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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초 팔아서만 3억 수익... "저는 게으른 농부입니다"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5/03/15 13:41
  • 수정일
    2015/03/15 13:41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지방소도시 청춘남녀 인터뷰 18] 서른세 살 약초 농부 강상우

15.03.15 10:15l최종 업데이트 15.03.15 10:15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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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우씨의 콩 밭. 지독한 가뭄을 만나서 콩이 타들어갈 때, 상우씨의 가슴도 까맣게 탔다. 곧 아기아빠가 되는 서른 살 가장은 콩밭에서 울었다.
ⓒ 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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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우씨는 3년 전 콩밭에서 울었다. 9년간 연애하고 결혼한 아내와 곧 태어날 아기까지 있는 서른 살 가장은 주저앉아 울었다. 폐염전을 개간한 전북 군산 하제 땅 1만 평, 임대해서 콩을 심었다. 콩이 자라는 모습은 대견했다. 수확을 한 달 앞두고 지독한 가뭄을 만났다. 하루에 40만 원씩 주고 살수차를 빌려서 밭에 물을 퍼부었다. 콩은 다 타들어갔다. 불가항력이었다.

다음 해 여름에는 내내 폭우가 쏟아졌다. 한꺼번에 파랗게 돋아나서 자라던 콩은 폭삭 주저앉았다. 그래도 상우씨는 콩 농사를 팽개치지 않았다. 지인에게 농사지을 수 있는 땅을 소개 받았다. 경기도 용인에 있는 땅 1만 5천 평, 임대료는 없었다. 군산에서 전용 도로를 타고 쉬지 않고 오가면 왕복 4시간, 상우씨에게는 아득한 거리가 아니었다. 

"승합차에 같이 일할 동네 할머니들 여덟 명을 모시고 갔어요. 1톤 트럭에는 기계를 싣고요. 그렇게 차 두 대 움직이면 경비만 25만 원 들죠. 근데 콩 농사는 손이 많이 안 가요. 한 해 동안 용인에 많이 가야 10번, 250만 원 들어요. 군산에서는 더 작은 면적을 빌리는 데 임대료가 천만 원 넘었거든요. 용인은 농사도 잘됐어요. 몇 천만 원의 수익을 냈어요." 

스물다섯, 농부의 길을 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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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우씨와 할머니가 쑤어서 매단 메주.
ⓒ 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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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콩 농사를 짓는 상우씨, 할머니에게 메주 쑤어서 된장 담그는 법을 배웠다.
ⓒ 매거진군산 진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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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우씨는 태어나 보니 군산 '회현 떡집'의 손자였다. 꼭두새벽부터 일어나서 해야 하는 떡집의 고된 일. 할머니와 어머니가 맡아서 했다. 어린 상우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할머니 곁에서 일을 돕다가 학교에 갔다. 성인이 된 상우씨는 제대 후 호원대학교 전기학과에 복학하면서부터 농사를 직업으로 삼았다. 그때 나이 스물다섯 살이었다. 

어머니는 반대했다. 힘들게 몸 쓰면서 일해도 불확실성이 큰 게 시골 일이니까. 상우씨는 "떡집 일이 없을 때는 콩 농사를 하면 돼요"하고 고집을 부렸다. 한 분야의 명인까지 되고 싶었던 상우씨는 할머니한테 메주 쑤어서 된장 담그는 것을 배웠다. 그래서 콩 농사를 포기하지 않았다. 씨 뿌리고 수확까지 5~6개월, 열흘 정도만 바짝 일하는 것도 콩 농사의 매력이었다.

스물일곱 살 상우씨, 순창에서 열린 농축산식품부의 장류 교육을 6개월간 받았다. 일본에 가서 쯔게모노(장아찌)와 미소 된장을 만드는 현장도 보았다. 그는 차츰 발효 식품과 발효 효소에 눈을 떠갔다. 농업기술원, 평생교육원, 임업진흥원에서 열리는 교육마다 찾아다녔다. 그의 동료는 50대나 60대, 그 속에서 상우씨는 각종 약초와 식품 관련 자격증 8개를 땄다.

상우씨가 농사 지은 지도 5년째, 자기 소유의 땅은 없었다. 집 옆에 딸린 텃밭이 전부였다. 동네 사람들은 떡집 손주가 성실하게 일하는 것을 보고 "여기 농사지을래?" 하면서 땅을 맡겨왔다. 상우씨는 군산시 회현면 일대 20여 군데의 땅에 농사짓게 됐다. 그는 씨가 발아해서 싹이 나고, 대공이 올라오고, 알이 맺히는 모습에 매료됐다. 보기만 해도 좋았다. 

"상우야, 이거 한 번 해보자!"

어느 날 충남 공주에서 와송을 보고 온 아버지가 말했다. 마침 맞게 약용 식물에 관심을 쏟고 있던 상우씨는 흔쾌하게 따랐다. 처음에는 땅 1백 평에 와송을 심기로 했다. 친척한테서 6백만 원을 빌려 종자 만 개를 사왔다. 첫해 농사에서는 심은 와송 중 50%만 살려도 성공이라고 본단다. 상우씨는 그 중 90%를 살려서 2천만 원의 소득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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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우씨가 실험적으로 해 본 와송 공동농장
ⓒ 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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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대성공이었죠. 콩 농사를 몇 만 평 하는 것보다 와송이 훨씬 낫다는 걸 알았어요. 그런데도 고민이 따라왔어요. 저도 그렇고, 대다수의 농민도 빚을 안고 일을 하고 있어요. 근데 빚지고 농사를 짓다가는 정말 힘든 상황을 만나게 돼요. '이건 전망이 좋아' 하면서 무리를 하면, 농사는 순식간에 주저앉을 수가 있거든요. 태풍이나 가뭄 닥친 것처럼요."

고추, 콩, 와송... 그가 도전한 농사

상우씨는 콩 농사 전에 고추 농사를 지었다. 수확의 기쁨이 커서 땡볕에서 고추 따는 일은 힘들지 않았다. 그러나 고추는 일일이 사람 손이 닿아야 했다. 가격 변동은 예측조차 안 됐다. 그는 6년간 농사 지으며 성공과 실패 속에서 알았다. 식량 자원과 약용 식물, 단기 소득 작물(콩, 와송, 어성초)과 중장기 소득 작물(매실, 감, 구찌뽕, 산양삼)을 같이 해야 좋다는 것을.

자칭 '게으른 농부'인 상우씨는 콩처럼 손이 많이 안 가는 약초를 선호했다. 피를 맑게 해 주는 어성초와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자소엽은 상우씨에게 딱 맞았다. 작물을 심어놓고 풀 관리만 두세 번 해 주면 수확 철이 왔다. 더구나 깻잎처럼 생긴 자소엽은 새순을 끊어서 거두고 뒤돌아서면, 또 새순이 올라왔다. 1년에 네다섯 번까지 수확할 수 있었다.  

작물 중에서 상우씨가 가장 힘을 쏟는 건 와송이다. 첫해는 1백 평, 지난해에는 2천 평에 와송을 심었다. 올해는 1만 5천 평에 70만 개의 와송을 심는다. 와송은 30~40cm까지 자라는 약용식물이다. 항암 효과가 있다. 또 해열, 지열, 간염, 아토피, 위와 장에 특효가 있다. 기와 위나 바위틈, 산과 밭에서 자란다. 1년 전부터 한약재뿐 아니라 식품으로 쓸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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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송 밭에 마사토를 뿌리는 작업
ⓒ 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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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초 생산하는 건 일도 아니에요. 판매가 힘들죠. 사람들한테 이게 어디에 좋은지를 납득 시키기가 어렵죠. 그래서 한국바위솔(와송)협동조합에 가입했어요. 거기로 와송을 출하해요. 협동조합은 노지에서 재배한 와송만 받아줘요. 와송은 비를 많이 맞으면 주저앉아요. 근데 비닐하우스 거는 햇볕을 못 봐서 '제7의 영양소'라는 파이토케미칼 성분이 별로 없어요."

한편, 상우씨는 시험 재배를 해 봤다. 연습 삼아 전북 임실의 작은 땅에서 세 사람이 콩 농사를 짓고 똑같이 수익을 나눴다. 지난해부터는 본격적으로 '공동 농장'을 꾸렸다. 약용 식물을 공부하는 동료 일곱 명과 함께. 공동 농장의 장점은 비용 부담을 던다는 것과 여러 사람이 모이니 지인 판매가 쉽다는 것. 다만 사는 지역이 제각각이라 한두 명만 농사를 짓게 된다는 게 단점이었다.

올해도 상우씨는 공동 농장을 계속한다. 와송 1주당 500원, 2만 주를 1천만 원에 분양했다. 투자자 일곱 명을 모아서 농사지을 땅을 임대했다. 밭을 뒤집고, 로터리를 치고, 퇴비를 갖다 넣고, 줄을 맞춰서 관리기로 고랑을 파고, 쇠스랑으로 북을 주는 일은 상우씨가 맡아서 한다. 그는 공동 농장 '밴드'에 날마다 작업 내용과 작물의 성장 모습을 올린다. 

"농사는 '3년에 한 번만 풍년이 들어도 돈 번다'는 말이 있어요. 그러니까 세 번 중 두 번은 실패를 할 수 있는 게 농사예요. 제가 투자자를 모아서 하는 공동 농장도 망할 수 있어요. 자연재해가 오면요. 지난해에 밭 상황을 공동 농장 하는 분들한테 날마다 알려줬어요. 그런 과정을 거치니 충분히 이해해 주더라고요. 모든 투자는 손실을 볼 수 있으니까요."

예전에 상우씨는 농부가 밭에서 일하며 콩이나 고추한테 말 건다는 의미를 몰랐다. 요새는 안다. 밭에 가면, "약성 좋게 잘 자라서 여러 사람한테 도움되어라"고 말한다. 옛날 사람들이 장 담그는 날짜를 받고 나서 목욕 재개를 하고, 장 항아리 앞에서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했던 마음을 헤아린다. 그는 부정 탈까 봐 욕심을 품지 않는다. 잡생각은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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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 사람들은 장 담그는 날짜를 받고, 목욕재개를 하고, 장항아리 앞에서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했다고 한다. 그래서 상우씨는 부정 탈까 봐 장독대에서 욕심을 품지 않는다.
ⓒ 매거진군산 진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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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우씨의 꿈

지난해 가을부터 '회현 떡집'에는 조부모님과 부모님, 상우씨 부부와 아기까지 4대가 함께 산다. 상우씨는 군산 미룡동의 한 아파트에서 출·퇴근하는 농부였다. 농사 규모가 커지자 그의 아내는 "시댁으로 들어가자"고 했다. 상우씨는 부담을 느꼈다. 그는 젊다. "일찍 들어와라", "일찍 일어나라" 같은 잔소리를 듣는 게 싫었다. 도심에서 살고 싶었다. 

"어느 일요일이었어요. 부모님 집에 와서 밥을 먹고 있는데 할아버지가 슬그머니 숟가락을 내려놓으시는 거예요. 저희 아기를 계속 쳐다보고 계시려고요. 그 눈빛이 너무 마음에 걸렸어요. 제가 장손으로 자라서인지 늘 마음속에 책임감을 갖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아파트 팔고 들어왔어요. 와송 농사도 만 평 이상 지어서 출·퇴근하는 게 점점 힘들어졌고요."  

지난해에 상우씨는 협동조합에 11톤 트럭 두 대 분의 와송을 납품했다. 올해는 약 50만 개를 조합에 보낼 예정이다. 그러나 그는 언제까지나 안정적으로 납품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와송을 사가는 큰 회사들은 순식간에 마음을 바꿀 수 있다. 이윤을 따라가는 곳이니까. 상우씨는 고민했다. 당장 올해 농사지어서 생기는 잉여 와송 20만 개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상우씨는 동갑내기 아내 박은하씨와 오랫동안 의논했다. 그는 공동 농장을 만들 때처럼, 와송과 어성초, 자소엽으로 뭐라도 한 번 해보기로 했다. 잉여 약초로 비누, 화장품, 모발 스프레이, 먹는 환과 가루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아는 사람들한테 "관절염에 좋아요. 탈모에도 좋고요. 아토피 같은 피부 질환도요"하면서 줬다. 그의 어머니와 할머니는 이해를 못했다.

"상우야. 힘들게 농사지어서 그렇게 다 퍼주면, 너 거지 되겠다. 응?"
"걱정 마세요. 모르는 걸 어떻게 돈 주고 사요? 저부터도 안 사는데요. 그러니까 많은 사람한테 와송이랑 약초가 몸에 좋다는 걸 알려 줘야죠." 

상우씨는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더딘 길을 택한 셈이다. 그가 만든 약초 제품들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지금은 하루 평균 50만~70만 원씩 주문 전화가 온다. 농사지은 지 7년째, 땅 임대하고 작물 사면서 진 2억 원의 빚도 줄고 있다. 올해는 와송으로 3억 원. 떡집과 약초 가공으로 1억 원의 수익을 예상한다. 그러나 태풍이나 가뭄을 만나면, 별수 없다는 그가 말했다. 

"농부는 1년 내내 일하지 않아요. 저같이 게으른 농부도 콩 농사지어서 논 1600평을 샀어요. 할아버지, 할머니 평생 소원이 논을 갖는 거였거든요. 농사는 어떤 직업보다 메리트가 있어요. 체계적으로 하면요. 저는 사람들한테 약초나 발효 식품을 알리고 싶어요. 몸이 아프면, 사람들은 산으로 가잖아요. 그 분들이 산책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들고 싶어요. 약초를 가공하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도요. 진정한 의미의 6차 산업, 그게 제 꿈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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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산시 회현면 '회현 떡집'에는 상우씨네 식구 4대가 함께 살아간다.
ⓒ 매거진군산 진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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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매거진군산 3월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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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을 두려워하라”...인사동 거리서 가면 행진

[영상] “국민을 두려워하라”...인사동 거리서 가면 행진

 


'민주주의와 민생 파괴를 걱정하는 시민들'이 

 

 

 

 

 

 

'민주주의와 민생 파괴를 걱정하는 시민들'이 주말 도심에서 박근혜 정권 규탄 행진을 벌였다.

14일 오후 40여명의 시민둘은 서울 청계광장에 모여 행진을 시작해 종로 ‘젊음의거리', 인사동을 지나 북인사마당까지 한시간 가량 침묵행진을 했다.

시민들은 모두 영화 '브이 포 벤데타'에 등장하는 '가이 포크스'(Guy Fawkes)' 가면을 쓰고 있었다.

'정부는 국민을 두려워하라'는 글씨가 적힌 검은 현수막이 대열의 앞에 섰고, 가면을 쓰고 손에 피켓을 든 시민들이 그 뒤를 따랐다.

피켓에는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유신부활 박근혜 아웃”, “세월호 진실을 인양하라” 등 각자 외치고 싶은 구호가 적혀 있었다.

