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생태어업 지키는 '슬로피시'를 아십니까

생태어업 지키는 '슬로피시'를 아십니까

황선도 2015. 06. 22
조회수 2036 추천수 0
 

로푸드 운동 하나로 2003년 출범, 지속가능 어업과 책임 있는 소비 중점

남해 죽방멸치가 대표적 예, 독살과 원담 등 전통어업의 가치 새롭게 주목

 

1280px-SlowFoodThera06676.jpg» 슬로푸드 운동의 일환으로 지속가능하고 책임 있는 수산물의 소비를 추구하는 슬로피시 운동이 눈길을 끈다. 사진은 슬로푸드 운동의 상징물인 달팽이. 사진=위키미디어 코먼스 
 
요즘 텔레비전이나 신문에 이른바 ‘먹방’이라 부르는 먹는 요리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방송인들이 출연하여 현지에 다니면서 이 계절에는 어디에 가면 무엇이 맛있다는 둥, 요리 쉐프가 나와 어떻게 음식을 만들고 어떤 영양분이 풍부하여 몸에 좋다는 둥, 심지어는 어느 식당의 음식을 평가하는 맛집 투어까지 온통 먹는 것에 관심이 높다.
 
다른 한편에서는 제철 음식이니 로컬푸드(Local food)니 슬로푸드(Slow food)니 하는 용어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있다. 이럴진대 어느 모임에 가서 품위 있게 한자리라도 끼려면 새로이 대두하는 먹을거리에 대해 공부를 해야 할 정도이다.
 
슬로푸드란 패스트푸드(Fast food)에 대립하는 개념으로, 지역의 전통적인 식생활 문화나 식재료를 다시 생각해보는 운동 또는 그 식품 자체를 가리킨다.

 

Bruno Cordioli 600px-Carlo_Petrini.jpg» 슬로푸드를 제창한 카를로 페트리니. 사진=Bruno Cordioli, 위키미디어 코먼스 
 
슬로푸드 운동은 1986년 이탈리아 피에몬테 주에 있는 작은 마을 ‘브라’에서 ‘고라’라는 식생활문화 잡지의 편집자였던 카를로 페트리니가 이탈리아 풀뿌리문화 부흥운동 조직인 아르치(ARCI)라는 여가·문화협회의 한 부문으로 ‘아르치·고라’라는 음식 모임을 만든 것이 출발점이 되었다. 
 
1980년대 중반 로마의 명소로 알려진 에스파냐 광장에 맥도널드가 문을 열었고, 이 패스트푸드가 이탈리아의 식생활 문화를 망친다는 위기감이 들면서 급기야 전통 식생활 문화를 지키자는 슬로푸드 운동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슬로푸드 운동’을 ‘안티 맥도널드 운동’으로도 부른다. 
 
패스트푸드에 반기를 들고 정성이 담긴 전통음식으로 건강한 먹을거리를 되찾자는 취지에서 발생한 슬로푸드 운동은 이후에 사람들이 “미식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부터 전통식, 소박한 식재료, 유기농, 건강에 좋은 것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시선을 끌게 되었다.
 
Jan-Tore Egge 640px-Patata_rossa_di_Cetica.jpg» 슬로푸드 식재료인 다양한 품종의 감자와 과일. 사진=Jan-Tore Egge, 위키미디어 코먼스 
   
슬로푸드 운동은 1989년 파리에서 결성된 국제 슬로푸드 협회 설립대회에서 “사람은 기뻐할 권리가 있다.”라는 개념의 슬로푸드 선언을 계기로 국제적인 운동으로 발전하여 현재 전 세계 160개 이상의 국가에서 10만명이 넘는 회원과 100만명이 넘는 후원자들이 참여하고 있다.  
 
2000년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된 슬로푸드 운동은 2007년부터 ㈔슬로푸드문화원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여 2014년 5월에 국제슬로푸드한국협회가 출범하여 저변을 확대하고 있다.

슬로푸드 운동은 단순히 좋은 음식인 슬로푸드를 먹자는 운동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근대화 과정 속에 효율성을 강조하면서 생겨난 다양성 감소, 지속가능성 저하에 대응하는 운동이다. 슬로푸드 운동에서 말하는 슬로푸드는 ‘좋은’, ‘깨끗한’, ‘공정한’ 음식을 말한다. 
 
좋은 음식은 맛과 풍미가 있으며, 신선하고 감각을 자극하며 만족시키는 음식이다. 깨끗한 음식은 그것의 생산이 생태계와 환경을 해치지 않으며, 건강을 위협하지 않도록 생산된 음식이다. 공정한 음식은 먹을거리를 생산한 생산자들의 노고를 인정하고, 그것에 합당한 가격을 지급한 음식이다.

 

david silver_640px-Victory_gardens_at_slow_food_nation.jpg»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설치된 슬로푸드 네이션. 도심 채소밭이다. 슬로푸드를 내세운 다양한 활동이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다. 사진=david silver, 위키미디어 코먼스

 
이러한 슬로푸드 운동은 주로 농업에 관심을 기울여 왔다. 농업이 없이는 먹을거리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슬로푸드 운동에서는 공장 수준의 효율성을 강조하는 산업형 농업이 땅을 망가뜨리고, 물을 오염시키고, 종자를 사라지게 하며, 농민들의 설 자리를 잃게 해 지역농업의 기반을 붕괴시키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슬로푸드 운동이 현대의 공장식 축산, 공장식 어업으로 인해 지속가능성이 위기에 몰리고 있어 이에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축산과 어업으로 확대되고 있다. 
 
즉, 공장식 축산에 대한 대안으로 자연 축산을 제시하고, 소비자들이 동물성 고기를 적게 먹을 것을 권하고 있다. 또한, 공장식 어업에 대한 대안으로 ‘슬로피시(Slow fish)’를 주창하고 있다.

 

slowfish.jpg» 슬로피시 캠페인 포스터들.   
 
슬로피시는 지속가능한 어업과 그것을 가능케 하는 소비자들의 책임 있는 수산물 소비를 지향하는 개념이자 국제행사를 일컫는데, 국제행사는 2003년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처음 열린 후 홀수 해마다 열린다. 
 
이 행사에는 어업 공동체와 수산 관계자들이 모여 점점 더 고갈되는 해양식량자원에 공동으로 대응하고 바다의 지속가능한 이용을 위한 국제적인 캠페인을 펼치며, 수산자원 관련 회의, 워크숍, 미각체험, 요리대회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구성된다. 
 
슬로피시는 민간과 공공기관의 거버넌스 형태로 진행되고 있는데, 기획이나 컨텐츠 개발은 슬로푸드 운동이 담당하고 있다.
 
slow fish4.jpg» 2015 슬로피시 대회 포스터. 
 
최근 슬로푸드 생물다양성재단의 슬로피시 활동도 주목된다. 이 재단은 최근에 23개 어업 공동체와 함께 23개 프레시디아(생산자 활동지원 프로젝트)를 시작하여 좋고, 깨끗하고, 공정한 생선이 점점 더 확산하고 있다. 
 
좋은 생선이란 우리의 감각을 만족시키는 신선하고, 맛있는 제철 생선으로 지역의 문화와 연관된 것을 말한다. 깨끗한 생선은 환경과 인간의 건강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생산한 것을 말한다. 
 
공정한 생선은 소비자들이 접근할 수 있는 가격이고, 소규모 생산자나 작업자들에게 온전한 작업 및 생활을 제공해줄 수 있는 소득을 보장해주는 가격을 지급한 생선을 말한다.

 

slow1.jpg» 잘 보전된 바다는 슬로피시의 터전이다. 사진은 전통어법인 죽방렴이 이뤄지고 있는 남해 연안 모습이다. 사진=황선도

 
최근 식량 자원 공급과 관련해서 바다와 갯벌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연안 난개발과 갯벌 오염 그리고 과잉 양식 등의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사정을 고려할 때 우리나라에서도 슬로피시에 대한 관심과 정책이 시급하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은 세계적으로 녹색혁명을 넘어 청색혁명(blue revolution)에 주목하고 있다. 청색혁명을 통해 수산물 공급에 대한 기대감이 크며, 엄청난 자원의 보고인 바다와 갯벌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01744628_R_0.JPG» 남해 창선교에서 바라본 죽방렴. 죽방렴은 길이 10m 정도의 참나무로 된 말목을 갯벌에 박아 만든 원시적 어업도구이다. 밀물 때 원통에 들어간 물고기는 썰물 때 나오지 못한다. 사진=고나무
 
식량자급률이 47%, 곡물자급률이 23%에 불과한 우리나라의 경우 바다로부터 생산되는 식량에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 잡는 어업에 비해 기르는 어업이 여러 면에서 효율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속가능하지 않은 방식에 의한 바다와 갯벌 접근은 식량자급률을 높이기는커녕 오히려 문제를 낳을 수 있다. 슬로푸드 운동이 제안하는 슬로피시는 중요한 정책방향을 제시해 준다. 그것은 지속가능한 어업과 소비자들의 책임 있는 수산물 소비이다. 
 

slow2.jpg» 대나무 그물(죽방렴)에 갇힌 멸치를 잡아내고 있는 어민. 사진=황선도   
 
우리나라 슬로피시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전통어업인 죽방렴과 그 어업으로 생산된 품질 좋은 멸치가 주목을 받았다. 2001년 포르투칼 포르토에서 열린 슬로푸드 시상대회에서 경남 남해 창선에서 죽방멸치를 생산하는 류광춘씨가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았다. 
 
전통적인 어획방법을 지키면서 품질 좋은 멸치를 생산하고 있는 공적이 인정되었던 것이다. 당시 슬로푸드 리더들에게 죽방멸치 그리고 그 멸치로 만든 멸치젓을 소개했는데, 이를 맛본 사람들 모두 고품질의 멸치와 그 맛에 감탄했다. 죽방렴과 죽방멸치가 보여주듯이 우리나라는 이미 전통적으로 슬로피시를 갖고 있다.

 

남해의 죽방렴은 대나무로 발을 쳐놓고 조석에 의한 밀물과 썰물에 따라 헤엄치다가 걸린 물고기를 잡는 어법으로, 이와 같은 원리의 어법이 서해나 제주에도 있다. 서해 갯벌에 있는 독살이 그것이다. 돌로 부챗살처럼 살을 만들었다는 의미이다. 
 
slow3.jpg» 충남 태안읍 파도리 독살. 사진=황선도 


slow4.jpg» 충남 무창포 해수욕장 독살. 사진=황선도
 
요즘 유행하는 제주 올레투어를 할 때 골목길에서 볼 수 있는 ‘돌담’이 강한 바람으로부터 집과 작물을 보호해 준다는  것쯤은 이제 누구나 알고 있다. 밭 한가운데 있는 무덤가에도 돌담이 있고, 산 중턱에 가도 돌담이 있는데 이를 산에 있다 하여 ‘산담’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제주에는 들과 산에 돌담이 있는데, 그렇다면 바다에도 돌담이 있을까? 바다에도 돌담이 있다. ‘원담’이 그것이다. 원담이란 돌을 둑처럼 야트막하게 쌓아 놓고 밀물 때 바닷물과 함께 휩쓸려 들어온 물고기가 썰물 때 물을 타고 빠져나가다가 엉기성기 쌓인 돌담 사이로 물은 빠져나가고 고기가 걸리게 한 돌 그물이다.

 

slow5.jpg» 제주 한림읍에 있는 금능원담. 사진=황선도 

 

slow6.jpg» 금룽원담에서 돌 그물에 갇힌 물고기를 잡아내는 어민. 사진=황선도 
 
원담을 처음 만들 때에는 어촌계 사람들 모두가 함께 무거운 돌을 하나하나 맞잡아 옮기고 쌓았을 것이다. 지금은 그 엄청난 일을 맨손이 아닌 굴착기로 하루아침에 만들 수 있으니 그 시기에 많은 노동력을 제공했던 것이 다소 미련해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노동생산성을 고려하면 답 안 나오는 행위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원담은 초기 투자비가 많이 들긴 했어도 한번 시설해 놓으면 선박 기름값이나 소모품인 그물 값이 들지 않으니 오히려 장기적으로는 이득일 수 있으니 자연순응적인 생태어업이 경제성도 있음을 입증한 셈이다. 
 
우리는 이들을 전통어업 또는 생태어업이라고 말한다. 그만큼 오래전부터 먹고살려고 했던 자연발생적인 고기잡이며 자연순응적인 어업이라는 의미이다. 
 
요즘 먹을거리 관점에서 보면, 이들 어업에 의해 잡힌 물고기는 슬로피시에 해당한다. 즉, 현대사회에서 이문을 남기려고 빠르게 대량으로 생산하는 공장식 먹거리를 과거 전통방식으로 자연에 순응하여 그리고 소비자와 가까운 생산지에서 얻어낸 수산물인 것이다. 
 
지속가능성이 위기인 시대에 슬로피시는 미래의 어업이고 미래의 식량자원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생선도 그냥 생선이 아니라 좋고, 깨끗하고, 공정한 생선이어야 한다. 앞으로 슬로피시를 지향하는 정부의 정책과 소비자의 슬로피시 실천을 유도해 나가야 할 것이다.
   
시스템 키친이 아무리 화려해도 요리의 즐거움이 되살아나지 않고, 재빠르고 영양이 넘치고 기름진 식탁에도 우리 가족들의 건강이 위협받고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처한 먹을거리의 그늘이다. 먹을거리가 비록 우리 삶의 전부는 아닐지라도 우리의 삶을 지속시켜 주고, 우리 삶의 질을 높여주는 의미에서 음식은 매우 중요하다.
 
국제 슬로푸드 운동 선언문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인류는 종이 소멸하는 위협에 처하기 전에 속도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속도와 효율성에 도취한 흐름에 전염되지 않기 위해서는 느리고 오래가는 기쁨과 즐거움을 적절하게 누려야 한다. 이러한 우리의 방어는 슬로푸드 식탁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황선도/ 한국수산자원관리공단 연구위원·어류학 박사

 

이 기사는 한국수산자원관리공단이 발행하는 잡지 <Sea Geographic>에 필자와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이며 국제 슬로푸드 한국협회 회장인 김종덕 님이 함께 기고한 것을 기반으로 작성되었음을 밝힙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노조가 눈엣가시? 갑을오토텍에서 무슨 일 있었나

 

외주화 반대·입금인상 요구…갑을상사그룹 유일 민주노총 노조

허수영 기자  최종업데이트 2015-06-23 03:37:23 이 기사는 현재 건 공유됐습니다.

 

갑을오토텍에서 그간 외주화 반대 등 노동자 권익 개선 활동을 해온 노조조합원들이 폭행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갑을오토텍에서 그간 외주화 반대 등 노동자 권익 개선 활동을 해온 노조조합원들이 폭행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금속노조 갑을오토텍지회
 
 

차량용 에어컨 생산업체인 갑을오토텍 공장에서 경찰과 특전사 출신으로 알려진 직원들이 노조 조합원들을 수차례 폭행한 사태가 일어났다. 도대체 갑을오토텍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관련기사:합법 파업에 폭력 난무하는 ‘갑을오토텍’...경찰‧특전사 출신 ‘용병’까지 )

통상임금 소송, 외주화 반대…노동자 권익 위해 싸워 온 노조
사측, 40세 이상 직원들 수십명 신규채용..그 이후 발생한 폭력사태

갑을오토텍은 갑을상사그룹의 계열사다. 현재 갑을상사그룹 15개 계열사 중 민주노총 노조가 들어와 있는 곳은 갑을오토텍 하나뿐이다. 민주노총 산하 금속노조 갑을오토텍지회 전병만 사무장은 “그룹 전체가 노조에 대해 부정적이며 특히 민주노총 계열 노조가 들어오는 것을 싫어한다”고 밝혔다.

2014년 갑을오토텍 사측과 지회는 노동시간 단축을 위한 주간연속 2교대 전환과 신규설비투자, 물량유지를 위한 신규채용에 합의했다. 이 당시 합의한 신규채용 인원은 25명이었다. 사측은 11명의 신규채용을 진행한 뒤 곧바로 60명의 추가 신규채용을 했다. 그런데 신입사원이라는 사람들의 평균연령이 47세로 절반 이상이 40세 이상이었다. 전 사무장은 “여태까지 이렇게 높은 연령대가 신입으로 채용된 적은 없었다. 직전에 11명을 선발할 때도 32세가 제일 많았고 거의 20대였다”고 밝혔다.

갑을오토텍에 생산직으로 들어오면 자동으로 금속노조 가입이 된다. 그러나 신입사원들은 금속노조 지회를 탈퇴하고 3월 12일부터 기업별 노조를 따로 만들었다. 이후 갑을오토텍 지회 사무실에 난입해 집기를 던지거나 지회원들에게 기업노조 가입을 강요한 것으로 알려졌다.

갑을오토텍 지회와 금속노조 충남지부는 외부제보와 자체적인 조사를 바탕으로 이들이 노조파괴를 위해 조직적으로 채용된 인원이라고 주장했다. 현재 갑을오토텍 지회 조합원은 380여 명 기업노조는 50여 명이다.

갑을오토텍 지회에 따르면 신입사원들 중 30명 이상이 전직 특전사, 경찰, 청와대 101경비단 소속이며 일부는 이력서에 본인의 경력을 날조했다. 또 이들은 정식채용 3개월 전인 2014년 9월에 사전모임을 가졌고 입사 이후에도 몇몇이 모회사인 두원상사그룹 임원들과 회동했다고 전해졌다. 이와 관련해 지회 측은 관련 내용이 담긴 기업노조원들의 휴대전화 문자메시지 등을 공개했다.

사측과 지회는 2012년부터 매년 쟁의가 일어날 정도로 임금 및 단체협약에서 마찰을 빚었다. 지회는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전면적인 활동을 벌였다. 사측은 정규직인 경비나 청소 등의 업무를 외주화시키려고 했으나 지회의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다.

전 사무장은 “사측은 회사가 어렵다는 이유로 늘 직원들의 임금인상에 소극적이었다. 교섭장에 나타나지 않은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그런데 작년 임원 연봉은 100% 올렸다. 그리고 다른 계열사에 지급보증 등을 해 주고 그 이자를 갚아 나갔다”고 밝혔다.

게다가 지회는 사측에 소송을 걸어 2013년 12월 대법원으로부터 “정기상여금은 통상임금에 해당한다”는 취지의 판결을 받아냈다. 지회의 활동으로 회사 안에서 노동자들의 권익이 개선될 결정적인 계기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법원의 판결이 났다고 갈등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사측은 지회에 올해 임금교섭안을 제시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갑을오토텍 지회는 10일까지 총 9차례의 임금교섭을 열었지만 사측은 그때마다 불참하거나 “생각할 시간을 달라” 등의 답변만 내놓았다고 주장했다. 전 사무장은 “기업별 노조가 결국 지회를 와해시킬 것으로 보고 시간끌기를 하는 것 같다”고 밝혔다. 갑을오토텍 지회는 임금교섭 결렬을 이유로 5월 29일 파업을 가결했고 현재까지 쟁의를 계속하고 있다.

“노조파괴 용병 사실일 경우 노동조합법 위반”

기업노조원들은 15일과 17일 갑을오토텍 지회가 쟁의 중인 장소로 난입해 갈코리 등으로 선전문을 훼손하거나 지회원들을 폭행했다고 알려졌다. 이전에도 지회 탈퇴와 기업노조 가입을 거부한 직원이나 공장을 방문한 금속노조 충남지부 간부를 폭행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지회에 따르면 4월 30일 금속노조 간부들에 대한 폭행 당시 10여 명이 늑골이 부러지는 등의 부상을 당했고 6월 폭력사태에서는 20여 명이 뇌출혈이나 눈뼈가 함몰되는 등의 부상을 입었다.

갑을오토텍에서 발생한 노조 조합원들에 대한 폭행사태에 대해 조합원과 가족들이 규탄하고 있다.
갑을오토텍에서 발생한 노조 조합원들에 대한 폭행사태에 대해 조합원과 가족들이 규탄하고 있다.ⓒ정의철 기자

17일 이후 기업노조원들이 경찰에 의해 해산되고 공장을 나간 뒤 금속노조원들은 공장에서 노숙농성을 벌이고 있다. 경찰이 공장 정문 등을 막고 둘 사이를 갈라놓고 있는 가운데 기업노조원들은 며칠째 “출근을 하겠다”며 공장진입을 시도하고 있다.

금속노조 법률원 김유정 변호사는 “회사 입장에서는 지회가 외주화 등 회사가 추진하려는 일에 걸림돌이 돼 왔기 때문에 눈엣가시처럼 보였을 수 있다. 게다가 통상임금 판결 이후 임금이 다소 상승한 것에 불만이 많았을 것이다”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사측의 노조파괴용병고용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이것은 노동조합법 81조에 위반되는 명백한 부당노동행위”라고 강조했다. 노동조합법 81조는 ‘근로자가 특정 노조에 의무적으로 가입하거나 가입하지 말 것을 조건으로 고용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5 ‘방위협력지침’ 개정 어떤 내용인가?

 
2015. 06. 22
조회수 133 추천수 0
 

 c001.jpg

 미일합동군사연습에 참가한 미군들

 

   미일동맹의 행보가 석연치 않다. 그동안 숨고르기 하며 기회만 엿보고 있던 독수리가 날개를 펴며 힘차게 비상하는 모습과 흡사하다. 중국이 글로벌 강국으로 부상하고, 이를 견제하기 위한 미국의‘ 아시아 재균형’ 정책이 대응 카드로 나오면서 일본이 기회를 포착한 것이다. 미일동맹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어떤 여정을 거쳐 왔으며, 앞으로 어디를 지향할 것인가? 두번에 걸쳐 실릴 이 글은 이 질문들에 대한 해답으로구성된다. 국제체계론의 관점과 미국의 전통적 세계전략 구상에 준거하여 미일동맹의 발전 정향을 풀이하고, 동아시아에서 한국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지를 진단한다.<편집주>                                           

 

 국가 간에 동맹이 결성되는 주된 이유는 두 나라가 특정 국가를 공동의 적 이라고 간주하고 함께 대응할 것을 약속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국과 일본은 이런  조건에서 벗어난 형태로 동맹을 체결하였다. 공식적으로는 두 나라 사이에 ‘미일 안전보장조약’ (Treaty of Mutual Cooperation and Security between the United States and Japan)이 체결되면서 동맹관계가 시작되었다. 이  때가 1952년이었고, 1960년에 새로운 조약이 탄생되면서 구 조약은 효력을 잃었다. 두 조약의 전체적인 맥락은 같으나 차이점은 대체로 주일미군의 주둔 요건과 관련 있다. 구 조약은 주로 미국의 일방적 요구가 반영되었다. 그 요점은 일본 영토 내에 미군 주둔을 허용하되 다른 제3국에게는 어떠한 군사시설이나 기지도 미국의 승인 없이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일본 내에서 발생하는 대규모 소요 사태 (large scale internal riots and disturbances) 에서도 일본 정부의 요청이 있다면 미국이 이를 진압하는 활동을 지원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즉 미국이 일본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가진다는 것을 약속한 것이다. 그런데 1960년의 신 조약에서는 일본 내부의 소요사태 지원 조항이 삭제되었고, 양국의 불평등성을 개선하기 위해 상호 방위임무를 더 구체화하고, 미국이 군사동원 하는 경우 일본에 사전 통보한다는 조항이 포함되었다. 이에 더하여 조약 이름에 mutual cooperation 이라는 키워드가 추가되면서 양국의 포괄적 협력 의지도 내용으로 담았다.

