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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역면제’ 정홍원 총리 후보자의 아들은 누구의 아들인가?

 

‘사람의 아들’ - ‘장군의 아들’ - ‘신의 아들’
 
[정운현 칼럼] ‘병역면제’ 정홍원 총리 후보자의 아들은 누구의 아들인가?
 
정운현 기자 | 등록:2013-02-12 12:39:27 | 최종:2013-02-12 12:59:59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영화 '장군의 아들' 포스터
장편소설 <사람의 아들>은 소설가 이문열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연극과 영화로도 만들어져 널리 알려졌다. 1990년에 개봉된 영화 <장군의 아들>은 청산리대첩의 영웅 김좌진 장군의 아들인 김두한을 주인공으로 만든 것으로, 김두한 역을 맡은 박상민을 일약 스타로 만들었다. 1993년에 출범한 YS의 문민정부에서 고위공직자 재산공개와 공직자 및 그 자녀의 병역사항 공개를 계기로 이 둘은 새로운 유행어로 둔갑했다.

 

그 때 생겨난 말이 현역으로 군대 간 사람은 ‘사람의 아들’, 방위병(공익근무요원)은 ‘장군의 아들’, 병역면제는 ‘신의 아들’이라는 것이었다. 응당한 국민의 의무로 알고 군대갔다온 사람을 마치 봉건시대 천민(賤民) 취급을 한 것이다. 대한민국 성인남자의 90%는 군대를 현역으로 갔다 온다. 예나 지금이나 군대생활이 힘든 것은 차치하고라도 만약 ‘군필(軍畢)’을 하지 않을 경우 사회적 불이익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그러니 가능하기만 하다면 군대는 안가려고 하고 이왕 안가려면 완벽한 ‘병역면제’를 꿈꾸는(?) 것은 어쩌면 인지상정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병역면제는 아무에게나 가능한 것이 아니다. 뚜렷하고도 심대한 신체적 결함, 즉 장애나 질병이 있는 경우에만 국한된다. 연예인이나 운동선수들의 병역기피가 더러 논란이 됐던 것은 일부러 질병을 유도했거나 기획했기 때문인데, 이는 몇몇 고위공직자 자녀들의 병역면제도 비슷한 맥락이라는 의혹을 사고 있다.

현역 출신은 '사람의 아들'? 천민?

현직 검사인 정홍원 국무총리 후보자의 아들은 허리디스크로 병역면제를 받았다. 정 후보자는11일 총리실을 통해 아들의 병적기록표, 2001년 10월 30일자 병무청 제출용 강남성모병원 진단서, 2001년 12월~2002년 7월까지 서울 자생한방병원 의무기록 등을 공개했다. 그리고는 아들이 허리디스크 수술을 받지는 않았지만 오랫동안 허리통증으로 고생했노라고 밝혔다. 앞서 낙마한 김용준 후보의 대응태도와는 사뭇 다르다는 평이다.

병적기록표에 따르면, 정 후보자 아들은 1997년 4월 서울지방병무청에서 1급 현역입영대상 판정을 받고, 대학원 재학 중인 2001년도까지 재학생 입영연기 대상이었다. 정 후보자 아들은 2001년 11월 병역처분 변경을 위한 신체검사에서 수핵탈출증(허리디스크)으로 5급 판정을 받아 사실상 병역면제인 제2국민역 판정을 받았다. 다시 말해 첫 신검에서는 입영대상자인 1급을 받았다가 4년 뒤엔 허리디스크로 병역면제를 받았다.

정 후보자의 아들이 실지로 심각한 허리디스크였는지, 아니면 병역기피를 위한 꾀병 부리기였는지를 가려내기란 전문 의료진 말고는 알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과거 고위공직자 자녀나 연예인, 운동선수들의 병역면제가 논란이 됐을 당시 이들의 뒤를 봐준 사람은 다름 아닌 의료인들이었다. 병역면제자를 양산(?)해온 몇몇 병원의 경우 병원 이름이 거명되기도 했었다. 다시 말해 의료진들의 주장도 사회적인 신뢰를 잃은 지 오래됐다.

2010년 10월 국회 국방위 국정감사 때 ‘장군의 아들’ 얘기가 거론됐는데 앞에서 언급한 ‘김좌진 장군’의 아들 김두한 얘기가 아니라 현역 장성들의 아들 얘기였다. 당시 민주당 신학용 의원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현역 장성의 아들 가운데 자대 배치된 육군 사병은 거의 예외없이 ‘편한 보직’으로 근무하고 있다는 것. 즉 ‘장군의 아들들’은 보병-포병-기갑병 등 ‘뺑이 치는’ 전투병보다는 복지지원병-시설관리병-통역병-전산운영병 등을 꿰차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장군의 아들들’은 해외 파병군에서도 달랐다. 위험지역인 아프가니스탄 파병 ‘오쉬노부대’에는 한 명도 없었던 반면 비교적 안전한 레바논 ‘동명부대’와 아이티 ‘단비부대’에 집중돼 있었다. 해외파병 장병들의 경우 월급 외에도 별도의 수당을 주었는데, 장군의 아들들은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고 한 셈이다. 이는 비단 육군만이 아니라 해군 장성들의 아들들로 힘든 함상근무 아닌 해군사령부 보급창 등에 배치돼 육상근무를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명박 정권의 병역면제 3인방. 왼쪽부터 이명박 대통령, 안상수 전 새누리당 대표, 김황식 총리

이른바 안보를 강조하는 보수정권이라는 이명박 정권은 ‘병역면제’가 극치를 이뤘다고 하겠다. 한 때 이 대통령을 비롯해 국무총리, 여당 대표, 국정원장 등이 모조리 군 면제자였던 때가 있었다. 일부러 이렇게 짜기도 어렵다. 반면 ‘천안함’에 타고 있다가 억울한 떼죽음을 당한 46명의 병사들은 하나같이 서민들의 자식들이어서 이들과 극명한 대조를 이뤘다. 이래놓고서 국민들에게 병역의무를 강조하거나 애국심 운운하는 건 말이 안된다.

'병역면제' 인사들이 보수정권 수뇌부 구성

정홍원 총리 후보자 아들의 경우 어쩌면 실지로 허리디스크가 심해 군 복무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의 병역면제가 정당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국민들이 이를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 것은 그간 고위공직자 자녀들의 비상식적인 행태 때문이다. 김용준 인수위원장 장남의 경우 몸무게 1kg이 미달해 면제를 받았는데 이를 두고 한 네티즌은 그가 군대 갈 생각이 있었다면 신검 때 물을 마셔서라도 몸무게를 늘였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오늘자 <한겨레>보도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총리 후보와 그의 아들들 13명 가운데 6명이 군 면제 판정을 받아 면제율이 거의 50%에 육박한다. MB 정부의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한승수 전 총리는 군 복무중 대학을 졸업하고 제대 후 1년 만에 대학원까지 졸업했다. 또 그의 아들은 병역특례업체 근무로 병역을 대체했는데, 4년6개월 근무 기간 중 휴가와 출장으로 244일이나 국외에 머물며 골프를 쳤다.

또 정운찬 전 총리는 입영을 수차례 미루다 ‘고령’(당시 31살)을 이유로 병역을 면제받았으며, 김황식 현 총리는 시력 문제로 병역을 면제받았다. 병역 면제로 번 2년여의 시간 동안 이들은 사법고시에 합격하거나 학위를 따면서 출세의 길을 탄탄하게 다졌다. 최근 들어 재벌가 자제들의 병역면제가 늘고 있다. 2011년 당시 한 언론사가 국내 11개 주요 재벌가 성인 남자 124명의 병역사항을 파악한 결과 면제율은 35.1%에 달했다. 재벌가의 아들들은 이제 ‘신의 아들’이 되려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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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연 사건’ 다룬 영화 ‘노리개’ 개봉 임박

 

‘장자연 사건’ 다룬 영화 ‘노리개’ 개봉 임박
 
2월 개봉 예정, ‘굿펀딩’ 통해 홍보비 모금 중... 상영 되면 큰 파장 일 듯
 
정운현 기자 | 등록:2013-02-11 12:08:49 | 최종:2013-02-11 12:57:06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 고 장자연 씨

 

연예계의 고질적인 성상납 비리사건이 빚어낸 이른바 ‘장자연 사건’을 다룬 영화가 이달 중에 개봉될 예정이어서 주목을 끌고 있다. 이 영화는 그간 암묵적으로 있어온 '연예계 성상납' 문제를 수면 위로 다룬 국내 최초의 법정 드라마로, 제작 전후 영화계 안팎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특히 이 사건은 아직도 관련 재판이 진행 중인데다 ‘성상납’을 고리로 연예인, 광고주, 언론, 정치인 등의 추악한 유착 실태가 적나라하게 다뤄질 예정이어서 영화가 개봉될 경우 상당한 파장이 예상된다.

‘2013년 대한민국을 분노케 할 작품’이라는 타이틀로 소개된 영화 ‘노리개’는 작년 9월부터 제작에 들어가 작년 말 촬영을 모두 마쳤으며, 현재 이달중 개봉을 목표로 마무리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제작진은 또 이 사건이 여전히 소송이 진행중인 점 등을 감안해 대비책도 세우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10일자 <미디어오늘> 보도에 따르면, 제작진의 한 관계자는 “제작 과정에서의 자본에 대한 끊임없는 외압 뿐 아니라 영화가 완성된 지금도 여전히 소송에 대한 두려움이 존재한다”고 털어놨다. 제작진은 또 대기업과 매니지먼트들이 참여를 꺼려 제작이 번번이 무산되는 고초를 겪었다고 밝혔다.

작년말 촬영 완료, 2월 중 개봉 예정...큰 파장 일듯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작진은 이 영화를 통해 연예계와 광고주, 언론, 정치인 등과의 추악한 유착의 고리를 끊는 전환점이 되길 기대하고 있다. 이를 위해 제작진은 연예기획사 대표, 언론사 사장, 영화감독, 매니저 등의 다양한 등장인물들에 대한 인터뷰와 법정증언을 통해 성상납 로비 문제와 거대권력의 잔혹한 살인행위를 폭로할 방침이다.

따라서 등장인물의 이름 역시 ‘장자연 사건’과 관련된 인물들과 비슷하다. 즉, 희생된 연예인 역의 이름은 고 장자연 씨 이름과 비슷한 ‘장지희’이며, ‘노란 복수초’에서 열연한 민지현 씨가 맡았다. 또 장지희의 죽음을 추적하는 기자의 이름은 ‘이장호’로 마동석이 맡았는데, 이 사건을 추적, 보도해온 이상호 전 MBC 기자를 연상시킨다.

‘노리개’ 제작진은 지난달 31일부터 ‘굿펀딩’(http://www.goodfunding.net)을 통해 일반관객들을 상대로 자발적 홍보지원금을 모금해 화제를 모으고 있다. 홍보지원금은 선전 포스터, 벽보, 전단 제작 등에 사용된다. 제작진은 ‘굿펀딩’으로 영화 개봉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을 유도해 이를 영화 홍보로까지 활용할 계획이다.
 

 

 


최승호 감독은 <미디어오늘>과의 인터뷰에서 “국민들이 생각하는 상식은 법원칙 혹은 ‘침묵의 카르텔’ 앞에 무너져버렸다”면서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 영화를 준비하기 위해 제가 만난 많은 여자 연예인들은 실제로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다고 했다. 누군가는 그녀들의 어두운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아야 했다”고 밝혔다.

 

한편, ‘장자연 사건’과 관련해 언론계 거물급 인사로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이 거명돼 진위 여부를 두고 논란과 함께 지리한 소송사건이 계속돼 왔다. 몇몇 언론과 언론단체, 국회의원들은 이같은 의혹에 대해 수사당국의 철저한 수사를 촉구하다가 조선일보사와 방상훈 사장으로부터 소송을 당했다. 그런데 최근 조선일보사와 방 사장은 이들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소송 항소심에서 모두 패소했다.

조선일보-방상훈 사장, 언론사 상대 소송서 모두 패소

서울고등법원 민사13부는 지난 8일 조선일보사와 방 사장이 KBS, MBC, 김성균 언론소비자주권국민캠페인 대표 등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 3건의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피고들은 공익성, 상당성 등 위법성 조각 요건을 갖춰 일부 허위사실을 적시했더라도 손해배상 책임이 없다”고 밝혔다. 다만 재판부는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이 고 장자연 씨로부터 부적절한 접대를 받았다’는 의혹은 ‘허위사실’이라고 밝혔다.

이와 함께 방 사장과 조선일보사가 이종걸 민주통합당 의원과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표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소송 항소심 선고공판에서도 재판부는 “(단정적인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고 의견을 말했을 뿐) 허위사실을 적시했다고 보이지 않는다”며 방 사장 측의 항소를 기각했다. 이로써 방 사장 측이 낸 소송은 현 단계에서는 모두 패소했는데 향후 대법원에 상고할지 여부에 주목된다.

이종걸 의원 등의 변호인을 맡고 있는 안상운 변호사는 고법 판결 직후 <미디어오늘>과의 인터뷰에서 “이번 항소심 재판결과는 방상훈 사장이 2009년 당시 처음부터 여론화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전략적으로 소송을 제기했다는 의심을 떨쳐버릴 수 없게 한다”며 “방 사장 접대 의혹 보도가 허위로 판단된다는 판결의 경우 경찰·검찰의 수사 자체가 부실하고 형식적이었다는 점부터 짚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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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유권소 회원들 부정선거 시위 동영상 - CJK

시카고 유권소 회원들 부정선거 시위 동영상
(다음아고라 / CJK / 2013-02-10)


(시카고 일부 한인단체가 유권소 활동을 종북 어쩌고 하는 바람에 분노한 유권소 회원들이 찬바람 속에 시위한 동영상과 글입니다)

Chicago Daley Plaza 시위 2013.02.09

태극기 둘르고, 시카고 겨울 찬바람에, 시위하는 좌빨이나 종북 본 적 있니?
얼마나 답답하면 해외동포들이 이러겠냐?
국정원이 개입한 18대 대선은 무효야, 쨔샤들아!
얌마들아! 수개표 하지 않은 가짜선거는 무효야, 이 십원짜리들아!
우리는, 고종의 헤이그 밀사의 심정으로, 우리를 낳아준 어머니의 나라가 정말 잘 되기를 빌어 마지 않는다.


 

http://www.youtube.com/watch?v=iWvpaVQu4hg

http://www.youtube.com/watch?v=TqS9VKNhzBo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15&articleId=2288781

 


 

재외동포들 "대선 총체적인 부정선거"...'유권소' 발족
(오마이뉴스 / 전희경 기자 / 2013-02-07)


재외 유권자와 동포들이 "18대 대선은 총체적인 부정선거라고 본다"는 내용의 다섯번째 성명서를 5일 발표했다.

18대 대통령 선거 부정의혹과 관련하여 이미 네 차례의 성명서를 발표한 바 있는 재외 유권자 및 동포들이 5일 오후 (미국 현지시각) 다섯번째 성명서를 같은 웹사이트에 발표했다. 18대 대선을 부정선거라 선언하는 이 성명서는 8일자 <한겨레>와 <경향신문>에도 광고형식으로 실린다. 이들은 웹사이트를 통한 서명진행, 일간지 광고게재 외에 주권방송을 통한 대안방송과 화상회의도 진행중에 있다.

이 성명서는 '제 18대 대통령 선거의 투명성을 요구하는 재외유권자와 동포들' 명의로 발표되었으며. 이 모임은 미주 사람사는 세상, 애틀랜타촛불 모임, 인도의 등불, 샌디에고, LA, 상하이, 독일 등의 유권자 모임' 등 단체 뿐만 아니라 미국, 영국, 독일, 인도, 중국, 오스트리아, 이태리, 호주 등 전세계에 거주하는 재외동포 1830여명으로 구성되어 있고 회원수는 증가추세에 있다. 또 이들은 새로운 시민운동조직인'유권자 권리를 소중히 생각하는 모임 (이하 유권소)'를 발족시켰다.

제니퍼 리 유권소 대표는 같은 날 유권소의 발족을 알리는 "새로운 시민운동! 새 길을 열겠습니다"제목의 선언문에서 "시민이 권력입니다. 전 세계의 흩어진 힘을 하나로 묶는 시민운동, 새로운 형태의 운동을 유권소가 시작"했다고 전했다.

유권소는 발족 선언문에서 진정한 독립운동, 부정과 불법을 자행하는 세력과의 싸움, 유권자의 권리를 정치인이나 정당에게 맡기지 않고 스스로 찾는 일을 해나가겠다고 밝혔다. 전문은 유권소 홈페이지(f4vr.com)에서 볼 수 있다.

다음은 5차성명서와 유권소 발족선언문 전문이다.

 

 

우리는 18대 대선을 총체적인 부정선거라고 본다.

이번 18대 대통령 선거에서 세계 곳곳에 퍼져 나가 있는 우리 재외국민들은 거리와 시간의 어려움을 무릅쓰고 조국의 발전을 위해 선거에 기꺼이 참여를 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는 선거중립을 지키기는커녕 국가정보원과 선거관리위원회를 부정선거에 동원하였다.
이에 해외에 있는 우리들은 조국의 민주주의가 파탄 나는 모습을 그냥 지켜볼 수 없어서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항거를 하며 이런 뜻을 국내외 모두에게 알리는 바이다.

우리는 18대 대선이 관권개입 부정선거라고 본다.

1. 국가기관이 개입하여 치른 선거는 원천무효이다.
국가정보원법 제9조 '정치 관여 금지' 조항에서는 "특정 정당이나 특정 정치인에 대하여 지지 또는 반대 의견을 유포하거나, 그러한 여론을 조성할 목적으로 특정 정당이나 특정 정치인에 대하여 찬양하거나 비방하는 내용의 의견 또는 사실을 유포하는 행위"를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실제로는 현직 국정원 직원들이 18대 대통령 선거에 관여하도록 기존의 조직보다 확대된 70명의 팀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그 중 언론에 들통난 1 명의 국정원 여성직원이 국정원 업무시간에 40개의 아이디를 가지고 활동한 정치적 교란행위는 대한민국 헌법을 유린하고 선거에 관여한 엄청난 범죄이다.

2. 선거관리위원회는 법대로 공정한 선거관리를 하지 않았다.
대선 개표에서 공직선거법 및 중앙선관위 개표 매뉴얼에 적시된 전량 육안에 의한 2-3회에 걸친 수작업 검열 과정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 여러 참관인의 증언과 동영상, 수많은 관련 자료로 밝혀졌으나 중앙선관위는 수개표를 하였다는 거짓 해명을 되풀이 하였고, 이번에 개표과정에 동원한 전자장치에 대해 허위로 발표하여 국민을 속였으며 선관위 서버를 선거 이후 교체하였고, 1분 단위 개표현황 자료가 선관위와 SBS방송사가 서로 어긋나는 등 실로 많은 면에서 부정이 개입된 흔적들이 드러나고 있다.

이에 우리 재외 유권자들은 다음을 강력하게 요구한다.

1. 국정원이 헌법을 위반하여 부정선거를 저지르게 한 책임을 지고 원세훈 국가정보원장을 당장 파면할 것.
2. 공정한 선거관리를 하지 않고 개표조작의 의혹을 일으킨 책임을 물어 김능환 당시 선거관리 위원장을 국정조사와 헌법위반 법정에 세울 것.
3. 법원, 검찰은 헌법정신과 민주주의에 원칙에 입각하여 부정을 처단할 것.
4. 선거 중립을 지키지 않은 이명박 대통령은 부정선거와 개표 조작을 저지른 현 정부의 책임자로서 국민 앞에 사죄하고 하야할 것.
5. 새누리당 김무성 선거관리 위원장이 관여한 것으로 의심되고 방송과 선관위의 부적절한 개표행위를 통해 당선자로 발표된 박근혜는 당선자 신분을 당장 포기할 것.
6. 여당과 야당을 포함한 정치단체들은 이번 18대 대선이 총체적인 부정선거임을 인정하고 국정조사 등 모든 노력을 아끼지 말 것.

