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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풍' 권영해의 국정원 논평, 다음은 전두환의 인권 논평?

 

[기자의 눈] 종편에 최소한의 양식을 바라는 건 지나친 기대일까

박세열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07-09 오후 7:45:37

 

9일 <매일경제> 소유 종합편성채널 MBN의 '고성국·이혜경의 뉴스 공감'에 안전기획부장을 지냈던 권영해 씨가 출연해 국정원 개혁을 말했다. 대한민국 현대 정치사에 길이 남을 '정보 기관의 정치 개입 사건'인 '1997년 안기부 대선 개입' 사건으로 5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던 그가 버젓이 TV에 출연, 현 정부의 국정원 개혁 방안에 대해 '감 놓아라, 배 놓아라' 하고 있는 '초현실적' 상황이다.

권 씨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 "정치권 스스로 개혁의 대상이면서 자기는 개혁을 안 하고 (있다)"라고 정치권을 비판하면서 "정치권에서 심지어는 TF를 구성해서 국회에서 이런 것을 해야 된다는 소리까지 나오는데 과연 이 사람들이 법을 알고 하는 얘기들인지"라고 말했다. 아무래도 국회법을 읽어본 적은 없는 것 같은 발언이다.

그는 이어 "국정원의 국내 파트를 없애야 한다"는 정치권의 주장에 대해 "그런 양반들을 가만히 보면 그런 것(정보 기관)에 별로 종사해본 적도 없고, (…) 그분들이 과거에 자기네들이 살 때 정보 기관으로부터 당했던 것 때문에 어떤 불만이나 이런 것들로 인해 그런 얘기를 한다면 공인으로서 더욱 온당치 않다"고 비판했다. 남산에 끌려가 모진 고초를 당한 적이 있는 이재오 새누리당 의원 같은 인사가 "국정원의 국내 파트 폐지"를 주장하는 게 '개인적 불만' 때문이라는 주장으로 해석된다.

이른바 '공작 정치'의 온상으로 지목돼 폐기됐던 국정원장과 대통령의 독대에 대해 그는 "자기가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직접 듣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며 "구두로 (독대 보고를) 한다. 그래야만 진정한 의미에서 통수권자를 제대로 보좌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쯤 되면 우리가 지금 어느 시대에 살고 있는지 헷갈리게 된다.
 

▲ 안기부장을 지낸 권영해 씨 ⓒMBN 화면 캡처


'1997년 북풍' 처벌받은 패널이 '국정원 쇄신' 말하는 종편의 수준

권영해, 1937년생. 76세다. 군부 정권 시절 국방부 차관을 지냈고, 문민 정부에서 국방부 장관, 안기부장을 지냈다. 노태우 정권의 국방부 차관이 김영삼 정권의 국방부 장관으로 승진했다. 김관진 국방장관의 연임은 비교도 안 될, 파격적인 일이었음에 분명하다. 그래서 그는 김영삼 정부 시절 "김영삼, 김현철에 이어 정권 넘버 3"라는 평가를 받은 적도 있다. 육사 15기 출신인 권 씨는 이진삼·이대희 장군 등 하나회 소속 동기 및 후배들을 '숙청'하는 데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비하나회 출신에게 하나회 숙청을 맡긴 것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용병술이었을까. 잘나가던 권 씨가 보여준 과잉 충성은 결국 대형 사고로 이어진다. 1997년 대선 당시 이른바 '김대중 낙선' 공작을 펼쳤다는 혐의(대선 개입, 이른바 '북풍 사건')로 그는 징역 5년형을 선고받게 된다.

본인도 이날 방송에서 밝혔다. 권 씨는 남재준 국정원장이 "국정원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공개했다고 주장한 데 대해 "세상에서 한 사람의 자연인도 명예가 있는 법인데 왜 국가의 중요한 정보를 다루는 기관 자체의 명예가 없겠느냐"고 반문하며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예를 들어 제가 1997년도 안기부장으로 있을 때 어떤 일이 있었냐면 오익제라고 하는 사람이 자진 월북한 적이 있었다. 그때 이 문제를 가지고 정치권에서 기획 입북을 시킨 것이라는 식으로까지 공격했다. 이런 얼토당토않은 공방을 당할 때 안기부 책임자로서 명예 손상을 어떻게든 밝혀야 될 거 아니냐."

권영해 씨는 잊힌 인물이다. 그 잊힌 인물에 대해 <프레시안>에서 이렇게 거론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미 잊힌 인물을 깜냥 따지지 않고 불러내는 종편의 행태 때문이다.

우선 2013년, 이 시점에서 국정원 쇄신 방안에 대해 권영해 씨의 견해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지 따져볼 일이다. 국내 정치 개입으로 실형을 받은 인사가 국내 정치 개입과 관련해 논평을 하는 것이 적절한지 여부도 따져볼 일이다.

예컨대 전두환 씨가 종편에 출연해 민주화 운동과 대한민국의 인권 실태에 대해 버젓이 논평하고 있다고 생각해보라. 그와 그리 다르지 않다. 권 씨가 이 방송에 출연해 한다는 이야기가, 이제는 청산됐으리라 생각한 정보 기관의 '구악 예찬론'이다.

권영해 씨 사례뿐만이 아니다. 최근 MBN의 간판 시사 프로그램이라는 '정운갑의 집중 분석'은 무려 45년 전 남파돼 내려왔던 김신조 목사를 출연시켰다. 주제는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였다. 김 목사가 언제부터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의 전문가였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김 목사는 생방송에 버젓이 출연해 북한이 보낸 대중 특사의 의미를 분석한뒤, 국내 정치에 대한 논평을 하며 "남한에 빨갱이가 많다"고 주장했다. 김 목사가 분석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에 많은 사람이 귀를 기울일 만한 내용이 얼마나 담겼을지 의문이다.

비단 MBN의 문제만이 아니다. <동아일보>가 소유한 <채널A>는 "북한에서 남파돼 1980년 광주에서 시민군으로 싸웠다"고 주장하는 탈북자를 등장시켜 '황당 인터뷰'를 방송했다. <조선일보>가 소유한 <TV조선>도 비슷한 수준의 탈북자 인터뷰를 내놓아 세간의 비난을 자초했다. <중앙일보>가 소유한 jtbc는 '아나운서 성희롱 발언' 파동으로 정치권에서 퇴출당한 강용석 변호사를 내세워 숱한 논란을 일으키는 데 성공, 결국 채널의 '간판 스타'로 키워냈다.

종편들이 수많은 '철 지난 철새' 정치인들을 무차별 출연시켜 '정치 논평'을 던지고 탈북자들에게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 분석을 맡기는 '초현실적인' 일들은 새삼스럽지도 않다. 종편이 '정계 낭인'들의 '패자 부활' 무대라는 세간의 냉소도 괜한 것은 아닌가 보다.

이런 식이라면 훗날 최시중 씨나 박영준 씨가 종편에 출연해 '공무원의 부정부패'에 관한 논평을 던지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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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나항공 사고관련, 외교부 트윗 달랑 1건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3/07/10 07:59
  • 수정일
    2013/07/10 07:59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아시아나 항공기 (OZ214)가 샌프란시스코 공항 착륙 도중 충돌하여 중국인 여학생 2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는 불행한 사고가 지난 7월 7일 일요일에 발생했습니다.

아시아나 항공기 사고에 관한 기사가 수천 건에 이르고 있습니다. 사고 원인과 사고기에 탑승한 승무원의 미담, SNS를 통한 사고 소식의 전파 등 다양한 기사가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정작 관련 기관들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기사는 찾아보기 드물었습니다.

오늘은 아시아나 항공기 사고에 관한 정부와 관련 기관들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살펴봄으로 지금 대한민국 정부와 관련 기관이 무엇을 해야할 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SNS로 뜬 사고 소식, 아시아나는 어떻게 대처했나?'

이번 아시아나 항공기 사고에서 SNS는 순기능을 톡톡히 발휘했습니다. 사고 소식을 접한 언론이 사고 현장에 갔었지만, 대부분 현장 접근이 통제된 상황이라 소식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고기에 탑승했던 승객과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있던 목격자들은 SNS를 통해 사고 소식을 재빠르게 전했습니다.


 



특히 현장 사진과 영상을 확보하지 못했던 방송은 목격자들이 유튜브에 올린 동영상을 인용하여 보도했고, 사고 소식을 더 알기 원하는 시청자들의 궁금증을 해소시켜 주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SNS는 기존 언론이 해내지 못한 일을 했고, 이를 통해 SNS가 급박한 현장의 대안 언론이 되고 있음을 보여줬습니다. 이 말은 SNS가 사고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사고 탑승객 가족들의 애타는 마음을 충족시킬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점도 우리는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사고 항공기 회사였던 아시아나는 SNS의 기능을 제대로 이용하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아시아나 한글 트위터 계정

 



아시아나항공은 사고 당일부터 7월 10일 수요일 오전 6시까지 총 8건의 트윗을 발행했습니다. 그중에 3건이 기자회견문 링크였고, 2개는 아시아나항공 영문 트위터 RT, 2개는 사고 관련 안내, 1개는 사고소식 공지였습니다.

사고 항공사가 가족은 물론이고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주목된 사건에 대한 안내가 이토록 미비하다는 점은 SNS의 기능에 대한 무지는 물론이고, 사고 수습을 알리는 과정이 대단히 소극적이었다는 증거입니다.

사고기 탑승객의 병원 치료 모습이나 상태 등을 전달하거나, 다친 가족을 만나러 가기 위해 인천공항에 대기 중인 가족들에 대한 공식적인 해명이나 상황을 전달했다면 더 나았을 것입니다.

 

 

▲아시아나항공 홈페이지에 올라온 사고 관련 자료는 보도자료와 기자회견문 4건이 전부이다.출처:아시아나항공 홈페이지

 


아시아나항공은 SNS로 전 세계가 다 알고 있는 충격적인 사고를 온라인 세상에서 단순히 기자회견문이나 올리는 행태를 보였습니다. 이는 서비스는 물론이고 사후조치를 알리는 일을 대하는 태도가 얼마나 허술하고 안일했음을 알려줍니다.

탑승객 가족이나 아시아나를 이용하는 고객과 시민의 입장에서는 도대체 현재의 상황이 어떤지 알려주는 사진 한 장이 더 필요한 시점에서 엉뚱하게 윤영두 사장 사진만 그것도 중국어 홈페이지에 올려놨을 뿐입니다.

형식적으로 아시아나가 노력하고 있다는 모습만 보여주는 아시아나항공의 이런 모습은 사고 원인을 떠나 당장 개선되어야 합니다.

' 사고 관련 내용을 발 빠르게 알려줬던 NTSB와 국토부'

아시아나항공의 안일한 대처와 다르게 SNS를 적극 활용한 기관도 있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공항 트위터 계정(@SFO)과 NTSB(미국연방교통안전위원회) 트위터 계정(@NTSB)은 발 빠르게 아시아나항공 사고 관련 소식을 전했습니다.

 

 

▲미국연방교통안전위원회 트위터

 


NTSB는 사고가 났던 7월7일부터 무려 61개의 트윗을 발행하면서 아시아나 관련 소식을 전했습니다. 특히 NTSB 트위터는 #Asiana 214라는 해시태그 (관련 소식을 검색하기 용이한 방법)를 이용해 아시아나항공 사고에 관한 다양한 정보에 손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또한, 트위터상에서 실시간으로 질문이 들어오면 관련 답변도 해주는 등의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아시아나항공기 블랙박스가 NTSB 워싱턴 실험실에 도착했다는 트윗. 출처:NTSB

 


NTSB는 실험실에 도착한 블랙박스와 조사관의 사진을 트위터에 직접 올려,사고원인을 밝혀줄 블랙박스 조사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상세히 알려주기도 했습니다.

사고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발행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NTSB가 이렇게 상세하게 사고 관련 소식을 알려준다면, 사람들은 그들의 조사에 신뢰를 보낼 것이며, 이는 미국측 조사관의 말이 진실로 굳어지기도 합니다. (그들의 사고 조사를 신뢰하지 않는다기보다, 여러 가지 변수에 대한 우리 측 의견이 무시될 수도 있는 가능성에 대한 우려 때문)

그러나, 다행히도 대한민국 국토교통부도 이에 못지않게 아주 제대로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국토교통부 트위터 계정

 


국토교통부는 아시아나항공 사고 관련 트윗을 7월 7일 이후 41개 올렸습니다. 미국 NTSB보다는 적지만, 정부기관 트위터가 이 정도로 사고 소식을 알려주는 일은 칭찬받을 일이라고 봅니다.

특히 국토교통부는 미국 언론과 NTSB등이 은근슬쩍 조종사 과실로 밀고 나가는 모습에 아직은 '기장의 과실로 단정하기는 이름'이라고 말함으로 정확한 사고 원인이 나와야 알 수 있다는 노련함도 보여줬습니다.

사고의 진실을 밝히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사고의 진실이 규명되지 않은 상황에서 미국과 언론에 밀려 일방적인 한국 조종사의 과실로 굳어지면, 외교,경제,항공 안전, 법적 문제에서 밀릴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국토교통부의 대응은 신속하면서 효과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 외교부 아시아나항공 사고 관련 트윗 달랑 1건'

국토교통부에 비해 해외에서 발생한 사고에 대한 외교부의 SNS 대응은 처참하다 못해 분노가 일어날 지경이었습니다.

우선 외교부와 다른 관련기관의 아시아나항공 사고 트윗수를 비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아시아나항공 착륙중 사고 관련, 아시아나 국내 트위터 계정과 영문 계정은 8개, 국토교통부 41개, 샌프란시스코 공항 46개,NTSB 61개의 트윗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외교통상부는 달랑 1개의 트윗만 올렸습니다.

트윗수만 봐도 아시아나와 외교통상부의 문제가 무엇인지, 왜 아이엠피터가 저들의 문제를 비판하는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외교부 공식트위터 계정이 올린 아시아나 항공기 사고 트윗 1건 내용. 출처:외교부 트위터

 


외교통상부가 올린 트윗도 단순히 보도자료만 올린 글로 일방적인 정부 발언 형태였습니다. '소통'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행태였습니다.

혹자는 아니 트위터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이렇게 외교부를 비판하느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이유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사고가 나자, 가족들이 제일 먼저 달려간 곳이 공항입니다. 어떻게 하든 다친 가족을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미국에 갈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전자여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현재 미국은 전자여권이 없으면 입국할 수 없는 시스템입니다. 미국 비자면제프로그램을 이용하려면 전자여권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아시아나항공 사고 가족을 만나기 위해 금재국씨가 출국수속을 하는 모습.ⓒ News1

 


사고가 난 아시아나항공 OZ214편에는 총 291명의 승객과 16명의 승무원이 탑승했습니다. 이중 한국인 승객은 77명이었고, 이들의 가족은 인천공항 탑승자 정보센터와 아시아나항공 출국 데스크에 미국에 갈 수 있는 방법을 계속 문의했습니다.

"전자여권이 없는 분들은 원칙적으로는 당장 미국 보내드리기가 힘든데 국토부와 외교부 통해서 임시로 무비자 입국 하실 수 있도록 해보는 중입니다."

아시아나항공도 전자여권이 없는 가족은 빨리 미국으로 보내주고 싶어도 보내줄 수가 없었습니다. 전자여권은 물론이고 체계적인 시스템이 전혀 가동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고 소식을 접한 가족들은 오전부터 나왔지만, 오후 1시30분에 출발하는 비행기에는 정부 사고조사반,아시아나 직원 20명 ,취재진 37명만 탑승했고, 가족은 아무도 탑승하지 못했습니다.

<참고로 현재 언론에 나온 사고 관련 사진은 대부분 NTSB 트위터에 나온 사진을 인용한 것으로 굳이 미국까지 가족보다 먼저 갈 필요성이 있었는지 의문조차 듭니다.>


이렇게 사고가 났을 경우 누가 나서야 합니까? 바로 외교부입니다. 외교부가 SNS와 언론을 통해 전자여권이 없는 가족을 위해 빠른 시일 내에 전자여권을 발급하겠다고 알려주고 실행에 옮겼어야 합니다.

 

 

▲주샌프란시스코총영사관 공지사항. 출처:외교부 홈페이지

 


다행히 주샌프란시스코총영사관은 사고기 탑승객 중에 여권을 분실한 승객들의 귀국을 위한 긴급여권 발급을 24시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정부기관은 외교부,국토부가 해야 할 일이 서로 다르며, 국민이 어떤 사고나 재난을 당하면 기관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전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국민이 세금을 내고 국민의 의무를 다하는 만큼 정부도 그에 못지않게 국민을 지키려고 노력해야 하고, 그것이 정부 존재의 이유입니다.

이번 아시아나항공 사고와 관련한 정부기관별 대처의 문제점을 점검하고 개선하지 않으면 혹시라도 발생할 사고에서도 이처럼 부족하고 미비한 점이 다시 나올 수 있습니다.

<언론에 정부 대처에 대한 문제점을 파악하고 그에 대한 진단과 개선책을 요구하는 기사가 최소 몇 개 정도는 나와야 하지 않을까요? >


 

 

 



이번 아시아나항공기 사고로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난 왕린자(王琳佳)와 예멍위안(叶梦圆) 두 여학생의 명복을 빌며, 다친 탑승객들 모두 후유증 없이 완쾌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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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뜻에 의해 남북경협 재개될 것"

 

유동호 남북경협기업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

민족21 염규현 기자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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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07.09 12: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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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동호 남북경협기업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과 인터뷰를 가졌다. [사진 - 민족21]
“지금의 모든 혼란과 갈등은 결국 새로운 변화의 시대를 위한 진통이라 생각합니다. 남북경협, 나아가 남북관계 복원과 발전이라는 ‘바른 길’을 믿는 국민들의 힘으로 반드시 지금의 상황이 희망적으로 풀릴 것이라 믿습니다.”

 

지난 6월 21일 서울 안국동에 위치한 비대위 사무실 근처 카페에서 만난 유동호 위원장은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 시종 밝은 모습을 잃지 않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하나도 좋을 것이 없는 상황이 바로 지금 아닌가. 5년이 넘도록 중단된 남북경협은 새로운 정부가 들어선 지금에도 좀처럼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유 위원장 역시 2008년 개성공단 외곽에 주유소를 건설해 준공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멈춰진 후, 지금까지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2003년 남북사회문화교류단체 ‘지우다우(지금 우리가 다음 우리를)’를 설립해 남북교류에 첫 발을 디딘 유 위원장. 이후 그는 2006년 (주)바두바투를 세워 본격적으로 남북경협에 참여했다. 그런 그가 이제 남북경협비대위의 위원장을 맡아 이렇게 고군분투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절박감

□ 민족21 : 지난 5월 남북경협비대위가 결성되었습니다. 여기에 위원장이라는 중책을 맡게 되었는데, 지금까지의 비대위 활동을 소개해 주시죠.

■ 유동호 위원장 : 저보다 먼저 남북경협에 뛰어들었던 많은 선배 기업인분들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이렇게 중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아주 무거워요. 현재 비대위는 금강산기업협의회, 남북경협활성화 추진위 일동, 남북임가공협의회, 남북경협경제인연합회, 남북농림수산물사업협의회, 남북경협경제인총연합회 등 남북경협 관련 임의단체들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결성 이후 비대위는 이들 단체에 속해 있는 1028개 업체들에게 ‘남북경협 피해 실태조사서’를 보내고 그 결과들을 취합하고 있습니다. 결과들이 모두 취합 되는대로, 이를 바탕으로 통일부와 향후 피해기업에 대한 지원 대책을 구체적으로 논의할 예정입니다.


   
▲ 남북경협기업 비상대책위원회와 민변 남북경협 법률지원단 업무협약식이 6월 12일 민변사무실에서 열렸다. [사진 - 민족21]
아울러 지난 6월 12일엔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통일위원회 소속 남북경협법률지원단(이하 민변경협지원단)과 ‘남북경협 정상화를 위한 업무 협약 체결식’을 맺었습니다. 이로써 남북경협의 장기간 중단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경협기업인들의 법률지원에 본격적으로 나설 수 있게 되었죠. 이제 민변경협지원단은 비대위의 일상적 활동, 즉 피해기업 보상안 마련, 남북경협기업 피해 보상에 관한 법률안 검토, 피해 기업 소송 지원 등에 대한 상시적인 지원 체계를 갖추고 비대위와 긴밀히 협력하기로 했습니다. 아울러 여기에 삼일회계법인도 함께 도움을 주기로 했어요. 그동안 경협기업인들이 하나로 뭉치지 못한 채 많은 어려움을 각자가 감내해 왔다면 이제는 모두가 힘을 합쳐 공동으로 대처해 나가기로 한 것이죠.

 

□ 비대위에 개성공단입주기업들은 참여하지 않는 것인가요?

■ 개성공단은 이미 입주기업협의회가 만들어져 개별적인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희 비대위는 MB정권 출범 이후 중단된 남북경협으로 극심한 피해를 입은 기업들이 중심으로 만들어 졌고요. 하지만 그렇다고 개별적으로 각각 활동하는 것이 반드시 바람직하다고는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각자가 처한 상황과 인식의 차이가 있을 수는 있지만, 모두가 힘을 합하여 한 목소리로 경협의 재개와 피해에 대한 보상을 촉구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 확신합니다. 때문에 저희 비대위는 언제든지 개성공단입주기업협의회(비대위)와 대화하고 협력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 당장 계획되어 있는 비대위의 활동이 있는지요?

■ 7월 12일 오후 4시 코엑스에서 남북경협기업인들 전체회의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각계 인사들이 영상으로 응원 메시지를 보내주고 있습니다. 100여 개 업체 이상이 참석할 예정입니다. 이런 계기를 통해 남북경협인들의 마음을 모아 5년 동안 힘들고 지쳤던 상황을 훌훌 털고 피해 보상과 경협 재개라는 우리의 공통된 목표를 이뤄갈 것입니다.

남북청년들의 만남 꿈꾸며 대북사업 시작

 

   
▲ 2003년 8월 지우다우의 대학생 금강산 '통일모꼬지' 이후 대학생들의 금강산행이 잦아졌다. [사진 - 민족21]
□ 위원장님이 남북경협, 남북교류사업에 처음 뛰어든 계기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 대략 2001년부터 금강산을 찾았던 것 같습니다. 당시 금강산을 직접 밟을 수 있다는 감격도 컸지만, 한 편으로는 더 많은 남측의 국민들이 이 땅을 밟아야 한다고 느꼈어요. 그러던 중 2003년 당시 현대아산 김윤규 사장님과 함께 식사를 할 자리가 있었어요.

당시 금강산관광은 새로 출범한 노무현 정부의 대북송금특검 등으로 동력이 떨어지고 있는 때였습니다. 때문에 현대아산은 전국 대학의 총학생회에 공문을 띄워 대학별로 2명씩 뽑아 무료로 금강산관광을 하게 해주는 프로그램 등 다양한 아이디어로 금강산관광에 활력을 불어넣으려 했죠.

하지만 반응은 미진했어요. 거기다가 사스 여파까지 있었고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 청년학생들이 지금 이 시대 우리 민족의 가장 중요한 화두이자, 또 우리 모든 한반도 구성원의 미래가 담겨 있는 남북문제에 대해 너무 무관심한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통일의 주체가 되어야 할 청년학생들이 금강산관광에 대해 별다른 감흥이 없다는 사실이 실로 가슴 아팠습니다.

때문에 그 자리에서 김윤규 사장님께 ‘제가 한 번 뛰어보겠습니다’고 제안했고, 이후 김윤규 사장님의 지원아래 커다란 행사를 함께 준비하게 됐습니다. 그것이 바로 2003년 8.15를 기념해 전국 815명의 대학생들을 모아 최초로 육로를 통해 금강산에 가는 프로젝트였어요. 당시까지만 해도 해로를 통해 금강산관광을 하던 때였잖아요. 게다가 대학생들은 북측CIQ(출입사무소)를 통과한 직후에는 금강산까지 8킬로미터를 행군해서 가기로 계획했어요. 당시로서는 모든 것이 ‘최초’인 시도였죠.

그렇게 계획을 세운 뒤 서둘러 사무실을 구하고 전국의 대학을 누비며 학생들을 만났어요. 학생들에게 제 뜻을 전하고 그들의 생각도 느낄 수 있었죠. 그렇게 해서 1,800여명의 학생들이 뜻을 함께 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지우다우’의 시작이었습니다.

