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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누이트와 피그미처럼, 인류의 진화는 계속될까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5/09/19 12:28
  • 수정일
    2015/09/19 12:28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이누이트와 피그미처럼, 인류의 진화는 계속될까

조홍섭 2015. 09. 18
조회수 673 추천수 0
 

최근의 잇단 화석 발견, "인류를 종착점으로 한 진화란 없다"

문화적 영향, 기술발전, 기후변화로 미래 인류진화 방향은 미궁에

 

호모 날레디 상상도.jpg»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두개골 화석을 토대로 복원한 호모 날레디의 상상도. 인류의 직접 조상인지 여부는 아직 논란거리이다.사진=요하네스버그/AP 연합뉴스 
 
인간은 외로운 동물이다. 사람은 포유동물강, 영장목, 사람과, 사람속(호모)에 속한 유일한 종(호모 사피엔스)이다. 
 
사람과에는 침팬지속, 오랑우탄속, 고릴라속, 사람(호모)속이 있는데, 사람속을 빼고는 모두 2종이 있다. 침팬지속만 해도 침팬지와 보노보가 있다. 사람의 친척은 모두 멸종했다. 
 
보통 1속 1종만 남은 동물은 미선나무처럼 멸종 위험이 커 보호를 받는데, 사람은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의 2008년 평가에서 “워낙 널리 분포하고 적응력이 뛰어나며 개체수가 증가하고 있어” 보전등급은 ‘최소 관심 종’이다.
  
고아처럼 남아서인지 인류의 조상 찾기 열정은 남다르다. 10일 남아프리카공화국 연구자들이 발표해 세계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킨 고인류 ‘호모 날레디’ 화석도 그런 예다. 

F1_large.jpg» 호모 날레디의 뼈 화석. 1990년 이후 세계에서 발굴된 모든 고인류 화석을 합친 것보다 많을 만큼 풍부하다. 사진=<이라이프>

 
깊은 동굴 속에서 적어도 15구에 해당하는 1500여 점의 완벽한 뼈 화석이 나와 “인류의 새로운 조상이 발견됐다”라는 보도가 잇따랐다. 그러나 흥분이 가라앉자, 연대 측정도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화석의 주인공을 호모속으로 단정한 것이 성급했다거나 오히려 멸종한 고인류인 직립원인에 가깝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와 호모속 특징이 혼재한 것 등에 비춰 인류의 진화 경로가 알려진 것보다 복잡했을 것이란 추정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분명한 건, 현생 인류가 필연의 단선적인 과정을 거쳐 탄생한 게 아니란 사실이다. 
 
세계적인 영장류학자 프란스 데 월은 15일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강이 흐르다 보니 바다로 간 것이지 바다로 가기 위해 흐른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인류는 지적인 도약을 이룬 진화의 종착점이 아니고, 지금도 진화는 계속되고 있다.

Rosino_-Homo_floresiensis_cave.jpg» 호빗의 두개골 화석이 발견된 인도네시아의 플로레스 섬 량바오 동굴. 사진=Rosino

 
1990년대 이후 어떤 고생물학자도 인류 진화의 경로를 깔끔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통념을 깨는 발견도 잇따른다. 2003년 인도네시아 플로레스섬에서 1만 8000년 전 살던 키 1m의 새로운 인류 ‘호빗’ 화석이 발견되기도 했다. 
 
단일종인 인류의 ‘순수함’도 흔들린다. 현생 인류가 지금은 멸종한 또 다른 인류인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 등과 섹스를 하고 형질을 나눴다는 사실도 유전자 연구 결과 분명해졌다. 
 
2010년 이들의 게놈(유전체)을 분석한 결과 약 4만년 전에 멸종한 네안데르탈인이 유럽인과 아시아인에게 유전물질의 2~4%를 물려준 것으로 밝혀졌다. 그 영향은 아직 불분명하지만 우울증, 비만, 피부질환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Neandertaler_reconst.jpg» 인류와 같은 종 또는 아종으로 분류되는 네안데르탈인의 복원 상상도.현생인류와 같은 장소에서 한동안 살았다. 사진=위키미디어 코먼스


비슷한 시기에 시베리아에 살았던 데니소바인은 특이하게 태평양 멜라네시아인과 호주 원주민에게 5%의 유전자를 남겼다. 아시아의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데니소바인의 흔적이 발견되는데, 티베트인은 물려받은 유전자 덕분에 4000m 이상의 고산지대에서도 적혈구 수가 늘어나 피가 끈적끈적해지는 고산병을 겪지 않는다.
  
인류는 홀로 남았지만 진화를 계속하고 있다. 특별한 환경에 사는 사람들에게서 그런 증거가 잇따라 나온다. 
 
마테오 푸마갈리 영국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 생물학자 등 국제 연구진은 17일치 과학저널 <사이언스>에 실린 논문에서 그린란드에 사는 이누이트가 지방과 단백질로만 이뤄진 식단으로 생존하는 비결은 지방 대사를 조절하는 유전자 변이 덕분이라고 밝혔다. 
 
이들의 주식은 물범과 고래인데, 지방산이 농축된 이런 음식을 먹고도 심혈관질환에 걸리지 않는 것은 불포화화 효소의 합성에 관여하는 유전자 몇 개가 돌연변이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이런 돌연변이는 빙하기로 베링해가 육지로 이어졌던 2만년 전 북극에 살던 시베리아 원주민에게서 처음 발생했는데, 이누이트 모두와 유럽인 2%, 중국 한족 15%에도 전해진 것으로 밝혀졌다.
 

Malik Milfeldt_s.jpg» 이누이트가 1000년 전부터 살아온 그린란드의 마을. 이곳에 이주해 오기 2만년 전 시베리아 북극쪽에서부터 과도한 지방섭취의 부작용을 막는 돌연변이가 일어났다. 사진=Malik Milfeldt


이 밖에도 인류의 최근 진화 사례는 많다. 유럽인의 젖당(락토스) 분해 능력은 널리 알려진 예이다. 성인이 돼도 우유 속 당분을 소화시키는 능력을 간직하는 이런 돌연변이는 7500년 전 유럽에서 나타나 퍼졌다. 
 
말라리아에 걸리지 않도록 적혈구가 낫 모양으로 바뀐 아프리카와 인도의 겸상적혈구도 그런 예이다. 최근에는 아프리카와 동남아 열대우림에 사는 수렵채취인들이 모두 키가 작은 까닭이 열대우림에서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유전적 변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그렇다면 인류 전체는 앞으로 어떻게 진화해 나갈까. 지난 연말 영국의 우주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비비시>에 “인류의 생물학적 진화는 너무 느려 인공지능을 따라갈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인공지능이 인류의 종말을 부를 것이라고 말해 논란을 불렀다. 그러나 가까운 미래에 로봇이 인간을 능가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자연 선택과 문화적 요인이 뒤섞여 진화의 효과를 가려내기도 쉽지 않다. 의학과 유전공학의 발달, 빈부 격차 등도 불확실성을 높인다. 
 
예를 들어, 수렵채취인보다 현대인은 확실히 두뇌를 덜 쓰기 때문에 뇌가 작아질 수 있다. 반대로  제왕절개 시술로 인류의 두뇌가 무한정 커지는 걸 가로막던 골반을 우회하는 길도 열렸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이 있다. 인류는 이제까지의 진화 경로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걸을 것이란 점이다. 
 
인류는 지난 80만년 동안 겪지 못한 수준으로 대기의 이산화탄소 농도를 높여 빙하기 도래를 늦추고 있고, 바다 산성화는 지난 3억년 동안 보지 못했던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지구의 생명질서는 대격변을 맞고 있다. 이제 인류는 처음으로 진화의 방향을 스스로 정하는 동물이 될지도 모른다.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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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원생부터 ‘사상교육’을 하겠다는 ‘국가보훈처’

 
 
어른들의 삐뚤어진 권력욕을 위해 사상교육을 하겠다는 국가보훈처의 모습
 
임병도 | 2015-09-19 09:58:26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새정치민주연합 강기정 의원에 따르면 국가보훈처는 지난 6월 4일 기획재정부에 요구한 예산안에서 나라사랑교육 관련 예산으로 무려 5,484억 4,800만 원을 요구했습니다. 이는 올해 관련 예산인 20억 3,500만 원의 269.5배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국가보훈처가 ‘나라사랑교육’ 예산으로 하려고 하는 일들을 보면 유치원부터 초중고,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사상교육을 시키겠다는 의도가 명백합니다.

△전국 유치원의 10%를 나라사랑 꾸러기 유치원으로(106.34억) 
△전국 초중고의 3%를 나라사랑 연구학교로 (87.1억), 
△전국 초중고의 10%를 나라사랑 실천학교로 (137.3억), 
△전국 대학의 10%를 나라사랑 특성화 대학으로 (41.3억), 
△전국 초중고교에 호국안보 전담교사를 배치(3,422억 4,000만 원), 
△현재 120명인 나라사랑 전문강사단을 2,000명으로 (240억), 
△올해 600회(계획)의 나라사랑교육 횟수를 95,000회까지

 
‘한국보훈안보단체연합회 신년교례회(2013.1.9. 중앙보훈회관)’ 강연 동영상에서 박승춘 처장은 “국방부는 군사 대결 업무를 하지만, 이념 대결 업무는 어디서 합니까?” 라고 묻고, “지금 우리 정부 부서에 이념 대결에 대한 업무를 하는 부서가 불분명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제가 2년 동안 국가보훈처가 우리 국민의 안보 의식을 함양시켜서 이념 대결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선제 보훈정책을 추진하는 업무를 했는데, 제가 알아보니까 국가보훈처가 이 업무를 하기에 가장 적합한 부서입니다.” 라고 하고, “본부가 있고, 지방청, 지청을 가지고 있어 가지고 전국적으로 이 업무를 할 수 있다.” 라고 설명했습니다.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강기정 의원 등은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을 ‘국가공무원법 위반’혐의로 검찰에 고발했지만, 아직도 수사는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강 의원은 “2년 전 온 나라를 충격에 빠뜨렸던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의 대선 개입 때 그대로 나라사랑교육을 계속하겠다는 것” 이라며 “총선을 앞두고 이런 생각으로 나라사랑교육을 대폭 확대하겠다는 것은 총선개입을 더 하겠다는 것” 이라면서, “국가보훈처가 내년 나라사랑교육 예산을 올해 대비 100배 넘게 편성했는데 이를 예산 심사에서 전액 삭감할 것” 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른들의 삐뚤어진 권력욕을 위해 유치원생부터 대학생까지 사상교육을 하겠다는 국가보훈처의 모습을 보면, 도대체 한국이 미래를 향해 가는 것인지, 반공시대로 후퇴하고 있는지 답답하기만 합니다.


[진실의길. 기고 글&기사제보 dolce42@naver.com]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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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철수 박근혜퇴진 1인시위 탄압을 규탄한다.

 
 
미국 대사관 앞에서 일인시위 한다는데 왜 막습니까?
 
이성원 기자 
기사입력: 2015/09/18 [15:19]  최종편집: ⓒ 자주시보
 
 

 

▲ 광화문 KT 앞에서 열린 <미대사관, 청와대, 종로경찰서 1인 시위 탄압 규탄 및 박근혜 퇴진, 미군철수 촉구 집회>에서 우리사회연구소 권오창 이사장이 발언에 앞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집회장 뒤로 미국 대사관 건물이 보인다.  2015. 9. 16.     © 자주시보 이성원 기자

 

9월 16일 광화문 미국대사관 건물이 바라보이는 KT 광화문지사 버스정류장 인근에서 자주통일과 민주주의를 위한 코리아연대(이하 코리아 연대)가 “미 대사관, 청와대, 종로서 1인 시위 탄압 규탄 및 박근혜 퇴진, 미군철수 촉구 집회”를 열었다.


 코리아연대 김대봉 회원의 사회로 진행된 이 날 집회에서 권오창 우리사회연구소 이사장이 발언에 앞서 “주한미군 몰아내고 조국통일 앞당기자! 우리민족끼리 힘을 합쳐 조국을 통일하자!”라고 구호를 외쳤다.


이어진 발언에서 “우리 민족끼리 통일해서 남과 북 해외동포가 어울려서 살 맛 나는 세상 만들어서 살아보자. 젊은 학생들도 조국과 민족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젊은이가 되기를 바란다.”고 발언을 하였다.

 

▲ 광화문 KT 앞에서 열린 <미대사관, 청와대, 종로경찰서 1인 시위 탄압 규탄 및 박근혜 퇴진, 미군철수 촉구 집회>에서 민통선 평화교회 이 적 목사가 발언하고 있다. 집회장 뒤로 미국 대사관 건물이 보인다. 2015. 9. 16.     © 자주시보 이성원 기자

 

두 번째 발언자로 나선 민통선 평화교회 이 적 목사는 미국이 이 땅에 들어온 지 분단 70년이 되었고 미군 맥아더는 자기 스스로 이 땅에 점령군으로 왔다고 말을 했다. 그리고 그 점령군의 모습이 70년이 지났어도 변하지 않고 있다고 발언하였다.


이 적 목사는 또, 얼마 전 보안수사대에서 조사에 받은 내용 중에 보안수사대는 반미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치고 미국을 욕한 것에 대해 국가보안법으로 옭아매려 한다고 성토하며  “내가 미국을 욕하는데 내 나라를 욕하는 것도 아니고, 미국이 이 땅을 수탈하는 모습을 참기가 힘들어서 이 땅의 백성의 한 사람으로서 외치고 있는데 왜 그 말들을 못하게 합니까?
이 땅에 있는 미국 대사관 앞에서 일인시위를 한다는데 왜 미 대사관이 막습니까?
이 땅의 국민이 스스로 자주권이 있다면 경찰 여러분은 왜 일인시위 하는 것을 막습니까?
일인시위는 코리아연대 단체의 개인적인 이익이 아니라 이 땅의 해방과 이 땅의 통일을 위해서 외치고 있는 우리 백성들의 대표적 함성입니다.“라고 일갈하였다.


마지막으로 “더 이상 (미국은 정체를) 숨기지 말고 미국은 이 땅을 떠나야 합니다. 더 이상 이 땅의 자주권을 침탈하지 말고 미국은 이 땅을 떠나야 합니다. 경찰 여러분은 미국의 꼭두각시놀음하지 말고 쇠침을 놓아서 일인시위 하는 자주 국가 국민을 탄압하지 말아야 합니다. 일제의 꼭두각시놀음을 했던 순사가 있었듯이 종미의 꼭두각시놀음을 하는 경찰이 아니기를 바랍니다.”고 미군철수를 촉구하며 발언을 마쳤다.

 

▲ 광화문 KT 앞에서 열린 <미대사관, 청와대, 종로경찰서 1인 시위 탄압 규탄 및 박근혜 퇴진, 미군철수 촉구 집회>에서 코리아연대 회원이 미국 대사관 앞 1인 시위 자리에 경찰이 쳐놓은 접근 방지선과 차량 돌진 방지용 쇠침판 사진을 들고 경찰의 방해를 규탄하고 있다. 2015. 9. 16.     © 자주시보 이성원 기자

 

이어진 발언자들은 1인 시위 방해 조치의 배후에는 <청와대의 상전 미국 대사관>이 있다고 주장하며 그 방해 증거사진을 제시하였다.

 

마지막 순서로 성명을 발표하였으며 성명의 주된 내용 중에 평화적 반미시위를 탄압한다면 “평화적 반미 시위의 도수를 결정적으로 높여 나갈 것이며 그 실천적 조치의 범위 안에는 미국 대사관 진입이 포함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후 집회 참가자는 “만악의 근원 분단의 원흉 미군은 이 땅을 떠나라!”라고 구호를 외치며 광화문 세월호 광장을 거쳐 정부 서울 청사 앞까지 거리행진을 하였다.

 

▲ 광화문 KT 앞에서 열린 <미대사관, 청와대, 종로경찰서 1인 시위 탄압 규탄 및 박근혜 퇴진, 미군철수 촉구 집회> 후 거리행진 중 광화문 세월호 농성장에서 연대를 표하고 있는 집회 참가자 2015. 9. 16.     © 자주시보 이성원 기자

 

▲ 광화문 KT 앞에서 열린 <미대사관, 청와대, 종로경찰서 1인 시위 탄압 규탄 및 박근혜 퇴진, 미군철수 촉구 집회> 후 정부 서울 청사까지 행진하고 마무리 집회를 하고 있다. 2015. 9. 16.     © 자주시보 이성원 기자

 

관련 성명 전문을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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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미대사관과 청와대, 종로서는 경거망동하지 말아야 한다
- 코리아연대의 집회·시위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허용하라 !

 

이 사회에 표현의 자유가 있는가. 말로는 자유민주주의라고 하는데 실제 무슨 자유가 있고 민주주의가 있는가. 표현의 자유가 있기는 있다, 손톱만큼! 이 자유를 누리려면 이 손톱위에서 엄지발가락으로 서는 발레리나의 고난도 예술적 기교가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리아연대는 자주통일과 민주주의를 위한 표현에서 이 손톱만큼의 합법성도 소중히 여기고 그에 충실하였다. 결과는 어떠한가.

결국 코리아연대회원들은 지난 1년간 합법적으로 1인시위를 하던 인도에서 차도로 쫓겨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자리는 무슨 봉을 보호하는 해괴한 폴리스라인이 쳐지더니 심지어 차량돌진방지용쇠침들까지 놓여졌다. 도대체 누가 이곳을 향해 차를 몰고 돌진하겠는가. 이렇게 해서 지난 1년간 허용되던 손톱만큼의 표현의 자유마저 철저히 유린되었다. 종로서경찰들이 확인해주는대로 이 모든 황당하고 악랄한 조치의 배후에는 미대사관이 있다는데 우리는 특별히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우리가 늘 <청와대의 상전 미대사관>이라고 주장하던 사실이 또다시 입증되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미대사관은 역사적으로 있어온 모든 군사쿠데타와 대선부정, 남북대결책동, 북침군사연습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이땅의 실질적인 지배자이다. 군사와 경제의 명맥을 장악한데 기초해 정치적으로 청와대를 꼭두각시처럼 조종하는 곳이다. 그래서 도둑이 제발 저리듯이 코리아연대의 조용한 1인시위조차 이처럼 가혹하게 탄압하는 것이고 평화적인 반미시위에도 저리 두려워 떠는 것이다.

코리아연대가 지난 7월 4일 4가지요구사항을 내걸고 4가지투쟁을 선포하였지만 모두 철두철미 평화적인 방식으로 일관하였다. 오직 이 사회의 <성역 중의 성역>인 미대사관을 향해 민심을 담아 할말을 하며 당당히 나아갔을 뿐이다. 이는 당연히 헌법이 보장한 집회·시위의 자유로 보호되어야 한다. 허나 미대사관의 조종을 받는 청와대, 그 청와대의 하수인인 종로서는 시종일관 가혹한 탄압으로만 나왔다.

심지어 지난 9월8일 9차때는 촬영하는 두 여기자와 그 차의 운전자까지 연행·구금하였다. 이는 지난 7월27일 6차때 남성·여성 두명의 촬영자를 연행한 데 이은 파쇼적 폭거이다. 도대체 이 지구상에 시위를 촬영한다고 잡아가는 나라가 어디 있으며 나아가 촬영기자를 구금하는 곳이 어디 있는가. 종로서는 이미 5월16일 청와대앞시위를 촬영하던 여기자를 연행·구금했던 곳이니 한마디로 상습적인 파쇼적 폭압기관이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다. 여성시위자들을 연행하는 과정에서 집단적으로 성추행하는 만행도 이제는 아예 노골적으로 매번 어김없이 벌이고 있다.

자유민주주의의 초보적 자유인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를 유린하고 집단성추행을 벌이는 종로서와 그 배후의 청와대, 미대사관을 향해 코리아연대는 정의로운 투쟁을 결코 멈출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코리아연대는 이 자리에서 분명히 밝힌다.

