 거대 기업이 숨어 있고, 그들은 자신의 시장 지배적 지위와 국가와의 긴밀한 관계를 통해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자유 경쟁 시장의 규칙을 깨뜨리거나 진입 장벽과 같은 시장 실패의 사례를 활용한다. 공공부문에 시장 경쟁의 활력을 불어넣는다는 민영화·시장화 사업도 실상은 거대 기업에 안전한 수익을 보장해주는 수단 이상이 아니었다.
크라우치의 신자유주의 해부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5장 '사유화된 케인스주의'에 있다. 거대 기업이 중소기업의 시장 진입을 막고 하청업체의 이윤 마진을 줄이고 노동자의 임금을 깎으며 전체 사회의 부를 독점해가는 것은 분명 그들에게 엄청난 이익이다. 그런데 이 과정이 심화되면 그들 거대 기업에게도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그들에게 집중된 부로 인해 자신들의 상품과 서비스를 구매할 사회적 수요가 크게 줄어드는 것이 바론 그런 문제이다. 이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까? 과거 케인스주의에서 수요 부족 문제는 정부 재정으로 해결하곤 했다. 그러나 정부 관여를 경계하는 신자유주의에서 부동산 담보나 신용 카드를 통해 크게 불어난 소비자 채무가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자유주의적 대안의 사려 깊음
6장과 7장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넘어 대안의 문제를 다룬 장들이다. 6장 '기업의 정치세력화와 새로운 가능성'은 거대 기업이 그들의 막강한 정치경제적 영향력으로 인해 사회적 관심과 비판의 초점이 되는 역설적 상황을 상정한다. 그것이 수반한 결과 가운데 하나가 우리가 익히 들어온 '기업의 사회적 책임' 개념이다. 크라우치도 인정하듯 거대 기업은 이 개념을 활용해 자신의 비위(非違)를 호도하거나 일종의 기업 홍보 전략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세계적인 차원에서 활동하는 글로벌 거대 기업에 대해 한 나라 정부가 규제를 가하기는 어렵고 때때로 그런 기업조차도 소비자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 개념은 비록 드물고 제한적이라도 시민 사회 운동이 거대 기업의 비민주적 행태를 견제하는 데 긍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고 말한다.
7장 '시민 사회에서 찾는 돌파구'는 제목이 시사하듯 저자의 대안이 다른 어떤 영역보다 시민 사회에 있음을 보여준다. 크라우치는 거대 기업의 전횡을 누구보다 날카롭게 비판하지만 시장에도 긍정적 역할이 있음을 인정한다. 다른 한편 그는 여태껏 거대 기업과 공모해왔던 국가 관료와 대표가 어느 순간 일변해 시장에 대한 민주적 규제를 가할 수 있다고 확신하지 못한다. 그래서 신자유주의와 거대 기업의 영향력은 앞으로도 상당 기간 유지될지 모른다는 우울한 전망을 피력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런 경제 체제가 불합리하고 부당하다는 인식이 발전한다면, 시민 사회는 거대 기업 중심의 신자유주의를 견제하는 중요한 원천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크라우치에게 시민 사회는 다양성과 차이·긴장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고 비폭력적으로 행동하며 공적 갈등과 담론, 이해와 타협을 지향하는 공간이다. 따라서 이곳에서는 시장·국가·기업에 대한 가치 지향적 비판이 수행될 수 있다. 국가와 기업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시민 사회를 통한 활발한 논쟁의 장은 여전히 열려 있다. 공동의 가치에 대한 정당한 해석을 독점하려는 국가의 주장에 맞서, 사회의 여러 가치를 주주 이익 극대화로 전환하는 것이야말로 최선의 삶이라는 기업의 주장에 맞서, 시민 사회는 그들의 지배에 도전하고 공적 목표를 탐구하며 그와 관련된 기획을 현실화할 수 있다는 뜻이다.
크라우치는 이런 역할을 기대해 볼만한 시민 사회 행위자로 특히 다섯 개 집단에 주목한다. 첫 번째는 주변적 지위에 있는 정당이다. 정당은 국가를 더 넓은 사회와 연결해주며 갖가지 대의와 쟁점이 정부로 진입토록 하는 통로 역할을 담당한다. 따라서 시민 사회에서도 정당은 매우 중요한 존재이며, 기업 권력에 대항하려는 어떤 시도든 정당을 주요한 조직 수단으로 삼아야 한다. 두 번째는 국가와 경제로부터 자율적인 종교 집단이다. 종교 단체는 가치의 장에서 예전의 권위를 많이 상실했지만, 여전히 경제적 동기와 결부된 정치와 경제의 우선성에 이의를 제기하고 권위를 갖고 윤리적 문제를 말할 수 있는 집단이다.
