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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핵무력, 일본의 핵야망, 미국의 철군정책

[개벽예감 312] 중국의 핵무력, 일본의 핵야망, 미국의 철군정책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기사입력: 2018/08/27 [08:51]  최종편집: ⓒ 자주시보
 
 

<차례>

1. 중국은 미국과 맞선 핵대결에서 어떻게 이겼나? 

2. 동아시아 평화를 위협하는 전범국의 핵야망 

3. 고용간첩 도미탈주극으로 파탄된 대만의 핵개발사업

4. 닉슨의 동아시아철군정책과 저우언라이의 오판

 

 

1. 중국은 미국과 맞선 핵대결에서 어떻게 이겼나?

 

1964년 4월 14일 미국 정책기획협의회(Policy Planning Council) 의장 월트 로스토우(Walt W. Rostow)가 작성하여 맥조오지 번디(McGeorge Bundy) 국가안보보좌관에게 1964년 4월 22일에 보낸 극비문서가 기밀해제되어 세상에 공개되었다. 그 문서에는 ‘중국 공산주의 핵시설들에 대해 가능한 기본행동의 탐색(An Exploration of the Possible Bases for Action Against the Chinese Communist Nuclear Facilities)’이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극비문서에 따르면, 1961년 1월에 출범한 케네디 행정부와 1963년 11월에 출범한 존슨 행정부는 중국의 핵무기개발을 저지하기 위해 중국의 핵시설들을 예방타격(preventive strike)으로 파괴하는 공습계획을 검토해왔는데, 린든 존슨(Lyndon B. Johnson) 대통령은 미국이 중국의 핵시설들을 공습할 경우 중국이 대만을 공격할 것으로 우려한 나머지, 공습계획 대신에 특수부대를 중국에 침투시키는 급변사태계획들(contingency plans)을 준비하라는 지시를 중앙정보국(CIA)과 다른 관련부서들에 내렸다고 한다. 하지만 미국은 중국의 핵시설들을 파괴하려는 각종 작전계획을 검토했으면서도 그 가운데 어느 것도 실행하지 못했다. 

 

왜 실행하지 못했을까? 중국에게 섣부른 불질을 하는 경우 전면전으로 확전되면, 전쟁에서 이기지 못하고 쩔쩔매다가 대만이 중국에게 넘어갈 것으로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우려는 미국이 겁쟁이여서 생겨난 것만이 아니었다. 1950년대에 일어난 대만해협위기가 미국에게 심각한 교훈을 안겨주었기 때문에 그런 우려가 생겨난 것이었다. 

 

중국내전에서 패하여 대만으로 도주한 장졔스(蔣介石) 정권은 1954년 8월 중국 본토 앞바다에 있는 섬들에 방대한 규모의 군사기지를 건설하였다. 대만군 병력 58,000명이 진먼(金門)섬을 뒤덮었고, 15,000명이 마추(馬祖)렬도에 밀려들었다. ‘본토수복’에 광분하는 장졔스의 도발을 방치할 수 없었던 중국은 진먼섬과 마추렬도에 대한 맹렬한 포격과 폭격을 계속하였다. 그 전투에서 중국인민해방군은 이장산(一江山)섬과 다첸(大陣)군도를 점령하였는데, 이것이 1954년 9월 3일부터 1955년 5월 1일까지 계속된 제1차 대만해협위기다. <사진 1>

 

▲ <사진 1> 이 사진은 1964년 10월 16일 중국이 진행한 첫 핵시험에서 거대한 버섯구름이 하늘 높이 솟구쳐오르는 광경을 보며, 중국인들이 승리의 환성을 올리는 장면이다. 1964년 가을, 서울에서 국민학교(당시 명칭) 4학년 학생이었던 나는 "핵시험 이후 중국에서 대기의 흐름을 타고 우리나라 상공으로 날아오는 낙진을 맞으면 방사능오염으로 죽는다"는 학교당국의 거짓안전교육을 받았는데, 비가 내리는 날이면 방사능낙진을 피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비옷으로 몸을 감싸고 등교길에 올랐던 일이 내 기억에 남아있다. 당시 핵무기개발에 박차를 가하던 중국은 1980년 5월 18일 미국 본토 전역에 핵타격을 가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에서 성공하여 마침내 국가핵무력을 완성하였다. 중국이 국가핵무력을 완성한 것은 적국의 핵무기개발을 저지하려던 미국의 계획이 파탄되고, 미국이 적국과 맞선 핵대결에서 패한 역사상 첫 사례로 되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대만이 중국에게 넘어갈까봐 다급해진 미국은 1955년 3월 3일 대만과 상호방위조약을 허겁지겁 체결하였고, 중국인민해방군의 대만상륙을 막아줄 미국 해군 제7함대를 대만해협에 황급히 들이밀었으며, 미국산 전투장비들로 대만군을 무장시켰다. 대만을 중국에서 떼어내려는 미국과 대만의 국가분렬책동은 진먼섬과 마추렬도에 대한 중국의 집중공격을 또 다시 촉발하였는데, 이것이 1958년 8월 23일부터 9월 22일까지 계속된 제2차 대만해협위기다. 

 

중국의 통일전쟁을 우려한 미국이 중국의 핵시설을 파괴하지 못하고 어물어물하는 사이에 중국은 핵무기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하여 중국은 1964년 10월 16일 첫 핵시험에서 성공하였고, 1966년 7월 1일에는 전략미사일부대인 제2포병부대를 창설하였으며, 1980년 5월 18일에는 미국 본토 전역에 핵타격을 가할 수 있는 둥펑(東風)-5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에서 성공하여 마침내 국가핵무력을 완성하였다. 중국이 국가핵무력을 완성한 것은 적국의 핵무기개발을 저지하려던 미국의 계획이 파탄되고, 미국이 적국과 맞선 핵대결에서 패한 역사상 첫 사례로 되었다. 

 

미국과 맞선 핵대결에서 승리한 중국은 자기의 핵무력을 더욱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2008년 3월 <중국중앙텔레비전방송(CCTV)>은 중국인민해방군 전략미사일부대가 주둔하는 거대한 지하핵기지가 있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그 길이가 약 5,000km에 이른다고 보도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서울에서 파키스탄 수도 이슬라마바드까지 거리가 약 5,000km인데, 중국이 그렇게 긴 지하핵기지를 건설했다는 말은 누구도 선뜻 믿기 힘들었다. 그런데 2009년 12월 중국인민해방군 언론매체인 <중국국방일보>가 위의 보도내용이 사실이라고 확인해주었다. 