첫째, 만약 종로서가 이후에도 촬영자를 연행하고 여성시위자를 성추행한다면 코리아연대는 미대사관을 향한 평화적인 반미시위의 도수를 결정적으로 높여나갈 것이다. 그 실천적 조치의 범위안에는 미대사관진입이 포함될 것이다. 한마디로 선택사항이 필수사항이 되고 그 시기도 앞당겨질 것이다. 둘째, 종로서가 당장 1인시위자리에 매어놓은 폴리스라인을 해제하고 우스꽝스러운 훼방책동을 중단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1인시위의 도수 또한 비상히 높아지며 때로 철야도 불사할 것이다.

코리아연대는 빈말을 하지 않는다. 미대사관·청와대·종로서는 어리석은 공안탄압과 야수적인 폭력만행을 중단하고 민심이 원하는대로 박근혜는 당장 물러나고 미군은 이땅을 떠나야 할 것이다.

                                                    2015년 9월16일
                                        자주통일과민주주의를위한코리아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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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화 속에 평화의 꽃 피운 불굴의 정원사


<인터뷰> 평양 국제유소년축구대회 이끈 (사)남북체육교류협회 김경성 이사장
이승현 기자  |  shlee@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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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9.18  18: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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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측 선수단을 이끌고 평양에서 열린 제2차 국제유소년 축구대회에 참가했던 김경성 남북체육교류협회 이사장과 17일 인터뷰를 가졌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포화 속에 탄생한 평화의 꽃’.
지난달 16일부터 24일까지 평양 능라도의 5월1일경기장에서 열린 ‘제2차 국제유소년(U-15)축구대회’를 일컬어 나온 표현이다.

그도 그럴 것이 선수단의 입국을 이틀 앞둔 지난달 14일 남북은 열흘 전 파주시 군사분계선(DMZ)에서 발생한 지뢰폭발 사건을 두고 서해지구 군 통신선으로 ‘군사적 결판을 내보자’, ‘가차없이 응징할 것’이라며 일촉즉발의 충돌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16일 남측 선수단을 포함해 165명의 방북단을 이끌고 평양에 들어간 김경성 남북체육교류협회 이사장은 그 와중에도 남북고위당국자접촉이 시작되기 하루 전인 21일부터 극적 타결에 이른 24일까지 평양 5월1일경기장에서 8개 참가팀을 2개조로 나누어 조별예선을 거쳐 순위결정전과 준결승, 결승전까지 예정된 경기를 치러야했다.

대회가 끝날 때까지 몸은 경기장 주석단에 앉아 있지만 눈과 귀는 온통 군사분계선에 가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비상연락망을 통해 한국 정부와 통화하면서 북측으로부터 신변안전 담보를 받고 여차하면 조기철수를 할 수도 있다는 전갈을 받고 북측과 긴박한 협의가 있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대회를 계속하겠느냐는 의사를 북측과도 수시로 상의하고 확인하면서 대회는 진행됐다.

김경성 이사장은 평양 대회를 마친 후 지난 14일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이 마련한 정례 정책포럼에 참석해 ‘체육교류로 열어가는 남북화해와 평화’를 주제로 긴박한 당시의 상황을 소개했다.

이 자리에서 김 이사장은 도무지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상황에서 연이어 대규모 방남과 방북을 성사시킨 불굴의 의지와 비결을 담담하게 풀어놓았다.

17일 오후 경기도 고양시 (사)남북체육교류협회에서 김 이사장을 만나 며칠 전 포럼에서 못 다한 뒷이야기를 더 들었다.

그는 오랜 고민 끝에 마침내 결론에 도달했다는 듯 ‘포화 속에 탄생한 평화의 꽃’이라는 시적인 표현으로 자신이 오랜 기간 공을 들여 성사시킨 ‘국제유소년(U-15)축구대회’를 정의했다.

이번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사실 지난해 11월 경기도 연천에서 열렸던 제1차 국제유소년(U-15)축구대회 당시에도 북측 선수들이 입국하기 20일 전에 북에서 대북전단을 향해 포격을 가하고 이에 다시 남측이 대응사격을 하는 등 정전상태인 한반도의 긴장이 유감없이 펼쳐진 상황이었다.

   
▲ 김경성 이사장은 지난 14일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정책포럼에서 '체육교류로 열어가는 남북화해와 평화'를 주제로 지난 10년간 자신의 경험을 담백하게 소개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통일뉴스 : 대회 성사에 대해 반신반의하는 분위기가 적지 않았다. 쉽지 않은 긴장 상황에서 대회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비결이 있었다면?

■ 김경성 이사장 : 지난 8월 16일 남측 선수·임원만 84명 방북했는데, 이건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최초의 대규모 방북사례가 된다. 2회 평양대회는 직전까지 남북이 비보도 보안을 지키면서 철저한 준비작업을 거쳐 8월 15일에야 첫 보도를 했다.

8월 14일 지뢰폭발 남북 군사상황이 시작됐는데, 남측 당국에서 16일 방북을 승인했다. 다른 사업 같았으면 못 가게 했을 것이다. 17일부터 한미 을지훈련기간이 되면서 군사적 긴장 수위가 높아진 상황이었기 때문에 정부로서는 국민의 신변안전에 대한 우려를 할 수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정부에서도 보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작년 1회 대회 때 유사한 군사긴장 상황을 겪고도 북에서 내려오면서 이미 대회의 체질이 강하게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1회 연천대회도 군사적 충돌 상황속에서 잘 치러졌다. 그런 군사상황에서도 북이 내려왔다는 것은 그동안 남북체육교류협회가 북과 지속적으로 해 왔던 평화적 사업의 성과가 이어진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 때도 북측 4.25체육단이 우승했는데 4번의 만찬에 모두 참가했다. 우리 측 남경필 도지사를 비롯한 여야 국회의원, 지자체 단체장, 기업인 등 700여명이 북측 선수 및 임원들과 대화의 기회를 가졌다.

작년 연천 대회 이전에 남북 간에 대화가 거의 없었는데, 결국 축구대회를 하다보니까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큰 틀에서 보면 남북대화의 통로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 셈이다.

11월 국내에서 3회 국제유소년축구대회 개최

□ 평양대회 이후 연속적으로 구상, 계획하고 있는 일이 있다면 소개해 달라.

■ 15세미만 국제유소년축구대회는 작년 1회 대회 때부터 북측과 남북체육교류협회가 장기사업으로 합의한 것이다. 기본 틀은 봄에는 평양, 가을에는 남측 도시, 겨울에는 중국이나 유럽, 남미 등 따뜻한 나라에서 개최하도록 되어 있다.

이번 2회 평양대회를 봄에 하지 못한 이유는 남북관계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그런 것이고 3회 대회는 가을에 남쪽으로 내려올 차례이다.

김 이사장은 14일 포럼에서도 현실적 일정을 고려할 때 이산가족 상봉행사가 끝나는 11월쯤 경기·강원도에서 3회 대회를 준비하겠다고 설명했다. 다만 대회 장소는 여러 지역이 경합하는 만큼 특정하지는 말자고 덧붙였다.

□ 무리한 일정은 아니라고 본다는 건가.

■ 제가 추진을 안 하면 몰라도 추진을 하면 가능할 것이다. 다만 3회 대회가 2회 평양대회 일정과 간격이 너무 짧고 내년 1월 겨울대회를 치러야 하기 때문에 꼭 해야 하느냐는 고민을 하고 있다.

□ 지난 14~15일 북에서 국가우주개발국, 원자력위원회 등을 앞세워 위성발사와 핵실험 의지를 밝힌 상황인데 대회 진행에 문제는 없을 것으로 보나?

■ 남북 간에 실제로 포탄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과 견주어서 위성 발사 등 의사표시를 한 것이 더 큰 긴장상황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또 북에서 인공위성을 쐈으니 유엔이 나서서 국제대회를 하지 말라고 제재할 수 있는 사안이라고 보지 않는다.

우리 정부가 ‘No’라고 할 수는 있지만, 그래도 이산가족 상봉을 해야 한다는 분위기인데 과연 평화적인 경기까지 손을 댈 것인지는 생각할 여지가 있다.

북측에서 내려오지 않는다는 것도 가능성이 낮다고 본다. 이미 가장 기분 나쁠 수 있는 대북 삐라를 뿌린 연천지역에도 와서 경기를 치르지 않았나.

   

▲ 8.24. 능라도 5월1일경기장에서 제2회국제유소년축구대회 우승팀인 북측 4.25축구단에 김경성 이사장이 우승 트로피를 수여하고 있다. [사진제공-남북체육교류협회]

□ 유소년축구대회 북측 파트너십이 다소 복잡해 보이는데 알기 쉽게 설명해 달라.

■ 남북체육교류협회의 북측 파트너는 국방위원회에 소속된 위원회인 4.25체육단인데 군 소속이라는 특성상 남측 민간과 연계해주는 민족화해협력위원회(민화협)이라는 창구가 필요한 것이다. 북측 민화협은 국제대회와는 직접 상관없고 창구역할에 그치는 것이다.

또 4.25체육단이 국제축구대회를 주최하기에 적절하지 않으니 국가체육지도위원회, 체육성, 조선축구협회 등을 거쳐 평양국제축구학교로 대회 주최가 조정된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국제유소년(U-15) 축구대회는 남북체육교류협회(이사장 김경성)와 평양국제축구학교(교장 현철윤)가 공동 주최하는 행사로 남측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경기도, 강원도, 연천군이 후원하고 있다.

□ 유소년축구대회의 참가범위를 더 넓히거나 확대해야 하지 않나.

■ 그렇다. 작년 1회 대회 때는 남북을 포함해서 중국, 우즈베키스탄 등 4개국이 참가했었다. 이번엔 거기에 남미의 브라질과 유럽의 크로아티아가 추가로 참가했다. 세계적인 규모로 확대된 것으로 볼 수 있다.

FIFA대회는 17세 대회부터 시작되고 그 미만 연령대의 대회는 없다. 또 15세 유소년대회에서 세계적으로 권위있는 대회가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에 남북이 공동으로 추진하는 이 대회를 발전시킬 수 있다.

또 남북관계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을 때 경기를 성사시켰던 과정을 돌이켜 보면 앞으로도 남북 당국이 이 대회를 관계 개선 등의 평화적 사업에 적극 활용할 수 있다고 본다.

   

▲ 개보수 공사를 마치고 제2회 국제유소년축구대회가 진행된 평양 능라도 5월1일경기장 전경. [자료사진-통일뉴스]

□ 이번에 대회를 치룬 5월1일경기장은 북에서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인 ‘아리랑’공연으로 유명한 곳이다. 김정은 제1위원장의 지시로 지난해 10월 개보수 공사를 마치고 준공한 이후 이번 대회가 5월1일 경기장에서 처음으로 열린 국제대회였다고 들었다.

5.1경기장에서 '아리랑' 대신 월드컵 예선전을

■ 과거 5월1일경기장은 국제축구연맹(FIFA)의 승인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월드컵 지역 예선도 김일성경기장에서 치를 수밖에 없었다. 5월1일경기장은 15만 명의 관중이 들어가는 거의 세계 최대 규모의 경기장이다. 김정은 제1위원장이 새로 짓다시피 개건을 한 후 북은 특히 홈앤드 어웨이 방식으로 진행되는 월드컵 예선 경기를 이곳에서 진행할 계획을 갖고 있다.

이번 대회에서도 봤지만 15만 명의 관객이 뿜어내는 엄청난 축구열기를 세계에 송출하려고 하는 것이다.

북한은 스포츠를 통해서 내부결속과 함께 북의 위상을 키우고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도 시도하는 것으로 보인다.

체육강국의 메시지를 통해 내부결속도 시키지만 국제적으로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아리랑은 더 이상 계획이 없다고 봐야 할 것 같다.

과거에는 북에서 내부결속 수단으로 봄부터 대규모 인력을 동원해 ‘아리랑’을 준비하면서 여름, 가을까지 집단체조를 했는데, 지금은 스포츠를 주요 매개로 활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리랑 축제가 가졌던 효과나 의의가 스포츠로 전환된 것이라고나 할까.

또 최근에는 국제대회에서 메달을 따오는 엘리트 체육 외에도 생활 스포츠를 강화하고 있지 않나. 이는 국민건강에 대한 홍보와 함께 개선되고 개방된 북한 사회의 모습을 외부에 보여주는 메시지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5월1일경기장은 다목적 체육경기장으로 새로 지어졌다. 북측 매체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준공한 5월1일경기장은 15만석의 관람석을 가진 축구장과 육상주로, 예비 운동실, 선수침실, 감독실, 심판원실, 검사등록실 등이 국제기준에 맞게 갖춰졌으며, 수영장, 탁구장, 미니골프장, 피로회복실을 비롯한 체육 및 문화 후생시설과 서비스 시설이 최상의 수준에서 완비되어 선수들의 훈련과 경기는 물론 관람객의 편의도 충분히 보장할 수 있게 됐다.

이에 따라 경기장에서는 축구경기 외에 마라톤을 비롯한 육상종목들과 탁구, 수영 경기 등이 열리게 된다.

   

▲ 평양 능라도 5월1일경기장에서 진행된 제2회 국제유소년축구대회 모습. [사진제공-남북체육교류협회]

양궁·마라톤·격투기도 남북교류 유력 종목

□ 축구 외에 다른 경기 종목들에 대한 협조와 교류도 진행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 2년 전부터 양궁장비를 꾸준히 지원해 왔다. 양궁장비는 1세트에 보통 1만 달러 정도 된다. 어지간한 초정밀 총포보다 비싼 고가 장비인데, 지금까지 정부 승인을 받고 20세트 이상 보내줬다.

지난해 5월 중국 강서성에서 남북 양궁대회를 열었는데, 장비 활용과 기술 교류뿐만 아니라 선수지도도 진행했다. 북에서도 세계 최고 수준인 한국 감독들을 인정한다. 또 실제로 성적이 좋아지니까 북측도 양궁교류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바라고 있다.

□ 남측 감독들이 평양에 가서 가르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지 않나.

■ 양궁은 특히 단기적으로 열흘 정도만 지도해도 효과가 크다. 장비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성적이 확 달라지기 때문에 기본 장비에 선수 체형별로 맞춤형으로 활용하는 방법, 야외경기에서 바람에 적응하는 방법 등을 ‘원포인트’ 지도방법만 가져도 상당히 효과가 있다.

또 북측 선수들이 집중력이 대단하기 때문에 단기적인 기술전수만 이루어져도 성적이 많이 오를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 그밖에 어떤 경기종목이 남북 교류에 유력하다고 볼 수 있나.

■ 남북이 함께 교류하면서 발전해 나갈 수 있는 종목으로 축구와 양궁, 마라톤을 꼽고 싶다.

축구는 전 세계가 열광하는 종목이고 양궁은 우리 민족이 잘하는 종목이며, 마라톤은 일제 강점기를 겪은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민족의 모습을 상징하는 종목이라고 생각한다.

또 북한이 전통적으로 격투기가 강하다. 복싱, 레슬링, 유도, 특히 태권도 등. 그런데 북은 격투기에 강하면서도 개정된 룰 등에 대한 숙지가 덜 되어서 불이익을 받는 경우가 있다. 반면 남측은 약해지고 있다. 사회체육 저변이 확대되면 격투기는 약해질 수밖에 없다. 오히려 격투기 종목에서는 기술이나 시설, 인프라, 용품 등 북을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선전하지 말고 성과내라'

□ 사업적으로 많이 힘들었을 것 같은데, 사업수지는 어떻다고 할 수 있나.

■ 수익사업으로 한 것이 아니라 지원사업으로 한 것이니까 대차대조표를 따지는 건 생각해 보지 않았다. 개인재산은 많이 썼다.

살면서 진화된다고 할까. 돈을 벌기 위해서만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남북교류 사업을 하면서 이 분야로 진화되면서 행복도 찾아지는 것 같다. 물론 돈을 벌고 싶지만 남북이 같이 버는 사업을 만들면서 벌고 싶다.

□ 남북관계가 곡절이 많았는데 흔들리지 않고 대회를 지켜온 비결을 이야기해 달라.

■ 2006~2008년까지는 이 대회가 남북을 오가며 진행되던 정기교류전이었다. 남측 선수들을 매년 봄·가을에 6번 평양에 데리고 갔고 같은 기간에 북 선수들은 남측에 4번을 방문했다.

3년간 남북 선수들이 남북을 10회 왕래했던 거다.

이렇게 정착되던 남북유소년축구대회 정기교류전이 2009년 북한의 2차 핵실험 이후 남북에서 할 수 없게 됐다. 다른 사람들이 다 중단했을 때 이 대회를 중국으로 가져가서 매년 겨울에 남북 선수들이 만나서 합동훈련도 경기도 했다. 2014년 겨울까지 중국에서 하다가 박근혜 정부 들어 남북 스포츠 교류는 허용을 했기 때문에 작년에 연천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

지난 10년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작년에 포탄이 날아다니던 연천으로 북측 선수들이 내려 온 것이다. 이게 기본적인 동력이라고 생각한다.

또 하나, 평양공단을 개발하다가 5.24로 막혔을 때 그 기반을 단둥으로 옮겨서 축구화를 만드는 아리스포츠공장을 했다. 이런 경험들이 쌓이다보니 북측과 두터운 신뢰가 쌓인 것 같다.

김 이사장은 지난 14일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정책 포럼에서도 “통일사업은 일관되고 지속적인 사업이어야 한다”며 조급하게 선전하려 하지 말고 성과를 내는 데 주력하라고 조언했다.

그리고 지난 8월 뜨거웠던 평양에서 9박10일을 함께 한 관계자들과 함께 만찬장에서 ‘홀로아리랑’의 가사를 읊었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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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 명백한 타살... 이제라도 기록 공개해야"

 

[인터뷰]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 펴낸 고상만

15.09.18 19:42l최종 업데이트 15.09.18 19:42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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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준하와 함석헌
ⓒ 함석헌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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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1918~1975)가 패기 있고 기상이 활달한 '행동가'였다면 함석헌(1901~1989)은 촌색시 같이 수줍음을 잘 타는 내성적인 '사상가'였다. 장준하는 일제강점기 광복군으로 총을 들고 항일운동을 벌였던 반면 함석헌은 그의 격렬한 말과 글로 낙심에 빠진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고난을 극복할 용기와 희망을 심어주었다. 박정희 독재정권 시절 장준하는 '야당정치인'으로 독재자 박정희와 정면대결을 벌였고 이 시기 함석헌은 '재야언론인'으로 박정희정권의 잘못을 누구보다 거침없이 비판했다.

장준하와 함석헌의 삶의 모습은 이렇게 겉으로는 차이가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또 중요한 공통점이 있었다. 두 사람은 다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가였고 해방 후 이승만·박정희 정권기에는 민주화운동가였다. 이 땅의 언론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장준하와 함석헌은 '바늘과 실'처럼 한 마음 한 뜻으로 행동했고 그 과정에서 그의 가장 소중한 가족들은 말 못할 고초를 겪었다.  

1975년 8월 17일 박정희 독재정권시절 장준하가 의문사 당한 후 함석헌은 장준하에 대한 인물평을 이렇게 했다. 

"그(장준하)는 어릴 때부터 죽을 때까지 이 나라의 잘못된 것을 올바르게 고쳐보려고 온갖 노력과 투쟁을 한 사람입니다."

그렇다! 함석헌의 평가처럼 장준하는 그저 삶의 매 순간을 오직 공익을 위해, 민족의 의를 위해, 사랑하는 가족의 희생을 감수하며 온갖 노력과 투쟁을 한 이다. 

나는 고상만을 지난 2004년 노무현정부 시절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직장동료'로 처음 만났다. 그때 그는 '장준하 의문사 사건' 조사관이었다. 1970년 대 말부터 '함석헌 환자'였던 나는 곧 정의감이 넘치는 '장준하 매니아' 고상만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고상만은 나의 후배이자 친구이면서 또 스승이 되었다.      

