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수의 13만원, 유골 자연에 뿌리면 무료

 

[종합] 장례문화 개선 시민캠페인 '생사 문화의 날' 행사 현장에 다녀와서

15.09.13 20:31l최종 업데이트 15.09.13 20:49l

 

 

기사 관련 사진
▲  13일 청계광장에서 열린 장례문화 개선 시민캠페인 '생사 문화의 날' 행사
ⓒ 이정환

관련사진보기


하나, 반드시 죽는다. 
둘, 혼자서 죽는다.
셋,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다.

삶과 죽음의 문제는 복잡한 듯 보이지만 한편 이렇게 단순하다. 사람마다 생사관(生死觀)은 달라도 "모든 사람이 아는 것" 또한 이 세 가지다. '웰다잉 10계명' 머리글, 생사 문화의 날 행사 현장이었기에 더욱 인상적이었다.

서울시설공단이 주최한 장례문화 개선 시민캠페인 '생사 문화의 날' 행사가 13일 청계 광장에서 열렸다. 지난 7일부터 '오픈 앤 체인지(Open & Change, 열어라, 그리고 변화하라)'란 주제로 시작한 '2015 서울 생사 문화 주간'을 마무리하는 날인 만큼, 지배적 장례 문화에서 '일탈한' 흔적들이 행사장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3가지 키워드로 정리해봤다.

착한 가격, 더 착한 '산골'
 

기사 관련 사진
▲  '생사 문화의 날' 행사장에서 공연을 지켜보고 있는 시민들
ⓒ 이정환

관련사진보기


"안치료 1시간 당 2,500원, 빈소 사용료 1시간당 1만8천원∼4만 원, 수의 13만 원∼25만 원, 관 11만 원∼17만 원, 남자 상복 3만 원, 여자 상복 1만5천 원, 자연장 50만 원, 산골은 무료." (서울형 착한 장례서비스 안내서에 있는 패키지 및 표준 요금 일부 발췌)

'서울형 착한 장례 서비스'는 지난 5월 1일부터 서울시설공단이 새롭게 선보인 프로그램이다. 서울의료원과 서울시설공단의 '장례 인프라'를 활용해 장례, 화장, 안장에 이르는 절차를 하나의 패키지 형태로 묶어낸 서비스다. 비교적 최근 선보인 서비스인 만큼 장례비용 거품을 걷어내자는 논의와 맞닿아 있다. 

착한 가격을 우선 내세우고 있다. 서울시설공단에 따르면 이 서비스 이용료는 약 6백만 원 수준으로 일반적인 장례비용보다 저렴하다고 한다. 상조회사에서 보통 제공되는 장례 지원 서비스도 사실상 이용할 수 있다. 행사 현장에서 만난 문수련(27·여)씨는 "장례를 좀 더 원활하게 치를 수 있도록 장례지도사 자격증을 갖고 있는 공단 직원이 도와주고 있다"고 소개했다. 아직은 시범 사업 기간으로 서울의료원 장례식장을 이용하는 경우에 한 해 서비스를 신청할 수 있다.

또한 최근 들어 친환경 장법으로 다시 주목받고 있는 '산골(화장 후 유골을 자연에 뿌리는 형태)'을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서울형 착한 장례 서비스는 '부담 없는 가격', '화장에 최적화된 장례용품'과 함께 '친환경적 장사법'을 3대 원칙으로 내걸고 있다. 

작은 장례로 나눈다
 

기사 관련 사진
▲  지난 3월,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은 종로구에 홀로 살고 있는 어르신 아홉 분이 구술한 삶을 책으로 엮어냈다. 책에 실린 사진
ⓒ 한겨레두레협동조합

관련사진보기


"문을 열고 들어서면 바로 부엌이다. 방문 바로 옆으로 냉장고가, 냉장고 위에는 참치 깡통과 자질구레한 살림살이가 놓여 있다. 작은 싱크대도 놓여 있다. 대낮인데도 방안은 어두웠다. 불을 좀 켜자고 하니 천장을 가리키며 겸연쩍게 웃는다. 형광등 소켓에 형광등이 없다. 아직 맞는 걸 못 찾아서 그냥 두고 있다고 한다." ('나는 종로에 사는 사람입니다' 중에서)

행사 현장에서 한겨레두레협동조합 김영주 차장이 소개해 준 책이다. 지난 3월,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은 종로구에 홀로 살고 있는 어르신 아홉 분이 구술한 삶을 책으로 엮어냈다. 저소득층 독거 노인의 장례 지원 사업 '품앗이 마을 장례' 일환으로 만든 책이다. 품앗이 마을 장례에 필요한 비용은 조합원 회비 중 일정 비율을 출자해 충당하고 있다. 장례 거품을 걷어내는 데서 한 발 더 나가고 있는 셈이다.

고 리영희 선생의 민주사회장을 시작으로 김근태, 성유보 등 우리 시대 '양심'의 장례를 주관했던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은 기본적으로 "소박하고 조용한 장례를 지향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삶의 결과인 죽음을 준비하고, 상호 부조의 방법으로 장례를 치른다"는 협동조합 설립 본연의 취지를 이어나가기 위해서란 설명이다.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의 장례 서비스는 '더불어 삶'을 통해 이용할 수 있다. 상포계 서비스로 직거래 공동 구매를 통해 장례 비용을 절감하고, 조합원으로 구성된 장례지도사와 접객 도우미가 장례식의 모든 과정에 함께 참여하고 있다. 현재 조합원 숫자는 2천5백여 명, 법적 기준에 따라 월 납부금(곗돈)의 50%를 은행에 예치하고 있다.

스토리를 담는다
 

기사 관련 사진
▲  은빛기획협동조합이 만든 고 내툰나잉 미얀마민족민주동맹 한국지부장의 조문보
ⓒ 은빛기획협동조합

관련사진보기


"민주주의 기차 있잖아요? 처음에는 같이 출발하는데 어떤 역에 도착하면 누군가가 내릴 수도 있고 어떤 역에 도착하면 누군가는 또 타요. 타고 내리면서 기차는 계속 갈 거예요. 종착역에 도착하면, 다 같이 도착하면 더 좋겠죠." (고 내툰나잉 미얀마민족민주동맹 한국지부장의 조문보)

은빛기획협동조합은 고인을 기리기 위해 만드는 인쇄물, 조문보로 잘 알려진 곳이다. 특히 고 신해철의 조문보가 만들어진 사실이 언론을 통해 널리 알려진 바 있다. 당시 팬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조문보에는 그의 삶의 궤적, 추모의 글들, 일화들이 담겨 "형식만 남은 장례에 스토리를 담은" 시도로 평가됐다.

이처럼 조문보 제작은 가족의 '몫'만은 아니다. 내툰나잉 한국지부장의 조문보는 평소 그와 친분이 깊었던 박은홍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가 주도해 만들어졌으며, 지난 달 31일 별세한 호서대 설립자 강석규 박사의 경우는 학교측에서 요청했다고 한다. 유족의 동의가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행사 현장에 전시된 조문보 중에는 1973년 박정희 정권 시절 의문사한 고 최종길 전 서울대 교수의 부인 고 백경자씨의 조문보도 있었다. 펼치면 A4 용지 크기, 앞서 언급한 조문보들에 비해 비록 분량은 많지 않았지만, "이 슬픔을 나눠주십시오"로 시작하는 글이 전달하는 울림은 컸다. 고인의 아들이 직접 썼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노항래 은빛기획협동조합 대표는 "계약 과정에서 인터뷰를 하는데, 그 내용만으로도 조문보를 만들 수 있다. 6시간 이내 제작이 가능하다"면서도 "본인이 직접 써오는 게 가장 좋더라. 미리, 지금 준비하시면 더욱 좋다"고 말했다.

'미리' 또는 '지금'의 무게

착한 가격, 착한 안장에 나눔을 더하고 스토리를 담는 쪽으로 변화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장례 문화, 그래도 핵심적인 것은 노 대표의 말처럼 '미리' 또는 '지금'이 아닐까. 웰다잉 10계명의 '모든 사람이 모르는 것 세 가지'가 다시 떠올랐다.

하나, 언제 죽을지 모른다.
둘, 어디서 죽을지 모른다.
셋,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
 

기사 관련 사진
▲  '생사 문화의 날' 행사장에 전시된 '웰다잉 10계명'
ⓒ 이정환

관련사진보기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인도를 왜 막아? 정몽구나 구속하세요!”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5/09/13 11:14
  • 수정일
    2015/09/13 11:14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9.12 희망버스 한남동 정몽구 회장 자택 인근서 출발...정 회장 자택 접근 막는 경찰과 충돌

정웅재 기자  최종업데이트 2015-09-12 11:23:08 이 기사는 현재 건 공유됐습니다.

 

비정규직 및 하청 노동자들의 문제 해결을 촉구하기 위한 희망버스 참가자들이 12일 오전 출발지인 서울 용산구 한남동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 자택 앞으로 올라가려다가 경찰에 막혀 있다.

 

비정규직 및 하청 노동자들의 문제 해결을 촉구하기 위한 희망버스 참가자들이 12일 오전 출발지인 서울 용산구 한남동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 자택 앞으로 올라가려다가 경찰에 막혀 있다.ⓒ정의철 기자
 

기아차동차, 거제 대우조선해양, 부산 생탁 등 고공농성중인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응원하기 위한 '희망버스'가 12일 오전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 자택이 있는 용산구 한남동에서 출발했다.

희망버스 참가자들은 서울에서 거제와 부산을 거치는 1박2일 일정을 출발하기에 앞서 정몽구 회장 자택 인근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불법파견 현행범, 정몽구를 구속하라”고 촉구했다. 이날 정몽구 회장 자택 인근에서는 평화적 집회를 보장하라는 희망버스 참가자들과 이를 막는 경찰간의 충돌이 한 시간여 계속됐다.

기아차 관계자들이 집회 장소 선점
경찰 정몽구 회장 자택 입구 들머리 방패들고 막아서

기자회견은 시작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정몽구 회장 자택 입구 들머리 인도를 이미 기아차 관계자들이 집회 신고를 내 선점하고 있었다. 와이셔츠와 정장바지 차림을 한 사람 20여명이 ‘평온하고 안정적인 주거환경 보장하라’, ‘시도때도 없는 집회, 주민건강 파괴한다’라고 쓰인 어깨띠를 두르고 1미터 간격으로 떨어져서 서 있었다. 어깨띠 내용만 보면 인근 주민들로 착각할 수 있지만, 민주노총 관계자는 “기아차 협력사 대표와 직원들”이라고 귀뜸을 해줬다.

경찰 중재로 이들이 정몽구 회장 자택쪽으로 물러나고, 그 자리에서 희망버스 참가자들이 기자회견 등 행사를 진행했다. 곧이어 경찰과 참가자들간 산발적 충돌이 한 시간여 계속됐다. 희망버스 참가자들은 ‘불법파견 10년, 파견법 위반 현행범 정몽구 구속’이라고 쓰인 스티커를 몸에 붙이고, 개별적으로 정몽구 회장 자택쪽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방패를 든 경찰이 대열을 짜고 이들을 막아섰다. 막는 경찰을 뚫고 정몽구 회장 자택쪽으로 걸어가려는 참가자, 이를 막는 경찰간 산발적 충돌이 한 시간 가까이 계속됐다.

희망버스 참가자들은 “인도를 막는 이유가 뭐냐?”, “내가 혼자 조깅을 하겠다는 건데 왜 막냐?”, “누가 집회한다고 그랬냐? 길을 가겠다는 건데 왜 막냐?”, “자유로운 보행을 무슨 근거로 막는거냐?”라고 항의했다. 현장의 경찰 지휘관들은 “범죄채증합니다. 집회 장소로 가서 하세요”, “목적을 갖고 집단적으로 이동하는 건 안 된다”라고 주장하며 막았다.

고 전태일 열사의 동생 전태삼 씨는 “(경찰은 ) 가서 (불법 현행범) 정몽구나 구속해야지 왜 여기서 그러는거냐?”라고 항의했다. 한 희망버스 참가자는 “청와대 앞도 지나가는데 대통령보다 위에 있는 사람이 정몽구냐?”라고 항의했다.

경찰이 용산구 한남동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 자택 입구 들머리를 막고 카메라로 채증하고 있다.
경찰이 용산구 한남동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 자택 입구 들머리를 막고 카메라로 채증하고 있다.ⓒ정의철 기자
전태일 열사의 동생인 전태삼 씨가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 자택 방향으로 올라가려다 경찰에 의해 사지가 들린채 끌려나오고 있다.
전태일 열사의 동생인 전태삼 씨가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 자택 방향으로 올라가려다 경찰에 의해 사지가 들린채 끌려나오고 있다.ⓒ정의철 기자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 자택 방향으로 올라가려다 경찰에 제압당하는 희망버스 참가자.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 자택 방향으로 올라가려다 경찰에 제압당하는 희망버스 참가자.ⓒ정의철 기자

권영국 변호사와 경찰 지휘관 설전 
권 변호사 “왜 인도 막냐? 인도 걷는 게 공공안녕 해치는 거냐?”
경찰 지휘관 “몰라요. 더 이상 대답 않겠어요”

“범죄자 정몽구 회장을 만나서 왜 불법을 계속하냐고 묻겠다”는 희망버스 참가자들과 이를 막는 경찰의 충돌이 계속되는 가운데,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권영국 변호사가 변호사 신분증을 제시하며 “인도를 왜 막나? 인도를 열어라”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권 변호사는 현장 지휘관을 찾으면서 경찰이 불법을 저지르고 있다고 주장했다.

잠시 뒤 현장에 나타난 경찰 지휘관과 권 변호사 간 설전이 벌어졌다.

권영국 변호사(이하 권):평화적 집회는 해산 명령을 못하게 돼 있어요. 헌재 판결 아시죠?

경찰 지휘관(이하 경):공공의 안녕 질서에 명백한 위험을 초래했잖아요.

권:주민들이 막으라고 하던가요? 인도를 따라 걸어가는 게 공공의 안녕을 해치는 건가요?

경:모르겠어요. 저는 카메라 싫어해요. 더 이상 대답하지 않겠어요.

권:도대체 뭐가 공공의 안녕을 해친다는 거예요?

경:몰라요.

경찰이 희망버스 참가자들을 막아선 사이로 차량이 지나가고 있다.
경찰이 희망버스 참가자들을 막아선 사이로 차량이 지나가고 있다.ⓒ정의철 기자
희망버스 참가자들이 12일 출발지인 서울 용산구 한남동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 자택 인근에서 불법파견을 규탄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희망버스 참가자들이 12일 출발지인 서울 용산구 한남동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 자택 인근에서 불법파견을 규탄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정의철 기자

10년 불법파견 하고도 처벌 안받는 정몽구 회장
“불법파견 현행범 정몽구를 구속하라”
희망버스 참가자들 기자회견 마치고 거제-부산으로

한 시간 가량의 아수라장은 오전 9시20분경, 희망버스 참가자들이 기자회견을 하고 버스를 타고 출발하기로 하면서 정리됐다. 양경수 기아자동차지부 화성지회 사내하청분회장은 “한남동은 올때마다 이렇게 난리가 난다. 이곳은 합법적으로 집회 신고를 해도 경찰이 막무가내로 막는다”라며 “불법을 바로 잡을때까지 끝까지 투쟁하겠다”라고 말했다.

희망버스 참가자들은 “불법파견 현행범 정몽구를 구속하라”, “평생 비정규직, 평생 파견 박근혜 정권 물러가라”라고 구호를 외쳤다.

현대기아차 그룹은 불법파견을 10년 가까이 진행해왔다. 법원에서는 현대 기아차 사내하청에 대해 불법파견이라는 판정을 내렸다. 이에따라 현대차그룹 불법파견의 총책임자인 정몽구 회장을 노동조합은 물론, 법학교수들까지 나서서 검찰에 고발한 바 있다. 그러나 정몽구 회장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불법파견에 대해서는 사내하청 노동자 일부만 신규채용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풀고 있어서 비정규직노조 등의 반발을 사고 있다. 기아차 화성공장 사내하청 노동자 최정명(45) 한규협(41) 씨는 “불법파견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 옥상 광고판에 올라 12일로 94일째 농성중이다.

기자회견을 마친 참가자들은 인근에 대기하고 있던 전세버스를 타고 희망버스 일정을 진행하기 위해 거제로 출발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추석 직전 '천정배 신당' 온다

 

[이슈 분석] 새정치 내분에도 당분간 현역 참여 어려워

15.09.12 18:15l최종 업데이트 15.09.12 18:15l

 

 

기사 관련 사진
▲  신당 창당을 준비중인 것으로 알려진 무소속 천정배 의원이 지난 3일 국회 본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 남소연

관련사진보기


천정배 의원은 아직 '신당 창당'을 공식적으로 선언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행보와 측근들의 말을 통해 '천정배 신당'은 기정 사실화되고 있다. 창당 절차의 시작인 '창당준비위원회' 출범을 언제 선언할 것인가만 남았다. 천 의원 지금 그 선언을 위한 조건을 만들고 그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최적의 시기를 재고 있는 것이다. 또 그것은 새정치연합 내부의 상황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천정배는 언제 신당 창당을 선언할까?

천 의원은 애초 '신당 창당'에 부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는 지난 4.29재보궐 선거에 출마하면서 "새로운 당을 만들려고 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을 수차례 반복했다. 당선 이후에는 그는 신당 창당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도 확정적인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 정치권에서도 자금 조달 등 창당 작업의 자체의 어려움 등을 근거로 천 의원이 신당이 아닌 '무소속 연대' 수준으로 내년 총선에 나설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천 의원의 태도에 변화가 시작된 것은 4.29 재보궐선거 패배에 따른 새정치민주연합의 내홍이 점점 깊어지기 시작하면서부터다. 문재인 대표가 혁신위원회를 앞세워 당의 혼란 상황을 수습하려 했지만, 일부 호남 의원들의 반발이 계속됐다. 대규모 탈당은 없었지만 박준영 전 전남지사 등 과거 당의 유력 인사들의 탈당도 이어졌다. 그때부터 측근들 사이에서 창당설이 흘러나왔고 최근에는 천 의원도 같은 의사를 밝히고 있다. 

천 의원은 지난 9일 경희대에서 열린 강연에서 "내년 4월 13일 총선 전, 늦어도 12월 말이나 1월 신당이 출범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보채는 분들이 있지만 내년 총선에서 역산해보면 된다, 당을 만드는 데 한 달이면 된다고 한다"라며 "지금 제가 꿈꾸는 건 먼 미래가 아니다. 내년 총선과 대선에서 집권하려고 한다"라고 말했다. 공식 선언은 아니었지만 사실상 창당 준비 작업에 들어갔음을 내비친 것이다. 

이러한 천 의원의 행보에 정치권에서는 9월 중순, 늦어도 추석 전에는 신당 창당 선언을 할 것이라는 전망이 제기됐다. 오는 12월 말이나 내년 1월에 창당을 위해서는 적어도 이 시기에 창당준비위원회를 출범하고, 5개 시도당위원회 출범 작업에 들어가야 한다는 분석이었다. 일각에서는 이번 주에 선언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기도 했지만, 문재인 대표의 재신임 문제 등 새정치연합의 갈등을 조금 더 관망하는 분위기로 가고 있다. 

호남 출신의 한 정치권 관계자는 "문재인 대표의 재신임 결과를 기다리는 것은 아니지만, 이 시기에 창당을 선언하면 야당의 갈등을 부추기는 모습이 될 수 있다"라며 "문 대표 재신임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새정치연합의 분열은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 대표가 불신임을 받아 사퇴하거나, 또는 재신임을 받더라도 당의 분란이 수습되지 않고 갈등이 더욱 증폭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결론적으로 천 의원의 창당 선언은 새정치연합의 혁신안 통과와 함께 문 대표의 재신임 여부가 결정되는 16일 이후로 미뤄질 가능성이 높다. 새정치연합은 현재 문 대표 재신임의 정당성을 놓고도 주류와 비주류 사이의 갈등이 계속되고 있다. 비주류 측은 "친노냐 반노냐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라며 "오히려 분열을 자극하는 행위"라고 반발한다. 재신임 여부와 상관 없이 천 의원을 향한 당의 원심력이 강해질 수 있는 지점이다.

'천정배-안철수'의 연결고리
 

기사 관련 사진
▲  무소속 천정배 의원과 회동한 새정치민주연합 안철수 의원이 지난 9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전화 통화하며 점심 약속을 위해 외출하고 있다.
ⓒ 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신당 창당이 확실해지는 상황에서 이제는 천 의원이 '누구'와 함께 '무엇'을 내걸고 신당을 만들 것인지가 최대 관심사다. 천 의원은 현재 새정치연합을 향한 호남의 '민심 이반'을 자신의 창당 명분으로 삼고 있다. "호남의 지지 없이 정권 교체는 불가능하다"라는 얘기다. 그는 문제의 원인을 새정치연합의 '호남 기득권'으로 규정하고 있고, 이것은 새정치연합 내에 호남 의원들에게도 해당하는 말이다. 

