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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처 사망, 그래도 대처리즘은 살아 있다

 

http://h21.hani.co.kr/arti/world/world_general/34385.html
대처 여사, 당신이 저지른 짓을 보시오 (한겨레21 2013.04.29 제958호, 정인환 기자)
[세계] BBC ‘영국 사회계급 조사’ 발표… 1980년대 이후 노동계급 균열·분화 뚜렷, ‘연소득 1360만원·대졸자 비율 3.3%’ 불안정 노동계급이 인구 15% 차지
“제 뒤에 서 있는 밴드는, 이 트로피가 제게 세상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할 겁니다. 틀린 얘깁니다. 사실, 그렇게 생각했던 때가 있긴 했지요. …음악이, 어떻게 사람보다 중요할 수 있겠습니까? 이깟 트로피 받는다고, 누가 관심이나 갖겠어요? 하지만 우리가 수상을 거부한다면, 아마 얘기가 달라질 겁니다. 뉴스에 한 줄이라도 나오겠지요.”
‘대니’의 말에 일순 장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무대 앞에 있던 사진기자들의 스트로보(플래시)가 일제히 터지기 시작했다. 마크 허먼 감독이 1996년 연출한 영화 <브래스드 오프>의 클라이맥스는 이렇게 흘러간다. 대니는, 영국 북부 요크셔의 작은 탄광촌 마을 ‘그림리’의 브라스밴드 지휘자다. 그가 이끈 ‘그림리 밴드’는, 우리의 세종문화회관 격인 런던의 왕립 앨버트홀에서 열린 전국 브라스밴드 경연대회에서 막 1등을 한 참이다. 조금 길지만, 대니의 말에 다시 귀를 기울여보자.
“물개나 고래였다면 이렇게 방치했을까”
“보셨죠? 제가 무슨 말 하는지. (플래시는 계속 터지고 있다.) 이제 그나마 사람들이 제 말에 귀기울이겠죠? 지난 10년 동안 이 빌어먹을 정부는 조직적으로 한 산업을 통째로 파괴했습니다. 우리의 산업, 바로 석탄산업 말입니다. 파괴한 건 산업만이 아닙니다. 우리 공동체, 우리 가족, 그리고 우리 삶 자체를 송두리째 파괴했습니다.
며칠 전, 이 밴드가 속한 탄광도 문을 닫게 됐습니다. 1천 명이 넘는 광산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잃어버린 건 일자리 뿐이 아닙니다. 대부분 이미 오래전에 ‘이길 수 있다’는 의지를 잃어버렸습니다. 더는 싸울 엄두를 못 내게 됐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살려는 의지, 숨을 쉴 의지마저 잃어버렸을 때는 어떻게 할까요? 이건 얘기가 전혀 달라집니다. …우리가 만약 물개나 고래였다면, 여러분 모두 두 팔을 벌리고 살리려 나섰겠지요? 어쩌겠습니까? 우리는 그저 평범하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썩 괜찮은 인간일 뿐인데. 삶에 대한, 한 줌의 희망도 남아 있지 않은….”
대니가 말한 ‘빌어먹을 정부’는, 지난 4월8일 87살을 일기로 숨을 거둔 마거릿 대처가 이끈 보수당 정권이었다. 대처 전 총리는 과도한 사회복지 지출과 노동조합의 막강한 영향력, 그로 인한 임금 인상과 생산성 저하로 요약되는 이른바 ‘영국병’을 고치겠다는 공약으로 1979년 5월 집권에 성공했다.
그로부터 11년6개월여, 신자유주의를 기치로 내걸고 1990년 11월까지 이어진 대처 정권은 노동조합을 ‘사회악’으로 규정했다. 그 핵심이자 영국 산업의 근간이던 석탄산업이 철저히 짓밟힌 이유다. ‘경제성이 없다’는 이유로 곳곳에서 폐광이 잇따랐다. <브래스드 오프>의 시대적 배경은 1992년이다. ‘그림리’의 노동자뿐 아니라, 영국 전역에서 일자리를 잃은 광산 노동자가 유령도시로 변한 탄광촌을 떠나던 시절이다. 대처 전 총리의 장례식을 지켜보며, 새삼 그의 ‘업적’을 들춰보는 이유다.
2011년 1월26일 는 대대적인 보도와 광고를 앞세워 ‘영국 사회계급 조사’(GBCS)를 시작했다. 인터넷 사이트를 이용한 온라인 설문이었다. 전통적으로 상류층·중산층·노동계급 3단계로 나눴던 영국 사회의 계급 구조에 대한 21세기판 보고서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16살 이상이면 누구나 참여가 가능하도록 한 설문은 25분 남짓이 걸리도록 설계됐다. 내용을 살펴보자.
홈페이지에 등록한 뒤 참여하도록 돼 있는 설문의 첫 번째 질문은 ‘거주지역’에 관해서다. 지방 소도시의 개인 주택부터 도심의 대저택까지, 주거 형태와 거주 지역의 특성을 모두 15가지로 세분화해 선택하도록 했다. 이어 취미와 관심거리, 여가활동과 좋아하는 음악·음식 취향 등에 대한 문항이 촘촘히 이어진다. 교육 수준과 사회적 활동 등에 대한 질문과 교우관계와 주변인물의 직업 등을 묻는 항목도 등장한다.
영국 전역서 16만여 명 설문조사 참여
주로 대하는 신문·텔레비전·라디오, 인터넷 매체 등 언론에 대한 선호도 역시 개인의 계급을 가르는 주요 항목으로 등장한다. ‘14살 때 누가, 어떤 일을 해 가족을 먹여살렸는지’를 묻는 질문은, 사회적 배경을 유추하는 데 요긴했을 터다. 이어 지난 1년간 휴가를 어떻게 보냈는지를, 여행지와 숙박 형태까지 꼼꼼히 따져 기록하도록 했다. 소득수준과 신상정보도 빠질 수 없다. 마지막으로 부모 세대와 견줘 ‘사회적 이동 가능성’이 얼마나 바뀌었는지 등에 대한 질문으로 설문은 마무리된다.
조사에 대한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그해 6월까지 영국 전역에서 모두 16만1458명이 조사에 참여한 게다. 하지만 조사 결과를 전해받은 런던정경대(LSE)·맨체스터대를 비롯해 3개국 6개 대학 연구팀은 한 가지 문제점을 발견했다. 설문 참여자의 절대다수가 소득·교육 수준이 영국 사회 평균보다 높은 ‘전형적인 시청자층’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연구팀은 다국적 여론조사 전문기관 ‘GfK리서치’에 맡겨 계층별로 대표성을 지닌 1026명을 따로 심층면접해 조사 결과 ‘보정작업’을 벌여야 했다. 결과는 어땠을까?