2013년 2월 5일

제 18대 대통령 선거의 투명성을 요구하는 재외 유권자와 동포들

김효원, 김성수, 이명자, 윤지영, 임서연, Hyun Song, 정옥경, JongmooLee, 한정혜, 오현경, 강재구, 이원종, 권건희, 하종민, 배용하, 권춘구, 김동열, 한은미, 황영매, 최형근, 김효소, 오주희, 박성미, 김효원2, 김현승, 정수진, 이경숙, 송은미, 이홍식, 최재혁, 이명자, 문영로, 김성현, 현기석, 해피손화이팅, 신수억, Jangwon, 끝까지화이팅, 부정선거, Laura Chang, Kyung Ji Lee, Ted Ahn, Mag Jung, Jae Lee, Sujin Kim, Linda Lee , J. Kim, Misook Gwon, Yooha Song, Laura Chang, 안상국, Mag Jung, Jae Lee, Sujin Kim , Linda Lee, J. Kim, 김명곤, Young Cho, Ted Park, LA 미권스, HeeYoung Jin, Mia Kim 송유나, Ung-Jin Kim, Chris Moon, SB Kang, Jennifer Lee, 한송이, 김동진, 오현경, 조경옥, 고진순, 여인철, James Choi, 황차은,일본김상문, 여인철, 임서연, 허경문,힘내세요, 석종호, 박미정
서명자 명단확인은 유권소 홈페이지( f4vr.com)이나 성명서가 실린 블로그스팟(http://2012skpreselection.blogspot.com/2013/02/18.html?m=1)을 참조할 수 있다.

 

 

 

유권소 발족문

"유권소 - 새로운 시민운동! 새 길을 열겠습니다."

- 시민이 권력입니다. 전 세계의 흩어진 힘을 하나로 묶는 시민운동,
새로운 형태의 운동을 유권소가 시작했습니다-

1. 진정한 독립운동! 다시 시작입니다.

1910년 8월 22일 최고 통치자 순종이 저항 한번 제대로 못 한 채, 합법을 가장한 불법을 저지른 일본에 나라를 통째로 넘겨줘도 대신들 누구 하나 이에 반대하거나 목놓아 우는 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고 합니다. 피 끓는 분노는 오로지 동학 농민전쟁· 의병전쟁을 비롯한 백성의 거센 저항과 반발뿐이었습니다. 일제는 군대를 동원하거나 각종 악법을 만들어 강력하게 탄압하였고 압제는 36년 동안 자행되었습니다. 치욕과 굴욕으로 얼룩진 대한민국의 역사입니다.

한일강제병합 100년을 기하여 새누리당 국회의원 정옥임 의원은 한일합방이란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이상득 의원은 2009년 일본 외상을 만난 뒤 같은 표현을 했으며 이동관 전 청와대 대변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정확한 표현은 한일강제병합입니다. 일제가 무력으로 우리나라를 침략하여 국권을 강탈했던 일임에도 일본에선 NHK가 정부의 지원으로 한일강제합방 100주년 특집을 준비하고, 강제합방을 합법적인 것으로 몰고 가는 위기가 닥쳐오는데도 대한민국은 국격도 주인도 없이 정체성의 혼돈 속에 표류하고 있습니다. 한일강제병합을 합방이라고 호칭하는 역사의식을 가진 정당이 정권을 잡는다면 역사 왜곡을 하지 않을까 심히 우려됩니다.

우리는 지난 역사에서 교훈을 배웁니다. "위대한 애국지사들의 독립운동은 단순히 일제를 몰아내고 국권을 되찾는 데 머무르지 않고 국민 주권을 확립하고 근대적 국민국가를 수립하는 토대를 마련해주었습니다. 야만적인 무력 침략에 굴복하지 않고 자유와 평화를 향해 줄기차게 투쟁한 세계사적 의미도 지니고 있다"고 역사는 적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애국지사의 자랑스러운 독립운동은 친일파들에 의해 역사 속에서 빛이 바래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진정한 독립은 이러한 친일파들을 끝까지 찾아내어 역사 앞에 반성하게 하고 민족의 정기를 바로 찾는 길입니다. 제2의 이승만의 탄생을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습니다. 새롭게 시작하는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 운동! 그 일을 유권소가 하겠습니다.

2. 부정과 불법을 자행하는 세력과 끝까지 싸우겠습니다.

18대 대선은 합법을 가장한 부정의혹으로 얼룩진 불법선거였습니다.공직선거법에 나와 있는 수개표를 실시하지 않았습니다. 과정이 공정하지 않았습니다.국가 기관인 국정원이 개입한 정황이 경찰 조사에서 밝혀졌습니다. 틀린 것을 틀렸다고 말하고 잘못된 것을 고치라고 요구하는 일은 유권자의 당연한 권리입니다.

페이스북내에서 친구들과 함께 부정선거 의혹을 살만한 증거와 정보를 나누면서 미주 동포들끼리 모여서 유권소 그룹을 만들었으며 네 번의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성명서엔 미주를 넘어 전세계의 유권자의 서명이 줄을 이었습니다. 이젠 전 세계에 퍼져있는 유권자를 한 곳에 모아 새로운 시민운동으로 도약을 하려고 합니다.

현대는 새로운 권력인 자본주의의 막강 권력에 국민은 알게 모르게 억압받고 있습니다.
거대 언론과 거대 재벌은 국민의 생계를 담보삼아 스스로 굴종하게 만들고 아직도 청산되지 않는 친일파의 잔재들이 나라를 좌지우지하며 교묘한 방법으로 국민의 알권리를 차단하고 올바른 판단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대선을 마치고 많은 시간을 써가며 네 차례의 성명서를 발표해도 기사 한 줄 실어주는 주요 언론사가 없습니다. 심지어 중앙일보는 광고비를 받는 광고자체를 거부했습니다.그 자체만으로도 보이지 않는 엄청난 권력의 압박을 느낍니다.

보이지 않는 검은 세력이 엄청난 불법을 저질러도, 자본 권력앞에 억울한 죽음을 당해도, 비리의 의문이 꼬리를 물어도 어느 누구하나 진실을 밝혀는데 전력을 쏟지 않습니다. 기사를 쓰는 기자 스스로 두려움을 느끼는건 이미 숨기는 그 무엇가가 있음을 입증하는 것입니다.그래서 유권소가 탄생했습니다. 유권소는 새로운 시민운동으로 거대 권력과의 싸움을 시작하겠습니다.전 세계에 흩어진 작은 목소리를 모아 큰 힘을 만들어 우리의 목소리를 내겠습니다. 만주벌판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피끊는 분노와 내 주권을 내가 스스로 찾겠다는 다짐으로 유권소가 앞장 서서 싸우겠습니다.

3. 야당이 하지 않는 일, 유권소가 하겠습니다.

대선 이후 국민의 반이 넘는 숫자가 멘붕상태로 하늘이 꺼져버린 심정으로 답답함을 호소해도 당권경쟁에만 목숨을 걸 뿐 야당다운 행동을 보여주지 못한 민주당엔 더 이상 희망이 없음을 선언합니다. 유권소는 야당이 하지 않는 일을 도맡았습니다. 유권소 회원들 스스로 부정 선거임을 입증할 증거들을 모아 세계 언론에 호소하고 정부와 정당. 국회와 국가기관에 엄중한 책임을 묻는 성명서로 외쳤습니다. 부정의혹이 넘치는데 수수방관만 하고 진실을 밝히고자 노력하지 않는 야당은 과감히 버리고 이제 유권소 운동은 정당을 넘는 엄청난 힘으로 커져가는 중입니다. 유권소의 힘은 무궁무진합니다. 전 세계에 흩어진 인재를 한곳에 모아 보다 더 큰 일을 하려고 합니다.

선거때만 표를 구하려고 고개 숙이는 정치인, 국회의원만 되면 권력의 맛에 취해 국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국민의 요구에 무반응하는 정당과는 선을 긋고 권력을 잡은 뒤엔 국민위에 군림하는 정당엔 엄중한 책임을 묻는 일을 유권소가 제일 먼저 하겠습니다.
우리의 권리는 정치인이나 정당에게 맡기지 않고 스스로 찾는 일을 유권소가 하겠습니다.
참여가 아닌 내가 주도하는 운동! 이제 유권소가 당당하게 앞장서겠습니다.

 


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3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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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독한 노동배제'를 끝장내자

박근혜, 1%만 행복한 사회 만들지 않으려면…

[민교협의 정치시평] 이 '지독한 노동배제'를 끝장내자

이도흠 한양대 교수·민교협 상임의장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02-11 오후 3:27:21

 

대다수 국민들이 귀향해 조상을 찾아뵙고 가족과 오랜만에 돈독한 시간을 보내고 귀경하는 지금, 이 땅에 함께 살고 있는 '국민'인 노동자들이 죽음으로 내몰리거나 말 그대로 목숨을 걸고 사투를 벌이고 있다. 평택과 울산의 송전탑, 아산의 굴다리, 서울성당 종탑에서 '이 땅의 버림받은 사람들'이 국정조사와 해고자 복직 등을 내걸고 투쟁하고 있다.

2월 11일 오늘로 농성한지 현대자동차는 118일, 쌍용자동차는 84일에 달한다. 그들은 그 얼마나 뼛속까지 시리고 고통스러울까. 어디 이들 뿐인가. 전국 곳곳이 노동자들이 내지르는 피 끓는 절규로 가득하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900만 명에 달하고, 자본은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가 아니라 '극단의 이익'을 위하여 정리해고를 다반사로 행한다. 이에 맞서서 코오롱은 2912일, 영남대 의료원은 2438일, 콜트콜택은 2202일, 재능교육은 1878일, 쓰리엠은 1358일, 대우자동차판매는 749일, 유성기업은 632일, PSMC(구 풍산마이크로텍)은 462일, 골든브릿지증권은 292일, JW생명과학은 239일째 농성중이지만, 아직까지 해결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왜 이렇게 곳곳에서 노동자들이 목숨을 걸고 수십, 수백 일을 농성하고 있는가. 혹자는 노동자들이 과격하거나 비타협적이기 때문이 아닌가 의심한다. 하지만, 엄연히 대법원이 불법 파견으로 판결했음에도 현대자동차 회사는 이를 거부한 채 조금도 양보하고 있지 않은 데서 보듯, 자본이 비정상적으로 비타협적이고, 국가와 대형교회, 보수언론, 사법부가 이들과 유착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자본은 비타협적인가. 태생적으로 천민 자본의 속성을 갖고 있는 것도 있지만, 든든하게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국가가 나서서 일방적으로 자본의 편에서 노동자에게 폭력을 가하고, 사법부는 거의 자본의 손을 들어준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적 해결이 가장 효과적인데, 새누리당은 무조건 자본의 편을 들고, 민주통합당도 노동 문제에 대해서는 늘 생색내기로 그친다. 보수-자유 양당은 노동배제적 정책을 구현하거나 그를 합법화하는 법안에 대해서는 짝짜꿍이 잘 맞는다. 국가-자본의 연합과 노동자들이 적대 국면을 형성하면, 보수언론은 허위 수치까지 들이대고 모든 논리를 동원하여 노동자들의 당연한 절규를 '경제혼란 행위', '과격폭력 행위', '빨갱이들의 투쟁'으로 매도하고, 시민사회 또한 극소수가 이에 맞설 뿐, 대다수가 이에 동조하거나 침묵한다.

국가와 자본, 보수 언론, 대형교회, 시민사회가 나서서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에게 물리적 폭력, 구조적 폭력(노동배제와 정리해고를 합리화하는 법과 제도), 문화적 폭력(육체노동을 천시하고 정리해고를 당연시하며 정당한 파업을 빨갱이로 매도하는 문화), 재현의 폭력(흑인이나 백인이나 같은 인간인데, 미국영화드라마에서 범죄자를 흑인으로 재현하면 흑인이 더 폭력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이것이 실제로 흑인을 차별하는 현실을 낳듯, 실제는 선량한 해고노동자를 언론에서 빨갱이로 재현하여 이들의 재취업차단하는 것) 등 모든 폭력을 구사하였다.

이에 맞설 진보정당과 노동조직은 분열되어 있고, 노동자들이 극소수 시민과 연대하여 맞서보지만 늘 중과부적이다. 국가-자본-보수언론-대형교회의 카르텔이 별로 견제당하지 않는 엄청난 권력을 형성하고서 거의 모든 비정규직 및 해고 노동자들을 죽음의 위기로 내모는 '지독한 노동 배제' 정책을 실행하고 있다.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이 농성을 벌이고 있는 송전철탑.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대표적인 예로 쌍용자동차 사태를 보자. 민교협이 주최한 몇 차례의 토론회와 국회 청문회에서 밝혀진 대로, 쌍용자동차 회사는 회계조작과 생산성 지수 조작을 하여 2646명을 정리해고 하였고 사법부는 조작된 장부에만 의존하여 이를 허용하였다. 대외비 문건을 통하여 상하이 자동차가 쌍용자동차에서 철수한 이유 또한 "고분고분하지 않은 노동조합," "한국 정부의 비협조," "기술유출 관련 검찰 수사" 등이었음도 백일하에 드러났다. 당연히 원천 무효이고 이를 부당하다고 항의하는 것은 국민의 최소한의 권리인데, 국가는 이를 주장하는 노동자들에게 적에게나 행하는 야만적인 폭력을 행사하였다.

실제로 정리해고 당한 노동자들의 약 52.3%가 전시의 병사들이 겪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고 있으며, 80%가 중등도 이상의 우울증을 앓고 있다. 이 스트레스와 생계 위기, 절망감 속에서 벌써 24명이나 죽었다. 그럼에도 보수언론이 이들을 '경제 혼란범, 과격분자, 빨갱이'로 매도하는 바람에 아직까지 단 한 명도 재취업하지 못하였다. 이에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중심에 서고 노동단체 및 시민사회가 연대하여 기나긴 투쟁을 벌였고, 이 결과로 국회 청문회가 열렸다. 민교협도 연이은 토론회와 언론기고, 성명서 발표 및 기자회견만이 아니라 동조단식과 농성, 집회와 시위로 연대하였다.

하지만, 청문회는 요식행위 내지 통과의례로 그치고 말았다. 진실이 밝혀질수록 더 많은 의문이 발생하였는데도 모든 것을 덮어둔 채 끝났기 때문이다. 누가 어느 정도로 기술 유출을 행했는지, 누가 어떤 의도로 회계 조작을 하였는지, 누가 왜 선량한 노동자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가했는지, 왜 마힌드라는 쌍용차 인수 후 9억 달러의 투자를 약속하고도 이를 이행하지 않고 있는지, 무엇보다도 이런 조작과 폭력을 행하는 국가와 자본과 사법부의 카르텔의 주체는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다. 이런 사안에 대해 국정조사를 하지 않는다면 국회는 더 이상 존립할 의미가 없다. 국정조사를 하여 그 진상을 낱낱이 밝히고 범법자를 처벌하지 않는다면, 권력과 자본의 폭력과 조작과 사기극은 재발될 것이고, 그로부터 선량한 국민을 보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국정조사는 한국 경제를 지키고 국민을 살리는 길이다. 여당의 대표라는 사람은 쌍용자동차에 대한 국정조사를 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궤변이다. 이것이야말로 국민보다 철저히 자본의 편에 서서 생각한 자의 편견이며, 나아가 나라의 경제를 좀먹고 다수의 국민을 생존위기에 내던질 수 있는 망국적 발상이다. 국정조사를 하지 않는다면, 쌍용자동차 사태에서 벌어졌던 외국자본의 헐값인수와 기술 유출, 회계 조작, 인권 유린에 대하여 면죄부를 주는 형국이기에 이는 끊임없이 반복될 것이다. 당연히 국정조사를 해서 사태의 진실을 낱낱이 밝히고 책임을 규명해야만, 해외 자본이 정권을 우습게 여겨 민족 자본을 좀먹고 첨단 기술을 유출하는 행위가 근절될 것이다. 기업이 손쉬운 구조조정의 도구로 정리해고를 남발하고 권력이 선량한 국민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행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그러기에 국정조사는 이 땅의 경제를 살리고 자본과 권력의 횡포로부터 국민을 지키는 최소한의 대안인 것이다. 이에 동의하여 새누리당 또한 국정조사를 대선의 공약사항으로 발표하였었다. 하지만, 대선이 끝나자 모르쇠로 일관하더니, 이제는 여야협의체를 만들어 사태의 진실을 덮고 여론을 호도하려는 술책을 자행하고 있으며, 이에 민주통합당도 동의하고 나섰다.

이렇게 쌍용자동차 국정조사가 무산될 위기에 놓이자 지난 2월 5일에 쌍용차 범대위가 인수위 앞에서 박근혜 당선인과 인수위원회에게 쌍용차 문제 해결에 대한 입장을 밝히라고 요구하며 끝장 농성에 돌입하였다. 이 과정에서 경찰의 방해로 인해 기자회견이 예정된 시각을 한 시간여 넘긴 후 진행됐으며, 깔판, 비닐, 침낭 등 일체의 물품을 경찰에 빼앗기는 바람에 노동자들은 엄동설한 속에 비닐 하나 없이 밤을 꼬박 새워야 했다. 이것은 박근혜 정부가 앞으로 5년 동안 철저히 '노동 배제' 정책을 펼쳐나가고 이에 민주통합당도 협력해 줄 것을 예고하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이 시점에서 박근혜 당선인께 정중히 묻고자 한다. 쌍용자동차 국정조사 약속은 박빙의 대선 국면에서 노동자의 표를 얻기 위한 기만행위였는가.

노동이란 돈을 버는 수단이 아니다. 노동은 거룩한 생산 행위이자 나를 자유롭게 하여 타인을 자유롭게 하는 실천이다. 노동은 만 원어치 밀가루계란우유이스트를 사서 빵 기계를 이용하여 천원 짜리 빵 열세 개를 만드는 것에서 보듯 생산 도구를 이용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생산을 해내는 인간의 행위이다. 돌덩이의 땅을 쟁기로 갈아 기름진 밭으로 변화시키는 것에서 보듯 인간 주체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자기 앞의 장애를 극복하고 세계를 자신의 의도대로 개조하는 행위이다. 새로운 가치를 만들고 세계를 새롭게 창출하는 인간은 무한한 자유를 느끼며 자신이 무엇인가 의미 있는 존재란 것에 흐뭇해하고, 생산행위를 통하여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기에 노동이란 진정한 자기 실현이다. 더 나아가 자신이 생산한 빵으로 굶주리는 자를 배부르게 하는 데에서 보듯 노동은 타자를 자유롭게 하는 정의의 실천행위다. 노동 없이 자유도, 정의도, 실존도 없다.

이제 개인과 집단 모두 노동의 가치와 신성함에 대해 새롭게 성찰해야 한다. 노동을 일방적으로 소외시키고 착취하고 억압하면서 건전한 사회는 가능하지 않다. 지금처럼 노동을 철저히 배제하고서 한국사회가 도달하고자 하는 이상이 1%만이 행복한 사회인가. 박근혜 당선인이 진정으로 모든 국민이 행복한 나라로 만들고자 한다면, 이 '지독한 노동배제 정책'부터 거두기 바란다. 최근에 행한 여론 조사에 의하면, 우리 국민의 90.8%가 새 정부 출범 전에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는 노동현안이 해결되기를 바란다. 진정으로 온 나라의 온 국민으로부터 박수를 받는 대통령 취임식을 열고자 한다면, 시급한 노동현안부터 해결할 것을 간곡히 요청한다. 쌍용자동차, 현대자동차, 재능교육의 노동자들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올 때, 박 당선인은 하늘처럼 존중받는 지도자가 될 것이다. 그렇지 않는다면, 국민의 저항에 직면하고 결국 전임 정권처럼 실패한 정권으로 귀결될 것이다. 지금 인수위 앞에서는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끝장 농성을 벌이고 있고, 이에 시민사회와 민교협도 함께 연대할 것이다.