이 때문에 천 의원은 새정치연합 내의 기존 호남 세력과 쉽게 손잡을 수는 없다. 최종적으로 일부 기성 정치의 일부 세력이 결합할 수는 있겠지만, 신당의 출발은 천 의원이 강조해온 '새롭고 참신한 인재'들과 함께 시작하는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다. 또 호남을 중심으로 한 '무소속 연대'가 아니라 '신당 창당'으로 가닥을 잡은 만큼 전국적 지지를 이끌 수 있는 인물들이 결합해야 한다는 새로운 조건이 제기 됐다. 

이런 관점에서 지난 9일 천 의원과 안철수 전 새정치연합 공동대표의 회동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두 사람의 회동은 안 전 공동대표가 문재인 대표와 당 혁신위원을 향해 "혁신에 실패했다"라고 비판의 날을 세운 직후 이뤄졌다. 안 전 공동대표는 정치에 본격적으로 몸 담으면서도 '기성 정치'에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그 때문에 당 대표까지 지냈음에도 여전히 일정 '새정치'라는 이미지가 남아 있다.  

이 자리에서 천 의원은 안 전 공동대표에게 "한국 정치를 재구성하기 위해 새로운 길을 가야 한다"라며 사실상 신당 참여를 제안했다. 여기에 안 전 공동대표는 천 의원의 복당을 요구하면서 "함께 해야 한다"라고 답했다. 천 의원의 신당 참여 제안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 사이에서 '현재의 새정치연합으로는 총·대선에 승리할 수 없다'는 공감대가 이뤄졌다는 게 주변 인사들의 전언이다.  

천 의원의 한 측근은 안 전 공동대표와의 회동을 '새로운 창당 세력과 대선주자의 만남'으로 해석했다. 그는 "총선을 치르기 위한 정당을 만들기 위해서는 안철수와 같은 대선주자급 인물이 함께 해야 한다"라며 "천 의원은 이미 지난 선거에서 호남 정치를 개혁의 열망으로 당선이 됐기 때문에 안 전 공동대표와 함께 더 큰 그림을 그려보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반면 안 전 공동대표를 비롯해 새정치연합의 비주류 인사들이 당장 당을 떠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전망도 함께 제기된다. 새정치연합의 한 관계자는 "안 전 공동대표는 천 의원에게 복당을 제안했을 정도로 당에 큰 책임감이 있다"라며 "설령 천 의원과 공감대가 있는 의원이 있다고 하더라도 내년 예산안을 처리하는 12월까지는 당을 나가기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천정배 창당 동력 될까
 

기사 관련 사진
▲  복지국가소사이어티가 지난 8월 25일 오후 2시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에서 '복지국가 정당 대국민 제안대회'를 개최하고 있는 모습.
ⓒ 이주영

관련사진보기


천 의원이 신당 창당을 추진하는 데 필요한 또 한 가지는 '창당 동력'이다. 실질적으로 사람이 모여야 창당이 가능하다. 이를 위해서는 새정치연합과 차별화되는 가치와 정책이 필요하다. 또 기존의 정치권 세력이 아닌 새로운 '피'로 그것을 채워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상이 제주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대표)가 추진 중인 '복지국가 정당'이 천 의원과 강하게 연결되고 있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는 지난달 25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복지국가 정당 대국민 제안대회'를 열고 오는 11월을 목표로 본격적인 창당 작업에 돌입했다. 이에 앞서 광주와 목포, 순천, 제주 등에 지역 조직을 건설했고, 최근에는 대전에도 지역 조직을 세웠다. 여기에는 각 지역의 시민사회와 학계 등 '비정치권 인사'들이 다수 참여하고 있다. 지난해 안철수 전 공동대표의 신당 창당에 참여한 인사도 일부 포함됐다. 

천 의원은 광주복자국가소사이어티의 상임고문이다. 현재까지 천 의원이 '복지국가 정당' 움직임에 동참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얼마든지 교감할 수 있는 상황이다. 이 조직에는 지난 4.29재보궐 선거 당시 천 의원을 도왔던 인사들도 대거 들어가 있다. 천 의원은 정치권에서 신당 창당의 기회를 만들고 복지국가소사이어티가 정치권 밖에서 새로운 정책과 가치로 정당 외연을 확장하는 형태를 예상해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이상이 교수는 <오마이뉴스>와 한 통화에서 "천 의원과 복지국가소사이어티는 지금 각자 세력을 키우는 단계지만 결국 한솥밥을 먹게 될 것"이라며 천 의원과의 연대 가능성을 확인했다. 그는 "천 의원 역시 기성 정치인으로 정치권 문제에 자유로울 수 없다, 독자 세력만으로는 새로운 정당을 창당이 어렵다"라며 "추구하는 가치와 정책이 맞는다면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편집ㅣ조혜지 기자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북의 과학자, 얼마나 많기에 그 많은 기술 100% 자립할까?

북의 과학자, 얼마나 많기에 그 많은 기술 100% 자립할까?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5/09/12 [23:37]  최종편집: ⓒ 자주시보
 
 

 

최근 한 외국 무역업을 하는 친구로부터 적도기니라는 나라가 올해 30억(현 시세로 3조 6천억원) 달러 국가의 통신망 구축 사업을 북에게 맡기기로 했다는 콩고민주공화국(민주콩고) 일간지 <Le Potentiel>, 우리 연합뉴스 등의 보도를 보고 충격을 금할 수 없었다며 도대체 북의 과학자가 얼마나 많기에 그럴 수 있는지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통신망 사업이란 것이 어느 한두 가지 기술로 될 수 있는 사업이 아니라면서 관련된 정말 많은 분야의 과학기술이 모두 세계 최첨단 수준이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북의 통신망은 미국이나 다른 어떤 나라에도 없는 독자적인 시스템이기에 모든 것을 다 북에서 자체로 개발해야 하는데 거기엔 엄청난 돈과 인력이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 적도기니 통신망 사업을 북이 3조 6000억에 수주했다는 민주콩고 언론의 프랑스어 보도     © 자주시보

 

 
✦ 북의 적도기니 통신망 구축이 충격적인 이유

 

적도기니에서 구축하려는 통신망은 인공위성을 통해 전국의 cctv와 통신시설 등을 통합 통제하는 시스템이다. 만약 해킹이나 도감청이 된다면 국가 안보에 치명상을 당할 수밖에 없다. 최근 러시아 팀으로 추정되는 '우로보로스'란 해킹팀에게 미국과 서방의 위성통신이 모조리 해킹 당해 위성의 모든 자료가 그대로 해케들에게 다 넘어갔다는 보도가 나왔다. 미국도 일본, 독일, 프랑스 등 서방의 대통령 집무실까지 도청과 해킹을 했다는 위키리크스의 폭로 보도도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리비아의 카다피가 당한 것도 결국 국가 정보망이 미국에게 완전히 털렸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다.

 

 www.jajusibo.com/sub_read.html?uid=23550

 

그런데 북의 위성통신시스템이나 통신망시스템은 미국은 물론 러시아, 중국 등도 전혀 손을 대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 미국은 김정은 제1위원장이 후계자로 공식 발표되기 전까지 전혀 관련 사실을 알지 못했으며 북에서 공개한 이후에도 미국은 후계자에 대한 정보가 거의 백지상태라고 고백할 정도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북과 가깝다는 중국도 김정은 제1위원장의 한자 이름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해서 초기엔 잘못 표기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김정은 제1위원장은 후계자가 되기 전에 이미 왕성하게 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북의 통신망을 그 어떤 나라도 도청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들이다.

 

26일 통일뉴스 보도에 따르면 민주콩고 <Le Potentiel>지가 6월 23일(현지시각) 보도한 바에 따르면 “북한이 전세계에서 보안시스템 구축으로 벌어들이는 돈이 매년 2억 달러를 넘어가고 있다”며 “이는 북한노동자들이 매년 해외에서 벌어들이는 돈과 거의 같다”고 한다. 그것도 대부분 은밀하게 진행되는 사업들이라는 것이다. 하기에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더 큰 규모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 북의 정보통신시스템은 누구도 뚫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 만한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다는 의미이다.

 

아프리카의 적도기니가 뭘 몰라서 북을 선택한 것 아니겠냐고 생각할 수 있겠는데 적도기니는 아프리카 제3위 산유국이다. 1인당 국민소득도 1만 불이 넘는다. 특히 반제 자주적인 결사체 아프리카연합을 주도하는 나라이다. 이 연합체의 화폐를 통일할 계획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연합군까지 건설하겠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은게마 적도기니 대통령은 이번 북에서 구축한 통신망시스템을 차차 전 아프리카지역으로 확대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Le Potentiel>이 보도하였다. 적도기니에서 완전히 신뢰했기에 북의 통신망을 선택했던 것이다.

실제 북은 독자적인 기술로 전국을 광통신망을 거미줄처럼 연결시켜놓고 있다. 이미 검증된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물론 많은 나라들이 통신망 관련 기술을 먼저 개발한 나라 것을 사다가 쓰는 형편이다. 서방도 모든 것을 다 자체로 개발하지는 않는다. 서로 분업체계를 가지고 있다.

인공위성이나 미사일 기술도 마찬가지이다. 세계 어떤 나라도 인공위성과 그 로켓 관련 기술을 100% 자급하는 나라는 없다. 미국도 엔진의 핵심기술을 러시아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 앨런 머스크 대표의 스페이스 엑스사도 옛 소련의 로켓기술을 가지고 있는 우크라이나와 협력을 통해 최신 로켓을 개발하기도 했었다. 일본도 미국과 협력 없이는 우주로켓을 쏘아올리지 못한다.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도 블라바 잠수함탄도미사일, 첨단 대공미사일, 첨단 전투기, 첨단 대륙간탄도미사일 등 세계 최강 최첨단무기의 핵심 기술 많은 부분을 외국에 의존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이 모든 무기는 러시아제가 추종불허이기에 중국, 유럽, 미국에 의존했을 리가 없다. 그래서 본지에서는 아마도 북에게 의존하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라는 분석보도를 한 적이 있는데 얼마 전 이 자주시보 보도를 북에서 전문 그대로 소개했었다.

 

▲ 서해에서 해군이 건져올린 은하3호 로켓연료통     © 자주시보
▲ 해군이 서해에서 건져올린 은하3호 로켓 잔해물 부품, 연료통과 엔진을 연결하는 부품으로 보인다.     © 국방부 제공

 

어쨌든 북은 은하-3호 위성과 그 위성로켓도 100% 자체 기술로 개발했다고 밝혔으며 우리 해군이 서해에서 건져 올린 로켓 1단 추진체 엔진과 연료통을 분석한 결과 흔하게 구할 수 있는 소소한 전기부품 10여개를 제외한 모든 부품이 다 북의 것이었음이 한국과 미국의 공동조사팀에 의해 밝혀졌다.

 

북의 100% 자체기술이 통신과 위성, 로켓뿐이던가. 그 많은 모든 무기도 다 100% 자체기술이고 어미기계라고 하는 cnc다축공작기계들도 모두 다 100% 북의 기술로 만든 것이다. 한국도 머시닝센터와 같은 공작기계의 조종프로그램과 핵심기술은 해외에 의존하고 있다. 핸드폰 하나에도 미국 퀼컴사 등에 많은 로얄티를 지급하지 않고서는 만들어낼 수 없다. 
그런데 북은 석유화학공업, 비날론공업, 제철공업 등 기간산업에서부터 미장용 타일까지 모든 것이 다 자체기술 100%이다.

 

▲ 올림피아드 수학 영재가 되겠다고 다부지게 결의를 밝히는 북한 어린이, 그는 리은성 학생의 메달도 목에 척 걸어보았다고 자랑했다. 북은 어린이들에게 과학자 꿈을 심어주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자주시보

 


✦ 북의 과학자 대부대를 육성하는 제1중고등학교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바로 북의 영재교육시스템 때문으로 짐작된다.

최근 억울하게 속아서 남측에 오게 되었다며 다시 북으로 자신을 돌려보내달라고 우리 정부에 호소하고 있는 김련희 씨를 만나서 장시간 북 주민들의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는 북의 군 단위마다 과학 쪽 영재학교(제1중고등학교)가 1개 이상은 있다고 했다. 이 외에 예체능 영재학교까지하면 영재학교는 훨씬 더 많다고 한다.

 

검색을 해보니 2010년 기준 북의 시와 군의 합이 185개였다. 평양시의 경우 과학영재학교가 3개가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결국 북은 200여개의 영재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련희씨의 말에 따르면 과학영재학교 신입생은 100여명 정도라고 했다. 매년 2만 명의 과학영재를 배출하는 것이다. 북의 영재학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제안과 지도로 1983년 평양시 보통강변에 "평양 제1고등중학교"를 설립하여 시범운영하면서 시작되었기에 이것이 완전히 정착이 된 것을 1990년 쯤이라고 보고 대학생 배출을 1995년부터라고만 봐도 20년간 매년 2만여 명의 영재를 배출한 것이다. 산술적으로 95년 이후 배출한 40만 명의 과학자 대군을 보유하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그 전에도 과학자를 육성하기 위해 북은 최선의 노력을 다해왔다. 해방되자마자 김일성 주석은 영재들을 발굴하여 소련, 동유럽 등에 유학부터 보냈다. 한국전쟁 기간에도 계속 보냈다. 따라서 70년간 과학자를 발굴 육성해오는데 가장 큰 관심을 기울여온 나라가 북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의 일부가 노환으로 사망했다고 해도 현재 약 100여만 명의 과학자 대부대가 북의 다양한 분야에 포진되어 연구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숫자도 중요하지만 그 과학자들의 의지도 결정적이다. 기어리 최첨단을 점령하는 의지가 있어야 많은 지식을 머리에 넣을 수가 있고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 종합판단을 내리는 뇌의 전전두엽이 뇌의 해마에 저장된 여러 지식들 중에서 지금 해결해야하는 문제와 관련된 정보를 분류 비교 대조 유추 분석 종합 등의 뇌의 추리작용을 통해 뽑아내어 문제 해결에 적용하기 위해서도 기어이 해결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그런 의지가 최대로 발동될 때가 전시이다. 세계 대전 때 그래서 과학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던 것이며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도 폭발적인 과학의 발전을 이루었던 것이다.

북은 세계 최강이라고 하는 미국과 거의 전쟁상황을 70년이나 겪고 있는 중이다. 언제 미국의 핵미사일이 북 전역을 초토화할지 모르는 위기상황에서 과학연구를 해오고 있는 것이다. 북의 과학자들만큼 절실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나라는 없을 것이다.

 

결국 유치원 단계부터 과학영재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발굴 육성하는 교육시스템과 미국과의 대결전에서 체감하는 과학자들의 절박성과 의지력이 북의 과학기술발전의 비결이 아닌가 생각된다.


참고로 한국의 정부의 지원으로 운영되는 과학영재는 부산과학고, 서울과학고, 경기과학고 등 매년 전국적으로 800여명 선발한다. 일반과학고까지 하면 더 늘어나기는 한다. 하지만 이 숫자 중에서도 적지 않은 학생들이 생명공학과 등 의대 관련 과를 이용하여 편법으로 의대를 가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으며 의대를 가지 않더라도 이들이 모두 과학자로 빠지는 것은 아니다. 한성과학고의 모 수학교사는 실제 과학자가 될 수 있는 학생들은 20%도 안 된다고 ‘대치동 잔혹사’라는 제목의 피디수첩에 나와 지적한 바 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과학기술 경쟁력은 서방 경제선진국과 견주어서도 만만치 않다. 그만큼 우리 민족이 영리한 민족인 것이다. 따라서 북의 과학자 대부대가 얼마나 위력적일지는 미루어 짐작이 될 것이다.

 

북의 그 많은 제1고등중학교의 영재들이 정말 영재성이 있을까. 그저 수학 조금 잘 한다고 막 모아 놓은 것 아닐까? 하는 의문을 품을 수도 있겠는데 북의 과학영재는 인민학교를 마칠 때 수학 등 과학적 사고가 월등한 학생들 중심으로 뽑지만 일반 고등중학교 4학년(우리의 고등학교 1학년에 올라가는 학생을 대상으로 2차 선발을 한다. 인민학교 시절에 보이지 않다가 중학교에 가서 수학, 과학적 사고력이 터지는 학생들도 있기 때문이다. 또 인민학교 때는 과학영재인 줄 알았는데 막상 가르쳐보니 수학적 머리가 부족한 학생도 더러 나타난다. 그런 아이들은 일반 중고등학교로 내려 보내는데 거기가면 바로 우수한 성적을 얻는다고 한다.

 

그렇게 제1고등중학교는 철저하게 영재들만 엄선하여 가르치는 곳이다. 특히 북은 현재 영재학교에서 컴퓨터 교육을 대대적으로 강화하고 있는데 중국 칭화대 컴퓨터 관련 학과의 1등부터 50등까지는 모두 조선유학생들이 차지한다고 한다. 이는 필자가 중국 취재 시 중국의 고위 간부에게 직접들은 이야기이다. 그만그만한 차이가 아니라 압도적이란 것이다. 
이런 학생들이 실제 바둑프로그램을 만들어 세계 대회를 휩쓸고 올해 인도에서 진행한 코딩대회를 싹쓸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북은 공식적인 보도를 통해 은하 3호도 젊은 과학자들이 대거 참여하여 개발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우주로켓 하나만 봐도 수만 가지의 부품이 필요하며 열에 잘 견디는 소재공업, 강력한 엔진의 동력공업, 첨단 통신기술, 인공지능 자동조종기술 등 아주 많은 과학분야에 있어 최첨단 수준을 돌파해야만 성공할 수 있다. 이 중에 어느 한 분야만 뒤떨어져도 아니, 수만개 부품 중에 어느 한 부품이라도 말썽을 일으키면 바로 공중분해 혹은 우주미아 신세를 면할 수 없다.

 

▲ 2012. 12.12. 09. 49. 46 인공위성을 탑재한 은하3호가 서해 위성 발사장을 박차고 하늘을 향해 날아 오르는 모습     ©


 
✦ 남북이 힘을 합치면 무조건 세계 최강

 

모든 과학기술분야에서 100% 자체기술로 세계 최첨단을 돌파한다는 것은 그래서 그 어떤 나라도 감히 도전조차 할 수 없다. 그런데 북은 그것을 당당하게 목표로 제시하고 있으며 원자력, 우주로켓, 로봇공학, cnc공작기계 등 많은 분야에서 이미 세계 최첨단을 100% 자체기술로 돌파하고 있다.

기술을 좀 아는 사람들이라면 이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알기에 사실 믿기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북의 영재교육을 연구해보면, 그리고 유독 우수한 수학과 과학적 머리를 가진 우리 민족의 능력을 참고한다면 꼭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본다.