연구팀의 관심은 애초 한곳으로 모아졌다. 바로 ‘전통적인 계급 분류법’이 21세기에도 유효한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영국 사회는 더욱 복잡하게 파편화했단다. 영국사회학회(BSA)가 4월15일 인터넷에 올린 최종 보고서를 보면, 전통적인 3계급 구조는 이제 ‘7계급’으로 세분화됐다.
최상위층은 영국 사회의 특권 집단인 ‘엘리트 계급’이다. 전체 인구의 6%를 점하는 이들은 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측면에서 ‘자본’이 가장 많은 집단이다. 연평균 최소한 8만9천파운드(약 1억5천만원)의 수입을 올리고, 14만파운드(약 2억4천만원) 이상의 예금을 보유하고 있다. 기업체 고위 간부와 경영자, 변호사·펀드매니저·의사 등이 이 부류에 많은데, 좋은 집안 출신으로 옥스퍼드대·케임브리지대·킹스칼리지 등 명문대 출신의 집중 현상이 뚜렷했단다.
두 번째 집단은 전체 인구의 25%를 점하는 ‘기성 중산층’이다. 경제·사회·문화적 측면에서 고루 ‘자본력’을 갖춘 이들은 평균 46살의 전문 기술직으로, 연평균 4만7천파운드(약 8천만원)의 소득을 올린다. 사회적으로 가장 왕성한 활동력을 보이며, 문화적 취향도 다양한 집단으로 분류됐다.
전통 중산층·노동계급 전체 인구 39% 머물러
이른바 ‘전통적 노동계급’으로 분류된 이들은 전체 인구의 14%에 그쳤다. 경제·사회·문화의 3개 평가 항목에서 고루 낮은 수준을 보인 이 집단의 평균연령은 66살, 연평균 수입은 1만3천파운드(약 2200만원)에 머물렀다. 그나마 주거용 부동산값이 상대적으로 높았는데, 설문 참여자들은 주로 비서직군과 전기·전자 등 기술직, 돌봄서비스 노동자였다. 전통적 의미의 중산층과 노동계급이 전체 인구의 39%에 그쳤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이번 조사에서 새롭게 등장한 계급은 △기술적 중산층 △풍족한 신 노동계급 △신흥 서비스 노동계급 △불안정 노동계급(프리캐리아트) 4가지다. 계급별로 특징이 있는데, ‘기술적 중산층’은 경제적으로 부유하지만 사회·문화적 자산이 적은 계급이다. 파일럿·약사·연구직 종사자 등이 대부분인 이들은 영국 사회의 6%를 차지한다.
‘풍족한 신 노동계급’은 영업직과 유통·부동산 업계 종사자가 많은데, 경제적으로는 중산층 수준이지만 사회·문화적 욕구는 왕성한 것으로 나타났다. 주로 대도시에 거주하는 ‘신흥 서비스 노동계급’은 이들에 견줘 상대적으로 경제 능력이 떨어지지만, 특히 유행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등 사회·문화적 ‘자본’은 풍족한 것으로 나타났다. 요리사·간호조무사·보육교사 등이 다수인 이 부류는 평균연령이 34살로, 조사 대상 가운데 가장 젊은 집단이란다.
영국 사회의 최하층을 이루고 있는 집단은 ‘프리캐리아트’, 곧 불안정 노동계급이다. 경제뿐 아니라 사회·문화적으로도 가장 취약한 이 계급은 전체 인구의 15%를 점한다. 연평균 소득은 8천파운드(약 1360만원). 수적으론 엘리트 계급의 2배가 넘지만, 소득은 10분의 1에도 이르지 못한다는 얘기다. 평균 예금액은 800파운드(약 136만원), 대학 교육을 받은 비율도 30명 중 1명꼴에 그친단다.
“대처 전 총리 집권 직전까지만 해도, 영국의 소득분배 구조는 독일·네덜란드와 엇비슷했다. 하지만 1980~90년대를 거치며 영국 사회는 미국·캐나다와 더욱 유사해졌다.” 대처 전 총리의 장례식을 하루 앞둔 4월16일 인터넷 매체 <허핑턴포스트> 영문판은 이렇게 전했다. 이 매체는 “2012년 말 네덜란드의 국가 채무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70%이며, 독일의 실업률은 5.4%에 그쳤다”며 “같은 시기 영국의 국가 채무는 GDP 대비 90%, 실업률은 7.8%였다”고 지적했다. 이른바 ‘영국병’이 사라졌다지만, ‘질병’이 사라진 것은 환자가 죽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시절, 탄광의 문을 닫아 건 것은 시장이 아니었다. 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보수당 정권이었다. ‘부작용’은, 시장이 고치도록 내버려뒀다. ‘시대의 변화’를 거부했던 광산 노동자들은 ‘잉여 노동력’이 돼, 고스란히 고용시장의 ‘예비군’으로 흘러들었다. <허핑턴포스트>가 “극도로 가난하지는 않지만 영원히 그 자리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집단, 프리캐리아트는 결국 대처 전 총리가 남기고 간 유산”이라고 꼬집은 것도 이 때문이다.
16세기로 퇴행한 하층 노동계급의 처지
‘귀족(젠틀맨)-시민-자영농-노동계급.’ 일찍이 1577년 성직자이자 출판인이던 윌리엄 해리슨은 <엘리자베스 1세 시대의 잉글랜드>란 책에서 당시 영국 사회의 계급 구조를 크게 4가지로 구분했다. 인터넷 도서관 ‘구텐베르크 프로젝트’(gutenberg.org)에 실린 책 서문을 보면, 해리슨은 ‘국왕 바로 아래인 왕자와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 등’으로 귀족계급을 세분화했다. 그는 이어 “인종, 혈통 또는 도덕적으로 고귀한 집단”이라고 묘사했다. 대처 전 총리는 생전에 그 공로를 인정받아 ‘남작’ 작위를 얻었다.