 

길이가 약 5,000km라는 것은 지하핵기지를 한 줄 직선으로 길게 뚫어놓았다는 뜻이 아니다. 중국의 지하핵기지는 수많은 지하시설, 지하도로, 지하철도가 그물망처럼 서로 연결된 거대한 지하도시다. 험준한 타이항(太行)산악지대에 건설된 지하핵기지에는 미사일발사구 수 백 개가 지표면으로 나 있는데, 그 가운데 어떤 것은 진짜 발사구이고 어떤 것은 가짜 발사구이므로 적국 정찰위성의 식별능력을 교란할 수 있다. 

 

2017년 5월 22일 <중국중앙텔레비전> 온라인 보도매체는 1966년에 창설된 중국의 첫 전략미사일부대인 둥펑(東風) 제1여단이 허난(河南)성 쑹산(嵩山)에 있는 지하핵기지 미사일발사구에서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시험발사하는 놀라운 장면을 공개하면서, 만일 중국이 핵타격을 받으면 10분 안에 보복핵타격을 가할 수 있다고 밝혔다. <사진 2>

 

▲ <사진 2> 이 사진은 중국의 험준한 타이항산악지대에 건설된 지하핵기지의 내부를 촬영한 것이다. 그 지하핵기지는 수많은 지하시설, 지하도로, 지하철도가 그물망처럼 서로 연결된 거대한 지하도시다. 그 지하핵기지에는 미사일발사구 수 백 개가 지표면으로 나 있는데, 그 가운데 어떤 것은 진짜 발사구이고 어떤 것은 가짜 발사구이므로, 적국 정찰위성의 식별능력을 교란할 수 있다. 2017년 5월 22일 중국 언론매체는 1966년에 창설된 중국의 첫 전략미사일부대인 둥펑 제1여단이 허난성 쑹산에 있는 지하핵기지 미사일발사구에서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시험발사하는 놀라운 장면을 공개하면서, 만일 중국이 핵타격을 받으면 10분 안에 보복핵타격을 가할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중국이 미국과 맞선 핵대결에서 승리한 때로부터 37년이 흐른 2017년 11월 29일 조선은 미국 본토 전역에 전략핵타격을 가할 수 있는 화성-15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에서 성공하여 마침내 국가핵무력을 완성하였고, 미국과 맞선 운명적인 핵대결에서 중국에 이어 두 번째로 승리를 거두었다. 조선의 승리는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뒤집어버린 엄청난 사변이었다. 

 

중국은 첫 핵시험에서부터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로 국가핵무력을 완성하기까지 16년 걸렸으나, 조선은 첫 핵시험에서부터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로 국가핵무력을 완성하기까지 11년 걸렸다.  

 

핵무기를 틀어쥐고 세계를 지배한다고 떠들어댔으나, 중국과 맞선 핵대결에서 패한 핵제국은 조선과 맞선 핵대결에서 또 패했다. 지난날 중국과 맞선 핵대결에서 패한 미국은 대만에서 미국군을 철수해야 했고, 오늘날 조선과 맞선 핵대결에서 패한 미국은 한국에서 미국군을 철수해야 하는 궁지에 빠졌다. 도널드 트럼프(Donald J. Trump) 미국 대통령은 핵무기현대화사업으로 “위대한 미국을 재건하겠노라”고 큰 소리를 치고 있지만, 지난 반세기에 걸쳐 힘이 차츰 약해지고 있는 핵제국의 몰골을 신형 핵무기로 감출 수는 없다.  

 

 

2. 동아시아 평화를 위협하는 전범국의 핵야망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핵탄개발을 시도한 나라는 전범국 일본이다. 일본은 이미 1940년대에 핵탄개발에 손을 댔다. 당시 일본은 핵탄개발부문에서 미국과 경쟁하려고 하였다. 일제는 나치 독일과 협력하여 핵탄개발에 박차를 가했고, 미국은 영국과 협력하여 핵탄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일본과 미국 가운데서 어느 나라가 먼저 핵탄을 만드는가에 따라 태평양전쟁의 운명이 결정될 판이었다.   

 

2015년 7월 26일 일본 언론매체가 보도한 바에 따르면, 1944년 10월 4일 일본 해군은 교또제국대학(당시 명칭)의 핵과학자 아라까쓰 분사꾸(荒勝 文策) 교수에게 핵탄개발을 의뢰하였는데, 아라까쓰 교수와 도꾜계기제작소가 각각 작성한 우라늄농축 원심분리기 설계도면 두 점이 그 대학의 이전 방사성동위원소연구소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설계도면에는 원심분리기제작이 완성되는 날짜가 적혀있었는데, 일제 패망 나흘 뒤인 1945년 8월 19일이 완성예정일이었다. 그들이 거의 완성해가던 원심분리기는 미국군의 공습으로 파괴되었다. 

 

일본 육군은 일본 해군보다 먼저 핵탄개발에 손을 댔다. 일본 육군은 1941년 도꾜제국대학(당시 명칭)의 저명한 핵과학자 니시나 요시오(仁科 芳雄) 교수에게 핵탄개발을 의뢰했고, 그로부터 2년 뒤 니시나는 폭발위력 10,000t급 핵폭탄을 만들 수 있다는 비밀보고서를 작성하였다. 그 보고를 받은 1급 전범 도조 히데끼(東條 英機) 일본 총리는 일본 육군항공본부에게 핵탄을 만들라고 지시했고, 핵탄개발사업은 1943년 9월부터 추진되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에서 승리하여 일본을 점령한 미국은 일제의 핵탄연구시설들을 파괴하였고, 핵탄연구문서들을 압수하였다. 그 과정에서 미국은 일제의 핵탄개발기술이 어느 수준에 이르렀는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일제가 패망한 직후 일제의 핵탄개발사업을 폐지하기 위해 미국이 일본에 급파한 핵공학전문가집단의 일원으로 일제의 핵탄개발사업을 현장에서 조사하였던 로벗 퍼먼(Robert R. Furman)은 2008년 미국 언론매체와 진행한 대담에서 1945년 8월 당시 일제의 핵탄개발기술은 초기단계에 있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하지만 이런 심층정보를 모르는 몇몇 미국인 연구가들은 1945년 8월 12일 새벽 일제가 식민지조선의 흥남 앞바다에서 감행한 수중대폭발시험이 핵시험이었다고 주장하였는데, 그것은 고성능폭약을 터뜨린 고폭시험이었다. <사진 3>

 