 

남측도 사실, 자동차, 반도체, 정보통신, 석유화학 등 많은 분야에서 세계 최첨단을 돌파하고 있으며 최첨단은 아니더라도 크게 두각들 드러내고 있다. 일제식민통치 시기 타어어 달린 수레도 만들지 못했던 나라가 당시 비행기 탱크를 만들었던 나라들과 지금 반도체와 자동차로 경쟁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남과 북이 힘을 합치면 그래서 세계에서 무서울 것이 없다고 본다. 통일만 이루면 굳이 미국이나, 일본, 중국 등 주변 대국들의 눈치를 보며 살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세계의 첨단기술을 우리 통일한반도가 선도하며 만인이 부러워할 부강번영할 나라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영영 사대주의 굴종의식까지 완전히 끝장내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

* 참고자료


  
조선에서의수재교육과한국에서의영재교육에관한비교적인연구
  
孫啓林*
중국동북사범대학교
  
목차
---------------------
Ⅰ. 머리말
Ⅱ. 조선에서의수재교육발전과정
Ⅲ. 한국에서의영재교육발전과정
Ⅳ. 수재교육과영재교육의특징비교
Ⅴ. 맺은말
----------------------
Ⅰ. 머리말
수재나영재(Gifted and talented) 란탁월한지적능력을가졌거나특정영역에서비범한재능을가진자를말한다. 수재나영재는자연과학, 사회과학, 인문과학, 예술, 체조, 스포츠등광범위한영역에걸쳐존재하며특별한문화실조를경험하지않은정상적인민족인경우그인구의3-5%가영재급에속한다는것이통계학적인정설이다. 영재교육은다음과같은두가지이유에서그필요성을논한다.
첫째는누구나자신의능력을최대한계발하기위해교육을받을권리가있으므로영재학생들도보통학생이나특수아동처럼자신의능력과적성에맞는교육을받을교육권을인정해주어야한다는점이다.
둘째는급변하는국제사회에서능동적으로대처하기위해서국가가우수한인재를체계적이고지속적으로양성할필요가있다는것이다. 예로부터조선과한국에서는교육과인재양성을중요시하는전통을가지고있는단일민족국가이다. 20세기80년대에들어서조선과한국모두인재양성사업을보다더중요시하게되었다. 특히21세기에들어서서그사업을이전보다더활발히체계적이며법으로제정, 시행함으로써큰성과를이루고있다.
본논문은조선과한국에서의수재교육과영재교육의발전과정과특징을더깊이연구하고자한다.
Ⅱ. 조선에서의수재교육발전과정
지난20세기80년대초기부터조선에서는첨단과학기술인재와특별히예체능방면에서뛰어난인재를양성하기위해서수재교육을실시하여왔다. 90년대에들어서조선은국내에서는컴퓨터기술교육에전력하여많은정보기술인재를양성하여왔으며국외에도많은유학생들을보내어새로운선진정보기술을배워왔다. 또한예술, 체육, 서예등뛰어난인재를많이양성하여나라의건설과발전에이바지하여왔다. 그리하여21세기가들어서기전에이미수재교육체계가완성되었다.
다음은조선에서의수재교육의창립과발전과정, 체계와현황을살펴보려한다.
---------------------- 
*孫啓林(손계림): 중국동북사범대학교교수, 국제및비교교육연구소소장, 조선-한국학연구센타주임, 국제korea학회"교육·체육"부회위원장, 중국비교교육학회상무이사, 길림성조선/학국학회부회장등.
1. 조선에서의수재교육체계설립배경
조선은교육사업을매우중요시하여끊임없이교육개혁을단행한결과교육사업이빠른속도로발전하게되었다. 조선은1950년부터전반적으로초등의무교육을실시하였다. 그러나조선전쟁의발발로인해중단되었다가정전후1956년부터4년제초등의무교육이실시되었고이어1958년4월부터는전반적인무료교육이실시되었다. 1967년부터전반적인9년제기술의무교육이실시되었고, 1972년부터1년제의취학전의무교육과10년제의중·고등학교의무교육을포함한11년제의무교육이실시되었다. 그리하여조선의새세대들은누구나할것없이노동에참가할연령이되기전까지국가가부담하는비용으로완벽한기초교육을받을수있게되었다. 
현재조선의교육체제는다음과같다. 취학전교육기관은2년제유치원으로서4-5세의유아를모집한다. 중등교육기관은6년제중학교로1-3학년까지는중등반이고4-6학년까지는고등반이다. 고등교육기관은보통전일제고등교육체제와"일하면서배우는" 고등교육체계로나뉘는데전자는3년제고등전문대학과4-7년제의대학이있고후자는공장고등전문학교, 공장대학(농장대학, 어장대학을포함), 통신교육과야간교육망, 간부와근로자정규교육체제가있다. 대학이후의과정으로는교육과과학분야의예비역군을배출하기위한연구원과박사원(대학원)이있다.
2. 조선에서의수재교육제도의제창과그완수
교육이보급되고과학기술이급격히발전함에따라조선은보통기초교육의질을향상시키기위해김정일위원장의제창과구체적인지도아래1983년평양시보통강변에"평양제1 고등중학교"를설립하여실험에들어갔는데김정일위원장이이학교를직접시찰하고학교의설립방침, 교수방법, 교사, 관리문제에관해장시간연설하시었다. "당시이학교를찾으신경애하는김정일장군님께서는수재란교육을시킨다고되는것이아니라우선머리가좋아야한다고강조하시면서유능한수재들을잘선발하여체계적으로전망적으로키워낼수있는획기적인조치를취해주셨다"1)1985년2월에도김일성주석께서는친히이학교를시찰하시었고. 이는조선정부에서이학교에얼마나많은관심을기울이고있는가를보여주고있다. 이어평양에이런유형의학교즉모란봉제1중학교, 동평양제1중학교, 창덕중학교등세곳이나더설립하였다. 동시에모든도와직할시에도"1고중"을하나씩설립하여보통중학교외에또다른신형의교육체계를만들었다. 또한1999년4월까지조선의모든군에서도"1고중"을하나씩설립하거나개조하였다.이로써"전국1고중교육체계는이미완성단계에들어갔다고할수있다.2)"그중제일먼저설립된"평양1고중"은나중에"중앙1고중"으로바뀌어전문컴퓨터수재학교로전환되었다.
3. 21세기"중앙1고중"의교육전환과수재교육발전현황
조선에서는정보기술인재를양성하기위하여많은강력한조치들을강구하여왔다. 이로써"중앙1고중"을더욱잘운영함과동시에지방의각도와시, 군에도"1고중"을하나씩설립하였다. 21세기에들어서는조건을구비한전국의모든중학교에컴퓨터과정을설치하도록하였으며각종컴퓨터프로그램제작경시대회를통해특수인재를선발하여"1고중"에보내거나직접대학에진학시켰다. 대학에서도김일성종합대학, 김책공업종합대학, 평성이과대학등일류대학을위주로컴퓨터연구개발을진행하고정보기술인재육성기지를설립하였다.이외에도각대학에컴퓨터학부와학과를개설하였으며컴퓨터전문인재양성을목적으로하는

 

(null) 1)리명희,《평양제1중학교와 수재양성》,《월간 조국》2004년 3월호.
2)조선 《로동신문》,1999-04-01,3면.
"컴퓨터전공대학"도세웠다. 동시에조선에서는국내의정보기술인재양성에만족치않고국외에유학생을파견하여선진기술을배워오도록했다. 예를들면매년중국, 싱가폴등에유학생과대학교원을연수생으로파견하였고, 국외대학의컴퓨터전문가를초빙하여컴퓨터교수방법등을광범위하게보급하였다. 이리하여조선의컴퓨터지식의보급과제고는다원화하는발전추세를형성하였다. 그리하여조선에서는전국각지"1고중"을위주로정보기술인재와예체능등에뛰어난학생들을대대적으로양성하게되었다. 이와동시에전국적으로정보기술경연대회를열어정보기술인재를발굴하고이분야에뛰어난학생을선발했다. 전국각지의대학들과전문학교에서는정부의기술인재양성사업이강화되고고등중학교에서도컴퓨터교육이널리실시됨으로서자랑찬성과를이룩하고있다. 예를들면2001년9월2일진행된제2차전국교육부문프로그램경연대회에서학생들은창조적인생각과불타는열정을바쳐수많은프로그램을작성하고능란한컴퓨터기교를보여주었다. 이번경연에서대학분조와전문학교분조, "1고중" 분조로나뉘어진행되었는데제1고등중학교에서는원산제1고등중학교, 평양제1고등중학교, 평양개선제1고등중학교, 동평양제1고등중학교학생들이우수한평가를받았으며고등중학교에서는평양민흥고등중학교학생들을비롯한많은학생들이우수한평가를받았다. 이번경연은학생들을나라의정보기술을발전시키는데이바지할과학기술인재를양성하는데중요한계기가되었다.3)조선에서는수재교육체계에따라대학에서는조선의인재중시방침을높이받들어유능한과학연구핵심인력을키우기위하여열심히사업을진행해왔다. 김책공업대학에서는2002년수재반졸업생전원이후보학사(석사)로되었고많은학생들이대학기간에학사논문을제출하였으며여러명의학생들이석사로자라났다.4)이상에서보는바와같이지금조선에서의수재교육체계는매우완벽해서각방면의우수한인재를많이양성해나라의경제발전과과학기술진보에이바지하고있다.
Ⅲ. 한국에서의영재교육발전과정
한국에서는1978년한국교육개발원주관으로장기종합교육계획으로서의교육개발계획을(1978-1991년) 수립할때영재교육정책이중요한관심이되었다. 이때의문교부는1979년과학고등학교추진위원회를구성하였다. 이런정책적인관심은마침내1980년대에결실되어1983년경기과학고등학교설립을계기로1984년에다시4개의과학고등학교가전국에신설되었다. 영재교육에대한관심은유치원나초등과중등은물론대학수준까지확충되어나갔다.5)1985년발족한한국과학기술대학이그증거다. 그후20세기90년대에들어서한국에서는평등주의교육원칙에따라영재교육체계를잘발전시킬수가없었다. 그러다가21세기에들어서"BK21" 계획과《영재교육진흥법》이제정됨에따라영재교육을본격적으로추진하게되었다.
1. 영재교육정책의태동과배경
한국은1960년대후반부터중등교육의평준화가강력히추진되어서1969년에서1971년까지는중학교평준화, 1974년이후는고등학교평준화가한국중등교육개혁을위한핵심정책이었다. 그러나이런평준화정책의문제점에대한비판과반성은당연한논리였다. 특수교육의한분야로서영재아동교육에대한관심은평준화정책의평등지향성에대한비판과교육의수월성추구논리와맞물려발전되어왔다. 그래서1978년한국교육개발원이주관하여성안한제2차장기종합

 

(null) 3)조선,《로동신문》,2001-09-08.
4) 리명희,《평양제1중학교와 수재양성》,《월간 조국》2004년 3월호.
5)김종철:「한국교육정책연구」,교육과학사,1998년,P293.
교육계획「교육발전의전망과과제, 1978-1991년」은영재교육의중요성과그발전방향을정책적으로제시한보고서로서주목할만한것이었다. 
1980년대에들어서영재교육에대한관심은한국교육개발원, 한국행동과학연구소들을중심으로영재교육에대한연구가활발히진행되었다. 특히1980년7월30일교육개혁조치가있으면서영재교육이다시부각되면서종합영재교육방안에대한정책이심도있게추진되어과학영재교육방안, 외국어교육강화방안, 외국어고등학교설립계획, 대학부설예능교실설치안, 예·체능교육진흥방안, 체육특기자교육정상화방안등여러분야에대한연구가이루어졌다.6)
2. 과학고등학교설립과영재교육의발전
20세기90년대초까지한국의영재교육은여전히평등주의에원칙에따라발전을못하였다. 그러나무한경쟁시대인21세기에들어서영재교육에관심이있는일부학자들에의해서우수한인재를국가적차원에서육성할것을주장하여마침내영재교육이추진되었다. 1998년에전국적으로16개과학고등학교, 17개외국어고등학교, 21개예술계고등학교, 13개체육계고등학교가설립되어영재교육의기틀을잡아가게되었다.7)
그러나대학진학을위한성적산출방법에있어특수목적고등학교학생들에게적용되던비교내신제가폐지되면서1997년에이어1998년에도특수목적고등학교에서공부하는우수한영재들이이탈하면서영재교육이흔들리기시작했다. 이에한국교육부에서는영재교육을활성화시킬수있는방안을「교육5개년(1999-2003년)계획안」에포함시킨21세기를대비한"신지식인", 즉창의력이뛰어난인재를육성할수있는정책을수립하여1999년에발표하였다.
3. "영재교육진흥법"제시와영재교육현황
21세기는지식기반사회로서창조적지식생산능력이절실히요구되는시대이다. 이런시대적환경에적극적으로대처하기위해서한국은국가경쟁력의초석이될창조적지식생산자들을양성해서배출해내는일이시급하게되었다. 그러나지식과정보의창출은누구나할수있는일이아니고소수의영재들만이할수있는것이다. 나아가영재란타고나는것이지만동시에계발되지않으면안되는것이다. 이에따라영재를조기에발견하여그잠재력을계발시켜줌으로써지식창출능력이뛰어난고급인재를양성배출해내는일이급선무가되었다. 
1999년한국에서는특색있는대학을만들기위해고급두뇌인재양성을위한「BK21」계획을세우고시행하면서1999년11월4일한국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가"과학영재교육체계의확립과운영방안"에대한보고서를제출함에따라국회에서「영재교육진흥법」이통과되어2000년1월28일영재교육진흥법이제정되고2002년4월부터영재교육진흥법이공포시행됨에따라영재교육이본격적으로실시되게되었다. 이영재교육진흥법에는영재학교, 영재학급, 영재교육원이라는다양한영재교육기관에서초·중·고등학교급에걸쳐영재교육을실시하도록되어있다. 
2000년1월28일공포된영재교육진흥법에의해서한국정부는특정분야에뛰어난잠재력이있거나성취를보이는학생들을교육하기위해기존의국공립, 사립학교중에서영재학교로지정전환하거나새로신설할수있게되었다. 과거과학고등학교가있음에도불구하고영재학교를새롭게설립하는이유는특수목적

 

(null) 6)한국문교부편 「문교40년사」,1998년,P527
7)한국교육신문사:「한국교육연감(1999년)」,P197
고등학교만으로는뛰어난인재를양성하는데한계가있기때문이다. 그래서한국중앙영재교육진흥위원회는부산과학고등학교를과학기술부가부산교육청과협약아래지원하고관리하도록승인했다. 그래서2003년개교한영재학교인부산과학고등학교는과학분야에서특별히도전적인프로그램을필요로하는학생들을위한특별프로그램을제공하려는목적으로설립되었다. 이것이영재교육진흥법이공포시행된후한국정부가세운최초의영재학교이다.
영재교육진흥법에의하여영재학교에서지도할수있는영재교육영역은다양하여특색있는영재학교가활발히설립되고발전하게되었다. 2000년부터지금까지한국의영재교육기관은전국81개, 초·중등학교의영재학급수177개, 지역교육청과대학의영재교육원36개170개학급이있다. 이곳에서공부하는학생은모두1만여명이다.8)
Ⅳ. 조선에서의수재교육과한국에서의영재교육에관한특징비교
조선에서는1980년대초기부터점차적으로11년제전반적의무교육제를실시함과동시에고등교육의무화를실시하기위한준비단계에들어서면서수재교육체계를수립한반면, 한국에서는1960년초반부터1980년초까지교육의평준화, 보편화와평등화라는리념적기조를강조하였으나1980년대에접어들면서교육의수월성을교육발전의목표로삼고정책적변화를시도하였다. 이와같이거의같은시기에수재교육과영재교육문제가제기되었는데각각교육제도나체계상에어떤특징이있는가를살펴보도록하겠다.
1. 조선에서의수재교육의특징
조선에서수재교육을실시하는"1고중" 교육체계는전반적10년제고중의무교육체계와는다음과같은다른특징을가지고있다.
첫째는수재학생선발제도와방식이다르다. 수재학생선발은주로소학교졸업때에뒤늦게머리가트이는학생들도있어중학교4학년진급할때도실시한다. 학생들의기억력, 상상력, 응용력을판정하는지능시험과수학시험을기본으로하여진행되는예비선발시험은전국의각도, 시, 군에서진행한다. 그러나이렇게선발된학생들이모두본학교학생으로되는것은아니다. 각도, 시, 군에서선발된학생들은다시이학교에서지적능력과응용능력을판정하는치렬한경쟁속에서입학수험을치르게된다. 여기서선발된학생들만이평양제1중학교에올라오게된다. 선발된학생들에게는평양제1중학교에서일정한기간지정된몇개의과목들을배워주고그학습방향에기초하여머리를잘쓰지않으면풀기어려운응용문제들을가지고다시실력판정을위한예비수험경쟁을진행한다. 바로여기에서합격된학생들만이본학교입학수험에응시하게되는데이수험경쟁에서이겨야만정식평양제1중학교학생이될수있다. 2003년조선의전국각지에서선발되어온500여명의우수한학생중입학수험자격을받은학생은250여명이며 입학 수험에서합격되어본학교에정식으로입학한학생은120여명밖에안된다고한다.9)그리고조선은매년중학생수학경시대회를열어금상과은상수상자는"중앙1고"에, 동상수상자는지방의"1고중"에진학시키고있다. 이렇게입학자체가매우힘든만큼학생들의입학열의와학부모들의관심은해마다높아지고있다. 평양제1중학교에입학한학생이라도수재급교육진도에따라가지못하는학생들은도중에물러나지않으면안된다. 그선발은년간에두차례의학기말시험과두달에한번씩진행하는판정시험을통하여선발한다. 일반적으로머리가비상한학생들은탐구심이남달리

 

(null) 8)http://blog.naver.com/glory0211/do
9) 리명희,《평양제1중학교와 수재양성》,《월간 조국》2004년 3월호.
강할뿐아니라지적능력과응용능력이뛰어나기때문에모든것을윈리적으로인식할때가지깊이파고들며창조적으로사색한다.
둘째로교수내용과교원수준도보통고등중학교와는다르다. "1고중"의학생은국가가규정한고등중학교의필수과정뿐만아니라선택과정도배워야한다. 이선택과정은보통고등중학교의과정보다훨씬더깊이가있으며각종다양한과외소조활동과기술조작훈련〉?참가하여야한다. "1고중"의학생은국가가규정한보통고등중학교가설치한과목을사전에완성할수있고고등중학교5-6학년이되면선택과목을위주로한다. 선택과목으로는혁명사, 수학, 물리, 화학, 생물, 컴퓨터등이있다. 이들과정의내용은대학에서배워야할수준이다. 일반적으로수학과컴퓨터를선택한학생이가장많지만학교의교사들의역량과교수시설에근거하여정해진다. 치렬한수험경쟁속에서알알이골라진수재급학생들은현대적인교육환경에서수준높은평제1중학교수재용교과서를가지고유능한교원들의지도아래교육을받는다. 교원들은김일성종합대학과김책공업대학을졸업한30-40대의재능있는대학교원과우수한박사원졸업생들을교원으로선발배치하고권위있는대학교수, 박사들의초빙강의도자주연다. 지금이학교학생! 들은미래의과학정보두뇌진의한성원으로될커다란포부를안고수업시간은물론과외학습시간에도분과초를쪼개가며경쟁적으로학업에열중하고있다.
셋째로, 학교의교수설비와시설도조선의중학교에서가장우수하고선진적이며완벽하다. 많은설비시설과실험기자재들은거의가수입한것들이다. "중앙1고중"을예로들면이학교에는모두25개의실험실이있는데실험실의기자재가완벽하게갖추어져있고시약도충분하다. 또한우수한랩실, 신형의컴퓨터와TV조정실, 방송실등을갖추고있으며대형체육관, 수영장도있고선반이잘갖춰진실험실습공장이있으며교실의책걸상은모두신형이다. 이러한설비는지방의보통고등중학교와는비교할수없는것이다.10)"평양제1고중"의졸업생들중절대다수는북한의몇개안되는"일류대학"에진학할수있다. 예를들면김일성종합대학, 김책종합공업대학, 평성이과대학, 평양의과대학, 김형직사범대학등이다. "평양1고중"의학생은만일고등중학교6학년동안전과정에서성적이모두우수하면시험없이자유롭게대학과전공을선택할수있다. 또한국제이과올림피아드에서좋은성적을거둔학생도무시험으로상응한대학에진학할수있다. 
이상에서보는것과같이조선에서는수재교육에의해근20년간에걸쳐평양제1중학교에서는수많은학생들이10대에학술적으로나실천적견지에서나의의가큰학위론문을제출하였다. 이학교를졸업한학생들은김일성종합대학, 김책공업종합대학, 평양의학대학등조선의중앙대학에들어가게되며특별히뛰어난학생들은재학중에대학에편입되기도한다. 조선에서는이미평양제1중학교졸업생출신들이과학연구기관의중추를이루고있고과학계의관록있는로장들과어깨를나란히첨단과학기술분야를개척해나가고있다. 인공지구위성《광명성1호》를단번에궤도에진입시킨다계단운반로케트의설계, 제작자들과바둑프로그램의작성자들이바로평양제1중학교출신들이라는것은이미세상에알려져있다.11)
2. 한국에서의영재교육의특징
여기서는한국에서의영재교육과관련하여학생선발, 교육과정운영, 교원의자격및배치, 재정확보, 그리고대학과의련계에대해살펴보고자한다.

 

(null) 10)손계림:「조선의 정보기술 정책과 정보화 기술교육에 관한연구」,「남북한 정보통신 정책협력에 관한 학술회의 논문집」,2002년 중국베이징,P113
11) 리명희,《평양제1중학교와 수재양성》,《월간 조국》2004년 3월호. 
첫째로, 「영재교육진흥법」에따라학생입학선발은일반과학고등학교와는달리전문가의추천이있어야한다. 영재교육대상자선정의전문성을확보하기위해영재교육기관내에영재교육대상자선정추천심사위원회를두고있다. 선정추천심사위원회는당해영재교육기관의소속교원, 교과전문가, 영재교육전문가, 교육평가전문가, 교육심리전문가, 교육행정경력5년이상의교육공무원, 기타학식과덕망이있으며영재교육에조예가있는자등으로구성된다. 선정추천심사위원회는영재학교입학생선발에필요한원칙, 절차, 도구, 기준등을결정한다.
영재학교에서의신입생선발의특징은다음과같다.
1) 영재학교의신입생선발전형에응시하려면우선교장이나전문가의추천을받아야한다. 2) 영재학교에대한지원자격은중학교재학생및졸업예정자라야한다. 3) 전형방법은다단계에걸쳐서수학과과학분야의창의적문제해결력을중점적으로평가하는점이특징이다. 4) 선발마지막단계에서는전문가들이선발대상자들의수업과정을관찰하면서수행과정을수정하고보완하는능력있는학생을선발하도록한다.
둘째로, 교육과정은대학과유사한형태로운영한다.
영재학교교육과정은학교가자율적으로결정하며운영할수있는데이는개별화맞춤식교육을융통성있고원활하게하기위한것이다. 커다란특징은대학과유사한형태로교육과정이운영된다는점이다. 과학영재학교교육과정을평가하고질적수준을발전시키기위해서국가수준에서주기적으로剋揮漬? 학교와교육기관평가, 교육과정편성및운영에관한평가를실시하여지속적인개선이이루어질수있도록하고있다. 
셋째로, 특별히선정된수준높은교원을영재학교교사로, 여기서는특별한자격증이없어도전문성이인정되면계약직교사로임용한다. 고등학교급의영재학교에서는해당분야의전문성을갖춘교사의확보가영재학교성공의관건이되는중요한사항이다. 따라서각교과영역의전문가와교수-학습에서의전문가가균형있게임용되어영재교육을담당하고있다. 또한교사들의전문성을제고하기위해서영재학교교사들은자체연수, 학회참석, 국내연수, 해외단기연수, 사이버연수등을통해지속적으로영재교육에관한전문성을키워가고있다. 2003년8월에40시간에걸친해외연수를미국, 이스라엘, 러시아, 태국등에서실시했다.12)
Ⅴ. 맺은말
상술한바와같이조선에서는20세기80년대부터정보기술교육을중시하기시작하였다. 그리고"수재교육체계"를통해서많은우수한컴퓨터인재들을양성하여90년대부터정보산업을발전시키고지금은"광명"망을연구개발하게되었다. 그리고윈도스2000에의하여개발된조선어입력시스템, 다언어번역시스템, 인터넷과이동통신이연관된대형기업의정보시스템, 테이터관리시스템, 인터넷관리및서비스, 국제인터넷서비스등을지속적으로발전시키고있다. 이첨단과학기술기관에서일하고있는인재들은거의"수재교육체계"에서양성되었다. 지금중등교육단계에서의전문수재양성사업은비단평양제1중학교에서만이아니라조선의각시, 도, 군들의제1중학교에서도진행되고있다. 이렇게계통적으로체계적으로양성해내고있는많은인재들로인하여조선의과학기술은빠른속도로발전하고있다. 
 

