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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풍자 코미디의 ‘암흑시대’ 노무현 시절이 그립다

 
 
 
장관은 기본에 대통령까지 정치 풍자 소재였던 참여정부 시절
 
임병도 | 2015-07-02 10:39:45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KBS<개그콘서트> ‘민상토론’이 받은 ‘행정지도 제재’가 불합리하다는 주장이 국회에서 제기됐습니다. 7월 1일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의 회의가 열렸습니다. 이날 새정치민주연합 유승희 의원은 방송통신심의의원회 박효종 위원장에게 KBS<개그콘서트> ‘민상토론’이 제재를 받은 이유를 질의했습니다.
 
지난 6월 24일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이하 방심위) ‘방송심의소위원회’는 개그콘서트에 대해 방송심의에 관한 규정 제27조(품위유지) 5호를 적용 ‘의견제시’를 결정한 바 있습니다. 6월 14일 방송된 ‘민상토론’의 주제는 메르스 관련 이야기였습니다.


‘개그콘서트 민상토론은 왜 제재를 받았나?’
 
코미디의 단골 소재 중 하나가 ‘정치풍자’입니다. 시기에 적절한 정치 사건과 인물에 대한 풍자는 시청자의 관심과 호응이 높습니다. 메르스를 개그 소재로 삼았다고 왜 ‘민상토론’이 제재를 받았을까요?

<개그콘서트> ‘민상토론’이 행정지도를 받은 것은 ‘시청자에게 불쾌감을 줄 수도 있다’ 지적사항 때문입니다. 유승희 의원이 '시청자에게 불쾌감을 준 이유'가 무엇인지 묻자, 박효종 방심위 위원장은 ‘특정인에 대해서 혹시 인격권을 과도하게 침해하는 이유’라고 답했습니다.1
 
유승희 의원이 ‘어떤 특정인에 대한 인격침해입니까?’라고 묻자, 박 위원장은 ‘인격침해의 우려가 있다’는 답변만 했지, 특정인을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6월 14일 방송된 ‘민상토론’에서 개그 소재로 등장한 인물 총 3명입니다. 마스크를 착용한 사진 속 문형표 복지부 장관과 티셔츠에 인쇄된 박원순 서울시장과 박근혜 대통령입니다.

세 명 중 누가 과도하게 인격권을 침해받았는지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방심위 함귀용 심의위원도2 ‘특정인의 인격과 관련한 부적절한 내용이므로 행정지도를 해야 한다’고만 주장했지, 정확히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3

‘문형표 장관’, ‘박원순 서울시장’, ‘박근혜 대통령’에게 과도하게 인격권을 침해 받았는지를 물어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이제는 정치 풍자가 어렵다는 개그맨’

미래창조방과학방송통신위원회에서(이하 미방위) <개그콘서트> ‘민상토론’이 받은 ‘제재’를 문제 삼은 이유가 있습니다. 2014년 10월 22일 미방위 소속 의원들은 KBS 개그콘서트 리허설 현장을 찾아 개그맨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개그콘서트의 서열 1위 개그맨인 김준호씨는 미방위 소속 국회의원들에게 “몇 년 전에는 정치나 사회적 풍자를 신랄하게 했었는데 (이제는) 좀 어렵다….”는 정치 풍자 개그의 어려움을 말했습니다.4
 
개그맨 김준호씨의 얘기에 미방위 국회의원들은 “더 세게, 많이, 더 신랄하게 해도 된다”고 했습니다. 새누리당 홍문종 의원은 “국회의원이 세비를 많이 받는다는 내용도 많던데 의원들에게도 출연료를 좀 줘야하는 거 아니냐”는 농담까지도 했습니다.

의원들이 ‘더 세게, 더 신랄하게 해도 된다’고 말했지만, 개그맨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결국, 역시나 특정인을 풍자했더니 곧바로 ‘행정지도’라는 ‘제재’를 받았습니다.


‘장관은 기본에 대통령까지 정치 풍자 소재였던 참여정부 시절’
 
정치 풍자 코미디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코미디언 김형곤씨의 KBS ‘유머 1번지’의 ‘회장님 우리 회장님’코너를 기억하는 시청자가 많습니다. 그러나 다양한 정치 풍자 코너가 등장한 전성기는 참여정부 시절입니다.

참여정부 시절, KBS, MBC, SBS 방송 3사의 코미디 프로그램마다 정치 풍자 코너는 빠지지 않았습니다. KBS 2TV <폭소클럽2>의 ‘응급시사’, ‘서민이를 살려주세요’, ‘뉴스야 놀자’와 MBC <코미디 하우스> ‘10분 토론’,<개그야> ‘뽀뽀뽀 유치원 회장선거’와 SBS 버라이어티 쇼 <라인업>까지 TV에서 손쉽게 정치 풍자 코미디를 볼 수 있었습니다.5
 
코미디에서 정치 풍자 코너가 대거 등장한 이유에 대해 KBS 김웅래 제작위원은 “참여정부가 등장하면서 코미디 소재의 제한이 많이 풀린 게 원인”이었고, “제작진의 체감지수가 높아 어느 시기보다 코미디가 꽃 피울 환경”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6

참여정부는 언론의 왜곡에 대해서는 강하게 반박했지만, 코미디 프로에 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코미디 프로에는 강금실 법무장관이나 유시민 의원 등은 물론이고 박정희나 노무현 당시 대통령까지도 코미디 소재로 등장했었습니다.

시청자들도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보여주는 정치인의 성대모사나 분장에 대해 거부감이 없었고, 단순한 코미디라는 인식이 강했습니다. 오히려 재밌다는 반응이 높아 우후죽순 정치 풍자 코너가 생겼습니다.

정치 풍자 코미디의 전성기는 참여정부가 끝나면서 함께 막을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MB정권 출범 한 달 만에 전, 현직 대통령을 풍자했던 <폭소클럽 2>’뉴스야 놀자’, ‘응급시사’가 폐지됐고, OBS <시사코미디포커스> ‘명반장과 어르신들’ 코너도 방송 한 달만에 종영됐습니다.7
 
외압이 아닌 시청률 저조라고 PD들은 말했지만, 개그맨들은 프로그램이 폐지된 시점이 ‘고소영, 강부자 내각과 한반도 대운하 논란이 한창일 때였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8

정치 풍자 코미디로 인기를 누렸던 코미디언 김형곤씨는 2006년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그 암울했던 5공 시절에도 시사 풍자 코미디가 있었는데. 참여정부 들어와서는 시사코미디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고, 개인기에만 의존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김형곤씨가 보기에는 성대모사 등의 개인기 위주의 정치 풍자 코미디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 암울했던 5공 시절에도 있었던 정치 풍자 코미디가 2015년에는 제재를 받으며 점차 두려움에 떨고 있는 현실을 본다면 과연 그는 어떤 말을 할까요?

민상토론이 받은 제재가 별거 아닌 행정지도라고 하지만 개그맨들에게는 더 큰 압박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대한민국 코미디史에 ‘정치 풍자 코미디의 암흑시대’로 기록될 사건입니다.


1. 국회영상회의록 제334회 국회 (임시회) 제3차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 2015년 7월 1일
http://w3.assembly.go.kr/jsp/vod/vod.do?cmd=vod&mc=352&ct1=19&ct2=334&ct3=03#
2. 새누리당 추천 인사
3. ‘민상토론’ 문형표 비판이 불쾌감 줬다고? 미디어오늘 2015년 6월 24일.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3768
4. “풍자 어렵다”는 김준호, “더 세게 하라”는 국회의원들? 오마이스타 2014년 10월 23일.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046309 
5. 시사코미디 어제와 오늘. PD저널 2007년 12월 4일.
http://www.pd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12225 
6. 코미디 프로 제2전성기 활짝. 중앙일보 2005년 5월 21일.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42028 
7. “정치 풍자가 안 웃겨? 판 벌여야 웃기지!”시사IN 2008년 11월 24일.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3337 
8. 개그맨 노정렬, 시사IN 인터뷰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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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호선 "새누리는 '조폭 정당', 보수마저 등 돌려"

 
[인터뷰] "새정치연합과 통합 불가, 연대는 가능"
 
 
2012년 '통합진보당 사태' 이후 진보 정치 세력에 관심을 갖고 추적해 온 독자가 얼마나 있을까? 

당시 '통합진보당'은 자주파(NL)가 주축이었던 구 민주노동당과, 유시민·천호선 등이 소속된 구 국민참여당, 평등파(PD)에 속한 심상정·노회찬·조승수 등 구 진보신당 탈당파가 함께 만든 정당이었다. 그러나 19대 총선 후 비례대표 부정 경선 파문을 겪었고, 중앙위원회 폭력 사태까지 발생한 끝에 분당에 이르렀다.

분당 결과 두 개의 원내 진보 정당이 존재하게 됐다. 한 갈래는 NL 내의 다수파였던 경기동부연합과 부산울산경남연합이 통합진보당이라는 이름을 계속 쓰면서 해온 당이다. 이 정당은 지난해 법무부와 헌법재판소에 의해 해산됐다. 이는 헌정 사상 초유의 일이었고, 민주주의 위축 우려가 일었다.

다른 한 갈래가 지금의 정의당이다. 조직세에서 이들은 구 '통합진보당'보다 소수파였다. 해산 당시 통합진보당 당원 수는 10만, 현재 정의당 당원 수는 현재 2만 명가량이다. 그러나 NL의 한 갈래인 구 인천연합과 국민참여당계, 진보신당계 등 3개 정파가 한 집 살림을 하면서 오히려 '통합진보당'보다 '통합'이라는 이름에 걸맞다는 평을 받았다. 

2013년 7월 당시 진보정의당은 당명을 정의당으로 바꾸고 천호선 대표 체제를 출범시켰다. 그 후 2년, 이들은 어떤 세월을 보냈을까?

2년 동안 당 대표를 맡았다가 이제 퇴임을 앞둔 천호선 대표를 지난달 29일 당사에서 만났다. 천 대표는 지난 2년간 이룬 성과로 3가지를 들었다. 이념과 정책 노선의 현대화, 당 문화의 개방화와 대중화, 당 운영의 민주화였다. 천 대표는 "'운동권 언어'는 사라졌다"며 "정파 중심 운영을 벗어났다"고 자부했다. 그는 이같은 성과를 '2기 진보 정치'라는 말로 표현했다. 

정의당이 노동당, 국민모임, 노동정치연대와 '진보 4자 통합'을 추진하는 것도 '더 큰 진보 정당'을 통해 2기 진보 정치를 해보겠다는 구상과 연결된다고 그는 설명했다. 인터뷰 바로 전날인 6월 28일 노동당 당대회에서 통합에 부정적 결론이 난 데 대해 천 대표는 "그러나 통합이라는 방향은 옳다"며 "(노동당을 제외한) 3자 통합이 되든 다른 어떤 형식이 되든 그 문제는 고민해야 한다"고 계속 추진해 나갈 뜻을 밝혔다. 

단 그는 노동당 내 일부 그룹을 의식한 듯 "'쟤들은 개량이다', '신자유주의다' 이렇게 전형적으로 우리를 비난하는 분들은 참 같이 하기 쉽지 않다"며 볼멘소리를 하기도 했다. 

천 대표는 기존의 진보 대중 조직을 당 지지 세력으로 조직화하는데 실패했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정의당이 노동을 대변하려 하고 인내심을 가지면 민주노총의 지지를 회복할 수 있다"면서도 "배타적 지지가 반드시 바람직하다고 보지는 않는다"고 지적했다. 또 그는 "기존의 진보적 대중 단체들에서도 새로운 세대가 새로운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며 "너무 진영 논리에 갇혀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정의당의 장점에 대해 "다른 당처럼 무자비한 대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념 대결이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했다. 마침 새누리당에서 유승민 원내대표 거취 문제가, 새정치민주연합에서는 사무총장 인선 문제가 불거진 와중이었다. 천 대표는 "선배 세대에 이어 새로운 세대가 등장하고 있고, 당원들의 공통 분모가 확대되고 있다. 하나의 꿈을 가진 하나의 정당이 돼가고 있다"며 정의당에 관심을 당부했다. 다음은 천 대표와의 인터뷰 전문.
 

▲ 천호선 정의당 대표. ⓒ프레시안(최형락)


"노동당 총투표 부결됐지만, 통합은 옳은 방향"

프레시안 : 정치권에 이슈가 많은 때다. 민심을 어떻게 보고 있나?

천호선 : 국민들이 제1당과 제2당의 모습을 보고, 정치에 대해 거의 포기하고 있지 않을까 한다.

새누리당의 '유승민 원내대표 찍어내기'는 (유 원내대표에게) 정치를 그만두라는 수준의 압력이다. 새누리당이 그래도 그간 자기 변화도 해왔고, 특히 유 원내대표의 교섭단체대표연설이 인상적이어서 보수·진보를 뛰어넘어 함께 경쟁하고 협력할 수 있는 정치를 기대했다. 유 원내대표에 대해 범 진보 진영이 더 놀라고 반가워하기도 했다. 그런데 새누리당이 거의 조폭 정당으로 전락하고 있다. 새누리당을 지지하는 분들도 상당히 회의적이다.

새정치민주연합도 가만히 보면 10년째 혁신에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3김 시대에 인물 중심 지역 구도가 (정치권에) 생긴 것이 불가피한 면이 있었다면, 그 이후부터는 정당이 자기 변화를 해야 했다. 지역 구도를 뛰어넘어 다양한 세대가 참여하게 하고, 아래로부터의 정당 운영이 되도록 혁신해야 했는데 그걸 못 하고 있다.

사실 문재인 대표가 선출되면서 저도 기대를 가졌는데, 4.29 재보선 패배 책임을 문 대표에게 묻는 것은 너무 과도하다고 보지만 그에 대한 문 대표의 대응도 정면 돌파가 아니었다. 혁신의 큰 방향은 너무나 분명하고, 혁신은 당 대표가 주도해서 해야 하는데 혁신위를 따로 만들었다. '외주 혁신'이다. 또 혁신위는 혁신안을 만드는 것이고, 실행은 문 대표가 해야 하는데 (그 당이) 대표에게 그런 권한을 인정하고 있는지 회의적이다. 물론 저는 새정치민주연합 혁신을 기대한다. 제1야당이 잘 돼야 야권 전체가 활성화되니까. 그런데 어려워 보인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민주주의는 국민 생각만큼만 가는 것이라고 했다. 저는 거기에 이 말을 꼭 덧붙인다. 국민의 정치 의식 수준은 그 나라 정당 수준에 영향을 받는다. 즉, 정당의 수준이 그 나라 국민의 정치 의식 수준을 결정한다. 그런데 새누리당이나 새정치민주연합은 정체돼 있거나 퇴행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원래 근대적 정당이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자유당 후보로 나와 당선된 게 아니라, 대통령 되고 난 뒤에 국가 권력을 이용해 자유당을 만들었다. 새누리당의 뿌리인 공화당도 쿠데타 후 중앙정보부부터 만들고 중앙정보부가 만든 당이다. 대중이 참여하는 정당이 아니라 국가 권력이 위로부터 만든 정당이다.

새정치민주연합도 그 뿌리는 한국민주당에 있지 않나. 친일 지주의 당이었다가, 권력을 잡지 못한 인물들의 당, 그 인물들의 지역 기반을 중심으로 형성된 당이 됐다. 그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다. 오히려 새누리당은 권력을 이용해 보수 세력을 단결시키는 등 나름의 자기 변화를 해 왔다면, 새정치민주연합이야말로 혁신이 정체돼 있다. 구호는 있지만 챗바퀴를 돌았던 게 아닌가 한다.

프레시안 : 진보 진영 재편 이야기로 자연스레 넘어가자. 방금 말씀처럼 기존 정당들이 혁신을 하지 못하고 국민의 정치 불신을 해소하지 못하고 있는데, 진보 재편이 그에 대한 답이 될까?

천호선 : 전통적 진보 정치는 민주노동당부터 시작됐다. 민노당의 '진보 정치 1기'는 1980년대의 운동권 이념과 가치, 헌신과 열정으로 무상 급식 같은 진보적 이슈를 통해 국민의 삶을 바꿨다. 지지받은 만큼 의석 확보를 못한 것은 한계였지만. 그러나 시대가 많이 변해서 진보정치도 혁신이 필요했는데, 여기서 구 통합진보당 얘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프레시안(최형락)

2011년 통합진보당을 처음 만들 때, 자기 혁신을 하고 통합을 하거나 또는 통합 직후 혁신을 추진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 결과 과거 진보 정치의 폐해가 아주 아주 파괴적으로 드러났다. 강한 이념, 낡은 운동권식 정당 문화, 정파 중심의 배타적 정당 운영 등이 비례대표 경선을 통해 드러났다. 결국 진보 정치가 쌓은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그냥 맨땅도 아니고 폐허가 됐다.

그 위에서 정의당을 시작했다. 정의당에서 '진보 정치 2기'가 시작됐다고 감히 자부한다. (요체는) 3가지인데, 첫째, 낡은 이념으로부터 벗어나 시대에 맞게 노선과 정책을 바꿨다. 올해 봄에 새 강령을 만들었는데, 이 강령을 보면 무슨 주의(主義)나 이념을 제기하기보다 지향하는 가치와 정책을 담았다. '운동권 언어'는 거의 사라졌고, 합리적이고 진영 논리를 벗어난 정책을 내세웠다. 예를 들어 공무원연금이 문제였을 때, 옛날에는 '전공노가 우리 편이니 무조건 편을 들어준다'는 식이었다면 이번에는 '공무원연금은 개혁돼야 한다'는 입장에서 시작했다. 담뱃세 인상에 대해서도 서민 증세라는 면에서는 반대했지만 흡연율을 줄이는 데 가장 효과적인 게 담뱃세라는 면에서 찬성했다. 

둘째, 대중적이고 개방적인 문화다. 예전에 뭐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느냐 마느냐 이런 얘기도 있었는데, 지금은 필요할 때 할 수 있다는 정도로 자연스럽게 정리됐다. 운동권 언어 같은 표현도 많이 줄어들었고, 예전에는 전투적 집회를 많이 했는데 이제 설득 중심의 대중 활동 위주로 변화했다. 우리 당의 거의 유일한 자산이 6000만 원짜리 LED 모니터가 붙은 '이동 당사'(전광판 차량 : 편집자)다. 

셋째, 민주주의 원칙에 따른 정당 운영이다. 예전에는 당 내 정파들의 힘이 강했고, 당이 정파들 간의 조정과 합의를 통해 운영됐다면, 지금은 철저히 민주적으로 운영된다. 예를 들어 얼마 전에 전국위원회 회의를 했는데, 같은 정파에 소속된 분들이 발언하는데 의견이 다 다르더라. 옛날엔 정파가 같으면 이게 다 똑같았다. 그래서 표 대결을 통해 상대 정파를 이기고 배제하는 게 진보 정치에서 많이 나타났던 현상인데, 이제는 정파 중심 운영을 벗어났다고 생각한다.

이 3가지 면에서 정의당이 진보 정치 2기를 시작했다고 자평하지만, 그럼에도 숙제는 남아 있다. 아직도 주변에 건강하고 합리적인 진보 정치 세력들이 있다. 제2의 창당은 처음부터 정의당의 과제였다. 모든 당을 다 통합하는 하나의 당을 만들자거나 무조건적 단결을 하자는 것은 아니다. 독자 노선을 따르는 정파도 있고, 함께하지 않겠다는 분은 어쩔 수 없다. 그래서 추진한 것이 4자 연대를 통한 진보 정치 재편이었다.

(함께하지 않겠다는) 그 분들을 제가 비판하는 건 아니다. 예를 들면 녹색당은 독자적 정당으로 계속 나가겠다는 입장 아닌가. 저는 녹색당을 굉장히 긍정적으로 보고, 언젠가 함께하기를 바라지만 지금은 그들의 기조를 존중해야 한다고 본다. 또 노동당 안에도 독자 노선을 주장하는 분들이 있다. 물론 배타적인 그룹, 자신들과 다르면 당 같이 안 한다는 그룹도 있긴 있다. 그게 누군지는 잘 모르지만.

프레시안 : 바로 어제(6월 28일) 노동당 당대회에서 4자 통합 가부를 묻는 총투표 발의안이 부결되지 않았나. 결국 노동당은 4자 통합에서 빠지겠다는 뜻인데.

천호선 : 냉정히 봐야 한다. 저는 노동당 당원들 다수, 반 이상은 통합을 지지한다고 본다. 나경채 현 대표가 진보 결집을 내세우고 당 대표가 된 것에서 그게 확인됐다. 그런데 노동당 당대회는 대의원들이 결정을 내리는 것인데, 대의원은 보통 일반 당원들보다 당 활동에 더 열성적인 사람이 되는 경우가 많고, 그러면 특정한 정치적 입장을 가진 사람이 더 많게 돼 있다. 대의원 의결 결과 (총투표 찬성이) 과반이 안 됐지만, 그게 노동당 당원 다수의 뜻이라고 해석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당대회에서는 과거 진보신당 때의 경험이나 기억 때문에 부정적인 결론이 났다고 본다.

우리도 노동당 당대회에서 그런 결론이 날 것이라는 걸 전혀 모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4자가 하려고 했던, 통합이라는 방향은 옳다. (노동당을 제외한) 3자 통합이 되든 다른 어떤 형식이 되든 어떻게 할 것인지 하는 문제는 고민해야 한다. 애초에 4자 결집이란 것이 '4자끼리만 통합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4자가 함께 진보 진영 전체에 '함께 당을 하자. 우리가 앞장서겠다'고 제안하는 것이었다. 노동당에서 결정이 나지 않았고 그것은 아쉽지만, 흔들리지 않고 추진돼 나가야 한다고 본다. 고민을 함께 해보겠다.