  

 국가간 동맹과 미일안보조약

 

  양국이 상호방위조약을 새롭게 개정해야 하겠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게 된 배경은 미국에 대한 일본 사회의 비판론 때문이었다. 일본 내의 진보세력들은 미국이 군사시설을 확대하려는 움직임에 반대하면서 크게 저항하였다. 구체적인 쟁점은 오키나와 미군시설에 대한 반대였다. 결국 이 문제는 신 조약에서 국제연합의 원칙과 목표를 준수한다는 것, 미군의 배치 조건을 언제든 협의한다는 것, 발효기간을 10년으로 제한하는 것 등을 명기함으로써 미국의 일방적 주둔 조건을 제한하고 일본의 독립적 지위를 확보하는 효과를 남겼다. 신 조약에 따르면 조약 발효 10년경과 후  어느 일방이 종료를 선언하면 그로부터 1년 후에 폐기되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발효 10년이 훨씬 지난 지금에도 미일 동맹의 결속력은 더 강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체로 일본보다는 미국이 동맹 필요성에 대해 더 애착을 보이는 듯하다. 물론 일본 역시 미국과의 동맹을 약화시킬 어떤 조짐도 보이지 않고 있다. 왜 그럴까?

   흔히 19세기는 동맹이 번성하던 시기라고 한다. 이 말은 유럽의 지역정치 특성을 잘 대변한다. 제1, 2차 세계 대전을 벌어지던 시기의 유럽에서는 국가들 사이에 제휴와 배신이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라는 말은 그만큼 국가 관계가 이익 중심으로 변화무쌍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동맹의 지속성은 비교적 짧았고, 결속력 또한 강했다고 말하기 힘들다. 유럽에서도 동맹외교가 가장 극에 달한 시기는 독일의 재상 비스마르크가 ‘보불전쟁’ (프러시아-프랑스 전쟁; 1870-1871년) 이후 유럽의 질서를 세력균형 방식으로 관리하던 때였다. 비스마르크는 프랑스가 복수전쟁을 벌이지 않도록 억누르기 위해 주변 여러 나라와 거미줄처럼 복잡하고 다중적인 동맹관계를 결성하였다. 러시아와 오스트리아를 끌어들여 1873년 소위 ‘삼제동맹’을 결성하면서 유럽은 변화무쌍한 동맹정치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삼제동맹’ 체결 후 불과 2년이 지난 1875년 러시아는 독일의 독주에 불만을 품게 되고 결국 1879년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러시아와 결별하여 새로운 동맹 체제를 형성했다. 이후 1882년에는 이탈리아가 독일-오스트리아 동맹에 가담하게 된다. 1892년 러시아는 프랑스와 동맹을 체결하고, 1904년에는 영국이 프랑스와, 그리고 1907에는 영국이 러시아와 동맹을 체결하게 된다. 이 경우에서 보듯 당시의 동맹은 외교의 한 방책으로 서로 제휴하는 형태였으며, 그렇기 때문에 동맹의 결속력과 응집력이 강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사진1.png

 

 20세기의 동맹구도는 대체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형성된 질서가 장기간 유지되는 모습을 보였다.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아마도 냉전구도의 골이 그만큼 깊었기 때문이 아닐까 추정된다. 탈냉전 시기가 도래했다고 말하지만 아직도 정치-군사적 차원에서의 대립구도는 그대로 지속되는 것이 그 좋은 예이다. 미국은 유럽과의 연대를 지속하고 있으며, 러시아와 중국이 여전히 전략적 제휴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새로운 동맹이 결성되는 사례도 줄어들었고, NATO와 같은 다자동맹은 적대진영이 해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동맹 목표를 수정하면서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과거에 체결된 동맹이 약화되는 경향도 나타나고 있다. 미국-필리핀의 동맹관계 약화,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해체, 중국-북한, 러시아-북한 관계에서 보듯 동맹 결속력이 약화되는 사례도 관측된다. 미일 동맹은 NATO나 한미동맹과 유사한 모습으로 변신을 계속하고 있다. 동맹의 목표와 가치를 수정하면서 새로운 비전을 창출하고 동맹 결속력을 높이는 방향으로 행진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미국의 패권적 입지가 약화되지 않고 강한 모습으로 유지되는 것이 주된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본다. 일본, 한국, 유럽 국가들은 이러한 미국의 지위 아래에서 ‘편승’ (bandwagoning)하고 싶은 것이다.


2015 ‘방위협력지침’, 어떤 내용인가?


   미일동맹에서 ‘방위협력지침’은 상호방위조약에서 천명한 군사협력을 실제에서 구체화하는 가이드라인이다. 조약은 동맹을 체결하기 위한 선언적 약속이다. 이 약속 아래에서 군사협력을 실제에서 추진하려면 구체적인 행동 지침이 필요하다. 처음 이 지침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때는 냉전 시기였던 1978년이었고, 이어서 탈냉전 시기가 시작되자 1997년에 첫번째 개정안이 나왔으며, 2015년에는 두 번째 개정안이 나오게 되었다. 한 가지 특징은 개정안이 나올 때마다 일본의 군사 역할이 확장되는 것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안보환경의 시대적 흐름이 일본을 ‘보통국가’ 혹은 ‘정상국가’로 발전하는 것을 요구하고, 미국이 이 흐름을 선도하거나 추인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이 이를 선도하였다면 과연 이 선택은 옳은 것인지 별도의 평가가 필요하다. 일본이 이 방향을 선택하는 것은 객관적으로 볼 때 일본의 국력과 위상이 신장된 것을 감안한다면 당연한 일이라고 본다. 어느 나라든 지금의 일본과 같은 처지라면 대외적으로 힘을 투사하고 국격을 높이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일본의 이러한 선택이 지역안보를 저해하고 세계 안보에도 결코 좋지 않은 결과를 파급시킨다는 점이다. 

    2015년 4월 27일, 미국과 일본은 ‘미일방위협력지침’의 두번째 개정안을 발표했다. 그 핵심 내용은 아시아에서 일본의 군사 역할을 확대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중국과 일본이 영토분쟁을 벌이고 있는 도서지역은 물론 아시아 주변지역의 군사행동에 대해 두 나라가 ‘동맹조정 메커니즘’ (Alliance Coordination Mechanism)을 통해 공동 작전을 벌인다는 약속이다. 그리고 군사력 강화와 관련된 분야에서의 협력을 강화한다는 조항도 포함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1978년에 처음 방위협력지침이 만들어졌을 때의 취지를 점차 확대, 발전시킨 것이다. 처음 제정되었을 때의 취지는 당시의 냉전 상황을 반영하여 구소련의 공격 시나리오를 염두에 두고 일본 자위대의 역할을 명시하는 것이 중점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일본에 대한 공격이 임박했을 때와 공격이 시작되었을 때로 구분하여 미국과 일본이 어떻게 작전을 전개할 것인가를 규정하였다. 특징적인 대목은 실제로 공격이 감행되었을 때 분쟁 급 수준의 공격에서는 일본 스스로가 자력으로 방어 작전을 전개하고, 더 강도 높은 수준의 공격에 대해서는 미국과 일본이 공동작전을 펼친다는 것이다.

   냉전이 종식되자 세계 안보환경은 급변했다. 쿠웨이트를 점령한 이라크를 상대로 전쟁을 벌일 때 일본은 이미 130억 달러에 해당하는 거금을 지원했다. 그리고 한반도에서 북한이 핵무기 위협 국가로 등장하는 등 세계 및 지역 안보정세가 급변했고, 이것이 1997년 2차  개정을 낳게 되었다. 요점은 일본 자위대의 군사 활동을 동아시아 지역으로 확장시킨 것이다. 2차 개정에서는 일본 주변지역에서의 군사위협 상황이 추가로 포함되었다. 일본 영토에 대한 직접 공격 위협이 아니라 난민 보호와 수색 및 구조 활동, 민간인 철수 작전 등이 군사적 임무의 주된 과제로 상정되었다. 그리고 미군의 군사작전을 후방에서 지원하고, 해상에서의 기뢰 제거와 정보 수집 등 지원 활동을 펼친다는 것이다. 제2차 개정안에서 특징적인 대목은 부록에 일본 주변지역에서의 군사협력 내용을 표로 작성하여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한편, 이번 이루어진 3차 개정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미국과 일본이 동등한 동맹국 지위 아래에서 아시아 지역의 군사안보 활동에 적극 협력한다는 내용이 골자를 이룬다. 그리고 방위협력지침은 필요에 따라 군사협력의 범위와 세부 활동을 수정 및 개정하도록 되어 있어, 앞으로 일본의 군사 활동을 더 확장시킬 수 있는 준거로 작용할 수 있다. 이로써 제2차 대전 패전국 일본은 그동안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억눌렸던 군사주권을 정상적으로 회복하는 것은 물론 아시아 지역에서 중국의 팽창을 저지하고 새로운 강자로 군림하기 위한 입지를 확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진2.jpg

 

 8개장으로 구성된 2015 미일방위협력지침

 

 2015‘미일방위협력지침’ (The Guidelines for U.S.-Japan Defense Cooperation) 내용은 총 8개 장 (chapter)으로 구성된다. 제1장은 방위협력의 목표 또는 방향을 제시한 것으로서, 다음 문장은 우리의 주목을 끈다.

“Japan will possess defense capability on the basis of the "National Security Strategy" and the "National Defense Program Guidelines". The United States will continue to extend deterrence to Japan through the full range of capabilities, including U.S. nuclear forces. The United States also will continue to forward deploy combat-ready forces in the Asia-Pacific region and maintain the ability to reinforce those forces rapidly.” 

   그동안 일본이 ‘보통국가’로의 지위 회복을 외쳐왔던 만큼 이번 지침에서 미국은 일본이 자신의 안보를 실현하기 위한 전략을 구상할 수 있고, 또 필요한 군사력을 확보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그동안 일본이 ‘전수방어’ 개념에 고착되어 있었고 일본 영토 너머에서 전개되는 안보문제는 미국이 전담하였지만 이번에 이런 공식을 깨버린 것이다. 그리고 미국은 핵 억제력을 제공하는 한편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 전투력을 유지하고 강화해 나갈 것을 약속한다. 이 의미는 미국이 광활한 아시아 지역에서 군사적 패권을 강화하겠지만 일본 방어문제는 일본 스스로의 자력으로 전담하라는 뜻이 담겨있다고 본다. 마치 과거의 ‘닉슨 독트린’과도 유사한 부분이 있다. 미국의 피로도가 증가하는 만큼 동맹국 각자가 자신의 방어문제를 전담하고 미국은 뒤에서 지원하는 쪽으로 선회하겠다는 것이다. 또 하나 눈에 띄는 표현은 ‘미일동맹의 글로벌 성격’ (the global nature of the U.S.-Japan Alliance) 을 언급한 대목이다. 이 표현은 미일동맹이 아시아 지역을 넘어서 글로벌 수준에서 협력을 추진할 어젠다가 있다는 것을 가정한 것이다. 잘 알다시피 일본은 결코 아시아 지역에 한정되는 국가가 아니다. 과거에는 동아시아 지역에서 그들이 말하는 ‘생존권’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지만 이제는 세계 전체와 교류해야 하는 글로벌 국가로 발전한 것이다. 이러한 일본의 국가 위상을 미국이 간파하고 글로벌 안보 파트너로 끌어내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제2장은 방위협력 전제와 원칙에 관한 내용으로 구성되며, 4가지 항목으로 기술된다. 첫째, 미일 상호방위조약과 미일동맹의 기본 정신은 그대로 유지된다. 둘째, 국제법과 유엔 헌장 정신을 계승하고, 개별 국가의 주권 평등과 분쟁의 평화적 해결 원칙을 준수한다. 셋째, 각자의 국내법 원칙에 부응하며, 특히 일본의 ‘비핵3원칙’과 ‘전수방어’ 원칙을 준수한다. 넷째, 방위협력 지침을 기준으로 어떠한 법적 행정적 조치도 서로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이 4가지 원칙을 자세히 보면 과연 그대로 지켜질까 하는 의문이 앞선다. 우선 일본의 전수방어 원칙을 고수하면서 어떻게 아시아 지역에서 방위협력을 추진할지가 의문이다. 아마도 미국이 필요한 군사행동을 선도적으로 하고 일본이 보조 역할을 하면 된다는 것을 전제로 하겠다는 뜻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원칙은 주변국들의 비난과 국내 비판세력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해석된다. 또 하나, 방위협력 지침을 이용하여 파트너 국가에게 어떠한 강요도 하지 않는다는 원칙은 어디까지나 선언적 의미에 불과하다고 본다. 현실로 들어가면 미국의 정책방향에 따라 일본이나 한국과 같은 동맹국은 행정적 법적 적응조치를 강구해야 할 때가 많다. 예컨대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THAAD 문제만 해도 그렇다. 미국이 이 무기를 배치해야 한다고 결정하면 일본이나 한국은 그것을 수용하고 따라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제3장은 동맹 조정에 관한 내용이며, 총 3가지 분야에서의 조치가 제시된다. 첫째, ‘동맹조정체제’ (Alliance Coordination Mechanism)를 신설한다는 것이다. 이 기구의 필요성은; “This mechanism will strengthen policy and operational coordination related to activities conducted by the United States Armed Forces and the Self-Defense Forces in all phases from peacetime to contingencies.” 라고 설명한다. 즉, 우발적인 상황에 대비하여 구체적으로 군사협력을 꾀할 수 있는 기구가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이런 기구는 한미동맹에서 ‘연합사령부’를 설치하는 것과 유사한 것이라고 본다. 한미동맹의 연합사령부와 같은 견고한 공동작전 사령부는 아니지만 군사정보를 공유하고 군사행동을 협의하기 위한 기구이므로 형태만 다를 뿐 사실상 미국이 주도할 것이므로 같은 내용이라고 해석된다. 만일 한국이 작전통제권을 미국으로부터 찾아온다면 대략 이와 유사한 협력기구가 필요하다고 보면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기구가 신설된다는 것은 일본의 군사역량을 실질적으로 강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원칙 하에서 군사작전에서의 조정과 협력을 (locating operational coordination functions to strengthen cooperation) 구체적으로 시행한다는 것이 둘째 항목으로 제시되어 있다. 그리고 셋째 항목에서는 양국의 안보정책 협의 채널 (SCC; The Security Consultative Committee)을 구성한다고 규정한다. 이 회의체는 처음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고 1978년 제1차 방위협력지침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이미 작동되고 있었다. 이 회의체는 한미동맹의 ‘안보협력회의’ (Security Consultative Meeting)와 유사한 것이다. 다만 일본의 SCC는 SCM처럼 매년 정기적으로 1회 개최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양국의 군사작전을 기획하기 위한 협의체로 기능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한미동맹에서는 SCM이 양국 국방장관이 주관하는 최고 결정기구인데 반해 미일동맹에서의 SCC 는 새로 신설되는 ACM의 하위 군사협의체로 작동하게 된다.

 

  제4장은 일본의 평화와 안보에 관한 역할을 규정한다. 이 내용의 전체적인 흐름은 일본이 왜 군사안보 분야에서 역할을 확대해야 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기술한다. 양국의 상호안보조약에서는 일본이 외부의 적이 일본 영토를 침략할 때를 제외하고는 군사행동을 취할 수 없도록 하였다. 그런데 상황이 달라져서 이제는 외부 안보환경이 변화됨에 따라 일본이 군사행동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한 상황변화를 몇 단계의 국면으로 구분하는데, 첫째는 평화 시기의 협력조치이다. 이 단계에서는 안보 정세 파악을 위한 정보수집 및 정찰활동, 방공 및 미사일 방어, 해양안보, 자산보호와 병참 지원, 군사훈련 등에서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설정한다. 둘째는 일본에 대한 위협이 증가하는 것에 대한 공동 대응이다. 이 단계에서는 양국 국민을 제3국으로부터 철수시키는 작전, 해양안보 활동, 일본 영토로 진입하는 난민 보호활동, 군사 수색과 구조 활동 등에서의 협력을 설정한다. 셋째는 일본에 대한 군사적 공격이 가해질 때의 대응이다. 이 단계에서는 세부 가정 상황이 설정된다. 우선 일본에 대한 공격이 예상될 때이다. 이때에는 외교 수단을 총동원하여 위협을 제거하고 위기 상황을 해소하는데 주력한다. 다음은 일본에 대한 공격이 실제로 가해질 때이다. 이때는 근본적으로 일본이 자국의 영토와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군사작전을 전개하고 미국은 이를 지원한다. 그리고 군사작전의 영역을 지상전투, 해상전투, 공중전투 등으로 구분하여 필요한 협력 조치들을 강화한다. 여기서 주목되는 대목은 핵무기와 미사일 방어에서 미국과 일본이 긴밀히 협력한다는 것을 명시했다는 점이다. 특히 북한의 핵 및 미사일 위협이 구체화됨에 따라 미일동맹 차원에서 공동 작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위협의 실체를 더 세부적으로 해부하면서 화생무기 위험, 방사능 위험과 핵 방어 등을 묶어 CBRN (chemical, biological, radiological, and nuclear) 으로 제시한 것이다. 넷째는 일본 이외의 국가가 공격을 당했을 때의 대응이다. 이 단계에서도 일본이 역할을 담당한다고 규정한다. 아마도 이 대목이 가장 큰 쟁점이라고 여겨진다. 방위협력지침에서는 일본과 우호적인 나라가 공격을 당했을 때로 가정하므로 이것은 한국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본다. 이 단계에서도 미국과 일본은 필요한 군사작전에서 협력을 강화할 것을 규정한다. 다섯째는 일본에서 재난이 발생하는 경우이며, 미일동맹 차원에서 필요한 협력을 강구한다고 설정한다.

  

 제5장은 아시아 지역 및 글로벌 수준에서의 안보협력을 설정하는 내용이다. 서설에서 두 나라가 지역과 세계안보를 위해 선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대목이 눈에 띈다; (“--In an increasingly interconnected world, the United States and Japan will take a leading role in cooperation with partners to provide a foundation for peace, security, stability, and economic prosperity in the Asia-Pacific region and beyond.”)  이 말의 뜻은 미국이 주도하는 역할에 일본도 거들어야 한다는 의미이겠지만 어제의 전범 국가가 오늘의 세계 평화를 말할 수 있으며, 그러한 여건이 실제로 조성되어 있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한국을 포함하여 중국과 주변국들이 크게 우려하는 부분도 바로 이 대목이다. 두 나라의 협력은 구체적으로 평화유지 활동, 인도주의적 지원활동과 재난 구호활동에서의 협력, 그리고 해상수송로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해적 소탕작전, 지뢰 제거, 대량살상무기 확산 저지 등에서의 협력으로 나타난다.

 

  제6장은 우주와 사이버 공간에서의 협력 조치로 구성된다. 그리고 제7장은 양국의 방위산업 분야와 IT 분야, 교육 및 연구 활동 분야 협력 조치들을 포함한다. 이 중에서도 특히 방산분야 협력은 앞으로 일본의 첨단 군사력이 강화되는 것을 미국이 주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동아시아 지역에서 군비경쟁이 본격화 될 것을 예고한다. 일본의 과학기술이 세계 첨단수준을 달리고 있고, 축적된 군사기술 및 지식과 결합된다면 세계 2위 3위권의 군사력을 확보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제7장에서는 양국이 설치하기로 합의한 협의체 SCC에서 방위협력지침의 실행 계획을 주기적으로 평가하고 개선 및 보완하는 조치를 강구한다는 내용이 포함된다.

 

 이민용 숙명여대 안보학 연구소장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한일협정 버금가는 졸속외교 우려된다


-한일협정 체결 50년, 한일 정상의 덕담외교를 지켜보고<칼럼> 조세열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총장
조세열  |  tongil@tongilnews.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5.06.23  08:36:13
트위터 페이스북

조세열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총장)


1965년 6월 22일 한일 양국이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한일기본조약)’을 조인한 때로부터 반세기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한일관계는 50년이라는 기나긴 시간이 무색하게 선린으로 성숙하기는커녕 퇴행을 거듭하며 과거로 회귀하고 있다.

일본군‘위안부’의 강제성을 인정한 1993년의 ‘고노 담화’와 일제의 침략전쟁과 식민지배를 공식 사죄한 1995년의 ‘무라야마 담화’는 한일관계 재정립의 초석이라 할만 했다. 미래지향적 한일관계가 다시 파탄에 이르게 된 데는 보수정권의 등장에 따른 일본의 우경화와 함께 동아시아 역학구도의 변화가 작용하고 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50년 전의 한일협정이 한일 간에 지속적으로 갈등을 일으켜온 원천이라는 사실은 잊혀진지 오래다. 한일협정은 그 배경이나 조문의 내용에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 미국과 일본 그리고 한국의 군사정권은 각기 다른 현실적인 필요에 의해 한일관계 정상화를 추진했지만 그 과정과 결론은 매우 비정상적이었다.

우선 미국은 한미일동맹 구축으로 냉전체제의 최전선을 공고히 하고자 하였으며, 이에 따라 사실상 한일수교를 강박하였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미국의 주문도 있었지만 전후청산과 시장확대 그리고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 회복이라는 현실적 욕구도 작동했다.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정통성 결여로 인해 미국의 요구를 즉각적이고 전폭적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었으며, 취약한 권력을 유지 강화하기 위해 경제개발의 재원 확보와 정치자금의 조성이 시급했다. 삼자간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셈이다.

그러나 한국 쪽은 추진단계에서 이미 정당성과 도덕성을 상실해 대등한 협상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협상에 직간접적으로 간여한 자들 중 다수가 일제관료나 일본군 출신이었으며, 일본의 파트너와 심리적 주종관계에 놓여 있었다.

 

   
▲ 박정희 전 대통령의 대규모 정치자금 수수 내용이 담긴 미국 CIA 특별보고서 「한일관계의 미래」 (1966. 3. 18). [자료사진 - 민족문제연구소]
또 음모적인 협상 커넥션의 가동은 자연스레 불법과 부정으로 연결되었다. 미 CIA 특별보고서(「한일관계의 미래」 1966. 3. 18.)는 “일본기업들이 1961∼1965년 사이 당시 한국의 민주공화당 총 예산의 2/3를 제공한 바 … 6개의 기업이 총 6천 6백만 달러를 지원했다”고 박정희 정권의 대규모 정치자금 수수를 기정사실화 했다.

 

그렇다면 일본은 한국에서 군사쿠데타가 일어나자마자부터 친일정권 수립을 목표로 조직적으로 정치자금을 조성하여 한국의 국내정치에 꾸준히 개입했다고 할 수 있다.

최소한의 명분마저 상실한 이러한 상황에서 대일협상이 당당하고 공정하게 진행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무상원조 3억 달러라는 초라한 협상 성적표를 받아든 이면에는 이렇게 상상을 초월하는 매국적 거래가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국가 간 규범과 국민적 상식으로는 당연히 불법적 범죄행위에 기반한 협약은 그 자체로 무효로 보아야 한다. 한일협정은 교섭과정에서도 일본의 진보세력이 외면하고 대다수 한국민들이 치열하게 반대하는 가운데, 일본 우익세력과 한국의 친일세력 간의 야합으로 태어난 사생아라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상용어로 정착한 ‘굴욕적 한일협정’이라는 말이 정권을 공격하기 위한 공연한 정치적 수사가 아니었던 것이다.

태동 과정이 음모적이었던 만큼 조약 문안이 명쾌할 수 없었으며 이는 지금까지 양국 사이에 해석을 둘러싼 갈등을 야기하는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

일본은 지금까지도 한국병합을 합법이라고 해석하며 한국은 불법이며 무효라고 간주한다. 일본은 유무상자금의 성격을 경제협력자금(심지어 독립축하금)이라고 주장하였으며, 한국은 청구권자금으로 배상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 해석했다.

일본(사법부)은 청구권이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는 일관된 입장을 견지하고 있으나 한국(사법부)은 개인 청구권이 존재한다고 판단한다.

일제침략 70년 식민지배 35년간을 넘어서서 국가관계를 정상화하는 조약으로서는 모호함과 부실함이 정도를 넘었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한일 양국의 인식 차이는 극복하기 힘들만큼 간극이 커 보인다. 가해자가 없는 식민지배와 배상이 없는 화약(和約)이 있을 수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피해규모에 동떨어진 보상액이나 개인 청구권에 대한 침해, 반인도적 범죄행위에 대한 책임 실종 등 문제가 하나 둘이 아닌 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보면 한일협정은 적대관계 해소와 국가 간 수교를 위한 정상적인 조약이라 하기에는 부적절한 측면이 적지 않았다.

