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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물질로 가득 찬 컵 속의 아이들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21/03/16 10:57
  • 수정일
    2021/03/16 10:57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태반에서 발견된 마이크로플라스틱
 
김종익 | 2021-03-15 12:41:05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화학물질로 가득 찬 컵 속의 아이들

모리 치사토森千里
의사. 지바 대학 예방의학센터장.
미국 국립환경보건과학원 박사 후 과정을 거쳐
태아기 복합 노출에 의한 출생 후 건강 영향에 관해 연구.

도다카 에미코戶高惠美子
지바 대학 예방의학센터 교수.
환경 오염이 인간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관해 연구. WHO 컨설턴트.

 

■ 태반에서 발견된 마이크로플라스틱

2020년 12월, 이탈리아 연구자 팀으로부터 출산 후 태반에서 처음으로 마이크로플라스틱이 검출된 사실이 보고되었다. 연구 대상이 되었던 태반은 6명분 미만이었지만, 이제까지 해양 포유류 체내와 인간 내장에서 검출되었다고 보고된 마이크로플라스틱이, 마침내 인간의 태반에서도 검출되었다는 의미에서 중요한 보고였다.

마이크로플라스틱은 직경 5mm 정도 이하의 미세한 플라스틱으로, 형태나 색은 마이크로플라스틱의 원래 물질보다 다양하다. 플라스틱 폐기물 문제는 이번 호에 실린 다가다 히데시게高田秀重의 논문 「플라스틱 의존 사회로부터 탈각」에서 상세하게 다뤄지고 있는데, 이번 이탈리아 연구 그룹에서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6명분의 태반에서 12개의 마이크로플라스틱이 발견되었다.

태반은, 어머니와 태아 쪽으로 이루어진 조직이다. 양자 간에는 틈새가 있으며, 거기는 어머니의 혈액으로 채워져 있는 한편, 태아 쪽의 혈액도 모세 혈관을 흘러 이 틈새(血管腔)에 도달한다. 다만, 태아 쪽 혈액은 모세 혈관의 내피세포 등에 의해 떨어져 있어 어머니 혈액과 직접 서로 섞이는 일은 거의 없다.

이번 4명분의 태아에서 발견된 마이크로플라스틱 12개의 내역은, 어머니 쪽 태반에서 4개, 태아 쪽이 5개, 그 중간이 3개이며, 크기는 모든 0.01mm 이하로 그 가운데 2개는 0.005mm 이하였다. 모두 색이 착색되어 있는데, 오렌지색, 푸른색, 짙은 남색, 빨간색, 자색, 핑크색이며, 성분은 4개가 polypropylene으로 특정되었다. 이것들의 사용 용도는, 소재로서의 플라스틱 그 자체만이 아니라, 착색료, 코팅제, 접착제, scrub 세안제, 입술연지, 마스카라, 아이섀도 등 화장품, 향료와 냄새 제거 스프레이 등에 포함되는 것이며, 현대의 일상생활에서는 노출을 피할 수 없는 것이 많다.

이것들이 어머니의 혈중에 들어간 경로는, 음식에 의한 장 경유, 혹은 호흡에 의한 폐 경유, 또한 그 양쪽일 가능성이 있다.

마이크로플라스틱에 의한 바다 오염은 몇 년 전부터 보고되었다. 어느 해안에서나 셀 수 없을 정도로 마이크로플라스틱이 발견된다. 조개류는 이 마이크로플라스틱을 집어먹고, 그 조개류를 인간이 먹는다. 체내에서 플라스틱에서 녹아 나오는 화학물질의 어떤 것은 몸속에 쌓이고, 어떤 것은 체외로 배출되어, 이것들도 최종적으로 바다로 흘러든다.

이번에 분석된 것은, 평균 600g인 태반의 매우 일부(약 20g)가 대상이었기 때문에, 태반 전체를 조사하면 더욱 다종다양한 마이크로플라스틱이 발견되었을 것이다.

논문의 저자들은, 이 마이크로플라스틱들에 의한 오염이 태아의 면역 기능과 건전한 발달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한다.

태아 쪽 태반에서 탯줄이 연장되어, 태아에 필요한 산소와 영양소 등이 모체에서 태아에게 공급되는데, 이번 조사 대상은 태아 쪽에서 연장된 탯줄이 아니어서 조사되지 않았다. 그래서 태아의 태반까지는 존재가 판명된 마이크로플라스틱이 태아의 체내에까지 들어갔는지 어떤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한층 미세한 입자라면 혈류를 타고 태아로 운반되는 것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이 마이크로플라스틱들로부터 녹아 나오는 다종다양한 인공 화학물질이 건강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 그 인과 관계를 밝히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 멈추지 않는 플라스틱 오염

마이크로플라스틱은, 세안제와 크림 치약 등에 scrub劑로 사용되는 microbeads[연마제나 가루 치약 등에 사용되는 미세한 플라스틱 입자], 제품의 원료로 쓰이는 resin pellet[플라스틱 제품의 중간 재료] 등 원래 작은 것이어서, 다종다양한 플라스틱 제품이 자외선에 의한 劣化와 물리적인 힘으로 가늘게 부서진 것 등 유래는 다양하다. 플라스틱은 싸고 형체를 만들기도 쉽고, 사용 용도가 제한 없이 많아 일상생활에 필요불가결한 것에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현재는, 플라스틱이 사용되지 않는 일용품을 찾는 편이 오히려 어려울지도 모른다. 만약 플라스틱을 전혀 사용하지 않게 되면, 양복도 집도 차도, 전차도 비행기도, 가구도 인테리어 용품도, 사무용품도 문방구도, 스마트폰도 모두 만들 수 없게 될까, 선택의 폭이 극도로 작아진다.

이리하여 플라스틱 연간 생산량은 과거 50년에 20배 증가했다. 일본은 플라스틱 생산량에서 세계 3위, 1인당 용기 포장 플라스틱 쓰레기 발생량은 미국에 이어 세계 2위다.

2020년 12월, 이스라엘 연구팀이, 인간이 이제까지 만든 콘크리트와 플라스틱 등의 총량이 1조 톤 이상이고, 삼림과 식물·동물 등의 총량보다도 많다고 시험적으로 계산한 논문을 「Nature지」에 발표했다. 인공물은 20년마다 거의 배로 증가하는데, 이 상태로 가면 2040년에는 3조 톤에 달하게 된다고 예상한다.

인공물 가운데, 플라스틱은 2020년까지 85억 톤이 생산되었다고 한다. 그 가운데 이미 세계의 바다에 존재하는 플라스틱 쓰레기는 1억5천만 톤, 나아가 매년 800만 톤이 바다에 유입된다고 추정되고 있다.

해양 플라스틱 문제 해결에는, 이미 바다에 떠다니는 쓰레기를 회수하는 방법을 개발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이 이상 바다로 유출되지 않게 하는 대책이 급선무다.

일본에서는, 용기 재활용법이 1995년에 제정되어, 용기와 포장 목적으로 사용된 후의 플라스틱을 회수하여, 재활용하는 제도가 생겼다. 그러나 플라스틱이면서도 용기·포장 용도로 사용되지 않으면 이 법률에서는 재활용 대상이 안 된다. 이제까지 폐플라스틱의 대부분이 ‘資源’으로 아시아 개발도상국에 수출되었지만, 이 국가들도 환경에 대한 배려에서 수입을 중지하게 되어, 앞으로 국내에서 어떻게든 처리할 수밖에 없다.

세계자연보호기금WWF은, ‘플라스틱 감축 사회’를 목표로 하여, 다른 환경 보호 단체들과 함께 공동으로 2018년 10월, “2030년까지 쓰고 버리는 플라스틱 사용을 50% 이상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한다” 등의 목표를 비롯한 사회 구조 변혁을 정부에 제언했다. 플라스틱의 생산, 사용, 국제 거래량을 대폭 감축하는 2030년까지의 목표와 로드맵을 제시하고, 국제적 리더십을 가지고 솔선해서 보일 것을 요구했다.

■ 유기 불소 화합물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

현대인을 둘러싼 오염 물질은 물론 플라스틱만이 아니다.

요 몇 해, 모든 곳에서 검출되고, 야생 생물과 인간도 오염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된 유기 불소 화합물, 과불화옥테인술폰산PFAS류는, 그 극도로 어려운 분해성分解性 때문에 ‘영원한 화학물질’로 불린다.

PFAS는, 종래의 화학물질 오염 대책을 근본부터 되묻게 하는 종류의 물질군이다. 불소 화합물과 탄소 사슬로 이루어져 매우 분해하기 어렵고, 물에도 기름에도 용해되지 않는다.

1938년, 미국 듀퐁사에서 우연히 만들어져, 나중에 ‘테플론Teflon’[테트라플루오로에틸렌의 중합으로 만들어진 합성수지]이라는 상품명으로 알려지게 된 물질 ‘폴리테트라플루오로에틸렌polytetrafluoroethylene’, 그 후 3M사 개발 ‘과불화옥탄산perfluorooctanoic acid(PFOA)’, 마찬가지로 3M사가 개발한 ‘퍼플루오로옥탄술폰산perfluorooctanesulfonic acid(PFOS, 상품명 「Scotchguard」가 유명하다)’ 등이 선구적 물질이며, 현재로는 용도에 응해 약 4,700종이 상품화되어 세계 전역에서 사용된다.

모두 휘발성, 내열성, 撥水性[직물 따위의 표면에 물이 잘 스며들지 않는 성질], 撥油性[표면을 유기 불소계 화합물로 처리하여 오염원이 스며들지 못하고 튕겨 나가게 하는 성질]에 뛰어난 특성이 있으며, 금속과 플라스틱의 표면 처리, 세정제와 농약, 塗料 등 다방면에 사용된다. 이런 특성 때문에 눌어붙지 않는 프라이팬, 밥이 달라붙지 않는 밥솥 안쪽, 햄버거 등 기름이 밴 물건을 넣는 식품 포장, 전차와 자동차 등의 좌석, 카펫 등 다양한 용도에 사용이 확대되었다. 이렇게 보면, 현대 생활에 빼놓을 수 없는 물질인 것을 알 수 있다.

최근, 저가 항공사 증가도 있어, 공항에서는 도착 비행기에서 승객이 내리자마자, 득달같이 다음 비행편의 승객이 올라탄다. 잘 더러워지지 않는 좌석 소재 개발도 이러한 단시간 비행편을 가능케 할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필자 가운데 한 명(도다카)이 탄 비행기가 난기류에 휩싸여, 서비스되지 않았던 승객의 음식물이 날아 흩어지는 일이 있었지만, 내릴 때 본 바로는, 콜라와 커피의 얼룩은 어떤 좌석에도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현대인의 생활을 편리하고 쾌적하게 해 온 이런 유기 불소 화합물들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사실은 1950년대부터 동물 실험에서는 혈중에 축적되는 사실과 간장과 면역계에 악영향을 미치는 사실, 선천성 눈 이상을 일으키는 사실이 보고되었다.

1980년대에는, 듀퐁사 공장에서 PFOA에 노출된 여성 종업원 7명 가운데 2명이 눈에 선천적으로 이상이 있는 아이를 출산한 일이 보고되었다. 그러나 듀퐁사는 이 자료를 “통계적으로 유의미하지 않다”라고 하여, 감독관청에 보고하지 않았다. 미국 웨스트버지니아주 파커즈버그에 있는 이 회사 공장에서 배출된 대량의 PFOA는 주변 환경을 오염시키고, 1990년대에는 근처의 목장에서 소, 사슴, 개가 죽게 되고, 목장 주인도 건강에 이상이 왔다. 목장 주인이 소송을 제기하여, 오랜 재판 투쟁 끝에 듀퐁사가 긴 세월에 걸쳐 PFOA의 유해성을 알면서 주변 수로에 방류해 온 사실이 판명되어, 배상금을 지급하는 것으로 화해했다.

이 재판을 담당했던 Robert A. Bilott 변호사는, 그 후에도 듀퐁사의 PFOA 오염을 계속 조사하여, 2012년에는 PFOA 노출과 임신고혈압병, 임신고혈압신장병, 고환암, 신세포암, 갑상선 질환, 궤양성 대장염, 고콜레스테롤 혈증과의 인과 관계를 확인했다. PFOA에 의해 오염된 물을 마신 부근 주민은, 이 질환들을 일으킨 경우, 듀퐁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것이 용이하게 되어, 그 후 3,500건 이상의 소송이 제기되었다. 듀퐁사는 자사에서 생산하는 화학물질의 유해성이 의심된 시점에서, 안전한 폐기 방법을 개발해야 했다. 일본의 미나마타병과 비슷한 사건이 미국에서도 일어났던 것이다.

이 밖에 PFOA 종류에 따라서는, 혈중 농도가 높은 어린이에게는 예방 접종 후에 항체 생산이 적어진다든가, 임신부의 혈중 농도가 높으면 저출생 체중아의 출생 비율이 높아지는 사실 등이 보고되었다. 왜 그렇게 되는가는 해명되지 않았다. 동물 실험에서는 발암성이 지적되었지만, 인간에게 있어서의 발암성에 대해서는 밝혀지지 않았다. 국제암연구기관에 의한 평가도 ‘2B(가능성 있음)’에 그치고 있다.

그러나 PFOA는 화학적으로 매우 안정되어 있어, 자외선과 미생물 등으로는 분해되지 않는다. 그래서 한 번 환경 속에 방출되면 장기간 잔류한다. 일부는 토양 속에서 1,000년 이상 잔류한다고 여겨진다. PFAS류가 ‘영원한 화학물질’로 불리는 까닭이다. 환경 속에 장기간 잔류하기 때문에, 야생 생물과 가축, 어패류에서 검출되고, 인간의 혈액, 모유에서도 검출된다. 2007년에 실시된 조사에서는, 미국의 거의 100% 국민 혈액에서 PFOA, PFOS가 검출되었다.

PFOS의 체내에서 반감기는 5년 정도로 보고되었지만, 생활의 모든 장면에서 노출되어 있어, 유입된 PFAS류는 조금씩 체외로 배출되는 한편, 항상 새롭게 유입되고 있으며, 노출은 계속되게 된다.

■ 고농도 노출원이 되는 포말 소화제

신변 가까이에 있는 일용품의 PFAS 오염 이외에, 때로 대량으로 환경을 오염시키고, 환경에서 유래되어 인체를 오염시키는 용도에 ‘포말 소화제’인 PFAS가 있다. 산소를 차단함으로써 화재를 재빨리 진화할 수 있는 포말 소화제는, 1967년에 미국 항공모함에서 발생한 화재로 다수의 사상자를 낸 사건으로 미국 국내는 처음부터 해외 미군 기지에서 대량으로 저장하게 되었다.

당연하게 일본 국내의 미군 기지에도, 그리고 자위대 기지, 민간도 포함한 공항과 항만 등에도 소화용으로 저장되어 있다. 그리고 국내 미군 요코다 기지, 이와쿠니 기지, 아쓰기 기지, 오키나와에서, 이 포말 소화제 유출 사고가 발생하여, 주변 환경을 오염시켰다.

그 가운데에서도 오키나와의 가데나 기지 근처를 흐르는 다무지야쿠강江의 취수 펌프장에서는, PFAS가 1675ng/리터(PPt) 검출되었다(오키나와 기업국의 2019년 조사에 따름).

2020년 4월에는, 기노완시 후텐마 기지의 소화 시스템 오작동으로, 227,000리터나 되는 포말 소화제(원액이 아닌 물에 희석된 것이지만)가 방출되어, 주변 강을 거쳐 바다로 유입되었다. 그 결과, 같은 해 12월에는 기지 주변의 민가 지하수에서 3,000PPt라는 고농도로 검출되었다. 기지 주변 지하수는 넓게 오염되었다는 생각이 들고, 이 물을 음료수로 의지하는 주민 건강에 미치는 영향이 염려스럽다.

오염원은 기지만이 아니다. 2003년 9월 26일에 홋카이도 도카치 앞바다에서 진도 8의 지진이 발생했을 때, 도마코마이항港의 석유 탱크에 화재가 발생하여, 40,000리터(210,000리터라는 보고도 있다)의 포말 소화제가 사용되었다.

포말 소화제는, 화재가 발생한 경우는 처음부터 누설 사고와 화재에 대비한 훈련에서도 대량으로 환경 속으로 방출되어, 음료수는 물론 토양과 대기를 오염시키는 것이 큰 문제다.

그런데 PFAS류에 의한 오염에 대해 국가는 어떤 대응을 하고 있을까?

■ 국가에 의한 PFAS류 규제

약 5,000종류의 PFAS류 가운데 규제 대상은, 생산·사용 이력이 길고, 대량으로 사용되어 건강에 미치는 영향도 조사되어, 명확히 유해하고 인정되는 과불화옥탄산PFOA과 과불화옥탄술폰산PFOS 두 종류뿐이다. 국제적으로는, 「잔류성 유기 오염 물질에 관한 스톡홀름 조약」이라는 국제 조약에 따라, 대상 물질로 지정되면 제조, 사용, 수출입이 금지 또는 제한된다. 2009년 과불화옥탄술폰산이 등록되고, 2019년 과불화옥탄산이 추가되었다. 여기에 대응하여, 국내에서는 「화학물질 심사 및 제조 등의 규제에 관한 법률」의 대상 물질이 되었다. 「화학물질 심사 및 제조 등의 규제에 관한 법률」은, 분해가 어렵고, 높은 축적성으로 인간의 건강에 악영향을 미치는 화학물질을 규제하기 위한 법률이다.

그 후 마침내 2020년에 수돗물의 수중 ‘목표치’로서, 과불화옥탄술폰산과 과불화옥탄산의 합계 50PPt(이하, 모든 단위는 PPt) 이하로 설정되어, 하천물의 수중에서도 마찬가지로 합계 50으로 설정되었다.

그런데 규제 후에도 전국 각지에서 포말 소화제로 비축되어, 적어도 2018년까지는 실제로 사용되었다. 2019년도에 환경청이 행한 전국 조사에서는, 오사카부 셋쓰시의 지하수에서 1,855, 오키나와현 가데나 기지 및 후텐마 기지 주변의 하천물, 지하수에서 1,000 등, 각지에서 목표치를 크게 초과하는 농도로 검출되었다. 2020년 12월, 후텐마 기지 주변의 민가 지하수에서 3,000이라는 고농도로 검출된 사실은 앞에서 말한 그대로다.

이 밖에 도쿄도 다마 지구의 일부 지하수에서 비교적 고농도로 검출되고, 2010년에는 다치카와시에서 230, 구니타치시에서는 160이었다. 2019년에도 도교도 히가시코이가쿠보 정수장에서 101, 후츄시 무사시다이 정수장에서 602, 다치카와시 우물물에서도 1,340으로, 목표치를 초과했다.

앞으로, 규제되고 있는 과불화옥탄술폰산과 과불화옥탄산 대신에 다른 PFAS류에 의한 오염이 진행될까 두렵다. 유기불소화합물이 초래한 편리함을 안 현대인이, 이것들이 없었던 시대의 생활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PFAS에 한하지 않지만, 장기간 환경 속에 잔류하는 오염 물질 대책은 곤란하기 이를 데 없다. 규제 대상이 되는 2개 물질에 대해서는, 포말 소화제 등 현재 대량으로 보관되는 것의 안전하고 해가 없도록 하는 조치를 신속하게 진행해야 한다. 오염된 마실 물에 대해서는, 활성탄에 의해 얼마간 제거할 수 있다는 보고도 있어,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제거할 수 있을까 연구를 추진하는 것이 요구된다.

■ Ecochil[어린이 환경 조사] 조사

환경 속에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종류의 오염 물질이 존재하며, 이 오염 물질들이 인간의 건강에 끼치는 영향에 대한 인과 관계를 밝히는 일은 매우 어렵다. 동물 실험처럼 특정 물질을 계속 부여해 영향을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을 조금이라도 추측하여, 미래 세대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행하는 것이, 환경청에 의한 ‘어린이 건강과 환경에 관한 전국 조사’, 통칭 ‘Ecochil 조사’다.

전국 15개 unit center에서 10만 조組의 母子(반수는 정도는 父子)가 참가하여, 태어난 아이들이 13살이 되기까지 건강 상태를 추적하고, 임신 중의 환경 오염 물질에 노출된 상황과 건강과의 관계를 조사·연구하는 대규모 집단 조사다. 2010년부터 준비를 시작하여, 2011년부터 3년간에 걸쳐 10만 조가 모집되었다.

필자인 우리 두 사람은, 그 가운데 지바현 내 대상 지역을 담당하는 지바 unit center에서 이 조사·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참가해 주신 부모, 어린이들에게 직접적인 말은 거의 하지 않는다. 미래 세대의 건강을 지키는 데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를 밝히기 위한 조사이기 때문이다. 비록 사실은 그러하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시간이 걸리는 앙케트에 대한 회답이나 먼 곳에 있는 회의장까지 와서 발달 조사 등에 협력해 주시는 참가자 여러분에게는 절로 고개를 숙이게 된다.

요 수십 년 사이에 어린이의 건강 상태는 크게 변화하여, 알레르기, 비만, 발달 장애 등이 증가하고 있다. 또한, 만기 출산임에도 출생 시의 체중이 2.5kg 미만의 ‘저출생 체중아’가 증가하고 있다. 더욱이 조현병은, 전에는 20살을 넘은 후 발병하는 성인 질환이었지만, 요 몇 해 사이 서서히 어려져서, 사춘기에 발병하는 사람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소아정신과’라는 새로운 진료과가 생긴 병원도 있는데, 전문의가 적은 점도 있어, 예약이 꽉 차 있다. 반년을 대기하는 일도 있다고 한다. 이런 상황을 맞아, Ecochil 조사에 대해서는 전문가로부터 “13살로 끝내는 것은 너무 빠르다. 그 후에 발병하는 질환도 있다”라는 의견도 제기되어, 가능하면 20살까지 조사를 계속하고 싶은 바다.