14일 오후 40여명의 시민둘이 서울 청계광장을 출발해 종로 ‘젊음의거리', 인사동을 지나 북인사마당까지 걷는 '박근혜 정권 규탄 행진'을 하고 있다.
14일 오후 40여명의 시민둘이 서울 청계광장을 출발해 종로 ‘젊음의거리', 인사동을 지나 북인사마당까지 걷는 '박근혜 정권 규탄 행진'을 하고 있다.ⓒ민중의소리

한 참가자는 최근 박근혜 대통령 비판 유인물 살포에 대한 경찰의 대대적인 수사를 비판하며 "시민들이 자기 얼굴을 내놓고 정부를 비판하는 것도 힘든 세상이 됐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은 온라인을 통해 행진을 제안하고 참가 지침 등을 공유해 자발적으로 모였다. 고등학생부터 대학생, 직장인까지 젊은층의 참가가 많았다.

올해 고3이라고 밝힌 한 여학생은 "세월호 참사로 떠난 학생들과 동갑인데, 그 친구들에게 미안한 마음에 나오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 친구들도 살아있었다면 공부하고 있었을 것"이라며 "오늘 학원 가는 날인데 학원 대신 여기에 오게 됐다”고 말했다.

고려대에 재학 중이라는 한 학생은 “학생들도 정부의 어처구니 없는 독재적 발상과 행동에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지만 용기있게 행동에 옮기지 못해 가만히 있는 것 뿐”이라며 “양심 있는 사람들이 가면을 쓰고 행진을 하는 것으로 그런 용기를 불러 일으킬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참여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날 행진이 인사동 거리를 지나자 주말 나들이를 나온 많은 시민들과 외국인 관광객들이 호기심에 휴대폰을 꺼내들고 이들의 모습을 담느라 분주했다.

참가자들은 오후 5시경 종로구 북인사마당에서 뮤지컬 ‘레미제라블’에 등장하는 ‘민중의노래’를 합창하는 것으로 행진을 마감했다.

14일 오후 40여명의 시민둘이 서울 청계광장을 출발해 종로 ‘젊음의거리', 인사동을 지나 북인사마당까지 걷는 '박근혜 정권 규탄 행진'을 했다.
14일 오후 40여명의 시민둘이 서울 청계광장을 출발해 종로 ‘젊음의거리', 인사동을 지나 북인사마당까지 걷는 '박근혜 정권 규탄 행진'을 했다.ⓒ민중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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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은 강한 사람이지만, 문재인은 좋은 사람

등록 : 2015.03.13 19:02수정 : 2015.03.14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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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토요판] 박성민의 ‘2017 오디세이아’
(5)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려면
노무현은 강한 사람이지만, 문재인은 좋은 사람
정치인은 ‘배은망덕’의 숙명…결단의 시간 다가와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이 29%까지 떨어졌을 때, 왜 사람들은 “문재인이 됐으면 잘했을 텐데”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만약 2012년 대선에서 이겨 대통령이 된 문재인의 지지율이 그렇게 떨어졌다면 “박근혜가 됐으면 잘했을 텐데”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꽤 있었을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율이 떨어졌을 때도 박근혜나 이회창이 되었다면 더 잘했을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이 꽤 있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놀라운 일이다. 어느 대통령이라도 지지율이 20%대로 떨어진다면 그 자리에 있었으면 더 잘했을 것 같은 누군가가 있기 마련이고 그건 대체로 경선이나 본선에서 아깝게 패배한 사람의 몫이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이 29%로 떨어졌는데도 불구하고 불과 3.53%의 근소한 차로 졌을 뿐만 아니라 대선 역사상 두 번째로 많은 표를 얻은 낙선자인 문재인은 왜 그런 평가를 받지 못했을까? 그뿐만 아니다. 제1야당의 대표이자 차기 대선 주자들 중에 지지율이 1위인데도 국민은(심지어 지지자들조차) 다음 대통령으로 문재인을 확신하지 못한다.

 

 

문재인은 무엇이 부족한가?

 

현직 대통령의 인기가 떨어졌을 때 국민이 ‘그 사람’이 대통령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누군가가 쉽게 떠오른다면 그건 아마도 그가 ‘대통령 자리’에 앉은 모습이 자연스럽게 상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지자들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여전히 국민에게 ‘문재인 대통령’은 어색하다. 대통령에 안 어울릴 것 같은 정치인(군인)도 대통령이 된다면 국민은 대통령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지지 여부와 상관없다) 어쨌든 대통령이 되면 대통령의 이미지가 생긴다. 미국의 유명한 정치드라마 <웨스트 윙>에 이런 에피소드가 나온다. 라틴계인 산토스 의원이 대통령에 도전하게 되는데 참모가 이런 말을 한다. “의원님은 다 좋은데 목소리는 대통령 목소리가 아니에요.” 가볍게 던진 참모의 이 한마디가 산토스 의원을 주눅 들게 한다.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슬쩍 물어본다. “정말 내 목소리가 대통령에 어울리지 않는가?” 그렇게 물어보니 상대는 아무렇지도 않게 “목소리는 그렇죠”라고 말한다. 그는 점점 자신감을 잃어간다. 그러던 어느 날 한 핵심 참모는 그에게 이렇게 소리 지른다. “대통령다운 목소리가 어디 있습니까? 대통령이 내면 대통령 목소리지.” 그렇다. 문재인도 대통령이 되었다면 대통령의 이미지가 생겼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떨어졌을 때도 그런 이미지가 강한 정치인들(예컨대 김영삼, 김대중, 이회창)과 비교해 봤을 때 확실히 뭔가 부족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게 뭘까? 나는 단언컨대 ‘지도자 이미지’라고 생각한다. 대통령은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니까 그런 이미지가 없다면 국민이 대통령으로 선택하기 어렵지 않겠는가? 지도자는 이끄는 사람이다. 문재인은 아직도 국민과 당을 이끌지 못하고 있다.

 

국민은 대통령을 뽑을 때 세 가지를 비교한다. 업적(과거)·비전(미래)·이미지(현재)가 그것이다.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와 문재인 모두 업적은 약했다.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은 민주화의 업적이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역주의와 싸운 업적이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서울시(청계천·버스중앙차로)를 바꾼 업적이 있다. 그에 비해 두 후보 모두 내세울 만한 업적이 없었지만 문재인은 더 없었다. 비전 역시 두 후보 모두 부족했다.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을 ‘메가 이슈’가 없었다. 결국 승부는 이미지에서 갈렸다. 민정수석과 비서실장을 지낸 문재인의 ‘참모’ 이미지는 퍼스트레이디와 한나라당 대표를 지낸 박근혜의 ‘지도자’ 이미지에 맞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대통령 후보와 야당의 대표를 맡고도 국민에게 지도자의 이미지를 심지 못한다면 대통령은 말할 것도 없고 대통령 후보도 되기 어려울 것이다.

 

선거에 나서는 모든 후보는 세 가지 지위 중 하나에 속한다. 현역이거나 계승자이거나 아니면 도전자다. 우리나라 대통령은 단임이기 때문에 대선에서 현역은 없다. 새누리당 대선 후보는 계승자 지위를 갖게 될 것이고 야권의 유력 후보들은 모두 도전자의 지위로 대선 후보의 자격을 얻기 위해 경쟁하게 될 것이다. 도전자 포지션인 야권의 문재인·박원순·안철수는 캠페인에서 국민과 지지자에게 세 가지를 증명해야 한다. 첫째,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이 나라를 잘못 이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권을 교체해야 한다. 둘째, 내가 대한민국을 이끌 더 나은 비전과 리더십이 있다. 셋째, 내가 더 경쟁력이 있다. 첫째는 세 후보 모두의 공통 과제지만 공격은 자기의 강점이 드러나는 방향에서 해야 하기 때문에 내용은 세 후보 모두 다를 수 있다. 둘째와 셋째 과제는 후보마다 차별이 분명히 드러나는 캠페인 목표인데 앞의 것은 국민을 상대로 하는 것이고 뒤의 것은 지지자를 상대로 한다는 차이가 있다. 문재인 대표의 지지율이 1위라는 것은 야권 지지자들이 현시점에서는 경쟁력을 평가한다는 의미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 그 자리의 주인공이 박원순 서울시장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아직은 우열이 드러난 것은 아니다. 세 후보 간의 의미 있는 우열은 역대 대선 경선의 사례를 봤을 때 2016년 추석 이후에나 드러날 것이다. 아직은 세 후보 모두에게 기회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박근혜의 지지율 급락하는데도
왜 사람들은 “문재인이 됐으면
더 잘했을 텐데”라 말 안할까
대선에서 근소한 차로 진 그를
차기 대통령으로 확신 못 하나

 

정치 지도자는 민주적 리더십과
소통 중요하다는 말에 동의 못해
지도자는 카리스마로 결단하고
책임지는 ‘강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명예로운 호칭이다

 

이회창의 길 갈 거라는 비관적 전망

 

문재인은 대통령이 될 수 있을까? 그의 경쟁력을 회의적으로 보는 야당의 비판자들은 그가 이회창의 길을 걷게 될 것이라고 비관적으로 전망한다. 야당의 후보는 될 것 같지만 이회창처럼 확장성의 한계로 근소하게 또 지게 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그런 생각을 가진 야권 지지자는 외연 확대가 가능한 박원순 시장을 유력한 대안으로 생각한다.(실제로 한국리서치가 매달 하는 조사에서 박원순 시장은 여야 대선 후보 중에 호감도 대비 비호감도의 비율이 꾸준히 가장 낮게 나온다) 그들에게는 중도 이미지의 안철수도 여전히 살아 있는 카드다. 문재인의 경쟁력에 더 비관적인 사람들은 후보가 되기도 어렵다고 단언한다. 실제로 1987년 이후 메이저 정당에서 두 번 연속으로 출마한 후보는 김영삼·김대중·이회창 세 명이다. 이들과 문재인은 두 가지에서 차이가 있다. 세 사람 모두 대선 패배 후에도 여전히 대통령에 어울리는 지도자의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당을 70% 이상 확실히 장악했다는 것이다. 김영삼은 3당 합당할 때는 소수파였지만 1992년 대선 경선 당시에는 이미 당을 70% 장악했다. 김대중은 새정치국민회의를 직접 창당했으니 말할 것도 없다. 이회창도 한나라당을 70% 이상 장악했기 때문에 연속으로 도전할 수 있었다. 문재인도 그럴 수 있을까? 이회창은 1997년 대선 패배 후 1년도 지나지 않은 1998년 8월에 압도적으로 승리하면서 당에 복귀했는데 문재인은 대선 패배 후 2년 뒤 전당대회에서 불과 3.5%의 차이로 겨우 이겼다. 그것도 (권리)당원에서는 졌다. 호남의 대표적 정치지도자인 박지원과 정동영, 그리고 천정배는 호남을 배경으로 문재인에 맞선다. 호남에서는 2003년 노무현 정부가 대북송금 특검을 받아들인 것과 민주당을 깨고 열린우리당을 창당한 것, 그리고 호남 인사 불이익을 근거로 문재인에 대한 지지를 유보한다. 현재 새정치민주연합의 역학구도로는 당의 50%도 장악하기 힘겨워 보인다. 그런 조건에서 두 번 연속 출마가 허용될까? 지역주의에 맞섰던 노무현은 특유의 당당함으로 호남에서 경선 승리를 했는데 문재인은 지역주의에 기댄 정치인과 당원의 눈치를 여전히 살피고 있는 듯 보인다. 지도자는 유불리를 따지면 안 된다. 끌려다니면 지도자가 될 수 없다. 지도자는 이끌어야 한다. 지역주의에 기댄 정치인과는 싸워야 한다. 지도자의 이미지는 ‘용기’로 얻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정치지도자에게 민주적 리더십과 소통이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지도자는 카리스마를 갖고 결단과 책임을 지는 ‘강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명예로운 호칭이다. 나는 정치인과 기업인, 그리고 군인은 매일매일 ‘실존적 결단’을 해야 하기 때문에 ‘좋은 사람’보다는 ‘강한 사람’이 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강한 사람은 합목적적이고 좋은 사람은 합리적이다. 강한 사람은 단점이 많지만 강점도 많다. 좋은 사람은 장점이 많지만 약점도 많다. 좋은 사람은 훌륭한 학자, 종교인, 언론인, 법조인, 시민운동가가 될 수 있지만 위대한 정치인, 군인은 되기 어렵다. 노무현은 강한 사람이지만 문재인은 좋은 사람이다. 2012년 박근혜와 문재인이 맞붙었을 때 니체가 <도덕의 계보학>에서 말한 두 종류의 권력이 떠올랐다. 그는 “죄의식이 없고, 귀족적 야수성을 가졌으며,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고, 깨끗한” ‘전사의 권력’과 “금욕적이고, 반성적이며, 죄의식적이고, 괴로워하고, 분개하는” ‘도덕적 권력’의 싸움으로 문명의 발전사를 봤다.

 

국민은 지도자의 정책이나 노선을 보고 지지를 결정하지 않는다. 국민은 메시지보다 메신저를 먼저 본다. 결국 노선이 아니라 리더십이 중요한 것이다. 김영삼이 3당 합당을 했을 때, 김대중이 김종필과 디제이피(DJP) 연대를 했을 때, 노무현이 재벌인 정몽준과 단일화를 했을 때, 박근혜가 경제민주화·복지 등 진보 의제를 수용했을 때도 지지자들은 등을 돌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을 좋아했고 지도자로 신뢰했기 때문이다. 대중은 이슈보다는 이슈를 다루는 태도를 더 중요하게 보기 때문에 유불리 따지지 않고 앞서 싸우는 전사의 권력을 더 신뢰한다.

 

문재인은 과거의 대통령들이 가졌던 확실한 기반이 없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의 물리적 기반(총과 돈)이 없다. 김영삼·김대중의 역사적 기반(민주화를 이끌었다)도 없다. 노무현의 도덕적 기반(3김의 지역패권주의와 싸웠다)도 없다. 박근혜의 지역적 기반(그는 대구·경북과 충청 두 곳을 고향으로 인식시켰다)도 없다.

 

그는 김대중이 가졌던 사상가의 자질인 ‘통찰력’도 없다. 김영삼이 가졌던 정치가의 자질인 ‘결단력’도 없다. 박정희가 가졌던 경영가의 자질인 ‘추진력’도 없다. 노무현이 가졌던 운동가의 자질인 ‘설득력’도 없다. 그럼 문재인은 무엇으로 대통령이 되려고 하는가?