어제 제가 노동당 당대회 가서 축사도 하고 왔는데, 우리가 만들려는 진보 정당의 원칙에 대해 얘기했다. 첫째, 진보의 가치에 동의하면 누구나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이고, 둘째, 민주주의적 운영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고, 셋째, 생각이 달라도 배제하지 말고 공존의 태도를 가지자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이런 정당을 꿈꾼다. 노동당원 여러분들도 이런 꿈을 같이 꿔 보자'고 얘기한 건데, 물론 그렇게 생각지 않는 분들도 있다. 전형적으로 우리를 비난하는 말이 있지 않나. "쟤들은 개량이다, 신자유주의다" 이런 것. 이런 분들은 참 같이 하기가 쉽지 않죠. (한숨)

프레시안 : 내년에 총선이 있는데, 향후 통합 관련 일정은?

천호선 : 9월에 모일 수 있는 분들이 최대한 모여야 한다. 바로 못 들어오는 분들은 그 뒤에 들어오면 된다. 9월에 한다고 해서 그때 완성이 되는 게 아니다. 애초에 '더 큰 진보 정당'이란 것도 그 자체로 끝이 아니라, 진보 정치에 대한 기대와 열망을 가진 여러 분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이유와 공간을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9월에 최대한 모으되, 그때 합류하지 못하는 분들은 그 후에' 이렇게 가는 것이고, 이후로도 계속 열려 있을 것이다. 총선만을 놓고 논의하는 것도 아니다. 총선 전까지 다 모여야 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다만 그런 공간과 이유를 만드는 것은 9월에 해야 한다.
 

ⓒ프레시안(최형락)


"총선 때 새정치민주연합과 같이? 통합은 불가, 연대는 가능"

프레시안 : 통합 진보 정당이 만들어지더라도, 새정치연합과의 선거 연대 문제가 분명히 또 당 내외로부터 제기될 것이다. 이와 관련, 새로 탄생할 정당에 대해서도 당의 체계가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총선을 위해 급히 만들어진 것이라는 비난이 선거를 앞두고 나올 가능성이 있다.

천호선 : 일단 진보 통합은 급조된 게 아니다. 급조해 봐야 시너지가 나지도 않는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우리 가운데 뭐 더 특별히 유명한 사람, 당에 온다고 국민들이 표 줄 그런 사람이 있지도 않다. (웃음) 9월에 통합을 해도 지지율이 의미 있게 오르지는 않을 것이라고 본다. 우리는 단지 결집을 하자는 게 아니다. 진보 정치 2기를 맡아나가는 정당이 돼야 한다. 이 정당은 실패해선 안 된다. 같이 하는 분들 모두가 트라우마가 있다. 노동당도, 우리 당 사람들도, 국민모임도. 이들 모두의 대원칙은 '이번에는 실패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제 입장은, 당이 명사 정당, 엘리트 정당이 돼서도 안 되고, 정파 연합 정당 같은 방식이 돼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통합하고 창당하면 매번 책상에 앉아서 무슨 표현, 무슨 이념을 강령에 넣느냐 마느냐 가지고 만날 논쟁하고, 지도부 구성 비율을 어떻게 배분할 것이냐 이런 것을 논의하는데, 이번에는 그런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선거 연대 문제는, 제가 올해 초 기자 회견을 할 때 총선 목표를 20석이라고 했더니 기자분들이 '그게 되겠냐'면서 웃더라. (웃음) 그런데 정치는 '운칠기삼'이다. '운'이라는 게 무슨 재수, 행운을 말하는 게 아니라, 선거 시점의 정치 환경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는 말이다. 정의당이 더 큰 진보 정당이 된다면, 선거 제도 개선이 이뤄진다면, 국민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연합 정치가 이뤄진다면 20석이 불가능하지 않다고 본다. 4자가 모이면 그 가능성은 더 커질 것이다.

야권 연대는 2010년 지방선거 때는 성공적이었으나 2012년에는 그렇게 성공적이지도 못했고 오히려 그 자체가 공격의 대상이 됐다. 국민들이 볼 때 식상하고, 선거를 위한 일시적 결합으로 보였다. 새정치민주연합도 별로 표가 안 된다는 걸 느꼈을 테고, 우리도 새정치민주연합 지지층의 표가 잘 당겨지지 않는 것을 재·보선 등에서 경험했다. 

저는 야권 연대가 불가피하다고 보지만, (과거의 야권 연대는) 그저 선거 연대 수준, 즉 선거 직전에 후보를 단일화하는 수준에 머물렀고 선거 후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2010년 선거에서 당선된 새정치연합 소속 시도지사들이나 기초단체장들이 민주노동당과의 합의문을 지켰나?

2012년에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통합진보당 사태의 책임이 크긴 하지만, 당시 통합진보당과 민주통합당이 여러 합의를 한 게 다 휴지조각이 됐다. 야권 연대가 선거 연대만이 아니라 의정에서의 연대를 통해 정치를 바꾸고 서민들의 삶을 개선하는 성과를 이루지 못한 것에는 우리도 책임이 있지만 새정치민주연합도 같은 책임이 있다. 새정치민주연합은 지금 우리 당에 대해 '무시하거나, 흡수하거나'라는 2가지 중 하나의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 같은데, 정의당을 인정하고 '작지만 협력해야 한다'는 정신을 가져야 한다. 무시하거나 흡수하려 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물론 새정치민주연합 의원들 중에 우리와 같이할 수 있는 사람이 적지 않지만, 당을 놓고 봤을때는 우리와 가치와 노선이 많이 다르다. 또 당 운영을 놓고 봤을 때에도 운영 원리가 다르다. 그 당은 개혁이든 반개혁이든 상층부에서 권력 투쟁을 할 수밖에 없는 구조, 지역과 세대의 편중이 나타나 지지하는 국민들의 의사를 반영하는 당 대표나 국회의원 후보가 안 만들어지는 구조다. 당을 같이 할 수는 없다. 또 당을 합친다고 지지율이 올라가지도 않는다. 지난 2011년 '시민통합당'을 만들어 민주당과 통합했지만 지지율이 얼마나 올라가더냐. 정의당과 합친다고 해도 지지율 '덧셈'한 것만큼도 안 오를 것이다.

프레시안 : 야권 연대가 불가피하다는 것은 그러면 어떤 면에서 하는 말인가?

천호선 : 거시적이고 과감한 전망이 필요하다. '정권 교체를 위한 야당 연합' 같은 구상을 가지고 중장기적 협력과 연대를 해야 한다. 그게 제가 제시하는 방안이다. 그렇게 될 때 시너지가 난다. 고유하게 있는 진보적 지지층에 무당파까지 합쳐져 '곱셈 지지'가 가능하다. 정권 교체는 결국 중도 개혁에서 진보까지를 포괄할 텐데, 새정치연합 내의 진보적 분들과 함께 진보적 의제를 우리 당이 주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과거에 DJP(김대중-김종필) 연대도 했는데, 이런 연립 정부를 왜 못하겠느냐. DJP 연대보다 훨씬 국민 공감을 받을 수 있다고 본다. 그런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국민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총선 연대가 될 수 있다 본다.

정리하면 '통합은 불가, 연대는 가능'이다. 

프레시안 : 내년 총선에서는 어떤 의제를 놓고 선거전을 치르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나?

천호선 : 올해 초에 '우리 당은 비정규직 정당'이라는 표현을 했다. 기존에 민노당을 만든 게 민주노총이었지 않나. 기존의 대기업 정규직, 조직화된 노동자들은 그래도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었지만 전체 노동자의 50%가 넘는 비정규직은 자기 목소리를 내기 어려웠다. 비정규직을 우선 대변하자는 것이 노동운동의 새로운 방향이기도 하고, 과거의 전통적 노동운동 방식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있기도 했다. 
 

ⓒ프레시안(최형락)

이번에 우리 당에서 바뀐 게 '노동 중심성' 얘기다. 노동 중심성은 전통적인 노동계급 헤게모니 개념에서 나온 것 아니냐. 그런데 저는 노동이 물론 굉장히 중요하지만, 노동 중심성이라는 것을 선험적으로 부여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노동자들이 사회 연대를 통해서 다수 서민의 입장을 대변하는 실천적 모습을 보였을 때 그게 정치적으로 인정되는 것이지, 노동자들만이 전체를 대변할 수 있다는 식의 접근은 옳지 않다.

지금도 노동 중심성을 당에서 강조하는 분들이 있지만, 그것을 전가의 보도처럼 내세우는 문화는 많이 사라졌다. 과거의 대기업·정규직 노동자보다 스스로 조직화하지도 못하고 대변받지도 못하고 있는 비정규직들을 대변하는 것이 정의로운 정당으로서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과감한 비정규직 정책이 총선에서 가장 핵심이다. 

두 번째는, 보수와 진보를 뛰어넘는 의제인 탈핵 문제다. 삼척·경주·고리의 사례를 보면 생명과 생태라는 가치 앞에 보수, 진보가 없다는 것이 검증됐다. 탈핵과 생태가 야권의 전면에 내세워져야 한다. 세 번째는, 총선 전에 정치 개혁이 이뤄지지 못한다면 이에 대한 분명한 비전을 내세워야 한다. 이 3가지 면에서 야권 전체가 공통적 정책 비전을 내세워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민주노총의 배타적 지지, 필수적이지 않아"

프레시안 : 노동 중심성을 얘기했는데, 현재 정의당에 대한 노동계의 조직화된 지지가 약한 것은 사실 아닌가. 

천호선 : 앞서 자유당·공화당 얘기도 했지만, 그런 의미에서 보면 대한민국 최초의 근대적 정당은 민주노동당이었다. 여기서 다시 '현대적' 진보 정당을 만들겠다는 게 제 공약이었다. 이념·노선, 문화, 민주적 운영이라는 3대 과제를 내세웠고 성과도 있었다고 자평한다. 

과거 민주노총은 민노당에 대해 배타적 지지를 했다. 그러다 보니 노동운동을 포함한 사회운동과 정당의 차이를 분명히 구현하지 못했다. 그래서 민노당이 민주노총 대리인이냐는 비판도 받았다. 꼭 그렇지는 않았지만, (민노당이) 대기업·정규직·조직 노동만 대변한다는 비판도 있었다. 또 하나, 민노당 안에서 당직과 공직을 분리했던 시절이 있었다. 의회는 개량적이고, 그래서 의회 밖에서 (당이) 의회를 통제해야 한다는 인식이었다. 

이 배타적 지지와 당직·공직 겸임 금지가 민노당의 대중 정당화를 실패하게 하고 안주하게 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정의당도 민주노총의 지지를 매우 바라지만 과거 식의 배타적 지지가 복원되는 것이 반드시 바람직하다고 보지는 않는다.

이번에 4자 재편 과정에서 노조 분들을 만났는데, 노조 조직에서도 30·40대 위원장들은 언어나 인식 자체가 오래 노동운동을 해온 50대 이상 민주노총 간부들과 완전히 다르더라. 어떤 분은 스스로 '전후(戰後) 세대'라고 표현했다. NL-PD(국민파-현장파) 갈등 이후에 노동운동을 했다는 거다. 이 분들은 기존 민주노총의 운동에 문제의식을 갖고 있고, 진보 4자 재편에 대한 열망과 진보정치에 대한 희망을 가진 분들이었다. 이 분들이 민주노총의 2세대를 이끌어 나갈 것이라는 희망을 갖는다. 

이 분들이 어떻게 다르냐면, 옛날에는 (노조에서) 정치 교양 할 때 '우리는 민노당 배타적 지지하니까…'라고 하지 않았나. 이 분들은 우리 당, 노동당, 녹색당 3군데의 활동을 다 조합원들한테 홍보해 주더라. 그런 접근이 옳다고 생각한다. 정보를 주고 스스로 주체적으로 판단하게 하는 정치적 교육이 훨씬 바람직하다. 

진보 정치 2기는 정의당에서 이미 시작됐다고 보고, 이번 당 대표 선거에 나온 조성주 후보가 과연 대표까지 맡을지는 모르겠지만 진보 정치 '2세대'라는 이들도 나왔다. 마찬가지로 민주노조 운동에도 2세대가 등장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정의당이 노동을 대변하려 하고 인내심을 가지면 민주노총의 지지를 회복하고 그뿐 아니라 한국노총, 비정규직 노조의 지지도 확보할 수 있다고 본다.

프레시안 : 기존의 진보 대중 조직 가운데에는 해산된 구 통합진보당에 우호적인 단체가 많다. 이들 세력은 어떻게 할 것인가?

천호선 : 통합진보당에 대해 제 생각은 명백하다. 그 당의 많은 당원들은 우리와 크게 생각이 다르지 않다고 본다. 다만 통합진보당을 주도했던 분들은 2가지 오해를 하고 있다. 2012년 통합진보당 사태 당시, 관행적으로 있었던 일이지만 일반 시민의 관점에서 볼 때는 불법이거나 문제가 있었던 일들이 있었다. 물론 노항래 당시 후보처럼 한 표도 부정이 없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러나 당시 저는 노 후보를 포함해 모두가 함께 책임을 지자고 했다.

반면 그 분들은 여기에 대해서 첫째, '우리는 잘못 없다'고 하거나, 둘째, '왜 우리한테만 책임을 지라고 하느냐' 이렇게 오해했다. 또 하나, 그분들로서는 억울할지 모르지만, 진보 정치와 진보 운동 전체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는 자성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 분들과 진보 정치 2기에 함께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프레시안 : 통합진보당 '주도 세력' 말고, 이를테면 농민단체라든가 이런 대중 조직을 어떻게 정의당 지지세력으로 조직화할지를 물었던 건데…. (웃음)

천호선 : 특정 단체는 정의당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인 태도를 갖고 있어서 접근 자체가 어렵다. 그렇지 않은 단체의 경우에도, 외형적으로 (정치권 내 진보 세력이) 쪼개져 있어 어느 한 쪽을 지지하기 어렵다고 하더라. 하지만 저는 최근 그 분들의 생각도 많이 변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기존의 진보적 대중 단체들에서도 새로운 세대가 새로운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고 본다. 너무 진영 논리에 갇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진영 논리를 벗어나 노동자든 농민이든 자유롭게 토론하고 그때그때 정치 방침을 다수 의견을 모아서 결정할 수는 없나? 예를 들어 총선에서 정의당 지지했어도 잘 못하면 바꿀 수도 있고 그래야 하는 것 아니냐. 협약에 의한 배타적 지지에 따른 결정은 바람직하지 않다. 여기에 익숙해져 있는 기존 대중 조직 지도자들도 생각이 바뀌어야 하고 새로운 세대로 교체돼야 한다고 본다. 아직도 1980년대식 사고에 머물러 있다. 

프레시안 : 정의당 내부 이야기다. 앞서 천 대표가 '당 운영에서 정파가 사라졌다'고 했지만, 여전히 정파라는 틀은 존재하는 것 아닌가. 이를테면 4.29 재·보선 과정에서도 '참여당계'라는 호명이 나오기도 했다. 

천호선 : 정파 문제가 없어졌다는 게 정파 자체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정파는 있는 게 좋다. 예를 들면 참여계 같은 경우(천 대표는 국민참여당 출신이다 : 편집자), 참여계라는 틀에 머무르지 않고 이제 사회민주주의로 가자는 분들이 적지 않다. 그런 것이 정파의 긍정적 발전이라고 생각한다.

정의당 내 모든 정파에서 '우리만 옳다. 다른 데는 배제하자' 이런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문화는 없어졌다고 생각한다. 자유로운 토론이 이뤄지고 있다. 제가 전국위원회를 구성할 때 '60명이 넘지 않게 하자'고 제안했다. 대의원대회는 그냥 대의기구지만, 전국위원회는 대의 기구이면서도 동시에 숙의 기구이니까 50여 명 정도면 충분히 중요한 의제에 대해 토론하고 설득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고 실제로 그런 과정을 해 왔다. 그런 의미에서 정파 주도 정당 운영의 폐해가 극복됐다고 본다.
 

ⓒ프레시안(최형락)


"정의당은 '무자비한 대결' 없는 당…꿈이 있다"

프레시안 : 앞서 내년 총선 의제 중의 하나로 정치 개혁을 들었다. 현재 국회에서 정치 개혁 논의를 하고 있는 중이고, 권역별 비례대표 도입 등도 논의되고 있다. 어떻게 전망하고 있는지?

천호선 : 오히려 지금은 개악될 가능성이 있다. 지금 중앙선관위에서 내놓은 안(권역별 비례대표제 등)은 노무현 정부 청와대 정무기획비서관실에서 만든 것과 똑같다. 권역을 너무 잘게 쪼개지만 않는다면 정의당의 입장인 독일식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와 유사한 면이 많다. 그래서 우리 당이 선관위 안을 지지하고 있기도 하다. 

다만 선관위는 지역구 대 비례대표 의석 비율이 2대1이 돼야 한다고 하는데, 결국 비례대표 의석을 줄이는 방향으로 갈 가능성이 높다. 선관위는 '저희가 정수 문제를 제기할 것은 아니다'라고만 한다. 건드리고 싶은데 못 건드린다는 말이다. 의원 정수를 늘리는 개혁에 대해 새누리당이나 새정치민주연합 역시 국민들 비판을 받으면서 할 용의가 없다. 물론 우리 당 내부에서도 의원 정수 문제는 논쟁이 있다. 심상정 전 원내대표나 나는 의원 정수를 늘리는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노회찬 전 대표는 국민 정서와 부딪혀서 명분을 갖기 어렵다고 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떠올릴 부분이 있다. 노 전 대통령이 대연정을 제안했는데, 그 자체는 본인도 실패했다고 평했지만 그 대연정 제안을 통해 노 전 대통령이 하자고 했던 게 바로 선거 제도를 바꾸자는 것이었다. 중대선거구제든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든 하자고 했다. 노 전 대통령은 이렇게 승부를 걸었다. 새정치민주연합은? 실현 가능성이 낮다는 것은 알지만, 그렇게 노무현처럼 치열하게 붙어봤나? 김대중 전 대통령은 노태우 정부 시절 지방자치제를 단독 투쟁으로 따냈다. 그 정도 결의를 새정치민주연합 내 친노 그룹이 가져야 한다. 그래서 정치 제도를 조금이라도 개선시키거나, 최소한 개악은 막아야 한다. 

이 부분에 대해 새정치민주연합 지도부가 나서야 한다고 촉구한다. 그렇게 되지 않을 경우 이것이 야권 연합의 중요한 의제가 될 것이다.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해서 승부를 걸지 않는 것은 '노무현 정신'을 잇는 게 아니다. 저희는 국민의 뜻을 제대로 반영하는 정치, 사표를 줄이고 민심을 반영하는 정치를 하자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다. 

프레시안 : 내년 총선에서 정의당은 몇 개 지역구에 후보를 내나?

천호선 : 올해 초에 100석을 내겠다고 했는데, 쉽지는 않지만 불가능한 목표는 아니다. 우리는 총선 캠프를 미리 만들어 펀드도 모으고 지금부터 지역 활동을 하게 하는 등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출마할 후보를 정의당이 70명까지는 만들 수 있고, (진보 통합 과정에서) 새로 오실 분들까지 하면 246개 지역구 중에 최소 절반에서 최대 200곳까지 낼 수 있다. 반 이상은 낼 거다.

프레시안 : 천 대표는 계속 수원에서 출마하나?

천호선 : 가을쯤 결정하려고 한다. 지금으로서는 출마하든 하지 않든 당을 위해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하겠다는 생각만 갖고 있다.

프레시안 : 유시민 전 공동대표는 총선 계기 정계 복귀 가능성이 없나?

천호선 : 그럴 가능성은 없다고 본다. 본인이 출마할 생각이 1%도 없더라. 

프레시안 : 긴 시간 좋은 말씀 감사하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천호선 : 앞서 정당 수준이 국민의 수준을 결정한다고 하면서,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이 가진 근본적 한계가 수정되지 않고 있다고 말씀드렸다. 정의당은 진보 정치 2기를 하고 있고, 과거의 이념에서 탈피했다고 생각한다. 강령을 통해 종합적 국가운영 비전을 만들려 하고 있고, 북한 인권과 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도 적시했다. 녹색당과 거의 차이가 없는 생태적 내용도 강령에 담았다. 유럽의 사민주의 복지국가 성과를 계승한다는 얘기도 있다. 

정의당은 다른 당처럼 '무자비한 대결'이 있는 당도 아니고, 이념 대결이 있는 당도 아니다. 선배 세대에 이어 새로운 세대가 등장하고 있다. 생각이 다 일치할 필요는 없지만, 당원들의 공통분모가 확대되고 있다. 정파연합 정당이 아닌 하나의 꿈을 가진 하나의 정당이 돼 가고 있다. 이번 당 지도부 경선 과정에서 이런 변화가 잘 보여지고 있다. 정의당에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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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방보고서, "북 첨단 무기본토 위협" 우는소리

미, 조.이.중.러 위협국 “전쟁나면 엄청난 결과”우려
 
미국방보고서, "북 첨단 무기본토 위협" 우는소리
 
이정섭 기자 
기사입력: 2015/07/02 [08:31]  최종편집: ⓒ 자주시보
 
 

 

▲ 북 EMP     ©

 

미국이 조선과 러시아, 이란, 중국이 기존의 국제질서를 흔들고 미국의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4대 국가로 지목했다.

 

마틴 뎀프시 미국 합참의장은 지난 1일(현지시간) 발표한 '2015 군사전략보고서'를 통해 "일부 국가들이 국제질서의 주요한 면을 바꾸려고 하고 미국의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방향으로 행동하고 있다"면서 이들 4개국을 거론하며 전쟁이 나면 엄청난 결과가 초래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미국의소리방송은 이슬람국가(IS)를 비롯한 비국가행위자들의 테러리즘이 새로운 안보적 도전과제로 부상하고 있지만, 여전히 주요한 위협은 국가행위자들로부터 나오고 있다는 미군 수뇌부의 분명한 인식을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미국방보고서는 "우리는 가까운 미래에 국가행위자들로부터 나오는 도전과제에 보다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며 "이들 국가행위자는 역내 이동의 자유에 도전하고 우리의 본토를 위협하는 능력을 지속적으로 키우고 있다"고 평가했다.