왜 어린이들에게 이런 변화가 일어나는 것일까. 인간 사회는 복잡하다. 사회 변화는 급속하고, 조사는 언제나 뒷북을 치고 만다. 그러나 어쨌든 유전적인 배경이 불과 수십 년에 변화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기에, 뭔가 환경 변화가 영향을 주고 있다는 의심을 하게 된다.

조사 대상이 된 오염 물질은 납과 카드뮴, 수은 등의 중금속류와 농약, cotinine(담배에서 유래) 등 외에, 여기서 소개한 PFAS도 포함된다. 나아가 조사 개시 당시에는 전혀 예상되지 못했던, 스마트폰과 온라인 게임 등의 장시간 사용에 따른 영향과 2020년부터는 코로나 감염증에 의한 새로운 생활 양식의 영향 등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인간은 환경으로부터 떨어질 수 없다. 환경을 구성하는 일원에 불과하다.

지금 우리는, 다양한 오염 물질로 가득한 컵 속에서 사는 꼴이다. 그러나 성장이 빠른 아이들,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에게도, “이 컵 속에서 너희들도 살아갈 수밖에 없으니까”라고 말하고 끝내도 되는 걸까.

생활 속에서, 가능한 것부터 조금씩 어떻게 하면 이 컵 속의 물을 깨끗하게 할 수 있을까, 한 사람이라도 많은 사람과 함께 생각하고, 행동하고 싶다.

(『世界』, 202103월호에서)

 
본글주소: http://www.poweroftruth.net/m/mainView.php?kcat=1001&table=ji_kim&uid=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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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정치를 하다](23)“멀리 있는 권력은 필요 없다” 그는 일평생 ‘거리’에 있었다

장영은

입력 : 2021.03.16 06:00 수정 : 2021.03.16 08:06

 

도러시 데이 

미국농장노동자연합(UFW)의 시위 현장에서 보안관에 맞서 간이의자에 앉아 있는 도러시 데이(1973년).  스탠퍼드대도서관 밥 피치 아카이브

미국농장노동자연합(UFW)의 시위 현장에서 보안관에 맞서 간이의자에 앉아 있는 도러시 데이(1973년). 스탠퍼드대도서관 밥 피치 아카이브

 

“수많은 젊은이들이 이곳에 와서 우리와 함께 일하고 나서 시간이 지나면 그동안 많은 걸 배웠고 우리에게 고마움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평화주의, 사형제 반대 입장, 소규모 공동체에 대한 관심, 국가의 강압적 권력에 반대하는 입장 같은 다양한 문제에서 우리와 의견을 달리합니다. 우리는 실용적이지 못하고, 사람 좋은 이상주의자이지만 크고 중요한 곳 그 어디로도 나아가지 않는다는 거죠. 우리 가운데 누군가가 말했듯, 우리가 실용적이지 못한 건 맞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만큼이나 실용적이지 못하죠. 우리를 달라지게 하려고 애써 봐야 아무 소용없습니다.”

1933년 5월1일, 뉴욕 유니언 광장은 인파로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경제대공황이 4년째 지속되자, 끼니조차 해결할 수 없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광장에는 미국의 경제 구조를 비판하는 연설가들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도러시 데이는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가톨릭 노동자(Catholic Worker)’ 창간호를 부지런히 나눠주었지만, 대부분 제호를 보자마자 쓰레기통에 버렸다. 다행히 1면 사설을 읽은 몇몇 사람들은 새로운 신문의 탄생을 반가워했다. “비를 피하려고 보호소에 있는 사람들, 없는 일거리를 찾아보려고 길거리를 헤매는 사람들, 미래에 대한 희망도 없고 지금의 아픔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 발행된 ‘가톨릭 노동자’는 가톨릭 교회도 사회 정책과 복지 제도를 영혼 못지않게 중요한 문제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밝혔다.

이 신문의 발행인은 36세의 도러시 데이. 전기요금과 가스요금을 연체하면서까지 마련한 57달러로 혼자 신문을 찍어냈다. 데이는 담대하고도 무모했다. 같은 해, 데이는 자신의 말과 글에 책임을 지겠다는 각오로 노숙인과 실직자들에게 조건 없이 음식과 숙소를 제공하는 ‘환대의 집’까지 열었다. 곧 문을 닫게 될 것이라는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3년 만에 33개의 ‘환대의 집’이 미국 전역에 설립되었다.

도러시 데이는 1897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시카고에서 10대를 보낸 데이는 고등학생 시절에 업튼 싱클레어와 잭 런던의 소설을 읽으며 작가의 꿈을 키웠다. 라틴어와 그리스어에서 두각을 드러냈던 데이는 장학금을 받고 일리노이대학교에 입학했지만, 학교 공부보다는 러시아 문학 작품과 아나키즘 사상을 섭렵하는 데 몰두했다. “1916년, 도러시는 학교는 더 이상 다닐 필요가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뉴욕으로 향했다. 1917년, 사회주의 성향의 신문인 ‘콜’과 ‘매시스(The Masses, 대중)’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한 스무 살의 데이는 아동 노동을 비판하는 기사 및 자본주의의 모순을 고발하는 취재로 이름을 날렸다. 미국을 방문한 러시아의 혁명 이론가인 트로츠키를 만나 인터뷰도 했다.

1916년 일리노이대학교를 중퇴하고 뉴욕으로 향한 도러시 데이.

1916년 일리노이대학교를 중퇴하고 뉴욕으로 향한 도러시 데이.

‘오늘, 지금, 바로 여기에…’
자본주의의 모순 고발해온 기자
반전·여성 참정권 시위로 투옥
1932년 11월30일, 유니언 광장서
워싱턴을 향해 단식 행진 시작
혼자 가톨릭 노동자 신문 만들고
노숙인들 돕는 ‘환대의 집’ 세워
 

도러시 데이는 반전 시위와 여성 참정권 운동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가두 행진을 벌이다 투옥되었다. 워싱턴의 감옥에서 성경을 읽었다. 수감자들에게도 많은 것을 배웠다. “교육이라고는 거의 받아본 적 없는 거리의 여인 매리-앤”은 데이에게 인생의 스승이나 다름없었다. 매리-앤은 데이에게 ‘살아남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고개를 꼿꼿하게 세우고 긍지 있게 행동해야 해.”

출옥 후인 1918년 봄에 도러시 데이는 “킹스 주립병원에서 간호원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취재 현장에서 가난한 사람일수록 질병에 쉽게 노출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데이는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싶었다. 1년 동안 간호사로 일했다. 데이의 취재력을 아까워하는 언론사들이 많았다. 데이는 1919년 ‘리버레이터(The Liberator, 해방자)’의 기자로 돌아왔다. 데이는 사회당을 지지하는 한편 공산주의자들과의 지적 교류를 점차 넓혀 나가고, 가끔씩 삶의 근본적인 의미를 묻는 묵상의 시간도 가졌다. 치열하게 살수록 외로움도 깊어졌다. 데이는 사랑도 이별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도러시 데이는 1926년 생물학자이자 무정부주의자인 포스터 배터햄을 만나 미래를 함께하고자 했다. 그러나 1927년 데이가 가톨릭 신앙으로 회심하며 믿음을 실천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무신론자인 배터햄은 결별을 통보했다. 데이는 혼자서 딸을 키우기로 한다. “몸과 영혼, 이 세상과 저 세상을 화해시키는 종합적인 것을 만들 수 있게 되기를 갈구”했지만, 우선 어린 딸을 키우며 먹고사는 문제부터 해결해야 했다. MGM 영화사에서 시나리오 작가로 일하며 돈을 벌고자 했지만, 1929년 경제대공황이 터지면서 6개월 만에 영화계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1930년부터 데이는 ‘어드밴스’ ‘커먼윌(Commonweal, 공동선)’ ‘아메리카’ 등 여러 매체에 글을 기고하면서 취재 현장으로 복귀했다. 기자로 성실하게 일상을 꾸려나가던 데이는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1932년 11월30일, 600여명의 실직자들이 뉴욕 유니언 광장에서 “워싱턴을 향해 단식 행진을 시작했다”. 그들은 “직장과 실직보험, 노후연금, 의료보장과 주택을 요구”했다. 그러나 “주요 신문들은 그 사건을 붉은 혁명을 일으키려는 위험한 과격분자 부랑배들의 행진으로 취급했다”. 델라웨어주에서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시위대에게 잠시 머물 곳을 마련해 준 교회 창문으로 경찰관들이 최루탄을 던졌고, “시위대의 지도부로 의심되는 사람들은 경찰차에 실려 유치장으로 끌려갔다”. 남은 자들은 단식 행진을 이어 나갔고, 워싱턴에 가까워질수록 함께 걷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추운 날씨였지만, “시위대는 사흘 동안 노숙을 했다”. 12월8일, 경찰은 바리케이드를 풀 수밖에 없었다. 3000마일을 걸어 워싱턴에서 구호를 외친 시위대는 평화롭게 해산했다. 도러시 데이는 취재를 마친 후, 혼자 성당에 들어가 “특별한 기도를 올렸다. 내 동료인 노동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내가 가진 재주를 쓸 수 있는 방법이 생기기를 바라는 기도였다”.

뉴욕으로 돌아오자마자 “급진적인 가톨릭 신문!”의 필요성을 설파하고 다녔다. 돈 문제부터 해결해야 했다. 바오로 출판사가 “8면 신문 2500부를 57달러에 찍어 주기로 동의했다”. 신문 발행만으로도 벅찼지만, 도러시 데이는 얼마 전 읽은 로즈 호손 라스롭의 전기가 자주 생각났다. 그는 가톨릭 신자로 개종하면서 뉴욕의 빈민가에 방 세 개짜리 아파트를 얻어 “암으로 죽어가는 이웃 사람들에게” 개방했다. “그의 시작은 미국 전역에서 도미니크회가 운영하는 여섯 개의 병원이 되었다.” 데이는 큰 용기를 얻었다. 노숙인과 실직자들에게 먹을 것과 쉴 곳을 제공하기로 결심하고, 1933년 ‘가톨릭 노동자’ 신문과 ‘환대의 집’ 운영을 시작한다.

하지만, 도러시 데이는 여러 사람들에게 자주 오해를 받았다. 가톨릭 신자들은 데이가 교회의 권위에 도전하는 과격하고 위험한 사회주의자라고 의심했다. 진보 진영에서는 데이를 전통을 중요시하는 고리타분한 종교인으로 몰아붙였다. 성직자들 가운데 일부는 데이의 이혼 및 동거, 낙태 경험 등을 문제 삼아 가톨릭 신자로서의 자격을 운운했다. 보수주의자들은 참정권 운동과 반전반핵 시위, 흑인 인권운동에 앞장서는 데이에게 질서를 지키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연방수사국(FBI)은 데이를 불온 인사로 분류했다.

때로 생명을 위협받기도 했다. 1956년 KKK단은 데이에게 총격을 가했다. 제도권 안으로 들어가 세상을 바꾸지 않으면 “미국에서 가난을 완전히 몰아낼” 수 없다며 데이에게 정계 진출을 권유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1968년의 모습.

1968년의 모습.

76세에도 노동자 시위에 참가
말과 글과 믿음을 실천한 종교인
프란치스코 교황, 미 의회연설서
“소외된 이와 함께한 위대한 사람”
 

도러시 데이는 “대중적이지 않은 명분을 지키기 위해” 신문을 발행하면서 시위 현장에서 행진하면서 그리고 노숙인과 실직자들의 식사를 준비하면서 매 순간 싸웠다. 삶의 본질은 “우리가 서명하는 성명서들이나 우리가 참여하는 정당들이나 우리가 주창하는 대의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살아가는 일상 속에 있다는 것”이 데이의 믿음이었다. 입법부와 행정부를 이끌어가는 정치 지도자들이 가진 권력 자체에 데이는 아무런 반감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다만, 데이는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책임지기 위해 날마다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부디 정치인들이 그들의 책무를 깨닫기를 촉구했다.

도러시 데이는 “아침나절은 온통 채소를 썰면서 보내고, 점심나절은 온통 누군가를 의사에게 데려갈 수 있도록 준비시켜 그 사람과 함께 시립병원 외래 병동에 앉아서” 보내는 일상을 자신의 소명으로 받아들였다. “전문용어를 빌리자면” 데이는 ‘지역’과 ‘현장’을 지키는 운동가로 남고 싶었다. 미래를 책임지는 정치인이 아니라 오늘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으로 살고 싶었다. “멀리 있는 권력, 이른바 리더라는 사람들이 지닌 권력”은 데이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데이는 ‘덕’을 추구하다 어느 날 ‘독선’에 빠지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끊임없이 경계했다. 말과 글과 믿음을 실천에 옮기고자 최선을 다했다.

1965년 도러시 데이는 바티칸 공의회가 모든 전쟁에 반대하는 선언을 내놓기를 촉구하며 로마에서 열아홉 명의 가톨릭 신자들과 함께 열흘간 단식 투쟁을 했다. 1973년에는 일흔여섯의 나이로 농장노동자연합 시위에 참가했다. 데이는 또다시 구속되어 열흘간 감옥살이를 했다. 출옥 후, 변함없이 데이는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꼿꼿이 서서 상냥하게 맞아 주었다”.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데이는 지상에서의 시간이 “이제 곧 끝날 것”이라고 담담하게 이야기하며, “내 삶은 기억될 만한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1980년 11월, 도러시 데이는 여든셋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2015년 9월24일, 미국 국회의사당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상·하원 합동연설에서 도러시 데이, 마틴 루서 킹, 에이브러햄 링컨, 토머스 머튼의 이름을 한 사람 한 사람 호명한 뒤,데이를 소외된 계층과 함께하며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평생을 분투한 위대한 미국인으로 기억했다. 그렇게 역사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데이는 현장을 떠나지 않은 실천가였다. 가난한 이웃을 외면하지 않은 진정한 종교인이었다. 가까이에서 손을 내미는 따뜻한 정치인이었다. 데이의 고집은 옳았다. 멀리 있는 권력은 필요 없다.

■장영은
 
[여성, 정치를 하다](23)“멀리 있는 권력은 필요 없다” 그는 일평생 ‘거리’에 있었다

성균관대학교에서 논문 ‘근대 여성 지식인의 자기서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균관대 비교문화연계전공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을 엮고,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 <촛불의 눈으로 3·1운동을 보다>를 함께 쓰고,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를 썼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이야기하는 여성들에게 관심이 많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분투해온 여성들의 생애를 복원하고, 그들의 말과 글을 차근차근 모아 널리 전하고자 한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103160600015&code=910100#csidx5eb2b0f368f3e3da21b2ca614e48a8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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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시가 급등에 중앙 “벼락거지 쇼크” 한겨레 “자연스런 과정”

[아침신문 솎아보기] 조중동 한목소리로 ‘쇼크’
문 대통령 사저 논란 팩트체크한 한겨레

 

조중동, 공시지가 상승에 ‘쇼크’ ‘폭탄

 

국토교통부가 15일 지난해 보다 19.08% 오른 공동주택(여러가구가 한 건축물 안에서 각각 공간을 갖고 생활할 수 있도록 설계된 주택) 공시가격안을 공개했다. 상승률이 2017년 4.44%, 2018년 5.02%, 2019년 5.23%, 2020년 5.98%였다.

공시가격이 오른 이유는 지난해 이후 아파트 가격 급등에 있다. 전국에서 세종이 70.6%로 가장 많이 올랐고, 대전은 20.5%, 서울은 19.9%, 부산은 19.6%, 울산은 18.6% 올랐다. 공시가격이 오르면 재산세와 종합부동산세 등 주택 보유세가 등 주택 보유세가 늘어난다. 또 지역 가입자의 건강보험료도 오르게 된다.

▲16일자 아침신문 1면.
▲16일자 아침신문 1면.

보수언론들은 ‘쇼크’ ‘폭탄’ 등의 단어를 사용하며 공시지가 상승한 게 정부 탓이라고 비판했다. 또 공시지가가 상승해 국민이 세금 폭탄을 맞게 됐다고 주장했다. 반면 중도·진보 성향 신문에선 집값이 상승하면 공시지가가 오르는 게 당연하고 선의의 피해자가 없도록 정책을 보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동아일보는 공시가격이 오른 소식을 1면에 전하면서 일제히 ‘쇼크’라는 단어를 제목에 사용했다. “공시가(價)… 세종 70%, 서울 노원 34% 급등”(조선일보) “공시가 쇼크, 마포 1주택 보유세 52% 뛴다”(중앙일보) “‘공시가 쇼크’… 종부세 21만채 증가”(동아일보)

▲16일자 조선일보 1면.
▲16일자 조선일보 1면.
▲16일자 동아일보 1면.
▲16일자 동아일보 1면.
▲16일자 중앙일보 1면.
▲16일자 중앙일보 1면.

동아일보는 1면 기사에서 “부동산대책 실패로 집값 급등세를 잡지 못한 정부가 공평과세를 명분으로 세 부담만 늘리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고 쓴 뒤 “올해 공시가격이 많이 오른 것은 아파트 매매가격이 크게 뛴 데다 작년 10월 정부가 밝힌 공시가 현실화 로드맵에 따라 올해부터 공시가를 시세에 가깝게 만드는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정부는 공시가 현실화율을 지난해 69%에서 올해 70.2%로 높인 뒤 연평균 3%포인트씩 올려 2030년까지 평균 90% 선을 맞출 계획”이라고 정부의 입장을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공시지가 상승에 대해 부정적 의사를 내비치는 교수의 입을 빌렸다. 동아일보는 “전문가들은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 땅 투기 의혹으로 공공에 대한 신뢰가 떨어진 상황에서 공시가격 인상 계획이 발표돼 집주인과 은퇴자 중심으로 반발이 거세질 수 있다고 본다”고 풀이한 뒤 대학교수의 멘트를 인용했다.

“그간 공시가 산정의 투명성에 대한 문제 제기가 많았지만 구체적인 개선안은 나오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부동산정책은 물론 조세정책 전반에 대한 불신이 커질 수 있다”(정수연 제주대 경제학과 교수)

▲16일자 조선일보 3면.
▲16일자 조선일보 3면.

조선일보는 3면 기사에서 다주택자의 과세를 우려했다. 조선일보는 “다주택자는 어지간한 회사원 월급으로 감당할 수 없는 보유세 폭탄을 맞게 된다. 예컨대 강남구 은마아파트 전용 76㎡와 관악구 ‘신림푸르지오1차’ 전용 84㎡를 보유한 2주택자는 올해 내야 할 보유세가 3991만원으로 작년(1627만원) 보다 2300만원 넘게 늘어난다”고 보도했다.

조중동은 사설에서 “국민이 허리가 휜다”며 한목소리를 냈다. 조선일보는 “종부세 부과 대상인 공시가격 9억원을 넘기면 1년 만에 보유세 상승률이 40%대에 이른다. 집 한 채 갖고 사는 사람이 무슨 죄를 지었나. 공시가에 연동되는 건강보험료도 따라 오른다. 자영업자 127만 세대의 건강보험료가 오는 11월부터 인상되고, 현금 소득이 없는 은퇴자나 고령자 2만명이 월 12만원가량의 건보료를 새로 부담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16일자 조선일보 사설.
▲16일자 조선일보 사설.
▲16일자 중앙일보 사설.
▲16일자 중앙일보 사설.

이어 조선일보는 “집을 팔라는 강요나 마찬가지다. 집이 두채인 사람은 보유세만 1억원이 넘을 수 있다고 한다. 집을 팔려고 해도 양도세 등이 워낙 높아 팔고 다른 곳으로 가기도 어렵다. 국민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만들고 있다”고도 주장했다.

중앙일보는 사설에서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 실패로 가계 빚이 크게 늘고 ‘벼락 거지’가 속출하는 와중에 이번엔 공시 가격 쇼크가 우리 사회를 덮쳤다”고 주장한 뒤 “전국 집값은 문 정부가 들쑤셔놨지만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이 짊어져야 한다”고 썼다.

동아일보도 사설에서 “급증하는 보유세 부담은 집 한 채만 보유하고 다른 소득은 없는 은퇴자들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 지난달 국회에서 여야 의원들이 1가구 1주택자 종부세 부담을 줄이는 법안을 냈지만 정부 반대로 심의조차 못 했다. 집값이 아니라 애먼 국민만 잡는 부동산 세재는 서둘러 손을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도·진보 신문 “집값 급등에 따른 세금 인상 당연”

반면 중도·진보 성향 신문에선 집값이 급등하면 공시지가가 오르는 게 당연하고 주장했다. 선의의 피해자가 없도록 정책을 보완해 나가야 한다고도 했다.

▲16일자 한겨레 사설.
▲16일자 한겨레 사설.

한겨레는 사설에서 “공시가격이 오르면 재산세·종합부동산세 등 보유세 부담이 늘고, 일부 고가·다주택 보유자들은 부담을 크게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동안 공시가격이 시세보다 너무 낮아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높았던 만큼 ‘공시가격 정상화’로 가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본다. 조세 형평성을 높이고 투기적 수요를 차단한다는 점에서도 긍정적 효과 역시 기대된다”고 주장했다.

한겨레는 “일각에서 또다시 ‘세금 폭탄론’이 제기되는 건 사실과 한참 다른 주장이다. 지난해 ‘중저가 1주택’의 부담을 줄이는 세법 개정으로 공시가격 6억원 이하 주택은 올해 재산세 부담이 외려 낮아진다. 전국 공동주택의 92.1%, 서울의 경우에도 70.6%가 해당한다. 또 재산세 상한제가 도입돼 공시가격 3억원 이하는 5%, 6억원 이하는 10%로 세 부담 증가율이 제한된다. 세 부담이 커지는 공시가격 9억원 초과 주택은 전체의 3.7%, 52만5천호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1주택 소유자는 보유세 부담이 줄거나 미미한 것”이라고 짚었다.