 

 

노무현과 김근태의 차이, 배은망덕의 숙명

 

정치캠페인의 전략적 목표는 ‘사적 욕망’을 ‘공적 이미지’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만약 문재인이 친노의 사적 욕망을 뛰어넘지 못한다면 ‘사적 이미지’에 머무르고 말 것이고 대통령이 되기 어려울 것이다. 실존적 결단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강한 사람 노무현은 자기를 정치적으로 키워준 김영삼·김대중의 공보다는 과를 많이 보고 싸웠기 때문에 대통령이 됐다. 정치인은 배은망덕의 숙명을 타고났다. 좋은 사람 김근태는 김영삼·김대중의 공을 더 크게 봤기 때문에 그들을 극복하지 못했다. 문재인도 결단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당내 지역주의와 싸워야 한다. ‘대한민국과 싸우는’ 세력과 결별하지 않고는 ‘대한민국을 위해 싸우는’ 이미지의 보수를 이길 수 없다. 국민은 대통령을 뽑을 때는 국회의원이나 서울시장을 뽑을 때보다 좀 더 신중하게 판단한다. ‘시민’의 정체성에서 ‘국민’의 정체성으로 기준이 이동한다. 안보 이슈가 대선에서 중요한 이유다. 당을 위해 헌신하지 않고 자신을 위해 당이 희생해 달라는 정치인들과 결연히 맞서 싸우지 않으면 반대자들에게 조롱을 당할 것이다. 국민은 사자를 지도자로 선택한다. 대한민국을 반드시 경영해보겠다는 의지 없는 정치인을 지도자로 뽑지 않는다. 박정희·전두환·김영삼·김대중·박근혜 모두 강한 권력의지를 갖고 있었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 목숨까지 건 사람들이다. 노무현도 쉽지 않은 상대와의 끊임없는 투쟁을 통해 열렬한 지지층을 만들어냈다. 노무현은 1988년에 국회의원이 된 후 14년 뒤인 2002년에 대통령이 됐다. 이명박은 1992년에 국회의원이 된 후 15년 뒤인 2007년에 대통령이 됐다. 박근혜는 1998년 국회의원이 된 후 14년 뒤인 2012년에 대통령이 됐다. 15년쯤 공적 영역에서의 활동을 지켜본 뒤 나라를 맡긴 것이다. 국민은 문재인의 공적 활동의 기점을 언제로 판단할까? 2012년 국회의원이 된 시점이라면 아직은 이르다고 볼 것이고 2003년으로 본다면 경쟁자들보다 유리할 수 있다. 그보다 먼저 문재인이 답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지도자가 되지 않고 대통령이 될 수 있는가?

 

박성민 정치 컨설턴트
다음 호에는 ‘그들은 어떻게 지도자가 되었나?’를 주제로 다룰 것이다.

 

박성민 정치 컨설턴트

 

▶박성민 정치 컨설턴트. 1991년 설립한 ‘민(MIN) 컨설팅’ 대표. 30년간 정치를 현장에서 관찰하고 수많은 선거를 이끌었다. 전략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승리를 위한 캠페인 방법을 몸으로 익혔다. 세계 최고의 전략컨설팅 회사를 꿈꾼다. 생각이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지혜가 민주주의라고 믿고 있다. ‘힘든 일은 있어도 나쁜 일은 없다’는 인생관으로 버틴다. 책과 영화, 커피를 사랑하며 걷는 것을 즐긴다. ‘2017 오디세이아’를 통해 차기 대선을 향한 여정을 독자들과 함께한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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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버스'의 부활... '이창근의 눈물' 통했다

 

[현장] 쌍용차 희망행동 1000여 명 참여... 2만6000개 자물쇠 첫 발

15.03.14 19:09l최종 업데이트 15.03.15 08:36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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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일 오후 이창근 쌍용차노조 기획실장이 92일째 굴똑농성중인 경기도 평택시 쌍용자동차 공장앞에서 희생자 26명 명예회복과 해고자 187명 복직을 응원하는 '3.14 쌍용차 희망행동' 행사가 전국각지의 투쟁사업장 노동자와 시민들이 모인 가운데 열렸다. 공장벽에 '우리 살자' '사랑해' 글씨가 비춰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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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가자들이 굴뚝위 이창근 기획실장을 향해 휴대폰 불빛을 흔들며 함성을 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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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보강 : 14일 오후 9시 3분]

"사랑해" "우리 살자" 

빛과 함성 소리는 철조망을 넘어 굴뚝에 닿았다. 굴뚝 아래 노동자들이 어두컴컴해진 쌍용차 공장 벽과 굴뚝으로 투사한 대형 빛 글자가 나타나자, 굴뚝 위 노동자도 "또 와요"라고 굴뚝에 새긴 글자에 손전등을 비춰 화답했다. 

'이창근의 눈물'이 통했을까? 14일 오후 경기도 평택시 쌍용자동차 공장 앞은 전국에서 모인 1000여 명의 노동자와 시민들로 가득 찼다. 쌍용차 굴뚝 농성 92일째를 맞아 전국에서 다시 '희망버스'가 출발한 것이다(관련 기사 : "우리가 앵벌이도 아닌데..." 쌍차 굴뚝농성 이창근의 눈물). 

지난 11일 김정욱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사무국장이 노사 교섭을 위해 내려오면서 굴뚝 위엔 이제 이창근 기획실장 혼자 남아있다. 쌍용차 희생자 26명의 명예 회복과 해고자 187명 의 복직을 응원하는 '3.14 쌍용차 희망행동'의 의미가 그만큼 더 절실해진 것이다. 이날 굴뚝을 에워싼 철조망엔 각양각색의 자물쇠들이 달려 홀로 남은 굴뚝 노동자를 응원했다. 당신은 외롭지 않다, 우리가 기억하고 있다고.

전국서 모인 희망버스 "혼자 남았지만 외롭지 않다" 

이날 오후 쌍용차 천막 농성장이 있던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출발한 버스 5대를 비롯해 부산, 목포, 수원 등 전국 곳곳에서 출발한 '희망버스'가 굴뚝 앞으로 속속 도착했다. 한진중공업 희망버스 참가자, '굴뚝신문' 배달부처럼 이창근 실장이나 쌍용차지부와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우리나라의 노동 현실을 직시하려고 멀리 독일에서 온 유학생, 캠퍼스를 벗어나 현실로 뛰어든 교수와 대학생, 희곡작가, 시인, 수녀까지 참가자들의 이력도 사연도 다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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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망행동에 참여한 수녀들이 굴뚝농성중인 이창근씨를 향해 기도를 한 뒤 손을 흔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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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민들이 쌍용자동차 공장 철망에 희생자와 해고자를 잊지 않겠다는 의미로 '희망 자물쇠'를 매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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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문 버스 4호차에 탑승한 한경화씨는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을 향하던 희망버스에서 처음 만난 이창근 실장을 떠올렸다. 한씨는 "한진 본사 앞에서 24시간 1인 시위를 벌일 때 이창근은 주변 모두를 채우는 힘을 보여줬다"면서 "이창근이 아프니 모두 아프다, 함께 그 아픔을 채우자"고 당부했다.

한 서울지하철 노동자는 "야만적인 사회에서 행동하는 사람을 응원하러 가는데 (오히려) 한진중공업(희망버스)처럼 위로 받고 올 수도 있다"면서 "이창근 실장이 <오마이뉴스> 팟짱과 인터뷰하며 우는 걸 보고 외롭지 않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 왔다"고 말했다.  

이들을 비롯해 희망행동 참가자들은 응원 메시지를 담은 편지를 준비했다. 김득중 쌍용차지부장과 이영주 민주노총 사무총장, 이형자 밀양송전탑반대대책위 총무는 이날 오후 대표로 쌍용차 공장 안으로 들어가 이 편지들을 이창근 실장에게 직접 전달했다.

세월호 희생자 가족도 굴뚝을 찾았다. 아직 실종 상태인 단원고 학생 허다윤양 어머니 박윤미씨는 이날 만남의 행사에서 단상에 오르자마자 울먹였다. 박씨는 "쌍용차에서 희생당한 26분을 봤는데 가족을 잃은 아픔을 우리도 잘 안다"면서 "아직도 내 딸은 수학여행 가서 333일 동안 그 차가운 바다에 있다, 우리가 바라는 건 내 딸과 실종자 9명이 돌아와 (우리가) 유가족이 되는 것"이라고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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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3세 생일을 맞은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에게 집회 참가자들이 "사랑합니다"를 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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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택시 쌍용자동차 공장앞에서 투쟁사업장 노동자들과 시민들이 결의대회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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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은 이곳에서 여든 세 번째 생일을 맞았다. 백 소장은 "쌍용차 문제 해법은 석 달 넘게 굴뚝에 있는 이창근을 내려오게 하고 박근혜가 저기 딱 1초만 올라가게 하는 것"이라면서 "박근혜와 인도 마힌드라 회장, 쌍용차 사장이 굴뚝 위에 올라가면 쌍용차 문제도, 전국 해고자 문제도 해결될 것"이라고 말해 큰 박수를 받았다.

전국 투쟁 노동자들 한 자리에... '4월 총파업' 각오 다져 

이날 행사는 전국 투쟁 사업장 노동자들이 준비한 각종 먹을거리와 전시 행사 등으로 시골 장터를 연상시켰다. 이창근과 쌍용차 노동자뿐 아니라 전국에서 투쟁 중인 비정규직, 해고 노동자들이 서로 격려하고 연대의식을 다지는 자리이기도 했다.

'굴뚝 노동자' 역시 이창근 실장만이 아니다. 차광호 스타케미칼 해고자 복직투쟁위원회 대표도 사측의 폐업에 맞서 지난해 5월 27일부터 경북 구미 스타케미칼 공장 굴뚝에 올라가 300일 가까이 굴뚝 농성을 벌이고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 101명 해고에 맞서 천막농성을 벌이고 있는 동양시멘트 노조, 쌍용차 해고자 마음을 치유했던 계약직 '마음 치유사' 복직을 위해 투쟁 중인 마인드프리즘 노조, KTX 여승무원 노조 등 수백 수천 일씩 투쟁을 벌이고 있는 전국 사업장 노동자들이 저마다 선전전을 벌이는 한편 증언대회를 진행했다.

쌍용차지부장 출신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도 비정규직, 해고자 문제 해결을 위해 '4월 총파업'을 준비하고 있다, 이영주 민주노총 사무총장은 이날 "이 땅의 수많은 이창근 동지, 당신들의 이름으로 총파업을 준비하고 있다"면서 "당신이 맞선 겨울이 가고 봄이 만연한 4월에 이 땅에 두발로 서서 4월 총파업을 함께 하기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한편, 이날 오전 쌍용차 굴뚝이 바라다 보이는 철조망에 이창근씨 부인과 아들이 단 하트 모양 자물쇠를 시작으로, 자물쇠는 하나둘 늘어, 날이 저물 무렵엔 수십, 수백 개로 불어났다. '희망 자물쇠' 달기는 앞으로 쌍용차 희생자 26명을 상징하는 2만6000개에 이를 때까지 계속된다. 앞으로 쌍용차 문제가 해결되면 노사가 함께 만들 '분홍 도서관'에 상징물이기도 하다. 

남산 타워에 사랑의 징표로 자물쇠를 다는 연인들처럼 쌍용차 희생자와 해고자를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는 약속을 담았다. 이창근 실장은 전날 '팟짱' 전화 인터뷰에서 "열쇠를 버리지 말고 잘 간직하고 있다 쌍용차 문제가 해결되는 날 자물쇠를 풀어 분홍 도서관에 다시 달아 달라"며 울먹이기도 했다. 그 열쇠를 보면서 자신들을, 전국의 해고 노동자들을 잊지 말아달라는 당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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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창근 기획실장 아내와 아들이 매달아 놓은 '희망 자물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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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상통화로 연결된 이창근 기획실장이 집회 참가자들을 향해 '하트'를 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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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창근 기획실장이 92일째 농성중인 굴뚝과 가까운 곳에서 '3.14 쌍용차 희망행동' 행사가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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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근 실장은 이날 오후 7시 30분쯤 스마트폰 화상 통화로 참가자들과 '소통'했다. 이 실장은 "여러분은 나를 보러 온 게 아니라 우리도 당당히 싸우고 있고 당신만 힘든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러 온 것"이라면서 "모두가 서 있는 곳이 굴뚝이고 생존의 현장"이라고 참가자들을 오히려 격려했다. 

이 실장은 "함께 죽을 수 없다, 함께 살아야 한다"면서 "기다리고 인내하고 교섭하고 투쟁하겠다"고 다짐했다. 

김득중 쌍용차지부장은 "2009년 이후 세 번째 고공 농성이지만 이것이 마지막이란 결기로 싸우고 있고 굴뚝 앞 집회도 오늘이 마지막이길 바란다"면서 "노사 교섭으로 이창근 동지가 내려오고 해고자들이 모두 공장에 돌아가는 봄을 만나고 싶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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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을 위한 화해 방안이 ‘박정희 찬양?’

 
 
국민대통합 기획단장, 제주 4·3 토론회에서 박비어천가를 부르다
 
임병도 | 2015-03-14 09:31:02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지난 3월 12일 제주에서 ‘화해와 상생을 위한 제주 4·3 도민 대토론회’가 열렸습니다. 제주 4·3희생자 추념일이 불과 한 달도 남지 않았으니, 토론회가 열릴 수 있지만, 이번 토론회는 시작부터 신기했습니다.

보통 토론회는 제주 시민단체나 유족회가 주최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번에는 새누리당 제주도당이 주최했기 때문입니다. 과거 새누리당이 공식적으로 토론회나 행사를 주관하는 경우가 별로 없었기에 더욱 주목을 받았습니다.

특히 이번 행사에는 새누리당 제주도당이 주최하고, 4.3유족회와 경우회 도지부가 공동주관하여 진짜 제대로 된 토론회가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도 있었습니다.

 

4.3유족회와 경우회는 각자의 입장이 다른 단체이다. 4.3유족회는 민간인 희생자들이고, 경우회는 4.3사건당시 토벌에 앞장섰거나 무장대에 희생된 경찰들이기 때문이다. 제주도에서는 이 두 단체가 서로 입장이 달라 매번 다른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국민대통합 기획단장, 제주 4·3 토론회에서 박비어천가를 부르다’

새누리당 제주도당이 주최한 ‘화해와 상생을 위한 제주 4·3 도민 대토론회’는 유족과 시민 등 500여 명이 참석하는 등 시작은 좋았습니다. 그러나 참석자들은 첫 번째 주제 발표자로 나선 최홍재 대통령직속국민대통합위원회 기획단장의 ‘지금은 국민대통합시대’라는 발표에 황당하기만 했습니다.

▲최홍재 단장이 제주 4·3 토론회에 대통합 사례로 발표한 자료 ⓒ제주의 소리

최홍재 국민대통합 기획단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새마을 운동은 국민대통합 주요 사례’라고 하면서, 대통합 사례로 ‘잘 살아보자’와 ‘새마을운동’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최 단장은 “어두운 면도 있었지만 6.25전쟁으로 빈곤에 허덕이던 1960년대 박정희 전 대통령이 해외로 나가 ‘우리나라에 고속도로를 뚫겠다’며 돈을 빌려왔다” 1면서 박정희라는 인물을 찬양하는 식으로 발언을 이어나갔습니다.

참석자들이 제주 4·3 도민 대토론회에 갑자기 새마을운동 이야기가 나오자 어리둥절했지만, 최 단장은“새마을 운동 당시에는 전국민이 다 같이 잘 살기 위해 하나 됐다”는 말도 언급했습니다.

최홍재 국민대통합 기획단장의 발표가 황당했는지 토론회 사회자였던 유철인 제주대 교수조차 “오늘 발표내용은 마치 정부 정책 홍보물을 보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어떻게 통합할 것인지 언급되지 않아 아쉬웠다. 자리에 함께 했다면 묻고 싶다”고 밝혔습니다.