‘노동계급’에 대한 정의는 어땠을까? 해리슨은 “일용직 노동자와 가난한 농민, 일부 땅이 없는 자영업자와 인쇄 보조공, 재단사, 구두수선공, 벽돌공 등”을 이 부류로 봤다. 트리스트램 헌트 영국 하원의원(노동당)은 지난 4월7일치 <파이낸셜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노동계급’에 대한 해리슨의 정의를 따 이렇게 적었다. “영국 사회에서 아무런 목소리도, 권위도 없는 집단. 누군가를 지배하는 게 아니라, 지배를 받기 위해 태어난 계급.” 16세기의 노동계급이, 21세기의 ‘프리캐리아트’란 얘기다. 지금, 당신은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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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처’라는 유령과의 싸움 (한겨레21 2013.04.29 제958호, 경남과학기술대 산업경제학과 교수)
[박종현의 이코노미피아] 대처 이후 탐욕 칭송받고 경쟁과 효율에 기반한 금융업 중심 된 영국
기품 있고 건강한 사회를 위해 우리 안의 대처 유령을 정면 돌파해야

영국은 새로운 사회를 꿈꾼 1980년대의 한국 젊은이들로부터 진지한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이상에 근접한 나라였다. 영국에서는 20세기 초반부터 복지국가를 향한 체계적인 시도가 본격적으로 이뤄졌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집권에 성공한 노동당 정부는 의료·주택·교육·연금·실업급여 관련 사회안전망을 ‘요람에서 무덤까지’ 구축했다. 노동당 정권은 철강·광산·철도·석유·통신 등 주요 산업을 국유화했다. 나아가 완전고용을 중요한 정책목표로 설정하고 경제 곳곳에 개입했다. 사회주의적 성격이 다분히 가미된 이런 혼합경제 모델은 보수당의 집권에도 흔들리지 않은 채 전후 30년 이상 계속 유지됐다. 이 과정에서 노동이 중요하고 정부는 모든 국민의 경제적 안녕을 보살필 책무가 있다는 가치관이 영국인들 삶 속에 철옹성처럼 뿌리를 내렸다.
하지만 우리 세대의 젊은이들이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바로 그 순간, 영국에서는 건곤일척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것을 주도한 사람이 바로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마거릿 대처였다. 그녀는 노동당의 무능과 강성노조의 과격한 투쟁- 당시 영국의 노조는 진주의료원 노조와 달리 진짜 강성노조였다- 에 대한 국민적 불만에 힘입어 1979년 집권하는 데 성공했다. 집권과 함께 물가를 잡겠다며 정부 지출을 대폭 삭감하는 과정에서 대량실업 사태가 일어나 정권을 내줄 처지에 내몰렸지만, 포클랜드전쟁에서의 승리로 기사회생할 수 있었고 재선에 성공한다. 대처는 이후 광산의 폐쇄와 민영화에 맞서 파업을 벌인 광부들과 전면전을 불사했고, 결국 전국광산노조의 파업자금이 고갈되면서 파업은 종결됐다. 이후에도 노동조합원만의 고용을 법으로 강제한 ‘클로즈드숍’(Closed Shop) 조항을 철폐하고, 동조파업이나 노조의 실력 행사를 불법화해 전투적 노조를 무력화하는 데 성공한다. 노동계급에게는 게으르고 무책임하며 사회불만 세력이라는 주홍글씨가 새겨졌고, 망치 소리로 우렁찼던 지역들은 실업과 빈곤 그리고 좌절 속에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국영기업을 민영화하고 노조를 분쇄한 대처의 처방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대처가 노조와의 싸움을 선택한 것은 표를 얻으려는 정치꾼의 책략이 아니라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방향으로 대중의 생각과 세상을 바꾸려는 불굴의 의지와 확신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녀가 꿈꾼 세상은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려는 강한 개인들이 절제의 미덕 위에 규제받지 않는 자유로운 장터에서 리스크에 과감히 맞서 성공을 거두고 그런 개인들의 성공이 모여 전체의 번영이 달성되는 ‘자본의 유토피아’였다. 그렇다면 대처의 이상은 성공했는가? 대처가 자신이 바라는 방향으로 세상을 바꾸는 데 성공한 것은 분명하다. 대처를 기점으로 이전의 영국과 이후의 영국은 철저히 다른 사회가 되었다. 노동이 존중받고 사회적 신뢰와 공동체에 기반을 둔 제조업 중심의 나라는 사라지고, 탐욕이 칭송받고 영리기업이 지배하며 경쟁과 효율에 기반한 금융업 중심의 나라가 등장했다.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정부가 정권을 되찾은 뒤 과거 혼합경제의 이상을 복원하는 대신 ‘착한’ 대처의 길을 걸었던 것은 많은 유권자들이 대처의 가치관을 내면화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대처가 만든 세상은 유토피아보다 디스토피아에 훨씬 가깝다. 경제를 살리겠다며 집권했지만, 실업률은 오히려 훨씬 높아졌고 현재까지도 만성적 고실업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빈곤층의 비중이 크게 늘었고, 소득 격차 또한 심해져 1990년대 중반부터는 미국과 더불어 선진국 중 양극화가 가장 심한 나라가 되었다. ‘노력한 만큼 기회가 제공된다’는 구호도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 대처 집권 이후 계층 간 사회적 이동성이 크게 떨어져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출신 배경을 뛰어넘어 잠재력을 발휘하기란 과거보다 훨씬 어려워졌다. 따라서 공동체의 연대에 기반했던 서로에 대한 신뢰도 사라지고 있다. 대처의 전기작가 휴고 영은 대처가 위대한 정치가이지만 그녀가 남긴 유산의 색깔은 어둡다며 무엇보다 영국인들의 기질이 나쁜 방향으로 바뀌었다고 개탄한다. 영국인들은 언제부턴가 길을 가는 데 방해되는 사람을 밀쳐버리고, 경쟁자의 사업에 무례하게 끼어들며, 상대팀 축구팬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부를 유일한 미덕의 기준으로 우상화하는 등 함께하기에 불쾌한 사람들로 변했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세계화와 무한경쟁의 물결 속에서 대처주의는 전세계의 새로운 규범이 되었고, 우리도 영국인 못지않게 대처와 같은 방식으로 인간과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다. 대처는 “사회 따위란 존재하지 않고 단지 개인과 가족이 있을 뿐”이라고 강변했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이 속한 집단 속에서 정체성을 확립하고, 집단적 규범의 영향 아래 삶의 자세를 세우며,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행복과 불행을 느끼는 존재다. 기품 있고 건강한 사회 없이는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것, 지속 가능한 번영도 불가능하다. 사람들이 대처의 뒤틀린 가치관을 공유하게 된 것은 그녀의 생각이 설득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지역공동체와 노조의 와해로 건강한 사회의 기반이 무너짐에 따라 그들의 가치관이나 태도도 함께 타락했기 때문이다. 수많은 대처가 목소리를 높이는 지금, 역사의 시곗바늘을 40년 전으로 되돌리는 일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겠지만, 활력 넘치면서 기품 있는 건강한 사회를 새롭게 건설하는 것은 결코 불가능한 꿈이 아니다. 그 첫걸음은 우리 안에 깃든 대처의 유령을 정면 돌파하는 일에서 시작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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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처리즘은 살아 있다 (한겨레21 2013.04.22 제957호, 정의길 한겨레 국제부 선임기자)
[초점] 타계한 대처에 대한 평가에서 전례 없는 분란 보이는 영국… 절망과 환호 교차하는 현재형 대처의 신자유주의 유산
고인에 대한 관대함은 동서고금의 예의이다. 하지만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는 이런 관대함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지난 4월8일 타계한 대처를 놓고 영국에서 전례 없이 여론이 엇갈리고 있다. 4월17일 그의 장례에 엘리자베스 여왕이 참석하고, 영국 상·하원은 그의 추모 회기를 소집했다. 국장으로 치르지 않는 정치인의 장례에 여왕이 참석하기는 처음이다. 하지만 그의 죽음을 놓고 영국 각지에서는 축하 파티가 벌어진다. 보수 언론들은 그를 평화시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평가하나, 진보 언론들은 영국에서 공동체 정신을 앗아간 분열과 갈등의 인물로 혹평한다.