국민일보는 사설에서 “집값이 오르면 보유세도 따라 오르는 게 당연하다. 공시가격과 시세의 괴리를 좁히는 것은 조세 형평성 제고 차원에서도 바람직한 방향”이라면서도 “하지만 최근 집값 급등은 정부의 부동산 정책 실패가 초래한 측면이 크다. 주택 소유자들의 불만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다. 공시가격 현실화와 보유세 강화는 부동산 시장 안정의 효과적 수단이기 때문에 정책 기조를 유지해야겠지만 가계에 미치는 충격을 감안해 완급을 조절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16일자 한국일보 사설.
▲16일자 한국일보 사설.

한국일보도 사설에서 “시세에 비하면 턱없이 낮은 공시가격에 대한 지적이 컸던 만큼 정책 방향이 틀렸다고 하긴 힘들다”면서도 “그러나 그동안 미친 집값과 전세대란으로 국민을 좌절시킨 건 잘못된 부동산 정책과 정부의 책임이 더 크다. 더구나 LH 직원들의 투기 의혹으로 정책 신뢰도가 바닥인 상황에서 세금만 더 걷으려 든다면 정부에 대한 분노만 커질 수 있다. 집값과 투기꾼은 못 잡고 국민만 잡는다는 비판도 나온다”고 지적했다.

이어 한국일보는 “정부가 공시가격을 올려 보유세 부담을 늘린 건 다주택자 매물 출회를 유도해 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다주택자들은 징벌적 양도소득세 중과에 팔고 싶어도 팔 수 없다고 호소한다. 공시가격 인상으로 보유세가 오른 만큼 거래세는 낮춰 시장의 거래를 터지는 방안도 고민하는 게 순리다. 세심한 접근도 요구된다”고 조언했다.

문 대통령 사저 논란 팩트체크한 한겨레

지난 15일자 조선일보 5면은 문재인 대통령이 퇴임하고 지낼 사저를 이명박 전 대통령과 비교하는 기사를 냈다. 조선일보는 “문(文) 사저 796평, MB의 2.5배... 경호동 건축비는 박(朴)의 2배”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문 대통령 양산 사저는 면적과 국고 투입 규모에서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 사저와 비교해 작지 않다”고 주장했다.

조선일보는 “문 대통령 사저 부지 면적이 이 전 대통령 사저보다 2.5배 큰 셈이다. 경호시설 건축 예산은 문 대통령 사저가 박 전 대통령 사저보다 21억8900만원 더 많은 39억8900만원이 투입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보도했다.

▲15일자 조선일보 2면.
▲15일자 조선일보 2면.

조선일보는 사저 면적과 예산을 비교했으나 서울과 경남 양산의 지역 차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한겨레는 6면 기사에서 “보수언론은 문 대통령의 사저 규모를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의 사저와 비교하며 규모의 적정성을 문제 삼는다. 실제로 이 전 대통령의 서울 강남구 논현동 사저 부지(1023㎡)나 박 전 대통령의 서울 서초구 내곡동 사저 부지(406㎡)에 견줘 문 대통령 사저 부지가 넓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농지가 포함된 시골 땅과 서울 땅의 크기를 땅값과 상관없이 단순비교하기는 어렵다”고 주장했다.

▲16일자 한겨레 6면.
▲16일자 한겨레 6면.
▲16일자 한겨레 사설.
▲16일자 한겨레 사설.

한겨레는 사설도 썼다. 한겨레는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의 서울 강남 사저와 견줘 부지 규모가 큰 것도 공격의 소재로 이용된다. 강남과 양산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2007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봉하마을에 조성한 사저를 ‘아방궁’이라고 비난했던 일을 떠올리게 한다”고 비판했다.

이어 한겨레는 “엘에이치 사태의 본질은 공직자가 개발정보를 이용해 땅투기를 한 것이다. 퇴임하고 농사를 짓겠다는 대통령과 엮을 문제가 아니다. 국민의힘과 보수언론도 일를 모를 리 없을 것이다. 어떻게든 대통령을 망신 주겠다는 과도한 정치 공세는 이쯤에서 멈추기 바란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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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격도 주권도 없는 나라

전덕용 사월혁명회 상임의장승인 2021.03.15 

 

▲ 한명주의 '봄
▲ 한명주의 '봄'

  음력 정월 대보름이 지나고 우수 경칩이 지나면 평양 대동강 물도 풀린다.
  옛 선인들의 지혜와 통찰력은 대단했다.
  눈 덮인 땅속 저 깊은 곳으로부터 오는 봄의 발자국 소리를 미리미리 앞질러 들을 수 있었다. 산야엔 하얀 눈이 두텁게 쌓여 있고 살갗을 에는 찬바람이 쌩쌩 부는데 봄이 오는 발자국 소리를 미리 듣고 ‘입춘(立春)절기’를 겨울 한 복판에 박아 놓은 것이다. 

  며칠 전 대관령에 폭설이 내려 도로가 막혀 큰 소동을 벌였었는데 벌써 여기저기서 꽃 소식이다. 
  지리산 자락 구례 산동면 산수유마을에선 노란 산수유가 피었다는 소식이다. 이에 뒤질세라 광양 매화마을에서 매화가 활짝 피었다는 것이다.
  깊은 산골짜기 실개천에는 한겨울 얼음 속에서도 버들강아지가 하얀 솜털을 피어낸다. 산등성이에는 생강나무 꽃이 눈바람 속에서도 땅속 깊은 곳에 봄이 오고 있음을 알려준다.

  고산 윤선도의 귀양처 보길도 세연정에도, 다산 정약용의 유배지 강진 땅에도 하마 봄이 오고 있으리라.
  지리산 피아골 세석평전 불무장 등에도 봄볕이 내릴 것이다.
  광양 백운산 빨치산 소굴 전남부대 옛터, 구름위로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고 서있는 산꼭대기에도 봄이 오고 있으리라.

  지난 5일 경칩이 지나자 계속해서 영상 10도를 웃도는 요즘 서울 날씨이다.
  없는 사람 살기는 여름이 좋다는 말이 있듯이 역시 어렵게 살아가는 바닥사람들에게는 추운 겨울보다는 따뜻한 봄이 좋은 것이다.
  나이 든 사람들에게는 ‘봄’하면 강남 갔던 제비가 다시 찾아오는 음력 춘삼월(春三月)을 떠 올린다. 하지만 요즘 세대는 진달래 벚꽃이 만발하는 양력 4월쯤을 생각하기 마련이다.
  음력 3월이건 양력 4월이건 봄이 오면 날씨가 따뜻하고 온통 세상 천지에 새싹이 돋고 아름다운 꽃이 피어서 좋다.

  지금은 비닐 온실이 일반화 되어서 겨울 꽃 보기가 일상화 되었지만 ‘보릿고개’시절 겨울에 꽃을 본다고 하는 것은 세상에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리운 임에게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라는 민요가 생겼다.
  얼었던 땅위에 새 생명이 돋아 오르고 강물이 풀려 휘감아 흐르는 들판엔 아지랑이가 일었다. 푸른 보리밭 위로는 노고지리가 우짖는 봄, 흰옷 백성들은 구십춘광(九十春光)을 노래했었다.

▲ 한미연합훈련
▲ 한미연합훈련

  이렇듯 평화로운 땅에 쪽발이들의 군홧발길 소리에 이어 바다 건너 온 양키털발들의 케터필라 소리가 물경 1세기를 두고 봄꽃 소식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도 아침 신문에는 한반도의 긴장과 전쟁책동을 일삼는 기사가 빠짐없이 올라온다.
  3월 들어 부쩍 마음이 급해진 사대 매국언론들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미국인들의 전쟁책동을 부추기고, 교묘하고 고약한 표현(말투)으로 북한의 비윗장을 거스르고 드는 것이다.
  새로 들어선 바이든정부를 충동질하고 미국인들의 대북여론을 악화시키려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또 다른 한편 한국의 외세의존 숭미세력들을 선동, 꺼져가는 반공의식 대북한 적대의식을 일깨우고 어떻게 하든지 전쟁분위기를 띄우기 위한 술책을 부린다.
  
  어느 때를 막론하고 미국이 세계평화, 한반도의 안정을 위해 조용하게 있은 적이 있었으랴만, 해마다 해가 바뀌고 3,4월 꽃피는 봄이 오면 전쟁연습 군대를 동원한 각종 기동훈련이 많았었다.
  휴전 이후 3,4십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그들이 한반도 상륙작전 북한 침공훈련으로 한반도 정세를 악화시킨 일들은 접어 둔다고 치자.
  북한이 자위적 핵개발 징후를 보인 이후 미국은 그야말로 무자비한 북한 말살작전에 돌입했다.
  오키나와, 괌, 하와이, 미본토로부터 대규모 병력 이동작전을 감행했다. 한반도에서의 전면전을 가상, 핵추진항모와 핵잠함을 위시하여 대규모 선단이 한국 내해 깊숙이 수시로 진입 위협을 가했다.
  스텔스 기능의 최정예 정찰기와 이른바 그들의 전략자산인 초대형 스텔스 전폭기(죽음의 백조)가 휴전선 부근까지 근접비행을 하는 실로 아슬아슬한 일촉즉발의 전쟁모험극을 감행했다. 
  시시때때로 도발적이고 기분 나쁜 이름을 붙여 실시하는 전쟁연습은 말 할 것도 없지만, 팀스프리트훈련 키리졸브훈련에 몸에 소름이 끼치는 ‘참수작전’등은 그야말로 악명 높은 흉측스런 도발훈련이었다. 

  미국의 침략근성, 폭력성, 흉측하고 잔인한 그들의 야만성을 그대로 잘 보여주는 전쟁 소동이었다.
  힘의 지배, 총과 자본으로 세계를 지배하겠다는 패권주의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군사행동이었다.
  인간이 땀 흘려 생산한 부의 열매, 축적된 자본을 사람들의 복리(福利) 인류의 평등 행복을 위해 소비하지 않는다.
  동물적인 힘, 폭력을 확대 재생산하는데 쏟는다. 끊임없이 전쟁수단에 매달려 패권추구에만 열을 올린다.

  자기들은 아무런 죄도 없는 우리를 76년 동안 강제 점령 강제 분단의 악행을 범하고도 얼굴색 한번 변하지 않고 중국의 인권, 북한의 인권문제를 들먹거린다.
  한국전쟁 베트남전쟁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폭격으로 죽이고도, 홍콩시위 미얀마시위에서 희생된 인명피해를 들먹거린다.
  끈질기게도 악독스런 돌림병 코로나19에 시달리며 지난해 한국인들이 피땀으로 벌어들인 돈 중에서 1조1833억원이 쓸데없이 지출된다. 미국군대의 주둔비용으로 주는 돈이다.
  전국에 산재한 미군주둔지 그 많은 땅을 내주고 주둔비용까지 대주고도 온갖 내정 간섭을 다 받는다. 상말에 내 무엇주고 뺨 맞는다는 말이 있다.
  주권국가이면 당연히 가져야 할 국군 전시작전권도 미국의 점검 판단 기준에 맞아야 전환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백년 하세월로 식민지군대 운영체제 그대로 두겠다는 것이다.
  한국군 통수권을 거머쥐고 두고두고 주권침탈에 무기까지 팔아먹겠다는 수작이다.

  문재인정부가 추진하는 한반도평화프로세스에 의한 선 종전선언 후 비핵화협상에도 미국의 기준에 의한 안보평가에 합격(?)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을 포위하는 미국의 대중(對中) 적대정책에 무조건 동조를 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위안부문제, 징용문제를 모두 다 일본에 양보하고 한미일 삼각동맹을 전제로 한 협상에 임하라는 압력도 드세다.
  한국 내에 동결된 70억 달러의 이란자금도 풀어주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판이다.
  도대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그들 미국인들에게 어떤 존재일까. 봉건왕조의 시녀, 귀족의 몸종쯤에나 그 격이 해당하는 것일까.
  함포외교로 식민지를 확장하고 아프리카를 침공하여 노예를 사냥하던 지난 세기의 몽상에서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1866년 셔먼호 사건에 이은 신미양요 이후 1백60년 동안 미국은 왜 우리를 계속 못 살게만 구는 것일까. 무력이 약한 나라는 국격도 국권도 없다는 말인가. 대한민국의 정부는 도대체 무얼하고 있다는 말인가. 정권 담당자들은 도대체 배알도 쓸개도 없다는 말인가. 미국인들의 눈치만 보다가 세월 다 보낼 참인가.
   대원군 영감은 서양인들의 침략에 맞서 대포를 쏘아 대고 전국곳곳에 척화비라도 세웠었다.
  주권을 행사 못하는 나라 국권이 없는 나라, 이런 나라 살림하자고 옛 선열들이 그렇게나 많이 피를 흘렸다는 말인가.
  세계 속의 대한민국의 국격을 객관화하고 이 민족적 수치에서 벗어나야 한다.
  국권과 국격을 침탈당한 이 치욕의 현실을 절치부심, 기필코 이를 타파해야 한다.■

전덕용

사월혁명회 상임의장
씨알의 소리 창간편집장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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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정, '3년전 봄날 돌아오기 어려울 것'(전문)

한미군사훈련 비판..조평통·금강산관광국 등 정리, 군사합의서 파기 언급

  • 기자명 이승현 기자 
  •  
  •  입력 2021.03.16 08:33
  •  
  •  수정 2021.03.16 08:44
  •  
  •  댓글 0
 
김여정 조선노동당 부부장. [통일뉴스 자료사진]

북한은 올해 상반기 한미연합군사훈련이 끝나는 16일 남북 대화와 교류협력 관련 기구 정리, 남북군사분야합의서 파기 등을 거론하며, 한국정부가 '레드라인'을 넘었다고 지적했다.

16일 [조선중앙통신]과 [노동신문]에 따르면, 김여정 조선노동당 부부장은 전날 발표한 '3년전의 봄날은 다시 돌아오기 어려울 것이다'라는 제목의 담화에서 지난 8일부터 진행된 한미연합군사훈련을 언급하고는 "남조선 당국이 앞으로 상전의 지시대로 무엇을 어떻게 하든지 그처럼 바라는 3년전의 따뜻한 봄날은 다시 돌아오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구체적으로 대남 대화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를 정리하는 문제, 교류협력기구인 '금강산국제관광국'을 비롯한 관련 기구를 없애버리는 문제를 검토하고 있으며, 이같은 중대조치를 '최고수뇌부'에 보고한 상태라고 말했다.

또 앞으로 한국 정부가 더 도발적으로 나온다면 '남북군사분야 합의서'도 파기하는 특단의 대책까지 '예견'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김 부부장은 남측이 훈련 성격과 규모 등을 유연화, 최소화했다며 이해를 구한데 대해서는 "우리(북)는 지금까지 동족을 겨냥한 합동군사연습 자체를 반대하였지 연습의 규모나 형식에 대하여 논한 적은 단 한번도 없다"고 하면서 "미친 개를 순한 양으로 보아달라는 것과 다름없는 궤변"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2018년에 110여 차례, 2019년에 190여 차례, 2020년에 170여 차례의 크고 작은 전쟁연습이 있었다고 지적하고는 "남조선당국은 또 다시 온 민족이 지켜보는 앞에서 '따뜻한 3월'이 아니라 '전쟁의 3월', '위기의 3월'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병적으로 체질화된 남조선당국의 동족대결의식과 적대행위가 이제는 치료불능 상태에 도달했으며 이런 상대와 마주 앉아 그 무엇을 왈가왈부할 것이 없다는 것이 우리가 다시금 확증하게 된 결론"이라고 잘라 말했다.

미국에 대해서도 경고를 보냈다.

김 부부장은 미국측이 지난달 중순부터 북측과 물밑 접촉을 시도하고 있다는 소식이 흘러나온 이날 마치 바이든 행정부를 겨냥한 듯 "앞으로 4년간 발편잠을 자고 싶은 것이 소원이라면 시작부터 멋없이 잠 설칠 일거리를 만들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3년전의 봄날은 다시 돌아오기 어려울것이다

김여정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부장 담화

 

오랜 기간 깊어지는 고민속에 애를 태웠다는 남조선당국이 8일부터 우리 공화국을 겨냥한 침략적인 전쟁연습을 강행하는 길에 들어섰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의 정정당당한 요구와 온 겨레의 한결같은 항의규탄에도 불구하고 차례질 후과를 감당할 자신이 있어서인지 감히 엄중한 도전장을 간도 크게 내민것이다.

우리 당중앙은 이미 남조선당국의 태도여하에 따라 3년전 봄날과 같은 평화와 번영의 새 출발점에로 돌아갈수도 있다는 립장을 천명하였다.

이것이 해마다 3월과 8월이면 되살아나는 남쪽동네의 히스테리적인 전쟁연습광기를 념두에 둔것이며 북남관계의 마지막기회로 될수 있다는 의미심장한 경고였다는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것이다.

말장난에 이골이 난 남조선당국자들이 늘 하던 버릇대로 이번 연습의 성격이 《년례적》이고 《방어적》이며 실기동이 없이 규모와 내용을 대폭 《축소》한 콤퓨터모의방식의 지휘소훈련이라고 광고해대면서 우리의 《유연한 판단》과 《리해》를 바라고있는것 같은데 참으로 유치하고 철면피하며 어리석은 수작이 아닐수 없다.

태생적인 바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늘 좌고우면하면서 살다나니 판별능력마저 완전히 상실한 떼떼가 되여버린것은 아닌지 어쨌든 다시 보게 된다.

우리는 지금까지 동족을 겨냥한 합동군사연습자체를 반대하였지 연습의 규모나 형식에 대하여 론한적은 단 한번도 없다.

그것이 뒤골방에서 몰래 진행되든 악성전염병때문에 볼품없이 연습규모가 쫄아들어 거기에 50명이 참가하든 100명이 참가하든 그리고 그 형식이 이렇게저렇게 변이되든 동족을 겨냥한 침략전쟁연습이라는 본질과 성격은 달라지지 않기때문이다.

미친개를 순한 양으로 보아달라는것과 다름없는 궤변에 놀아날 상대가 아님을 아직까지 그렇게도 모를가.

털어놓고말하여 정치난, 경제난, 대류행전염병난에 허덕이는 형편에 하나마나한 전쟁연습놀음에 매여달리면서까지 동족에 대한 적대행위에 부득부득 명운을 거는 남조선당국의 처지가 가련하기 그지없다.

우리에 대한 비정상적인 적대감과 불신으로부터 출발한 피해망상이 극도에 달한 모양이다.

연습중단을 약속하고도 우리의 눈을 피해가며 2018년에는 110여차, 2019년에는 190여차, 2020년에는 170여차의 크고작은 전쟁연습을 도적고양이처럼 벌려놓은데 대하여서도 우리는 알고있은지 오래며 때가 되면 낱낱이 계산하려고 하였다.

앞뒤가 다르게 이런 식으로 북침전쟁연습에 계속 열을 올리다가는 북남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될수 있다는것을 남조선당국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있을것이다.

이에 대해 우리는 루차 강조하였고 인내심을 발휘하며 충분한 기회도 주었다.

그럼에도 남조선당국은 또다시 온 민족이 지켜보는 앞에서 《따뜻한 3월》이 아니라 《전쟁의 3월》, 《위기의 3월》을 선택하였다.

3월의 봄계절에 모두가 기대하는 따뜻한 훈풍이 아니라 스산한 살풍을 몰아오려고 작정한것이다.

남조선당국은 스스로 자신들도 바라지 않는 《붉은선》을 넘어서는 얼빠진 선택을 하였다는것을 느껴야 한다.

병적으로 체질화된 남조선당국의 동족대결의식과 적대행위가 이제는 치료불능상태에 도달했으며 이런 상대와 마주앉아 그 무엇을 왈가왈부할것이 없다는것이 우리가 다시금 확증하게 된 결론이다.

전쟁연습과 대화, 적대와 협력은 절대로 량립될수 없다.

우리는 남조선당국이 대화를 부정하는 적대행위에 지꿎게 매달리고 끈질긴 불장난으로 신뢰의 기초를 깡그리 파괴하고있는 현정세에서 더이상 존재할 리유가 없어진 대남대화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를 정리하는 문제를 일정에 올려놓지 않을수 없게 되였다.

그리고 우리를 적으로 대하는 남조선당국과는 앞으로 그 어떤 협력이나 교류도 필요없으므로 금강산국제관광국을 비롯한 관련기구들도 없애버리는 문제를 검토하고있다.

이러한 중대조치들은 이미 우리 최고수뇌부에 보고드린 상태에 있다.

우리는 앞으로 남조선당국의 태도와 행동을 주시할것이며 감히 더더욱 도발적으로 나온다면 북남군사분야합의서도 씨원스럽게 파기해버리는 특단의 대책까지 예견하고있다.

행동에는 언제나 결과가 따르는 법이다.

명백한것은 이번의 엄중한 도전으로 임기말기에 들어선 남조선당국의 앞길이 무척 고통스럽고 편안치 못하게 될것이라는것이다.

력사적인 우리 당 제8차대회에서 명백히 천명된바와 같이 대가는 노력한것만큼, 지불한것만큼 받게 되여있다.

이 기회에 우리는 대양건너에서 우리 땅에 화약내를 풍기고싶어 몸살을 앓고있는 미국의 새 행정부에도 한마디 충고한다.

앞으로 4년간 발편잠을 자고싶은것이 소원이라면 시작부터 멋없이 잠설칠 일거리를 만들지 않는것이 좋을것이다.