 

보고서는 조선에 대해 "핵무기와 탄도미사일 기술 추구는 국제사회의 지속적인 요구와 상충된다"며

"조선의 이 같은 능력은 직접적으로 한국과 일본 등 주변국들을 위협할 뿐만 아니라 언젠가 미국의 본토도 위협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 러시아 정찰기     ©


 

특히 지난해 말 소니 픽처스 해킹사건을 지칭하는 듯 "조선이 미국 기업에 중대한 손상(major damage)을 입히는 사이버 공격을 수행하고 있다"고 덧 붙였다.

 

그러나 소니 해킹 문제는 조선이 행하지 않았다는 것이 명확해졌음에도 미국정부가 북의 소행이라고 몰아가는 저의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보고서는 러시아에 대해 "마약퇴치나 대테러 등 선별적 안보분야에 기여하고 있지만, 이웃나라의 주권을 존중하지 않고 자신들의 목표달성을 위해 힘을 사용하려고 한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러시아의 군사행동은 지역의 안보를 직접적 또는 대리세력을 통해 약화시키고 있다"며 "이 같은 행동들은 러시아가 유엔 헌장이나 헬싱키 협약 등 국제규범에 따라 서명한 다양한 협약들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덧붙여 신 냉전적 인식이 미국정부에 기조임을 시사했다.

 

 
▲ 중국의 미사일     ©

 

보고서는 또 이란을 "국제사회의 전략적 도전"이라고 규정하고 "이란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지속적인 결의에도, 핵과 미사일 운반기술을 추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이란은 이스라엘과 레바논, 이라크, 시리아, 예멘을 포함한 많은 국가에서 안정을 해치고 있는 테러지원국"이라며 "지역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이란 국민에게 번영된 미래를 보장하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비극을 가져다주고 있다"고 비판했다.

 

중국에 대해서는 "우리는 중국의 부상을 지지하고 국제안보의 협력자가 될 것을 독려하고 있지만, 중국의 행동은 아시아태평양지역에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다"고 지적해 중국을 경제적 동반자로 인정하면서도 군사적으로는 여전히 적수라는 것을 확인했다.

 

▲ 중국 해양 부양정     © 이정섭 기자

 

보고서는 "현재로서는 이들 4개국 가운데 어떤 나라도 직접적으로 미국 또는 동맹들과 직접적 군사충돌을 추구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며 "그럼에도, 이들 국가는 국제사회가 공통의 정책과 공유된 메시지, 조율된 행동을 통해 집단적으로 해결해야할 심각한 안보적 우려를 노출하고 있다"고 거듭 우려를 표했다.

 

보고서는 미국이 이들 국가와의 '주요한 전쟁'에 개입할 개연성은 낮지만 점차 커지고 있다고 평가하고 "일단 전쟁이 일어나면 그 결과는 엄청날 것"이라고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뎀프시 의장은 보고서 서문에서 "미래에 일어날 전쟁은 단기간에 끝나기보다는 장기화될 가능성이 크고 긴장 고조를 억제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질 것"이라며 "우리는 제한된 자원을 갖고 우리의 국제적 편제를 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 이란 미사일     ©

 

국방보고서는 향후 대응방향의 일환으로 미국이 아시아 역내에서 패권질서를 유지하는데 초점을 맞춘 '아시아 재균형 전략'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동맹과 우방국들과의 안보협력을 강화해나가야 한다고 주문했다.

 

보고서는 "미국과 동맹, 우방국들이 이끄는 대부분의 국가는 분쟁을 막고 주권을 존중하며 인권을 촉진하는 기존 국제기관들과 절차들을 지지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또한 "우리는 보다 진전된 전략적 역량을 배치하고 사활적 이해가 걸린 전장에 더 큰 역량을 투입함으로써 아시아 재균형 전략을 추진해나갈 것"이라며 "특히 우리는 호주와 일본, 한국, 필리핀, 태국 등과의 동맹을 강화할 것"이라고 밝혔다.

 

보고서는 또 "인도와의 안보협력을 강화하고 뉴질랜드,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베트남, 방글라데시와의 협력관계 구축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며 "이 같은 노력들은 지역의 평화를 유지하고 미사일 방어와 사이버 안보, 해양 안보, 재난 구조를 위한 역량을 구축하는데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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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2사단 주둔 50년, 과거와 현재

인계철선의 상징 '인디언헤드'미2사단 주둔 50년, 과거와 현재
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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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7.01  11:5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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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북부지역에 배치된 주한미군 제2보병사단이 1일 주둔 50년을 맞았다. 사진은 2사단이 보유한 다연장로켓포 발사 장면. [사진출처-미2사단]

경기도 의정부, 동두천 등에 배치된 주한미군 제2보병사단(미2사단)이 1일 주둔 50년을 맞았다. 미 2사단의 상징은 머리에 깃털 장식을 한 인디언의 옆모습을 하고 있는데, 그만큼 용맹성을 과시하는 부대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미2사단은 한.미동맹의 상징, 인계철선이라고 불려왔다.

하지만 한.미동맹의 상징인 미2사단이 50년째 주둔하면서 국민들에게 아픈 상처를 남긴 것도 분명하다. 윤금이 씨가 잔혹하게 살해되고, 친구의 생일을 가기 위해 길을 걷던 여중생 2명이 사망하는 사건의 주범이 바로 미2사단 소속 병사들이었다.

부대 마크처럼 '인디언헤드'라고 불리는 미 2사단은 지금까지 38명의 명예훈장 수훈자를 배출했고 20개 이상의 전쟁에 참가한 이력을 갖고 있는 미국을 대표하는 육군 주력부대이다.

1917년 10월 프랑스에서 창설된 미2사단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독일군의 파리진격을 막았다. 그리고 1940년 미 육군에서는 처음으로 예하에 3개의 부대를 편성하고, 공중기동과 대전차 전략 개념을 도입했다.

1943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가했으며 독일을 지나 체코슬로바키아까지 진격해 연합군의 승전에 한 몫했다.

   
▲ 미2사단은 한국전쟁 발발직후인 1950년 7월 미국 파병부대로는 처음으로 한국땅을 밟았다. 사진은 1950년 11월 미2사단 참전모습. [사진출처-미2사단 페이스북]

미2사단과 한국의 인연은 다름아닌 1950년 한국전쟁이다. 전쟁발발 이후 7월 미국 파병부대 중 처음으로 한국에 도착해 부산방어선을 뚫고 유엔군 중 처음으로 평양에 입성했다. 이후 1953년 4월 중공군에 밀려 후방으로 이동했고, 이듬해 8월 미국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미2사단은 동북아와 한반도 긴장고조 상황에 따라 1965년 7월 1일 한국에 재배치됐다. 그리고 현재 의정부 캠프 레드클라우드, 캠프 스탠리, 동두천 캠프 케이시, 평택 캠프 험프리, 성남 K-16 등 기지에 1만여 명 이상이 주둔하고 있다. 이는 주한미군 전체 병력의 40%를 차지한다.

미2사단은 미 육군 중에서도 유일하게 가장 최전방에 배치된 사단으로 '오늘밤 싸운다'라는 구호를 내걸고 있다. 예하부대로는 제1기갑전투여단(동두천 캠프 호비), 제2전투항공여단(성남K-16, 평택 캠프 험프리스), 제210야전포병여단(동두천 캠프 케이시)이 있으며, 각 여단에는 5~8개 대대가 편성되어있다. 미2사단 사령부는 의정부 캠프 레드클라우드에 있고 현재 사단장은 티어도어 마틴 소장으로 이라크전 참전이력이 있다.

제1기갑전투여단 예하부대 중 제1여단특수병력대대는 전시 군사정보, 통신, 화학, 제독, 후방보안 작전 등을 수행하며, 제23화학대대는 화학, 생물학, 방사능, 핵 및 고성능 폭발물 위협에 대한 대응작전을 담당한다.

제210야전포병여단 예하부대 중 제1-15야전포병대대는 155mm 팔라딘 2개 포대를 보유하고 있고, 제1-38야전포병대대는 북한 장사정포를 파괴하는 대포병사격 임무를 맡고 있다. 그리고 제6-37야전포병대대는 세계에서 가장 전방에 배치된 다연장로켓포대이다. 또한, 공동경비구역(JSA) 유엔군사령부 경비대대도 여기에 속한다.

   
▲ 미 2사단 배치도. [사진출처-미2사단 홈페이지]

미2사단이 남긴 상처..윤금이 씨 살인사건과 여중생 사망사건

미 2사단 주둔 50년은 한.미동맹의 상징이라고 하지만 국민들에게 남긴 상처는 여전히 크다. 물론, 미 2사단도 이른바 '판문점 미루나무사건'으로 북한군에 의해 병사들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하지만 미2사단 장병들이 국민들을 무참히 살해한 기억도 오래 남아있다. 1992년 10월 경기도 동두천시에 위치한 기치촌에서 일하던 윤금이 씨(당시 26세)가 케네스 마클 이병에 의해 무참히 살해됐다.

케네스 마클 이병은 1994년 대법원에서 징역 15년형이 확정됐다. 당시 1심은 무기징역을 선고했지만, 미국 정부가 윤금이 씨 유족에게 배상금을 지불했다는 이유로 감형됐다. 이후 천안소년교도소 외국인수용사동에 수감됐지만 잔여형기 1년여를 앞둔 2006년 8월 가석방으로 풀려나 미국으로 돌아갔다.

2000년 2월에는 미2사단 소속 크리스토퍼 매카시 상병이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술집에서 여종업원을 목졸라 숨지게 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매카시는 결국 징역 6년형을 받았으나, 조사 당시 검찰은 매카시의 신병인도를 요청했지만 미군 측은 '법원의 최종판결이 나오기 전까지 신병은 미군측에서 확보한다'는 주둔군지위협정(SOFA) 규정을 들어 인도를 거부했다.

   
▲ 지난달 13일 신효순.심미선 양 사망 13주기 추모행사가 사고현장에서 열렸다. [자료사진-통일뉴스]

2002년 6월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56번 도로에서는 친구 생일잔치에 가던 여중생 신효순, 심미선 양이 미 2사단 소속 장갑차에 치여 사망했다. 그러나 '미군의 공무집행중에 일어난 범죄에 대해 미군이 1차적 재판권을 갖는다'는 SOFA규정에 따라, 두 여학생을 친 병사들은 대한민국 법정에 서지않은 채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리고 2014년 용인 에버랜드 여직원 성추행, 택시기사 폭행도주 등 미2사단 소속 병사들의 범죄행위는 이어져왔지만 SOFA의 보호를 받고 있다.

미국이 자인한 '인계철선', 미2사단 병력 증강

미2사단이 저지른 범죄행위로 의정부, 동두천 등 경기북부지역이 몸살을 앓고 있는 가운데, 미 2사단은 2016년까지 한강이남 경기도 평택 이전할 계획이었다. 2003년 미래한미동맹정책구상회의(FOTA)에서 주한미군 기지의 평택 이전과 통폐합, 미2사단 감축 등 전략적 유연성이 논의된 이후 2005년 한.미안보정책구상회의(SPI), 2006년 한.미연례안보협의회(SCM) 등을 거쳐 미2사단의 평택 이전 등을 골자로 한 전략적 유연성에 한.미가 합의했다.

즉, 정밀타격능력과 확대된 전장과 원거리에서의 작전능력을 보유한 미2사단이 주한미군의 아시아.태평양 신속기동군화라는 전략적 유연성을 위해 2016년까지 이전할 예정이었다.

   

▲ 미2사단 및 예하부대 마크. 왼쪽이 미2사단 부대마크로 인디언 옆모습을 했다고 해서 미2사단을 '인디언헤드'라고 부른다. [사진출처-미2사단/편집-통일뉴스]

그러나 2014년 제46차 한.미연례안보협의회(SCM)에서 한.미 양국은 한국군이 자체적인 대 화력적 수행능력을 증강하는 2020년까지 미2사단 예하 제210야전포병여단을 잔류하기로 결정했다. 제210야전포병여단이 위치한 동두천 캠프 케이시는 14.15㎢로 동두천에 위치한 미2사단 부대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여기에 지난 5월까지 제210야전포병여단에 다연장로켓포(MLSR) 1개 대대가 증강해, 2개 대대 36문에서 3개 대대 48문으로 늘어났다. 또한, 4백여 명의 병력도 추가 배치됐다.

그리고 지난 6월부터 미2사단 예하 제1기갑전투여단이 해체되는 대신, 미 본토 1기갑사단 2기갑전투여단이 9개월단위 순환배치가 시작됐다. 순환배치 병력은 4천6백명으로 1기갑전투여단 장비는 그대로 운용된다.

2013년에는 제1기갑전투여단 예하 제23화학대대가 의정부 캠프 스탠리로 재배치됐다. 23화학대대는 지난 2004년까지 주둔한 뒤 주한미군 재편성으로 본토로 철수했지만, 3백여 명의 병력이 북한의 화생방 무기에 대한 대응을 목적으로 돌아왔다.

지난달 미2사단과 한국 육군으로 구성된 한미연합사단이 편성, 평시에는 한.미 연합참모부 형태로 운영되고, 전시에는 예하부대와 한국군 1개 기계화보병여단으로 편성되는 새로운 형태의 부대가 만들어졌다.

   
▲ 지난달 3일 한미연합사단이 출범했다. 미2사단과 한국 육군으로 구성된 부대로, 미2사단의 평택이전에 의구심을 낳고 있다. [사진출처-미2사단]

미2사단의 평택 이전계획에도 불구하고 일련의 병력증강은 미2사단이 경기북부지역에 잔류하는 것아니냐는 의구심을 낳고있다. 동두천 캠프 케이시는 2020년까지 그대로 남고 동두천 캠프 호비에 있던 1기갑여단은 미 본토 2기갑여단으로 순환배치되며, 의정부 캠프 스탠리에는 떠났던 화학대대가 다시 돌아왔다. 게다가 의정부 캠프 레드클라우드에는 한미연합사단이 새로 들어섰다.

이시우 평화활동가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상황적 조약으로 평가받는 데 이는 미국이 언제든 발을 뺀다는 뜻"이라며 "하지만 인계철선으로 평가받는 미2사단의 존재는 비상황적 조약으로 된 것이다. 미국이 유연성을 발휘할 수 없게된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미2사단의 평택으로 이전은 그러한 유연성을 확보하기 위한 차원이었다. 그런데 증강배치는 미국으로서도 다시 발이 묶이는, 스스로 후퇴한 결정"이라며 "미국 스스로가 인계철선을 인정하는 셈"이라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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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버스 추락사고, 한국 공무원 10명 사망

 

연수간 5급 지방직 공무원 참변... 부상자 16명 중 4명은 중상

15.07.01 20:15l최종 업데이트 15.07.02 08:16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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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연수를 떠난 행정자치부 소속 지방행정연수원 교육생을 태운 버스가 다리에서 추락해 최소 6~7명이 숨지는 등 사상자가 20여 명에 이르는 사고가 발생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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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안<중국>·서울=연합뉴스) 홍창진 특파원 하채림 김효정 기자 =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에서 1일 한국 공무원들을 태운 버스가 다리에서 추락, 최소한 10명이 숨지고 16명이 다쳤다. 부상자 중 4명은 중상인 것으로 알려졌다.

외교부와 행정자치부에 따르면 중국을 방문중인 지방공무원 24명을 포함한 한국인 26명을 태운 버스가 이날 오후 3시30분(현지시간·한국시간 오후 4시30분)께 지안과 단둥(丹東) 경계지점 조선족마을 부근 다리에서 15m 아래 하천으로 추락했다.

사고 버스에는 전국 각 시도에서 모인 지방행정연수원 교육생 24명, 연수원 직원 1명, 가이드 1명 등 한국인 26명과 중국인 2명이 탑승하고 있었다.

외교부는 "사고 버스 탑승객들은 전원 지안시 병원으로 후송이 완료됐다"면서 "지안시 병원에 있는 지방행정연수원 직원으로부터 파악한 바에 따르면 오후 9시20분 현재 사망자 수는 10명"이라고 밝혔다.

사망자 10명은 지방직 5급 공무원인 교육생 9명과 한국인 가이드 1명으로 파악됐다.

각 시도에 따르면 경기도 소속 공무원 2명, 서울·부산·인천·광주·강원·경북·제주 등에서 각 공무원 1명이 사망했다. 

부상자 16명 중 4명은 중상이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고 행자부는 전했다. 

사고 버스에 탑승한 교육생은 지난달 29일부터 이달 3일까지 4박 5일간 중국 옌지(延吉)·단둥·다롄(大連) 등 고구려·발해 터와 항일 독립운동 유적지를 둘러볼 예정이었다. 

지방행정연수원 교육생 일행 148명은 공무원 143명과 연수원 관계자 5명으로 구성됐으며 이날 버스 6대에 나눠타고 이동 중 버스 1대가 사고를 당했다.

일부 교육생들의 전언에 따르면 사고 버스는 과속으로 달리던 중 추락했다. 

외교부는 사고 직후 본부에 이기철 재외동포영사대사를 본부장으로 하는 재외국민보호대책본부를 설치하고 국내 관계기관 및 관할 공관과 긴밀한 연락체계를 구축했다.

관할 주선양총영사관도 사고대책반을 꾸리는 한편, 담당 영사를 사고 현장으로 급파해 사고 수습에 나섰다

행자부는 정재근 차관 등 20명 내외로 현지 사고조사·대응팀을 꾸려 2일 현지로 파견할 예정이다. 

전북 완주 지방행정연수원에 사고수습대책본부가, 정부서울청사 지방행정실에 상황대책반이 설치됐다.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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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정권교체는 시민권력이라야 가능…”

 
“2017 정권교체는 시민권력이라야 가능…”
 
4.29 재보선 광주 서구(을) 평가토론회 개최한 광주시민정치위원회 주장
 
임두만 | 2015-07-01 08:20:21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사단법인 광주연구소와 4.29보궐선거대책시민정치위원회는 30일 광주 YMCA에서 4·29 광주서구(을) 보궐선거 평가 토론회를 통해 향후 시민정치활동의 방향을 모색하는 계기를 다졌다. 개회식을 포함해 총 3부로 이뤄진 이 토론회는 향후 호남 특히 광주의 정치지형이 어떻게 변할 것인지 가늠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광주시민정치위원회 주최 4.29재보선 평가토론회 © 임두만

김대현 광주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실장의 사회로 열린 개회식이 끝난 뒤 나간채 광주연구소 이사장의 사회로 시작된 약정토론에는 김만흠 한국정치아카데미 원장의 <4·29 재보선에 나타난 정당정치의 현주소>란 제목의 발제가 있었으며, 이 발제에 대해 지병근 조선대학교 정치학과 교수와 천성권 광주대학교 교수의 평가토론이 있었다.

이 토론이 끝나자 최영태 전남대학교 교수의 <4·29보궐선거(광주서구을)와 지역정치>란 발제를 놓고 김상집 광주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대표, 나기백 전 참여자치21 대표, 황정아 전 여성단체연합 대표 등이 나서 열띤 토론을 전개했다.

이어진 종합토론은 나상기 민주평화 광주회의 총무의 사회로 참여자 전원이 토론자가 되어 향후 호남과 광주정치에 대해 자신들의 생각을 밝혔다. 그리고 이 토론회의 종합결론은 현 새정치민주연합을 대체할 새로운 세력으로 시민권력이 필요하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었다.

1차토론 발제에 나선 김만흠 한국 정치아카데미 원장은 “4·29 재보선에서 새정치민주연합은 지역 유권자 구도에 부합하는 후보 전략도 없었고 대안 없이 동교동계를 불러들였다”며 “이는 새정치연합과 호남의 비대칭 구조를 확인시켜 주면서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 원장은 특히 새정치연합 문재인 대표의 정치적 역량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문재인 대표체제의 상황인식이나 전략에 문제를 제기할 수밖에 없었다”며 “2013년 댓글 정국에서 NLL대화록 공개 공방을 자초한다거나, 성완종 특사 논란에 법무부 책임이라는 황당 발언으로 여당의 물타기에 빌미를 제공하는 등 문 대표의 정세인식과 정치적 역량에 대한 논란은 많았다”고 지적한 것이다.

▲김만흠 정치아카데미 원장 등이 열띤 토론을 하고 있다. © 임두만

또 “문재인 대표 체제의 새정치연합에 대한 불만과 조영택 후보의 경쟁력 부족이 천정배 후보의 압승 배경”이라며 “문 대표는 소외돼 있는 호남 정치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이 부족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한 분석으로 호남출신 유권자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서울 관악을 사례를 든 그는 2012년 총선에서도 야권이 분열되어 김희철 무소속 후보가 높은 득표율로 3위를 했으나 이상규 후보가 당선되었다며 새정치연합 후보의 패배는 정동영 출마가 문제가 아니라 ‘친노 후보’가 결정적 이유라고 설명했다. 즉 새정치연합의 4.29대보선 완패는 친노 후보라는 후보 공천 잘못에서 대체적으로 기인했다는 평가였다.

이어서 그는 “친노패권주의 논란과 당의 비대칭 구조의 딜레마에 대한 해법을 제시해야 한다”며 “친노는 친노대로, 전통 민주당 지지자는 그들대로 새정치에 대한 충성도가 낮은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당 권력과 지지 세력이 유대감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같은 김만흠 원장의 발제에 대해 토론에 나선 천성권 광주대 교수는 새정치민주연합 지도부의 구체적인 자기 혁신과 경쟁적 정당 체제 형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박근혜 정부 2년 동안 드러난 인사 난맥, 성완종 사태, 내부 권력 투쟁 등의 반대급부로서 정치적 이득도 누리지 못 하고 있다”며 “국민을 위한 정치가 아닌, 정치를 위한 정치를 하고 있기 때문에 국민의 마음이 떠나고 있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천 교수는 특히 “호남민심은 지난해 7.30 재보선 당시 순천곡성 유권자들이 새누리당 이정현 후보를 선택한 것으로 이미 옐로우카드를 내보였음에도 새정치연합이 변하지 않은 친노 지도부에 레드카드를 내밀었다”고 주장했다. 즉 “천정배 후보가 52.4%의 득표율로 새정치연합 조영택 후보(29.8%)에 20% 포인트 이상 압승한 것”을 두고 이런 평가를 한 것이다.