그런 고상만이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를 발간했다. 이 책은 박정희 독재정권시설 중앙정보부가 불법으로 민간인들을 사찰하고 야당 국회의원의 전화를 도청하는 등 박정희 독재정권이 저지른 추악한 국가범죄에 대한 기록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고상만의 말처럼 "중정이 장준하 선생을 상대로 한 사찰, 미행, 도청 그리고 사설 정보원 활용을 통한 정보 수집은 그때나 지금이나 해서는 안 될 정치 개입"이었다. 이렇게 박정희정권은 "국가의 안보와 상관없는 독재자의 권력 연장용 도구로서 국가권력을 이용한 것이다, 따라서 이는 처벌받아야 할 불법 행위이지 보호할 가치가 있는 국가 기밀이 아니다"라고 고상만은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에서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이 책에서 독자들은 중앙정보부가 작성한 장준하에 대한 '중요 상황 보고'를 통해 친일장교 출신 독재자 박정희가 광복군장교 출신의 야당 국회의원 장준하를 얼마나 비열하게 불법으로 감시하고 탄압했는지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또 고상만의 증언처럼 이 책을 통해서 "독재 권력이 국민의 인권을 어떻게 유린했으며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똑똑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또한 박정희 정권 시절 중앙정보부가 저지른 추악한 불법범죄행위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그래서 자신에게 다가올지도 모르는 커다란 불이익을 감수하고 당당하게 이 책을 세상에 내놓은 '스승' 고상만의 용기에 깊이 감사드린다. 다음은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의 저자 고상만과 <함석헌평전>의 저자인 기자가 지난 몇 달간에 걸쳐 국제전화와 이메일로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중앙정보부와 국가 권력기관 자료 토대로 책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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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 책표지
ⓒ 오마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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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출간을 축하드린다. 정말 어려운 시절에 큰일을 했다고 생각한다. 이번에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의 비밀 기록으로 새롭게 조명한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을 쓰기로 마음먹게 된 동기가 무엇인지 듣고 싶다.
"2015년 올해는 장준하 선생님이 돌아가신지 40주기를 맞이하는 해다.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는데 그 40주기에 선생님의 삶과 투쟁, 죽음에 대해 많은 이들이 잘 알 수 있도록 책을 쓰고 싶었다. 원래는 8월 기일에 맞춰 책을 내려 했는데 책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무리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더 좋은 책이 나왔다고 생각한다."

- 지난 2012년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을 출간한 바 있다. 기존의 저서 그리고 다른 분들이 또 그동안 쓴 '장준하평전'과 이 책의 차이점이 있다면?
"이전에 나온 장준하 선생님의 평전과 이 책의 큰 차이점은 증언을 하는 이가 다르다는 점이다. 이전의 평전들은 장준하 선생님의 유족이나 지인, 또는 동지들의 증언을 주요 토대로 삼았는데 이번에 내가 쓴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 평전은 생전 장준하 선생님을 지독하게 감시했던 중앙정보부 등 국가 권력기관이 기록한 자료를 토대로 책을 썼다는 점이 큰 차이점이다. 이를 통해 장준하 선생님의 말씀을 그대로 담을 수 있었다. 나 역시 평전을 쓰며 매우 흥미로웠던 이유다."

- 20세기를 살다 간 장준하 선생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 21세기를 살고 있는 오늘 우리, 특별히 젊은 세대들이 아는 일이 왜 중요하다고 생각하나?
"2015년 올해는 대한민국의 광복 7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에 국가 차원에서 다양한 기념행사를 가졌는데 나는 장준하 선생님 자체가 '대한민국 광복 70년 역사'라고 생각했다. 일제강점기에는 광복군으로, 또 해방후에는 <사상계> 언론인으로, 이어 독재 권력하에서는 민주 투사로, 이를 제도적으로 바꾸기 위해 국회의원을 지낸 장준하 선생님의 삶을 알게 된다면 나는 그것이 대한민국 광복 70년 역사를 제대로 아는 것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따라서 지금의 젊은 세대가 장준하의 삶을 알아가는 것이 또 다른 역사 공부라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을 가장 사랑한 사람, 바로 장준하였기 때문이다."   

- 지난 1974년 1월 15일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장준하 선생은 박정희 독재정권 하에서 징역 15년을 받고 민간인 신분임에도 군사재판을 받는다. 당시 박정희가 장준하 선생을 감옥에서 죽이려 한다는 소문도 돌았다. 이런 소문이 사실이었나?
"사실이었다. 박정희는 장준하를 죽이고 싶었다. 이를 위해 제일 처음 한 일이 바로 1974년 긴급조치 1호를 선포한 것이다. 박정희는 이러한 긴급 조치 발동을 통해 장준하를 감옥에 15년간 갇아 두려고 했다. 당시 장준하 선생님은 56세였는데 만약 15년을 다 살고 나온다면 일흔이 넘는 나이가 된다. 

이 당시 우리나라 평균 수명이 60세를 갓 넘었을 때였는데 협심증을 앓고 있어 건강이 좋지 않았던 장준하가 감옥에서 일흔을 넘겨 건강하게 나올 수 있다고 여긴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당시 미국 정부의 압력으로 박정희 정권은 장준하를 불과 10개월 만에 석방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장준하 선생의 저항은 계속되었고, 결국 중단하지 않는 장준하 선생의 저항이 비극적인 의문사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나는 확신한다."  

- 장준하가 의문사 당하기 20여 일 전인 1975년 7월 말 그는 김대중을 찾아 갔다. 당시 그는 김대중을 찾아가 "당신이 못 움직이니 내가 움직이겠다"며 "희생을 각오하고 싸울 터이니 힘을 합치자"고 제안했다. 함석헌은 이를 놓고 "장준하가 김대중과 화해한 것이 죽음을 불러왔어, 저놈들이 둘이 합치면 어찌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지, 둘 중 하나는 죽어야만 했을 것이야"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장준하가 의문사 당하기 전 김대중과 화해한 것이 그가 의문사 당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판단하나? 
"함석헌 선생님의 말씀은 매우 정확한 인식이었다. 실제로 2003년 12월 당시 나는 돌아가신 김대중 전 대통령님을 김대중도서관에서 만나 장준하 선생님의 사인에 대해 면담을 한 적이 있는데 이날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도 하신 말씀이 있다. 

'장준하 선생님이 박정희 정권에 의해 피살되었다고 하는 의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냐'는 물음에 대해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는 '나도 1973년에 암살당할 뻔했는데 장준하 선생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답변한 사실이 있다. 나 역시 박정희 권력하에서 가장 두려워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님과 장준하 선생님이 화해하면서 거사를 논의하는 상황을 중정이 알게 되었고 결국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장준하 선생이 변을 당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지금이라도 장준하 선생에 대한 국가기록 공개해야"

- 지난 1975년 8월 17일, 장준하 선생이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사 당한 날 당시 중앙정보부는 어떤 기록을 남겼나?
"단 한 장의 문서만 남겼다. 이는 대단히 이상한 일이었다. 평소 시간대 별로 별스럽지 않은 일조차도 장준하 선생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기록으로 남겨놨던 중정이 정작 사건이 발생한 당일에는 사고가 발생하여 사망했다는 단 한 장의 문서만 남겨 놨다. 그리고 그 다음에 생산된 문서는 다음날인 18일 오전 7시 57분경, 장례 일정에 대한 협의를 담아 보고서를 작성했다. 무려 11시간동안 공백이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사이 시간에 적어도 수차례의 추가 보고문이 있다고 확신한다. 의정부 지청 검사와 부검의 그리고 보안부대 고위 관계자가 사건 현장에 왔는데 이들이 무엇을 봤고 어떤 말을 했는지 기록하고 보고해야 하는데 이러한 내용이 일체 없다. 이는 중정 요원들조차 이상한 일이라고 조사과정에서 답한 바 있다. 지금이라도 이 기록은 반드시 공개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반드시 진실을 밝힐 것이다."

- 장준하 사후 장준하 선생의 사인에 대해 의혹을 제기했던 국내기자는 연행, 구속되고 또 외신기자는 아예 추방되기도 했다. 장준하가 정말 단순 사고인 추락사를 당했다면 박정희는 왜 그토록 진실을 은폐하고 철저하게 언론을 탄압했을까?
"중정은 장준하 선생의 사인 의혹에 대해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정말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많은 이들이 의혹을 제기하는 상황에서 우리가 아니면 다른 어느 기관이 했나 살펴볼 것 같기도 한데 전혀 그러한 흔적이 없다. 그런 상황에서 의혹을 제기한 <동아일보> 편집부 기자를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하는가 하면 의혹을 보도한 외신 기자를 추방하기도 한다. 장준하의 이름을 세상에서 지우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한다. 이러한 구체적인 내용을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에 잘 실었다. 그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말 놀라운 이야기들이 많다." 

- 장준하는 박정희 독재정권하에서 모두 37번 연행되고 그중 3번 구속되었다. 그후 포천 약사봉에서 장준하 선생은 의문사 당했다. 그러나 당시 장안에서는 박정희가 죽은 장준하조차 두려워한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는데?
"장준하의 사망 경위에 대한 보고는 대단히 엉성한데 반면 중정은 장준하 사후 장준하 선생의 유족과 동지들을 감시하는 데 더 많은 공을 들인다. 예를 들어 함석헌 선생님이 장준하 선생 사후 두 달여 만에 명동에서 추모제를 하려고 하는데 이를 저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1주기 기일 때는 더욱 그랬다. 그만큼 무서웠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장준하 선생을 박정희 권력이 얼마나 무서워했는지 알 수 있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죽은 사람조차 이렇게 두려워 할 지경이니 살아있는 장준하는 얼마나 무서웠겠나." 

- 일제강점기에는 광복군 그리고 해방 후에는 언론인으로 이승만과 박정희의 독재정권에 맞섰던 장준하 선생이 마침내 1967년부터 정치인으로서 본격적인 현실참여를 결심하게 되는 중대한 계기는 어디에 있다고 보나?
"박정희 권력은 장준하 선생의 <사상계>를 탄압했다. 판매방해와 세무조사로 이중, 삼중의 고통과 어려움을 줬다. 결국 장준하 선생은 더 이상 비판만으로는 박정희 권력을 제압할 수 없다고 판단한다. 그것이 바로 국회의원 선거출마였다. 이를 통해 국회에서 싸워 박정희 권력의 부도덕성과 야만적인 탄압에 맞서고자 했다. 만약 장준하 선생에게 조금 더 많은 권한이 부여되었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더 좋은 나라가 되었을 텐데... 많이 안타까운 생각을 가지고 있다."

- 장준하 선생은 부인과 3남 2녀의 가장이었다. 그러나 국회의원이 된 후에도 단 한 번 월급봉투를 집에 가져온 적이 없다고 한다. 또 그의 지인인 이행우 선생은 한 번 식사 시간에 우연히 장준하 선생 집을 방문하고 놀랐다고 기자에게 말했다. 그래도 명색이 국회의원인데 장 선생이 식사하는데 반찬이 깍두기 하나밖에 아무 것도 없었다고 한다. 왜 장준하 선생은 그토록 가난했을까?    
"높은 도덕성, 청렴성 그리고 가지지 못한 사회적 약자와 더불어 살고자 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난했다고 생각한다. 이 책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에서도 이러한 많은 일화가 들어 있다. 

예를 들어 장준하 선생은 국회의원 명함조차 만들지 않았다. 당시 국회의원 명함만 가지고 가도 마치 신분증처럼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시대였는데 장준하 선생은 그러한 부도덕한 일에 얽이지 않기 위해 아예 명함조차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이 책에 실린 장준하 선생의 부인 '김희숙 여사와 국회의원 명함' 일화는 글을 쓰는 나조차도 먹먹한 감동을 느끼는 일이었다. 이처럼 정직하고 청렴한 정치인을 다시 만나고 싶다."

"장준하, 절대 추락사 하지 않았다... 명백하게 타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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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의 저자 고상만.
ⓒ 고상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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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장준하 사건' 조사관을 지냈는데, 장준하 사건 조사관 입장에서 장준하 선생의 사인은 무엇이라고 추정하는가?
"내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다. 장준하 선생은 절대 추락사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명백히 타살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러나 '누가 죽였느냐'는 것으로 앞으로 국가차원의 조사 기구가 만들어져 그곳에서 책임있게 규명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여러 시나리오가 있는데 국가차원의 조사기구가 만들어진다면 내가 적극 지원하고 도와 남은 의혹을 명쾌하게 풀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자신 있다. 확실하게 진실을 규명할 것이다."

- 끝으로 장준하 선생이 한국역사와 사회에 남긴 소중한 유산은 무엇이라고 평가하는가?
"장준하 선생은 생전 '못난 조상이 되지 말자'고 말했다. 나는 그 말씀이 우리 사회에 남긴 소중한 유산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역시 못난 후손이 되지 말아야 한다. 나라를 생각하는 애국심, 이웃을 생각하는 연대감, 그리고 사회적 약자와 더불어 함께 가겠다는 인권의식이 나는 장준하 선생이 나에게 준 유산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시대는 다시 어둡지만 나는 긍정적으로 낙관한다. 장준하 선생이 꿈꾼 정직한 나라, 용기 있는 정의를 위해 나는 제2의 장준하처럼 살고자 노력한다. 이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한 명, 한 명 늘어난다면 나는 결코 절망하지 않아도 된다고 믿는다. 장준하 선생이 남긴 소중한 정신적 유산을 앞으로도 끊임없이 말하고 나 역시 그런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함께 가자!"

* 저자 고상만은 인권 운동가, '장준하' 선생 의문사 및 '친일 반민족행위자 재산 조사위원회' 조사관 역임, 98년 판문점 김훈 중위 등 의문사한 이들의 진실을 밝히고자 노력한다. 저서-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돌베개, 2012년), <다시, 사람이다>(책담, 2014년) 외 다수. 2012년 오마이뉴스 '올해의 뉴스게릴라상' 등 수상.


○ 편집ㅣ박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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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아 고맙다, 쌀 빼고 생태계 서비스 연 13조원

논아 고맙다, 쌀 빼고 생태계 서비스 연 13조원

이은주 2015. 0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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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상식 톺아보기-벼농사의 가치

전국 논의 홍수조절량 춘천댐 24배, 지하수 함양 소양댐 8배

여름철 냉각효과와 오염물질 정화, 산소 생산, 습지 생태계 구실도 

04453621_R_0.JPG» 경기도 김포의 가을 들판에서 벼가 누렇게 익어가고 있다. 논은 단지 식량뿐 아니라 수많은 가치있는 환경적 기능을 한다. 사진=김명진 기자


이제 열흘 뒤면 추석이다. 추석에 우리는 햅쌀로 밥을 지어 조상께 올린다. 밥은 우리나라 사람의 주식이다. 밥은 쌀에 물을 부어서 조리해 먹기 좋게 만든 것이다. 
 
그 쌀을 생산하기 위해 벼를 재배하는 곳이 논이다. 그런데 벼농사는 단순하게 쌀을 생산하는 농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환경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98년 충북 청원군 옥산면 소로리 오창과학단지 구석기 유적에서 출토된 볍씨가 관심을 끌었다. 이 볍씨가 나온 토탄층의 연대가 1만 3000여 년으로 확인됐기 때문이다.

 

사본 -03070789_R_0.jpg 
 
만약 이 볍씨가 묻혀있던 토탄층과 연대가 같다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 중 하나가 된다. 현재까지는 중국 허난성에서 출토된 약 1만 년 전 볍씨가 가장 오래되었다. 
 
토탄층에 묻힌 볍씨가 토탄층보다는 나중 것임은 분명하다. 그렇더라도 벼농사가 한반도에서 매우 오래전에 시작됐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04061996_R_0.jpg» 경기도 파주의 교하신도시와 황금빛으로 물들어가는 논. 벼는 열대작물이지만 오랜 세월에 걸쳐 온대 몬순에 맞게 개량한 작물이다.
 
동아시아 중심에 자리 잡은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하고 6~7월이 되면 장마전선이 형성되어 일 년 강우량의 60%가 넘는 비가 집중적으로 내린다. 이러한 기후에 잘 맞는 농작물이 바로 벼이다. 
 
벼는 원래 아열대 및 열대지역이 원산지이므로 따뜻한 곳을 좋아한다. 우리 선조는 이런 벼를 온대기후에 잘 맞게 순화시키고 선발해서 우리의 주식 작물로 정착시킨 것이다. 
 
벼농사란 우기에 강우량이 집중되고, 고온다습해서 물가 잡초가 잘 자라는 몬순지대에서 진화해 발달한 농업이다. 이 때문에 유럽과 달리 아시아지역은 밀 대신 벼농사를 짓게 되었으며, 지금도 전 세계 쌀 생산량의 90%가 이곳에서 생산돼  대부분의 국가에서 주식으로 먹고 있다. 
 
그러면 미국이나 호주는 어떨까? 그런 나라들은 수출하기 위해 상업적으로 벼를 많이 재배하고 있으며 쌀 생산 방식 역시 생태적으로 차이가 있다. 
 
즉 우기 때 몬순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겨울비나 눈 녹은 물을 인공적으로 저수해 이용하고 있다. 이런 벼농사 방식은 인위적인 물대기, 기계화 농법 및 화학물질 투입에 의존한다. 

00934967_R_0.JPG» 집중호우로 물에 잠긴 전남 나주평야의 논. 흔히 홍수피해의 전형적 사례이지만, 논이 홍수로 불어난 물을 가두어 주는 구실을 하고 있는 모습이기도 하다. 사진=연합뉴스

 
볍씨를 뿌리고 수확하기까지 약 6개월이 걸리지만 이 기간 동안 벼는 기후에 적응하면서 우리의 주식을 제공해 주고 동시에 기상재해 방지, 환경 보전 등 공익적인 기능을 한다. 만약 벼농사를 짓지 않고 그 자리에 골프장이나 공장이 들어선다면 장마철에 쏟아지는 그 많은 빗물은 어디로 가며, 무엇으로 홍수를 조절할 것인가? 
 
장마 때 전국 논에 가둘 수 있는 물의 양은 춘천댐 저수량의 24배(36억 톤)이며, 논에서 지하수로 스며드는 물의 양은 전 국민이 사용하는 수돗물 양의 2.76배(소양댐 저수량 8.3배)가 된다고 한다.
  
벼농사는 수질정화 기능이 있다. 논에 가두어 놓은 빗물의 45%는 지하로 침투해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정수된 맑고 깨끗한 지하수 물이 된다. 논의 지하수 함양기능은 전 국민의 전체 물 사용량의 약 80%에 해당한다. 
 
수질정화 능력은 어떤가? 생활하수가 논에 들어오면 질소는 52~66%, 인산은 27~65%가 제거된다고 한다. 논만으로 전체 생활하수의 36%를 정화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논에는 여름철 더위를 식혀주는 기능도 있다. 논에 있는 물이 증발할 때마다 주위의 열을 빼앗는데 이러한 증발 잠열에 의해 우리나라 논에서 하루에 조절되는 열량은 원유 543만㎘에 해당한다. 
 
이렇게 열을 빼앗아 가기 때문에 여름에 논 주변을 시원하게 만든다. 호수에 둘러싸인 마을을 생각해 보라. 여름철 물에 잠긴 논이 호수 구실을 한다. 
 
또한 식물은 광합성 작용에 통해 대기로부터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우리가 호흡할 때 필요한 산소를 방출하는데 그 효과가 다른 작물에 비해 높다. 우리나라 벼농사에서 방출되는 산소의 양은 연간 1019만 톤에 이른다.

 

03036378_R_0.JPG» 강화도 길상면 초지마을 논에 분포하는 멸종위기 식물 매화마름. 논의 습지로서 생물다양성의 보고이기도 하다. 사진=연합뉴스 
 
이밖에 논은 습지로서 수많은 곤충, 갑각류, 물고기, 개구리 등의 서식지이고 이들을 먹이로 삼는 새들이 몰려드는 생물다양성의 터전이기도 하다. 
 
물론, 논의 물에 잠긴 토양에서 세균이 메탄가스를 만들어내는데, 이것이 지구온난화에 상당히 기여하는 점은 부정적 요인이다. 세상에 모든 것이 좋은 일이란 없다. 
 
이처럼 벼농사를 지속함으로써 얻어지는 논의 홍수조절, 수질정화, 토양 유실방지, 공기와 수질의 정화, 유기물의 재순환, 여름철 냉각 효과, 습지생태계의 유지 효과 등 공익적인 기능을 모두 합치면 그 가치가 연간 13조 원이 넘는다고 한다.