▲ <사진 3> 이 사진은 1945년 9월 패전국 일본에 급파된 미국 핵공학전문가집단이 교또제국대학(당시 명칭)에 있는 핵연구장치들을 해체하는 장면이다. 일본 해군은 1944년 10월 4일 교또제국대학의 핵과학자 아라까쓰 분사꾸 교수에게 핵탄개발을 의뢰하였다. 당시 아라까쓰가 추진하고 있었던 원심분리기제작이 완료되는 날은 일제 패망 나흘 뒤인 1945년 8월 19일로 예정되었다. 일제가 패망한 직후 일제의 핵탄개발사업을 폐지하기 위해 미국이 현지에 급파한 핵공학전문가집단의 일원으로 일제의 핵탄개발사업을 현장에서 조사하였던 로벗 퍼먼은 1945년 8월 당시 일제의 핵탄개발기술은 초기단계에 있었다고 증언하였다. 그런데 지금 미국은 고도의 국가핵무력을 완성한 조선을 비핵화하겠다고 떠들어대면서, '조선반도의 완전한 비핵화'가 무슨 뜻인지도 알지 못하는 헛소리를 늘어놓고 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일제가 패망하여 핵야망이 사라지는 듯했지만, 패망 이후 일본은 전범국으로서 자기 죄행을 반성하고 자숙하기는커녕 핵야망을 버리지 않았다. 흉악한 1급 전범으로 마땅히 사형을 당했어야 하지만, 미국이 사형집행 직전에 극적으로 살려주어 전후 일본을 미국의 요구대로 재건하는 임무를 맡긴 기시 노부스께(岸 信介) 일본 총리는 1957년에 “현행 헌법 아래서도 자위를 위한 핵보유는 용인된다”고 하면서 핵야망을 드러냈다. 

 

2013년 11월 29일 미국 노틸러스 연구소(Nautilus Institute)가 공개한, 미국 국무부 원동지역 연구부가 1957년 8월 2일에 작성한 보고서는 “1950년대 일본의 보수정권은 원동지역이 냉전적 긴장상태의 중심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핵무기를 생산하는 계획을 실행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고 하면서 “기시 노부스께 일본 총리는 핵무기가 일본 방위의 핵심이 될 것이라고 믿었지만, 핵무기 생산을 반대하는 여론을 무마하여야 했기 때문에 핵무기를 만들지 못했다”고 지적하였다. 

 

2014년 7월 24일 일본 텔레비전방송 <NHK>가 기밀해제된 일본 외교문서를 보도하였는데, 그 문서에는 기시 노부스께의 뒤를 이어 일본 총리가 된 이께다 하야또(池田 勇人)와 딘 러스크(David Dean Rusk) 미국 국무장관이 1964년 1월 28일 일본 도꾜에 있는 총리관저에서 진행한 회담내용이 담겼다. 회담에서 러스크 국무장관은 중국이 1~2년 안에 핵시험을 할 수 있다고 말했는데, 그 말을 들은 이께다 총리는 중국이 한 두 차례 핵시험을 해도 정세변화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중국의 과학수준과 경제수준을 보면, 핵시험은 불가능하지 않지만 (실전에 사용될) 핵무기를 만드는 것은 먼 미래의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께다는 당시 중국의 핵무기개발능력을 과소평가하였다. 이께다가 러스크 앞에서 과소평가발언을 늘어놓은 때로부터 9개월 만에 중국은 핵시험에서 성공하였고, 1966년 10월 27일에는 사거리가 1,250km인 둥펑-2 탄도미사일에 전술핵탄두를 장착하고 시험발사하여 기폭시켰으며, 1967년 6월 17일에는 3.3메가톤급 수소탄 기폭시험에서 성공하였다. 

 

중국의 핵무기개발은 일본을 자극하였다. <NHK> 2010년 10월 4일 보도에 따르면, 1964년 중국의 첫 핵시험 직후 일본 정부는 비밀보고서에서 중국의 핵보유가 일본에 미치는 정치적, 심리적 영향이 크다고 하면서, 일본은 “언제라도 핵무기를 보유할 수 있는 잠재능력을 중국보다 높은 수준에서 항상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고 한다.  

 

일본의 핵야망이 꿈틀거리자 미국은 그것을 억제하기 위해 ‘핵우산’ 공약을 확인해주어야 했다. 일본 외무성이 2008년 12월 22일에 공개한 외교문서에 따르면, 당시 중국의 핵무기개발에 자극을 받은 사또 에이사꾸(佐藤 英作) 일본 총리는 1965년 1월 12일부터 13일까지 워싱턴을 방문하여 린든 존슨 대통령과 회담하면서 일본에 대한 핵우산 제공을 보증해달라고 요청했는데, 존슨 대통령은 즉석에서 “내가 보증한다”는 확답을 주었다고 한다. 또한 사또 총리는 로벗 맥나마라(Robert S. McNamara) 미국 국방장관과 진행한 회담에서도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 미국은 즉각 핵공격을 포함한 반격을 해주기 바란다”고 하면서, “해상에 배치된 핵무기탑재 함선이라면 즉각 핵공격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고 물었다. 이것은 ‘핵우산’ 공약을 보증해달라는 소리였다. 말귀를 금방 알아차린 맥나마라 국방장관은 “해상에 배치된 핵무기탑재 함선이라면 기술적인 문제는 없다”고 맞장구를 쳤다. 

 

2007년 9월 14일 기밀해제된 일본 외교문서에 따르면, 중국이 수소탄 기폭시험에서 성공한 직후인 1967년 11월 맥나마라 국방장관은 워싱턴을 또 다시 방문한 사또 총리와 회담하면서 그에게 “핵무기 사용이 중국의 핵위협을 저지하기 위한 방도로 간주될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 공약확인과 더불어, 미국은 일본과 핵밀약을 체결하는 것으로 일본의 핵야망을 억제하였다. 1969년 11월 19일 워싱턴에서 진행된 미일정상회담에서 리처드 닉슨(Richard M. Nixon) 대통령과 사또 에이사꾸 총리는 긴급사태가 일어나는 경우 일본은 미국이 오끼나와 미국군기지에 핵무기를 반입하거나 미국의 핵전략자산이 오끼나와를 통과하는 것을 인정하고, 미국은 오끼나와에서 핵무기를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게 준비한다는 핵밀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미국과 핵밀약을 체결하였으면서도 핵야망을 포기하지 않고 은밀히 책동하였다. 독일 외무성의 기밀문서를 인용한 <NHK> 2010년 10월 4일 보도와 <요미우리신붕> 2010년 11월 20일 보도에 따르면, 1969년 2월 3일부터 5일까지 일본 도꾜에서 진행된 일본-서독 정책기획협의에서 일본 외무성 관리들은 “국제적으로 감시해도 핵분열물질을 5% 정도 추출하는 것을 차단하지는 못하므로, 핵탄생산기반을 구축할 수 있다. 일본은 핵무기 원료를 만드는 기술을 가졌다”고 밝히면서, 서독에게 핵공학기술협력을 요청했는데, 서독 외무성 대표단은 자기들이 그 문제를 결정할 수 없다고 하면서 발뺌하였다고 한다. 