 
 
 

 

/이도흠 한양대 교수·민교협 상임의장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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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 될 사주야... 26살까지 취업 꿈도 꾸지마!"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3/02/12 07:59
  • 수정일
    2013/02/12 07:59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설 특집 - 점집 체험] 쇠락해 가는 미아리 점성촌... "머지 않아 사라질 것"

13.02.11 20:39l최종 업데이트 13.02.11 20:39l

 

 

새해를 맞아 신년 운세 보러 서울 미아리 돈암동을 찾았다. 한국에서 제일 규모가 큰 점성촌이라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그만큼 '용할 것 같다'는 막연한 기대감이 부풀어 올랐다. 6일 찾아가 보니 최대 규모의 점성촌답게 골목 대부분이 점집이었다. 한 집 건너 점집이 있을 정도였다.

미아리 점성촌은 현관문마다 초인종이 있거나 사람 움직임을 감지해 알리는 벨이 있다. 어느 점집에 가야할지 몰라 두리번거리다 제일 가운데 있는 집에 들어갔다. 초인종을 누르니 잠시 후 한 아주머니가 나와 길을 안내한다. 미아리 점성촌 역술인 대부분은 맹인이라고 했다.

역술인이 내게 한 말은...

미아리 점성촌의 한 점집. 손님 맞이에 문을 활짝 열어뒀지만, 슬리퍼 한 짝이 전부 였다.
ⓒ 김다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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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집 내부는 일반 가정집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선글라스를 낀 할아버지가 방에 앉아 있다. 그는 복채를 먼저 달라고 요구했다. 가격은 개인 사주는 3만 원, 인원이 늘어나면 금액이 올라간다.

그는 내게 생년월일과 태어난 시간을 물었다. 보통 점집에 가면 책을 보고 풀이를 하는데 이 역술인은 입으로만 중얼거렸다. 기자가 "왜 사주책을 보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는 "40년 동안 점을 봤기 때문에 안 봐도 외운다"고 말했다.

"기생 사주네. 기생 사주야! 옛날 같으면 사주단자 넣자마자 쫓겨났어!"

입이 떡 벌어졌다. 기가 세서 풍파가 많다는 둥, 남자를 조심하라는 둥, 일찍 결혼하면 시집을 2~3번 간다는 둥 무서운 말들이 마구 쏟아졌다. 역술인은 "그래도 시대가 바뀌었으니 기생 사주가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며 나를 달랬다.

기본적인 사주 총평이 끝나자 신년운세를 봤다. 올해 졸업을 앞둔 나로서는 취업이 제일 걱정이기에 진로에 대한 질문을 먼저 물었다.

"제가 취업을 해야 하는데, 올해는 잘 풀릴까요?"
"시험 쳤다 하면 떨어진다고 보면 돼. 26살까지는 취업, 꿈도 꾸지마!"

나는 잠시 정신이 멍했다. 그러자 역술인은 재빠르게 부적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15만 원에 부적 10장 써줄 테니 집안 곳곳에 붙이라"며 "이만한 효과가 없다"고 말했다. 30분간 상담이 끝나자 그는 명함을 주면서 "살풀이 할 생각 있으면 연락하라"고 덧붙였다. 기분이 묘했다.

"국민 수준이 높아지면서 발길 끊겨…"

사주를 보고 나오자 "속았다" "하마터면 상술에 말릴 뻔 했다" 등 여러 생각이 들었다. 골목길에 인적은 드물었지만 나처럼 막연한 고민을 안고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있었다. 웃음소리를 따라 들어간 점집에는 홍자영(50. 경기도 광명시 철산동)씨와 박미애(53. 서울 노원구 공릉동)씨가 있었다. 박씨를 따라 이곳을 처음 찾은 홍씨는 "천주교 신자지만 신년이니까 이렇게 점보는 일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반면에 박씨는 점성촌 '단골손님'이었다. 박씨는 "대부분의 사람은 무슨 일이 생기거나 큰일을 앞뒀을 때 점을 많이 보는데 나는 생각날 때 마다 (이곳을) 찾는다"고 말했다. 점성촌의 일반적인 복채 가격은 3~5만 원인데 박씨는 단골집인 B철학관에서 2만 원에 점을 본다.

B철학관의 C역술인은 박씨가 온 것을 알고 마당까지 마중을 나왔다. C역술인은 "아저씨(박씨의 남편)가 올해부터 몸이 괜찮아 질 것"이라고 말했다. 박씨가 찾는 B철학관은 그녀의 가족 사주부터 집안 대소사까지 모두 꿰고 있었다.

이 점성촌 골목에는 약 20곳의 점집이 있었다. 오후 3시 30분부터 오후 4시 30분까지 1시간 동안 지켜본 결과, 불과 8명의 손님이 이곳을 다녀갔다.
ⓒ 김다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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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골목으로 나가보니 한동안 사람이 없었다. 점집은 손님을 맞으려 문을 활짝 열어 뒀지만 입구에는 대개 슬리퍼 한 짝이 전부였다. 반대편 점성촌 골목으로 건너갔다. 웬 아주머니가 아저씨와 승강이를 벌이고 있었다.

경북 영주시 가흥동에서 온 이금옥씨(69)씨는 "경기도에 있는 둘째 아들 집에 갈 때마다 남편이랑 여기(점성촌)에 들린다"며 "설이나 추석에는 꼭 찾는 편"이라고 말했다. 이씨의 남편은 "남부끄럽다"며 이씨의 손을 끌어 당겼다. 이씨는 "옛날에는 점 보러 다니는 게 창피한 일이라 손가락질을 받았다"고 밝혔다.

설을 앞두고 가족이나 친지의 사주를 들고 점성촌을 찾은 사람도 있었다. 서울 성북구 하월곡동에 사는 안선경(58)씨는 대학 졸업하고 몇 년째 백수로 지내는 딸 취업 문제로 들렀다. 안씨는 "우리 딸이 작년까지 부정살(사람이나 물건 등을 해치고 파괴하는 악한 기운)이 끼여 있었는데 올해부터는 (부정살이) 풀린다 해서 어떻게 될지 들으러 왔다"고 말했다.

"입춘과 설 사이에 하루 5~6명이 다녀가지만..."

'○○철학관, 사주 봐드립니다.'
'영으로 점을 봅니다'
'◯◯◯ 여성 작명 역학사'

미아리 돈암동 점성촌은 1966년 맹인 역술인 이도병씨가 정착한 이래 많은 역술인들이 찾았다. 미아리 점성촌은 역학을 보는 맹인이 많다는 게 특징이다. 점술이 호황기를 맞이했던 1980년대에는 약 100곳의 점집이 있었다. A역술인은 "지금은 약 40여 곳만 남아 점성촌을 이루고 있다"고 말했다. 6일 미아리 돈암동 점성촌 거리는 생각보다 한적했다.

"보다시피 손님이 없는 편이에요. 갈수록 더 심해질 거예요. 경기가 안 좋아서라기보단 국민 수준이 높아지면서 발길이 끊긴 거죠."

A역술인은 점성촌 쇠락의 원인으로 국민 수준 향상을 꼽았다. 옛날에는 애가 아프거나 집안에 무슨 일이 생기면 무조건 점을 보러왔기에 손님이 많았지만, 지금은 달라졌다는 거다. 그는 "젊은 사람들 80%가 대학을 나왔다고 하지 않느냐"며 "경제가 문제가 아니라 국민 수준이 높아지면서 점을 믿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A역술인은 "요즘 하루 2~3명이 다녀가는 게 일반적"이라며 "가끔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때도 있는데, 그나마 장사가 되는 때는 지금 뿐"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왜 이 즈음이 사람들은 점집을 찾을까. 사주명리학에서는 입춘을 기준으로 새해 운세가 들어온다고 보기 때문이다. 입춘과 설날 사이의 '대목'에는 돈암동 점집마다 하루 약 5~6명의 손님들이 찾아온다.

미아리 점성촌의 벽화에는 '점'에 대한 이야기들이 새겨져 있다. 서울시에서 전통 거리로 지정하려 했으나 기독교의 반발로 무산됐다.
ⓒ 김다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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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철학관은 6일 하루 총 손님 7명을 받았다. 평소보다 많은 사람이 찾은 거다. C역술인은 "2013년 계사년을 맞이하니 뱀띠 생들이 많이 온다"며 "손님들이 많이 오는 시기지만 옛날에 비해 적은 건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그는 "가이드들이 외국인들을 데리고 관광지 삼아 찾아오는 경우가 있긴 한데, 머지 않아 점성촌은 사라질 거라 보면 된다"고 씁쓸하게 말했다.

미아리 점성촌 인근 부동산을 찾았다. 부동산 관계자는 "점집은 매물이 나오지도 않고 들어오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점집에서 '신년운세'를 점쳐보는 행위는 이제 옛날 이야기로 남는 걸까?

돈암동의 많은 점집에는 "미래를 보여드립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점집의 미래는 잘 보이지 않았다.

덧붙이는 글 | 김다솜 기자는 <오마이뉴스> 17기 인턴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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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득-라응찬 '상촌회 게이트' 이제야 밝혀지나?


 

 

 


'경제개혁연대'는 지난 5일 '신한은행 사태' 재판 과정에서 드러난 '남산 3억원' 의혹과 관련하여 라응찬 전 신한금융지주 회장과 이상득 전 의원을 각각 검찰에 고발했습니다.

개혁연대는 "신한사태의 핵심 사안 중 하나인 이른바 '남산 3억원'이 라응찬 전 회장의 지시로 이뤄진 것이며 그 최종 행선지는 이명박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전 의원에게 전달된 것이 명백하게 드러났다"며 당사자인 라응찬 전 회장과 이상득 전 의원을 고발한다고 밝혔습니다.

'서울중앙지검'은 차명계좌를 이용한 비자금 조성과 돈을 건네받은 혐의로 라응찬 전 회장과 이상득 전의원을 고발한 경제개혁연대 사건을 '금융조세조사3부'에 배당했다고 밝혔습니다.

이 사건은 지난 2010년부터 불거진 사건인데 그동안 실체는 계속 밝혀지지 않고 있다가 MB말기에 조금씩 그 진실이 드러나는 모습을 보입니다. 과연 사건의 본질과 문제점, 그리고 앞으로의 모습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라응찬과 이상득의 '남산 3억원'

이번 사건의 핵심은 라응찬 전 신한금융지주 회장이 진짜로 이상득 전 의원에게 돈을 주고 이상득 전 의원은 그 돈을 받았느냐는 점입니다. 이 사건이 밝혀지게 된 배경은 일명 '신한은행 사태'입니다.

'신한은행 사태'는 라응찬 전 회장과 신상훈 전 사장 간 경영권 다툼에서 불거진 내부비리 사태로 회삿돈을 빼돌린 혐의 등으로 라응찬 전 회장은 무혐의,신상훈 전 사장과 이백순 전 행장에 대해서는 각각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사건입니다.

 

 

 



지난 '신한은행 사태' 재판 과정에서 전 신한금융 사장의 비서실장 박모씨는 2008년 2월 신상훈 이백순 행장이 '라응찬 회장의 지시'라며 현금 3억 원을 준비하라고 해서 돈을 마련해 남산자유센터 주차장에 있는 이백순 행장 차의 트렁크에 실어줬다고 진술했습니다.

당시 검찰은 이백순 전 행장이 라응찬 전 회장의 지시로 2008년 2월 남산자유센터 주차장에서 신원을 알 수 없는 사람에게 3억원을 전달한 혐의는 확인했지만, 이 돈이 이상득 전 의원에게 갔다는 증거를 확보하지 못해 라응찬 전 회장을 무혐의 처리했습니다.

그러나 이백순 행장 비서실 송모씨가 "남산자유센터 주차장에서 전달한 3억원이 이상득 의원측에 전달됐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돈을 전달할 때가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 직전이어서 당선 축하금으로 전달되는 것으로 생각했다"고 주장함으로 새로운 국면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MB정권 실세 중의 하나였던 '상주촌놈회'

MB정권 중에 우리는 흔히 '영포회','6인회'라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이 모든 사조직은 MB정권에서 소위 잘나가는 권력형 모임을 뜻하는데, 이에 못지않은 조직이 '상촌회'(상주촌놈회)라는 조직입니다.

라응찬 전 회장은 상주 출신 인사들로 구성된 '상촌회' 회장이었으며, MB정권의 실세였던 이상득 전 의원과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천신일 세중나모 회장들과 친분이 두터웠다고 알려졌습니다.


상촌회가 MB정권과 많은 유착 관계를 보였다는 증거는 경북 상주 출신 인사들이 유독 MB정권에서 많은 인맥 파워를 보였고, 경북 상주가 '정권 실세 지역' 중의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2011년 기준 경북 상주 출신 인사들의 직책

 


앞서 말한 라응찬 전 회장과 류우익 통일부 장관,노환균 서울중앙지검장은 모두 '상촌회' 멤버였으며, 이희원 안보특별보좌관,이상우 국가안보총괄점검회의 의장 모두 경북 상주 출신이었습니다. 여기에 이성규 서울지방경찰청장과 이홍기 3군사령관도 역시 상주가 고향이었습니다.

특히 라응찬 회장이 2000여개 차명계좌로 50억 원 이상의 자금을 불법 운영한 의혹이 발생하던 '신한은행 사태' 당시 류우익 주중대사를 만나러 라 회장이 중국까지 갔던 의혹이 제기된 적도 있었습니다.

영포회라 부르는 포항 출신 인사들이 MB정권에서 승승장구했던 만큼 경북 상주 출신 인사들도 라응찬 상촌회 회장을 중심으로 정부 요직을 두루 장악했으며, 이는 MB재임 중 자행됐던 '지역 편중 인사'로 손꼽을 수 있습니다.

'똑같은 검찰조직, 이제는 가능한가?'

이번에 사건을 배당받은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세조사3부는 지난 '신한은행 사태'때 수사를 했던 곳입니다. 그런데 당시 검찰은 2008년 2월 남산자유센터 정문 주차장 입구에서 누군가에게 돈을 준 사실은 맞지만 누가 받았는지를 밝히지 못해 라응찬 전 회장을 무혐의 처리했습니다.

똑같은 조직인데 이번에는 가능할 수도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된 배경은 당시 입증하지 못했던 고려대 출신의 금융조세조사3부 이중희 부장검사가 승진해서 나가고 김한수 부장검사가 지난해 임명됐기 때문입니다.

 

 

▲검찰 조직 내 고려대출신 주요 보직간부. 출처:국민일보

 


MB정권에서 고려대 출신 인사들이 대부분 승진하면서 검찰 내 실세로 자리 잡았는데, 당시 신한은행 사태를 수사했던 이중희 부장검사와 '상촌회' 노환균 법무연수원장은 모두 고려대 출신이었습니다.

이번에 수사를 맡게 된 김한수 금융조세조사3부장 검사는 숭실고등학교를 나온 서울대학교 출신입니다. 여기에 검찰총장 후보로 나선 김진태(경남 사천,서울대),채동욱(서울,서울대),소병철(전남 순천,서울대) 모두 MB정권에서 검찰을 쥐고 흔들었던 대구,경북,고려대 라인이 아니라는 점이 지난 수사와는 다르게 라응찬 전 회장과 이상득 전 의원 간의 돈거래를 밝혀줄 수 있으리라는 예상을 하게 만듭니다.

또한,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면서 MB정권과의 차이를 나타내기 위한 수단으로 검찰 수사를 더 강도있게 할 수도 있다는 점으로 비춰볼 때 돈을 받은 사람을 이제는 찾아낼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도 해봅니다.

' 모피아, 과연 박근혜 정부는 끊을 수 있을까?'

라응찬-이상득 전 의원의 '상촌회 게이트'를 단순하게 보면 불법 정치자금의 한 단면일 수 있지만, 우리는 MB정권에서 일어났던 모피아(MOFIA)의 문제점도 함께 주목해야 합니다.

 

 

 

▲주요금융지주회장 약력과 경력, 출처:동아일보

 


현재 대한민국 금융계를 이끌고 있는 주요 금융지주 회장들은 모두 경남,부산 출신입니다. 여기에 어윤대 KB금융 회장은 이명박 대통령의 고려대 후배이자 국가브랜드위원장이었고, KDB산은금융 회장은 이명박 후보 선거대책위 출신인 강만수 회장입니다. NH농협금융 회장은 재정경제부 출신인 신동규 회장이이며, 우리금융 이팔성 회장은 17대 대선 당시 한나라당 이명박후보 상근특보 출신이었습니다.

이처럼 한국 금융계는 이명박 대통령의 측근으로 이뤄져 있는 상황인데, 이것은 모피아의 전형적인 경제관료 금융계 장악에 해당합니다.

박근혜 당선인이 새로운 정부를 이끌고 나가면서 남은 이들의 임기를 보장하면 모피아와 계속 유대를 할지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만약 박근혜 정부가 이런 모피아 집단의 활동을 보장해준다면 라응찬-이상득과 같은 권력자와 금융계의 결탁과 비리는 언제든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법개혁 공대위가 주최한 '권력형 비리로 본 검찰개혁의 필요성과 대안 토론회' 출처:경실련

 


대한민국의 부조리가 일어나는 배경을 보면 돈을 가진 자가 권력자와 결탁하고 이들은 검찰까지도 손을 뻗쳐 자신들의 죄를 감추고 축소하면서 부와 권력을 누리는 구조 때문입니다. 이런 부조리를 없애려면 우선 검찰이 제대로 법에 따라 수사를 할 수 있어야 하지만 그런 일은 자꾸 멀어져만 가고 있습니다.

박근혜 당선인은 총리 후보 정홍원이 30년간 검찰에 재직하며 아주 떳떳한 인물이라고 주장하지만, 그 속내를 보면 지금의 검찰 수준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정홍원 총리 후보는 1998년 서울지검 특별범죄수사본부장 당시 의정부판사들이 의정부 관내 변호사로부터 떡값과 휴가비 명목으로 수백만 원의 돈을 수십 차례에 걸쳐 받고 룸싸롱까지 함께 다녔지만 포괄적 뇌물죄가 아니라 관행적 비리이기 때문에 "징계 조건부 기소유예"라는 결론을 내렸던 인물입니다.


 

 

▲금품로비,불법정치자금 수수혐의로 구속된 이명박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새누리당 전 의원에게 "내 돈 내놔라"며 달려들고 있다. 출처:오마이뉴스 유성호

 


부와 권력이 없는 서민은 항상 당하고 사는 나라가 대한민국입니다. 그것은 그들을 지켜줄 법이 모피아와 같은 집단이나 대한민국 권력자만을 우선 보호하고 있지, 법의 심판을 제대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권력형 비리는 어떤 대통령이 되더라도 쉽게 끊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예전보다는 줄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고, 더는 그런 권력형 비리가 국민에 피해를 주지 않도록 막아야 합니다.

학연,지연,돈,검찰,권력이 모두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어 나가고 있습니다. 그것을 대통령이 막지 못한다면 국민이라도 그들의 범죄 사실을 잊지 않고 끝까지 기억해 심판을 요구해야 합니다. 깨어 있는 시민이 있다면 그들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세상은 반드시 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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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과 백석, 그리고 진짜 동백을 느끼고 싶다면…

[강제윤의 '통영은 맛있다'] <13>

강제윤 인문학습원 <섬학교><통영학교> 교장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02-10 오후 5:44:12

 

카멜리아의 여인

파리 사교계의 여인, 마르그리트 고티에는 밤마다 동백꽃을 들고 다녔다. 한 달 중 25일은 흰 동백, 나머지 5일은 붉은 동백을 들고 극장이나 사교계에 나타나 동백꽃(카멜리아) 여인으로 불렸다. 알렉상드르 뒤마 필스의 소설 <춘희>에 나오는 이야기다. 붉게 타오르는 겨울의 심장. 정념의 상징인 동백은 겨울에 피어야 동백이다. 따뜻한 봄에 피는 동백은 동백이 아니다. 춘백이다. 가을에 피는 것은 추백이다. 한겨울 추위를 뚫고 피어나는 동백이야말로 진짜 동백이다. 한겨울에는 많은 동백꽃을 보기가 어렵다. 하지만 단 한 송이일지라도 한파를 뚫고 피어오른 동백을 봐야 진짜 동백을 봤다 할 수 있다. 눈보라 속에 피어나는 설중매야말로 진짜 매화인 것처럼. 통영 충렬사에서는 한겨울 한파를 뚫고 피는 진짜 동백을 볼 수가 있다.
 