최 단장이 주제 발표 이후 토론회는 참석하지 않고 자리를 떠났기 때문입니다.

 

최홍재 국민통합 기획단장은 뉴라이트 계열 시대정신 편집위원과 MBC 방송문화진흥회 이사를 거쳐, 19대 총선에서 새누리당 은평갑 국회의원 후보로 나왔었다. 청와대 정무수석실에서 국민소통비서관실 선임 행정관으로 근무하다 국민대통합위원회 기획단장에 임명됐다.

 

‘국민대통합, 과연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가?’

국민대통합은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이었습니다. 인수위가 ‘특별위원회 국민대통합위원회’를 설치했고, 지난 2013년 5월 '국민대통합위원회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규정'이 대통령령으로 제정됐습니다.

▲국민대통합위원회에 게재된 위촉위원과 정부위원, 정부위원은 모든 장관들이 망라되어 있다. ⓒ국민대통합위원회 홈페이지

현재 국민대통합위원회 위원장은 한광옥 전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입니다. 위원회에는 위촉위원이라는 시민단체 위원과 정부위원이 있습니다.

위촉위원은 각계 인사이기 때문에 그만두고라도, 정부위원은 그냥 박근혜 정부 장관들을 모두 나열해놓고 있습니다.

과연 장관들은 자신들이 국민대통합위원회 정부위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국민대통합을 외치고 있지만, 우리 사회는 오히려 갈등이 더 커져만 가고 있습니다. 또한 갈등을 조정하겠다는 갈등관리위원회는 축소되고만 있습니다. 2
 
국민대통합위원회는 갈등이 벌어지고 있는 ‘강정 해군기지나 ‘밀양송전탑’, ‘쌍용차 사태’ 등은 쳐다도 보지 않고, 그저 용산 화상 경마장 시위 현장에 나가 마사회 입장만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기도 했습니다.3
 
국민과의 갈등을 조정하기는커녕 오히려 갈등을 부추기는 이런 위원회가 왜 존재하는지 의문이 듭니다.


‘오히려 갈등을 더 유발하는 대통령’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대통합을 위한 갈등 조정 능력을 키우는 일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정부는 갈등을 더 유발하는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제주도민들이 제주 4·3을 말하면서 꼭 요구하는 일이 박근혜 대통령의 제주 4·3 희생자 추념일 참석입니다. 대통령이 자신이 제정한 국가 추념일에 참석하는 일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대통령은 오지 않습니다.

대통령이 오는 일이 무슨 대단한 희망사항이라고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지난 수십 년 간 정부로부터 외면받았던 제주도민의 입장에서는, 대통령이 제주 4·3 희생자추념일에 공식적으로 참석한다는 자체가 자신들의 고통과 갈등을 해결해주겠다는 강한 의지로 보고 있습니다.

2006년 노무현 대통령은 제주를 방문해 사건 발생 55년 만에 처음으로 국가 차원의 잘못을 공식 사과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과거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억울한 희생자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것은 대한민국 건국에 기여한 분들의 충정을 소중히 여기는 동시에 역사의 진실을 밝혀 지난날의 과오를 반성하고 진정한 화해를 이룩하자는 뜻”이라고 밝혔습니다.

화해와 상생을 말하면서 제주 4·3이 아닌 박정희와 새마을운동 찬양을 외치는 박근혜 정부의 모습으로는 절대 진정한 화해와 상생, 국민대통합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제주 4·3이 불과 한 달도 남지 않았습니다. 지금부터 제주도는 이번 제주 4·3희생자 추념일에 박근혜 대통령이 오느냐 마느냐를 놓고 말들이 많습니다. 지금 제주도민에게 필요한 것은 ‘박정희와 새마을운동 찬양’이 아닌, 박근혜 대통령의 제주 4·3희생자 추념일 참석입니다.

간단한 일조차 하지 못하면서 국민대통합을 외치며 세금을 소모하는 모습을 보면, 도대체 누가 갈등을 만들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1. 제주의소리. http://goo.gl/fSD2R7
2. 국민대통합 내건 박근혜 정부, 갈등관리 인원은 2명. 오마이뉴스 2014년 9월 22일.http://goo.gl/ytFlPZ 
3. 뉴스타파. http://newstapa.org/23648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7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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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에 두 번 부상 딛고 600리길 귀향한 참매

 
김봉균 2015. 03. 13
조회수 1205 추천수 0
 

한 번은 굶주림, 한 번은 충돌사고 뒤 구조…재활훈련 받고 방생

병아리 훔쳐 먹다 야생화 훈련, 서산에서 흑산도로 당당히 '귀향'

 

hong8.jpg» 두 번의 치명적인 위기와 야생 부적응을 딛고 성공적으로 자연에 복귀한 참매 '홍도'의 모습.

 

지난달 저희에게 무척이나 뜻깊고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려면 약 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야 합니다.
 
2013년 4월 어린 참매 한 마리가 야생동물 구조센터에 들어왔습니다. 당시 이 참매는 굉장히 특이한 이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전남 신안군에 위치한 홍도에서 조류조사를 하던 국립공원 철새연구센터 직원이 기아 상태에 놓인 이 참매를 처음 발견해 구조하였습니다. 치료가 끝난 뒤에는 바로 옆에 위치한 흑산도에서 풀어놓았습니다. 
 
그런데 방생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참매가 다시 발견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두 번째로 구조된 참매는 지난번과 같은 단순한 기아 상태가 아닌 사고를 당한 상태였습니다. 
 
부상이 심각해 흑산도에서 충남야생동물구조센터로 치료를 위해 이송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에게 개체번호 ‘13-400 참매’인 ‘홍도’ 가 오게 되었죠.
 
hong1.jpg» 처음 우리 센터에 이송되어 진료를 위해 보정되고 있는 참매 ‘홍도’의 모습입니다. 어렸을 때의 모습인데요, 풋풋하지요? 이 글을 읽으시면서 ‘홍도’ 가 점차 어떠한 모습으로 변해갔는지 지켜보시면 재미있을 겁니다. 
 
당시 홍도는 얼굴의 눈썹 선이 위치하는 부분에 창상이 있었고, 꽁지깃의 마모가 꽤 심한 수준이었습니다. 문제는 그뿐이 아니었죠. 
 
방사선 사진을 찍어보니 단순한 어깨 탈골이 아닌 견갑골과 오훼골 골절로 인해 우측 어깨가 거의 무너져 내린 상황이었습니다. 아마도 어딘가에 강하게 부딪히는 사고를 겪었을 겁니다.

 

홍도는 사실상 치료도 굉장히 까다로운 상황이었고, 치료가 잘 된다 하더라도 영구장애를 지니게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습니다. 다행히 장애가 남지 않는다 하더라도 깃털의 마모가 너무 심해 깃갈이를 하기 전까진 자연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hong2.jpg» 우측 견갑골과 오훼골의 골절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결국, ‘13-400 참매’는 영구장애의 가능성을 열어둔 채 집중치료를 받았습니다. 어느 정도 치료가 끝난 뒤에는 재활훈련을 위해 훈련조류로 선정되어 훈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13-400 참매’는 ‘홍도’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이 참매를 ‘홍도’라 부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사실, 구조된 야생동물에 이름을 지어주는 것은 경우에 따라 다소 옳지 못한 행동일 수 있습니다. 이름을 지어주고 부르다 보면 관리 중인 야생동물을 애완동물처럼 여기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이는 해당 동물이 꼭 지녀야 할 야생성을 떨어뜨리고, 사람에 대한 경계심을 누그러뜨리는 결과를 낳게 되기도 하지요. 때문에 구조센터에서는 영구장애 판정을 받았거나, 훈련을 받는 개체가 아닌 이상 절대로 이름을 지어 부르지 않습니다.
 
고통스러웠을 치료 과정을 이겨내고, 묵묵히 재활훈련의 과정을 버텨주었던 홍도는 처음에 걱정했던 것과는 다르게 보란 듯이 건강을 되찾아 갔습니다. 
 
약 반년이 지났을 무렵부터는 본격적인 깃갈이가 시작되었습니다. 깃갈이를 돕기 위해 훈련 역시 중단했죠. 이때부터 홍도는 깃갈이를 진행함과 동시에 다시 야생성을 회복하는 기간을 보냈습니다.
 
hong3.jpg» 왼쪽은 재활훈련 당시의 홍도가 샤워를 마친 뒤 깃을 말리고 있는 모습입니다. 오른쪽은 깃갈이를 거의 끝내고 방생 직전의 홍도입니다. 사진이 작아 구별이 어려우실 수 있으나 자세히 보면 우측의 깃이 훨씬 더 마모가 적고(둥글고) 깨끗하며, 부러지거나 탈락한 곳도 없음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위의 사진을 보시고 별다른 차이를 못 느끼실 수도 있겠다 싶어 사진 하나를 더 준비했습니다. 아래 사진에는 2013년 4월 접수 당시의 모습부터, 방생 후 발견되었던 모습까지 순차적으로 담겨있습니다. 
 
마모가 심했던 깃도 모두 새로운 깃으로 갈았고, 약 10개월의 시간이 흐르며 어린 새의 모습에서 얼추 어른스러워진 티가 나기까지 어떻게 변해갔는지 비교해 보실 수 있습니다.
 
hong4.jpg» 2013년 4월 접수 당시 홍도의 모습부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어떻게 달라져 갔는지 비교해 보실까요? 
 
그렇게 오랜 시간을 버텨내며 건강을 되찾은 홍도는 10개월이 지난 2014년 1월15일 충남 서산시 부석면 마룡리에서 방생되었습니다. 본래 방생할 때는 구조되었던 지점에서 일정한 범위 안에 풀어놓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래야 야생동물의 적응을 돕고 방생 성공률을 조금이라도 높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홍도를 원칙에 맞게 방생하기 위해선 흑산도까지 이동을 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고, 무엇보다 어린 개체로 구조돼 약 10개월이라는 오랜 기간을 거쳤기에 굳이 기존 서식지에 의존하기보다는 새로운 참매 서식장소로 적합한 곳을 선정하는 것이 더 성공적일 수 있을 거라는 판단 아래 방생을 진행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저희는 홍도의 안녕을 빌며 10개월간 쌓아올렸던 인연에 마침표를 찍는가 했습니다. 그런데 11일이 지난 2014년 1월26일, 야외에 잠시 놓아둔 먹이인 병아리를 도둑맞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 범인은 다름 아닌 참매였습니다. 워낙 많은 양의 병아리를 한꺼번에 들고 날아가다 보니 얼마 못가 작은 언덕 위에 내려앉았습니다. 황당한 마음을 가라앉힌 채 관찰한 결과 이 친구는 얼마 전 방생한 홍도였습니다. 
 
hong5.jpg

 

hong6.jpg» 갑자기 나타나서 계류동물들을 위한 먹이를 낚아채간 이 녀석, 너 홍도였구나. 사진을 자세히 보시면 금속 링이 부착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링을 통해 방생 후 모니터링을 하거나 차후 재포획 여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직 홍도와 저희의 인연이 끝나지 않았던 걸까요? 1월15일 방생한 홍도가 11일이 지난 후에 처음으로 활동하는 모습이 발견된 것입니다. 11일 동안 큰 탈 없이 살아있다는 건 생존에 필요한 먹이활동을 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센터 주변에서 계속 모습이 보인다는 것은 아직 환경에 완벽히 적응을 못 해 자신의 영역을 만들어내지 못했거나, 먹이사냥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러한 경우 ‘단계적 방사’(Soft-Release)를 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단계적 방사란 방생 후 그 지역 환경에 완전히 적응할 때까지 혹은 생존에 필요한 여러 가지를 터득할 때까지 서식지 주변에 먹이를 공급해 주거나 은신처를 제공해 줌으로써 점차 자연에 적응할 때까지 도와주는 것을 뜻합니다.

 

홍도는 계속해서 센터 주변에 나타났고, 저희가 주는 먹이를 가져갔습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고 방생 후 처음 발견되었던 날부터 그해 4월까지 약 3개월 동안 단계적 방사를 진행했습니다. 
 
처음 1개월이 지나고부터는 먹이를 놓아주는 빈도를 점차 줄여나갔습니다. 그러자 홍도의 모습도 점차 보기 어려워졌습니다. 
 
2월에는 문을 열고 나가면 어김없이 주변 나무에 앉아 우릴 지켜보았던 녀석이 3월이 되자 무인카메라에 포착되는 모습이 아니고서는 거의 볼 수 없었으니 말이죠. 그렇게 홍도는 점점 저희에게서 멀어져 진정한 자연의 일부가 되어갔습니다. 
 
4월에 접어들면서 단계적 방사도 완전히 종료하였고, 이후로 홍도를 볼 수는 없었습니다. 이젠 정말 끝났구나라고 생각했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말 그런 줄만 알았습니다.
 
홍도를 잊고 지내던 지난 2월, 흑산도에 위치한 국립공원 철새연구센터 관계자로부터 갑작스럽게 연락이 왔습니다. 흑산도에서 참매 1개체를 발견했는데, 다리에 금속가락지를 부착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 가락지에 새겨진 식별번호는 다름 아닌 홍도의 것이었습니다. 지난해 4월 방생한 홍도가 10개월이 지난 시점에 방생장소에서 약 235㎞ 떨어진 흑산도에서 발견된 것입니다.
 
hong7.jpg» 서산에서 방생된 홍도가 흑산도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직선거리로 약 235㎞ 됩니다. 
 
철새연구센터 측에서 제공해준 사진에 담긴 당시 홍도는 무척이나 늠름하게 자기보다 덩치가 큰 재갈매기(추정)를 사냥하고 있었습니다. 그냥 잘 지내고 있다는 모습만 보여줘도 고마울 텐데, 자신의 사냥실력을 뽐내주니 고마움과 동시에 어찌나 대견하던지….
 
방생 후에도 나타나 먹이 달라고 기웃거리던 녀석이 어느새 정말 멋진 참매가 되어 나타났습니다. 비록 사진이었지만 잘 지내고 있는, 한층 멋있어진 홍도를 보니 그간 홍도와 함께했던 날들이 떠오르며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참매 홍도와 우리의 인연은 아직 끝나지 않았네요.
 
글·사진 김봉균/ 충남야생동물구조센터 재활관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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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여성평화운동가들, DMZ 횡단 행사 발표

세계적 여성평화운동가들, DMZ 횡단 행사 발표5월 24일 '국제여성평화걷기' 추진..남북 여성 지도자들과 만남도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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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3.13  11:5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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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omen Cross DMZ’는 국내외 여성 평화활동가들이 참석한 가운데 11일 뉴욕에서 '국제여성평화걷기'를 발표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사진제공 - 정현경]

노벨평화상 수상자 2명 등 세계적인 여성 평화운동가들이 5월 24일 한반도 DMZ(비무장지대)를 횡단하는 ‘국제여성평화걷기’ 행사를 개최하겠다고 11일 발표했다.