천 교수는 “애초 예측은 박빙의 승부일 것으로 봤으나 결과는 참사수준이었다”며 이를 “호남정치 복원 갈망의 소산”이라고 말했다. 이어 “새정치연합이 텃밭에서 패배한 것은 그동안 정치개혁과 올바른 견제를 바라는 민심을 뒤로 한 채 무기력증과 계파갈등에만 몰두해온 것에 대해 지역 유권자들이 크게 실망하고 호남정치 복원을 갈망한 결과로 분석된다”고 평가했다.

이어 “지도부가 구체적으로 자기 혁신을 먼저 보여주고 비주류 역시 자기 개혁을 먼저 보여야 한다”며 “1당 체제인 호남의 경우 새정치연합과 경쟁할 수 있는 정치세력의 등장과 다당제에 부합할 수 있는 제도 개편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어진 토론회에서 최영태 전남대 교수는 새정치민주연합을 거부한 배경에 대해 문재인 대표에 대한 부정적 평가, 새정치민주연합의 공천행태에 대한 거부감, 호남지역 국회의원에 대한 부정적 분위기(4무 현상), 후보의 상대적 열세 등 4가제를 제시하면서 이를 쇄신하지 않으면 호남에서의 새정연에 대한 무조건적 지지는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최 교수는 특히 “지난 대선에서 호남 유권자들은 노무현이나 정동영에 비해 후보의 역량이 뛰어나지 않음에도 문재인 후보에게 광주 92% 전남 89%, 전북 86%라는 압도적 지지를 보낸 것은 오로지 정권교체에 대한 열망 때문이었다”고 한 뒤, 이 압도적 지지에도 문 후보가 패하면서 “호남 몰표에 대한 비난”은 물론 “보수 세력들의 호남 고립화 시도가 노골화되었다”고 분석했다.

이 같은 열띤 토론은 김상집 광주복지국가소사이어티 대표의 “정권교체는 시민권력이라야 가능하다”는 발제에 이르러 절정을 이뤘다.

이미 “새정련으로는 정권교체가 불가능하다고 진단하고 불임정당을 벗어나 2017 정권교체를 이루자”는 합의는 마음 속으로 상당부분 합의된 것으로서 “한마디로 2017 정권교체를 위해 제3의 정치세력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미 엘리트를 자처하는 국회의원과 동교동계 등이 모인다고 해서 정권교체가 가능할까요?”라는 질문을 던지고, “소수 엘리트 중심의 정당정치의 악폐를 넘어설 정치세력화는 4․29재보선의 광주모델이 보여주고 있다”고 주장했다.

▲천정배 의원도 토론회에 참석 인사말을 했다. © 임두만

즉 “천정배 후보를 시민권력이 개혁후보로 선정 집중 지원을 함으로써 거대 야당의 후보에게 압승을 거두게 한 것은 후보의 우위와 함께 시민권력의 성찰에 기인한 바 크다”면서 “이 광주모델을 전국 각 지역에 설명하여 지역마다 시민권력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이러한 시민권력이 존재해야만 소수엘리트 중심의 낡은 정당정치의 패악을 극복하는 정치세력화가 가능할 것”이라고 결론을 맺었다.

한편 이날 토론회에 참석, 인사말을 한 무소속 천정배 의원은 “신당을 포함한 다양한 방식의 야권재구성 방안을 구상 중에 있으나 아직 결정된 것은 없다”면서 “만일 신당을 한다면 새로운 비전, 새로운 인물, 주도세력을 갖춘 전국적 개혁정당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따라서 광주지역의 이 같은 시민사회 움직임이 현재 천정배 의원을 중심으로 불고 있는 신당논의에 어떻게 작용할 것인지 귀추가 주목되는 하루였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28&table=c_flower911&uid=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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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가 복지 때문에 망했다? 대표적인 5가지 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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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ECE

 

 

 

 

 

 

 

 

 

 

 

 

 

 

 

편견은 무섭다. 잘 깨지지 않는다. 그 편견을 조장하는 건 잘못된 정보다. 잘못된 정보가 돌아다니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가장 질이 낮은 것 중 하나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왜곡한 ‘거짓 정보’다. 때로는 학자들도, 정치인들도, 또 언론도 거짓정보를 퍼뜨리는 주범이 된다.

그리스 위기도 마찬가지다. 그리스 디폴트(채무불이행) 가능성이 높아진 요즘, 아직도 ‘그리스가 복지 때문에 망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스를 비롯한 유럽 재정위기가 불거진 이래 벌써 몇 년째 되풀이된 거짓말이다.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그리스 사태’에 대한 대표적인 오해 5가지를 허핑턴포스트코리아가 정리했다. 어디서 이런 얘기를 했다가는 ‘무식하다’는 핀잔을 듣기 쉽다는 점을 기억해두자.

오해 1. 그리스는 복지 때문에 망했다

“그리스 사태는 국민들이 과잉 복지에 물들 경우 얼마나 되돌리기 어려운지를 생생히 보여준다.” (동아일보 사설 6월30일)

한 문장 안에 사실과 다른 내용이 여럿 등장한다. 그리스는 결코 과잉복지 국가가 아니었으며, 복지혜택을 누리는 국민은 많지 않았다. 문제는 과거 정부의 무능이었지, 복지가 아니었다.

우선 그리스의 1인당 국민소득(GNP) 대비 정부 복지지출 비중은 21.3%로 유로존 회원국 가운데서는 가장 낮은 수준이다. 덴마크는 26.1%, 핀란드는 24.9%, 스웨덴은 27.3%에 이른다. 단순히 복지지출이 많아서 망한다면 스웨덴부터 망해야 한다. OECD(경제개발협력기구) 평균은 19.3%, 우리나라는 7.5%다. 복지지출이 많아서 위기에 직면했다는 비판은 사실관계부터 틀렸다. 복지지출을 늘리면 그리스 꼴이 될 거라는 비판 역시 인과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미디어오늘 2012년 6월17일)

 
 

그리스의 상류층과 중산층은 제대로 세금을 내지 않으면서 사회복지제도로부터 가장 많은 혜택을 누리고 있다. 노동자들은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지만, 사회복지제도의 혜택에서 소외되고 있다. 그리스 사회복지제도는 통일·집중되어 있지 못하고, 파편화(fragmentation) 되어 있다. 무엇보다 정부 주도성이 약화되고 '민간-공공 파트너십(PPP)'이라는 미명 하에 민간사업자가 대거 참여하여 이윤을 취하고 있다. 그리스의 사회복지제도는 복지 강국인 북유럽 국가들의 모델과는 크게 다르고, 오히려 한국이나 미국 같은 복지 후진국의 모델과 닮았다. 각종 통계 지표는 이를 뒷받침한다. (프레시안 2011년 11월10일)

 
 

 

오해 2. 그리스 국민들은 나태하다

“복지과잉으로 가면 국민이 나태해지고, 나태가 만연하면 부정부패가 필연적으로 따라온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 연합뉴스 2월5일)

과잉복지와 꼭 붙어다니는 게 ‘나태하다’는 주장이다. 그리스 국민들이 일은 하지 않고 복지혜택만 누리려고 한다는 얘기다. 김무성 대표는 그리스를 그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했다. 틀렸다.

2013년 OECD 통계를 정리한 이 도표 하나만 기억하자. 그리스 국민들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 일한다. 독일인들보다 무려 연간 649시간을 더 일한다. 다른 해에도 마찬가지였다. 유럽에서 연간 2000시간 넘게 일하는 건 그리스인들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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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 3. 빚을 갚지 않겠다는 건 말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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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그리스 정부를 이끌고 있는 건 지난 1월 총선에서 승리한 시리자 정권이다. 언론들은 시리자를 “급진 좌파 정부”라고 규정하고 있다. 일련의 구제금융 재협상 과정에서 그리스 정부의 주장은 종종 위험할 정도로 ‘급진’적이고 시장경제 원칙을 무시한 ‘좌파적인’ 것들로 그려졌다.

그러나 ‘급진 좌파들이 문제야!’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있다.

시리자의 대표적인 공약은 ‘구제금융 재협상’이었다. 애초 불합리한 조건으로 협상이 이뤄졌으니 이걸 다시 논의하자는 얘기다. 시리자는 재협상을 통해 일부 부채 상환은 유예하고, 일부는 탕감 받겠다는 목표를 밝혀왔다.

‘돈을 빌릴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못 갚는다는 게 말이 되냐’고?

그리스는 돈을 빌리는 조건으로 채권자들이 시키는 대로 했다. 재정지출을 대폭 줄였고, 빚도 꼬박꼬박 갚았다. 그 결과 채권자들은 돈을 회수했을지 모르지만, 그리스 정부와 국민들은 더욱 가혹한 상황으로 내몰렸다. 상황이 어려워지니 빚을 갚는 것도 점점 어려워졌다. 악순환이다.

그리스는 유럽 연합 집행 기관, 유럽 중앙은행, IMF로 형성된 '트로이카'가 요구하는 사항을 상당 수준 성공적으로 이행했다. 정부의 재적 적자를 흑자로 바꿨다. 그러나 그에 따른 정부 지출 감소는 예고했던 것처럼 파괴적인 결과를 낳았다. 실업률이 25%로 치솟았고, 2009년 이후 GDP가 22%나 감소했으며, GDP 대비 부채 비율도 35% 증가했다. 긴축 반대를 외친 시리자가 최근 선거에서 크게 승리한 건 '이제 겪을 만큼 겪었다'는 그리스 유권자들의 선언과도 같다. (조지프 스티글리츠 -허핑턴포스트 블로그, 2월5일)

 
 

나 몰라라 하는 듯하지만, 그리스도 할 말이 많다. 위기를 맞고 난 뒤로 겨우 5년 사이에 경제 규모가 4분의 1이나 쪼그라들었다. 실업자는 약 2.5배로 90만명가량 폭증했다. 대공황의 참상이 따로 없다. 이른바 트로이카(유럽연합·국제통화기금·유럽중앙은행)가 짜준 경제 프로그램을 가동했는데도 형편은 계속 더 나빠져갔다. 빚은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 국가부채를 갚으려면 전 국민이 1년9개월 동안 번 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다 내주어야 할 지경이다. 지금으로선 상환이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스 재무장관이 말했듯이 국가경제는 이미 파산한 상태다. (한겨레 2월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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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무탕감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고, 전례 없는 일도 아니며, 오히려 더 나은 해결책일 때도 있다. 그리스의 최대 채권국이라는 독일을 보면 알 수 있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50억마르크의 부채를 탕감 받았다. 심지어 주변국들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덕분에 독일은 빠르게 위기에서 벗어났다. 선순환이다.

1945년 2차대전에서 패한 독일이 경제대국으로 일어선 ‘라인강의 기적’은 1953년런던 합의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중략)
런던 합의는 서독이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할 때만 채권자들한테 빚을 갚을 수 있게 했다. 상환 규모도 무역 흑자의 3%를 넘지 않도록 배려했다. 채권자들로서는 서독한테서 빚을 받으려면 서독 제품을 사는 게 유리했다. 서독의 수출은 늘었다. (한겨레 1월26일)

 
 

프랑스의 유명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 파리경제대 교수(사진)가 "그리스 사태로 대변되는 유로존 위기는 회원국들의 거버넌스 실패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말했다.

피케티 교수는 최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의 앤-실바 차사니 파리 지국장과의 인터뷰에서 "이미 많은 부채를 안고 있는 그리스에게 독일과 프랑스가 긴축 정책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매우 아이러니한 상황"이라면서 "이 두 국가들이야 말로 2차 세계대전 후 30년간 채무 탕감을 통한 교육과 혁신, 인프라 투자로 성장을 일군 주인공들" 이라고 비판했다. (아시아경제 6월28일)

 
 

그리스에도 똑같은 방식이 적용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기업이 파산할 경우, 출자전환(debt-equity swap)은 매우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방안으로 이용된다. 이와 비슷한 방법을 그리스에 적용한다면, 기존의 채권을 GDP와 연결된 채권(GDP-linked bonds)으로 바꾸는 방안이 있을 수 있다. 그리스 (경제)가 잘 되면 채권자들도 더 많은 돈을 돌려받을 수 있게 된다. 그렇지 않다면 채권자들도 그만큼 손해를 입게 된다. 이렇게 되면 양쪽 다 성장 회복 정책을 시행할 강력한 유인을 갖게 된다. (조지프 스티글리츠 - 허핑턴포스트 블로그, 2월5일)

 
 

 

오해 4. 사태가 여기까지 온 건 그리스 책임이 제일 크다

어쨌거나 그리스가 거액의 빚을 낸 건 그리스의 책임이 제일 크지 않냐고 되물을 수 있다. 그리스 책임이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모든 책임을 그리스가 져야 한다는 주장은 가혹하다. 이유가 있다. 전문가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얘기하는 게 있다. 바로 ‘유로화’다.

IMF(국제통화기금) 등에서 국가재정 및 개발원조 업무를 맡았던 엘리엇 모스 박사의 설명을 들어보자.

자국 통화를 쓰는 국가들은 무역수지가 악화되면 통화 가치를 낮춰 수출경쟁력을 높일 수 있지만 유로존 국가는 통화 가치를 독자적으로 낮출 수 없어 무역적자를 감내할 수밖에 없다. 무역적자의 증가는 정부부채 증가 및 경제성장의 둔화로 이어진다. 그리스의 현재 위기는 바로 이런 과정에서 발생했다는 것이 모스 박사의 주장이다. (서울신문 6월16일)

 
 

유로존 회원국이 통화와 기준금리 정책을 공유하고 있지만 이를 뒷받침할 재정통합은 없는 상태다.

유로존 역내에서 재정의 이전이 자유롭게 이뤄지지 못하면서 구조적 개혁에 따른 불균형 해소가 불가능한 구조인 것이다.

화폐 통합만 이뤄진 상태에서 역내 회원국 간의 경상수지 격차는 확대됐고, 그리스를 중심으로 경쟁력이 떨어지는 회원국들의 확장적 재정 정책이 악순환을 일으킴에 따라 남유럽발 재정위기는 시작됐다.

그럼에도 '몸에 맞지 않는' 유로화를 계속 쓰느라 그리스 등 재정 위기국의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그리스가 유로존에 가입하지만 않았어도 위기가 이처럼 오래 가지는 않았을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연합뉴스 6월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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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존을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사실은 유로화가 ‘경제적’인 목적으로 도입된 것이 아니라 철저히 ‘정치적’인 산물이라는 점이다.

(중략)

그러나 경제학적 측면에서 보자면 유로화 시스템은 ‘바보 같은 자해행위’와 다를 바 없었다. 유로존 국가들은 모두 자신들의 통화정책 주권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위치한 ECB에 넘겨야 한다. 유로존 국가들의 중앙은행 역할을 하는 ECB가 각 국가를 대신해 통일된 금리를 결정하고 화폐 유통량을 정한다. 문제는 19개의 유로존 국가들이 모두 너무나 이질적이고 처한 상황도 크게 다르다는 데서 발생한다.

(중략)

일부 전문가들은 유럽의 경제위기 때문에 유로화가 출렁거리는 것이 아니라, 유로화 때문에 유럽의 경제위기가 더욱 심각해졌다고 지적한다. ECB로 금융통제권을 ‘아웃소싱’한 탓에 아일랜드, 포르투갈, 그리스, 스페인이 2008년 경제위기 당시 각자의 상황에 맞게 제대로 방어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주간경향 제1110호, 1월20일)

 
 

그리스 문제의 핵심 고리는 인플레이션이다. 과거 유럽에서는 이런 경우 평가절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왔다. 그러면 외화로 표시된, 노동비용을 포함한 그 나라의 모든 가격이 단번에, 무차별적으로 떨어진다. 그래서 평가절하를 한 위기 국가는 신속하게 경쟁력을 되찾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이제는 단일 통화, 고정 환율을 사용하는 유로 시스템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한겨레 2월15일)

 
 

금융위기가 닥치자 유로존이 구제금융을 대가로 PIGS 국가에 내린 처방은 임금·연금삭감 등 긴축정책이었다. 구제금융은 사실상 독일과 프랑스 은행 등 민간기관에서 빌린 돈을 공공부채로 전환하는 역할을 해주는 것일 뿐, 각 국가 국민들을 위해 쓰이는 돈이 아니다. 결속기금 등 실질적인 지원 대책이 전무한 상황에서 유로존은 긴축이란 의무만을 강요했다.

문제는 각국의 ‘체력’을 따져보지 않고 획일적으로 부과한 긴축 처방이 그리스의 경우 엄청난 부작용을 일으킨 것이다. (경향신문 6월29일)

 
 

요약하면, 위기는 언제 어디서든 발생할 수 있다. 문제는 유로존에 묶인 그리스에겐 위기에 대처할 방법이 사실상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재정을 긴축하라는 채권단의 요구는 오히려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위기에 빠진 모든 국가가 그리스와 같은 고통을 겪어야 하는 건 아니다.

유로화가 출범할 때부터, 이런 위험성을 경고하는 목소리는 늘 제기됐다. 언제든 그리스 사태와 같은 일은 벌어질 수 있었다는 뜻이다.

그리스가 처음이 아닐 뿐더러, 마지막도 아닐 가능성이 높다. 지금은 그리스가 유독 눈에 띄지만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도 같은 상황에 처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쯤 되면 이건 그리스만의 문제가 아니라, 유로화 시스템의 문제라고 봐야 하는 게 아닐까?
 

오해 5. 그리스 정부가 최소한의 의지와 책임감을 보여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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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정부가 ‘생떼’를 쓰고 있다는 시각도 있다. 그리스 정부는 협상 막판 연금삭감 등을 내용으로 하는 IMF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조심스레 타결 가능성이 언급되던 순간 벌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그리스 정부가 무책임하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채권단의 요구는 또 얼마나 합리적이었는지도 함께 따져보는 게 맞다.

채무불이행(디폴트)과 그렉시트(유로존 탈퇴) 위기에 처한 그리스에 대해 국제 채권단은 처음부터 좌파 정권의 퇴진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됐다.

지난주만 해도 그리스 지원재개에 대해 낙관적 분위기였으나 마지막 순간 국제통화기금(IMF)이 연금삭감 등 재정지출 감축을 요구하면서 협상이 뒤틀어진 데는 이런 배경이 있다고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가 29일(현지시간) 보도했다.

그리스 급진좌파연합(시리자) 정권으로선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안이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시리자 지도부는 국제 채권단이 그리스 정권 전복을 기도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통상 급진좌파의 편집증적인 주장으로 치부하기 쉽겠지만 이번 경우엔 매우 확실한 근거가 있다. (연합뉴스 6월30일)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은 일찌감치 채권단의 ‘횡포’를 비판했다.

이어 크루그먼은 “그리스가 구제금융을 받아들이면 분명 트로이카 채권단은 치프라스총리 에게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을 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현재 정권을 잡고 있는 급진좌파연합(시리자)의 실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지난 1월 당선된 치프라스 총리가 흔들리며 정치적인 혼란이 가중될 것이라는 것.

크루그먼은 이미 트로이카 채권단에 대해 강력한 비판을 한 바 있다. 그는 “트로이카 채권단이 부과한 프로그램은 전혀 말이 안됐고 제대로 돌아갈 가능성도 없었다”며 “경제학적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했다. (이데일리 6월29일)

 
 

게다가 채권단이 요구하고 있는 건 이미 실패한 정책이라고 평가받는 바로 그 것, 긴축정책이다. 긴축으로 인한 고통에시달려왔던 그리스 국민들에게 똑같은 길을 또 가라는 얘기다.

야니스 바루파키스 그리스 재무장관은 지난 4월 이 같이 일갈한 바 있다.

그는 “그리스는 조기 퇴직을 제한하는 방식으로 연금시스템을 개혁하고 국유자산 일부를 민영화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이어 “부실채권 문제 해결과 세금문제를 관할하는 독립적인 위원회 창설, 기업활동 활성화 도모 등에도 노력할 것”이라고 덧붙엿다.

그러나 바루바키스 재무장관은 “앞서 IMF 구제금융 프로그램을 진행할 당시 임금과 연금 삭감 등 긴축정책은 기대했던 수출 경쟁력 상승과 경제 발전으로 이어지지 못했고, 따라서 현재 그리스 국민들은 국제 채권단이 요구하는 추가 임금 삭감과 연금 삭감에 반발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가 해야할 일은 협상 파트너들에게 이미 실패로 드러난 정책을 포기하도록 설득하고 우리의 논리가 합당하다는 것을 이해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데일리 4월24일)

 
 
 

9 facts about Greece and the Eurozone crisis - V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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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긴축 반대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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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그렉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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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영예 자랑하듯 그 이름도 조선대학'


<감상기> 신은미 선생 일본 순회 통일콘서트를 보고 (3)
도쿄=배안 통신원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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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7.01  07: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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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북기로 유명한 재미동포 신은미 선생의 일본 순회 통일토크 콘서트는 조선대학 방문으로 마무리됐다. 신은미 선생 부부가 조선대학교를 방문, 꽃다발을 받고 장병대 학장과 포즈를 취했다. 맨 왼쪽이 필자. [사진 - 조선대학교 출판부 전현철]
신은미 선생의 일본 일정은 조선대학교 방문으로 마무리된다.

 

요코하마에서 강연회를 끝내고 신나게 뒷풀이도 치르고 또 언젠가 보자며 서로 껴안으며 악수하며 헤어졌건만 왠지 또 보고싶어져 나도 그녀가 방문한다고 하는 내 모교로 부랴부랴 가보기로 하였다.

떳떳한 모습으로 선 우리 모교는 늘 변함이 없고 그 언제나 포근하며 따뜻하다. 훈훈한 바람을 타고 신 선생이 대학을 찾아오니 교정에 또 아름다운 꽃이 한송이 핀 것 같다.

이번 순회공연이 도쿄, 가나가와, 오오사카, 고베 등 일본의 주요도시에서 열렸는데 그녀는 방문하는 곳마다에서 조선학교를 방문하기를 뜨겁게 원했다.