세 번째와 네 번째 집단은 운동 단체와 자선 단체이다. 이들 두 단체는 종종 겹쳐지기도 하지만 전자는 흔히 논쟁과 갈등에 호소하는 방식으로 정부와 기업에 문제의 시정을 촉구하는데 반해 후자는 문제 해결을 위해 국가나 기업과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들의 자원을 직접 제공한다는 차이를 갖는다. 마지막 집단은 전문직 단체이다. 여기서 전문직은 직업 활동의 방법에 대해 자율적으로 획득한 일단의 가치를 발전시킨 직업 집단을 의미한다. 물론 전문직의 노동은 직무를 위한 것이고, 그 종사자는 그런 일을 통해 수입을 얻는다. 그러나 전문직 노동은 사회적 가치에 뿌리를 두고 있기에, 때로는 국가와 기업의 지배 논리에 대항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한국 사회를 위한 함의
<왜 신자유주의는 죽지 않는가>에 담긴 분석과 대안은 한국 사회에도 많은 함의를 던져준다. 무엇보다 반가운 일은 이 책이 그간 한국의 중요한 정치경제 현상들에 대해 가졌던 의문을 해소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자유로운 시장 경쟁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 하에서도 재벌 대기업은 어떻게 과거보다 더 큰 시장 지배력을 갖게 되었는지, 김대중 정부와 현대 그룹, 노무현 정부와 삼성 그룹 간의 긴밀한 관계는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이명박 정부 하에서 강력하게 추진된 고환율 정책이 누구에게 가장 큰 이득을 주었는지, 지난 정부들이 적극적으로 실천했던 공기업 민영화 사업, 외자·민자 유치 사업의 실질적 수혜자는 누구인지, 국제통화기금(IMF) 외환 위기 이후 주기적으로 나타났던 신용카드 위기와 부동산 가격 폭등, 그리고 오늘날 1000조에 달하는 가계 부채의 근원(根源)은 어디에 있는지. 이 책은 이런 많은 중요한 문제들을 보편적인 논리로 설명할 수 있는 이론적 토대를 제공해준다.
물론 일부 독자에겐 신자유주의과 거대 기업 간의 관계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에 비해 시민 사회의 역할을 강조하는 크라우치의 대안이 미적지근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대안 부분에서 신자유주의 하에서 가장 큰 고통을 받으며 경제적 이해관계에서 거대 기업에 적극적으로 맞설 수 있는 노동자나 중소기업 집단의 정치적 잠재력을 경시하고, 정당의 역할을 강조하면서도 정당 간 경쟁이 중심을 이루는 선거를 통한 사회적 힘이 정부 정책에 영향을 미치고 그럼으로써 거대 기업의 불합리하고 부당한 경제 행태를 규제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못내 아쉽다.
그러나 크라우치가 신자유주의에 대항할 수 있는 시민 사회의 마지막 집단으로 전문직과 그들의 '직업 윤리'를 강조한 대목에서 그 전문직에 대학 교수로 대표되는 지식인·전문가 집단을 포함시켜본다면 그런 아쉬움을 달래기는 쉬운 일로 생각된다.
사실 이 책의 주장은 매우 반갑기도 했지만, 그런 만큼 우리 학문 공동체의 역량 부족에 대한 부끄러움도 컸다. 다른 어떤 나라보다 급진적이고 광범위한 신자유주의 경제 개혁을 단행해왔고 그 속에서 재벌 대기업의 영향력은 어느 때보다 커졌으며 점점 더 많은 노동자, 서민, 중소기업, 영세 상인들이 피해를 보고 있는 상황을 목도해왔음에도, 우리 연구자들은 이 문제를 체계적이고 심도 깊게 다루지 못했다.