하지만 행사 준비가 막바지에 이르고 학생들의 명단을 정리하는 와중에 그만 정몽헌 회장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어요. 남측은 물론 북에서도 매우 큰 충격으로 다가왔고, 북은 모든 관광의 일체 중지를 발표했습니다. 당시 신청한 1,800명의 학생 중 815명을 어떻게 추려야 하나 고민하던 저희에겐 큰 충격으로 다가왔죠. 신청을 취소하는 전화가 빗발쳤고, 남북관계가 급속히 경색되는 가운데 과연 ‘지우다우’의 계획이 실행에 옮겨질 수 있는가에 대한 문의도 많았죠.


   
▲ 지우다우가 추진한 대학생 금강산관광 당시의 모습. [사진 - 민족21]
하지만 ‘지우다우’는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끝내 간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북도 오지 말라고 하고 남측도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말이죠. 우리는 ‘우리 순수한 청년 학생들이 한반도의 평화와 조국의 통일을 위해 온 몸으로 철책선을 열어젖히고 들어가겠다’는 메시지를 남북 당국 모두에 전했습니다. 결국 이런 저희의 뜻이 전해졌는지 행사 일정이 코앞에 다가오는 시점에서 북이 방북을 허용했고, 남측 당국 역시 허가를 해줬습니다.

2003년 8월 13~16일 동안 126개 캠퍼스 815명의 대학생, 집행부, 언론인, 참여인사 등 1,000여명이 금강산을 찾아갔습니다. 이 의미 있는 행사로 인해 정몽헌 회장의 사망 등으로 부정적으로 인식되었던 금강산관광이 다시금 활력을 얻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잊지 못할 순간이었어요. 당시 숙소가 부족해 몽골텐트를 설치하고 잠을 잤는데, 모든 학생들이 침낭을 들고 나와 마당에서 북녘의 하늘을 바라보면서 밤을 새웠으니까요. 그들도 가슴이 벅찼던 것이죠.

 

□ 그 이후 지우다우가 바두바투로 바뀌게 된 연유도 궁금합니다.

■ 2003년 8월의 행사 이후 남측 대학가에서는 ‘통일모꼬지’ 붐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 이후에도 2004~2005년까지 매년 2만 여 대학생들이 금강산으로 통일모꼬지를 떠났죠. 이러한 열풍은 국민들이 다시 금강산을 사랑하게 되는 작은 계기로 작용하게 되었고, 금강산관광의 전성시대를 여는데 기여하였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저는 금강산을 찾는 대학생들의 숙소문제가 여의치 않다는 사실에 고민하다 ‘통일수련원’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바닷가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수련원을 짓고 남북의 청년들이 함께 모여 민족의 미래와 통일의 희망을 논의하는 자리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죠. 설계도 마치고 부지 계약까지 끝냈습니다.

하지만 현대아산의 경영방침이 변화를 겪으면서 이 사업은 진행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 느끼게 됐죠. 남북사회문화교류사업이 기부에만 의존하게 된다면 동력의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말입니다. 그래서 경제협력사업을 병행하며 그 부가가치를 통해 사회문화교류를 더욱 힘 있게 가져가자는 생각을 하게 됐고, 2006년 바두바투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공정률 97%에서 멈춘 개성의 주유소

 

   
▲ 2008년 바투바투의 개성주유소 착공식 모습. [사진 - 민족21]
□ 바두바투는 주로 어떤 사업을 추진하고 진행해 왔습니까?

 

■ 처음 생각한 것은 중국, 동남아시아 등 제3국에 나가서 생산 활동을 하고 있는 남측의 제조업, 임가공업체들을 평양으로 옮길 수 있도록 해보자는 것이었어요. 물론 개성공단도 훌륭한 대안 중 하나지만, 그 확장 속도가 상당히 더디었거든요. 남북경협을 더욱 폭발적으로 확대시켜 더 큰 성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평양공단을 생각하게 된 것이죠. 그래서 평양시 외곽에 위치한 대안군에 시범단지 3만 평을 구입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남포까지 이어 확장해 나가자는 구상을 가지고 사업을 진행하려 했어요.

하지만 결국 평양이 깊은 내륙이라는 특징으로 접근성이 용이치 않아 사업의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고, 고민하던 중 통일수련원 사업을 이미 설계는 해놓았으니 다시 실현시켜야겠다는 생각에서 개성에 다시 2만 평의 부지를 얻었습니다. 금강산이 아닌 개성에다 통일수련원을 짓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죠. 물론 이는 현대아산과 사업적으로 협력해야 하는 사항이죠. 하지만 일단 사업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가지고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이미 인연을 맺고 있던 GS칼텍스와 협의해 2만평 부지 초입에 주유소를 먼저 지은 것입니다.

□ 왜 갑자기 통일수련원 사업에서 주유소 건설이 포함된 것인가요.

■ 주유소 사업 역시 나름 너무나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이 사업은 단지 개성에 주유소 하나를 지으려고 한 게 아니라, 북.미 관계가 개선되고 북이 세계무대에 본격적으로 진출할 때를 예상해서 추진한 것입니다. 북에 수많은 SOC건설사업이 진행될 때, 현실적으로 북의 여건상 화석연료가 기본 동력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기업이든 정유사가 들어가 토대를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은 가능하면 민족자본화될 수 있는 기업이 들어가길 바랐어요. 그러기위해선 최고 경영자의 의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생각했습니다.

GS칼텍스는 GS가 50% 지분이고 쉐브론이라는 미국의 다국적 기업이 50%의 지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선 한.미가 같이 들어가는 개념이라 생각했죠. 그래야 북이 세계 무대에 나서는 길도 더 자연스럽게 열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GS의 오너쉽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고 짧은 시간에 의기투합해 1차적으로 안테나숍으로서 개성에 첫 번째 주유소를 세우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사인만 아직 하지 않았을 뿐이지, 북에서 이미 초안까지 온 상태인데, 평양에 5개소의 주유소를 세운다는 것까지 합의가 되어있어요. 일단 평양에 5개소를 짓고, 그리고 북 전역에 확장할 생각인 것이죠. 북은 미국과의 관계가 개선되고 그 이후 세계시장에 진출한다면 뛰어난 기술력을 바탕으로 비약적인 성장을 이룰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민국이라는 경제강국이 함께 할 것이기에 그 속도는 더욱 눈부시겠죠. 하지만 이 사업은 안타깝게도 2008년 11월까지 97% 공정률을 마친 상태에서 12월에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남북경협 1세대를 기억해야

□ 다시 비대위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동안 남북경협하면 대다수 국민들은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을 떠올렸던 것이 사실입니다. 최근 개성공단의 중단 이후 ‘남북경협의 최대위기’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개성공단, 금강산관광사업 이전에 이미 북에 진출해 경협사업을 진행해온 업체들이 엄연히 존재합니다. 어찌 보면 남북경협 1세대라고도 할 수 있는데요. 그동안 이들 업체의 고통이나 억울함이 전면에 드러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이라 보십니까.

■ 그동안 개성공단을 제외한 내륙기업의 목소리가 작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사태에 대해 다소 소극적으로 대처해 온 것도 사실입니다. 먼저 전체가 힘을 가지려면 조직이 사분오열되어 개인적인 역량들이 표현되는 것보다는 단일한 목소리가 나와야 합니다. 조직화가 필요한 것이죠.

개성공단이나 금강산 지역은 지역적 성격으로 외형적인 조직화가 이미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북 내륙진출 기업들의 경우 모두 개별적으로 진출해 사업을 진행해 왔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조직적인 틀 속에 진출한 것이 아니라 남북경협이라는, 국가가 열어준 큰 틀 속에서 개인적인 역량을 바탕으로 진출한 것입니다. 때문에 어떠한 사건이나 변화 앞에서도 신속히 조직화되거나 결집되기 힘들었던 것이죠. 아쉬운 부분입니다.

하지만 이제 새로운 희망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동안 결집되지 못했던 많은 기업들이 비대위의 이름으로 모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MB정권 5년의 고통을 더 이상 연장시킬 수 없다는 절박감과 남북경협이라는 소중한 ‘통일의 씨앗’을 다시 가꾸어야 한다는 사명감이 이들을 하나로 묶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비대위는 이제부터 어느 특정 기업이나 개인이 아닌 전체 기업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이들의 억울함을 알리며, 다시 열릴 남북경협 시대에 대비할 수 있도록 역량을 모으는 작업을 진행할 것입니다.

□ 남북경협의 장기간 중단 상태에 대해 지난 MB정권의 과오가 적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기존의 남북경협이 가지고 있었던 여러 가지 미흡한 부분들에 대한 지적도 있습니다. 향후 남북경협이 재개된다면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모습의 경협이 되어야 한다는 지적도 있는데요.

■ 어떤 특정권력이나 일개인이 역사의 큰 흐름을 좌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물론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는 있겠죠. 하지만 저는 그러한 개인의 성격과 특정 권력에 의해 역사의 흐름이 바뀐다기보다는, 국민의 집단 무의식이 역사의 실질적 변화요인이라 생각합니다. 국민들은 남북의 통일과 통합을 위한 실험장이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때문에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이 시작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일정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국민들이 바라본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이, 국민들이 기대했던 것만큼 제 역할을 충실히 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기대에 부응한 면도 많겠지만, 그렇지 못한 측면도 분명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국민들은 북은 북대로 자신들의 이데올로기, 역사의식을 토대로 경제협력 방향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였다고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대로 물질주의에 만연되어 물질적 우세에 의해 상대를 하대하고 우리의 방식만이 옳다는 아집과 고집을 부리진 않았나 생각해봐야 합니다. 아울러 기업은 기업대로 되돌아봐야 할 부분이 존재합니다. 개성공단에 들어간 기업의 대다수가 어떤 기업입니까. 대부분 단순히 저렴한 북의 노동력을 통해 부가가치를 획득하고 경쟁력을 얻기 위해 들어간 기업입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기업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 북을 바라보는 일방적인 시각이 존재해 왔다는 것입니다. 물론 북측의 근로자들 역시 자신들만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겠죠. 이러한 분열의 씨앗을 계속 잉태하고 있는 ‘통합의 실험장’. 과연 국민들이 100% 만족하고 안심했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지금 남북경협의 시련이라는 것도 그런 시각 속에서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MB정권도 그랬고, 지금의 정부도 부분적으로는 존재한다고 생각하는데, 아무리 자신들의 생각이 옳다고 여겨도 국민들의 뜻을 거스르며 고집을 부리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멈춰진 남북경협이 다시금 살아나고, 그것도 그냥 살아가는 것이 아닌 더욱 더 개선되고 긍정적인 모습으로 살아나기 위해서는 정부의 의지 못지않게 국민들의 의식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지금 개성공단이 파국의 위기에 있습니다. 전체 경협사업 중 마지막 남은 개성공단마저 이런 상황이라는 것은 결국 국민들이 진정으로 경협을 멈추기를 바라기 때문일까요?

저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 비록 무산되긴 했지만 남북당국회담을 앞두고 국민들이 얼마나 큰 희망을 가지고 남북관계의 개선을 촉구했습니까? 대다수의 국민들은 남북관계가 정말 잘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국민들은 그냥 잘하라는 의미도 있겠지만, 정말 잘하기를 바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남과 북이 양보도 하고 생산적이고 진취적인 방향으로 서로의 뜻을 잘 모아 기존의 모순을 잉태한 경협이라든가 교류를 넘어서 진정한 미래 비전을 담을 수 있는 내용을 가지고 해나가기를 바라는 것이 진정한 국민의 마음입니다.

우리 경협기업인들도 기존 경협과정에 문제점이 있었다면 그것을 깊이 있는 자성과 각성의 마음을 가지고 돌아보고, 향후 진정으로 남북이 윈-윈 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진정성과 책임 있는 자세를 갖는다면 북 또한 다시 테이블로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경협기업인들이 진정 고민해야 할 자세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 그렇다면 향후 남북경협이 빠른 시일 내에 재개될 것이라 보는 것인가요.

■ 저는 남북경협이 국민의 뜻에 따라 시작되었다고 믿습니다. 물론 정부가 시작을 했고, 기업이 함께 하면서 발전해 왔지만 국민의 뜻이 함께 하지 않았다면 결코 지금까지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현재 남북경협의 장기간의 중단 이후 피해를 입은 기업에 대한 보상, 지원문제가 계속 거론되고 있습니다. 대출 방식이든, 무상지원 방식이든 결국 이는 국민들의 혈세로 나가는 것입니다. 국민들이 주는 것이란 소리입니다.

위기에 처한 경협기업인들이 궁극적으로 마지막에 가서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곳은 정부도 기업도 아닌 국민인 것입니다. 저는 남북경협이 국민의 뜻으로 시작되었고, 국민의 뜻에 의해 유지되어 왔고, 또 결국은 국민의 뜻에 의해 다시금 열릴 것이라 확신하고 있습니다. 국민들이 경협인들에게 주시는 그 소중한 피와 땀의 진정한 의미는 다시 한 번 힘내 정말로 잘해보라는 경책과 사랑, 주시와 격려라 생각합니다.

다시금 시작될 남북경협시대를 위해

□ 마지막으로 북에 대해 당부하고 싶은 것과 중장기적인 비대위 활동계획에 대해 소개해 주시기 바랍니다.

■ 현재 남북관계의 경색은 남북 모두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성공단 중단 과정에서 북 당국자 중 한 분이 ‘개성공단이 중단되면 우리들은(북) 손해 볼 것이 하나 없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는 정말 어린 아이 장난과 같은 말입니다. 누구는 이익이고 누구는 손해 본다는 관점으로 남북관계, 남북경협을 바라보면 안 됩니다. 상생의 자세가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제 더 이상 과거와 같이 서로 대립하고, 상처 주는 말이나 행동을 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역지사지의 입장을 견지하며 서로가 한 발씩 물러나 대화를 재개하기를 바랍니다.

한편 비대위는 큰 틀에서 몇 가지 준비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우선 그동안 많은 경협기업인들이 스스로 ‘버려졌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소외, 설움 등이 응어리져 있습니다. 더구나 문제는 어느 누구도 ‘나의 설움’을 토로할 곳을 찾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전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합니다. 그들의 설움이 왜 만들어졌는지, 우리 사회와 정부는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이들의 고충을 담아내 가능한 현실적으로 정책에 반영될 수 있도록 제도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지금까지의 피해를 최소화시키고 앞으로 어떻게 하면 이러한 피해가 발생되지 않고 더 잘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소리를 담을 수 있는 틀이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피해를 입은 경협인들의 현실적인 생존권에 대한 문제입니다. 우선은 지금 논의되고 있는 정부의 대출 형태로부터 시작해 앞으로 궁극적인 피해보상이 실질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경협기업인들이 경협을 하는 데 있어 섬세한 안내가 절실합니다. 실질적 지원 외에도 상세한 정보와 제도, 해당 기업에게 부족한 부분들을 살펴 전문적으로 카운슬링 하는 것 등이 필요합니다.

지금까지는 이런 부분에 있어 경협기업인들은 직간접적으로 상당히 차단되어 있었습니다. 앞으로는 경협기업인들에게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고 제도도 소개해서, 경협활동을 더 잘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더 적극적으로는 교육프로그램 개발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경협인들이 재활할 수 있는 실질적인 방안도 필요할 것입니다.

지난번 경협기업인들과의 간담회 등에서 좋은 얘기들이 많이 나왔는데, ‘농활’처럼 청년학생들과 함께 하는 ‘경활’도 좋은 프로그램의 예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프로그램도 만들고, 중소기업진흥공단 등과 함께 강연 및 지원프로그램도 많이 만들고, 통일부에서도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그런 것들이 함께 진행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경협인들의 교육을 위한 프로그램도 필요합니다. 이들이 남북경협을 준비하고 공부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합니다. 이제 이런 논의들이 다시 새롭게 대두되어 준비할 시기입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남측의 문제도 나오고 북측의 문제도 나오고 우리 기업의 문제도 나올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그냥 비판적으로 쏟아내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잘할 수 있는 토대 속에서 대안들을 만들어 북에도 건의하고 우리 정부에도 건의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는 분명한 기준이 있습니다. 암울하고 패배적인 시각이 아닌 긍정적인 미래 비전속에서 나오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으로의 남북관계는, 남북경협은 보다 큰 차원에서 더욱 잘 진행될 것이라는 믿음 속에 이뤄져야 할 것입니다.

* 이 기사는 월간 <민족21>과의 기사교류협약에 의해 <민족21> 2013년 7월호와 동시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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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 얼음 밑 ‘유령 호수’서 다양한 생물 확인

 

남극 얼음 밑 ‘유령 호수’서 다양한 생물 확인

 
조홍섭 2013. 07. 09
조회수 46추천수 0
 

미 연구진 물고기 창자 서식 세균 등 유전자 확인, "다양한 생태계 존재 가능성"

열수분출구서 에너지와 영양분 공급…1500만년간 외부와 차단, 외계 생물 연구자 관심

 

Lake_Vostok_Sat_Photo_color.jpg » 위성에서 촬영한 보스토크호 상부의 빙상이 평평하다. 사진=미항공우주국 제트추진연구소, 위키미디어 코먼스

 

세계에서 4번째로 깊고 담수용량이 7번째로 많은 호수는 남극대륙 한가운데 있다. 지상이 아니라 얼음을 4000m 가까이 파내려 간 곳에 충남과 충북을 합친 면적의 거대한 담수호 보스토크호가 자리 잡고 있다.
 

엄청난 얼음 압력에다 빛이 전혀 들지 않고 영양분도 없는 차가운 이 호수에는 아무것도 살 수 없고, 혹시 있다면 외계 생물체와 비슷할 것으로 믿어졌다.
 

그러나 이 호수에도 세균과 함께 다양하고 복잡한 생물들이 살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스콧 로저스 미국 오하이오 보울링 그린 주립대 미생물학자 등 미국 연구진은 최근 미국 공공과학도서관이 발간하는 온라인 공개 학술지 <플로스원>에 실린 논문을 통해 1990년대 러시아가 보스토크 기지에서 굴착한 얼음 시료를 분석한 결과를 발표했다.
 

noaa_640px-Wostok-Station_core32.jpg » 남극대륙 한가운데 있는 러시아의 보스토크 기지. 이 지하에 거대한 호수가 있어 심층 굴착이 진행중이다. 사진=미 국립해양대기국(NOAA), 위키미디어 코먼스

 

보스토크호도 3500만년 전에는 푸른 하늘 아래 숲에 둘러싸인 호수였다. 그러나 남극대륙의 급격한 한랭화와 함께 1500만년 전 이 호수는 얼음 밑에 갇히고 말았다. 남극에는 이런 얼음 밑 호수가 375개 있으며, 보스토크호는 이 가운데 가장 크다.
 

소련이 1956년 발견하고 영국이 1990년대 레이더로 관측해 알려진 이 호수는 1만 5000㎢ 면적에 수심 800m로 과학자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애초 생물이 살았던 호수라면 오랜 세월 얼음 밑에 갇히더라도 바뀐 환경에 서서히 적응해 진화한 독특한 생물이 살고 있을 것이란 기대 때문이다.

 

708px-LakeVostok-Location.jpg » 보스토크호의 위치(원). 사진=미항공우주국, 위키미디어 코먼스

 

그러나 남극에서의 심층 굴착 자체가 어려운데다 굴착 과정에서 외부 생물체로 인한 오염 우려가 있어 호수에 대한 본격적인 탐사는 아직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이번에 연구진은 연간 3m 속도로 이동하는 빙하 때문에 보스토크호 상부가 얼어붙은 ‘부착 얼음’을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지표로부터 3500m 지점에서 굴착한 이 부착 얼음은 5000~1만년 전에 형성된 것으로 깊이가 231m에 이르며, 호수 안 생물의 흔적을 간직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연구진은 이 부착 얼음 속의 유전물질을 분석해 모두 3507가지 독특한 유전자 염기서열을 찾아냈고, 이 가운데 1623개는 이미 밝혀져 데이터베이스에 확보된 기존 생물과 유사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가운데 94%는 세균이었고 6%는 복잡한 다세포 생물이었으며 2건은 원시적 단세포생물인 아케이아였다.
 

Melanie Conner_National Science Foundation-1 _HOLDINGVOSTOKX.jpg » 보스토크호에서 굴착한 얼음 시료. 사진=멜러니 코너, 미국과학재단

 

흥미롭게도 이들 세균 가운데는 동물의 몸속에서 공생하거나 병을 일으키는 종류였는데, 그들이 사는 동물로는 환형동물, 말미잘, 완족류, 완보류, 어류 등이었다. 이 세균들은 무지개송어, 바다가재, 촌충, 물벼룩, 바다 표면을 떠도는 갑각류 등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또 열에 잘 견디는 세균과 비소를 산화하는 세균의 유전자 염기서열도 발견했는데, 이는 호수 안에 지질활동에 의한 열수분출구가 있을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열수분출구는 심해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호수 생물이 살아갈 에너지와 영양분을 공급할 가능성이 있다고 논문은 밝혔다.
 

유전자 염기서열이 확인된 다세포생물로는 조개, 절지동물, 윤충 등이었다. 해양생물의 유전자가 검출된 것은 이 호수가 한때 바다와 연결돼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전체적으로 생물 흔적의 농도는 미미해 호수의 영양상태가 매우 빈약했다.
 

vostok.jpg » 보스토크호의 얼개. 서서히 이동하는 상층 빙상 아래 호수 윗 부분에 부착 얼음 층이 두 개 있다. 호수 바닥엔 퇴적층과 그 위에 소금물 층이 있다. 지질활동으로 열수분출구도 왼쪽에 그려져 있다. 이번 연구에서 시료를 채취한 지점은 가로축에 화살표로 나타낸 두 곳이다. 그림=로저스 외, <플로스 원>

 

이번 연구는 호수를 직접 탐사한 것이 아니라 유전자를 통해 간접적으로 분석한 것이라는 한계를 지닌다. 그러나 논문은 “적어도 일부 복잡한 동물이 이 호수에 살고 있을 가능성이 드러났다.”라고 밝혔다.
 

연구자의 하나인 로저스 보울링 그린 주립대 연구자는 “이제가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한 생태계를 발견했다. 생명은 얼마나 강인한가, 수십년 전이라면 아무것도 생존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던 곳에서도 생물체는 잘 살아가고 있다.”라고 <뉴사이언티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보스토크호는 목성의 위성인 유로파, 토성 위성 엔셀라두스 등 얼음에 덮인 외계 행성과 유사한 환경이어서 우주생물학의 관심사이기도 하다. 러시아는 지난해 보스토크호를 굴착했으며 곧 그 분석결과를 발표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기사가 인용한 논문 원문 정보:
Shtarkman YM, Koc¸er ZA, Edgar R, Veerapaneni RS, D’Elia T, et al. (2013) Subglacial Lake Vostok (Antarctica) Accretion Ice Contains a Diverse Set of Sequences from Aquatic, Marine and Sediment-Inhabiting Bacteria and Eukarya. PLoS ONE 8(7): e67221. doi:10.1371/journal.pone.0067221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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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근혜정권’을 10년이나 더, “난 반대합니다”

 
 
 
홍문종 ‘박근혜 대통령 끝나고 10년은 더 집권해야’
 
耽讀 | 등록:2013-07-09 09:37:40 | 최종:2013-07-09 09:53:58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인쇄하기메일보내기
 
 


 

"박근혜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고도 우리가 최소 10년은 더 집권해야 대한민국이 반석에 올라간다. 북방한계선(NLL) 포기 논란을 비롯해 많이 보지 않았느냐. 민주당은 믿을 수 없으며 이들에게 정권을 맡길 수 없다."

홍문종 새누리당 사무총장이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당 사무처 월례조회에서 한 말입니다. 민주당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은 맞지만, 새누리당 박근혜정권 이후 10년은 더 집권해야 한다는 말에는 도저히 동의할 수 없습니다.


새누리당"박근혜 대통령 끝나고 10년은 더 집권해야"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인 지난 2007년 6월 2일 참여정부 평가포럼에서 한나라당 집권하면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당시 노 대통령이 예언한 내용을 간추려 보면 이렇습니다.

"한나라당의 민주주의에 대한 비전에 무엇인지는 제가 잘 알 수가 없습니다. 민주주의의 미래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나라당은 우리 민주주의가 너무 많이 왔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건 확실합니다",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우리 언론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눈을 감으면 항상 눈에 선한데 저는 이것은 눈을 감지 않아도 눈에 선합니다."