 

(null)
12)조석희:「이것이 한국정부가 세운 최초의 영재학교다」,《교육 개발》2003년1+2호
한국에서도1970년대까지노동집약산업국가였던것이1980년대에접어들면서기술집약산업국가로변모하면서선진국가들과의국제경쟁에서과학기술의고도화가그어느때보다더필요하게되었다. 이러한사회적변화는교육체제의새로운변화를요구함에따라그결과과학영재교육의필요성이대두되었다. 이로써한국에서는새로운영재교육진흥법이제정되어영재교육을힘있게추진할수있게되었다. 조선에서의수재교육체계나한국에서의영재교육체계에의하여얻은경험을더욱주목하여야하며21세기의우수한인재들은이교육체계를통해서수많이양성될것이다.    
   
참고문헌
1. 손계림:《조선의정보기술정책과정보화기술교육에관한연구》,《남북한정보통신정책협력에관한국제학술회의논문집》, 2002년12월.
2. 손계림:《조선에서의"수재엘리트" 교육체제에관한연구》,《외국교육연구》1999년, 제6호.
3. 김정일:《평양제1고등중학교를견본학교로만드는것에관하여》,《과학교육사업발전에관하여》, 조선로동당출판사, 1999년.
4. 조선중앙통신사, 《조선중앙년감》,1988-2002년.
5. 조선《로동신문》, 1990-2004.4.
6. 조선《교원신문》, 2003년.
7. 조선《교육신문》, 2004.1-4.
8. 손계림《전후한국교육연구》, 강서교육출판사, 1995년.
9. 손계림《한국과학기술과교육발전》, 인민교육출판사, 2004년.
10.김종철:《한국교육정책연구》,교육과학사, 1989년.
11.문교부《문교40년사》,1998년.
12.한종하《과학영재교육의도입과과정》, 《교육혁신의반성과지로》, 교육과학사, 1991년.
13한국신문사,《한국교육연감》,1990-2002년
14.조석희《이것이한국정부가세운최초의영재학교다》,《교육개발》, 2003년.1+2호.
15. 한국《영재교육진흥법》, 《영재교육진흥법시행령》-http://opendic.naver.com.
16.리명희:《평양제1중학교와수재양성》,《월간조국》,2004년3월호.-http://www .kcna.co.jp.
 

 

 

 
 
트위터 페이스북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문재인 옹호자 vs. 비판자, 세력 구도 보니…

 
재신임 놓고 野 내분 심화…김부겸도 참전
곽재훈 기자 2015.09.11 17:36:33
 
 
문재인 대표의 재신임안을 놓고 새정치연합 내에서 '친(親)문재인 대 반(反)문재인' 구도의 세력 재편이 일어나는 양상이다. 문 대표가 던진 재신임-혁신안 연계 카드 자체에 필연적으로 수반될 수밖에 없는 현상이다. 

11일 오후에는 김부겸 전 최고위원이 공개적으로 문 대표의 재신임 추진안을 비판하고 나섰다. 김 전 최고위원은 기자들에게 보낸 메시지에서 "문 대표는 재신임 카드를 내리고 폭넓게 당의 화합을 요청해야 한다"며 "당 지도부와 함께 국민의 의견을 더 경청해야 한다. 천정배를 만나고 정동영을 만나야 한다"고 비판했다. 이는 이종걸 원내대표가 주장한 '천정배 포함 통합 조기 전당대회'론이나 정세균 상임고문이 주장한 '문 대표 2선 후퇴 및 범계파 연석회의 구성'론을 상기시킨다. 

김 전 최고위원은 "총선에서 이기려면 우군을 모두 합해야 한다"며 "절대적으로 옳은 혁신도, 완벽하게 틀린 비판도 없다. 승리의 길이라면 상처도 영광도 다 모아야 한다"고 혁신안 통과를 놓고 배수진을 친 문 대표를 우회 비판하기도 했다. 단 김 전 최고위원은 그러면서도 "우리는 문재인만으로도 총선 승리가 불가능하지만, 문재인을 배제한 총선 승리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반문' 진영에도 경고하며 "모두 냉정을 되찾고 정치의 대의를 다시 생각할 때"라고 덧붙였다. 

앞서 김한길, 안철수, 박지원 등 비주류 주요 인사들은 물론 범주류인 정세균 상임고문까지 문 대표의 재신임 추진에 대해 비판적 의사를 밝힌 가운데, 김 전 최고위원까지 가세한 것. 김 전 최고위원은 지난 2.8 전당대회 당시 '반(反) 문재인 대항마' 추대설이 돌았으나 결국 본인이 고사해 불출마했었다. 

 

▲문재인 대표의 '재신임 투표' 결정을 놓고 새정치민주연합 내 주요 세력그룹과 인물들이 입장차를 보이고 있다. 그림 왼쪽의 황색 타원은 기존의 범(汎)주류, 오른쪽의 녹색 타원은 비주류에 해당한다. ⓒ프레시안


문재인의 비판자들

새정치연합 내에서 문 대표의 '재신임 카드' 비판론에 동참하고 있는 이들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전통적 의미의 계파 수장들이다. 김한길 전 대표, 정세균 고문, 박지원 전 원내대표 등이다. 김한길 전 대표는 페이스북에 "절망이 기교를 낳고, 기교 때문에 또 절망한다"는 의미심장한 글을 올렸다. 

김 전 대표와 가까운 주승용 최고위원은 이날 "참담한 심정"이라며 "대표는 자신의 뜻을 따라주지 않는다고 화만 내고, 같은 지도부인 최고위원들과 전혀 대화하지 않고 복종을 강요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주 최고위원은 "문 대표는 재신임 여부는 물론 절차에 대해서도 전혀 상의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고 있다"며 "최고위원 다수가 반대하는 재신임 투표를 강행하는 것은 정당 민주주의에 위배된다. 지도부 존폐가 걸린 중대한 사안이므로 최소한 최고위 동의 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촉구했다. 

정세균 고문도 이날 한국방송(KBS) 라디오에서 "대표의 고충이나 고심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시기적으로나 방법상으로 적절치 않다. 재신임 투표가 지금보다 더 큰 혼란을 낳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라며 "당 대표는 어려움이 있더라도 갈등과 분열을 극복해야지, 상대를 제압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정 고문은 지난 9일 "문 대표 등 지도부가 살신성인의 자세로 대결단을 해달라"며 2001년 보궐선거 패배 후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새천년민주당 총재직에서 물러난 것을 언급하기도 했다. 

박지원 전 원내대표도 트위터에 글을 올려 "문 대표가 최고위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재신임을 여론조사(국민·당원)로 하겠다며 일방적 선언을 하고 퇴장한 것은 독선"이라며 "대표의 결정은 무효"라고 주장했다. 또 앞장서서 '조기 전당대회론'을 주장하고 있는 이종걸 원내대표는 본디 계파색이 없는 인물이지만, 원내부대표단 10여명을 지명한 원내지도부의 수장이다. (☞관련 기사 : 비주류 '조기 전당대회'론에…文 '당원·국민 재신임'으로 응수)

계파·세력그룹보다도 인물 면에서 차기 대선주자급으로 점쳐지는 인사들 가운데에는, 이날 공개 입장 발표를 한 김 전 최고위원 외에 안철수 전 공동대표가 문 대표에 대해 강하게 날을 세우고 있다. 안 전 대표는 전날 언론 인터뷰에서 "아무도 혁신안이 통과된다고 당이 혁신적으로 바뀌고 총선 승리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보지 않는다"며 "지금은 대표의 미래를 걱정할 때가 아니라 당의 미래를 걱정해야 할 때"라고 일침을 가했다. 안 전 대표는 "결과에 상관없이 극심한 분란을 초래할 수 있다"며 "재신임이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 혁신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힘을 모을 때"라고 했다. 

박영선 전 비대위원장은 당내 현안에 대해 '침묵 모드'를 유지하며 국정감사에만 집중하고 있지만, 최근 북콘서트에서 손학규 전 상임고문의 정계 복귀 필요성을 언급하고 문 대표를 비판해 주목을 끌었던 데다가(☞관련 기사 : '反문재인' 박영선, 손학규 정계 복귀 촉구?) 최근 김한길 전 대표와 가까운 '민집모' 소속 의원들이 16일로 예정한 혁신안 평가 토론회에 박 전 위원장을 초청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이목을 끌고 있다. 박 전 위원장 측 관계자는 "박 전 원내대표는 당내 상황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국정감사만 열심히 하고 있는데 (언론이)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일축했다. 

문재인의 옹호자들

문 대표에 대한 비판 세력이 이처럼 비주류 주요 계파와 인물들에 범주류 일부(정세균계)가 가세한 형국이라면, 문 대표의 '재신임' 결단을 이해 내지 지지한다는 쪽은 2.8 전당대회 후 당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이들로 분석된다. 특히 지도부의 일원인 전병헌 최고위원은 계파상으로는 정세균계로 분류되지만 이번 재신임 이슈에서는 문 대표 지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역시 정세균계인 최재성 총무본부장도 "문 대표가 언급한 '국민 여론조사 50%, 권리 당원 투표 50%' 방식이 합리적"이라며 이와 유사한 입장을 취한 것으로 전해졌다. 

전 최고위원은 이날 "문 대표가 재신임 조기 강행을 선택했다"며 "안타깝지만 현직 당 대표가 내릴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전 최고위원은 "재신임 카드가 나온 이상, 그 방법과 의미를 두고 벌어지는 논란은 짧을수록 좋다"며 "하루라도 빨리 재신임 투표 결과에 따라 당을 수습해 가는 것이 당의 통합을 위해 보다 현실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정 고문의 '연석회의' 제안을 겨냥한 듯 그는 "더 큰 통합이나 다른 버전의 테이블을 만들더라도 지도력이 정비되어야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하기도 했다.

486 운동권 출신 및 당내 진보 성향 의원들 상당수도 '문 대표가 다 잘한 것은 아니지만, 비판만 하기에는 문 대표가 짊어진 짐이 너무 크다'는 수준의 공감대를 이룬 것으로 전해졌다. 486 그룹의 대표 격으로는 이인영·우상호 의원이 꼽히고, 이들은 진보 성향 초·재선 모임인 '더좋은미래' 모임의 핵심 멤버이기도 하다. 

이날 우상호 의원이 라디오 인터뷰에서 "재신임 방법을 가지고 왈가왈부 하는 것은 아주 협량하다"며 "그렇게 치사하게 왈가왈부 하는 게 아니다"라고 당내 비주류룰 겨냥해 강경한 비난을 쏟아낸 것은 그래서 주목받는다. 우 의원은 "당원과 국민의 의견을 묻겠다는 취지로 재신임 방식을 제시한 것 같은데 이 정도는 받아들여야 한다"며 정 고문의 '연석회의' 주장을 겨냥해서도 "원탁회의에서 대표가 선출된 게 아니지 않느냐. 원탁회의는 재신임이 되지 않았을 때, 비대위를 꾸릴 때 중진들의 협의 기구"라고 일축했다. 

'김상곤 혁신위원회' 역시 문 대표가 혁신안 통과에 대표직을 건 만큼, 혁신안 관철과 실천을 위해 당분간이라도 문 대표 측과 정치적 이해관계를 같이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특히 혁신위원인 조국 서울대 교수는 이날 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해 비주류 측의 조기 전대론을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관련 기사 : 조국 "혁신안 제쳐두고 조기전대? 같이 망하는 길")

안희정 충남지사는 문 대표의 재신임 투표 결정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지만 '혁신안을 중심으로 단결해야 한다'면서 사실상 문 대표에게 힘을 싣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안 지사 측 관계자는 "최근 안 지사는 충남도당 당보에 기고한 글에서 '혁신위가 합법적 프로세스를 통해 권한을 위임받은 만큼, 혁신안을 중심으로 단결하는 것이 성숙한 당원의 도리'라는 메시지를 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그러나 "재신임은 문 대표의 결단"이라며 "안 지사는 이에 대해 어떤 입장을 밝힌 바 없다"고 선을 그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교과서 국정화 ‘빨간불’, 정부 폭주극 벌일까?

 
 
역사교사 98%가 정부가 내세운 당위성에 ‘반대’
 
육근성 | 2015-09-11 16:50:20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야당의원: “장관, 교과서 국정화 어떻게 하겠다는 보고가 왜 없느냐?”

교육부장관: “......”

야당의원: “차관이 학자일 때는 국정교과서 안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교육부차관: “일부에서 국정 전환하자는 주장 있기 때문에… 이 문제 검토 중…”

야당의원: “국사편찬위원장은 유신 때도 국정화에 반대하지 않았느냐?”

국편위원장: “그 당시로서는 그랬지만…”

 


국감장에서 벌어진 ‘말 바꾸기 쇼’

지난 10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국회 교육부 국정감사장에서 벌어진 진풍경이다. 피감기관 대표로 나온 정부 측 3인의 말 바꾸기는 도를 넘었다. 불과 며칠 전 언론에 나와 공개적으로 했던 말까지 뒤집었다.

황우여 교육부장관은 ‘추진’을 ‘검토’로 바꿔치기했다. “국정교과서 추진할 것인가?”라는 야당의원들의 질문에 “미리 말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며 즉답을 피했다. 장관 취임 직후부터 ‘국정화’를 입버릇처럼 외쳐온 그가 갑자기 말을 바꾼 것이다. 지금 국정화에 대해 말하는 게 적절하지 않단다. 앞뒤가 영 안 맞는다.

지난 8월 KBS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황 장관은 “검·인정을 하다 보니 7가지 교과서로 가르치는데 이것이 혼란스럽다”며 “9월까지 (국정교과서 추진을) 매듭을 짓겠다”고 확언한 바 있다. 그런데 국회 국감장에서는 교묘하게 말을 바꿨다. 추진 사실을 인정하는 시점을 최대한 늦춤으로써 야당이 적극 공세로 돌아서는 걸 일단 막아보자는 꼼수다. 박근혜 정부의 교과서 국정화 추진은 이제 누구나 다 아는 공공연한 비밀인데도 저런다.

▲ < “교과서 국정화는 소수저자의 독단”이라며 반대 글 기고(1973)했던 김정배 국편위원장>


학자 땐 ‘반대’, 감투 쓰더니 ‘찬성’

김정배 국사편찬위원장은 원래 국정교과서 반대론자였다. 1973년 박정희가 국정교과서를 추진하자 “다양성을 말살하고 획일성만 찾으려는 것은 위험하다”며 반대를 분명히 한 바 있다. “소수 저자 만에 의한 (국정)교과서는 독단에 빠질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던 그가 고위공무원이 되더니 “현재는 독재체제가 아니기 때문에 국정제를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황당한 주장을 편다. 말을 바꾸기 위해 자기모순에 빠지는 짓도 서슴지 않는다.

김 위원장은 1993년 국사편찬위원 자격으로 김영삼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유신 때 국사책을 국정교과서로 획일화해 역사인식의 경직성 또는 국수주의적 사고 등 문제점을 일으키고 있다”며 “국사교과서는 (국정이 아닌) 검정으로 해줬으면 합니다”라고 건의하기도 했다. 그랬던 그가 이제 와서 다시 국정제로 돌아가는 게 맞다고 주장한다. 소가 웃을 일이다.

김재춘 교육부차관도 딴 소리를 했다. 김 차관 역시 국정교과서 반대론자였다. 자신이 발표한 논문(2005,2009)에서 “국정교과서는 독재국가에서만 주로 사용되는 제도”라며 “국정제는 정치적·이데올로기적인 통제 목적에서 유지되어 왔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랬던 사람이 이젠 국정교과서를 지지하는 발언을 한다.

정부가 추진하는 국정화 작업의 주역인 김정배 위원장과 김재춘 차관. 학자 땐 국정화 반대하다가, 박근혜 정권이 하사한 감투 하나씩 쓰더니 국정화 지지로 급선회한다. 그래봤자다. 권불십년이요, 화무십일홍이다.


정부가 내세운 ‘국정화 당위성’은 엉터리

정부여당은 ‘교과서 국정화’를 주장하면서 몇 가지를 명분으로 내세운다. ▲교과서 다양성에 의한 혼란 ▲현 교과서의 좌편향 문제 ▲교과서 단일화로 인한 수능 준비 수월 ▲사교육비 감소에도 영향 ▲균형 잡힌 역사교육은 국가의 책임 ▲많은 국민과 지식인들의 요구 등의 이유로 국정제 도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정말 그럴까? 저들의 주장이 맞는 건지 검증해볼 수 있는 자료가 나왔다. 현직 역사교사 101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가 그것이다. ‘국정화 사유(통일된 교과서 필요, 좌편향 교과서 수정 등)에 동의하느냐“는 질문에 ’동의하지 않는다‘가 98.6%에 달한 반면, ’동의한다‘는 1%에 그쳤다.

‘단일 교과서가 수능 준비에 도움이 되느냐’는 질문에 ‘차이가 없다’는 의견이 절반(49.7%)을 차지했고, 도움은커녕 ‘더 어려워질 것’이라고 답한 비율이 45.9%에 달했다. ‘수월해 진다’고 답한 경우는 4.4%에 불과했다.

국정교과서와 사교육비 관련성을 묻는 질문에 ‘사교육비가 (대폭 혹은 소폭) 증가할 것’이라고 대답한 비율(60%)이 가장 높았고, 그 다음으로 ‘영향 주지 않을 것’이라고 답한 경우(39.8%)가 많았으며 ‘사교육비가 감소할 것’이라는 답한 경우는 0.2%에 그쳤다.


98.6%가 반대, ‘빨간불’ 무시하려는 정부

이쯤이면 정부여당의 ‘국정화 당위성’ 주장은 엉터리라는 게 입증된 셈이다. 절대 다수가 반대하는 국정제를 왜 강행하려는 걸까? 대체 누가 밀어붙이기에 학자로서의 신념도 내팽개치는 걸까? 군색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자기모순에 빠지는 것도 서슴지 않는 이유가 뭘까?

이번 여론 조사결과에서 이에 대한 답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국정화 추진은 누구의 의지가 가장 크게 반영되었다고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에 ‘박근혜’라고 답한 경우가 69.1%로 압도적이었다. 다음으로 뉴라이트계열 학자(26.2%), 황우여 장관(2.2%) 등이었다. 뉴라이트도 박 대통령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그렇다면 국정화 추진은 ‘박 대통령에 의한 박 대통령을 위한 일’이라는 봐도 무방하다는 얘기가 된다.

타당성과 현실성뿐 아니라 심지어는 명분과 국민여론 까지, 가리키는 건 그 어느 하나도 국정화에 대한 당위성과 거리가 멀다. 이런데도 정부는 여론의 ‘빨간불’을 무시하고 폭주할 기세다. 극소수의 이익과 목적을 위한 일을 다수에게 강요하는 것, 이게 파쇼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22&table=c_aujourdhui&uid=572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기기묘묘하고 서글픈 새들의 둥지 천태만상

기기묘묘하고 서글픈 새들의 둥지 천태만상

윤순영 2015. 09. 11
조회수 1841 추천수 0
 



깃털로 들머리 가리고, 물위에 방석 엮어 띄우고, 딱따구리 둥지 줄여 쓰고…

천조각, 플라스틱, 철사까지 재료로…그렇게 우리는 바꾸고 새들은 적응한다

 

크기변환_YSJ_87961.jpg» 이끼와 부드러운 깃털, 거미줄로 물잔 모양의 둥지를 짓는 멸종위기야생생물2급 긴꼬리딱새.

 

둥지는 새들의 집이다. 그곳에서 알을 낳고 새끼를 기르며 포식자나 위험으로부터 피한다. 특히 번식기가 다가오면 새들은 알을 낳아 안전하게 새끼를 키울 수 있는 둥지를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크기변환_YSJ_6100.jpg» 땅바닥에 둥지를 트는 멸종위기야생생물2급 검은머리갈매기.