▲ 가을에 피면 추백, 봄에 피면 춘백, 겨울에 피어야 동백이다. ⓒ강제윤


나그네는 충렬사에 오면 무엇보다 백석 시인의 시가 먼저 생각난다. 연모하는 통영 소녀 난을 만나러 왔다가 헛걸음하고 충렬사 난간에 하염없이 기대앉아 시를 썼던 백석. 그 백석 시인의 시비가 충렬사 건너편 정자 옆에 서 있다. 실연의 아픔을 시와 술로 달랬던 백석도 충렬사 동백을 보고 가슴 뜨거웠으리라.

사당이나 향교 같은 건축물을 둘러보는 것을 고리타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그네 또한 그랬었다. 무언가 지나치게 의미가 부여된 건축물들은 너무 무겁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즈음은 그런 오래된 건축물들을 일부러 찾아다닌다. 굳이 의미를 따지지 않고 소요하러 가는 것이다. 편안한 마음으로 가야 친숙해질 수 있다. 고건축물의 고즈넉한 분위기와 정갈한 정원과 수백 년 묵은 고목들. 고건축에는 역사만 있는 것이 아니다. 휴식과 안식, 옛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있다. 공원을 나들이하듯이 가벼운 마음으로 자주 찾다 보면 고건축물들이 참으로 편안한 공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통영의 충렬사도 그런 곳이다. 이순신 장군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란 생각만으로 참배를 간다면 얼마나 무겁고 경건해야 하겠는가. 이제는 그런 무거움에서 탈피해야 한다. 참배란 강요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가능하다. 산책하기 좋은 공원 같은 사당, 그곳이 나그네에게는 충렬사다.
 

▲ 흰 동백, 소복의 여인처럼 처연한 저 흰빛은 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강제윤


나그네가 충렬사를 자주 찾는 이유는 사당의 고건축물이 주는 고즈넉한 분위기가 좋아서이기도 하지만 더 큰 이유는 동백나무 고목들 때문이다. 충렬사 경내에 들어서면 500년이나 된 아름드리 동백나무 고목 네 그루가 나란히 서 있다. 동백나무로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거목들이다. 동백나무는 성장 속도가 워낙 느려서 수령이 많아도 잘 크지 않는다. 그 대신 도끼날도 잘 안 들어갈 정도로 단단하다. 옛날 충렬사 부근 마을 처녀들은 충렬사 입구 '명정샘'으로 물을 길으러 다녔다. 겨울 새벽이면 처녀들은 물을 긷기 전에 충렬사 경내로 들어가 이 오래된 동백나무에서 동백꽃 한두 송이를 땄다. 샘에서 물을 길은 뒤 처녀들은 물동이 위에 동백꽃을 띄웠다. 처녀들은 어째서 물동이에 그 붉은 동백꽃을 띄웠던 것일까. 처녀들이 물동이에 띄운 것이 정말 동백꽃이었을까. 혹시 그녀들 속에서 타오르는 붉디붉은 정념은 아니었을까.

김구·이승만·여운형까지 참배했던 사당
 

▲ 눈 속에서 피어난 충렬사의 겨울 동백. ⓒ이상희


충렬사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사당이다. 제7대 이운룡 통제사가 선조 39년(1606년) 왕명에 따라 지었다. 봄과 가을, 음력 2월과 8월 그달의 두 번째 정일(丁日)인 중정일(中丁日)에 춘추 향사(제사)를 봉행한다. 또 양력 4월 28일에는 탄신제를 지낸다. 충렬사는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이 내려졌을 때도 이 충무공 사당으로는 유일하게 존속된 사당이다. 1895년 삼도수군통제영이 폐지된 이후에는 통영의 유지들이 충렬사 보존회를 설립해서 제사를 받들어왔다.

일제강점기에는 왜경이 장군의 위패를 칼로 부수고 문에 그려진 태극 문양에 덧칠하여 일장기로 바꾸고 또 위패를 모신 정당에 못질까지 해서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수난을 당하기도 했었다. 8.15 해방 직후에는 김구, 여운형, 송진우, 신익희, 이승만 같은 인사들이 환국하여 가장 먼저 참배했던 성지였다. 마치 현재의 국립 현충원 같은 위상이었다. 지금은 더는 그런 모습을 볼 수 없게 됐지만, 통영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세병관과 함께 정신의 본향 같은 곳이다.
 

▲ 충렬사 유물전시관에 전시중인 팔사품. ⓒ강제윤


충렬사 사당을 둘러보고 강한루 밑을 빠져나와 오른쪽 유물 전시실로 향한다. 유물 전시실에는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수군도독(水軍都督) 진린(陳璘)이 이순신 장군의 전공을 명나라 신종 황제에게 보고하자, 신종이 장군에게 보내온 물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도독인(都督印), 호두령패, 귀도, 참도, 독전기, 남소령기, 곡나팔 등의 팔사품(보물 440호)이 그것이다. 모두 여덟 종류의 하사품 15개다. 처음에는 삼도수군통제영에 보관되다가 충렬사로 가져와 오늘에 이르렀다. 유물들은 한때 아산 현충사로 옮겨지기도 했지만 통영시민의 요구로 되돌아왔다. 도독인은 동으로 만든 도장인데 도장을 넣은 함에는 황조어사인(皇朝御賜印)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어 황제가 직접 보내온 도장임을 확인할 수 있다.

충렬사 외삼문 곁 비각 충렬묘비에는 백사 이항복이 지은 이순신 장군의 치적이 새겨져 있다. 여기에는 임진왜란 당시 원군으로 왔던 명나라 진린 도독이 장군을 경외했던 이야기가 적혀 있다. 진린 도독은 "공의 전술을 기이하게 여겨 반드시 이야(李爺), 즉 어르신이라 호칭하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고 전한다. 장군은 조선 백성뿐만 아니라 명나라의 장군들에게도 존경을 받았다. 이순신 장군을 시기·질시했던 건 오로지 무능한 조선의 왕과 권력자들뿐이었다.

통영의 생명수, '명정샘'
 

▲ 일정, 월정 두 개의 우물을 합해서 명정이라 한다. ⓒ강제윤


충렬사를 나오면 건널목 건너에 '명정샘'이 있다. '쌍우물'이라고도 부르는 명정샘은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통영 사람들의 생명수였다. 이순신 장군이 팠다는 전설이 있지만, 이 샘은 1670년 제51대 김경 통제사 때 판 것으로 전해진다. 명정샘 입구에는 박경리 선생의 소설 한 대목이 새겨진 석조물이 놓여 있다.

"충렬사 이르는 길 양켠에는 아름드리 동백나무가 줄을 지어 서 있고 아지랑이 감도는 봄날 핏빛 같은 꽃을 피운다. 그 길 연변에 명정골 우물이 부부처럼 두 개가 나란히 있었다. 음력 이월 풍신제를 올릴 무렵이면 고을 안의 젊은 각시 처녀들이 정화수를 길어내느라 밤이 지새도록 지분 내음을 풍기며 득실거린다."

명정샘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같은 자리에 굳이 샘을 두 개나 판 것은 무슨 연유일까. 처음 샘 하나를 파고 보니 물이 탁하고 곧 말라버렸다. 그래서 옆에다 우물을 하나 더 파봤다. 그랬더니 두 우물 다 맑은 물이 나오고 수량도 풍부했다. 위쪽에 있는 샘을 일정(日井), 아래쪽에 있는 샘을 월정(月井)이라 한다. 합치면 일월. 두 우물을 합해서 명정(明井)이라 부른다. 평상시에는 두 우물 모두 마을 공동 우물로 사용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 향사 때가 되면 일정은 충렬사 전용으로만 사용되는 신성한 우물이었다.

신성한 우물이었던 만큼 샘에 얽힌 기이한 이야기도 많이 전해진다. 시체나 상여가 이 우물 근처를 지나가면 물이 흐려지는 이변이 생겼다. 또 한때 두 우물을 합해 팔각정으로 개축한 적이 있었는데 갑자기 돌림병이 발생하는 등 재앙이 일어나 명정으로 복원했다. 명정샘은 햇빛을 받지 못하면 물이 흐려지는 까닭에 지붕도 세우지 못했다고 한다. 참으로 기이한 샘이다.

이 작은 샘에 그토록 많은 전설과 금기 따위가 덧붙어 있는 것은 왜일까. 이순신 장군에 대한 통영 사람들의 마음이 그만큼 지극했다는 뜻일까. 장군의 제사에 올리는 물이니 여느 우물물과는 다른 신비한 물일 거란 믿음이 그런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은 혹시 아닐까. 상수도가 보급된 뒤부터 명정 샘물은 더는 사용되지 않는다. 안타까운 일이다. 상수도가 꼭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상수도 때문에 수백 년 된 우물을 버리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우물 또한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수백 년을 솟아나온 샘물, 통영의 상징인 이순신 장군 샘이 아닌가. 수질 관리를 잘해서 길손들도 마실 수 있게만 해준다면 이보다 큰 관광자원이 어디 있을까.

충렬사 마을 동동주 할머니를 찾아서

명정샘을 나온 나그네는 문득 충렬사 아랫마을에서 막걸리를 담가 판다는 할머니가 궁금해졌다. 나그네는 양조장 막걸리가 아니라 집에서 담근 막걸리가 있다는 소문이 들리면 천 리를 마다치 않고 찾아가 맛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막걸리 광이다. 그런데 통영에 그런 막걸리를 오랫동안 담가온 할머니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고 할머니가 충렬사 아랫마을에 산다는 정보를 입수했으니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으랴. 명정샘 부근 작은 슈퍼마켓 주인에게 물으니 집을 알려주신다. 그 골목에 가서 동동주 할머니라면 다 알 거란다. 미로처럼 좁은 골목길을 헤맨 끝에 할머니 집을 찾았다. 충렬사 아래서 서포루 쪽으로 한참을 올라갔다. 충렬사 아래가 아니라 서포루 아래라 해야 더 찾기 쉽겠다.

비탈진 언덕에 위태롭게 들어앉은 오두막집. 계단을 올라 할머니 집에 들어서자 마당은 온통 누룩 바구니와 물을 가득 담아놓은 물통으로 빽빽하다. 발 들여놓을 틈이 없다. "할머니 계세요?" 몇 번을 불러도 대답이 없다. 방안에선 텔레비전 소리가 나는데 어딜 가신 걸까. 이 늦은 저녁에. 골목에 나와 앉아 계신 동네 할머니에게 물으니 좀 전까지 있었는데 잠깐 어디 간 것 같다고 하신다. 위쪽에 사는 딸네 집에 갔는지 모르니 기다리면 금방 오실 거란다. 나그네는 할머니 집 계단에 쪼그려 앉아 하염없이 기다린다. 할머니는 대체 언제나 오시려나. 나그네가 할머니를 기다리는 것은 막걸리 한잔 때문이 아니다. 그렇다면 나그네가 기다리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올 수 있는 기다림일까? 인기척은 들리지 않고 사위는 점점 어둠에 잠겨간다.

□ 인문학습원 <통영학교>가 오는 2월 23일부터 24일까지 통영 답사를 떠납니다. 자세한 답사 정보는 바로 가기를 클릭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 답사 정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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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이 가기 전에 듣고 싶은 낭보

 

2월이 가기 전에 듣고 싶은 낭보
<칼럼> 김진환 건국대 HK연구교수
 
 
2013년 02월 11일 (월) 09:01:44 김진환 tongil@tongilnews.com
 
김진환 (건국대학교 통일인문학연구단 HK연구교수)


지난 1월 초에 북한의 3차 핵실험 강행 첩보가 입수됐다는 뉴스가 나오자마자 누군가가 제게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제 대답은 “북한이 자신의 장거리 로켓 발사에 대한 미국의 대응이 확정되기도 전에 굳이 핵실험을 강행할 이유가 있을까요?”라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대답했을까요? 탈냉전 이후 북․미관계를 보면 북한이 어떤 행위를 한 뒤 미국의 대응 태도나 수위를 지켜보고 나서야 그에 맞춰 또 다른 행위를 한 사례가 많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회현상을 설명하는 경우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수준의 법칙은 없기 때문에 항상 예외가 있기 마련입니다. 오바마 행정부가 갓 출범했던 2009년에 특히 그랬습니다. 북한은 그해 연초부터 연말까지 장거리 로켓 발사, 핵실험, 우라늄 농축 선언 등 정말 미국이 숨 돌릴 틈도 없이 바쁘게 움직였었는데, 돌이켜보면 2008년 쓰러졌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복귀한 뒤 북․미 관계정상화라는 필생의 목표를 향해 조금은 다급하게 달려갔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고, 약관의 후계자가 북한의 대미 외교를 이끌고 있는 마당에 2009년 같은 ‘속도전’은 당분간 없을 것이라는 게 평소 제 생각이었습니다. 그랬기에 북한이 장거리 로켓 발사 이후 불과 한 달여 만에 핵실험을 하려 한다는 첩보 역시 신빙성 있게 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1월 22일(한국 시각 23일 새벽)에 대북제재 대상을 추가하는 결의안 2087호를 통과시킨 직후 북한이 “높은 수준의 핵시험”까지 운운하며 강하게 반발할 때도, 저는 “앞으로 조선반도와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보장하기 위한 대화는 있어도”라는 북한의 주장에 주목하며 3차 핵실험 전에 북.미 대화가 재개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습니다. 탈냉전 이후 북․미가 겉으로는 온갖 험구를 쏟아내면서도 물밑에서는 양자대화의 물꼬를 트기 위한 협상을 성과적으로 벌여 왔던 경우가 실제로 많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수많은 근거들을 제시하며 현재 북한이 미국과의 전면전쟁까지 염두에 두고 움직이고 있다는 정세 분석을 내놓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미국과의 전면전쟁까지 염두에 둔 조선노동당이 세포비서대회를 소집해(1월 28~29일) “우주를 정복한 그 정신, 그 기백으로 경제건설과 인민생활에서 결정적 전환을 이룩”하자고 호소하고, 이러한 목표 달성의 기반인 “당과 인민의 일심단결”을 지키기 위해 “당에서 세도와 관료주의”를 척결하자고 강조하고 있는 현실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지난 해 말부터 북한 관영매체에서는 ‘민심’을 헤아리자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고 있고 심지어 2013년 신년사에서도 ‘민심’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정도로 부쩍 민생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런 북한 내 분위기와 전면전쟁 준비가 쉽게 연결되는지요? 2009년 6월 유엔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1874호 채택 직후 평양시를 시작으로 북한 주요 도시에서 진행됐던 유엔안전보장이사회 규탄 군중대회도 올해는 감감무소식인데 이러한 차이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한마디로 제 입장은 북.미 전면전쟁까지 염두에 둔 정세 전망에 아직까지는 동의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때마침 북한 주간지 『통일신보』가 2월 8일자 기사에서 “최근 공화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조작한 제재결의를 배격하고 그에 따른 국가적 중대조치를 취하겠다고 내외에 선포했다”며 “미국과 적대세력은 공화국이 제3차 핵실험을 한다고 지레짐작하면서 그것이 현실화되는 경우 선제타격까지 해야 한다고 입방아를 찧고 있다”고 비난했다고 합니다. 비록 외무성, 국방위원회 같은 북한 국가기구의 입장 발표는 아니었지만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1월 27일 ‘국가안전 및 대외부문 일꾼협의회’에서 결심했다는 ‘국가적 중대조치’를 ‘핵실험’과 거의 동일시해왔던 국제사회 여론에 문제를 제기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벌써부터 한국 정부가 북한의 ‘기만전술’, ‘연막전술’로 보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던데, ‘북한이 핵실험을 하지 않을 리 없다’고 단정하기보다는 이처럼 북한이 여지를 보일 때 어떤 경로로든 대화를 시도해보는 게 좀 더 바람직한 태도가 아닐까요? 만약 현재 남북 간에도 ‘물밑협상’이 진행되고 있다면 이참에 북한의 ‘진의’를 파악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한반도 정세는 지금 중요한 분기점에 서 있습니다. 2월에도 북.미 물밑협상의 가시적 성과가 나오지 못한 채 3월 초로 예정된 한.미합동군사훈련이 계획대로 실행된다면 북한이 공언한 ‘국가적 중대조치’의 실체가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물론 그 전에라도 북한이 2009년처럼 ‘속도전’을 할 수도 있겠지요. 예상되는 2월 중 핵실험 날짜는 벌써 한국 언론사들이 몇 개 꼽아 놓았더군요.

반대로 2월 안에 북.미가 양자대화의 물꼬를 텄다는 낭보가 들려올 가능성도 있습니다. 대북협상파를 자임하는 존 케리 국무장관이 2월 들어 본격적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점, 국방예산을 삭감해야 하는 미국 사정 때문에 3월 초 한.미합동군사훈련이 중지될 수도 있다는 점 등도 한반도 정세 분석을 할 때 당분간 빼놓지 말아야 할 변수입니다. 여기에 새로 출범하는 박근혜 정부의 남북관계 개선 의지까지 더해진다면 북.미 대화 가능성은 훨씬 더 높아질 것입니다.

재개될 북.미 대화가 성과를 내며 순항할 것인지, 제자리걸음만 반복하다 끝날 것인지는 확실히 예측할 수 없지만, 그래도 대화 없이 으르렁거리는 북.미를 바라보며 하루하루 불안에 떨고 있는 한국인들에게는 북․미 대화가 언제나 절실한 바람일 것입니다. 더 이상의 긴장 고조 없이 북.미 대화가 재개될 수도 있다는 예측이 이번만큼은 현실이 되기를 바랍니다.


 

김진환 (건국대 HK연구교수)
 

   
 
동국대학교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고 건국대학교 통일인문학연구단 HK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 전에는 민주노동당 통일외교 정책연구원, 이화여대 통일학연구원 객원연구위원 등으로 일해 왔다. 이 밖에 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 경실련 통일협회,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같은 통일 관련 단체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동북아시아 열국지 1: 북․미 핵공방의 기원과 전개』(2012), 『코리언의 생활문화』(2012, 공저), 『문화분단: 남한의 개인주의와 북한의 집단주의』(2012, 공저), 『구술사로 읽는 한국전쟁』(2011, 공저), 『북한위기론: 신화와 냉소를 넘어』(2010), 『민족과 통일』(2010, 공저), 『시련과 발돋움의 남북현대사』(2009, 공저) 등이 있다.