이 행사를 주관하는 ‘Women Cross DMZ’는 국내외 여성 평화활동가들이 참석한 가운데 이날 오전(현지시간) 제59차 UN 여성지위위원회(CSW) 회의가 열리고 있는 뉴욕 유엔본부 인근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은 12일자 보도자료를 통해 “글로리아 스타이넘, 애비게일 디즈니, 앤 라이트, 수지 김, 크리스타인 안, 정현경 등 기자회견에 참여한 여성 평화운동가들은 오는 5월 남한과 북한의 여성 지도자들과 만나 한국 전쟁을 공식적으로 끝내기 위한 평화정착 이니셔티브를 시작할 예정이라고 밝혔다”고 전했다.

이들은 세계비무장의 날인 5월 24일 세계 유일의 분단국인 남북한을 걸어서 횡단하는 ‘국제여성평화걷기’ 행사를 추진하고 있으며, 세계적인 서명운동과 함께 1953년 휴전협정 당사국을 대상으로 정전을 영구적인 평화협정으로 교체할 것을 촉구할 계획이다.

‘국제여성평화걷기’ 행사에는 1976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북아일랜드의 메어리드 매과이어와 2011년 수상자인 라이베리아의 리마 보위를 포함해 12개국 여성 지도자와 해외동포 평화운동가 등 30여명이 참가할 예정이다.

   
▲ 기자회견에는  CSW-NOG포럼에 참석 중인 한국여성단체연합 대표단도 함께 했다. [사진제공 - 정현경]

이날 기자회견에는 CSW-NOG포럼에 참석 중인 한국여성단체연합 김금옥 상임대표, 정문자 공동대표 등도 참가했으며, 김금옥 상임대표는 이 행사에 대한 지지와 함께 뜻깊은 이 행사가 꼭 성사되길 바란다는 연대발언을 했다.

미국의 저명한 저술가이자 국제대표단의 공동 명예회장인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DMZ에 처음 방문했을 때 멈춰선 기차를 보고 이렇게 친밀한 것을 갈라놓은 풍경이 미친 짓이라는 생각을 했다”며 “한반도의 분단을 여성들의 힘으로 잠깐이라도 치유할 수 있다면, 여성들이 북아일랜드나 라이베리아에서 전쟁 중에 평화를 이끌어낸 것과 같은 고무적인 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러트거스대학 한국사 교수인 수지 김은 “역사학자로서 한반도에 평화협정이 체결되지 않아 군사적 충돌이 일어날 위험이 있으니 평화협정 체결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미국의 영화제작자이자 자선사업가인 애비게일 디즈니(디즈니사 창업주의 손녀)는 “미국 여성들이 한반도 평화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우리가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모국 미국이라는 나라가 한반도에 분단의 선을 긋고 분단체제를 적극적으로 강화하는 역할을 해 왔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행사의 조직위원 대표인 크리스틴 안은 “사람이 만든 인위적인 분단으로 인해 비극적으로 서로 헤어진 이산가족들을 위해서 정부의 투자를 군사비가 아니라 사람, 특히 여성, 아동, 노인 복지를 향상시키는 목적으로 전환할 것을 촉구하기 위해 걷는다”라고 말했다.

한편, ‘여성평화걷기’ 행사가 성사되기 위해서는 남북 정부의 승인을 얻어야 하지만 아직 남북 당국은 이 행사에 대해 분명한 승인을 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통일부 관계자는 12일 “실무적으로 의향이 있다는 정도만 전달해 온 것으로 들었다”며 “남북한 주민이 DMZ를 지나서 걷겠다는 게 아니므로 교류협력법 적용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전달했다”고만 확인했다.

남북교류협력법은 남북한 주민을 대상으로 하고 있고, 외국인의 방북이나 북한 경유 입국은 유엔군사령부 소관사항이라는 것. 다만, 출입국 절차는 외교부와 법무부 등이 처리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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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언론 “세월호 참사 1주기, 진상조사 진척 없어”


UPI, ‘유민아빠’ 인터뷰로 진상규명 현주소 심층 타전
나혜윤 기자  |  balnews2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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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3.13  16:17:00
수정 2015.03.13  16:4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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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아 미국 <UPI> 통신이 45일간 극한 단식에 돌입했던 ‘유민아빠’ 김영오씨의 인터뷰를 통해 세월호 진상규명의 현주소를 심층적으로 타전했다.

외신 전문 번역매체 <뉴스프로>에 따르면, <UPI>는 11일(현지시간) 「답변을 얻기 위한 한 아버지의 싸움 : 세월호 침몰의 원인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아 유가족들이 여전히 세월호의 침몰에 대한 정부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다고 전했다.

<UPI>는 세월호 참사 당일 김씨가 사고 소식을 접했던 과정을 전하며 “거의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김씨는 여전히 이 사건의 전말을 알지 못한다”고 보도했다.

   
 

매체는 세월호 사건에 대해서도 분석한 후, 이준석 선장이 36년의 징역형을 받은 사실도 언급했다. 또한 진상규명에 있어서 화물 과적과 급변침이 침몰 원인이라고 추측만 할 뿐 정부가 확실한 답변을 유가족에게 내놓지 않고 있다는 소식도 함께 전했다.

매체는 세월호 침몰과 같은 사건들의 원인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성균관대학교 경제학자 다니엘 슈베켄디에크는 <UPI>에 한국 역사상 최악의 공공재난 중 성수대교·삼풍백화점 붕괴 사건을 언급하며 “세월호 침몰과 같은 대규모 재난들은 경제적 현대화와 사회적 근대화의 간극이 해결되지 못했음을 비극적으로 상기시켜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박찬운 한양대 법대교수의 “언론과 한국의 보수주의자들 사이에서 행동가들에 대한 전체적인 반대 분위기와 분노가 조성되고 있기 때문에 특별 조사가 진행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지적을 전하기도 했다. (☞ ‘UPI’ 보도 보러가기) 

다음은 ‘뉴스프로’의 <UPI> 보도 번역 전문
번역 감수 : 임 옥

A father’s fight for answers: What caused South Korean ferry sinking?
답을 얻기 위한 아버지의 싸움: 세월호 침몰을 일으킨 원인은 무엇인가?

By Elizabeth Shim | March 11, 2015 at 6:00 AM

In this undated photograph, Kim Young-oh, center, poses with his daughter Kim Yu-min, left, and Kim Yu-na. Kim lost his older daughter in the Sewol ferry sinking last year. He is still seeking answers from the South Korean government on the cause of the tragedy. Photo courtesy of Kim Young-oh
날짜 표시가 없는 이 사진에서 김영오씨는 자신의 딸 김유민(왼쪽)과 김유나와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 씨는 지난해 세월호 침몰로 큰 딸을 잃었다. 그는 아직까지 한국 정부로부터 그 비극의 원인에 대한 답변을 기다리고 있다.

Kim Young-oh as a younger father with his first daughter, Kim Yu-min, on left and Yu-na on right. Nearly a year later, Kim said he and other families are still seeking answers from the South Korean government regarding the capsized ferry Sewol. Photo courtesy of Kim Young-oh
왼쪽에 첫 딸인 김유민과 오른쪽에 김유나와 함께한 젊은 아빠 김영오씨. 거의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김씨는 자신과 다른 가족들이 여전히 전복된 세월호에 대한 한국 정부의 답변을 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Kim Yu-min, left, was on a high school field trip to Jeju island in South Korea when the ferry Sewol capsized and more than 300 passengers died. Kim Young-oh, her father, has become an activist after her death.
김유민(왼쪽)양은 세월호가 전복되고 300명 이상의 승객이 사망했을 당시 한국 제주도로 고등학교 수학여행 중이었다. 그녀의 아버지 김영오씨는 딸의 죽음 이후 활동가가 되었다.

SEOUL, March 11 (UPI) — Kim Young-oh, a divorced father of two, remembers the phone call he received on the morning of April 16 from his former wife.
서울, 3월 11일(UPI) – 이혼한, 두 아이의 아버지 김영오씨는 전 부인으로부터 4월 16일 아침에 받았던 전화 통화를 기억하고 있다.

“Are you watching the news?” she had asked in a worried tone.
“뉴스 보고 있어?” 걱정으로 가득한 어조로 그녀는 물었다.

Kim had not slept at all. In fact, he had been awake all night, rounding off a long night shift at an auto-parts plant, finishing work at 7:30 a.m. Before returning home for some rest, he had stopped by his neighborhood fitness center where he received the unexpected phone call.
김 씨는 전혀 잠을 자지 못했고, 자동차 부품 공장에서 오전 7시 30분에 끝나는 오랜 야간 근무를 마무리하느라 실제로 밤새 깨 있었다. 휴식을 위해 집으로 돌아오기 전, 집 근처 헬스클럽에 들렀고 그곳에서 그는 예상치 못한 그 전화를 받았다.

“There’s been a ferry accident,” she said. “And our daughter is on that boat.”
“여객선 사고가 있었어”라고 그녀는 말했다. “우리 딸이 그 배를 타고 있어.”

Kim turned to the nearest television. The broadcast confirmed the news.
김영오씨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TV를 향했다. 그리고 방송에서 그 소식을 확인했다.

But nearly a year later, Kim still doesn’t know the whole story.
그러나 거의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김 씨는 여전히 이 사건의 전말을 알지 못한다.

The sinking of the South Korean ferry Sewol killed more than 300, including Kim’s 17-year-old daughter, Kim Yu-min. He said the victims’ families have not received a conclusive explanation of what happened from the government. Since the November passage of a special bill that was supposed to pave the way for an investigation, efforts to establish the probe have only encountered obstacles.
한국 세월호 침몰로 김 씨의 딸인 17세의 김유민 양을 포함하여 300명 이상이 사망했다. 그는 희생자 가족들이 정부로부터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확실한 설명을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진상조사의 길을 열어주리라 기대됐던 세월호 특별법이 지난 11월에 통과된 이후 조사에 착수하려는 노력은 온갖 장애에 부딪혀왔을 뿐이다.

Overloaded cargo contributed to the capsizing of the boat when the captain made a sharp turn off the coast of Jindo, on the southwestern tip of the Korean peninsula, the South Korean news agency Yonhap reported. But why he made that abrupt–and fatal–change in direction has yet to be determined.
한국의 연합뉴스에 따르면, 과적된 화물이 한반도의 남서쪽 끝에 있는 진도 해안에서 선장이 급변침을 했을 때 배가 전복된 원인이었다. 그러나 선장이 왜 그런 갑작스럽고 치명적인 항로 변경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

The ferry’s captain, Lee Joon-seok, was convicted of gross negligence in November, and sentenced to 36 years in prison for abandoning the vessel and leaving confused passengers to fend for themselves.
이준석 세월호 선장은 지난 11월 중대과실에 대한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배를 버리고 나온 것, 또한 혼란에 빠진 승객들이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둔 것에 대해 36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Most recently, an official probe into the accident’s cause has been hobbled by fractious disputes between South Korea’s political parties over the investigation committee’s structure.
가장 최근의 일로, 사고 원인에 대한 공식적 조사는 조사위원회의 구성을 놓고 벌어진 한국 정치 정당들 간의 성난 분쟁 때문에 발목이 잡혀 있는 상태다.

Kim told UPI that victims’ families have been accused of wasting taxpayers’ money even though they seek the passage of improved safety regulations.
김 씨는 희생자 가족들이 개선된 안전 규제법의 제정을 요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국민들의 세금을 낭비한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고 UPI에 말했다.

For Kim, a deeply personal fight has become a public affair.
김 씨에게 있어 매우 개인적인 투쟁이 공적인 사건이 되어왔다.

Kim became a prominent figure when he staged a 45-day hunger strike in July and August. A daily subsistence of water and salt left him emaciated. After losing nearly 30 pounds, he fell ill and was hospitalized.
김 씨가 작년 7월과 8월에 45일간 단식투쟁을 벌였을 때 그는 저명인사가 됐다. 하루하루 물과 소금으로 버티며 그는 여위어갔다. 거의 30파운드 가량 체중을 잃고 나서, 그는 쓰러졌고 병원으로 후송됐다.

In response to his activism, Kim said some South Korean conservatives have lashed out at him, labeling him a pro-North Korean agitator, a dangerous accusation that pits Kim against South Korea’s draconian National Security Law responsible for the dissolution of a left-wing political party in December.
그의 활동에 대해서 일부 한국 보수파들은 맹렬히 비난하며 자신을 친북 선동가로 몰았다고 김씨는 말했는데, 이는 그를 작년 12월 좌파 정당을 해산시킨 한국의 혹독한 국가보안법과 맞서게 만드는 위험한 비난이다.

His request for a direct meeting with President Park Geun-hye was routinely denied. But but he briefly made world headlines when he secured a meeting with Pope Francis, whose trip to South Korea was marked by gestures of support for the families of Sewol victims.
박근혜 대통령을 직접 만나게 해달라는 그의 요구는 일상적으로 무시됐다. 하지만 한국 방문 중 세월호 유가족에 대한 지지의 표현을 했던 프란시스코 교황과의 만남이 성사되었을 때, 그는 잠깐 세계뉴스를 장식했다.

Daniel Schwekendiek, an economic historian at South Korea’s Sungkyunkwan University, said the country’s position as one of the world’s poorest countries while facing a communist North Korea made economic growth the most important priority for South Korean leaders. Making haste, though, sometimes came at the cost of public safety, with the collapse of a Seoul bridge in 1994 and a department store in 1995 still remembered as some of the biggest public disasters on record.
한국 성균관 대학교 경제사학자 다니엘 슈베켄디에크는 공산주의 북한과 대치한 상태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던 한국의 상황 때문에 한국 대통령들이 경제성장을 가장 우선시하게 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급속성장은 역사상 최악의 공공재난 중 몇몇으로 여전히 기억되는 사건들인 1994년 서울의 다리와 1995년 백화점의 붕괴 사건에서와 같이 공공 안전을 때때로 희생시켰다.

“Large-scale disasters such as the sinking of the Sewol tragically remind us that the economic versus social modernization gap has not been closed,” Schwekendiek told UPI.
“세월호 침몰과 같은 대규모 재난들은 경제적 현대화와 사회적 근대화의 간극이 해결되지 못했음을 비극적으로 상기시켜 주는 것”이라고 슈베켄디에크 교수는 UPI에 전했다.

Yonhap reported in October that diminishing passenger revenue prompted the ship operator, Chonghaejin Marine Co., to overload cargo against regulations.
10월에 연합뉴스는 여객 운임수익이 줄어드는 것 때문에 세월호 운영사인 청해진 해운이 규정을 위반하면서 화물 과적을 했다고 보도했다.

But Schwekendiek said that past disasters were not followed by critical voices that highlighted the negative effects of aggressive business interests.
그러나 슈베켄디에크는 과거의 재난들이 있은 후 급속히 사업이익을 내는 일의 부정적 영향에 대해 강조하는 비판적 의견들이 없었다고 말했다.

Born into rural poverty
빈곤한 시골에서 태어나

Like many South Koreans in the 1960s, Kim Young-oh, 46, was born into rural poverty, in an area that was so destitute there was “no access to transportation. Nothing to eat.”
1960년대의 대부분 한국인들처럼 46세의 김영오씨는 너무 궁핍해서 “교통편도 없는” 가난한 시골에서 태어났다. “먹을 것도 없었다.”