 

둥지는 나무 위나나무구멍땅바닥벼랑바위물 표면 등 새 종류와 생활 방식에 따라 다르다. 둥지 모양도 물잔밥그릇접시반구형굴 등 다양하다둥지 재료도 천차만별이다.

 

크기변환_DSC_4996.jpg» 들머리에 깃털로 문을 만들어 위장한 흰머리오목눈이의 둥지. 새끼가 먹이를 받아먹고 들어가면 둥지 아래에 보이는 깃털이 닫혀 안이 보이지 않는다.

 

물까치까치는 나뭇가지로 둥지를 만드는 대표적인 새이며 흰머리오목눈이는 이끼를 이용하여  타원형의 둥지 위에 새의 깃털을 이용하여 정교하게 위장 문을 만들어 달아 아예 둥지 안이 보이지 않게 한다.

 

크기변환_YSY_1301.jpg» 참매는 15미터 이상 높이에 마른 나뭇가지를 이용해 둥지를 짓는다.

 

크기변환_YS1_2220.jpg» 마른 나뭇가지와 이끼를 이용해 둥지를 짓는 물까치는 집단번식을 하는 특징이 있다.

 

특히 둥지를 만드는 조류 중에서 멧비둘기는 나뭇가지로 나무 위에, 저어새는 줄 뿌리와 갈대로 바위나 땅바닥에 둥지를 흉내만 낸 듯 엉성하게 만들지만 그들에겐 최상의 둥지다.

 

크기변환_1SY_8921.jpg» 흙 벼랑에 구멍을 파고 둥지를 만든 물총새.

 

긴꼬리딱새는 거미줄과 깃털이끼를 사용해 물잔 모양의 둥지를, 제비는 개흙으로 둥지를 만든다. 딱새는 마른풀과 여러 가지 재료를 사용하여 밥그릇 모양의 둥지를 만든다.

 

크기변환_DSC_3186~1.jpg» 개흙과 볏짚을 사용해 둥지는 짓는 제비.

 

물총새와 청호반새는 흙 벼랑을 이용해 흙을 파고 들어가 둥지를 만든다. 바다직박구리는 암초의 틈암벽의 갈라진  벼랑에 난 작은 구멍에 식물의 가는 뿌리나 마른 풀을 써서 밥그릇 모양의 둥지를 만든다.

 



크기변환_YSJ_9675.jpg» 반구형인 팔색조 둥지.

 

팔색조는 나뭇가지, 마른 풀나뭇잎, 이끼를 사용하여 반구형의 둥지를 만들고, 뿔논병아리는 물위에 수초를 역어 방석 모양의 둥지를 뛰운다.

 

크기변환_YS1_5051.jpg» 물위에 수초를 모아 둥지를 짓는 뿔논병아리.

 

새들은 나뭇가지나뭇잎이끼나 동물의 털마른 풀잎과 가는 뿌리 등을 물어 와 바닥에 쌓아서 충격 흡수, 보온력통기성, 습도까지 고려한 쾌적한 둥지를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 알을 낳는다.

 

크기변환_YSY_5916.jpg» 이끼를 주 재료로 사용하는 큰유리새.

 

오색딱따구리나 까막딱따구리는 수컷이 몇 개의 나무에 구멍을 조금 내어 둥지를 만들 후보지를 준비한 뒤 암컷을 유혹한다. 짝짓기 할 암컷이 결정되면 암컷과 같이 둥지를 만들 나무를 최종 확정하고 부부가 함께 번식하기에 적합하도록 둥지를 만든다까막딱따구리 둥지는 원앙의 둥지로 사용되기도 한다.

 

크기변환_DSC_2146~3.jpg» 목질이 연한 은사시나무에 둥지를 만든 멸종위기야생생물2급 까막딱따구리.

 

스스로 나무를 파내 집을 짓는 딱따구리도 이제는 무른 나무를 선택하여 손쉽게 집을 짓는다특히 까막딱따구리는 소나무전나무 등 단단한 침엽수 나무에 구멍을 파 집을 지어 여러해 사용해 왔으나 은사시나무 조림이 늘어나면서부터 제법 아름드리로 자란 무른 나무에 집을 짓는 편이 손쉽다는 것을 알아챘다.

 

 크기변환_1SY_1621.jpg» 딱따구리는 목질이 연한 오동나무를 선택하여 둥지를 만들었다. 이 둥지를 다시 소쩍새가 사용하고 있다.

 

흰눈썹황금새파랑새동고비, 박새, 호반새, 소쩍새 등도 딱따구리가 쓰다가 버린 나무구멍을 재활용해 둥지로 쓴다.

 

크기변환_YSJ_0120.jpg» 동고비는 딱따구리가 쓰던 둥지 들머리를 흙으로 막아 자신만이 들어 갈수 있도록 미장을 한다. 흙을 물고 와 둥지 구멍을 좁히는 공사를 하고 있는 동고비.

 

새들을 환경 변화에 적응해 둥지를 만드는 곳도 다양해지고 있다.

 

크기변환_DSC_2001~2.jpg» 신발장에 둥지를 튼 딱새.

 

크기변환_DSC_0910.jpg» 우편물 함에 둥지를 마련한 딱새.

 

그뿐만 아니다요즘 환경의 변화로 인해 순수 자연재료만 쓰던 새 둥지에서 눈에 띄게 비닐, 비닐 끈, 종이, 헝겊, 플라스틱 등을 재료로 쓰는 모습은 흔하게 볼 수 있다. 심지어 철사 줄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크기변환_YS3_1246.jpg» 줄 뿌리와 갈대를 둥지 재료를 사용하는 저어새 둥지 안 오른쪽에 인쇄된 두꺼운 종이가 보인다.



 

새들도 그 시대의 환경에 적응해 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사례지만, 환경오염이 만연돼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크기변환_SC_0166.jpg» 버려진 헝겊을 나뭇가지에 매달아 지은 꾀꼬리 둥지.

 

동물들은 환경변화에 적응하며 살고, 사람은 환경변화를 만들며 사는 존재이다.

 

크기변환_시우리150404-3.jpg» 비닐 끈으로 만들어진 새 둥지.

     

달라지는 새 둥지는 환경을 어떻게 다루는지 보여주는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사진/ 윤순영 한국야생조류보호협회 이사장, 한겨레 <물바람숲> 필자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제주 망신은 다 시키고 다니는 원희룡지사

 
제주도지사로 당선되기 전에는 항상 ‘서울시민 원희룡’을 주장했던 인물
 
임병도 | 2015-09-12 09:42:51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지난 7월 24일 제주도청의 소식을 알려주는 ‘제주도정뉴스’에는 ‘중국 대표 포털 봉황넷, 제주 홍보 앞장선다’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메르스로 침체된 제주 관광 활성화를 위해 중국의 대표 포털 사이트와 제주가 손을 잡는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상했습니다. 중국의 대표적인 포털 사이트인 ‘바이두’, ‘QQ’, ‘시나닷컴’ 등은 들어봤어도 봉황넷은 처음 들어봤기 때문입니다. 알고 보니 ‘봉황망’을 도정뉴스가 봉황넷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이름이 鳳凰網인데 이것을 봉황넷으로 호칭한다는 자체가 이상합니다. 마치 네이버를 네이넷으로 부르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공식적으로 사용되는 ‘봉황망’이라는 명칭을 사용해야 맞습니다. 제주도가 봉황망을 봉황넷으로 호칭하면서 엉뚱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네이버에서 봉황망으로 검색하면 봉황망 사이트와 뉴스가 나옵니다. 봉황망이 제주 관광을 위해 협력했다는 뉴스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봉황넷으로 검색하면 제주 관련 소식이 계속 나옵니다. 제주도가 보도자료를 뿌리면서 봉황망을 봉황넷으로 했고, 언론사가 모두 봉황넷으로 받아쓰기를 한 결과입니다.

돈을 써가면서 봉황망 관계자들과 만났고 보도자료를 배포해 뉴스는 나왔지만, 봉황넷이라는 단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받아쓰기에 나선 언론만 알 수 있는 봉황넷이라는 이상한 뉴스가 생성된 셈입니다.
 
봉황망이라는 명칭만 제대로 썼어도 검색 등에 노출돼 홍보 효과를 충분히 볼 수 있었지만, 봉황넷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 효과는커녕 망신만 당했습니다.

제주도 공무원이 착각하고 일을 잘못했다고 합시다. 제주에서 천재라고 불렀던 원희룡 지사마저도 자신의 페이스북에 당당하게 ‘봉황넷’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원 지사의 글을 읽는 사람 중 중국을 아는 사람이라면 헛웃음이 나올 수도 있었습니다.

중국인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중국을 찾고 관심이 있었다면 봉황넷을 봉황망이라고 한다는 정도는 금방 찾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공무원들이 봉황넷이라고 하니 원 지사도 아무 생각 없이 봉황넷이라고 부르고 다녔습니다. 똑똑하다는 사람이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짓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제주도는 관광객 유치를 위해 중국에서 마케팅을 한다고 홍보했습니다. 제주도정뉴스는 ‘특히 이번 상하이시 마케팅에는 지난 17일 서울시 명동 거리 제주 관광마케팅에 참여한 바 있는 박원순 서울시장이 다시 참여, 공동으로 마케팅을 추진할 예정이어서 주목된다’고 밝혔습니다.

제주도의 이런 주장만 보면 제주도가 중국 마케팅을 하고, 박원순 서울시장이 참여하는 모습입니다. 즉 제주도가 차려 놓은 밥상에 서울시가 숟가락을 얹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정반대였습니다. 원래 중국 마케팅은 서울시가 메르스 사태로 발생한 관광 침체를 활성화하기 위해 대대적인 예산을 투입해 기획한 행사입니다. 다 만들어 놓은 서울시 계획에 막판에 제주도가 숟가락을 얹었습니다.

아이엠피터가 만난 서울시 관계자들은 원희룡 지사와 수행원들에게 불만이 있었습니다. 일은 서울시가 다했는데 막판에 와서 마치 자기들이 다 한 것처럼 생색을 내거나, 원희룡 지사를 돋보이려고 무리수를 뒀기 때문입니다. 그들과 얘기하는 내내 얼굴이 화끈거리고 도민으로 창피했습니다.

원희룡 지사는 봉황망을 봉황넷으로 당당하게 부르면서 ‘제주도는 대한민국입니다.’를 외칩니다. 사실 원희룡 지사가 언제부터 제주도를 그리 사랑했는지 의심이 듭니다. 왜냐하면, 원희룡 지사는 제주도지사로 당선되기 전에는 항상 ‘서울시민 원희룡’을 주장했던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정치] 서울시민 원희룡, 그래도 제주도민은 열광
 
‘제주도는 지금 대한민국 마케팅의 최전방에 서 있습니다’라며 자신이 제주와 대한민국 마케팅을 위해 열심히 뛰어다닌다고 자랑하는 원희룡 지사를 보면서, 제주도민 망신은 다 시키고 다니면서 왜 저리 자랑을 하는지 답답하기만 합니다.

원희룡 지사님 !
 
자랑스러운 제주도지사가 되지 못할 바에는 망신이나 시키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도민으로 부끄럽습니다.


[진실의길. 기고 글&기사제보 dolce42@naver.com]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900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한.미, "북 핵무력 강화에 당황"?

 
'미국 군사적으로 조선 전복 불가능'
 
이정섭 기자 
기사입력: 2015/09/12 [09:51]  최종편집: ⓒ 자주시보
 
 

 

▲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진 화성 13호, 북의 조건없는 대화에 응하지 않던 미국이 더는 물러 설 수 없는 입장에 처해 있어 이번 한미 당국의 회담 결과가 주모 된다.     ©자주시보 이정섭 기자



러시아 전문가와 언론이 미국이 군사적으로 핵무력을 가진 조선을 전복시킬 수 없으며 조선정권 붕괴는 실현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러시아통신인 스프티니크는 지난 11일 대한반도와 동아시아 전문가의 이 같은 견해를 대서특필했다.

스프티니크는 '미국과 남한 북한의핵억제력 개발결정에 당황했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6자회담은

이미 죽었으며 회담 자체의 성사를 무산 시킨 것은 조선이 아니라 미국과 한국이라고 분명히 했다.

 

이 신문은 미국과 서방 등은 현실 가능성이 없는 북 정권 붕괴를 위한 군사적 행동이나 싸이버 행동들을 중단하고 대북정책의 변화를 가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오는 13일 한국의 황준국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이 미국을 방문해 당국자 회담을 통해 정책을 선회해야하는 이유도 설명했다.

 

스프티니크는 황준국 한국평화교섭본부장이 지난 10일 국회연설에서 "미국과 한국은 6자 회담 재개를 위한 노력을 다방면으로 하고 있다»며 "그러나 북은 핵문제와 관련하여  모든 형태의 대화를 거부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통신은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동양연구소 한국 및 몽골 담당자인 알렉산드르 보론쪼프는 6자 회담과 관련한 이런 해석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많은 언론들이 말하듯이 '6자'라는 말은 매우 유용한 장치로 검토되고 있으나 서울이나 워싱턴 어디서든 6자 회담은 이미 '죽은 것'으로 간주된다."면서 "2009 년 이후 여러 차례 회담은 중단됐고 상황을 어렵게 하는 많은 사건들이 일어났다.

 

이는 핵문제도 예외는 아니다. 예를 들어, 조선에 핵이 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한국과 미국의 조선에 대한 비건설적인 정책(대북적대정책)이 회담 재개와 성공적인 회담 개최를 가로 막고 있다."고 지적했다.


브론쪼프 연구원은 "조선은 최근 다양한 형태로 대화 재개 제안을 해왔으나 미국과 한국은 이를 조선의 선전행위나 차후 도발을 위한 준비라고 여겼다."면서  "조선은 6자 회담에 대해 준비가 되어 있다고 여러 차례 밝혔다.

 

그러나 미국은 변함없이 먼저 예비 조건들을 이행하라고 다그쳤고 국제 핵사찰단이 조선에 들어갈 수 있게 하라고 했으며 모든 핵시설을 폐쇄하고 사실상 일방적으로 무장해제하라고 몰아 부쳤다.

조선 입장에서는 이는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임이 분명하나 미국과 한국은 물러서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조선의)평화로운 시도에 대한 이런 예기치 못한 반응에 직면한 평양 정권은 올해 마침내 미국과 한국과의 대화는 이들의 목표가 정권 교체에 있기 때문에 의미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며 "이런 사실은 버락 오바마의 올해 1월 회견문이 입증해 주고 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유감스럽게도 미국은 평양 정권이 충분히 강할 뿐만 아니라 핵 기술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군사적 방법으로는 전복할 수 없으며, 따라서 미국은 대중매체나 인터넷을 통한 방법을 포함하여 외부에서 정권을 와해하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강화해 갈 것이라고 밝혔다."고 고발했다.

 

또한 "이후 평양 정권은 오바마 행정부와의 건설적인 대화를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결정하고 조선은 대화를 하고자 하는 시도를 중지하고 핵 억제 수단 및 경제 건설을 동시에 진행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로 했다고 천명했다.


따라서, 6자 회담을 재개하기는 쉽지 않게 되었다. 현재 많은 사항들이 황준국의 워싱턴 방문에 따라 달라지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다시 말해, 미국과 한국이 북한이 수용할 수 있는 보다 합리적인 입장을 보일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브론쪼프 연구원은 라디오 '스푸트니크'과의 대담에서 "미국과 한국은 자신들의 정책을 비방하고 핵억제력 개발에 제재를 가하는 비건설적(대북적대정책)인 태도에 실망한 평양 정권의 결정을 우려하고 있다."면서 "위협으로 북한이 이 길을 포기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평양 정권과의 동등한 대화를 위한 서방의 진실한 노력을 보여주고 침략 거부를 보여 주어야 할 것이다. 평양 정권의 교체는 그 실현 자체가 어려운 일"이라고 못 박았다.


한편 한국의 황준국 평화교섭본부장의 이번 미국행은 8.25합의 이후 결정된 것이어서 회담 결과가 주목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안중근 유해, 이토 히로부미 무덤 아래 있다?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5/09/12 12:52
  • 수정일
    2015/09/12 12:52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서평] 김월배 교수의 <뤼순의 안중근 의사 유해발굴 간양록>

15.09.12 12:13l최종 업데이트 15.09.12 12:13l

 

 

서울 효창운동장에 있는 안중근 의사의 가묘(假墓) 사진을 본다. 정면 오른쪽에 흑대리석으로 된 안내석이 서 있다. "이곳은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봉환되면 모셔질 자리로 1946년에 조성된 가묘입니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유해가 없는 '가짜 무덤'이 가묘다. 안 의사의 유해는 어디에 있을까. 가묘는 '주인'을 맞을 수 있을까.

안 의사의 사형은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4분에 집행되었다. 105년이 지났다. 1세기를 넘는 긴 시간 동안 안 의사는 이국 땅 차디찬 곳에 묻혀 있다. 국민들로부터 독립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지만 유해 봉환을 위한 정부의 노력은 눈에 띄는 게 없다.
 

기사 관련 사진
▲  뤼순의 안중근 의사 유해발굴 간양록
ⓒ 청동거울

<뤼순의 안중근 의사 유해발굴 간양록>은 김월배 다렌외국어대학교 교수가 "10년 동안 안중근 의사의 유해에 관하여 연구하고 추적한 현장의 세세한 기록"(13쪽)이다. 안 의사 유해 매장지에 대한 당시 신문 보도와 사료, 뤼순 감옥 수감 당시 중국 측 근무자나 수감자 관련 자료와 그들의 증언, 1970년대 뤼순 감옥 주변 거주자들의 증언 들이 실려 있어 사료적 의의가 큰 책이다.

책명의 '간양록'은 조선 중기 문신 강항(1567~1618)이 정유재란 때 왜군 포로가 되었을 당시를 기록한 책 이름인 <간양록>에서 빌려온 것이다. '간양'은 흉노에게 포로로 잡혀간 한나라 소무(蘇武)의 충절을 뜻한다. 소무, 강항, 안중근으로 이어지는 애국충절의 계보를 강조한 저자의 뜻이 제목에 담겨 있다.

안중근 의사 유해를 찾아야 하는 이유

저자가 안 의사의 유해 찾기에 집착하는 이유는 "일제의 부당했던 안중근 의사 재판으로 안 의사의 유해가 어떻게 처리되었는가를 우리 국민들에게 사실대로 알리기 위해서"(13쪽)다. 그래서 이 책에는 안 의사의 유해에 대한 모든 자료와, 중국 내에서 진행된 발굴 사업의 성과, 안 의사 유해발굴 사업에 참고가 될 만한 모든 정보가 총망라되어 있다.

저자는 안 의사 유해의 매장지가 뤼순, 곧 '관동도독부 감옥서'라고 단정한다. 일제가 남긴 '관동도독부 사형집행 보고서'와 '안 사형 집행전말서',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 <도쿄일일신문> <만주신보> <만주일일신문> 등 다수의 당대 신문 들에 관련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한다. 

많은 기록을 보면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뤼순과 관동도독부 감옥서 공공묘지가 아닌 다른 곳에 묻혔다는 주장은 소모적인 논쟁일 뿐이다.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묻히신 자리까지 입증할 순 없지만, 1910년 3월 26일 오후 1시에 관동도독부 감옥서 공동묘지에 묻히신 것은 자명하다. 그동안 수많은 이견들이 떠돌던 안중근 의사 유해의 도쿄 매장설, 이토 히로부미 무덤 밑 매장설, 하얼빈 공원(현 조린 공원) 매장설, 바다 수장설 등은 모두 근거가 없다. (92쪽)

저자가 안 의사의 의거 이후 공판과 사형 집행에 이르기까지의 사정들을 서술한 대목을 보면 일제가 안 의사(의 의거)를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

1909년 10월 30일 처음 열린 제1회 심문에서 일본 미조부치 검찰관은 안 의사로부터 '이토 히로부미 죄상 15개조'를 듣고 안 의사를 '동양의 의사'라고 말했다. 당시 관동도독부 고등법원에서는 안 의사 의거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무기징역 판결을 고려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일본 외무성이 12월 2일 "안중근을 극형에 처하라"라는 비밀명령을 내리면서 바뀌었다. 공판은 1주일간 6회에 걸쳐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 이 시기 안 의사가 일제 사법기관에 맞서 벌인 투쟁을 저자는 '안중근 의사 관동도독부 공판 투쟁기'로 명명했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4분 일제는 안 의사를 사형대에 세웠다. 조선통감부의 통역 촉탁(通譯囑託) 소노끼 스데요시(園木末嘉)가 보고한 <안중근 사형 집행 상황>에 순국 상황, 순국 후 유해 매장 시간과 매장지역, 유해 교부와 관련된 상황 등이 명기되어 있다.