 

05400261_R_0.jpg» 16일 오후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한 논에서 벼베기가 한창이다. 그러나 쌀은 논이 우리에게 주는 수많은 선물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철원/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우리 선조가 오래전부터 지어 온 벼농사기 주는 이런 엄청난 혜택에도 그 고마움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 같다. 논은 그저 쌀을 생산하는 곳이 아니다. 그런데도 최근 들어 벼의 재배면적이 급속히 감소하고 있다. 이런 농업생태계의 변화는 경제적인 논리와 맞닿아 있다.
 
벼농사가 환경에 기여하는 공익적인 효과는 대략 쌀 생산액 10조 원보다 훨씬 크다. 논이 공짜로 제공하는 생태계 서비스를 장기간 고려한다면 우리나라에서 벼농사를 지어 쌀을 소비하는 하는 것이 반드시 비싸다고만 할 수 없는 것이다.  건강을 해치는 주범 중 하나인 콜레스테롤 함량이 가장 낮은 곡물이 바로 쌀이라는 연구결과도 있지 않은가.
 
벼농사를 단순한 시장경제 원리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앞으로 우리 후손들이 살아가야 할 국토 환경과 건강까지 고려해야 한다. 우리는 벼농사에 대해 다시 한 번 깊이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이은주/ 서울대학교 생명과학부 교수, 환경과 공해연구회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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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 수백 명을 죽여서 버렸지. 시체 썩는 냄새가…"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 전라남도 영암 ②
정찬대 <커버리지> 기자 2015.09.17 13:59:43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에 대한 기획 연재를 진행합니다. 정찬대 <커버리지> 기자가 발로 뛰며 취재한 내용입니다. 전쟁이 끝난 지 60여 년이 지났지만, 아픈 기억은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필자는 좌우 이념 대립 속에서 치러진 숱한 학살, 그 참화(慘禍) 속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수많은 원혼의 넋이 글로나마 위로받길 바란다고 밝혔습니다. 호남(제주 포함), 영남, 충청, 서울·경기, 강원 순으로 연재할 계획이며, 권역별로 총 7~8개 지역을 다룰 예정입니다.

 

의용군 박 씨의 사연…'화학산 빨치산'이 되다

냉천 마을에서 사달이 벌어지던 그 시각, 냉천 아랫동네인 다보와 연산 부락은 갑자기 들려온 총소리에 일제히 몸을 피해 큰 피해를 면했다. 연산 부락은 특히 경찰의 피해를 막기 위해 산 어귀에 보초를 세워 이들로부터 안전을 기하기도 했다.


연산 부락에서 만난 박상인(가명) 씨는 "흰 깃발과 붉은 깃발을 들고 산에서 보초를 섰다"며 "경찰이 올 경우 붉은 기를 들어 주민들이 산으로 도망가도록 했고, 이들이 다시 영암으로 빠져나가면 흰 기를 들어 마을에서 농사짓도록 했다"고 회고했다. 주민들이 받았을 경찰에 의한 피해를 짐작케 한다.

 

▲ 냉천 부락을 지나는 도로를 따라 곧장 내려오면 금정면 연보리 1구인 연산 부락과 만난다. 연산 부락 건너 편(사진 위쪽)에 다보 마을이 희미하게 들어온다. 사진 우측 하단에 있는 검은 지붕의 가옥에는 정복용 씨 후손이 거주하고 있다. ⓒ커버리지(정찬대)


박 씨는 또 자신이 빨치산 의용군으로 참여했다가 도망친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그는 "당시 내 나이 18살이었다. 좌(左)니 우(右)니 그런 것은 당연히 모르고, 배고픈 사람 잘 먹게 해준다는 말에 의용군에 참여했다"고 털어놨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한국 전쟁 발발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됐고, 남침 한 달여 만에 부산을 제외한 상당 지역이 인민군에 의해 점령당했다. 파죽지세로 몰아붙인 북한군은 거침이 없었다. 이들은 겹겹이 처진 방어선을 쉽사리 무너뜨리며 무섭게 남하했다.
 

북한군이 금정면에 들어온 것은 1950년 8월경이다. 군경은 이미 영암을 빠져나가 후퇴한 뒤였다. 냉천 마을에서 만난 한 주민은 "8월경에 처음 인민군을 봤다"고 했다. 실제로 7~8월경 영암경찰서는 이 지역 보도연맹원 수백 명을 사살한 뒤 퇴각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 씨의 증언에 따르면 그해 가을 금정면을 통제한 빨치산들은 의용군에 참여할 지원자를 차출해갔다. 이렇게 모아진 이 지역 의용군은 위치상 전남 서부권의 중심쯤에 해당하는 전남 함평으로 이동해 집결한 뒤 다시 화순으로 옮겨졌다.


화순 남단의 화학산(해발 614미터)은 영암, 장흥, 보성 등 전남 동남부 지역과 맞닿아 있고, 북단의 백아산(해발810미터)은 지리산과 무등산을 연결하는 주요 요충지다. 특히, 백아산은 한국 전쟁 당시 빨치산 전남총사령부가 주둔했을 만큼 반군의 본거지였다. 박 씨는 당시 화학산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했다.
 

"의용군을 모집한다기에 자원해서 참여했다. 그게 뭔지도 모르고 그렇게 하면 적어도 살 수는 있을 것 같아 그리했다."

 

박 씨의 거친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그는 긴장된 듯 담배 한 모금을 깊게 들이키더니 큰 소리로 내뱉었다. 그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 금정면소재지에서 연보리로 들어가는 초입. 사진 좌측 상석이 있는 묘지 부근과 도로 끝부분(검은 자동차 있는 부근) 우측에 인민 재판을 위한 총살장이 마련돼 있었다. ⓒ커버리지(정찬대)


북한군의 일방적인 승리를 예감하며 살기 위한 수단으로 의용군이 됐지만, 화순으로 이동하는 내내 그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곳곳에서 벌어진 게릴라전을 목격하며 죽음의 공포에 내몰렸고, 날선 칼날 위를 걷는 듯 하루하루 두려움에 떨었다. 황금빛 물줄기가 넘실대던 늦가을, 이들의 손은 적군의 핏줄기로 붉게 물들었고, 이런 상황에 맞닥뜨린 박 씨는 죄악에 몸부림쳤다.
 

 

"'이건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 

 

긴장한 표정은 이내 흥분으로 바뀌었다. 그는 "화순까지 넘어갔지만 먹을 것도 제대로 안주고, 사람 죽이는 것을 보면서 정말 '이건 아니다' 싶었다"고 거듭 항변했다. 이어 "통일도 못할 것 같고, 고향 떠나 지내는 것도 겁이 났다"며 "그런 생각에 다보마을에서 함께 차출된 동무와 함께 그곳을 도망쳐 나왔다"고 말했다.


화순을 빠져나온 박 씨는 군경과 빨치산부대 모두를 피해 힘겹게 이동했다. 그리고 갔던 길을 되돌아 내산(금정면 청룡리)으로 왔고, 외갓집이 있던 나주로 곧장 향했다. 군경에 의한 보복 학살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리고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난 뒤 고향인 연산 부락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취재진은 박 씨로부터 '화학산 빨치산' 생활에 대한 상세한 얘기를 듣고자 했지만, 그는 "그만하세, 그때 생각만하면 지금도 괴롭단 말이시"라며 더 이상의 언급을 피했다. 그만큼 당시 기억이 그에게 상처가 됐던 것이다. 어린 나이에 마주한 충격적인 공포의 잔상은 60년 세월이 더 흘렀음에도 여전히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영암 부호 정 씨 집안의 특별한 인연감시 대상 1호, 몰살 위기에서 살아남다

연보리는 군경에 의한 피해가 컸지만, 빨치산에 의한 피해도 곳곳에서 발생했다. 특히, 군이나 경찰 집안, 부호(富戶), 지식인들은 모두 잡아 총살시켰다. 앞서 소개한 토벌대 척후병 조경석 씨의 경우도 이에 해당한다.


냉천에 살던 조 씨는 동생이 경찰이란 이유로 일가가 빨치산에 끌려가 학살당했다. 어렵사리 동네를 빠져나간 그는 이후 군경의 토벌 작전이 있을 것이란 소문을 듣고 길안내를 자처하다 변을 당했다. 현재 냉천 마을에는 조 씨의 며느리가 터를 이루며 살고 있다.

 

▲ 군경 토벌 작전이 있기 전 연보 부락에 들어온 경찰이 마을 청년들을 감금했던 장소.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나 주민들은 이곳을 '앵게 앞'이라고 불렸다. 현재 가옥은 모두 허물어져 밭이 됐고, 그 옆으로 비닐하우스 한 동이 놓여 있다. ⓒ커버리지(정찬대)


이밖에도 냉천에 거주하던 김윤채 씨 가족 역시 작은 아버지가 형사라는 이유로 윤채 씨와 그의 여동생 종숙 씨를 제외한 일가족이 몰살당했다.

 


연산 부락에 살던 정복용(당시 32세·현재 작고) 씨 사연은 좀 더 특별하다. 그의 집안은 빨치산에 의해 몰살당할 위기에 처했지만, 특별한 인연으로 무사할 수 있었다.

정 씨는 미군정기 미군 부대(목포 주둔 제16사단)에서 동시통역관을 지냈을 만큼 지역 내 엘리트였다. 전쟁 전, 정 씨의 아버지는 고향으로 그를 불러왔고, 빨치산이 마을을 습격한 뒤에는 자연스레 '감시 대상 1호'가 됐다. 지방 좌익들은 인민 재판을 한다며 그의 가족 모두를 포승줄에 묶어 총살장으로 끌고 갔다. 그런데 우연찮게 이를 본 한 유격대장이 정 씨 가족 모두를 빼주면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사연은 이러했다. 영암 부호로 손꼽혔던 정 씨 집안의 머슴을 지낸 한 청년이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 고향인 해남으로 돌아가게 됐다. 물론 추수 후 받기로 되어있던 세경은 포기했다. 하지만 워낙 성실했던 그에게 정 씨 아버지는 세경을 넉넉히 챙겨줬고, 훗날 꼭 다시 오라고 했다.


이후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는 해남 지역 빨치산 부대의 유격대장이 됐고, 빨치산의 후퇴로 영암을 지나 금정까지 오면서 총살장으로 향하던 정 씨 일가와 마주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지위를 통해 가족 모두를 빼주었다. 그야말로 천우신조였다.


정 씨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빨치산에 이어 경찰들에게서도 목숨을 잃을 뻔 했다. 해병대의 토벌 작전이 있기 전 연산 부락을 찾은 경찰은 동네 청년 열댓 명을 잡아다 감금시켰다. 물론, 명분은 '빨갱이 색출'이었다.

 

불안한 정 씨는 잠을 청할 수 없었고, 경계가 느슨해진 새벽녘, 배가 아프다는 핑계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한 뒤 그대로 줄행랑을 쳤다. 다음날 아침, 집에 감금된 청년들은 영부재(냉천과 연산 부락 사이에 있던 고개)에 끌려가 모두 사살됐다. 정 씨만이 다보 마을 인근 논에 쌓아둔 볏단 속에 몸을 숨긴 채 살아남았다.


연산 부락에서 만난 한 주민은 "낮에 경찰이 들어와 마을 사람들을 다짜고짜 끌고 갔다"며 "특히, 젊은 사람들이 일차적으로 피해를 봤다"고 말했다. 이어 "그때 잡혀간 사람 중 안적양반(정 씨의 별칭)만 살고 모두 죽었다"며 당시 기억을 끄집어냈다.
 

▲ 냉천 마을과 연보 마을 중간에 위치한 '6.25 희생자 위령탑'. 위령탑 아래 누군가 따라놓고 간 막걸리와 잔이 억울하게 희생된 원혼의 넋을 달래는 듯하다. ⓒ커버리지(정찬대)


영암 보도연맹 사건빈 트럭만 남긴 채 쓸쓸한 주검이 되다

한국 전쟁 발발 전인 1949년 10월, 이승만 정권은 좌익 세력에 대한 통제와 회유 목적으로 국민보도연맹(보도연맹)을 조직한다. 그해 말까지 이 조직에 가입된 수는 무려 30만 명에 달했다. 

 


초기 보도연맹 가입자는 순수하게 좌익에서 전향한 인사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조직 확대 과정에서 정부는 의무 가입 대상을 광범위하게 규정하였고, 말단 행정기관에까지 가입 인원을 할당하면서 본인 의사와 무관한 이들이 강제 가입된 경우가 허다했다. 또한 이름 석 자만 쓰면 밀가루와 고무신 등을 준다는 말에 그냥 서명한 이도 적지 않았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진태(장동건)의 약혼녀로 등장한 영신(故 이은주)이 식량을 배급받기 위해 보도연맹에 가입한 장면은 당시의 상황을 잘 말해준다. 그런데 이것이 훗날 '살생부 명단'이 되어 돌아온다. 이것이 바로 보도연맹 사건이다.
 

전쟁 뒤 정부의 태도는 돌변했다. 좌익 전향자들이 행여나 인민군에 참여할 것을 우려해 후퇴 과정에서 이들에 대한 무차별 검속 및 즉결 처분을 단행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영암군도 예외일 수 없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영암경찰서는 이 지역 보도연맹원을 영암읍 마을회관에 감금시켰다. 이후 7월15일과 22일 두 차례에 걸쳐 집단 사살했다. 1차는 10여 대 트럭에 실려 금정면 덤재 골짜기에서, 2차는 냉천 마을 인근 야산에서 희생됐다. 그렇게 죽어간 이가 200~300여명으로 추산된다.
 

당시 상황을 잘 아는 한 주민은 "경찰이 후퇴하면서 수백 명의 보도연맹원을 죽이고 갔다"고 했다. 아울러 "냉천 마을 앞 여운재 넘어 약수터 근처에서만 수많은 이들이 죽어나갔다"고 증언했다. 그는 "사람을 가득 태운 수십 대의 트럭이 여운재를 넘어왔다가 영암으로 빠져나갈 때는 빈 트럭으로 갔다"며 "총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고 말했다. 이어 "그때가 7~8월로 한 여름이었는데,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며 "총살한 사람을 그냥 버리고 간 모습이 얼마나 참혹했는지 모른다"고 치를 떨었다.


('전남 구례 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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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남북 보도 훼방말고 떠나라"

 
민가협 "6.1510.4 깃발들고 남북합의의 길로 진군하자"
 
이정섭 기자 
기사입력: 2015/09/18 [09:34]  최종편집: ⓒ 자주시보
 
 

 

▲ 민가협 조순덕 상임의장이 국가보안법철폐와 양심수 전원석방을 위해 23년째 목요집회를 갖고 있으나 국가보안법은 아직도 살아 양심수를 양산하고 있다고 고발했다.     © 자주시보 이성원 기자

 

시민사회단체가 남북고위급 긴급접촉에서 합의한 8.25합의에 자주통일의 길이 있다며 이를 훼방하는 세력과 미국을 규탄했다.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상임의장 조순덕, 이하 민가협)은 지난 17일 서울 종로 삼일문 앞에서 목요집회를 열고 남측 당국과 미국은 8.25합의에 대해 시비하거나 혼란을 조성하지 말고 성실히 이행할 것을 촉구했다.


민가협 조순덕 상임의장은 "민가협 집회가 시작 된지 23년째가 되었으나 자주. 민주. 통일. 민생. 인권을 위해 투쟁하던 양심수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며 "박근혜 정권이 조금이라도 양심이 있는 정권이라면 양심수들을 석방하고 국가보안법을 철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순덕 상임의장은 "박근혜 정부는 무엇이 무서운지 통합진보당을 해산한 것도 모자라 당원들을 구속했다."면서 "공안당국은 국가보안법을 모르는 것 같다. 내란음모가 없었다고 사법부가 판결해 놓고도 궁여지책으로 내란 선동이라며 감옥에 가두어 놓고 있다. 박근혜 정부는 성탄절을 기해 양심수를 전원 사면해 석방시켜야한다. 우리모두 양심수들의 석방을 위해 노력하자."고 호소했다. 

▲ 통일광장 임방규 선생은 미군이 70년 동안 우리민족에게 ㄱ친 인적 물적 피해는 계산할 수 조차 없다며 온 겨레에게 고통만을 안기는 미군들이 철수해야 된다고 강조했다.     © 자주시보 이성원 기자



통일광장 임방규 선생은 자신은 일제 시대에 태어났다고 소개하고 "당시 우리민족 대다수는 일본 놈들을 일본인이라 부르지 않고 왜놈이라고 불렀다. 그러던 일본놈들로 해방 되어 이제 살만하다 생각했는데 미국X들이 이 땅에 점령군으로 들어 와 70년 동안 우리민족에게 고통을 안기고 있다."고 고발했다.


임방규 선생은 "지금 많은 사람들이 민족의 이익을 위한 생각을 갖지 못하고 있다"며 "자기생각대로 살지 못하고 남의 생각과 사상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 것은 미국이 미군정을 실시하면서 미국의 사상을 세뇌시켰기 때문" 이라고 지적했다.


임 선생은 "미국이 우리 땅에 군홧발을 내민 뒤 우리민족이 입은 인적 물적 피해는 계산할 수 조차 없다"며 "미국은 지금도 한반도 긴장을 고조 시키고 전쟁위기를 만들어 우리민족이 한시도 발편한 잠을 잘 수 없다."고 단죄했다.


또한 "미국. 미군은 외세다. 이는 역사적 사실이다. 미국에 의해 남북이 분단 되었다."며 "외세가 갈라 놓은 분단을 끝장 내기 위해서는 외세를 몰아내야 한다.그게 정석이다 앞으로 온 겨레는 외세의 지배없이 우리민족끼리 화해하고 단합하고 협력해야 한다."고 피력했다.


이어 "박근혜 정부는 일본에 대해 과거를 묻지 말고 미래를 보자고한다."면서 "그런데 왜 동족인 북에 대해서는 그렇게 말하지 못하는가. 이제 우리 모두 나서서 민족적 비극을 끝장 내기 위해 투쟁하자."고 호소했다. 

   

▲ 자주시보 이정섭 기자는 8.25 남북합의에 자주통일이 있다며 8.25정신을 훼손하는 미국과 남측 당국자, 국회등을 규탄했다.     © 이성원 기자



두 번째 발언자로 나선 자주시보 이정섭 기자는 8.25합의 중요성을 설명한 뒤 "그러나 정부 당국은 합의정신에 어긋나는 발언들을 이어 가고 있다."며 "미국은 합의정신을 존중한다고 해 놓고 한미합동 군사연습을 진행 하고 있으며 북을 선제타격 하려는 작전계획 5015를 발표하는가하면 북의 핵 승인자를 제거하는 참수작전 계획도 내 놓았다.


참수 작전은 최고존엄을 생명 처럼 여기는 북을 심각하게 자극하는 말로 전쟁으로 몰아가는 대결적 계획으로 민족의 안전을 위해서 작전계획 5015와 참수작전은 즉각 철회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기자는 "박근혜 대통령 역시 남북이 합의한 정신을 이행 하기만 하면 우리민족끼리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 정신에 의한 대단합과 통일의 전환적 국면이 열릴 수 있을 텐데 무엇 때문에 민족문제를 가지고 여러나라에 통일을 구걸하는지 이해가 안간다."면서 "박근혜 대통령과 당국자들은 남북공동합의 정신을 훼손하지 말고 이행에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또한 남한 국회에서 여야가 북 인권법 일부에 합의한 사실을 전하면서 "박근혜 정부와 여.야 국회는 북인권법 제정에 앞서  40여분마다 강간을 당하고 38분마다 자살하며, 58만여명의 노인들이 밥을 굶고 불타죽는 현실이 펼쳐지고, 자주와 민주, 통일, 민생, 인권을 말한다고 하여 감옥에 끌려가는 남한 인권문제 해결에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그러면서 "이제 우리민족의 미래는 7.14 공동성명과 6.15 10.4 깃발을 높이들고 남북합의 정신의 길로 전진하는 것"이라며 "북녘 동포들은 백두산에서 평양을 거쳐 휴전선을 넘어 제주도 한라산으로, 남녘 동포들은 제주도 한라산을 출발하여 서을을 지나 분단 장벽을 넘어 백두산으로 달려가 민족의 염원인 조국통일 깃발을 꽂아야 한다. 우리모두 자주통일을 위한 길에 모두 떨쳐 나서자"고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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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초방학, 감귤방학… 제주만의 독특한 ‘이색방학’

 
 
제주의 벌초 문화에 숨겨져 있는 우리 현대사의 아픔
 
임병도 | 2015-09-18 08:25:55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추석이 가까워져 오면서 주말이면 전국적으로 벌초를하러 오가는 차량으로 고속도로 곳곳이 정체됩니다. 제주에서도 매년 음력 8월 초하루가 되면 오름 주변이나 산간 도로가 벌초 차량으로 뒤덮입니다. 제주에서는 보통 음력 8월 이전이나 8월 1일에 벌초를 합니다.