그리고 "아무런 역사 의식도 비전과 전략도 보이지 않는다"며 "집권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당과 후보가 이 모양이니 그 사람들이 집권하면 나라일도 걱정이고 힘 없는 사람들의 일은 더욱 걱정"이라고 말했습니다.


MB업적을 '참 좋아'하는 박근혜 대통령

노 전 대통령은 예언은 정확했습니다. MB정권 업적을 간단하게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4대강 죽이기 ▲ 언론자유탄압 ▲민간인 불법사찰 ▲부패순위 1-5위 ▲남북관계 파탄 ▲고위공직자 4대필수과목 ▲역사의식부재 ▲국정원 선거개입 따위입니다. 이외에도 많습니다.

문제는 MB정권 업적을 박근혜정권이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중 하나가 MB정권 고위공직자를 상징했던 '4대 필수과목'(병역비리·세금탈루·위장전입·부동산 투기)은 오히려 박근혜정권하에서 더 악화됐습니다. 얼마나 심각했으면 '낙마축구팀'을 구성했겠습니까?

▲ 허태열 비서실장은 지역감정 바이블이었다

▲ 박 대통령이 허태열 비서실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하는 모습 <연합뉴스>

박 대통령은 특히 지역감정 '바이블'로 잘 알려진 허태열 전 한나라당 의원을 대통령비서실장에 앉혔습니다. 허 비서실장은 "민주당은 전라도정권, 전라도 사람이 키우고 사랑하고, 반대로 우리 한나라당은 부산시민이 키웠고 부산시민이 사랑했습니다."," 민주당은 노 후보 하나만 경상도고, 나머지는 다 전라도다"라는 지역감정을 부추겼습니다.

특히 2009년 7월 15일 한나라당 부산시당 국정보고대회에서는 "지난 10년간 깔아놓은 좌파들의 인프라를 걷어내려면 한나라당이 20년간은 집권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무엇보다 요즘 수구세력들이 진보세력과 박근혜정권을 비판하는 사람들 논문표절을 찾아내 거세게 비판합나다. 그런데 허 비서실장은 지난 1999년 건국대 박사 학위 논문인 '지방자치단체의 정책결정 참여자 간 네트워크에 관한 연구'가 표절로 드러났습니다.


'법과 원칙주의자' 박근혜...박사학위 논문표절자를 대통령 비서실장에

지난 2월 20일 보도자료를 통해 "1999년 논문 작성 당시 논문 작성 방법이나 연구 윤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연구 윤리 기준을 충실히 지키지 못한 점 참으로 부끄럽게 생각"한다며 표절을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황당한 주장을 했습니다. "저는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가 아니고 또 학위나 논문을 활용하여 학문적 성과나 학자로서 평가를 이용하려 한 것은 아니었다"고 했습니다. 지금 허 실장이 박사학위를 반납했다는 소식은 없습니다. 대한민국 대통령 비서실장은 박사학위 논문을 표절해도 '당당하게' 직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입만 열면 '법과 원칙'을 강조하는 박근혜 대통령이 정작 비서실장에게는 적용하지 않습니다.

논문표절과 지역감정 '바이블'을 대통령 비서실장에 앉힌 것 쯤은 넘어갈 수 있습니다. 이명박정권에서 확인했듯이 도덕성에 흠결이 없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이명박근혜정권'이란 이상 야릇한 말처럼 국정원 부정선거 개입은 다시는 새누리당이 정권을 잡지 말아야 할 명백한 이유입니다.


'이명박근혜정권' 증명한 국정원 부정선거

▲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회록 유출 의혹 관련자들. 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원세훈,남재준,정문헌,권영세,김무성,서상기

지금까지 드러난 국정원 부정선거 개입 개요는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국정원은 지난 4년 동안 각종 선거때 MB와 MB정권 정책을 비판하면 '종북좌파'로 매도했습니다. 그리고 특정후보 당선을 위해 '댓글'을 달았습니다. 그런데도 박 대통령은 "나는 모른다"고 했습니다. 비판이 워낙 비등하니 8일 "국정원 스스로 개혁안을 마련하라"고 했습니다. 국정원같은 정보기관은 권력을 더 가지려고 하지 내놓지 않습니다. 이는 국정원을 개혁할 마음이 없음을 대통령이 국민 앞에 인정한 것과 다름없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국정원장과 '독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독대를 하지 않았다고 국정원이 개혁된 것은 아닙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집권하자 독대를 부활시켰고, 원세훈같은 이를 원장에 내정하면서 국정원이 부정선거에 개입하는 빌미를 제공했습니다. MB는 지난 2010년 11월 <동아일보>와 인터뷰에서는 "권력을 휘두르지 않기 때문,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레임덕이 없다"고 했었습니다. 권력을 휘두르지 않았다는 말이 이번 국정원 부정선거 개입을 통해 낱낱이 드러났습니다.

즉, 노무현 전 대통령처럼 독대를 하지 않겠다는 '선의'도 한순간 MB처럼 권력을 휘두르는 악용하는 비극이 일어납니다. 이를 막는 길은 대통령 의지만 아니라 국정원은 반드시 법으로 개혁해야 함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므로 "국정원 스스로 개혁하라"는 말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맞기는 것과 같습니다.

국정원은 부정선거만 아니라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하하는 글을 올렸습니다. 내용을 보면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글입니다.

"놈현이가 저 세상에 와서 보니 아주 큰 죄가 많았군요~ 살아 있을 때 잘하지~ 왜 거기 가서 죽어서 후회하나~ 좌빨 여러분~ 있을 때 잘하세요."(2009.06.07)
"나도 안 믿었는데 노무혀이가 자살한 것으로 봐서는 뇌물 묵었는 것 같다. 안 그랬으면 죽을 노무혀이가 아니제…."(2009.06.21)
역대 대통령들 다 감옥가서 죄를 심판받았는데, 노무현은 정녕 자살로 땡인가? 부인 참 좋 으시겠어. 남편 덕에 감옥살이 면하시고."(2010.06.01)-<한겨레21> "다 감옥 가 심판받았는데, 노무현은 자살로 땡인가?"


2007년 정상회담대화록 공개...이명박근혜정권 '합작품'

▲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3월 22일 오후 청와대에서 남재준 국가정보원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청와대

이것도 모자라 새누리당은 노무현 대통령을 '부관참시'했습니다. 2007년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공개했습니다. 그것도 대통령 선거를 이용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악용'입니다. 대화록에도 없는 'NLL포기'와 '김정일에게 보고'했다고 했습니다. 정문헌-김무성-서상기-권영세 그리고 원세훈 전 국정원장과 남재준 국정원장에 대화록에 관여했습니다. 국기문란을 범한 것입니다.

이들은 이명박 전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로 대화록 공개는 이명박근혜정권 '합작품'입니다. 대화록 유출자는 법으로 엄단해야 합니다. 김무성 의원은 지난 대선 때 박근혜 캠프 총괄본부장이었습니다. 12월 14일 부산 서면 유세때 대화록을 줄줄 읽어내려갔습니다. 그 옆 박근혜 후보가 있었습니다. 총괄본부장은 다 알고 있는데, 대통령 후보자는 모른다는 것은 '상식'이 거부합니다.

특히 남재준 국정원장은 더 엄격한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은 "한국은 정보기관이 정보 유출자"라고 했고, <워싱턴포스트>는 "한국의 정보기관은 정치적 선동꾼(political provocateur)이 됐다."고 지적했습니다. 이 정도면 남재준 원장은 파면감입니다. 하지만 박 대통령 입에서는 아직 남재준이란 이름 석 자가 나오지 않습니다.


'이명박근혜정권'을 10년이나 더, "난 반대합니다"

이게 이명박근혜정권 실체입니다. 그리고 역사의식은 얼마나 빈약한지 모릅니다. 박 대통령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 5.16군사반란을 일으킨 것 때문인지 몰라도, 고위공직자들이 5.16을 군사반란이라고 부르지 못합니다. 민주공화국 각료 자격이 없습니다. 하기사 박 대통령 자신이 5.16을 군사반란이라고 국민앞에서 당당하게 인정하지 못합니다.

이런 정권을 10년이나 더 해야 한다니, 민주공화국 시민으로서 결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명박근혜정권이 또 다시 10년이나 반복된다면 대한민국은 10년이 아니라 30년, 50년이 후퇴할 것입니다. 우리 후손들에게 민주주의를 배반하는 정권을 더 이상 물려줄 수 없습니다.

'이명박근혜정권'을 10년이나 더, "난 반대합니다"

혹시 국정원 이런 글도 사찰 할까요? 그럴지라도 민주주의를 향한 정의로운 싸움은 막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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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국정원 셀프 개혁'의 불편한 진실


 

 

 


드디어 박근혜 대통령이 국정원에 대한 말문을 열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7월 8일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각종 의혹과 공방을 계기로 삼아 "국정원 개혁에 박차를 가하고 개혁안을 스스로 마련해 주기를 바랍니다."라고 밝혔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국정원 사건에 대해 청와대에서 공식적인 발언을 한 것은 환영할만한 일이지만, 이상하게 '국정원 개혁'을 국정원 스스로 하는 '셀프 개혁'을 요구했다는 점이 이상합니다.

KBS를 비롯한 여타의 언론들은 박근혜 대통령이 고강도 개혁을 지시했다고 하지만 국정원 스스로 개혁을 하는 '셀프 개혁' 주문이 무슨 고강도 개혁 지시인지 의문이 듭니다.

국정원이 과연 셀프 개혁을 할 수 있는지, 박근혜 대통령의 소극적인 국정원 개혁의지가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국정원 셀프 개혁은 구조적으로 불가능'

박근혜 대통령은 국정원이 스스로 개혁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주문 자체가 국정원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 전혀 모르는 무지에서 비롯된 상황에서 나온 말입니다.

먼저 국정원의 가장 큰 문제점은 수사권이 있다는 점입니다. 세계 각 나라 정보기관들은 대부분 수사권이 없이, 오로지 정보만 수집합니다. 그리고 그 정보를 수사 기관에 넘깁니다.

 

 

 


물론 미국 CIA도 국내 수사권이 있기는 있습니다. 조지 부시 행정부가 국방부와 미국 CIA에 감청과 인터넷 기록을 수사할 수 있는 수사권을 부여했다가 물의를 빚은 적이 있고, 미국 CIA는 FBI와 앙숙처럼 서로가 견제하는 시스템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 국정원은 1994년 안기부법 개정으로 수사권의 범위가 삭제되었지만, 1996년 수사권이 다시 부활했습니다. 아예 국정원이 수사권이 있으니 '정보 수집과 수사'라는 명목으로 국내 정치에 당당하게 개입하는 것입니다.

이런 국정원을 견제할 기관이 있느냐고 반문한다면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검찰이야 당연히 국정원 수사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거니와, 비밀리에 돌아다니는 국정원 수사 내용을 알기가 불가능합니다.

 

 

 


대통령을 제외한 유일한 국정원 견제 수단은 법으로 명시된 국회입니다. 국회에서 국정원을 견제하는 곳은 국회정보위원회이며, 정보위는 국가정보원의 법안에 대한 입법권과, 국정원의 예결산 심의, 국정원장 인사청문회, 국정원 감사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국회 정보위에서 국정원을 견제하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국정원 법안을 처리하는 국회 정보위는 16대,17대,18대 국회에서 가장 소극적으로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그마저도 국정원 견제와 먼 법안만 가결시켰습니다.

▲ 국가정보대학원 설치법 폐지안
▲ 국가정보원 직원 계급정년 연장
▲ 국가정보대학원 설치법 개정안

그렇다면, 국정원을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무기 중의 하나인 돈을 국회가 견제할 수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국정원은 아예 법률로 예산안과 관련된 첨부서류 제출 면제 대상입니다. 그냥 단순 총액만 제출하기 때문에 세부적으로 어디에 어떻게 돈이 사용됐는지는 국정원만 압니다. 또한, 예결위 심사도 받지 않고 오로지 정보위원회의 비공개 심사를 받습니다.

국정원이 개혁되려면, 국회의 강력한 정보위원회 권한 강화 및 법안 심사와 예산 심사를 지금과 다른 방식으로 추진해야 가능합니다. 과연 국정원이 자신들을 옭아맬 법안을 스스로 제안하고, 예산 심사는 물론이고 예산안 서류를 낼 수 있으리라 믿습니까?

국회 정보위와 국정원 관련 법률을 아는 사람이라면 박근혜 대통령이 주문한 '국정원 셀프 개혁'이 얼마나 초등학생과 같은 수준의 말장난에 불과한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 국정원은 대한민국 최대 조직범죄 집단'

국정원은 범죄 영화를 만들면 정말 많은 얘기가 나올 수 있는 집단입니다. 재산 강탈,도청,미행,불법 연행,납치,고문 등 범죄 집단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각종 범죄를 그동안 계속 저질러왔습니다.

국정원이 벌인 범죄 중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대한민국 선거에 깊숙이 관여했다는 점입니다.

 

 

 


대한민국에서는 선거 때마다 '북풍'이라고 불리는 '색깔론'과 '용공조작'이 끊임없이 일어났는데, 그런 '북풍'을 조장하고 공작을 벌인 집단이 바로 국정원입니다.

박정희는 1967년 대선 이후 1971년이면 물러나야 되자, 개헌을 하려고 합니다. 문제는 이미 6.8 대선 부정선거 규탄대회가 일어나고 있어 강력하게 밀고 나가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중정이 벌인 사건이 '동백림 사건'입니다. 박정희는 '동백림 사건'을 통해 개헌 성공과 6.8 부정선거를 잠재웠습니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6월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시행되자, 안기부를 동원해 대대적인 'KAL 폭파 사건'을 이용합니다. KAL 폭파가 안기부 자작이라는 주장은 의문이 들지만, 안기부가 '무지개 공작'을 통해 선거에 이용한 사안만큼은 분명합니다.

대선 전에 사건 중간발표를 하고 대선 하루 전날 김현희가 서울에 도착하는 순간 이미 노태우 당선은 확실해졌습니다.
(마치 2012년 18대 대선과 너무나 유사하다는 생각이 드는 대목이다.)


 

 

▲ 국정원의 압수수색을 받은 김명숙 전교조 인천지부장과 전교조 공안탄압 시위. 출처:참세상 안옥수 기자.

 


총풍이나 조선로동당 중부지역당과 함께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건이 전교조 사건입니다. MB정권에서 총선,대선 때마다 꼭 일어나는 일이 전교조 '국가보안법' 사건입니다.

2007년 대선이 있던 해부터 시작된 전교조 사건은 2008년 총선, 2012년 총선,대선이 있던 해에 빠짐없이 벌어졌습니다. 국정원이 압수수색을 벌이면서 일어난 전교조 국가보안법 사건은 대부분 항소심에서 무죄로 판결이 났습니다. 그런데도 국정원이 이런 일을 벌인 이유는 간단합니다.

선거때 가장 부모가 고려하는 부분이 교육과 아이들에 관한 내용이고, 전교조와 연관된 후보는 이런 점에서 가장 치명적인 타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국정원이 벌인 납치,고문,불법연행,재산 강탈 등의 범죄를 열거하려면 아마 책이 10권도 더 필요합니다. 얼마나 국정원이 무소불위의 집단인지 알려주는 대목이 있습니다.

 

국가정보원 요원이 이명박 대통령이 한겨레신문사를 상대로 낸 손해 배상 청구소송을 맡은 판사에게 전화해 재판사항을 확인하고,재판을 참관하다 판사에게 적발되었다.

2008년 7월 3일 서울 중앙지법 민사72단독 김균태 판사 심리로 열린 이날 재판에서 국가정보원 직원 김 모 씨를 법대 앞으로 불러 “국정원 연락관이라고 했는데,(대통령)개인 사건에 국정원이 전화를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경고했다.김 씨는 지난 5월 말 첫 변론기일 이후 김 판사에게 전화해 진행사항을 물었고 김 판사가 난색을 표하면 전화번호를 묻자 전화를 끊었다고 한다.

7월 3일 재판에서도 재판시작 10여 분 후 법정에 들어왔다가 “어떻게 오셨냐”고 묻자 머뭇거렸고 “기자냐”는 질문에도 “그렇다고 답했으나 김 판사가 신분증 제시를 요구해 국가정보원 직원임이 드러났다.

이후 2009년 2월 6일 김균태 판사는 이명박 대통령이 ‘BBK 의혹’보도로 명예를 훼손당했다며 한겨레신문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한겨레는 이 대통령에게 3천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국정원 직원이 재판 중인 판사에게 전화를 걸거나 거짓으로 재판에 참석하려던 정황을 보면 이들이 얼마나 대한민국을 우습게 아는지 알 수 있습니다. (국정원 직원이 신분을 숨기려던 점이 문제가 아니라 신성해야할 법정에 국정원 직원이 왜 와야 하느냐는 점이다. 대통령을 위한 국정원이라는 증거)

불교계,문화계,시민단체,언론,정치인 가릴 것 없이 대한민국 모든 일에 손을 대고 있는 국정원은 아마 국내 최대의 범죄조직이라고 말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 국정원 개혁이 싫은 박근혜 대통령'

사실 박근혜 대통령이 국정원 개혁에 소극적인 태도는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지난 2005년 '국정원 과거사 진실위'는 우선 조사 대상을 발표했습니다. 그러자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는 "국정원이 이런 일을 조사하는 곳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서 몹시 불쾌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국정원 과거사 진실위 활동에 불쾌함 내지는 과거사 조사에 정면으로 대응하겠다고 했던 이유는 그의 아버지 박정희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선정 7대 주요 의혹사건>

1.부일장학회 헌납 및 경향신문 매각 사건(65.5.) 박정희,박근혜 연관
-5.16이후 군사정권이 사유재산과 언론기관을 강제로 탈취,중정의 주도적 개입 의혹.
2.인민혁명당(64.8.)및 민청학련 사건(74.4.) 박정희 연관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을 잠재우기 위해 피의자들에 대한 고문과 사실 왜곡,조작 의혹.
3.동백림 사건(67.7.) 박정희 연관
- 67년 선거 당시 중정이 공안정국을 조성하고자 사건의 실체를 조작하였다는 의혹.
4.김대중 납치사건(73.8.) 박정희 연관
-73년 유신체제에 반대하며 일본에 체류 중이던 야당 지도자 김대중을 납치한 사건으로 이후락 전 중정부장이 주도적으로 개입했다는 의혹.
5.김형욱 실종사건(79.10.) 박정희 연관
-김형욱 전 중정부장이 해외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에 반대하는 활동을 벌이다 파리에서 실종된 사건으로,중정이 살해했다는 의혹.
6.KAL 858기 폭파사건(87.11.)
-87년 대통령선거 국면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안기부가 KAL858기 폭파를 자작했다는 설.
7.남한조선노동당 사건(92.10.)
-안기부가 92년 대선을 앞두고 고문을 통해 사건의 실체를 조작,과장했다는 의혹.


국정원 발전위가 선정한 7대 의혹사건중 5개가 당시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와 관계가 있었다는 사실을 보면, 왜 박근혜 대표가 국정원 진실과 개혁에 발끈했는지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국정원 댓글과 NLL 관련 의혹에 대해서는 재발 방지 노력을 한 뒤 더 이상 소모적인 논쟁이 없어야 한다면서 '정치권에서 국민들에게 NLL 수호 의지를 분명하게 해서 더 이상의 논쟁과 분열을 막아야 한다고 봅니다'라고 밝혔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소모적인 논쟁'이라고 말하면서 또다시 'NLL 수호의지'를 들고 나왔습니다. 물타기와 NLL 활용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발언이었습니다.

18대 대선에서 'NLL 논쟁'을 조장하고 가장 이득을 본 사람이 '박근혜' 대통령 본인이었습니다. 이것을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박근혜 대통령이 과연 선거 때마다 자신들을 도와줬던 국정원 개혁을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습니다.

국정원은 대통령 직속기관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대통령의 의지가 중요합니다. 또한, 국정원 조직이 민주주의 원칙에 위배되는 경우, 대통령의 지시도 거부할 수 있는 '조직의 가치'가 필요합니다.

결국, 국정원 개혁은 대통령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습니다. 박근혜 대툥령은 '국정원 셀프 개혁'을 요구했습니다. 아마 선거 때 다시 국정원 정치 공작이 벌어져도, '나는 국정원에 셀프 개혁을 요구했고, 그들이 하지 않았다'라는 변명이 나올 듯합니다.

<국정원 셀프 개혁- 새누리당 10년 집권>을 주장하는 박근혜 정부가 있는 한, 대한민국의 '국정원 흑역사'는 계속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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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핵 사고 나면, 350만 명 대피·국가" 파산

 

[좌담] "송전탑 안전성 사업자가 입증해야"

남빛나라 기자(정리)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07-09 오전 7:33:31

 

 

지난 5월 20일 한국전력이 밀양 765킬로볼트 송전탑 공사를 재개하면서, 경상남도 밀양에 전국의 이목이 쏠렸다. 한국전력이 고 이치우(당시 74세) 씨의 분신자살 이후 공사를 중단한 지 8개월 만에 다시 시작된 싸움이었다. 한국전력과의 대치 과정에서 고령의 주민들이 연이어 부상을 입었다. 밀양은 말 그대로 전쟁터가 됐다.

합의점을 찾고자 국회와 산업통상자원부가 나서 '전문가 협의체'를 구성했지만 결국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좌초됐다. 모든 것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셈이다.

10년을 향해가는 갈등은 왜 갈수록 깊어지고 있으며 해결의 방향은 어디에 있을까. 3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교동 프레시안 회의실에서 밀양 송전탑 사태의 처음과 현재를 짚어보는 좌담회가 열렸다. 우희종 서울대학교 교수가 사회를 맡고 환경법 전문가 전재경 박사와 장하나 민주당 의원이 참석했다.

이번 좌담회는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가 주최하고 프레시안과 불교생명윤리협회가 후원했다. 다음은 두 시간 동안 진행된 대화의 주요 내용이다. <편집자>

 

ⓒ프레시안(최형락)


'생명권'의 문제…한국 전자파 기준 833밀리가우스 vs. 스웨덴은 2밀리가우스

전재경 : 최근 밀양 송전탑 사건은 보상 중심으로 이야기가 흘러가고 있다. 지난 1998년 과천 송전탑 문제가 불거졌을 당시에는 보상 문제로 가면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해서 바로 생명권의 문제를 제기했었다.

장하나 : 주민들은 보상을 바라지 않는다. 국회에서 '송·변전 설비 주변 지역의 보상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을 '밀양법'이라고 명명하면서 송전탑 보상액을 현실화하겠다고 나섰다. 이러면 마치 밀양이 보상을 더 많이 받기를 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밀양의 할머니, 할아버지들께서는 일단 기본적으로 사시던 곳에서 계속 살고 싶어 하신다. 정주생활권(定住生活圈)을 지키고 싶으신 것이다.

송전탑이 밀양에 들어서면 밀양이 과연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인지가 쟁점이다. 많은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제시하지 않고 한편으로는 은폐도 하는 한국전력의 행태를 보며, 주민들이 많이 분노한다.

헌법에서 보장하는 생명권은 말 그대로 생존할 권리다. 송전탑이 들어서는 지역에서 주민들이 '못 살겠다'고 외치는 것은 단순히 생활이 불편해졌다는 뜻이 아니라 바로 이 생명권이 침해받고 있다는 비명이다. 가장 큰 문제는 송전탑이 내뿜는 전자파다.

밀양 주민은 고압 송전선로에서 발생하는 전자파가 국제암연구소에 의해 2B 등급(발암 가능)으로 분류된 점 등을 근거로 전자파의 위해성을 우려하고 있다. 이에 한국전력은 휴대전화를 사용할 때 방출되는 전자파 때문에 휴대전화 역시 2B 등급으로 지정됐다는 점을 들어 주민들의 우려가 과장됐다고 반박했다. 결국 논란은 '과장된 우려'와 '지나친 안심' 간의 대결 구도가 됐다.


전재경 : 과학자들은 '내 아파트 아래층에 전등이 어디 달렸는지를 확인하고 내 침대의 위치를 결정하라'고까지 한다. 저주파 전자기파가 지속적으로 우리 몸의 바이오리듬을 교란시킨다는 것이다.

장하나 : 한국은 전자파 인체 안전 기준을 833밀리가우스로 정했다. 이는 고농도 전자파에 단시간 노출된 경우를 기준으로 정한 수치다. 그런데 이것을 기준으로 송전탑이 내뿜는 전자파가 안전하다고 여론을 호도하고 있다. 스웨덴과 미국 국립방사선방호학회의 기준은 2밀리가우스고 네덜란드는 4밀리가우스다.