Kim, along with his siblings, was sent away from home to a city where he could attend school. He dropped out at age 15 – beginning what he said were decades of trouble with money.
형제자매들과 함께 김 씨는 고향 집을 떠나 학교를 다닐 수 있는 도시로 나가게 됐다. 그는 15세에 학교를 중퇴하고 그로부터 수십 년간 돈 문제로 인한 고난이 시작됐다.

When his first daughter, Yu-min, was born, Kim was beginning to struggle with his clothing store. He had borrowed substantially from banks, but was unable to pay his bills. He declared bankruptcy around the time of the 1997 Asian financial crisis.
첫 딸 유민이가 태어났을 때, 김 씨가 운영하는 옷 가게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김 씨는 은행으로부터 상당히 많은 돈을 빌렸지만 청구서들을 낼 돈이 없었다. 그는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때 파산했다.

It was money troubles, Kim said, that led to his divorce in 2003. After decades of wandering from one temporary job to another, in 2012 Kim had a breakthrough: a full-time position with benefits.
김 씨는 2003년 이혼을 한 것도 돈 문제였다고 말했다. 임시직으로 이곳 저곳을 떠돌며 십여 년을 보낸 2012년 김씨는 돌파구를 찾았다: 그때서야 혜택이 주어지는 정규직 일자리를 갖게 됐다.

“I remember telling my daughter then,” he said, “that I had good news…telling her that she can go to college now. We can afford to send her to university.”
“그때 우리 딸에게 말하던 것이 생각난다”고 그는 말했다. “좋은 소식이 있다고…내 딸에게 이제 너는 대학에 갈 수 있다. 이제 우리는 너를 대학에 보낼 형편이 된다고.”

Kim said Yu-min was good with numbers, excelling in her math classes. Two months before the ferry sinking, they talked about a career in banking after graduation.
김 씨는 유민이가 숫자에 강해서, 수학 성적이 좋았다고 말했다. 세월호 침몰 두 달 전, 유민양과 김 씨는 유민이가 학교를 졸업한 후 은행원이 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Things were looking up for his family, Kim said.
김 씨는 자기 가족의 상황이 나아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In search of Yu-min
유민이를 찾아서

On the morning of the accident, Kim and his ex-wife rushed to Jindo, where the rescue and recovery efforts were taking place.
세월호 침몰 당일 아침 김 씨와 김 씨의 전 부인은 구조 작업이 진행되고 있던 진도로 급히 향했다.

“It took us eight days to be reunited with Yu-min,” he said, recalling identifying the body and complying with DNA tests before they could claim her.
“우리가 유민이를 다시 만나는 데에는 8일이 걸렸다”고 김씨는 말했다. 김 씨는 말하면서, 유민이의 시신을 인도받기 전 유민이의 시신을 확인하고 DNA 검사를 받았던 것을 떠올렸다.

Kim said the rescue efforts were hindered by red tape, with rescuers denied entry into the waters to search for survivors and a lack of updates from the South Korean Coast Guard that left families speculating about the causes for the rescue’s delay. Families like Kim’s became frustrated, he said, as efforts were postponed.
김 씨는 구조 작업이 행정 절차에 의해 방해받았고, 구조자들은 생존자 수색을 위해 물속에 들어가는 일을 거절당했으며 해경은 구조 작업에 대해 최신 정보를 제대로 주지 않아서 유족들은 구조 지연의 이유를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김 씨와 같은 다른 유족들이 구조 노력 지연으로 좌절감을 느겼다고 김 씨는 말했다.

According to separate reports from Stars and Stripes and Japan’s Yomiuri Shimbun, the South Korean government declined offers of help from the U.S. Navy and Japan’s Coast Guard.
스타즈 앤 스트라이프스(역주: 미국 육군 기관지)와 일본의 요미우리 신문으로부터의 별개의 보도에 따르면, 한국 정부는 미국 해군과 일본 해경의 구조 지원 제안을 거부했다고 한다.

Victims’ families have sought answers about their government’s inaction, but none have been given.
희생자 가족들은 정부의 무대책에 대한 답을 찾고 있으나, 얻은 것이 없다.

Park Chan-un, a law professor at Hanyang University, told UPI that it will not be easy to move forward with special investigations because South Korea’s governing party has delayed providing answers that satisfy the victims’ families, and a general mood of opposition and resentment has formed toward the activists in the media and among conservative South Koreans.
박찬운 한양대 법대교수는 한국의 집권당이 희생자 가족들을 만족시킬 만한 답변을 제공하기를 미루고 있고, 언론과 한국의 보수주의자들 사이에서 행동가들에 대한 전체적인 반대 분위기와 분노가 조성되고 있기 때문에 특별 조사가 진행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UPI에 말했다.

Kim, meanwhile, said he will push on for reform and answers from his government about regulatory oversight, a matter that the Korea Herald reported is being addressed in a new anti-corruption bill.
한편 김 씨는 개혁안이 받아들여지도록, 그리고 코리아 헤럴드가 보도한 대로 새 반부패법안에서 다루어지고 있다는 규제 소홀에 대한 정부의 답변을 얻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According to the Herald, initial findings revealed South Korean maritime officials received kickbacks from the Sewol’s ship operator which may have contributed to the ferry violations.
헤럴드에 따르면, 초기 조사 결과에서 한국 해양 관료들이 세월호 선박 경영자로부터 뇌물을 받은 것이 드러났으며, 이 사실은 세월호의 위법 사항들이 만들어지는 데에 기여했을 수 있다.

“Before the tragedy, I had no idea how lax Korea’s safety regulations were,” Kim said.
“참사 이전에, 나는 한국의 안전 규제가 얼마나 느슨한지 몰랐다”고 김 씨는 말했다.

“I have lost my daughter, but at the same time, I’m proud. Yu-min died for a movement to make Korea a better and safer society.”
“나는 딸을 잃었고, 그러나 동시에 나는 자랑스럽다. 유민이는 대한민국을 더 나은, 그리고 더 안전한 사회로 만들기 위한 움직임을 위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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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있으라" 세월호 추모 침묵행진 제안자 용혜인씨

"세월호 이후 공무원시험 준비 포기했어요"

[사람들이 만난 사람들 ①] "가만히 있으라" 세월호 추모 침묵행진 제안자 용혜인씨

15.03.13 21:11l최종 업데이트 15.03.13 21:11l

 

 

<사람들>은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아 우리 사회에서 '싸우고 있는 사람들, 보이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잊지 않는 사람들'을 찾아가 만나고 이들의 목소리를 전하는 프로젝트입니다. 함께 사는 세상을 위해 싸우는 이들의 이야기를 기획해 인터뷰로 연재하고 있습니다. - 기자말

새봄이 왔지만, 갑자기 꽃샘바람이 불어 날이 추워졌다. 여전히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저마다의 싸움을 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 이후 그 사건과 희생자를 "잊지 말자"고 외치던 한 대학생이 세월호 1주기가 곧 돌아오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 잊히는 사람들과 "함께 하자"고 말하고 있다. 

지난 10일, 늦은 오후 서울 동대문구 경희대학교 청운관 카페에서 이제 스물여섯 살이 되는 용혜인씨를 만났다. 지난해 5월, 그녀는 검은 옷에 하얀 국화꽃과 "가만히 있으라"라고 적힌 피켓을 들었다. 그 침묵행진 때의 모습과 달리 그녀는 동그란 뿔테 안경에 편한 맨투맨 티셔츠와 양털 조끼를 걸쳐 입은 평범한 대학생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4학년이 되고 나서, 먹고 살 길 찾기 위해 공무원시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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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만히 있으라" 두 번째 침묵 행진 2014년 5월 3일에 있었던 "가만히 있으라" 추모 침묵행진에서 용혜인씨가 국화와 손피켓을 손에 들고 행진하고 있다.
ⓒ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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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만히 있으라" 추모 침묵행진을 제안한 이후, 지금까지 어떤 일을 해 왔나요?
"작년에 참 바쁘게 살았는데, 기억을 더듬어보니 한 일은 많지 않은 것 같아요. 4월에 침묵행진을 하며 세월호와 뗄 수 없는 시간을 1년 동안 살았어요. 6월 때까지는 '이윤보다 인간이다'라는 말을 하며 사람들과 침묵행진을 했었죠. 

6월에는 저도 학생이어서 기말고사를 보고 농활을 다녀왔습니다. 7월부터는 유가족이 광화문과 국회에서 단식을 시작해 국회 농성장에서 잠도 자고, 광화문 농성장에서 자고 그랬죠. 그러다가 8월 말부터 대학생들이 행진할 때, 같이 했던 기억이 나요. 

9월에는 개강 주에 수업을 반납하고 거리로 나와서 수많은 시민을 만나는 캠페인을 시작했죠. 11월 1일, '세월호 200일'에 버스를 두 대 정도 전세해서 100명이 좀 안 되는 대학생과 청년들과 함께 안산합동분향소에 갔던 기억이 나요. 3월 이후에는 개강해서 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 참 바쁘고, 긴 한 해를 보내셨는데요. 겨울방학 때는 뭐하셨어요?
"1년 동안 살면서 청년들과 청소년들이 움직여야 한다는 걸 많이 느꼈어요. 실제로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문제에 대해서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어요.

2015년에 대학에 입학하는 새내기들과 사회문제에 대해 같이 공부하고 토론하고 고민할 수 있는 <안녕, 새내기>라는 행사를 준비해 3월 초에 했고요. 당일 행사에서 세월호 유가족 간담회가 있었는데, 이 간담회에서 사회를 봤어요. 사회를 보면서 고등학생 때, 세월호 참사를 겪었던 분들에게 그 일은 또 다른 의미구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 많은 분들이 "가만히 있으라"의 모습으로 혜인씨를 기억하는데요. 일상에서의 혜인씨는 어떤 분인지 궁금해요.
"시간이 날 때는 드라마를 봐요. 최근에는 MBC 드라마 <킬미힐미>를 봤고, (웃음) 종영을 앞두고 있어서 열심히 보고 있어요. 학교에서는 작년에 침묵행진을 같이 했던 후배들과 자주 놀았어요. 매주 목요일에는 학회 동아리에 나가고 있고, 쉬는 날이 생기면 잠을 자는 편입니다."

-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군요. 취미가 있나요?
"이런 질문은 참 난감한데…. 저는 딱히 취미랄 것도 특기랄 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드라마 보고 잠자는 걸 좋아합니다. 오랜만에 복학해서 수업을 열심히 듣고 과제하고."

- 사실, 청년들이 사회에 참여하는 일이 쉽지 않잖아요. 앞서 말한 것처럼 혜인씨는 지난 한 해를 세월호 참사 해결을 위해 바쁘게 살아온 것 같아요. 정치외교학을 전공했다고 들었는데, 우리 사회의 문제에 대해 관심을 두게 된 남다른 계기가 있나요?
"고등학교 때는 뉴스가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면서 살았거든요. 예를 들면 고등학교 3학년 때, 2008년 촛불시위가 있었는데 그땐 한미FTA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야만 나라가 잘 살고, 또 내가 잘산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가 대학에 오면서 이런저런 주간지도 읽고 시사 문제에 대해 같이 고민하는 동아리도 하면서 '내가 봤던 세상이 전부가 아니구나'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좀 충격적이었던 사건이 있었어요. 제가 대학교 3학년 때, 김진숙이라는 여성이 한진중공업 크레인 위에 올라가서 농성했죠. 그 사건을 계기로 노동 문제를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찾아보았죠. 그 이전에도 많은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고 그랬던 걸 알고 굉장히 충격을 받았어요. 그때부터 사회 문제에 대해 더 관심을 갖게 되었죠. 2012년에 4학년이 되고 나서, 먹고 살 길을 찾아야겠다 해서 사실 공무원시험을 좀 준비했습니다. 그러다가 작년에 세월호를 만나면서 다시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어요."

"가장 큰 변화는 인터뷰를 많이 하게 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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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교 카페에서 만난 용혜인 "가만히 있으라" 제안자 용혜인 씨가 경희대학교 청운관 카페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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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와대 홈페이지에 글도 쓴 것으로 알고 있어요.
"한 친구가 저한테 '너 이렇게 하면 부모님도 알게 될 수 있고, 경찰에서 어떻게 할 수도 있고…' 그랬어요. 시작하기 전에 그런 얘기를 했었죠. '설마, 뭐 이런 걸 가지고 언론에 주목을 받겠어'라고 생각하며 별 대수롭지도 않게 넘겼거든요. 해야 하니까 했던 거고, 뭐 어떤 큰 용기를 갖고 했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때는 정말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용기를 내고 큰마음을 먹고 그랬던 게 아니라."

- 어떻게 보면 세월호 참사라는 사건 이후, 예정에 없는 길을 걷고 계신 거잖아요. 주변의 관계나 삶이 변하기도 했을 것 같아요.
"가장 큰 변화는 할 일이 없었던 인터뷰를 많이 하게 된 것이고요. (웃음) 정말 많은 인터뷰를 하게 된 것 같은데. 사실 얼마나 바뀌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굳이 변화라고 한다면 공무원 시험을 딱히 준비하고 있지 않다는 것 입니다."

- 곧 있으면 세월호 1주기입니다. 세월호 이후 생활이나 생각에 변화를 겪는 사람들이 많아요. 앞으로 혜인씨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요.
"어려운 질문입니다. 예전에는 먹고 사는 일이 큰일이었고, '졸업해서 뭐해서 먹고 살지'  이런 게 고민이었는데 그때보다는 그 고민이 덜해요. 좋은 거 먹고 좋은 옷 입고 넉넉하게 남들처럼 사는 것보다 돈을 좀 덜 벌더라도 제가 하고 싶은 일,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게 더 의미 있는 것 같아요. 그런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세월호 이전과 이후에 가장 큰 변화인 것 같아요."

-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은 어떤 내용이고, 왜 준비하게 됐는지, 어떤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가고 있는지 좀 더 자세히 말씀해주세요.
"<사람들>은 침묵행진을 같이 했던 친구들과 세월호 1주기를 그냥 보낼 수 없지 않느냐는 고민을 나누다가 만들어졌어요. 

세월호 1주기가 다가오는데 아직 인양조차 결정하지 못했고, 새해부터 설치된 세월호 진상조사위원회는 제대로 활동을 못하는 상태고, 여론은 관심 자체가 없어진 것 같고. 또, 세월호 이후에 유가족들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세월호 참사뿐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고통 받거나 배제된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됐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배제된 사람들, 이 사회에서 같이 살지만 드러나지 않고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모아서 함께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자리를 만들자고 이야기가 된 거죠. 세월호 1주기를 맞이해서 <사람들>이라는 이름으로 세월호 유가족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 모아서 정말로 이 땅에 '싸우는 사람들, 보이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잊지 않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함께 하고 있고, 그럴 수 있다는 사회적인 분위기를 만드는 그런 활동들을 같이 해나가는 게 목적인 프로젝트예요. 그 중 하나로 4월 4일 토크콘서트 <사람들>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관련기사 : '잊지 않기로 약속'한 사람들, 여기 모이세요

- 좋은 일이네요. 마지막으로 '함께하는 사람들'로서 우리에게, 또 우리가 찾아가야 할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주세요.
"기억하는 것이 참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스스로도 시간이 지나면 무뎌지고 기억에서 잊히고. 이런 것들에 대해서 기억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죠. 세월호 기억저장소 활동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그분의 활동을 하나의 '기억투쟁'이라고 부르더라고요.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이 사회를 바꾸는 데 큰힘이 될 수 있겠다 하는 걸, 세월호 참사를 겪으면서 많이 느꼈어요. 