제주에서는 일가가 모여 조상 묘소를 벌초하는 것을 “소분(掃墳)한다”, “모듬벌초한다”, “모듬소분”한다고 합니다. 제주에서는 ‘제사는 지내지 않아도 남이 모르지만, 벌초는 안 하면 금방 남의 눈에 드러난다’, ‘추석 전에 벌초 안 하면 조상이 덤불 쓰고 명절 먹으러 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벌초하지 않는 일을 가장 큰 불효로 보기도 합니다.

벌초하는 날이면 회사에서는 휴가를 내줬고, 공무원들도 연가를 받았습니다. 육지에 사는 사람들도 명절에는 오지 않아도 이날만큼은 비행기를 타고 꼭 와야 했습니다. 만약 오지 않으면 양말이나 장갑, 내의 등을 돌리기도 했지만, 요새는 벌금처럼 돈으로 냅니다.

다른 지역보다 유달리 벌초에 애착을 가진 제주에서는 ‘벌초방학’이 별도로 있었습니다. 2003년 이전까지는 제주 도내 초중고등학교 100%가 음력 8월 1일에 ‘벌초방학’,‘성묘방학’을 했습니다. 아이들은 풀을 베는 어른들 틈에서 풀을 나르기도 했고, 점심이나 간식 먹는 재미에 푹 빠져 소풍처럼 느끼기도 했습니다.
 
제주에는 ‘벌초방학’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보리 수확 철에는 ‘보리방학’을 감귤 수확 시기에는 ‘감귤방학’을 했습니다. 수확철이 되면 한꺼번에 인력이 필요했지만, 제주는 섬이라 금방 인력을 구하기 어려워 아이들도 일손을 거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2003년이 지나면서 벌초방학이나 보리방학, 감귤방학을 하는 곳은 점점 사라졌습니다. 벌초를 꼭 음력 8월 1일에 하기보다 주말에 하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또한, 점점 보리농사나 감귤농사를 짓지 않는 곳이 많이 늘어나기도 했습니다.

▲ 제주 4.3평화공원에 있는 민간인희생자 명단 ⓒ겨레하나

제주에서 유독 문중이나 일가의 벌초를 함께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제주 4.3사건으로 많은 민간인이 희생됐기 때문입니다. 제주에서는 가족마다 4.3사건에 연루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희생자가 많았습니다. 제주 4.3사건 피해자 중에는 아이는 물론이고 온 가족이 모두 학살당해 후손이 일가친척밖에 남지 않은 경우도 허다했습니다.

문중 사람들이 돌봐주지 않으면 벌초조차 해줄 수 없는 상황이 됐기 때문에 제주에서는 꼭 모듬벌초가 끝나야 직계가족의 개인벌초를 했습니다. 주변에 ‘골충’이라는 임자 없는 묘소가 있으면 같이 해주는 미덕도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현대사의 아픔이 고스란히 마을과 가족에게 대물림되고 있는 모습이 제주의 벌초 문화에 숨겨져 있는지도 모릅니다.

초중고의 벌초방학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대학교에는 벌초방학이 남아 있습니다. 총학생회의 요청에 따라 하는 곳도 있고 안 하는 곳도 있지만, 대학생들이 벌초방학을 해야 하는 이유는 그만큼 벌초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육지로 간 사람도 있고, 나이가 많아 벌초를 하기 힘든 노인세대가 점점 늘어나면서 대학생까지는 벌초방학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제주에도 이제 젊은 청년들이 많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육지에서 게스트하우스나 카페, 식당 등을 하려고 오는 사람은 늘어났지만, 정작 제주의 청년들은 일자리가 없거나 낮은 임금 때문에 오히려 육지로 떠날 수밖에 없는 현상이 벌어집니다. 땅을 팔아 장사를 한다고 성공할 보장도 없거니와, 오랜 세월 농사짓는 부모님의 고생을 옆에서 본 자식들 입장에서는 농사가 얼마나 힘든지 알기 때문입니다.

제주에 산 지 이제 6년째가 되어갑니다. 제주의 독특한 문화를 그냥 보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문화가 생겼는지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해가 될 뿐 아니라, 제주의 아픈 역사에 분노가 치솟을 때가 많습니다.

척박한 제주 땅에 살았던 사람들의 얘기를 듣노라면 어쩌면 아이엠피터는 부모님 덕분에 평탄한 인생을 살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두 아이의 아빠가 되고, 부모님을 떠나 살다 보니, 얼마나 조건 없는 사랑을 받았는지 깨닫습니다.

이번 추석에 육지 부모님을 뵈러 가느냐를 놓고 고민이 많았습니다. 8월에도 육지에 갔다왔고, 온가족이 차를 끌고 육지에 가려면 비용이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벌초방학’ 글을 쓰면서 자료를 찾으면서 참 못된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저 자식들 손과 입에 뭐라도 챙겨주려고 하는 마음, 그런 부모님의 사랑을 잊고 살았기에 죄송스러웠습니다. 이번 추석에는 아이들 손을 잡고 꼭 부모님께 가야겠습니다.


[진실의길. 기고 글&기사제보 dolce42@naver.com]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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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무성 선친 “자식이 야스쿠니 신사에 모시어질 영광을”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5/09/18 10:22
  • 수정일
    2015/09/18 10:22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등록 :2015-09-17 16:09수정 :2015-09-17 17:59

 

1943년 9월8일 ‘아사이신문’ 4면에 징병제를 찬양하고 조선인의 참여를 선동하는 광고가 김용주의 이름으로 실렸다.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1943년 9월8일 ‘아사이신문’ 4면에 징병제를 찬양하고 조선인의 참여를 선동하는 광고가 김용주의 이름으로 실렸다.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민족문제연구소, 김무성 대표 선친 김용주씨 친일 행적 사료 공개] 
“징병을 보낼 반도의 부모로서 자식을 기뻐하며 바치는 마음가짐
진정한 정신적 내선 일체화를 꾀하여 충실한 황국신민이 될 것”

일본 신문에 ‘징병제 찬양·군용기 헌납 독려 광고’ 자신의 이름으로 실어
최대 친일단체 ‘임전보국단’ 발기인 참여 ‘황군장병에 감사의 전보’ 제안

 

민족문제연구소가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선친 김용주씨의 친일 행적 논란과 관련해 추가 사료를 공개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17일 서울 동대문구의 민족문제연구소 5층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친일파냐, 애국자냐는 논쟁이 있었던 김용주에 대해 기초 사료로 검증한 결과 명백한 친일반민족행위자라고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기본적으로 연좌제에 반대하지만 김무성 대표 쪽에서 부친의 친일행적을 애국으로 미화하는 내용으로 구성된 평전을 발간하는 등 역사를 왜곡하고 있어 검증에 나섰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한겨레>를 통해 김 대표 부친의 친일 행적 의혹이 제기된 뒤 일각에서는 ‘친일파가 아니라 오히려 민족교육에 헌신한 애국자였다’고 주장하는 등 논란이 계속됐고, 지난달 15일에는 광복 70주년을 맞아 김용주 평전 <강을 건너는 산>이 출간되기도 했다. 이 책은 ‘극일을 이겨낸 망국의 한’이란 부제를 달고 김용주를 애국적인 민족주의자로 묘사했다.(▶ 바로가기 : ‘친일’ 김무성 아버지가 애국자로 둔갑하고 있다)

 

 

그러나 민족문제연구소가 이날 공개한 자료들에는 김용주의 친일 행적이 여럿 나온다. 연구소가 정리한 김용주의 대표적인 친일 행적으로는 △식민통치기구인 도회의 의원으로서 일제의 식민통치에 협력 △친일단체 간부로서 침략전쟁에 협력 △징병제 실시를 찬양하고 전쟁동원을 선동한 점 등이다. 특히 일제의 침략전쟁을 위한 국방헌납운동의 하나인 애국기(국방헌금으로 생산한 군용 비행기) 헌납 운동을 전국에서 가장 활발히 했다고 민족문제연구는 밝혔다.(▶ 바로가기 : [전문] 김용주 ‘친일 발언’)

 

 

당시에는 영일군 소속이었던 포항 출신의 재력가 김용주는 1937년부터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경북 도회의원으로 활동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도회는 오늘날의 지방의회와 달리 지방자치기구로서의 기능과 권한은 없었으며, 일제의 식민지배에 협조적인 인물들로 구성된 식민통치 기구였다”고 설명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당시 <매일신보> 기사 등을 보면 김용주는 도회 의원으로서 조선인에 대한 강제노역을 정당화한 국민개로운동을 독려하는 등 일제의 식민통치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정황이 나온다.

 

1944년 7월9일 ‘아사이신문’ 4면에는 애국기 헌납운동을 독려하는 김용주 이름의 광고가 실렸다.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1944년 7월9일 ‘아사이신문’ 4면에는 애국기 헌납운동을 독려하는 김용주 이름의 광고가 실렸다.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또 1941년에는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하기 위해 만들어진 최대의 민간 친일단체인 임전보국단에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임전보국단 경북지부 상임이사에 선정돼 결성식에서 ‘황군장병에게 감사의 전보를 보낼 것’을 긴급 제안하는 등 민·관을 가리지 않고 경북 지역에서 매우 영향력있는 친일인사로 전방위적으로 활동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민족문제연구소는 밝혔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또 김용주가 징병제 실시와 애국기 헌납 등 일제의 침략전쟁에 대한 조선의 인적·물적 자원을 동원하는 데도 적극적이었다고 했다. 1943년 <아사히신문>(9월8일)에는 ‘대망의 징병제 실시, 지금이야말로 정벌하라, 반도의 청소년들이여’라는 징병제에 찬성하는 광고가 김용주의 이름으로 실렸다.

 

민족문제연구소에 따르면 김용주는 1943년 10월 열린 전선공직자대회에서는 “가장 급한 일은 반도 민중에게 고루고루 일본정신문화의 진수를 확실히 통하게 하고, 진정한 정신적 내선일체화를 꾀하여 충실한 황국신민이 될 것”이라며 “앞으로 징병을 보낼 반도의 부모로서 자식을 나라의 창조신께 기뻐하며 바치는 마음가짐과 귀여운 자식이 호국의 신으로 야스쿠니 신사에 신으로 받으러 모시어질 그 영광을 충분히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특히 김용주는 경북지역에서 애국기 헌납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고 민족문제연구소는 밝혔다. 애국기란 기업이나 단체, 개인이 낸 국방헌금으로 생산한 군용 비행기다. 일제의 만주침략 이후 대대적으로 전개된 국방헌납운동의 하나다. 김용주는 <조일신문> 등에 자신의 이름을 걸고 애국기 헌납운동을 독려하는 기명 광고를 싣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김용주가 활동한 영일군은 모두 14기의 애국기를 헌납해 전국에서 가장 많은 애국기를 헌납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김용주 평전 <강을 건너는 산>에 대한 검증 결과, 기초적인 사실 관계도 틀린 부분이 많고, 객관적 자료로 확인이 불가능한 근거없는 이야기나 과장된 이야기들이 다수 포함돼 있다. 또 불리한 친일 행적은 감추고, 일부 친일 행적은 마치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한 것처럼 미화 왜곡하고 있다”며 오류가 많아 사실로 인정하기 어려운 평전이라고 설명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조세열 사무총장은 “김용주에 대해 친일파냐, 애국자냐란 논란이 있었지만 이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친일인데 어떤 친일이냐가 문제인데 검증 결과 경북지역의 가장 대표적인 친일인사로서 명백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해야 한다”고 했다.

 

허승 기자 rais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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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의 발밑 가시가 된 오키나와 미군기지

 
2015. 09. 17
조회수 53 추천수 0
 

  오키나와.jpg

 언론매체들은 중국과 일본 또는 중국과 이웃국가들 간 고조되고 있는 긴장감에 대한 기사는 많이 쓰면서도, 오키나와와 도쿄 또는 오키나와와 워싱턴 간 마찰은 거의 다루지 않고 있다. 오키나와현의 주민들은 18년 전부터 이 두 정부(일본과 미국)가 결정한 오키나와 북부의 헤노코 미 해군기지 신설 프로젝트에 대한 반대시위를 벌이고 있다. 2012년 12월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한 아베 신조 총리는 최우선 과제로 이 프로젝트를 꼽았다. 하지만 그는 전례 없는 강력한 저항세력과 마주하고 있다.

  2015년 4월, 아베 총리는 미 의회에서 헤노코 군사기지와 같은 특정 의제를 거론할 때, 민주주의의 '공유가치', 즉 법률과 인권존중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표명하며 의원들을 강력하게 설득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미국 방문 한 달 후, 오나가 타케시 오키나와 지사는 워싱턴을 방문해 신설 군사기지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말로 아베 총리의 말을 반박했다.

   대만과 일본 최남단 섬인 규슈 그리고 오키나와의 섬들 간엔 1,000km의 해안선이 펼쳐져 있다. 중국입장에서 보면, 이 해안선은 태평양 접근을 좌지우지하는 잠재적인 “거대한 장벽”이다. 예컨대, 이 지역이 동아시아의 군사력 균형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일본에 합병되기 이전에 이 섬들은 류큐 왕국을 형성하고 있었다. 당시 이 섬들은 전 근대국가인 중국과 일본에 정치적으로 의존해 있는 상태였고, 중국에 조공을 바치며(1) 5세기 동안 동중국 해안에서 평화를 누렸다. 1850년대만 해도, 류큐 왕국은 미국을 비롯한 프랑스와 네덜란드 등과 조약을 협상하던 독립 국가였다.

 하지만 이 같은 상대적인 자치는 1870년대 막을 내렸다. 1868년 등장한 현대 일본 (메이치)정부가 류큐 왕국이 중국과의 관계를 유지하려 했다는 구실로 징벌차원에서 왕국을 붕괴시켜 일본에 편입시킨 것이다. 이후 왕국은 오키나와현이 되었고, 왕국의 수도 나하를 굽어보던 슈라성(城)은 오키나와 최초의 군사군지로 전락했다. 오키나와 주민들에겐 고유 언어사용 금지, 일본식 이름 사용, 신사참배 채택 등과 같은 강제 조치가 내려졌다. 

  일본 측에서 보면, 오키나와의 합병은 중국과 미국에 대한 반감의 징표이다. 이는 1945년의 참상으로 이어진다. 1945년 3월과 6월 말(2) 두 차례에 걸친 미국의 오키나와 폭격으로, 오키나와 주민 4분의 1이 사망했다. 많은 주민들이 간첩활동으로 기소되어 일본군에 의해 처형되거나 집단 자살을 해야 했다(때로는 일가족 전체가 자살했다). 이 같은 트라우마는 오키나와인들의 영혼 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 70주년을 맞은 일본이지만, 미군은 여전히 오키나와 영토의 20%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일본에 주둔하는 미군의 4분의 3이 오키나와에 집중되어 있다. 미국은 일본의 다른 지역에서 모든 주둔군을 철수시킨 후에도, 20년 동안 (1972년까지) 지속적으로 오키나와를 직접 통치했다. 물론 통치하는 영토가 당시보다 조금 줄기는 했지만 현재도 이들은 여전히 오키나와에서 주권을 행사하고 있다.

  이론적으로, 헤노코에 건설하기로 한 군사기지는 오키나와 섬 남쪽에 위치한 기노완시 한복판에 들어선 후텐마 기지를 대체하는 것이어야 한다. 후텐마 기지의 격납고와 활주로는 학교, 병원, 거주지와 인접해 있다. 그래서 거주민들 입장에서 보면, 후텐마 기지는 전 미국국방장관 도널드 럼스펠드의 말처럼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기지”이다. 천만다행으로 8월 방학이라 희생자가 나진 않았지만, 사람들은 2004년 오키나와 국제대학교를 덮친 군용 헬기 추락 사건을 기억하고 있다.

 훨씬 넓고 다양한 기능을 갖춘 후텐마 기지 대체시설(FRF)은 육·해·공군 시설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헤노코 동쪽만과 오우라 서쪽만을 마주하고 있는 수심이 깊은 바다 위 160ha에 걸쳐 항구를 건설할 수밖에 없다. 이 기지는 바다 위로 10m 높이로 솟아오른 콘크리트 덩어리, 즉 1,800m에 달하는 두 개의 활주로와 272m의 부두로 구성된다.

 그러나 기지가 들어설 곳은 일본 최고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해안 중 하나로 자연 보호구역이다. 일본 환경부 장관도 이 지역을 유엔 산하 유네스코에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고 싶어 한다. 또한 이곳은 생물 다양성의 보고이다. 산호, 갑각류, 해삼, 미역, 수백 종의 새우, 달팽이, 물고기, 거북이, 포유동물 등은 물론 멸종위기에 처한 많은 희귀 생물들이 서식하고 있다.

 

생물 다양성의 보고인 해안에 들어서게 되는 미군기지

 

  만약 이 기지가 건설되면, 21세기 동아시아에서 군사력이 가장 밀집된 기지가 될 것이다. 이는 또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공들이는 “피벗 투 아시아(Pivot to Asia·아시아로의 중심축 이동)” 정책(3)의 핵심 요소이기도 하다. 오키나와 주민들에겐 씁쓸한 일지만, 1996년 이들은 후텐마 기지의 이전을 아무런 조건 없이 약속했다. 아베 정부는 해군은 국방의 축이기 때문에 헤노코가 제격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2014년 초반 국방장관 나카타니 겐은 후텐마 기지를 규슈나 다른 곳으로 이전하지 못할 군사적인 또는 전략적인 이유가 전혀 없지만, 도쿄의 반대가 유일한 걸림돌이라는 말로 여운을 남겼다.(4)

   사실, 후텐마 해군기지는 첫 단추부터가 잘못되었다. 오키나와 주민들의 머릿속엔 ‘총검과 불도저’를 동원해 주민들의 토지를 강탈해 불법 조성한 것이 곧 후텐마 기지라고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기지의 위험이나 소음 혹은 유해함을 거론할 필요도 없이 당장 폐쇄해야 한다고 여긴다.

  대부분의 오키나와 주민들은 기지 이전에 반대하고 있다. 오키나와현 지사를 비롯한 도·시 의원들과 일본 주요 정당의 오키나와 지부 소속 정당인들 그리고 <류큐신문>과 <오키나와타임스> 등도 이들과 함께 하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초기 몇 년은 기지 이전 프로젝트를 막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2013년 초반부터 제2기 아베 정부는 이들 세력을 무력화했다. 우선, 아베 총리는 본인이 대표로 있는 자민당 소속의 오키나와 지역구 의원 3명을 설득해 자기 진영으로 끌어 들였다. 이어 그는 자민당 소속의 오키나와 도의원들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키나와현 지사 나카이마 히로카즈까지 설득해 자기편으로 만들었다.

  지지기반의 잇단 이탈에 분개한 해군기지 이전 저지세력은 2014년 한 해 동안 치른 일련의 선거에서 승리하며 반격에 나선다. 이들은 1월에 치른 오키나와 북쪽에 위치한 나고시(市)의 시장 및 시의원 선거, 11월의 주지사 선거, 국회의원 4석이 걸린 12월의 국회의원 선거 등 모든 선거를 승리로 장식했다. 오키나오현 지사 선거 때, 보수성향의 후보 오나가 타케시는 섬을 수호하기 위해 공산당과 보수당 등 모든 정당을 아우르는 슬로건 “오키나와는 하나다”란 정책으로 승부수를 던졌다. 그는 또 기지 이전 프로젝트를 막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겠다”고 공약했다. 유권자 64%가 참여한 기록적인 투표율을 자랑하는 이 선거에서, 그는 당시 시장을 10만 표(그는 36만 800표를 얻은데 반해 상대방은 26만 1천표를 얻음) 차로 크게 이겼다.