이보다 앞서 두 아우(안정근, 안공근-기자 주)는 오늘 사형집행의 취지를 전해 듣고 그 시체를 사정해 얻어 내어 곧 귀국하기 위해 여장을 갖추고 감옥서에 출두할 준비 중이라는 보고에 접했으므로 급히 수배를 해 그들의 외출을 금하고 형의 집행 후에 이르러 소환한 다음 전옥으로부터 피고의 시체는 감옥법 제74조 및 정부의 명에 의해 교부하지 않는다는 취지를 언도하고 특별히 시체에 대한 예배는 허가한다는 뜻을 유고(諭告)한 데 대해 두 아우는 몹시 분격하면서 (중략) 울부짖으며 쓰러진 채 막무가내로 움직이지 않으므로 하는 수 없이 경찰의 힘을 빌려 실외로 끌어내어 다시 백방으로 간곡히 타이른 결과 간신히 약간 정상상태로 돌아왔기 때문에 그대로 정거장으로 호송해 두 명의 형사 경호 하에 오후 5시발 대련행 열차로 귀국시켰던 것입니다. (하략) (88쪽에서 재인용)

2014년 1월 19일, 중국 정부는 헤이룽장(黑龍江)성 하얼빈(哈爾濱)역에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열었다. 개관 직후인 1월 20일 일본 정부 대변인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이 "안중근은 테러리스트"라고 주장하면서 한국과 중국에 거세게 항의했다.

극에 달한 안중근 의사 의거 폄하
 

기사 관련 사진
▲ 일제강점기 순교자 안중근 의사 1910년 3월 뤼순감옥에서 빌렘 신부와 면회를 갖고 있는 안중근(맞은편) 의사. 왼쪽에 안 의사의 두 동생 정근·공근 형제가 함께하고 있다.
ⓒ 안중근의사숭모회

관련사진보기


저자는 이 책에서 최근 일본 위정자들 사이에서 안 의사에 대한 폄하와 왜곡이 극에 달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안 의사를 테러리스트, 살인자, 범죄자로 보는 왜곡된 시선들이다. 이토 히로부미의 무덤에 "한국의 독립운동가에 의해서 살해되었다"라는 비문이 버젓이 새겨지게 된 정치․사회적 배경들일 것이다.

저자는 안 의사를 테러리스트나 범죄자로 보는 스가 요시히데 류의 시각이 안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한 단면만을 본 단견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안중근 의사는 일본을 바로잡음으로써 동양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일본이 대외정책을 시정하지 않는 한 동양의 평화와 한국의 독립은 요원할 것으로 여긴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안중근 의사의 해법을 따르지 않고 1910년 한국의 강점, 1931년 만주사변에 의한 중국 동북지역 지배,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확대, 1941년 태평양 전쟁으로 전세계의 평화를 위협하다가 1945년 8월 세계의 보복을 받고 원자탄에 의하여 전쟁에 패망하고 말았다. (53쪽)

스가 요시히데 류의 '망언'은 자국의 부당한 침략 역사를 부인하고 '신군국주의'를 향해 치닫고 있는 일본 아베 정권의 반동적인 역사의식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우리 정부는 제대로 대처하고 있을까.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8월 15일 광복 70주년 경축사에서 "오늘은 광복 70주년이자 건국 67주년을 맞는 역사적인 날입니다"라고 말했다. '건국' 관련 내용을 운운하는 게 올해로 3년째라고 한다. 작년 광복절 경축사에서는 "대한민국 수립 66주년"이라고 했다.

'건국 67주년' 식의 표현은 이명박 정부 이후 뉴라이트와 보수 우파들이 추진하고 있는 '건국절'과 동궤의 역사의식을 갖는다. '건국절' 추진 세력은 상하이 임시정부의 역사를 한사코 외면하려 한다. 박 대통령이 상하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시한 헌법 정신을 부정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최근 박근혜 정부는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작업을 끈질기게 밀어부치고 있다. 고교 한국사 교과서 집필기준안 시안에서 임시정부 법통성 관련 내용이 제외됐다는 보도도 나왔다. 정권 입맛에 맞는 역사만을 가르치겠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뤼순 감옥 지하 어느 자리에 묻힌 안 의사가 무덤을 박차고 나올 일들이 아닐까.

<뤼순의 안중근 의사 유해발굴 간양록>(김월배․김종서 지음 / 청동거울 / 2015.8.15. / 319쪽 / 1,8000원)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공순이들, 노동운동에서 평화를 찾다


평화여성회, 70~80년대 여성노동자 목소리 듣기 개최
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승인 2015.09.11  16:44:53
페이스북 트위터

"국가가 불리할 때는 분단을 이용한다. 노동운동을 빨갱이라고 해서 위협했다. 북한에서 쳐들어 올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줄 때는 슬프고 안타깝다."

1980년대 대학을 다닌 이들이라면 읽어봤을 책 『서울로 가는 길』을 쓴 여성노동자 송효순 씨는 노동운동의 경험을 통해 통일된 한반도를 소망했다.

'평화를만드는여성회'(상임대표 안김정애)는 10일 오후 서울 당산동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여성, 광복 70년, 분단 70년을 말하다'라는 라운드테이블을 마련, 세 번째 주제로 '70~80년대 여성노동자의 목소리'를 다뤘다. 이 자리에는 남영나이론 노동자였던 김연자, 대일화학 노동자로 일한 송효순 씨가 나섰다.

   
▲ 평화를만드는여성회가 10일 서울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여성, 광복 70년, 분단 70년을 말하다'라는 주제로 세 번째 70~80년대 여성노동자 목소리 듣기 라운드테이블을 마련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가난 속에서 '공순이'의 길을 걷다"

1960~70년대 한국은 국가적 차원에서 가난과의 전쟁을 벌이던 시기다. 그리고 집안의 딸들은 학교가 아닌 공장으로 가야했고, 그것도 자신이 아닌 오빠와 남동생들을 공부시키기 위해서 일해야만 했다. 이들은 하나같이 '공순이'라고 불렸다.

1955년생인 김연자 씨도 마찬가지였다. 충남 연기군에서 태어난 그는 7남매 중 여섯째로 다섯 명의 오빠를 뒀다. 공부를 잘해 천안의 한 중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했지만 어려운 살림에 통학비가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베트남전에 참전한 셋째 오빠가 전쟁 트라우마로 자리에 눕자 학교를 그만두고 병수발을 도맡아야 했다.

16살에 천안 가발공장에 처음 취업한 김연자 씨는 아침 6시부터 밤 11시까지 일해야 했다. 기숙사가 있는 공장이라고 하지만 문짝 하나가 일터와 기숙사의 경계선일 뿐이었다. 게다가 월급도 못받았다.

"그때 일하는 것은 집에있는 것보다 일단 돈을 번다고 생각하니 좋았어. 그런데 월급을 안주는 거야. 3개월만 하다가 나왔어. 사장이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를 이용한 것 같아. 지금 생각하면 너무 억울해."

19살이 된 김연자 씨는 서울 문래동 허리를 펼 수 없는 하꼬방에서 바로 위 오빠와 생활하며 가발공장인 서울통상에 발을 들였다. 당시 서울통상은 최대 가발생산업체로 최준규 사장은 1971년 종합소득세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종합소득세 1위의 배경에는 노동자들이 있었지만 당시 서울통상은 지각한다고 때리고, 일 못한다고 때리는 등 대우가 상당히 열악했다. 그래서 어린 김연자는 그 광경에 놀라 친구의 소개로 남영나이론에 취업했다. 남영나이론은 우리가 잘 아는 '비비안'을 만드는 회사다.

"내가 지금도 키가 작지만 그때도 작았어. 150cm였거든. 1년반을 시다만 시키는거야. 거기가 브래지어, 팬티같은 거 만드는 곳인데. 원단이 얼마나 무거운지...한 달에 100시간 넘게 잔업을 했어. 일당 210원이었거든. 야간작업하고 그러면 한 달에 만원 넘게 받았어."

"남영나이론은 다른 공장보다 좀 좋았는데. 출.퇴근하면 카드를 찍어야해. 그런데 출근해서 카드를 찍으면 카드를 숨겨놔. 퇴근 안 시키려고. 그럼 그때 실업계 야간학교 다니는 애들은 울고불고 난리나는 거야 카드 달라고... 그때 위장병이 생겼어. 맨날 약을 달고 살았지."

   
▲ '남영나이론'에서 노동운동을 한 김연자 씨. 취업 당시 사진 속 모습 앞에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1957년생인 송효순 씨도 당시 공장에서 일한 소녀들과 다르지 않았다. 익산에서 태어난 그는 언니 둘, 남동생 둘을 뒀다. 둘째 언니가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돈벌러 갔듯이 그도 같은 길을 걸었다.

"꿈을 가진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됐어요. 내가 돈벌어서 남동생을 학교에 보내야 한다는 것이 자연스러웠지요. 어떻게 꿈이라는 게 있어요? 돈을 벌어야 한다고만 생각했죠."

16살에 서울로 올라와 목욕탕 심부름꾼으로 일한 송효순 씨는 18살이 돼야 취업이 가능했지만 17살에 나이를 속여 '대일화학'에 취업했다. '대일화학'은 '대일밴드'를 생산하는 업체다.

"8시 반에 출근해서 6시 퇴근이지만 야간작업이 많았죠. 일당이 188원이었는데 점심은 주지 않아서 회사식당에서 60원을 내야 밥을 먹을 수있었어요. 남영나이론은 점심이 꽁짜였는데 우리는 그렇지 않았지. 우리에 비하면 남영은 천국이었어요."

"내 별명은 '송순진'이었어요. 그럴 정도로 일만 했죠.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회사에서 모범상을 받아서 밍크이불을 선물로 받았어요. 최고의 모범직원이었죠. 내가 열심히 일하면 동생이 열심히 공부하겠지 생각했어요. 이렇게 사는 것이 당연했지요."

   
▲ 영등포산업선교회. 도시산업선교회로 출발한 이 곳은 1970년대 노동운동 성장의 통로였다. [사진출처-영등포산업선교회 홈페이지]

"우리는 '산선대학' 출신..내가 아니라 우리였다"

1970년대 열악한 노동현실을 깨기 위한 노동운동 성장의 통로가 있었다. 바로 '영등포산업선교회(산선)'. '도시산업선교회(도산)'로 출발한 이 곳을 거쳐간 노동자들의 수는 헤아릴 수없을 정도다. 그래서 '도산이 들어오면 도산한다'는 말이 언론에 나올 정도였다.

김연자 씨와 송효순 씨가 산선에 발을 들여놓은 계기는 당시 산선이 운영하던 신용협동조합(신협)이었다. 은행에 월급을 저금하러 갈 시간조차 없던 이들에게 산선의 신협은 1원, 10원 짜리도 받아줬다. 하지만 처음 이들이 바라본 산선은 '빨갱이 소굴'이었다.

"월급날 한 친구가 10원짜리만 모아서 저축을 한다고 모아갔어. 그걸 보고 난 빨갱이단체다. 빨갱이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으로 유혹한다는 문구를 많이 봤기 때문에 그걸 확인해보려고 갔어. 1974년도에 가니까 시범아파트 지하에 사무실이 있더라. 아 여긴 정말 빨갱이다라고 생각했지."(김연자)

"그때 똘똘한 어떤 언니가 1원도 저축할 수 있는 곳이 있다고 얘기를 듣고 많이 망설이다가 따라가봤어요. 한발 넣고 여차하면 한발 빼야지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공장에서 할 수없는 꽃만들기, 바느질하기 등등을 가르쳐준다고 하더라. 기대가 됐어요."(송효순)

공부의 기회에서 멀어졌던 이들은 신협 저축으로 산선과 인연을 맺고 많은 것을 배웠다. 꽃꽂이, 인형만들기 등에서 시작한 이들에게 산선은 노동자의 권리, 인권, 여성인권 등을 깨우치게 했다.

그리고 영국노동운동사, 종교, 문학 등의 공부를 했고 문동환, 문익환, 고은, 장명국, 김근태, 백기완, 김동길, 김옥길 등이 강사로 나섰다. 쟁쟁한 강사들을 둔 이들은 그래서 '산선대학' 출신이라고 자부한다.

   
▲ '대일화학'에서 노동운동을 한 송효순 씨. '서울로 가는 길'의 저자이기도 하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내적 성장의 계기가 됐어. 나에 대한 자부심이 생겼지. 나도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 나는 내가 노동운동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내가 해야하는 일을 자연스럽게 했어. 활동 전에는 관심이 나에게 머물렀다면 활동 후에는 '전체 속의 나'를 볼 수있게 됐지. 그때는 같이 하고 있다는 것이 힘이 됐어."(김연자)

"노동법도 배우고 문인이 와서 강의도 했어요. 그것이 너무 좋아서 야간을 빼먹고 오기도 했지요. 그 과정을 통해 생각이 변화됐어요. 주눅이 들어있을 때인데 '너희들 노동자가 없으면 세상은 안 돌아간다'라는 말을 들으면서 자존감이 높아졌어요."(송효순)

이를 토대로 김연자 씨는 회사의 부당한 처우개선에 앞장섰다. '강제잔업거부', '생리휴가', '잔업수당' 등을 요구했다. 6시 퇴근시간이 되자 동료들과 미싱기의 전원을 끄고 버티고 앉는 투쟁도 벌였다. 그리고 성과를 거두자 회사가 만든 어용노조를 민주노조로 바꾸는 일에 나섰다.

"대의원 진행연습도 했지. '가하면 예하시오. 나하면 뭐하시오' 얼마나 연습했는지 몰라. 그런걸 잘 몰랐으니까. 그렇게 회의가 열렸는데 계속 정회되는 거야. 회의가 열리지 않더라고. 그래서 노조 사무실에서 농성을 벌였어. 깡패가 끌고가서 누굴 겁탈했다느니 소리도 듣고. 무서웠고 힘들었지." (김연자)

"내가 모범을 보여야 하더라구. 내가 모범을 보여야 동료들이 나와 함께할 거 아니야. 그래서 많이 성숙해졌지."(김연자)

"산선 야유회에 간다고 일요일에 7명이 빠졌어요. 그걸 회사가 알고 산선에 다니지 말라고 협박하고 회유하는 거야. 그래서 산선에 이야기했죠. 노동법 지키라는 탄원서를 내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서명을 받았어요. 그 일이 있고 나서 강제야간금지, 식당 밥 질 높이기, 동복 작업복 지급 등이 바뀌었어요."(송효순)

"우리는 빈틈을 보이지 않도록 지각하지 말고 조퇴하지 말자고 약속했어요. 내가 일의 기준이었는데. 내가 60개면 다른 사람은 55개해. 그럼 내가 더 해서 다른사람 채워주고 그랬어요. 그때 관심사는 당당하게 사는 거였죠. 그리고 내가 아니라 우리라는 생각을 했어요."(송효순)

사회가 무시하던 중퇴, 국졸들이 노동현장을 바꾸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어용노조를 민주노조로 바꾸는 일로 확대됐다. 그러나 1980년 5월 전두환 신군부가 들어서면서 시작된 '노동정화'는 이들에게 시련을 안겼다.

송효순 씨는 산선의 인명진 목사가 잡혀가는 모습을 목격했고 회사로부터 해고당했다. 그리고 블랙리스트에 올라 취업이 어렵게 됐다. 게다가 경찰의 감시 속에서 살아야 했다. 그런 경험은 『서울로 가는 길』에 녹아있다. 김연자 씨도 민주노조가 좌절되고 회사의 협박에 못이겨 1981년 퇴사해 결혼했다.

   
▲ 여성노동자로 1970년대 노동운동의 길을 걸어온 이들은 한반도 평화통일이 답이라고 강조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노동운동에서 한반도 평화통일을 찾다"

김연자 씨와 송효순 씨는 70~80년대 노동운동 현장에 뛰어들면서 사회의식을 키웠다. 그리고 이들의 눈은 한반도 평화통일로 가 있었다.

"나는 아들이 크면 통일이 되어 군대가 없어질 줄 알았어. 한 사람은 2년이지만 그 기간이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는 거지. 재원낭비, 시간낭비, 인간성낭비다. 그래서 평화는 꼭 필요해."(김연자)

"국가가 불리할 때는 분단을 이용해요. 정부에서 궐기대회할 때는 동원됐고, 불리할 때는 의식화교육시키고. 노동운동을 빨갱이라고 해서 위협했어요. 북한에서 쳐들어 올 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줄 때는 슬프고 안타깝죠."

김연자 씨는 노동운동의 경험을 살려 10년동안 구로의원, 갈릴리교회 외국인노동자상담소, 서울의료생협 이사장 등으로 일했다. 현재 인천 결식아동을 후원하는 도시락사업을 하고 있다.

송효순 씨는 해고 후에도 노동운동을 이어갔다. 후배노동자에게 경험을 나누고 깃발도 만들어줬다. 그리고 가슴 한 켠에 1986년에 분신한 박영진 열사가 남아있다.

"1970년대의 저임금정책이 빚은 결과가 노인빈곤으로 연결되고, 지금은 비정규직 문제가 심각하고 취업을 하기가 힘든 것이 노동자의 삶을 힘들게 하고 있어요. 분단사회에 사는 것은 상당히 고난이에요. 휴전협정이 평화협정으로 바뀌는 것이 모두를 위한 일이에요." (송효순)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숲속 요정' 팔색조의 기막힌 둥지, 새끼 크면 부피 늘어

'숲속 요정' 팔색조의 기막힌 둥지, 새끼 크면 부피 늘어

김성호 2015. 09. 10
조회수 4182 추천수 0
 

가는 나뭇가지 이용한 돔 형태, 탄력 있는 구조여서 새끼 자라도 함께 커져 

부화 19일만에 새끼는 둥지 떠나…통통 뛰며 숲바닥서 지렁이 찾는 희귀새

 

fledging05.jpg» 가는 나뭇가지로 만든 팔색조의 둥지에서 훌쩍 자란 새끼가 먹이를 보채고 있다.

 

새가 번식할 곳이라면 들어가지 않았던 숲이 없었습니다. 대나무 숲, 딱 한 곳을 빼고는 말입니다. 

 

숲이야 기본적으로 울창하기 마련이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먹이를 물고 분주히 둥지를 드나들어야 하는 일정이 번식인데, 바람도 스며들기 힘겨운 빽빽한 대나무 숲을 번식 장소로 선택할 새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탓이었습니다. 생각이 그러하니 번식의 계절에 대나무 숲으로 눈길을 준 적은 없었습니다. 

 

물론 나만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자연이 우리가 생각한 그대로 작동할 것이라는 예단은 보기 좋게 어긋나고 말았습니다.

 

오히려 그 곳은 다른 곳보다 천적의 간섭이 거의 차단된 아주 좋은 번식지였습니다. 게다가 대나무 숲에서 팔색조가 번식을 치르고 있으리라는 것은 꿈에서조차 나타날 수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fp01.jpg 
 
‘호이잇, 호이잇’. 분명 팔색조 소리였습니다. 걸음을 멈추고 숨마저 잠시 멈춘 채 소리의 중심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것은 당연한 순서입니다.

 

이것 참…. 팔색조 소리는 겹겹이 늘어선 대나무 사이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길이 없습니다. 다가설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이 지역에도 팔색조가 살고 있네.” 하는 혼잣말을 흘리며 대나무 숲을 지나 더 깊은 숲으로 발길을 옮기고 말았습니다.

 

다음 날 새벽, 대나무 숲의 끄트머리를 막 지날 때였습니다. 어…, ‘호이잇, 호이잇’ 팔색조 한 개체의 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다른 쪽에서 바로 ‘호이잇, 호이잇’ 소리가 이어집니다.

 

팔색조는 한 개체가 아니라 두 개체, 곧 한 쌍이 있다는 뜻입니다. 어제 그 대나무 숲에 말입니다. 대나무 숲은 모기의 소굴이지만 모기에 뜯겨 죽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으니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대나무 숲을 비집고 들어가 봅니다.

 

대나무 숲으로 들어가 보니 속 모습은 겉모습과 또 달랐으며, 새는 내가 들어서는 경로가 아니라 하늘 쪽에서도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대나무 숲에서 번식을 치를 새는 없으리라는 생각은 그날로 멈춰야 했습니다. 대나무 숲에서 새가, 그것도 팔색조가 번식을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fp02.jpg» 대나무숲의 팔색조.

  
팔색조는 ‘숲의 요정’이라 불립니다. 학명과 영명 모두에 요정을 뜻하는 ‘nympha’와 ‘fairy’가 들어가기에 붙여진 별명일 것입니다.

 

팔색조는 여덟 가지 색을 지닌 새를 의미합니다. 색깔을 어떻게 세분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실제는 그보다 색이 더 많아 보이기도 하고 어찌 보면 또 적어 보이기도 합니다.

 

숫자 8은 분명 여덟을 뜻합니다. 하지만 숫자 8에 ‘여러 가지’라는 뜻도 있으니 굳이 팔색조가 여덟 가지 색인지를 따질 필요는 없겠습니다. 팔방미인의 팔방(八方)이 꼭 여덟 가지 방향을 뜻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게다가 팔색조의 영어 속칭은 일곱 빛깔의 새(seven-colored bird)입니다. 몸길이는 약 18㎝입니다. 
 
세계의 미조(美鳥) 중 하나로도 꼽히는 팔색조는 우리나라의 여름 철새입니다. 5월 중순 경 우리나라에 와서 여름을 지내며 숲에서 번식을 하고 찬바람 술렁이는 가을이면 떠납니다.