더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함께할 때 그런 사람들이 없어질 수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요. 잊지 않는 사람들로서 이 <사람들>에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합니다."

덧붙이는 글 | 김영길 기자는 <사람들>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사람들> 공식 페이스북 페이지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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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해군 기밀문서에 드러난 천안함의 의문

 
[천안함 5주기] 잠수함 전문가 안수명씨, “에클스 조사단장에 침몰날짜 왜 틀렸냐 물었더니 묵묵부답”
 
입력 : 2015-03-12  17:44:28   노출 : 2015.03.13  15:28:58
 

천안함 침몰원인을 밝히기 위해 3년 여 동안 미해군과 정보공개 소송을 벌이고 있는 미 잠수함 전문가 안수명 전 안테크 대표가 천안함 5주기를 맞아 북한 잠수함의 어뢰 공격에 의한 침몰 확률 자체가 모순이라고 밝혔다.

또한 안 전 대표는 2010년 천안함 국제조사단의 미군측 조사단장으로 왔던 토머스 에클스 미 해군 제독이 작성한 보고서에 천안함 사고 날짜가 이틀 앞선 것(2010년 3월 24일로 표기)과 관련해 에클스 제독에게 이메일을 보내기도 했다고 전했다. 

안 전 대표는 12일 미디어오늘과 이메일 인터뷰에서 “에클스 제독에게 ‘천안함이 2010년 3월 26일이 아닌 24일 침몰했다고 생각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이메일을 보냈으나 아직도 답이 없다”고 밝혔다.

안 전 대표는 5년 동안 해소되지 않은 대표적인 의문점에 대해 “정확한 시간에 정확한 장소에서 북한 잠수함이 쏜 어뢰가 움직이는 천안함을 탐지하고 추적하여 버블제트(Bubble Jet)로 천안함을 침몰시킬 확률(이 모순)”이라며 “또한 이승헌 미 버지니아대 교수와 서재정 전 존스홉킨스대 교수(현 일본 국제기독교대 교수)가 주장한 흡착물질 의혹 등”이라고 꼽았다.

천안함 5주기가 됐는데도 여전히 의혹이 해소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안 전 대표는 “합조단 보고서가 비과학적이고 비양심적이기 때문”이라고 역설했다.

   
안수명 전 안테크 대표.
이치열 기자 truth710@
 

그는 2010년부터 지난해까지 미해군을 상대로 정보공개 소송을 벌인 끝에 에클스 제독 등의 이메일 자료 1500페이지 가량을 제공받는 등 일부 성과를 얻기도 했다. 안 전 대표는 “내가 소송에 약 100만달러(10억 원)이상을 들여 미정보 자유법에 의거하여 얻은 정보를 보면 이러한 나의 주장을 뒷받침한다”고 밝혔다. 

안 전 대표가 확보한 미 해군 자료를 보면, 에클스 제독조차 천안함 흡착물질 분석결과에 대해 신뢰하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미군 조사단장이었던 에클스 제독은 지난 2010년 천안함 최종보고서 초안에 대해 7월 13일 한국 국방부에 보낸 이메일을 통해 “알루미늄 산화물(백색물질) 논의는 천안함이 북한 어뢰에 격침됐다는 것과 관련해 (굳이) 입증할 필요가 없으며, 과학적 타당성에 대한 의심이 훨씬 많아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에클스는 “한국에서 실시한 테스트를 믿지 않는 우리쪽의 부식관련 전문가들은 의심을 제거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그들은 ‘비결정성 알루미늄 산화물이 평상시 바닷속 부식이 이뤄지는 환경에서도 존재할 수 있다’는 (한국조사결과에) 반하는 증거들이 있다고 믿는다”고 전했다.

에클스는 “나는 이 섹션을 아예 없애거나 부록으로 밀어넣기를 추천한다”며 “이런 증거를 뒷받침하는 모든 케이스가 드러난다면 당신은 신뢰를 잃을 것이며 나는 그런 접근법에 동의할 수 없다”고 밝히기도 했다.

   
토마스 에클스 천안함 미군측 조사단장(해군제독)이 2010년 7월 13일 국방부에 보낸 이메일. 안수명 박사가 미 정보자유법 소송을 통해 얻은 미 해군자료.
 

안 전 대표는 천안함 진실규명과 관련해 최근 자신의 경험을 들어 여전히 북한이 아니라고 하면 빨갱이로 몰아붙이는 분위기가 팽배하다고 전했다.

“한 2주전에 Washington DC 에서 ‘Sony Hacking(소니 해킹), 천안함의 유사점과 틀린점’ 이라는 강연을 했다. 누군가가 ‘그래 북한이 아니면 누가 했소’라 질문하길래 ‘저는 모릅니다’라 했더니 ‘빨갱이 아냐’라고 반문이왔다. 지난해 11월 24일 Sony Hacking 사건에 대해 당시 내가 ‘증거를 대라’, 며칠후, ‘미국이 북한의 IT를 Hacking 해서 안다, Sony Hacking이 미국의 자작극이 아니라는 증거를 대라’고 했을 때도 답이 없다. Sony Hacking과 천안함의 경우 북한이 안했다고 증거를 댈 필요가 없다. 남한이나 미국이 북한이 했다는 증거를 대야 한다. Sony Hacking, 천안함의 경우 북한은 안했다고 말했다.”

천안함 5주기와 관련해 안 전 대표는 “합조단의 보고서는 비과학성과 비양심성을 나타내고 있으나 이승헌 교수, 서재정 교수, 김소구 지진연구소장 등 양심적 학자들이 있다는 것에 기쁨을 가진다”고 전했다.

안 전 대표는 샌디에고에 거주하고 있는 잠수함과 어뢰, 미사일 등의 신호처리-관리 분야 전문가이다.

   
토마스 에클스 천안함 미군측 조사단장(해군제독)이 2010년 7월 13일 국방부에 보낸 이메일. 안수명 박사가 미 정보자유법 소송을 통해 얻은 미 해군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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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리퍼트 대사 피습 사건 수사결과 발표

“김기종, 북한 동조 및 반미 성향으로 범행 착수”경찰, 리퍼트 대사 피습 사건 수사결과 발표
김수정 기자  |  girlspeace@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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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5.03.13  11:2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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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 리퍼트 대사 피습 사건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경찰은 김기종 씨의 북한 동조 및 반미 성향을 범행동기로 파악했다며 김기종 씨를 살인미수, 외국사절 폭행, 업무방해 혐의로 구속 송치하겠다고 밝혔다.

   
▲ 경찰은 13일 오전 기자회견을 열고 김기종 씨의 리퍼트 대사 피습 사건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사진=YTN 속보 캡처)

김기종 우리마당 대표는 지난 5일,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조찬 강연을 준비 중이던 마크 리퍼트 주미대사에게 접근해 그를 쓰러뜨리고 과도 등 흉기를 사용해 오른쪽 얼굴과 왼쪽 손목에 상처를 입혔다. 경찰은 13일 오전 기자회견을 열고 리퍼트 대사 피습 사건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리퍼트 대사 피습 사건 수사 본부장인 김철준 경무관이 브리핑을 맡았다.

경찰은 김기종 씨의 ‘반미’와 ‘북한 동조’ 성향이 범행동기가 됐다고 보았다. 경찰은 “피의자는 1997년 서울시민문화단체 연석회의를 설립하고 우리마당통일문화연구소 등을 중심으로 주로 통일, 반미와 관련된 활동을 전개해 왔다”며 “과거 행적과 현장 발언 등을 볼 때 반미 성향이 대사를 공격하는 극단적인 행위로 이어진 것으로 판단한다”고 말했다.

또한 △1999년부터 2007년까지 7회에 걸쳐 북한을 다녀온 점 △2011년 12월 김정일 분향소 설치를 시도하는 행사에 참가한 점 △2013년 이후 이적단체인 범민련 남측 본부 등이 소속된 전쟁 반대 평화실현 국민행동을 주최하고 공격적 한·미 연합상륙훈련중단 촉구 기자회견에 참가한 전력이 있는 점 △범행 직후에도 한·미 연합훈련 때문에 통일이 안 된다는 취지 주장을 하는 점 △조사 과정에서 우리나라는 미국에 예속된 반식민지 사회이고 북한은 자주적인 정권으로 생각한다고 진술한 점 등으로 미루어 “북한 동조 및 반미 성향이 이번 범행으로 이어졌다고 본다”고 말했다.

경찰은 “피의자는 부인하고 있지만 위해를 가하기 위해 칼을 가지고 갔다고 진술하고 있고, 대사를 발견하자마자 실행에 착수한 점, 칼을 머리 위까지 치켜든 후 내리치듯 가격했다는 목격자 진술, 강한 공격이 최소 2회 이상 이어진 점, 위험한 신체부위인 얼굴에 길이 11cm 깊이 3cm 상해를 입힌 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살인 고의가 있다고 판단된다”고 설명했다.

경찰은 “범행 직후 및 호송 과정에서 주장한 훈련 중단 등의 발언이 피의자의 과거 활동과 연계돼 있어 공범과 배후 여부에 대해서도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전했다. 또 “행적수사 과정에서 북한 방문이나 이적단체인 범민련 남측본부 등으로 구성된 단체가 주최한 친북 성향의 집회에 참석했고, 유인물 내용과 같이 미군 철수, 전쟁 훈련 반대 등피의자의 주장이 북한 주장에 동조한 측면이 많아 국가보안법 위반혐의 관련 수사도 착수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김기종 씨를 살인미수·외국사절 폭행·업무방해 혐의로 구속 송치할 예정이다. 공범 및 배후 여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서는 향후 수사를 이어나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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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말, 늦어도 내년 초, 집값 고꾸라진다

[선대인 칼럼] 지금 빚 내서 집 사는 사람들 특히 위험… 물량폭탄 덮을 부채폭탄 임박
 
입력 : 2015-03-12  13:35:57   노출 : 2015.03.13  09:50:33
선대인 선대인경제연구소 소장 | battiman@hanmail.net   
 

수도권 2차 부동산 폭등이 일어난 2006년부터 분양가상한제 시행 앞둔 2007년까지 건설업체들 앞다퉈 분양물량 쏟아냈죠. 2008년 봄 "뉴타운광풍"이 불었죠. 그 때 아무도 "부동산 불패"를 의심하지 않았을 때 제가 부동산 폭락 가능성을 경고했습니다. 실제로 2008년 하반기 집값이 급락했고, 2006~2007년 분양됐던 아파트들의 물량 폭탄이 쏟아지면서 부동산시장을 더욱 내리눌렀죠.  

2008년 말 수도권 중심으로 집값이 단기 급락했다가 2009년초부터 이명박정부의 대대적 부양책으로 집값이 다시 급반등할 때 많은 이들이 인천 청라 등지의 분양 물량과 강남 재건축에 뛰어들었죠. 그때 저는 "부동산 막차에 올라타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2009년 10월이 고점이었고, 수도권 집값은 그 때부터 2012년 말까지 내리막길 걸었습니다. 하우스푸어들이 여기저기서 생겨났습니다. 

자, 다시 정부와 언론에서 "집값 바닥"이라고 소리칩니다. 2006년 이후 1,2월 거래량이 사상 최대라고 떠들죠. 여기에는 분양권 전매제한 풀린 물량도 상당량 있고, 2000년대 초반 거래량이 파악되지 않아 비교대상에 들지 않아 사실 사상 최대는 아닙니다. 

   

▲ 부동산 열풍이 한창이던 2000년대 후반, 한 아파트 청약 현장에 몰려든 인파. ⓒ 연합뉴스

 

 

그런데 확실한 사상 최대는 두 가지 더 있죠. 이 기간 동안 늘어난 주택담보대출은 사상 최대입니다. 이건 대한민국 역사상 사상 최대입니다. 주택 거래건당 주택담보대출 증가액이 사상 최대입니다. 부동산 폭등기였던 2006년 하반기에 비해서도 두 배입니다. 그런데 2006년엔 14% 이상 뛰었던 집값이 지난해엔 겨우 2.5%였습니다. 이 난리를 치고도 말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사상 최대는 2000년대 이후 사상 최대 분양 물량이 올해 쏟아진다는 겁니다. 집 살 수요가 많이 있어서요?  글쎄요. 한 언론 보도에 인용된 건설업계 관계자 말입니다. "이런 장세가 짧게는 6개월, 길어도 1년 이상 가기 힘들 수 있다는 판단 때문에 경쟁적으로 서둘러 물량을 쏟아내는 것" 건설업체 관계자가 이렇게 말하면, 잠재 수요자들은 어떤 판단을 해야 할까요? 

자 지금 말씀드리는 이런 것들이 모두 뭘 의미하느냐고요? 일부 언론에서 지금부터 2,3년 후에는 "물량 폭탄" 때문에 집값이 다시 가라앉을 거라고 얘기하는데요. 저는 그렇게 길게 잡지 않습니다. 집값이 하락할 주원인도 물량폭탄이 아니라 부채 부담 때문일 거고요. 제가 2013년 말 출간한 "미친 부동산을 말하다"에서 2~3년이라고 말했는데, 이제는 1~2년 정도 안이라고 보면 되겠군요. 아직까지는 그 전망을 수정할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올해 말~내년 초 정도까지는 집값이 다시 가라앉는 걸 보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제가 직접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또 하나의 데자뷰가 있습니다. 1991년 일본에서 부동산 거품이 붕괴했고 이후 3~4년 동안 일본 정부는 대규모 토건 부양책을 펼쳤습니다. 그래도 안 되자 1994~1996년부터는 제로금리와 각종 세제혜택, 가계부채를 동원해 일본 가계들로 하여금 집을 사게 부추겼습니다. 많은 일본 국민들도 집값이 고점에 비해 상당히 빠진 것 같고, 이자 부담도 낮으니 분양대열에 뛰어들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지금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입니다. 

그 뒤는 일본의 길을 따라갈지 아닐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일본의 결론의 말씀드리면,  1997년 부동산 2차 버블이 붕괴했고, 1994~1996년에 분양대열에 뛰어들었던 많은 일본 국민이들이 하우스푸어로 전락했습니다. 한국이 일본의 양상을 똑같이 따라갈지는 미지수입니다. 하지만, 가계부채는 산더미처럼 쌓여있는데, 최근에는 그 속도가 훨씬 더 빨라지고 있습니다. 연내 미국발 금리 인상 가능성은 갈수록 가능성이 높아지는군요. 미국 금리 인상 가능성이 살짝 높아지기만 해도 환율이 급등하는 나라에서 언제까지 금리를 낮은 상태로 묶어둘 수 있는지 의문이군요. 다만 이것 하나는 확실합니다. 지금 무리하게 빚을 내 집을 사는 사람들의 뒷모습이 매우 위태로워 보인다는 것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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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잡는다, 14년 전 여고생 강간살인범”

등록 : 2015.03.12 20:06수정 : 2015.03.13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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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살인의 추억’

전·현직 형사들 뭉친 ‘미제사건 포럼’

2001년 2월4일 전남 나주시 드들강 유역에서 여고생 박아무개(당시 17살)양의 주검이 발견됐다. 피해자의 옷은 모두 벗겨져 있었다. 박양과 아는 ㄱ군은 “그날 새벽 광주 남구의 한 식육점 앞에서 박양이 20대 남성 두 명과 얘기하는 걸 봤다”고 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주검에서 범인의 것으로 보이는 체액이 발견됐지만 범인은 끝내 잡히지 않았다.