가나가와 강연회를 준비하였을 때 관계자가 그녀와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가나가와는 세계에 이름난 항구도시 요코하마를 껴안은 곳인데 오신 김에 어디 방문하기를 원하시지는 않으냐” 물어봤더니 “조선학교를 찾아 가보고 싶습니다”란 한마디 답만 돌아왔다 한다.

 

   
▲ 민족의 기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광개토호태왕비 앞에서 한 컷. [사진 - 통일뉴스 배안 통신원]
민족적인 것을 바라며, 누구보다도 민족의 얼을 지키고 싶어하며, 또 민족의 정을 이어가고 싶어 하는 것은 해외에 사는 동포들의 공통분모인 것 같다.

 

이런 민족적 소망을 실현하기 위해서 민족교육은 무엇보다도 귀한 것이지만 이 길이 결코 순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아는 것도 해외동포들의 공통의식인 것이다. 그녀 또한 그것을 잘 아는 사람 중의 한사람이다.

우리의 말과 글도, 민족정신도 자연히 익혀지지도 키워지지도 않다는 것을 뼈저리게 아는 그녀이기에 조선대학교 방문은 그만큼 더 의의가 크다는 것을 얘기해 준다.

신은미 선생 일행을 조선대학교 학장, 부학장을 비롯한 교직원, 학생들이 환영한다. 서로 초면인 것 같지가 않을 정도로 분위기는 화기애애하다.

조선대학은 도쿄 교외인 고다이라에 자리잡고 있다.
우리대학은 1956년 4월 10일에 창립되었고 내년에 환갑을 맞게 된다. 이는 재일동포 자녀를 위한 민족교육의 최고학당이며 이 대학의 설립은 재일동포 사회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통일조국의 미래를 지닌 우리 민족의 희망을 꽃피우는 대학인 것이다.

 

   
▲ 민족교육의 생생한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기념관을 둘러보고 있는 신은미 선생 부부. [사진 - 통일뉴스 배안 통신원]
이 대학이 있으므로 하여 우리 재일동포들은 동포사회를 이어갈 새세대 교육을 담보할 수 있게 되었고 오늘도 능력있는 새세대 리더들을 육성할 수 있는 것이다.

 

초창기에는 대학의 면모를 갖추었다 하기에도 곤란한 초라한 교사에서 시작되었으나 대학에는 차츰 새조국 건설을 위하여, 동포사회를 위하여 살며 일할 거라는 일념을 안은 청년들이 전국에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민족교육의 화원 속에서 고등교육을 실시하고 싶어했던 우리 동포들, 특히 청년들의 요구는 1959년 6월 지금 현재 위치하는 도쿄도 고다이라시로 자리를 옮기게 되면서 일대 비약을 이루게 된다.

1957년부터 일본에서의 민족교육발전을 위하여 북에서 막대한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이 보내져 오게 된 것이다. 그중의 제2차 교육원조비(1억 51만엔)와 3,4차 교육원조비에서 5천만엔씩 모두 2억 51만엔이 우리 대학의 새 학사 건설기금으로 쓰이게 되었고 우리는 세계에서 하나 밖에 없는 해외동포들을 위한, 해외동포들에 의한, 해외동포들의 고등교육을 실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 대학은 창립 당시로부터 오늘까지 13,000명의 졸업생들을 배출시켰고 그들은 일본뿐만 아니라 남과 북, 널리 해외에서도 활약하고 있다.

대학 교직자들과의 인사를 나누고 난 다음 일행은 기념관으로 향한다. 안마당을 거쳐 지나가면서 대학의 교육이념, 연혁 등에 대하여 설명을 듣는다.

 

   
▲ 학장실에서 장병태 학장과 면담을 가졌다. [사진 - 통일뉴스 배안 통신원]
강당 앞의 잔디가 깔려진 마당에 초등학교 어린이들이 모여 앉는다. 소풍 나온 모양인지 다 같이 모여앉은 모습이 예쁘다.

 

안내하신 선생님 이야기로는 초등학교 2학년 국어 교과서에 “조선대학교를 찾아서”란 제목의 글이 실려져 있는데 도쿄 근교에 있는 우리학교 학생들은 이 과목을 배우는 시기가 되면 대학을 찾아오게 되어 있다. 나 역시 어렸을 때 그랬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일행은 기념관으로 들어선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손님들을 맞아주는 이는 갑옷 입고 말을 탄 고구려의 늠름한 병사이다. 우리를 지켜주는 것 같아 한결 마음이 든든해진다.

이 기념관은 대학 창립 25돌을 맞아 1982년에 세워진 건물이다. 여기에는 조선역사박물관과 조선자연박물관이 설치되어 있어 주로 북에서 보내 온 역사유물 500여종과 자연박물표본 2000여종이 전시, 관리 되어있다.

신 성생은 감탄을 금하지 못 한다. 북에서도 귀한 역사유물들을 이 대학에 보낸다는 북의 용단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그것은 오로지 민족을 알고 사랑하고 민중을 위하여 살며 일하는 인재를 해외에서 육성하라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북의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정대세가 이 대학 졸업생이라는 사실은 주지의 일이다. 동포사회에서 나서 자라 일본에서, 남과 북, 해외에서 활약하는 졸업생은 정 선수뿐만이 아니다. 우리가 젊었을 때 주로 동포사회 내에서 활약하던 졸업생들이 지금은 체육인이며 예술인이며 학자며 활동가며 기업가들이 되어 세계를 향하고 있으며 또 각자 활동을 통해서 우리 민족교육을 빛내이고 있다.

금수강산 내나라에 사회주의 꽃이피니
바다너머 이땅우에 우리대학 높이섰네
백두영봉 기상이냥 무사시노 굽어보며
조국영예 자랑하듯 그이름도 조선대학

젊은가슴 희망품고 교정안을 들어서니
조국사랑 넘쳐풍겨 따사로이 안아주네
무쇠팔뚝 두다리에 불을뿜뜻 용기솟고
우리심장 붉은심장 불덩이로 타오르네

참으로 우리 대학은 이 교가에서 불리워지는 것처럼 백두영봉의 기상을 이어받은 우리의 대학인 것이다.

신은미 선생을 뵙고 얘기를 듣고 싶어하는 기대를 안고 전교생, 전교직원들이 오후 1시가 되기를 기다린다.

 

   
▲ 무대 위에서 강연하고 있는 신은미 선생. 3대헌장기념탑이 무대 배경을 장식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배안 통신원]
강연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지나가는 학생들마다 신 선생에게 “안녕하세요”, “잘 오셨습니다”하며 인사를 한다.

 

“저 선생님께서 <오마이뉴스>에 올리신 글 다 봤답니다. 말씀 잘 들을게요.”
어떤 여학생이 신 선생에게 좀 수줍은 듯 전하고 강연장으로 뛰어 들어간다.
신 선생도 “오! 그랬어요? 고마워요”하며 답한다.

무대 위에 오른 그녀는 역시 강당에 모인 학생들을 축복한다.
순회강연 하면서 방문하게 된 각 지방에서 만난 동포들, 방문한 조선학교들, 거기서 배우는 학생들의 모습에서 조국과 통일의 미래를 보게 되었다는 감상을 얘기한다.

초등, 중등, 고등학교를 세워 체계적으로 민족교육을 실시해 온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인데 대학까지 세우고 훌륭한 인재를 키워내 온 역사는 아주 값있는 것이며 우리 민족의 재산이며 보물인 이 대학에서 배우는 학생들에게 감사하며 여기서 보고 느낀 것들 잊지 않을 거며 어디를 다녀도 많이 자랑할 것이라고 전한다.

그리고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면서 민족교육을 시작하고 지켜온 수많은 동포들에게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표하고 싶다고 하니 장내에 박수가 크게 울려 퍼진다.

 

   
▲ 학생들이 그녀의 말 한마디 놓치지 않으려는지 강연장은 물뿌린 듯 조용하다.
[사진 - 통일뉴스 배안 통신원]
학생들이 그녀의 말 한마디 놓치지 않으려는지 강연장은 물뿌린 듯 조용하다.
하지만 강연장 어디서나 그녀가 보여준 사진을 여기서도 소개시키기 시작하자 장내는 웃음꽃이 피기 시작한다.

 

그녀가 어디서 춤추는 사진이 소개된다. 그녀 얘기론 모란봉으로 산책하러 나가니 동네 아줌마들이 서클 활동을 하는지 춤판이 벌어졌는데 대뜸 합세하여 신나게 한판 춤추었다는 것이다.

“제가 어디 유럽 나라나 또 다른 나라를 방문하다 누가 춤춘다고 뛰어 들어가서 춤을 출 수가 있겠나요? 그건 아니잖아요. 우리가 하나의 민족이라서 그럴 수 있는 거죠”하고 얘기하자 청중들이 하나가 된 것처럼 머리를 위아래로 끄덕인다.

그녀의 말 속에서 느껴오는 가장 귀중한 엣센스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의 민족이기에, 같은 민족으로서의 정을 나눌 수 있고, 나라가 둘로 동강난 슬픔을 공유할 수 있는 것이며, 가족과 친구들이 자유롭게 오고 갈수 없는 설움이 가슴에 맺히는 것이다.

우리가 이 많은 아픔과 설움을 넘어서려면 통일에로 향해야 한다는 뜻이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 속에 배어 있다.

그녀는 “여기 오니까 우리말로 얘기하고 정을 나눌 수 있어 고향으로 온 것 같애요. 남쪽으로 가고 싶어지면 이제는 일본에 와서 우리 동포들을 만났으면 해요”라고 말했다.

여기서는 우리말이 조선어나 한국어, 코리안이 아니며 더군다나 한글어가 아니다. 우리말이 우리말이고 우리의 정은 민족의 정인 것이다.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이렇게 다시금 마음에 새겨본다.

일제식민지 치하에서 제 이름 하나 제대로 입밖으로 내놓을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조상으로부터 이어받은 성도, 가족들이 지어준 이름까지 다 잃어버린 민족이었던 것이다. 우리말, 우리글은 파묻혀버리고 우리의 역사, 우리의 민족문화는 왜곡되어 날조되어 가면서 언젠가 그 찬연한 빛은 바래지고 동방에 이름난 영광의 민족으로서의 나날은 잊혀지고 잃어버려지고 말았던 것이다.

허나 그 암담했던 그 시절에 쭈그려 앉듯이 지내던 우리 동포들은 민족의 뿌리와 씨앗을 기어코 지켜내고 만 것이다. 광복이란 양춘을 다시 만나게 되었고 후대들에게 잃어버린 우리의 문화, 우리의 전통 그리고 무엇보다도 백번 무너졌다한들 억천만번 다시 일어서 우리의 것을 다시 찾으려는 민족정신을 전하기 위하여 우리의 교육을 실시하게 된 것이다.

그녀는 우리대학 학생들이 민족의 희망이며 자랑이라 거듭 말한다.
분단의 설움을 넘어서 우리가 결탄코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뜨거운 메시지를 학생들에게 전하는 모습은 그 날씬한 몸매와는 어긋나 그녀의 억세고 굳센 결심을 보여준 것 같기도 하다.

따뜻한 사랑의 정과 단호한 결심을 우리에게 전하고 그녀는 일본 일정을 끝내고 다음 행선지 평양을 향하여 일본을 떠났다.

 

   
▲ 조선대학교 학생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신은미 선생. [사진 - 통일뉴스 배안 통신원]
재일동포사회는 지금 결코 순탄한 환경에 놓여있다 할 수 없다.
남북의 분단은 재일동포사회의 분단이 되었고 세대가 몇대로 바뀌어지면서 남에서나 북에서나 희망을 찾을 수 없게 된 많은 동포들이 동포사회를 떠나가고 있다.

 

하지만 이번 일본 순회강연회를 준비하면서 그런 동포들 역시 남북분단의 설움을 안고 통일에 대한 불씨를 안고 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들도 강연장에 찾아 온 것이다.

그리고 통일운동에 있어서의 세대교체는 기존세대들의 숙제가 된지 오래다.
더 이상 다음 세대들에게 넘겨져서는 안 되는 분단의 현실은 통일운동이 원만하게 다음 세대에 이어져야 한다는 모순을 끌어안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젊은 세대들이 “언젠가 될 거지”, “누군가 할 거지”하여 남들 일처럼 여겨 온 것도 사실이다. 통일이 희망이란 이름 밑에 밀어붙여져 사람들의 삶과 먼 곳에 위치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번 강연회는 그런 의식을 깨뜨려 버린 아주 좋은 기회가 된 것이다.
강연장에는 이제까지 볼 수 없던 여러 세대의 동포들이 모여 들었고 그들의 마음속 깊이에서 잠들던 통일의식이란 눈을 다시 뜨게 하였다.

재미동포 아줌마 신은미 선생이 일본 순회강연하면서 남긴 것은 북에 대한 새로운 지식, 관점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너무 오래 기다린 나머지 느슨해진 재일동포들의 통일의식을 다시 불러일으키고 또 고무해주기도 한 것이다.

이하 한 재일동포 여성이 보내 온 감상문을 소개한다.

밝은 미소와 장내를 울리는 맑은 목소리가 장내에 울리기 시작하지마자 마음이 몹시 끌렸다.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낭만에 넘친 힘있는 한마디 한마디는 내 마음을 삽시에 사로잡았다.
그녀가 하는 말들은 너무도 소박했다.
그 소박한 말들에는 진실감이 가득했다.
때로는 소리 내고 웃으며 어떨 때는 눈시울을 닦으면서 내 시간은 빨리도 흘러갔다.
처음 듣는 말은 아니었다.
자주 귀에 들려온 말들이었다.
그런데 가슴 깊이 스며드는 거짓이 없는 성실한 이야기들.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겨봤다.
통일은 그 누가 이룩해 주는 게 아니다는 걸.
서로가 만나고 손에 손을 잡아 장벽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걸.
잠깐 동안은 미워했었어도 서로가 뜨겁게 사랑을 하고 해결하고 풀어야 한다는 걸.
작은 힘이나마 나도 그 한사람이어야 한다는 걸.
다시금 알게 해준 귀한 시간이었다.
2015.6.24
박 청 순

그렇다 통일은 누가 해주는 다른 누구의 일이 아니다.
우리가 선 이 자리에서 통일을 바라며 통일을 생각하며 통일을 실현하기 위하여 행동하여야 하는 것이다.

일본에서 한사람이라도 더 많은 동포들을 만나고 싶다던 신은미 선생.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서로 잇게 하는 것, 이것이야 말로 통일에로의 지름길인 것이다.

초여름에서 여름으로 계절은 흘러가려 한다.
민족의 지맥을 남북으로 갈라놓은 얼어붙은 장벽도 우리 민족의 소원이란 뜨거운 정열을 앞에 두고서는 녹아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곳도 차츰 더 더워지며 열기를 띠기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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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방의 벽에 써내려간 시 '흰옷'

<사이공의 흰옷> 실존 인물, 응우옌티쩌우를 만나다

[아맙이 만난 사람] 감방의 벽에 써내려간 시 '흰옷'

15.06.30 20:06l최종 업데이트 15.07.01 00:55l

 

 



한 다발의 삐라와 신문 감추어진 가방을 메고
행운의 빛을 전하는 새처럼 잠든 사이공을 날아다닌다
복습은 끝나지도 않고 평온한 밤도 오지 않았다
내일도 수업시간엔 잠이 오겠지 그러나 간다 내일도 내일도
- 노래 <사이공의 흰옷> 중에서

1960년대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에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생사를 건 투쟁을 감행하는 청년들의 학생운동을 다룬 소설 <사이공의 흰옷>. 이 작품은 1980년대 중반 한국에 소개돼 당시 반독재 투쟁의 선봉에 섰던 대학생들의 필독서가 될 정도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베트남의 시인 레안쑤언이 <사이공의 흰옷>의 주인공 '홍'의 실제 인물인 응우옌티쩌우에게 헌사한 시 '사이공의 흰옷'이 노래로 만들어져 널리 불리어지고 소설의 인기가 1990년대 초반까지 꾸준히 이어져 <전환시대의 논리>, <전태일 평전>, <철학에세이>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스테디셀러에 오르기도 했다. 2006년에는 베트남과 정식으로 저작권 계약을 맺고 <하얀 아오자이>란 제목으로 다시 번역해 출간됐다. <사이공의 흰옷>은 베트남과 한국이 역사와 문학을 통해 어떻게 만나고 소통하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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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우옌티쩌우
ⓒ 베트남 사회적기업 아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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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공의 흰옷>의 원작은 베트남 작가 응우옌반봉의 소설 <흰옷>으로 1972년에 출간되었다. 이 소설은 '응우옌티쩌우'라는 실존 인물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는 1960년대 베트남 남부에서 이름을 날린 청년 열사 응우옌반쪼이, 시인 레안쑤언과 함께 회자되는 역사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출판 상황이 아주 열악했던 전쟁 시기에 북베트남에서 출간된 탓에 정작 소설의 무대인 남베트남에서는 아주 극소수만 이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다가 1995년에 베트남 문학출판사에서 출간된 <응우옌반봉 선집 2>에 이 소설이 다시 수록되고, 응웬티쩌우의 이야기는 1950,60년대 남베트남의 학생운동사를 회자하는 신문과 방송 등 언론을 통해서도 널리 알려져 왔다.

시내 중심가에서 그리 멀지 않은 호치민시 10군에 살고 있는 응웬티쩌우 여사를 아주 오랜만에 다시 찾았다. <사이공의 흰옷>의 주인공, 가난한 농촌 출신의 여학생 '홍'은 이제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가 되어 있었지만 여전히 해맑은 얼굴로 우리를 맞이했다. 이른 아침부터 시장에 나가 신선한 용과를 사왔다며 주방을 오가는 그의 모습은 77세의 나이가 무색할 만큼 정정해보였다. 젊은 시절 극심한 고문과 고초를 겪어 만신창이가 되었던 그가 이토록 건강한 모습으로 우리를 반겨주는 것이 무엇보다도 기뻤다. 

이날 만남에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의 남편 레홍뜨가 자리를 함께했다. 그 역시 베트남에서는 아내 못지않은 유명인사다. 두 명의 살아 있는 전설이 우리들의 맞은편에 앉아 용과를 자르고 차를 따르며 접대를 하느라 부산했다. 하얀 백발 아래 두 눈동자가 치열했던 한 시대를 방금 통과한 듯 강렬하게 반짝였다. 시간이 허락되었더라면 밤을 지새워도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이야기가 조곤조곤 이어졌다.   

밥 먹듯이 지각을 하던 우등생 소녀 람

응우옌티쩌우는 1938년 사이공의 북동쪽에 위치한 비엔호아 성의 솜짜이라는 작은 마을의 가난한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쩌우는 다섯 형제자매 가운데 장녀였다. 11살이 되던 어느 날, 감옥에서 막 출옥한 아버지가 만신창이가 되어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쩌우는 10개월 된 막내둥이를 업고 어머니와 함께 병원으로 달려갔다. 오래전부터 혁명 활동을 해오던 아버지가 경찰에 붙잡혀 보름간 온갖 고문을 당한 후 겨우 숨만 붙은 채 산송장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장사를 하는 어머니를 대신해 쩌우가 곁에서 아버지를 간호하며 동생들을 돌봤다. 아버지는 절친한 고향 친구를 불러 가족을 돌봐달라고 당부하고는 2주 만에 숨을 거두었다. 

쩌우의 어린 시절은 평탄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혁명 활동으로 집을 비우는 일이 잦았고 어머니는 이른 새벽부터 시장에 나가 장사를 했다. 9살 때부터 쩌우는 아버지를 도와 서신전달이나 연락 업무를 도왔다. 다른 친구들이 학교에 갈 시간이면 쩌우는 동생들의 아침 식사를 챙겨야 했다. 10시를 훌쩍 넘겨 어머니가 시장에서 돌아오면 그제야 책가방을 들고 학교로 달려갔다. 그런 쩌우를 맞이하는 것은 선생님의 불호령과 따끔한 회초리였다. 선생님이 자꾸 늦는 이유가 뭐냐고 물었지만 쩌우는 입을 다물었다. 찰싹찰싹 매서운 회초리가 이어지며 선생님이 자꾸만 지각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지만 어린 쩌우는 입을 꾹 다물었다. 

어느 일요일, 시장에서 어머니를 도와 장사를 하고 있는데 우연히 선생님과 마주쳤다. "세상에나 람(Lam)이 언니 동생이었어요?" 람은 쩌우의 아명이었다. 어머니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응, 내 아이야"라고 답했다. 선생님은 그 자리에서 눈물을 쏟았다. 그때부터 선생님은 쩌우를 '성실한 럼'이라고 불렀다. 같은 반에 동명이인의 럼이 또 한 명 있었는데 그 아이는 '게으른 럼'이라고 불렸다. 매일없이 지각을 할 수밖에 없었지만 학업서만큼은 우등생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쩌우에 대한 선생님의 총애가 깊어지자 질투를 하는 친구들도 생겨났다. "시장 바닥에서 장사나 하는 주제에"라며 조롱하는 친구도 있었다. 그럴 때면 참지 않고 달려가 매운맛을 보여주곤 했다. 상대할 쪽수가 많을 때는 시장통에서 장사를 하는 집의 아이들을 모아 함께 싸웠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1년간은 학교마저 다니지 못했다. 다시 학교에 돌아온 쩌우는 한이 맺힌 듯 공부에 열중했다. 그러고는 비엔호아 성 최고 수석으로 중학교를 졸업한다. 사람들은 우등생인 쩌우가 사이공에 있는 고등학교를 가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선생님의 도움으로 장학금을 받아 학비는 간신히 해결했지만 숙식을 비롯한 기본적인 생활비를 감당할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 아버지의 유언을 받든 한 아저씨가 쩌우를 찾아와 500동을 내밀며 말했다. "오늘부로 아저씨는 담배를 끊었다. 매달 담배 살 돈으로 500동씩 부쳐줄 테니 학교에 가려무나" 그렇게 해서 쩌우는 고향 비엔호아를 떠나 말로만 듣던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에 발을 딛게 되었다. 