물론 관련 연구가 전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신자유주의 세계화나 사회 복지 문제에 대한 진단과 해법은 차고 넘쳤다. 그러나 그들 대다수 연구는 각자의 연구 영역에서 나름의 가치 기준으로 문제를 정의하고 대안을 구성하는 데만 급급할 뿐, 실제 사회의 여러 이익 갈등과 권력 관계의 동학이 어떻게 기대와 다른 결과를 만들어내는지에 대한 본격적 연구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리고 그런 과제를 감당할만한 역량을 갖춘 뛰어난 연구자들이 대거 대통령 후보 캠프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면서 한 미국 정치학자의 말이 떠올랐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가 연구하는 것'이 되었나?
미국 정치학회장을 지냈던 시어도어 로위는 그의 학회장 취임 연설에서 "우리는 어떻게 우리가 연구하는 것이 되었나?"라는 질문을 던졌다. 국가 권력을 둘러싼 여러 문제를 연구해야 할 정치학자들이 국가 권력을 행사하는 데 용이한 연구 주제, 연구 방법인 공공 여론, 공공 선택, 공공 정책에 점점 더 몰두해가고 있다는 비판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지난 대선에서 예전과 달리 경제 민주화나 복지국가 건설이 주요 이슈로 다뤄진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그만큼 많은 사람들은 그런 정책과 공약이 과연 새 정부에서 얼마나 실현될 수 있을지 의심하기도 한다. 이런 의심이 타당한 이유에는 사회경제 이슈를 압도했던 박정희 대 노무현 대립 구도나 후보 단일화를 둘러싼 정치 개혁 이슈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설득력 있는 사회경제적 정책 대안을 구성하는 데 있어 지식인·전문가 집단의 책임 방기도 무시할 수 없다.
유권자 다수가 신뢰할 만한 공약과 정책이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그저 말뿐인 가치 원칙이나 통계수치 상의 재정 여력을 넘어서는 문제의 현실에 대한 인과적 분석이 필요하다. 물론 여기에 정답이 있을 순 없겠지만, 적어도 우리는 왜 어떻게 재벌 대기업이 그토록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는지, 왜 노동자나 중소기업 집단은 그런 영향력을 상쇄할 만한 수의 힘을 조직하는 못했는지, 왜 이른바 '민주정부'들은 그렇게 쉽게 신자유주의 정책에 경도됐는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그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누구에 의해 어떻게 결정되었는지에 대한 사실 정보와 인과 분석이 어느 정도는 이뤄져야 했다.
그렇지 못한 조건에서 일상에 바쁜 유권자 시민을 과거에 대한 향수나 비위 사건의 폭로가 아닌 설득력 있는 정책 대안으로 끌어들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그런 역할을 담당했어야 할 많은 사람들은 규격화되고 정형화된 정책 대안을 제시하는데 머무르거나 기껏해야 일시적인 유권자 분위기와 지역, 세대, 성별 구분 밖에 보여주지 못하는 여론 조사를 분석하고 해석하고 또 분석하고 해석하는 데만 열중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지난 대선은 얼마나 민주적이었나?
지식인·전문가들이 자신들의 직업윤리를 고수하며 주어진 사회적 역할에 충실히 하지 못한 문제는 선거 과정뿐 아니라 선거 결과를 평가하는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대선이 끝난 지 두 달이 가까워옴에도 우리 주변에는 왜 야당 후보가 패배했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그래서 그 결과를 수용하기도 어려워하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도 지식인·전문가들은 여러 가지 해답을 제시하곤 한다. 진영 대립의 문제, 야당의 지나친 급진화, 친노 패권주의, 50대 보수화, 정당의 문제 등이 그것이다. 수긍할 수 있는 주장도 있고 그렇지 못한 주장도 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들 해석 모두가 하나같이 "왜 야당이 패배했는가"라는 질문에만 초점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경제 민주화와 사회 복지 확대가 우리 사회의 과제라는 데 수긍하고 크라우치의 신자유주의 분석에 동의한다면, 우리가 함께 고민해봐야 할 문제 가운데 하나는 "지난 대선은 과연 얼마나 민주적이었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민주주의의 핵심이 선거인데 거기에 다시 민주주의의 기준을 갖다 대는 일이 생뚱맞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선거라고 해서 다 같은 선거가 아니며, 민주주의에서 좋은 선거란 다른 무엇보다 사회의 다양한 이익과 요구가 광범위하게 표출되는 경우를 의미한다. 이 기준에서 지난 대선은 얼마나 민주적이었나?