고인에게 관대한 것은 그에 대한 평가가 이미 끝났거나, 그의 영향력이 소멸됐기 때문이다. 대처가 여전히 환호와 증오의 인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그의 영향과 유산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의 유산과 영향은 여전히 어떤 이들을 환호케 하고, 다른 이들을 절망시키는 현재형이다.
복지 시스템의 핵심은 안 건드려
그는 영국을 구했는가? 모두 구하지는 않았다. 계층적으로 부자와 상류계급만, 산업적으로는 금융산업만, 지역적으로는 런던 등 동남부 지역만 구했다.
민영화(더 정확하게는 사영화) 정책, 변동환율 체제로의 이행 등 탈규제로 대표되는 시장자유화 정책인 대처리즘하에서 영국 경제는 그의 집권 전보다 분명 활력이 돌았다. 1975년 27%에 달하던 인플레이션은 1986년 2.4%로 떨어졌다. 성장률은 집권 직전 -4%에서 시작해 1987년 말~1988년 중반에는 7%대까지 올라갔다. 그것을 대처리즘의 효과로 볼 수 있느냐는 반론도 있다. 1970년대 중반은 오일쇼크로 모든 나라가 인플레이션에 시달렸고, 1980년대 중반엔 모두가 저유가와 경기회복을 맛보았다. 보수 진영은 세계적인 경기회복이 대처와 당시 로널드 레이건 미국 정권이 주도한 시장자유화 정책의 결과였다고 방어하기도 한다.
마거릿 대처는 어쨌든 영국 경제가 짊어진 짐을 완화했다. 활력과 경쟁력을 잃은, 노조가 장악한 국영기업을 가차 없이 잘라버렸다. 짐을 진 사람의 체력이 좋아졌다기보다는, 그 짐을 던져버린 것이다. 집권 전 150만 명 내외에 5%이던 실업자 수와 실업률이 경기회복에도 불구하고 대처 정부에서 300만 명, 10%대로 올라간 것에서 잘 드러난다. 무거운 짐에 무너지기보다는 그 짐을 던져버리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 방법이 유일했느냐는 여전히 논쟁거리다.
그의 집권 기간에 영국의 제조업은 공동화됐다. 금융규제가 철폐된 공간에 세계의 자금이 몰려들어 파운드화는 영국의 소득과 생활수준에 비해 줄곧 강세를 보였고, 이는 이미 경쟁력을 잃은 영국 제조업을 고사시켰다. 런던의 금융허브 고수를 위해서도 고평가된 파운드화가 필요했다. 런던이 금융허브가 되는 비용이었다.
대처의 사임 뒤 보수당은 런던을 중심으로 한 동남부의 지역정당화됐다. 스코틀랜드, 웨일스와 북부 도시에서는 사실상 전멸했다. 대처의 집권 동안 산업이 공동화된 지역이다. 그의 영국 구하기의 편중적 효과가 잘 드러난다.
개인적으로 불행한 정치적 말로
그는 복지국가를 와해시켰나? 그렇지 않다. 그는 전후 노동당의 클레멘트 애틀리 정부가 구축한 유럽에서 가장 사회민주주의화된 영국의 ‘요람에서 무덤까지’ 복지국가 시스템의 핵심 기제는 건드리지 않았다.
예를 들어 영국 복지 시스템의 핵심 중 하나인 국립의료보험제도(NHS)는 건재하다. 노령연금이나 실업보험 등도 여전하다. 대처는 이런 복지 시스템을 일부 건드리기는 했으나, 이를 시장 논리에 완전히 맡겨두는 것은 거부했다. 영국 국민이 이를 용납하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그는 ‘작은 정부’ 신봉자가 아니라 오히려 ‘강력한 정부’ 신봉자였다. ‘큰 정부’를 혐오했으나, 작은 정부를 선호한 것은 아니다. 그는 집권 내내 지방정부의 권한을 약화시키려 했고, 국가의 경찰력을 키웠다.
그는 2008년 금융위기의 씨를 뿌렸나? 그렇다고 볼 수 있다. 대처리즘의 핵심인 사영화와 규제 완화 철학을 가장 정력적으로 옹호해온 <이코노미스트>도 어느 정도 인정한다. “대처가 없었다면, 빅뱅(런던을 금융허브로 만든 금융규제 완화)은 없었을 것이다. 금융 분야는 영국 경제에서 그렇게 많은 몫을 차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영국은 과도한 대출로 인한 개인 부채와 은행 구제로 야기된 정부 부채에 허덕이지 않을 것이다. 이런 논거의 일부는 진실이다.” 물론 <이코노미스트>는 “대처리즘이 없었다면, 영국 경제는 여전히 국가 통제의 수렁에 허덕이고, 경제의 핵심은 정부가 소유하고, 전투적 노조가 여전히 득세할 것이다”라고 옹호했다.
아마 대처가 아니었다면 신자유주의가 그렇게 주류 정책으로 득세하지 못했을 것이다. 대처의 집권 전에, 시장과 경제학계에서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의 신고전주의 경제학과 밀턴 프리드먼의 통화주의는 여전히 찬밥과 비주류 취급을 받았다. 대처를 통해서, 그의 밀어붙이기 사영화 정책을 통해서 이들의 사상과 아이디어는 신자유주의로 발화했다.
그는 성공한 정치인인가? 그렇지 않다. 보수 세력에게는 축복이었으나, 그는 개인적으로 불행한 정치적 말로를 걸었다.
그의 장기 집권과 정치적 성공에는 다분히 운이 따랐다. 포클랜드전쟁은 패배 직전에 있던 총선에서 그와 보수당을 구했고, 집권 중반 이후 터져나온 북해 유전의 수입은 보수당 정부의 재정을 뒷받침했다. 미국에서 보수 지도자인 로널드 레이건의 집권과 소련의 약화도 그의 국제적 입지를 도왔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는 3기 집권 이후 자신의 성공을 과신하며 독단에 빠져, 당내에서 입지를 잃었다. 집권 초 내각 구성원으로 유일하게 남은 제프리 하우 당시 부총리도 그가 추진하던 인두세에 반대하며 등을 돌렸다. 대처는 당수 선거에서 안팎의 압력으로 중도 하차해야 했고, 퇴임 이후 당내에서 영향력이 소멸됐다. 레이건이 퇴임 뒤에도 국민적 인기와 당내 영향력을 확고히 누린 것과는 대비된다.