 그럼에도 스가 요시히데 내각관방장관은 주사위가 이미 던져졌기 때문에 정부는 기지 건설을 착수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못 박았다. 2014년 7월에 시작했던 군사기지 공사 예비심사는 11월 국회의원 선거기간 동안 중단되었다가, 2015년 1월 다시 재개되었다. 아울러 아베 총리도 경찰폭동진압대와 해안경비대를 동원해 기지건설 반대 시위대를 저지하는 충격과 공포 전략을 채택했다. 일례로, 지난 3월 4일 오키나와 전통악기 산신(일종의 현악기) 음악축제 때, 29명의 음악인들은 기지이전 반대 시위를 지지하기 위해 해군기지가 들어설 장소 외곽에 모여 클래식 음악공연을 개최했다. 하지만 이들의 공연은 급작스럽게 들이닥친 경찰폭동진압대에 의해 중단되고, 비를 피하기 위해 이들이 설치한 간이시설도 철거되었다.

  2015년 1월, 오키나와현 지사는 후텐마 기지의 이전을 허락한 전임 지사의 이전계획 과정에 대한 감사를 실시하기 위해 이른바 ‘제 3의 길’이라는 전문위원회를 발족시켰다. 그는 이전 과정이 제대로 진행된 것인지, 이 계획을 철회시킬 순 없는 것인지를 알고 싶어 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도쿄당국이 의뢰한 공사 사전점검 작업으로 인해 산호들이 손상되고 있다며 도쿄당국에 작업을 중단해달라고 요청했다.

  오나가 오키나와현 지사로 당선된 이후 4개월 동안, 일본 정부는 그에게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았다. “그런 사람과 말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냐?”라는 나카타니 겐 국방장관(5)의 말은 이런 상황을 암시한다. 2015년 4월과 5월, 오나가 오키나와현 지사는 마침내 총리, 내각관방장관, 국방장관 등과 면담을 가졌다. 하지만 이 회동으로 인해 이들 두 진영 간에 골만 더 깊어졌다. 오나가는 이들에게 “당신들이 거만하게 굴면 굴수록 오키나와 주민들은 당신들한테서 등을 돌릴 것이다”라고 말해 섬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아베 총리를 접견한 그는 “오키나와 주민들의 땅을 강탈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군사기지를 짓더니, 이젠 이 기지가 쓸모없는 곳으로 전락했으니 세상에 이보다 황당한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직격탄을 던졌다. 그러자 아베 총리는 약속했던 5분 연설을 3분 만에 중단한 채 기자들과 함께 서둘러 회견장을 빠져 나갔다.

 

아베 정권에 정치적 부담감을 주는 오키나와 미군기지

 

  일본 총리는 전례 없는 국회 장악력을 선보이고 있다. 야당은 분할되어 약화되고, 대부분의 일본 주요 언론들도 정부를 거들고 있다. 아베 총리가 언론계 거물들과 골프 회동을 갖고 사교파티에서 이들과 조우하는 것이 힘을 발휘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국회와 언론계를 뺀 일본인들은 오키나와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며 이들의 기지건설 반대투쟁을 강력 지지하고 있다.

  2013년 워싱턴 방문 때, 아베 총리는 환대를 받지 못했다. 오바마 대통령과의 저녁 만찬이나 기자회견도 없었다. 그의 발언들, 예컨대 '재도약하고 있는 일본,' '전후 체제와의 단절,' '일본이란 이름에 걸맞은 역사를 가르쳐 일본인들이 자부심을 갖게 하겠다' 등과 같은 표현들은 미국 정치인들의 심기만 불편하게 했다. 왜냐하면 이는 미국이 만들어 놓은 일본의 전후 체제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내는 동시에 일본이 군국주의와 파시스트 성향에 애착을 보이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2년 후 아베 총리가 워싱턴을 재방문했을 때, 그 앞에는 붉은 카펫이 깔렸다. 그는 상·하의원들이 집결한 의회에서 연설도 했다. 이 같은 반전의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워싱턴의 '일본 자문단'이 요구한 일정을 최우선적으로 구현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아베는 미국의 요구대로 과거 60여 년 동안 일본정부가 중시하던 노선으로 복귀했다. 이어 그는 자위대의 군사 개입의 범위를 확장하고 앞으로 세계 어디든 간에 '자율적으로 연합군에' 자위대를 파견할 수 있도록 일본 헌법도 손질했다. 아베 총리는 일본군 22만 5천명을 미군에 배속시킨 데 이어, 일본에 미군을 주둔시키기 위해 지속적으로 비용을 지불하겠다는 약속도 했다. 미군 주둔 유지비용은 비밀에 부쳐졌지만, 연간 86억 달러(6) 이상이 소요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아베는 헤노코에 미 해군기지를 신설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괌과 마리아나 제도의 신설 미군기지의 자금 28억 달러도 대부분 직접 조달해주겠다고 호언했다. 여기다가 해군 8천명의 이전비용을 합하면, 아베정부가 미국에 지불하게 될 총 보조금의 규모는 60억 9천만 달러에 달한다.

 아베 총리는 이를 두고 일본이 1947년부터 중시해온 헌법에 명기된 평화주의를 뿌리내리게 하는 이른바 “긍정적인 평화주의” 행위라고 일컬었다. 그러자 존 매케인 미 상원 군사위원회 위원장은 아베 총리의 발언을 명확하게 짚고 넘어갈 요량으로, <재팬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긍정적인 평화주의’란 일본자위대를 한국을 비롯한 중동과 남중국해에 파견하겠다는 의미라고 부연 설명했다.(7)

   제2차 세계대전 패전 70주년을 맞은 일본은 어쩌면 일본 역사상 가장 적극적인 친미활동을 하는 국가 지도자에 의해 통치되고 있다. 워싱턴에 대한 아베의 행동은 노예근성과 깊은 적대감이 뒤섞인 이상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는 미국에 대한 노예근성과 민족주의의 확립이라는 두 기치를 하나로 통합해야 하는 근대 일본의 근본적인 모순에 끼어 옴짝달싹 못하고 있다.(8)

   그는 당장 오키나와 문제를 해결해야 하지만, 그럴 방도가 전혀 없다. 일본에서 그의 지지기반이 붕괴되자, 일본 정부도 이 일을 해결하는 데 미온적이다. 4억 6천만 달러에 달하는 헤노코 기지건설에 대한 첫 계약이 체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는 공사 착공을 지시하지 못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지난 7월 16일 전문위원회 ‘제3의 길’은 보고서를 통해 기지건설 허가 과정에서 전임 지사가 여러 부정을 저질렀음을 지적했다. 이와 때를 같이해, 오나가 지사는 9월에 이 사건을 제네바의 유엔 인권위원회에 제소하겠다고 발표했다.

   한편 지난 8월 4일, 아베 정부는 오키나와현 지사와 4개 부문에서 협상을 타결했다고 발표했다. 첫째는 협상을 시작한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8월 10일부터 9월 9일까지 공사를 중단한다는 것이었다. 셋째는 오키나와는 모든 법적조치를 중단한다는 것이었다. 넷째는 지사의 요구대로 오우라만(灣)의 산호에 대한 영향평가를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정부는 착공을 너무 오랫동안 지체할 수 없는 처지이다. 왜냐하면 태풍이 닥치면 공사를 거의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같은 일본 정부의 전향적인 태도를 보면, 아베 정권에게도 오키나와의 마찰은 완전히 무시할 수 없는 정치적 부담이 되고 있는 셈이다.

  한 달 간의 휴전 끝에, 아베 총리는 어쩌면 자신의 의지를 오키나와현에 관철시키는 데 성공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키나와 주민들은 단지 신설기지건설 중단 요구에 만족하지 않고 모든 군사기지의 폐쇄를 요구하지 않을까.

  

 

(1) 동아시아의 중심, 중국은 이웃 국가들에게 충성 맹세를 대가로 무역권을 제공하고 있다.

(2)  오키나와 전투의 가장 끔찍한 행위는 3월 26일부터 벌어진 케라마제도 전투였다. 이 전투는 미군이 이 섬에 상륙한 1945년 6월 22일까지 지속되었고, 미군은 이 섬을 후방 폭격기지로 활용해 일본 전역을 점령했다.

(3) Michael T. Klare, ‘펜타곤이 태평양으로 기수를 돌릴 때(Quand le Pentagone met le cap sur le Pacifique)’,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2년 3월.

(4) <Okinawa Taimusu>, Naha, 2014년 12월 25일.

(5) <Okinawa Times>, Naha, 2015년 3월 13일.

(6) Estimations : 2012.

(7) <McCain : SDF should expect to see action in Korea, deploy to Mideast, South China Sea >, <Japan Times>, Tokyo, 2015년 5월 2일.

(8) Bruce Cumings, ‘의심의 시기를 맞은 미일 커플(Le couple nippo-américain à l’heure du soupçon)’,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999년 4월.

 

 

글·가번 맥코맥 Gavan McCormack  호주 국립대 명예교수  
 

웹사이트 저팬 포커스(Japan Focus)의 코디네이터. 최근에 사토코 오카 노리마츠와 함께 <일본과 미국에 맞서 저항하는 섬, 오키나와(Resistant Island : Okinawa confronts Japan and the United States)>(Rowman & Littlefield, Lanham, 2012)를 출간했다.

  

번역·조은섭 chosub@hanmail.net 파리7대학 불문학박사.

 

 

*이 글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9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4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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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부, 일본 식민통치 수법까지 쓰려나"

"박근혜 정부, 일본 식민통치 수법까지 쓰려나"
[인터뷰·下]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
서어리 기자 2015.09.16 11:49:23

 

인성 교육 법제화에서부터 역사 교과서 국정 전환 시도에 이르기까지…. 박근혜 정부의 교육 정책을 지켜본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일제 시대의 교육이었다. 예절 교육과 교과서 통제. 이를 통해 일제가 구현하고자 한 조선인의 인간상은 '순응적 식민(植民)'이었다. 

 

이 교수는 역사 교과서 국정화 시도에 대해 "시대착오적 발상"이라 비판했다. 학계와 학교 현장의 여론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여기저기서 일제히 "국정화 반대"를 외친다. 그러나 정부는 별말이 없다. 국정 전환, 검정제 유지 등 여러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는 정부의 모호한 태도는 논란만 가중시키는 형국이다.

 

정부의 진짜 속내는 무엇일까. 이 교수는 "정부로선 논란을 반길 것"이라고 했다. 정부의 국정화 시도에는 국민을 순응적 인간으로 만드는 것 말고도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교과서 논쟁은 결국 이념 대결로 흐르기 마련이다. 그리고 분단 상황 속에서 이데올로기 싸움의 승자는 언제나 보수 진영이었다. 교과서를 둘러싼 논란도 마찬가지다. 논란이 커지면 커질수록 진보 세력은 종북 프레임 속에 갇히기 쉽다. 또 현 정부로선 교과서를 둘러싼 잡음이 커진 덕에 상대적으로 다른 여러 실정이 묻히고 있으니, 일석이조 효과를 얻는 셈이다. 정치권이 학계 의견 수렴도 하지 않은 채 국정화 이슈를 들고 나온 배경엔 이런 셈법이 숨어있을 거라고 이 교수는 말한다.

 

정부가 과연 계획대로 국정화 작업을 강행할 것인가. 교육부는 이달 말께 역사 교과서 국정 전환 여부를 발표할 예정이다. 다음은 지난 회(☞관련기사 : "역사 교과서 국정화가 '종북' 아닌가")에 이은 이 교수의 인터뷰 내용이다. 인터뷰는 지난 9일 서울 마포구 프레시안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 ⓒ프레시안(최형락)

 

 

"국사편찬위, MB때부터 망가지기 시작했다"

 

프레시안 : 국정 역사 교과서가 발행되면, 이념 편향 문제는 차치하고 단순 오류도 더러 있지 않을까 우려를 표하는 이들이 많다. 최근 공개된 초등학교 5학년 2학기 교과서에서 오류가 상당수 발견됐다.

이만열 : 보수 진영에서는 늘 시장 원리를 이야기하는데, 기본적으로 국정 체제는 시장 원리를 따르지 않는 독과점 체제다. 검인정 체제는 경쟁을 하기 때문에 최대한 오류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고, 또 오류가 발견이 되어도 바로바로 수정하려고 한다. 국정 체제가 되면 그런 노력을 게을리할 수밖에 없다. 결과물에 대해서 검정제 하에서만큼 책임지지 않는다. 오류들이 걸러지지 않을 가능성이 그만큼 크다는 얘기다.

프레시안 : 국사편찬위원회(이하 국사편찬위)도 감수를 하기 때문에 그 책임에서 자유롭다고 볼 수 없다.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검정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비롯해 국사편찬위가 초기 위상을 잃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과거 위원장으로서 어떻게 느끼나.

이만열 : 교학사 교과서는 명백한 오류들이 많았고, 내용도 부실했다. 집필 기준에 따르면 떨어졌어야 하는 교과서였다. 그런 점에서 국사편찬위에 책임이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는 없다.

현재 한국사 교과서는 국사편찬위의 검정을 통과해야 한다. 물론 국사편찬위에서 직접 심사를 하는 게 아니라 위원회를 따로 두지만 통과 여부는 국사편찬위 이름을 내걸고 밝힌다. 과거 국사편찬위에 있었던 경험을 토대로 보건대, 국사편찬위는 교과서 검정에 관여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국사편찬위는 중립적 입장에서 국사 연구에 관한 자료를 모으고 기록을 해나가야 하는 작업을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2003년 내가 위원장에 취임했을 당시 교과서에 관한 업무는 교육부 산하 기관이 담당했고, 국사편찬위는 종래 해 오던 국정교과서 업무만 맡고 있었다. 국사편찬위가 교과서 검정과 관련된 일을 부탁받은 적이 없었다. 정부가 국사편찬위 위원 인선 문제 등에서 관여하려고 했지만, 국사학계가 성장했고 그런 인선은 학회들과 논의하는 것이 좋겠다는 이유를 들어 받아들이지 않았다.

기관장이 해야 할 중요한 임무 가운데 하나는 기관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책임지고 부당한 외압을 막아야만 조직이 제대로 돌아간다. 상부 기관의 압력을 막아내지 못하면 기관이 정상적으로 돌아갈 수 없고 공동체를 이끌어가기도 힘들다.

국사편찬위가 흔들리기 시작한 건 그 몇 년 후 MB정권 때부터라고 생각한다. 그 당시 크게 문제가 됐던 게 바로 '건국절' 논란이다. 정부에서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꾸려 하면서 당시 위원장으로 하여금 건국절준비위원들 앞에서 건국절과 관련된 강연을 하도록 했다. 아마 그 무렵부터 정부가 원하는 방향에 따라 협조하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국사편찬위이 그렇게 된 데 대해서 개인적으로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

 

 

ⓒ연합뉴스

 

 

"국정 교과서 집필, 교학사 집필진 말고 누가 나설까"

프레시안 : 교과서 발행 체제에 대한 논의가 정치권에서부터 비롯된 데 대한 비판이 적잖다. 여권은 역사 교과서의 국정화를 통한 '탈이념' 내지 '탈정치'를 강조하지만, 정작 국정화 움직임은 정치권에서부터 시작됐다. 학계에서는 역사 교과서를 국정화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나.

이만열 : 내가 아는 한 역사학계에서는 국정화에 대한 의견이 있었던 건 아니다. 지난번 교과서 검정 때 교학사 집필자 몇몇에게서 들은 것 말고는, 학계에서 역사 교과서를 국정화해야 한다는 의견을 들은 적이 없다. 최근 서울대 교수들도 공동 성명을 통해 이를 지적했다. '저희 주변의 역사학자 중에서 역사(한국사) 교과서를 국정화하는 데 찬성하는 이는 찾아볼 수 없다'고 했다. 내 주변 또한 그렇다.

교과서는 학계의 보편적 이론을 학생들에게 알리기 위해 만들어진 책이라고 본다. 그 시대 학문 결과로서의 '보편성'이 중요하다. 그런데 식민지 근대화론이 과연 보편적인 이론인가. 이 이론에 동조하는 이들이 일부 있지만 학계에서는 결코 그렇게 보지 않는다. 만약 식민지 근대화론이 학계의 주류 이론이고, 그래서 이를 근거로 정치인들이 지금의 교과서가 잘못됐다고 지적한다면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국정화 주장은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게 아니다.

먼저 학계에서 논의가 돼야 한다. 교과서가 당시 학계의 보편적 학문 결과를 집약하여 묶는 것이어야 한다면, 정치권에서 이런저런 형태로 먼저 자극적으로 이념으로 편 가르기하고 선동해대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교학사 교과서가 배척받을 때, 교학사 교과서 집필 책임자 중 한 사람은 교학사 교과서 외의 검정 통과된 교과서에 대해 '좌편향'이니 '민중사관'이니 하며, 그럴 바에는 차라리 국정화하는 게 낫겠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역사학계는 물론 국민들에게서도 크게 신뢰를 받는다고 볼 수 없는 교과서의 대표 집필자가 한 말이 마치 예언처럼 맞아 들어가는 데 대해 나는 아주 모멸감을 느낀다.

프레시안 : 국정교과서 집필에 학자들이 순순히 나설지도 의문이다.

이만열 : 정부는 공정하고 해박한 분들을 모시겠다고 하지만, 그런 분들이 과연 집필에 나설지는 의문이다. 우선 학자들 대부분이 국정화 자체를 반대한다. 더군다나 집필자 명단에 이름이 올라가는데, 이렇게 전국민적인 저항을 받는 상황에서 용기 있게 나설 수 있겠나. 동의하고 나서는 사람들이 있다면, 미안한 얘기지만, 교학사 교과서 집필에 나섰던 분들이거나 그 아류들이 되지 않을까 한다.

이런 상황에서 교과서를 국정화한다면 국가에서 뭔가 요구하는 게 있지 않겠는가. 국가가 굳이 요구하지 않더라도 현 보수 정권을 지원하고 있는 극우 세력의 입김이 자연히 국정화된 교과서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극우 세력이 어떤 존재들인가, 청산되지 않은 친일 세력과 독재 부패 세력 그리고 반통일 세력이다. 이들의 입김을 받으면 한국 근‧현대사의 흐름이 독립운동 세력과 민주화운동 세력 및 평화통일 세력 중심에서 친일 세력, 독재 부패 세력 및 반통일 세력으로 대치된 상태에서 힘겨루기를 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 다시 말하면, 한국 근‧현대사의 주체가 독립운동 및 민주화운동 세력에서 친일파와 독재 정권 세력으로 바꿔치기 될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이렇게 되면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적 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을 강조하는 헌법 정신이 교과서 속에 제대로 살아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이 점을 굉장히 우려한다.

그러지 않아도 벌써 국사편찬위에서 만들고 있는 국사 과목 기술 가이드라인에는 근‧현대사와 독립운동사를 축소하려 하고 있다. 거기에다 학계에서는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이 MB정권 이래 활개를 치고 있는데 이들이 교과서 서술에 또 얼마나 관여하게 될까. 학계에서 보편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서술들이 역사 교과서에 주입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

 

"교과서 논란? 朴 정권 실정들 묻어 버리려는 꼼수"

프레시안 : 교육부가 사회, 역사 과목에서 전근대사와 근‧현대사의 비중이 현행 5대 5에서 6대 4로 조정되고, 학습량 전체는 30% 정도 줄어들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한마디로 역사 교육에서 근‧현대사 비중이 축소된다는 얘기다. 이게 어떤 의미인가.