 

그보다 앞서, 1967년 12월 사또 총리는 일본 국회에서 의원들의 질문에 답변하던 중에 이른바 ‘비핵3원칙’이라는 것을 언급하면서 일본은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고, 반입하지 않고, 만들지 않겠다고 뇌까렸지만, 그것은 흑막 뒤에서 핵야망을 실현하려고 책동하면서, 무대 위에서는 마치 핵야망을 포기한 것처럼 연출한 희대의 사기극이었다. 사기극에 감쪽같이 속은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비핵3원칙’을 제시한 ‘공로’를 인정하여 1974년 3월 그에게 노벨평화상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일본이 핵야망을 실현하려고 책동해도, 미국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수는 없었다. 얼마 전, 조선이 국가핵무력을 완성한 직후 일본의 핵야망은 또 다시 꿈틀거렸지만, 일본은 중국이 핵무기개발에 박차를 가하던 1960년대에 그러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핵야망을 행동에 옮기지 못했다. 미국의 손아귀에 붙잡혀 있기 때문이다. 

 

 

3. 고용간첩 도미탈주극으로 파탄된 대만의 핵개발사업

 

1988년 1월 9일 미국 서북단에 있는 워싱턴주 씨애틀-타코마 국제공항에 미국 중앙정보국 요원들이 모여들었다. 이윽고 홍콩발 미국 민항기에서 내린 중국인 한 사람이 특별입국절차를 마치더니 중앙정보국 전용차량을 타고 순식간에 공항을 빠져나갔다. 그 중국인은 미국 중앙정보국에게 포섭되어 오랜 기간 대만에서 고용간첩으로 암약해온 장셴이(張憲義)였다. 그는 당시 비밀리에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었던 대만 중산과학연구원 제1연구소 부소장이었다. 1988년 1월 13일 장셴이는 미국 연방의회 비밀청문회에서 대만의 핵무기개발에 관한 극비정보를 털어놓았다. 첩보영화장면처럼 흘러가는 이 극적인 사건이 일어나기까지 대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일본이 그러했던 것처럼 대만도 중국의 첫 핵시험에서 자극을 받고 핵야망을 품었다. 대만이 중산과학연구원을 설립하고 ‘신주(新竹)계획’이라는 이름의 핵무기개발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한 때는 1969년이었다. 당시 중산과학연구원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던 장셴이는 미국에 유학하였는데, 그가 미국에서 핵공학 박사학위를 받은 때는 1973년이었다. 미국 중앙정보국은 대만이 핵무기개발사업을 시작하기 훨씬 전부터, 다시 말해서 장셴이가 1965년부터 1968년까지 대만 국립칭화대학에서 핵공학을 공부할 때부터 그를 포섭하여 고용간첩으로 육성하였다. 

 

대만은 중국이 국가핵무력을 완성하였던 1980년에 기존 ‘신주계획’을 ‘타오위안(桃園)계획’이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핵무기개발사업을 가속화하였는데, 대만의 핵무기개발사업이 가속화될수록 장셴이의 간첩활동도 더욱 대담해지고 활발해졌다. 대만은 핑둥(屛東)현에 건설된 주퍼(九鵬)지하시설 안에 각종 핵공학설비들을 들여놓고 플루토늄추출기술을 확보하였고, 연속적인 고폭시험으로 핵무기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핵탄두운반수단을 만들기 위해 ‘텐마(天馬)계획’이라는 이름의 탄도미사일개발사업도 병진시켰다. 그리하여 대만은 늦어도 1989년까지 핵무기개발을 완료할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진 4> 

 

▲ <사진 4> 이 사진은 대만 중산과학연구원 경내에 있는 연구개발전시관 외부를 촬영한 것이다. 중국의 첫 핵시험에서 자극을 받은 대만은 1960년대 후반에 핵무기개발을 비밀리에 추진하였다. 대만은 1969년 중산과학연구원을 창설하고, '신주계획'이라는 이름의 핵무기개발사업에 집착하였다. 중국이 국가핵무력을 완성하였던 1980년에 대만은 기존 '신주계획'을 '타오위안계획'이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핵무기개발을 더욱 가속화하였다. 그리하여 대만은 늦어도 1989년까지 핵무기개발을 완료할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미국은 20여 년 동안 대만 핵무기개발사업의 핵심부에 박아둔 고용간첩 장셴이를 1988년 1월 8일 미국으로 빼돌려 대만의 핵무기개발사업을 파탄시켰다. 닉슨의 동아시아철군정책에 의해 주한미국군 제7사단이 전격 철수되자 안보불안에 사로잡힌 박정희는 비밀리에 핵무기개발을 추진하던 중 미국의 제지를 받고서도 계속 강행하다가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 술자리에서 김재규의 총에 암살당했고, 중국의 국가핵무력 완성에 자극을 받은 대만 총통 장징궈는 비밀리에 핵무기개발을 추진하였으나 미국 중앙정보국 고용간첩 장셴이와 그의 가족이 도미탈주한 사건에서 너무 큰 충격을 받고 비명횡사하였다. 이런 일련의 사건은 핵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는 한국, 대만, 일본은 어떤 경우에도 핵무기를 개발하지 못한다는 점을 말해준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만일 대만이 핵무기를 만들고 독립을 선포하면, 중국은 즉각 대만을 복속시키는 통일전쟁을 단행할 판이었다. 그렇게 되면, 핵보유국과는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따르는 미국은 발만 동동 구르다가 대만을 중국에게 넘겨주게 될 판이었다. 1987년 중국-대만-미국 삼각관계는 극도의 긴장 속에 휘말렸다.   

 

중국이 통일전쟁에서 승리하고, 대만이 중국에게 넘어가는 씨나리오는 미국에게는 대재앙인데, 미국이 그런 재앙을 피할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었다. 미국 중앙정보국이 20여 년 동안 대만 핵무기개발사업의 핵심부에 박아둔 고용간첩 장셴이를 미국으로 빼돌려 대만의 핵무기개발사업을 파탄시키는 것이었다. 

 

결국 1988년 1월 8일에 일어난 장셴이와 그 가족의 극적인 도미탈주극으로 대만의 핵무기개발사업은 파탄되었다. 장셴이의 도미탈주극을 보고받고 심한 충격에 빠진 대만 총통 장징궈(蔣經國)는 병석에서 피를 토하다가, 장셴이가 미국 연방의회 비밀청문회에서 대만의 핵개발사업에 관한 극비정보를 털어놓은 바로 그날 숨을 거두었고, 그의 뒤를 이어 미국의 말을 잘 듣는 리덩후이(李登輝)가 권좌에 올랐다. 리덩후이는 미국이 정해준 비핵화씨나리오에 따라 대만의 핵무기개발사업을 폐기하였다.  