현재 월간『민족21』에 ‘김진환의 동북아시아 열국지’를 연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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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에 정면대결- 광주코뮌과 아고라의 공통점

쿠데타에 항거하는 광주코뮌과 아고라의 공통점
개표부정을 부정하는 논리의 위선

(서프라이즈 / 시다의검 / 2013-02-10)

 

1.다시 5월의 정신을 돌아보며

5.18 광주! 마지막 까지 도청을 사수하던 사람들! 죽을 것을 알면서 그 자리를 지킨, 아니 떠나지 못한 그 심정은 무엇이었을까? 죽어간 사람들에 대한 의리? 살아남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 누구도 그 어느 누구도 도청을 지키자고 강제하지 않았다. 오히려 중학생 어린 동생들을 떠밀다시피 도청 밖으로 밀어내고 구식 칼빈 소총 한 자루에 지친 몸을 기대며 저 멀리 어둠 속을 바라본다. 계엄군의 함성과 박자를 맞춘 군홧발 소리, 헬기에서 뿌려지는 삐라들이 눈발처럼 날리고 투항하라는 선무방송이 귀를 찢어대는 그 긴장된 여명의 시간! 우리의 형제이자 벗이었던 수백의 윤상원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저 반역의 무리들에게 순순히 이 나라를 넘길 순 없다. 내 부모와 형제들의 목숨을 앗아간 저 악귀들에게 나의 비겁한 뒷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 두 손을 들고 항복할 순 없다. 비록 저놈들의 총탄에 내 육신이 갈기갈기 찢어진들 내 영혼은 핏발선 저항을 하리라. 죽어서도 이 순간을 지켜봐야한다. 내 죽음이 역사의 증거가 되리라. 산들 그것이 산 것이겠는가? 어쩌면 오래전부터 내 죽을 자리는 여기로 예정되었나보다. 광주에서 태어났거나, 우연히도 지난 10여일의 사건에 참여했거나, 우리는 모두 광주코뮌의 동지들이다. 동지들 안녕히, 저승에서 다시 만나자! 그들은 그렇게 오로지 자신만의 실존적 결단으로 도청을 사수하다 죽어갔다. 이렇게 5.16 쿠데타를 계승한 1980년 전두환의 5.17 쿠데타는 수천 광주시민의 목숨을 짓밟고서야 완료될 수 있었다.


2. 517 쿠데타와 51.6 개표 쿠데타의 비교

 

5.17쿠데타 그 후로 30여년, 2013년 2월 초 우리는 아주 다른 것 같지만 본질상 동일한 51.6개표 쿠데타의 전개과정을 목도하고 있다. 계엄군의 총검이 선관위와 방송국의 조작된 개표 프로그램으로 그 외양이 바뀌었을 뿐 다른 모든 양태가 놀랄 정도로 유사하다.

박정희 사후 드러난 전두환의 권력욕과 이명박그네의 권력재창출의지가 너무도 닮았다. 강도의 폭력이냐 사기꾼의 사술이냐의 차이만 있을 뿐 주권재민의 민주적 절차를 파괴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모든 언론과 방송이 앵무새처럼 전두환과 박그네의 집권의 정당성을 떠들어댄다는 점도 같다. 구국의 결단으로 쿠데타를 미화하고 있다. 아니 더 나아가 5.17을 김대중에 책임을 씌우려는 어용세력이나 18대 대선 실패책임을 문재인과 친노(?)에 전가하려는 적반하장의 세력이 모두 기득권 쿠데타 세력의 동조자라는 점 또한 동일하다.

또한 지식인과 시민운동 세력이 침묵하는 점도 유사하다. 그 이유는 좀 다른 점이 있다. 전두환의 쿠데타에 침묵한 이유는 정말 말 그대로의 두려움이었다. 총칼을 휘두르는 학살정권의 폭력에 대한 원초적 두려움이었다. 그에 반해 이번 51.8개표 쿠데타에 대한 침묵은 비겁함이다. 부정선거를 인정할 때 필연적으로 요구받는 당위적 대응으로써의 부정에 대한 부정을 위한 투쟁의 의무에 대한 회피심리가 작동하는 거다. 목숨까지는 아니더라도 많은 것을 잃을 수 있는 저항운동에 정면으로 마주할 자신이 없는 거다. 그래서 내놓는 말이 “많은 오류와 한계가 있을 수 있지만 선거결과를 뒤집을 만한 정도의 부정선거는 불가능함으로 받아드리고 내일을 기약하자”는 멋들어진(?) 항변이다.


3-1. 부정선거를 부정하는 위선적 논리

부정선거를 부정하는 유일한 근거는 개표과정에서 다수 참여자를 다 속일 수 없다는 게 핵심이다. 그러나 그것은 변명과 핑계에 불과한 위선적 논리이다. 이미 드러난 증언과 증거 자료로 판단해보면 개표장의 대다수 참관인들은 그저 구경꾼에 불과했고 선관위 직원들은 전자개표기의 수동적 보조도구로 기능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대다수가 허수아비였다고 볼 수 있다.(이는 이번 대선에서 민주당 관계자들을 겪어본 내 경험과 일치한다.) 그런데 골 때리는 것은 이렇게 허술하게 집계된 선관위의 개표결과 수치와 방송국이 실제 방송한 수치가 불일치한다는 사실이다. 이번에 그 어떤 방송사도 개표현장에 집계요원을 보내지 않았고-아고라 마포나루님의 조사에 따르면 출구조사 여부도 대부분 확인되지 않는다.- 선관위가 보내준 자료를 그대로 송출했다는 데 말이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제3의 서버에서 미리 준비된 프로그램에 따라 산출된 수치가 방송사로 송출되었다고 추론하는 게 너무도 상식적인 것이 아닌가? 그렇게 가정할 때 이번 선거 개표과정의 모든 의문이 깔끔히 풀리지 않겠는가? 오캄의 면도날의 이론에 따르더라도 그렇다. (즉 이는 같은 현상을 설명하는 두 개의 주장이 있다면, 간단한 쪽이 논리적이라는 이론이다. 지동설이 천동설보다 행성궤도의 예측에서 보다 단순하다. 고로 지동설이 옳다.) 이번 대선의 개표과정의 숱한 의문점들(51.6%, 로지스틱 함수 꼴, 막판 전국적인 문재인 득표율의 미세상승조정, 기초 자치구와 광역 시도의 득표 그래프의 쌍둥이 닮은 꼴, 선관위와 방송국의 수치 불일치 그 외 등등)은 단순한 한 가지 가설 즉 외부개표조작 프로그램의 존재 이 하나로 충분히 설명 가능하다. 반면 물뚝심송등 일부 부정선거를 부정하는 착한(?) 사람의 주장은 이 모든 걸 우연이나 실수, 착오로 설명해야한다는 난제를 해결할 수 없다.


3-2.

 

그러나 실천적인 면에서 물뚝심송류의 부정선거 불가능설은 유리한 한 가지가 있다. 바로 실천적 고민을 대폭 줄여준다는 점이다. 개표과정의 오류는 없었다. 그러므로 전자개표기 사용에 반대할 이유도 수개표 투쟁을 할 필요도 없다. 또한 로지스틱함수도 방송국이 시각적 효과로 멋지게 컴퓨터그래픽으로 만들어서 나온 것이므로 의심할 필요가 없다. 다른 문제점도 뭐 그럴 수도 있는 우연일 뿐이다. 이 모든 게 박그네를 인정하기 싫어하는 문재인 열성 지지자들의 주관적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저 릴렉스! 사태를 냉정히 보고 현실을 받아들이자.

좋다. 참 그렇게 믿고 싶다. 그리고 부럽다. 그렇게 세상 편히 살 수가 있어서 그 강심장이 존경스럽다. 아고라에서 지금 이 시간에도 귀성길에 나눠줄 전단지를 만들어 돌리는 그 사람들이 편집증에 사로잡힌 이상한 사람이 되는 건가? 솔직히 고백하면 나도 물뚝심송의 글을 읽고서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러면 속이 편해질 거 같거든. 그냥 안철수나 씹던지, 노인네와 저소득층에 저주만 보내면 되거든. 그리고 앞으로 5년간 무관심하게 살면 되지 뭐, 저 인간들 망하는 거 보면서, 고소해하면서 말이야. 그런데 말야! 그게 잘 안되더라고. 합리적인 의심을 이미 품고 있는데 물뚝심송의 아무 문제없어! 라는 주장이 내게는 내가 고딩 때 떠나버린 야소교의 주여! 믿습니다. 라는 주술로 밖에는 안보이더라고 그리고 아고라와 서프에서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이 자꾸 5.18 당시 전남도청을 사수하던 광주시민처럼 느껴지더라고.. 30여년전 그 분들은 승리를 확신하지 못했지. 아니 오히려 도청을 떠나지 않고 사수하려다간 끝내 목숨을 잃게 되리란 걸 절감했었지. 시간이 갈수록 고립감을 느끼고 동지들이 하나씩 둘씩 자리를 뜰 때 심리적 동요도 있었을 거야. 지금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아고라의 시민들도 정도는 다르지만 비슷한 심경일꺼야. 30여년전 도청의 시민들이 총칼에 굴하지 않고 절대 전두환의 집권을 용납하지 않았듯이 지금 아고라에 모인 시민들도 개표부정으로 당선이 진행 중인 박그네의 정통성을 절대 인정할 수 없는 거야.


4.이 투쟁이 어떻게 될지 속단할 순 없다.

 

30여년전 광주에서 항쟁에 나선 시민들은 다른 도시의 지원과 봉기를 기대했었다. 그리고 심지어 미국이 민주주의를 위해서 전두환을 몰아내고 광주시민을 지지하리라 믿었다. 그러나 그러한 기대와 믿음은 무참히 깨졌다. 당시의 학생 운동권은 대대적인 탄압과 검거에 몸을 숨기고 침묵했다. 미국은 오히려 전두환을 지지했다.

현재 이 부정선거 투쟁도 4.19로의 도약이냐 좌절이냐의 기로에 서있다. 그러나 그 시절과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의 싸움은 현재 물리력이 아닌 담론을 둘러싼 싸움이라는 것이다. 사실을 규명하고 널리 알려서 진실로 규정하는 성격의 싸움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작은 노력이 모여서 트윗으로, 전파로 전 세계 인터넷 망을 타고 알려지고 있다. 이러한 투쟁을 원천봉쇄할 방법이 저들에겐 없다. 아고라에 서프에 침입해 오는 국정원 십알단의 무리들을 보면서 우리는 오히려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 우리를 고립시키려 국민세금까지 동원하는 저들의 작태에서 우리는 결코 고립되어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우리의 싸움은 박그네 정권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과정에서 수구 기득권 전체를 박그네와 싸잡아 부정할 수 있는 싸움이다. 단기간에 뚜렷한 성과가 없을 지라도 부정선거를 해야만 하는 취약한 저들의 집권기반을 그 토대에서 무너뜨릴 수 있는 싸움이다. 또한 이 과정에서 야권전체를 새롭게 재편할 수 있는 싸움이다. 알곡과 가라지가 아직은 구별이 안 되게 혼재되어있으나 우리의 이 투쟁에 대한 지지의 저변이 커지는 결과로 새롭고 튼튼한 대안세력이 형성될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 주체는 이 싸움을 주도해나가는 민주시민이 될 것이다. 민주당 따위가 우리를 능욕하고 무시하는 현재의 상황을 조만간 그대로 그들이 느끼게 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저 부정선거 주범들과 손잡은 배신의 무리가 노골적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4.19 미완의 혁명에 숨지신 민주 열사 분들과, 전남도청에서 마지막 밤을 살라가며 역사의 제단에 민주주의의 제물로 화하신 선배 동지들에게 우리가 오늘 화답할 차례다. 김구와 장준하, 김대중과 노무현의 길을 따라 ‘사람 사는 세상’의 대장정을 시작할 때다.

# 예고했던 글의 첫 번째 글입니다. 나머지 주제들은 자칫 주관적 감상으로 흐를 수 있어서 좀 더 취재하고 숙고한 후 쓸 계획입니다.

 

시다의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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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엄마 육아 그 아빠 일기 1] 나의 마지막 가정 출산기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3/02/11 09:13
  • 수정일
    2013/02/11 09:13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내가 미쳤지, 왜 또 이걸!"... '복댕이'가 나왔습니다

 

13.02.10 20:29l최종 업데이트 13.02.10 20:29l

 

 

이희동, 정가람 부부가 함께 쓰는 육아일기입니다. 다섯 살 까꿍이와 세 살 산들이, 그리고 갓 태어난 복댕이가 그 주인공으로서 다섯 식구가 어떻게 복작거리며 살아가는지 소소한 일상을 담을 것입니다. 또한 육아와 관련된 상황들을 이 시대의 남편과 아내가 어떻게 다른 시각으로 인식하고 대처하는지 기록하고자 하며 이를 통해 많은 부모들과 좀 더 나은 육아에 대해 고민하고자 합니다. 우리의 일기는 까꿍이가 일기를 쓰기 시작하는 날 끝날 듯 싶습니다. <기자 말>

▲ 세남매 니들이 키워라, 막내!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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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설날. 작년 이날만 해도 임신 7개월의 부른 배를 하고 새벽같이 시댁에서 일어나 시어머님과 함께 만두를 빚었는데 올해는 세수도 않고 안방에 누워 늦잠을 자며 뒹굴거리고 있다. 며느리인 친구들은 물론이거니와 친정엄마께서도 부러워하신다.

시댁으로 친정으로 오가는 수고로움은 없지만 그래도 명절날 갓난쟁이와 단 둘이 안방에 누워있는 게 마냥 좋지만은 않다. 어른들 말씀처럼 그래도 명절은 식구들 다같이 모여 북적거리는 게 제 맛이다 싶다. 하지만 두 번 다시 없을 이 고요하고 나른한 '나 홀로 명절'에 귀에 걸린 입은 내려올 줄 모른다.

처음도 아닌데, 두 번도 아닌 세 번째인데 이상하게 겁이 나고 떨리고 두렵기까지 했다. 처음엔 뭔지 모르니 그야말로 무식한 용감함으로 덤볐고, 그 다음은 두 번째는 쉽다는 말에 별다른 긴장 없이 덤볐는데, 세 번째가 되니 두 번의 경험으로 이도 저도 다 잘 알기에 9개월 동안 문득문득 마음이 살얼음판이 되었다가 콩알만 해지기를 반복했다.

대망의 그날이 다가오자 이는 더욱 심해졌고 평소엔 잘 안하던 기도가 절로 반복재생 되었다. 2월이 되고 그날이 점점 다가옴을 느꼈다. 자는 것도 걷는 것도 뭐든 다 불편해지고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고통은 잦아졌다. 이번에도 무사히 잘 할 수 있을까…, 그래야 하는데…, 뭔지 모를 불안함에 자신감은 뚝뚝 떨어져만 간다.

예정일을 며칠 앞둔 일주일 전, 나부터 시작해 첫째 둘째가 이틀 간격으로 노로바이러스에 감염되어 힘든 날들을 보내던 주말, 아무래도 거사를 앞둔 마지막 일요일이 될 것 같은 예감에 식구들 모두 영양보충을 제대로 하자 작정을 하고 토요일 밤 맛집을 찾았다. 그때 아뿔싸! 신호가 시작되었다.

설날을 일주일 앞두고... 아뿔싸! 신호가 시작됐다

▲ 쓸쓸한 계단 걷기 조금이라도 진행을 빨리 시키려는 야밤의 노력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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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아이들은 모두 잠든 한밤중. 5분 주기로 아파오는 배를 뒤로 하고 거실에서 억지로 잠을 청했다. 아이들이 곁에 없어야 신음소리라도 편히 낼 수 있기에. 진통 속에 두어 시간 선잠을 자다 깬 새벽, 남편을 깨워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진통의 강도가 그렇게 세진 않았지만 주기는 5분. 경산모이기에 언제 진진통이 걸릴지 몰라 남편은 새벽이었지만 조산원에 전화를 걸어 상황을 알렸다. 두 아이 모두 받아준 조산사는 짐을 챙겨 곧바로 집으로 오기로 했다.

새벽 6시경 조산사가 집으로 도착했고, 내진 결과 자궁문은 2cm 열려 있지만 아직 자궁 경부가 부드럽지 않은 상황이었다. 빠르면 오전 중에, 늦어도 저녁 전엔 '복댕이'가 세상에 나올 거라 알려주었다. 이미 4시간 정도 진통을 한 상황인데, 최소 6시간이 더 남았다는 말에 힘이 쭈욱 빠졌다. 그래도 셋째인데 9시간 진통을 하고 나온 둘째보다는 빨리 나오겠지 했는데, 20시간 진통을 한 첫째만큼 갈 수도 있다니! 셋째는 30분 만에도 나온다는 행운은 내겐 없는 건가….

아이들에게 동생이 세상에 나오는 걸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싶어 가정출산을 선택했는데 둘째 낳을 때 진통하는 엄마 곁에서 한 시간 넘게 울어댄 첫째를 생각하니 애들 잘 때 빨리 복댕이를 낳아야겠다는 생각과 어서 이 진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간절함에 외투를 입고 아파트 계단 오르내리기를 시작했다.

집을 나서는 나를 따라 남편이 나온다. 마지막 출산이니 계단을 함께 걸어주려나 보다 하고 고마운 마음이 들려는 찰나 뒤에서 들리는 사진기 소리. 찰칵찰칵 사진기만 눌러대더니 집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세 번째 임신이라고 뭐가 먹고 싶다는 것도, 손발이 부어 힘들다는 말도 은근슬쩍 못들은 척하고 넘어가기 일쑤였던 남편이었다. 아, 바랄 걸 바라야지.

1층부터 9층까지 계단 걷기를 몇 번 했지만 진통 주기는 좀처럼 짧아지지 않고 계속 5분. 소파에 머리를 박고 진통을 견디는데 남편은 공부방에서 뭘 하는지 내다보지도 않는다. 전엔 와서 허리도 쓰다듬어 주고 손도 잡아주고 하더니 마지막 출산이라 생생하게 남겨야 한다며 노트북에 내장된 캠코더 시범 작동 중이라 바쁘단다. 아, 나는 누구의 아이를 낳기 위해 이다지도 진통 중에 있는가!

30분 만에 나온다는 셋째... 내게 그런 행운은 없는 건가

▲ 진통 아이들이 놀라지 않게 최대한 숨죽여서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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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엔 9시까지도 늦잠을 자는 아이들이 8시가 못 되어 일어났다. 마음이 더 급해진다. 그러나 내진 결과, 아직도 자궁문은 3cm밖에 열리지 않았고 자궁경부도 출산하기엔 딱딱한 상태이다. 자궁경부가 얇고 부드러워져야 진진통이 걸린다 하는데, 복댕이는 나와 달리 급할 게 없나보다. 하긴 누나와 형이 장악한 집에 빨리 나오고 싶은 마음이 뭐 그리 크겠는가. 반신욕을 하면 진행도 빨리 되고 진통도 덜해진다는 친구의 말이 생각나 욕조에서 한 시간가량 배를 쓰다듬었지만, 여전히 자궁문은 3cm에서 더 열리지를 않는다.

아이들이 놀라지 않게 최대한 신음소리를 내지 않고 여전히 5분 주기인 진통을 견뎠다. 아이들은 일어나자마자 좋아하는 만화영화와 어쩌다 한 번씩 나오는 과자가 줄줄이 나오자 신이 났다. 오전 11시가 넘으면서 진통의 강도가 세지고 진통 간격도 4분으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렇게도 안 열리던 자궁문이 드디어 8cm까지 열리고, 조산사는 경산모이니 지금부터 힘 주기에 들어가자 했다.

안방에서 혼자 진통이 오면 힘 주기에 들어갔다. 진통과 함께 열까지 세며 있는 힘 다해 힘을 주기 시작하자 떠오르는 지난 두 번의 산고의 고통들. 아, 내가 왜 잊었던가, 그 고통들을! 내가 왜 이 고통을 또 자처해서 겪고 있는가, 내가, 왜, 왜!

바보 같은 내가 서러워 몰래 화장실에서 울기까지 했다. 딸 아들, 둘 낳았으면 됐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또 이러고 있나 하며…. 안간힘을 쓰며 참아내던 고통이 극에 달하고 나도 모르게 비명 소리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만화와 과자가 있어도 안방에서 혼자 복댕이 낳을 준비 중인 엄마가 걱정이 되어 수시로 들락거리던 아이들이 겁먹은 얼굴로 문간에 서 있는 게 보인다. 아이들이 더 놀라지 않게 참자 다짐을 하지만 지쳐버린 몸과 마음은 마지막 잡고 있던 이성의 끈을 놓아버렸다.