남조선당국이 앞으로 상전의 지시대로 무엇을 어떻게 하든지 그처럼 바라는 3년전의 따뜻한 봄날은 다시 돌아오기가 쉽지 않을것이다.

 

주체110(2021)년 3월 15일

평양

(출처-조선중앙통신 202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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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Hi-story]마을 앞 '선돌', 이끼 벗겨보니 '제2의 광개토대왕비'였네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입력 : 2021.03.15 06:00 수정 : 2021.03.15 08:02

“어? 이건 ‘국토(國土)’네, 이건 ‘토내(土內)’, 이건 ‘대(大)이고….’ 1979년 2월 24일 향토연구모임인 예성동호회원들은 충북 중원군(현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입석마을에 우뚝 서있던 비석에서 예사롭지 않은 명문을 읽어냅니다. 이것이 바로 한반도에서 처음 발견된 고구려비석의 역사적인 발견 순간이었습니다.

1979년 2월24일 충북 충주의 향토답사모임인 예성동호회 회원들이 중원군(현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입석마을에 서있던 비석에서 옛 글자들을  읽어내고 있다. 한반도에서 유일한 고구려 비석을 발견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유창종·장준식씨 제공

1979년 2월24일 충북 충주의 향토답사모임인 예성동호회 회원들이 중원군(현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입석마을에 서있던 비석에서 옛 글자들을 읽어내고 있다. 한반도에서 유일한 고구려 비석을 발견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유창종·장준식씨 제공

 

예성동호회는 1978년 9월 당시 유창종 충주지청 검사(현 유금와당박물관장)와 장준식 충주 북여중 교사(전 충청대 교수) 등이 결성한 답사모임이었는데요. 그러나 이 예성동호회는 예사로운 향토모임이 아니었답니다. 동호회를 결성한 그해 봉황리 마애불상군(보물 1401호)을 찾았고, 고려 광종(재위 949~975)이 954년(광종 5년) 어머니 신명순성왕후(생몰년 미상)를 위해 세운 숭선사(사적 445호)의 위치를 알려주는 명문기와도 확인했으니 말입니다. 이 분들이 틈나는대로 발품을 팔아 충주 일대를 답사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미술사학자인 황수영 박사(1918~2011)가 전부터 “이곳에서 진흥왕순수비가 발견될 수 있으니 만약 비슷한 고비를 보면 반드시 연락해달라’고 누누이 언급했기 때문입니다. 예부터 충주 일대는 고구려-백제-신라가 각축을 벌인 요충지였으니까요.
 

예성동호회가 찾아낸 문화유산들. 1978년 봉황리 마애불상군(보물 1401호)을 찾았고, 고려 광종(재위 949~975)이 954년(광종 5년) 어머니 신명순성왕후(생몰년 미상)를 위해 세운 숭선사(사적 445호)의 위치를 알려주는 ‘숭선’명 기와도 확인했다.|문화재청·충청대박물관 제공

예성동호회가 찾아낸 문화유산들. 1978년 봉황리 마애불상군(보물 1401호)을 찾았고, 고려 광종(재위 949~975)이 954년(광종 5년) 어머니 신명순성왕후(생몰년 미상)를 위해 세운 숭선사(사적 445호)의 위치를 알려주는 ‘숭선’명 기와도 확인했다.|문화재청·충청대박물관 제공

■잇달아 국보 보물을 찾아낸 향토모임

실제 그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1978년 1월 6일 단양 성재산(해발 323m)을 답사하던 장준식 교사(당시 단국대학원 재학중)가 신발에 묻은 흙을 털다가 그 유명한 단양 적성비(국보 198호)를 찾아냈으니까요.

적성비는 신라 진흥왕이 고구려 땅이던 적성(赤城·단양)을 점령한 뒤, “신라의 척경을 도운 사람에게 상을 내리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8개월 뒤 결성된 예성동호회 회원들은 장준식 교사를 본보기로 삼아 열정적으로 답사를 다녔다고 합니다.

그러던 1979년 2월24일 의정부지청으로 발령받은 유창종 검사를 위한 송별회 및 기념촬영을 위해 답사에 나섭니다. 그러다 용전리 입석마을 어귀에 우뚝 서있던, 그리고 40여 일 뒤 ‘충주 고구려비’로 명명된 ‘국보 중 국보’ 명문비석을 발견한 겁니다. 물론 발견 당시에는 얼만큼 중요한 비석인지는 알 수 없었죠. 동호회원들은 4월 5일 충주를 방문한 황수영 박사에게 이 비석과 비석 탁본을 보여줍니다.
 

고구려비에서 선입견 때문에 잘못 읽은 부분. 처음부터 ‘진흥왕순수비’로 여겼기 때문에  ‘고려’를 ‘진흥’으로 잘못 읽었다.(①)그러나 자세히 보면 ‘고려대왕(高麗大王)’이라는 글자가 어렴풋 보인다(②). 선입견이 빚은 오류였다.

고구려비에서 선입견 때문에 잘못 읽은 부분. 처음부터 ‘진흥왕순수비’로 여겼기 때문에 ‘고려’를 ‘진흥’으로 잘못 읽었다.(①)그러나 자세히 보면 ‘고려대왕(高麗大王)’이라는 글자가 어렴풋 보인다(②). 선입견이 빚은 오류였다.

과연 ‘신라토내(新羅土內), 당주(幢主), 대왕(大王), 국(國), 태자(太子)’와 같은 글자들이 드러났습니다. 황교수는 순간 외마디 비명일 질렀습니다. “아! 진흥대왕(眞興大王)이다.” 석비 전면 맨 앞줄에 “○○大王”이라는 대목이 있는데, 이 “○○대왕”을 “진흥대왕(眞興大王)”으로 읽은 것입니다. 황수영 박사는 “꿈에 그리던 진흥왕순수비일 것”이라면서 “아! 혈압이 높아 흥분하면 안되는데….”라면서 연신 차를 마셨답니다.

황 박사는 제자인 정영호 단국대 교수(1934~2017)에게 “자네가 조사해보라”고 지시했습니다.
 

충주 고구려비에서는 ’고려대왕’ ‘전부대사자’와 ‘제위’, ‘하부’ 등 고구려 왕을 지칭하는 표현과, 관직명, 그리고 고모루성, 우벌성과 같은 고구려 성의 이름이 보였다. 반면  ‘신라토내당주’, ‘신라토내’,  ‘신라매금’ 처럼 상대방이 신라를 지칭하는 문구들이 계속 보였다.

충주 고구려비에서는 ’고려대왕’ ‘전부대사자’와 ‘제위’, ‘하부’ 등 고구려 왕을 지칭하는 표현과, 관직명, 그리고 고모루성, 우벌성과 같은 고구려 성의 이름이 보였다. 반면 ‘신라토내당주’, ‘신라토내’, ‘신라매금’ 처럼 상대방이 신라를 지칭하는 문구들이 계속 보였다.

■“대박사는 안오고 소박사만 왔나봐”

조사단(단국대박물관)은 3일 후인 4월8일 이끼와 청태를 완전히 제거한 뒤 조심스럽게 뜬 탁본을 걸어놓고 비문해독에 나섰습니다. 조사단과 몇몇 자문위원들이 필획 하나하나 글자 한자한자 읽어나갔습니다.

그러나 쉽지 않았습니다. 시간은 계속 흘러가는 데도 비석의 국적조차 특정하지 못했습니다. 비석의 마멸이 워낙 심했다지만 뭔가 이상했습니다. ‘전부대사자(前部大使者)’ ‘제위(諸位)’ ‘하부(下部)’, ‘사자(使者)’ 등 고구려 관직명이 주로 보였습니다. 특히 광개토대왕비문에 등장하는 ‘고모루성’이 확인됐습니다. 수상했습니다. 고구려 관직명과 고구려성 이름이 보이는데 정작 고구려라는 명문은 보이지 않고…. 또한 ‘신라토내당주’, ‘신라토내’, ‘모인삼백’, ‘신라매금’ 등 마치 상대편이 신라를 지칭하는 문구들이 판독되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유가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이 비석이 신라의 진흥왕순수비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혼돈에 빠진거죠. 하도 해석이 안되자 토론을 지켜보던 주민들이 수근수근댔습니다.

“아니 서울에서 대학자들이 안 왔나봐. 소학자들만 와서 해석을 못 하는 거 아니냐?”
 

충주 고구려 비문의 성격을 알 수 있는 표현. ‘고려대왕 신라매금 세세위원여형여제(高麗大王○○○○新羅寐錦世世爲願如兄如弟)’는 ‘고려왕은 신라매금(왕)과 오래도록 형제와 같은 관계를 맺는다’는 내용이다.  또  ‘동이매금(東夷寐錦)’이라 해서 고구려왕이 신라왕(매금)을 오랑캐의 뜻인 ‘동이’로 지칭했다. 고구려가 스스로를 천자국의 입장에서 신라를 주변국으로 여긴 것으로 해석된다.

충주 고구려 비문의 성격을 알 수 있는 표현. ‘고려대왕 신라매금 세세위원여형여제(高麗大王○○○○新羅寐錦世世爲願如兄如弟)’는 ‘고려왕은 신라매금(왕)과 오래도록 형제와 같은 관계를 맺는다’는 내용이다. 또 ‘동이매금(東夷寐錦)’이라 해서 고구려왕이 신라왕(매금)을 오랑캐의 뜻인 ‘동이’로 지칭했다. 고구려가 스스로를 천자국의 입장에서 신라를 주변국으로 여긴 것으로 해석된다.

■“고려대왕이지 어째서 진흥대왕이야?”

비석 해석을 두고 골머리를 썩일 때인 오후 3시 김광수 교수(건국대)가 뒤늦게 현장에 도착했습니다. 김교수는 현장에서 ‘진흥대왕이 어떠니 저떠니’하고 설왕설래하자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단칼에 정리했습니다.

“도대체 뭔 소리들 하는거야. 저게 어떻게 진흥대왕이냐. 고려대왕이지.”

김광수 교수의 한마디에 좌중은 순간 얼음이 되었답니다. 그러다니 잠시후 “아! 아! 맞아”하는 감탄사가 터져나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처음부터 ‘진흥왕’이라는 선입견에 꽂혀있던 이들이 무릎을 친 거죠. 고려대왕, 즉 고구려 임금이 주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거죠.

뒤늦게 도착해서 선입견이 없던 김교수가 본대로 ‘고려대왕’을 읽어낸 겁니다. 시골 마을에서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던 돌덩이가 일약 한반도의 유일한 고구려비로 탄생되는 역사적이고도 감격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조사단을 이끈 정영호 단국대박물관장은 마침내 “이 비는 장수왕의 남진정책을 기념하기 위해 고구려의 국원성이었던 충주에 세운 고구려의 비석”이라고 발표합니다.
 

1979년 당시 정영호 단국대박물관장이 학계 자문위원 및 원로들에게 조사내용을 발표하고 있다. 그러나 비문의 마멸이 워낙 극심해서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조차 판독에 애를 먹었다. 지금도 전체 500여자 중 200여자 정도만 읽었다.

1979년 당시 정영호 단국대박물관장이 학계 자문위원 및 원로들에게 조사내용을 발표하고 있다. 그러나 비문의 마멸이 워낙 극심해서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조차 판독에 애를 먹었다. 지금도 전체 500여자 중 200여자 정도만 읽었다.

■‘꿈의 계시론’을 개진한 이병도

그후 쟁쟁한 학계원로와 연구자들이 비문 해석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두 달 여가 지난 1979년 6월9일 이병도·이기백·변태섭·임창순·김철준·김광수·진홍섭·최영희·황수영·정영호 등 당대 내로라하는 학자들이 모여 막 발견된 충주(중원) 고구려 비문의 해독에 골머리를 썩였습니다. 이들은 잘 보이지도 않는 글자와, 잘 연결되지 않은 문장을 두고 고뇌에 찬 해석을 하고, 또 다른 이와 열띤 논쟁을 벌입니다.

명문은 확인됐지만 비문의 마모가 너무 심했습니다. 비석 앞 부분은 50%만 확실했고, 문맥으로 읽을 수 있는 부분은 25% 뿐이었습니다. 하도 비문해석을 두고 논쟁이 계속되자 차문섭 교수(단국대)는 “주민들 말마따나 우리는 대박사가 아니라 소박사들만 모였나 봅니다. 원 이렇게 못해서야 원!”라고 자책해서 한바탕 좌중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오죽하면 당시 83살이던 이병도 박사는 ‘꿈의 계시론’을 개진했을까요.

“비문 첫 꼭대기에 액전(제목)이 있는 것 같아 곰곰이 생각하다가 잠이 들었어요. 그런데 꿈에 ‘건흥(建興)’ 두 글자가 나타났단 말이야…아! 그래 눈이 번쩍 띄어가지고… ‘건흥(建興)’ 두글자는 (고구려 장수왕의) 연호가 틀림없어요.”
 

1979년 83살의 이병도 박사가 학술대회에서 “꿈속에서 고구려비문이 보였다”면서 “비석의 윗부분에서 제액(비석의 제목)이 있었고, (장수왕의 연호인) ‘건흥(建興)’ 두 글자가 나타났다”고 주장한 내용을 실은 동아일보 1979년 6월14일자

1979년 83살의 이병도 박사가 학술대회에서 “꿈속에서 고구려비문이 보였다”면서 “비석의 윗부분에서 제액(비석의 제목)이 있었고, (장수왕의 연호인) ‘건흥(建興)’ 두 글자가 나타났다”고 주장한 내용을 실은 동아일보 1979년 6월14일자

■“고구려, 신라는 영영 (고구려)처럼 동생(신라)처럼 지내자”

당대 내로라는 학자들은 일단 비문의 대강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비문을 작성할 무렵의 고구려·신라의 주종관계를 설명할 수 있다는 거죠. 즉 ‘고려대왕 신라매금 세세위원여형여제(高麗大王○○○○新羅寐錦世世爲願如兄如弟)’라는 대목을 보죠. 즉 “고려왕은 신라매금(왕)과 오래도록 형제와 같은 관계를 맺는다”는 내용입니다. 또 하나 ‘동이매금(東夷寐錦)’이라 해서 고구려왕이 신라왕(매금)을 오랑캐의 뜻인 ‘동이’로 지칭했습니다. 이것은 고구려가 스스로를 천자국의 입장에서 신라를 주변국으로 여긴 것이 아닐까요.

‘동이매금지의복(東夷寐錦之衣服)’과 ‘상하의복(上下衣服)’, ‘대위제위상하의복(大位諸位上下衣服)’이라는 표현도 주목거리입니다. 고구려왕이 신라왕과 신하들에게 의복을 하사했다는 대목이니까요. ‘신라토내당주(新羅土內幢主)’라는 표현은 어떨까요. ‘신라 영토 내에 있는 고구려 당주(군부대의 지휘관)’라는 뜻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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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단국대박물관이 뜬 충주 고구려비의 탁본. ‘고려대왕’ 등의 기록이 그나마 잘 보이는 한 면 빼놓고는 마모가 심해 판독하거나 내용을 파악하기 힘들다.(출처:고구려연구회의 <중원고구려비연구>, 학연문화사,2000에서)

■“영락 7년(397년) 명문 읽어냈다”

지난 2000년 관련학계 연구자 55명이 4박5일간 모여 잘 보이지 않는 비문을 판독하기 위해 분투해서 겨우 19자(2000년)를 더 읽어냈는데요. 그럼에도 비문의 실체에 다가가기까지는 부족했죠.

특히 비석의 건립연대가 지금까지도 논쟁거리인데요. 여전히 광개토대왕(재위 391~412)설, 장수왕(413~491)설, 문자명왕(492~519)설 등이 혼재합니다.

그런데 2019년 충주 고구려비 발견 40주년을 맞이해서 ‘3D 스캐닝’과 ‘RTI 촬영(Reflectance Transformation Imaging)을 활용해서 비문의 글자를 하나하나 읽어냈는데요. 두 방식은 360도 돌아가며 다양한 각도에서 빛을 쏘아 글자가 가장 잘 보이는 순간 읽어내는 기법이래요.
 

고광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이 읽어낸 글자들. 고 위원은 ‘영락 7년, 즉 397년 광개토대왕 7년에 일어난 사건을 기록했다’고 해독했다.|고광의 위원의 논문에서

고광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이 읽어낸 글자들. 고 위원은 ‘영락 7년, 즉 397년 광개토대왕 7년에 일어난 사건을 기록했다’고 해독했다.|고광의 위원의 논문에서

동북아역사재단과 고대사학회 연구자들은 이 기법으로 얻은 자료를 바탕으로 두차례에 걸쳐 판독회를 열어서 총 19곳에서 23자를 제시했는데요. 가장 중요한 결론은 비석의 앞면 윗단 부분에 비문의 제목(제액)에 해당되는 글자가 존재할 가능성에 대해서는 연구자들이 재차 합의했습니다.

그 부분은 1979년 당시 이병도 박사가 ‘꿈의 계시’ 운운하면서 비석의 제목, 즉 제액이 존재하고 그곳에 글씨가 분명히 있다는 것이었는데요. 그러나 그것이 어떤 글자인지 의견을 모으지 못한채 유보했습니다.

그런데 연구에 참여한 고광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이 흥미로운 판독결과를 발표합니다. 즉 연구자들이 합의하지 못한 글자를 8자 읽었다는 논문을 발표한 겁니다. 즉 기로쓰기 형태의 비석제목에 ‘영락7년세재정유(永樂七年歲在丁酉)’라는 글자가 보였다는 겁니다. 즉 비석은 ‘영락 7년(광개토대왕· 397년)에 일어난 사건’의 기록이라는 겁니다.
 

①고광의 위원이 읽은 ‘영(永)’자. 두계 이병도는 1979년 당시 ‘꿈에서 나타났다’면서 ‘건흥’으로 읽었던 글자다. ②‘락(樂)’자. 두번째 글자의 상부와 하부의 형태를 결합해서 읽었다. ③‘칠(七)’자. ‘영락7’이라면 397년을 의미한다. ④‘년(年)’자. 광개토대왕 비문의 ‘年’자와 비슷한 형태라 한다. |고광의의 논문에서

①고광의 위원이 읽은 ‘영(永)’자. 두계 이병도는 1979년 당시 ‘꿈에서 나타났다’면서 ‘건흥’으로 읽었던 글자다. ②‘락(樂)’자. 두번째 글자의 상부와 하부의 형태를 결합해서 읽었다. ③‘칠(七)’자. ‘영락7’이라면 397년을 의미한다. ④‘년(年)’자. 광개토대왕 비문의 ‘年’자와 비슷한 형태라 한다. |고광의의 논문에서

먼저 고위원은 제액의 첫번째 글자를 ‘영(永)’자로 판단했답니다. 이 글자는 광개토태왕비나 천추총에서 발견된 ‘천추만세영고(千秋萬歲永固)’명 전돌의 ‘永’자와 비슷한 형태”라는거죠. 또 두번째와 세번째 글자는 ‘낙(樂)’과 ‘칠(七)’자가 확실하고 네 번째 글자는 ‘연(年)’자라는 거구요. 다섯번째 글자와 여섯 번째 글자는 ‘세재(歲在)’가 확실하다는 거죠. 고광의 위원은 그 다음 글자에서 세로로 쓰여진 ‘정유(丁酉)’ 간지를 읽었다는데요. 이렇게 가로로 썼다가 세로로 쓰는 경우도 흔치 않지만 있다고 합니다.

이 판독이 맞다면 이 충주 고구려비석은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요. 이 비석이 광개토대왕 때 일어난 일을 기록한 것이며 이 비석을 세운 연대는 ‘397년 이후’라는 얘기가 되겠죠. 광개토대왕의 재위기간이 391~412년이니까 비석의 건립연대는 ‘광개토대왕 재위 시절까지’로도 소급해볼 수 있겠네요. 그렇다면 충주고구려비는 한반도에서 발견된 첫번째 ‘광개토대왕비’일 수도 있다는 얘기죠.
 

고광의 위원은 ①②를 두고 ‘세재(歲在)’로 읽힌다고 했다. ③은 세로로 쓰여진 ‘정유(丁酉)’ 간지를 읽었다는데요. 이렇게 가로로 썼다가 세로로 쓰는 경우도 흔치 않지만 있다고 한다.|고광의의 논문에서

고광의 위원은 ①②를 두고 ‘세재(歲在)’로 읽힌다고 했다. ③은 세로로 쓰여진 ‘정유(丁酉)’ 간지를 읽었다는데요. 이렇게 가로로 썼다가 세로로 쓰는 경우도 흔치 않지만 있다고 한다.|고광의의 논문에서

■제2의 광개토대왕비?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와 신라는 381년(고구려 소수림왕·신라 자비왕) 때 이미 친선(주종)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단적인 예로 광개토대왕 비문에 따르면 광개토대왕 10년(400년) 신라가 왜구의 침입을 받자 고구려는 5만 보기병을 파견, 왜병을 쫓아낸 적도 있죠. 이번 고광의 위원의 판독이 맞다면 고구려와 신라가 형제국 사이이고, 밀월관계를 맺고 있을 때 건립된 것이라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발표를 수용하는 연구자들도 있더라구요.

물론 아직까지 학계의 검증이 필요하겠죠. 최첨단 판독 기술이 개발된다면 보이지 않던 비문을 더 읽어낼 수 있겠죠. 총 500여자 중에 어렴풋 읽어낸 글자까지 포함해도 200여자에 불과하니까요. 소학자라는 비판을 들으면서 꿈의 계시까지 동원해서 비문을 읽어내려던 연구자들의 분투를 기대해봅니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103150600001&code=960100#csidx761b4d9b586a3c19ce6a4ddd5b2e6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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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국으로 치닫는 ‘안철수-오세훈’ 단일화 협상… 그 이유는?