<이코노미스트>는 “지금은 대처의 중심적 통찰력을 꽉 붙잡을 결정적인 때다. 나라가 번영하려면 국민은 국가의 전진을 다시 뒤로 돌려야 한다. 세계에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대처리즘이지, 더 적은 대처리즘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반면 <가디언>은 “대처가 씨름했던 전후의 실패한 과거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하지만 그의 실패한 해답으로 돌아가서도 안 된다. …그녀의 유산은 공공의 분열, 개인적 이기심, 탐욕의 추종이다. 이 모두는 어느 때보다 인간 정신에 족쇄를 채웠다”고 혹평했다.
영국과 세계는 어떻게 변했나?
1975년 보수당 당수로 첫 연설을 할 때, 그의 연설담당관은 에이브러햄 링컨의 연설을 인용하라고 권고했다. “강자를 약화시켜서 약자를 강하게 할 수 없다. 검약을 위축시켜서 번영을 가져올 수 없다. 고용주를 끌어내려서 피고용인을 도울 수 없다.”
대처는 핸드백에서 낡은 인쇄물을 꺼냈다. 그 구절에 줄이 그어진 인쇄물이다. “내가 항상 지니고 다니는 것이다”라고 대처는 응답했다.
40여 년이 지난 지금 영국과 세계는 어떻게 변했나? 대처는 강자를 강화해서 약자도 강하게 했는가? 검약을 장려해서 번영을 가져왔는가? 고용주를 부추겨서 피고용인을 도왔는가? 부자와 강자는 그렇다고 하고, 약자와 빈자는 아니라고 한다. 대처는 죽었지만, 대처리즘은 여전히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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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4152156355&code=970205
영국에 대처의 유산은 없다 (경향, 주영재 기자,ㅣ 2013-04-15 21:56:35)
ㆍ‘작은 정부’ 추구 영국병 고쳤다지만, 설문 결과 국민들 ‘큰 정부’ 선호
‘큰 시장, 작은 정부’를 주장하며 사회보장제도를 대폭 축소한 마거릿 대처 전 총리의 바람과는 달리 영국인들은 여전히 복지를 비롯한 사회안전망 구축을 위한 정부의 적극적 역할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이 영국과 미국, 프랑스, 독일 등 4개국에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에서 드러났다. 가디언은 14일 사설에서 이 결과를 인용해 ‘대처가 영국을 변화시켰다’는 주장이 맞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지적했다.
여론조사 결과 영국은 국가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해온 프랑스와 독일 등 유럽의 대륙 국가들과 입장을 같이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영국인들은 일하지 않는 사람을 게으른 사람으로 보는 경향이 프랑스보다 더 적었고, 또 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해 세금을 내는 데엔 독일인보다 더 적극적이었다. 정부의 실업자 정책이 너무 가혹하다는 의견도 36%에 달했다. 1만5000달러에 불과한 저소득계층의 20배가 넘는 최고경영자 보수에 대해서는 과도하다는 의견이 미국보다 많았다.
부유층과 빈곤층 아이들에게 똑같은 기회를 보장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인가라는 질문에는 78%가 찬성해 14%에 그친 반대 의견을 크게 앞섰다. 영국인은 기회의 사다리만이 아니라 사회안전망 구축에도 적극적인 정부 역할을 강조했다. 정부가 모든 가정에 인간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최소 수당을 보장해야 하는지에 영국인의 74%가 동의했다. 프랑스와 독일도 영국과 비슷한 비율을 보였지만, 미국인들은 단지 50%만이 이를 국가의 의무라고 봤다. 또 영국인의 52%는 소득재분배를 국가의 의무로 인식했다. 프랑스의 경우 62%가 이에 동의했지만, 미국은 32%만 동의했다. 실업자와 빈곤층을 돕기 위해 세금을 더 낼 용의가 있다는 답변은 54%로, 반대 의견보다 35%포인트 앞섰다.
영국인의 이 같은 인식은 시장의 자율성과 개인의 자조 노력을 강조해온 생전의 대처가 전혀 달가워하지 않을 만한 결과이다. 1980년 당시 대처는 국민들에게 “우리는 국가가 낭비벽 있는 착한 요정의 모습을 하고 삶의 모든 여정에서 말 많은 참견자로 등장하는 걸 기대해선 안된다”며 ‘요람에서 무덤까지’라고 표현돼온 영국 사회보장제도를 대폭 축소했다.
가디언은 사설에서 “영국인은 정부가 단지 경쟁 조건을 평등하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보편적 안전망을 제공하고, 소득을 재분배하는 것을 진실로 기대하고 있다”며 “대처가 영국이 정확히 유럽 대륙과 인식을 같이하고 있고, 미국과는 대양 하나만큼의 거리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불만을 품었을 것”이라고 평했다. 가디언의 사설 제목은 복지국가를 뜯어고치려 한 대처의 실험이 실패했음을 암시하듯 ‘대처의 끝나지 않은 혁명’이었다.
17일 대처의 장례식을 앞두고 그의 공과를 둘러싼 논란은 여전히 뜨겁다.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대처를 “평화 시기 영국의 가장 위대한 총리”라고 평했지만, 14일 영국 선데이미러가 시행한 여론조사에서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의견이 41%로, 동의한다는 의견(33%)을 앞섰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30416084923
고사 직전의 한국 진보, 대처를 배워라! (프레시안, 지주형 경남대학교 교수, 2013-04-16 오전 9:28:27)
[대처를 넘어서] 대처의 개혁에서 얻는 교훈 : 비전, 세력, 학습
17일 장례식을 앞둔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의 사망 소식은 영국에서뿐만 아니라 멀리 우리에게까지 뉴스가 되고 있다. 단순히 지나간 역사적 인물의 사망 소식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대처의 사망 소식이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것은 대처가 1980년대 이후 우리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삶을 송두리째 바꾼 세계적인 신자유주의 공세와 개혁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때때로 한 인물의 사망은 그가 만들었던 시대의 종말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지만 대처의 경우 그의 죽음은 그가 만들어낸 시대가 끝났음을 확인시키는 대신 그 시대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것, 따라서 그 시대를 종식시킬 과제가 우리에게 여전히 남아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실로 우리의 삶을 돌봐주고 보호하는 "사회와 같은 것은 없(There is no such thing as society)"으며 따라서 신자유주의 외에 다른 "대안은 정말로 없다(There really is no alternative)"는 대처의 명제는 설득력 있는 레토릭이자 물질화된 현실로서 아직도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마르크스의 말대로 죽은 세대의 전통이 악몽처럼 산 세대의 두뇌를 짓누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글에서 대처의 신자유주의 개혁과 그것이 현대 자본주의에 남긴 지적, 제도적 유산을 살펴보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려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기존의 질서와 체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질서와 체제를 수립하는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가장 잘 보여준 것은 대처 자신이었다.