2005년 8월 참여정부의 ‘한일회담 문서공개 후속대책 관련 민관공동위원회’는 한일협정은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이 아니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따른 국가 간의 권리 정산이며, 일본군‘위안부’ 문제 등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대한 일본의 법적 책임이 남아있고, 사할린동포 원폭피해자 문제가 포함되지 않았다고 명쾌하게 정리했다. 더불어 무상자금 배분과 관련하여 강제동원피해자에 대한 한국정부의 책임도 인정했다. 처음으로 한일협정의 성격과 한계를 명확히 규정한 것이다.

이와 같은 이해에 도달하면 당연히 한일기본조약의 개정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한일협정 폐기에서부터 재협상 또는 재해석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침략전쟁과 식민지배로 입은 직접적인 피해는 물론 분단과 내전으로 인한 엄청난 피해가 일본의 탓이라고 확신한다. 나아가 일본이 단기간에 경제부흥을 할 수 있었던 주요 요인도 한국전쟁으로 인한 활황 때문이었다고 본다.

반면 아베를 비롯한 전후 일본의 우파 정치인들의 역사인식은 일본제국주의 시기나 한일협정 때나 지금이나 동일하다. ‘대동아전쟁’은 침략전쟁이 아닌 아시아해방전쟁이다. 도쿄 전범재판은 승자에 의한 일방적인 단죄이다. 식민지는 일본에 의해 근대화하였으며 전후에도 일본의 원조를 기반으로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즉 일본은 결코 침략자나 가해자가 아니며 선의의 피해자라는 의미이다.

 

   
▲ 박근혜 대통령이 22일 한일국교정상화 50주년 기념 리셉션에 참석해 “과거사의 무거운 짐을 화해와 상생의 마음으로 내려놓을 수 있도록 만들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사진출처 - 청와대]
6월 22일 서울과 도쿄에서 동시에 한일국교정상화 50주년 기념 리셉션이 열렸다. 참으로 놀라운 일은 한일 양국 정상이 상대국 대사관이 주최한 행사에 교차 참석하여 한일관계의 미래에 대해 덕담을 늘어놓은 것이다.

 

“과거사의 무거운 짐을 화해와 상생의 마음으로 내려놓을 수 있도록 만들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50년간의 우호 발전의 역사를 돌이켜보고 앞으로 50년을 내다보며 함께 손을 잡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자.”

엊그제까지 냉랭하기 짝이 없었던 상황을 기억하는 이들은 당혹감을 넘어 아연실색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최근 한국 외교는 전혀 유연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외교부 장관의 방일이 4년 만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적성국 간에도 외교는 이루어지는 것일진대 지나치게 경직된 자세는 청와대의 심기와 무관하지 않았으리라 짐작된다.

그런데 도대체 이렇게 표변하게 된 사정은 무엇일까. 아무 것도 달라진 것도 없고 오히려 일본 측 도발의 빈도와 강도만 더해 가고 있는데 급속히 노선을 바꾼 데는 반드시 이유가 있었을 법하다.

먼저 한일협정 체결이 박정희 정권의 소산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비록 계엄령 선포 등 강권을 발동하여 이루어진 한일수교이긴 하나 박정희주의자들에게는 경제성장의 단초를 마련한 위대한 업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1962년 김-오히라 이면 합의의 주역으로 협상 타결을 위해 “제 2의 이완용이 되어도 좋다”던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자신감 넘치는 회고(중앙일보 6월 22일자 인터뷰)가 이를 반증하고 있다.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고픈 현 정권이 어떻게 한일국교정상화 50주년을 외면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본질적인 배경을 찾다보면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에 경악을 금치 못하게 된다. 50년 전과 마찬가지로 역시 미국의 개입이 결정적이다. 미국 외교라인의 결례에 가까운 한일화해 강압과 일방적인 일본 편들기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일본정부의 안보법제 추진과 평화헌법 개정 시도, 한미일군사동맹 강화는 한일협정 전후 상황을 빼다 박았다. 과거 소련의 자리에 중국이 들어섰을 뿐, 한국의 존재감은 그 때나 지금이나 초라하기 짝이 없다. 일본은 아태지역 패권 유지에 있어 미국의 대리인을 자임하며 영일동맹 이래 전통적인 해양세력으로 재부상하기 위해 국력을 기울이고 있다.

한편으로 인맥과 예산을 총동원하여 역사수정주의와 군사대국화에 대한 우호적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국제사회 특히 미국의 정치권과 학계에 노골적인 로비도 서슴지 않고 있다.

박근혜 정권은 2년 반의 강경외교 끝에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한 채 정책 방향을 선회하기로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이 달라질 가능성이 전무한 데다 미국의 압박이 가중되고 있기 때문이다.

제 2의 한일관계정상화에 대한 정지작업은 이미 이루어졌고 지금은 여론을 떠보고 각색하는 단계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양국 외교 수장의 회담에서 메이지시대 산업시설의 세계유산 등재시 조선인 강제노동 사실 명기에 합의한 사례나 ‘위안부’ 문제가 타결 직전이라는 외신 보도, 정상회담이 거론되기 시작하는 등 일련의 현상들은 준비된 시나리오 없이 진행될 사안들이 아닌 것이다. 

우려스런 점은 이러다가 덜컥 한일협정에 버금가는 졸속 외교가 현실화하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벌써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교섭과정의 쟁점들을 공공연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 중에는 예컨대 ‘평화의 소녀상’ 철거와 같은 몰염치한 요구도 들어있다 하니 피해자와 시민사회로서는 결코 용납할 수 없을 게 뻔하다.

또 ‘위안부’ 문제가 일제의 야만성을 인권 차원에서 드러내는 상징적인 요소이긴 하지만 한일과거사 전체로 볼 때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앞서 지적한 한일협정에 포함되지 않은 강제동원피해자 문제 외에도 독도 야스쿠니신사 시베리아억류자 BC급전범 관동대진재 재일동포 등 해결하지 못한 한일과거사 현안들이 산적해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따라서 특정사안에 대한 일부 진전을 과대포장하거나 대단한 양보라도 얻어낸 듯이 선전하며 어정쩡한 타협으로 면죄부를 발행할 때는 만만치 않은 후폭풍이 따를 것임을 각오해야 한다고 본다. 그야말로 장고 끝에 악수를 두는 과오를 저지르지 않기를 빌 뿐이다.

아베 총리는 전후 70주년 담화를 각의 결정이 아닌 개인 발표 형식으로 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얄팍한 술수이며 혼네(本音)는 따로 있음을 삼척동자도 알 것이다.

적극적 평화주의니 보통국가니 아무리 분식해도 아베의 뇌리에는 군국일본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는 망상만이 가득 차 있음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부정적 확신은 전적으로 일본 정부와 정치인들로부터 비롯하였다. 그들의 진정성을 다시 믿어보기에는 우리 모두가 이제 너무 지쳐 버린 것이다.

동아시아 평화공동체의 이상이 신기루처럼 사라져가는 가운데 일본군의 군화발 소리가 음산하게 다가오고 있다. 환청인가? 그랬으면 좋겠다.

 

조세열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총장

 
   
 
현재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총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부위원장을 겸하고 있다.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친일재산 국가귀속업무를 진행했다. 친일문제와 한일관계 등 근현대 과거사청산과 통일시대의 역사문화운동이 주요한 관심 분야이다.

「법정에 선 역사정의」, 「친일인명사전 편찬의 쟁점과 의의」, 「74년 조직(세칭 ‘인혁재건위’)사건의 운동사적 의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특별법 개정의 의미와 쟁점」 등의 글이 있고, 『일제협력단체사전』, 『친일인명사전』 집필에 참여했다.

경희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 민족문제연구소 초대 사무국장, 경희대학교 사학과 겸임교수를 역임했으며, 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이사를 맡고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예멘 미사일공격으로 사우디공군기지 점령사건의 진실

예멘 미사일공격으로 사우디공군기지 점령사건의 진실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5/06/22 [16:50]  최종편집: ⓒ 자주시보
 
 

 

▲ 예멘 미사일공격으로 사우디공항을 초토화시킨 내용을 보도하고 있는 베테랑투데이 , 사진속의 미사일이 전형적인 북의 단거리 탄도미사일이다.    © 자주시보

 

사우디아라비아와 예멘반군의 전투가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11일 연합뉴스는 ‘예멘 반군은 왜 사우디로 스커드 미사일을 쐈나’라는 기사를 통해 예멘 반군이 예멘에서 130㎞ 정도 떨어진 카마이스 무샤이트에 있는 킹 칼리드 공군기지를 향해 스커드미사일 1발을 쏘았는데 이를 격추했다고 보도했다. 
킹 칼리드 공군기지는 예멘 시아파 반군을 폭격하는 사우디 공군 전투기가 출격하는 곳이다.

위 연합뉴스 기사에서는 살레 전 대통령에게 충성하는 예멘 정부군도 예멘반군과 합세하여 사우디를 중심으로하는 연합군과 싸우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보도했다.

 

그런데 17일 중동의 베테랑투데이 뉴스(veteranstoday.com)에서 이란 반관영 파르스통신(FNA)과 이란 메흐디 나세르 알 바쉬 보안장교의 대담을 인용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사우디의 할리드 공군기지를 예멘군이 미사일로 공격하여 이스라엘 장교 20명과 사우디 장교와 병사 63명이 사망했으며 이후 이어진 진격으로 35명이 체포되었다고 한다. 예멘 반군이란 표현은 없었고 예멘군이 사우디아라비아 공항을 공격했다는 것이다.


원문: 
http://www.veteranstoday.com/2015/06/17/israeli-officers-captured-killed-in-yemen-attacks/

번역문: 
http://www.surprise.or.kr/board/view.php?uid=161815&table=global_2&mode=search&field=title&s_que=예멘

 

문제는 이번 예멘의 미사일 공격을 포함한 특수작전으로 사우디아라비아 공군 사령관 중장 무하메드 빈 하메드 알 사하알란이 공군기지 현장에서 즉사했다는 것이다. 사우디 정부에서는 외부 업무 도중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했지만 이와 관련된 이란과 예멘정부의 보도와 인터넷 상에 소개된 까맣게 탄 그의 시체 등을 종합해 보았을 예멘의 공격으로 희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이번 공격은 이스라엘과 사우디에게는 경악을 금할 수 없는 엄청난 공격인 셈이다. 모사드 요원 20명이 동시에 한 장소에서 희생된 일은 이스라엔 정보국 역사에서 일찍이 없었던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스라엘은 단 한 명의 모사드요원만 희생되어도 지구 끝까지 추적하여 처절하게 복수를 한다는 의지를 내외에 공표해온 나라이다. 그런 나라의 요원 20명이 동시에 한 장소에 있다가 그대로 폭사해버렸으니 얼마나 심각한 일인가. 하여 좀 자세히 분석해 보자.

 

▲ 2006년 이란 사게브 순항미사일을 함선에서 시험발사하는 장면, 장거리 타격이 가능하고 어떤 레이더에도 탐지되지 않는다고 이란 국방부에서 자랑했었다.     © 자주시보

 


예멘 미사일을 막지 못한 사우디의 방공시스템

 

이란의 알 바쉬 보안 장교는 "예멘 군대가 후원한 안사룰라 전사가 남부 사우디 아라비아 하메스 알 무사트 지역 아미르 할리드 공군 기지를 스커드 미사일과 다수의 나짐 알 사케브(스트라이킹 스타) 미사일로 지난주 공격해서 20명 이상의 선임 이스라엘 장교와 사우디 아라비아 군인 63명이 죽었고 35명이 체포되었다."며 “이스라엘 장교는 모사드 스파이 기관의 요원이고 사우디 군대를 도우려 그 지역에 있었다. 공격 시점에 이스라엘 장교는 금지된 이스라엘 제작 무기로 에멘의 어떤 지역을 공격할 계획을 작업하고 있었다.”고 지적하였다.

 

탄도미사일인 스커드 미사일은 예멘에서 오래 전부터 북으로부터 수입해간 무기임이 드러난 바 있다. 미국의 대량살상무기전파방지협약 PSI 정책에 따라 2003년 12월 스페인 특수부대가 북의 무역선을 나포 강제 검색했는데 거기에 예멘으로 수출하기 위해 싣고 있던 스커드 미사일이 발견된 것이다. 미국의 항의에 예멘 대통령은 북의 미사일이 싸면서도 위력적이서 수입했다고 당당하게 밝힌 바 있다. 미국도 북의 무역선을 그대로 돌려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미사일을 이번에 사우디에서 막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순항미사일인 사게브 미사일은 이란에서 자체 제작했다고 2006년 자랑했던 순항미사일이다. 함선과 잠수함에서 발사가 가능하며 당시 이란 국방장관은 어떤 레이더에도 탐지되지 않으며 장거리 공격이 가능하고 정밀도가 높다고 자랑했었다.(2006년 8월 28일 YTN보도 ‘이란, 미사일 시험발사 성공’ 참조). 물론 지상발사용으로도 얼마든지 변용이 가능한 미사일이다. 
이란의 미사일은 북의 기술로 개발되기 시작했다는 점은 이란 국방부도 공식 인정한 바 있다. 다만 첫 설계도를 넘겨받은 이후엔 점차 자체제작해오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미사일이란 것이 하루 아침에 그 기술을 다 전수받기는 힘든 무기이다. 그래서 우리 국방연구원에서 출간한 '이란을 읽으면 북한이 보인다'라는 책에서 이란의 모든 미사일 등 핵심 무기는 다 북의 기술로 제작한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http://www.ytn.co.kr/_ln/0104_200608280007591673

 

사우디는 미국으로부터 가장 많은 무기를 사들이는 나라이다. 미국의 첨단무기는 거의 다 가지고 있다고 봐야 한다. 따라서 예멘 폭격을 진행한 최전방 핵심공격기지인 킹 칼리드 공군기지는 당연히 미국의 MD 미사일방어체계나 이스라엘의 아이언 돔 미사일 방어망을 가동 중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예멘의 이 두 종류의 미사일이 완전히 뚫어버린 것이다.

 

결국 미국과 이스라엘의 무기체계가 예멘처럼 작은 제3세계국가가 보유한 미사일마저 막지 못하고 있음이 만천하에 증명된 것이다. 이것이 알려질 경우 미국의 무기수출은 심각한 타격을 받을 것이고 미국의 군사력에 안전을 내맡기고 있는 많은 대미 추종국들이 우수수 떨어져 나갈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미국은 이와 관련된 보도를 철저히 차단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아무리 차단을 하려고 해도 사우디 왕정 당국자들까지 모르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우디가 점점 러시아나 중국의 무기 수입을 늘려간다면 사우디정부도 더는 미국을 믿지 못하겠다는 마음을 다진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기에 향후 사우디의 무기 수입 움직임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 이스라엘의 전술핵무기가 예멘 지역에서 폭발하는 모습, 일반 폭탄과 달리 폭발 시간이 길고 저렇게 여러개의 작은 빛들이 반짝이며 거대한 섬광과 함께 폭발이 일어나고 나중에 버섯구름이 피어오른다. 핵무기일 가능성이 높다. 다만 핵먼지 등에 의한 오염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자주시보

 

▲ 예멘에 피어오른 버섯구름, 이스라엘 전술핵무기를 사우디에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자주시보

 

 

이스라엘 핵무기 공격에 대한 보복이었나?

 

사우디 군대는 미국 근접 미사일 방어망인 패트리어트 미사일로 예멘에서 쏜 2기의 스커드 미사일을 차단했다고 주장했지만 아랍어 알 마아딘 뉴스 채널은 미사일 공격 장면을 보여주고 목표를 공격했다고 보도하고 뒤따라 이번 미사일 공격으로 사우디 군대가 지역 가까이 공항 2군데 여행객 터미날로 대피했다고 전했다. 

 

(17)수요일 FNA의 대담에서 사리 모함메드 대령도 "사하알란은 사우디 아라비아 하메스 알 무사트 국경 지역 아미르 할리드 공군 기지에 대한 예멘 군대의 특수 작전으로 5일전에 죽었다."고 말하고 "할리드 공군 기지에 대한 공격은 미사일 무기 시스템으로 수행했는데 매우 특수하지 않다.(그저 평범한 공격이었다는 의미, 더 위력적인 공격작전도 갖추고 있음을 암시하는 말인 듯) 작전은 안사룰라와 예멘 군대가 계획했고 하메스 알 무사트 할리드 공군 기지에 무하메드 사하알란의 존재에 대한 정보를 안사룰라가 제공한 후에 수행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모하메드 대령은 이번 작전으로 예멘 군대가 초기 미사일 공격에 이어서 병사들을 직접 보내 사우디의 할리드 공군 기지를 점령한 후 선진 미국제 무기를 소유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사우디 할리드 공항을 완전히 점령하고 사우디 무기까지 모두 압수해버린 것이다.

 

지난 수요일 공식 사우디 언론 기관은 국방부 장관이 중장 무하메드 빈 하메드 알 사하알란의 죽음을 선언한 것을 인용하면서 사령관이 왕국의 외부를 여행하던 중 심장 마비로 죽었다고 주장했다는데 이를 부정하고 미사일 공격으로 죽었다는 여러 보도들이 줄을 이었고 불에 탄 사우디 사령관의 시신도 사진으로 공개되기도 했다고 이번 베테랑투데이는 지적하였다. 아무래도 사우디보다는 예멘군대의 주장이 사실인 듯하다.

 

예멘이 이스라엘 모사드 요원 20여명과 사우디사령관이 회의를 하고 있는 공군기지를 때맞추어 공격했다면 사우디, 이스라엘과 전면적인 전쟁확대까지 각오를 하고 했다는 말과 같다.

 

도대체 예멘에서 왜 이런 무서운 각오를 하게 되었을까. 사우디는 중동 친미국 중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를 보유한 나라이고 이스라엘은 핵무기와 여러 첨단무기를 개발한 나라이다. 이런 나라들과 동시에 전쟁을 각오하지 않을 수 없었던 뭔가 절박한 일이 있었을 것이다.

 

최근 이스라엘에서 만든 전술핵무기가 예멘 공격에 이용되고 있다는 주장이 인터넷에 많이 오르고 있다. 동영상을 보면 버섯구름이 확연하게 피어오르고 있어 핵무기임을 직감할 수 있다. 블로그 유용원의 군사세계에서도 관련 동영상을 소개하면서 핵무기일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하고 있다.

 

예멘에서 터진 전술핵무기 추정 폭탄은 일반 폭탄과 달리 폭발 시간이 길고 여러개의 작은 빛들이 반짝이며 거대한 섬광과 함께 폭발이 일어나고 나중에 버섯구름이 피어오른다. 핵무기일 가능성이 높다. 다만 반감기가 짧아 20분이면 방사능이 사라져 핵먼지 등에 의한 오염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핵무기 중에서 중성자탄의 반감기가 짧아 핵물질 오염은 없다. 다만 폭발시 다량의 중성자가 방출되어 주변의 모든 생명체만 다 죽인다. 이 악마의 중성자는 납을 이용한 방호시설만 빼고 모든 건물도 다 뚫고 들어간다. 이번 이스라엘에서 사용한 폭탄이 중성자탄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핵폭탄도 요즘은 이렇게 핵먼지 오염이 없고 파괴력과 살상력이 큰 다양한 종류가 만들어지고 있다. 그런 무기를 이번 예멘전에서 이스라엘이 시험 사용해보려고 했던 것 같다.

 

 

이런 이스라엘과 사우디의 공격에 예멘정부도 더는 참을 수 없어 사우디와 이스라엘 핵심작전가들이 회의를 하고 있는 전략적인 공간을 탄도미사일과 순항미사일을 동시에 사용 마구 미사일 공격을 퍼부어 쑥대밭을 만들고 그래도 분이 안 풀렸는 듯 특수부대까지 보내 공항을 완전 점령하고 사우디 군이 보유하고 있던 최신 미제 문기를 모조리 압수해버린 것 같다. 아마 전술핵무기 사용의 결정적 증거도 예멘군이 압수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스라엘과 사우디, 미국은 엄청난 타격을 입은 것이다. 전술핵무기 기술까지 예멘군으로 넘어가게 생겼다.

 

위의 베테랑투데이에서 인용한 이란 바쉬 보안장교(정보요원인 듯)가 '금지된 이스라엘 제작무기'로 예멘을 공격하려는 작전논의를 하고 있다는 정보를 예멘군이 입수하여 그곳을 공격했다고 언급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금지된 이스라엘 제작무기가 바로 전술핵무기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현재 국제적으로 금지된 주된 무기는 생화학무기와 핵무기이다.

 

물론 이런 내용은 서방언론에서는 취급하지 않고 이란의 반 관영 통신사 FNA나 초국적독립언론사인 베테랑투데이 뉴스 등에만 나오는 내용이기는 하지만 명백하고 구체적인 근거와 증언들이 있어 낭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앞으로도 이스라엘이 예멘에 핵무기를 사용하는지 두고 볼 일이다. 만약 이스라엘이 다시는 그런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예멘에 대해 패배를 인정한 것으로 될 것이다.

 

결국 사우디와 이스라엘에 대한 이번 예멘군과 반군의 미사일 공격은 미국의 무기시스템도 이제는 바람빠진 고무풍선신세이고 저렴하고 위력적인 북, 이란제 미사일이 세계 곳곳의 나라로 널리 전파되면서 이젠 군사력에 있어 절대 약자도, 절대강자도 없어졌음을 말해주고 있다. 즉, 제국주의 패권국은 이제 발을 붙일 곳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북 반함선로케트(대함미사일)와 고속공격정에 깃든 놀라운 사연

 
 
한호석의 개벽예감 <164>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기사입력: 2015/06/22 [09:51]  최종편집: ⓒ 자주시보
 
 

<차례>
1. 로케트탄연구실 실장의 예고발언
2. 하필이면 왜 3발을 쏘았을까?
3. 동조선만 동북쪽으로 날아간 금성-3호
4. 대공미사일로 무장력을 한층 더 강화한 고속공격정
5. 조선의 고속공격정에 일본산 안테나가 설치된 사연
6. 금성-3호 방어수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 <사진 1> 2015년 6월 14일 김정은 제1위원장이 참관한 가운데 진행된 금성-3호 발사훈련에는 조선인민군 해군 제597대련합부대 관하 직속부대가 참가하였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제공



1. 로케트탄연구실 실장의 예고발언

 

나의 글 ‘습격기가 투하한 지뢰폭탄, 고속정이 발사한 금성-3호 대함미사일’이 <자주시보>에 실린 2015년 6월 15일 조선의 언론매체들은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참관한 신형 반함선로케트 발사훈련이 진행된 소식을 일제히 보도하였다. 내가 금성-3호 함대함미사일에 관한 집필을 마무리하던 시각, 조선 동해에서는 그 미사일을 발사하는 훈련이 진행되고 있었으니, 기묘하게도 시간적으로 일치한 것이다. 만일 내가 그 글을 하루 늦게 탈고하였더라면, 금성-3호 발사훈련에 관한 내용까지 분석하여 더 풍부해진 정보를 독자들에게 전해드렸을 것이다. 그런 아쉬움을 집필동기로 삼고 나는 이 글에서 금성-3호 함대함미사일과 그것이 장착된 고속공격정에 깃든 사연을 논한다.


조선의 언론매체들이 조선에서 진행되는 각종 무장장비들의 시험과 각종 군사훈련을 지속적으로 보도하는 것은 몇 해 전부터 계속되는 현상이다. 이런 현상은 김정일 시대에 축적된 군사과학기술과 무장장비생산의 저력이 김정은 시대에 분출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를테면, 지난 3년 동안 조선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낸 신형 미사일들은 대륙간탄도미사일 화성-13호, 초정밀지대지미사일 화성-11호, 지대공요격미사일 번개-6호, 잠대지탄도미사일 북극성-1호, 함대함미사일 금성-3호 등이다. 지난 3년 동안 조선에서는 신형 미사일들만 아니라 지상, 공중, 해상, 수중에서 각각 작전하는 신형 무장장비들도 속속 등장했으니, 그런 현상을 문학적으로 표현하면 개화만발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2014년 8월 15일 <조선중앙텔레비죤방송>이 방영한 대담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조선의 미사일과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제2자연과학원 로케트탄연구실 김인용 실장이 그 대담에 출연하였는데, 그는 김정은 제1위원장으로부터 “또다시 새로운 전투적 명령을 받아안았다”고 하면서, “이제 곧 보다 새로운, 초정밀화된 최신 로케트탄 시험발사가 연이어 단행되게 된다”고 예고했다. 김인용 실장의 예고가 무슨 뜻인지 당시에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었으나, 그로부터 약 6개월 뒤인 2015년 2월 6일 김정은 제1위원장이 참관한 금성-3호 함대함미사일 시험발사가 진행되었던 것이다.