 

그렇다면 대만은 핵야망을 영구히 포기하였던가? 리덩후이가 핵무기개발사업을 폐기한 때로부터 18년이 지난 2007년 11월 11일 중국 홍콩에서 발간되는 시사주간지 <아주주간>에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대만이 핵보유국인 인도로부터 비밀리에 핵무기개발에 관련된 기술지원을 받고 있다는 폭로기사였다. 보도기사에 따르면, 1998년 5월 인도가 핵시험에서 성공하였을 때 인도 국방장관으로 재직하였으며, 평소에 중국에게 적대감을 드러내는 쉬리 조지 퍼난데스(Shri George Fernandes)는 2004년 11월 대만을 처음 공개적으로 방문하여 대만 총통 천수이볜(陳水扁)을 만난 이후 여러 차례 비공개로 대만을 방문하였는데, 대만에 갈 때마다 그는 총통의 안보자문기관인 국가안전회의 인사들을 비밀리에 만났고, 대만 국가안전회의 인사들도 여러 차례 인도를 비밀리에 답방하여 인도 국방부 관리들을 만났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대만의 야당인사는 2007년 10월 19일 대만 입법원에서 대정부질의를 하면서 천수이볜 정부가 인도의 전직 국방장관과 핵무기개발전문가들을 비밀리에 대만으로 초청하였다고 폭로하였다. 

 

대만이 인도의 기술협력을 받으며 핵무기개발을 재개하였음을 보여주는 명확한 증거는 보이지 않지만, 양자 사이의 비공개 교류는 의심을 불러일으킬 만하다. 2020년까지 대만을 복속하겠다고 벼르고 있는 중국이 대만의 분리독립책동을 억제하려는 군사활동을 대만 주변에서 계속 벌이고 있는 오늘의 긴장된 정세에서 대만이 또 다시 핵야망을 추구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의혹이 생긴다.   

 

 

4. 닉슨의 동아시아철군정책과 저우언라이의 오판

 

1960년대 말에 핵탄두를 개발한 중국은 그것을 운반할 탄도미사일개발에도 박차를 가했다. 1970년 1월 30일 중국은 둥펑-4 중거리탄도미사일 시험발사에서 성공하였다. 2단형 로켓으로 설계된 이 중거리탄도미사일이 실전배치되면, 미국의 서태평양전략거점인 괌(Guam)을 사정권 안에 둘 수 있었다. 또한 중국은 1970년 4월 24일 중국의 첫 인공위성 둥팡홍(東方紅)-1호를 탑재한 위성운반로켓 창정(長征)-1호를 성공적으로 쏘아올렸다. 이것은 중국이 대륙간탄도미사일을 개발하기 시작하였음을 말해주는 사건이었다. 

 

국가핵무력 완성을 향한 중국의 움직임을 감시해오던 미국은 국가안보위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감지하였다. 그리하여 미국은 신흥 핵보유국 중국과 관계를 개선하는 수밖에 없었다. 닉슨 대통령은 자기의 심복 헨리 키씬저(Henry A. Kissinger) 국가안보보좌관에게 대중관계개선을 추진하라는 특명을 주고, 그를 베이징에 밀사로 파견하였다. 1971년 7월 9일 베이징에서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총리와 키씬저 미국 대통령 밀사의 비밀회담이 진행되었다. 회담에서 저우언라이는 철군지역들을 지적하였는데, 그가 중요순위에 따라 열거한 지역은 베트남, 대만, 한반도였다.  

 

그런데 당시 중국은 닉슨의 동아시아철군정책에 관한 심층정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닉슨의 동아시아철군정책은 베트남중부전선 케산전투에서 미국군이 패한 이후 베트남에서 미국군을 완전히 철수하고, 중국과 맞선 핵대결에서 패한 이후 대만에서도 미국군을 완전히 철수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닉슨은 1968년 1월 23일 미국 첩보선 푸에블로호가 원산 앞바다에서 조선인민군 해군에게 나포된 사건, 1969년 4월 15일 미국 첩보기 EC-121이 동해 상공에서 조선인민군 공군 전투기에게 격추당한 사건으로 핵제국의 체면이 무참히 짓밟힌 한반도에서도 미국군을 완전히 철수하려고 생각하였다. <사진 5>

 

▲ <사진 5> 이 사진은 1971년 7월 9일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가 베이징을 비밀리에 방문한 미국 대통령 밀사 헨리 키씬저와 상봉하는 장면이다. 1960년대 말 국가핵무력 완성을 향한 중국의 움직임을 감시해오던 미국은 국가안보위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감지하고, 신흥 핵보유국 중국과 관계를 개선하는 수밖에 없었다.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은 자기의 심복 키씬저 국가안보보좌관에게 대중관계개선을 추진하라는 특명을 주고, 그를 베이징에 밀사로 파견하였다. 저우언라이-키씬저 비밀회담은 그렇게 성사되었다. 그런데 당시 중국은 닉슨의 동아시아철군정책에 관한 심층정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만일 저우언라이가 정세를 오판하지 않고 키씬저에게 주한미국군 철수를 강하게 요구하였더라면, 닉슨은 자기의 철군구상을 실행에 옮겼을 것이고, 그런 정세급변에 대처하지 못한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은 붕괴되고, 평화통일을 천명한 김대중 정부가 들어섰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더라면, 김대중 정부와 북측 정부는 1972년 7월 4일 남북공동성명에 제시된 조국통일 3대 원칙에 의거하여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통일공화국을 건설하였을지 모른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1969년 8월 21일 미국 쌘프랜시스코에서 열린 한미정상회담에서 닉슨은 박정희에게 “북의 도발이 계속되기 때문에 주한미국군을 철수할 생각은 전혀 없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철군을 두려워하는 박정희를 속인 거짓말이었다. 닉슨은 자신을 수행하여 한미정상회담에 배석한 윌리엄 포터(William J. Poter) 주한미국대사를 한미정상회담 직후 따로 부르더니, 주한미국군 철수훈령을 곧 내리겠다고 그에게 말했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국무부, 국방부, 중앙정보국은 닉슨 대통령의 철군준비지시를 받고 주한미국군 철수문제를 검토하였다. 

 

그런데 키씬저가 철군을 강하게 반대하는 바람에 닉슨은 주한미국군을 완전히 철수하려던 자신의 구상을 접고, 감군훈령을 내리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닉슨의 감군훈령에 따라, 미국 국방부는 1971년 3월 27일 주한미국군 제7사단을 전격 철수하였고, 남겨둔 제2사단은 서부전선 방어임무를 한국군 전방사단에게 넘겨주고 뒤쪽으로 물러서게 조치하였다. 

 

키씬저는 왜 닉슨의 철군구상을 반대하였을까? 이 물음에 명쾌한 해답을 주는 문서들은 찾아볼 수 없지만, 당시 그는 두 가지 반론을 제기했던 것으로 보인다.