남편은 최대한 아이들이 놀라지 않게 거실에서 아이들과 놀아주고 난 조산사의 손을 잡고, 내 골반에 진입해 360도 회전을 하며 산도를 통과해 내려오는 복댕이를 돕는 힘주기를 계속 했다. 곧 머리가 보일 테니 이젠 아빠가 들어와 엄마를 도와야 한다는 조산사의 부름. 몇 번만 더 힘을 주면 이 고통이 끝난다는 걸 알지만 약해질 대로 약해진 심신은 마음먹은 대로 잘 되지 않았다.

등 뒤에 앉아 나를 받치고 있는 남편 목을 잡고 다리를 최대한 벌려 힘을 주면 아기가 내려오기 쉬운데, 팔을 뻗어 남편의 목도 잡지 못하고, 몸부림을 치며 못하겠다, 그만하자, 병원 가 수술하자는 떼를 쓰기 시작했다(남편은 틈만 나면 이랬던 나를 놀려댄다).

약한 엄마와 달리 복댕이는 씩씩하게 쑤욱 내려와 까만 머리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출산의 가장 중요한 순간이다. 아무리 아파도 몸 뒤틀지 말고 조산사의 말을 잘 듣고 태아가 혼자 세상에 나올 수 있게 심호흡 크게 하며 긴장해야 하는데 나의 고통은 절정에 달했고, 한 번만 더 힘을 주면 되는데 또 쉬어버렸다.

둘째 때도 머리 보이는 찰나에 쉬어 머리에 자국이 열흘 넘게 남았었는데. 자꾸 이러면 회음부가 찢어져 고생한다는 조산사의 말에 화들짝 정신이 들었다. 복댕이 힘드니 정신 차리란 얘기는 흘려들어놓곤 이러면 출산 후 내가 고생할 거란 얘기를 듣고 나서야 마음을 가다듬고 마지막 힘을 짜냈고, 쑤욱 하고 복댕이가 태어났다.

마지막 힘을 짜내는 순간... '쑤욱' 복댕이가 태어났다

▲ 핏덩이 그야말로 갓 태어난 신생아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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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산의 현장 마지막 고통, 태반을 꺼내는 순간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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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다리 사이에서 나온 동생을 정면에서 보고 서 있던 두 아이들은 다행히 울지 않았다. 진통하는 엄마를 보면서도 놀라지 않고 잘 참던 큰아이가 갓 태어나 엄마 배 위에 엎드려 누워 꼬물거리는 동생을 보자 울먹이기 시작했다. 누나가 울먹이자 둘째도 울려 한다.

급한 마음에 스마트폰을 쥐여주며 갖고 놀아라 했더니, 스마트폰을 받아든 첫째는 거실로 쌩하고 나가버린다. 그래도 둘째는 계속 엄마 곁에서 동생과 엄마를 번갈아 본다. 아직 태맥이 뛰는 탯줄과 작고 어린 복댕이를 쓰다듬으며 울기 직전인 둘째 아이를 보듬으며 세 번째이자 마지막인, 꼭 마지막이어야 하는 가정출산을 무사히 끝마쳤다.

임신기간 동안, 진통하는 동안 내도록 나를 나약하게 했던 많은 걱정과 달리 아기도 나도 건강했다. 남편은 자궁문이 완전히 열리고 20분도 채 걸리지 않고 복댕이가 태어났다 했지만, 내겐 20시간, 아니 200시간 같았던 출산의 시간이었다. 하지만 금방 잊어버리는 게 산고의 고통이다. 불과 몇 초 전까지만 해도 죽겠다 소리 질러 놓곤 언제 그랬냐는 듯 웃으며 조산사 선생님과 남편, 아이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첫째 조산원 출산, 둘째 가정출산 이후 셋째 출산을 앞두고 남편부터 시작해 많은 이들이 이번에도 집에서 낳을 거냐 물었다. 어른들은 마지막이고 하니 병원에서 안전하게 출산하고 조리원에 들어가 산후조리도 야무지게 하라고 조언을 하셨지만, 마지막이기에 더더욱 가정출산을 하고 싶었다.

다행히 막달검사까지 별다른 이상이 없었고, 조산원에서도 가정출산이 가능하겠다는 진료 결과를 주었다. 물론 몇 번은 병원에서 무통주사 맞고 조금이라도 덜 아프게 아이 낳고 조리원에서 편하게 산후조리 하고 싶은 생각도 했다. 하지만 출산이 다가올수록 내가 제일 마음도 몸도 편한 건 가정출산에 내 집에서의 산후조리였다.

앞서 두 번의 출산기에서 썼듯 나는 가장 자연스러운 출산을 하고 싶었다. 일명 출산 3종 세트인 회음부 절개, 관장, 제모를 하지 않고, 환자복을 입고 좁은 간이침대에서 진통을 하다 자궁문이 다 열려서야 분만실로 들어가 의사들이 정해주는 자세로 아이를 낳고, 갓 태어난 아기를 안아보지도 못하고 간호사들이 처치실로 데리고 가버리는 그런 일반적인 분만은 하고 싶지 않았다(모든 병원분만이 이런 건 아니다. 가족분만실에서 자연출산에 가까운 출산을 하는 병원도 점점 늘고 있다).

아이들이 마음껏 꿈꿀 수 있는 세상을 위해, 출발이다!

▲ 라이벌 등장 내가 먹던 엄마 젖인데...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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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가까운 병원이라 해도 갓 태어난 핏덩이를 데리고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도 걱정이고, 38개월, 20개월 두 아이를 데리고 병원이나 조산원으로 오가는 것도 힘들 일이었다. 가까운 시댁에 아이들을 맡기는 방법도 있지만, 가뜩이나 동생의 출현으로 엄마를 나눠야 한다는 불안함이 큰 아이들에게 갑자기 엄마가 사라졌다 동생을 안고 등장하는 충격을 주고 싶진 않았다.

혹자들은 엄마가 고통 속에 동생을 출산하는 걸 보여주는 게 더 큰 충격으로 오래 남을 것이라 걱정을 하지만 경험을 미뤄보면 곁에서 출산하는 엄마를 두 번씩이나 본 큰아이는 동생에게 샘도 부리지 않고 출산 후 몸조리 하는 엄마를 아주 잘 이해해준다. 아직도 수유 중인 둘째도 누나의 이런 모습을 그대로 따라해 크게 떼 부리지 않고 동생과 엄마 젖을 나눠 먹고 있다.

애가 셋이면 애 셋 모두 맑음인 날이 단 하루도 없다는 어느 엄마의 말이 내 앞날을 걱정해주지만 낳고 보니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첫째 둘째 출산 후엔 엄마로서의 뿌듯함이 거의 없었는데, 셋까지 낳고 나니 어쩌면 살면서 제일 잘한 일이겠구나 하는 마음이 든다. 아이들에게 다복한 형제애, 동기애만큼 큰 유산이 있을까 하는 마음도 들고. 출산 후 마땅히 드려야 하는 감사의 기도도 셋째를 낳고 나서야 낮고 겸허한 마음에서 진심을 다해 우러나왔다.

세 아이를 키우는 일이 쉽진 않겠지. 지금의 다짐과 감사를 까맣게 잊고 소리 질러가며 히스테리 가득한 엄마가 되는 날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아롱이다롱이 각기 다른 세 아이를 키우면서 나 또한 각기 다른 삶의 지혜를 배우고 쌓아가면서 더 큰 부모가, 더 넓고 싶은 내가 되어갈 것이다.

육아에 밀려 사라져버린 내 꿈에 서러운 날도 있겠지만 길어야 몇 년 육아에 전념하며 아이들을 키워내다 보면 잠시 쉬고 있는 내 꿈도 아이들과 함께 영글어 가리라 믿어본다. 자, 이제 다시 시작이다. 육아와 살림, 일상에 함몰되지 않기 위해 남편과 번갈아 세 아이 키우는 일상을 이곳에 기록하며 서로를 이해하고 아이들이 마음껏 꿈꿀 수 있는 세상을 위해 출발, 출발이다!

▲ 40개월, 남동생만 둘 고단한 누나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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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제 셋째 등장 이후 훌쩍 커버린 둘째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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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동포들 설명절 어떻게 보낼까?

 

 

 

북녘 동포들 설명절 어떻게 보낼까?
 
설빔 입고 집안 동네 어른에게 새배
 
이정섭 기자
기사입력: 2013/02/10 [09:58] 최종편집: ⓒ 자주민보
 
 

▲ 북녘동포들이 가족과 함께 새배를 한뒤 윷을 놀며 설명절을 즐기고 있다. © 이정섭 기자
우리민족의 대명절인 설을 북녘 동포들은 어떻게 지낼까? 과거 반북 반공 교육을 받던 시기 북은 우리전통 명절도 없이 지낸다고 배웠다.

정말 그럴까? 답부터 말하면 전혀 틀렸다가 맞다. 조국평화통일위원회 기관지인 우리민족끼리는 우리전통 설명절을 소개하는 기사를 실었다.

우리민족끼리는 “음력 정월초하루를 기념하여 쇠는 민속명절인 설은 새해 첫 명절을 이르는 고유한 조선말”이라며 “설명절은 고조선을 비롯한 고대국가시기부터 있었다. 그후 설명절 맞이는 삼국시기와 고려, 이조시기에 이어져 전통적인 풍습으로 더욱 고착되어 큰 규모로 진행되었다.”고 유래를 소개했다.

이 신문은 “섣달그믐날에는 집안 밖을 깨끗이 청소하고 소나무, 학 등 십장생그림을 그려 벽장이나 병풍에 붙여서 명절분위기를 돋구었으며 설 옷(설빔, 세장)과 설음식을 준비하였다.”며 “설맞이행사는 새해 정월초하루날 아침부터 진행되었다. 설맞이행사로는 차례와 세배, 설음식대접, 민속놀이 등이 있었다.”고 전했다.

신문은 “차례는 설날 새벽에 먼저 돌아간 조상들에게 지내는 제사로서 조상숭배관념에서 생겨난 행사였다.”며 “설날 이른 아침에는 웃어른들에게 세배를 하였다. 우선 집안의 웃 사람순서로 차례차례 큰절로 세배를 하였으며 다음에는 마을의 웃어른들, 친척집의 웃 사람들, 스승들에게 세배를 하였다.”고 써 차례와 세배 등 우리민족의 전통을 고스란히 전했다.

또한 “설날에 하는 즐거운 일은 다음으로 설음식을 잘 차려 친척들이 한곳에 모여 먹거나 세배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대접하는 것이었다. 설날음식은 세찬이라고 하였다. 이날에는 특색 있는 음식인 떡국, 찰떡, 설기떡, 절편 등과 여러 가지 지짐류, 당과류, 수정과, 식혜, 고기구이, 과실, 술을 마련하였고 특히 떡국은 설음식으로서 빠져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고 떡국음식에 대한 특별함도 소개했다.

이어 “설명절을 특별히 장식하고 즐겁게 한 것은 민속놀이였다. 설날의 놀이로는 대중적인 놀이인 윷놀이와 장기놀이, 어린이들의 연띄우기, 썰매타기, 팽이치기, 제기차기, 바람개비놀이 등이 있었다. 이러한 놀이는 우리 인민이 예로부터 즐겨 온 것으로서 정서적이면서도 체력단련에 도움을 주었다.” 고 놀이의 의미를 설명했다.

하루빨리 조국이 통일 되어 남과북을 넘나들며 설을 함께 지 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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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긴급> 문재인 이제 나와서 밝혀야 한다.

<긴급> 문재인 이제 나와서 밝혀야 한다.
(서프라이즈 / 짜고친고스톱이냐 / 2013-02-08)


이번 설연휴에 국민들에게 대대적으로 홍보하지 않으면 부정선거 의혹과 증거들은 그대로 묻히고 2.25일 박근혜의 대통령 취임은 정당성을 얻고 제 2의 박정희시대, 제 2기 유신독재가 시작됩니다.

조국 교수가 박근혜가 대통령되면 이명박이 그리워지는 시대가 온다는 예언이 100% 증명됩니다. 이명박 시대는 봄날이었다는 것이 증명될 겁니다.

민주, 진보진영의 인사들(문재인 포함)과 국민들의 피의 희생을 줄이려면 양측이 서로 손잡고 하나되어 나아가야 합니다.

부정선거 의혹을 밝힐 수 있는 증거들 확보하고 칼날이 아닌 칼자루를 쥐고 있어야 팍곯은 애가 휘두르는 칼에 피흘리지 않고 고통을 당하지 않게 됩니다.

서프의 여러분도 마찬가지 입니다. 문재인과 하나 되어 피흘리지 않을 자기보호는 해야할 시점입니다 또한 문재인은 우리와 같이 함으로써 살아남을 겁니다.

동의하시면 아래 링크글에 적극적으로 추천하여 베스트 보내주세요.

문재인은 아래 유튜브 동영상의 1:08분 부터 시작되는 해외동포들의 호소와 피토하는 눈물을 보아라!!!!

이런 상황에서도 문재인이 나서지 않는다면 사람도 아니다.
문재인을 우리가 보호하고 지켜줄 이유가 없다.
문재인은 한 나라의 정치인이 돼서도 안되는 치졸한 졸장부다.
국회의원 자격도 없다 사퇴하고 정치판에서 당장 사라져라 !!!!!

문재인 후보 밑에서 대선을 지휘하고 당선되면 한자리 하려고 붙었던 민통당 주류세력(친노)의 친노의원들 수십 명은 대선이 끝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쥐구멍에 숨어서 모습을 감추고 침묵하고 있는데 니들도 마찬가지다.

이 이후에 침묵하여 확실한 부정선거임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세상을 만들어주고 민주,진보진영의 인사들이 탄압당하고 국민이 피흘리고 목숨 빼았기는 지옥문을 열어 놓고도 침묵할 것이라면 국민이 너희들을 단죄하고 감방에 쳐넣기 전에 석고대죄하고 정치판을 떠나라 !!!!

(문재인을 비롯한 주류인 이해찬, 한명숙 등 수십명의 친노의원들은 명심하라)

 

짜고친고스톱이냐

 

 

[펌 1]

어제 회원 수 1,000 명이 넘는 부정선거 의혹 규명에 앞장선 유권소의 미주 회원들과 한국의 회원들이 주권방송 협조로 ‘나는 왜 지난 대선을 부정선거로 생각하는가’의 주제로 제 2차 한미 글로벌 화상회의를 열었습니다.

동영상은 막 유튜브에 올려졌는데 이 동영상이 알려짐으로 부정선거 의혹에 관한 관심이 커져갈 것을 기대합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VNQ024itJMw&feature=youtu.be

 

 

 

[펌 2]

국정원 사태까지 왔다 문재인 이제 나와라!
(다음아고라 / 증거는 민심이 증거다 / 2013-02-08)

 

문재인이 아직 나서서는 안된다고 설레발 치던 1인이다!
문재인의 말과 행동 하나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올 것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에, 나는 문재인이 아직은 나서면 안된다고 얼마전까지 주장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다르다! 문재인은 국정원 사건과 십알단 사건의 의문에 대해서 국민에게 답할 때가 되었다!

수많은 지지와 투표를 문재인에 던지며, 문재인의 질문에 답했던 유권자들에게 지금은 말하고 보여줄때가 된것이다!

때는 무르익었고, 문재인에게는 그러한 사명이 대권주자로서 국민에게 지지를 부탁하면서 부터 자연 발생 했다!

국정원 사건이 거의 구체화 되어있고, 이제는 국가기관에 근무하는 공무원들의 복지부동을 견제할 야권의 강력한 목소리가 필요 할때이고, 민주당의 복지부동을 흐트러트릴 문재인의 목소리가 필요 할때이다.

국민에게는 그런 목소리가 없다!
오로지 문재인에게만 있다!
지금은 문재인이 국민의 부름에 답을 할때이다!
망설일 이유도 없고, 파장을 걱정할 이유도 없다.

이미 증거는 충분하고,이조차 망설이고 증거탓만 한다면, 문재인은 석고대죄를 통해 국민에게 철저히 사과하고 정치에서 물러나라!

국민에게 지지를 부탁할 자격조차 없었던 자가 정치한다고 깝친것 밖에 안된다!

자신이 국민의 부름을 받고 나왔더라도, 애초에 거절했으면 될일을, 승낙한것은 이러한 국민의 부름에 나올준비는 당연히 하고 있다는것이라 생각하고 그것을 너무도 알 분이라고 믿기에 과감하게 요구한다!

이제는 국민의 부름에 응답하라! 문재인!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articleId=2286570&bbsId=D115&pageIndex=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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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겁고 오래 타는 난로 어디 없소?-기발한 난로 다 모여

뜨겁고 오래 타는 난로 어디 없소?-기발한 난로 다 모여

 
이유진 2013. 02. 08
조회수 420추천수 0
 

완주서 2회 '나는 난로다' 공모전 성황…'난로인'들 적정기술 기량 겨뤄

발열통 덧붙인 난로, 거꾸로 타는 난로, '일파만파 난로', 고물 재활용 난로, 드럼통 열풍기…


입춘에 폭설이 내릴 정도로 유난히 추운 이번 겨울엔 따뜻한 난로와 고구마가 절로 생각난다. 이런 겨울에 딱 어울리는 고효율 화목난로 공모전 '나는 난로다' 행사가 지난 2월 1일부터 3일간 완주군 커뮤니티비즈니스센터에서 열렸다.

 

nan1.jpg » 전북 완주에서 열린 '나는 난로다' 전시장.


전국의 난로 장인들이 출품한 59개 작품이 전시되었고, 화목난로·태양열온풍기·폐식용유 바이오디젤 만들기 등에 대한 '적정기술 강의'도 열렸다. 약 6000 명이 방문한 대회장은 한겨울 추위를 녹일 정도로 후끈했다. 자료집은 이틀 만에 동이 났고, 즉석에서 앙코르강연이 진행되기도 했다.


이번 행사를 완주군과 함께 준비한 '지역 에너지 자립 적정기술 네트워크(준)'의 김성원 준비위원은 "이번 출품작들은 지난해 담양에서 열린 대회보다 기술적으로 더욱 성숙했다. 효율을 높이면서도 용도에 맞게 다양하게 출품되었다는 것이 특징이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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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상금은 1000만원. 300만원의 상금이 주어지는 금상은 '축열식 더블 큐브난로'를 개발한 이주연씨와 '슈퍼펠렛스토브'를 개발한 한국전씨에게 돌아갔다.

 

이번 대회의 심사기준은 고효율 화목난로의 구성요소를 잘 반영하면서도 사용 편의성이 높고, 디자인이 훌륭한 난로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더불어 양산이 가능하고,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새로운 연소방식을 도입한 것에 가산점을 줬다.

nan3.jpg » 금상을 받은 이주연씨의 축열식 더블 큐브난로.

 

nan4.jpg » 다른 금상 수상작인 한국전씨의 SPS.

이주연 씨는 금속디자인 작가이다. 우연한 기회에 난로를 디자인하게 되었는데, 지금은 실력파로 이번 대회에서 금상을 수상했다.

 

난로의 핵심은 완전연소와 열이용률을 높이는 것이다. 나무를 태워서 발생한 열이 연통을 통해 바로 나가버리면 안 된다. 그래서 이씨는 큐빅 모양의 연소실 위에 발열통을 같은 크기로 설치하고, 열기가 발열통에서 충분히 머물도록 설계했다.

 

이씨의 '난로 철학'은 이용하는 사람이 사용 용도와 장소에 맞게 만들면 된다는 것이다. 자신이 만든 난로는 실내용으로, 은근히 오래 타도록 만들었고 했다. 그의 난로는 이미 서울시 동작구 성대골마을학교에서 사용하고 있다.