 

이렇듯 팔색조는 분명 우리나라의 숲에서 여름을 지냅니다. 그러나 마주하기 쉬운 새는 아닙니다. 탐조가가 만나고 싶은 여름 철새 목록 첫줄에 자리 잡을 새이지만 그 만남이 성사될 확률은 극히 낮습니다.

 
팔색조를 만나기 어려운 이유 몇 가지를 꼽아보겠습니다. 우선 개체 수 자체가 적습니다. 전 세계의 서식 개체를 최소 2500 개체에서 최대 1만 개체로 추정하고 있는데, 그나마 서식지 파괴로 인하여 급격한 감소추세에 있어 국제자연보전연맹(IUCN; International Union for Conservation of Nature)의 적색목록에 올라있는 형편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제주도 한라산 둘레에 위치한 남사면, 거제도 동부면 학동, 전라남도 진도 등의 섬에서 번식하는 희귀한 새로서 1968년 천연기념물 제204호로 지정되었고, 2012년에는 멸종위기야생동식물 Ⅱ급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필자만 해도 전라도 내륙, 충청도 내륙, 경기도, 심지어 강원도 지역에서도 번식 개체를 확인한 바 있으니 서식 범위는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확대되었다 여겨집니다.

 

그렇더라도 팔색조를 만나기 어려운 이유에는 그들의 서식환경 또한 한 몫을 합니다. 팔색조는 인적이 지극히 드물거나 아예 끊어진 깊은 산 속 음습한 지역에서 삽니다.

 

구름 한 점 없이 하늘이 제대로 열린 한낮에도 컴컴할 정도의 숲이기 십상입니다. 따라서 깊은 산 속을 더듬듯 뒤지다 ‘호이잇, 호이잇’ 팔색조가 내는 울림이 큰 소리를 들었다 하더라도 모습 한 번 보지 못하고 소리를 들은 것으로 만족해야 할 때가 많습니다. 게다가 팔색조는 까칠한 새를 대표할 정도로 무척 경계심이 강합니다.

팔색조는 이미 대나무 숲 경사면에 둥지를 짓고 알을 품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일단 철수합니다. 대나무 숲에서 이뤄지는 관찰이니 제대로 전략을 짜야할 상황입니다.

 

움막을 짓는 것은 기본인데 장소가 마땅치 않습니다. 게다가 대나무 몇 개는 잘라야 하겠으니 소란을 떨지 않고 움막을 지을 길은 없겠습니다.

 

움막을 짓는 시간을 정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둥지를 막 짓기 시작했을 때 움막을 짓는 것이 최선이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이제 차선이라도 찾아야 합니다. 팔색조의 포란 기간은 17일 정도입니다. 언제부터 알을 품기 시작했는지 알 수 없지만 알 품는 일정을 간섭하는 것은 피하기로 정합니다.

 

부화한 어린 새가 둥지를 떠나기까지는 약 18일 정도가 걸립니다. 부화 초기도 간섭은 피하기로 합니다. 먼발치서 위장천 뒤집어쓰고 지켜보다 부화가 일어난 후 5일째 되는 날 미리 정한 곳에 가능한 빨리 움막을 짓기로 합니다.
 
움막이 완성되었습니다. 짧은 소란도 끝나 이제는 원래 대나무 숲의 고요함만이 있을 뿐입니다. 다행스럽게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흐르자 팔색조가 경계심을 풀고 먹이를 문 채 둥지 앞 대나무에 내려앉습니다. ‘호이잇, 호이잇’.  
 
팔색조가 어린 새를 키우기 위해 잡아오는 먹이의 95% 정도는 지렁이입니다. 거의 지렁이를 먹인다고 보아도 좋을 정도입니다. 나머지 5% 정도는 애벌레와 거미를 포함하여 번식지의 환경에 따라 다양한 곤충을 잡아옵니다.

 

성체의 주요 먹이 역시 지렁이입니다. 주식이 지렁이다 보니 둥지는 지렁이를 쉽게 구할 수 있는 습하고 음침한 숲에 자리합니다. 번식 시기 또한 우리나라의 장마철과 겹칩니다. 모두 주요 먹이가 지렁이인 것과 맞닿아 있습니다.

 

이처럼 팔색조의 둥지는 낮에도 음침한 숲에 위치하는 데다 장마까지 겹치니 번식 일정에 동행하는 관찰자로서는 최악의 조건일 때가 많습니다. 둥지는 경사진 땅, 굵은 나뭇가지 사이, 바위 위에 나뭇가지를 엮어 짓는데 어느 곳이라도 모양은 윗부분이 둥그런 돔(dome) 형태입니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팔색조의 체형 또한 지렁이를 잘 잡도록 최적화되어 있습니다. 땅을 헤쳐 지렁이를 잡아야 하니 다리가 무척 길고, 꼬리 깃은 땅에 끌리지 않을 만큼 짧습니다. 화려한 몸 색에 비해 꼬리가 너무 짧아 조금 우스꽝스럽게 보이기도 합니다. 부리 역시 땅을 뒤져 지렁이를 잡는데 맞춤형입니다.

 

팔색조가 지렁이를 잡는 모습도 재미있습니다. 땅바닥에서 통통 튀듯 이동하며 낙엽을 헤치고 지렁이를 잡으면 옆으로 던져놓습니다. 그렇게 금방 예닐곱 마리의 지렁이를 잡은 뒤 땅 위로 던져놓은 지렁이를 한꺼번에 수거합니다. 

 

■ 어린 새를 키우는 주요 먹이인 지렁이를 물고 대나무에 앉은 팔색조의 다양한 모습

 

preyt02.jpg

 

preyt03.jpg

 

preyt04.jpg

 

preyt05.jpg

 

preyt06.jpg

 

preyt07.jpg

 

preyt08.jpg

 

preyt09.jpg

 

preyt10.jpg

 

preyt11.jpg

 

 지렁이 이외의 다른 먹이를 문 팔색조의 여러 모습

 

otprey01.jpg

 

otprey02.jpg

 

otprey03.jpg

 

otprey04.jpg

 

otprey05.jpg 

 

■ 팔색조가 땅바닥에서 지렁이를 잡는 모습

 

preyb01.jpg

 

preyb02.jpg

 

preyb03.jpg

 

먹으면 나올 수밖에 없는 배설물입니다. 성체 새들의 배설물은 거의 액체 수준이지만 어린 새의 배설물은 얇은 막으로 둘러싸여있습니다. 부리로 물어 처리하기 위한 생리학적 배려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어미 새들은 먹이를 준 뒤 잠시 기다립니다. 먹이를 먹으면 먹이가 장을 자극하여 바로 배설을 유도하기 때문에 잠시 기다리는 것입니다. 먹이를 받아먹은 어린 새는 엉덩이를 살짝 둥지 밖으로 돌려 배설을 하여 어미 새들의 배설물 처리 수고를 덜어주고 도와줍니다.

 

먹이를 주고 배설물이 나오기를 기다릴 때 부모 새는 고개를 돌리고 기다릴 때가 많습니다. 이미 먹이는 다 주고 빈 부리인데 먹이를 받아먹지 못한 어린 새는 계속 먹이를 달라고 고개를 내밀며 보채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습은 팔색조뿐만 아니라 다른 새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어린 새한테 받아낸 배설물을 처리하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둥지에서 가능한 멀리 가져다 버리는 방법이며, 또 하나는 부모 새가 먹어버리는 방법입니다.

 

배설물을 먹는 것이 좀 그래 보일 수 있지만 어린 새는 아직 소화 능력이 뛰어나지 않아 먹이에 담긴 영양분이 제대로 흡수되지 않은 채로 배설되기 때문에 아직 영양 가치가 충분한 것이 이유입니다. 팔색조는 부리로 받은 배설물을 멀리 가져가 버립니다.

 

■ 배설물을 처리하는 과정

 

feces01.jpg

 

feces02.jpg

 

feces03.jpg

 

feces04.jpg

 

feces05.jpg

 

어린 새는 하루가 다르게 쑥쑥 큽니다. 부화 16일째가 되니 이제는 둥지가 좁아 보일 정도입니다.

 

그렇더라도 문제가 될 것은 없습니다. 가느다랗고 긴 나뭇가지를 엮어 돔 형태로 지은 팔색조 둥지는 역학적으로 완벽해서 마치 풍선이 부푸는 것처럼 부피만 늘어날 뿐이며 무너지는 일은 없습니다. 

 

■ 둥지에서 하루가 다르게 크는 팔색조 어린 새

 

fledging01.jpg

 

fledging02.jpg

 

fledging03.jpg

 

fledging04.jpg

 

fledging06.jpg

 

fledging07.jpg

 

부화 19일째입니다. 오랜만에 비가 없는 날입니다. 시간도 찰만큼 찼고 날씨도 좋고, 오늘이 둥지를 떠나는 날이겠다 싶은 느낌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린 새가 하나씩 하나씩 둥지를 떠납니다. 둥지에는 모두 4마리의 어린 새가 크고 있었습니다. 첫째가 둥지를 떠나고 막내까지 둥지를 떠나는 데에는 6시간 정도가 걸렸습니다.

 

걸어서 떠난 새도 있었고, 둥지 입구에서 휙 날아 둥지를 떠난 새도 있었습니다. 팔색조 어린 새는 하루 안에 모두 둥지를 떠나는 경우가 흔합니다. 부모 새가 골고루 잘 키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 둥지를 떠나는 어린 새

 

afl01.jpg

 

afl02.jpg

 

팔색조의 경우 둥지를 떠난 어린 새는 이틀이나 사흘 쯤 부모 새의 돌봄을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둥지를 떠난 어린 새를 추격하는 일은 없었으므로 둥지를 떠나면 그것으로 만남은 끝이었는데, 어린 새들이 큰 선물도 안겨줍니다. 둥지를 떠난 어린 새들이 멀리 가지 않고 움막 앞에서 이리저리 통통 튀며 자주 오가는 것입니다.

 

어린 새가 움막 근처에 있으니 부모 새도 움막 가까이 다가와 어린 새에게 먹이도 건네주며 돌봅니다. 비좁은 둥지를 벗어난 어린 새는 틈틈이 스트레칭도 하며 날개와 근육에 힘을 붙입니다. 그 날 하루는 그렇게 저물었습니다.

 

■ 둥지를 떠난 어린 새의 다양한 모습

 

baban01.jpg

 

baban02.jpg

 

baban04.jpg

 

afn01.jpg

 

afn02.jpg

 

stret01.jpg

 

stret02.jpg

 

stret03.jpg

 

stret04.jpg

 

 다음 날입니다. 하루 종일 움막을 지키고 있었지만 주변에서 소리만 들릴 뿐 어린 새의 모습을 다시 마주할 수는 없었습니다. 어린 새의 생존확률은 20%를 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확률로 말하면 어린 새 넷 중 하나만 살아남기 쉽습니다. 그 하나라도 제대로 살아남아 내년 여름 대나무 숲에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baban03.jpg» 대나무 숲의 팔색조 어린 새.

 

나무 숲에서 팔색조의 번식 일정에 동행할 수 있었던 이번 여름은 특별했습니다. 무엇보다 자연은 내가 생각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교훈을 얻은 것이 가장 특별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대나무 숲에서는 팔색조뿐만 아니라 긴꼬리딱새도 번식을 치르고 있었고, 호반새도 드나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bpfc01.JPG

 

bpfc02.jpg» 대나무 숲에서 번식을 치르고 있는 긴꼬리딱새.

 

rudkf01.jpg» 대나무 숲의 호반새.

 

글·사진 김성호/ 서남대 생명과학과 교수, <물바람숲> 필자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미국의 전쟁중독증과 난민 위기

[주간 프레시안 뷰] "미국 군사주의, 극소수만 배 불린다"
 

지난주 '프레시안 뷰'에서 저는 '난민 위기의 근원은 미국이 촉발했거나 개입한 전쟁'이라고 말했습니다. 송민순 전 외교부 장관이 지적한 것처럼 '미국은 지구상에서 전쟁을 가장 많이 한 나라'입니다. 지금도 이라크, 아프간, 시리아, 예멘 등에서 미국이 직간접적으로 개입된 전쟁이 계속되고 있고, 동유럽에서는 우크라이나 사태를 이유로 미국과 러시아가 준전시상태로 대치하고 있습니다. 동아시아에서는 중국과 미국 간의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 수천만 난민의 고통을 외면한 채 전쟁을 계속하는 걸까요? 미국의 정책담당자들은 미국의 국익을 위해, 또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라는 고상한 목표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은 은밀한 진짜 이유가 있습니다. 군산복합체를 비롯해 미국의 지배 계층에게 전쟁이 최고의 돈벌이 수단입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전쟁은 미국경제를 지탱하는 중대한 버팀목이기 때문에 중단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난민 희생자의 절반은 어린이 

미국의 전쟁경제를 얘기하기 전에 지난 2일 터키 해변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 세 살짜리 시리아 난민 에이란 쿠르디의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 ⓒRafat Alkhateeb


위의 만평은 요르단의 만평가 라파트 알카팁의 작품입니다. 자유와 안전과 인권이 보장된 대륙과 허허벌판의 대양 사이에는 철조망이 쳐있고, 세 살의 쿠르디는 아무도 돌보지 않는 대양 한가운데 주검으로 버려져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세계의 슬픈 자화상입니다. 실제로 이런 철조망은 미-멕시코 국경 사이에 설치돼 있습니다. 인간다운 삶의 기회를 찾아 미국으로 밀입국햐려는 중남미인들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유엔 통계에 따르면 분쟁 지역 사망자의 절반이 어린이라고 합니다. 1995년 유니세프는 이전 10년간 군사분쟁에 의한 어린이 사망자가 200만 명이라고 밝혔습니다. 1차 걸프전이 끝난 1991년부터 2003년까지 이라크에 대한 경제제재로 이라크에서만 50만 명의 어린이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1999년 당시 미 국무장관 매들린 올브라이트는 이라크에 대한 경제제재가 인도주의적 견지에서 정당화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민주주의를 위한 불가피한 희생'이라고 강변했습니다. 미국의 경제 제재가 이라크에 민주주의를 가져왔을까요? 절대 아닙니다. 생필품과 의약품 부족으로 어린이 50만 명을 비롯해 수많은 이라크인들이 참담한 고통 속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나아가 2003년 미국의 침공 이후 이슬람국가(IS)가 국토의 3분의 1을 점거하는 등 이라크는 무법천지가 됐습니다. 이라크 내에서 삶의 터전을 잃고 떠도는 국내 난민만 310만 명입니다.

미국과 영국 등 서유럽은 냉전이 끝난 1990년대부터 자유와 민주주의를 내세워 제3국에 대한 이른바 '인도주의적 개입'을 단행했습니다. 이로 인해 구유고연방을 비롯해 아프간, 이라크, 리비아의 정권이 무너졌고 시리아가 붕괴의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 등의 인도주의적 개입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혼란과 파괴를 불러왔습니다. 수천만 명의 전쟁 난민들이 살 길을 찾아 지구 도처를 헤매가다가 고통 속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영국 트리니티대학의 비제이 프랴사드는 "서방은 (자신들의 대외활동의 근거로) 자유와 평등을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정반대로 행동한다"고 비판합니다. 대외 개입의 대상이 된 제3세계 국가에 자유와 평등을 가져오기는커녕 혼란과 고통만을 초래한다는 것입니다. 서방이 말하는 자유와 평등은 서방의 자유, 서방의 평등일 뿐 보편적 인류의 자유와 평등은 아니라는 겁니다. 각종 자유무역협정과 IMF의 구조조정 등을 통해 자본의 이동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것이 이들의 목표입니다. 반면 국제자본의 횡포로 삶의 기반을 잃어버린 제3세계 국민이 보다 나은 삶을 찾아 서방으로 이주하는 것은 철저히 봉쇄합니다. 한마디로 자본에는 국경이 없지만 인간에게는 국경이 있는 것입니다. 또한 국제자본의 일방적 횡포에 반대하는 제3세계의 지도자들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인도주의적 개입에 의해 제거됩니다. 프라샤드는 현재 서방이 추구하는 자유는 '인간의 자유'가 아니라 '돈의 자유'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윤을 추구하는 '돈의 자유'를 위해 무력이 행사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Regime Change Refugees: On the Shores of Europe)

20세기 이후 미국의 무력행사는 돈벌이를 위한 것

1953년 이라크, 1954년 과테말라, 1973년 칠레 등에서 미 중앙정보국(CIA)이 벌인 정권전복 공작이 이를 잘 말해줍니다. 이들 나라의 민주정부는 석유메이저를 비롯한 미국 대기업의 돈벌이에 방해가 됐기 때문에 제거된 것입니다. 미국 대기업의 돈벌이를 위해 미국의 군사력과 정보기관이 동원된 것은 20세기 초 이래 미국의 전통입니다. 

이러한 전통은 우선 아메리카 대륙에서 시작됐습니다. 1900-1910년대 미국의 전설적 해병 스메들리 버틀러 장군이 멕시코, 니카라과 등 중남미 국가들에 군사 정벌을 나선 것은 미국 대기업의 돈벌이를 돕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버틀러 장군은 1935년 <전쟁은 사기다>라는 책을 통해 예전의 자신은 '자본가들을 위한 조폭'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자신의 군사행위가 미국의 안보나 자유를 지키기 위한 고매한 행동이 아니었음을 고백한 것이죠. 

1차 대전 참전의 결정적 이유도 대기업의 돈벌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당시 최고 금융재벌 J. P. 모건이 영국과 프랑스 등에 대출한 수십억 달러의 전쟁 자금을 회수하려면 이들 연합국이 승리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1934년 제랄드 나이 상원의원은 미국의 1차 참전 경위에 관한 청문회를 개최했습니다. 결론은 "은행가들(모건)이 미국의 1차 대전 참전을 불가피하게 만든 중심이자 핵심"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참전 당시 윌슨이 내세운 '민주주의를 위한 전쟁'은 사실상 거짓이라는 얘깁니다. 

이에 앞서 1933년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대통령 취임 직후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진실은 (…) 자네나 나도 알다시피 이 나라 정부는 앤드류 잭슨(1829~1837년 재임) 이래 금융계가 소유하고 있다는 걸세"라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금권에 의한 미국 정부 통제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한마디 덧붙이자면 미국의 중앙은행이라고 할 수 있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는 정부기구가 아니라 민간 은행가들이 비밀리에 만든 민간기구입니다.


2차 대전 이후 미국의 자본가들은 자신들의 활동무대를 전 세계로 확대합니다. 미국 자본의 세계적인 이윤 추구 활동을 돕기 위해 동원된 것이 핵무기를 비롯한 미국의 군사력과 CIA 등 비밀공작기관입니다. 앞에 말한 것처럼 민족주의를 내세워 미국 대기업의 이윤 추구를 방해하는 이란, 칠레 지도자 등은 비밀공작으로 축출하고, 소련을 비롯한 다른 강대국들의 반대는 압도적 핵무기의 우세로 잠재운 것입니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1964~75년)의 패배로 미 군사력의 신뢰도에 중대한 균열이 생깁니다.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가진 미국이 동남아의 가난한 나라 베트남을 굴복시키지 못함으로써 군사력을 앞세운 미국 자본의 이윤 추구가 어렵게 된 것입니다.

베트남 전쟁 이후 미국의 대리전 전략

이에 대한 미국의 대응은 군사주의의 포기가 아니었습니다. 중국과 국교를 정상화하고 소련과 데탕트에 나서는 한편, 대리인을 앞세운 은밀한 전쟁을 추진한 것입니다. 우선 닉슨은 1972년부터 이란에 미국의 신무기를 무제한 공급합니다. 베트남 전쟁의 패배로 미 지상군의 해외 파병이 불가능해졌고, 그동안 중동의 안보질서를 유지해왔던 영국이 1968년 이 지역에서 철수함으로써 안보 공백이 생긴 데 대한 대응이었습니다. 미국 신무기를 원하는 대로 제공할 테니 이란이 미국을 대신해 중동의 경찰 노릇을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아시아의 안보는 아시아 국가가' '중동의 안보는 중동 국가가' 맡으라는 닉슨 독트린의 적용이었습니다. 또 다른 이유도 있었습니다. 베트남 전쟁이 종결되면서 그동안 전쟁 특수를 누렸던 미국 방위산업체들이 도산 위기에 몰린 것이었습니다. 

닉슨의 결정으로 미 방위산업의 상업화가 빠르게 진전됩니다. 1960년대까지 미국의 대외무기 이전은 퇴역 단계의 구식 무기를 정부 차원에서 무상원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란에 신형무기를 판매하기 시작하면서 미 방위산업체를 노다지를 만나게 됐습니다. 1971년 14억 달러에 불과했던 미국의 무기 수출은 1975년 160억 달러로 11배 이상 늘어납니다. 이 가운데 이란이 80억 달러, 사우디가 60억 달러를 차지합니다. 전체 수출의 87.5%입니다. 1960년대까지 이렇다 할 무기가 없었던 중동 지역은 이후 미국제 첨단무기의 핵심 구매자가 됩니다. 주목할 것은 1971~75년간 한국의 미제 무기 수입은 200배로 폭증했다는 점입니다.