패자가 모든 것을 잃는 단일화 협상, 각자의 길을 갈 수도
 
임병도 | 2021-03-15 09:05:36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서울시장 야권 단일 후보 결정이 나흘 앞으로 다가왔지만, 협상은 지지부진하고 해결책은 보이지가 않습니다.

원래 오세훈 국민의힘 후보와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가 합의한 일정은 TV토론 1회, 17~18일 여론조사, 19일 단일 후보 결정이었습니다. 그런데 토론회는커녕 여론조사 문항조차 합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특히 두 후보가 직접 만나 약속했던 비전발표회가 연기되면서 단일화 협상이 완전히 깨지는 것 아니냐는 추측까지 나왔습니다.

오 후보는 14일 오후 3시 예정됐던 비전발표회를 강행하겠다며 일정을 공지했습니다. 그러나 안 후보는 같은 시간 금천구 노후아파트 방문 일정을 알렸습니다.

안 후보 측은 “현재까진 비전발표회에 대한 실무협상단과 양 후보 간의 추가 논의의 과정이 전혀 없었고, 따라서 비전발표회에 대한 내용이 결정되거나 합의된 사실이 없다”며 입장문을 냈습니다.

결국 두 후보는 전화 통화를 통해 일정 연기에 합의했지만, 실무진 간 단일화 협상의 파국을 막기 위해 부랴부랴 수습에 나선 것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었습니다.

김무성 ‘두 후보가 직접 만나라’… 후보 따로 협상팀 따로?

지난 12일 단일화 실무진 협상이 열렸지만 막말에 고성까지 오가며 파행됐습니다. 14일 비전발표회를 두고 양측의 신경전이 벌어졌습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19일에 단일 후보가 결정되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국민의힘 협상팀은 여론조사 추이를 보면서 단계적으로 단일화 협상에 임하겠다는 전략입니다. 이에 반해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 측은 일괄 타결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15일에 실무진 협상을 재개하기로 했지만, 후보 단일화를 위한 여론조사 문항 등에 대한 협상은 풀어질 기미는 보이지 않습니다.

실무진 간 단일 후보 협상이 계속 불협화음을 내자, 급기야 김무성 전 국민의힘 의원, 이재오 상임고문 등 원로들까지 나섰습니다.

김 전 의원은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단일화를 어렵게 만들고 있는 각 정당은 협상에서 손을 떼고, 두 후보가 직접 만나 단일화를 이루는 결단을 해야 한다”며 신속한 단일화를 촉구했습니다.

두 후보가 만나도 단일화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국민의당은 안철수 후보가 협상팀에 전권을 위임하는 등 한 목소리입니다. 그런데 국민의힘은 후보는 후보, 협상팀은 협상팀이라며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두 후보가 만나 극적으로 타결을 한다고 해도, 국민의힘 내부에서 받아들일지도 현재까지는 의문입니다.

패자가 모든 것을 잃는 단일화 협상, 각자의 길을 갈 수도 

국민의힘이나 안철수 후보나 이번 서울시장 야권 단일 후보로 결정되지 못하면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됩니다. 

만약 안철수 후보가 단일 후보로 결정되면 국민의힘은 서울시장 후보도 내지 못한 제1야당이 됩니다. 이후 대선까지도 당내 후보가 아닌 윤석열 등 제3의 인물에 의해 끌려다니게 됩니다. 당의 존재 자체가 위협받을 수 있습니다.

국민의힘 오세훈 후보가 단일 후보로 결정되면 안철수 후보는 이제 선거에 나설 명분도 능력도 사라집니다. 서울시장 단일 후보에서 진다면 대선조차도 윤석열을 돕거나 제3지대 정당에 국민의당이 흡수되는 선택만 남게 됩니다.  

이번 야권 단일 후보 협상에서 지는 패자는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서로 윈윈이 아니라 죽지 않기 위해 끝까지 싸워야 하는 데스매치입니다.

국민의힘이나 안철수 후보나 ‘아름다운 단일화’는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야권 단일 후보 대신 각자 출마로 끝날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을 잃는 것보다는 낫기 때문입니다.

 
본글주소: http://www.poweroftruth.net/m/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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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최악 ‘유혈 사태’ 최소 39명 사망... 누적 사망자도 130명 넘겨

유엔특사, “잔인한 진압 계속” 군부 비난... 부통령 대행, “여명이 가까워지고 있다” 저항 촉구

김원식 전문기자
발행 2021-03-15 08:28:18
수정 2021-03-15 08:28:18
이 기사는 번 공유됐습니다
미얀마에서 군부 쿠데타에 항의하는 시위대가 14일(현지 시간) 모래주머니 등으로 바리케이드를 친 채 군경과 대치하고 있다. (자료 사진)
미얀마에서 군부 쿠데타에 항의하는 시위대가 14일(현지 시간) 모래주머니 등으로 바리케이드를 친 채 군경과 대치하고 있다. (자료 사진)ⓒ뉴시스/AP 
 

군부 쿠데타에 항의하는 시위대에 14일(현지 시간) 미얀마 군경이 실탄 유혈진압을 감행하고 화재도 겹치면서 최소 39명이 사망하는 최악의 사태가 발생했다. 이에 따라 누적 사망자 수도 130명을 넘긴 것으로 파악된다.

로이터통신은 이날 미얀마에서 유혈 사태가 발생해 최소 39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보도했다. 특히, 사망자 중 22명은 미얀마 최대도시 양곤의 산업지대인 흘라잉타야에서 방화가 발생하면서 나왔다.

미얀마 정치범지원협회(AAPP)는 이날 하루 미얀마에서 시위 참가자 중 최소 38명이 군경에 의해 살해됐다고 밝혔다고 로이터 통신은 전했다. 지난 3일 시위에서도 군경의 유혈 진압으로 38명이 사망한 바 있다.

현지 매체 이라와디는 현재까지 군부 쿠데타에 항의하는 시위로 인해 누적 사망자 수가 최소 130명을 넘겼다고 보도했다. 산업지대인 흘라잉타야에서 이날 발생한 사망자 수도 30명에 달할 수 있다고 전했다.

이날 미얀마 최대 도시인 양곤에서는 시위대가 군경의 진압에 대비해 모래주머니와 철조망 등으로 바리케이드를 구축한 채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군경은 최루탄과 함께 실탄을 발사하면서 무자비하게 시위대를 해산했다고 현지 언론들은 전했다.

 

미얀마 군사정부는 이날 오후 시위 사태가 악화한 양곤 내 흘라잉타야와 쉐삐따 등 인구 밀집 지역 2곳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또 야간 통행 금지도 강화하고 있지만, 시민들의 항의 시위는 계속되고 있다고 현지 매체들은 보도했다.

크리스틴 슈래너 버기너 유엔 미얀마 특사는 “미얀마에서 잔인한 진압과 고문이 계속되고 있다”면서 미얀마 군부를 강력히 비난했다고 로이터통신은 전했다. 그는 “국제사회는 미얀마 국민, 그리고 그들의 민주적 열망과 연대하는데 힘을 합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앞서, 군부의 쿠데타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진 ‘연방의회 대표위원회(CRPH)’가 임명한 만 윈 카잉 딴 부통령 대행은 전날 시민들이 군부의 탄압에 강력히 저항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페이스북 연설에서 “지금은 이 나라에 가장 어두운 순간이지만 여명이 가까워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김원식 전문기자

국제전문 기자입니다. 외교, 안보, 통일 문제에 관심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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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신문 솎아보기] “좀스럽다” 대통령 발언에 ‘국민 겁박’ ‘위기감 발로’

문 대통령 사저 MB 사저와 비교한 조선일보
서울시장 선거 여론조사, 야권 단일화시 우세... 단일화 지지부진 오세훈·안철수에 동아일보 ‘직접 담판’ 촉구

 

 

조선일보는 15일 1면 머리기사로 “오세훈 안철수 단일화 땐 박영선에 10%p 앞서”를 냈다. 조선일보·TV조선이 칸타코리아에 의뢰해 실시한 4·7 서울시장 보궐선거 후보 선호도 조사 결과 오세훈 국민의힘 후보와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 중 누구로 단일화돼도 더불어민주당 박영선 후보를 10%포인트 이상 차이로 앞섰다. 

안철수 후보로 야권 단일화가 될 경우 안철수 후보 45.2%, 박영선 후보 33.8%로 나타났다. 오세훈 후보로 단일화가 될 경우 오세훈 후보 46.5%, 박영선 후보 34.2%였다. 다만, 야권 단일화가 성사되지 않아 민주당·국민의힘·국민의당 등 3자 구도로 선거가 치러질 경우 박영선 후보 28.8%, 오세훈 후보 27.2%, 안철수 대표 19.9%를 기록했다. (서울 만 18세 이상 남녀 806명, 유무선 전화면접, 응답률 20.9%, 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 ±3.5%포인트)

▲ 15일 조선일보 기사.
▲ 15일 조선일보 기사.

다른 여론조사에서도 결과는 비슷했다. SBS가 넥스트리서치에 의뢰해 14일 발표한 조사에서는 오세훈 국민의힘 후보로 단일화가 되면 지지율 42.3%로 박영선 후보(35.0%)에 앞섰다. 안철수 후보로 단일화할 경우 안철수 후보(45.4%)가 박영선 후보(33.6%)에 비해 11.8%p 우세했다. (서울 만 18세 이상 남녀 1008명, 무선 전화면접, 응답률 25.6%, 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 ±3.1%포인트)

머니투데이가 미래한국연구소에 의뢰해 실시한 조사에서는 오세훈 후보 단일화시 46.2%로 박영선 후보(36.1%)를 앞섰고, 안철수 후보 단일화시 46.7%로 박영선 후보(34.8%)에 앞섰다. (서울 만 18세 이상 남녀 802명, 유무선 자동응답방식(ARS), 응답률 4.5%, 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 ±3.5%포인트)

* 여론조사 관련 자세한 내용은 중앙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 15일 주요 종합일간지 1면
▲ 15일 주요 종합일간지 1면

단일화 지지부진 야권에 동아일보 단일화 ‘촉구’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야권 후보가 우세한 여론조사 결과가 잇따라 발표됐지만 단일화라는 ‘변수’가 남아 있다. 오세훈, 안철수 두 후보의 단일화 논의는 결실을 내지 못하고 있다.  조선일보는 “오 후보와 안 대표가 적합도, 경쟁력 조사에서 모두 오차범위 내 접전을 벌이면서 그만큼 단일화 합의가 어려워질 것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고 했다.

경향신문은 “두 후보의 직접 대화를 통해 판이 깨질 뻔한 상황을 겨우 이어붙였지만 여론조사 문항 등 핵심 쟁점에는 이견이 남아 있다”며 “특히 야권 지지율이 오르면서 협상 여지가 더 줄어들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고 지적했다. 

경향신문은 “핵심 쟁점은 여론조사 문항이다. 국민의힘은 ‘국민의당이 경쟁력 문구(후보 경쟁력을 묻는 여론조사 문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토론회 일정 등도 합의 못한다며 버틴다고 주장한다. 안 후보가 토론을 피하려고 시간을 끄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도 나온다”며 “반면 국민의당은 ’이길 후보를 뽑으려면 경쟁력 조사가 순리‘라고 주장한다”고 전했다. 

▲15일 중앙일보 기사.
▲15일 중앙일보 기사.

 

▲ 15일 동아일보 사설
▲ 15일 동아일보 사설

야권 우세 속에서 단일화 논의가 지지부진하자 동아일보는 “김칫국 마시는 야 단일화 협상, 유권자 인내 시험하려 드나” 사설을 내고 단일화를 촉구했다. 동아일보는 “이런 여론조사 결과가 본선에까지 이어질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며 “오, 안 후보가 대승적 결단 없이 ’내가 아니면 안 된다’ 식으로 벼랑 끝까지 가는 진흙탕 싸움을 벌인다면 민심의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동아일보는 양 후보에 실무 협상에 기대지 말고 직접 담판을 짓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했다.

문 대통령 ‘좀스럽다’ 글에 쏟아진 비판

이날 아침신문은 12일 문재인 대통령의 SNS 게시글과 이로 인한 논란을 적극적으로 다뤘다. 12일 문재인 대통령은 SNS를 통해 사저 의혹과 관련 “선거 시기라 이해하지만, 그 정도 하시지요. 좀스럽고 민망한 일입니다”라고 밝혔다. 

보수신문은 발언을 적극 비판하며 쟁점화했다. 조선일보는 “문 사저 796평, MB의 2.5배... 경호동 건축비는 박의 2배” “문 ‘좀스럽다’ 글, 청 일부서도 말려... 여 내부 ‘대통령이 직접 쓴 것 맞나’” “야 ‘국민 겁박하나... 사저 부지 논란 문 대통령이 해명하라’” 등 3건의 기사를 냈다. 중앙일보는 “문 대통령 ‘좀스럽고 민망한 일’ 페북 글에 댓글 1만9000개‘” 기사를 통해 “문 대통령의 발언으로 인한 정치적 논란이 커지고 있다”고 했다.

▲ 15일 조선일보 기사.
▲ 15일 조선일보 기사

조선일보는 문 대통령 사저를 전직 대통령들 사저와 비교한 기사를 통해 “문 대통령 양산 사저는 면적과 국고 투입 규모에서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 사저와 비교해 작지 않다”며 “문 대통령 사저 부지 면적이 이 전 대통령 사저보다 2.5배 큰 셈이다. 경호시설 건축 예산은 문 대통령 사저가 박 전 대통령 사저보다 21억8900만원 더 많은 39억8900만원이 투입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했다. 조선일보는 팔면봉을 통해 “문, 사저 논란에 ‘어느 나라가 물고 늘어지나.’ 나라는 몰라도 MB사저로 그리 했던 정파는 기억 납니다만...”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다만, 조선일보 기사 후반부에는 법 개정으로 외각경비가 경찰에서 경호처로 이관돼 방호직원 근무 공간 증가 등에 따라 예산 28억원이 증가해 경호 관련 비용 62억원에 포함됐다는 사실은 후반부에 청와대 관계자 멘트로 다뤘다. 이들 신문은 사저 면적과 예산을 비교했으나 서울과 경남 양산의 지역 차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한겨레, 문 대통령 메시지 변화에 주목

사저 논란을 쟁점화하는 보수신문과 달리 중도·진보 성향 신문에선 다른 결의 보도가 이어졌다. 한국일보는 사설을 통해 정부여당과 야당 모두를 비판했다. 한국일보는 문재인 대통령 페이스북 글을 가리켜 “일을 키웠다”고 지적한 뒤 윤영석 의원의 ‘감정조절 장애’ 등 발언을 언급하며 “이어진 여야 공방은 더 한심하다”고 했다. 한국일보는 “민심을 못 읽고 냉소를 부르기로는 여야가 뒤지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 15일 한겨레 기사
▲ 15일 한겨레 기사

한겨레는 문재인 대통령의 바뀐 소통 방식에 주목했다. 한겨레는 문재인 대통령의 LH 직원 투기 논란, 사저 논란에 대해 전과 달리 강경한 메시지를 내놓았다며 “전문가들은 초조함 때문이라고 본다. 정권 내내 가장 큰 위협 요인이었던 부동산 문제가 결국 임기 말까지 발목을 잡은 데 대한 당혹감도 깔려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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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총장이 ‘대망’ 품고 수사 지휘했다면?

등록 :2021-03-14 08:53수정 :2021-03-14 09:01
 
[토요판] 뉴스분석
검찰총장 퇴임 뒤 공직 제한했던 이유

1995년 사정정국 주도 김도언 검찰총장
퇴임 4일 만에 여당 지구당 위원장
“YS, 통치 뒷받침한 직할부대 배려”
국회, ‘2년간 공직·정치 금지’ 입법

1997년 헌재, 시행 6개월 만에 “위헌”
‘검찰총장=마지막 공직’ 굳어졌지만
윤석열, 정치 입문하면 관행 깨져
‘별의 순간’ 찾아 떠나도 논란 계속
문재인 대통령이 윤석열 검찰총장의 사의를 수용한 4일 저녁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들머리에서 윤 총장이 퇴임식을 마치고 차에 오르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문재인 대통령이 윤석열 검찰총장의 사의를 수용한 4일 저녁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들머리에서 윤 총장이 퇴임식을 마치고 차에 오르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퇴임 직후 대선후보 적합도 1위에 오르면서 대선판이 요동치고 있다. 1996년 개정된 검찰청법에 따르면, 윤 총장의 대선 출마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 법은 시행 6개월 만에 효력을 잃었고 검찰총장의 대선 출마에는 윤리적·도의적 비판만 가능할 뿐이다. 25년 전 국회는 왜 검찰총장의 정치 입문을 금지했을까. 당시의 입법 정신은 지금도 유효한 것일까.

 

지난 4일 윤석열 검찰총장이 사퇴했다. 잔여 임기는 4개월, 대선으로부터는 1년 남짓 앞둔 시점이었다. 문재인 정부에 맞설 강력한 대항마를 기다리던 야권 지지자들은 “어떤 위치에 있든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힘을 다하겠다”는 그에게 환호했다. 사퇴 이튿날 <티비에스>(TBS) 의뢰로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가 전국 18살 이상 102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대선후보 적합도 조사에서 윤 전 총장은 1위(32.4%)로 뛰어올랐다.(자세한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 심의위원회 누리집 참조) 본인의 의지, 대중적 호응을 종합하면 윤 전 총장의 정치권 입문은 초읽기에 들어갔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2000년대 들어 굳어진, ‘검찰총장은 마지막 공직이어야 한다’는 당연한 명제가 흔들리게 되는 것이다.

검찰총장, 퇴임 4일 만에 여당 정치인

“진정으로 검찰의 정치적 중립이 지켜지려면 검찰총장이 퇴임 뒤 정치는 물론 일체의 공직을 맡지 않는 풍토가 정착돼야 한다는 데 많은 검사들이 동의해왔다.”

윤 전 총장을 비판한 게 아니다. 26년 전인 1995년 9월20일 <한겨레>는 김도언 검찰총장의 여당행에 ‘대검의 한 관계자’가 이렇게 말했다고 보도했다. 김 전 총장은 그해 9월15일 임기 2년을 채우고 퇴임한 뒤 4일 만에 여당인 민주자유당의 부산 금정을 조직책(지구당 위원장)으로 선정됐다. 김영삼 대통령의 아성인 부산의 지역구를 받았으니 이듬해 4월 총선을 앞두고 건넨 ‘금배지 선물’이었다.

당시 <조선일보>는 외부 수혈 성격이었던 민자당의 조직책 선정을 두고 “김도언 전 검찰총장(부산 금정을), 정형근 전 국가안전기획부 1차장(부산 북·강서갑) 등 검찰과 안기부 등 핵심부서에서 김 대통령의 통치를 직접 뒷받침해온 ‘직할부대’ 인사들도 발탁됐다. (…) 부산 동래고 출신의 김 전 검찰총장은 김 정부 출범 후 첫 임기제 검찰총장으로서 임기 만료와 동시에 지역구를 맡겨 공백기를 주지 않으려는 김 대통령의 ‘배려’가 있었다”고 풀이했다.

검찰의 공정성·중립성이라는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던 권위주의 정권 시절, 검찰총장의 법무부 장관 영전은 허다했지만 정치권으로 직행하는 경우는 희귀했다. 게다가 당시는 문민정부 시절 사정 바람이 불어 야당을 몰아치던 시절이었다. 1995년 야당의 승리로 끝난 6·27 전국동시지방선거 뒤 검찰은 민선 자치단체장 수사에 열을 올렸고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총재의 싱크탱크인 아태평화재단 후원금 수사에도 착수했지만, 노태우 전 대통령의 5천억원 비자금 내사는 조용히 덮었다.

그리고 그 정점에 ‘김도언 검찰총장’이 있었다. 그랬던 검찰총장이 퇴임 4일 만에 여당 정치인으로 변신했으니, ‘재직 중 편파수사’와 ‘퇴임 뒤 자리 보장’ 간의 대가성을 의심받기에 충분했다. 야당인 국민회의는 “야당에 대해 표적사정의 칼을 휘두르던 김 전 총장이 임기를 마치자마자 조직책을 받은 것은 야당 탄압에 앞장섰던 공로에 대한 표창”이라며 비판했고 검찰총장의 공직 취임을 제한하는 입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1995년 5월22일 전국공안부장회의를 주재한 김도언 검찰총장. 그해 6월 전국지방선거를 앞두고 소집한 회의였다. 한겨레 자료사진
1995년 5월22일 전국공안부장회의를 주재한 김도언 검찰총장. 그해 6월 전국지방선거를 앞두고 소집한 회의였다. 한겨레 자료사진
검사 출신 반발 뚫고 ‘공직·정치 제한’

이듬해인 1996년 4월11일 15대 총선이 치러졌고, 김도언 전 총장은 부산 금정을에서 당선됐다. 민자당이 이름을 바꾼 신한국당의 당선자 139명 중 1명이었다. 신한국당이 총선 직후 인위적으로 단독과반을 채우기 위해 야당 당선자 빼오기에 착수하자 야권은 거세게 반발했다. 국민회의와 자유민주연합은 ‘15대 총선이 편파수사, 편파방송에 따른 부정선거였다’며 관련 법 개정 등을 요구했다.

야당이 15대 국회 원구성 협상과 이 사안을 연계하면서 결국 정치권은 여야 동수로 제도개선특위를 구성해 이를 논의하기로 합의했다. 1996년 8월 정치관계법·방송관계법 소위가 꾸려졌고, ‘선거 관련 공직자의 중립성 제고를 위한 관계법률심사소위’의 핵심의제가 검찰·경찰의 중립화 방안이었다. 특위에서 야당은 검찰총장·경찰청장 임명 시 인사청문회와 국회 동의, 퇴임 뒤 4년간 공직 취임 제한을 주장했다.