투쟁과 함께 찾아온 사랑, 그리고 이별

사이공에 정착한 쩌우는 반랑 기숙학교에 입학한다. 당시는 친미독재 정치로 악명이 높던 응오딘지엠 정부 치하였다. 교내에 일체의 정치성을 띤 동아리는 물론 학생들의 자치조직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쩌우는 빈민구제사업 등 여러가지 사회활동에 참여하면서 학생운동에 발을 내디뎠다. 가정교사를 하며 학비를 벌고 조직의 활동자금을 마련했다. 그의 주된 임무는 사이공과 그 인근 지역에서 중고등학생, 대학생, 청년들을 조직화하여 남베트남의 자유와 평화, 그리고 조국의 독립과 통일을 요구하는 투쟁을 이끄는 것이었다.

반랑 학교의 같은 반에는 레홍뜨라는 남학생이 있었다. 쩌우보다 3살 연상인 그는 당시 반랑 학교 노동청년단 서기장을 맡아 학생운동을 주도하고 있었다. 뜨는 처음부터 쩌우를 눈여겨봤다. 흑진주처럼 빛나는 까만 머리카락에 하얀 아오자이를 입은 당찬 미소의 쩌우에게 남학생이라면 누구든 마음이 흔들렸다. 쩌우와 마찬가지로 뜨도 가난한 농민의 아들이었다. 비슷한 처지의 어린 시절의 경험과 고단한 하루하루의 일상을 나누면서 두 사람은 가까워졌다. 무엇보다도 교내 학생운동의 선봉에 섰던 두 사람은 목숨을 담보로 한 비밀 투쟁을  이어가면서 서로에 대한 깊은 감정이 싹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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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생운동 당시 레홍뜨(좌측)와 응우옌티쩌우.
ⓒ 베트남 사회적기업 아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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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작 뜨가 사랑을 고백했을 때 쩌우는 자신의 속마음을 숨기며 차갑게 거절한다. 지금은 어려운 가정 형편에 동생들을 돌보며 공부에 열중할 때라고 생각했다. 그 이후에도 뜨의 구애는 멈추지 않았고 쩌우는 매번 그를 거절했다. 날이 갈수록 치열해지는 투쟁의 나날 속에서 쩌우는 자신에게 사랑을 허락할 수 없었다. 학생운동의 핵심 인물이었던 뜨가 정부의 블랙리스트에 오르면서 학교를 옮기게 되었고, 쩌우는 2년간 고의로 졸업시험에 낙방하며 뜨의 빈자리를 대신해 반랑학교에서 학생운동을 이어갔다. 

감방의 벽에 써내려간 시 '흰옷'

1961년 2월 9일 늦은 오후, 집으로 돌아가던 쩌우의 앞길을 낯선 택시가 막아섰다. 쩌우가 끌려간 곳은 레반주옛 캠프로 당시 수도 사령부가 있는 곳이었다. 학생운동을 하다가 붙잡혀 경찰의 취조를 받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 풀려난 것은 여러 번이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사상개조실에 들어서는 순간 쩌우는 자신이 '붙잡혔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사상개조실 뿐만 아니라 동물원의 암실, 군 교도소 등을 돌며 온갖 고문과 취조가 이어졌지만 쩌우는 굴하지 않았다. 아침마다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하는 것을 시작으로 단식투쟁을 이어갔고 간수들이 몸을 땅에 파묻고 구타하며 취조를 하면 목청을 돋워 노래를 부르며 저항했다. 감옥에서 만난 동지들과 비밀리에 집회를 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쩌우는 뜨의 소식을 접한다.

1961년 8월 7일, 사이공은 물론 미국의 워싱턴을 발칵 뒤집어 놓는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사이공 주재 미 대사인 프레드릭 놀팅의 차량이 폭탄 테러를 당한 것이었다. 사이공-자딘 지역의 학생운동을 주도하던 세력이 감행한 테러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를 계기로 남베트남의 모든 도시에 반미·반독재 투쟁이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 사건은 사이공에서 미국에 가해진 최초의 공격이었다. 사이공의 모든 경찰 병력은 물론 특공대, 헌병대, 기무사가 테러 주모자를 잡는데 총동원되었다. 이 작전의 주모자 가운데는 26살의 레홍뜨가 있었다. 결국 레홍뜨와 동료들은 붙잡히고 1962년 4월 25일, 뜨는 사형을 선고받는다. 법정에서 뜨는 "수류탄이 부족해 미 침략자들을 전멸시키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뿐"이라며 마지막 순간까지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감옥 안에서 뜨의 사형 선고 소식을 전해 들은 쩌우는 서럽게 울었다. 그가 사형집행을 당하기 전에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감옥의 모든 연락책을 동원해 쩌우는 짧은 메시지를 전했다. "나는 레홍뜨와 결혼을 서약한 사람입니다. 동지들 중에 누구든 그를 만나게 되면 이 말을 꼭 전해주세요. 나 응우옌티쩌우가 그의 청혼을 받아들인다고". 쩌우의 전언이 뜨의 손에 가닿기까지는 2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그들의 사랑이 결실을 맺기까지는 또다시 10여 년의 세월이 흘러야 했다.

감옥에서도 굴하지 않고 투쟁을 이어가던 어느 날, 쩌우에게 큰 시련이 닥친다. 음식을 주고받는 바구니에 숨긴 비밀 서신이 간수에게 발각된 것이다. 황급히 종이를 삼키려는 쩌우에게 간수들이 달려들었다. 쩌우는 암실에 감금되었고 모진 구타와 함께 밤새 물고문이 이어졌으며 열 손가락에 못을 박고 팔을 잡아당기고 비틀어 관절을 뽑는 끔찍한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쩌우가 목숨을 잃을 지경에 이르자 병원에서 응급처치를 한 후 경범죄 수감자들의 방에 던져 넣었다. 그곳은 나병, 매독, 임질 등 전염병 환자들을 수감하던 감방이었다. 그가 병에 걸려 죽기를 바랐지만 수감자들은 감옥 안에서도 명망이 높았던 쩌우를 극진히 간호한다. 이에 격노한 간수들을 쩌우를 다시 암실에 가두었다. 

사경을 헤매던 쩌우는 자신에게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를 직감한다. 생사를 알 수 없는 뜨의 얼굴이 떠올랐다. 생전에 꼭 한번 만나고 싶었던 호치민 주석의 사진도 떠오르고 고향의 가족들 얼굴도 하나하나 주마등처럼 눈앞에 스쳐갔다. 이대로 죽고 마는 것인가. 그때  쩌우의 눈에 누군가 떨군 머리핀 하나가 보였다. 쩌우는 남은 기력을 모두 짜내 머리핀으로 감방의 벽에 '흰옷'이라는 자작시를 써내려간다. 

흰옷

나의 흰옷은 아직 세상에 물들지 않고 
먼 훗날의 일을 꿈꿔본 적도 없는데
이제 비참한 수렁에 빠졌으니 
이 흰 옷 언제까지나 하얗게 빛나길 바랄 뿐이네

1964년 말, 사이공 정부는 일부 학생들과 기자들에게 쩌우가 감금되었던 동물원의 암실을 견학시켰다. 감방문이 열리자 쩌우가 쓴 시 '흰옷'이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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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5년 5월, 자신이 투옥되었던 감옥 앞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는 응우옌티쩌우.
ⓒ 베트남 사회적기업 아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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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객들이 찍은 사진을 통해 이 시와 응웬티쩌우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그에 대한 불법 구금과 고문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면서 사이공 정부는 어쩔 수 없이 쩌우를 포로 명단에 올려야 했고 이듬해인 1965년 5월 2일, 쩌우는 석방된다.

생사의 기로에서 쓴 네 줄짜리 시가 쩌우의 목숨을 구한 것이다. 쩌우의 시 '흰옷'은 전쟁이 끝나는 날까지 감옥의 정치범들 사이에서 애송되었고, 쩌우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시인 레안쑤언 또한 '흰옷'이라는 시를 지어 쩌우에게 헌사한다. 그리고 훗날 레안쑤언의 이 시가 '사이공의 흰옷'이라는 노래로 만들어져 1980년대 한국의 운동권 학생들 사이에서 널리 구전되어 불리게 된다.  

감옥에서 나온 쩌우는 만신창이었다. 그는 구찌 땅굴에 은신해 몸을 회복하면서 투쟁을 이어갔다. 이전과는 달리 쩌우는 베트남에서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고, 그의 존재는 호찌민 주석에게까지 알려진다. 1969년 5월, 쩌우는 열사 응우옌반쫑이의 아내인 꾸옌과 함께 캄보디아로 건너가 비행기를 타고 하노이에 도착한다. 쩌우의 이야기를 들은 호찌민 주석이 자신의 생일에 초대한 것이다. 지팡이를 짚은 '호 아저씨'가 나타나자 쩌우는 곧장 달려가 그를 부둥켜안았다. 준비한 꽃다발을 선물하는 것도 잊은 채 쩌우는 호 아저씨를 끌어안고 놓을 줄 몰랐다. 호치민은 레홍뜨의 안부를 물었다. 쩌우는 왈칵 눈물만 쏟으며 말을 잊지 못했다.

호찌민을 미소 짓게 한 '2kg'

생일상이 무색할 정도로 소박한 식탁에 마주앉았다. 호찌민은 직접 젓가락으로 쩌우와 꾸옌에게 고기를 한 점씩 집어주었다. "얘야, 너는 너무 말랐구나.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뭐든 식당에 말을 하거라". 호찌민은 쩌우에게 밥을 많이 먹으라고 채근하기도 했다. 같은 해 6월과 7월, 8월까지 쩌우는 호찌민을 네 번 만난다. 그때마다 호찌민은 "여전히 말랐구나. 밥을 잘 챙겨 먹으라니까"라며 정겨운 잔소리로 쩌우를 맞이했다. 그러나 정작 호찌민 자신은 눈에 띄게 쇠약해지고 있었다. 

호찌민을 마지막으로 만난 8월 14일에는 그의 몸 상태가 정말 좋지 않았다. 털옷에 모자까지 둘러쓰고 등나무 의자에 앉아 있는 호찌민은 기침이 끊이지 않았다. 호찌민은 위독한 상태였지만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석하기 위해 먼 길을 떠나는 쩌우와 젊은이들을 배웅하기 위해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나온 것이다. 호찌민은 쩌우를 보자마자 살이 좀 쪘는지부터 물었다. 몸무게를 재어 보니 34.8kg이었다. 체중계를 가져온 비서가 "예전보다 2kg이 늘었습니다"라고 보고하자 호치민은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그것이 호찌민과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1969년 9월 2일, 쩌우가 모스크바에서 열린 세계청년축제에 참가하고 있을 때 호찌민은 눈을 감고 만다.  

1969년 5월, 쩌우는 작가 응우옌반봉을 만났다. 그가 쩌우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고 싶다고 제의했지만 처음엔 거절했다. 자기 자랑을 하는 것 같아 부끄럽기도 했고, 자신이 세상에 노출되면 더 이상의 투쟁 활동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베트남의 대표적인 혁명시인으로 이름을 날리던 또흐가 "남베트남의 학생운동을 알리는 데 큰 기여를 하게 될 것"이라며 쩌우를 설득했다. 결국 쩌우는 응우옌반봉에게 자신이 살아온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그것이 1972년에 장편소설 <흰옷>으로 탄생하게 된다. 

이후 쩌우는 핀란드의 헬싱키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제에도 참석하고 구소련, 중국, 헝가리, 북한 등 각 나라의 독립기념행사에 참석하며 베트남의 민족해방 투쟁을 알리는 일에 앞장섰다. 그 후 하노이에 돌아와 응우옌아이꾸옥대학(오늘날의 호찌민국가정치원)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다시 사이공으로 돌아가 감옥에 갇힌 자신의 애인과 동지들을 석방시키기 위한 구출 투쟁을 이어갔다. 

다시 만난 두 사람, 처음으로 손을 맞잡다

1975년 4월 30일, 드디어 기나긴 전쟁이 막을 내린다. 사이공을 비롯한 남부 베트남이 해방을 맞이하고 모든 정치범들이 석방되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육지에 있는 모든 감옥 문이 열렸지만 쩌우가 애타게 기다리는 레홍뜨는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레홍뜨는 수 천 개의 감옥 가운데 가장 악명이 높았던 꼰다오 섬의 '타이거게이트'에 수감되어 있었다. 그를 비롯한 4300명의 사람들은 5월 4일이 되어서야 육지로 돌아와 사람들과 종전의 기쁨을 나눈다. 

무려 2만 명에 가까운 목숨을 앗아간 꼰다오 감옥에서 살아 돌아온 레홍뜨도 15년 만에 쩌우와 감격적인 재회를 하게 된다. 5월 5일 밤 10시, 호치민시 10군의 인민위원회 주석 응웬티쩌우가 차를 타고서 이제 막 사이공에 도착한 뜨의 앞에 나타났다. 오랜 세월 쇠고랑을 차고 있었던 뜨의 두 발은 형편없이 굽어져 있었다. 수년간 전장을 누비고 감옥에서 온갖 고초를 겪은 두 사람은 아직 젊은 나이에도 흰머리가 무성했다. 그저 눈물만 흘릴 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굳은 언약은 없었어도 서로에 대한 사랑을 잊지 않았던 두 사람이 처음으로 마주잡은 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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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홍뜨(왼쪽)와 응우옌티쩌우의 결혼식.
ⓒ 베트남 사회적기업 아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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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8월 19일, 두 사람은 오랜 기다림 끝에 부부의 연을 맺는다. 전쟁이 막 끝나고 너 나 할 것 없이 가난했던 시절이라 결혼식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동료들이 추렴해 모은 돈으로 차린 음식은 고작 떡 몇 접시와 차가 전부였다.

그러나 가족, 친지들만 불러 조촐하게 치르려던 결혼식에는 '세기의 사랑'의 주인공을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성황을 이루었다. 

응웬티쩌우와 레홍뜨의 이야기는 밤이 깊은 줄도 모르고 이어졌다. 못다 들은 이야기는 다음날을 기약해야 했다. 마지막으로 응우옌티쩌우에게 어린 시절의 꿈을 물었다.

고향인 비엔호아에 살 때, 약을 구하지 못해 죽어가는 아이들을 보고 간호사가 되고 싶었고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이 학교에 가지 못해 글자도 모르는 것이 안타까워 선생님을 꿈꾸기도 했다고 한다. 공직에서 은퇴한 그는 호치민시 어린이보호위원회에서 오래 활동했다. 어린 시절의 꿈을 말년에 펼친 셈이다. 그는 자신이 살아온 삶에 당당했고 후회는 없어 보였다. 인터뷰 내내 여전히 사회주의에 대한 이상과 자신의 신념에는 변함이 없다고 수차례 힘주어 말하곤 했다. 

우리가 서둘러 떠날 채비를 하자 재빨리 부엌으로 달려가 용과를 한 아름 안겨주는 쩌우의 모습은 인정 많고 푸근한 동네 할머니를 닮아 있었다. 골목을 다 빠져나갈 때까지 손을 흔드는 노부부의 모습이 점점 멀어지면서 가로등 아래 백발만 하얗게 빛났다. 순간, 언제까지나 하얗게 빛나길 바라던 그 흰옷이 살포시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베트남 사회적 기업 아맙에 실린 글을 필자 허락을 구해 실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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警, 40만 국민서명 가로막아…“우리가 전염병 환자인가”


4.16연대, 세월호 시행령 개정 촉구 서명 靑에 전달하려다 3시간 째 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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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주희 기자  |  balnews2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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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6.30  17:43:09
수정 2015.06.30  19: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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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o발뉴스(강주희)
세월호 유가족들의 국민서명서 전달이 결국 경찰에 의해 가로막혔다.

 

4.16 가족협의회(이하 가족협의회)와 4월 16일의약속국민연대(이하 416연대)는 30일 오후 2시 서울 청운효자주민센터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과 특별법 시행령 개정을 촉구하는 국민서명을 청와대에 전달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16일부터 시작한 서명운동에는 39만 8727명의 국민들이 참여했다. 전명선 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은 “국민의 마음이 모인 이 서명용지야 말로 박근혜 대통령이 무엇을 해야하는지 일깨워주는 중요한 서명지”라고 말했다.

기자회견을 마친 유가족들은 서명서가 담긴 박스를 들고 청운효자주민센터 우측으로 이동했다. 청와대로 이어진 길이다. 박스는 전명선 위원장, 유경근 집행위원장 등 13명의 대표 손에 들렸다. 그러나 청와대로 향한 길은 곧바로 경찰에 막혔다.

#. 오후 2시 30분

이날 경찰은 청운효자주민센터 우측을 이중삼중으로 막았다. 진압용 버스 3대도 사거리 한켠에 들어섰다. 유가족들의 머리 위로 또 다시 채증 카메라가 등장했다. 경찰의 제지에 가족들은 “민원을 제기하러 가는건데, 왜 막느냐”며 소리쳤다. 그러나 경찰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 ©go발뉴스(강주희)
일부 유가족들이 강하게 항의하자 경찰은 몸으로 이들을 밀어냈다. 경찰관 폭행시 현행범으로 체포하겠다는 경고방송이 이어졌다. 이태호 세월호참사 국민대책회의 공동운영위원장은 “종로서 경비과장은 비겁하게 숨어있지 말고 막는 이유를 설명하라”고 외쳤다.

 

#. 오후 3시

“민원을 제기하러 가는거잖아요.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이 아닙니까? 우리가 무슨 전염병 환자입니까?”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박주민 변호사의 말이다. 박 변호사는 “기자회견에 앞서 경찰이 박스 안에 위험 물질이 포함되어 있을지 모른다며 일부 박스를 개봉하기도 했다. 내용물까지 다 확인했는데 이렇게 이중 삼중으로 막는 이유를 모르겠다”며 답답해 했다.

애초 대표자 13명이 서명서를 전달하기로 한 것을 경찰이 일방적으로 3명으로 줄인 점도 비난했다. 박 변호사는 “경찰이 가족들에게 민원 제기 인원을 3명이라고 알렸다. 어떠한 설명도, 타당한 이유도 없었다”고 지적했다.

   
▲ ©go발뉴스(강주희)
#. 오후 3시 15분

 

서명서 박스를 들고 있던 전명선 위원장과 유경근 집행위원장이 길 위에 주저 앉았다. 옆에 있던 이태호 공동위원장은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구었다. 지친 나머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김혜진 공동위원장은 허리에 손을 올린 채 거친 숨을 골랐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기자회견이 끝난 지 1시간이 지났지만 청와대로 향한 길은 여전히 막혀 있었다. 노란색 경찰 통제선은 주민센터 우측으로 점점 늘어났다. 경찰은 이후 세 차례의 해산방송을 하며 가족들을 압박했다. 경고방송을 한 경비과장은 이날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세월호 유가족 홍영미씨(단원고 이재욱군의 어머니)는 “국민들의 세금으로 경찰이 있는 건데 부끄럽지도 않느냐”며 분통을 터트렸다.

   
▲ ©go발뉴스(강주희)
#. 오후 4시

 

유가족들과 경찰의 충돌이 주민센터 곳곳에서 일어났다. 유가족 최경덕 씨(단원고 최성호군의 아버지)는 화단을 넘어 가려던 중 경찰에 의해 제지 당했다. 최씨는 “민원을 제기하러 가는 것 뿐이다. 경찰이 막을 이유가 없다”며 거칠게 항의했다. 이원호 국민대책회의 운영위원은 “국민의 민원을 막으면서 뭐가 자랑스러워 채증까지 하고 있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유경근 위원장은 “민원 하나 전달하는 일에도 경찰이 막고 있다. 서명은 가장 최소한의 권리지, 권리행세가 아니다”며 경찰의 일방적인 제지를 비난했다.

#오후 5시 20분

기자회견 후 끝난 지 2시간이 지났지만 상황은 좀처럼 진전되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한 시민이 “자기 자식 팔아먹은 사람들이 뭐하는 짓이냐”며 막말을 하자 유가족들은 거칠게 항의했다. 가족들이 막말을 한 사람을 데려오라고 요청했지만 경찰은 이를 제지했다. 황필규 변호사는 “정식으로 모욕죄로 고발조치 하겠다”고 항변하자 이 남성은 카메라로 유가족들을 찍으며 도망갔다.

   
▲ ©go발뉴스(강주희)
황 변호사는 “경찰이 질서를 유지하고 상황을 대처하는 것은 당연한 역할이지만 오늘 했던 역할은 정당하지 않은 행동”이라며 “가족들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사람을 뒤로 빼돌리고 보호하는 게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알길 바란다”고 주장했다.

 

하루 반나절이 지난 오후 6시. 유가족들의 성토가 이어졌다. 마이크를 잡은 홍영미씨는 “국가의 원수가 국민들의 목소리를 거부하고 있다. 비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며 국민들이 원하는 진상규명을 반드시 하고 책임자를 처벌해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들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홍씨의 발언에 유가족들은  “진상규명 밝혀내자. 인양과정 공개하라”며 구호를 외쳤다.

   
▲ © go발뉴스(강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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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당 몰라도 노회찬은 안다 '진보 장기집권'이 정치적 목표"

 

[정의당 당권주자 인터뷰④] 노회찬 후보

15.06.30 11:26l최종 업데이트 15.06.30 11:26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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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회찬 정의당 당대표 후보.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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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은 역시 노회찬이었다. 29일 오후 <오마이뉴스>와 인터뷰 직전까지 그는 정의당 팟캐스트 방송 '노유진의 정치카페'를 녹음했다. 그를 비롯해 당 대표 경선에 출마한 후보들이 출연해 토론을 벌였다. 노 후보는 녹음을 마치고 선거사무소에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그는 숨을 고를 틈도 없이 사전에 보낸 '인터뷰 질문 개요'를 훑어 읽고 곧바로 기자의 질문에 답하기 시작했다. 인터뷰 중반에는 개요에 없는 질문이 더 많이 나왔지만 막힘이 없었다. 