민주주의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절차적 민주주의와 실질적 민주주의를 구분하며, 이제 우리 사회는 후자의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곤 한다. 하지만 보다 더 민주적인 선거에서 재벌 대기업과 중소기업 집단 간의 상충하는 이해관계, 고용주와 노동자의 상충하는 이해관계, 대형마트와 영세상인 간의 상충하는 이해관계가 충분히 표출되고 그들의 요구가 아래로부터 모아지며 그러한 조직적 활동의 힘이 한껏 드러나지 않는다면, 누가 당선되든 신뢰할 만한 정부 정책으로 경제 민주화나 사회 복지 확대를 이루기는 어렵다. 파당적 이해관계에 묶일 수밖에 없는 정치인은 그렇다 하더라도 지식인·전문가들이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다뤄주지 못한 것은 크게 안타까운 일이다.
책의 저자와 번역자가 인정하듯 <왜 신자유주의는 죽지 않는가>는 독자가 가능한 한 쉽게 읽을 수 있도록 구성된 대중용 교양서이다. 그래서 우리 삶이 왜 점점 더 팍팍해져 가는지 답답한 사람들, 왜 지난 선거는 결과뿐 아니라 과정에서도 실망스러웠는지 궁금한 사람들, 그리고 그 선거에서 참여하고 앞으로 참여할 지식인·전문가들이 이 책을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해서 책이 많이 팔린다면 재판에서는 더 많은 역자 해설주를 담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책을 다시 한 번 읽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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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heraldcorp.com/view.php?ud=20121130000194&md=20121203003541_AN
신자유주의 끈질긴 생명력, 그 비결은… (헤럴드경제, 이윤미 기자, 2012-11-30 09:47)
글로벌 위기 원흉 지목 불구 경제의 정치권력화 더 심화
국가-시장-기업간 안락한 조정
정부의 역할 기업에 양도, 공기업 민영화 등 독점화 초래
사적인 것 넘어 공공가치 추구
제4의 세력 작은 시민사회 통해 시장-국가 대립 돌파구 찾아야

2008년 글로벌 금융 붕괴 이후 원흉처럼 지목된 신자유주의는 몰락해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저명한 사회학자 콜리 크라우치(영국 워릭대 경영대학원 거버넌스 공공관리 부문 교수)에 따르면 신자유주의는 어느 때보다도 더 정치적으로 강력해졌다. 수년째 독한 화살에도 왜 신자유주의는 이상하게 죽지 않는 걸까. 크라우치는 국가와 시장, 기업의 관계를 통해 그 이유를 찾아낸다.
결론을 먼저 말하면 3자 사이의 ‘안락한 조정’(comfortable acommodation)이다. 이는 국가와 시장의 대립으로 보는 신자유주의 논쟁이 잘못됐음을 전제한다. 즉 시장과 기업을 같이 놓고 보는 게 아니라 제3세력 즉 거대 기업이 핵심주체로 참여하는 삼각관계로 보는 것이다. 즉 신자유주의는 국가ㆍ시장ㆍ거대기업의 안락한 조정이 이루어지는 경제, 반독점법을 무너뜨린 자유주의라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저자는 이런 시각에서 신자유주의 쟁점들을 하나하나 파헤쳐 나가며 ‘순수시장과 완전 경쟁을 통한’ 자유경제라는 게 얼마나 본질과 다른지를 보여준다.
우선 신자유주의자들이 추구한다는 ‘순수시장’은 없다. 모든 가격이 비교 가능하며 모든 것이 거래된다는 순수시장 조건과 달리 현실은 가격 없는 상품이 존재하며 시장은 외부성을 다루지 못한다. 또 시장의 진입장벽 때문에 부와 권력의 불평등이 축적되고 정보접근의 불평등, 강력한 이익집단이 정치과정의 내부자가 됨으로써 경제와 정치는 더 가까워지고 있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 경제에서 오히려 시장과 완전경쟁이 왜곡되고 무력해진 이유는 뭘까. 저자는 공정한 경쟁을 위한 반독점법의 무력화를 든다. 소수의 강한 기업만 살아남는 정책이 소비자의 선택권을 줄이고 거대 기업에 권력을 주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시민사회라고 알려진 미완성의 세력 집단에 대한 답을 찾게 되었다. 시민사회의 조직들 자체가 인간이 운영하는 다른 제도에 비해 더 믿음직스럽기 때문이 아니라 시민사회는 진정한 다원주의를 창출할 수 있는 역량이 있기 때문이다.”(본문 중)
저자는 신자유주의 주요 정책 가운데 하나인 공기업 민영화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특정기업의 독점화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더욱이 공무원들이 민간 부문 인력에게서 배우도록 장려하고 민간부문 컨설턴트들이 정부의 정책에 깊이 관여함으로써 경제의 정치 권력화가 진행된다는 지적이다.