이만열 : 모든 역사가 소중하겠지만, 최근 세계적인 추세를 보자면 고대사보다 근‧현대사가 좀 더 중요하게 다뤄지는 편이다. 아무래도 현대 사회 문제와 더 직접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으로 보인다. 따라서 근‧현대사를 줄이겠다는 것은, 근‧현대사에 대한 치열할 역사의식을 약화시키면서 근‧현대사를 통해 과거의 역사를 보려는 시도마저 약화시키려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자기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 역사 내용의 비중을 줄인 다음, 자신들이 원하는 역사를 넣어 다시 근‧현대사 비중을 늘릴지도 모른다. 국정 교과서로 전환되고 그 체제가 안정기에 접어들면 그럴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교육 과정이 수시로 바뀐다. 예전 7차 교육 과정까지는 예고를 하고도 실제로 바뀔 때까지 시간을 오래 뒀다. 그런데 MB정권 이후로는 아예 몇 차 교육과정이라는 말 자체가 없어졌다. 교육 과정을 수시로 바꿀 수 있게 했다. 이런 작업이 다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교육 과정을 손질하기 쉽게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대통령부터 시작해 국정 교과서에 대한 여권의 의지가 대단한 걸로 보인다. 국정화로 최종 결론 내릴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그런데 학계와 현장의 반발이 거세다. 반발을 감수하면서까지 정부가 국정화를 할까? 만일 그렇다면, 정부가 이렇게 국정화를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이만열 : 우선 국정화 전환 가능성은 충분히 있어 보인다. 지금까지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태도가 늘 그러했다. '반대하려면 해라. 우리는 간다'였다. 일단 해놓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제풀에 알아서 지치기를 기다릴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잠잠해질 거라고 믿는 거다.

역사 교육, 국사 교육을 강화하겠다는 생각 자체는 좋다고 본다. 그런데 왜 국정화를 시도해서 분란을 일으켜 왜 점수를 다 까먹으려고 하나. 분명 어리석은 짓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엔, 일부러 갈등이 증폭시키려는 것 같기도 하다. 경제도 자신이 없고 다른 공약들도 줄줄이 실천 불가능한 것이 되니, 그런 문제들을 정면 돌파하지 않고, 교과서 논란 같은 걸 만들어 각종 실정들을 함께 묻어버리려는 그런 정치공학적인 의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때때로 든다.

특히나 보수 진영은 이념적 편 가르기를 통해 많은 덕을 봐왔다. 남북 대치 상황 속에서 불안감을 조성하고, 그런 상황에서 정부를 비판하는 이들에 대해 '종북' 세력이라고 몰아붙여 선거에서 이득을 본다. 이렇게 끌고 가야만 정치적으로 이득이 된다는 걸 잘 알기 때문에, 국민 다수가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원치 않는 걸 알면서도 국정화 반대 의견을 종북 좌파의 얘기로 치부하면서 이데올로기적인 편 가르기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것이 아닌가 한다.

 

 

"교과서 통제에 인성 교육, 일제식 발상"

프레시안 : 역사 교과서 국정 전환 시도부터 인성 교육 법제화까지, 정부가 비판적‧창의적 사고를 죽이는 방향으로 교육 정책을 펴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이만열 : 20세기 초, 일제가 우리나라를 침략하며 조선 정부를 '지도'할 고문을 셋을 뒀다. 외교, 제정, 그리고 지금의 교육부에 해당하는 학부다. 학부 고문이 우리나라 교육에 간섭하면서 맨 처음 한 게 교과서를 통제하고, 교육 현장에서 정의 관념과 투쟁적인 걸 가르치지 말라고 강조한 일이었다. 그리고 우리 국민을 상부에 순응하는 양순한 인간으로 만들려고 했다. 인성 교육, 예절 교육이라는 것도 투쟁하지 않고 순응적인 식민(植民)을 만들기 위한 방법이었다. 단재 신채호 선생 같은 이들은 '나라를 망하게 하는 학부'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우국자의 심정이 얼마나 착잡했으면 그런 말을 썼겠나.

지금 국가가 법으로까지 만들어 인성 교육을 실시하겠다는 것은 일제의 행태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국정 교과서도 그렇다. 국가가 역사 서술을 독점함으로써 비판적 사고를 위축시키게 된다.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마지막으로, 올바른 역사 교육이란 무엇인가.

이만열 : 내가 살고 있는 현재가 이뤄지기까지의 과정을 공부하는 것이 역사 교육이라면, 역사 교육은 오늘의 삶에 대한 진단으로도 통한다. 그러기에 역사 교육은 과거의 어떤 시점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현재와 연결시키는 교육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의 사실을 인과적으로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재적 입장에서 과거를 바라보고 거기에 비판적인 안목을 키우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역사를 제대로 가르치기 위해서는 먼저 가르치는 사람이 확고한 가치관 위에 서서 신념과 열정으로 무장해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교육 지침서라 할 교과서가 좋아야 한다. 열의를 가진 교사가 '이 교과서 정도면 내가 아이들에게 나의 역량을 충분히 보여줄 수 있겠다' 하고 안심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외적인 조건이 주어졌을 때에 역사 교육이 바로 된다. 이러한 여건을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중앙과 지방의 정부, 학부형, 교사의 역할이다. 부디 이를 명심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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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위원장의 차원 다른 북미대결전 대응

김정은위원장의 차원 다른 북미대결전 대응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5/09/17 [00:31]  최종편집: ⓒ 자주시보
 
 
▲ 언론들은 벌써부터 북의 위성발사와 핵시험 이후 가해질 대북 제재에 대한 보도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것이 자칫 세계적인 전쟁을 초래할 우려가 높다.    © 자주시보

 

14일 북이 인공위성발사 계획을 발표하자 15일 미국은 유엔안보리결의 위반이라며 대응 조치를 경고하였다.


그러자 같은 날 북은 즉각적으로  "우리는 미국과 적대세력들이 무분별한 적대시정책에 계속 매여달리면서 못되게 나온다면 언제든지 핵뢰성으로 대답할 만단의 준비가 되어 있다"며 핵시험 가능성까지 시사하며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이것만 봐도 김정은 제1위원장의 한반도 핵문제 해결 관련 정책은 전과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  2010년 10월 27일 KBS 9시 뉴스 화면복사, 궈보슝 중국 중앙군사위 부주석이 김정은 대장에게도 선물을 전달하였다.  천안함 사건 이후 중국은 북에 대한 태도가 확 변했다. 원자바오 총리의 방북을 시작으로 북중관계가 폭발적인 교류협력으로 접어들었다.   ©자주민보
▲  2010년 10월 27일 KBS 9시 뉴스 화면복사, 궈보슝 중국 중앙군사위 부주석이 김정은 대장에게 전달한 선물,  선물에 김정은 당시 김정은 대장을 '수장'이라고 호칭하였다. 수장은 중국에서 최고사령관에게만 붙이는 호칭이다.   ©자주민보

 


✦ 김정은 제1위원장의 외교전 특징

 

김정은 제1위원장이 군사분야를 총 지휘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진 계기는 2010년 연평도 포격전을 통해서이다. 정원 등에서 그 사건 이후 공개한 자료를 보면 연평도 포격전을 김정은 위원장이 지휘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연평도 포격전의 직접적 계기가 된 사건은 천안함 사건이다.

 

외교는 군사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특히 경제력으로 외교력을 뒷받침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소위 벼랑끝전술이라고 알려져 있는 군사력으로 외교력을 뒷받침하고 있는 북의 경우엔 외교전도 군사를 틀어쥐고 있는 지도자가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2008년 10월 11일 미국의 테러지원국 지정 철회 결정을 이끌어낸 과정에서부터 북은 전과 다른 군사, 외교전 특성을 보여주었다.


첫째가 최종 시한을 명시한 단호한 최후통첩이고 둘째 특징이 실제 물리적 타격까지 사용한다는 점이다.

 

2008년 10월 1-3일까지 힐 차관보가 평양에 들어갔는데 당시 조선신보를 인용 보도한 내일신문과 연합뉴스 등의 보도를 보면 그때 북에서 중대한 최후통첩을 했었다고 한다. 그 최후통첩 내용이 얼마나 단호했던지 힐 차관보는 예정보다 하루 더 평양에 체류하면서 미 백악관과 수시로 협상 과정을 논의하였다. 성 김 당시 국무부 한국과장은 서울에 남겨두고 힐 차관보만 평양에 들어갔는데 성 김은 한국정부와 입장을 조율하는 업무를 수행했었다고 한다. 전에 없는 일이었다.

그 후 며칠도 지나지 않아 미국 부시 대통령은 전격적으로 북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한다고 발표하여 즉각 그 효력을 발생시켰다. 북이 정한 최후통첩 시간을 10일 정도 밖에 주지 않았던 것 같다.

 

2009년 1월에도 인민군 총참모부 대변인 명의로 대남 '전면적 대결태세 진입'을 발표하여 놀라게 했던 북은 4월 5일, '은하 2호' 장거리 로켓을 발사하였는데 이것도 1호 때와 달리 발사 날짜와 발사 장소까지 미리 알려주었다. 요격할 테면 해보라는 것이었다. 실제 미국과 일본에서 요격 운운하자 김정은 제1위원장은 즉각적으로 전면전 불사 입장을 천명하였다.

 

이후 국정원 등에서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김정은 제1위원장의 결심이 하도 확고해서 ‘세계전쟁이 터지는 게 아닌가 걱정했다’고 회고했다고 한다. 
본지 한반도정세전문가 한호석 소장의 분석에 따르면 당시 김정은 제1위원장은 위성을 요격하려고 할 경우 즉각 미 항공모함을 타격하라는 명령까지 내린 상태였으며 북의 전투기들이 항공모함을 타격하기 위한 매복비행에 들어간 상태에서 광명성 2호 위성을 발사했다고 한다. 
결국 미국은 북의 위성로켓을 요격하지 못했으며 북은 성공적으로 실험위성을 우주공간에 올려놓았다.

 

이에 미국이 유엔을 움직여 대북 제재 논의를 진행하자 그 다음달인 5월 25일 북은 전격적으로 2차 핵시험을 단행하였다. 유엔 제재결의안이 나오기도 전이었다. 이어 6.12일 유엔안보리 대북제재결의안 1874호를 채택하자 북은 바로 우라늄농축과 그 무기화에 진입한다는 초강경 입장을 천명하였다.
2006년 5월 장거리 탄도미사일 연속 발사 이후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결의안이 나오자 수 개월이 지난 10월 9일에 1차 핵시험을 진행한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전격적인 대응이었다.

 

본지에서는 2010년 천안함 침몰 당시에도 북과 미국 사이에는 엄청난 군사적 충돌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다만 천안함을 북이 침몰시켰다는 결정적 증거인 어뢰 잔해는 국내외 권위 있는 과학자들에 의해 말이 되지 않는다는 점은 명백히 드러났다. 어뢰의 백색물질이 폭발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 바다 속에 있으면서 층층이 쌓인 알루미늄 산화물이란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대신 이스라엘과 미국의 잠수함 등에 심대한 타격이 가해졌을 가능성이 높은데 자세한 그 구체적 내용을 언급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상 실형을 선고받은 바 있어 이정도로 약한다.

천안함 하나만 놓고 봐도 사실 이전 서해교전이나 연평해전과는 그 피해 규모에 있어 차원이 다른 엄청난 군사적 충돌이 아닐 수 없다.


더 충격적인 것은 그해 10월 벌어진 연평도 포격적이다. 설령 천안함 사건 당시 북미 사이에 잠수함이 격침되는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다고 해도 북도 미국도 우리정부도 공개하지 않았기에 국민들과 세계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연평도는 북에서도 공식적으로 인정한 유엔군이 관할하는 한국의 영토이다. 그곳에 한 두 발도 아닌 포탄 수백발을 쏟아부어 섬 전체의 모든 군사기지를 불바다로 만든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1953년 7월 27일 맺은 정전협정은 전쟁을 잠시 정지하자는 협정이지 종전협정이 아니다. 따라서 어느 일방이 공격을 가하면 정전협정은 자동 폐기되며 정전 이전 치열한 전투상황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만약 유엔군사령부 사령관을 겸임하고 있는 주한미군사령관이 즉각 보복타격을 지시했다면 바로 전면전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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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무장지대 지뢰폭발 사건 당시 조선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비상확대회를 주재하며 단호한 결심을 언급하고 있는 김정은 제1위원장 .

 

김정은 제1위원장의 시한을 명시한 최후통첩과 총포탄을 사용한 물리적 타격의 특징은 이번 비무장지대 지뢰폭발 사건에서 다시 한 번 명백하게 증명되었다.

북은 대북 심리전 방송을 48시간 안에 중단하지 않으면 전 전선에서 무자비한 타격을 가해 흔적도 없이 날려버리겠다고 최후통첩을 내보냈으며 실제 전면전을 대비한 준전시상태를 선포하고 인민군의 전방 증강 배치에 잠수함전단 기동, 상륙용 공기부양정 기동과 특수부대 침투 준비는 물론 미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까지 발사 준비에 들어가는 초강경 군사적 조치를 단행하였다.
결국 유엔사에서 북에 누차 대화제의를 했지만 북은 그마저도 거부하고 남북당국간 회담을 역제의 하여 결국 남북관계 개선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8.25합의를 도출하였다.

 

이 사건에서 보여준 북의 대응에서 주목할 점은 최후통첩 시간이 일 단위가 아니라 시간 단위로 단축되었다는 점과 물리적 대응 수위가 미 본토타격까지 상정한 전면전까지 올라갔다는 점이다.

이번 4차 인공위성 발사 계획 발표에 대한 미국의 경고의 경우에도 북은 그 당일에 핵뢰성을 터트리겠다는 경고로 대답했다.

 

▲ 어니스트 미 백악관 대변인이 인공위성로켓발사와 북핵시험 계획 발표에 대한 기자회견에서 강경과는 거리가 먼 근심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다.     © 자주시보

 


✦ 대북 제재는 북미 본토타격전 초래 우려

 

한국 언론들은 이번 북의 발표에 구체적 시기가 명시되어 있지 않다면서 실제로 발사하려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반응을 떠보려는 것 같다는 분석과 함께 만약 북이 위성을 발사하게 되면 미국과 유엔안보리의 강력한 제재에 직면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특히 장거리 로켓을 발사할 경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기존 결의에 규정한 '트리거 조항'(자동개입)에 따라 추가 제재에 나서게 되는데 이것이 북에게는 큰 부담이 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추가 제재로는 지금보다 더욱 강력한 금융제재가 거론되고 있다. 특히 중국이 추가적인 강력한 금융제재에 적극적으로 나선다면 북에게는 가장 치명적인 타격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16일 주요 뉴스들은 미국의 입장과 함께 중국 외교부 대변인의 기자회견 내용을 집중보도하면서 미국과 중국이 한 목소리로 북에게 강력한 경고를 발표했다고 보도했다.

 

▲ 대니엘 러셀 동아태 차관보의 북 위성발사와 핵시험 계획에 대한 입장도 신중한 어조와 단어선택으로 일관되어 있었다.    © 자주시보

 

▲ 중국 훙레이 외교부 대변인의 북 위성로켓 발사에 대한 입장 보도     © 자주시보
▲ 중국 훙레이 외교부 대변인은 북만이 아니라 한반도 핵문제 관련 유관국 모두에게 당부하는 입장을 밝혔다.     © 자주시보

 

하지만 미국도 그렇고 중국 훙레이 외교부 대변인의 담화 내용을 직접 들어보면 북만 지칭해서 한 말이 아니라 유관국 모두가 한반도에 긴장을 초래하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물론 kbs 9시 뉴스에서는 훙레이 대변인이 ‘유엔결의안은 실질적으로 이행되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는데 앞 뒤 다 자르고 이 말만 딱 보도해서 아직 중국 정부의 확실한 입장을 확인하기는 이른 상황이다.

 

미국의 입장은 ‘경고’, ‘자멸’ 등과 같은 과거의 강력한 대응어들이 사라지고 ‘촉구한다’, ‘실수가 될 것’, ‘북의 경제발전에 악영향을 미칠 것’ 등과 같은 매우 낮은 수준으로 일관하고 있다. 한국의 언론에서는 이를 무슨 엄청난 경고라도 했다는 듯이 보도하고 있는데 미국 어니스트 백악관 대변인이나 다니엘 러셀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의 표정만 봐도 걱정이 한 가득 어려있는 표정들이었다.

 

사실, 지금도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북에 대한 경제제재를 입체적으로 가하고 있지만 의미가 없는 상황이다. 본지의 입장과는 약간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미국과 한국의 언론에서도 북중관계가 좋지 않을 정도로 중국도 북에 대한 경제제재에 있어 미국과 보조를 같이하고 있다고 연일 보도하고 있는데도 북은 나날이 경제가 폭발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러시아는 내놓고 북과의 교류협력을 확대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미국과 전면 대결전을 펴고 있는 러시아가 대북제재 공조에 보조를 함께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제3세계 국가들은 평양공항 문턱이 닳도록 드나드느라 바쁜 상황이다. 사실 북에 대한 미국과 그 동맹국의 경제제재는 이미 끝장난 지 오래다. 여기서 뭘 더 가한다고 해서 실제 북에 타격을 줄 것인지 의문이다.

 

대신 북의 강력한 반발은 불을 보듯 자명한 일이다.

 

김정은 제1위원장이 군사와 외교전을 지휘할 때부터 북은 전에 없는 파격적인 행보들을 보여왔다. 그 중 제재에 대한 입장에서도 큰 변화가 있었다. 김일성 주석이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미국의 제재 경고에 “언제는 제재가 없었는가”라며 신경 쓰지 않고 갈 길은 간다는 입장이었다. 김정은 제1위원장 시대에 와서는 경제제재도 북의 레짐체인지 즉, 체제전복을 노린 공격이라고 언급하며 대응타격을 경고해왔다. 특히 강대국의 이득을 위해 언제까지 분단을 인내하며 살 수만은 없다며 주동적으로 분단을 끝장내겠다는 입장, 나아가 통일성전까지 언급하고 있는 상황이다.

 

최근 북은 한반도 전쟁으로 통일을 하려고 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며 한반도가 아닌 미 본토에서 전쟁으로 미국과 끝장을 볼 준비를 하느라고 그간 통일이 늦어졌다며 이제 그 준비가 완벽하게 끝났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특히 전쟁은 소문을 내고 하는 것이 아니라며 전혀 알 수 없는 시점에 전격적으로 진행될 것이라는 보도까지 내놓았다.
나아가 전쟁 이후 남한 경제적 혼란을 전혀 없게 할 수 있는 만만반의 준비까지 다 끝냈다는 보도도 나왔다.

 

북 외교관들은 2차 핵시험 이후 유엔 대북 제재결의안이 나오자 유엔 회의석상에서 ‘미국이라는 갱스터와 그 똘마니 중국, 일본 등 모든 나라가 다 덤벼도 얼마든지 상대해줄 수 있다’는 폭탄발언도 터트렸던 적이 있다. 
그리고 실제 그 후 천안함 사건이 터졌고 연평도 포격전도 벌어졌다. 이 정도면 북의 의지가 어느 정도인지는 미국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정말 중국 훙레이 대변인이 유엔대북제재결의안은 실행에 옮겨져야 한다고 말을 한 것인지 아니면 9.19공동성명 등 그간의 합의사항이 이행에 옮겨져야 한다고 한 말을 우리 언론이 잘못 번역한 것인지는 모르겠는데 중국까지 적극적으로 앞장서서 북의 위성발사를 이유로 북에 또 다시 제재를 가하려고 하면 한반도만이 아니라 전 세계가 심각한 전쟁 위기 상황을 맞이할 우려가 높다.

 

북은 올 초 미국이 한미합동군사훈련을 중단하면 북미대화를 진행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다. 여전히 북은 대화를 통한 문제해결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이번 남북관계개선 관련 8.25합의만 봐도 북도 무조건 전쟁만을 생각하고 있는 나라는 아닌 것이 분명하다. 
과거의 틀에만 얽매이지 않는다면 8.25처럼 위성발사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북미대화가 전격적으로 진행될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는 것이다.

 

북의 위성발사가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로켓기술이 그대로 미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 기술로 되기 때문이다. 특히 북과 미국은 정전 즉, 실질적인 전쟁 상태에 놓여있기에 이런 위성발사가 미국에게는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결국 현 북미사이의 전쟁상황을 완전한 평화체제로 바꾸지 않는다면 북미 사이엔 언제든 전쟁이 발발할 수 있는 위험천만한 상황에 항상 놓여있게 된다.