대처, 영국을 개조하다!
전후 영국 사회는 자본과 노동의 계급 타협, 재정 정책을 통해 경기를 조절하는 케인스주의적 위기 관리 방식 그리고 이른바 '요람에서 무덤까지' 보장하는 사회 복지 제도에 근거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것은 강력하게 조직된 노동조합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포드주의의 위기, 브레턴우즈 체제의 붕괴, 석유 파동 그리고 케인스주의적 위기 관리의 실패라는 세계사적 변동 속에서 이러한 영국의 정치경제 질서도 위기에 빠진다.
노동당 정부에는 필요한 구조 개혁을 실행할 역량이 결여되어 있었고 위기에 빠진 경제에는 1976년 국제통화기금(IMF)의 개입으로 긴축 정책과 임금 억제책이 시행되었다. 이에 따른 노동조합의 저항과 사회적 혼란은 1978~79년 겨울에 벌어진 노동 소요(이른바 '불만의 겨울(Winter of Discontent)')에서 정점에 달한다. 그 결과 한편으로는 보수적 중산층의 도덕주의적 경각심이 높아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불만에 빠진 노동자 상당수가 노동당 지지를 철회하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1979년 대처의 집권은 보수당의 승리보다는 노동당이 자멸한 결과였다.
집권 경위가 어떠했든 신자유주의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와 밀턴 프리드먼을 지적 스승으로 섬기는 대처는 '현대화'라는 기치를 내걸고 영국의 전후 체제를 완전히 해체하고 새로운 체제를 건설하는 개혁을 시작한다. 여기에는 대처의 지도자로서의 비전과 역량뿐만 아니라 행운 또한 작용하였다.
초기에 대처의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은 긴축 재정과 고금리를 포함한 통화주의 정책 그리고 작은 정부를 표방하는 감세와 민영화(사유화)를 핵심으로 했다. 이는 연 18퍼센트까지 치솟았던 인플레이션을 잡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대가로 복지를 축소하고 실업을 늘리며 제조업 생산을 크게 위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대처의 입장에서 이는 실패라기보다는 성공이었다. 대처는 다른 부작용이 있더라도 국가의 축소 및 재구조화 밖에 "정말로 다른 대안이 없다"고 확신했다.
더구나 대처의 정치경제적 목표는 비효율적 복지 국가의 중요한 지지 기반인 제조업과 공공 부문 노동조합을 약화시키고, 일국적 산업 자본 대신 초국적 기업과 금융 기관의 축적과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화이트칼라 중간 계급의 성장을 지원하여, 세계화라는 지구 정치경제의 변동 속에서 영국 자본주의의 위치를 재정립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경기 침체, 고금리, 물가 안정, 복지 축소는 노동조합의 힘을 약화시키고 금융 자본의 수익성을 높임으로써 영국의 자본주의를 재구조화하는 최선의 수단이었다.
대처와 보수당은 단기적으로 형편없는 경제 성과에도 불구하고 1983년 재집권에 성공한다. 1982년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전략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별 가치가 없는 포클랜드 섬에 대한 전쟁을 불사하고 승리한 결과 국민의 높은 정치적 지지를 확보하였던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상식, 전통, 도덕, 국가, 국민, 현대화 등에 초점을 둔 대처리즘의 문화적, 대중적 호소력, 보수당-노동당 양당에 대한 회의의 증가로 인한 사회민주당-자유당 연합의 약진, 그리고 보수당에 대한 대안 세력이 되지 못한 노동당의 역사적인 총선 참패도 한 몫을 하였다.
이제 대처와 보수당 정부는 1984년 탄광노동조합 파업에 대한 강력한 대응과 1986년 런던 시티(the City)의 금융 빅뱅(금융 자유화, 탈규제, 감세 및 국제화)과 같은, 때로는 권위주의적 행동을 불사하는 "작지만 강력한" 국가 개입을 통해 영국 자본주의의 재구조화라는 목표에 보다 더 가까이 다가간다. 이 과정에서 대처 정부는 개인주의, 기업가 문화, 주택, 주식 및 사적연금 등의 금융 자산 소유를 내용으로 하는 '대중 자본주의(popular capitalism)'를 장려하였다.
예를 들자면 대중은 공적 자산의 민영화를 통해 주식을 소유한 자산 투자가가 되었다. 이러한 대중의 자산 소유 확대는 금융 자본의 축적 기회를 확대할 뿐만 아니라 국민을 보수화하여 보수당에 대한 사회적 지지를 동원하는 기제였다. 더구나 그것은 복지의 축소와 노동조합의 약화로 자신의 삶을 보살피고 보호하는 "사회와 같은 것이 없"고 따라서 개인과 가족이 스스로 자신을 보살피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는 조건 속에서 각자가 자신의 삶을 관리할 수 있게 돕는 방법이기도 하였다. 결국 이러한 재구조화의 결과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영국 경제의 성장률은 회복되고 실업률도 줄어들었으며 런던 시티는 다시금 세계적인 금융 축적의 중심지로 도약하였다. 이른바 '영국병(British disease)'이 치유된 것이다.
대처는 어떻게 세상을 바꿨나?
대처가 만들어낸 영국의 이러한 새로운 신자유주의 정치경제 질서는 1990년 대처가 권좌에서 물러나고 심지어는 1997년 노동당이 집권한 뒤에도 커다란 변화 없이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존 메이저 내각(1990~1997년)은 대처도 반대하였던 철도 민영화에 앞장섰으며, 토니 블레어와 고든 브라운의 신노동당(New Labour) 내각(1997~2010년)은 노동조합과 복지 세력을 배제하려는 대처의 노골적인 '두 국민 전략' 대신 국민 통합적인 '한 국민 전략'을 추진했지만, 대처의 작지만 강력한 정부,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 및 금융적 축적 전략을 거의 그대로 승계하였다. 2010년 집권한 데이비드 카메론의 보수당 정부는 '큰 사회(big society)'라는 구호를 통해 '사회'의 역할 강화를 주장하지만 사실 그것은 사회가 몰락한 자리에 흩어져 있는 개인들에게 국가의 책임을 더욱 더 미루는 것일 뿐이다.