노 후보가 '진보 정치의 스타'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거의 없다. 특히 그의 화려한 입담과 토론 기술은 정치인 중에서도 '톱클래스'라고 할 수 있다. 진보정당의 인사 중에 선거도 가장 많이 치렀다. 그래서 '인기'는 그의 가장 큰 무기다. 그 스스로도 다른 후보와 구별되는 강점으로 "대중성에 기반을 둔 확장성"을 꼽는다. "정의당을 잘 몰라도 노회찬을 아는 사람은 많다"는 것이다. 그가 이번 경선에서 제기하고 있는 '강한 정당'도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한다.

노 후보는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오므로, 권력의 지지를 많이 받는 당이 강한 당"이라면서 "정의당은 좋은 당이지만 힘이 약하다, 국민들이 좋게 평가받지만 표는 안 준다"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그는 "건강하고 좋은 재료로 음식을 만들었는데 인기는 없다, 맛이 없거나 먹기 불편해서일 것"이라며 "당 대표가 된다면 맛도 있고 먹기도 편하게 만들겠다, 정의당의 '수석 요리사'가 돼 당의 지지율을 8%까지 끌어올리겠다"라고 말했다. 

한편, 노 후보는 최근 조성주 후보의 출마로 제기된 세대교체 요구에는 부정적인 견해를 내보였다. 그는 "이제까지 정당 리더는 노선으로 교체되지 나이로 교체되지는 않았다"라며 "영국의 블레어 총리는 40대라서 당 대표가 된 게 아니라 그가 들고 나온 'New labor'라는 신 노선이 많은 당원에게 채택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우리 당도 노선으로 리더십이 교체돼야 국민의 마음을 얻고 권력을 쟁취할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다음은 노 후보와 나눈 일문일답을 정리한 것이다.

"개인의 입신양명 위해 운동하고 정치해온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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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회찬 정의당 당대표 후보.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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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초 노회찬·심상정 후보의 '빅 매치'가 예상된 가운데, 조성주 후보가 '다크호스'로 떠오르면서 선거구도가 변하는 모습이다. 현재 선거구도를 어떻게 보고 있나?
"바람직한 구도다. 자칫 '노-심' 구도로 갔으면 유권자들이 심심하거나, 따분하거나, 어쩌면 짜증이 날 수도 있었다. 조성주 후보가 활기차게 덤벼들고, 노항래 후보도 강한 주장을 내세우고 있다. 흥행에 성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용감하고 패기 있게 도전한 두 후보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 평소 대중적 인기가 높고 촌철살인으로 주목을 많이 받았는데 이번 선거에서는 노 후보가 잘 부각되지 않는다는 평가가 있다.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나?
"내가 원래 그렇다. 같은 편끼리 경쟁하는 데 '촌철살인'할 필요는 없지 않나. 대신 적들하고 싸울 때는 힘도 나고 '번쩍번쩍'한다. 박근혜 대통령과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의 갈등 등을 두고는 제대로 할 말을 한다. 그런 부분에서는 여태까지 활약한 게 있으므로 당원들이 좋게 평가해주시지 않을까 싶다."

- 조 후보가 출마선언문을 통해 노회찬 후보를 '진보정치 1세대'라고 평가했다. 어떻게 생각하나?
"'좋다' 혹은 '나쁘다'로 말할 수 없다. 사실이다. '어디까지가 1세대인가'를 두고 논쟁이 있을지는 몰라도 그 논쟁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 나는 당을 만든 창업세대다. 당연히 1세대일 수밖에 없다. 다만, 생물학적 세대교체가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지 여부는 문제다. 

이제까지 정당 리더는 노선으로 교체되지 나이로 교체되지 않았다. 영국의 토니 블레어는 40대라서 당 대표가 된 게 아니었다. 그가 들고 나온 'New labor'라는 새로운 노선이 많은 당원에게 채택됐기 때문이었다. 우리 당도 노선으로 리더십이 교체돼야 국민의 마음을 얻고 권력을 쟁취할 수 있다."

- 최근 화제가 된 한 노동당 당원은 "노·심·조(노회찬·심상정·조승수)의 문제는 공은 사유화하고 과는 공유화한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관련기사 : "노심조는 공은 사유화하고 과는 공유화한다").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진보신당 시절인 2010년에 서울시장 후보로 나가서 많은 욕을 들었다. 다음 선거에서 어려워질 수도 있다는 지적까지 받을 정도였다. 그런데 왜 나갔나? 제 공을 위해 나갔나? 진보신당을 위해서 나갔다. 민주노동당을 탈당해서 진보신당으로 오는 과정도 그랬다.

국회의원 재선을 위해 좀 더 쉬운 길을 갔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애써 험한 길을 택했다. 개인의 입신양명을 위해 운동하고 정치해온 게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잘나서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렇지만 공을 사유화했다는 지적은 받아들이지 못하겠다."

- 정의당이 창당한 지 3년이 됐다. 그러나 선거에서 성적은 좋지 않았고, 지지율 역시 답보 상태다. 이 부분에 노 후보의 책임이 있다는 지적도 있다. 
"(나는) 진보정당 전체가 어려워진 상황에 책임이 큰 사람 중 하나다. 시인한다. 여러 차례 유감도 표명했고, 성찰의 시간도 갖고 있다. 그러나 정의당만 놓고 보면, 꼭 지지율이 정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당이 처음 출발할 때 옛 통합진보당과 싸우고 나왔다. 온몸이 만신창이가 됐다. 진보당을 탈당하는 과정에서 떨어져나간 분도 많다. 나오긴 했지만 국민들로부터 따가운 시선을 받았다. 

이후 진보당은 폭격을 맞아 분해됐고, 진보 전체가 최악의 상황에 내몰렸다. 정의당 지지율은 1%까지 떨어졌다. 다행히도 지금은 5%까지 올랐다. 천호선 지도부를 비롯해 다들 애를 많이 썼다. 조직을 잘 유지·보존·생존시켰다. 그렇다고 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내가) 이번 당 대표 경선에 출마한 이유다."

"정의당은 건강한 음식이지만 맛이 없거나 먹기 불편"

- 당 대표가 되면 '강한 정의당'을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강한 정당'은 다른 후보들도 똑같이 말하고 있다. 노 후보의 주장은 무엇이 다른가? 
"후보마다 '강한 당'의 의미가 다르다. 국민의 지지를 많이 받는 게 강한 당이라고 생각한다. 행동이 거칠거나, 주의·주장의 수준이 높거나, 과격하게 발언한다고 해서 강한 건 아니다. 제왕적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만으로도 당이 강해지진 않는다.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오므로, 권력의 지지를 많이 받는 당이 강한 당이다.

지금 강한 정당은 새누리당이다. 불행하게도 가장 나쁜 당이 가장 강한 당이 됐다. 정의당은 좋은 당이지만 힘이 약하다. 국민들이 좋게 평가받지만 표는 안 준다. 건강하고 좋은 재료로 음식을 만들었는데 인기는 없다. 맛이 없거나 먹기 불편해서일 것이다. 당 대표가 된다면 맛도 있고 먹기도 편하게 만들겠다. 정의당의 '수석 요리사'가 돼 당 지지율을 8%까지 끌어올리겠다."

- 그럴 경우 '지지율 만능주의'에 빠질 수도 있지 않겠는가. 당이 지지율만 신경 쓴다면 강한 정당이 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지지율에만 매몰돼서는 안 된다는 지적은 온당하다. 하지만 우리 당은 처지가 다르다. 우량주인데 저평가받고 있다. 우리의 정책이나 노력들이 어떤 것인지 잘 보여드려서 제대로 평가받겠다는 것이다. 

나쁜데도 불구하고 우리 실력 이상으로 지지율 받아내겠다는 주장이 아니다. 국민들은 합리적이고 건강한 진보정당에 표를 줄 용의가 있다. 그런데 그분들이 왜 우리를 선택하지 않는지 스스로 돌아봐야 한다. 정책의 내용, 제시 방식, 시점 등 여러 가지를 갈고 닦는 노력이 필요하다."

- 정당 지지율을 올릴 구체적 방법이 있나?
"'열심히 하자, 언젠가 세상이 알아주겠지'라는 식으로 막연하게 일하지 않겠다. 정의당이 비정규직을 위한 정당이 되겠다는데, 왜 그들은 우리를 안 찍을까.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직접 물어보고 바로잡으면서 적극적으로 국민 마음에 들도록 노력하겠다. 이렇게 했는데도 지지율이 오르지 않으면 대국민 시위라도 하겠다. 우리 당 지지율을 높여야 정치가 바뀐다고 설득하겠다. 청년 아르바이트 노동자들이 '시급 5000원 받아서 어떻게 먹고 사냐'고 호소하듯이, 좀 더 우리를 지지해달라고 하소연이라도 하겠다."

"지금은 전시 상황... 나는 전시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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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회찬 정의당 당대표 후보.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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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 선출되는 당 대표는 내년 총선에서 내부를 단결시키고 외연을 확대해야 한다. 노 후보는 '총선 리더십'으로 적합한 인물인가?
"(나는) 가장 검증된 후보다. 실적이 있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 지지율이 2%일 때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았다. 당시 헌법소원으로 1인 2표제(지역구-비례대표)도 얻어내고, 여러 전술을 써서 2002년 지방선거 때 정당득표율 8.13%를 기록했다.

2004년 총선 때는 정당명부 투표율 13.4%를 얻었다. 다들 비례대표 후보 8번인 노회찬이 당선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당선됐고, 김종필까지 정계은퇴 시켰다. 그렇게 10명의 의원이 당선됐다.(지역구 2명, 비례 8명) 물론 지금은 여건이 다르지만 과거의 쾌거를 이룬 경험을 토대로 열심히 뛰겠다." 

- 4명의 후보 중 노 후보만의 강점은 무엇인가?
"대중성에 기반을 둔 확장성이다. 정의당을 잘 몰라도 노회찬을 아는 사람은 많다. 깨끗한 정치인, 정의롭고 용기 있는 정치인, 정책 능력이 있는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그런 호감과 지지가 당으로 연결이 안 됐다. 내가 당의 얼굴이 되면 당의 대중성과 지지를 확장시킬 수 있다. 만약 평시라면 다른 사람이 당 대표를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지금은 전시 상황 아닌가. 나는 전시용 대표다. 전쟁터에 필요한 장수로 역할을 다하겠다."

-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2.8 전당대회 때 한 말과 비슷하다.
"그럼 결과도 비슷하겠다(웃음)."

- 지난해 7.30 재·보궐 선거에서 새정치연합 후보의 사퇴에도 패배했다. 야권연대가 아직 유효하다고 생각하나?
"서울 동작을 재보선 사례만으로 야권연대가 안 된다고 볼 수는 없다. 그때는 야권이 제대로 연대했으면 이기고도 남는 선거였다. 그러나 새정치연합 내부 공천 파동 등으로 야권 지지자들이 고개를 돌려버린 상황이었다. 그 공천파동과는 아무 상관없는 나에게도 시선이 싸늘했다. 그나마 후보 단일화가 되고, 내가 후보가 됐으니까 그만큼의 득표율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 내년 총선에서도 새정치연합 또는 천정배 의원 등과의 야권연대가 필요하다고 보는 건가?
"정의당의 기본 노선은 '야권과의 협력적 경쟁관계'여야 한다. 정책은 날카롭게 경쟁하고, 총선·대선 등의 큰 선거에서는 국민의 뜻을 받아서 연대해야 한다. 2016년 총선도 큰 선거이므로 연대가 필요하다. 다만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내용과 방식을 갖춘 연대여야 한다.

선거제도처럼 큰 개혁 과제를 놓고 구체적 합의가 이뤄지면 연대를 위해 결단을 내릴 수도 있다. 전략적으로 협력하되, 정책으로는 경쟁하는 '리딩(leading) 그룹'으로 역할을 하겠다. 정의당이 가장 큰 당은 아니지만, 독특한 원내 제3당 아닌가. 진보정당으로서 내년 선거판에서 상생할 수 있는 선거연대를 주도해나갈 수 있다."

- 내년 총선에서 서울 동작을과 노원병 중 어느 지역으로 출마할 것인가?
"출마 지역을 어떤 시기에 어떻게 정하느냐도 주요 선거행위다. 당과 상의한 뒤 때가 되면 결정하겠다."

- 제3의 지역으로 나갈 가능성도 있나?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지난 재보선 때 동작을에 출마한 것도 당에서 정했다. 나는 어디든 나가야 하는 사람이다. 반드시 3선으로 국회에 복귀하겠다."

"진보 결집, 다원민주주의 실현해야 한다"

- 오는 9월까지 진보재편을 이루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총선을 위해 결집을 서두르면 또다시 분열 등의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고 우려한다.
"진보재편을 선거용으로 보지 않는다. 진보가 결집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따른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국민에게 책임 있는 정치세력으로 인정받기 위한 첫걸음이다. 정의당은 출발할 때부터 '혼자 가지 않겠다, 흩어진 진보세력의 구심점이 되겠다'라고 약속했다.

마침 선거를 앞둬서 그렇지, 진보재편 논의는 계속 진행해왔다. 진보재편은 이번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계속 모아나갈 것이다. 여러 강물과 시냇물이 큰 강으로 합류하듯이, 가장 낮은 데 위치한 바다로 갈 동안 계속 지류를 모아내겠다.

우리는 두 가지 지적에 답하는 차원에서 질적으로 변화해야 한다. 하나는 '왜 큰 차이도 아닌 것 가지고 분열했는지', 또 하나는 '왜 국민 눈높이에 맞추지 못하는지'다. 이중 전자를 해결하려면, 진보 재결집으로 싸우지 않고 공존하는 다원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한다."

- 노동당 내부 반대 등으로 통합이 요원해질 수도 있지 않은가?
"진보 재결집에 반대하는 분들까지도 포기하지 않겠다. 그분들은 나름의 문제의식으로 그런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지, 궁극적으로는 진보가 하나 되는 데 동참할 것이다. 문제는 시간과 과정이다. 

한 번에 다 안 된다면, 긴 시간을 인내할 수 있어야 한다. 만나는 시간과 방식 등은 실사구시적인 방식으로 풀어나가겠다. 힘과 힘의 대결로 가지 않겠다. 손과 손을 마주 잡는 방법으로 가겠다. 언젠가 같이할 분들이라 생각하고 더 좋은 관계로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겠다."

- 진보신당 내부의 반대에도 2011년 통합진보당 창당 과정에 합류했다. 당시 그런 행보를 비판했던 사람들과 감정적 앙금이 남아있지 않나?
"제가 누구를 탓하겠나. 당시에는 진보정당의 가치를 지켜나가면서 더 큰 대중정당을 만드는 것이 국민의 요구라고 생각해 과감히 선택했다. 그 과정에서 함께한 분들과 충분히 더 얘기하지 못하고 임박한 상황에 맞춰 결단 내렸다. 많은 분들에게 상처와 실망을 안겼다. 그분들에게 미안할 뿐이다."

"언변 때문에 정책능력 부각 안 돼 억울하다"

- 온라인 팟캐스트 <노유진의 정치카페>를 오랫동안 진행해왔다. 어떤 성과가 있었다고 보는가?
"<노유진의 정치카페>를 듣고 정의당에 입당했다는 분들이 꽤 있다. 하지만 팟캐스트를 애청하는데도 정의당에 표를 안 주는 사람들에게 더 관심이 있다. 그분들의 마음을 어떻게 가져올 것인가가 과제다."

- 노 후보는 대중에게 가장 잘 알려진 진보 정치인이다. 일각에서는 너무 인기에 집중하는 것 아니냐고 우려하기도 한다.
"억울하다(웃음). 사람들이 말을 정말 잘한다고 한다. 한국에서 가장 말 잘하는 정치인이라는 말을 들을 때도 있다. 되레 그런 칭찬 때문에 얼마만큼 일을 잘하느냐가 부각 되지 않는다.

그동안 정치인으로 많은 일을 했다. 헌법소원을 제일 많이 낸 정치인으로서 1인2표제 도입을 이끌어냈다. 영세 자영업자들을 위해 신용카드 가맹점 수수료 인하도 이뤄냈다. 덕분에 미용사협회와 안경사협회 등에서 지금까지도 나를 도와준다. 내가 잘하는 건 말이 아니라 일이다. 언변 때문에 자꾸 정책적 능력이 가려지는 듯해 속상하다."

- 당 대표가 되면 가장 먼저 어떤 일을 해보고 싶나?
"박근혜 정부의 복지공약을 재검토하겠다. 앞으로 우리는 과거처럼 무상급식 등을 두고 원조 경쟁을 펼치면 안 된다. 진보정당으로서 더 많이 주는 복지 경쟁은 하지 말자고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 복지를 제대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재정에 우선순위를 두는 마스터플랜을 짜야 한다.

먼저, 박 대통령의 복지공약이 어느 정도 진척됐고, 문제는 없었는지 각 당이 모여 재검토해야 한다. 반성도 해야 한다. 대한민국 정치권은 1차 분배 구조가 악화되는 상황을 방치해두고 복지로만 해결하려고 했다. 1차 분배과정도 함께 수술해야 한다. 특히 정의당은 더 이상 반짝이는 아이디어, 조금 더 센 메시지로 승부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책임지는 정당으로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 노 후보의 정치적 목표는 어디까지인가? 대선 출마도 생각하나?
"당근이다(당연하다). 정권교체에 힘을 보태겠다. 이왕이면 제대로, 좋게 이겨서 진보진영이 20년 집권할 수 있도록 만들고 싶다. 그래야 세상이 달라진다. 우연히 이기면 또 빼앗긴다. 오래 집권하려면 처음부터 잘 이겨야 한다. '진보 장기집권'이 정치적 목표다."

○ 편집ㅣ김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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줬다 뺏는 박근혜, "뻔뻔해도 유분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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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015/06/30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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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6/30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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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줬다 뺏는 기초연금
 
 
7월이면 기초연금이 도입된 지 1년이다. 기초연금만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다. 무엇보다 '줬다 뺏는 기초연금' 때문이다.

지난 1년째 기초생활수급 노인들은 매달 25일 기초연금 20만 원 입금을 통장에서 확인하고 다음 달 20일 기초생활 생계 급여에서 같은 금액을 공제당하고 있다. 그 수가 무려 40만 명에 달한다. 박근혜 정부에서 노인 70%가 대부분 기초연금만큼 현금 소득이 늘었는데, 유독 가장 가난한 기초생활수급 노인들만 여기서 배제되고 있다.

노인들, 이제는 한숨만…

처음엔 이분들은 '어찌 그럴 수 있느냐'며 분통해 하셨는데, 이제는 오직 한숨만 쉬신다. 정부로부터 생계 급여를 받는 주제에 무슨 말을 또 하냐며 자신을 탓하신다.

하지만 정작 부끄러워할 사람들은 이분들이 아니다. 이러한 사태를 초래하고도 방치하는 우리 모두가 책임자이다.

작년 기초연금법이 국회에서 통과될 때까지 아무도 이 문제를 제기하지 못했다. 아니 모르거나 안중에 없었다. 정부는 이를 알리지 않았고, 국회와 복지 시민단체들은 오로지 국민연금과 기초연금 연계 문제에만 정신이 쏠려 있었다.

정부, 법으로 기초연금 보장하고 시행령으로 박탈

우선 박근혜 정부의 뻔뻔함이 도를 넘는다. 기초연금법에선 20만 원을 보장해 놓고, 다른 법 시행령에서 이를 뒤엎고 있기 때문이다.

현행 기초 연금은 국민 연금 가입 기간에 따라 금액이 삭감되는 구조를 지닌다. 그럼에도 결코 삭감되어선 안 되는 대상이 기초연금법에 명시돼 있다. 바로 장애인연금 수령자, 기초생활수급 노인 등이다. 보건복지부도 기초연금법 통과를 주문하면서 보도 자료를 통해 이를 홍보하기도 했다.

"기초생활수급자의 경우에도 기초노령연금을 신청하는 경우 지원 대상이 되며, 기초연금의 경우 20만 원을 지원받을 수 있도록 조치(기초연금법안 제5조 제6항)" (보건복지부 보도 설명 자료, 2013년 12월 27일)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기초연금법 제정 이후 관련 법률인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시행령을 정비해야 했다. 현재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시행령을 보면, 소득 인정액 범위에 기초연금이 들어가 있다. 기초생활수급 노인들이 기초연금을 받더라도 이 금액이 생계 급여에서 공제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 단어가 소득 인정액 범위에서 삭제돼야 한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시행령>

제3조(소득의 범위) ① 법 제2조제9호에서 "실제 소득"이란 다음 각 호의 소득을 합산한 금액을 말한다.
1. 근로 소득... 2. 사업 소득.... 3. 재산 소득.... 4. 이전 소득
다. 「국민연금법」, 「기초연금법」, 「공무원연금법」, 「군인연금법」, 「별정우체국법」...

그런데 정부는 이를 그대로 놔두었다. 이는 시행령이 상위 법 조항을 무력화하는 불합리한 경우이며,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 보건복지부의 설명과도 어긋난다.

작년 9월 추석을 앞두고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노인복지관을 방문해 '개선하겠다' 약속하고 올해 2월 당시 이완구 국무총리가 남윤인순 의원 질문에 "보완 대책을 검토하겠다"고 답변했다. 단지 말뿐이다.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다.

국회, 법안들 낮잠만 재워

둘째,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국회의 의지, 능력이 너무 빈약하다.

복지 확대에 소극적인 새누리당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제1야당 새정치민주연합의 활동은 실망만을 안겨준다. 작년 기초연금법 제정 과정에서 새정치민주연합은 오로지 다가오는 지방 선거에서 악재가 되지 말아야 한다는 정치 공학 문법에만 매달렸다.

서둘러 통과시키다 보니 기초연금법에 기초연금액 조정 원리가 소득 연동에서 물가 연동으로 대체되었음에도 별다른 대응이 없었다. 사실 황당한 법안 심의이다(당장 기존처럼 소득 연동이었으면 올해 4월부터 기초연금이 3.2% 올라 20만6400원이었어야 했건만, 물가와 연동되는 바람에 1.3%만 인상돼 20만2600원에 그쳤다. 이러한 격차는 시간이 흐를수록 커질 것이다).