그러나 지방선거에서 참패해 지역 기반을 잃고 대선을 준비해야 하는 여당에 검경 중립화는 달갑지 않은 과제였다. 야당은 여당의 태업을 비판하며 공세 수위를 높였고, 구체적 수치를 들어가며 검찰의 선거법 위반 수사가 공정하지 못하다고 주장했다.

1996년 11월19일 열린 특위 회의록을 보면, 그해 9월9일 기준 선거법 위반으로 입건된 국회의원 후보는 신한국당이 76명으로 월등히 많았고, 국민회의는 21명, 자민련은 18명 차례였다. 그러나 실제 기소된 이는 신한국당과 국민회의가 각각 2명, 자민련 3명, 무소속 1명이었다. 입건 대비 기소율로 따지면, 자민련이 17%, 국민회의 9.5%였지만, 신한국당은 2.6%에 그친 것이다. 직무 관련 수사선상에 오른 자치단체장도 전체 49명 중 40명이 야당, 기소된 6명 중 5명이 야당이었다. 김진배 의원(국민회의)은 “야당 당적의 자치단체장들만 나쁜 짓을 골라서 하고 여당에 있는 자치단체장은 이슬만 먹고 사는 사람들이겠느냐”며 검찰의 표적수사를 비판했다.

검경 중립화 방안은 선거법·정치자금법·방송법 개정안 등과 함께 그해 12월9일 여야 3당 원내총무 간 합의로 결론이 났다. 검찰총장·경찰청장은 퇴직일로부터 2년 동안 모든 공직 취임을 금지했고, 검찰총장은 같은 기간 정당 입당이나 발기인 참여도 제한했다. 제한 기간을 4년에서 2년으로 줄이고 검찰총장 인사청문회 규정을 빼면서 여야 간 절충이 이뤄진 것이었다.

여야 원내지도부가 입법에 합의했지만 검사 출신 여당 의원들은 이 법이 헌법에 어긋난다며 반발했다. 1996년 12월13일 열린 제도개선특위에서 홍준표 신한국당 의원은 “공무담임권을 전면적으로 배제하는, 검찰총장을 전과자와 동일시하는 위헌적 법률”이라며 “정당의 발기인이 되거나 당원이 될 수 없다는 조항도 위헌적 소지가 있다”고 주장했다.

법안이 법제사법위원회로 넘어가자 이번에는 안상수 의원이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냐. 법 같지도 않은 법”이라고 흥분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강재섭 법사위원장이 “동료 의원끼리 추궁하는 것처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마시고 조용하게 질의하자”며 진정을 시켜야 할 정도였다. “부드럽게 하겠다”며 발언을 이어간 안 의원은 검찰청법 개정안을 성안한 이건개 자민련 간사와 설전을 벌였다. 이 의원도 검사 출신이었다. 요약·정리한 논쟁에는 퇴임한 검찰총장이 2년간 모든 공직에 취임할 수 없도록 한 이 법의 명분과 이에 대한 반발 논리가 응축돼 있다.

이건개 검찰총장이 그만두고 나서 공직 취임이나 당적을 평생 제한하면 위헌 소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재직 중에 검찰권 행사를 불공정하게 했다는 인식을 불식시켜주기 위해서 짧은 기간 동안에 그런 희생을 강요한 것입니다.안상수 헌법상 기본권을 제한하는 것도 본질적인 권리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최소한에 그쳐야 되는 겁니다.이건개 2년간 제한이라는 것은 최소한의 제한입니다.안상수 ‘모든 공직에 취임할 수 없다’는 것은 본질적인 공무담임권을 침해하는 것 아닙니까? 최소한에 그쳐야 한다면 ‘검찰총장의 직무의 공정성을 해칠 수 있는 법무장관이라든가 국회의원이라든지 한정해서 2년간 취임할 수 없다’, 이 정도면 검찰총장의 중립성 확보하기 위해 제한을 했다는 이해를 받을 수 있을 겁니다.이건개 집권여당의 총재가 국가원수를 하면서 막강한 권한이 집중돼 있기 때문에 모든 공직에 임명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권한이 (대통령) 1인에게 과잉되게 집중돼 있기 때문에 (검찰총장은) 최소한 모든 공직에 대해 2년간 제한을 해야 됩니다.안상수 외국에 검찰총장이 퇴임 후 2년 이내에 모든 공직에 취임을 금지하는 이런 입법례를 봤습니까?이건개 외국의 예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한국의 현실이 중요한 것이지. 막강한 검찰권을 행사하고 그것이 특정 정당을 위해서 검찰권을 행사했다는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입법이 된 겁니다.

이런 토론 끝에 검찰청법 개정안은 법사위에서 가결됐고 그날 본회의에서도 통과됐다. 앞으로 검찰총장은 퇴임 뒤 2년간 다른 공직에 오를 수 없고 정치 활동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헌재, 검찰 주장대로 위헌 결정

그러나 이 법은 곧바로 위헌 심판대에 올랐다. 1997년 1월 시행 직후 김도언 후임인 김기수 검찰총장과, 고검장 7명이 헌법소원을 낸 것이다. 여야 합의로 통과된 법안에 검찰 수뇌부가 불복하며 집단행동에 나선 것이 부적절하다는 비판이 뒤따랐지만 ‘검찰 불신을 전제로 한 이 법률이 검찰 수뇌부의 자존심을 건드렸다’는 분석도 나왔다.

그리고 6개월 뒤인 1997년 7월 헌법재판소는 재판관 8 대 1 의견으로 위헌 결정했다. 헌재는 “검찰총장 퇴임 후 2년 이내에는 법무부 장관과 내무부 장관 직뿐만 아니라 심지어 국공립대학교 총·학장, 교수 등 학교의 경영과 학문연구직에의 임명도 받을 수 없게 돼 있다”며 “직업 선택의 자유와 공무담임권을 광범위하게 제한하는 것으로서 입법 목적에 비춰보면 그 제한은 필요 최소한의 범위를 크게 벗어난 과잉된 것”이라고 판단했다.

또 정당 가입 금지도 “정치적 결사의 자유, 참정권(선거권과 피선거권)을 침해하는 합리성이 결여된 차별취급규정”이라고 했다. 검찰 수뇌부 주장이 대부분 받아들여진 결과였다. 조승형 재판관만이 “검찰총장이 유혹될 수 있는 퇴임 후의 보다 나은 공직은 국무총리·국무위원 기타 임명공직 중 선거 관련 정보·수사·재판 업무를 담당하는 중앙기관의 장이라 할 수 있을 뿐 이 범위를 벗어난 임명공직에 대해 (검찰총장이) 연연하리라고는 기대되지 않는다”며 “금지기간 2년은 입법 목적이나 국민 법감정에 비춰 직업 선택의 자유나 공직담임권을 최소한으로 제한했다고 봄이 타당하다”고 했지만 외로운 소수의견이었다. 이렇게 검찰총장 퇴임 뒤 2년간 공직과 정치 참여를 제한하는 규정은 6개월 만에 효력이 사라졌다.

윤 전 총장을 제외한 대한민국 역대 검찰총장 42명 중 퇴임 뒤 다른 공직을 경험한 이는 모두 19명이다. 16명이 법무부 장관으로 영전했고, 국회의원 경험자가 3명, 정보부장(중앙정보부·안기부) 2명, 대법원장, 감사원장, 감사원 사무총장, 내무부 장관, 대통령 비서실장이 각 1명씩 있다.

검찰총장이 다른 공직의 징검다리였던 사례는 1999년 5월 법무부 장관으로 옮겨간 김태정이 마지막이다. 그 뒤 검찰총장에 오른 14명(박순용~문무일)은 모두 정치권·공직과 거리를 뒀다. 검찰이 신뢰를 받기 위해서는 수사지휘권자인 검찰총장이 마지막 공직이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자연스레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윤 전 총장이 정치에 입문하게 되면 이 관행은 깨지게 된다.

검찰총장들이 정권에 빌붙어 더 좋은 자리로 보상받았던 과거 행태와 비교하면 문재인 정부와 불화하고 사퇴한 윤 전 총장은 상황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검찰이 수사를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현실은 여전하다. 윤 전 총장이 ‘서 있는 자리’가 다르다고 해도,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윤석열 검찰총장’의 과거 수사지휘는 공정성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윤 전 총장은 ‘별의 순간’을 찾았을지 몰라도 검찰에 남아 수사해야 하는 검사들도 똑같은 의심과 논란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다.

윤 전 총장의 사퇴설이 나온 뒤 검찰 내부에서는 “중대범죄수사청 반대의 진정성이 훼손될 텐데 왜 지금 사퇴하느냐”, “사퇴의 진정성이 왜곡되지 않도록 ‘정치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함께 해달라”는 요구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윤 전 총장은 이를 모두 물리치고 떠났다. 한 중견 검사는 “윤 전 총장이 어느 순간부터 대통령을 하겠다는 뜻이 생긴 것 같지만, 검찰 조직과 후배를 생각하면 정치를 하지 말아야 한다”며 “윤 전 총장이 개인적으로 희생하고 헌신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욕심이 큰 사람”이라고 말했다.

김태규 기자 dokbul@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986645.html?_fr=mt1#csidx7b4d513958a5f9f944eb6bf6be09ae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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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배 협동의 경제학] 이재용 돈 없다고 걱정해주는 한심한 언론

이완배 기자 peopleseye@naver.com
발행 2021-03-14 09:20:48
수정 2021-03-14 09:20:48
이 기사는 번 공유됐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쓸 데 없는 걱정이 재벌 걱정, 연예인 걱정, 건물주 걱정이라고 했던가? 그런데 요즘 이 쓸 데 없는 걱정을 언론이 유난히 열심히 한다. 특히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이 조금이라도 손해 볼까봐 노심초사, 전전긍긍 하는 언론이 한 둘이 아니다. 이재용 부회장이 자기 밥줄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니 그들의 전전긍긍이 이해가 가지 않는 바는 아니다.

그런데 그것도 어느 정도껏이다. 예를 들어 3월 8일자 『머니투데이』의 ‘[단독]현금 없는 이재용…수천억 신용대출 받아 상속세 낸다’ 기사는 심해도 너무 심했다. 이재용 씨가 신용대출을 받으니 걱정돼 죽겠나보다. 이 사람들은 이재용 심기가 상할까봐 밤에 잠이 안 오고 막 그러나?

기사 내용을 요악하자면 이재용 일가가 총 11조 원이 넘을 것으로 예상되는 상속세를 마련하는 데 어려움을 겪어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상속세가 11조 원인 사람을 보면 ‘어이쿠, 누구 자식인지 부모 잘 만나 호강하네’라며 부러워하는 게 정상이지, ‘어이쿠, 상속세가 11조 원이나 되다니 불쌍해 죽겠네’라고 생각하는 게 정상인가?

아무튼 이 오지랖 넓은 기사는 내용조차 허접해서 별로 소개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딱 한 대목,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부분이 있어 이를 검토해보고자 한다. 불쌍한(!) 이재용 씨가 집에 보관해둔 유명 미술작품을 팔아서라도 돈을 마련하려고 하는데 그게 여의치 않다며 걱정하는 대목이다.

기부 압박은 누가 한 건가?

 

이 부분에 대한 『머니투데이』 기사를 요약하면 이렇다.

① 상속세 마련을 위해 이재용 일가가 미술 작품 1만 2,000~1만 3,000점을 팔 수도 있는데, 이들 작품의 감정가는 3조 원 정도다.
② 미술계에서는 “삼성가문이 이 작품을 기증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국가에 헌납했다가 훗날 예상치 못한 오해와 시비에 휘말릴 수도 있어 기증은 어려울 것이다.
③ 그래서 이재용이 미술품은 못 팔고 보유 주식은 팔아야 하는 황당한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

기사는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으면서 재계 관계자의 이야기를 슬쩍 끼워 넣는다. “현금이 없어 빚을 내고 여차하면 지분까지 매각해야할지도 모르는데 ‘기부하라’는 일부 여론의 압박 때문에 미술품을 팔지 못한다면 황당한 경우”라는 게 그 코멘트다.

진짜 웃기는 짬뽕들 아닌가? ‘기부하라’는 여론의 압박? 도대체 누가 이재용 보고 소장 미술품을 기부하라고 압박했나? 삼성가에 대해 책까지 쓴 나도 그런 주장을 한 적이 없다. 그러면 기부하라고 압박한 자는 기사를 쓴 기자 너님이냐? 아니라고? 그러면 나도, 너님도 아닌데 도대체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하고 다니는 거냐?

행여 미술계에서 그런 압박을 한다는 헛소리를 할까봐 못 박는다. 삼성 일가는 미술계에서 유명한 큰손이었다. 워낙 미술품을 고가에 잘 사줘서 미술계는 그야말로 삼성 일가에 껌뻑 죽었다. 그런 미술계가 감히 이재용에게 “미술품을 기부하라”고 ‘압박’을 한다고? 웃기는 소리는 작작들 하자.

‘삼성가가 미술품을 기증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 것은 올해 초다. 그것도 몇몇 언론이 [단독]마크 붙여가며 떠든 이야기들이다. 다른 언론은 오히려 상속세 물납제, 즉 ‘미술품으로 상속세를 대신하면 어떤가?’라는 이야기를 흘리고 다녔다.

기부설을 흘리면서 동시에 ‘그런데 돈 대신 이걸로 세금을 내면 안 될까요?’라고 간을 본 것이다. 자기들이 그렇게 떠들어놓고 그걸 여론의 압박이란다. 아, 니들이 여론 그 자체여서 그런 거냐?

나는 이재용과 그 일가가 저지른 파렴치한 범죄에 대한 대가를 반드시 치러야 한다고 굳게 믿는 사람이다. 하지만 ‘죗값은 미술품으로 치렀으면 좋겠어요’라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기부하라는 여론의 압박이라는 건 실체가 없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왜 기부 압박을 받는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며 엄살을 떠시는지 당최 이해가 가지 않는다.

미술품을 기부하지 못하는 황당한 이유

둘째, ‘미술품을 국가에 헌납했다가 훗날 예상치 못한 오해와 시비에 휘말릴 수도 있어 기증은 어려울 것이다’라는 대목에서는 진심으로 피식 웃고 말았다. 만약 이재용이 미술품을 국가에 헌납한다면 그건 칭찬받을 일이다. 나도 칭찬하겠다.

하지만 전제가 있다. 그 미술품이 정당한 돈으로 구입한, 즉 순수한 이재용 일가의 재산이어야 한다는 전제다. 자기가 열심히 일해서 번 돈으로 정당하게 구입한 미술품을 국가에 헌납하는데 누가 그걸 비판하나? 당연히 칭찬하지.

심지어 기부를 하지 않아도 괜찮다. 기부는 누가 강요해서 하는 게 아니다. 따라서 깨끗한 돈으로 구입했다면 주저 말고 구입 자금 출처를 밝힌 뒤 미술품을 팔아 상속세 재원으로 사용하라.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 아무리 그렇게 하라고 해도 이재용 일가는 절대 자금 출처를 밝히지 못할 것이라는 데 내 한 달치 최저임금을 걸겠다. 왜냐고? 정당한 경로로 구입한 게 아닐 테니까! 내 추정이지만 3조 원에 이른다는 그 미술품 중 상당수는 비자금으로 구입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1월 18일 서울 서초동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국정농단 사건 파기환송심 선고 공판에 출석하는 모습.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1월 18일 서울 서초동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국정농단 사건 파기환송심 선고 공판에 출석하는 모습.ⓒ김철수 기자

2007년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에 의해 시작된 삼성 비자금 사건 때 이런 일이 있었다. 김용철 변호사는 “(이건희 회장의 부인) 홍라희 관장이 홍송원 서미갤러리 대표를 통해 뉴욕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800만 달러에 달하는 프랭크 스텔라의 ‘베들레헴 병원’과 716만 달러인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 등을 구입했다. 모두 삼성 비자금으로 구입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 변호사는 증거로 미술품 리스트와 대금을 어떻게 외화로 지급을 했는지를 정리한 문서를 공개했다. 또 그는 “2002년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을 이재용이 직접 봤다는 확인이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특검은 수사 끝에 “대부분의 미술품을 이건희 일가가 개인 자산으로 구입한 것”이라고 결론지어 버렸다.

문제는 특검 수사가 절대로 면죄부가 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에버랜드를 ‘애벌랜드’로 잘못 발음한 특별검사 조준웅은 이건희에게 면죄부만 왕창 주고 사건을 마무리했다. 그 덕에 이건희는 역사상 전례가 없는 초대형 비리를 저지르고도 집행유예 5년으로 감옥행을 피했다. 당시 수많은 시민단체들이 지적했듯 그 수사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이건희 봐주기 수사였다.

미술품에 관한 수사도 그랬다. 특검은 삼성그룹 임원 9명 명의의 차명계좌에서 국제갤러리와 서미갤러리 등으로 140억 원 가량이 흘러들어간 사실을 밝혀냈지만, 그 돈의 출처가 어디였는지는 정작 캐지 않았다. 심지어 이건희 일가에게 미술품을 판 브로커 홍송원 서미갤러리 대표는 각종 재벌들이 미술품으로 비자금을 세탁할 때마다 이름을 올린 인물이었다. 의혹은 널려있는데 특검이 이를 덮은 것이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그 미술품들, 기부를 하건 상속세로 대신 내건 이재용 마음대로 해도 좋으니 이참에 무슨 돈으로 그것들을 구입했는지 다 까보자. 당당하게 구입했다면 못 까볼 이유가 도대체 뭐냔 말이다.

결국 이 기사의 요지는 이렇게 해석된다. 이재용이 미술품을 팔아 상속세를 마련하고 싶은데 아무리 봐도 미술품 구입 자금 출처가 구린 것 같다. 그러니 불쌍한 이재용을 생각해서라도 구입자금 출처를 묻지 않는 것이 도리(!)다, 뭐 이런 이야기 아닌가?

제발 상식적으로 생각을 하자. 누군가가 훔친 장물을 사회에 기부했다. 그러면 그걸 칭찬해줘야 하나, 절도죄를 물어야 하나? 답은 당연히 후자다. 이게 이해가 안 되면 법치국가의 시민으로 살 권리를 내려놓아야 한다.

그런데도 언론이 이 이야기를 굳이 꺼내면서 “우리 이재용 님은 정~말 불쌍합니다. 상속세가 3조 원인데 돈이 없어요” 이러고 자빠졌다. 나는 이 몰상식이 정말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 삼성과 이재용이 이 사회의 상식을 얼마나 많이 허물고 있는지 또 한 번 절감한다. 이들의 범죄를 더 단호히 처벌하고, 무너진 상식을 다시 세워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완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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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쪽 안보리 성명에, 미얀마 청년들 종로 한복판 길 위에 몸을 던지다

[포토] 미얀마 민주화 기원하는 미얀마 청년들의 오체투지

앞서 유엔은 10일(현지시간) 안보리 이사회를 열고 미얀마 군부의 폭력을 규탄하는 성명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그러나 AP 등 외신에 따르면, 중국과 러시아, 인도, 베트남 등의 반대로 '쿠데타'를 명시하지 못했고 실질적 제제가 가능한 제제결의가 아닌 의장성명에 그쳤다.

 

12일 오후 재한미얀마청년연대는 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 등과 함께 서울 한남동 미얀마대사관에서 종각역 유엔인권위원회까지 오체투지를 시작했다.

 

▲ 12일 오후 미얀마 청년들이 고국의 쿠데타를 규탄하며 미얀마 대사관 앞에서 피켓을 들었다. ⓒ프레시안(최형락)
▲ 이날 오체투지에는 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 재한미얀마청년연대, 미얀마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한국 시민사회단체 모임 등이 참가했다. ⓒ프레시안(최형락)
▲ 코로나 방역 기준을 맞추기 위해 8명이 오체투지에 나섰다. ⓒ프레시안(최형락)
▲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10일(현지시간) 미얀마 군부의 폭력 규탄 성명서에 합의했다.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최형락)
▲ 이날 오체투지는 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의 주도로 이뤄졌다. ⓒ프레시안(최형락)
▲ 오체투지에 참여한 미얀마 청년ⓒ프레시안(최형락)
▲ 오체투지에 나선 이 청년은 고국의 이야기를 하다 눈물을 흘렸다. ⓒ프레시안(최형락)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1031215373919395#0DKU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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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협력 끊겠다"…미얀마 군부 첫 제재

김유진 기자 yjkim@kyunghyang.com

입력 : 2021.03.12 18:31 수정 : 2021.03.12 21:04

 

정부가 12일 군부 쿠데타로 유혈 사태가 발생한 미얀마에 대한 첫 제재 조치를 발표했다. 민주화 시위를 유혈 진압한 군·경과의 협력을 중단하고, 전략물자 수출을 보다 까다롭게 하는 것이 골자다. 문재인 대통령이 아시아 정상 중 가장 먼저 미얀마 당국의 대응을 규탄하는 입장을 밝힌 데 이어, 정부 차원에서 실제 행동에 나선 것이다.

외교부, 기획재정부, 국방부, 법무부 등 7개 부처는 이날 “우리나라를 포함한 국제사회의 거듭된 요구에도 불구하고 미얀마 군과 경찰 당국의 무력 행사로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하고 있다”며 국방·치안, 전략물자 수출, 개발협력 등 3개 분야의 대응 조치를 발표했다.