 

3년 전 유력한 용의자가 나타났다. 그는 이미 교도소에 수감돼 있었다. 다른 살인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김아무개(38)씨한테서 채취한 디엔에이(DNA)가 박양 주검에서 나온 것과 일치했다. 그러나 마지막 목격자 ㄱ군이 ‘김씨가 범인이 아닌 것 같다’고 진술하고, 김씨 역시 범행을 부인하면서 사건은 다시 미궁에 빠졌다. 검찰은 김씨를 불기소 처분했다. 2016년 2월3일까지, 이제 공소시효는 1년도 남지 않았다.

 

박아무개양 사건 첫 대상으로
나주 드들강서 주검 발견뒤 ‘미궁’

 

3년전 수감자 유전자 검사 도중
DNA 일치 유력 용의자 나왔지만
증거불충분 이유로 불기소처분

 

“오래된 사건이라 해도 주변에
보이지 않는 증거는 남아 있다”
주변조사 등 단서 찾아나서

 

전·현직 베테랑 형사 5명과 범죄학자, 변호사가 팀을 만들어 이 ‘콜드케이스’(미제사건)를 해결하겠다고 나섰다. 장기미제사건을 풀어가는 여형사가 주인공인 미국 드라마 <콜드케이스>의 ‘한국판’인 셈이다.

 

고병천 전 서울 서초경찰서 강력반장
지존파 사건 등을 수사했던 고병천(66) 전 서울 서초경찰서 강력반장이 중심이 돼 지난해 12월 꾸린 ‘미제사건포럼’은 박양 사건을 첫 대상으로 삼았다. 지난 11일 만난 고씨는 “30년 형사 생활을 하면서 한 건의 미제사건도 남기지 않았다고 자부한다. 범죄학 박사 학위를 받은 것도 예전부터 이런 일을 해봐야겠다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고씨는 지난달 광운대에서 범죄단체 구성원의 행동 패턴을 연구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9년 이후로 수사본부까지 꾸려졌지만 결국 범인을 찾지 못해 장기미제로 분류된 것은 ‘대구 황산테러 사건’(1999년) 등 모두 20건에 이른다.

 

미제사건포럼이 드들강 여고생 살인사건에 주목한 이유는 공소시효가 채 1년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2007년 12월 살인죄 공소시효가 15년에서 25년으로 늘었지만, 2001년에 발생한 이 사건에는 기존 15년 시효가 적용된다.

 

고씨는 “유전자가 일치하면 거의 범인이 맞는데,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한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김씨를 조사한 게 사건이 나고 10년도 더 지난 시점이기 때문에 목격자가 부정적 진술을 했다고 해도 추가조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고씨는 특히 유력한 용의자 김씨가 2명을 살해해 복역 중인 사실을 눈여겨보고 있다. 범죄 패턴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살인도 알코올중독과 똑같다고 보면 돼요. 범죄를 저지르면 불안하고,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 다른 범죄를 또 저지르죠. 일단 교도소에 들어가면 수사 대상에서 사실상 제외되고요.” 고씨가 박사학위 과정 중 쓴 부논문의 제목도 ‘살인중독’이다.

 

미제사건포럼은 박양 가족을 접촉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14년이 지났지만 가족 얘기를 듣다 보면 당시에는 놓친 중요한 단서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고씨는 “용의자와 같은 방에 수감된 사람들 얘기도 들어보면 큰 도움이 된다. 공소시효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범인이) 안심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이를 역이용하는 게 필요하다”고 했다.

 

“10년이 지난 사건이라도 ‘보이지 않는 증거’는 남아 있어요. 현장은 물론 피해자 주변이 말해주는 무언가가 반드시 있습니다.” 미제사건 해결팀엔 과거의 미제사건도 현재진행형이다.

 

서영지 기자 yj@hani.co.kr

 

드들강 여고생 살인사건

 

2001년 2월4일 여고생 박아무개양이 전남 나주시 남평읍 드들강 유역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사인은 익사였지만 목이 졸리고 성폭행을 당한 흔적이 발견됐다. 2012년 살해죄로 복역 중인 김아무개씨의 디엔에이가 박양 주검에서 나온 것과 일치했지만 증거가 부족해 무혐의 처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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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술번복으로 생성된 ‘정윤회 알리바이’ 그 의혹들

 
 
허위 진술 밝혀낸 증거를 졸지에 알리바이로 둔갑시켜
 
육근성 | 2015-03-12 13:55:57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대통령 7시간 행방과 관련된 기사를 쓴 가토 다쓰야 산케이신문 전 서울지국장검찰이 이 사람을 기소하기 위해서는 정윤회씨로부터 세월호 참사 당일 박 대통령과 함께 있지 않았다는 증거를 확보해야만 했다알리바이를 찾아내야 했던 검찰은 우선 정씨를 검찰로 불렀다.  

가토 기소위해 필요했던 정윤회 알리바이 

검찰이 ‘4월 16일 행적을 묻자 정씨는 알리바이를 입증하기위해 자신의 휴대폰 통화내역을 제출하며 이런 얘기를 한다 

“(세월호 참사 당일특별한 일이 없어서 집(신사동)에 있다가 저녁 6시경 신사동에서 친구들을 만난 게 전부다집에서 일하는 아주머니에게 물어보면 그날 자신의 행적이 남김없이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신사동집-통화내역-가사도우미를 내세워 자신의 알리바이를 입증하려 했던 정씨의 주장은 거짓으로 드러난다그가 평창동에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 발신기록(4월 16일 1420)이 나왔기 때문이다알리바이가 허물어진 것이다이렇게 끝날 경우 가토 지국장에 대해서는 무혐의 처분이 불가피할뿐더러, ‘박근혜 7시간 행방에 대한 논란은 더욱 뜨거워질 수밖에 없게 된다 

다급해진 검찰이 움직였다하지만 태도가 상식 밖이었다허위사실을 알리바이로 만들려 했던 정씨를 소환하지 않고 전화로만 조사를 했다. 1차 전화조사는 정씨가 검찰조사(2014년 8월 15)를 받은 지 4일 뒤에 이뤄졌다. ‘16일 1420분 평창동에서 휴대전화 사용한 기록이 있다는 사실을 정씨에게 알려주며 사실 여부를 확인한 게 전부다. ‘진술과 다른 증거가 나왔다는 사실을 통보해준 거나 마찬가지다.

 

정윤회 진술 사실과 달라...다급해진 검찰 

이후 10일쯤 지나서다. 8월 말경 담당검사가 정씨에게 전화를 해 평창동 발신기록에 대해 묻는다이것이 2차 전화조사다이때 정씨는 ‘4월 16일 11시부터 220분까지 평창동 지인 집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돌아왔으며 저녁 6시경 약속돼 있던 친구들을 만났다고 말한다진술 번복 정도가 아니다. ‘평창동 발신내역에 꿰맞춘 새 진술이 나온 것이다. 

2차 전화조사 2주 뒤인 9월 15. “정윤회는 평창동 지인의 집에 있었다는 기사가 대서특필된다대부분 언론매체가 검찰 당국자의 말을 인용해 이 같은 보도를 앞다투어 내보냈다정씨의 새로운 주장을 알리바이로 굳히기 위해 언론을 활용한 것으로 밖에 달리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정윤회 알리바이는 이렇게 만들어졌고 가토 지국장은 10월 초 불구속 기소된다정씨의 진술 번복과 새로운 주장에 상당한 신빙성이 있다고 본 검찰에 의해 생성된 알리바이다하지만 이 알리바이는 뜯어볼수록 의혹투성이다.

진술번복으로 생성된 알리바이는 의혹투성이 

의혹1: 정말 평창동 점심약속을 기억하지 못했을까친구들과의 저녁 약속은 또렷이 기억하면서, 40분 정도 자동차로 이동해야 했던 고명한 역술가와의 점심약속을 기억하지 못하다니 납득이 가지 않는다더욱이 모든 국민이 기억하는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던 그날 아닌가 

의혹2정씨가 만났다는 평창동 지인(이상목씨)의 주소지는 종로구 부암동그런데 세월호 참사 당일 정씨를 만났다고 진술한 그 시점에 갑자기 주소지가 평창동으로 옮겨진다왜 일까?

<정씨 지인 이상목씨(역술인) 평창동 집>

의혹3정씨와 이씨의 진술이 엇갈린다당일 정씨가 평창동 이씨 집을 방문한 시간과 그 집에서 나온 시각두 사람이 서로 알게 된 경위연락을 주고받은 빈도수 등에 대한 증언이 일치되지 않는다 

의혹4: 검찰의 전화조사도 미심쩍다첫 번째 전화조사와 두 번째 조사는 10일 간격을 두고 진행됐다.첫 전화는 정씨가 제출한 통화내역에 진술 번복이 불가피한 증거가 들어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함이고두 번째 전화는 정씨에게 뭔가 준비할 시간을 준 뒤에 형식적으로 이뤄진 조사가 아닐는지

의혹5: ‘정씨가 당일 청와대로부터 멀리 있었다는 주장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형제봉 아래(평창동4XX 번지)에 위치한 이씨 집에서 출발해 자동차로 이동해도 청와대까지 걸리는 시간은 불과 15분 정도.거리로는 15km택시를 탈 경우 7000~8000원 요금이 나온다세검정을 거치지 않고 북악스카이웨이를 이용할 경우 10분 이내 청와대에 도착할 수 있다물리적·공간적 측면에서 볼 때도 알리바이가 충분하다고 말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의혹6: ‘평창동 알리바이의 단서가 된 당일 1420분 발신 내역에 대한 조사도 부실하다누구와 통화했는지 밝혀지지 않았다게다가 정씨 휴대전화에는 세월호 참사 전날인 15일 1419분부터 평창동 발신이 확인된 1420분 이전까지 24시간 동안 발신기록이 전혀 없다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의혹7: 애당초 정씨가 주장한 1차 알리바이가 허위라는 걸 밝혀낸 증거(평창동 발신내역)가 외려 2차 알리바이를 형성하는 재료로 활용됐다알리바이가 신사동-가사도우미에서 평창동-지인(역술인)’으로 졸지에 둔갑된 상황이라면 검찰은 합리적 의심의 눈초리로 정씨를 바라봐야 한다하지만 검찰은 정씨와 이씨의 말을 그대로 믿어 정씨의 번복된 주장을 알리바이로 인정했다언론플레이까지 동원해서 말이다 

허위진술 입증한 증거가 알리바이로 둔갑 

의문이 생긴다정씨가 당일 집에 있었다는 자신의 알리바이를 입증하기 위해 제출한 통화내역에 평창동 발신이 들어있었다는 걸 어떻게 봐야 할까 

관련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 채 통화내역을 검찰에 제출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세월호 참사 전후 24시간 동안 정씨의 휴대전화 통화내역을 보면 발신 내역이 하나도 없다그러다보니 전화를 걸지 않았다는 생각에서 1420분 발신 사실까지 잊었던 모양이다 

당일 1420분 평창동 발신은 정씨의 알리바이 주장이 거짓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이자 동시에 검찰이 인정한 알리바이의 결정적 단서이기도 하다이 알리바이가 24시간 동안 단 한 번도 휴대전화 발신 버튼을 누르지 않은 채 당일 청와대와 부근에 있었던 정씨에 대한 의혹을 모두 해소하는데 충분하다고 보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22&table=c_aujourdhui&uid=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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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인사 이름 딴 광주 '백일로' 사라진다

 

광주 서구청 "16일부터 '학생독립로'로 변경 사용"

15.03.12 19:48l최종 업데이트 15.03.12 19:48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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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일인사 김백일의 이름을 딴 도로명 '백일로'가 오는 16일부터 '학생독립로'로 변경 사용된다. 3·1운동 이후 가장 큰 규모의 항일운동이었던 광주학생독립운동의 기념회관 소재지가 친일인사 김백일의 이름을 딴 '백일로'라는 사실이 지난해 11월 뒤늦게 확인됐다. 백일로 외에도 백일초등학교, 백일 어린이공원 등이 김백일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백일초등학교 , 이름도 조만간 변경될 것으로 보인다.
ⓒ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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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장교출신 김백일의 이름에서 유래한 광주광역시 서구 '백일로'가 '학생독립로'로 변경된다(관련 기사 : '친일 김백일' 이름 딴 지명, 개명 요구 잇따라).

12일 광주 서구청(구청장 임우진)은 "친일인사 명칭 사용으로 논란이 제기됐던 백일로 도로명 변경을 위한 모든 절차를 마쳤다"라며 "16일부터 '학생독립로'로 변경해 사용한다"라고 밝혔다.

서구청은 지난해 12월부터 백일로 명칭 변경을 위한 추진계획을 수립, 주민의견 설문조사 등을 실시한 바 있다. 지난 2월 '도로명주소 심의위원회'를 개최해 백일로를 '학생독립로'로 변경하기 결정했다. 이후 백일로 외 3구간 주소사용자(화정동) 주민 665명 중 460명(69%)에게 서면동의를 받아 도로명 변경에 필요한 모든 절차를 마쳤다. 

서구청은 도로명 변경에 따라 도로명판과 건물번호판을 교체하고 주민들에게 도로명 변경안내문을 발송할 예정이다.

백일로 도로명 변경과 함께 김백일의 이름을 딴 백일초등학교도 학교명 변경을 추진 중이다. 지난 1월 광주광역시교육청(교육감 장휘국)은 교명 변경협의회를 열고 '백일'초등학교를 대신할 새이름 후보로 성진, 백범, 독립초등학교 3개를 선정하고 학교 측에 추천했다. 백일초등학교 명칭 변경은 관련 조례 개정 절차를 거쳐야 하며, 3월 말쯤 변경될 것으로 보인다.

이에 앞서 지난해 11월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회관이 위치한 백일로, 백일초등학교, 백일산 등이 1930년대 간도특설대 장교출신 인 김백일의 이름을 딴 것으로 알려져 개명 요구가 잇따랐다.(관련기사 : "광주 '백일로' 유래는 친일파 장교 김백일")

김백일은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돼 있을 뿐만 아니라, 2009년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일제강점 말기 친일반민족행위 관련자' 704명의 명단에도 오른 인물이다. 

국립현충원에 안장된 김백일은 한국전쟁 영웅으로 숭상받고 있으며, 서울 전쟁기념관·경남 거제 거제포로수용소 유적공원·전남 장성 육군보병학교 등에 그의 흉상과 동상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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