2.6시험발사에는 조선인민군 해군 제155군부대 해병들, 국방과학기술자들, 군수로동계급이 참가하였다. 강원도 원산에 주둔하는 조선인민군 해군 제155군부대는 1968년 1월 23일 원산 앞바다에 접근하여 조선의 무선신호를 도청하던 미국 간첩선 푸에블로호(USS Pueblo)를 기습적으로 나포한 최정예부대다. 푸에블로호를 나포하여 “미국의 거만한 콧대를 꺾었다”고 자부하는 해군부대가 조선에서 개발된 최첨단 함대함미사일 금성-3호의 시험발사를 진행한 것은 최후결전에서 승리하려는 조선인민군의 전의를 상징적으로 부각시킨 조치로 해석된다.  


2.6시험발사가 진행된 때로부터 약 6개월 뒤인 2015년 6월 14일 김정은 제1위원장이 또 다시 참관한 가운데 <사진 1>에서 보는 것처럼 금성-3호 발사훈련이 진행되었다. 조선에서 신형 미사일의 시험발사와 발사훈련이 6개월 간격을 두고 진행된 것도 이례적이고, 최고영도자가 시험발사와 발사훈련을 모두 참관한 것도 이례적이다. 그렇게 이례적인 만큼, 조선의 해군력강화에서 금성-3호가 차지하는 위상은 커 보인다. 금성-3호의 출현은 한반도 해상무력판도를 바꿔놓은 것이다. 


6.14발사훈련에는 조선인민군 해군 제597대련합부대 장병들이 참가하였다. 조선인민군 해군 제597대련합부대는 함경남도 함흥 인근 락원군에 있는 동해함대사령부다. 금성-3호 발사훈련에 동해함대사령부 관하 직속부대가 참가한 것은 그 신형 함대함미사일이 시험발사된 이후 지난 6개월 동안 조선인민군 해군부대들에 실전배치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 <사진 2> 금성-1호가 화염을 뿜으며 날아가는 장면이다. 동체와 날개가 커서 육중한 느낌을 준다. 이 미사일의 사거리는 260km다.     © 자주시보

 

▲ <사진 3> 이것은 금성-3호가 화염을 뿜으며 날아가는 장면이다. 금성-1호와 완전히 다른 미사일임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그런데도 한국 국방부 당국자는 금성-3호를 금성-1호(KN-01)라고 왜곡한 정보를 언론에 흘려주었다.     © 자주시보


그런데 익명의 한국 국방부 당국자는 조선의 6.14발사훈련과 관련한 왜곡정보를 언론에 흘려주어 사람들을 헷갈리게 만들었다. 그는 조선인민군 해군이 6.14발사훈련에서 KN-01 단거리미사일을 발사하였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왜곡발언이다. 미국 군부가 KN-01이라는 자의적 명칭으로 부르는 미사일은 금성-1호인데, 이 미사일은 1997년경에 개발된 조선의 첫 대함미사일이다. <사진 2>에 보이는 금성-1호와 <사진 3>에 보이는 금성-3호를 비교하면, 외형부터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 국방부 당국자가 금성-1호와 금성-3호를 구분하지 못할 리 없으므로, 그는 금성-3호를 금성-1호(KN-01)라고 고의적으로 왜곡한 정보를 언론에 흘려준 것이다. 조선인민군 해군부대들이 최첨단 함대함미사일을 실전배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은폐하려는 의도에서 그런 왜곡정보를 흘려준 것으로 생각된다.

 

▲ <사진 4> 조선의 고속공격정에는 금성-3호 발사관이 좌우에 각각 2문씩 모둔 4문 장착되었다.     © 자주시보

 

 

2. 하필이면 왜 3발만 쏘았을까?

 

6.14발사훈련을 보도한 조선의 언론매체들은 “순차대로 발사된 반함선로케트들이 세찬 불줄기를 내뿜으며 날아올랐다”고 묘사하였다. 이것은 금성-3호를 여러 발 쏘았음을 의미한다. 한국 국방부 당국자는 6.14발사훈련에서 미사일 3발이 발사되었다고 말했다. 그가 조선의 6.14발사훈련에서 발사된 미사일 수량까지 왜곡하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금성-3호 3발이 발사되었다는 그의 말은 사실로 인정된다.


그런데 6.14발사훈련에 참가한 고속공격정을 찍은 보도사진을 보면, 그 훈련 중에 금성-3호가 3발 발사되었다는 말이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왜냐하면, 6.14발사훈련에 참가한 고속공격정에는 금성-3호 발사관 4문이 장착되었기 때문이다. <사진 4>에서 보는 것처럼, 금성-3호 발사관은 좌우에 각각 2문씩 장착되었다. 그렇다면, 금성-3호 4발을 쏘는 게 자연스러운데, 3발만 쏜 것이다. 하필이면 왜 3발을 쏘았을까?

 

▲ <사진 5> 금성-3호가 화염을 뿜으며 표적을 향해 날아가고 있다. 6.14발사훈련은 고속공격정이 호도반도 앞바다에서 금성-3호를 발사하여 김책시 앞바다에 있는 표적선을 명중시키는 훈련이었다.     © 자주시보


<사진 5>에서 보는 것처럼, 6.14발사훈련은 고속공격정이 호도반도 앞바다에서 금성-3호를 발사하여 김책시 앞바다에 있는 표적선을 명중시키는 훈련이었다. 표적선을 맞추는 발사훈련에서는 실탄을 쓰지 않고, 훈련탄을 쓴다. 표적선으로 사용되는 퇴역함선에 실탄이 명중되면 그 표적선은 완파, 침몰될 것이다. 표적선이 사라지면, 여러 발을 쏘면서 명중률을 검증해야 하는 발사훈련을 진행할 수 없으므로, 고폭탄두를 일반탄두로 교체한 훈련탄을 사용하는 것이다. <사진 6>은 2.6시험발사에서 금성-3호 실탄을 맞은 표적선이 완파되는 장면이고, <사진 7>은 6.14발사훈련에서 금성-3호 훈련탄이 명중한 표적선이 완파되지는 않은 채 선체 일부만 화염에 휩싸인 장면이다. 그런데 파괴력을 줄인 훈련탄이라도 여러 발이 모두 명중하여 표적선이 침몰해버리면, 발사훈련은 더 이상 진행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사정을 이해하면, 6.14발사훈련에서 금성-3호 훈련탄이 왜 3발만 발사되었는지 알 수 있다. 그 훈련탄 3발이 모두 표적선에 명중하여 표적선이 완파, 침몰하였기 때문에 마지막 남은 훈련탄 1발은 쏘지 않은 것이다. 

 

▲ <사진 6> 2.6시험발사에서 금성-3호 실탄을 맞은 표적선에서 검은 연기가 솟구치고 있다. 그 표적선은 금성-3호 실탄 1발을 맞고 완파, 침몰되었다.     © 자주시보

 

▲ <사진 7> 6.14발사훈련에서 금성-3호 훈련탄이 명중한 표적선은 완파되지 않은 채 선체 일부만 화염에 휩싸였다.     © 자주시보



조선의 언론매체들은 6.14발사훈련에서 “지능화된 반함선로케트들은 지정된 고도를 유지하면서 단 한 치의 편차도 없이 안전하게 비행한 후 <적>함선을 정확히 탐색, 식별하여 명중하였다”고 보도하였다. 또한 조선의 언론매체들은 김정은 제1위원장이 6.14발사훈련을 참관하면서 “영상표시장치에 현시되는 반함선로케트들의 비행상태를 구체적으로 보시”고, 금성-3호가 표적함에 명중할 때마다 “통쾌하게 들어맞았다. 멋있다. 목표식별능력이 대단히 높다”고 하면서 “커다란 만족을 표시하시였다”고 보도하였다.

 

 

3. 동조선만 동북쪽으로 날아간 금성-3호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김정은 제1위원장은 2.6시험발사를 참관하면서 “이번에 적함선집단을 먼 거리에서 마음먹은 대로 타격할 수 있는 신형반함선로케트가 개발완성”되었다고 말하였다. 여기서 먼 거리는 금성-3호의 사거리를 뜻한다. 자국산 신형 미사일의 사거리를 외부에 밝히는 나라는 없으므로, 미국 군사전문가들이 펴낸 자료들에 나오는, 조선산 미사일들의 사거리는 모두 추정수치들이다. 


나는 2015년 6월 15일 <자주시보>에 실린 글 ‘습격기가 투하한 지뢰폭탄, 고속정이 발사한 금성-3호 대함미사일’에서 미국의 군사전문 웹싸이트 <오릭스 블럭>이 분석한 금성-2호와 러시아산 함대함미사일 우란(Uran)의 차이점을 지적하면서 금성-2호 동체가 우란보다 더 크고, 따라서 금성-2호보다 성능이 더 향상된 금성-3호의 사거리는 당연히 우란의 사거리보다 더 길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한국 언론매체들이 러시아산 우란미사일에 대해 언급할 때, 3M24(함대함미사일)과 Kh-35(공대함미사일)를 구분하지 않고 Kh-35로 통칭하지만, 금성-3호와 그 미사일을 비교할 때는 Kh-35가 아니라 3M24로 적시해야 옳다. 명칭혼동을 피하기 위해, 이 글에서는 우란이라는 명칭을 쓴다. 
금성-3호 사거리를 추산하려면, 러시아가 2012년부터 실전배치하는 최신형 우란과 비교해야 하는데, 최신형 우란의 사거리는 초기형 우란의 사거리 130km를 두 배로 늘인 260km다. 이처럼 긴 사거리를 가진 함대함미사일은 러시아의 최신형 우란밖에 없다.

 

▲ <사진 8> 6.14발사훈련상황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영상현시장치 화면에는 함경남도 최남단 금야군에 있는 호도반도에서부터 함경북도로 이어진 해안선과 동조선만이 나타났다. 화면 오른쪽에는 금성-3호가 비행하는 방향각, 거리, 속도, 탄착점 등을 숫자로 표시하는 상자들이 설정되었다. 이 화면은 금성-3호가 발사되기 직전에 찍은 것이어서 그 상자에 숫자들이 아직 표시되지 않았다.     © 자주시보


그렇다면 조선이 실전배치하는 금성-3호 사거리는 얼마나 길까? 조선의 언론보도매체에 실린 두 장의 사진에서 추산근거를 발견할 수 있다. <사진 8>은 6.14발사훈련상황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영상현시장치 화면을 확대한 것인데, 함경남도 최남단 금야군에 있는 호도반도에서부터 함경북도로 이어진 해안선과 동조선만이 화면에 나타났다. 또한 금성-3호가 비행하는 방향각, 거리, 속도, 탄착점 등을 숫자로 표시하는 상자들이 화면 오른쪽에 설정되었는데, 금성-3호가 발사되기 직전에 찍은 화면이어서 숫자들이 아직 표시되지 않았다.

 

▲ <사진 9> 금성-3호가 표적선에 명중한 직후 영상현시장치에 나타난 화면이다. 명중이라는 글씨가 보이고, 호도반도에서부터 북동쪽으로 길게 그어진 흰색 직선이 보인다. 금성-3호가 비행한 방향각, 거리, 속도, 탄착점 등을 붉은색 숫자로 표시한 상자가 화면 오른쪽에 보이는데, 너무 흐려서 식별할 수 없다.     © 자주시보



<사진 9>는 금성-3호가 표적선에 명중한 직후 영상현시장치에 나타난 화면을 찍은 것인데, 화면 한 복판에 명중이라는 붉은 글씨가 나타났고, 호도반도에서부터 북동쪽으로 길게 그어진 흰색 직선이 나타났다. 또한 금성-3호가 비행한 방향각, 거리, 속도, 탄착점 등이 그 화면 오른쪽에 설정된 상자들에 붉은 색 숫자로 표시되었는데, 사진을 확대해도 너무 흐리게 나타나 숫자를 알아볼 수 없다.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처럼, 화면에 나타난 흰색 직선은 금성-3호가 날아간 방향을 표시한 것이다. 흰색 직선의 위쪽 맨 끝에 금성-3호의 탄착점이 표시되는 것인데, 흰색 직선이 화면의 표시범위를 넘어섰기 때문에 탄착점이 화면에 표시되지 않았다. 금성-3호의 탄착점이 나타난 다른 화면도 있었는데, 그 화면이 언론에 보도되면 금성-3호 사거리가 외부에 알려지게 되므로 탄착점이 표시되지 않은 화면만 언론보도에 나온 것이다.


호도반도 앞바다에서 발사되어 동조선만 동북쪽으로 날아간 금성-3호는 어디에 탄착한 것일까? 조선에서 신형 미사일을 시험발사할 때 호도반도에서 동북쪽으로 발사한 선례들을 살펴보면, 매번 함경북도 최남단 김책시 앞바다에 탄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선례를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면, 2014년 6월 27일에 진행된 시험발사에서 쏜 신형 전술미사일 3발도 김책시 앞바다에 탄착했고, 2014년 8월 14일 김정은 제1위원장이 참관한 시험발사에서 쏜 신형 전술미사일 5발도 김책시 앞바다에 탄착했다. 김책시 앞바다에 탄착한 신형 전술미사일들 가운데 가장 멀리 날아간 미사일의 비행거리는 220여 km였다.

 

▲ <사진 10> 온라인 거리측정프로그램을 사용하여 호도반도 앞바다에서 김책시 앞바다까지 거리를 측정하였더니, 그 직선거리는 257km로 나왔다. 금성-3호 사거리는 그 정도일 것이다.     © 자주시보


온라인 거리측정프로그램을 사용하여 호도반도 앞바다에서 김책시 앞바다까지 거리를 측정하였더니, <사진 10>에서 보는 것처럼 그 직선거리는 257km로 나왔다. 위에 열거한 몇 가지 사실들은 금성-3호 사거리가 250km 정도에 이른다는 점을 말해준다. 이런 사실은 조선의 금성-3호가 세계 최강이라는 평가를 받는 러시아의 최신형 우란과 동급인 최첨단 함대함미사일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금성-3호가 지닌 최첨단 성능은 사거리에서만 나타나는 게 아니라, 명중률, 해수면밀착비행, 전파교란돌파비행 등에서도 나타나므로, 조선인민군 해군이 세계 최강의 함대함미사일로 무장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김정은 제1위원장은 6.14발사훈련을 참관하면서 “오늘 훈련을 통하여 조선인민군 해군부대들에 실전배비된 신형 반함선로케트의 위력이 남김없이 과시되였다. 주체적 해군무력강화에서 또 하나의 새로운 리정표를 마련하였다. 조선인민군 해군의 해상작전능력은 이를 계기로 비약적으로 강화되였다”고 격찬하였고, 조선의 언론매체들은 2.6시험발사를 보도한 기사에서 “가까운 시일 안에 신형 반함선로케트가 해군부대들에 실전배비됨에 따라 해군의 령해방위에서는 커다란 변혁을 이룩하게 되었으며 우리에 대한 군사적 타격을 기도하는 적함선집단들과의 접촉전이든 비접촉전이든 강력히 대응할 수 있게 되었다”고 지적하였다. 

 

 

4. 대공미사일로 무장력을 한층 더 강화한 고속공격정


조선에서는 소형화, 고속화, 자동화된 각종 전투함선을 많이 만들었다. 지난 2월 6일 금성-3호를 장착하고 언론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고속공격정은 물론이고, 아직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위성사진에만 나타난 파도관통식 고속공격정이나 신형 초계함도 소형화, 고속화, 자동화된 전투함선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한국군 정보당국이 파악한 정보에 따르면, 조선인민군 해군이 운용하는 각종 전투함선은 총 420여 척에 이른다는데, 그처럼 많은 전투함선을 총동원하면 동서해 작전구역을 전투함선으로 완전히 뒤덮을 만하다.


그런데 조선을 무턱대고 혐오하는 몰지각한 사람들은 조선인민군 해군이 운용하는 그 많은 전투함선들이 실전에 동원하기 힘든 낡은 함선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아래와 같은 정보를 파악하면, 그런 식으로 왜곡한 주장들은 설 자리를 잃어버리게 된다.


금성-3호를 장착한 고속공격정은 매우 강한 타격력을 가졌다. 거기에 장착된 4발의 금성-3호 함대함미사일이 얼마나 강력한 타격수단인지는 위에서 설명하였으므로 재론할 필요가 없다. 금성-3호 함대함미사일 이외에도 강력한 근접방어무기들이 장착되었다. 선체 앞쪽에 30mm 6렬 자동속사포 1문이 장착되었고, 14.5mm 6렬 자동속사포가 선제 앞쪽 좌우에 각각 1문씩, 선체 뒤쪽 좌우에 각각 1문씩 모두 4문이 장착되었다. 이 5문의 자동속사포들은 수동으로도 사격할 수 있다.

 

▲ <사진 11> 금성 3호를 장착한 고속공격정 뒤쪽에 저고도대공미사일발사대 1문이 장착되었다. 왼쪽에 포신을 하늘로 쳐든 것은 14.5mm 6렬 자동속사포다. 이 발사대에는 사거리가 8km로 추정되는 대공미사일 6발이 들어간다. 이 고속공격정으로 날아드는 교전상대의 순항미사일과 해상작전헬기를 그 대공미사일로 격추할 수 있다.     © 자주시보


<사진 11>은 금성-3호를 장착한 고속공격정을 뒤쪽에서 촬영한 것인데, 선체 뒤쪽 중앙에 장착된 저고도대공미사일발사대 1문이 보인다. 이 저고도대공미사일발사대는 머쥴(module)이 좌우에 설치된 형태인데, 사용자가 손에 들고 다니다가 어깨 위에 올려놓고 쏘는 휴대용 대공미사일(MANPADS)이 좌우에 각각 3발씩 모두 6발이 들어간다. 이 저고도미사일발사대는 러시아군이 사용하는 깁카(Ghibka) 저고도미사일발사대와 비슷한데, 양자의 차이점은 조선의 저고도미사일발사대의 경우 미사일을 긴 상자 같이 생긴 발사관 안에 넣어두어 미사일이 보이지 않는 데 비해, 러시아의 저고도미사일발사대에는 발사관이 없어서 미사일이 보인다는 점이다.  

이 저고도미사일발사대는 사격통제장치를 가동하여 자동으로 1발씩 쏠 수도 있고, 6발을 일제사격으로 쏠 수도 있다. 발사준비시간은 8초 이하로 매우 신속하다. 사격방위각은 좌우로 150도씩 돌아가고, 사격고도각은 60도까지 세울 수 있다. 


저고도미사일발사관에 들어가는 6발의 대공미사일은 어떤 미사일일까? 조선에서는 대공미사일을 고사로케트라고 부르는데, 조선인민군 무장장비관에 전시된 1976년식 고사로케트의 사거리는 5km다. 사거리가 5km인 대공미사일을 이미 40년 전에 만들만큼 그 분야에서 높은 기술을 축적한 조선은 지난 40년 동안 단거리대공미사일 성능개량을 거듭하면서 사거리가 긴 후속미사일을 만든 것이 분명하다.


러시아는 1992년부터 자국산 휴대용 대공미사일 아이글라(Igla)-S를 실전배치하기 시작한 2004년까지 12년 동안 조선산 휴대용 대공미사일 1,250발을 수입하였는데, 아이글라-S의 사거리는 6km다. 이런 사정은 조선이 1990년대 초에 만든 휴대용 대공미사일의 사거리가 6km 이상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현재 세계에서 사거리가 가장 긴 휴대용 대공미사일을 가진 나라는 미국인데, 미국산 스팅어(Stinger)의 사거리는 8km다. 2008년 8월 8일 미국 의회조사국(CRS)이 펴낸 보고서에 따르면, 1990년대 초 조선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스팅어 휴대용 대공미사일을 사들였다고 한다. 스팅어 휴대용 대공미사일을 분해하여 제작기술을 파악한 조선은 1990년대 중반 스팅어와 같은 급의 자국산 휴대용 대공미사일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고속공격정에 장착된 저고도대공미사일발사대에 들어있는 대공미사일 사거리를 8km로 추정하는 근거가 거기에 있다.


해군력이 강한 나라들이 보유한 각이한 형태의 고속공격정들 가운데 이처럼 강력한 타격수단을 갖춘 것은 조선인민군 해군이 보유한 공기부양식 쌍동선체 고속공격정밖에 없다.

 

▲ <사진 12> 조선의 고속공격정에는 일본 후루노전기회사가 만든 항법레이더안테나가 설치되었다. 이것은 그 고속공격정에 일본산 항법레이더가 설치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조선만이 아니라 미국도 기존 전투함선들에 설치된 항법레이더를 후루노항법레이더로 교체하는 중이다.     © 자주시보

 

 

5. 조선의 고속공격정에 일본산 안테나가 설치된 사연


금성-3호를 장착한 공기부양식 쌍동선체 고속공격정을 촬영한 사진을 확대하면, <사진 12>에서 보는 것처럼 푸루노(Furuno)라는 영어글씨가 쓰인 반구형 물체가 보인다. 그 반구형 물체는 일본의 후루노(吉野)전기회사가 만든 항법레이더안테나다. 원래 항법레이더안테나는 항법레이더에 연결된 부속장치이므로, 조선의 고속공격정에 설치된 항법레이더는 후루노전기회사 제품인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고속공격정을 촬영한 보도사진에서 일본산 레이더안테나가 보이자, 조선을 무턱대고 혐오하는 몰지각한 사람들은 전략물자수출금지협정에 가로막혀 외국산 군용레이더를 수입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조선이 일본산 민수용레이더를 제3국을 거쳐 수입하여 고속공격정에 달아놓았다느니, 고속공격정에 성능이 떨어지는 민간용레이더를 달아놓은 것은 한심한 궁여지책이라느니 뭐니 하며 비아냥거렸다.


조선이 건조한 고속공격정에 일본산 항법레이더가 설치되었으니 어찌된 일인가? 이 문제를 해명하려면 레이더에 관한 상식이 필요하다. 레이더의 종류는 탐지레이더, 추적레이더, 항법레이더, 기상레이더, 지리영상레이더 등으로 대별되는데, 그 가운데서 군용레이더는 탐지레이더와 추적레이더 뿐이고, 나머지 레이더들은 군민겸용이다. 조선의 고속공격정에 설치된 후루노항법레이더도 군민겸용항법레이더다. 그러므로 조선을 무턱대고 혐오하는 몰지각한 사람들이 고속공격정에서는 쓸 수 없는 민간용항법레이더를 조선에서 궁여지책으로 고속공격정에 설치한 것처럼 비아냥거린 것은 항법레이더가 무엇인지 모르는 무지몽매의 노출이다. 


조선의 고속공격정에 후루노항법레이더가 설치된 까닭은 그 항법레이더가 매우 우수한 성능을 지녔기 때문이다. 미해군 공보실 웹싸이트 <미국의 해군>에 현시된 자료에 따르면, 미국 해군은 자기들이 운용하는 모든 함선들에 설치된 기존 레이더체계를 최신형 레이더체계인 AN/SPS-73(V)12로 교체하는 중인데, 그 최신형 레이더체계에는 후루노항법레이더가 포함되었다. 후루노항법레이더는 미해군 전투함선들에만 설치된 게 아니라, 내가 검색한 매우 제한적인 정보만 보더라도, 캐나다 호위함, 브라질 초계함, 필리핀 호위함 등에 설치되었다. 세계 각국 해군이 그 회사제품을 널리 사용하는 것이다.