국방부는 미얀마 측과 추진하던 국방정례협의체나 미얀마 군 장교에 대한 신규 교육훈련을 중단한다. 경찰청 역시 치안 분야 업무협약(MOU) 체결을 중단할 계획이다. 화학물질 등 산업용 물자 수출 심사를 강화하고, 2019년 1월 이후 수출된 적이 없는 최루탄 등 군용물자의 경우도 수출을 아예 불허한다. 정부는 또 인도적 목적의 사업을 제외하고 개발협력사업 전반을 재검토하기로 했다.

아울러 한국 내에 거주하는 미얀마인들에 대해선 인도적 특별체류조치를 실시해 미얀마 정세가 안정될 때까지 임시 체류자격으로 국내에 머물 수 있도록 했다. 현재 국내에는 근로자와 유학생 등 미얀마인 2만5000∼3만명이 있다.

정부가 민주주의 악화를 우려하며 제3국에 대해 제재 조치를 취한 것은 드문 일이다. 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을 포함해 아시아 국가 중에서 미얀마 유혈사태 확산에 대응하는 조치를 내놓은 나라도 한국이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광주민주화운동 등 민주화 경험을 지닌 한국이 그 위상에 걸맞게 행동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가치 외교’를 중시하는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와 보조를 맞출 필요성도 고려했을 수 있다. 외교부 당국자는 “그만큼 인권과 민주주의 가치를 중요하게 느끼기 때문에 여러 차례 성명 발표 이후 실질적 조치 단계로 접어든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향후 미얀마 정세와 국제사회 동향을 지켜보며 추가 대응조치에 나서겠다는 방침이다. 우선적으로 공적개발원조(ODA) 중점협력국인 미얀마에 대한 유·무상 원조 규모를 조정할 가능성이 높다. 2019년 기준 미얀마에 제공된 ODA 규모는 유·무상 합쳐 약 9200만달러로로, 국가별로는 세 번째로 많았다. 재검토 대상에는 대외경제협력기금(EDCF)의 지원을 받은 한국토지주택공사(LH)의 ‘한·미얀마 경협 산업단지’ 등이 오를 것으로 보인다. 외교부 당국자는 “유·무상 원조 사업을 재검토하되, 민생과 직결된 사업이나 보건·방역 등 인도적 지원 사업은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시민사회는 정부의 제재 조치를 환영하면서도 민간 부문 투자까지 폭넓게 검토해야 한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나현필 국제민주연대 사무국장은 “한국 기업의 미얀마 투자 등 국제사회도 문제제기하는 부분에 대한 구체적 언급이 없는 점은 아쉽다”며 “ODA 재검토 과정에서 시민사회 의견 수렴 절차도 있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얀마 최대 도시 양곤에서 12일 군인들이 시위대가 쌓은 바리케이드 뒤편에 서 있다. 양곤/AP연합뉴스

미얀마 최대 도시 양곤에서 12일 군인들이 시위대가 쌓은 바리케이드 뒤편에 서 있다. 양곤/AP연합뉴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103121831001&code=910302#csidx5086e3b22159f2da641898740e0c7c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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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국무‧국방장관이 방한하는 진짜 이유?

  • 기자명 강호석 기자
  •  
  •  승인 2021.03.12 14:54
  •  
  •  댓글 0
 
 
 
 

제5차 한미 외교·국방(2+2) 장관회의 의제와 쿼드 플러스, 그리고 미국의 대중국 포위 전략

▲미 국무부 안토니 블링컨(Antony J. Blinken) 장관(왼쪽)과 로이드 오스틴(Lloyd Austin) 국방장관(오른쪽)이 오는 17일 방한한다.[사진 : 뉴시스]
▲미 국무부 안토니 블링컨(Antony J. Blinken) 장관(왼쪽)과 로이드 오스틴(Lloyd Austin) 국방장관(오른쪽)이 오는 17일 방한한다.[사진 : 뉴시스]

미 국무부 안토니 블링컨 장관과 로이드 오스틴 국방장관이 오는 17일 일본을 거쳐 방한한다.

이들은 방한 기간 제5차 한미 외교·국방(2+2) 장관회의를 개최할 예정이다.

이들의 방한은 ▲1000여 개 단체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행한 한미 연합군사훈련, ▲코로나19로 인한 경제위기에도 주한미군 주둔비(방위비분담금) 13% 인상, ▲성주 사드(THAAD)도 모자라 미사일방어체계 추가 배치, ▲작전통제권 이양 노골적 거부 등 한미 간 국방외교 현안이 미국의 의도대로만 결정된 데 따른 한국의 반발을 무마하는 데 목적이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하지만 이들의 한국 방문에는 더 큰 그림이 있다. 그것은 미국의 대중국 포위전략에 한국군을 첨병으로 삼겠다는 계산이 깔려있다.

집권과 동시에 대중국 포위전략을 수립한 바이든 행정부는 12일(현지시각) 4자(미국, 일본, 인도, 호주) 협의체인 ‘쿼드’ 정상회의에서 대중국 포위에 주력하는 인도‧태평양 전략을 공포할 예정이다. 그리고, 미 국무‧국방장관을 일본과 한국에 보내 전략 이행에 필요한 조치를 동맹국에 요청한다는 계획이다.

이 같은 분석은 쿼드 정상회의와 미 국무‧국방장관의 방한에 대한 바이든 행정부의 공식 발표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된다.

젠 사키 백악관 대변인은 9일 쿼드 정상회의 발표 브리핑에서 “바이든 대통령이 쿼드를 조기에 개최한 것은 사실은 우리가 인도·태평양에서 동맹, 파트너와의 긴밀한 협력에 두고 있는 중요성을 보여준다”라면서, 중국을 미국의 심각한 전략적 경쟁 대상이라고 밝혔다.

패트릭 크로닌 허드슨연구소 아시아태평양 석좌는 “바이든 정부의 외교안보 수장이 첫 해외 순방지로 일본과 한국을 택한 것은 미국의 대중국 견제에 따른 것”이라면서, “중국이 동중국해와 남중국해에서 구사하는 회색지대 전략은 물론 미사일 등 중국의 전통적인 도발에 대한 억지를 논의하게 될 것”이라고 명백히 밝혔다.

더 심각한 문제는 미국이 한국을 인도‧태평양 전략의 린치핀(linchpin, 중심축에서 바퀴가 빠지지 않도록 연결한 고리)에 비유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미국의 코너스톤(cornerstone, 주춧돌)은 일본이고,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을 위해 결성한 쿼드의 주력군은 주일미군과 일본 자위대다.

최근 쿼드 정상회의를 앞두고 바이든 행정부가 한국을 쿼드 회원국에 추가(쿼드 플러스)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하지만 한국의 쿼드 가입은 한국군이 주일미군 휘하에 들어감과 동시에 일본 자위대와의 군사동맹 체결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심각한 반발이 예상된다. 그 때문에 이번 쿼드 정상회의에서 쿼드 플러스가 결정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 다만 쿼드에 가입하지는 않지만, 회원국에 준하는 조치가 마련될 공산이 크다.

가령 이번에 합의된 주한미군 주둔비(방위비 분담금) 134억 원이 주일미군 F-35전투기와 탐색구조헬기 HH-60 정비 비용으로 지출되는 것과 같은 조치가 취해질 것으로 보인다.

미 국무‧국방장관이 방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한국에서 누구를 만나 어떤 협의를 할지 아직은 동선이 공개되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미국의 두 장관이 ‘최대 교역국인 중국과의 갈등 심화’를 우려하는 한국의 처지를 고려할 리 없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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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역사저널 그날>의 ‘역사 모독’

3월 9일 방송 ‘아웅 산 묘소 테러’ 시청 소감
 
강진욱  | 등록:2021-03-12 14:24:39 | 최종:2021-03-12 14:36:25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KBS <역사저널 그날>의 ‘역사 모독’
- 3월 9일 방송 ‘아웅 산 묘소 테러’ 시청 소감

강진욱 <1983 버마> 저자

함부로 범접해서는 안 될 우리 현대사가 언젠가부터 딴따라들이 멋대로 씨부리는 연예 이야기 소재로 전락했다. 겸허히 역사를 배워야할 자(者)들이 역사 연구의 권위자로 행세한지도 꽤 됐다. 3월 9일 KBS <역사저널 그날>의 ‘전두환 암살 미수,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편은 차라리 역사 모독이다. 전두환네 안기부가 온갖 거짓말로 더럽힌 우리 현대사를, 안기부식 언설로 재차 유린했다.

논의의 형식부터가 문제였다. 진행자는 다섯. 앵커와 역사 교수 박태균(서울대 국제대학원), 역사 교사 이상석(서울 모 중학교), 그리고 ‘추임새 남녀’ 둘(배우 이시영과 독일인 다니엘 린데만). 박 교수는 꽤 유명한 이다. <한계레신문> 등 소위 진보 언론에 글을 많이 싣는다. 글은 좀 엉성한 편이다. 작년에 임용고시에 합격했다는 이 교사는 코로나 시대에 막 ‘뜨는’ 신세대 교사란다.

그 진위가 의심되는 논쟁적 사건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을 섭외해야 한다. 중견급 교수는 그렇다 치고 초짜 교사까지, 똑같은 의견을 가진 둘을 붙여 놨다. 어쩌잔 말인가. 거기다 사건의 맥을 짚어야 할 앵커까지 추임새 넣는데 신을 냈다. 니나노판과 다름이 없었다.

구성도 엉성했다. 전두환과 그 정권에 대해서는 어떻게든 ‘디스’를 해야 한다는 시류 감각인지 ‘전비어천가’를 남발하던 80년대 ‘땡전뉴스’를 연속 틀어놓고 낄낄댔다. 전두환과 그의 시대를 혐오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듯 싶지만, 이게 아웅 산 묘소 테러와 무슨 상관이 있나. 영부인이 화려한 옷차림으로 해외 순방에 나선다는 멘트는 사족(蛇足), 이철희-장영자 어음 사기 사건이나 대도 조세형 얘기는 ‘개밥에 도토리’다. 전파의 낭비고 시청자 우롱이다. 구성이 엉성한데 내용인들 알찰까.

역사적 사실에 대한 깊이 있는 관찰과 사유 대신 전두환네 안기부가 정.리.해. 놓.은. 조작된 결론으로의 회귀 본능이 너무 강했다. 아웅 산 묘소 테러는 전두환 정권의 안기부가 은폐한 진상을 밝혀야 할 문제. 전두환 정권의 공식 해설에 대한 비판적 접근이 필수다. 그런데 <역사저널 오늘>은 사건에 얽힌 숱한 의혹들은 건성 핥으면서 전두환네 안기부식 해설에 안주하려는 경향이 농후했다. 차라리 장세동의『일해재단』(1995)나『전두환 회고록』(2017)을 펴 놓고 강설을 하지! 전두환과 그의 시대에 대한 냉소는 그냥 시늉이었다는 얘기다.  

하나하나 보자. 먼저 사건의 정의. 이시영이 “북한의 시도는 자살골”이라고 언급하자 앵커가 “이때부터 북한은 범죄집단으로 낙인찍혔다. 반공정신이 고취돼 전두환을 곤란하게 했던 많은 이슈들이 모두 묻혔다”고 맞장구를 치고, 곧바로 박 교수가 말을 보탰다. “그런 게 한 두 가지가 아니거든요 ... 아, 진짜 (북한은 남한의 민주화에) 도움이 안 되는구나 ... 이런 생각을 할 때가 많은데 ... 아, 이게 정말 북한 내부 사정 때문에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볼 때는 뭔가 한 발 한 발 발전해서 나아가는데 찬물을 끼얹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그런 순간의 하나였다라고 생각해요.”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발언이다. 그의 논지는 ‘우리 남한 국민들이 민주화를 위해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에 맞서고 있는 판에 북한이 되지도 않을 요인 암살 테러를 감행하다 실패해 괜히 전두환 정권에 힘을 실어줬다’는 것으로 읽힌다. 박 교수는 아마도 ‘6.25 남침’ 등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 모르지만, ‘남한이 발전하는데 북한이 방해했다’는 말을 입증할 수 있을까. 그는 이 말에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그와 이 교사는 또 “사건이 정리된 뒤 ‘늑대사냥’이라는 외교전을 펼쳐 북한을 고립시키는데 성공”했고, “1983년 말 남북한의 수교국 수가 120대 102”라며 남한이 북한을 압도했다고 강조했다. 북한이 전두환을 죽이려다 실패한 덕분에 전두환 정권이 승승장구했다는 말이다.

<역사저널 오늘> 출연진의 말대로 문제의 테러를 저질렀다는 북측이 얻은 것은 ‘1’도 없고 모든 것을 잃었다. 적어도 사건 직후 한.미와 서방국들이 외교전에 급피치를 올릴 때 북측은 국제사회에서 고립되는 듯 했다. 만약 냉철한 판단력을 발휘해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면, ‘이거 북한이 한 거 맞아?’라는 의문을 가져야 마땅하다. 희극과도 같은 전대미문의 사건을 기획하고 실행한 측이 모든 것을 잃었다는 말이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시영이 “미얀마와 북한의 관계가 생각보다 끈끈했던 것 같거든요”라고 했듯이 버마는 북한에게 비동맹 우방이고 형제국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버마에서 북측이 전두환을 죽이려 했다는 이야기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남한 대통령을 시해하려면 남한에서 하면 될 일이다. 굳이 버마에까지 가 전대미문의 사건을 일으켜 국제사회의 이목을 끌 이유가 없다. 그 ‘국제사회의 이목’은 바로 미국과 전두환네가 노린 바였다. <역사저널 오늘> 팀이 떠벌린 ‘도끼만행 사건’(미루나무 사건, 1976.8.18) 때와 마찬가지!

미루나무 사건 당시, 북측의 경고를 무시하고 미군 병사들이 도끼를 들고 미루나루를 자르러 갈 때 이미 미국 측은 비디오 영상 촬영을 준비하고 있었고, 이때 촬영된 영상 자료를 유엔 등 외교무대에서 틀어대며 북측의 외교를 무력화시켰다. 이 사건 이후 유엔이나 비동맹회의 어디에서도 북측의 주한미군 철수 안은 회의 안건에 오르지 못했다. 1974년에 이어 1975년 30차 유엔총회에서 미군 철수안이 가결되고 곧 31차 유엔 총회와 비동맹정상회담을 앞둔 시점에 이 사건이 촉발된 것이다. 이때 미국 등은 ‘국제사회의 이목’이 가져다주는 쾌감을 만끽했을 것이고, 이런 짜릿한 쾌감을 다시 한 번 맛보고 싶었을 것이다. 아웅 산 묘소 자작테러 발생 시점에 맞춰 미주여행업자협회(ASTA) 세계총회(9.25∼30)와 국제의원연맹(IPU) 총회(10.2∼13)가 연달아 서울에서 열린 것은 한.미 양측이 아웅 산 묘소 테러를 준비하며 미리 국제사회의 이목을 서울로 집중시킨 정황이다.

(사진 좌 : 1983.9.13 조선일보)(사진 우 : 1983.4.30 조선일보)

버마 아웅산 묘소 테러는 특히 IPU 총회가 한창 진행 중일 때 일어났다. 전두환은 IPU 총회 개회 연설을 하고(10월 4일) 버마로 향했고(10월 8일), 그가 버마에서 돌아왔을 때(10월 10일) IPU 총회장은 이미 ‘북괴 성토장’이 돼 있었으며, ‘북괴 규탄’ 분위기 속에서 IPU는 폐막했다.

북측은 ‘미루나무 사건’ 등으로 인해 외교력이 많이 약화됐지만 1980년대에도 비동맹권에서 상당한 지위를 누리고 있었고, 이들 비동맹권 국가들의 힘을 바탕으로 유엔 무대에서도 여전히 남한보다 우위의 외교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또 한 번 국제사회의 이목을 집중시킨 가운데 엄청난 사건을 조작함으로써 북측의 비동맹에서의 우위와 유엔 무대에서의 만만찮은 위상에 일대 타격을 가했던 것이다. 

아웅 산 묘소 테러는 이렇게 치밀한 계산 아래 벌인 자작테러(라고 판단해야 한)다. 이런 판단에 이르기 위해서는 전두환네가 정리했고 신문과 방송이 너절하게 떠벌린 이야기만 주워 모아서는 곤란하다. 이런 허접한 이야기들을 면밀히 살펴 그것들 사이의 연관성을 추리하고 전두환 정권이 떠드는 이야기의 허점을 찾아내 파고들어야 한다. 이처럼 사건에 대한 인식을 심화시키는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새로운 사실들을 찾아내고 이전의 허접한 이야기들 속의 감춰진 내막을 들춰내는 것이 바로 역사 연구다.

박 교수가 이 지점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은 그가 1983년 전후 및 1980년대 한반도 정세를 깊이 관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한반도 문제 또는 남북관계는 한미관계와 북미관계를 종속변수라는 사실은 제대로 인지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특히 1980년대는 레이건 정권이 나카소네 정권과 전두환 정권을 또는 레이건 정권과 나카소네 정권이 전두환 정권을 불쏘시게 삼아 한반도 정세를 전쟁 일보전 상태로 몰고 갔다는 사실을.

<역사저널 오늘>의 누군가가 언급한 KAL기 격추(1983.9.1) 사건이 바로 미국이 한국의 민간 항공기를 동원해 소련 군사 시설을 정탐하려다 빚은 참사였다. 레이건 정권은 곧바로 소련을 ‘악의 제국’(Empire of Evil)이라고 낙인했다. 그러면 곧이어 북한을 ‘악의 제국의 아류’ 쯤으로 낙인할 수 있을 법한 사건들이 잇따라 터지게 돼 있다. 레이건 정권은 전두환 정권과 협잡해 소련의 동맹국인 북한을 궁지에 몰 궁리에 골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KAL기가 소련 공군 미사일을 맞고 격추된 지 3주가 지난 9월 22일 대구의 미국문화원 문 앞에서 폭탄이 터졌다. 그러자 전 정권과 미국은 곧바로 ‘북괴의 소행’이라고 외쳐댔다. 또 18일 뒤인 10월 9일에는 버마 아웅 산 묘소 테러가 일어난다. 전 정권은 “대구 미 문화원 사건 때와 똑같은 폭탄이 터졌다”고 떠들었다.

[아웅산 묘소에서 발견된 폭발물이 대구 미 문화원 폭발 사건 때의 폭발물과도 유사한 점이 많다고 ... 대구 미 문화원 폭발 사건 때의 폭발물도 아웅 산 묘소에서 터지지 않은 채 발견된 폭발물과 크기가 거의 같고, 배터리가 같은 일본 회사 제품이며 성능도 비슷한 것으로 미루어 같은 수법과 재료로 제조된 것이 틀림없다고 ... ] (<동아일보> 1983.10.13)

미국은 아웅 산 묘소 사건 직후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 올리려 했다. 소련을 ‘악의 제국’으로 낙인한데 이어 북한을 테러국가로 낙인하려는 속셈이었던 것. KAL기를 소련 영공에 들이밀고 대구 사건과 버마 사건을 잇따라 조작해 소련과 북한 두 나라를 국제사회에서 밀어내려 한 것은 1983년 한.미 양국이 20만 대병력을 동원해 거의 석 달 동안 팀스피리트 훈련을 벌이며 북한을 괴롭히고, 이 해 미국이 ‘스타워즈’(별들의 전쟁) 구상을 천명하며 군사적으로 소련을 압박한 것과 정확히 아귀가 맞아 떨어진다.

또 대구 사건은 대한민국 대표 고문기술자 이근안(李根安)까지 동원해 수많은 이들을 족쳐대며 ‘간첩의 소행’으로 만들려다 실패한 사건임이 최근 드러나고 있다. 그러면 이 사건에서 사용된 것과 똑같은 폭탄이 터진 아웅 산 묘소 사건은? 전두환 정권이 떠벌린 것처럼 ‘북괴의 소행’이야?   

신참 역사교사 이 씨는 아웅 산 묘소 테러 한 해 전인 1982년 북측이 아프리카의 가봉을 방문한 전두환을 죽이려다 실패했다는 해괴한 ‘썰’을 풀었다. 그는 이 ‘썰’의 원조가 탈북자 고영환(高英煥)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있을까. 이 자가 어느날 갑자기 국가정보원의 방계 조직인 국가안보전략연구원의 부원장 직함을 달고 나타나(이는 거짓말에 권위를 부여하는 방법이다) 극우 성향의 두 개 종편 TV에서 이 ‘썰’을 풀었다. “아 글세, 내가 자이레 주재 북한대사관에 있을 때 말입니다. 전두환 대통령을 시해하려고 가봉에 데리고 갔던 자들이 바로 아웅산 테러범이었더란 말입니다아~~”.

고영환이 남한에 온 때가 1991년 9월이고, 문제의 ‘썰’을 집중적으로 푼 때는 2010년대 중후반이다. 그러면 남한에 온 지 거의 20년 동안 묵비권을 행사했어? 그러다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어? 이 자의 말에 대해 그 누구도 진위를 가린 바 없고, 그의 말을 사실이라고 믿을만한 어떤 증거도 정황도 없다. ‘고영환의 썰’이 등장하기 앞서 그 ‘썰’의 습작 쯤 되는 글이 <신동아> 2004년 5월호에 실렸다.「김정일, 1982년 아프리카 가봉에서 전두환 암살 노렸다」. 이 글에서는 고영환이라는 이름조차 없었다. 글 말미에는 사건 당시 경호실장이었던(1981∼1985) 장세동의 코멘트가 붙어 있었다. “그러한 정보를 책임자였던 내가 몰랐을 리 없으므로 잘못된 정보일 것으로 본다. 구체적인 사실과 근거를 확인한 뒤에 기사화해 달라.”