밀양 송전탑 바로 아랫부분이 22밀리가우스쯤이다. 밀양 송전탑에서 100미터 정도 떨어지면 3.2밀리가우스다. 상황이 이런데, 833밀리가우스라는 말도 안 되는 수치를 들이대는 것은 국민에 대한 사기다.

환경부는 송전선과 거주지 거리가 100미터 이내인 초등학생들의 멜라토닌과 성장 호르몬 분비량이 유의하게 낮은 수준으로 나타났다고 발표한 바 있다. 환경부는 이런 사실을 알고 있지만 산업통상자원부, 기획재정부 등 힘센 정부 부처의 눈치만 보고 이런 내용을 국민에게 알리지도 못한다.
 

 

"송전탑 건설자들이 안전성 입증해야"

전재경 : 일반인들이 이 논쟁에 빠지면 끝이 없다. 송전탑 건설에 찬성하는 쪽도 만만치 않은 반론을 펴낸다. 환경이나 생명 문제에서는 인과 관계가 입증되기까지는 굉장히 많은 세월이 필요하다. 또 그 많은 세월에 걸쳐 인과 관계가 입증된다 해도 과학적 데이터에 대한 논쟁이 여전히 벌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송전탑이 인체에 전혀 해롭지 않다는 입증 책임을 건설하는 쪽에다 돌려야 한다. 송전탑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송전탑이 해롭다는 것을 입증하기 시작하면 승산이 없다. 입증 책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개발하고 싶은 쪽이 해롭지 않다고 입증해야 한다.

그래서 밀양 주민들이 지중화(송전 선로를 땅에 묻는 방식)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역시나 한국전력은 엄청난 공사 비용을 제시하며 밀양에서 지중화는 불가능하다고 아예 입을 막고 있다.

한국전력은 밀양 구간을 지중화하면 2조7000억 원이 소요된다고 밝혀왔다. 이를 두고 지역 주민은 한국전력이 공사 비용을 과다하게 측정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며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그러나 한국전력은 여전히 지중화는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전재경 : 주민들이 765킬로볼트 송전탑을 세우지 말고 345킬로볼트로 세우라고 하면 한국전력은 '345킬로볼트 송전탑은 송전 손실이 높다'고 한다. 사실 과천 사례에 비하면, 765킬로볼트를 345킬로볼트로 바꾸라는 것도 송전탑 사업자가 고마워할 일이다. 과천은 345킬로볼트도 못 오게 하지 않았나. 765킬로볼트를 계속 고수하는 것은 협상의 여지를 스스로 차단하겠다는 의미다.

한국전력은 전압이 낮을수록 장거리 송전에서 전기가 손실되니까 이를 막기 위해서 765킬로볼트 송전탑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대륙을 횡단하는 그런 큰 나라에서나 통하는 얘기다. 겨우 밀양에서 영남권에 송전하는 데는 765킬로볼트가 필요하지 않다.

그런데도 한국전력이 765킬로볼트를 고집하는 이유는, 345킬로볼트로 하면 전력 손실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이 죽고 산다는데 전력이 좀 손실되면 어떠냐. 수돗물은 땅속에서 흘러서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아서 그런지 몰라도, 수돗물은 수없이 흘려보내면서도 전력은 조금이라도 손실되면 안 된다고 아우성이다.
 

▲ 전재경 박사. ⓒ프레시안(최형락)


강정과 밀양이 오버랩…밀양 송전탑 반대하면 좌파?

장하나 : 한국전력은 신고리 3·4호기의 건설에 맞춰서 밀양 송전탑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한국전력은 2000년 1월부터 송전탑 건설 작업에 착수했으나 마을 어르신이 이 사실을 최초로 인지한 것은 2005년이었다. 그동안은 내가 사는 마을이 송전 선로 경과지인지 알지도 못하고 지냈다. 2005년 8월에 첫 설명회가 있었는데 약 40명만이 참여할 정도로 비밀리에 이뤄졌다. 이렇듯 처음부터 절차적·행정적 문제가 있었다.

지금 70, 80되신 분들이 8년째 싸우고 계신다. 아침부터 한 시간 넘게 기다시피 산에 올라가신다. 용역의 모욕적 폭언과 폭력에 늘 노출되어 있다. 결정적으로 고 이치우 어르신의 분신 사건이 이 오래된 문제에 국민들이 관심을 갖도록 바꿨다.

강정과 밀양이 오버랩된다. 주민들을 국민이 아니라 우매한 사람 취급하며 (국가가) 행정을 진행한 것이 똑같다. 언론은 계속 '주민들이 보상을 원한다', '외부 세력이 와서 이유 없이 투쟁에 불을 지핀다'고 보도한다. 강정이나 밀양이나 똑같은 패턴이다. 밀양 송전탑에 반대하면 좌파가 되는 어이없는 구조다.

주민들이 제시한 대안…기존 선로 편입 계통

밀양 송전탑과 관련한 현안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지난 5월 29일 국회 산업통자원위원회와 산업통상자원부는 '밀양 송전탑 전문가 협의체'를 가동키로 했다.

한국전력 추천 3인, 주민 대책위원회 추천 3인, 국회 추천 3인(여당 1인, 야당 1인, 여·야 합의 1인) 등 9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전문가 협의체는 애초에 최종 보고서를 내놓기로 했었다. 이 보고서를 바탕으로 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회가 강제성을 가진 해결책을 제시하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한국전력의 비협조적인 태도에 대한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5일에는 야당 추천 위원과 대책위원회 추천 위원들이, 한국전력 추천 위원들의 보고서가 한국전력의 자료를 표절한 것이라는 의혹을 제기했다. 급기야 8일 백수현 위원장(동국대 교수)은 대책위원회·야당 추천 위원들의 동의 없이, 공사에 찬성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국회에 제출하며 논란을 일으켰다.


장하나 : 산업통상자원부가 국회가 제시한 중재안에 사인하면서 전문가 협의체를 구성했다. 전문가 협의체에 밀양 주민들이 요구한 사항을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신고리 3·4호기까지의 생산전력은 신양산~동부산, 신울산~신온산 구간의 송전 선로로 보내라는 것이다. 이렇듯 기존의 송전 선로에 계통 편입시켜서 처리 가능하다는 것이 주민들의 주장이었다. 또 이후 신고리 5~8호기까지 건설되려면 최소한 10년은 기본으로 걸리니까 그 사이에 지중화 문제를 다뤄달라고 요구했다.
 

▲ 장하나 의원. ⓒ프레시안(최형락)


"한국도 이미 후쿠시마 사태를 겪었다"

장하나 : 나의 관점은, 밀양 송전탑은 아예 필요 없다는 것이다. 신고리 5~8호기를 건설하면 안 된다. 지금 핵발전소 비리가 줄줄이 터졌는데 국가정보원이나 갑을 관계로 신문 지면이 꽉꽉 차다 보니, 이것(핵발전소 비리)도 국기 문란 사건인데 한 달여간 묻혀버렸다. 지금 핵발전소 비리 문제를 어떻게 이슈로 끌어올릴지 고민하고 있다.

왜 이렇게 한국 핵발전소가 고장이 잦은지, 얼마나 위험한가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들이다. 이것에 대해 이야기하면 밀양 송전탑 자체가 필요 없어진다. 밀양 주민들이 하는 말이, '왜 무분별하게 전력을 사용하는 서울 사람들에 의해 우리가 고통받아야 하는가'이다. 이제 핵발전소를 멈추자는 인식이 형성되는 데 밀양 주민이 중요하다.

전재경 : 탈핵 문제는 정치권이 역할을 해줘야 한다. 탈핵하자면 30년 정도의 계획을 가지고 어떻게 대체 에너지를 가질지에 대한 구상을 마련해야 한다.

장하나 : 밀양 송전탑에 반대한다고 하면 찬성 측 특히 산업통상자원부는 전력 수급을 어떻게 할 거냐고 질문한다. 좀 더 발전된 단계의 신·재생 에너지 전략을 도입해야 한다. 제5차 전력 수급 기본 계획에는 2024까지 신고리 5~8 호기를 건설한다고 나와 있는데 이에 대해 다른 방향을 모색하자.

핵발전소는 안 된다. 밀양도 문제지만 전력 수요자들의 마음 변화가 중요하다. 송전탑 건설로 고통받는 분들이 소수가 아니라, 우리도 언제든지 피해자가 될 수 있다.

한국도 이미 후쿠시마 사태를 겪었다. 지난해 2월 고리 1호기에서 정전 사고가 발생했을 때 노심이 녹지 않은 이유는 당시 계획 예방 정비 기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날 사고가 났으면 어떤 일이 벌어졌겠나. 후쿠시마 사고를 기준으로 반경 30킬로미터를 대피 범위로 잡으면 350만 명이 대피해야 한다. 이동도 못 하고 갈 데도 없다. 그 모든 난민을 수용할 수도 없다.

피폭당해서 죽는 게 아니라 대한민국이 파산해서 다 죽을 수 있다. 이런데도 핵발전소를 짓자는 주장은, 안전에 대해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남빛나라 기자(정리)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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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공단의 국제화’

 

 
 
<남북대화>자루 속에 보란듯이 집어넣을 송곳일 것인가?
 
한성 기자
기사입력: 2013/07/08 [20:38] 최종편집: ⓒ 자주민보
 
 


▲개성공단 재가동, 과연 현실화될 것인가?

7월 7일 개성공단 관련 남북 당국 간 실무회담에서 합의문이 나왔을 때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환호했다. 개성공단 시설점검과 완제품 및 원부자재 반출, 설비반출 등에 합의를 하는 성과를 남겼기 때문이었다.

정치적으로는 2008년 2월에 당국간 합의가 나온지 5년 5개월만에 나온 정부당국간의 합의라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여기에는 실무회담의 성과가 최근 남북당국회담이 무산된 어려운 환경을 딛고 남북대화에 새로운 물꼬를 틀수도 있다는 기대가 섞인 것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남북관계에 밝고 그 남북관계의 속성을 잘 아는 사람들은 다른 한편으로는 우려를 동시에 가질 수밖에 없었다. 개성공단 정상화문제가 험로를 걷게 될 것이라는 걱정 때문이었다.

실무회담 합의문에는 "준비되는 데 따라 개성공단 기업들이 재가동하도록 한다"는 대목이 있다. 매우 중요한 사항이다. 그러나 이 문항은 중요한 만큼의 갈등 소지를 안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준비되는 데에 따라’ 라는 대목이 그것이다.

그 ‘준비’가 무엇을 의미하느냐하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 준비를 두고 설비 점검과 같은 실무적인 절차가 마무리되는 대로라는 것으로 보면 문제는 없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김형석 통일부 대변인은 8일 정례브리핑에서 "이 부분은 원칙적인 합의"라면서 "그동안 있었던 가동 중단 등의 상황이 재발되지 않는 조건이 마련되고 개성공단의 발전적 정상화가 되는 과정에서 (재가동이) 이뤄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는 우리정부가 갖고 있는 공단정상화 조건이 재발방지책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설비를 점검한다고 해서 바로 재가동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통일부당국자의 발언이 유독 돋보였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발전적 정상화’ 개념에 대한 내용까지도 담고 있는 말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공단재가동의 조건이 무엇인지에 주목을 돌렸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우리당국은 지난 7.7실무회담에서 개성공단 정상화 조건으로 △개성공업지구 내 신변안전 및 재산보호, △통행, 통신, 통관 등 3통 문제의 제도적 보완 문제를 제시했다. 구체적으로는 △북의 일방적 조치로 인한 피해에 대한 책임 있는 입장표명과 재발방지 보장, △완제품 및 원부자제 조속 반출, △물자반출을 위한 우리측 인원 출입경 보장 및 통신선 조속 복구, △시설 장비 점검 병행 등을 요구한 것이다.

언뜻 보면 개성공단중단사태의 책임소재 문제가 이후 회담에서 문제가 될 것처럼 보인다. 북 또한 마찬가지로 개성공단사태의 책임을 우리당국에게 떠넘기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에 있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실무회담이 타결되고 10일 후속회담을 예고하고 있는 조건에서 정부당국자가 언론에 흘린 개념 하나가 있다. ‘개성공단의 국제화’라는 개념이 그것이다. 정부당국자들이 ‘발전적 정상화’라는 개념에 연동시키면서 자주 사용하고 있는 개념이다. 유별 날 정도로 강조되고 있기도 하다. 언론들은 곧 바로 반응했다. 마치, 무슨 의도인지 알겠다는 듯한 모양새였다.

▲ ‘개성공단 국제화’ 개념은 이미 준비된 것일까?

"외국기업이 유치될 때, 그래서 개성공단이 국제화될 때 함부로 어느 날 출입이 금지된다거나 세금을 갑자기 올린다거나 하는 국제기준으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이 나올 수 없다"

지난 3월 말 통일부 업무보고 때 박근혜대통령이 했던 말이라고 연합뉴스가 8일 보도했다. 연합뉴스는 같은 꼭지에서 새누리당 황우여 대표가 지난 5일 국회에서 개성공단 입주기업 대표단과 만난 자리에서 "개성공단은 국제 기준에 맞는 실질적인 경제특구 자유지역으로 완벽히 보장돼야 한다"고 말했다면서 황대표의 언급은 ‘개성공단 국제화’와 관련된 박대통령의 의중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라는 설명을 덧붙혔다.

이것들은 개성공단의 ‘발전적 정상화’가 결국 ‘개성공단의 국제화’를 의미하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들은 아울러 정부당국이 ‘개성공단 국제화’를 언론플레이를 통해 개성공단 정상화의 조건으로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6·15의 정신에 따라 건설된 민족공동의 경제개발지구를 국제화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개성공단의 국제화’와 관련하여 북이 지난 5월 15일 중앙특구개발지도총국 대변인을 통해 주장한 내용이다. ‘개성공단 국제화’ 개념에 대해 얼마나 강력하게 반발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지난달 4일 조선중앙통신 논평을 통해서도 새정부의 '개성공단 국제화' 구상 등에 대해 "외세를 끌어들여 개혁, 개방에 의한 '제도 통일' 준비를 다그쳐보려는 범죄적 기도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면서 남북관계 개선보다는 대결과 흡수통일을 위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북이 ‘개성공단 국제화’에 대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곳은 다른 곳이 아닌 정부당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당국에서 ‘개성공단 국제화문제’를 개성공단의 ‘발전적 정상화’의 조건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개성공단의 재가동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찬물을 끼얹는 행위,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걱정거리를 안겨주는 행위라고 했다. 자주통일진영의 한 인사가 어두운 낯빛으로 한 지적이다. ‘발전적 정상화’니 ‘개성공단의 국제화’니 하는 것들은 자루 속에 숨겨진 송곳 같은 것이라는 설명까지 덧붙혔다.

그리고는 “박근혜 대통령이 최근 외국에 나가 북의 핵.경제병진노선을 비판하는 발언을 하면서 북이 강력하게 반발할 것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을 번히 알면서도 그런 발언을 연이어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고 반문했다.
대결의 자세인지 대화의 자세인지를 사람들은 상식을 갖고 판단하게 된다고 했다. 자루에 들어있는 송곳은 대화의 진정성을 의심하기에 충분하다는 지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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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관계는 승패 없어…실무회담 성공적"

 

 

[정세현의 정세토크] '북한 비핵화' 고집해선 '북핵 제거' 못 한다

임경훈 서해문집 편집인(정리)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07-08 오전 8:01:11

 

지난 7일 남북 실무회담이 합의 타결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며, 북핵 문제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대화와 협상 쪽으로 흘러가고 있는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고 정세현 원광대 총장이 분석했다. 지난 번 정세토크(6월 23일)에서 6자회담이 임박했다고 분석했던 정 총장은 한국 측이 우리 기업인들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모양새로 북한에 대화를 제의한 것은 이러한 국제적 흐름을 따라잡기 위한 것으로 평가했다.

정 총장은 이어 최근 일부 언론 등에서 한중 정상이 '북한 비핵화'에 합의한 것처럼 보도하고 있는데, 이는 크게 잘못된 것으로 '한반도 비핵화'가 정확한 표현이며 목표라고 지적했다. 한국을 비롯해 미.중.러.일 등 동북아 관련국들이 북한 핵을 용인할 수 없다는 '북핵 불용' 입장은 동일하지만, 북한 핵만을 제거하겠다는 '북한 비핵화'로는 이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이다. 미국 핵무기에 의한 대북 공격의 가능성까지도 제거한 '한반도 비핵화'를 통해서만 북한이 핵개발과 핵보유를 포기할 것이라는 지적이다.

그는 한국 입장에서는 '북한 비핵화'를 추구하고 싶겠지만, 북한과 중국 입장에서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향후 전개될 6자회담에서 우리의 정책 목표를 보다 현실성 있게 조율해야 할 것이라고 충고했다. 다음은 지난 7일 오후 있었던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편집자


남북 당국실무회담..."비교적 성공적이다"

프레시안: 6일 열린 남북실무회담이 진통 끝에 합의를 이루고 타결됐습니다. 지난 달 남북당국 회담이 결렬된 것과 비교되는데, 이번 타결의 배경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정세현: 이번에 북한이 개성공단 기업인 및 관리위원회 인원의 방북을 허용하겠다는 입장을 밝히자 우리 측에서 의제를 확장해서 당국 간 실무회담을 전격적으로 제안하지 않았습니까? 아마도 미중, 한중 정상회담 등을 거치면서 한반도 정세가 대화 분위기로 가고 있는 커다란 흐름을 읽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아주 다행스런 일입니다. 이번 회담의 결과도 그런대로 잘됐다고 봅니다. 6일 낮에 시작해서 오늘(7일) 새벽 4시 5분경에 끝났는데 합의 내용을 보면 순서대로 문제를 풀어나가기로 한 것으로 보입니다. 개성공단 정상가동에 대한 얘기는 비교적 합의하기 수월한 문제라 먼저 진행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부가 개성공단을 국제적 규범에 부합하는 공단으로 발전시킨다는 계획을 얘기했는데, 그 역시 차차 진행하면 될 문제입니다. 그런 식으로 차기 회담을 합의해가는 것 자체가 상징성이 크고, 남북 대화의 모멘텀이 유지되면서 접촉과 대화의 격이 올라가게 될 것이라고 봅니다.

남북대화에서도 중국말로 소위 '꽌시(關係, 연줄)'가 중요합니다. 이번에 우리 측과 북측 회담 대표로 서호 수석대표와 박철수 단장이 발표되는 걸 보면서 이번 회담이 잘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두 분 다 과거 남북 실무접촉에서 만났던 인연이 있고 2009년에는 개성공단을 제대로 운영해가기 위한 남북 공동 해외공단 시찰을 함께 가기도 했습니다.

박철수 단장은 개성공단을 담당하는 중앙특구개발지도총국 부총국장으로 그쪽에서도 많이 활동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 쪽 서호 수석대표도 그동안 장관급 회담 등 남북대화에서 여러 차례 수행원 역할을 경험한 뒤 나중에 실무회담 대표로 일하는 등 남북협상 경험이 많습니다. 꽌시가 이미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번에 어떤 식으로 성과가 나올 것이라 예상이 되었던 것이죠. 앞으로도 회담 대표를 정하는 데 있어서 기왕이면 이번처럼 했으면 싶습니다. 그러려면 남북이 사전에 조율을 좀 해야겠지요.

이런 식으로 대화가 잘 진행된다면 우리 쪽이 주장하는 개성공단 운영중단 재발방지 대책도 나올 것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북쪽이 난색을 보였지만, 협상하다 보면 적절한 선에서 합의를 하게 될 것입니다. 남북관계에서 그동안 비슷한 상황이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여러 차례 의견 조율을 통해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자는 데 서로가 의견을 같이 했다"는 식으로 합의를 하곤 했었습니다. 스포츠에는 완승과 완패가 있지만, 남북관계에서는 그게 힘들죠. 우리는 완승을 하고 저쪽을 완패시키겠다는 생각으로 하면 대화가 어렵습니다. 서로가 조금씩 양보를 하면서 관계를 개선시켜 나가야 합니다.

▲ 남북 양측은 이날 16시간의 마라톤 회의 끝에 10일 개성공단 점검 및 정비를 진행한다는데 합의했다. 양측은 종결회의에서 각각 합의서를 2부씩 작성했다. 사진은 합의서 서명 후 악수하고 있는 서호(오른쪽)남북협력지구지원단장과 북한 중앙특구개발지도총국 박철수 부총국장 ⓒ공동취재단


결렬과 타결 사이..변화된 한반도 정세

프레시안: 6월의 당국회담은 결렬됐고 이번 실무회담은 타결된 배경에는 그동안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에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할까요? 지난번 인터뷰에서 미국이 북한과 직접 대화하기로 결정한 것으로 보이고 이에 따라 6자회담 재개도 머지않았다고 분석하셨는데요.

정세현: 지난 달 남북 당국회담이 무산되고 난 뒤에 북한이 미북 당국회담을 제의했고 한중정상회담이 있지 않았습니까? 한중정상회담 이후 제가 신문을 보는데 청와대 관계자인가 외교부 관계자인지 정확이 기억이 안 나지만 백그라운드브리핑을 하면서 6자회담이 수개월 내에 열릴 것 같다는 얘기를 했다는 내용이 짤막하게 들어 있었습니다. 그 뒤로는 더 이상 관련 기사가 나오지는 않았습니다.

'원칙'과 '진정성'을 강조하면서 일종의 대북압박 정책을 펴고 있는 박근혜 정부 관계자가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은 회담 재개를 위한 모종의 물밑 움직임이 있기 때문이라고 봐야지요. 정부 관계자가 6자회담이 수개월 내에 열릴 것이라고 말한 건 단순한 희망사항이 아니라 미중, 한중 정상회담 등을 거치면서 그러한 분위기를 알아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최근 북한의 움직임과 관련해서 미중 간 교감이 있었다고 봐야 하는데, 한중정상회담을 통해 그런 정황을 접하게 된 정부 사람이 6자회담이 곧 열리는 것 아닌가 하고 판단을 하고 그것을 의도치 않게 말해버린 것 같아요. 나중에 거둬들였는지 더 이상 크게 보도는 되지 않았지만, 그런 것들이 가끔은 정세를 전망하는 데 있어서 판단의 중요한 기초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번 남북 실무회담 제의도 타이밍이 절묘했습니다. 기업들이 장마철을 앞두고 기계나 부품 손질 혹은 설비 이전을 위해 우리 정부에는 방북 승인을, 북한에는 신변안전 및 무사귀환을 보장하라는 요구를 3일에 했습니다. 바로 북측에서 방북을 허용하겠다는 발표를 했죠. 그러자 다음날 오전 10시 30분에 바로 우리 측에서 실무회담을 제의했습니다. 그리고 오후 5시께 회담 개최에 동의한다는 북한의 답변이 왔습니다.

겉으로 보면 급조된 회담 같지만 바닥에서는 이를 위한 상당한 준비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남북간 대화 재개를 위한 적절한 계기가 없던 차에 우리 기업들이 문제제기를 함으로써 시동이 걸렸고 기업들의 요구와 북한의 입장 전달이 있은 다음날 아침에 바로 대북 제의가 나갈 수 있었던 거죠. 또한 우리 정부가 김계관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의 러시아 방문이 심상치 않다고 보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렇게 남북대화가 되고 이것을 명분 삼아 미북대화가 어떤 식으로든 시작되면서 미북 간에 6자회담의 판을 어떻게 짤 것인가에 대한 얘기가 진행될 것입니다. 최근 북한이 대미 채널을 담당했던 한성렬 유엔 주재 북한대표부 차석대사를 불러들이고 그 자리에 장일훈 북한 외무성 국제기구국 과장을 보냈는데, 장일훈 과장은 다자외교 전문가라고 합니다.

북한이 작년 4월 헌법을 개정하면서 '핵보유국'임을 명시, 공표하고 이를 인정하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우리는 물론이고 미국과 중국, 일본도 모두 인정할 수 없다고 했죠. 북한은 '과거와 같은 6자회담은 의미 없다, 핵군축회담으로 바로 건너가야 한다'는 식으로 얘기하고 있습니다. 북한이 다자외교 전문가를 뉴욕으로 보낸 것은 핵무기를 갖고 있는 미‧중‧러‧북의 회담판을 벌이겠다는 포석이 아니가 싶습니다.