한국전씨는 캠핑을 아주 좋아한다. 영하 20도의 날씨에서도 캠핑을 하면서 석유난로를 썼는데,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직접 난로를 만들어 봤더니 나무가 너무 많이 들었다. 그래서 3년 동안 나무를 적게 쓰는 효율 좋은 난로를 집중해서 연구했고, 거꾸로 타는 캠핑용 펠릿난로와 화목난로를 개발해 특허를 받았다.

 

상금이 100만원인 은상은 세 명이나 수상했다. 김준수씨의 '키다리 화목난로', 강상영씨의 '일파만파', 김흥수씨의 '거창화로'가 그것이다.

 

'키다리화목난로'는 불이 위에서부터 타서 내려오는 'T-LUD'(Top-Lit Up Draft) 기술을 채택했다는 점이, '일파만파'는 난로 옆에 라디에이터를 붙여 바닥난방, 화덕, 오븐, 열풍을 할 수 있도록 다기능을 접목했다. '거창화로'는 로켓화목난로의 원리에 충실하면서도 발열과 연소를 개선했다.

 

nan5.jpg » 은상을 받은 김준수씨의 키다리화목 난로.

 

nan6.jpg » 은상을 받은 강상영씨의 일파만파.

동상은 김일환 씨의 '착한 난로'와 안병국 씨의 '잡열 잡는 난로'가 수상했다. 김일환씨는 통영거제환경연합 전 사무국장으로 지금은 적정기술 기술자로 변신했다. '착한 난로'는 발열통을 따로 두어서 열을 충분히 사용하도록 만들어 나무가 많이 안 들어가기에 그런 이름을 붙였다. 안병국씨는 완주에서 만든 불노리영농조합법인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지역 당선자로 완주의 체면을 세웠다.

 

nan7.jpg » 동상 수상작인 김일환씨의 '착한 난로'.

 

nan8.jpg » 역시 동상을 받은 안병국씨의 '잡열 잡는 난로'.

장려상은 정지용씨의 '하이브리드 난로'와 류영옥씨의 '고물딱지 난로'가 수상했다. '하이브리드 난로'는 난로에 착탈식 열교환기를 부착해 온수를 생산하는 방식이고, '고물딱지 난로'는 거의 모든 재료를 재활용한 재료로 사용해 환경과 에너지를 고려하면서도 효율을 높였다.

nan9.jpg » 장려상 수상작인 정지용씨의 '하이브리드 난로'.

nan10.jpg » 장려상을 받은 류영옥씨의 '고물딱지 난로'.

그 외에도 주목할 만한 난로로 가스통을 쉽게 재활용한 원주공방의 '멧돼지 난로', 드럼통으로 구둘 효과를 낸 '드럼통 구들', 농가 비닐하우스에 사용하기에 적합한 '드럼통 열풍기' 등이 있다. 이들은 수상작은 아니었지만 실용성과 아이디어가 돋보였다.

 

nan11.jpg » 원주공방의 '멧돼지 난로'.

nan12.jpg » '드럼통 구들'의 얼개.

 

nan13.jpg » 비닐하우스에 쓰기 적합한 '드럼통 온풍기'.

완주군에서는 내년 군의 다양한 먹을거리와 결합해 '나는 난로다' 3회 대회를 준비하겠다고 밝혔다. 이번에는 에너지 자립마을 덕암마을에서 고효율화덕으로 'Fire Food'를 준비했는데, 다음에는 더욱 풍성해질 것으로 기대된다.

 

임정엽 군수는 올해 완주군의 시정 목표로 ‘로컬 에너지’정책을 펼치겠다고 밝혔다. 농촌도 에너지 위기에 대응해야 할 뿐만 아니라 군민의 에너지 부담을 덜기 위해 적정기술을 활용한 에너지 복지정책을 적극 도입한다는 것이다.

 

로컬푸드 1번지가 된 완주군에서 로컬에너지를 어떻게 일궈낼지 기대가 되는 대목이다.

 

nan14.jpg » 올해 완주군에서 로컬 에너지 정책을 펼치겠다고 발표하는 임정엽 군수.

마지막 날에는 '적정기술 에너지협동조합 포럼'이 열렸다. 앞으로 논의는 더 진행되겠지만 올해 난로를 포함한 농촌에 적합한 적정에너지 기술을 교육하고 연구하는 협동조합이 완주에 만들어질 것으로 보인다.

 

'나는 난로다' 경진대회도 난로만이 아니라 태양열 온풍기, 단열 건축기술 등 다양한 분야로도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완주군은 앞으로 지역에너지 자립을 위한 다양한 실험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전국 난로인들의 축제로 자리잡은 '나는 난로다'행사는 우리 농촌에 적합한 적정기술의 가능성과 필요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자리가 되었다. 내년 대회가 어떻게 진화할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글·사진 이유진/ 한겨레 물바람숲 필진, 녹색당 공동정책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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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 녹색연합 녹색에너지 디자인 팀장
녹색연합 녹색에너지 디자인 팀장. 재생가능에너지, 기후변화, 원자력 발전, 지속가능한 발전 분야에서 풍부한 현장 경험과 전문적 식견을 지녔다. <동네에너지가 희망이다> <에너지 자립마을 만들기 가이드북> 등의 저서가 있다.
이메일 : leeyj@greenkorea.org
블로그 : http://plug.hani.co.kr/localener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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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설 맞는 사람들] 송전탑, 성당 종탑 등에 오른 노동자들

아들의 33m 고공농성, 어머니는 한 달 넘게 몰랐다

 

13.02.09 11:27l최종 업데이트 13.02.09 11:27l

 

 

매서운 칼바람이 부는 하늘에서 설날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있다. 고공 농성 중인 노동자들이다. 이들이 머무는 곳은 15만 볼트 송전탑, 성당 종탑, 굴다리 난간 등이다. 적게는 3일째부터 길게는 115일째 농성들을 벌이고 있다.

8일 전화 통화를 통해 이들의 심정을 들어봤다.

[복기성 쌍용자동차 해고자] 송전탑 생활 81일째... 소원은 "가족과 저녁식사"

▲ 쌍용차 철탑농성 77일째 지난 4일 민주노총 금속노조 쌍용차지부의 한상균(52) 전 지부장, 문기주(53) 정비지회장, 복기성(38) 비정규지회 수석부지회장이 77일째 경기도 평택시 쌍용자동차 공장 부근 철탑에서 국정조사 실시, 비정규직 정규직화, 해고자 복직 등을 요구하며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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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분 거리에 아이들이 있는데…."

복기성 비정규지회 수석부지회장은 "설 연휴에는 아이들을 보고 싶다"며 말을 흐렸다. 복 부지회장에게는 7살 딸과 5살 아들이 있지만 81일째 아이들 얼굴을 쓰다듬어주지 못했다. 그가 있는 곳은 경기 평택시 쌍용자동차 공장 앞 송전탑. 15만 4000볼트의 전류가 흐르는 곳이다.

한번은 부인이 아이들과 함께 송전탑 먼발치까지 와서 손을 흔들어줬다. 그는 바람에 휘청거리는 송판 위에 서서 아이들을 바라봤다. "아빠가 보고 싶다"며 우는 모습에 그의 마음도 흔들렸다고 한다. 그 뒤로 아이들은 오지 않았다.

그는 2009년 쌍용차 정리해고 사태로 해고된 비정규직 노동자다. 그가 원하는 건 복직과 정규직 전환 그리고 쌍용차 국정조사다. 얼마 전 무급휴직자 455명이 복귀하게 됐지만 여전히 201명은 해고된 상태로 남아있다. 그동안 불거져온 회사의 회계조작도 풀어야할 문제다. 하지만 그의 진짜 소원은 바로 이거다.

"개인적인 소원은 가족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거예요. 아내가 차려준 밥 먹으면서 즐겁게 설 연휴를 보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습니다."

[홍종인 유성기업 해고자] "설도 설이지만... 오는 15일은 초등학생 아들 졸업식"

홍종인 금속노조 유성기업 지회장
ⓒ 충남시사 이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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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인 금속노조 유성기업 지회장은 14살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 뿐"이다. 올해 중학생이 되는 아들은 오는 15일 초등학교 졸업식을 치르지만, 아버지인 그는 졸업식에 가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아버지로서 아들 졸업식에 참석해 사진이라도 같이 찍고 싶죠. 그런데 당장 설날에 아들이랑 떡국 먹는 일도 힘든데요."

그는 충남 아산시 유성기업 인근 자동차전용도로 굴다리 난간에 움막을 매달고 고공 농성 중이다. 그는 2011년 노조파업에 대한 유성기업의 직장폐쇄로 거리에 내몰렸고, 지난해 10월 21일부터 회사의 사태 해결을 요구하며 고공 농성을 시작했다. 8일로 111일째가 됐다. 이번 설 역시 한 사람 누울 정도 크기의 움막에서 버텨야 한다.

그가 처음 굴다리 난간 위에 올랐을 때, 그 모습을 본 아들은 많이 울었다고 한다. 세 달이 훌쩍 지났는데도 아들의 눈물샘은 마를 날이 없다. 설날 때 손에 용돈이라도 쥐어주며 마음을 달래주고 싶지만, 그의 몸은 굴다리 난간 위 움막에서 움직일 수 없다.

그는 오늘도 "아버지 노릇을 할 수 있는 날"을 꿈꾸며 하루를 마감한다.

[오수영 재능교육 해고자] 난간 없는 성당 위에서도 시어머니 걱정

전국학습지산업노동조합 재능교육지부 소속 해고노동자인 여민희(41)씨와 오수영(40)씨가 6일 서울 종로구 혜화동 재능교육 본사 맞은편 혜화동성당 종탑에 올라가 해고자 전원 복직과 단체협약 원상회복을 요구하며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오수영씨가 재능교육 본사 간판을 배경으로 서 있다.
ⓒ 이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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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수영씨는 남편과 함께 70세 넘은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아왔다. 매년 설 연휴 때마다 친척들이 그의 집에 찾아왔다. 오씨는 시어머니를 도와 전을 부치고 차례상을 차렸다.

하지만 올해에는 시어머니 혼자 제수음식을 준비해야 한다. 재능교육 해고 노동자인 그는 지난 6일부터 동료 해고 노동자와 함께 서울 종로 재능교육 본사 건너편 헤화동 성당 종탑에서 고공 농성에 돌입했다.

"시어머니한테는 아들만 셋이에요. 제대로 된 음식을 만들 줄 아는 사람은 저밖에 없는데…."

전국학습지산업노동조합 재능교육지부(이하 재능교육노조)의 전임자로 활동하던 오씨는 2008년 해고됐다. '노조 활동을 그만 두고 업무에 복귀하라'는 회사의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서울행정법원은 지난해 11월 "재능교육 학습지 교사들에 대한 계약해지는 무효"라고 판결했지만 오씨는 여전히 복직되지 않고 있다. 그가 성당 종탑에 올라간 이유다.

"가족이 그립지만 해고자 복직과 노동조합 인정이 이뤄질 때까지 내려오지 않겠다"는 오씨. 그는 이번 설날을 높이 20m 너비 약 30m²의 난간 없는 종탑에서 맞고, 그의 시어머니는 혼자 제수 음식을 준비해야 한다.

[김재주 택시노동자] 33m 조명탑에 있는 아들, 어머니는 언론 보고 알았다

김재주 공공운수노조 택시지부 천일교통 분회장이 손을 내밀어 인사를 하고 있다.
ⓒ 문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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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운수노조 택시지부 천일교통 분회장인 김재주씨의 어머니는 얼마 전에야 아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았다고 한다. 그것도 언론 보도를 통해서다. 8일 현재 아들은 전주 야구장의 33m 조명탑에서 36일째 지내고 있다. 한 달이 넘도록 까맣게 모르고 있던 것이다.

택시노동자였던 김 분회장은 2011년 11월 5일 천일교통에서 해고됐다. "민주노총 노조를 세우면서 회사 측의 노조탄압이 시작됐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김씨는 고용노동부 노동위원회의 복직명령을 받았는데도 6개월 넘게 복직을 거부하는 회사에 항의하기 위해 지난 1월 4일 조명탑 위에 올랐다.

김 분회장의 어머니는 "설날에도 그 모진 곳에서 지내야 하냐"며 걱정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들은 오히려 어머니가 걱정된다.

"어머니가 전주에서 혼자 사세요. 이번 설날에 자식도 못보고 혼자 계셔야 하잖아요. 얼른 복직돼서 좋은 모습으로 어머니를 찾아뵙고 싶습니다."

[천의봉 현대차 사내하청 노동자] 설날 소원이 뭐냐는 질문도 그에겐 사치였다

현대차 울산공장 앞 송전탑 위에서 농성 중인 현대차 사내하청 노동자 천의봉씨.
ⓒ 박석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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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하도 불어서 체온이 많이 떨어졌어요. 바람이 세니까 '공중부양' 할 때도 있고요(웃음). 그래도 여기 있은 시간이 오래되니까 몸이 좀 적응이 되는 것 같네요. 설 연휴 한파라고 해도 어떻게든 버틸 수 있겠죠."

천의봉씨의 목소리는 덤덤했다. 그가 있는 곳은 울산 현대자동차 공장 주차장 안 송전탑이다. 15만 볼트의 고압 전류가 흐르는 50m 높이의 송전탑 중간에서 생활 중이다. 한 칸 쪽방보다 좁은 간이 천막으로 올 겨울을 버티고 있다. 영하의 매서운 추위를 막아줄 수단은 개인용 침낭과 손난로가 전부다.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인 그가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이곳에 올라온 지 벌써 115일째가 됐다. 명절 때 고향인 경북 의성으로 가고 싶지만, 현대차 비정규직 문제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아 "들뜬 마음도 가라앉았다"는 천씨. 그는 "갑갑하지만 땅에서 함께 농성을 돕는 동료들이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으려고 한다"고 체념했다.

'설날 소원이 뭐냐'고 묻자, 천씨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일단 땅에 발을 딛고 서야 무슨 소원이라도 빌지 않겠냐"는 것이다. 설이면 흔히 하는 질문조차 그에게는 사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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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PC통신…"우린 신인류였어"

[방담] PC통신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나

김봉규 기자(정리)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02-10 오전 2:02:42

 

1990년대에 PC통신으로 출발했던 웹 사이트 나우누리가 지난달 31일 문을 닫았다. 급작스러운 소식은 아니었다. 지난해 말 야후 코리아가 철수했고, 초기 온라인 시대의 대표 사이트였던 프리챌도 저물었다. 월드와이드웹(WWW) 시대 이전의 온라인 서비스였던 PC통신은 대부분의 누리꾼에게 이미 추억으로 남아 있는 상태였다. 나우누리의 종료 선언은 그 희미해지는 추억을 다시 상기시키는 계기였다.
<프레시안> 기자들도 감회에 젖었다. 인터넷 세계로 넘어오면서 자연스럽게 잊혔던 PC통신의 추억을 다시 곱씹자는 취지로 기자 4명이 모여 수다를 떨었다. 독자들도 설 연휴에 또래 친척과 모여 앉아 PC통신을 추억해보는 건 어떨까. <편집자>


PC통신 뭐 했어요?
 

*참가자: 이텔(37세, 여), 누리(34세, 남), 리안(30세, 남), 니텔(27세, 여)


리안: 지난 일요일(3일) <EBS>에서 심야에 방영하는 '한국영화특선'에 <접속>이 나왔어요.

일동: 아~.

누리: <접속>이 PC통신으로 만나는 이야기였나?

이텔: 네. 유니텔이었어요.
 

▲ 1997년 개봉됐던 영화 <접속>. 현대의 소외된 두 남녀를 이어주던 끈은 당시 청년층을 중심으로 퍼져 나갔던 'PC통신'이었다.

리안:

(나우누리 소식과 관련해) 의도가 있는 편성이라고 보이는데. 먼저, 각자 PC통신을 언제 접했었나요?

이텔: 저는 1996년 말에 처음 접했어요.

리안: 하이텔?

이텔: 아니. PC통신의 초창기여서 큰 규모가 아니라 BBS.

리안: 사설 BBS라고 부르던?

이텔: 응. 참세상이라고…진보네트워크의 PC통신 버전인데, 같이 놀던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접하게 됐고. 당시 접속해서 'all'이라는 명령어를 치면 접속한 사람들이 다 보였어요. 작은 규모라 많지 않았지. 그래서 접속한 사람들에게 말 걸고 놀았는데, 그 당시 문화진보운동 쪽 사람들이 많아서 정보도 많이 접했죠.

그러다가 큰물로 가고 싶어져서 처음 시작한 게 유니텔. 당시
이미지가 '쌔끈'했거든. 하이텔이나 나우누리는 벌써 낡은 느낌이 있었는데 유니텔은 신세대를 겨냥해 만들었다는 느낌이었죠. 나우누리도 동아리 활동 때문에 했고, 나중에 하이텔도 했고.

누리: 저는 1997년 고등학교 3학년 때 처음 했어요.

이텔: 고3 때?

누리: 수능 압박을 별로 안 받아서….

리안: 어느 서비스?

누리: PC통신은 닫힌 곳이었잖아요. 가입을 해도 다른 PC통신은 못하고. 뭐 할까 하면서 보니 천리안은 확실히 '노땅'들이 사용하는 이미지였고, 하이텔도 마찬가지. 나우누리, 유니텔 둘 중 하나였는데 고민하다가 나우누리가 갈 만한 데가 더 많다고 해서 들어갔죠. 그 때는 열심히 안 했고 대학 가서 죽어라 했죠.

니텔: 1998~1999년 사이에 시작했어요. 그 '삐삐삐~'(☞듣기) 하는 소리 나던…(누리: 모뎀) 네, 모뎀. 하는 동안에는 전화도 못 받고. 중학교 2학년 때 한 아이돌 그룹을 좋아해서 하이텔 연예 게시판과 그 그룹 팬클럽 헤비유저가 됐죠. 그러다 사람들이랑 채팅하고 친해지면서 나중에는 우리끼리 따로 비밀 소모임을 만들어서 활동했어요. '정모' 같은 거 하면 나중에 인물 게시판에 '인평'(인물 평가)도 올라오고…. 심지어 그곳에서 알게 된 언니 때문에 '티티마' 강세미 팬클럽 시삽까지 했고(웃음).

누리: 티티마, 정말 추억의 이름이다. 시삽이라는 말도….

리안: 저는 1996년에 처음 접했고, 나우누리를 썼죠. ID라는 말의 개념 자체를 잘 몰라서 제 이름 이니셜에 살던 집 호수를 붙여서 만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누리: 전 누나 ID를 썼는데 '상상의별'이었어요(일동 폭소).

리안: 당시 ID 길이가 한글 4글자까지 가능했던 것 같네요.

일동: 맞아, 맞아.

리안: 하이텔은 게스트 ID로 로그인하면 판타지 소설 등이 연재되는 게시판에 접근이 가능했죠. 이영도가 판타지 소설 <드래곤 라자>를 연재하던 그 게시판, 거기에서 갈무리를….

일동: 갈무리…흐흐흐.

리안: 갈무리 명령어가 'pr'이었나…. 각설하고, 다들 PC통신을 하던 장소는요?

이텔: 집에서 방해받지 않는 밤 시간. 학교는 PC실 줄이 너무 기니까. 오래 쓰면 눈치 보이고.

누리: 대학 입학한 후에는 자취방에서 주로 사용했죠. 1학년 때 필수교양수업 하나가 오전 8시에 시작했는데, 알잖아요? 대학교 1학년 때 얼마나 인간이 망가지는지? 그 수업 들어간단 핑계로 밤새 PC통신 하고, 결국 뻗어서 학교도 안 가고…. 나뿐만 아니었어, 대학교 1학년 때만 해도 사람들이 PC실에서 그 '삐삐삐~' 하면서 파란 화면을 쳐다보고 있었죠. 뒤에는 프린트하려고 온 학생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그래서 문제 되기도 했고.

리안: 어릴 때라 집에서만 했는데, PC통신 중에는 전화가 통화 중이어서 많이 혼나곤 했죠.