케인스주의 수요관리의 위기의 구원투수로 등판한 신자유주의가 약속한 안정적인 대량 소비도 허상이었음을 저자는 밝힌다. 경제를 촉진하기 위해 빚을 지는 정부 대신 일부 빈곤층을 포함한 개인과 가구가 빚을 떠안는 ‘사유화된 케인스주의’가 바로 신자유주의 번영과 원동력이었다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은 자신에게 생긴 비현실적인 돈을 통해 실제 상품과 서비스를 구매함으로써 이득을 얻었으며, 이런 무책임성이 공동선이 됐다는 설명이다.
저자가 걱정하는 것은 기업의 정치권력화다. 문제는 기업 스스로 진화한다기보다 정부가 스스로의 역할을 포기하고 기업에 양도함으로써 벌어지는 양상이라는 점이다. 가령 초국적 기업에 부과되는 사회적 책무가 그것. 환경 및 아동, 노동과 관련한 사회적 책임의 경우, 그 책임 수행 여부가 기업의 틈새 수요 창출에 영향을 미친다. 기업들이 실제로 필요로 하는 것은 평판이기 때문에 실제로 행동을 바꾸지 않고서도 주장과 자기광고를 활용할 수도 있다.
저자는 이미 전작 ‘포스트 민주주의’에서 민주주의를 빈 껍데기로 몰아가는 요소 중 하나로 글로벌 기업의 권력을 지적한 바 있다.
그렇다고 저자가 주장하는 것이 거대 기업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저자의 입장은 안락한 3각관계의 비리를 폭로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제4의 세력, 즉 작은 시민사회를 통한 4자 구도다. 이는 피할 수 없는 시장과 국가의 대립의 돌파구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즉 신자유주의적 우파가 시장을 가리킬 때 실제로는 기업을 가리키는 오류와 좌파가 시장과 기업에 대한 대항력의 원천으로 본 국가가 정당의 이데올로기적 기원과 상관없이 거대기업의 헌신적 동맹자 노릇을 하고 있는 허점을 넘어설 수 있기 때문이다. 사적인 것을 넘어 공공의 가치를 추구할 가능성을 시민사회에서 찾은 것이다. 저자는 시민사회 조직들이 서로 다르고 때로는 대립하는 도덕적 의제를 추구하지만 그래도 도덕적 목표를 지닌 채 행동한다고 본다.
“어떤 종교나 신념 체계도 패권을 갖지 못하는, 경쟁하는 가치들의 복수성을 내포하는 사회에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라는 게 크라우치의 단언이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11301942495&code=900308
[책과 삶]기업 지배에 종속된 국가·정치…그래서 신자유주의는 죽지 않는다 (경향, 김종목 기자, 2012-11-30 19:42:49)
▲왜 신자유주의는 죽지 않는가 | 콜린 크라우치 지음·유강은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88쪽 | 1만5000원
2008~2009년 미국발 금융위기는 시장의 한계와 신자유주의의 결함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신자유주의는 정부가 아니라 개인과 가구가 경제성장의 짐을 떠안고 빚(주택담보 및 신용 대출)으로 금융자본을 먹여 살리는 ‘사유화된 케인스주의’로 번영을 이루다 파탄 지경에 빠졌다. 신자유주의 정책은 성장과 번영을 약속했지만 이행하지 못했다. 신자유주의 정책을 폐기하거나 수정하는 쪽으로 가는 게 마땅했다. 하지만 여러 국가의 정부는 복지·공공지출을 줄여 위기를 벗어나려 했다. 금융위기를 불러온 거대 은행들은 망할 법도 했지만 살아남았다. 정부는 은행이 망하면 경제 전체가 무너진다며 막대한 돈을 달라는 은행의 요구를 들어줬다. 공무원들은 수천명이 해고됐지만, 은행원들의 보너스는 금융위기 이전 수준으로 회복 중이다.
영국의 진보적 사회학자 콜린 크라우치는 “(금융위기에도) 시장의 한계나 신자유주의의 결함은 잘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 오히려 “금융위기가 거대 기업, 특히 거대 금융기업들이 현대사회에서 하는 역할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계기가 되기는커녕, 그들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만 기여했다”고 밝힌다.