저는 협상전략상 북한이 이런 주장을 했다고 보지만, 상당히 오랫동안 버티리라고 봅니다. 이것이 협상전략으로 보면 바로 '강탈적 요구'라고 하는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대가를 내놓으라고 우기다가 상대방의 양보를 받아낸 뒤 이 요구를 거둬들이는 수법이죠. 북한이 미국을 상대로 핵군축 회담을 하자고 하는 데 핵무기 7000~8000개를 가지고 있는 나라와 2~3개 가지고 있는 나라가 무슨 핵군축회담을 한단 말입니까? 그러나 그런 식으로 처음부터 세게 불러놓고 나중에 깎아 주면서 자기네가 챙길 것을 챙기겠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외교용어로 fallback position(만일의 상황을 위한 준비)라고 할 수 있죠.

북한이 미국에게 당국회담을 제안하면서 자신들의 핵보유는 '전략적 선택'이라고 했어요. '전략적 선택'이라는 표현은 값만 높게 쳐주면 내려놓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한미정상회담 후 우리 정부가 북핵을 어떤 경우든 용인할 수 없다는 식으로 얘기하고, 한중 간에도 북한의 비핵화가 완전 합의된 것처럼 얘기하니까, 북한은 거기에 대응하며 핵은 절대로 포기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것은 협상전략의 일환이라고 봅니다. 미국에게는 '전략적 선택'이라고 했지만, 한국 정부에게는 절대 포기할 수 없다며 기를 꺾으려고 한 것이죠.

'북한 비핵화'와 '한반도 비핵화' 혼동해선 안돼

프레시안: 그런데 한중정상회담 보도를 보면 박근혜 대통령은 '북한 비핵화'라고 하고 시진핑 주석은 '한반도 비핵화'라고 말하더군요. 우리 언론에서도 두 단어가 섞여서 사용되는 걸 볼 수 있는데요. 그동안 정 총장께서는 이 둘은 서로 다른 것이라고 여러 번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정세현: '북한 비핵화'와 '한반도 비핵화'는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북한 비핵화'는 북한의 핵무기를 제거하고 핵개발을 저지하자는 얘기지만, '한반도 비핵화'는 한국을 포함한 한반도 전체에서 핵무기가 반입, 배치되거나 사용되는 것을 막자는 얘기이니까요. 1991년 말에 남북이 합의한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은 그런 뜻이었습니다.

중국이 '북한 비핵화'에는 합의하지 않았을 겁니다. 중국으로서는 미국과 얘기할 때도 '한반도 비핵화'라고 얘기했을 거예요. 그런데 우리 정부는 한반도 비핵화라는 표현이 갖는 의미가 한미동맹의 약화로 연결된다고 생각하니까 될 수 있으면 북한 비핵화라고 얘기하려는 성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북한은 "조선반도 비핵화(한반도 비핵화)가 '수령'님과 '장군'님의 유훈"이라 하는데, 조선반도 비핵화는 "미국이 우리를 핵으로 공격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핵을 내려놓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핵을 폐기시키고 싶으면, (미국 본토에 갖고 있는 핵에 대해서는 시비를 안 걸겠지만) 한반도 해역에 출몰하는 함정들에 탑재된 핵무기로도 우리를 공격하지 않겠다는 보장을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반도 비핵화. 이게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미국이 몇 개 안 되는 북한의 핵무기를 없애기 위해서 동북아에서의 자신의 핵 능력을 약화시킨다는 건 쉽지가 않죠. 그것은 한미동맹 차원에서 제공하는 핵우산의 크기를 줄이는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미국이 한반도 해역을 드나드는 거대 항모, 군함들에 핵무기를 탑재하는 이유가 북한 때문만은 아닙니다. 중국, 러시아까지도 견제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죠. 그런 점에서 한반도 비핵화는 동북아시에서의 미국의 군사이익과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따라서 미국이 북한의 핵무기를 폐기시키기 위해서 한반도 해역에서 핵무기를 싣고 다니지 않겠다는 약속은 하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다만 미국이 먼저 북한을 공격하지 않겠다는, 즉 핵 선제공격을 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하는 선에서 북한의 비핵화를 달성할 수는 있으리라고 봅니다. 그 내용이 평화협정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죠. 물론 미국이 그렇게까지 해줄지는 두고 봐야 합니다만, 그런 식으로 최소한 선제 핵공격을 않겠다는 것이 평화협정 안에 들어가야 북한의 비핵화를 끌어낼 수 있을 겁니다. '조선반도 비핵화'에 약간의 개념 수정을 해서 타결을 볼 수 있다는 것이죠.

지금 현재 혼란스러운 것은 정부 측과 일부 언론이 한국, 중국, 미국, 일본 등 모두가 북한 비핵화에 합의했다는 듯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북한은 북한대로 미국의 핵우산 때문에 한반도 비핵화 얘기를 꺼냈지만, 중국 입장에서는 북핵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경우 미국이 북한을 핑계로 핵전력 차원에서 중국을 위협할 수 있기 때문에 한반도 비핵화를 바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미국의 대북 선제공격을 않겠다는 약속 없이 북한만의 비핵화에 대해서 중국은 절대 합의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전인수로 해석해서 북한 비핵화란 표현을 써서는 안 됩니다. 국민들에게 정확히 알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앞으로 협상테이블에서 이 문제를 풀어나갈 때 우리 자신이 그런 개념 혼란에 빠져서 제대로 대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홍보 논리와 정책 논리가 섞이면 안 되는 것이죠. 정책 논리는 야박할 정도로 냉철해야 하고 우리 자신의 문제점부터 제대로 파악한 토대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물론 한국, 미국은 물론이고 중국, 러시아, 일본까지도 '북핵 불용'이란 입장은 같습니다. 북한이 핵무기를 가져서는 동북아외 평화와 안정을 유지할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북핵 불용'을 강조한다고 해서 '북한 비핵화'가 달성되는 건 아닙니다. 한반도 비핵화라는 틀 안에서 북한의 비핵화와 미국이 선제 대북 핵공격을 않겠다는 약속을 맞바꾸는 식으로 접근해야 될 겁니다.

남북 실무회담을 잘 진행해 놓고 북핵문제와 관련해서 이렇게 스스로 개념상의 혼선을 자초하면 안 됩니다. 이런 것들을 잘 정리해 나가면서 앞으로 남북회담과 6자회담, 또는 4자회담 전략을 잘 수립해 나가야만 박근혜 정부의 신뢰프로세스가 실현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전협정 60주년과 평화협정

프레시안: 남북 실무회담도 긍정적 성과를 낳았고, 대화와 협상의 분위기가 익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앞으로 어떻게 전망하시는지요?

정세현: 지난 번에도 얘기했지만 오바마 대통령이 G8 정상회의에 가는 도중 비행기에서 박근혜 대통령에게 전화를 했다는 건 심상치 않은 일입니다. 나아가 한중정상회담 이후 이번에 남북 실무회담이 타결된 것은 6자회담이라는 대화와 협상의 큰 마당으로 들어가기 위한 작은 문을 연 것으로 봐야 합니다.
 

▲ 정세현 원광대 총장 ⓒ프레시안(최형락)



7월 27일이 정전협정 6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북한으로서는 금년 7.27 이후 평화협정을 체결해야 한다는 공세를 대대적으로 전개할 것입니다. 과거 1970년대 초 븍한이 미북평화협정을 체결하자고 할 때는 한반도 전쟁상태를 종식하자는 차원의 제안이었습니다. 북한이 핵 실험에 성공한 지금은 북미수교, 한반도 비핵화와 연결되는 문제가 되었습니다. 덩어리가 커진 것이죠. 미북수교를 하려면 법적으로 평화협정 체결을 해야만 합니다. 정전 상태, 즉 사실상 전쟁 상태에서는 수교를 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수교를 하려면 평화협정을 체결해야 합니다. 지금 북한이 둘을 한꺼번에 받기 위해 핵카드를 들고 나온 것입니다.

지금 평화협정, 북미 수교, 한반도 비핵화 등 세 가지가 엉켜 있어 쉽지는 않은데 한반도 비핵화를 위해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핵우산을 완전 철거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평화협정에 "미국이 북한에 대해 선제 핵공격을 않겠다"는 정도의 약속은 넣어주는 선에서 마무리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거기까지도 상당한 시간이 걸리겠죠.

앞으로 북한 측에서 협상을 위한 대대적 공세가 계속될 것이고 그러면서 미북 접촉과 6자회담 재개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오리라고 봅니다.

 
 
 

 

/임경훈 서해문집 편집인(정리)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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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가 흙으로 1만2천년, 북한산 백운대 토양 보호 나서

 

바위가 흙으로 1만2천년, 북한산 백운대 토양 보호 나서

 
조홍섭 2013. 07. 07
조회수 1443추천수 0
 

북한산 정상 바위가 풍화돼 생성된 토양 오롯이 남아

등산객 밟아 쉽게 유실, 울타리 두르는 등 시설공사 중

 

buk6.jpg » 북한산 백운대의 바위가 풍화돼 생성된 토양층과 식생이 보호를 받게 됐다.

 

북한산 최고봉인 백운대(해발 836m)에 오르면 바위틈이나 바위가 우묵하게 패인 곳에 흙이 남아있고 이곳에 풀과 키 작은 나무가 자라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산꼭대기의 토양은 어디서 왔을까.
 

굵은 모래가 바람 타고 왔을 리는 없으니, 이곳 토양은 북한산이 처음 땅밑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후 오랜 세월 동안 풍화된 결과임이 분명하다. 적어도 수천~수만년 동안 북한산 정상이 비와 바람, 추위와 더위에 갈라지고 떨어져 나가 형성된 토양이 오롯이 남아 있는 것이다.
 

이처럼 산의 자연사를 간직한 북한산의 주요 바위 봉우리에 남은 토양에 대한 보호 사업이 시작됐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은 7일 백운대에서 암반층의 토양을 보호하기 위한 공사를 벌이고 있다고 밝혔다. 동·식물뿐 아니라 자연사적 가치를 지닌 토양도 본격적인 보전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buk1.jpg » 백운대 산이 깎여 만들어진 토양과 그것을 붙잡아 주는 식생 주변을 보호하는 시설 공사가 벌어지고 있다.

 

buk3.jpg » 백운대 바위틈의 토양층과 식물.

 

북한산은 1억 7000만년 전 중생대 쥐라기 때 한반도 대부분의 지역에서 화산활동이 활발했던 시기 땅속 1만m 지점에서 마그마가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로 굳으면서 산을 이룰 암체가 만들어졌다. (■ 관련기사: 땅밑 1만m서 태어나 나이 1억7천만 살) 이후 지상으로 융기한 화강암 덩어리가 오랜 세월 동안 풍화돼 현재의 산이 만들어진 것이다.
 

공단은 북한산에서 토양이 유실과 퇴적을 반복하면서 1㎝ 쌓이는데 약 200년 정도 걸리는 것으로 추정했다. 백운대 정상 부근에는 토양이 여러 곳에 걸쳐(합계 면적 1200㎡) 약 10~60㎝ 깊이로 발달해 있다. 따라서 단순 계산해도 이곳의 토양이 형성되는 데는 줄잡아 수천~1만 2000년의 세월이 걸린 셈이다.
 

현재 북한산의 높은 봉우리 토양에는 털개회나무, 참조팝나무, 분취, 처녀치마, 금마타리 등의 식물이 고산 생태경관을 이루고 있으며, 새들의 먹이 활동과 은신처 구실을 하는 등 생물다양성에 기여하고 있다고 공단은 보도자료에서 밝혔다.

03043225_P_0.jpg » 라일락의 원종인 털개회나무. 사진=김소영 기자  

 

특히, 이곳에 자생하는 털개회나무는 생물다양성 보존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유명한 사례를 낳기도 했다. 1947년 미국 농무성 직원이 백운대 바위틈에서 자라던 나무에서 종자를 채취해 미국에서 ‘미스킴라일락’이란 이름으로 육종한 뒤 우리나라가 역수입한 역사가 있다.
 

그러나 백운대 정상의 토양은 밀려드는 탐방객 때문에 급속히 유실되고 있다. 신현승 국립공원관리공단 생태복원부 계장은 “등산객이 토양을 밟으면 딱딱해져 그 위의 식물이 죽게 되고, 그러면 식물 뿌리가 흙을 잡아주지 못해 토양이 빗물에 쉽게 씻겨나가는 일이 벌어진다.”라고 설명했다.

 

buk7.jpg » 등산객에 밟혀 나무의 뿌리가 드러나고 토양이 유실되고 있는 백운대 토양층 모습.
 

buk4.jpg » 백운대 토양보호 공사 뒤의 모습.

 

공단은 백운대 위 토양 주변에 울타리를 치고 탐방객이 토양을 밟지 않도록 유도하는 토양유실 방지시설 공사를 하고 있다. 나아가 주변에 자생하는 털개회나무 등 원래 있던 식물을 추가로 심고 토양을 보강하는 훼손지 복원 사업도 벌일 예정이다. 또 이런 토양 보호사업은 북한산의 다른 주요 봉우리인 족두리봉, 문수봉, 대머리바위, 영봉, 보현봉에도 추진할 계획이다.

 

글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사진=국립공원관리공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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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집단' 국정원 보아라...이게 전라도 욕이다

 

[주장] 전라도 사람이 본 국정원 '전라도 비하' 댓글... 비열한 국가권력

13.07.08 08:30l최종 업데이트 13.07.08 09:25l
최지희(backno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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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정원 댓글왕' 국정원 대선개입 규탄 대규모 촛불집회가 열릴 예정인 28일 오후 서울 종로구 동화면세점 앞에서 시민들이 국정원 직원이 불법으로 여론조작하는 모습을 재현하는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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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라'였다. 지금껏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봐 왔던 국가정보원 요원의 모습은 판타지였다. 가족과 연인을 속이면서도 '조국과 민족'을 위한 '비밀특수임무'를 수행하는 정의로운 요원까지는 아니더라도 얼추 그 비슷한 일을 하고 계시는 줄 알았다. 적어도 국정원 직원들이 PC방, 원룸에 박혀서 '쌍욕' 댓글 올리는 업무를 하리라곤 상상조차 못했다.

국정원 댓글, '판타지 코미디 블록버스터'

박장대소 했다. 언론에 보도된 국정원 심리전단 요원들의 범죄일람표(관련기사-"홍어·전라디언들 죽여버려야" 국정원 요원, 하는짓은 '일베충')는 일상에 지친 나에게 큰 웃음을 줬다. 농담이 아니다. 정말 웃겼다. 그야말로 '욕의 향연'이자 '욕의 배움터'였다. 난생 처음 들어보는 욕도 많았다. 욕쟁이 할머니도 울고 갈 국정원 직원들의 작문 수준이 참 우스웠다.

국정원 댓글을 외국어 공부하듯 한 자, 한 자 읽어가다 문득 궁금해졌다. 도대체 이리도 자유롭게 저질 욕을 구사하는 비결은 뭘까. 국정원에는 쌍욕을 지도하는 교육 프로그램이 있나. 아님 욕으로 댓글을 다는 필기시험을 보나.

논술 1.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에 따른 국민들의 대대적인 추모열기를 비판하는 댓글을 종북, 좌파, 전라도와 연결시켜 쌍욕으로 논하시오."

개그콘서트 작가들을 힘 빠지게 하는 코미디의 진수다. 그렇다면 상식을 깨는 국정원의 이러한 '창조'적인 업무는 누가, 왜, 무슨 목적으로 계획하고 지시한 것일까. 이건 그냥 비웃고 넘길 일이 아니다. 국가기관이 대통령 선거 당시 특정 지역과 정치 세력을 비난해 국민 여론을 분열, 조작하는 데 개입했다.

더구나 그 분들은 아무 목적도 없이 행동할 분들이 아니다. 이쯤 되면 국정원 댓글 사건은 판타지와 코미디를 넘어서 블록버스터로 진화한다. 이 엄청난 '판타지 코미디 블록버스터'의 한 가운데에 전라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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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20페이지 분량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 범죄일람표' <오마이뉴스>가 입수한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 범죄일람표'. 검찰이 작성한 것으로 총 2,120페이지 분량이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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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체 없는 '종북좌파 전라도'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국정원이 전라도를 종북, 좌파라는 프레임으로 몰고 간 사실은 놀라운 이야기가 아니다. 굳이 5·18민중항쟁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전라도는 대한민국 '흑역사'의 중심에 있었다. 전라도를 권력의 제물로 삼고 호의호식하는 정치인들을 숱하게 봐 왔다. 슬프지만, 소외와 차별은 전라도의 오랜 벗이었다.

맞다. 난 전라도 사람이다. 어찌 억울하지 않겠는가. 전라도에서 산다는 것이 대체 무슨 대역죄라도 되나. 우리도 열심히 일해서 낸 세금으로 국정원 직원 월급 주는 대한민국 국민이다. 인종차별이라면 세계의 정의로운 지구인들에게 도와 달라 호소라도 하지. 지역차별의 소외는 한이 되고, 분노는 때로 맨주먹이 됐다.

하지만 만약 전라도 사람들이 국정원의 말대로 종북좌파 불온세력이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없을 것이다. 또 전라도 사람들이 그의 한과 분노를 국정원의 주장처럼 폭력적으로 표출했다면, 현재 우리 사회는 분명 다른 모습일 테다.

'빨갱이 전라도인'에서 '종북좌파 전라도인'로 옷을 갈아입은 실체 없는 관념. 관념이 존재를 대신하는 이 실존적 절체절명의 문제를, 전라도 사람들은 평화와 화합이라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풀어 왔다. 그러했기에 민주주의는 우리 삶 속에서 조금씩 싹 틔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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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커뮤니티 사이트 '클리앙'의 한 회원이 "국가정보원이 지역감정 조장했다"며 올린 게시물
ⓒ 클리앙 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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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권력의 비열한 두 얼굴

생색내려는 게 아니다. 분명히 알자는 것이다. 국정원이 기도 안 차는 쌍욕 댓글로 얻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 똑똑히 알고 시시비비를 가려야 한다. 그들이 원하는 것이 국민의 안위인지, 권력 집단의 안위인지 알아야 한다. 국정원이 치졸한 스킬을 동원하며 여론을 조작한 그 목적이 무엇인지 모른 척하지 말아야 한다.

어찌 보면 절호의 기회다. 국정원 댓글 사건은 우리 사회 모순의 집결체나 다름없다. 이처럼 정치권력의 검은 속내를 적나라하게 목격하기란 쉽지 않다. 겉으론 '국민행복' 운운하면서 다른 얼굴로는 국민을 분열시키는 국가 권력의 비열한 두 얼굴. 그들이 21세기에도 '종북좌파 전라도'라는 만능 도깨비 방망이로 국민을 요리하는 걸 두고 볼 수만은 없다. 우리는 '호구'가 아니다.

마지막으로 국정원 댓글 요원님께 조언 한마디. 그저 '아따'와 '~당께'를 붙인다고 다 전라도식 욕이 되는 게 아니다. 전라도에서 나고 자라 몇 해 전에 돌아가신 홍어를 좋아하셨던 할아버지가 당신들을 봤다면, 분명 이렇게 '욕' 해 주셨을 게다.

"워메, 짜잔한 놈들. 징한 짓거리 엔간히 하고, 이리 와서 밥이나 한 숟깔 묵자잉."

우리네 욕은 이렇게 '격'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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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기동전과 전면타격전의 주역들

무장장비관 견문록(2) 고속기동전과 전면타격전의 주역들
 
[한호석의 개벽예감](69) 장갑차와 자행포 그리고 방사포들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기사입력: 2013/07/07 [11:28] 최종편집: ⓒ 자주민보
 
 

‘선군-915’가 앞서고 ‘준마-ㄹ’이 뒤따르는 인민군 고속기동전

무장장비관 중무기실을 참관하던 내 앞에 전차 다음으로 나타난 것은 장갑차다. 장갑차는 전차와 함께 고속기동전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무기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고속기동전을 벌여 ‘조국통일대전’을 단숨에 끝내겠다고 밝힌 북의 선언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북은 고속기동화된 철갑무력의 두 축인 전차와 장갑차를 중시하고, 철갑무력의 제작기술개발, 성능향상, 대량생산에 힘써왔다. 내가 참관한 무장장비관 중무기실에 전시된 각종 전차와 장갑차들은 북이 고속기동화된 철갑무력을 얼마나 중시하는지 말해주었다. 그런데 인민군 장갑차와 관련하여 남측과 미국에서 아래와 같은 부정확한 정보가 나돌고 있다.

첫째, 저들의 부정확한 정보에 따르면, 인민군에 배치된 4축8륜 수륙양용장갑차는 러시아산 1972년식 장갑차 ‘BTR-70’과 동급인 ‘66장갑차’인데, 이 장갑차의 조종병력은 3명, 탑승병력은 7명이라는 것이다.

둘째, 저들의 부정확한 정보에 따르면, 인민군의 주력 장갑차인 5축10륜 수륙양용장갑차는 중국산 장갑차 ‘YW531’과 동급인 ‘VTT-323’인데, 이 장갑차의 조종병력은 3명, 탑승병력은 10명이라는 것이다. 이 장갑차의 존재를 1973년에 처음 포착한 미국 군부는 이 장갑차를 ‘M1973’이라고 제멋대로 부른다.

셋째, 저들의 부정확한 정보에 따르면, 인민군의 신형 장갑차인 4축8륜 수륙양용장갑차는 러시아산 1986년식 장갑차 ‘BTR-80’과 동급인 ‘M2010’인데, 이 신형 장갑차의 조종병력은 2명, 탑승병력은 8명이라는 것이다. 이 신형 장갑차의 존재를 2010년에 처음 포착한 미국 군부는 이 장갑차를 ‘M2010’이라고 제멋대로 부른다.

그러나 내가 무장장비관 중무기실에서 살펴본 인민군 장갑차들은 위에 서술한 내용과 크게 다르다. 인민군 장갑차에 관한 정확한 정보는 아래와 같다.

첫째, 무장장비관 중무기실에 전시된 4축8륜 수륙양용장갑차의 공식명칭은 1969년식 장갑차 ‘69’다. 남측과 미국에는 인민군 장갑차 ‘69’가 ‘66’으로 잘못 알려졌다. 또한 남측과 미국에는 1969년식 장갑차 ‘69’의 조종병력이 3명으로 잘못 알려졌는데 실제는 2명이고, 탑승병력도 7명으로 잘못 알려졌는데 실제는 8명이다.
 
▲ <사진1> 2012년 4월 15일 인민군 군사행진에 등장한 1969년식 장갑차 '69'. 이 장갑차는 4축8륜 수륙양용장갑차로 기동속도가 매우 빨라 고속기동전에 유리하다. [자료사진= 인터넷검색, 한호석]


<사진1>에 나온 장갑차가 2012년 4월 15일 인민군 군사행진에 등장한 1969년식 장갑차 ‘69’다. 미국 군사전문가들의 자료에 따르면, 이 장갑차는 지상에서 최고시속 90km로, 물에서 최고시속 10km로 주행하며, 주행거리는 600km다. 또한 이 장갑차의 무장은 회전포탑에 장착된, 사거리가 2km인 14.5mm 대구경 기관총 1정, 사거리가 1.5km인 7.62mm 기관총 1정이다. 북이 이미 1969년부터 자체로 장갑차를 생산하기 시작하였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둘째, 중무기실에 전시된 무한궤도 장갑차의 공식명칭은 1973년식 장갑차 ‘323’이다. 현재 인민군은 이 장갑차를 주력 장갑차로 운용하고 있다. 미국과 남측에는 이 장갑차가 5축10륜 장갑차로 잘못 알려졌는데, 실제는 무한궤도 장갑차다. 또한 미국과 남측에는 1073년식 장갑차 ‘323’의 조종병력이 3명으로 잘못 알려졌는데 실제는 2명이고, 탑승병력도 10명으로 잘못 알려졌는데 실제는 12명이다.

미국 군사전문가들의 자료에 따르면, 1973년식 장갑차 ‘323’의 최고주행속도는 시속 65km이고, 주행거리는 500km다. 이 장갑차의 우월성은 강력한 화력이다. 다른 나라 장갑차들은 대체로 12.7mm 기관총 1정을 장착한 것이 일반적인데, 인민군 장갑차 ‘323’은 12.7mm 기관총 2정을 포탑에 장착하였을 뿐 아니라, 강력한 무기를 하나 더 장착하였다.
 