니텔: 그래서 핑계도 만들었죠. 사실은 '팬픽'을 쓰는데 부모님에게 '소설을 쓴다, 나의 미래를 위해 투자하라'고(웃음). 그 뒤로는 안 혼났어요.

리안: (PC통신 에뮬레이터 프로그램) 이야기, 새롬데이타맨도 기억나세요?

누리: PC통신 확장기가 IMF 환란 때와 겹치잖아요, 그때 새롬데이타맨 주가(새롬기술)가 삼성 주가보다 더 올랐어요. 시가총액이 삼성보다 더 오른 거예요. 김대중 정부도 세금 들여서 땅 까고 인터넷망 깔던 때였고. 젊은 층 상대로 PC통신이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니 새롬데이타맨이 나스닥에도 상장한다느니 별 기사가 다 나왔는데, 우리나라 주식 거품 역사에서 한 획을 그었을 거예요. 삼성전자를 넘었으니.

메탈리카가 센가, 메가데스가 센가?

이텔: 당시 PC통신 진입장벽 중에 전화비가 있었나요?

리안: 모뎀 가격도 비쌌죠. 저는 십만 원을 훌쩍 넘게 주고 샀던 기억이 나네요.

누리: 가입비도 내야 했고.

리안: 나우누리가 1만4000원 정도 했었던 것 같네요.

누리: 하이텔이 9900원 정도였고, 천리안이 제일 비쌌었죠.

리안: 신기하다고 해야 할까, 현재 집에서 인터넷을 3년 약정으로 월 2만 원 정도에 쓰고 있는데, 당시 이용료와 전화비를 합치면….

누리: 더 비싸죠. 물가 상승을 감안 안 해도. 당시엔 386DX 컴퓨터가 600만 원에 나오고 하던 시절이었으니. 접하기 어려운 고급 문화였던 셈이죠.
 

▲ 요즘도 회자되는 1990년대 컴퓨터 광고.


이텔: 20대 이상에서 문화가 됐다고 보는 게 맞죠.

누리: (고등학교) 반에서는 친구들과 PC통신 이야기한 적이 별로 없으니까.

리안: PC통신을 접하고 느낀 충격은 '아 이렇게 고수가 많았구나'라는 것. 지금보다 더 강하게 느꼈죠. 음악을 좋아했는데 당시 잡지에서 전문가들이 쓰는 글만 보다가 PC통신에 들어가니 '지미 헨드릭스가 최고인가, 잉베이 맘스틴이 최고인가' 하고 싸우고 있더라고요. 글 쓰는 사람들이 모두 표현력도 좋고….

누리: PC통신 문화라는 게 신문, 언론의 권력이 낮아지게 된 첫 시대를 연 게 아니었나 싶어요. 재야의 고수들이 출몰한. <퇴마록> 열풍이 대표적이고. 재야의 고수들이 자신의 존재를 사방에 알리기 시작했고, 그걸 바탕으로 기성 언론이 따라가지 못하는 동시대의 이야기를 우리의 언어로 하기 시작했고. 거기에 사람들이 열광하면서 새로운 정보들이 유통되기 시작했고. 그 세대가 인터넷에서도 <딴지일보> 식으로 넘어온 거잖아요.

PC통신이 가장 위력을 떨친 것 중 음악이 있는데, 누구나 인정하는 PC통신 동호회로 하이텔의 '블렉스', 나우누리의 'SNP', '메탈체인' 등이 있었죠. 블렉스, SNP는 힙합 동호회였는데, 당시 거기 있던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데모 테이프 만들어 공유하다가 지금 다 현업 뮤지션으로 활동해요. 면면을 보면 블렉스 출신으로 가리온, 주석이 있고 SNP에서는 버벌진트, 휘성이 다 그쪽 사람들이에요. 말 그대로 우리나라 힙합 문화를 만든 곳이죠. 언더그라운드 힙합. 메탈체인 쪽 대표 뮤지션으로는 오지은이나 김윤아가 있고.

리안: 방담 준비하면서 보니 델리스파이스는 하이텔 메탈동 소모임 '모소모'에서 활동했다고 하네요. 모던락 소모임이었던 모소모를 만든 사람이 언니네이발관의 이석원.

이텔: 홍대 언더문화 얘길 하기 시작한 게 1996년부터잖아요. 예전에 이석원 씨 인터뷰할 때 다른 뮤지션들한테도 물어본 게 있어요. 음악이라는 분야가 그런가, 기타를 사서 치면 되지만 영화 같은 경우는 당시로선 엄청난 크기의 카메라가 필요하니 영화 동호회가 있어도 영화를 찍지는 않았어요. 근데 모소모 이런 데 모인 사람들은 그 전까지는 음악을 하지도 않았지만 어릴 때 피아노 학원에서 배운 것 말고는 딱히 음악적 훈련을 받지 않았던 친구가 키보드연주하기 시작하고, 이석원은 (음악 한다고) 거짓말하다가 실제로 밴드를 만들었고, 이석원과 친하던 고등학생이 그 밴드에 들어가 기타를 치고.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물어봐도 '만날 만나는 사람이 이 사람들이고 이 사람들이랑 음악 얘기하다 보니 이렇게 됐다'고만 하더라고요.

누리: 우리나라 대중 문화, 개인의 취미 생활이 전혀 환영받지 못하던 시대였죠. 공부·돈 아니면 안 되는 사회에서 처음으로 개인의 문화가 소중하다는 걸 PC통신을 통해 사람들이 깨달은 거죠.

니텔: 우리가 좋아하던 1980년대 외국 뮤지션들을 보면 그냥 동네에서 만나서 차고에서 합주하다가 밴드 된 예가 많은데, 우리는 PC통신 이전까지는 그렇게 만날 수가 없었던 거죠.

누리: 우리에겐 그 차고 역할을 PC통신이 한 거고.

니텔: 도시에서 합주가 불가능한 사람들이 만나서 '찌질'대다 뭔가 하나 나오고 그런 거죠.

누리: 판타지 문학도 PC통신에서 나왔고.

이텔: 동호회라는 존재 자체가 획기적인 것 같아요. 지금 보면.

누리: 1990년대 문화 폭발 현상을 우리 세대가 이끈 거죠. 메탈체인에 가면 딴 곳에서는 안 하던 얘기를 우리 언어로 할 수 있었으니까. 메탈리카가 세니, 메가데스가 세니…정말 이런 유치한 논쟁을 각종 자료를 붙여가면서 주고받기 시작한 거죠. 모두 궁금한 거니까.

리안: 메탈체인에서 음악 한 곡을 내려받았었는데, 나중에 찾아봐도 시중 음반으로는 듣기 어려운 일종의 희귀 버전이었어요. 지금도 갖고 있고. 지금과 비교해 PC통신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어도 집중력이 있다는 인상이 있었어요.

걔가 나우누리의 걔였어?

누리: 반대로 대중 문화를 향유하는 취미가 없던 사람들도 대학교에 처음 가거나 할 때 신입생 '번개' 같은 걸 하는 통로로 PC통신을 처음 접했죠. 저도 PC통신으로 동창 만났었고.

니텔: 지금도 존재하는 특정 인간형의 습관이 PC통신 시절 형성되었다고 봐요. 제가 경험한 건 팬덤 문화니까 거기에 국한해 얘기하자면 전통적인 팬덤, 그러니까 JYJ 같은 아이돌 팬덤뿐 아니라 가령 일본 애니메이션 팬이나 영화 <어벤저스>를 가지고 동인지를 생산하는 문화 같은 게 있잖아요. 어떤 것을 매우 좋아해서 '팬질'을 하고, 그게 '덕질'로 이어지고, 그게 2차 창작으로 이어지는. 그런 세계가 있는데 PC통신 때 봤던 게 그대로 이어지고 규모나 질은 더 커진 것 같아요. 주로 여성들의 세계인데….

리안: 동인 문화 같은?

니텔: 그렇지. 현재 많은 '덕질' 혹은 '2차 창작' 하고 있는 여성들은 PC통신을 많이 했었고, 이것저것 건드려 온 계보가 있어요. 생각나는 건 소위 '팬 아트'인데, 좋아했던 아이돌 그룹 팬 내에서도 팬 아트를 잘 그리는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이 코믹월드 같은 데 나가기도 하고 그랬죠. 그런 사람들이 글 쓰면 같은 팬 입장인데도 환호하고. 정모 때도 인기 제일 많고.

이텔: '존잘'인데(웃음).

누리: 존잘?

이텔: '존나 잘 그린다'의 준말. (웃음)

니텔: 아직도 기억하는 ID가 있는데, 'OOO'님이 정말 잘 그렸는데…(일동 폭소). 나중에 인터넷에서 집요하게 검색해 보니 그 언니가 한예종(한국예술종합학교) 애니메이션과에 들어갔더라고요(일동: 아~).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전부 아이돌 그룹을 좋아해 모였는데, 그 안에서 인기인과 팬이 또 형성되는 거죠. 그림 잘 그리고 소설 잘 쓴다는 이유로 어떤 ID를 신봉하는 사람이 생기고, 당사자도 2차 창작으로 어딘가에서 암약하고 있고, 21세기 여성들의 규방 문화라고 해야 할지(웃음). PC통신이 그 원류가 아닌가 싶어요. 그 정서는 지금도 인터넷 곳곳, 동인지가 판매되는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고.

이텔: 지금 트위터에서 '박원순이 나한테 멘션했다' 이러는 것처럼, PC통신은 우리가 생각하는 유명 인사와 말을 섞을 수 있는 첫 번째 창구였던 것 같아요. 저의 경우엔 당시 '신세대 작가'라는 명칭으로 수식되던 백민석 씨에 대한 추억이 있어요. <헤이, 우리 소풍간다>라는 소설을 읽고 하이텔 문학동에 감상문을 괴발개발 써서 올렸죠. 그런데 백민석 씨가 '감상문 잘 봤다. 고맙다'라는 메일을 보냈어요. 그날 밤 설레서 잠도 못 잤어요. 그런 식의 동경하던 사람들과 말을 섞게 되고, 만나기도 하고, 그런 가능성 때문에 팬덤과는 또 다른 의미가 있었어요.

니텔: 다르게 얘기해보면 그 전까지는 텔레비전에 나오는 사람만 팬클럽을 이끌 수 있고 소위 셀레브리티(celebrity)의 권위를 가질 수 있었잖아요. 그런데 지금 트위터를 보면 바깥에선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사람이 파워 트위터리언이 되어 있어요. PC통신에서도 현실 직함은 백수인데 뭐 하나를 잘한다는 이유로 재야의 고수가 되고 팬을 거느릴 수 있었죠. 그런 '평범한 ID님의 셀레브리티 화(化)' 문화의 시작점이 PC통신이었던 거죠.

이텔: 적어도 동네 노는 형은 될 수 있었던.

니텔: 10년 뒤에 '걔가 나우누리의 걔였어?' 하는(웃음).

누리: 궁금해서 방금 트위터에서 PC통신을 검색해봤는데, 우리가 빼먹은 추억이 있다. PC통신 들어가면 인사가 당시 '방가방가', '하이룽'….

이텔: 안냐세요~.

니텔: 리하이~.

리안: 리하이?

니텔: 채팅방에서 튕겼다가 다시 들어올 때. re-hi.

인터넷, 파란 화면도 아닌데 왜 공짜지?

리안: PC통신을 언제부터 잊었나요?

누리: 전성기가 5년도 못 갔으니까….

리안: 당시 모뎀으로 인터넷을 처음 했는데, 넷스케이프를 통해 천천히 로딩되는 야후 초기화면을 처음 봤을 때 충격이 굉장했죠.

니텔: 당시엔 인터넷 검색창에 뭘 쳐도 사용하는 사람들이 없으니 결과가 며칠 동안 똑같고 그랬어요. 그래도 뭔가 정보를 얻고 싶어서 계속 썼고.

리안: 저는 '다운족'이었는데 고속 인터넷망이 뚫리고 인터넷에 '와레즈'(warez) 사이트 같은 게 생기면서 PC통신 자료실과 멀어지게 된 것 같아요. 음악 같은 경우에도 소리바다가 생겼었고.

누리: PC통신 단절은 군대에 가면서 자연스럽게 이뤄졌어요. 군대 가기 전에는 PC방 가면 한쪽에서는 스타크래프트 하고 한쪽에는 '삐삐삐~'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듬해 휴가를 나와서 PC방에 갔더니 친구들이 '스카이러브'라는 채팅 사이트를 가르쳐줬죠. 전 그걸 새로운 PC통신으로 알고 있었어요. 화면이 깔끔해서 '엄청 비싸겠다'고 생각했고. 그런데 가입비도 안 내더라고요. 그냥 하면 된다는 거예요. 공짜라는 개념 때문에 처음에는 충격을 받았어요. '파란 화면도 아닌데 왜 공짜지' 하는. 적응하는 데 한참 걸렸던 것 같아요.

리안: 고속 인터넷을 쓰면서 비용이 더 늘어났는데, 나우누리만 쓰는 데 1만4000원씩 주기가 아까워지기 시작했죠.

이텔: 저의 경우에는 직장에 들어가 바빠지면서 멀리하기 시작했죠. PC통신은 '잉여'들의 문화였잖아요. 시간이 있으니 정보를 모아 '자랑질'하는 게 PC통신이었는데, 바빠지니까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또 PC통신에서 함께 놀던 또래들이 일제히 사회생활을 시작했어요. 영화동에서 놀던 사람은 현장 가서 제작부에 들어가고, 누구는 또 영화 잡지 붐이 일면서 웹진이 생기니 그쪽으로 흡수가 되고, 음악 소모임 하던 애들도 음반회사 들어가고. 취미를 직업의 영역으로 옮기는 사람들이 늘어난 거죠. 일터에서 만나면 되니까 PC통신을 굳이 할 이유가 없고. 한 세대가 공통적으로 PC통신을 하다가 일시에 딱 끊긴 거 같아요.

우린 신인류였어

리안: 현재로 돌아와 봅시다. 돌이켜보면 2000년대 전반기는 인터넷 확장기이고, 후반기에는 일종의 '대세'가 나타났던 시절이라고 봐도 될까요? 검색은 구글, 포털은 네이버, '잉여 문화'는 디시인사이드, 정부 비판하는 사람들은 특정 사이트로 몰리고, 트위터가 출연하는 등 SNS가 현재 인터넷 문화의 가장 큰 특징이 되기도 했죠. 오늘 방담 목적이 PC통신의 향수를 나누는 것이지만요, 현재 인터넷과 PC통신의 대비를 통해 우리가 특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요?

니텔: PC통신에서 인터넷으로 옮겨간 것은 기술 발전과 시대상에 맞춰가는 문제라고 봐요. PC통신에서 놀라웠던 것들이 더는 놀랍지 않고, 사실 PC통신을 그 당시 하지 않던 사람들도 2000년대에 들어와 대부분 인터넷 사용을 했단 말이죠. 자신만의 습관을 터득하고 자신만의 정보 습득 능력, 사람들을 만나는 걸 선택할 수 있게 된 거죠. 그걸 단순히 'PC통신 시절엔 우리만의 문화였는데 아쉽다'거나 '지금은 재밌는 게 없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그저 시대 변화에 따라 이런 문화를 향유하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많아진 거죠.

누리: 나우누리 문 닫는다는 기사를 보고 사람들이 '그때가 좋았지'라고 하지만 당시만 해도 PC통신의 언어 파괴 현상 등에 대한 비판도 많았어요.

이텔: 옛날 신문 보면 분명 나올 거야.
 

PC대화 '문법 파괴' 확산

컴퓨터통신이 새로운 대중매체로 빠르게 확산되면서 컴퓨터통신 용어의 '문법 파괴'가 새로운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13일 정보통신부에 따르면 96년 7월 말 현재 컴퓨터통신 이용자는 270만 명을 넘어섰으며, 남북한 언어의 이질화에 못지않게 '미디어세대' 간 언어의 장벽도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어솨여(어서와요), 안냐세요(안녕하세요), 방가(반가와요), 설사라요(서울 살아요), 잼(재미있었어요), 그럼20000(그럼 이만), 담에 바여(다음에 봐요)" 등을 볼 수 있다. 컴퓨터통신 대화방에 처음 들어간 사람들은 '이게 무슨 소린가' 의아해 하지만, 청소년들 사이에선 이미 일상용어로 자리 잡은 컴퓨터식 대화법이다. 이런 표현법들은 컴퓨터 통신이 지닌 쌍방향커뮤니케이션 기능에 힘입어 급속하게 전파되고 있다. (<한겨레> 1996년 8월 14일자)


누리: X세대가 삐삐로 통일되는 세대였는데, <동아일보>가 당시 1면 하단 기사로 'Y세대'라는 개념을 내세워 1979~1981년생만을 따로 묶어보려고 하기도 했어요. 그 세대의 특성으로 PC통신을 하고 힙합 바지를 입고 HOT를 좋아하고….

니텔: 트위터에서 이런 말을 본 적이 있어요. "지금 이 시대의 모든 매체는 인터넷의 부분집합"이다. 방송을 예로 들면, 과거엔 방송 자체로 권력을 가졌지만 지금은 그렇지가 않아요. 다시 보고 싶어도 처음 띄우는 건 검색창이고, '방송 반응' 즉 검색어 같은 게 없으면 권위가 휴지 조각이에요. 모든 자료가 검색어 망의 부분집합이 되어버렸죠. 세계가 인터넷이 되어버렸다는 느낌인데.

PC통신과 인터넷은 다르지만, 어쨌든 뭔가 화면 속에서 생활을 영위하고 사람을 아이디로 접하고 이런 공통점을 생각해 보면, 과거엔 일부의 습관·생활이었던 게 지금은 모든 사람의 습관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그 농도는 희석되었겠지만 어쨌든 지금 인터넷 문법을 외면한 채 살아가는 사람은 없거든요. 그래서 PC통신에 대한 향수를 갖는다는 건 그런 습관을 소수만 누렸던 시절에 대한 향수가 아닐까요? 지금은 다 인터넷형 인간이지만, 그때는 약간의 특권의식과 무언가를 선도한다는 인식이 있지 않았나 싶어요.

이텔: PC통신을 했던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나를 그리워하는 게 더 맞는다고 봐요. <접속> 같은 영화가 어마어마한 흥행을 기록했고 삽입곡도 확 뜨고 했었는데, 영화에 나온 신세대 사랑법, 너무 고독해서 하루키적 인간형이라고 내세워져 컴퓨터로만 대화하던 두 남녀가 막판에 만난다는 그 러브스토리로 지금 세대를 분석하려고 했단 말이죠. 정말 그 시대의 우리는 '신인류'였던 겁니다!(웃음) 무언가 새롭고, 예쁘고, 신선한 감수성을 우리가 독차지했던 시절이었으니. 그때를 그리워하는….

리안: <접속> 얘기도 다시 나오고, 수미쌍관의 멋진 방담이 됐다고 봅니다(일동 박수). 어떻게 끝낼지 계속 고민이었는데 방금 나온 '그 시대의 우리는 신인류'로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이텔: 아뿔싸.

누리: 20년 뒤에 지금 '초딩'들도 얘기할 거야. "그땐 아이폰 이런 걸 들고 통신했어" 그러면서.

니텔: 다들 자신이 첫 취향을 형성하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거죠.

누리: 그 말 좋다. 첫 취향을 형성하던 도구로서 PC통신.

이텔: 제가 영화 좋아하는 거 엄마가 진짜 싫어했거든요. 항상 구박만 받았단 말이야. 내 취향에 대해.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거 가지고 똑같은 인간들이 모여서 밤새도록 채팅하고, 24시간 영화 얘기만 하고, 거기서 비롯되는 흥분이라는 게…. 취향이 그렇게 형성이 되고 자기 인생의 경로를 결정짓는 순간이 그때였으니.

 
 
 

 

/김봉규 기자(정리)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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