조선의 전투함선설계자들은 공기부양식 쌍둥선체 고속공격정을 설계할 때 조선산 항법레이더를 설치할 것인가 아니면 후루노항법레이더를 설치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심사숙고했을 것이다. 그들은 성능이 가장 좋은 항법레이더를 설치해야 자기들이 설계하는 고속공격정의 첨단성능을 충분히 보장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외국산 항법레이더들 가운데 성능이 가장 좋은 후루노항법레이더를 선택하였던 것이다.

 

▲ <사진 13> 1.8m 높이의 파도가 몰아치는 것으로 가상한 상황에서 쌍둥선체는 70도 각도를 유지할 수 있지만, 일반선체는 63도 각도를 유지한다.     © 자주시보

 

 

6. 금성-3호 방어수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금성-3호를 장착한 고속공격정은 평행으로 연결된 두 개의 소형선체 위에 대형본체를 올려놓은 쌍동선이다. 고속공격정을 쌍동선체(catamaran hull)로 설계하는 까닭은, <사진 13>에서 보는 것처럼, 쌍동선체가 일반선체보다 파도 속에서 적게 흔들리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조선인민군 연구자로 알려진 조셉 버뮤디즈(Joseph S. Bermudez)가 2015년 2월 9일 <38 노스(North)>에 발표한 글 ‘전시된 신형 고속경비정’에 따르면, 조선은 이미 1980년대에 쌍동선체 전투함선을 건조하였다고 하니, 조선이 얼마나 일찍이 선진적인 선체설계기술을 개발하였는지 알 수 있다. 

 

▲ <사진 14> 조선의 공기부양식 쌍동선체 고속공격정에는 워터제트엔진이 달렸다. 엔진을 가동하여 선체 뒤쪽에 생겨난 하얀 물살이 워터제트엔진의 존재를 입증한다. 주목하는 것은, 이 고속공격정은 정지상태가 아니라 항해 중에 금성-3호를 발사한다는 점이다.     © 자주시보


주목하는 것은, <사진 14>에서 보는 것처럼 평행으로 연결된 두 개의 소형선체 뒤쪽에 워터제트엔진이 하나씩 달렸다는 점이다. 프로펠러엔진 선박과 비교하여 워터제트엔진 선박이 지닌 우월한 성능은, 강력한 속력과 추진력을 낼 수 있고, 수심이 얕은 연안에서도 항해할 수 있고, 배의 항진방향을 전후좌우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으며, 엔진소음이 적게 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속전투함에 워터제트엔진을 장착하는 것은 선진적인 군사과학기술을 가진 몇몇 나라들에서 해군무력을 현대화하는 하나의 추세로 되었다. 빠른 속도로 선진적인 군사과학기술을 개발하고 있는 조선에서도 워터제트엔진이 달린 고속공격정을 만들었다. 이를테면, 미국 군부가 농어급 고속공격정과 해삼급 고속공격정에 워터제트엔진이 장착된 것이다. 


이처럼 금성-3호를 장착한 고속공격정은 워터제트엔진을 가동하여 빠르고 민첩하게 움직이는 쌍동선체로 설계되었을 뿐 아니라, 교전상대의 탐지레이더가 쉽게 포착할 수 없는 스텔스 선형으로 설계되었다. 다시 말해서, 그 고속공격정은 스텔스 쌍동선인 것이다.


더욱이 금성-3호를 장착한 고속공격정은 공기부양기능까지 갖추었으니, 현대화된 전투함선이 갖출 수 있는 첨단성능을 완비한 것이다. 공기부양이란 쌍동선체 사이의 공간에서 해수면으로 분출되는 공기압으로 공기부양효과를 발생시킨다는 뜻이다. 이런 첨단선박의 선체를 공기부양식 쌍동선체(air-cushioned catamaran hull)라 부른다.


공기부양식 쌍동선체로 건조된 조선의 스텔스 고속공격정은 바다 위를 나는 듯이 매우 빠른 속도로 항해하며 자유자재로 방향전환을 할 수 있는데, 이것은 해수욕장에서 제트스키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나는 듯이 달리는 고속질주를 연상시킨다. 한국군 당국의 추정에 따르면, 조선의 공기부양식 쌍동선체  스텔스 고속공격정은 시속 90km로 항해할 수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그들이 추정한 속도이므로 실제로는 더 빠를 것이다.

 

▲ <사진 15> 세계에서 가장 빠른 공기부양식 쌍동선체 스텔스 고속공격정인 노르웨이 해군의 쑐급 고속공격정이다. 잔잔한 바다에서 시속 110km로 항해할 수 있다. 조선은 노르웨이보다 1년 앞서 세계 최초로 그런 첨단고속공격정을 건조하였다. 노르웨이의 고속공격정은 매우 빠르지만, 무장력은 조선의 공기부양식 쌍동선체 스텔스 고속공격정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빈약하다.     © 자주시보


<사진 15>에 보이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공기부양식 쌍동선체 스텔스 고속공격정은 노르웨이 해군이 운용하는 쑐급(Skjold-class) 고속공격정인데, 배수량이 274t밖에 되지 않는 이 고속공격정은 잔잔한 바다에서 시속 110km로 항해할 수 있다. 공기부양식 쌍동선체 설계기술을 가장 먼저 개발한 노르웨이는 그 설계기술로 처음 건조한 쑐급 고속공격정을 1999년 4월에 취역시켰고, 그 당시 쑐급 고속공격정의 등장은 세계전투함선건조사의 새 장을 장식하였다. 이를 보고 놀란 미국 해군은 2002년에 노르웨이 해군과 기술협정을 맺고 쑐급 고속공격정 설계기술을 전수받았는데, 미국 해군이 노르웨이 해군에게서 전수받은 설계기술로 서둘러 건조한 것이 프리덤급(Freedom-class) 연안전투함이다. 미국이 노르웨이의 선진기술을 따라배워 첫 연안전투함 프리덤호를 건조한 때가 2006년 9월이었으니, 공기부양식 쌍동선체 고속공격정 설계기술에서 노르웨이는 미국보다 7년이나 앞섰던 것이다.


그런데 위에서 인용한 조셉 버뮤디즈의 글에 따르면, 조선이 공기부양식 쌍동선체 고속공격정과 파도관통식 고속공격정(very slender fast attack craft)을 처음 건조한 때는 1998년이다. 버뮤디즈의 글은 조선이 미국보다 8년이나 앞서 그런 첨단고속공격정을 건조하였음을 말해준다. 조선은 공기부양식 쌍동선체 고속공격정을 세계 최초로 건조한 것으로 알려진 노르웨이보다 1년 앞서 그런 첨단고속공격정을 건조하였으니, 세계전투함선건조사를 다시 써야 할 것이다.

 

▲ <사진 16> 한국 해군의 울산급 호위함이다. 조선인민군 해군이 금성-3호를 장착한 첨단고속공격정을 실전배치함으로써 한국 해군이 운용하는 구축함, 호위함, 초계함, 유도탄고속정을 비롯한 모든 전투함선들은 금성-3호에 피격될 위험에 전부 노출되었다. 금성-3호 방어수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 해군 전투함선들은 전라남도 목포 앞바다까지 남쪽으로 멀리 후퇴해야 안전할 것이며, 미7함대와 일본해상자위대는 조선을 자극하는 대북전쟁연습을 중지해야 안전할 것이다.     © 자주시보



조선에서 금성-3호를 장착한 공기부양식 쌍동선체 스텔스 고속공격정을 실전배치한 군사적 의미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문화일보> 2015년 6월 15일 보도에 따르면, “한국군 정보당국과 해군전력분석시험평가단은 북한의 신형 함대함미사일(금성-3호를 뜻함-옮긴이)이 저공으로 기습공격할 경우 구형 포항급 초계함(PCC)과 울산급 호위함(FFG), 유도탄고속함(PKG) 등이 무방비로 노출될 것으로 보고 대책마련에 착수했다”는 것이다. <사진 16>에서 보는 것처럼, 한국 해군은 울산급 호위함 8척, 포항급 초계함 15척, 검수리급 유도탄고속정 17척을 운용하고 있는데, 위의 보도기사에 따르면, 그 40척이 모조리 조선의 첨단고속공격정에 무방비로 노출된 것이다.


한국 해군이 운용하는 전투함선 가운데 위에 열거한 40척을 제외한 나머지는 구축함 12척과 인천급 호위함 3척 뿐이다. 한국 해군은 자기들이 운용하는 구축함 12척과 인천급 호위함 3척은 첨단성능을 지닌 전투함선들이어서 안전하다고 판단하였으나, 그것은 오판이다.


미국의 군사전문가들은 러시아산 우란미사일 한 발이 명중하면 5,000t급 구축함도 격침당한다고 보는데, 금성-3호도 그처럼 엄청난 파괴력을 가졌다고 보아야 한다. 문제는, 그런 금성-3호를 막아낼 방어수단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어떤 탐지레이더도 해수면 3m 높이로 날아오는 금성-3호를 포착할 수 없고, 그 어떤 요격무기도 그처럼 낮게 비행하는 금성-3호를 격추할 수 없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한국 해군이 운용하는 전투함선들은 금성-3호에 피격될 위험에 전부 노출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한국 해군만이 아니라, 조선인민군 해군과 맞서는 미7함대와 일본해상자위대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특히 무력충돌위험이 매우 높은 서해5도 분쟁수역에 전진배치된 한국 해군 전투함선들은 금성-3호가 출현한 이후 300km 밖의 안전구역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서해5도 분쟁수역에 전진배치된 한국 해군 전투함선들이 현재 위치에서 남쪽으로 300km 떨어진 안전구역으로 후퇴하면, 전라남도 목포 앞바다까지 밀려나야 한다. 더욱이 한국 해군을 참가시킨 가운데 미7함대가 감행하는 대북전쟁연습도 남해 안전구역으로 멀리 후퇴해야 할 처지다. 조선이 금성-3호를 장착한 첨단고속공격정을 실전배치함으로써 한반도 해상무력판도는 완전히 바뀌었다. 그러므로 미국군과 한국군은 조선인민군의 공격위세에 밀려 남쪽으로 자꾸 후퇴하며 수모를 당할 게 아니라, 남북관계를 회복하여 평화적으로 통일을 이루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 될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단독] 美 생화학전 프로젝트 책임자 “원하면 한국 어디서든 실험 가능” 발언 파문

 

미군, 지난해 9월에도 생화학전 신규 감시장비 오산기지에서 테스트... 수시로 실전 훈련 반복

김원식 전문기자 최종업데이트 2015-06-21 18:21:20 이 기사는 현재 건 공유됐습니다.

 

미군의 생화학전 대응 능력 향상 프로젝트로 알려진 일명 '주피터(JUPUTR:Joint United States Forces Korea Portal and Integrated Threat Recognition) 프로젝트'가 주한미군에서 실시된 것과 관련, 총괄 책임자가 "원한다면 (한국 내 주한미군) 어디에서나 실험이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공식적으로 밝힌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따라 최근 이른바 '살아있는 탄저균 사건'과 관련하여 미군이 한반도를 마음대로 생화학전의 실험장으로 사용했다는 의혹이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사실은 지난 2011년경부터 이 주피터 프로젝트를 공식적으로 추진하면서 총괄 담당을 해온 미 육군 에지우드 생화학 연구센터(ECBC) 소속 에마뉴엘 피터 박사가 지난해 12월 16일 자 인터뷰에서 밝혔다. 이 인터뷰는 미국 안보 관련 전문 자문회사(IB Consultancy)가 운영하는 포털(cbrneportal) 사이트가 피터 박사와 가진 단독 인터뷰다. 피터 박사는 이 인터뷰에서 "특히, 주한미군에서 강력한 생화학전 감시(biosurveillance) 능력이 필요한 이유를 설명해달라"는 질문에 "생화학전 감시의 여러 아이디어를 테스트할 수 있지만, 왜 한국인가? 하면, 나는 간단한 개념적인(philosophical) 답변을 줄 수 있다"고 답했다. 그는 이어 "그런 아이디어를 테스트하고 싶다면, 당신은 (주한미군 내) 어디에서든(구역이 시작되는 어느 지점에서든) 테스트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답변했다. 피터 박사는 이어 "(생화학전 감시의) 구역은 한 지점에서 시작되고, 당신은 지점을 택한 후 (생화학 물질이 확산된) 구역을 그릴 수 있다"며 "이렇게 한국에서 진행된 원형의(template) 아이디어는 미군의 아프리카사령부나 유럽사령부, 태평양사령부 등에 적용(replicated)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피터 박사는 주피터 프로젝트가 주한미군에서 실시된 배경에 관해 "실제 상황은 주한미군 지도부에게 그런 능력이 요구되고 있고, 그들 스스로 이런 앞선 아이디어를 가능하게 했으며, 지정학적으로 미국의 (군사) 자산이 집중된 호의적인(friendly) 나라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어 "이러한 향상된 기술 실험(ATD)을 하려면, 성공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호의적이고 지정학적으로도 관계가 있으며 어느 정도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지역에서 하려고 한다"고 덧붙였다.

피터 박사가 주한미군 내 원하는 곳에서 실험이 가능하다고 밝힌 인터뷰 내용
피터 박사가 주한미군 내 원하는 곳에서 실험이 가능하다고 밝힌 인터뷰 내용ⓒ해당 포털 내용 캡처

피터 박사는 이 인터뷰에서 주피터 프로젝트의 추진 배경에 관해 '생화학전감시(biosurveillance)'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생물학 무기에 의한 공격이나 큰 규모의 (바이러스) 창궐(outbreak)로 인한 비용(부담)은 중대한 일"이라며 "생화학전 감시의 핵심 패러다임은 '생명을 구하는 효과적인 시간 관리'"라고 밝혔다. 그는 이어 "이것은 신속 탐지와 이른 대응으로 그러한 비용을 최소화하고 완화해 행동과 대응을 앞당기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피터 박사는 "생화학전 감시의 개념이 새로운 것이 아니"라면서 "우리가 서아프리카에서 발생한 에볼라 사태를 미리 인지할 수 있었다면, 일찍 조치를 취했을 것이고, 그렇게 했더라면 전 세계적인 대응이 필요 없을 만큼 적은 비용으로 후회 없는 대응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주피터 프로젝트의 실무 책임자인 피터 박사가 이 프로젝트가 주한미군에서 실시된 이유를 장소 제공 등 실험의 편의성과 한국이 우호적인 국가이기 때문이라고 밝힘에 따라, 애초 미군 관계자들의 "북한의 생화학 공격 위험 가능성"이라는 해명과는 대비를 이뤄 파문이 예상된다. 더구나 이 인터뷰에서 피터 박사는 북한의 생화학전 위협 가능성이나 능력에 관해서는 전혀 거론하지 않았다.

"지난 5월 말 주피터 프로젝트 훈련 처음"이라는 주장 거짓 가능성 커... 
'탄저균 사건'으로 일시 중단

한편, 피터 박사는 이 인터뷰에서 미 육군 에지우드 연구소가 "주피터 프로젝트를 위해 10개의 신규 탐지(AED) 장비를 구매했었다"며 "이 중 2개의 분석 장비는 주한미군 오산 기지로 전달되었으며, 지난해 9월부터 12월 초까지 해당 비행장(airfield)에서 가동됐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우리는 그 장치가 잘 작동되는지 알고 싶었는데, 비가 오던 맑은 날이던 잘 작동됐다"고 설명했다. 피터 박사의 이런 언급은 지난달 말 이른바 '살아있는 탄저균 배달 사건'이 발생한 직후 '주피터 프로젝트' 관련 훈련이 지난달이 처음이었다는 주한미군 발표가 사실이 아님을 방증하고 있다. 앞서 <민중의소리>는 주한미군이 이미 2013년부터 주피터 프로젝트를 본격 실시했다는 내용을 단독으로 보도한 바 있다. (관련 기사:[단독] 주한미군 탄저균 훈련, 2013년부터 용산기지 포함 본격 시행)

피터 박사의 언급은 이미 2013년 6월부터 주한미군 기지 내 연구소와 필드(비행장, 훈련소 외곽 등)에서 본격적으로 실시된 주피터 프로젝트의 일환인 생화학전 감시 장비 등을 사용한 탐지, 분석, 대응 등의 훈련이 수시로 실시됐음을 재차 시사하고 있다. 피터 박사는 이와 관련 이미 지난 2013년 3월 19일, 자신이 직접 작성한 공식 문서에서 "생화학전 탐지, 분석(AED) 장비를 평택에 있는 주한미군 기지인 '캠프 험프리(Camp Humphreys)'에서도 해질녘부터 새벽까지 하루 12시간 가동할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밝힌 바 있다.

피터 박사가 주한미군 평택 기지 내에서 주피터 프로젝트 실행을 설명하고 있는 자료
피터 박사가 주한미군 평택 기지 내에서 주피터 프로젝트 실행을 설명하고 있는 자료ⓒ미 육군 에지우드 연구소 문서 캡처

이번 인터뷰에서 피터 박사는 "탐지 장비 중 2개는 미 육군 에지우드 연구소 내에 있는 '엠비언트 브리지 터널(Ambient Breeze Tunnel:실제 풍향 등 외부 상황과 유사하게 만든 이 연구소의 유명한 핵심 터널 실험실)'에 설치되어 탄저균, 페스트균, 바실리스균, 보톡신 등 네 종류의 152가지 기체 미립자 형태(aerosol)의 공격 유형으로 실험을 했다"는 사실도 공개했다. 즉 미 육군 핵심 생화학전 연구 시설인 에지우드 연구소와 주한미군 기지 내에서 지난해에도 계속해서 생화학전 연구가 동시에 진행됐다는 것이다.

또한, 민중의소리가 확보한 자료에 의하면, 주피터 프로젝트에 따라 지난 3월, 관련 최신 시설이 미 육군 더그웨이 연구소에서 대규모로 외부 실전 실험이(massive outdoor test grids) 실시됐다. 실험이 끝난 이 장비는 한국의 오산 미 공군기지로 이송됐으며, 한국에서 다시 6월 초에 대규모 실전 실험을 계획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 장비와 함께 관련 기록들은 다시 올해 여름경 미 육군 에지우드 연구소로 이송되어 훈련 결과를 취합하고 이에 맞는 업데이트 등을 진행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지난달 22일경 이른바 '살아있는 탄저균 사건'이 발생하고 미 국방부가 지난달 27일, 이를 공식 발표하는 바람에 기존에 추진되고 있는 생화학전감시와 관련된 주피터 프로젝트는 현재 일시 중단된 것으로 알려졌다.

[단독] 美 생화학전 프로젝트 책임자 “원하면 한국 어디서든 실험 가능” 발언 파문
주한미군 주피터 프로젝트 일환으로 분석과 실전 훈련을 하고 있는 모습ⓒ미 육군 공개 사진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마른 논에 직사로 물 뿌리는 박근혜, 예고된 재앙

‘2015년 1월, 예고됐던 가뭄’ 예측된 가뭄, 왜 막지 못했나?
 
임병도 | 2015-06-22 08:54:37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6월 21일 일요일, 휴일이었지만 온라인에서는 사진 한 장이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사진은 인천시 강화군 화도면 흥왕리 가뭄 피해 지역을 방문해 마른 논에 물을 뿌리는 박근혜 대통령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날 박근혜 대통령은 소방차를 동원한 비상급수 차량에 연결된 소방호스로 논에 물을 뿌렸는데, 직사로 물을 뿌리는 모습이 많은 국민에게 답답함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물줄기가 강한 소방호스로 논에 물을 뿌릴 경우 대부분 공중으로 물을 뿌립니다. 워낙 물줄기가 강하기 때문에 논에 있는 벼가 쓰러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평생 청와대와 삼성동 자택, 국회에 있던 사람이 논에 물을 뿌리는 방법을 알기는 어렵습니다. 사전에 청와대 참모진 중에 농사 경험이 있었다면, 이런 사진은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 번도 농사를 제대로 경험해보지 않은 박근혜 대통령을 위해 논에 물을 뿌리는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흔히 논에 물을 공급하는 것을 뿌린다고 하지 않고, 물을 댄다고 말합니다. 보통 '물대기'는 논의 가장자리에 물 호스를 연결해 자연스럽게 물이 흐르도록 합니다. 소방차나 급수차를 이용할 경우, 수압이 낮으면 가장자리에 물을 공급하고, 수압이 높은 경우 허공에 물을 뿌려 벼가 상하지 않도록 합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수압이 센 소방호스를 허공으로 향해 물을 뿌리기도 했지만, 좌우로 흔들면서 논으로 소방호스를 향하는 모습도 몇 번씩 나오기도 했습니다.1 이 방법은 대단히 잘못된 방법입니다. 모내기한 지 오래되지 않은 벼의 경우 조그마한 충격에도 쓰러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박 대통령이 물을 제대로 뿌리지 못했다고, 무조건 잘못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청와대 참모진들이 사진을 연출할 때,가뭄을 막아내겠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강한 의지를 너무 과하게 보여주려다 발생한 일로 보입니다.


‘2015년 1월, 예고됐던 가뭄’
 
박근혜 대통령이 논에 물을 뿌리는 방법을 비난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농사 경험이 없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은 논에 물을 뿌리는 것이 아니라, 가뭄을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방안을 마련하는 일입니다.

불과 3년 전인 2012년, 전국적으로 가뭄이 들었습니다. ‘104년 만의 극심한 가뭄’이라는 당시 기록을 보면, 비는 평년의 10%밖에 내리지 않았고, 서울의 낮 기온은 12년 만의 최고 기온을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1973년 이후 5~6월 강수량이 가장 적었습니다.2
 
날씨는 덥고 건조하면서 비는 내리지 않아 전국적으로 물 부족 현상을 나타냈고, 당시에도 지금처럼 소방차와 급수차를 이용해 논과 밭에 물을 대느라 난리가 났습니다.

2015년 1월, 환경전문가와 기상학자, 언론들은 2015년에 대가뭄이 온다고 예측했습니다. 이유는 지난해 강우량이 예년의 절반도 안 됐기 때문입니다.3 전국적으로 저수지들의 수위가 낮아져 슬슬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변희룡 부경대 환경대기학과 교수는 “38년짜리 가뭄주기의 정점에 해당이 되고요, 124년짜리 가뭄 주기의 시작점에 해당되기 때문에 가뭄이 심할 것으로 예측됩니다.”라고 예측했으며, 전문가들의 예측대로 한반도는 강우량 부족 등으로 가뭄이 최고조에 달하고 있습니다.


‘예측된 가뭄, 왜 막지 못했나?’
 
삼국사기 등 고전 문헌을 봐도 한반도는 항상 주기적으로 가뭄에 시달렸습니다. 그래서 MB는 4대강 사업으로 가뭄을 해결할 수 있다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4대강 사업으로 물그릇이 커진 것은 맞습니다. 다만, 그 물그릇이 정작 필요한 곳이 아닌 엉뚱한 곳에 만들어졌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새정치연합 이미경 의원에 따르면 ‘4대강 사업으로 건설된 보 16개 중 11개가 물 부족 지역과 무관한 곳에 위치해 있다’고 밝혔습니다. 국무조정실 4대강사업조사평가위 보고서를 봐도 4대강 사업으로 만들어진 보의 위치 선정이 기준조차 확인할 수 없었고, 4대강 사업으로 가뭄대응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용수공급계획과 용수공급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평가했습니다.4
 
이 말은 4대강 사업으로 16개의 보를 만들어 물그릇을 크게 만들었지만, 이 물을 가뭄으로 물이 필요한 곳에 공급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물 공급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이 시스템이 없기 때문에 여전히 급수차와 살수차를 동원해 물을 날라서 논에 물을 뿌리고 있는 것입니다.