 

첫째, 주한미국군이 철수하는 경우, 박정희 정권이 붕괴되어 한국을 잃어버리게 될 것으로 우려하였기 때문에 키씬저는 닉슨의 철군구상을 반대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둘째, 주한미국군이 철수하고, 미국이 한국을 잃어버리는 경우, 정세급변으로 충격을 받은 일본이 핵야망을 다시 추구하게 될 것으로 우려하였기 때문에 키씬저는 닉슨의 철군구상을 반대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닉슨의 철군구상은 키씬저가 반대하는 바람에 흐지부지되고, 제7사단만 철수하였는데, 당시 그런 내막을 알지 못한 중국은 제7사단 철수가 주한미국군을 단계적으로 완전히 철수하는 ‘서막’인 것으로 오판하였다. 미국군이 베트남과 대만에서 각각 철수하기 훨씬 전에 한반도에서 먼저 제7사단이 전격 철수했으니, 중국이 그렇게 오판할 만도 했다.  

 

중국이 그런 오판에 빠져 있었던 때, 다시 말해서 주한미국군 제7사단이 철수된 때로부터 약 석 달 뒤, 키씬저가 베이징에 나타났다. 그를 만난 저우언라이는 미국이 주한미국군을 철수하고 일본자위대를 한국에 파병하려는 게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1971년 7월 11일 베이징에서 키씬저를 만난 저우언라이는 “25년 뒤 미국이 패권적 지위를 누리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일본은 강해졌다. 만일 지금 원동지역에서 미국군이 모두 철수하면, 일본을 강화시켜 아시아 나라들을 통제하는 데서 미국의 전위대로 내세우려는 것이 미국의 목적”이라고 지적하면서, 미국이 주한미국군을 철수하고 일본자위대를 한국에 파병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질문을 키씬저에게 들이댔다.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은 키씬저는 미국이 일본의 해외팽창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원론적인 답변만 꺼내놓았는데, 저우언라이의 의심은 그런 답변으로 해소될 수 없었다. 1971년 10월 22일 베이징에서 진행된 제2차 회담에서 저우언라이는 키씬저에게서 확답을 받아내기 위해 이렇게 다그쳤다. “나는 한 마디 덧붙고 싶다. 만일 당신들의 궁극적인 목표가 남조선에서 미국군을 철수하는 것이라면, 미국군을 일본군으로 대체하는 것도 당신들의 목표인가? 그런가, 그렇지 않은가?” 이 물음에 키씬저는 이렇게 답변했다. “주한미국군을 일본자위대로 대체하는 것은 우리의 목표가 아니다. 일본자위대의 대만 파병에 대해 내가 어제 언급했던(반대했다는 뜻-옮긴이) 일반적인 원칙과 똑같다. 미국은 일본의 군사팽창을 반대한다.” 

 

닉슨의 동아시아철군정책을 오판한 저우언라이는 주한미국군을 일본자위대로 대체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키씬저의 답변을 믿을 수 없었다. 일본자위대가 한국에 파병되는 최악의 씨나리오를 피해야 한다고 생각한 저우언라이는 키씬저에게 주한미국군 철수를 더 이상 요구하지 않았다. 

 

만일 저우언라이가 정세를 오판하지 않고 키씬저에게 주한미국군 철수를 강하게 요구하였더라면, 중국과 맞선 핵대결에서 패해 수세에 몰린 닉슨은 자기의 철군구상을 실행에 옮겼을 것이며, 그런 정세급변에 대처하지 못한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은 붕괴되고, 1971년 4월 27일 대선에서 ‘3단계 평화통일’을 천명한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더라면 김대중 정부와 북측 정부는 1972년 7월 4일 남북공동성명에서 김일성 주석이 제시한 조국통일 3대 원칙을 구현하여 통일공화국을 건설하였을지 모른다. 

 

당시 베트남이 통일된 과정을 보면, 1968년 1월 21일부터 7월 9일까지 계속된 케산전투에서 패한 미국은 1973년 3월 29일 베트남에서 미국군을 철수했고, 그로부터 2년이 지난 1975년 4월 30일 베트남민족은 통일공화국을 건설하였다. 베트남의 역사적 경험은 미국의 패배로부터 철군까지 5년, 철군에서 통일까지 2년밖에 걸리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1970년대 초 우리 민족에게 다가왔던 철군의 기회는 사라졌고, 전쟁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정전체제는 그대로 남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긴 세월이 흐른 오늘 우리 민족은 금은보화보다 더 귀중한 두 번째 기회를 맞았다. 어떤 기회인가?

 

조선의 국가핵무력 완성으로 미국이 조선과 맞선 핵대결에서 패하였고, 근 반세기 전에 닉슨 대통령이 주한미국군 철수를 구상하였던 것처럼 오늘 트럼프 대통령도 주한미국군 철수를 구상하고 있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조미핵대결에서 승리한 기세로 주한미국군을 철수시키고 자주통일을 실현하려는 전략구상을 추진하고 있고, 문재인 대통령은 그토록 험악했던 박정희 군사독재정권 하에서도 3단계 평화통일론을 외쳤던 김대중 대통령을 따라가지는 못하지만 남북관계개선에는 상당히 적극적이다.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그런 변화들이 정전-분단체제를 뒤흔드는 가운데, 남북정상회담, 조미정상회담, 조중정상회담이 잇달아 성사되면서 종전선언 발표가 일정에 올랐고, 철군기회가 마침내 시야에 들어왔다. 

 

위와 같은 정세인식에 이르면, 올해 1월부터 주체적 조건들과 객관적 조건들이 서로 착착 맞물리면서 조국통일정세가 성숙되어가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나니, 8천만 우리 민족이 힘을 합쳐 몇 해 안에 통일공화국을 건설할 눈부신 내일을 뉘라서 감히 외면할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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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폼페이오 방북 ‘전격 취소’ 미스터리... 백악관 막후에서 무슨 일이?

핵심 정책결정권자 모두 백악관 불려들어가 통보받아... 이번 ‘뒤집기’ 카드는 실패 가능성 농후

김원식 전문기자
발행 2018-08-26 14:51:21
수정 2018-08-26 15: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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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4일(현지 시간)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 대북정책 특별대표에 지명된 스티븐 리건, 성 김 필리핀주재 대사, 앤드류 김 중앙정보국(CIA) 코리아미션센터장 등을 백악관으로 불려 대북 회의를 하고 있는 모습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4일(현지 시간)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 대북정책 특별대표에 지명된 스티븐 리건, 성 김 필리핀주재 대사, 앤드류 김 중앙정보국(CIA) 코리아미션센터장 등을 백악관으로 불려 대북 회의를 하고 있는 모습ⓒ댄 스커비노 백악관 소셜미디어 국장 트위터
 
 

“하룻밤 지나고 나니 트럼프 대통령이 갑자기 바뀌었다. 정치뿐만 아니라, 외교관계도 자신의 동물적인 감각을 자신하는 그에게 누군가가 보고나 전화를 한 것이 분명하다”

지난 24일(이하 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방북을 하루 만에 전격 취소한 배경에 관해 워싱턴의 한 소식통이 전한 말이다. 누가 트럼프 대통령의 마음을 바꾸게 했는지는 아직도 미스터리지만, 그날 오전 백악관이 급박하게 돌아간 것은 분명하다.