'줬다 뺏는 기초연금' 역시 그렇다. 기초연금법 심의과정에서 이 문제는 아예 제기조차 되지 않았다. 기초연금법 제정 이후 이 문제가 언론을 통해 널리 알려졌지만, 이를 시정하려는 활동도 미미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새정치민주연합 이목희, 새정치민주연합 양승조, 정의당 박원석 의원이 법안을 제출했으나, 보건복지위원회는 이 법안들을 계속 낮잠만 재우고 있다.

복지·시민단체, 더 분발해야

셋째, 내가 활동하는 단체를 포함해 복지·시민단체들도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작년 5월 기초연금법이 국회를 통과한 직후 한 언론사가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에 물었다. "혹시 기초연금이 도입돼도 기초생활수급 노인들은 못 받는다는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는데, 맞는지요?" 아차 싶었다. 후속 조치로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시행령을 손보지 않으면 그러할 위험이 컸다.

서둘러 문의했건만 보건복지부는 시행령을 바꿀 의사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기존 기초노령연금에서도 이 문제가 존재했으므로 국회가 기초연금법 제정 과정에서 반드시 정부에게 '시행령 개정' 약속을 받았어야 했는데 이를 놓친 것이다. 

일부 복지학자들은 기초연금을 소득 인정액에서 빼면 기초생활보장제의 '보충성 원리'가 무너진다고 우려한다. 설령 이러한 논리에 따른다면, '줬다 뺏는 기초연금'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노인 가구 유형 최저 생계비의 재설계를 포함해 전체 최저 생계비 체계를 바꿔야 하는데 이를 위한 활동이 눈에 띄지 않는다. 이 작업에 시간이 걸린다면 과도적이라도 기초연금을 소득 인정액에서 제외하는 조치가 반드시 필요하다. 복지 전문가들의 적극적인 참여도 요청된다.

시행령의 '기초연금' 4글자만 삭제하면 돼

작년 6월 노년유니온, 세상을 바꾸는 사회복지사,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등 20개 단체들이 '빈곤 노인 기초연금 보장 연대'를 구성했다. 청와대 앞에서 '도끼 상소'를 올리고, '대통령직도 줬다 뺏을까요?', '줬다 뺏는 기초연금, 불효정당 새누리당' 퍼포먼스 등 다양한 활동을 폈으나 아직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역시 40만 기초생활 수급 노인들에게 송구하다. 미리 챙기지 못하고 법안이 통과된 이후에야 움직였다. 그만큼 더 열심히 활동하겠다 다짐한다. 해법은 간단하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시행령에서 '기초연금' 네 자를 삭제하라!

기초생활수급 노인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 보세요.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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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는 왜 유승민을 죽여야만 하나?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5/06/30 12:06
  • 수정일
    2015/06/30 12:06
  • 글쓴이
    이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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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적 보수를 주장하며 차세대 리더로 주목받고 있는 유승민 의원
 
임병도 | 2015-06-30 09:58:23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박근혜 대통령이 ‘배신의 정치’를 말하며 유승민 의원을 죽이려고 합니다. 새누리당 내부에서도 친박계를 중심으로 유승민 의원이 사퇴해야 한다는 주장이 거세지고 있습니다. 새누리당 최고위원 8명 중 4명이 유승민 의원이 사퇴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국회법 개정안’때문이라고 하기에는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 친박계의 유승민 사퇴 요구는 너무 과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도대체 왜 박근혜 대통령은 유승민 의원을 그토록 몰아내려고 하고 있을까요? 그 이유를 알아봤습니다.


‘합리적 보수를 주장하는 유승민’

유승민 의원의 지역구는 ‘대구 동구 을’입니다. 유승민 의원의 지역구가 대구이니, 박근혜 대통령의 후광 때문에 당선됐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대구가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기반인 것은 맞지만, 100% 박근혜 대통령 때문은 아닙니다.

유승민 의원은 17대 비례 대표로 국회에 들어왔다가 사퇴하고 10.26재보궐선거 대구 동구 을 지역에 출마, 다시 국회로 들어옵니다. 유승민 의원이 대구에서 출마한 이유는 대구가 아버지 유수호 전 의원의 지역구였기 때문입니다.

유승민 의원의 아버지 유수호 전 의원은 대구지방법원 판사 출신으로 ‘여당의 양심세력, 여당의 비판세력’을 내세웠던 대구 중구의 13대, 14대 국회의원이었습니다.1 유승민 의원은 경북고등학교 출신의 전형적인 대구 토박이였던 아버지 유수호 전 의원의 지역 기반을 토대로 대구에서 출마해 당선됐지, 결코 박근혜 때문만은 아닙니다.

판사출신이었던 유수호 전 의원은 14대 국회가 끝나면서 본업인 변호사로 돌아가겠다며 15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습니다. ‘과욕이 되기 전 그만두는 게 온당하다고 판단했다’는 그의 말을 통해 전형적인 권력만 추구형 보수만은 아니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2 

유승민 의원은 무조건 보수를 고집하거나 편을 들지 않는 스타일입니다. 2013년 합창의장 인사청문회에서는 “진보정권, 좌파정권이라고 비난받던 노무현 정권은 자주국방을 위해 8.8%씩 국방예산을 늘렸는데, 국가안보를 생각하는 보수정권이라는 이명박·박근혜 정권에서 연평균 5.3%, 4.1% 늘린 것은 국가안보를 생각하는 보수정권이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면서 보수정권이 내세우는 보 프레임의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2014년 새누리당 사회경제적특위에서는 “특위가 출범하고 자문위원이 확정되니까 외부에서 새누리당이 너무 왼쪽으로 가는 게 아니냐며 약간 이념적 안경을 끼고 보는 것 같은데 저는 위원장으로서 그런데 전혀 개의치 않는다. 보수냐 진보냐가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센터, 마을기업 등과 관련해서 이 나라가 가야 할 옮은 방향이라면 이념적 색깔 씌우기에 전혀 구애받지 않겠다”며 진보에 가까운 정책을 강행하기도 했습니다.

유승민 의원을 가리켜 ‘합리적 보수’라고 합니다. 그의 행동과 발언, 정책이 보수세력의 전형적인 모습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에서 약간씩 좌에 치우치거나 진보와 보수를 정확히 나누지 않는 특징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차세대 리더로 주목받고 있는 유승민 의원’

유승민 의원이 여권 내 차기 대선주자 지지율 조사에서 4위에 올랐습니다.3 박근혜 대통령과 대립하고 있는 모습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그는 차세대 리더로 주목받고 있었습니다.

▲대구, 경북 광역의원들을 대상으로 한 차기 정치적 리더 조사 ⓒ 대구일보

대구일보가 2014년 말에 대구, 경북 시도의원을 대상으로 차기 정치 리더를 조사한 결과, 대구시의원들은 유승민 새누리당 의원을 뽑았습니다.4 유승민 의원은 다른 정치인들에 비해 지역구와 상관없이 고른 지지를 받았습니다. 대구 정치인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은 이유가 ‘정치 신뢰도가 높고 소신 있는 정치인’이라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대구시의원들은 유승민 의원에 대해 “중앙 정치권에서 강력한 리더로 지역을 대표할 수 있으며, 원칙을 중요시하고 진보와 보수의 적절한 이미지를 갖춘 눈치 보지 않는 정치인”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지역 기반인 대구에서조차 합리적 보수로 가야하는 차세대 지도자의 모습을 갖춘 인물이 유승민 의원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2인자와 항명을 용납하지 않은 박정희와 박근혜’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 박정희는 2인자를 절대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부하들이 서로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도록 경쟁을 부추기면서도 결코 권력을 나눠주지는 않았습니다. 

‘이후락’, ‘박종규’, ‘김재규’, ‘차지철’, ‘김형욱’ 등의 인물을 적당히 경쟁시키며 권력을 견제했던 박정희는 만약 자신의 권력에 위협이 되는 존재가 있다면 가차 없이 내쳤습니다. 윤필용이나 김종필 등이 제거됐던 이유가 자신의 권력에 위협이 됐기 때문입니다.
 
박정희는 군주라는 개념이 강했기 때문에 국회조차도 자신의 명령에 따르도록 철저히 통제했습니다. 만약 국회의원이라고 국회를 중심으로 움직였다면 철저히 응징했습니다.

1971년 공화당 의원 23명이 남산 중앙정보부로 끌려갔습니다. 처절한 고문을 당한 공화당 의원의 죄목은 ‘오치성 내무장관 해임’에 찬성표를 던졌기 때문입니다. 공화당의 실세였던 ‘김성곤’, ‘길재호’, ‘김진만’, ‘백남억’은 ‘10.2 항명’5이라 불리는 해임안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고문을 당했고, 강제로 정계를 떠났습니다.
 
지금 유승민 의원이 겪고 있는 사퇴 요구를 보면, 박정희 정권 때 벌어졌던 ‘10.2 항명’과 너무나 유사합니다. 단지 내무장관을 해임하게 했다는 이유와 국회법 개정안을 주도한 과정을 보면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유승민 의원이 원내대표가 됐다는 것은 ‘친박 우세론’보다 새누리당의 ‘위기론’이 작용했습니다. 유승민 의원은 원내대표에 출마하면서 “이대로 가면 내년 총선은 어렵다. 특히 박빙의 승부처인 수도권 선거는 더 힘들고 충청·강원·영남도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누가 원내대표가 되는 것이 내년 총선 승리를 위해 올바른 선택인가.”라며 ‘위기’를 내세워 원내대표에 당선됐습니다.6
 
박근혜 대통령은 절대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 사퇴 요구를 철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총선을 앞두고 새누리당 내부에서 그를 지지하는 세력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그녀를 위협하는 세력의 중심에 ‘유승민 의원’이 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유승민 의원을 죽여야만 레임덕을 늦출 수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유승민 의원은 사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렸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퇴 파문은 오히려 박근혜 대통령 레임덕의 시작이 될 것이며, 친이계와 중도 보수가 힘을 합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진정한 리더는 새로운 사상을 가진 신진 세력을 품 안에 끌어들입니다. 독재자는 자신의 권력에 도전하는 자들은 가차 없이 죽여 버립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유승민 사퇴 요구는 리더십이 완전히 망가지는 사건으로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1. 대구중구합동연설회. MBC뉴스. 1988년 4월 17일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8/1808719_13401.html 
2. 유승민 의원을 주목한다. 영남일보. 2013년 4월 22일.
http://www.yeongnam.com/mnews/newsview.do?mode=newsView&newskey=20130422.010310709170001
3. 유승민 원내대표 여권 ‘차기 대선주자’ 4위 올라. 경향신문 2015년 6월 29일,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6291200541&code=940100 
4. 할말하는 원칙주의 ‘믿음 가는’ 유승민 중앙정치 영향력 갖춘 ‘친박핵심’ 최경환. 대구일보, 2014년 12월 31일.http://www.idaegu.com/?r=home&c=4&uid=308242 
5. 경향신문, 1971년 10월 4일 
6. 유승민 "박근혜 지지율 추락...내년 총선 어렵다" 오마이뉴스 2015년 1월 27일.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76315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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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태권도인, 남북종단. 북태권도단 미국 공연 추진

 
 
북 당국자 적극 호응, 남측 당국에 긍정적 기대
 
이정섭 기자 
기사입력: 2015/06/30 [08:23]  최종편집: ⓒ 자주시보
 
 
▲ 지난 4월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난 미국 태권도 협회 관계자는 4월 대회가 취소된 것에대해 아쉬움을 표명하면서 에볼라 바이러스 사태가 끝나면 재 추진하겠다는 의사를 밝힌바 있다.     © 자주시보 이정섭 기자


미국의 태권도인들이 조선 에볼라 바이러스 방역 조치로 취소됐던 남북한 종단 계획을 다시 추진키로 했다.

 

미국의소리방송은 30일 조선과 미국의 태권도인들이 상호 방문과 시범공연 등 구체적인 교류 계획을 논의했다고 보도했다.

 

미국의 태권도 전문 잡지인 ‘태권도 타임스’ 의 정우진 대표는 29일 'VOA’와의 전화통화에서 지난 19일부터 23일까지 평양을 방문해 조선 태권도 고위 관계자들과 면담했다고 밝혔다.

 

태권도 타임스의 정우진 대표는“국제태권도연맹 ITF의 장웅 총재, 그리고 조선태권도위원회 김경호 위원장을 만나서 미국을 비롯한 세계 태권도인들과 조선 태권도인들 간 왕래, 그리고 남북한 태권도 교류 방안을 심도 있게 논의했다.”고 전했다.

 

정대표는 "이번 논의에서 지난 4월 조선의 에볼라 방역 조치로 무산된 ‘남북한 태권도 종단’ 행사를 다시 추진하자는 데 합의했다."며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 태권도인들이 조만간 조선을 방문해 군사분계선을 통과한 뒤 통일을 상징하는 짧은 행사를 갖고 곧바로 한국 땅을 밟겠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또한“평양의 태권도 성지에서 조선 태권도인들과 서로 기술교환도 하고 세미나도 연 뒤에 남북한 중간지점으로 이동해 통일을 염원하는 격파 시범을 진행하려고 한다.”고설명했다.

 

미국 태권도인들은 이 계획이 성사 될 경우 한국으로 입국해 서울을 거쳐 무주 태권도원, 제주도의‘주먹탑 (태권도탑)’ 등을 돌아보는 일정도 기획 중이다.

 

이번 행사에서 가장 주목되는 일정은 남북한 육로를 통과하는 동선으로 남북한 당국의 승인을 거쳐야 하는 절차인데 양측으로부터 이미 긍정적 반응을 얻었다는게 정 대표의 설명이다,

 

태권도 타임스 정우진 대표는“이번에 평양에서 조선 당국자들로부터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 받았고, 한국 측으로부터도 긍정적 반응을 기대하고 있다.”고 말해 미국인들이 추진하는 태권도 행사의 성사 가능성에 무게를 두었다.

 

앞서 지난 4월 무산된 남북한 종단 행사에는 1백명 가까운 미국 태권도인들이 방북 의사를 밝혔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 대표는 올 가을 북한 태권도 시범단의 미국 공연 가능성도 타진 중이라고 밝혀 태권도를 통한 조-미, 남-북 관계개선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

 

미국 태권도인들은 앞서 지난 2007년과 2011년 조선 태권도 시범단의 미국 공연을 진행해 미 언론과 관객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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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IB 협정문 서명식, 중국 주도 세계금융질서 본격화

 
최경환 부총리 "AIIB 통한 북한 지원 마다할 이유 없다"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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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6.29  17: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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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주도하는 새로운 국제금융기구인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이 29일 협정문 서명식을 갖고 공식 출범했다. 바야흐로 '중국의 시대'로 한발짝 더 접어든 셈이다.

 

   
▲ 최경환 부총리가 29일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AIIB 협정문 서명식에 참석했다. [사진출처 - 기획재정부]
기획재정부는 “최경환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한국과 러시아, 인도, 독일 등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57개 회원국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29일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AIIB 협정문 서명식에서 한국 정부를 대표해 서명했다”고 밝혔다.

 

서명식에 참석한 57개 회원국 중 중국과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을 벌이는 필리핀을 비롯한 7개국은 이날 서명하지 않고 연내에 서명할 예정이다. 우리나라는 AIIB의 창립회원국으로 협정문에 등재됐고, 향후 국회 비준동의를 완료하면 공식적으로 창립회원국이 된다.

당초 미국의 반대 속에 중국 주도로 추진된 AIIB는 아시아 지역의 부족한 인프라 투자를 지원함으로써 아시아의 경제.사회발전을 촉진하고 부를 창출하는 것을 목적으로 설립된 다자개발은행이다. 이후 융자, 보증, 지분투자, 기술원조 등을 통해 인프라 투자를 지원하게 된다.

이날 서명된 협정문에 따르면 AIIB의 수권자본금은 1천억 달러이며 이중 납입자본금 비율은 20%, 역내국 지분 비중은 75% 이상이다. 그러나 일부 회원국이 배분된 일부 지분을 포기해 출범일 기준 실제 청약자본금은 982억 달러다.

이 중 중국은 지분률이 30.34%, 투표율 26.06%를 확보해 최대주주로 떠올랐고, 인도(8.52%), 러시아(6.66%), 독일(4.57%)에 이어 한국은 지분율 3.81%, 투표율 3.5%로, 37개 역내국 중 4위, 57개 전체 회원국 중 5위를 차지했다. 

이는 지금까지 한국이 가입한 국제금융기구 중 가장 높은 순위이며, 한국에 배당된 자본금 37억 4천만 달러 가운데 실제 납입금액은 7억 5천만 달러이고 향후 5년간 분할 납입될 예정이다.

AIIB 지배구조는 총회, 이사회, 총재 및 1인 이상의 부총재와 임직원으로 구성되며, 이사회는 비(非)상주로 출범하되, 총회 의결에 의해 상주화가 가능하며 모든 투자결정에 대한 권한을 보유하게 된다.

아시아개발은행(ADB) 등에 따르면 아시아의 인프라 투자 수요는 매년 7300억 달러 규모로 추정되나, 투자되는 자금은 연간 2360억 달러 수준에 불과하고, 이같은 실정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013년 10월 AIIB 설립을 제의해 이날 결실을 거두게 된 것.

중국은 육상으로는 중앙아시아와 러시아를 거쳐 유럽 대륙까지 철로를 연결해 ‘실크로드 경제벨트’를 형성하고 해상으로는 중국 연해와 동남아시아, 남아시아, 인도양을 거쳐 유럽과 아프리카까지 연결하는 ‘21세기 해상 실크로드’를 구축하는 일대일로(一帶一路) 구상 실현과 맞물려 AIIB 설립에 공을 들여 왔다.

2014년 10월 중국.인도.아세안 등 21개국이 참여한 가운데 AIIB 설립 관련 양해각서(MOU) 서명식을 가졌고, 우리나라는 지난 3월 27일 공식적인 참여를 결정함으로써 막차를 타고 예정 창립회원국 지위를 획득한 바 있다.

기재부는 “AIIB 출범이 인프라 분야에서 경쟁력 있는 국내 기업들과 금융기관의 사업 참여 기회가 확대되는 등 관련 산업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된다”고 전했다.

앞서,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경부 장관은 28일 오후 중국 베이징에서 한국 특파원들과 만나 "AIIB 설립 이후 운영 과정에서 북한 지원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되고 환경과 여건이 조성된다면 AIIB를 통한 북한 지원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고 말해 주목된다. 현재 북한은 AIIB 회원국이 아니지만 AIIB 지분의 4분의 3 이상이 찬성하면 북한 지원도 가능하다.

안병민 한국교통연구원 연구위원은 신의주-개성 간 철도.도로 연결사업에 대해 “북-중 간 철도 연결은 양자간 협력사업이 아니라 다자간 협력사업의 성격이 있기 때문에 중국의 일대일로 사업의 최적의 파일럿 프로젝트가 될 수 있다”고 전망한 바 있다.[관련기사 보기]

정부는 AIIB 출범과 가입에 따른 국익을 극대화하고자 하반기에 계속될 협상에 적극 참여하는 한편, △민관 합동 태스크포스(TF) 구성.운영 △한국 인력의 AIIB 고위직 및 중간관리직 진출 지원 △지분율에 걸맞은 이사직 수임 등을 추진해 나갈 방침이다.

한편, 최 부총리는 협정문 서명식 후 시진핑 주석이 개최한 간담회에 참석했으며, AIIB 특별재무장관회의에 참석해 AIIB의 출범까지 향후 준비계획과 총재 선임절차, 신규회원국 가입절차 등을 협의했다.

<AIIB 회원국별 지분율 및 투표권>
 

순위

국 가

지분율

투표권

순위

국 가

지분율

투표권

1

China

30.34%

26.06%

32

Brunei

0.05%

0.31%

2

India

8.52%

7.51%

33

Lao PDR

0.04%

0.30%

3

Russia

6.66%

5.93%

34

Mongolia

0.04%

0.30%

4

Korea

3.81%

3.50%

35

Tajikistan

0.03%

0.29%

5

Australia

3.76%

3.46%

36

Kyrgyz

0.03%

0.29%

6

Indonesia

3.42%

3.17%

37

Maldives

0.01%

0.27%

7

Turkey

2.66%

2.52%

역내국 합계

74.77%

73.29%

8

Saudi Arabia

2.59%

2.47%

9

Iran

1.61%

1.63%

 

 

 

10

Thailand

1.45%

1.50%

1

Germany

4.57%

4.15%

11

UAE

1.21%

1.29%

2

France

3.44%

3.19%

12

Pakistan

1.05%

1.16%

3

Brazil

3.24%

3.02%

13

Philippines

1.00%

1.11%

4

UK

3.11%

2.91%

14

Israel

0.76%

0.91%

5

Italy

2.62%

2.49%

15

Kazakhstan

0.74%

0.89%

6

Spain

1.79%

1.79%

16

Vietnam

0.68%

0.84%

7

Netherlands

1.05%

1.16%

17

Bangladesh

0.67%

0.83%

8

Poland

0.85%

0.98%

18

Qatar

0.62%

0.79%

9

Switzerland

0.72%

0.87%

19

Kuwait

0.55%

0.73%

10

Egypt

0.66%

0.83%

20

New Zealand

0.47%

0.66%

11

Sweden

0.64%

0.81%

21

Sri Lanka

0.27%

0.50%

12

South Africa

0.60%

0.77%

22

Myanmar

0.27%

0.49%

13

Norway

0.56%

0.74%

23

Oman

0.26%

0.49%

14

Austria

0.51%

0.70%

24

Azerbaijan

0.26%

0.48%

15

Denmark

0.38%

0.58%

25

Singapore

0.25%

0.48%

16

Finland

0.32%

0.53%

26

Uzbekistan

0.22%

0.45%

17

Luxembourg

0.07%

0.32%

27

Jordan

0.12%

0.37%

18

Portugal

0.07%

0.32%

28

Malaysia

0.11%

0.36%

19

Iceland

0.02%

0.28%

29

Nepal

0.08%

0.33%

20

Malta

0.01%

0.27%

30

Cambodia

0.06%

0.32%

역외국 합계

25.23%

26.71%

31

Georgia

0.05%

0.31%

 

<자료제공 - 기획재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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