중동 지역에 미제 무기가 범람하게 되는 또 다른 요인이 발생합니다. 1973년 10월의 1차 석유 위기입니다. 석유가격이 일거에 4배나 뛰어오르자 미국도 막대한 석유 대금 결제로 심각한 무역적자에 직면하게 됩니다. 미국은 사우디와 비밀 협정을 맺습니다. 앞으로 모든 석유대금 결제는 달러로만 한다, 사우디가 벌어들인 석유 수입금을 미국 금융기관에 예치한다, 그리고 미제 무기를 대량 구입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앞의 두 약속은 달러의 국제결제통화 기능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고, 뒤는 미국의 석유 수입에 따른 무역적자를 메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리하여 1970년대 후반부터 사우디는 미제 무기의 최대 구입국이 됩니다. 사우디는 석유 대금을 미국에 제공하고 미국은 사우디의 안보를 보장하는 형식입니다. 2011년 미국의 무기 수출액은 663억 달러로(러시아는 48억 달러) 전체 무기 거래의 79%를 차지했는데 이 가운데 사우디의 수입액은 절반이 넘는 334억 달러입니다. 중동 지역에 미제 신무기가 넘쳐나게 된 것이죠. 미국의 무기산업은 미국 경제의 매우 중요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겁니다. 

무슬림 용병을 앞세운 대소련 아프간 전쟁

한편 미국은 1978년부터 아프간의 무슬림 전사들을 앞세워 소련의 멸망을 재촉하기 위한 전쟁을 벌입니다. 1979년 말 아프간의 안정화를 위해 소련군이 군사 개입을 단행하자 당시 브레진스키 안보보좌관은 카터 대통령에게 "드디어 소련에게 '그들의 베트남'을 선사할 기회가 왔습니다"고 말했답니다. 10년 간 30억 달러의 자금이 투입된 CIA 역사상 최대 비밀 공작으로 결국 소련을 무릎을 끓고 맙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오사마 빈 라덴, 아부바크르 알 바그다디(이슬람국가 지도자) 등 10만 명 이상의 무슬림 전사들이 탄생했습니다. 미국의 자금과 무기로 무장한 이들은 오늘날 중동지역의 최대 골칫거리가 됐습니다. 

또한 미국은 이란 이라크 전쟁(1980~1988년) 당시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을 적극 지원함으로써 중동을 전쟁의 불바다로 만들었습니다. 당시 레이건 정부는 무려 55억 달러의 정부 신용보증으로 이라크의 무기 구매를 돕는 한편 함께 화학무기 기술 이전 등 이라크의 전쟁을 지원했습니다. 그리고 1990년 9월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하자 1차 걸프전을 일으켰고, 2003년에 이어 지난해부터 3차 걸프 전쟁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1차 아프간 전쟁에서 3차 걸프 전쟁에 이르기까지 중동 전쟁의 과정을 보면 모두 미국이 개입돼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전쟁의 민영화-전쟁 자체가 돈벌이가 되다

미국 드레이크 대학교의 경제학 교수인 이스마엘 호세인 자데는 <미 군사주의의 경제학>(2007년)이란 책을 통해 미국의 군사주의가 탈냉전(1990년)을 경계로 중대한 변화를 겪었다고 지적합니다. 이전의 군사주의는 미국 대기업의 해외팽창을 돕기 위한 것으로 그 경제적 과실이 일부나마 미국 국민들에게도 돌아간 반면 냉전 이후에는 전쟁 자체를 위한 전쟁이 됨으로써 방위산업 등 전쟁산업에 직접 연관된 극소수 엘리트만 이익을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부시 정부에서 국방부 장관을 지낸 네오콘 딕 체니가 전쟁의 민영화를 적극 추진한 탓입니다. 체니는 1992년 말 미 육군과 핼리버튼의 자회사 브라운루트 간에 5년간의 군대 업무 외주를 성사시키면서 전쟁 민영화의 길을 열었습니다. 이후 체니는 세계 최대의 석유개발기업인 핼리버튼의 회장을 맡게 됩니다. 당시의 군대 외주는 병참 등에 국한된 것인 반면 클린턴 정부 때인 1994년 보스니아 내전부터는 미국 퇴역군인으로 구성된 MPRI란 기업이 크로아티아군의 훈련 및 전투 지휘를 맡습니다. 이 전투용역에 투입된 금액은 자그마치 4억 달러나 됩니다. 이후 미국의 다인콥스, SAIC, 블랙워터 등 미국의 민간 용병 집단은 코소보전쟁(1999년), 아프간전쟁 및 2차 걸프전 등에서 맹활약을 펼칩니다. 2003년 이라크 침공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럼스펠드 역시 군대 외주화의 신봉자였는데, 그의 임기 말인 2006년 이라크에는 미군 병사와 맞먹는 10만명의 민간 용병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 민간 용병은 전투를 직접 수행하기보다는 요인 및 주요 시설 경호, 외국 군대의 훈련 및 지휘 등을 맡고 있습니다. 한 추계에 따르면 2007년 현재 용병산업의 연 매출 규모는 1000억 달러에 달합니다.

미국 정보 관련 예산의 70%가 외주화

전쟁뿐만이 아닙니다. CIA 등 정보 수집도 외주화되고 있습니다. 탐사전문기자인 팀 셔록이 2008년에 낸 <청부 스파이(Spies for Hire)>에 따르면 미 연방정부의 연간 정보 관련 예산 6백억 달러 줄 70%가 외주화돼 있다고 합니다. 그 대표적 수혜기업이 부즈 알렌 해밀턴으로 이 기업의 일감 중 99%가 정부 용역입니다. 부즈 알렌 해밀튼은 유명한 내부고발자 에드워드 스노든이 일하던 곳이죠. 더 놀라운 것은 부즈 알렌 해밀튼이 CIA 용역을 수주한 것은 알렌 덜레스가 국장을 맡은 1953년부터였다는 것, 그리고 이 회사의 소유주는 아버지 부시, 영국 존 메이저 총리 등 미영의 고위 관리들이 주주로 있는 카알라일이라는 점입니다. 

또한 아버지 부시 정부에서 국가안보국(NSA) 국장을 지낸 마이크 매코넬이란 인물은 이후 클린턴 정부 때 부즈 알렌의 임원으로 옮겼다가 아들 부시 때는 미 정보기관의 총수인 DNI(Director of National intelligence)를 역임했고, 그 다음에는 부즈 알렌 부사장으로 옮겼습니다. 이렇듯 한 인물이 정부와 기업 사이를 오가면서 미국의 전쟁정책을 요리하고 그 과정에서 이윤을 챙긴다는 것이죠. 이렇듯 미국의 정관계와 기업에는 전쟁을 통해 이득을 챙기는 세력들이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 재정적자의 대부분은 전쟁 부채

전쟁과 금융에는 한 가지 중요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익은 사유화되고 위험은 사회화된다는 것입니다. 즉 전쟁의 이익은 정치가와 고위 지휘관, 그리고 방위산업체들이 독차지 하는 반면 그 피해는 군인들의 목숨과 국민들의 혈세로 부담하는 것이죠. 금융 역시 이익은 소수 주주들이 독점하는 반면 위기가 닥치면 국민들의 세금으로 때웁니다.

미국의 과학자 윌리엄 에드스트롬이란 분이 최근 <카운터펀치>에 미국의 정부 부채와 전쟁 및 금융 간의 관계에 관한 글을 발표했습니다. 그의 결론은 2차 대전 이후 미국이 전쟁을 일삼지 않았다면 정부 부채는 거의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미국 정부의 공식 통계에 따르면 미 연방정부의 GDP는 18조 달러, 부채는 17.52조 달러입니다. 내년도 우리 정부 부채가 645조원에 GDP의 40%를 돌파한다고 하는데, 우리 형편은 미국보다 훨씬 나은 편입니다. 미국은 부채 비율이 100%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에드스트롬은 미 정부의 통계가 부채는 실제보다 적게, GDP는 높게 계산돼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에 따르면 2014년 미국의 실제 GDP는 14.77조 달러, 연방정부의 부채는 23.1조 달러입니다. 부채 규모가 커진 것은 정부신탁기금으로부터의 차입금, 공무원 연금의 부족분, 헬스케어 비용 등을 포함시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23.1조 달러의 부채 중 군사/정보/전쟁 비용에 의한 빚이 22.5조 달러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연방정부 부채의 대부분이 전쟁 등 군사비용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지난 1996년 브루킹스연구소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당시 연방정부의 부채는 5.5조 달러였습니다. 그런데 1940년 맨해튼 프로젝트가 시작된 이래 1996년까지 핵무기의 개발, 생산, 배치, 유지에 든 비용이 5.5조 달러였다고 합니다. 즉 핵무기 관련 비용 전체가 정부 부채가 된 것입니다. 이후 20년 간 미국이 군사/정보/전쟁 비용으로 쓴 돈은 연간 8500억 달러로 지난 20년간 17조 달러를 썼습니다. 그러니까 '5.5조+17조=22.5조 달러'라는 계산이 나오는 겁니다.

이 막대한 부채는 결국이 미국 국민들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갚아야 합니다. 물론 지금은 기축통화국이라는 점을 이용해 달러를 찍어내는 것으로(2008년 10월부터 4.5조 달러 발행) 적자 위기를 모면하고 있지만 중국 위앤화 등에 의해 달러 헤게모니가 무너질 경우 그 후과는 감당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결국 미국의 전쟁중독증이 미국 경제를 파탄으로 몰아넣고 있다는 얘깁니다. 그러나 그동안 전쟁으로 경제를 유지해온 미국이 전쟁중독증에서 벗어날 가능성은 아직 보이지 않습니다. 전쟁으로 인한 난민 위기도 쉽게 해결될 것 같지 않습니다.
(☞Wall Street and the Military are Draining Americans High and Dry)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
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미제국의 두기 둥-전쟁과 기독교-1

 
 
미국인 스스로가 선언한 제국주
 
최천택. 김상구 공저 
기사입력: 2015/09/11 [09:03]  최종편집: ⓒ 자주시보
 
 

 

▲ 최천택 교수와 김상구 선생이 공동으로 쓴 미국제국주의 역사를 폭로한 제국의 두기둥-전쟁과 기독교의 책표지.     © 자주시보 이정섭 기자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로 살쪄 온 미국의 본질을 파헤친 '미제국의 두기둥-전쟁과 기독교'의 공동 저자인 전 한신대 최천택교수와 역사학자 김상구 선생이 자주시보에 연제를 동의했다.

 

독자들의 미국연구와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라 믿으며, 연재를 위해 소중한 원고를 보내주신 최천택 교수님과 김상구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편집자주)

 

미국인 스스로가 선언한 제국주의

 

미국의 형성 과정은 역사 이래 인류가 건설한 수많은 국가들과 그 형태를 달리하는 특수한 국가다. 서구적 비전으로 바라볼 때,  슈펭글러, 소로킨, 토인비 등 대개의 학자들은  서유럽과 미국을 동일한 문명권으로 상정한다.

 

하지만 서유럽 국가들이 혈연과 지연을 기반으로 형성된 전통적 개념의 국가인데 반해 미국은 먼저 국가와 이념을 설계해놓고 그런 뒤에 받아들인 여러 인종의 이민을 통해 건설된 나라다.


19세기 미국의 애국주의 역사학자 뱅크로프트는 미국을 전 세계 문명을 융합한 결정판으로 미화하며 미국의 건국 과정을 "이탈리아의 콜럼버스와 스페인 여왕 이사벨라가 합작한 신대륙 탐험과 발견, 프랑스가 지원한 독립전쟁, 인도에 기원을 둔 영어, 팔레스타인에 그 뿌리를 둔 기독교, 그리스 문명에서 기원한 문화, 로마에서 기원한 법, 영국으로부터 전수받은 대의 제도,  네덜란드 연방으로부터 받아들인 연방제 원리와 사상적 관용의 정신"을 하나로 녹여 인류의 보편적 정치 체제를 가진 나라로 묘사했다.

 

그러나 구대륙의 타락으로부터 탈출하여 새로운 도덕적 국가로 태어났다고 치장된 미국이, 실제로는 끊임없이 지속된 전쟁을 바탕으로 지속된 역사라는 것을 알아야 된다.

 

미국의 대외정책은 '힘의 정치'와 '도덕주의적 외피'라는 상반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두 가지 모순된 외교정책의 밑바탕에는 기독교의 소명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 즉 전쟁을 포함한 미국의 모든 외교적 행위는 도덕적인 것이며,

 

신의 섭리에 부합하는 행위이지만, 미국의 기준에서 벗어나는 모든 국제 정치 행위는 반도덕적인 것이며, 신의 섭리에 어긋나는 것이 된다.

 

그런 까닭에 미국은 스스로를 "구세주의 나라(Redeemer Nation), 세계의 십자군"으로 표현한다. 어쨌든 미국은 오늘날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 불리며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군대를 가졌으며, 세계 자본주의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나라다.

 

이러한 미국의 성장 동력은 전쟁으로 획득한 독점적 지위와 방대한 원료자원 그리고 노예무역으로 상징되는 노동력의 확보였다.

 

미국은 건국이후 전쟁을 멈추지 않음으로써 자국의 산업을 끊임없이 성장시켜왔다. 미국이 지금까지 수행한 전쟁은 300여 차례에 이른다.

 

1년에 평균 한 차례 이상의 전쟁을 치루고 있는 미국 전쟁의 역사는, 1만년 역사를 가진 중국의 전쟁 횟수에 비견될 정도다.

 

이 같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팽창정책은 이미 전 세계의 눈총과 질타를 받고 있으며 기정화된 사실이다.

 

2003년 3월 이라크 전쟁이 시작되고 열흘 정도가 지날 무렵 알자지라 방송은 럼스펠드를 인터뷰하며 미국이 “제국 건설(empire building)을 하고 있는가?”라고 묻자 럼스펠드는 “우리는 제국을 추구하지 않는다. 우리는 제국적이지 않다. 그리고 과거에도 그런 적이 없다”고 화를 내며 말했다.

 

럼스펠드는 왜 화를 냈을까? 과연 미국은 제국이 아닐까? 그리고 미국은 정말 제국을 추구한 과거가 없었을까? 우리의 오해는 ‘고립주의’라고 배운 “먼로 독트린”이 미국 외교의 출발선이라고 알고 있는 미국의 외교에 대한 잘못된 지식으로부터 시작된다.

 

엄밀히 말해 먼로독트린은 미국의 고립주의가 아니라 유럽에 대해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배타적 권리가 미국에 있음을 주장한 선언이다.

 

즉, 먼로 독트린은 미국이 국제정치에 참가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독점적 권리가 미국에 있음을 유럽에 알린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오랫동안 스페인의 식민지로 있던 라틴 아메리카의 독립을 지원하기 위한 미국의 정책으로 오해해 왔다.

 

럼스펠드가 보인 과민한 반응의 이유와 우리의 잘못된 역사 인식을 바로 잡기 위해선, 미국 인디아나 주 상원의원(공화당) 앨버트 비버리지(Albert Jeremiah Beveridge, 1862–1927)가 1900년 미국 상원에서 행한 “미 제국을 지지하며(In Support of an American Empire)”라는 제목의 연설문을 소개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본다.

 

이 연설은 “MR. PRESIDENT, the times call for candor. The Philippines are ours forever,…"라고 시작되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필리핀은 영원히 우리 것이다.…게다가 필리핀 건너편에는 중국이라는 무한한 시장이 있다.…태평양은 이제 우리의 바다다.”“태평양을 제압하는 자가 세계를 제압할 것이다.…그 자리는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미국이 차지할 것이다.”

 

“우리는 세계를 지배할 인종이다.…우리는 세계의 문명화를 담당하라는 사명을 신으로부터 위탁받은 특별한 인종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역할을 방기하지 않을 것이다.…신은 우리를 선택하셨다.…야만스럽고 망령든 사람들을 통치하기 위해 신은 우리를 통치의 달인으로 만드셨다.”

 

비버리지가 자신의 조국 미국을 제국으로 선언하고, 제국의 영위를 위해 제안한 몇 가지 사안 즉 필리핀 식민지 문제, 중국 시장 개척, 태평양 블록화 등은 당시 미국 대통령 맥킨리(William McKinley, 1843-1901)의 주요 정책이었을 뿐 아니라

 

후임 대통령 T.루즈벨트를 거쳐 21세기 현재까지도 미국 외교의 근간이 되고 있는 정책들이다. 건국 초기부터 시작된 백인·기독교 선민주의라는 미신도 이 연설문에 포함되어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마약사위’ 둔 김무성의 기막힌 반전

 
 
 
‘정치 비리 드라마에서 막장 애정 드라마로 바뀌다’
 
임병도 | 2015-09-11 09:42:48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9월 10일 동아일보는 ‘재산가의 아들이 2년 반 동안 코카인 등 마약류를 15차례 투약한 혐의로 구속됐으나 법원이 집행유예를 선고하고 검찰은 항소하지 않아 ‘봐주기’ 논란이 일고 있다’며 ‘마약 상습 투약 유력 정치인 인척’ 관련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동아일보는 정치인의 이름이나 자산가의 아들을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미디어오늘은 ‘상습 마약 투약자는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사위’라며 실명을 공개했습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마약 상습 투약자가 자신의 사위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국회에서 긴급 간담회를 열어, 자신은 판결을 나중에 알았고, 파혼을 요구했으나 딸의 간곡한 요청과 사위의 뉘우침 때문에 결혼을 허락했다고 밝혔습니다.


‘누가 봐도 봐주기, 대권이 위험하다’

마약 상습 투약자로 집행유예를 받은 사람은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의 차녀 김현경씨의 남편 이상균씨입니다. 이상균씨는 충북 지역 출신의 재력가인 신라개발 이준용 회장의 아들입니다.

보통 마약 사범에 대한 양형 기준은 4년~9년 6개월입니다. 그러나 이상균씨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으로 풀려났습니다. 법원이 '이번에 한해 피고인에게 개전의 기회를 준다'는 판결 자체는 누가 봐도 명백한 봐주기입니다.

대권주자로 꼽히는 여당 대표의 사위, 거액 재력가의 아들을 향한 불공정한 판결은 이미 논란의 소지가 충분했습니다. 특히 ‘뽕쟁’이라며 마약 관련 범죄자들을 싫어하는 한국인의 정서는 대권을 향해 가는 김무성 대표의 발목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그래, 박지만이 있었잖아’

김무성 대표의 사위가 마약을 상습 투약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도대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참 고민이 됐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에는 이런 유사한 사례가 있었습니다. 바로 박근혜 대통령의 동생이자 박정희의 아들인 박지만씨입니다.

박지만씨는 1989년부터 상습적으로 히로뽕을 투약했습니다. 사창가를 돌며 윤락녀와 함께 히로뽕을 투약했던 사람이 만약 연예인이었으면 사회적으로 매장됐을 것입니다. 그러나 박지만씨는 불구속됐습니다. 이유는 전직 대통령의 아들이자 부모가 모두 총을 맞고 사망했다는 동정 여론 때문이었습니다.

박지만씨가 처음 히로뽕 상습 투약으로 불구속됐던 나이가 31살이었습니다. 20대 초반도 아니었지만,  대통령의 아들이자 부모가 숨진 불쌍한 아이로 법의 처벌을 피했습니다. 나이 든 사람들은 일반인이나 연예인이었으면 쌍욕을 해댔을 박지만씨의 히로뽕 상습 투약에 관대했고, 오히려 그를 응원하기도 했습니다.


‘정치 비리 드라마에서 막장 애정 드라마로 바뀌다’

김무성 대표가 사위의 마약 상습 투약 이슈를 피하는 방법은 박지만씨의 경우처럼 동정 여론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김무성 대표는 사위가 아닌 딸을 내세웠습니다.

김무성 대표는 딸이 32년간 한 번도 속을 썩인 적 없었다고 말하며 딸의 선택에 자신도 어쩔 수가 없었다고 밝혔습니다. 김무성 대표가 긴급 간담회에서 말한 얘기는 바로 뉴스 속보로 종편에 도배됐습니다.

도대체 김무성 대표의 딸이 아버지를 속 썩인 적이 없다는 말이 어떻게 ‘뉴스 속보’이자 ‘긴급’이 될 수 있는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언론은 마약을 투약한 사위에 대한 처벌보다 딸과 아버지의 관계에 포커스를 맞췄습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원했던 그림은 ‘딸이 울면서 결혼을 원했고,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없어, 마약 투약 사실을 알고도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허락했다’입니다.

한국의 언론과 여론은 ‘자식을 이길 수 없었던 불쌍한 아빠’로 김무성 대표를 포장할 것입니다. 대한민국 권력의 최상층에 있는 대권주자의 딸이 유명 클럽이나 지방 리조트에서 코카인을 투약했던 방탕한 부잣집 아들을 사랑한 순정파 교수로 바뀌었습니다.

김무성 대표의 사위 이상균씨의 아버지 이준용 신라개발 회장은 2006년에 10억 뇌물 사건으로 구속됐던 인물입니다. 뇌물과 히로뽕, 정치인. 부당한 판결이 연루된 정치 비리 법정 드라마가 갑자기 막장 애정 드라마로 쪽대본이 바뀐 셈입니다.


[진실의길. 기고 글&기사제보 dolce42@naver.com]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899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