24일, 오전 트럼프 대통령의 호출을 받은 폼페이오 국무장관을 비롯해 새로 대북정책 특별대표에 지명된 스티븐 리건, 그동안 대북 실무회담 총책을 맡았던 성 김 필리핀주재 대사, 그리고 북한과 막후 실무협상을 주도하는 앤드류 김 중앙정보국(CIA) 코리아미션센터장 등이 모두 백악관으로 불려들어갔다.

댄 스커비노 백악관 소셜미디어 국장이 25일, 공개한 그날 백악관 회의 사진을 보면, 마이크 펜스 부통령은 물론 존 켈리 비서실장을 포함해 백악관 대변인 등 주요 참모진도 모두 배석했다. 여기서 트럼프 대통령은 종이 한 장을 들고 전격 방북 취소를 거의 통보한 셈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4일(현지 시간)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 대북정책 특별대표에 지명된 스티븐 리건, 성 김 필리핀주재 대사, 앤드류 김 중앙정보국(CIA) 코리아미션센터장 등을 백악관으로 불려 대북 회의를 하고 있는 모습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4일(현지 시간)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 대북정책 특별대표에 지명된 스티븐 리건, 성 김 필리핀주재 대사, 앤드류 김 중앙정보국(CIA) 코리아미션센터장 등을 백악관으로 불려 대북 회의를 하고 있는 모습ⓒ댄 스커비노 백악관 소셜미디어 국장트위터

주요 외신과 외교 소식통의 전언에 따르면, 백악관은 물론 국무부의 주요 핵심 실무자들도 급작스러운 전격 취소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특히, 방북하고 돌아오는 길에 일본에서 한미일 외교장관 회담을 개최해 방북 내용을 설명하려고 준비하던 국무부 관계자들은 거의 멍하니 언론 발표를 보고 취소 사실을 알아야 했다.

백악관 내부도 마찬가지였다. 국가안보회의(NSC) 관계자들도 전혀 전격 취소 발표 사실을 사전에 알지 못했다는 분위기다. 우크라이나를 방문 중이던 존 볼턴 보좌관도 스피커폰을 통해 백악관 회의에 참여해서 트럼프 대통령의 통보를 들어야 했다고 주장한다.

의문이 남는다. 대통령이 중요한 외교관계 문제를 급히 결정하는데, 만약 중앙정보국도 백악관 NSC도 국무부도 전혀 몰랐다면, 누가 미국 대통령을 움직였을까? 가장 유력한 가설은 존 볼턴 보좌관을 중심으로 하는 대북 강경파 일원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이번에도 ‘빈손 귀국’을 한다면, 역풍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협박(?)했다는 추론마저 난무한다.

북미관계 자랑하던 트럼프, 하루 만에 스스로 궁지에 빠진 꼴

트럼프 대통령이 특유의 ‘승부사 기질’로 북한과 중국에 양보를 더 얻어내기 위해 또 ‘판 뒤집기’의 충격 전략을 사용했다고 하더라도 이번에는 별로 통하지 않을 것 같다. 불과 하루 전까지도 “북한이 비핵화 조치를 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자랑하던 그가 “비핵화와 관련해 충분한 진전을 이뤄내지 못하고 있다”고 말을 바꿨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그동안 ‘가짜 뉴스’라고 비난하던 미 주류 언론들은 이 점을 놓치지 않고 있다. “북미협상이 교착된 좌절감의 첫 공개적인 신호”라는 비판이 가세하면서, 온통 트럼프 대통령의 그동안 대북정책이 ‘실패’했다는 칼럼들이 넘쳐난다.

북·중의 양보를 얻기 위해 던진 승부수라고 해도 그것이 효과를 발휘하기도 전에 내부 비판의 치명상을 입고 있는 셈이다. 이 치명상을 각오하고도 북·중 양국에서 양보를 받아낼 가능성도 크지 않다. 당장 중국 외교부는 중국 탓을 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주장은 ‘무책임하다’고 비난하고 나섰다.

북한도 북미정상회담이 개최되기 전의 사정하고는 많이 바뀌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나름대로 핵 실험장 폭파는 물론 미군 유해까지 송환해가면서 북미공동성명을 이행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북한이 똑같은 양보는 하지 않고 초강수를 계속 두는 미국에 이제는 양보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트럼프 대통령이 전격 취소 하루 전까지도 북한과 김정은 위원장에 관해 칭찬과 친밀감 일변도로 북미관계를 설명해 왔다는 것이 스스로 발목을 잡고 있다. 한미 연합군사훈련도 중단하면서, 북한 칭찬으로 일관했던 트럼프 대통령이 다시 대북 강경책을 구사하려면, 자신의 기존 말을 다 뒤집어야 하기 때문이다.

온통 미 주류 언론들이 ‘차라리 안 가는 것이 잘했다’고 보도하고 있지만, 이는 사실 트럼프 대통령을 가장 강력하게 비난하고 있는 말에 불과하다. 미 의회전문 매체 ‘더 힐’은 이에 관해 25일, 전문가의 말을 인용해 트럼프 대통령의 전격 방북 취소는 ‘실수’였다고 비판했다.

미 전문매체들 “트럼프 결정은 ‘실수’... 한국인들 ‘우려’ 더 커져”

이 매체는 “폼페이오 장관은 평양에 가서 김정은 위원장의 진짜 의도를 테스트해야 했다”면서 “트럼프 행정부는 북한과 대화가 계속돼야 하는 이유가 아니라, 골치 아픈 문제는 더욱 뒤로 미뤘다(kick the can farther down the road)는 이유를 발표했다”고 꼬집었다.

‘더 힐’은 또 다른 전문가의 말을 인용하면서 “미국이 무언가를 얻으려고 한다면, 무언가를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면서 “비핵화라는 큰 것을 원한다면, ‘평화 협정’을 위해 함께 노력하는 큰 것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에 관해 미 정치전문 매체 ‘폴리티코’는 25일, 장문의 기사를 통해 한국에서 트럼프 대통령에 관한 ‘염려(anxiety)’가 확대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매체는 한국인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종전선언은 보장하지 않으면서, 단지 김정은 위원장과 회담한 것을 자신의 ‘승리(trophy)’라고 치부하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 매체는 또 많은 한국인들은 북한에 압력을 유지하기 위해 중국의 협력이 필요한 시기에 트럼프 대통령이 무역 전쟁을 개시한 것에 실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한국인들은 이는 첫 만남에서 돌파구를 찾으려는 트럼프 대통령의 성급한 개인 성격과 관계가 있다고 우려한다고 설명했다.