( 신동아 2004년 5월호)

장세동이 청와대 경호실장과 안기부장 자리를 연달아 차지하며 전두환 정권의 2인자로 군림하던 시절에는 없었던 각본을 누군가 뒤늦게 조작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고영환의 썰’은 허접한 각본을 다듬고 또 다듬으면서, 월간지와 주간지, 종편TV, 보도채널, 각 신문과 방송, 통신 순으로 ‘거짓 썰’의 확산 범위를 넓혀가며 완성한 작품이다. 이런 허황된 ‘썰’을 공영 TV에 나와 마구 떠벌려도 되나! <역사저널 오늘> 팀의 허접한 역사 해설은 계속된다. 아웅 산 묘소 테러의 보복작전을 준비했다는 같잖은 이야기.
 
[이 상황을 조금 더 심각하게 느낀 거는 군대였어요. 육사 12기 출신들을 중심으로 해서 계획을 세웁니다. ‘벌초계획’(이상석) ... ‘아, 싸악 쓸어버리겠다는?’(다니엘) ... 60년대 후반하고 너무도 비슷한 상황이 돼 버린 거네요. 1.21 사건 이후 684부대(실미도부대)를 창설할 때와 ... 패러글라이더 이용해서 30명의 특수부대원을 평양에 떨어뜨린 다음에 네 시간 만에 주석궁을 폭파시키고 김일성을 암살시키는 거였죠. ... 실제 훈련을 받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 훈련하는 내내 북한 말투를 쓰고 자다가 일어나며는 ‘김일성 장군 만세!’ 뭐 이런 액션도 취했다고 합니다.(이상석) 자연스럽게 입에 붙어야 하니까 그런 연습을 한 거군요.(앵커)]

‘망치작전’이라고도 불리는 ‘벌초계획’은 아웅 산 묘소 테러의 보복작전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다. 이 벌초계획이 나올 때 아웅 산 묘소 자작테러가 기획됐다(고 본다). 바로 이 시점에 버마와 한국 양측에서 아웅 산 묘소 테러가 성공하는데 필요하고 충분한 조건들이 짜맞춰졌고, 이 벌초계획(또는 망치작전)은 아웅 산 사건을 북한의 공작인 것처럼 조작하는 ‘다대포 대간첩 작전’(1983.12.9)에서 딱 한 번 그 진가를(?) 발휘하기 때문이다(『1983 버마』참조).

이런 정황은 전혀 파악하지 못한 채 어디서 떠도는 말과 글의 제목만 보고 이를 아웅 산 보복작전이라고 떠벌리면 곤란하다. <월간조선>은 2010년 5월호 글 「비화 : 28년 전 백령도 해상에서 대북 보복작전 계획 있었다」에서 “망치작전[벌초계획의 딴 이름]은 일명 ‘812계획’에 의해 탄생했다”며 “1981년 8월 12일 북한의 미그21기 편대가 백령도 상공에 침공해 저공비행을 실시한 사건으로 인해 서해 5도의 안보 위협이 증폭되자 북한의 대남 무력 도발 의지를 사전에 봉쇄하고 도발 시 보복작전을 통한 전술적인 대응 차원에서 시작된 계획”이라고 전했다.

[1980년대 초 북한군의 잦은 도발에 대응, 백령도 인근 해상에서 구체적인 북한 침투 작전 계획이 수립된 것으로 알려졌다. ‘망치작전’으로 불리는 이 계획은 1982년 1월부터 2년 10개월 동안 해병대 요원들을 선발해 백령도 인근 NLL(북방한계선) 해상에서 기만작전을 펼치며 북한의 월례도 등 3개 목표 지역에 침투해 ▲군사시설 파괴 ▲요인 암살 ▲납치.교란 등 2시간 만에 작전을 마무리하는 것이다. 이 작전 계획은 1980년 11월 전남 횡간도 무장간첩 침투, 1981년 8월 북한 미그기 백령도 상공 침공 및 미 정찰기 SR-71(블랙버드) 격추 시도 등 고조된 남북 대치 상황에서 수립된 것으로 ... 1981년 10월 전두환 대통령은 국군의 날 행사에서 “단순히 적의 도발을 물리칠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 도발에 대한 철저한 응징력도 함께 갖춰야 한다”면서 ... 망치작전에 관여한 한 관계자는 ... 그의 설명 ... “해병대 각 부대에서 1차로 선발된 요원들은 1982년 4월까지 포항에서 훈련을 받은 후 백령도로 이동해 소대 규모로 훈련 및 작전을 펼쳤습니다.” ... 1981년 9월 UDT, 공수 교육 등 이미 특수 교육을 이수한 인원 중 최정예 대원을 뽑는 것으로 1차 요원 선발이 시작 ... 이듬해[1982년] 1월부터 ‘망치 교육’이라 불리는 ‘특수침투훈련’을 받고 백령도로 파견 ... 1983년 10월 말까지 총 300여 명의 요원이 6차례에 걸쳐 투입 ... 작전에 참여했던 한 장교는 “육군에서 실시한 ‘벌초계획’도 같은 시기에 계획된 것”이라며 ... ]

초짜 교사 이 씨가 떠벌린 주석궁 폭파 계획 어쩌고 하는 이야기는 이 <월간조선> 글이 나오기 며칠 전 <주간조선>에 실려 있었다.

[지난 4월 12일 <주간조선> 보도에 따르면, 육사 12기 출신 군 지휘관들이 주도한 벌초계획은 패러글라이더를 이용해 특수부대를 평양으로 파견, 주석궁을 폭파하고 김일성을 사살한 뒤 육로 또는 해로를 통해 돌아오는 비밀계획이다. 이 계획은 전두환 대통령이 “북한과 똑같은 짓을 할 수는 없다”며 부정적 입장을 표명해 1983년 12월 경 폐기된 것으로 알려졌다.] (<월간조선> 2010년 5월호)

1981년 8월 작전이 시작됐다는 사실은 도외시한 채 ‘보복 작전’이라는 단어와 ‘아웅 산 테러’라는 단어를 결합한 주간지 제목만 보고 그대로 떠벌린 것이다. 하는 짓이 딱 봉숭아학당 수준이다. 아웅 산 묘소 사건 등 논쟁적 사건과 관련된 보도 또는 이야기는 그것이 등장한 배경과 발설(자) 및 전파(자) 과정과 그 면모를 먼저 살펴야 한다. 그래야 그 보도 또는 이야기 속에 숨겨진 저의를 파악할 수 있다. <역사저널 오늘> 출연진은 이런 노력은 고사하고 주간지가 전달하는 자투리 팩트 몇 개 듣고 와서는 헛소리만 늘어놨다.

[만반의 준비를 갖춘 뒤에 딱 전두환 대통령의 재가만 떨어지면 됐는데, 전 대통령은 오히려 다른 반응을 보여요.(이상석) 어, 왜요?(이시영) 전방 부대까지 직접 찾아가서 보복공격 하지 말아라 ... (이상석) [10.20 전두환 대통령 대국민담화 화면과 자막 : “본인은 이번이 우리의 평화의지와 동족애가 감내할 수 있는 최후의 인내이며 만약 또다시 이와같은 도발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힘의 응징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을 ... ” 더 나아가서 보복을 하게 되며는 반역으로 간주하겠다 이렇게 엄포도 놓죠.(이상석) 저렇게 국민들의 분노가 커지고 있는데 왜 그랬을까요?(이시영) 사실 본인을 목표로 했고 분노가 차 있을텐데 ... (다니엘)]

자작테러를 저질러 놓고 무슨 보복? ‘보복작전’은 ‘우리가 보복했다!’고 주장할 수 있는 또 다른 자작극을 의미한다. 앞에서 언급한, ‘벌초계획’(망치작전)의 대미를 장식한 ‘다대포 대간첩 작전’ 그것이다. <역사저널 오늘> 제작진의 정치적 우편향도 심각하다. 출연진이 버마 사건 범인들에 대해 나눈 대화.

[둘 다 사형을 선고받습니다. 테러범 1985년 진모는 교수형, 강민철은 수사 협조 참조 사형 무기한 연기 ... 살아남았어도 사는 게 아니죠. 북한은 계속해서 발뺌을 하고 있고, 남한은 데려올 의지도 없고. 이후 강민철이 남한으로 가고 싶다고 얘기했는데 그것마저 무산이 돼 버려요. 그러다가 2008년에 감옥에서 사망을 하게 되죠.(이상석) 양쪽에서 버려진 테러리스트가 됐네요.(이시영) 사실은 그런 사람들은 외교를 해서 빨리 데리고 와야 돼요. 그래야만 사실 우리가 이 사건의 전모를 정확하게 조사를 해 가지고 ... 해 놓을 수가 있는데 ... (박태균)]

진모(본명 김진수)가 사형을 당했는지 - 아니면 한국으로 몰래 송환했는지 -그 진위가 확인된 적이 없는 낭설들을 마치 확인된 사실인양 이야기하고 있다.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를 사실인양 퍼뜨리는 것은 호사가들의 습성이다. 강민철(본명 강영철)을 한국으로 데려왔어야 한다는 박 교수의 주장은 어떤가. 가정이지만, 만약 강민철이 송환됐더라면 틀림없이 ‘제2의 김현희’가 됐을 것이다. 실제로 강민철 송환에 가장 열을 낸 자가 바로 김현희 사건(KAL 858편 여객기 자작테러) 당시 안기부 대공수사국장이었던 정형근(鄭亨根)이었다. 이 자가 의원 배지를 달고 난 뒤인 2006년부터 갑자기 강민철을 데려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이때 정형근(및 그와 통하는 국정원 내 일부 세력)이 내세운 주장은 ‘강민철이 잘못을 뉘우치고 한국에서 살기를 원한다’였다. 그러나 당시 노무현 정부는 국정원 내 일파(대공수사국)의 이 구상을 거절했다. 그러자 정형근 등 국정원 공안 세력은 강민철을 우선 제3국으로라도 빼내는 쪽으로 방향을 튼다. 이때는 ‘강민철이 남도 북도 다 싫다더라’는 슬로건을 내세운다.

강민철 송환 공작에 대해서는 라종일의『아웅산 테러리스트 강민철』에 소개돼 있다. 제3국으로의 강민철 송환 공작에는 종교계의 국제적 마당발 김장환 목사도 개입돼 있다고 라 씨는 밝혔다. 박 교수도 이 정도는 알고 있을 터. 그런데도 강민철을 데려왔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극우 세력에 편승해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공격하고 안기부-국정원의 반북적대 놀음에 동조하는 것과 같다.

그가 주장하는 것처럼 아웅 산 묘소 테러가 북측의 소행이고 강민철이 북측이 보낸 공작원이라면 더더욱 그를 남한에 데려올 이유가 없다. 그가 북한 공작원이라면 남한으로 가서 살겠다고 말했을 리도 없다. 그렇게 말했다는 ‘썰’ 자체가 웃기는 얘기다. 이런 웃기는 이야기가 떠도는 배경과 그 진위를 따져봐야 할 역사학자가 무작정 극우 세력이 벌이는 정치 공세에 가세하는 꼴이라니!

강민철은 국정원 대공수사국이 키운 공작원일 개연성이 높다. 강민철 송환 공작은 - 필시 강민철 등을 버마에 보낸 조직이 - 그를 다시 서울로 데려오기 위한 수작이었음이 분명하다. 만약 전두환 정권의 안기부가 그를 ‘북한 공작원’으로 조작하지 않았다면, 만약 그가 버마 경찰에 붙잡혔을 때 고백했던 것처럼 “서울에서 왔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면, 그는 다시 남한으로 돌아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안기부 대공수사국 간부들의 농간에 속아 초기 진술을 번복하고 스스로 ‘북한 공작원’인 것처럼 행세했다. 그 스스로 국내로 돌아와야 할 권리를 포기한 것이다. 매우 안타깝고 슬픈 일이다.

그러면 남한 공작원이 북한 공작원 흉내를 내기는 쉬울까? 쉽다. 그렇게 훈련을 받으니까. <역사저널 오늘> 멤버인 이상석 교사가 ‘벌초계획’ 운운하며 한 말이 그 것이다. “실제 훈련을 받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 훈련하는 내내 북한 말투를 쓰고 자다가 일어나 ‘김일성 장군 만세!’ 뭐 이런 액션도 취했다.” 남한 공작원이 북한 말투를 익혀야 하는 이유는, 북한 공작원 흉내를 내기 위한 것 말고 또 있을까. 전두환 정권을 떠받치던 육사 12기들이 1981년 8월부터 기획한 ‘벌초계획’에 따라 양성된 특수부대원들 중 일부가 아웅 산 묘소 테러에 동원됐을 것으로 보는 이유다. 

<역사저널 오늘>팀이 ‘건너 뛴’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저널 오늘> 제작진이 연출한 강민철 심문 장면. 이시영이 “갑자기 저렇게 (자신이 북한에서 왔다고) 털어놓는 이유가 뭐예요?”라고 묻자 박태균 교수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대답을 내 놓는다.

[이게 아마 제가 생각할 때 가장 큰 이유는 북한에 대한 배신감 때문인 거 같애요. 내가 지금 이러고 왔는데 결국 나만 희생되는 거 아닌가. ... 수류탄을 쥐여 줬는데 이 수류탄이 적을 죽이기 위한 수류탄이 아니고 자폭용 수류탄을 줬다는 거예요 ... 굉장한 배신감을 느끼게 ... 결국은 우리한테 이렇게 해서 ... 뭐, 조국을 위해서 뭘 해라라고 얘기했지만 나는 이렇게 희생양 되면 끝나는 거 아니냐 ... 라고 하는 부분들이 충격으로 온 게 아닌가.(박태균) 나는 이렇게 버려지는구나 ... 하는 배신감이 컸겠네요.(앵커)]

자폭용 수류탄 이야기는 맞는 이야기다. 수류탄 핀을 뽑다 강민철은 한쪽 손을, 또 다른 범인 진 모는 양 손을 잃었다. 그런데 ‘간첩의 배신’ 각본은 철 지난 심파. 김신조가 한 이야기고 김현희가 한 이야기이며, 중앙정보부와 안기부가 연 ‘간첩들 기자회견’ 때마다 나오는 이야기다. 북측 지도자의 친필 지령까지 받았다는 자들이 어느 날, 어느 순간 갑자기 ‘배신감’에 사로잡혀 남한 정보당국에 귀의(歸依)하고 ‘대한민국 만세!’를 외친다는 같잖은 이야기다. 김신조나 김현희 등이 연루된 사건들 모두 조작 시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다. 잘 나가는 서울대 역사학자가 이처럼 논쟁적 문제의 심각성은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 박정희.전두환 시절의 구태를 반복하는 꼴이란!

수류탄 핀을 뽑다 손이 잘린 강민철과 진모는 배신감에 치를 떨었을 것이다. 그래서 강민철은 처음 버마 경찰에 붙잡혔을 때 자신은 “서울에서 왔고 어머니가 영등포에 살고 있다”고 말했을 것이다. 조직이 자신들을 버리려한 데 대한 배신감에 사무친 반항이었을 것이다. 전두환네 공안 세력과 외교 진영이 총동원돼 버마 정부를 압박하며 ‘배후는 북한이야’를 외치는 상황에서도 버마 수사당국이 사건의 배후를 북한이라고 단정하지 못한 이유다. 버마 당국은 사건 발생 한 달여 뒤인 10월 17일 중간 수사결과를 발표할 때 그냥 “코리언이 범인”이라고만 밝혔다. 범인이 남쪽에서 왔는지 북쪽에서 왔는지 알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자 전두환 정권은 안기부 대공수사국 성용욱 국장과 한철흠 과정을 버마로 급파했다. 자작테러의 책임을 북측에 뒤집어씌우기 위해서는 ‘마지막 카드’를 써야 했다. 그것은 성 국장과 한 과장이 강민철이 느꼈을 배신감을 누그러뜨리고 그를 달래 진술을 번복하게 만드는 것. 성 국장 등은 무슨 말로 강민철을 설득했을까? “너 어떻게든 살아야 하지 않겠냐?” 이 한 마디였다.

강민철이 안기부가 보낸 공작원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안기부 대공수사국 국장과 과장이 버마로 급히 가 그를 만나 이런 이야기를 할까? 강민철이 북한 공작원이라면 남한의 안기부 대공수사국 국장과 과장이 만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박 교수는 이 빤한 추리도 못 하나? 정상적인 사고력을 지닌 이라면 마땅히 이렇게 생각할 일이다. 혹시 박 씨의 정치적 우편향이 그의 정상적 사고를 저해하는 것은 아닐까. 실제로 그의 언설에는 극우적 색조가 배어 있다. 

[아쉬운 게 ... 돌아가신 분들 추모는 제대로 했는가 ..처음에는 반공궐기대회하고 추모대회하고 그렇게 했는데, 1984년 남북관계에 훈풍 ... 훈풍이 부니까 북한을 비난하는 궐기대회도 못 열고 .. 추모 행사 열자니 북한을 비난하는 게 되고, 추모하는 부분도 점차 줄어들어가는 ... 굉장히 안타까운 상황이 발생을 하게 되는 거죠.(박태균)]

박 교수는 아웅 산 묘소 테러 사건의 유족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알까? 남편이나 아버지 또는 아들을 잃은 유족들은 경제적으로 부족함은 없었다. 전두환의 안기부가 ‘일해재단’을 통해 기업체의 돈을 뜯어 유족들에게 거액의 위로금을 줬고, 부인네들과 자녀들의 직업과 학업 등 유족들의 장래를 전폭적으로 지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20년이 되는 시기까지 거의 매년 언론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아야 했다. 일종의 감시였다. 유족들 거의 대부분은 ‘반북반공전사’가 됐다. 특히 몇몇은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대북화해정책을 맹렬히 비난하고 있다. 박 교수도 이들의 견해에 동조하는 뉘앙스다. 전두환 시절의 그 끔찍한 관제 궐기대회를 계속 했어야 한다는 말인가.

박 교수는 또 사건의 배후가 북한이라고 단정하면서 “북한은 남한의 독재자를 제거하면 남한을 혼란에 빠뜨려 적화통일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주장한다. 이 말은 과거 박정희.전두환.노태우 등등 이 땅의 민주화와 통일을 방해한 정권이 녹음기처럼 틀어주던 곡조다. 시대착오. 북측 지도부를 동네 양아치 집단으로 여긴다. 북맹(北盲. 조선(북한)에 대한 무지)의 극치. ‘시대착오+북맹’은 남북관계가 얽힌 한국현대사에 대한 그의 해설이 엉터리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역사저널 오늘>의 엉터리 역사 해설은 지적할 것이 한 둘이 아니지만 일일이 논할 수가 없다. 강민철 등 “테러범들의 소지품 중 100여 점이 북한 공작원들이 갖고 있던 물품과 거의 일치했다”거나 “남한 경호팀이 사건 발생 사흘 전 안전 점검을 했지만 범인들이 그 다음날 폭탄을 설치해 폭탄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둥 ... 강민철네가 무슨 증거 수집상이야? 증거가 될 만한 물품은 한 점이라도 없애려고 안 했을까? 그게 아니고, ‘나 북한 공작원이야!’하고 동네방네 소문을 내려 한 거지!

남한 경호팀은 사건 발생 사흘 전(10월 6일) 에 금속탐지기를 동원해 안전 점검을 다 했는데, 범인들은 그 다음날(10월 7일) 폭탄을 설치해 10월 9일 사건이 일어났다고? 그 말이 맞는다면 경호팀과 폭탄 설치조는 한 팀으로 봐야 한다. 똘똘한 초딩들이 <역사저널 오늘> 방청석에 있었다면 손을 번쩍 들고 이렇게 질문했을 것이다. “사건 발생 하루 전이나 대통령 등이 묘소에 헌화하는 당일 아침에는 왜 안전점검을 안 했어요?”(초딩 1) “안전 점검을 한 뒤에는 아무도 거기를 안 지키고 그냥 비워뒀나요?”(초딩 2) “그러려면 뭣 하러 사흘 전에 안전점검을 했을까요?”(초딩 3) “당신들 바보 아니에요?”(초딩 4) ... ...

범인들이 소지한 권총의 일련번호가 과거 남파공작원들에게서 획득한 권총의 일련번호와 같다는 이야기는 신빙성이 있다. 남한 정보당국은 남파공작원들에게서 빼앗은 벨기에제 브라우닝 권총을 수 십 정 갖고 있을 테니까. 그 중 몇 개를 강민철 등에게 들려 보내놓고, 나중에 일련번호가 같은 총 몇 개를 가져갔을 것이다.

전두환이 버마에 간 이유를 묻는 질문에 박 교수는 끝끝내 네 윈의 상왕식 통치를 벤치마킹하기 위해 갔다는, 가당찮은 낭설을 되풀이 주장한다. 왜 예정에도 없는 버마에 갔는지를 묻는 질문에 대한 답은, 순방 일정이 다 짜인 상태에서 5월 중순 갑자기 전두환의 청와대가 이범석 외무장관에게 버마 방문 일정을 끼워 넣으라고 지시한 내막을 샅.샅.이. 살펴야 한다. 박 교수는 이런 내막을 들여다볼 의지도 없겠지만, 아마도 그럴 능력도 없어 보인다.

이 밖에도 범인들이 타고 왔다는 북한 화물선 ‘동건애국호’에 대한 이야기나 대통령 전두환과 경호실장 장세동 등 4명만 뒤늦게 출발한 것을 두고 이 4분이 대통령에게는 천우신조였다는 같잖은 얘기 등은 모두 장세동의『일해재단』이나『전두환 회고록』에 나오는 이야기들이다. 이들이 하는 얘기를 아무 저항감 없이 그대로 되뇌는 <역사저널 오늘> 출연진은 자신들이 얼마나 몰지각한지 깊이 반성해야 한다. (*몰지각(沒知覺) = 어떤 것을 알아서 깨닫거나 분별하는 능력이 전혀 없음을 일컫는 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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