동아일보는 ‘4대강 사업 이후에도 가뭄비상 왜’라는 기사에서 정치논쟁에 휘말려 농업용수 공급시설을 못 만들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5 4대강으로 만든 물그릇이 커졌으니 이 물을 농업용수로 공급하기 위한 ‘4대강 살리기 사업 마스터 플랜’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국회 예산 삭감 등으로 후속 조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었습니다.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한 계획으로 ‘하천수(4대강) 활용 농촌용수 공급 사업’ 또는 ‘4대강 연계 농업용수 확보 마스터플랜 수립’이 있습니다.6 이 계획은 4대강 사업으로 만들어진 물그릇을 농업용수로 공급하기 위한 별도의 사업입니다. 어쨌든 물그릇이 만들어졌으니 이용하는 방법이 있다면 이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업비 1조 913억 원'이 든다는 얘기는 쏙 빼놓고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4대강 사업으로 22조 원을 투자했는데, 별도로 1조 913억 원이 드는 사업을 해야만 농업용수 공급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1조913억 원만 든다고 아무도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결국, 4대강 사업으로 가뭄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수조 원의 돈이 더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가뭄이 비상상황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민,관,군이 협력하여 가뭄 극복에 총력대응해 줄 것을 당부하면서 '준설 적기인 본격 장마 시작 전까지 물그릇을 키울 수 있도록 준설작업을 최대한 실시하고, 근본적인 가뭄 대책을 마련할 것'을 주문했습니다.7 박근혜 대통령은 항상 사고나 재난이 닥쳐야 준비하라는 얘기를 합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말하는 물그릇을 키운다는 의미가 도대체 어떤 의미인지 자세히 나와 있지 않습니다. 4대강 사업으로 만들어진 보라면 이미 충분합니다. 그러나 저수지 준설이라면 필요합니다. 4대강 준설과 저수지 준설은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어떤 물그릇을 키우느냐와 4대강 사업으로 만들어진 물그릇을 어떻게 농업용수로 공급하느냐입니다. 그러나 4대강 사업을 찬성했던 박근혜 대통령은 MB의 4대강사업 연계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MB정권이나 박근혜 정권이나 대통령만 바뀌었을 뿐, 그 구성원은 동일합니다. 박근혜 대통령 입장에서는 똑같은 정권인 상황에서 전직 대통령의 4대강 사업을 비판하면서 다시 수조 원의 돈을 들여야 하는 하천용수(4대강) 사업을 진행하기가 껄끄러울 것입니다.

지금 국민에게 필요한 것은 가뭄을 해결할 수 있는 대통령의 대책입니다. 4대강 사업으로 만든 물그릇을 공급하는 방식이든, 저수지를 준설하는 방식이든 정확한 대책을 마련하는 일이 박근혜 대통령의 몫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소방호스로 벼를 향해 직사로 물을 뿌리는 일은 물대기를 잘하는 사람에게 맡겨놓고, 이미 예견됐던 가뭄을 막지 못한 실패의 책임과 함께 장기적인 가뭄 대책을 국민에게 설명해야 할 것입니다.

1. 박근혜 대통령, 강화도 가뭄 피해 현장 방문. YTN. 2015년 6월 22일.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52&aid=0000694008&sid1=001 
2. 기상청,file:///C:/Users/LG/Downloads/150423_%EB%B3%B4%EB%8F%84%EC%9E%90%EB%A3%8C%25283%EA%B0%9C%EC%9B%94_%EC%A0%84%EB%A7%9D_2015%EB%85%84_5%EC%9B%94-7%EC%9B%94%2529.pdf 
3. 강우량 절반…2015년 한반도 대가뭄 오나?.KBS뉴스. 
http://news.kbs.co.kr/news/NewsView.do?SEARCH_PAGE_NO=4&SEARCH_NEWS_CODE=2999479 
4. 4대강은 ‘물 찰랑’ 주변은 ‘가뭄 쩍쩍’. 경향신문 2015년 6월 17일,.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6172228475&code=620100 
5. 4대강 사업 이후에도 가뭄비상 왜. 동아닷컴. 2015년 6월 19일.
http://news.donga.com/Main/3/all/20150619/71952270/1 
6.‘하천수 이용 농촌용수공급사업 마스터플랜 안’ 단독입수 총력 분석. 경향신문. 2015년 6월 20일.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6201644431 
7. 청와대. http://www1.president.go.kr/news/newsList.php?srh%5Bview_mode%5D=detail&srh%5Bseq%5D=11162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839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가난한 자는 '현금'에 집착한다!

 
[함께 사는 돈 탐방기] 물고기를 줘야 하는 이유
 
 
<프레시안>과 녹색당,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는 '함께 사는 돈 탐방기'라는 공동기획을 시작합니다. 지금은 '각자 생존'의 시대라고 합니다. 노인빈곤율이 OECD 최고수준인 48.1%에 달하고, 체감 불평등은 점점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청년들은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중‧장년층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함께 사는 길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습니다. 점점 높아지고 있는 기본소득에 대한 관심도 이런 현실의 반영입니다. 
 
그래서 이 기획에서는 우리 사회의 소득 실태에 대해 진단하고, 지역과 현장의 다양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대안을 모색해 보려고 합니다. 각자 생존이 아니라 함께 사는 길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많은 관심과 의견을 부탁드립니다. 
 

 

기본소득은 한국사회에서 완전히 낯선 개념은 아니다. 기초노령연금이나 무상급식처럼 소득기준을 철폐한 분배방식이 미흡하나마 정책화되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한국기본소득네트워크,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와 같은 민간단체가 기본소득의 정당성을 알리는 데 적잖은 기여를 해왔다. 
 
기존 작업은 유럽사회에서 구축한 이론적 논의를 바탕으로 기본소득 법안이 제정되었거나 일부 시행하고 있는 나라의 사례를 주로 소개했는데, 복지에 대한 관심과 신자유주의적 개입이 동시에 똬리를 튼 한국사회에서 기본소득이 어떻게 제도화될 수 있는가를 모색하려면 유럽중심성을 탈피한 다양한 경험적 연구가 축적될 필요가 있다.
 
물고기 잡는 법 가르쳐라? 현재 어업이 숙련된 노동을 요구하는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광범위하게 시행되고 있는 사회복지 프로그램에 관한 제임스 퍼거슨(James Ferguson) 교수(미국 스탠퍼드대 인류학과)의 작업을 소개하는 것은 이 같은 취지에서이다. 퍼거슨 교수는 아프리카에 관한 경험적 연구를 중심으로 빈곤과 개발, 이주와 현대성 문제에 관한 인문사회과학의 논의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인류학자이다. 2012년 11~12월 연세대 문화인류학과와 한국문화인류학회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하여 ''현금 거래'의 사회적 삶: 돈, 시장, 그리고 빈곤의 상호의존성', ''사회적인 것' 이후: 신자유주의적 위기와 새로운 복지국가' 주제로 강연을 했고, 한국기본소득네트워크와 좌담회를 가졌으며, 2015년 그간의 작업을 바탕으로 저서 <물고기를 줄 것: 새로운 분배 정치학의 모색>(Give a Man a Fish: Reflections on the New Politics of Distribution, Duke University Press)을 출간했다.  
 
"어떤 사람에게 물고기를 그냥 준다면 그를 하루만 배부르게 할 것이고,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준다면 평생을 배부르게 할 것이다." 
 
개발과 빈곤퇴치 사업에 참여하는 정부나 NGO, 종교단체가 구사해 온 이 관용적 수사를 현시기 어업(fishing)의 사례를 들어 반박하는 것으로 퍼거슨 교수의 논의는 시작된다. 오늘날의 어업은 과거와 달리 아시아의 양식업에 상당 부분 의존하며 일반 어업의 경우 고도로 자본화, 기술화된 특정 기업들이 독점하는 상태다. 노동에 대한 수요가 감소하면서 실직 어민이 넘쳐나는 판국에 현재의 어업이 정말로 숙련된 노동이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게다가 우리가 지금보다 물고기를 더 많이 잡을 필요가 있는지도 의문이다. 작금의 어획량은 이미 바다의 생태계를 파괴할 만큼 엄청나다. 어획량을 무작정 늘리는 게 능사는 아니다.
 
이러한 비유는 고용 없는 성장의 시대, 생태 위기가 일상이 된 시대에 살면서도 여전히 분배가 아닌 생산에서 탈빈곤의 해법을 찾고자 하는 시각에 대한 문제제기다. 아프리카에서 공식부문에 종사하는 임금노동자는 전체 성인인구 중 극소수에 불과하며, 실업률은 기약 없이 치솟고 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대부분 사람은 일시적 잡일을 하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적당히 손 벌리거나, 자잘한 소매치기로 '땜질'을 반복하는데, 과거 식민지배자들이 "부랑자"라 불렀고, 마르크스(Karl Marx)가 "룸펜 프롤레타리아트"라 칭했던 이들은 이제 남아공에서 나이가 40대든 50대든 상관없이 '청년'으로 통한다. '청년'이 단순히 세대 범주가 아니라 공식부문 고용의 기회를 박탈당한 채 결혼과 출산, 양육을 통해 가족을 구성할 기약이 없이 만성적 유예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일반에 대한 통칭이 된 것이다.
 
실업률이 35퍼센트에 달하는 남아공은 물론 극단적 사례라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실물경제와 무관한 금융자본주의가 확산되는 가운데 기업이 청년들에게 일자리가 아니라 각종 인턴십과 자원봉사기회만 선물보따리처럼 제공하는 한국사회에서 ‘청년’ 집단이 살아갈 사회가 남아공보다 낫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못사는' 남아공은 동정의 대상으로 남겨둔 채 이미 파산선고를 한 유럽 복지국가체제의 파편들을 짜깁기하는 게 유일한 대안일까? 
 

ⓒ프레시안(최형락)

 
유럽 복지국가에 노스탤지어를 가질 필요없다
 
퍼거슨 교수는 (대부분의 비서구인들이 경험해보지도 않은) 유럽 복지국가에 대해 노스탤지어를 가질 필요가 없다고 단언한다. 전통적인 복지국가의 근간이자 현재 종말을 고했다고 이야기되는 '사회적인 것'(the social)은 '정규직 임금노동자와 그의 가족들'만을 대상으로 사회적 돌봄을 제도화했던 불완전한 구성물에 지나지 않았으며, 안정적인 임금 노동의 기회를 박탈당한 '프레카리아트'(precariats)가 새로운 노동자의 전형으로 급부상한 시대에 조응하는 체제도 아니라 주장한다. '보편적인 사회적인 것'(the social)의 종말 이후 무엇이 올 것인가가 아니라 '이러한 사회적인 것'(this social) 이후에, 남아공의 역사로 한정 짓자면 "백인 정착자와 흑인 노동귀족만을 위한 역사적으로 특수하고 위계적이었던" 사회적인 것 이후에 무엇이 등장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복지국가를 파괴한 주범으로 곧잘 거론되는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하에서 남반구의 많은 나라는 역설적으로 새로운 형태의 사회지원체계를 실험 중이다. 과거의 차별정책이 종식되고 첫 흑인 대통령이 선출된 1994년 이후 남아공의 사회적 부조체계는 계속 확대되어왔다. 정부 통계에 따르면 현재 전 인구의 30퍼센트를 차지하는 1500만 명의 국민이 정부의 사회지원프로그램을 통해 보조금을 받고 있으며, 극빈 지역의 경우 이 수치는 전체 가구의 75퍼센트에 다다른다. 
 
이를 두고 유럽에서 이미 한물간 '사회적인 것'이 현재 아프리카에서 등장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라고 퍼거슨 교수는 강조한다. 아프리카에서 등장하는 '사회적인 것'은 유럽 복지국가의 근간이었던 임금노동과 보험 메커니즘과 거리가 멀며, 대규모의 사회적 지원은 오히려 임금노동에서 배제된 다수 개인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1998년 이후 대대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아동지원보조금의 경우 결혼 여부를 따지지 않으며, 오직 보조금 지원 대상이 아이를 가장 적극적으로 돌보는 자인지만 조사한다. '정상적'인 가족을 더 이상 복지 급여의 기준으로 전제하지 않게 된 것이다. 또한 모든 남아공 국민에게 매달 15달러 수준의 현금을 지급할 것을 주창하는 기본소득 캠페인은 가족구조는 물론이고 임금노동의 여부도 따지지 않는다. 임금이라는 공식적 대가를 지급할 직업이 늘지 않는 상황에서 생계를 위한 다양한 형태의 노동을 추구하는 다수를 끌어안는 작업을 제안한 것이다. 
 
빈자들, 사회적이며 현금에 집착한다
 
이쯤에서 다시 물고기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남아공의 사례에서 보듯 기본소득운동이 제안하는 것은 물고기 자체라기보다는 '현금화'된 물고기이다. 금전을 매개로 한 관계를 사회적, 도덕적 연대의 대척점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기본소득의 정당성을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도 현금 지급에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곤 했다. 하지만 퍼거슨 교수는 사람들에게 생필품이 아니라 현금을 주자고 호소하는 기본소득 입안자들의 주장을 경험적 연구를 바탕으로 옹호한다. 빈자들은 굉장히 사회적이며, 동시에 굉장히 현금에 집착한다. 
 
이들의 일상에서 시장의 논리와 공통 연대의 논리는 서로 모순적인 것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자기 호주머니 안의 돈이란 (결국 생사의 문제이기도 한) 사회성, 상호의존성의 기회를 배가시켜줄 너무나 소중한 자원이다. 교통비가 없어 이동조차 못 한다면 자신이 의존할 사회적 관계를 어떻게 만들 수 있겠는가. 현금거래란 결국 사회적 세계에 '의존성'을 새로이 도입하는 것이 아니라 빈자들의 삶에서 덜 해악적인 의존의 관계가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돕는, 일방향적인 의존관계가 상호의존이라는 좀 더 평등한 형태로 나아갈 수 있도록 호혜성의 통로를 열어젖히는 창구로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물고기를 주라는 게 무작정 현금을 베풀자는 게 아니라는 점, 토지든 지하자원이든 특정인의 소유를 주장할 수 없는 공동의 세계에 대해 '지분'을 가진 개인들에게 배당하는 것임을 첨언해야겠다. 노동권이 아닌 사회적 성원권을 강조했던 러시아의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 크로포트킨(Peter Kropotkin, 1842-1921)의 말을 인용하자면, "내가 어떤 재화를 생산하기 때문에 그것을 누릴 자격이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우리 공통의 산출물에 대한 상속인으로서의 지분을 갖기 때문에 배당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기본소득이 새로운 정치 형태의 포문을 여는 것인지, 아니면 슬라보예 지젝의 주장처럼 현재의 구조적 모순을 야기한 체제를 건드리지 않는 값싼 해결책에 불과한지는 여전히 논쟁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 크로포트킨이 주장한 정당한 지분(rightful share)이 국경을 넘어 전 지구적으로 배당될 수 있는가도 현재로써는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 그럼에도 퍼거슨 교수는 프롤레타리아트 임금 노동의 찬양, '룸펜'이나 금전적 관계에 대한 경멸 등 이론적 연역에서 출발한 편견이 수십 년간 좌파 정치학에 전혀 도움이 못되었다는 점을 고백하면서 우리에게 다른 출발점을 제안한다. 사람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론가들의 생각이 아니라 이들이 실제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경험적 관찰로부터 급진적인 정치를 실험해야 하지 않을까? 신자유주의의 '안티'로 자족하기보다 "우리는 무엇을 원하는가?"로 문제의 지형을 바꿔내야 하지 않을까? 

 

프레시안 조합원, 후원회원으로 동참해주세요. 좌고우면하지 않고 '좋은 언론'을 만드는 길에 정진하겠습니다. (☞가입하기)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4대강사업에 어류 떼죽음"... 낙동강 어민, 첫 선박시위

"4대강사업에 어류 떼죽음"... 낙동강 어민, 첫 선박시위

[현장] 내수면어민총연합회, 25척 참여... 하굿둑, 대형 보 철거 등 촉구

15.06.21 14:38l최종 업데이트 15.06.21 14:38l

 

 

"물고기가 살 수 없는 곳에 인간도 살 수 없다. 낙동강 하굿둑과 대형보를 철거하라."

낙동강 어민들이 4대강사업 뒤 첫 '선박시위'를 벌였다. 낙동강내수면 어민총연합회(회장 박남용)와 낙동강재자연화 부산경남대구경북본부는 21일 오전 낙동강 대동선착장에서 하굿둑까지 선박시위를 벌였다.

어민들은 선박 25척에 갖가지 구호를 새긴 펼침막을 매달고 머리띠를 두른 채 총 20km 길이의 강 위에서 시위를 벌였다. 어민들이 선박시위를 벌인 것은 최근 낙동강에서 어류가 폐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사 관련 사진
▲  최근 낙동강에서 어류가 집단 폐사하자 '낙동강내수면 어민총연합회'는 21일 오전 대동선착장에서 하굿둑까지 선박시위를 벌이며 '하굿둑과 대형 보 철거'를 촉구했다.
ⓒ 윤성효

관련사진보기


특히 통발에 잡히는 새우와 물고기들이 거의 대부분 죽고 있다. 환경부 산하 낙동강유역환경청은 '용존산소량 부족'을 원인으로 보고 있다. 환경단체와 어민들은 하굿둑과 4대강사업으로 생긴 낙동강의 8개 보로 인해 물 흐름이 느려지면서 '썩은 강'이 되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55년째 낙동강에서 어업활동을 해온 유점길(70)씨는 "옛날에는 낙동강 물을 그냥 떠서 마실 정도였다"며 "4대강사업 뒤 당분간은 괜찮았는데, 특히 올해 들서 어류 폐사가 심하다, 통발 하나를 건져 올리면 어류는 전멸이다, 이런 경우는 처음 겪어본다"고 말했다.

또 그는 "몇 년전까지만 해도 낙동강에는 잉어, 붕어, 장어, 동자개 등 어류가 많았다, 4대강사업 뒤부터 강가에 있던 수초가 모두 없어졌다, 물고기는 수초가 있어야 산란도 하면서 살 수 있다, 심지어 어민들 사이에서는 다른 곳에 있는 수초를 가져와 심자는 말까지 한다"고 덧붙였다.

낙동강오염방지협의회 박용수 회장은 "4대강사업 이후 낙동강은 담수 됐다, 그러면서 부영양화가 심해졌고 계속 발생하고 있다"며 "잘못된 4대강사업 탓이다, 그리고 하굿둑으로 인해 낙동강 하류 물 정체 현상이 심하다, 어류가 자랄 수 없는 여건이 되면서 낙동강은 생태계 병화가 온 것"이라고 지적했다.

"잘못된 4대강사업 이후 어류 못 사는 환경 돼"
 
기사 관련 사진
▲  최근 낙동강에서 어류가 집단 폐사하자 '낙동강내수면 어민총연합회'는 21일 오전 대동선착장에서 하굿둑까지 선박시위를 벌이며 '하굿둑과 대형 보 철거'를 촉구했는데, 화명대교 아래에 녹조가 창궐해 있다.
ⓒ 윤성효

관련사진보기


이날 낙동강 하류는 녹조가 심했다. 녹조 알갱이가 둥둥 떠 있었고, 배가 달리자 물보라가 생겼는데 녹색이었다. 특히 화명대교 위에서 보니 녹조가 심했다. 

어민들은 선박에 "호수냐 산이냐 녹조 때문에 구별을 못하겠다"거나 "30년 기다렸다 하굿둑을 열어라", "부산지방국토관리청장, 한국수자원공사 사장은 사퇴하라", "낙동호수 물고기 죽으면 어민들도 죽는다"고 외쳤다.

다른 어민들는 하굿둑 옆에 있는 한국수자원공사 홍수통제사무소 앞에서 집회를 열었다. 집회에는 생명그물, 대구환경연합, 마산창원진해환경연합, 창녕환경연합, 녹색연합 등 환경단체 관계자들도 참석했다.

참가자들은 "물고기가 살 수 없는 곳에 인간도 살 수 없다, 낙동강 하굿둑과 대형보를 철거하라"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환경청은 이번 물고기 폐사가 용존산소량 부족이라고 결론을 내렸지만, 왜 용존산소량이 부족해졌는지에 대해서는 조사하거나 분석할 계획이 없다고 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용존산소량 부족의 원인은 대형보로 인해 유속이 느려지고 강바닥이 뻘층으로 변해 혐기성 부폐가 진행되고 있으며, 녹조창궐과 낙동상 수온 상승 때문임이 틀림없다"며 "이제는 낙동강의 자체 정화 능력이 무너지고 있다는 심각한 위기임을 판단해야 할 시기에 돌입했다"고 덧붙였다.

어민들은 "박근혜정부는 4대강조사위원회의 결과로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원인을 해소하기 위한 구체적인 정책, 전환을 위한 실천보다는 용역만 반복하고 있다"며 "집단 폐사가 4대강사업의 부작용이라면 생태환경의 근본적 변화라는 환경재앙적 측면에서 방책을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사 관련 사진
▲  최근 낙동강에서 어류가 집단 폐사하자 '낙동강내수면 어민총연합회'는 21일 오전 대동선착장에서 하굿둑까지 선박시위를 벌이며 '하굿둑과 대형 보 철거'를 촉구했다. 55년간 낙동강에서 어민활동을 해온 유점길(70)씨가 선박시위하면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
ⓒ 윤성효

관련사진보기

 
기사 관련 사진
▲  최근 낙동강에서 어류가 집단 폐사하자 '낙동강내수면 어민총연합회'는 21일 오전 대동선착장에서 하굿둑까지 선박시위를 벌이며 '하굿둑과 대형 보 철거'를 촉구했고, 다른 어민들은 한국수자원공사 낙동강홍수통제사무소 앞에서 집회를 벌였다.
ⓒ 윤성효

관련사진보기

 
기사 관련 사진
▲  최근 낙동강에서 어류가 집단 폐사하자 '낙동강내수면 어민총연합회'는 21일 오전 대동선착장에서 하굿둑까지 선박시위를 벌이며 '하굿둑과 대형 보 철거'를 촉구했고, 다른 어민들은 한국수자원공사 낙동강홍수통제사무소 앞에서 집회를 벌였다.
ⓒ 윤성효

관련사진보기

 
기사 관련 사진
▲  최근 낙동강에서 어류가 집단 폐사하자 '낙동강내수면 어민총연합회'는 21일 오전 대동선착장에서 하굿둑까지 선박시위를 벌이며 '하굿둑과 대형 보 철거'를 촉구했고, 다른 어민들은 한국수자원공사 낙동강홍수통제사무소 앞에서 집회를 벌였다.
ⓒ 윤성효

관련사진보기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세월호 촛불.. “이제 국민이 정부 압수수색 하러 간다”


빗속 토요 촛불문화제.. “정부 탄압 불구 진실규명 외침은 계속”
  •  
  • 1

강주희 기자  |  balnews21@gmail.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5.06.20  21:47:38
수정 2015.06.20  22:23:13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구글 msn

 

   
▲ 20일 서울 광화문 세월호 광장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정부 시행령 폐기촉구 문화제'에 참석한 시민들이 "세월호 인양, 압수수색 규탄"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제공=뉴시스>
“정부의 어떤 탄압에도 우리는 진실규명의 목소리를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위한 토요촛불문화제가 20일 서울 광화문 세월호 광장에서 열렸다. 궂은 비가 내리는 가운데 이날 세월호 유가족과 시민 100여 명은 세월호 진상규명과 온전한 선체 인양, 실종자 수습 등을 촉구했다. 특히 전날 경찰의 4.16 연대 사무실 압수수색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쏟아졌다.

규탄 발언에 나선 단원고 고 임세희양의 아버지 임종호씨는 “어제 경찰이 압수수색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이가 없었다”고 말문을 열었다. 임씨는 “국가가 당연히 밝혀야 될 진실을 밝히지 못해 국민과 유가족들이 나서서 밝히려고 하고 있다. 그런데 정부는 이 마저도 가로막고 있다. 정부는 도대체 무엇이 두려운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경찰의 압수수색을 당한 김혜진 4·16연대 상임운영위원도 발언에 나섰다. 김 위원은 “경찰이 압수해간 물품 목록을 보니 세월호 관련 강의 교환 내용 4개와 1주기 토론회 책자 3개 등 7개였다. 압수만 하지 말고 반드시 그 내용을 읽어보면 자신들이 지금 무슨 일을 하는지 깨닫게 될 것”이라고 꼬집었다.