대처가 영국에서 성공적으로 만들어낸 이러한 신자유주의 질서는 신자유주의의 모범 사례로 한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에 참조의 대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식되기까지 하였다. 예를 들자면 1997년 경제 위기 이후 한국이 채택한 대기업 구조 조정 방식인 '워크아웃'은 영국의 런던 어프로치를 모델로 할 것이었고 2000년대 후반에 추진된 금융 허브 전략 또한 영국의 금융 빅뱅을 상당 부분 참조한 것이었다.
대처가 창조한 이러한 신자유주의 체제의 힘은 무엇보다도 그가 역설한 동시에 만들어낸 사회의 부재와 대안의 결핍이라는 조건에서 찾을 수 있다.
첫째, 대처는 노동조합과 제조업과 같은 옛 질서의 사회적 기반을 사실상 해체하였고 그 결과 대처가 물러난 이후에도 구질서로 돌아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더구나 대처는 신자유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에 대한 상상력을 고갈시켜 버렸다. 사회 복지 제도나 노동조합과 같이 보호를 제공할 수 있는 사회적 기관이 크게 약화된 상태에서 대처의 주장대로 사회와 같은 것은 없고 오직 무한 경쟁 속에 놓인 개인만이 있다고 믿게 되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대안은 신자유주의적인 자기 계발과 투자뿐이었다. 영국 등의 좌파 정치 세력 또한 케인스주의적 복지 국가의 실패 그리고 산업 민주화를 추진하는 '구조 개혁 좌파'의 패배로 인해 구체적인 대안을 상상하는데 매우 큰 어려움을 겪기는 마찬가지였다.
둘째, 이러한 '사회'의 공백 속에서 대처의 경제 개혁은 금융적 축적과 이에 대해 이해관계를 가진 세력(초국적 금융 자본 및 서비스 중간 계급)을 확대하여 신자유주의적 질서의 물질적 기반을 만들어냈다. 제조업이 몰락하고 대신 금융 및 서비스 산업의 경쟁력이 강화된 조건에서 전자가 아닌 후자를 통해 경제 성장을 도모하는 것은 1990년대 중반 이후 "제3의 길"을 선언하며 새롭게 변신한 신노동당 정부에도 자연스러운 선택이 되었다. 더구나 경제적인 영역에서의 금융적 축적의 확대는 사적 연금이나 보험, 부동산 자산 소유 등의 대중 자본주의와 결합하여 사회적으로 개인주의를 강화시켰고, 정치적으로 개인의 자산 보유 확대는 유권자를 전반적으로 보수화시키는 효과를 낳았다.
요약하면 신자유주의의 힘은 '사회'와 '대안'을 효과적으로 봉쇄하는데 있지만 '사회'와 '대안'은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대처와 로널드 레이건 등의 신자유주의 세력이, 대다수 개인에게 삶에 대한 보호를 제공하는 '사회와 같은 것은 없'으며 신자유주의 외에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이 없다'는 이데올로기적 환상을 설득력 있게 전파하고, 그러한 환상에 근거한 강력한 물질적, 실제적 질서를 만들어낸 결과일 뿐이다.
대처의 유산을 극복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사회(보다 친숙한 언어로는 공동체와 가족)를 해체하고 실업과 불평등을 심화시키며 무한 경쟁의 불안감을 강요하는 신자유주의의 극복은 대처 등의 신자유주의 세력이 해체했던 사회의 복원 또는 재건을 필요로 하지만 과거의 사회를 그대로 복원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기에 새로운 대안에 대한 상상력을 요구한다. 이러한 처방은 일견 막연하게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막연한 것만은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대처의 신자유주의 개혁이 성공적인 체제 변동의 한 사례로서 신자유주의의 극복에 대한 교훈을 제시한다. 그것은 성공적인 체제전환은 특수한 현실 진단에 기초한 전략적 비전, 세력 관계의 변화 그리고 학습을 통한 제도적 조정과 적응을 수반한다는 것이다.
첫째, 한 사회를 바꾸려는 세력은 현실 진단에 기초한 국가, 사회, 경제에 대한 (그리고 가능하다면 더 나아가 새로운 문명에 대한) 비전을 마련하고 추진해야 한다. 사실 개인만이 있을 뿐이고 사회는 없으며 신자유주의 외에 대안이 없다는 대처의 주장은 (폴라니의 표현을 따르면) '시장 사회'라 부를 수 있는 것에 대한 자신의 강력한 장기적인 문명 비전을 제시하는 방식이었다. 그것은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영국이 당면한 여러 상황 중에서 특정한 것들을 핵심적 '문제'로 규정하고 해결하려는 시도였다. 특히 그것은 경제적으로는 당면한 인플레이션과 국가 재정의 악화라는 문제를 해결하고 사회적으로는 국가와 노동조합을 포함한 사회 집단의 힘을 약화시키고 개인과 기업의 힘, 특히 비즈니스(영리 활동)의 자유를 강화하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대처의 비전은, 그것이 설사 그런 목표를 성공적으로 달성할 수 있을지라도 실업이나 불평등 심화와 같이 영국이 직면한 다른 문제들을 해결할 수는 없는 매우 불완전한 대안이었다. 실제로 대처의 집권 초기에 경제는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사회적 저항은 고조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처는 다른 문제들을 억누르면서 자신의 목표들을 오랜 기간 추구하였다. 그 결과는 물가와 국가 재정의 안정 및 비즈니스 자유의 획기적 증가라는 변화였다.
둘째, 비전의 지속적인 확산과 실행은 세력의 뒷받침이 있어야 하며 이는 사회적 세력 관계의 변화를 동반해야 한다. 대처 정부의 신자유주의 개혁은 자본-노동의 타협에 기초한 전후 영국의 전통적인 사회적 세력 관계를 역전시키는데 성공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집권 이전에 세력관계의 역전이 일어나는 것이 최선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집권 후에라도 세력 관계의 역전이 시도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정부의 정책은 단순히 사회적 세력 관계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세력 관계에 영향을 주고 그것을 재편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정책은 언제나 정치적 함의를 가지고 있으며 정치적 관점에서 만들어지고 집행된다. 대처 정부는 집권 기간 내내 비판적인 미디어 보도, 사법적 제재, 파업에 대한 강경 대응, 복지 축소, 제조업 구조 조정을 통해 노동 운동을 현격히 약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1986년에는 좌파가 장악한 대런던시의회(Greater London Council)를 폐지하는 등 반대 세력의 기반을 적극적으로 허물어 버렸다. 동시에 대처 정부는 민영화와 금융 빅뱅을 통해 자본주의를 대중화하고 금융화함으로써 초국적 금융 자본, 서비스 중간 계급, 자산 소유자 등 그 지지 기반을 확대했다. 간단히 말해 대처는 신자유주의 개혁을 통해 자신의 비전에 동조하는 세력(금융 자본과 중산층)을 확대하는 한편, 반대하는 세력의 물질적 기반(제조업과 복지제도)과 조직(노동조합)을 와해시켰다. 이렇게 반대 세력의 축소와 물적 기반의 해체 그리고 동조/지시 세력의 확대와 물적 기반의 건설을 통해 비전은 성공적으로 확산되고 집행된다.