▲ <사진2> 인민군의 주력 장갑차인 1973년식 장갑차 '323'. 이 장갑차에는 12.7mm 기관총 2정과 저고도지대공미사일 8기가 장착되었다. [자료사진= 인터넷검색, 한호석]
<사진2>에 나온 1973년식 장갑차 ‘323’은 12.7mm 기관총 2정을 장착한 포탑 뒤쪽에 저고도지대공미사일 8기를 장착하였다. 미국 군사전문가들의 자료에는 이 장갑차에 장착된 것이 러시아군 저고도지대공미사일인 9K23 ‘아이글라(Igla)’라고 쓰여 있지만, 그것은 러시아산 수입무기가 아니라 북이 자체로 생산한 적외선유도식 고사로케트 ‘화승총’이다. 중무기실에 전시된 고사로케트 ‘화승총’의 해설판에는 “따라사격 사거리 5km, 마주사격 사거리 8km”라고 적혀 있다. 미국군의 저고도지대공미사일 FIM-92 스팅어(Stinger)의 사거리는 4.5km다.

셋째, 중무기실에는 북이 2009년에 생산한 신형 장갑차가 전시되었다. <사진3>에 나온 장갑차가 2012년 4월 15일 인민군 군사행진에 등장한 주체98년식 장갑차 ‘준마-ㄹ’다. 북에서는 ‘준마-르’라고 읽는다. 남측과 미국에는 주체98년식 장갑차 ‘준마-ㄹ’가 4축8륜 장갑차로 잘못 알려졌는데, 지탱바퀴가 여섯 개 달린 무한궤도 장갑차다. 또한 남측과 미국에는 ‘준마-ㄹ’의 탑승병력이 8명으로 잘못 알려졌는데, 실제는 9명이다. 미국 군사전문가들의 자료에 따르면, 북의 신형 장갑차 ‘준마-ㄹ’의 최고주행속도는 시속 85km, 주행거리는 600km다. 또한 이 신형 장갑차에는 컴퓨터사격통제장치로 가동되는 14.5mm 대구경 기관총 2정이 회전포탑에 장착되었고, 81mm 연막탄 6발과 화생방방호체계를 갖추었다.
 
▲ <사진3> 2012년 4월 15일 인민군 군사행진에 등장한 인민군 신형 장갑차인 주체98년식 장갑차 '준마-ㄹ'. 컴퓨터사격통제장치로 가동되는 14.5mm 대구경 기관총 2정이 회전포탑에 장착되었다. [자료사진= 인터넷검색, 한호석]


놀랍게도, 북은 2009년에 신형 중전차 ‘선군-915’와 신형 장갑차 ‘준마-ㄹ’를 한꺼번에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고속기동화된 철갑무력을 대량생산하는 매우 강력한 현대적인 생산체계가 북에서 가동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북의 기계공업부문에서 생산설비의 CNC화와 자동화가 추진되었다는 기사가 북측 언론에 나오기 시작한 때도 2009년이었고, 제철공업부문에서 주체철 생산체계가 가동되고 있다는 기사가 북측 언론에 나오기 시작한 때도 2009년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북에서 기계공업 및 제철공업의 비약적인 발전과 신형 중전차 및 신형 장갑차의 대량생산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다.

미국의 군사전문가들은 인민군 1개 기계화보병대대가 3개 중대, 300명 병력, 장갑차 48대로 구성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런 추정에 따르면, 인민군 1개 기계화보병대대는 1973년식 장갑차 ‘323’ 32대를 보유한 2개 중대와 신형 장갑차 주체98년식 ‘준마-ㄹ’ 16대를 보유한 1개 중대로 편성된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군사전문 웹사이트 ‘글로벌 씨큐리티(Global Security)’가 이전에 발표한 자료에는 인민군 장갑차가 모두 2,500대라고 적혀 있지만,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적어도 2009년 이전부터 북이 현대화된 철갑무력 대량생산체계를 가동해온 것을 생각하면, 지금은 3,000대 수준으로 늘었을 것으로 보인다.
 
▲ <사진4> 인민군 고속기동전 훈련장면. 신형 전차 '선군-915'가 앞서고 신형 장갑차 '준마-ㄹ'가 그 뒤를 따른다. [자료사진= 인터넷검색, 한호석]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북의 ‘조국통일대전’ 시나리오에 따라 고속기동전에 출격하게 될 인민군 장갑차에는 특수훈련으로 단련되고 중무장한 정예병력이 타게 될 것이다. 이런 맥락을 살펴보면, 김정은 인민군 최고사령관이 명령을 내리는 즉시 장갑차 3,000대에 분승할 중무장한 인민군 정예병력 약 30,000명이 최전방에 대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진4>가 보여주는 인민군 철갑무력의 기동모습은, 신형 전차 ‘선군-915’가 앞서고 신형 장갑차 ‘준마-ㄹ’가 그 뒤를 따르는 고속기동전 훈련장면이다.

다종다양한 자행포 가운데 최강자는 ‘주체포’

무장장비관 중무기실에 전시된 장갑차들을 살펴보는 나에게 해설강사 김윤희 동무는 “인민군 포무력이 매우 강하다”고 말하며 나를 자행포(자주포)와 방사포(다련장로켓)가 전시된 곳으로 안내하였다.
 
▲ <사진5> 무장장비관 야외전시장에는 퇴역한 자행포 등이 전시되었다. [자료사진= 인터넷검색, 한호석]
무장장비관 중무기실 중앙통로 오른쪽이 각종 포를 전시한 구역인데, 긴 포신을 허공에 쳐든 각종 자행포가 중앙통로 가까이에 전시되었고, 그 바깥쪽에 장갑차와 방사포가 전시되었다. 중무기실에는 현재 인민군 포병부대가 운용하는 자행포와 방사포만 전시되었고, <사진5>에서 보는 것처럼, 퇴역한 자행포는 야외전시장에 전시되었다. 중무기실에 전시된 각종 자행포들은 자행직사포, 자행곡사포, 자행평사포 등이다.

주목하는 것은, 북이 대구경 장거리포를 무한궤도차량에 탑재하여 기동력을 높이는 자행화(self-propellization)를 완료하였다는 점이다. 대구경 장거리포의 자행화는 포무력을 고속기동전에 적합하게 ‘진화’시킨 것이다. 물론 인민군 포병부대에는 견인포도 배치되었지만, 그 견인포는 주로 해안갱도진지에 고정배치된 해안포들이다. 중무기실에 전시된 각종 자행포는 구경이 100mm, 103mm, 122mm, 130mm, 152mm, 170mm로 다종다양한데, 생산연도순으로 열거하면 이렇다.

1972년식 103mm 자행직사포
1972년식 152mm 자행곡사포
1973년식 170mm 자행평사포
1974년식 100mm 자행직사포
1974년식 130mm 자행평사포
1976년식 122mm 자행평사포
1978년식 122mm 자행곡사포
1983년식 170mm 자행평사포

주목하는 것은, 위에 열거한 자행포 8종 가운데 7종이 1970년대에 생산되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인민군 포무력의 자행화는 이미 1970년대에 높은 수준에 이른 것이다.

원래 인민군 자행포가 실전에 처음 등장한 때는 한국군이 자주포라는 말조차 몰랐던 6.25전쟁 시기였다. 인민군 포병부대는 지금으로부터 63년 전에 76mm SU-76 자행포를 몰고 남진하였는데, 1942년 소련에서 처음 생산되기 시작한 이 자행포는 사거리가 14km이고, 최고주행속도가 시속 45km다. 한국군이 미국산 203mm M-110 자주곡사포 99문을 수입한 때는 1966년이었다.
▲ <사진6> 김정은 최고사령관은 2013년 3월 12일 인민군 제641군부대를 시찰하면서 1973년식 170mm 자행평사포를 살펴보았다. 포신 받침대에 '주체포'라고 쓴 흰색 글씨가 선명하다. [자료사진= 인터넷검색, 한호석]

위에 열거한 8종의 자행포를 살펴보던 내 앞에 엄청나게 크고 육중한 자행포가 나타났는데, 그것이 1973년식 170mm 자행평사포다. 북에서는 이 자행평사포를 ‘주체포’라고 부른다. 구경이 170mm나 되고, 포신이 15m로 매우 긴 이 자행평사포는 곁에서 바라보기만 해도 위압감을 느낄 만하다. 1973년식 170mm 자행평사포는 포를 쏠 때 생기는 엄청난 반동력을 제어하기 위해 평토기 배토판(bulldozer blade)처럼 생긴 접이식 제어판(retractable spade)을 차체 뒤쪽에 장착하였다. <사진6>에서 보는 것처럼, 김정은 최고사령관은 2013년 3월 12일 인민군 제641군부대를 시찰하면서 1973년식 170mm 자행평사포를 살펴보고 포병들에게 지침을 내렸다. 그 사진을 보면, 포신 받침대에 ‘주체포’라고 쓴 흰색 글씨가 선명하다.

미국 군사전문가들의 자료에 따르면, 1973년식 170mm ‘주체포’는 사거리 60km, 최고주행속도 시속 40km, 주행거리 300km이며, 포탄 12발을 싣고 이동한다. 북이 이 ‘주체포’를 생산하기 시작한 때로부터 5년이 지난 1978년에 이 포가 황해북도 곡산에 배치된 것을 고공정찰로 처음 포착한 미국 군부는 그 포를 ‘M1978’ 또는 ‘곡산포’라고 제멋대로 불렀다. 이 ‘주체포’ 실물이 북측 외부세계에 알려지기까지 12년이 걸렸는데, 1985년 평양에서 진행된 인민군 군사행진에 이 ‘주체포’가 처음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 <사진7> 1980년부터 1988년까지 계속된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이란은 북으로부터 수입한 1973년식 170mm '주체포'로 이라크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자료사진= 인터넷검색, 한호석]


1973년식 170mm ‘주체포’의 위력은 실전에서 입증된 바 있다. 1980년부터 1988년까지 계속된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이란은 북으로부터 1973년식 170mm ‘주체포’를 수입하여 전선에 투입하였다. <사진7>이 말해주는 것처럼, 당시 이란혁명수비군은 ‘주체포’로 이라크군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 <사진8> 2013년 3월 13일 실전능력판정을 위한 실탄사격훈련에 참가한 1973년식 170mm '주체포'가 불을 뿜었다. [자료사진= 인터넷검색, 한호석]
이처럼 실전경험이 풍부한 1973년식 170mm ‘주체포’는 처음 생산된 때로부터 40년이 지난 오늘도 ‘현역’으로 뛰고 있다. <사진8>은 2013년 3월 13일 실전능력판정을 위한 인민군 실탄사격훈련에 참가한 1973년식 170mm ‘주체포’가 불을 뿜는 모습이다. 북에서는 인민군의 포사격을 흔히 “불벼락을 친다”고 표현하는데, 그것은 ‘주체포’ 사격을 두고 하는 말로 들린다.

<사진9>는 2012년 4월 15일 인민군 군사행진에 등장한 1974년식 100mm 자행직사포다. 중무기실에 전시된 이 자행직사포 앞에 놓여있는 해설판에는 “조종인원 7명, 사거리 27km”라고 적혀 있다. <사진10>은 이 자행직사포를 쏘는 실탄사격훈련장면이다.

그런데 중무기실에 전시된 또 다른 ‘주체포’가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것은 1983년식 170mm 자행평사포다. 생산연도를 밝히지 않으면 똑같이 ‘주체포’라고 부르는 2종의 170mm 자행평사포에 대해 좀 헷갈릴 수 있는데, 북에서는 10년 간격을 두고 생산된 170mm 자행평사포 2종을 모두 ‘주체포’라 부른다. 주목하는 것은, 북이 1973년식 170mm 자행평사포를 생산한 때로부터 꼭 10년 만에 성능을 향상시킨 170mm 자행평사포를 생산한 것이다. 중무기실에 전시된 1983년식 170mm ‘주체포’ 앞에 놓여있는 해설판에는 “조종인원 9명, 사거리 40km, 추진탄 사용하여 사거리 연장”이라고 적혀 있다. <사진11>은 2012년 4월 15일 인민군 군사행진에 등장한 1983년식 170mm ‘주체포’다.
 
▲ <사진9> 2012년 4월 15일 인민군 군사행진에 등장한 1974년식 100mm행직사포 [자료사진= 인터넷검색, 한호석]

▲ <사진10> 1974년식 100mm 자행직사포를 쏘는 실탄사격훈련장면. 엄청난 발사화염을 뿜어낸다. [자료사진= 인터넷검색, 한호석]

▲ <사진11> 2012년 4월 15일 인민군 군사행진에 등장한 1983년식 170mm 자행평사포 '주체포'. 이 '주체포'를 쏘면, 포탄이 서울 한 복판에 있는 주한미국군사령부에 떨어진다. [자료사진= 인터넷검색, 한호석]


미국 군사전문가들의 자료에 따르면, 1983년식 170mm ‘주체포’의 최고주행속도는 시속 40km이며, 주행거리는 300km다. 인민군 포병부대들은 일반탄과 추진탄(projectile)을 각각 쏘는데, 추진탄을 쏘면 일반탄보다 20km 더 멀리 날아가므로 1983년식 170mm ‘주체포’의 최장사거리는 60km다. 최전방에 배치된 인민군 포병부대가 이 ‘주체포’를 쏘면, 포탄이 서울 한 복판에 있는 주한미국군사령부에 떨어진다.

해설강사 김윤희 동무의 말에 따르면, 전시에는 이 ‘주체포’가 60km 밖에 있는 타격목표를 향해 ‘특수탄’을 쏜다고 하는데, 그녀는 ‘전시특수탄’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말해주지 않았다. 미국 군사전문가들의 자료에 따르면, 이 ‘주체포’에는 예비포탄 12발이 들어가는 포탄적재함이 설치되었다고 하는데, ‘주체포’ 1문이 ‘전시특수탄’ 12발을 타격목표를 향해 쏘면 어떻게 될 것인지는 독자들의 상상에 맡긴다.

거대한 숲을 이룬 자행포 7,000문의 강철포신

인민군은 위에 열거한 각종 자행포를 몇 문이나 보유하였까? 남측 국방부는 2012년에 펴낸 ‘국방백서’에서 인민군 중장거리포가 8,600문이라고 썼다. ‘국방백서’는 격년 발행인데, 2008년에 펴낸 ‘국방백서’에는 인민군 중장거리포가 8,500문이라고 쓰여 있다. ‘국방백서’에 따르면, 북이 중장거리포를 5년 동안 100문밖에 더 증강하지 못했다는 것인데, 북의 중장거리포 연간 생산량이 20문이라는 것은 누가 봐도 추산오류로 보인다.

인민군 중장거리포가 5년 전에 8,500문이었으므로, 지난 5년 동안 500문이 더 늘어 현재는 9,000문에 이르렀다고 해야 합리적인 추산이다. 2013년 4월 8일 중국 언론 <환구시보>에 보도된 중국군사과학원 세계군사연구부 부부장의 말에 따르면, 인민군이 10,000여 문의 포를 겨냥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인민군 중장거리포 9,000문 가운데 각종 자행포가 7,000문이고, 각종 견인포가 2,000문이라고 추산한다. 자행포 7,000문이 하늘을 향해 일제히 강철포신을 쳐들면 거대한 ‘포신숲’을 이룰 것이다.

‘유투브(You Tube)’에 게시된 북의 예술영화 ‘군관의 안해들’을 보면, 인민군 포병들은 일제히 “일당백!”을 외치면서 포사격을 개시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북에서 말하는 ‘최후결전의 날’에 김정은 최고사령관이 타격명령을 내리면, 갱도진지 밖으로 나온 인민군 자행포 7,000문이 “일당백!” 구호와 함께 일제히 불을 뿜는 사상 최대의 포사격에 돌입할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가공할 인민군 대량포격에 맞설 어떤 방어수단도 갖지 못한 한미연합군의 현 상황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자행포 전시구역에서 방사포 전시구역으로 발길을 옮기던 내 앞에 3종의 자행박격포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자행박격포라는 말을 그 자리에서 처음 들었는데, 장갑차 뒤쪽에 대구경 박격포 1문을 장착한 것이 자행박격포다. 원래 소구경 박격포는 보병들이 어깨에 메고 운반하는 것인데, 북에서 만든 대구경 박격포는 너무 무거워 그렇게 운반할 수 없으므로 장갑차에 탑재하여 기동력, 파괴력, 방호력을 갖춘 것이다. 중무기실에는 1976년식 82mm 자행박격포, 1978년식 120mm 자행박격포, 1981년식 140mm 자행박격포가 전시되었다.

중무기실에 전시된 각종 포들은 모두 자행화된 것인데, 자행화되지 않은 견인포 1종이 전시되었다. 그것은 1991년식 30mm 6신 견인고사포인데, 해설판에는 “조종인원 5명, 사거리 4km”라고 적혀 있다. 이 견인고사포는 미국군이 벌컨방공포(vulcan anti-air artillery)라고 부르는 것이다. 한국군도 조종인원 4명이 쏘는 차량견인식 20mm 6신 KM-167 벌컨방공포를 실전배치하였는데, 구경이 작아서 사거리가 2.2km에 이른다.

인민군 방사포는 122mm 방사포에서 300mm 방사포까지 모두 8종

인민군 포무력의 중추는 방사포라고 말할 수 있다. 현재 인민군이 8종의 방사포를 운용하는 것만 봐도, 인민군 포무력에서 방사포의 역할이 어떠한지 알 수 있다.

중무기실을 참관하면서 내가 놀란 것은, 북이 자국산 방사포를 처음 생산한 때가 지금으로부터 45년 전인 1968년이라는 사실이다. 전 세계에서 방사포를 가장 먼저 개발한 소련이 3축6륜차량에 탑재한 122mm 방사포(BM-21 Grad)를 처음 생산한 때가 1963년이었는데, 북은 그로부터 5년 뒤에 무한궤도차량에 탑재한 200mm 방사포를 생산하였으니 북의 선진적인 방사포 개발능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중무기실에 전시된 방사포를 생산연도순으로 열거하면 아래와 같다.

1968년식 200mm 4관 방사포
1973년식 122mm 30관 방사포
1973년식 122mm 40관 방사포
1984년식 240mm 12관 방사포
1984년식 240mm 18관 방사포
1990년식 122mm 40관 방사포
1990년식 240mm 22관 방사포

남측과 미국에 나도는 부정확한 자료에 따르면, 현재 인민군이 107mm 12관 방사포, 107mm 18관 방사포, 107mm 24관 방사포도 운용하고 있다지만 중무기실에 107mm 방사포가 없는 것을 보면 107mm 방사포는 이미 퇴역된 것으로 보인다. 내가 이전에 남측과 미국에 나도는 부정확한 자료밖에 모르는 상태에서 쓴 인민군 방사포에 관한 몇몇 글들은 이번 무장장비관 참관에서 얻은 새로운 정보에 근거하여 수정되어야 한다.

인민군 방사포를 생산연도순으로 열거한 위의 서술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근 50년에 이르는 북의 방사포 개발사는 구경을 더욱 확장하고, 발사관수를 더욱 확대하는 방향으로 사거리 및 파괴력의 증강과 타격정밀도 향상을 추진해온 과정이었다.
 
▲ <사진12> 2013년 4월 15일 인민군 군사행진에 등장한 1973년식 122mm 30관 방사포. [자료사진= 인터넷검색, 한호석]


인민군 방사포들 가운데 1968년에 생산된 200mm 4관 방사포를 초기형 방사포라고 한다면, 현재 인민군이 실전배치한 방사포는 122mm 계열 방사포와 240mm 계열 방사포, 그리고 중무기실에 전시되지 않은 300mm 계열의 신형 방사포로 대별된다. 그러므로 북의 방사포 개발사는 122m 방사포 발사관을 30관에서 40관으로 확대하고, 240mm 방사포 발사관을 12관에서 22관으로 확대하고, 12관 방사포의 구경을 240mm에서 300mm로 확장하는 성능향상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사진13> 2013년 4월 15일 인민군 군사행진에 등장한 1990년식 122mm 40관 방사포. 4축8륜차량에 탑재되었고, 예비포탄 40발을 싣고 다니면서 자동장치로 재장전하여 곧바로 2차 사격을 하는 위력적인 무기다. [자료사진= 인터넷검색, 한호석]

▲ <사진14> 2013년 4월 15일 인민군 군사행진에 등장한 신형 122mm 12관 방사포. 무한궤도장갑차량에 장착되었다. [자료사진= 인터넷검색, 한호석]


2013년 4월 15일 인민군 군사행진에 3종의 122mm 방사포가 등장하였다. <사진12>에 나온 3축6륜차량에 탑재된 방사포는 1973년식 122mm 30관 방사포이고, <사진13>에 나온 4축8륜차량에 탑재된 방사포는 1990년식 122mm 40관 방사포인데, 예비포탄 40발을 싣고 다니면서 자동장치로 재장전하여 곧바로 2차 사격을 하는 위력적인 무기다. <사진14>에 나온 무한궤도장갑차량에 탑재된 방사포는 신형 122mm 12관 방사포다.
 
▲ <사진15> 2008년 9월 9일 로농적위군 군사행진에 등장한 1973년식 122mm 24관 방사포. 저고도지대공미사일 '화승총' 2기가 방사포와 함께 차량에 장착되었다. 이 방사포는 로농적위군 여성포병들이 쏜다. [자료사진= 인터넷검색, 한호석]


<사진15>에 나온 방사포는 2008년 9월 9일 로농적위군 군사행진에 등장한 1973년식 122mm 24관 방사포인데, 저고도지대공미사일인 ‘화승총’ 2기가 방사포와 함께 차량에 장착되었다. 2011년 9월 9일 로농적위군 군사행진 장면을 촬영한 <사진16>에는 협동농장 뜨락또르(트랙터)가 끄는 122mm 18관 방사포가 등장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웬만한 나라는 현역 포병부대에게도 122mm 방사포를 갖춰주지 못하는 형편인데, 북은 예비역 포병부대까지 122mm 방사포로 무장시켰으니, 그처럼 막강한 방사포무력을 보유한 나라는 전 세계에서 북밖에 없다.
 
▲ <사진16> 2011년 9월 9일 로농적위군 군사행진에 등장한, 협동농장 트랙터가 끄는 122mm 18관 방사포. 이 방사포는 로농적위군 여성포병들이 쏜다. [자료사진= 인터넷검색, 한호석]


<사진17>에 나온 3축6륜차량에 탑재된 방사포는 2012년 4월 15일 인민군 군사행진에 등장한 1990년식 240mm 22관 방사포다. 이 방사포는 중무기실에 전시된 7종의 방사포들 가운데 가장 나중에 만든 것이며 따라서 화력이 매우 세다. 그런데 중무기실에 전시된 1990년식 240mm 22관 방사포보다 화력이 훨씬 더 강한 신형 240mm 방사포가 2013년 3월 13일 인민군 실탄사격훈련에 참가하였다. <사진18>에 나온 방사포가 신형 240mm 40관 방사포다. 기존 240mm 방사포는 3축6륜차량에 탑재된 22관 방사포인데, 신형 240mm 방사포는 4축8륜차량에 탑재된 40관 방사포다. 화력이 두 배 정도 증강된 것이다.

신형 240mm 40관 방사포 발사장면을 촬영한 <사진18>이 북측 언론에 보도된 때로부터 약 3개월이 지난 2013년 6월 30일 <연합뉴스>는 인민군이 기존 240mm 방사포를 개량형 240mm 방사포로 교체하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보도에 따르면, 북이 개량한 신형 240mm 방사포는 기존 240mm 방사포보다 사거리가 5∼10km 더 늘어났다고 한다.
 
▲ <사진17> 2012년 4월 15일 인민군 군사행진에 등장한 1990년식 240mm 22관 방사포, 인민군이 전개할 전면타격전의 주역이다. [자료사진= 인터넷검색, 한호석]

▲ <사진18> 2013년 3월 13일 인민군 실탄사격훈련에 참가한 신형 240mm 40관 방사포. 재장전장치가 보인다. 이 신형 방사포의 최장사거리는 80km인 것으로 추정된다. [자료사진= 인터넷검색, 한호석]


중무기실에 전시된 각종 방사포들 앞에 놓인 해설판에는 122mm 방사포 사거리가 20.7km라고 적혀 있고, 240mm 방사포 사거리가 50.3km라고 적혀 있는데, 이것은 일반탄을 쏠 때 포탄이 비행하는 거리다. 해설판에는 각종 방사포로 일반탄만 아니라 연장탄도 쏜다고 적혀 있는데, 연장탄 사거리는 “비공개”라고 적혀 있다. 연장탄은 일반탄에 비해 20km 정도 더 멀리 날아가므로, 1990년식 240mm 22관 방사포의 최장사거리는 70km로 추정되고, 신형 240mm 40관 방사포의 최장사거리는 80km로 추정된다.