   
▲ 20일 오후 서울 광화문 세월호 광장에서 열린 토요촛불문화제에 시민들이 참석하고 있다. © go발뉴스(강주희)
   
▲ 극단 '끼'© go발뉴스(강주희)
최영준 ‘다함께’ 운영위원은 “정부는 4.16 가족협의회의 사단법인 설립을 자신들의 소관이 아니라며 가로 막고 있다. 4.16연대가 정부를 감시하는 것에 대해서는 탄압으로 일관하고 있다”고 발언했다.

 

규탄 발언에 이어 극단 ‘끼’가 무대에 올라 ‘하숙집 낭독극’이라는 제목의 공연을 펼쳤다. 하숙생 ‘새누리’와 ‘새민련’ 그리고 하숙집 주인인 ‘박근혜’가 사는 집에 새로운 이사온 주인공 ‘국민이’의 이야기다. 메르스 사태를 비꼰 재치있는 대사와 풍자에 시민들의 박수가 쏟아졌다.

“역시 엄마 장조림은 말해야 입만 아파요”(새누리)
“내 말이. 어쩜 고기가 이렇게 부드러워? 아줌마 이거 무슨 고기예요?”(새민련)
“이거? 낙타고기. 호호호”(박근혜)

이날 문화제 마지막 발언은 유경근 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이 맡았다. 유 위원장은 “정부와 경찰이 가족과 국민을 탄압하고 있다”며 “문제는 그들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배후를 가지고 탄압을 하든 말든 거기에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 유경근 4.16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이 압수수색 규탄 발언을 하고 있다.<사진제공=뉴시스>

 

유 위원장은 최근 민간업체 88수중환경이 세월호 선체를 촬영한 것에 대해 해수부가 방관한 사실을 규탄했다. 88수중환경은 지난해 11월 세월호 실종자 수습 수색을 중단했다.

유 위원장은 “88수중이 세월호 선체의 수중촬영 했다는 것을 제보받고 해수부에 확인했더니 그런 사실이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세월호 선체 인양과 실종자 수습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면 정부는 아무나 들어가서 헤집고 다녀도 모를 정도로 바닷속에 있는 세월호를 방치해선 안된다”고 주장했다

이어 “다음 주는 우리가 압수수색 하러 가는 날”이라며 “의지가 없는 정부가 할 수 있도록 이끌어내는 것은 우리다. 세월호가 온전한 모습으로 올라올 때까지, 미수습자들이 가족품으로 돌아올때까지 매의 눈으로 감시하고 지켜보겠다”고 말했다.

한편, 가족협의회는 오는 27일 오후 7시 광화문 세월호 광장에서 시행령 개정 촉구 문화제와 국민대회가 열 예정이다. 이와 더불어 정부시행령 폐기와 세월호 특별조사위원 개정안 수용을 정부에 요구하는 10만 서명운동 결과를 모아 30일 청와대에 전달한다.

 

[관련기사]

강주희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혼자 된 며느리에게 담배 가르친 시아버지

 

[답사] 경북 성주와 봉화로 떠난 '심산(心山) 역사기행'

15.06.20 20:31l최종 업데이트 15.06.20 20:31l

 

 

기사 관련 사진
▲  유도교도원 제1회 입학기념 촬영(성균관 명륜당, 1949.3.8.). 앞줄 가운데부터 차례로 정인보·김구·김창숙 선생이다.
ⓒ 심산김창숙선생기념사업회 제공

관련사진보기


심산 김창숙 선생 기념사업회에서 베푸는 '심산 역사탐방'의 답사단이 심산 생가인 경북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 사도실 마을에 도착한 것은 지난 5월 30일 오후 2시가 다 되어서였다. 나는 이른 점심을 챙겨먹고 정오 전에 일찌감치 사도실에 들어와 있었다. 
 
기사 관련 사진
▲  심산 김창숙(1879~1962) 선생
ⓒ 심산김창숙선생기념사업회 제공

관련사진보기

심산은 경북 성주가 낳은 독립투사다. 대가에 그의 생가가, 읍내에 심산기념관이 있지만 사람들은 무심히 그를 숱한 독립지사 가운데 한 분이라고 여기고 만다. 그러나 심산은 역사평론가 이덕일이 '그가 없었다면 한국의 유교는 역사 앞에 고개를 들 수 없었을 것'이라고 평가한 열혈 독립 운동가였다. 

"그때에 왜정 당국이 관직에 있던 자 및 고령자 그리고 효자 열녀에게 은사금이라고 돈을 주자 온 나라의 양반들이 많이 뛸 듯이 좋아하며 따랐다."
- 김창숙 <벽옹 73년 회상기> 중에서

경술국치(1910)를 당했을 때 매천(梅泉) 황현은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도 어렵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것은 봉건적인 충(忠)을 지키고자 한 게 아니라 '글을 아는 자', 즉 '선비로서의 양심'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1879~1962)이 지적한 것처럼 나라가 망하고 나서도 선비로서의 양심은커녕 국망(國亡)에 무심하고 세속의 이욕만을 좇던 양반들이 적지 않았다. 조선은 선비의 나라였고 그 선비들이 일생을 바쳐 천착한 성리학이 나라의 지배적 사상이었는데도 그랬다. 

'을사오적 참형소'로 시작된 독립투쟁의 길

일제가 대한제국을 점령한 직후인 1910년 10월 '합방 공로작(功勞爵)'을 받은 76명의 한국인들은 모두 양반 유학자들이었다. 조선총독부 <관보(官報)>에 따르면 이완용·송병준 등과 대원군의 조카 이재완, 순종의 장인 윤택영, 명성황후의 동생 민영린 등이 귀족 작위를 받았다. 이때 일제가 이들 지배층에게 내려준 은사금(恩賜金)은 1700여만 원이었다. 

그뿐이 아니다. 나라를 빼앗긴 지 10년이 가까워오는 1919년, 3·1운동의 기폭제가 된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은 천도교 15명, 기독교 16명, 불교 2명 등이었다. 정작 거기 유림 인사는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이 선언에 참여하지 못한 심산은 유교 대표가 한 명도 없음을 보고 통탄해마지 않았다.

"망국의 책임을 져야 할 유교가 이번 독립운동에 참여치 않았으니 세상에서 고루하고 썩은 유교라고 매도할 때에 어찌 그 부끄러움을 견디겠는가?" 
 
기사 관련 사진
▲  동강 김우옹을 모시다가 고종 때 훼철된 후, 1992년 복원된 청천서원. 현판은 백범 김구의 글씨다.
ⓒ 장호철

관련사진보기


심산의 독립운동은 일찍이 을사늑약(1905)이 체결되자 스승 이승희와 함께 상경하여 이완용 등 오적을 참형에 처하라는 상소를 올리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그의 독립운동은 낡은 화이론(華夷論)에 입각한 '척사위정(斥邪衛正)'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된다. 그리고 1945년 8월 초순 건국동맹 결성 사실이 드러나 일경에 체포되어 수감될 때까지 그는 오직 독립투쟁 한길을 갔다. 

심산은 영남의 문벌사족인 의성김씨, 조선조 중엽의 명현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의 13대 종손으로 태어났다. 재주가 남달랐으나 성품이 얽매이기를 싫어하여, 열서너 살이 되어 비로소 사서(四書)를 읽었다. 부친이 유학자이며 독립운동가인 대계 이승희(李承熙, 1847∼1916)에게 교육을 부탁했으나 성리학설을 싫어하여 문하에 들지 못하였을 정도였다.

그가 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한 것은 1896년 부친상 후부터다. 당시 열여덟 심산은 이승희(성주)·곽종석(경남 산청)·장석영(경북 칠곡) 등 원근의 유학자들 문하를 두루 찾아 경서에 대해 물었는데 특히 이승희를 각별히 따랐다. 당시 명문가 출신으로 일제하에서도 안일한 삶을 누리고 있던 양반 지주들이 많았지만 심산은 이때부터 구국활동에 몸을 던져 간난과 형극을 길을 걷게 된다. 

"사직은 중하고 임금은 가볍다"

1905년 '을사오적 처단상소' 이후 심산은 매국단체 일진회가 한일합병론을 제창하자 '역적을 치지 않는 사람 또한 역적이다'라는 격문을 돌리고 동지를 규합하여 중추원과 일간지에 이들에 대한 성토문을 보냈다. 이 일로 체포되어 일본 헌병 성주분견소에서 8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이때, 분견소장과 나눈 일문일답은 그가 수구적 충군(忠君)의식에서 벗어나 있었음을 보여준다. "황제가 합방을 허가한다면 어떻게 처신할 것인가" 하고 묻는 헌병에게 심산은 "황제가 역신의 말을 따르지 않을 것이고 설령 허가하더라도 어지러운 명령이니 따르지 않겠다"고 답한다.

헌병이 '황명을 따르지 않는 것은 역(逆)'이라고 하자, 심산은 "사직은 중하고 임금은 가벼운데 난명(亂命)에 따르지 않음이 충이다"라고 답한다. 이는 그의 의식이 이미 '국가'와 '정부'를 구별하고 국가 수호를 위해서는 정부의 통치도 거역할 수 있다는 데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심산이 태어난 사도실 마을 입구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답사단을 기다리는 동안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마을 어귀로 들어서면 왼쪽으로 생가가, 오른쪽 길섶 동강의 불천위(不遷位)사당과 어깨를 맞댄 고가가 있다. 심산이 1910년에 연 성명학교(星明學校)다. 

성명학교는 동향으로 배치된 정면 5칸, 측면 1칸 반의 팔작집이다. 고종 때 청천서원이 훼철되자 심산의 부친 김호림이 종택의 사랑채를 고쳐 청천서당(晴川書堂)으로 중건했고, 심산이 여기에 성명학교를 연 것이다. 심산은 '김창숙이 나고 청천이 망하고 말았다'는 완고한 유림의 반대를 무릅쓰고 개교를 강행했다. 
 
기사 관련 사진
▲  성명학교는 동강을 모신 청천서원이 훼철되자 김호림이 종택의 사랑채를 고쳐 중건한 청천서당(晴川書堂)에 연 학교다.
ⓒ 장호철

관련사진보기


2칸 대청 안벽에는 '청천서당' 현판이, 대청 앞 기둥에 '성명학교' 현판이 걸렸다.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에 2칸, 오른쪽에는 1칸 온돌방을 들였다. 서당은 비교적 잘 관리되고 있는 듯했지만 마당에는 씀바귀와 고들빼기가 노랗게 피어 있었다. 

그해 8월, 나라가 망하자 심산은 "선비로서 세상에 산다는 것은 치욕이다"라며 음주와 미치광이 노릇으로 3년여를 보냈다. 그러다가 모친의 가르침을 받들어 4, 5년간 독서에 정진하게 된다. 이후 심산이 독립운동을 전개하는데 소양이 된 학문과 문장은 모두 이 시기에 기반을 닦은 것이었다.  

심산은 행동성이 강한 편이었지만 청년기에 스승인 이승희나 곽종석의 의병활동에 참가하지 않았다. 앞서 밝힌 대로 그의 독립운동은 낡은 존화양이(尊華攘夷)에 입각한 '척사위정론'을 벗어나 있었다. 그는 무엇보다 근대 국제관계의 현실적 상황 속에서 조선을 이해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독립주권의 회복을 기도했던 것이다.

파리장서운동을 주도하다

이러한 심산의 독립운동은 자연히 대외적으로 선전·섭외 활동을 중심으로 출발하게 된다. 이는 바로 그 자신이 참여하지 못한 3·1운동을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1919년 심산이 파리평화회의에 조선 독립청원서를 보낸 파리장서(長書)운동은 심산의 대외적 선전·섭외 활동의 첫 출발이었다. 

심산은 전국 유림을 규합하려 했지만 보수적 유생들의 지역·학통·사색당파·사고의 차이 때문에 이를 이루지 못하였다. 대신 곽종석·김복한 등 영남과 충청도 유림 130여명이 연명한 장서를 작성하여 극비리에 출국, 상하이로 갔다. 거기서 독립청원서를 영역하여 파리의 김규식에게 보내 회의에 제출하게 하는 한편, 장서를 인쇄하여 중국의 정계·언론계, 외교사절, 해외 교포와 국내 지방 향교에 우송하였다. 
 
기사 관련 사진
▲  성주의 야성송씨 문중을 이끈 송준필이 1919년 파라강화회의에 보낼 독립청원서의 서명을 한 백세각(百世閣).
ⓒ 장호철

관련사진보기

 
기사 관련 사진
▲  1919년 심산이 파리장서의 초안을 작성했다는 봉화군 해저리 만회고택(晩悔古宅). 심산의 부친 김호림은 이 마을에서 자라 심산의 조부에게로 출계(出系)했다.
ⓒ 장호철

관련사진보기

 
기사 관련 사진
▲  봉화읍 해저리 송록서원 앞에 2014년에 건립된 ‘한국유림독립운동 파리장서비. 서명한 유림 가운데 봉화 출신은 9명이었다.
ⓒ 장호철

관련사진보기


이에 당황한 일제가 국내 유림 500여 명을 체포하는 등 대규모 옥사를 벌이니 이것이 이른바 '제1차 유림단 의거(1919~1921)'다. 이 의거는 국내 민중운동을 바탕으로 민족의 의지를 세계만방에 천명하였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의를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심산은 파리에 가는 대신 중국에 머물면서 임시정부 수립을 협의하였고 임시의정원 4차 회의에서 경상도 의원에 선임되었다. 심산은 자신의 유학·한문학적 교양을 통하여 중국과의 대일본 공동항쟁을 위한 연대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심산이 혁신유림의 독립운동을 주도한 선각자로 기려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상하이에 임정을 수립했지만 1921년을 고비로 국내외 독립운동은 점차 약화되고 있었다. 심산은 1925년 베이징에서 이회영(李會榮)과 함께 만주와 몽골 접경에 황무지 3만 정보를 얻어내는데 성공하고 여기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로 하고 필요한 자금을 모으기 위해 국내로 잠입했다. 

'일제 총독하의 모든 기관 파괴', 나석주 의거를 기획

그러나 모금활동은 부진했고 심산은 "친일 부호들의 머리를 베어 독립문에 달지 않고는 우리의 독립이 달성되지 않을 것"이라며 분노하였다. 심산의 국내 잠입 모금활동 사실이 드러나며 다시 6백여 명의 유림 인사들이 검거되는데 이것이 '2차 유림단 의거(1925~1926)'다. 

심산은 모금의 실패가 민심이 죽어 있고, 그것은 일제의 위장된 '문화정치'에 매수된 지식층과 주구화된 식민지 관리 및 일부 부호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독립운동에 일대 전환이 있어야 한다고 보고 "먼저 일제 총독 하의 모든 기관을 파괴하고, 다음 친일 부호들을 박멸하고, 그리하여 민심을 고무시켜 일제에 대한 저항을 다시 불붙게 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기사 관련 사진
▲  나석주 의사 의거 기념터 표석. 서울 을지로 외환은행 본점 왼쪽 화단에 있다.
ⓒ 국가보훈처 블로그

관련사진보기


상하이로 돌아온 심산은 이동녕과 김구에게 취지를 설명하고 모금한 돈으로 청년결사대를 국내에 파견하기로 한다. 1926년 국내로 잠입하여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던지고 동척사원과 경찰 간부 등 여럿을 죽이고 일경과 교전 중 자결한 나석주(1892~1926) 열사는 바로 심산이 파견한 청년이었다. 

이듬해(1927) 심산은 국내에 보냈던 맏아들 환기의 부음을 들어야 했다. 환기는 일경에 체포되어 고문 끝에 출옥 후 바로 사망한 것이었다. 아들의 주검을 가슴에 묻어야 했던 심산은 지병이 악화되어 상하이 조계의 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다가 이를 탐지한 일경에 체포되어 국내에 압송되었다.

1928년, 심산은 14년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었다. 병세가 깊어지면서 혼절하여 사경을 헤매기도 했지만 그는 일제의 고문에 굴하지 않았고 한국인 변호사들의 무료변론도 거절하였다. 그는 스스로를 '포로'로 자처하면서 구차히 살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대한 사람으로 일본의 법률을 부인한다. 일본의 법률을 부인하면서 만약 일본 법률론자에게 변호를 위탁한다면 얼마나 대의에 모순된 일인가? 나는 포로다. 포로로서 구차히 살려고 하는 것은 치욕이다." 

1934년 병이 위중하여 형집행정지로 석방될 무렵, 이미 몸을 제대로 쓰지 못해 사람들이 '벽옹(躄翁-앉은뱅이)'이라고 부르자 스스로도 이를 별호로 썼다. 그러나 그의 저항정신은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일제의 창씨개명을 끝내 거부하는 등 그의 투쟁은 계속되었던 것이다. 

1940년, 일제의 감시가 다소 느슨해지자, 그는 고향집을 찾아 어머님 묘소에서 2년 간 시묘(侍墓)했다. 1920년 정월, 망명지 상하이에서 모친의 부음을 들었지만 그는 어머니와 영결(永訣)하지 못했었다. 그러니 그 시묘는 실로 20년 만의 뒤늦은 자식 노릇이었던 셈이다.

심산은 1944년 8월에 서울에서 여운형이 조직한 건국동맹에 남한 책임자로 참여하였다. 비록 실질적 활동은 못했지만 일제의 패망과 민족 해방에 대비하고 있었던 이 지하조직에 심산이 참여하고 있었던 것은 그가 민족적 양심을 대표하는 존재였다는 점에서 충분한 상징성을 갖고 있었다. 

심산이 해방 소식을 접한 것은 1945년 8월초, 건국동맹을 결성한 사실이 드러나 일경에 체포되어 왜관경찰서에 수감되어 있을 때였다. 을사늑약 체결 후에 스승과 함께 상경하여 '오적참형소'를 올린 때부터 40년이 흘러 스물여섯 청년은 예순여섯의 노년이 되어 있었다. 
 
기사 관련 사진
▲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의 심산 김창숙 선생의 생가 안채.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01년 중수했다.
ⓒ 장호철

관련사진보기

 
기사 관련 사진
▲  심산의 둘째 며느리 손응교 여사. 옆은 아들 김위 씨. 손여사는 젊어 남편을 잃고 걸음조차 어려운 시아버지의 손발이 되었고 만주와 중국에 세 번, 국내는 30여 차례나 오가며 심산이 국내외 독립운동가에게 보내는 '비밀편지'를 전했던 숨은 독립유공자였다.
ⓒ 김선기

관련사진보기


임시정부로 보낸 차남, 유해로 돌아오다

그해 10월에 심산이 1943년 충칭(重慶)의 임시정부로 보냈던 차남 찬기가 유해로 돌아왔다. 1927년 맏이 환기를 떠나보낸 지 꼭 18년 만이었다. 아들 셋 가운데 둘을 조국 해방 투쟁에 바친 심산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는 스물일곱에 청상이 된 둘째며느리에게 담뱃대에 불을 붙여달라고 하면서까지 담배를 가르쳤다. 

그것은 남편을 잃고 걸음조차 어려운 시아버지의 손발이 되어 삯바느질로 힘겹게 생계를 꾸린 젊은 며느리에게 베푼 시부의 사랑이고 위로였다. 일찍이 그이는 만주와 중국에 세 번, 국내는 30여 차례나 오가며 심산이 국내외 독립운동가에게 보내는 '비밀편지'를 전했던 숨은 독립유공자였다. 

며느리와 함께 담배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이른바 '맞담배'를 한 독립투사를 상상해 보라. 불의엔 굽힐 줄 모르는 성정이었지만, 구태의연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았던 개방적이며 진취적인 사고를 지녔던 이가 심산이었던 것이다. 

도착한 답사단과 함께 어느덧 백수(白壽)를 바라보는 둘째며느리 손응교 여사가 홀로 지키고 있는 심산 생가를 찾아 인사를 드렸다. 기력이 떨어진 노인을 뵈면서 답사단은 옷깃을 여며야 했다. 그이가 감내한 세월이 바로 이 땅의 고단한 현대사였음을 새삼 떠올리면서.

그이가 갓 결혼해 남편과 처음으로 시아버지를 뵈러 간 데가 대전형무소였다. 심산은 그때 이미 고문으로 다리를 쓰지 못하는 상태여서 간수에게 업혀 나왔다. 며느리는 시집 와서 시아버지가 걷는 모습을 한 번도 볼 수 없었다.
 
기사 관련 사진
▲  이승만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에 반대하여 반독재호헌 구국선언을 발표한 국제구락부 사건으로 심산은 투옥되었다. 사건 당시 연행되고 있는 심산.
ⓒ 심산김창숙선생기념사업회 제공

관련사진보기

 
기사 관련 사진
▲  심산은 해방 공간에서 성균관 초대 관장과 성균관대학 초대 총장을 역임하면서 유도의 재건과 개혁에 앞장섰다. 성균관대학에서.
ⓒ 심산김창숙선생기념사업회 제공

관련사진보기


비록 몸은 불편했지만 '진정한 해방'을 위한 심산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해방 공간에서 유도회를 조직하고 성균관 초대 관장과 성균관대학 초대 총장을 역임하면서 유도(儒道)의 재건과 개혁에 앞장섰다. 그는 유도의 현대적 재건을 좌우 대립의 이념적 혼란을 극복하고 민족 통일을 추구할 수 있는 중요한 매개로 파악했던 것이다.

단독정부 수립 반대·반독재 투쟁

특히 무엇보다도 민족의 분열을 경계했던 심산은 일찍이 임시정부의 노선에 비판적이었지만 해방공간에선 임정을 중심으로 뭉치자는 이른바 '동일정부 수립'을 주장했다. 또 김구·김규식·홍명희·조소앙·조성환·조완구 등과 더불어 '7인 지도자 공동성명'을 발표하여 남북 분단을 고착화시키는 남북한 단독정부 수립을 극력 반대하였다.  

김구를 비롯한 여러 지도자들이 암살되는 정국의 혼란을 거치면서 친일파가 정권과 유착하여 다시 실세로 떠오르자 심산은 이제 이승만 정권의 부패와 독재에 단신으로 맞섰다. 해방된 조국에서도 심산은 여전히 탄압받고 거듭 옥고를 치러야 했다. 

이 대통령 하야 경고문,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에 반대하여 반독재호헌 구국선언을 발표한 국제구락부 사건, 이승만 삼선 취임 반대, 보안법 개악 반대, 민권쟁취 구국운동 등 독재와 맞서는 외로운 싸움에서 그는 늘 전면에 있었다. 

1955년 무렵부터 독재 권력과 주변세력들에 의해 성균관과 성균관대학의 분규가 확산되자 심산은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심산은 집 한 칸 없이 곤궁한 생활 속에 여관과 병원을 전전해야 했다. 일신의 이해를 돌보지 않는 그의 선비정신이 대학을 세우고 총장을 지내고서도 셋집에서 여생을 보내게 한 것이었다. 

1957년 겨울, 병으로 가마에 실려 고향에 돌아온 심산은 '쇠약한 몸으로 병상에 누우니 온갖 감회가 층층으로 나와, 고시(古詩) 한 편을 지어 여러 일가에게 보'였다(심산 자주(自註))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았던가. 시에는 이루지 못한 평화와 통일을 절절하게 그리는 노 독립운동가의 회한이 짙게 배어 있다. 

천하는 지금 / 어느 세상인가.
사람과 짐승이 서로들 얽혔네.
붉은 바람, 미친 듯 / 땅을 휘말고
태평양 밀물, 넘쳐서 / 하늘까지 닿았네.

아아, 조국의 슬픈 운명이여.
모두가 돌아갔네. / 한 사람 손아귀에,
아아, 겨레의 슬픈 운명이여.
전부가 돌아갔네. /반역자의 주먹에

평화는 어느 때나 / 실현되려는가.
통일은 어느 때에 / 이루어지려는가.
밝은 하늘 정녕 / 다시 안 오면
차라리 죽음이여 / 빨리 오려무나.