책은 ‘이상하게 죽지도 않고 되레 살아난 신자유주의’에 관한 이야기다. 크라우치는 신자유주의 기원과 정책·이념의 확장 과정을 분석한다. 이 문제를 더 짚기 위해 과거로 돌아가 고전적 자유주의가 표방한 경제와 신자유주의의 그것을 대비한다. 크라우치의 분석은 이렇다. “국가 개입을 최소로 한 채 시장이 지배하는 경제에 관한 자유주의의 원래 전망은 사멸한 듯 보였다.” 사람들은 신자유주의 정책과 이념이 자유주의가 역설했던 순수 시장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착각한다.
금융위기 때 정치나 국가의 개입을 배제하는 순수 시장의 법칙이 작동했다면, 은행들은 시장에서 퇴장당했을 것이다. 진입 장벽도 엄연히 존재한다. 대형 항공기 제조업은 보잉과 에어버스가 독점하고, 컴퓨터 소프트웨어 시스템은 마이크로소프트가 지배한다. 이럴 경우 “경제 이론의 수학적 모델에서 가정하는 과정으로 가격과 상품의 질을 정할 수 없”다. 시장 참여자들이 ‘완전한 정보’를 얻는다는 것도 허구다. 크라우치는 “핵심적인 문제는 시장경제에서는 대부분의 정보 자체에 가격이 붙는다는 점”이라고 말한다. 부유할수록 더 많은 정보를 얻기 쉽고, 효율적인 경쟁을 내려 더 부유해질 공산이 크다. 이런 불평등은 금융 시장에서 더 심하다. 거대 기업이나 부유층이 말하는 시장과 자유는 진입·퇴장 장벽이 없는 순수 시장이 아니라 도전받지 않는 재산권, 낮은 수준의 규제, 낮은 세금에 관한 것이다.
크라우치는 전작 <포스트 민주주의>(2004)에서 선거 같은 민주주의 제도를 유지하는데도 소수 특권층의 권력이 강화되는 문제를 짚었다. 속편 격의 이 책에서도 민주주의 문제를 파고든다. 특히 “민주주의를 텅 빈 껍데기로 몰아가는 여러 요소들 중 하나로 글로벌 기업의 권력을” 부각시킨다. 그는 고전적 자유주의와 사회민주주의가 본 ‘국가와 시장의 대립’이라는 구도로는 지금 신자유주의 문제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고 본다. 신자유주의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제3세력’인 거대 기업에 주목해야 한다. 오늘날 글로벌 기업은 정부의 많은 부분을 장악하고 있다. 게다가 거대 기업은 시장과 국가의 작동을 변형시킬 정도로 힘이 세다.
다음 사례는 ‘왜 신자유주의는 죽지 않는가?’의 하나의 답이 될 것 같다. 2010년 금융 유통 시장에서 과거의 관행은 되살아났다. 기업 로비스트들은 미국 상원에서 작업에 착수하면서 금융 부문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려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법안을 크게 약화시켰다. 기업이 단순히 로비스트 덕분에 죽지 않은 것만은 아니다. 기업은 스스로 표준을 정하고 사적인 규제 체제를 확립하는 정치적 주체로 부상했다.
국가와 정치는 기업 지배에 종속된 양상을 보인다. 크라우치는 시장 모델이 요구하는 경제와 정치의 분리가 실제로 존재하는 경우가 드물다고 지적한다. 그는 선거운동 자금의 문제를 사례로 든다. 기업의 정치 개입은 전통적 의미의 ‘자유시장’에 대한 중대한 위협인데도, 특히 미국인들은 ‘일상적인 일’로 당연시한다. “정치권력과 경제적 부는 서로 교환 가능한 통화”가 되었다. 부의 불평등은 권력의 불평등으로 이어진다. 크라우치는 “거대 기업의 성장에 조력함으로써 사적 경제권력과 국가권력의 강력한 결합에 공모”하면서 신자유주의를 지탱시켜온 주축인 ‘시카고 학파’의 문제도 여러 곳에서 비판한다.
책은 독점적인 공익 사업을 정치 연줄이 있는 사적 소유주들에게 넘겨준 것에 불과한 공기업 민영화 과정, 수요 관리가 사실상 사유화되면서 일어난 금융위기, ‘기업의 사회적 책임’ 문제를 두루 짚고 있다.