신형 300mm 12관 방사포는 어디에 있을까?

2013년 5월 23일 남측 언론매체들은 인민군이 5월 18일부터 20일까지 동해 쪽으로 발사한 발사체가 단거리미사일이 아니라 신형 300mm 4관 방사포인 것으로 보인다는 추측기사를 내보낸 바 있다. 나는 2013년 6월 1일 <자주민보>에 발표한 글 ‘호도반도 뒤흔든 발사폭음의 정체’에서 당시 인민군은 신형 300mm 방사포를 쏜 것이 아니라 신형 지대공미사일을 쏜 것이라고 분석하면서, 북은 이미 오래 전에 300mm 12관 방사포를 실전배치하였다고 썼다. 미국의 군사전문 웹사이트 <아미 레커그니션(Army Recognition)>은 북이 300mm 12관 방사포 보유국이라고 명시하였다. 지금으로부터 근 30년 전에 240mm 방사포를 생산한 북이 300mm 방사포를 아직 실전배치하지 못하고 시험발사를 하고 있다는 식의 추측보도는 북의 방사포 개발사를 모르는 무지의 발로다.

<사진19>에 나온 방사포는 러시아군이 실전배치한, 사거리가 90km에 이르는 300mm 12관 방사포다. 중국은 러시아산 300mm 12관 방사포를 수입하여 1996년부터 PHL96 300mm 방사포를 모방생산하였다. 300mm 방사포탄은 120mm 강철장갑을 뚫는 엄청난 파괴력을 지녔다.
 
▲ <사진 19> 러시아군이 실전배치한 300mm 12관 방사포. 인민군도 300mm 12관 방사포를 실전배치하였다. 인민군의 300mm 12관 방사포의 최장사거리는 170-200km로 추정된다. [자료사진= 인터넷검색, 한호석]


북측 언론보도에 따르면, 김정은 최고사령관은 2013년 6월 29일 강원도 원산 부근에 주둔하는 인민군 제851부대 포사격훈련을 지도하였는데, 보도사진에 나온 방사포 발사장면은 “적진과의 실지거리를 타산하여” 신형 300mm 12관 방사포를 쏘는 실탄사격훈련을 진행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신형 방사포는 사거리가 매우 길고 타격력이 매우 강해서 육지 목표를 향해 쏘지 못하고 동해 쪽으로 쏘는 실탄사격훈련을 진행하게 된다. 남측 언론매체들은 인민군이 실전배치한 신형 300mm 12관 방사포의 사거리가 170∼200km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였다.

나는 중무기실에 가면 신형 300mm 12관 방사포도 볼 수 있으려니 기대했지만, 거기에는 그 방사포가 없었다. 그런데 중무기실에 전시된 각종 방사포를 살펴보고 발길을 막 돌리려던 내 앞을 생전 처음 보는 거대한 포신이 가로막았다. 구경이 무려 370mm나 되는 거대한 포신 세 개가 우람하게 서 있는 게 아닌가. 그 거포의 공식명칭은 1984년식 370mm 3신 자행비반충포다. 다른 자행포들은 무한궤도차량에 포신이 한 개씩 탑재되었는데, 370mm 자행비반충포는 5축10륜 장갑차에 초대형 포신 세 개를 탑재하였다. 인민군은 비반충포라 부르고, 한국군은 무반동포라 부른다. 그 앞에 놓여있는 해설판에는 “조종인원 5명, 사거리 비공개”라고 적혀 있다.

인민군이 산포탄이라 부르는 포탄은 한국군이 집속탄(cluster bomb)이라 부르는 것인데, 자탄들이 꽉 들어찬 모탄이 타격목표 가까운 공중에서 터지면 그 안에서 쏟아져 나온 자탄 수 백 개가 넓은 공간에 흩어지면서 2차로 폭발하여 그 일대를 완전히 불바다로 만드는 가공할 대량파괴무기의 일종이다. <사진20>은 인민군이 방사포로 일반탄을 일제사격하여 타격구역 전체를 불바다로 만든 충격적인 실탄사격훈련장면이다. 인민군이 방사포로 일반탄을 쏠 때도 그처럼 불바다가 되는데, 산포탄을 쏘면 그 파괴범위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인민군이 일제히 발사할 240mm 방사포와 300mm 방사포의 산포탄이 한미연합군 머리 위에 불소나기처럼 쏟아지는데, 심각한 문제는 이것을 막을 방어수단이 한미연합군에게 없다는 것이다.
 
▲ <사진 20> 인민군의 방사포 일제사격은 타격구역 전체를 불바다로 만든다. 이것은 인민군 방사포의 실탄사격훈련장면이다. [자료사진= 인터넷검색, 한호석]


해설강사 김윤희 동무의 말에 따르면, 북은 1984년에 240mm 방사포를 생산할 때부터 방사포에 정밀타격능력을 갖췄다고 한다. 이것은 포탄에 유도장치가 들어갔다는 뜻이다. 방사포 최강국이라고 자부하는 러시아는 유도장치를 갖춘 방사포를 설계했다가 재정부담이 너무 커서 생산을 포기하였고, 중국은 유도장치를 갖춘 자국산 방사포 WS-2를 개발하였음을 2004년에 공개하였는데, 북이 30년 전부터 유도장치를 갖춘 첨단 방사포를 만들고 있었다니 실로 놀라운 일이다. “방사포로 점목표도 타격할 수 있다”고 말하던 해설강사 김윤희 동무의 목소리가 기억에 남는다.

미국 국제전략연구소(IISS)가 펴낸 2011년도 ‘군사균형(Military Balance)’이라는 자료에는 인민군 방사포가 5,100문이라고 적혀 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났으므로, 현재 인민군 방사포는 5,400문으로 증강되었을 것이다. 인민군 전투력 가운데 약 70%가 전방에 배치되었으므로, 인민군 방사포 5,400문 가운데 70%에 이르는 대구경 방사포 3,700문이 전방에 배치된 것으로 보인다.

2010년 11월 23일 연평도 포격전에서 인민군은 122mm 22관 방사포 5문을 발사하여 연평도 주둔 한국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사진21>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인민군의 방사포 일제사격은 먼 거리에 있는 타격구역 전체를 초토화한다.
 
▲ <사진 21> 인민군이 실탄사격훈련 중에 방사포를 일제사격하는 장면. 4문의 방사포가 후폭풍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자료사진= 인터넷검색, 한호석]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 인민군 포병부대들이 전방에 배치한 방사포 3,700문을 일제히 발사하면 그에 맞설 방어수단을 갖지 못한 한미연합군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한미연합군이 전투기를 띄워 장거리공대지미사일로 인민군 방사포를 파괴하겠다는 식의 대응시나리오는 그들의 훈련교범에나 나오는 것이지, 실전에서는 한미연합군의 공중무력부터 먼저 파괴될 것이므로 그런 대응시나리오는 현실과 동떨어진 상상도가 아니라면 실전과 무관한 대국민 홍보용에 지나지 않는다. 한미연합군이 대북전쟁연습으로 북을 자꾸 자극하여 전쟁위기를 증폭시키는 행동을 중지하고 한반도 평화협정을 체결해야 할 까닭이 분명해 보인다.(2013년 7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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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정부 출범 이후 최대 시위, 단 한 곳도 보도 안해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3/07/08 11:33
  • 수정일
    2013/07/08 11:33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지난 토요일 (7월 6일) 국정원 대선개입을 규탄하는 촛불집회가 오후 6시부터 서울광장에서 열렸습니다. '국정원 정치공작 대선개입 규탄,진상규명 촉구 범국민대회'에는 1만여명의(경찰추산 4,500명) 시민이 참석했습니다.

7월 6일 서울광장에 모인 시민 1만여명이라는 숫자는 지난달 21일부터 시작된 '국정원 대선개입 규탄 촛불집회'이후 최대 규모를 기록했습니다.

처음 국정원 정치 공작에 대한 시민들의 참여가 지지부진했었던 상황과 비교해보면, 가면 갈수록 시민들이 국정원의 불법 정치공작과 선거개입에 분노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난 6일 열렸던 국정원 규탄 촛불집회는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최대 규모의 집회입니다. 그러나 이상하게 TV에서는 촛불집회 장면을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지난 토요일은 장마로 침수 피해와 남북 실무회담이 주요 뉴스였습니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벌어진 최대 규모의 집회 뉴스는 MBC,KBS,SBS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MBC는 최원석 동아그룹 회장 아들의 물놀이 사망 소식은 8시뉴스 세번째 꼭지로 기자가 사건 현장까지 직접 찾아가는 화면을 내보냈지만, 서울광장에 모인 1만명 시민의 촛불집회는 보도하지 않았습니다.

SBS 8시뉴스도 '무더위 찬 음식, 효과 얼마나?'라는 기사는 있어도, 국정원 촛불집회는 없었고, KBS 9시뉴스도 기성용 선수 얘기는 있었지만, 촛불집회 소식은 아예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 국정원 사건은 보도하지 않고, 오로지 원세훈 개인비리만'

7월 6일은 주말이라 KBS,MBC,SBS 기자가 당직 기자만 빼고 모두 집에서 쉬었다고 칩시다. 그렇다면 지난 일주일간 지상파 8시,9시뉴스에서는 국정원 사건을 어떻게 얼마나 다뤘는지 조사해봤습니다.
 

 

▲NLL대화록 뉴스는 제외,

 

 

 

 

7월1일부터 7월7일까지 일주일 동안 지상파에서는 총 13건의 국정원 뉴스가 보도됐습니다. 그중에 3건이 7월1일 '국정원 국정조사' 관련 보도였습니다.

여야가 합의한 국정원 국정조사 관련 뉴스 이외에 지상파 뉴스에서는 원세훈 개인 비리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 소식이 주를 이루었고, 민주당 관계자가 국정원여직원 감금(?)으로 체포됐다는 뉴스가 전부였습니다.

뉴스를 보면 알겠지만, 지금 지상파 뉴스에서는 국정원 정치공작보다 원세훈 개인 비리로 보도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뻔합니다. 국정원 사건을 개인 비리로 축소하여, 국정조사를 여야의 진흙탕 싸움으로 전락시켜 '국정원 사건'이 정국의 핵심 쟁점이 되지 않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론이 꼭 박근혜 대통령을 닮은 것 같습니다. 쟁점이나 문제의 소지가 있는 사안은 절대 말하지 않는 것, 언론이 아니라 박근혜 대통령의 충복 같은 느낌을 지금 언론에서 받는 것은 저만의 생각일까요?


' 사라진 국정원 대선 관여 증거 뉴스'

지상파 방송이 국정원 사건을 원세훈 개인비리로 만드는 사이, 국정원 관련 주요 뉴스들은 TV에서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그중에 가장 중요한 사안은 국정원 댓글 수사 발표 전에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에게 전화했던 국정원 국장이 소환 조사받은 부분입니다.

검찰은 박원동 국정원 국익정보국장을 지난해 12월 16일 김용판 서울경찰청장에게 전화를 걸어 수사결과 발표를 독촉하는 등의 압력을 행사한 혐의로 7월 2일 불러 조사했고, 이런 사실은 7월 5일 언론에 알려졌습니다. (물론 지상파 뉴스에서는 보도되지 않았다)
 

 

 

 


만약 박원동 전 국정원 국익과장이 김용판 서울경찰청장에게 '국정원 여직원의 선거 개입 댓글은 발견하지 못했다'는 수사결과 발표를 지시했다면 이는 명백히 국정원이 대선에 개입한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 김용판 서울청장이 권은희 수사과장에게 수사 축소를 강요했다는 증거가 나온다면, 지난 대선은 국정원,경찰의 조직적인 합작 부정 선거가 됩니다.

새누리당과 보수는 이런 국정원과 경찰의 직접적인 대선 개입은 전혀 거론하지 않고 오로지 국정원 여직원과 국정원 심리전단의 댓글이 대선에 무슨 영향을 끼쳤느냐고 주장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지상파 뉴스 어디에서도 박원동 국정원 국장의 피의자 신분 조사는 다루지 않고 있습니다.

'절대 거론되지 않는 이명박 전 대통령'

우리는 국정원 정치 공작과 대선 개입 의혹을 보면서 한 가지 의문을 갖습니다. 그것은 왜 뉴스에서 당시 책임자였던 이명박 전 대통령을 거론하지 않고 있느냐는 부분입니다.

'아이엠피터'는 이미 지난 2012년 9월에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후보와의 비공개 단독회동이 의심스럽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정치] - 박근혜,이명박 회동 '정권 재창출 위한 밀약?'

이와 같은 근거의 밑바탕에는 이상득 의원이 MB정권에서 차기 정권은 무조건 박근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추진했던 부분 때문이었습니다. 새누리당은 아무리 파벌이 갈라져 있어도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항상 한마음, 한뜻으로 힘을 합칩니다.

 

 

▲클릭하면 확대

 


2012년 9월 2일 정오, 청와대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만나 무려 100분간 비공개 단독 회동을 했습니다. 당시 어떤 내용이 오갔는지는 아직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조각들을 하나둘씩 맞추다 보면 분명 정권연장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고 봅니다.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후보의 만남 이후, 선거 전략은 철저히 야당 후보에게 불리한 내용이 나왔습니다. 기재부의 문재인 후보 공약 비판 (경제민주화를 통틀어 비판했지만, 세부적인 공약 내용은 문재인 후보를 겨냥)이 있었고, 가장 중요한 정문헌 새누리당 의원의 'NLL 땅따먹기' 발언이 있었습니다.

당시 대선기간 NLL 기사만 9,500여건이었다는 사실은 얼마나 대선에 영향을 끼쳤는지 알 수 있을 것이고, 국정원도 조직적으로 NLL을 이용해 대선에 개입한 증거가 검찰 조사에서 밝혀졌습니다.

권영세 새누리당 종합상황실장은 국회 정보위원장으로 있으면서 당시 국회 파견관이었던 박원동을 알았고, 박원동 국정원 국익정보국장은 12월 16일 '국정원 대선 개입 댓글 무혐의' 수사 발표 압력을 행사한 의혹을 받고 있는 인물입니다.

' 너구리를 잡으려면 굴에 연기를 피워야!'

일련의 증거를 보면 국정원의 대선 개입은 분명 MB와 박근혜의 연관성을 보여주고 있지만, 18대 부정선거를 외치면 박근혜 대통령을 흔드는 나쁜 일로 비난받기 일쑤입니다. 그렇다면 국정원 사건과 불법 선거를 한 방에 잡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바로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국정원 정치공작 책임을 요구하며 그를 법정에 세우는 일입니다. 그를 압박하면 당시 회동에서 무엇이 논의됐고, 과연 박근혜 후보가 당시 어디까지 알고 있었는지 밝혀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것은 어떤 정치적 전략이전에 국정원의 정치 공작이 명백한 상황에서 당시 대통령이 책임지는 것이 마땅하기에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소속 정당의 대통령 후보와 만나 비공개로 회동했다는 사실만으로 선거개입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아무도 그런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이라도 당시의 문제점을 제기하면서, 국정원과의 연계성을 밝혀내야 합니다.

너구리를 잡으려면 굴에 연기를 피워야 합니다. 이러한 이치로 굴속에 있는 몸통을 밝히기 위해서는 그것을 막고 있는 돌을 먼저 치워야 합니다.

 

 

 


다른 나라 민주화 시위는 빠짐없이 보도하는 대한민국 지상파 TV에서, 정작 대한민국 시민 1만여명이 모인 '국정원 정치 공작,대선 개입 규탄 촛불집회'는 단 한 줄도 보도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이 지금 대한민국의 현실입니다.

힘이 들고, 지치고 외로운 싸움이 시작됐습니다. 그것은 어떤 정권을 몰아내고 내 마음에 드는 대통령을 선택하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이 땅에 살아갈 우리 아이들에게 떳떳한 민주주의를 물려주기 위해서 시작한 고난에 불과합니다.

당신이 든 보잘것없는 하나의 촛불,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것 같지만,
용기를 내면 많은 사람이 함께합니다.
잊지 마세요. 당신도 누군가의 영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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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저에도 미스터리 서클? 복어에게 물어봐

 

해저에도 미스터리 서클? 복어에게 물어봐

조홍섭 2013. 07. 04
조회수 15605추천수 0
 

일본 남부 아마미-오시마 섬 해저에 지름 2m '비행접시 무늬' 조형물 잇따라

복어 일종 수컷이 만든 산란장 드러나, 둥지용 미세 모래 공급받을 정교한 장치

 

puffer0-1.jpg » 일본 남부 해저 모래밭에서 발견되는 '미스터리 써클'. 사진=요지 오카타, <사이언티픽 레포츠>

 

일본 남쪽의 아마미-오시마 섬이 있는 아열대 바다에서 다이버들은 1995년부터 신기한 모습을 가끔씩 관찰했다. 바다 밑바닥 모래밭에 지름 2m쯤의 원형 무늬가 곳곳에 그려져 있는 것이었다. 가장자리에서 중앙을 향해 방사상으로 빗살 무늬가 선명한 이 무늬는 마치 비행접시를 눌러 찍어놓은 것 같기도 해서 다이버들 사이에서는 ‘미스터리 써클’이라고 불렸다.
 

이 괴상한 무늬의 정체가 일본 연구자들에 의해 밝혀졌는데, 이를 만든 주인공은 작은 복어의 일종이었다. 히로시 가와세 일본 지바 자연사박물관 연구원 등은 이런 내용을 <사이언티픽 레포츠> 최근호에 실린 논문에서 밝혔다. <사이언티픽 레포츠>는 네이처가 발행하는 온라인 공개학술지이다.

fuffer1.jpg » 지느러미로 '미스터리 써클'을 만드느라 열심인 참복과 복어의 일종. 사진=키미아키 이토, <사이언티픽 레포츠>

 

연구진이 수중에서 관찰했더니, 참복과 토르퀴게너속의 이 신종 복어 수컷은 산란용 둥지를 만드는 과정에서 이런 조형물을 빚어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복어는 원의 바깥에서 안쪽으로 헤엄치면서 가슴과 배, 꼬리지느러미를 총동원해 바닥의 모래를 헤집어 고랑을 만들었다. 이렇게 형성된 빗살 모양의 고랑이 가운데 만나는 곳이 신부를 유인할 둥지이다. 둥지에는 조개나 산호 조각을 뿌려 장식했다.

 

해저 '미스터리 써클'을 만드는 과정

 

puffer2-1.jpg

 

pugger2-2-1.jpg

 

puffer2-3-1.jpg

 

puffer2-4.jpg » a. 둥지 제작 초기 b. 중간 단계. 오른쪽에 작은 복어의 모습이 보인다. c. 완성. d. 산란 뒤 골이 무너져 가는 모습. 복어가 알을 지키고 있다. 사진=요지 오카타, <사이언티픽 레포츠>

 

길이 12㎝인 이 물고기가 지름 2m의 이런 조형물을 만드는 데는 7~9일이나 걸렸다. 암컷이 둥지에 알을 낳은 뒤에도 수컷은 6일을 더 머물며 알을 지켰다. 이러는 사이에 조형물의 고랑은 물살에 차츰 무너져 평평해졌다.
 

복어는 왜 이런 조형물을 만드는 걸까. 연구진은 모래의 미세한 입자가 한가운데 둥지에 쌓이도록 유도하는 구조일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복어가 골을 팔 때 일어난 미세 입자는 흩어지지 않고 골 표면에 쌓이는데, 골이 방사상이어서 조류와 무관하게 미세 입자는 중앙에 위치한 둥지로 이동했다. 따라서 복어의 미스터리 써클은 폭신한 둥지의 원자재인 미세 입자를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한 장치라는 것이다.
 

하지만 복어는 이렇게 힘들게 만든 구조물을 재활용하지 않고, 번식 때마다 새로 만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진은 “어렵게 만든 둥지이지만 모래에 포함된 미세 입자를 모두 써 버린 상태여서 다시 쓰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논문에서 밝혔다.

 

기사가 인용한 논문 원문 정보:

Role of Huge Geometric Circular Structures in the Reproduction of a Marine Pufferfish
Hiroshi Kawase, Yoji Okata & Kimiaki Ito
SCIENTIFIC REPORTS | 3 : 2106 | DOI: 10.1038/srep02106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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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LL 논란? 노무현은 옳았다!

 

 

[프레시안 books] <정세현의 통일토크>

한승동 <한겨레> 문화부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07-05 오후 6:37:48

 

 

2007년 10월의 남북 정상회담 때 나온 노무현 당시 대통령의 서해 북방한계선(NLL) 발언 내용이 불법적으로 유포, 공개되고 정치 흥정의 대상물로 전락했다. 지구상에서 참으로 희귀하고도 기괴한, 그리고 비극적이고도 희극적인 반공국가 대한민국, 그 시대착오적인 냉전국가의 실체를 거기서 본다.

이 문제가 언론에 등장한 것은 지난 연말 대선 때였다. 그 5년 전의 전임 대통령 발언록이 왜 그때 불쑥 불거져 나왔을까. 공개 자체가 법으로 금지돼 있는 내용이 어떻게 세간에 흘러나오고 집권당이 이를 문제 삼았을까. 권력을 쥐고 있던 자들이 그것을 집권당 대선 전략으로 활용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 문제를 집권 연장을 위한 이데올로기 공세 도구로 활용하려던 그들은 노 전 대통령의 발언 내용 중 일부를 자의적으로 짜깁기해 흘리면서 정치적 반대파를 위험한 '종북좌파'로 몰아가는 반공 매카시즘을 다시 또 부추겼다.

그리고 그 문제가 대선 뒤 국정원의 불법적인 대선 개입 논란이 거세지면서 다시 등장했다. 아마도, 그대로 두면 대선 불법개입 공작을 지시한 국정원 수뇌부와 국정원이 위험해지고 공모 가능성이 짙은 집권당과 권력자들 또한 난처해질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그리하여 국정원의 대선 개입 비리를 입증하는 사실들이 속속 드러나는 순간, 난데없이 과거 대통령의 NLL 발언 내용이 다시 정치 쟁점화했다.

그렇게 해서 지금 국정원 불법비리 혐의라는 문제의 본질은 묻히고 엉뚱하게도 공개돼선 안 될 전임 대통령의 정상회담 발언 내용을 공개하는 게 맞느냐 틀리느냐, 그 내용이 '나라 팔아먹은 종북좌파'의 매국 행위냐 아니냐 따위의 곁가지, 근거 모호한 에피소드들이 사건의 본질인 양 행세하고 있다. 저질 코미디를 보는 듯했던 '윤창중 사건'이 상징하는 권력 주변 문제도 NLL 거품 속에 녹아버렸다. 그게 바로 노림수다. 수구 언론 매체들은 언제나 그랬듯, 거기에 맞장구치며 모략가들을 결과적으로 도와주고 있다. 자신을 방어할 수 없는 고인의 발언을 자의적으로 비틀어 사건을 날조한 혐의가 짙은 이 '사기극'의 핵심에 구제불능의 언론이 자리 잡고 있다.

노 전 대통령 발언이 공개되든 말든, 또 얼마만큼 공개되든 상관없이 결국 발언 내용 중에 문제될 만한 것은 없을 것이다. 설사 있다고 해도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 실체 규명이 목적이 아닐 테니까.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주류 수구세력에게 법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게 아니다. 그리고 유엔 가맹국인 북한은 그들에겐 국가가 아니다. 통일 문제의 당사자요 논의 상대임에도 그들은 전혀 그런 대우를 해줄 생각이 없다. 국내 정치적 이용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라면 북과의 약속이나 국가 대 국가로서 지켜야 할 기본 룰조차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려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 특권 유지를 위해서라면 '빨갱이'들쯤은 마음대로 처분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을 지닌 극단적 반공투사, 이미 다른 곳에서는 다 흘러가버린 '냉전의 전사', 시대착오적이고 퇴행적인 분열증적 영웅주의자의 면모를 보여준다.