 - <통일은 어느 때에> 중에서

1962년 5월 10일, 불요불굴의 저항정신과 실천적 행동주의의 표상이었던 심산은 서울 중앙의료원에서 그 열혈의 삶을 마감했다. 향년 84세. 온 국민의 애도 속에 사회장이 엄수되었고, 그의 유해는 수유리에 안장되었다. 
 
기사 관련 사진
▲  심산은 1962년 5월 10일 중앙의료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5월 18일, 서울운동장에서 선생의 사회장이 엄수되었다.
ⓒ 심산김창숙선생기념사업회 제공

관련사진보기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면서 전통과 원칙을 지켜나갈 때 비로소 대의명분이 세워지는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 비타협·불복종의 행동주의자. 한평생 격동의 근대사를 고스란히 겪으면서도 흐트러짐 없이 스스로를 갈무리해 온 심산은 지나간 시대의 '마지막 선비'였다.

역사와 역사적 인물은 곧잘 그 당대의 삶과 자취를 통해 '지금, 여기', 우리의 삶을 환기해 주곤 한다. 비록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일이지만 그 성찰의 시간으로 우리의 비루하고 속된 삶의 민낯을 되돌아볼 수 있다면 1박2일은 얼마나 값진 시간이 될까. 

과거를 통해 오늘을 돌아보는 역사 탐방, 심산기행은 이튿날 오전, 1919년 심산이 파리장서의 초안을 작성했다는 봉화군 해저리 만회고택(晩悔古宅)에서 그 공식 일정을 마쳤다.

○ 편집ㅣ최유진 기자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환자유치에 나선 국민안심병원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5/06/21 11:17
  • 수정일
    2015/06/21 11:17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현장] 무수한 바이러스들 중에 가장 위험한 바이러스는 정치바이러스
 
장유근 | 2015-06-21 10:26:25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환자유치에 나선 국민안심병원
-한국에서만 호들갑 떠는 메르스-

메르스 바이러스의 정체는 무엇일까…?

19일 오후, 최근 건강검진을 받은 서울 강남의 M병원을 다시 찾아가게 됐다. 건강진단결과를 문서로 제출해야 할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병원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평소와 다른 이상한 풍경 때문에 슬며시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이 병원에 출입하는 내원객 전부를 대상으로 명단(출입자)을 작성케 하는 한편, 준비된 소독약(젤)으로 손바닥을 비벼 소독을 하게 했다. 아울러 체온 측정을 위해 이마 가까이 측정기를 들이밀었다. 생전 이런 일은 처음 겪는 일이어서 무엇 때문에 내원객을 불편하게 만드느냐며 약간은 짜증투로 자초지종을 따져 물었다.

“지금 뭐 하는 거죠?”
“손님(환자)들이 안심하고 병원에 출입할 수 있도록 하는 조치입니다.”
“이거(소독) 때문에 더 불안한 데요.”
“우리 병원은 안심병원…”

필자는 이 병원이 내원객을 상대로 소독을 하는 조치에 대해 짜증이 난 게 아니었다. 정부가 언론 등을 통해 무한 방치하거나 부풀리며 호들갑 떠는 메르스 바이러스 때문이었다. 따라서 병원 관계자를 향해 최근 유럽을 출장 다녀온 지인의 이야기를 덧붙여 말해주었다. 지인은 귀국후 일성을 통해 대한민국을 어지럽히고 있는 메르스 바이러스의 정체에 대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이렇게 말했다.

“한국에서 온 나를 입국장에서 아무런 제재나 추가조치 없이 도장을 쾅 찍어주었다. 이곳 사람들은 한국을 공포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메르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한국만 호들갑 떨고 있는 게 이상할 정도…”

필자는 볼 일을 끝마치고 나오면서 병원 입구에서 안심조치(?)를 하고 있는 관계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사진 몇 장과 영상을 남기게 됐다. M병원에서 하고있는 對메르스 바이러스 조치는 내원객을 상대로 손바닥을 소독하게 해 2차감염을 사전에 예방하는 조치와 함께 내원객의 체온을 체크하는 게 전부였다. 또 비치된 마스크를 참조하면 필요에 따라 마스크를 나눠줄 수 있도록 하는 조치였다. 메르스가 공기를 통해 전염되는 게 아니라 감염자와 접촉을 통해 전염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따라서 지인이 말해준 메르스의 정체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됐다.

메르스에 감염된 환자들은 이미 다른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저항력이 크게 떨어진 사람들로, 어쩌면 감기 바이러스 보다 더 못한 존재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송3사 혹은 언론들이 대대적으로 호들갑을 떠는 이유는 불필요한 의혹을 만들기에 충분했다. 사람들이 메르스의 정체에 대해 '정치바이러스'쯤으로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닌 것. 특정 병원이 ‘안심병원’이라는 명목하에 환자 유치에 들어가거나, 해외 관광객 등이 한국을 기피하는 현상 등은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를 더욱 부채질 하는 일면으로 위정자들의 책임이 크다는 생각이 드는 것.

메르스 바이러스가 출현하기 전으로 시간을 되돌려 보면 그곳엔 위정자들로부터 대국민 기망쇼가 진행되고 있었다. 정부의 존재가 무의미해진 세월호 참사는 해를 넘겨도 해결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자국민이 바다속에 수장된 채 구조를 기다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정자들은 법을 만들어 자국민 구출에 나서겠다는 희한한 논리로 국민들을 속이고 있었던 것. 여야가 따로 없었다.

특히 최근에는 사실을 사실대로 잘 보도하고 있는 JTBC 손석희 사장에 대해, 검찰이 입질을 하는 모습을 통해 정치가 한계에 다다랐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자국민 300여 명이 수장되는 순간 7시간 동안 행방이 묘연했던 박근혜의 지지율이 20%대로 곤두박질 친 모습은 시사하는 바 컸다. 정부와 새누리당 등 정치권이 무슨 말을 해도 믿지 못하는 기막힌 상황을 메르스 바이러스가 메우고 있다면 과장된 상상일까.

외국여행을 다녀본 사람들은 단박에 알 것이다. 만약 한국에서 메르스 바이러스가 창궐하여 국민들의 건강과 생명을 위협하게 된다면, 이 사실은 곧바로 지구촌으로 알려져 각국의 출입국 관리소는 한국인 또는 한국을 경유한 여행객들을 상대로 특별 관리에 들어갈 것. 지구촌의 네트웍은 하나가 된 지 이미 오래다. 그런데 여행객들이 붐비는 유럽의 한 공항에서 한국인(여권)에 대해 본체만체(?) 출입허가 도장을 쾅 찍어준다는 건 상상밖의 일일까. 세상에 존재하는 무수한 바이러스들 중에 가장 위험한 바이러스가 정치바이러스란 거…알랑가몰라.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5&table=dream_jang&uid=253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언론인 꿈꾸는 이들 "채용 갑질에 후졌다"

 
[집담회] 예비 언론인 5명 “무한스펙 요구에 모호한 채용기준… 저널리즘스쿨 연계도 또 다른 갑질”
 
입력 : 2015-06-17  10:54:21   노출 : 2015.06.21  09:00:55
장슬기 기자 | wit@mediatoday.co.kr    
 

언론사 입사준비 풍경은 다른 분야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토익, 한국어능력시험 등 스펙을 쌓으며 채용정보를 모으고 논술과 작문을 준비한다. 아랑(언론사 지망생 인터넷 카페), 스터디 모임을 통해 서로 의지하거나 몇몇 대학에서 운영하는 언론고시반에 들어간다. 저널리즘스쿨 명목으로 설립된 입사대비기관이나 언론사에서 개설한 글쓰기 강좌도 이용한다. 

1년 4개월째 기자를 준비하고 있는 김재희(여)씨는 다른 분야의 회사를 다니며 2년이 넘는 시간동안 두 번의 입사와 퇴사를 반복했다. “부모님이 ‘기자일이 힘들다’며 우려해 다른 곳에 취직했지만 야근과 주말출근이 일상이었고 집에 못 들어가는 날도 많았다. 나중엔 부모님도 그럴 바에는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좋겠다고 하더라.” 

김씨는 본격적으로 기자를 준비하기 위해 지난해 세명대저널리즘스쿨대학원에 진학했다. 그의 퇴직금은 등록금이 됐다. 첫 번째 회사를 그만뒀을 때 언론사 입사준비를 조금 했지만 사정상 재취업을 해야만 했다. 일하면서 공부하기란 쉽지 않았다. 이 대학원은 언론사 지망생들이 모여 언론인 출신 교수진에게 수업을 듣는 곳이다.  

오경환(남)씨는 지난해 초 한겨레 아카데미를 수강한 뒤 3월부터 다른 분야의 회사에서 1년간 일을 했다. “낮에는 일을 하고 저녁에 (입사준비)스터디를 하며 준비하려했는데 생각보다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일을 쉬고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언론사 입사 준비를 시작했다.” 지금은 집에서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기자준비를 하고 있다. 

기자준비를 한지 1년 정도 된 박혜연(여, 가명)씨는 낮에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한다. 주경야독이다. 수험생들은 생계와 꿈 사이를 오가며 산다. 박씨는 신문사에서 인턴도 했다. 정민경(여)씨도 인턴기자 경험이 있다. “열정착취이기도 했지만 배우는 것은 많았죠.” 수험생들은 착취도 감당해야 한다. 

몇몇 대학교에서는 언론고시반을 운영한다. 2년 동안 기자준비를 해온 권동현(남, 가명)씨는 고시반에서 수업을 듣고 글 쓰고 책도 보며 기자를 준비하고 있다. 권씨는 “신문방송학과 교수 한명이 (고시반을) 담당하고, 전·현직 언론인이나 스피치 강사들이 와서 수업을 해주는데 이보다 열악한 학교들도 많다고 알고 있다”고 말했다. 

미디어오늘이 예비언론인의 목소리를 들었다. 이들은 한국 언론의 채용제도와 대안으로 제시된 미국식 저널리즘스쿨에 대한 날선 비판을 쏟아냈다.  

   
▲ 예비언론인 5명이 미디어오늘 회의실에서 언론사 채용 문제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다. 사진=정철운 기자
 

- 언론사 채용이 불규칙하기도 하고 문도 좁다. 입사를 준비하면서 어려운 점이 무엇인가? 

정민경(이하 정) : 뭘 준비해야할지 모르고 어떻게 해야 합격하는지도 전혀 알 수 없는 것이 가장 문제다. 서류전형에서는 스펙을 보고, 필기시험도 보고, 실무평가도 보면 여러 가지를 준비해야 한다. 점수가 객관화되지 않고 투명하지 않다는 것이 지원자들에게 부담이 된다. 

박혜연(이하 박) : 오래 준비한 사람이 있는데 갑자기 옆에서 ‘기자 한 번 해볼까’해서 (기자가) 될 때 가장 낙담하게 된다. 채용제도가 다양했다면 그렇게 낙담했을까 싶다. 

김재희 : 지역MBC들이 사정이 어려워서 채용을 줄이고 있어서 채용문이 좁아지고 있다는 게 확실하게 느껴진다.
  
오경환 : 지인이 기사를 웹페이지에 맞게 수정 작업하는 일을 한다. 웹디자인에 능숙해야 하지만 기사 보는 눈도 있어야 한다. 그런 작업을 하는 사람도 저널리스트로 받아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언론사 시험을 준비하는 모습은 비슷했다. 종합일간지 대여섯 가지를 수험생들이 나눠 읽고 요약해서 서로 공유한다. 논술은 최근 이슈를 주제로 선정하고, 언론사 논조에 맞춰서 논술이나 작문을 준비하는 경우도 있었다. 상식시험은 시중에 나와 있는 시사 상식책을 여러 번 돌려보고 아랑에 올라온 상식을 취합하기도 한다.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은 만큼 불안감도 커진다. “스펙도 중요한 것 같고 자기소개서도 중요한 것 같고…”(오경환) “공기업 중에는 스펙 상한선이 있다. 예를 들어 토익이 820점 이상이면 다 만점이다. 하지만 지금 언론사는 ‘고고익선’이다.”(정민경) 지원자들은 전형 과정에서 탈락했을 때 자신이 무엇이 부족한 지를 가장 궁금해 했다. 

   
▲ 오경환씨. 오씨는 언론사들이 정기적이지 않다며 “1년은 신입을 뽑고 1년은 경력기자를 뽑는 것 같다”고 말했다. 사진=정철운 기자
 

“1년은 신입 뽑고 1년은 경력 뽑는 것 같다”(오경환) 언론사 채용은 정기적이지 않다. 채용인원도 언론사 당 10명을 넘어가는 경우는 드물다. 문은 좁은데 통과하려는 자는 많다. 자연스럽게 사교육 시장도 생겨났다. 지망생 필수코스로 알려진 한겨레 문화센터에서 기자들이 진행하는 언론사 취업용 글쓰기 강좌 수업료는 40만원(10회)~ 85만원(16회)에 이른다.

1995년부터 언론계 사교육 시장을 주도한 한겨레에 이어 조선일보는 저널리즘아카데미(2011년), 경향신문은 정치저널리즘스쿨(2012년)을 각각 선보였다. 2007년부터 이화여대에서 운영하던 프런티어저널리즘스쿨(FJS)은 지난해부터 SBS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100~120만원(6개월)이던 수강료를 무료로 바꿨다. 

세명대에는 대학원 과정도 있다. 세명대저널리즘스쿨대학원은 전교생이 기숙사에 살면서 언론인을 꿈꾸고 있다. 학생 중 40%는 장학금을 받는다지만 2년간 매학기 300만원이 넘는 등록금을 감당할 수 있는 지원자들만 다닐 수 있다. 언론인 출신 교수진이 지속적으로 직접 글을 봐준다는 점이 큰 장점이다.   

지원자들은 열심히 준비하지만 채용 문은 점점 좁아지고 있다. 최근 MBC가 2013년 12월 이후 대졸신입공채를 진행하지 않다가 최근 이를 공식화했다. 한겨레는 수습기자 채용전형 4주 동안 현장실습을 실시한다고 공고했다가 지원자들의 희생을 강요한다는 비판여론이 거세지자 현장실습 기간을 2주로 단축하기도 했다. 전형절차가 까다로워졌다는 불안감도 커졌다. 

이런 상황에서 한겨레21(제1064호)은 무너지는 저널리즘에 대한 해결책을 언론사 공채제도의 변화에서 찾았다. 저널리즘스쿨과 연계한 채용방안을 내놨고, 세명대저널리즘스쿨과 프런티어저널리즘스쿨(FJS)을 소개했다. 한겨레21은 저널리즘스쿨과 연계한 상시인턴제도도 운영할 계획이다. 

   
▲ 정민경씨. 정씨는 저널리즘스쿨 연계채용에 대해 “스펙도 있어야 하고 시험 준비도 하면서 언론사 공동 취재경험까지 있어야 한다는 소린데 이는 수험기간만 늘리는 꼴”이라고 말했다. 사진=정철운 기자
 

이에 언론사 지망생들은 “또 하나의 스펙이 늘어나는 것”이라며 반발했다. 정민경씨는 “지금도 대졸기자밖에 없는 상황에서 저널리즘스쿨까지 마치고 오라는 것은 지원자에게 비용을 전가하는 것”이라며 “KBS 정연주 전 사장은 지방쿼터제와 같이 합리적 채용을 위한 노력이 있었는데 (한겨레21은) 너무 미디어 엘리트만 키우려는 것 같다”고 비판했다.

인턴에 대한 거부감도 있었다. 정씨는 “미국식 저널리즘스쿨에서는 상시인턴을 통해 좋은 기사를 쓰면 기자가 될 수 있지만 한국에서는 스펙도 있어야하고 시험 준비도 하면서 이젠 인턴을 하거나 언론사와 공동 취재 경험까지 있어야 한다는 소린데 이는 수험기간만 늘리는 꼴”이라고 말했다.
 
오래전부터 지적됐던 인턴은 곧 ‘열정페이’라는 비판도 나왔다. 월 40만~50만원을 주는 언론사 인턴프로그램들이 교육이라는 명목 하에 운영되고 있다. 상시인턴과 상시채용에 대해 오경환씨는 “그 자체가 나쁜 건 아니지만 이용해 먹고 말 것 같다는 뉘앙스가 있다”고 말했다.  

한겨레21은 지난 13일 일반인턴 2~3명, 세명대와 프론티어저널리즘스쿨 연계형 인턴 2~3명을 뽑겠다고 밝혔다. 수천명에 이르는 기자 지망생이 있는 가운데 두 저널리즘스쿨 학생 200여명에 특혜를 주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올만하다. 

저널리즘의 문제를 채용제도에서 찾는 것도 예비 언론인들에게는 억울한 일이다. 권동현씨는 “일본 NHK와 KBS는 비교하기에도 부끄러운 수준”이라며 “채용제도로 (저널리즘의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일본은 한국과 같이 고시형 채용제도를 실시하고 있고, 미국은 중앙언론사 입사를 위해 저널리즘스쿨에서 인턴 등의 경험을 통해 지역언론사로 입사해 경력을 쌓은 뒤 옮기는 것이 일반적이다.   

저널리즘스쿨을 바라보는 지망생들의 시선은 부정적이었다. “로스쿨이 도입될 때도 진입장벽이 된다는 비판이 있었다. 현실적으로 (진학이)불가능한 사람은 오지 말라는 것이다. 로스쿨이나 의학전문대학원을 나오면 자격증이 생긴다. 하지만 언론사는?”(박혜연) 저널리즘스쿨에서 학생을 추천해 채용하는 방안에 대해 권동현씨는 “새로운 것을 준비하는 게 부담스럽고 지금껏 투자한 시간과 노력을 거부당하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결국 언론사 지망생들은 저널리즘의 문제를 채용제도로 돌리는 언론사 태도는 ‘비겁하다’는 입장이다. 언론사 면접도 개선돼야 할 사항이다. 많은 기업의 면접관들이 채용 전에 따로 교육을 받는다. 면접 시뮬레이션을 통해 지원자들에게 해야 할 질문과 하지 말아야 할 질문을 익힌다. 하지만 언론사 채용 전형을 겪어본 지원자들은 공통적으로 언론사 면접관들이 지망생을 바라보는 시선에 상처를 받은 적이 있고, 감수성이 부족했다고 털어놨다.   

“한번은 면접관이 이렇게 말했다. ‘방금 전 지원자는 외국에 나가보지도 않았는데 토익이 970점인데 외국도 다녀 와놓고 점수가 이거밖에 안되느냐’ 잠깐 외국에 다녀 온 것은 사실이지만 면접장에서 이런 말을 들으면 당황스럽다. 몇몇 언론사에서는 몸무게, 키, 가족사항, 종교, 취미, 흡연여부 등까지 묻는다. 떨어지고 나면 별 생각이 다 든다. 종교가 없어서 떨어졌나? 토익을 더 높여야 하나?”(김재희) 

   
▲ 김재희씨. 김씨는 얼마 전 한 언론사 면접관에게 ‘다른 지원자는 외국에 안가고도 토익 970점인데 외국 다녀 와놓고 점수가 이거밖에 안 되냐’는 말을 들었다고 털어놨다. 사진=정철운 기자
 

“지금 언론사 채용은 후진적이다. 얼마 전 경향신문에서 여성차별 논란도 나오지 않았나? ‘늘 그렇게 뽑았으니 계속 뽑지 뭐, 경쟁이 더 치열해지면 더 잘난 애들 뽑으면 되지 뭐’ 이런 식이다. 일반기업도 이렇게 채용 안한다. 갑이 을 대하듯이 지원자를 대하는 곳은 언론사가 유일한 것 같다.”(박혜연)

그럼에도 지원자들은 이른바 잘 나가는 언론사에 입사하기 위해 노력한다. 1인 미디어나 대안언론에 눈을 돌려 경험을 쌓아보라는 의견이 있다. 이에 오경환씨는 “언론사 뿐 아니라 취업시장 전반이 변화하고 있다”면서 "처음부터 근로조건이 열악한 곳으로 취업했다가 좋은 곳으로 이직하기 어렵지 않느냐"고 말했다. 

박혜연씨는 “(어느 매체에 있든)유능한 기자가 되면 정당한 보상이 주어지느냐”고 반문했다. 박씨는 “어느 매체냐에 따라 기자의 보상이 달라질 뿐”이라고 말했다. 김재희씨는 “대부분 기사가 모바일을 통해 다음, 네이버에서 소비되는 상황에서 중앙언론사말고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기는 더욱 어렵다”고 말했다. 

최근 언론사들이 수습기자보다 경력기자 채용을 선호하는 흐름도 있다. MBC는 상시채용으로 바꾼 뒤 경력기자만 뽑고 있으며, 연합뉴스도 경영악화를 이유로 당분간 수습기자 채용을 중단한 상황이다. 

권동현씨는 “MBC는 (공채에 기반한) 기수문화를 파업의 원인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정민경씨도 “MBC가 노조를 깨는 수단으로 채용제도를 바꿨다는 비판이 있는데 노조가 깨졌을 때 피해를 입는 것은 젊은 기자들과 예비언론인이 될 청년들”이라고 말했다. 기자들에게 광고영업을 시키는 곳도 있다는 소문이나 언론이 사양산업이라는 얘기도 익숙하다. 이들의 어깨가 무겁다.   

 
 

 
장슬기 기자의 트위터를 팔로우 하세요. wisdomssupreme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러시아, 미국 야망에 즉각 대응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5/06/21 10:29
  • 수정일
    2015/06/21 10:29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미국 패권전략, 러시아 핵 암초에 걸려
 
러시아, 미국 야망에 즉각 대응
 
이정섭 기자 
기사입력: 2015/06/21 [08:45]  최종편집: ⓒ 자주시보
 
 

 

▲     ©

 


 
미국이 나토의 군사력을 강화시키며 러시아를 자극, 이 지역 패권을 구사하려 하고 있으나 러시아의 핵잠력이라는 암초에 결렸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러시아 언론 스프티닉은 20일 “발틱해 연안 지역에 나토 군사력을 강화시키며 러시아 접경선에 접근하고 있는 미국의 '지정학적 야망'이 러시아의 '핵잠재력'이라는 큰 걸림돌에 걸렸다”는 인도의 정치 평론가의 분석을 보도했다.
  
스프티닉은 펜타곤은 폴란드, 루마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불가리아, 에스토니아에 군사 중장비 배치 문제를 검토 중에 있으며 이를 통해 나토 동부군사력을 강화시킬 계획이라고 덧 붙였다.
  
정치평론가 멜쿨란가라 브하드라쿠마르는 “미국이 서방 동맹국들을 통해 러시아에 도전하는 전법을 쓰고 있다”면서 “미국의 패권에 대항하는 러시아의 독립 노선에 평정을 유지할 수 없어 이 같은(나토국가들을 동원한) 전법으로 러시아를 자극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멜쿨란가라 브하드라쿠는 마르국제무대를 배경으로 모스크바의 독립적 대외 정책은 워싱턴의 '지정학적 야망(지역적 패권)' 실현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자국의 주권 실현을 지향하는 타 국가들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러시아는 미국의 패권적 정책 발표가 나오는 즉시 이에 대응한 반응을 내 놓고 있다. 러시아 국방부 고위급 한 관계자는 발틱 연안 지역에 탱크와 포격 시스템 배치에 대해 냉전 이후 펜타곤과 나토가 가장 공격적 행보를 걷고 있다는 성명을 발표 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모스크바가 전략적 핵군사력을 강화할 방침이라며 미국에 경고하며 대륙간탄도미사일을 40 개 이상 배치하고 항공 목표물 포착을 위해 레이더 ‘노드’를 개발할 것이라고 선포했다.
  
인도의 정치 평론가는 “러시아가 핵 잠재력을 강화하겠다는 결정은 냉전시절 통했던 패권을 미국이 다시 잡아보려는 지정학적 야망에 강력히 '반대 의사'를 표명하는 것”이라면서 “또 미국은 지금 전쟁위기를 고조 시켜 과거의 패권적 지위를 되찾으려 한다. 우크라이나 를 비롯해 유럽 지역에 전투 가능성을 확대하려 한다.”고 비난했다.
  
그는 끝으로 유럽 지역에 부는 '폭풍'이 아시아 지역 안보에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