크라우치는 “신자유주의가 이제 수명이 다해가고 있다”고 진단하면서 ‘우파의 왼쪽’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진단한다. 크라우치의 대안은 비판의 강도만큼 세지 않다. “진정한 다원주의를 창출할 수 있는 역량이 있기 때문”에 시민사회의 활력을 기대해보자는 정도다. 그는 “좋은 사회를 만드는 데 필요한 네 가지 힘 즉 국가, 시장, 기업, 시민사회 사이의 계속적인 긴장이 존재하는 경제를 지지한다”며 “이런 긴장이 창조적으로 유지된다면, 기업가의 혁신과 권력 불평등에 대한 억제를 모두 가져올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런 말을 덧붙였다. “물론 계속해서 기업의 부가 지배하는 그늘 아래서 유지될 공산이 크긴 하지만 말이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563266.html
위기 맞고도 건재한 신자유주의, 가면을 벗기다 (한겨레, 한승동 기자, 2012.11.30 20:32)
2008년 미국 월스트리트발 금융위기가 닥쳤을 때 투자은행 등 거대 금융업체들은 정부의 대규모 구제금융(공적자금)에 매달렸다. 국가(정부)의 역할을 부정하며 오직 시장의 자유경쟁만 외치던 신자유주의의 총아들이 정작 위기에 빠지자 살려 달라고 달려간 곳이 국가였다면, 이보다 더한 모순이 어디 있나? 그것은 명백히 신자유주의의 실패를 자백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세상사가 통상적인 관례대로 굴러갔다면, 우리는 지금 파산한 신자유주의의 잔해를 처리하고 새 대안체제 적응에 바빠야 옳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발등의 불을 끄자 은행원들이 받는 거액의 보너스는 위기 이전 수준으로 회복됐다. 반면 그들을 살린 정부의 수많은 공무원들이 일자리를 잃고, 구제금융 원천제공자인 일반 납세자들의 삶은 실업과 복지·공공부문 축소로 한층 더 피폐해지고 있다. 잇따른 위기에도 신자유주의는 건재할 뿐 아니라 오히려 더 강화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콜린 크라우치 영국 워릭대 교수의 <왜 신자유주의는 죽지 않는가>는 바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공공정책과 노동시장의 변화를 연구해온 이 사회학자는 기업, 특히 거대기업의 정치권력화로 민주주의 원리가 무력해진 오늘날 사회를 ‘포스트민주주의’라는 말로 개념화했는데, 이 책에서는 그것을 초래한 경제구조상의 변화를 치밀하게 살핀다.
크라우치가 보기에 현존 신자유주의는 순수한 신자유주의가 아니다. 자유시장에 충실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시장을 장악하고 공공부문과 국가까지 사실상 지배하고 있다. 그 실체는 바로 거대기업이다. 따라서 시장이냐 국가냐를 둘러싼 논쟁은 무의미하다. 정치는 시장과 국가, 그리고 이들의 동맹이자 지배자인 거대기업 사이의 ‘안락한 조정’으로 변질돼버렸다. 정당은 주요 자금줄인 기업과 최상층 부자들에게 기대고, 언론 또한 베를루스코니 전 이탈리아 총리의 예에서 보이듯 거대기업과 부유층의 앞잡이로 전락했다.
그리하여 고용증대와 경제성장 토대인 공공부채를 국가가 책임졌던 케인스주의는 그 부담을 힘없는 개인과 가구에 떠안기는 ‘사유화된 케인스주의’로 변질됐다. 이제 개인과 가구들은 주택담보대출과 신용대출 빚에 허덕이며 경제성장을 떠받치고 배부른 금융자본과 부자들을 먹여 살리는 황당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여러 차례 그 의미가 엎치락뒤치락 뒤바뀐 자유주의 역사와 시카고학파, 그것을 더욱 정교하게 가다듬은 버지니아대 공공선택학파에 이르는 신자유주의 역사를 살펴가며 크라우치는 해법을 제시한다. 그것은 ‘시민사회’를 국가·시장·기업에 이은 제4의 세력으로 키우는 것이다. 그리하여 4자 간에 긴장이 유지되는 경제체제를 만들고, 개인주의가 아니라 집단적인 공동의 가치를 정립하는 것이다. 글쎄, 이게 대안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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