중국과 소련도 대륙간탄도미사일을 가지고 있지만 서로의 주권을 존중해주고 있기에 문제가 되지 않듯이 미국도 북과 관련하여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상호 안전을 보장할 실질적인 장치를 마련하여 관계를 정상화하려는 입장이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국 정부도 북미관계가 악화되어 한반도가 전쟁 상황으로 치달아가게 되면 좋을 것이 하나도 없다. 경제만 더 어려워지게 된다. 전쟁이라도 터지면 그간의 많은 재부가 일순간에 잿더미가 되고 만다.

 

곧 미국에서 열리게 될 유엔 총회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한반도 긴장을 고조시키는 행보가 아니라 미국, 중국 등의 지도자들을 만나 지혜롭게 중재하고 국익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조율해나가기를 국민들이 간절하게 바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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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걸렸어!. 숫자로 본 박근혜정권 ①경제

 
 
정부가 주장해온 GDP 대비 법인세의 비중은 잘못된 것
 
임병도 | 2015-09-17 09:18:59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박근혜 정권과 새누리당은 야당과 시민사회의 법인세 인상 요구에 ‘GDP 대비 법인과세 비중이 3.7%로 OECD 국가 평균보다 월등히 높다’고 주장하며 법인세 인상 불가를 주장해 왔습니다. 법인세를 올려야 한다고 동의하는 국민도 한국이 OECD 국가 평균보다 높다는데 여기서 더 인상할 수 있겠느냐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정부가 주장해온 GDP 대비 법인세의 비중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정의당 박원석 의원이 기재부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4년 GDP 대비 법인과세 비중은 3,7%가 아닌 3.16%였습니다.

정의당 박원석 의원은 “정부가 지난해 GDP대비 법인세 비중을 3.7%라고 제시했지만, 작년 한국은행의 GDP통계 1485조 1000억원에서 3.7%는 55조원이다. 정부가 걷은 법인세 수입은 42조 6000억원인데 이는 GDP대비 2.87%불과하다”고 밝혔습니다.
 
기재부의 자료를 보면 한국의 GDP 대비 법인과세 비중을 보면 2011년 3.72%, 2012년 3.68%, 2013년 3.39%, 2014년 3.16%로 계속 내려가고 있습니다. 이는 그동안 박근혜 정권과 여당이 주장해온 숫자와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새누리당 이한구 의원은 장문의 보도자료를 통해 박근혜 정권의 경제 정책을 비판했습니다. 이 의원은 “2015년 국가재정운용계획에서 2016년 재정수입 전망치는 2013년 펴낸 국가재정운용계획보다 21조 7,000억 원, 2014년 국가재정운용계획보다는 13조 1,000억 원이 차이가 난다”며 정부의 국가재정운영계획이 수십조 원씩 차이가 난다고 지적했습니다.

특히 이한구 의원은 “더 심각한 문제는 2017년 이후 재정지출 증가율을 비정상적으로 낮게 전망해 관리재정수지 적자와 국가부채를 과소추정한 의혹이 있다”며 박근혜 정권이 고의적로 통계 자료를 왜곡해서 국민에게 알리고 있다는 의혹까지 제기했습니다.

박근혜 정권의 재정운영이 부실하다 보니 부족한 세수를 과태료나 과징금, 가산금 등의 징벌적 세외수입으로 충당하고 있다는 의혹도 나왔습니다.

2014년 징벌적 세외수입은 4조 773억 원으로 전년대비 14.5%(5,148억원)이 증가했습니다. 과태료의 경우는 9,491억 원을 징수해 2013년보다 22.1%(1,720억 원) 증가했고, 과징금은 7,906억 원을 징수해 2013년보다 무려 1,795%(7,489억 원)가 증가했습니다. 가산금의 경우는 8,263억 원을 징수, 2013년 대비 13.5%(980억 원)가 증가했습니다.

박근혜 정권이 세수 때문에 과태료를 인상하고, 교통 범칙금을 남발한다는 주장이 유언비어만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진 셈입니다.

요새 노동개혁이 박근혜 정권의 화두입니다.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 정부의 주장을 믿고 ‘청년 일자리’가 많아지고 비정규직이 해소될 것이라 믿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통계를 보면 그리 신뢰하기가 어렵습니다.

민간의 자발적 정규직 전환을 추진하겠다고 밝혔지만, 민간의 정규직 전환비율은 2013년에는 분기별로 20%대를 유지하였으나, 2014년 이후 10%대로 오히려 하락했습니다. 민간부문의 비정규직 비율도 2013년 이후 감소율이 극히 미미한 수준에 불과합니다.

노동관련 수치만 보면 무조건 ‘임금피크제’만 내세웁니다. ‘임금피크제=청년 일자리’를 주장하고 있지만, 그동안 박근혜 정권이 해온 노동개혁을 보면 앞으로 잘하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숫자가 모든 것을 말해주거나 결론을 내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일부 통계와 자료를 보면 지금 박근혜 정권이 어떤 생각으로 무엇을 왜곡하고,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예상할 수가 있습니다.

박근혜 정권은 ‘공공’, ‘노동’, ‘교육’. ‘금융’ 등 4대 구조개혁을 하겠다고 나섰지만, 이미 손을 쓸 수가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오로지 총선과 대선을 위한 프레임으로 '청년 일자리'라는 이슈를 만들어 여기에 모든 상황을 뜯어 맞추고 있습니다.

과거 일자리 몇 개 만들겠다고 해놓고 결과를 보면 그저 숫자상의 통계에 불과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마저도 오류투성이였습니다. 규제개혁을 통해 개혁하겠다고 했지만, 잠시 그때뿐입니다. 과연 미래를 위한 진정한 정책이 있는지, 정권을 잡기 위해 왜곡된 통계를 인용해 국민을 속이고 있는지 우리 스스로 다시 한 번 제대로 알아봐야 할 때입니다.


[진실의길. 기고 글&기사제보 dolce4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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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상의 출발점, ‘평화적 우주개발권’


<초점> 북한의 인공위성 발사 의지 표명의 의미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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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9.16  19: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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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1위원장, ‘평화적 우주개발권’ 강조

   
▲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5월 초 새로 건설한 국가우주개발국 위성관제종합지휘소를 현지지도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북한이 인공위성 발사 의지와 핵실험 가능성을 연이어 천명하고 나선 가운데 북한이 유독 ‘평화적 우주개발권’을 강조하고 나서 주목된다.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지난 5월 초 새로 건설한 국가우주개발국 위성관제종합지휘소를 현지지도하면서 “평화적인 우주개발은 우리 당과 인민이 선택한 길, 선군조선의 합법적인 권리”라고 강조했다.

14일 국가우주개발국 국장은 “평화적 우주개발은 국제법에 의하여 공인된 주권국가의 합법적 권리이며 우리 당과 인민은 그 누가 뭐라고 해도 이 권리를 당당히 행사해나갈 드팀없는 결심에 넘쳐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장거리로켓을 이용한 인공위성 발사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는 기술적으로 큰 차이가 없고, 유엔안보리 결의 1718/1874/2094호 등은 ‘탄도미사일 기술을 이용한 북한의 모든 발사’를 금지하고 있다.

2006년 1차 핵실험 직후 채택된 유엔안보리 결의 1718호(2006.10.14)는 북한에 대해 탄도미사일 관련 모든 활동 중지를 결정하고 있으며, 이후 결의들은 이를 재확인하고 있다.

김정은 제1위원장은 위성종합관제지휘소 시찰시 “인공지구위성 제작과 발사국으로서의 우리의 지위는 적대세력들이 부정한다고 해서 결코 달라지지 않으며, 우주개발사업은 그 누가 반대한다고 해서 포기할 사업이 아니”라고 말했다.

<조선중앙통신>은 ‘우주개발법’을 설명하면서 “우주개발 및 리용과 관련한 국제법과 질서를 존중하고 우주활동분야에서 선택성과 이중기준의 적용, 우주의 군사화를 반대한다는 데 대한 공화국의 원칙적 립장도 천명되여 있다”고 소개한 바 있다.(2014.3.31)

그러나 김민석 국방부 대변인은 15일 정례브리핑에서 “북한의 탄도미사일 발사는 중대한 도발행위”라며 “군사적인 위협이고, 탄도미사일 기술을 이용한 모든 행동을 금지하고 있는 UN결의안에 대한 명백한 위반행위”라고 규정했다.

존 커비 미 국무부 대변인도 14일(현지시간) 정례브리핑에서 “여러 안보리 결의들은 북한측에 탄도미사일 관련한 모든 활동 중단과 미사일 발사 중지(moratorium), 탄도미사일 기술을 이용한 모든 발사 행위 중단,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방식으로 탄도미사일 프로그램 포기를 요구하고 있다”면서 “탄도미사일 기술을 이용한 (북한의) 모든 발사는 이들 결의에 대한 명백한 위반”이라고 했다.

이같은 상황에 처한 북한은 인공위성 발사는 주권국가의 고유 권한이라고 주장하면서 국제사회가 제재를 가할 경우 핵실험이라는 고강도 대응책으로 맞서왔다.

북한이 14일 인공위성 발사 의지를 밝힌 데 이어 15일 미국 등 적대세력이 ‘무분별한 적대시정책’을 계속할 경우 ‘언제든지 핵뢰성으로 대답’할 준비가 돼 있다고 강조한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다.

결국 북한의 인공위성 발사는 북한이 주장하고 있는 ‘평화적 우주개발권’과 국제사회가 우려하고 있는 ‘탄도미사일 기술’ 개발이 상충하고 있는 셈이며, 더 근원적으로는 북한의 핵개발과 맞물려 있는 사안이기도 하다.

우주개발법 제정, 국가우주개발국 설립

   
▲ 북한이 2012년 4월 내외신에 공개했던 인공위성 '광명성 3호' 1호기. [자료사진 - 통일뉴스]

북한은 국제사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가 중점시책으로 인공위성과 로켓 기술을 발전시켜왔다. 1998년 광명성 1호 발사를 시작으로 인공위성 개발을 본격화 했고, 2012년 12월 인공위성 ‘광명성 3호’ 2호기를 은하3호 로켓에 실어 우주궤도에 올려놓는데 성공했다.

이 여세를 몰아 북한 최고인민회의는 2013년 4월 제12기 제7차회의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우주개발법’을 채택하고 기존의 우주공간기술위원회를 국가우주개발국(NADA)으로 확대개편했다.

이어 국가우주개발국 마크를 제정하는가 하면, 평양시 룡성구역 룡궁동을 은하 로켓의 이름을 따 ‘은하동’으로 개명하는 등 우주개발에 대한 적극적 의지를 숨기지 않았다.

국가우주개발국 국장은 “우리 국가우주개발국은 나라의 경제발전에 적극 이바지하기 위하여 기상예보 등을 위한 새로운 지구관측위성개발을 마감단계에서 다그치고 있으며 이와 함께 위성개발의 새로운 높은 단계인 정지위성에 대한 연구사업에서도 커다란 전진을 이룩하였다”고 말했다.

또한 “보다 높은 급의 위성들을 발사할 수 있게 위성발사장들을 개건확장하는 사업들이 성과적으로 진척되여 나라의 우주과학발전을 힘있게 밀고나갈 수 있는 확고한 토대가 마련되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로 2012년에 궤도에 진입시킨 인공위성 광명성 3호 2호기는 실용위성으로서의 역할은 제대로 수행하기 힘든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

윤창혁 국가우주개발국 부소장은 지난 7월 <CNN>과의 인터뷰에서 광명성 3호 2호기에 대해 “지금도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면서도 “물론 데이터 전송에 종종 문제가 생기긴 하지만...”이라고 덧붙였다.

인공위성 발사의 경제적 효과

따라서 지금 북한이 준비하고 있는 ‘새로운 지구관측위성’은 보다 진전된 기술로 실용위성으로서의 역할을 강화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국가우주개발국 국장은 “현 시기 우주개발은 세계적 추세로 되고 있으며 많은 나라들이 통신 및 위치측정, 농작물수확고 판정, 기상관측, 자원탐사 등 여러가지 목적으로 위성들을 제작, 발사하고 있다”며 “우리의 위성발사 역시 경제강국 건설과 인민생활 향상을 위한 국가과학기술발전계획에 따르는 평화적인 사업”이라고 말했다.

윤창혁 국가우주개발국 부소장은 지난 5월 28일 <AP>와 인터뷰를 갖고 북한은 통신위성을 개발 연구 중이라고 밝혔다. 또한 기상위성은 농업에 효과적이라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이 재정난을 겪고 있어도 우주개발에 투자하는 것은 좋은 정책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것의 경제적 파급 효과는 8배에 달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또한 러시아 전략기술분석센터 전문가인 바실리 카신은 15일 러시아 관영 <스푸트니크>와 가진 인터뷰에서 북한의 위성발사에 대해 “국가 위상을 높여줄 뿐 아니라, 북한에 있어 미사일 기술 수출은 외화 벌어들이기에 상당한 출처가 된다”고 평했다.

그는 “북한에 있어 우주 분야 기술 수출은 상당한 이윤을 남기는 비즈니스”이며, “특히 연구원들에게 지불되는 저임금과 저렴한 재료 비용은 국제가로 상환할 때 거의 공짜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은하 9호’, 미국 본토 사거리에 넣을 수 있어

   
▲ <조선중앙통신>은 김정은 제1위원장이 전략잠수함 탄도탄 수중시험발사의 완전성공을 지켜보았다고 5월 9일자로 보도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한편, 국가우주개발국 국장의 발표처럼 평안북도 철산군 동창리에 위치한 ‘서해 위성발사장’의 발사대는 기존 50m에서 67m로 확장돼 전장 30m의 은하3호 로켓보다 최대 두 배 크기의 로켓 발사가 가능해졌다.

그러나 북한의 이같은 기술력 향상을 국제사회에서는 위험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은하3호 로켓은 이미 1만Km 사거리를 가진 것으로 평가되며, 은하3호보다 훨씬 큰 로켓이 개발될 경우 미국 본토 전역이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사정권에 들게 된다.

북한은 2013년부터 은하3호 보다 훨씬 큰 은하9호 로켓 모형을 여러 차례 홍보했고, 2013년 3월 26일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는 지금 이시각부터 미국본토와 하와이, 괌도를 비롯한 태평양군작전전구안의 미제침략군기지들과 남조선과 그 주변지역의 모든 적대상물들을 타격하게 된 전략로케트군부대들과 장거리포병부대들을 포함한 모든 야전포병군집단들을 1호 전투근무태세에 진입시키게 된다”고 엄포를 놓은 바도 있다.

‘전략적 인내’라는 사실상 무대책으로 북한 문제를 방치해온 미국으로서는 북한이 미국 본토를 사정거리에 둔 로켓에 인공위성을 탑재해 쏘아 올리는 모습을 바라볼 수 밖에 없는 곤혹스러운 처지에 놓일 수 있다.

물론,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은 로켓 비행거리 뿐만 아니라 탄두 경량화 기술이나 대기권 재진입 기술 등이 추가로 필요하고 북한의 관련 기술력은 아직 객관적으로 확인된 바 없다.

그러나 북한이 지난 5월초 수중에서 발사할 수 있는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발사 실험 동영상을 공개함으로써 북한은 ICBM 외에도 잠수함을 이용해 미국 본토에 타격을 가할 수 있는 수단을 보유하고 있음을 과시해 파문을 일으켰다.

인공위성의 이중 용도와 GPS

   
▲ 24개의 위성으로 구성된 GPS의 개념도. [자료사진 - 통일뉴스/카리스쿨]

북한의 인공위성 기술이 경제적 가치를 갖는 것은 사실이지만 군사적 목적으로도 쓰일 수 있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이 두 측면에 모두 적용될 수 있는 GPS(Global Positioning System, 전지구 위치파악 시스템) 문제도 장기적인 관심거리로 등장하고 있다.

GPS는 24개의 인공위성이 지구 주위를 6면 궤도로 돌면서 보내오는 신호를 수신해 현재 위치를 계산하는 위성항법시스템으로 미국 국방부가 1970년대부터 군사용으로 개발해 독점적으로 운용해 왔다.

GPS 기술은 무기 유도, 항법, 측량, 지도 제작, 측지, 시각 동기 등 군용 및 민간용 목적으로 다양하게 이용되고 있으며, 최근에는 스마트폰에서도 사용되는 등 첨단 과학기술의 보고라 할 만하다.

북한 <노동신문>은 광명성 3호 2호기 발사가 성공한 직후인 2013년 1월 7일 “GPS 분야에서 미국의 독점적 지위는 허물어지고 있다”며 “앞으로 자기 식의 GPS를 가지는 나라들이 더욱 늘어날 것은 명백하다”고 보도했다.

실제로 미국의 GPS에서 벗어나기 위해 유럽연합(EU)은 독자적인 GPS인 갈릴레오(Galileo)를, 중국은 베이더우(北斗, COMPASS)를, 러시아는 글로나스(GLONASS)를 개발 중이거나 보완하고 있다. 일본은 미국 GPS를 보완해 정밀도를 높인 ‘준텐조(準天頂, QZSS)’위성 구축을 추진하고 있다.

북한의 인공위성 발사가 아직 초보적인 단계에 불과하지만 미국의 GPS 독점권으로부터 벗어나 중국이나 러시아의 GPS를 이용하거나 이와 연계해 독자적인 GPS를 구축하려는 방향으로 움직일 것임에는 틀림없다. [관련기사 보기]

‘조선이 우주개발을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도전적인 <CNN> 기자의 질문에 윤창혁 부소장은 “우리의 목표는 경제발전이다. 인민들의 생활수준을 제고하는 것”이라며 정확한 일기예보는 농업발전에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경제적으로 투자가치가 충분하다는 답변인 셈이다.

한편, <노동신문>은 “1990년대에 있은 페르시아만 전쟁과 발칸전쟁 때 유럽이 GPS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미국이 작간을 부린 사실은 많은 나라들에 심각한 교훈을 주었다”고 지적, GPS가 상업적 문제뿐만 아니라 군사적 자주권에서도 중요성을 갖고 있음을 지적했다.

국방대학교 안보문제연구소는 올해 초 ‘2015년도 3대 안보위협 예측’ 보고서에서 “관성항법장치(INS)에 GPS가 결합되면 정확도가 25% 높아지고, 재진입오차제어 등을 활용하면 60%까지 정확도가 향상된다”고 분석했다.

북한의 평화적 우주개발권 문제는 핵문제와도 연계돼 있다. 북핵 문제가 없었다면 탄도미사일 발사에 대한 국제사회의 규제 결의가 나왔을 리도 없다. 결국 북핵 문제의 해결 과정에서 평화적 우주개발권 문제도 함께 해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평화적 우주개발권과 핵이용권

   
▲  2007년 2.13합의에 도달한 6자회담 수석대표들이 손을 맞잡았다. 9.19공동성명에 입각한 북한 영변 핵시설 불능화와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 등 '상호 조율된 조치'에 합의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한겨레>에 따르면 이삼성 한림대 교수는 오는 18일 토론회 발제에서 이란 핵협상 타결을 예로 들어 “플루토늄 생산 시설은 완전 폐기하고, 대신 전력생산용 경수로와 이에 필요한 저농축 우라늄 시설의 일정한 유지를 핵심적인 내용으로 하는 이 타협은 북한의 평화적 비핵화 협상에 적용될 여지가 많다”고 지적할 예정이다.

국제기구의 감시하에 평화적 우주개발권과 핵이용권을 보유하는 것은 보통국가에게 적용되는 통상적 국제기준이다. 그러나 핵을 개발한 북한을 보통국가로 용인하는 협상을 할 수 없다는데 미국의 딜레마가 있다.

국가의 생사존망을 걸고 핵과 미사일을 개발해온 북한에게 이것을 포기하라고 할 때는 그에 합당한 안전장치를 제공해야 할 것이다. 국제적 감시하의 평화적 우주개발권과 핵이용권은 미국의 ‘종잇장 약속’이 뒤집힐 경우 북한이 핵무장국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가역성’을 보장하는 물적 토대가 될 수 있다. [관련기사 보기]

북한이 국가우주개발국 국장과 원자력연구원 원장을 내세워 연이틀 인공위성 발사와 핵실험을 경고하고 나선 지금이 오히려 북한과의 협상의 기회가 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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