유사 사태가 1992년 남북 고위급회담 때도 벌어졌다. 당시 안기부장 특보를 하다 고위급회담 남쪽 대변인을 맡고 있던 이동복의 '훈령조작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성사시키기 위해 필요한 조처(피랍 동진호 선원 송환요구 철회)를 취하라는 청와대 훈령을 중간에서 가로채 우리 쪽 회담 대표에게 전달하지도 않고 자기 고집대로 회담을 끌고 가 결렬시켰다. 그리고 훈령조작 사실을 은폐했다가 나중에 들통 났다. 감사원 감사를 통해 드러난 범죄 행각은 정상적인 국가에서 보기 드문 것이었다. 좁은 세계에 갇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다른 모든 것을 희생시켜도 상관없다는 가치관·세계관의 소유자들. 그런 유형의 시대착오적이고 광신적인 반공투사들이 21세기인 지금도 여전히 대한민국 핵심부를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번 국정원 대선 불법개입과 전직 대통령 NLL 발언 공개 논란은 다시 한 번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남북한 통일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나라 바깥의 힘센 자들과 한통속이 돼 뭔가 일이 될 만하면 사사건건 훼방을 놓으면서 70년 세월의 분단구조 속에서 특혜를 누려왔다.
 
 

▲ <정세현의 통일토크>(정세현 지음, 서해문집 펴냄). ⓒ서해문집

30여년 통일 문제 전문가로, 통일부 장·차관으로, 남북대화 현장 핵심멤버로 일한 정세현 원광대학교 총장이 체험을 토대로 쓴 <정세현의 통일토크>(서해문집 펴냄)를 읽노라면 이 뒤틀린 인간들과 뒤틀린 구조가 한결 선명하게 다가온다. 이 70년 묵은 복잡하고 뒤틀린 문제를 그만큼 구수하고 흥미진진하게, 그러면서 문제의 본질과 핵심을 그만큼 쉽고 명쾌하게 풀어내는 이도 드물 것이다. 책은 박정희 정부 이후 이명박 정부까지 역대 정부의 남북관계 현장 30년 역사를 통사적으로 요약 정리한 1부, 논란거리가 될 수 있는 주제 7가지를 '한반도 평화를 여는 일곱 개의 문'이란 제목으로 정리한 2부, 그리고 남북접촉 현장의 에피소드들을 묶은 3부로 구성돼 있다. <정세현의 정세토크>(서해문집 펴냄)의 자매편 격이지만 남북관계·통일 문제를 좀 더 체계적으로 정리했다는 느낌을 준다.

먼저 이런 얘기부터 해 보자. 만일 2007년 10·4 남북 정상선언대로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합의내용이 실행에 옮겨졌더라면? 그런데도 그 2년여 뒤인 2010년 3월의 천안함 침몰 사태가 일어났을까? 그럼에도 그 인근 해역에서 대규모 한미 합동군사훈련이 벌어지고 46명의 젊은이들이 영문도 모른 채 숨져간 비극이 일어났을까? 그리고 뒤이은 북의 연평도 포격 만행도? 우리 젊은이들의 피로 지킨 NLL을 사수해야 한다고 군과 집권당과 대통령은 말했지만, 전쟁이 끝난 지 60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무고한 젊은이들 피가 아니면 지킬 수 없는 NLL을 계속 '사수'해야 할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걸까? 사수하지 않아도 지켜내는 다른 방법은 없는 걸까? 사람들은 도대체 문제의 그 NLL에 관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발언이라는 게, 정확한 내용은 차치하고라도, 어떤 맥락에서 어떻게 나온 것인지나 알고 있는 걸까?

2007년 10월 노무현-김정일 회담 뒤 발표된 '10·4선언'에 담긴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구상의 골자는 이랬다.

우리의 '서해 5도'가 산재해 있는 해주 앞바다와 주변 해역을 남북이 함께 안전하게 이용하는 '공동어로·평화수역'으로 지정한다. 해주경제특구를 개발하고 장차 해주-개성-인천을 연결하는 물류네트워크도 만든다. 해주와 인천간 직항로도 개설한다. 강화도와 북쪽 건너편 개풍군 사이에 다리를 놓아 개성공단을 좀 더 단거리로 남쪽과 연결함으로써 공단의 내실화, 확장을 꾀한다.

<정세현의 통일토크>에서 정 총장은 이렇게 썼다. "10·4 정상선언에는 여러 가지 계획과 사업들이 언급되어 있지만, 그 중 가장 의미 있고 남북관계 발전과 한반도 평화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서해특별지대)에 관한 합의사항입니다."

정상끼리 합의했다고 해서 일사천리로 진행되진 않았겠지만, 그 구상이 실현 가능할 뿐만 아니라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진척될 수도 있으리라는 전망을 해도 될 만한 주·객관적 환경이 당시에는 어느 정도 조성돼 있었다. 경의선 철도가 연결되고 동해 쪽 도로·철도도 연결되거나 연결 작업을 하고 있었다. 수많은 남쪽 사람들이 이미 육로로 금강산을 오가고 있었고, 개성공단도 시범단계를 넘어 대규모 확장이 구체화되고 있었다. 제주도와 남해안 사이에선 북쪽의 선박들이 탈 없이 통과하고 있었다.

"그건 정말 대단한 발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김대중 정부에서 철도·도로 연결공사를 시작하고 개성공단 개발을 추진할 때는 '군사적 대치지역'을 '경제적 협력지역'으로 변화시켜나가는 식으로 접근하다 보면 결국 남북 간에 협력과 공존의 영역이 넓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서 있었습니다. 그게 통일로 가는 가장 정확한 길이라고 판단한 것이죠. 기능주의적 접근을 하되 경제와 군사를 연계시키는 개념이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입니다. (…) 그런데 그 범위를 훨씬 더 넓힌 것이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라는 것입니다. (…) 그럼 황해도까지도 군사긴장지역에서 경제협력지대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리고 NLL 문제 때문에 툭하면 긴장이 고조되던 서해가 평화협력지대로 탈바꿈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서해특별지대가 실천에 옮겨지기 전에 이미 "북한 당국이 개성공단 부지로 내 놓은 지역에 있던 6만여 명의 북한병력이 10킬로미터 이상 북쪽으로 올라갔다"고 했고, 금강산 쪽 주둔 북한군 부대들도 금강산이 경제협력지대로 바뀌면서 그 북쪽으로 15킬로미터 정도 이동했다. 보수 성향의 <신동아>가 2005년 2월호에 여러 장의 위성사진과 함께 '개성공단 일대 군사시설 전격 철거'라는 제목의 기사까지 실었다. 뿐만 아니라 경협이 확대되면서 그들 지역을 관리하는 북쪽 군대들이 어쩔 수 없이 남쪽 군대와 매일 통화하고 팩스도 주고받으면서 협력할 수밖에 없게 되고, 이에 따라 긴장완화, 신뢰구축 효과가 눈에 띄게 나타났다.

노 전 대통령이 북쪽 수뇌와 얘기했다는 NLL 관련 발언과 엮인 서해특별지대 구상은 그런 변화의 연장이자, 그것을 질과 양 모두 획기적으로 높이자는 남북 간의 합의였다. 따라서 노 전 대통령의 NLL 발언은 이 합의를 끌어내기 위한 협상과정에서 나온 것이며, 기록공개 여부가 논란이 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기록자들이 배석한 자리에서 이뤄진 것이다. 국민 대다수의 지지로 당선된, 수많은 공식 수행원들을 대동하고 세계의 관심 속에 유엔 가맹국인 이웃나라를 공식방문 중인 자국 대통령을 나라를 팔아넘길지도 모르는 적국의 스파이쯤으로 간주하는 것은 정신병리학적 광기의 소산일까. 아니면 정치적 이득을 노린, 공작 차원도 못되는 졸렬한 수작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NLL을 넘어 분단체제 자체를 '사수'하려는 의지의 표명이거나.
 

▲ 2007년 남북 정상회담 당시 노무현 대통령, 김정일 국방위원장. ⓒ청와대 사진단


2008년 2월 출범한 이명박 정부는 서해특별지대 구상뿐만 아니라 10·4 선언, 그리고 김대중 정부 때의 6·15 공동선언까지 전 정부들이 10년간 어렵사리 쌓아 올린 남북공사 토대들을 사실상 모조리 폐기처분해 버렸다. '박왕자 피살사건'으로 이명박 정부의 대북 자세는 한층 더 경화됐지만, 그 전 인수위 시절과 취임 이후 발표한 대북정책 기본구상인 '비핵·개방 3000'을 통해 강경 대결자세를 기조로 한 대북 정책 방향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정 총장은 걱정했다.

"이명박 정부가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합의를 포함해서 10·4 정상선언 전체를 부정했는데, 이렇게 한 것이 훗날에는 시간을 낭비했다는 점에서 굉장히 후회스러운 역사가 될 것입니다."

정 총장은 이명박 정부가 폐기해버린 이런 접근방식을 국제정치학상의 주요 통합이론들 가운데 하나인 '기능주의'로 분류했다. 정치 위주의 직선적 접근을 앞세우기보다는 경제, 사회, 문화, 스포츠 등 비정치적·기능적 부문의 교류·협력을 통한 우회적 접근을 강화한 뒤 궁극적으로 정치적 통합을 꾀하는 방식이다. 세계대전을 두 번이나 치른 뒤 석탄·철강 공동체 등을 우회해 유럽연합(EU)을 결성하기에 이른 유럽의 전후 통합방식이 그랬다. 정 총장은 남북한의 경우 여기에다 정치적 요소를 가미해 의도적인 정치적 결단을 중시하는 신기능주의를 도입했다며,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햇볕정책'이 바로 신기능주의 통합이론에 가깝다고 했다.

"더 많은 접촉을 통해서 북한의 변화를 유도해야만 통일이 가능하다는 것이 햇볕정책의 기본철학 아닙니까? 접촉점을 무수히 찍으면 접촉선이 생기고, 접촉선이 무수히 생기면 접촉면이 넓어지고, 그런 접촉면이 자꾸 생기다 보면 접촉공간이 넓어지고, 그것이 바로 북한의 개방점, 개방선, 개방면, 개방공간이 되고, 이어서 통합점, 통합선, 통합면, 통합공간으로 연결된다는 철학입니다." 독일통일 방식이 그랬다.

김대중 정부 이후 이 신기능주의적 접근을 통해 남북 간 왕래가 보편화되고 통일 문제가 현실 문제가 됐다. 그러나 그렇게 되자 이번에는 남북 내부에서 각기 내부 갈등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통일 문제가 담론 차원에서 현실 차원으로 넘어가면서 냉전구조가 허물어지자, 냉전구조 위에 번성해온 기득권 세력이 위기의식을 느끼면서 반격을 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로 인한 우리 내부 갈등이 '남남 갈등'이다.

대한민국 수구세력은 북과의 갈등 증폭을 통해 남남 갈등을 조절하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온존시키는 전략을 택했다. 그들은 북과의 갈등을 전면화하고 남쪽 내부의 반대세력을 모조리 종북좌파로 몰아 약화시키는 대신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했다. 2002년 9월 고이즈미 총리 방북 때 나온 북의 일본인 납치 사실 시인을 북-일의 오랜 갈등 해소의 출발점이 아니라 오히려 갈등 증폭 수단으로 써먹은 일본 우파의 복사판인 '자학사관 비판'과 뉴라이트의 대두가 그것과 표리일체를 이룬다.

이는 정 총장이 <정세현의 통일토크>에서 자주 거론하는 독일 통일의 예와 매우 대조적이다. 통일 전 서독은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 이후 통일까지 20여 년간 엄청난 '퍼주기'를 마다하지 않고 동독과의 대화·교류 확대에 매진했고 이에 대해서는 기독교민주당이나 자유민주당 등 보수·우파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사회민주당의 브란트 동방정책을 계승해 독일 통일 마지막 단계를 완수한 건 헬무트 콜의 보수 기독교민주당이었다. 정 총장이 명시적으로 얘기하진 않았으나 <정세현 통일토크>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의 핵심 축 하나가 바로 한국과 독일의 이런 자세 대비일지도 모르겠다. 통일 문제와 관련해, 이명박 정부의 '비핵·개방 3000'이 대표하는 한국 보수 우파의 기본자세는 '북이 먼저 변해야 대화도 하고 지원도 한다'는 것이다. 남쪽 보수 우익은 북이 먼저 핵문제에 대한 입장을 바꾸기만 하면, 말하자면 핵을 포기하겠다는 쪽으로 가기만 하면 왕창 도와주고 체제안전도 보장하겠다고 줄기차게 얘기한다. 이는 북이 자세를 바꾸지 않는 한 대화도 지원도 하지 않겠다는 얘기다. 일본이 북을 대하는 태도와 똑같다. 북이 먼저 굴복하지 않는 한 대화도 지원도 과거 청산도 수교도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마디로 대화하지 않겠다는 얘기다.

독일의 자세는 이와 확연히 다르다. 서독은 동독에 대해 먼저 변하라고 요구한 게 아니라 '동독이 변하게 하려면, 동독을 (우리가 원하는 쪽으로)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를 고민했다. 동독에게 안 바뀌면 대화도 지원도 없다며 변화를 다그친 게 아니라, 동독이 서독의 요구에 호응하고 나설 수밖에 없는 조건을 만들었다. 그 핵심 수단이 바로 한국 보수 우파들이 보면 입이 딱 벌어질 정도의 '퍼주기'였다. 한국 우파의 대북정책이 '바꾸면 주겠다'인데 비해 서독의 대동독정책은 '주어서 바꾼다'였다.

정 총장에 따르면, 1969년 동방정책이 시작된 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날까지 20년 간 서독 정부가 직접 또는 교회 등 민간을 통해 동독에 지원한 돈과 물자가 1044억 마르크, 달러로 약 576억 달러나 됐다. 연간 평균 약 29억 달러쯤 되는데,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남이 북에 지원한 연평균 4억 달러의 7배가 넘는다. 지금 독일의 국내총생산(GDP)이 3조5000억 달러 정도고 우리가 1조1600억 달러(2012년) 정도인데, 이런 소득차나 국력차를 감안해도 통일 전 서독의 동독에 대한 지원 규모는 남한의 북에 대한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이에 대해 독일 국회나 언론은 그 20여 년간 한 번도 시비를 걸지 않았다고 한다. 이게 또한 한국과 독일이 다른 점이다.

한국 우파들 논리대로 그런 퍼주기 공세를 당한 동독이 그 돈으로 첨단무기를 사들이고 신무기를 개발하는 등 군사력을 길렀다면 독일 통일의 주역은 서독이 아니라 동독이 됐어야 한다. 그러나 서독의 퍼주기는 동독을 강하게 만든 게 아니라 결과적으로 동독의 해체를 크게 앞당겼다.

정 총장은 미국도 인정했듯이, 북이 미사일 기술 한 가지만으로도 연간 10억 달러 이상의 외화를 벌어들인 사실을 지적하면서 금강산 관광이나 개성공단 수익, 인도적 식량지원 등을 군사비, 나아가 핵과 미사일 개발에 전용했을 거라며 김·노 정부의 퍼주기를 북핵 개발의 원흉으로 몰아가는 이들의 황당한 논리를 꼬집었다. 그것보다는 북한 옥죄기와 북이 느낀 체제위기 공포가 북핵 개발을 촉발시켰을 가능성이 높다는 게 정설에 가깝다. 누가 옳고 그르냐가 아니라 상대를 어떻게 해서든 변화시켜 통일을 달성하는 방책을 제시하는 게 통일정책의 존재이유 아닌가. 독일은 그렇게 했지만 우리는 그러지 못했다.

 
정 총장에 따르면, 한국은행이 추산하는 북의 1인당 국민소득은 대체로 1000달러. 그런데 북한 경제를 연구하는 러시아 등의 전문가들은 그 절반인 500달러 정도로 본단다. 이를 기준으로 시산한 2010년대의 대체적인 남북한 1인당 소득차는 2만 달러 대 500달러. 즉 북의 소득수준은 남의 40분의 1. 남북의 인구가 2 대 1이니까 총량 기준으로는 무려 80 대 1의 격차다.

국방비만 보면, 남의 2013년 전체예산이 약 340조 원이고, 그 중에서 국방예산은 약 10퍼센트인데, 달러로 환산하면 330억 달러 정도. 이에 비해 북한의 1년 예산은 지금 60~70억 달러가 못 된다. 그 중에서 50퍼센트, 즉 절반을 군사비에 쏟아 붓는다 해도 30~35억 달러밖에 안 된다. 남북의 군사예산에 10 대 1의 차이가 난다는 얘기다.

이 실패한 나라, 취약한 북을 바꾸기는커녕 체제 생존을 결과적으로 도와주는 듯한 대북정책, 통일정책. 북을 변화시켜 통일로 가기 위한 방책이 아니라 북의 변화를 가로막고 분단을 영속화하기 위한 방책. 그것으로 이득을 보는 자들…. 유치한 음모론이라고 하겠지만, 그럴 리 없다고 단정할 수도 없는 게 현실이다.

1990년대 중반, 통일 뒤 독일에서 과다한 통일비용이 논란거리가 됐을 때, 일본 장기신용은행이 한반도 통일비용을 예측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독일 사례를 기계적으로 한반도 통일에 대입한 그 연구는 남북한이 통일되면 10년 동안 매년 한국 GDP의 15퍼센트씩을 쏟아 부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면서 "한국 혼자의 힘만으로는 감당 못할 테니 결국 일본이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는 논평까지 달았다. GDP의 15퍼센트면 국가예산의 거의 절반인데, 차라리 통일하지 않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킬 만큼의 출혈이다.

그 연구를 계기로 우리 국내에서도 통일비용 연구 붐이 일었고 하나같이 천문학적인 통일비용들을 제시했다. 40퍼센트가 통일을 바라지 않는다고 한 7월 2일의 서울대생 대상 통일의식 관련 조사 발표까지 증폭돼 온 통일에 대한 부정적 사고의 근저에는 이런 경제적 요인, 특히 천문학적 통일비용이 자신의 호주머니를 비게 만들 것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그것을 누구보다 먼저 촉발한 게 일본이라는 게 아이러니라고 정 총장은 지적했다. 이명박 정부의 통일비용, 통일세 얘기도 거기에 연원이 닿아 있다.

하지만 정 총장은 그런 식의 통일비용 산정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한다. 독일의 통일비용이 산더미처럼 커진 것은 통화통합 탓이 가장 크다. 동서독 화폐는 당시 명목상으로는 2 대 1, 실질적으로는 4 대 1 정도의 가치 격차가 있었다. 즉 서독의 1마르크는 동독 돈 4마르크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뒤 동서독의 통합을 서두르면서, 동독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정치인들이 동서독 화폐를 1 대 1의 동일 가치를 지닌 것으로 간주하는 통화통합을 강행했다. 그 결과 동독인들의 마음을 일시적으로 사로잡았지만, 서독의 4분의 1 가치 밖에 없는 노동력과 기술, 물품에 1마르크의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비용은 4배로 늘었다. 게다가 동독 고향의 땅문서를 지닌 서독인들에게 그 토지에 대한 권리를 인정함으로써 동독 땅값을 일거에 치솟게 만들었다. 결국 높은 인건비(노동력)와 땅값 때문에 서독 기업들이 동독 진출을 꺼렸고, 그것은 동독경제의 오랜 침체와 동서독 소득격차, 고실업 등을 초래해 결과적으로 통일비용을 엄청나게 부풀렸다.

일본 장기신용은행의 통일비용 연구는 이런 사정을 무시했으며, 엄청난 분단비용도 고려하지 않았고, 또 통일될 경우 비용보다 훨씬 더 클 수 있는 통일수익 또한 논의대상에서 빼버렸다. 정 총장은 말했다.

"그러니 통일을 포기하는 것이 차라리 편하게 사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 수 있었습니다. 이게 바로 무서운 분단 이데올로기입니다. 일본 사람들이 참 무서운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우리 분단의 근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데 통일 공포증까지 유포시키면서 분단을 지속시키려는 장난을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통일비용 과다론, 이거 정말 무서운 분단 이데올로기입니다."
 

이것 역시 북한 붕괴론, 흡수 통합론의 득세와 표리관계다.

정 총장이 인용한 신창민 중앙대 명예교수의 '통일비용과 분단비용'(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홈페이지 자료실에 들어가 116번 자료를 클릭하면 볼 수 있단다)을 보면 통일비용은 통일되는 날부터 10년 동안 매년 GDP의 6~6.9퍼센트가 들어가는데, 우리 GDP가 지금 1조 달러 남짓이니 600억~690억 달러쯤 된다. 그런데 통일이 되면 지금 쏟아 붓고 있는 분단비용을 쓰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해마다 30조원 이상, 국가예산의 9~10퍼센트, GDP의 3퍼센트 정도를 국방비로 쓰고 있다. 기타 외교비용 등을 합하면 해마다 분단비용으로 GDP의 4.35~4.6퍼센트를 쓰고 있는데, 통일되면 이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예상 통일비용에서 이 분단비용을 뺀 순 통일비용은 GDP의 1.65~2.3퍼센트, 평균 2퍼센트 정도가 된다. 2011년 GDP를 기준으로 계산하면 연간 200여 억 달러, 20조 원 정도가 되는데, 지금의 국방비 연평균 34조 원의 60퍼센트 정도다. 게다가 통일 뒤에는 연평균 11.25퍼센트의 경제성장을 이룩할 수 있다고 신 교수는 추산했다. 거기서 2퍼센트의 순통일비용 만큼 빼더라도 연평균 GDP 9.25퍼센트의 고도성장을 할 수 있다.

이는 통일비용을 투자로 보는 사고와 맞물려 있다. 철도와 도로, 전기를 연결하는 등 북의 인프라를 새로 깔고 질 좋고 값싼 노동력과 토지를 이용해 공장을 짓고 저렴한 인건비로 경쟁력 있는 고품질의 상품을 쏟아내게 되면 북 주민소득 수준을 단기간에 크게 높일 수 있다. 거기에 필요한 비용을 몽땅 통일비용으로 간주할 수도 있지만, 더 큰 수익을 위한 투자로 볼 수도 있다.

남북 합해 7000만이 넘는 광대한 인구의 거대 시장이 만들어지고, 그것이 중국 동북3성(만주)과 러시아 연해주, 나아가 유라시아 대륙과의 연결로 이어지면서 섬과 같은 지금의 분단 약점을 일거에 털어버릴 획기적 차원 상승으로 나아갈 수 있다.

반면 분단은 그런 가능성을 모조리 차단하고, 한반도 남북 모두 주변 대국들에 종속돼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는 약자 신세가 되도록 속박한다.

미국 주류세력 역시 한국 우파나 일본 우파들처럼 북이 변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주는 게 아니라 북이 먼저 변하지 않으면 대화하지 않겠다는 자세를 고수하고 있다.

1차 북핵위기 때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를 불과 보름여 만에 중간선거에서 승리한 공화당이 사실상 뒤엎은 것, 2005년 6자회담에서 채택한 9·19공동성명 발표 바로 다음날 미 재무부 매파 네오콘들이 방코델타아시아은행(BDA) 예치 북한 자금 동결조처로 공동성명 자체를 무력화시키고 남북관계 자체를 동결시켜버린 것, 2000년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이 평양에 가고 조명록 북 차수가 워싱턴에 간 북-미 접근을 그 직후 대선에서 이긴 공화당 부시 정부가 가로막은 것, 2002년 고이즈미 방북과 함께 급진전되던 북-일 접근을 그 직후 평양에 간 제임스 켈리 국무차관보가 촉발한 북의 고농축우라늄 소동과 제2차 북핵 위기로 막아버린 것 등등. 정 총장은 이런 사건들의 실체와 의미를 일목요연하게, 어렵지 않게 설명한다.

오바마의 민주당 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마찬가지다. 미국이 바라는 것은, 애초에 그들이 갈라 놓은 대로, 한반도 통일이 아니라 분단체제 유지일지도 모르겠다. 대신 미국이 바라는 통합은 한-미-일 통합이다. 그게 일본 우파 이익에도 부합한다. 한-미-일 통합은 북-중 통합 또한 보장해줄 테니까, 중국 역시 영구분단에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게 약자들의 이해는 아랑곳 않는 대국들의 분할 통치방식이다. 거기에 국내의 일부 광신적 반공투사들이 동조하면서 분단구조 속에서 특혜를 누려온 자신들 기득권을 영구화하려 할 것이다. 그 자신 1980년대 말까지 반공투사였던 정세현의 '통일토크'는 그걸 꿰뚫어 보라고 주문한다.
 

 
 
 
 

 

/한승동 <한겨레> 문화부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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