셋째, 이렇게 세력의 기반 위에 서 있는 비전은 시행착오, 학습, 적응, 조정 등을 통해서 현실화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대처의 개혁을 통해 사회적 저항이 약화되고 다른 대안의 추구가 불가능해지자 영국 경제에도 학습을 통해 새로운 자본주의에 성공적으로 적응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렸다. 기성 체제는 항상 더 나은 대안을 내놓으라고 하면서 현존하는 체제를 옹호한다. 그러나 기존의 체제보다 모든 점에서 나은 대안은 처음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과학 이론에서조차도 새로운 패러다임이 낡은 패러다임보다 반드시 모든 면에서 뛰어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자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의 천체 운동 예측력은 오랫동안 정교하게 다듬어진 당시의 천동설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사회의 변화는 급격히 일어날 수 있지만 사회의 진보는 패러다임의 변화에서와 마찬가지로 단번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학습과 적응을 통해 일어난다. 만약 모든 면에서 더 나은 대안이 있어야만 한다면 어떠한 사회 개혁이나 변혁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의 사회 변화는 그렇게 일어나지 않는다. 먼저 변화가 일어나고 이후에 학습과 적응이 뒤따르면서 개선이나 진보가 일어나는 것이 정상적이다. 대처 정부의 경우에도 처음부터 완전한 대안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대처의 신자유주의 정책은 단기적으로도 성공적이지 못했다. 대처 정부는 그럼에도 장기 집권을 통해 반대 세력을 성공적으로 억누름으로써 시행착오를 겪으며 적응하고 학습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냈다. 그리하여 제조업 중심 산업 구조나 강력한 노동조합 조직 등 신자유주의 정책의 적용에 부적합한 환경은 제거하고 신자유주의 정책의 수정과 변경이 필요한 곳에서는 정책을 현실에 맞게 정교하게 다듬어, 완벽하지는 않지만 지배 계급을 위해 무리 없이 작동하는 신자유주의 정치경제 질서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대처가 예시한 신자유주의적 전환의 형식에 비추어 볼 때 신자유주의의 극복은 다음과 같은 비전의 수립과 확산, 세력의 전환 그리고 학습과 집행을 강력히 요청한다.
첫째,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적 비전은 물론 현실 진단에 기초해 현재의 금융 위기를 극복하고 경제적으로 보다 풍요하고 평등한 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만 단순히 거기에 그쳐서는 안 된다. 그것은 경제적 이익을 넘어서 신뢰, 윤리, 연대, 복지를 포괄하는 사회와 국가의 복원과 재건을 목표로 하는, 대안적인 가치와 문명에 대한 장기적인 비전의 수립과 확산을 요청한다. 이는 신자유주의와 달리 모든 것을 영리 활동, 화폐 소득, 효율성과 같은 경제적 잣대로 평가하는 것으로부터 과감히 탈피하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둘째, 이러한 비전의 확산과 집행은 집권 이전이든 이후이든 물질적 기반의 해체와 생성, 반대 세력의 축소와지지 세력의 강화 등 세력 관계의 변화를 전제로 하는 동시에 전략적 목표로 삼아야 한다. 주어진 역사적, 지리적 환경 속에서 각 사회의 특유한 계급적, 세력적 지형 속에서 다수의 세력이 공유하는 통일적 이해관계를 구성하는 '국민적-대중적(national-popular)' 전략의 수립은 이러한 세력 관계의 전환을 촉진할 수 있다.
셋째, 신자유주의의 최종적 극복은 이러한 세력적 조건 하에서 처음에는 다소 유토피아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비전과 정책들이 시간을 두고 시행착오를 겪으며 학습과 조정을 통해 참을성 있게 현실에 적응하고 정교화됨으로써 가능해질 것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현재의 세계에서 그리고 한국에서 좌든 우든 위기에 빠진 신자유주의를 극복할 대안적 비전, 그리고 그것을 추진할 정치 세력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이 글에서 답할 수 없는 또 다른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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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9102202235&code=960205
[오늘의 사색]대처리즘의 문화정치 (경향, 노명우 | 아주대 교수, 2012-09-10 22:02:23)
▲ 대처리즘의 문화정치 | 스튜어트 홀·한나래
“대처리즘이란 상당 부분 상식의 재구성에 관한 것이다. 즉 대처리즘의 목적은 이 시대의 상식이 되는 것이다. 상식은 평범하고 실제적이며, 일상적인 계산방식의 틀을 형성하며, 마치 우리가 숨 쉬는 공기처럼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것은 실제와 사고에서 그냥 당연시되고 모든 대화가 시작되는 출발점을 이루며 모든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가정하는 전제가 된다. 스스로 역사에서 벗어나 자연의 영역으로 자연화하고, 그리하여 드러나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어 무의식적으로 작동하게 되는 것은 모든 이데올로기가 꿈꾸는 바이다. 이것은 대처 여사의 언설과 사고에서 자연적인 숙어처럼 구사되고 있는데, 어떤 이는 이것이 바로 대처에게만 가능한 숙어라고까지 말한다.”
좌파는 이데올로기가 체계적인 이론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마르크스라는 절대적 지위를 차지하는 사상가가 있고, 그가 남긴 텍스트가 배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좌파 진영에서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상식에 가깝다.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러한 이해에 따라 좌파가 고유한 이데올로기를 정교화하려는 노력을 나무랄 수는 없다. 하지만 좌파가 자신들의 정치적 적대자인 우파의 이데올로기를 동일한 잣대로 평가한다면, 좌파는 대중동원에 실패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스튜어트 홀은 대중동원에 실패한 좌파의 한계를 분석하기 위해, 대처리즘이라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분석한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정교한 개념에 기반을 둔 이론의 체계라기보다 사람들의 마음을 얻은 ‘상식’에 가깝다. 이러한 분석틀을 통해 본 우파의 이데올로기는 이론들이 체계적으로 배열된 지식의 체계가 아니라, 심리적 거부감을 주지 않는 평이한 언설로 구성되어 있다. 이 평이한 언설들은 대중들을 감염시키기 위해 폭포수처럼 흐르지도 않는다. 이 언설들은 가랑비와도 같다. 사람들은 이 가랑비에 젖는 줄도 모르고 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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