‘폴리티코’는 특히, 한국 매체의 한 전문기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한국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트럼프 개인의 성격과는 관계없이 그가 핵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그를 지지할 것”이라면서도 “하지만 지금은 그가 그런 능력이 있는지 점점 의문이 커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매체는 또 다른 한국인들의 말을 인용하면서, “트럼프 대통령이 평화를 가져온다면, 그의 접근법이나 태도는 심각한 문제가 될 것은 없다”면서 “하지만 지난해가 재앙(disaster)이었듯이 지금도 미래는 불확실하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희망은 있지만, 어쩌면 다시 험악한(nasty) 상황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하고 있다”고 전했다.

19년 전, 트럼프 “지금 협상하지 않으면, 큰 어려움 직면할 것” 예언

트럼프 대통령은 지금부터 19년 전인 지난 1999년 10월, 자신의 자서전 출판을 계기로 미 NBC 방송에 출연해 “북한의 핵 개발을 멈추려면, 지금 협상을 해야 한다”며 “북한이 우리(미국)가 협상에 진지하다고 생각하면, 협상에 응할 것이고 문제가 될 일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1999년 11월 미 CNN 방송에 출연해 “지금 북한과 협상을 시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5년 후에는 더 엄청나게 큰 어려움에 직면할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1999년 11월 미 CNN 방송에 출연해 “지금 북한과 협상을 시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5년 후에는 더 엄청나게 큰 어려움에 직면할 것이다”라고 예언했다.ⓒ미 CNN 방송화면 캡처

그는 같은 해 11월에도 미 CNN 방송에 출연해 미 행정부의 대북 정책을 비판하면서, “지금 북한과 협상을 시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5년 후에는 더 엄청나게 큰 어려움에 직면할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결국, 북한과의 협상은 고사하고 더욱 강경책을 펼친 조지 W. 부시 정권의 등장으로 현재까지 그의 예언은 적중하고 있다.

한마디로 이번 트럼프 대통령의 ‘폼페이오 방북 전격 취소’ 카드는 불발탄을 넘어 트럼프 자신의 발목에서 터질 가능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미국 국내적으로는 자신의 말도 책임지지 못하고 대북 정책에 관해 ‘오만(hubris)’에 가득 찼음이 드러났다는 비판이 봇물을 이룬다.

한국 정부(외교부)도 공식적으로는 “아쉽게 생각한다”고 발표했지만, 늘 ‘긴밀 공조’를 강조하던 미 백악관의 처사의 당혹함을 넘어 혼란에 빠지고 있는 모습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금 되새겨 들어야 할 말은 어쩌면 바로 자신이 19년 전에 스스로 했던 “지금 북한과 협상을 하지 않으면, 앞으로 더 엄청나게 큰 어려움에 직면할 것”이라는 말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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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 쇼크'는 헛소리다!

[오민규의 인사이드 경제] 다른 말 하는 취업자 통계와 고용보험 행정통계

 

 

 

일주일째 '고용 쇼크'를 놓고 온갖 주장과 해석이 범람하고 있다. 통계청에서 발표한 '7월 고용 동향' 자료 하나를 놓고 벌어진 일이다. 여기에 나온 수치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논쟁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거의 일방적으로 "문재인 정부 소득주도성장 정책이 재앙을 불러왔다"는 공격, 그리고 "원인을 정확히 찾기 어렵다"는 정부의 어설픈 변명뿐이다.
 
놀랍게도 통계청 발표자료의 적합성에 문제를 제기하는 논의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이런 상황일수록 <인사이드 경제>는 언제나 삐딱한 접근법을 선호한다. 도대체 그놈의 '7월 고용 동향'의 실체가 뭐야? 조사는 어떻게 하는 거고 결과는 신뢰할 수 있는 건가? 고용 지표 조사를 위해 이것보다 더 좋은 자료나 데이터는 없는 거야? 아무도 묻지 않는 이런 질문을 던지면서 ‘고용 쇼크’ 논쟁에 뛰어들어 보기로 했다.
 
표본 추출에 기반한 통계청 조사 
 
통계청 발표 자료의 원본은 매월 시행하는 ‘경제활동인구조사’이다. 7월에 시행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국의 취업자 수는 약 2708만3000명이라고 한다. 작년 7월에는 2707만8000명으로 조사되었는데, 1년 뒤에 취업자 수가 고작 5000명 늘어난 것이다. 올해 1~4월에는 전년 동월 대비 최소 10만 명 이상씩 늘었는데 7월에는 5000명으로 나왔으니 ‘쇼크(shock)’라는 거다. 
 
<인사이드 경제>가 던지는 기본 질문은 이거다. 통계청이 2700만에 달하는 취업자를 모두 조사했을까? 아니지. 정확히 말하면 실업자, 비경제활동인구, 취업자를 구분해야 하니 5000만 국민 전체를 조사해야만 취업자 수를 정확히 추산할 수 있는 법이다. 그런데 10~20만 명도 아니고 5000만 명을 무슨 수로 매월 조사한다는 말인가.
 
그렇다. 그건 불가능하다. 그럼 통계청은 저 숫자를 대체 어떻게 내놓는다는 말인가. 통계학적으로 검증된 ‘표본 추출’ 방식에 의존한다. 경제활동인구조사의 경우 전국의 1737개 조사구에서 약 3만5000 가구를 선정해 조사를 벌인다고 한다. 이 표본들은 노후화 방지를 위해 매월 970가구씩 교체된다. 
 
한두 번 조사를 하는 것도 아니고 매월 하는 것이니 이런 표본 조사의 신뢰도는 매우 높은 편이라고 가정해볼 수 있다. 하지만 그건 ‘합리적인 가정’일 뿐이다. 전수 조사가 아닌 이상 표본 조사는 통계적으로 반드시 오차를 가질 수밖에 없다. 표본 설계가 얼마나 정밀하가에 따라 오차율 범위를 줄일 수 있을 뿐, 표본 조사를 하는 이상 오차를 배제할 수 없다.
 
오차율 범위에 따라 실제 취업자가 5000명만 증가했을지, 아니면 10만 명 이상 증가했을지, 오히려 취업자가 줄었을지도 모른다. <인사이드 경제>는 통계청 조사의 신뢰도 전체를 깔아뭉갤 생각이 아니다. 표본조사에서 오차가 불가피하다면, 다른 조사를 통해 이를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이런 상식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연합뉴스

전수조사에 입각한 행정통계 노동시장 동향 
 
참조해볼 만한 다른 자료가 하나 있다. 박근혜 정권 시절인 2016년 6월부터 고용노동부가 매월 발표하고 있는 ‘행정통계로 보는 노동시장 동향’이다. 이건 주로 고용보험 DB와 Work-Net 등을 활용한 행정통계인데, 고용보험에 가입되어 있는 모든 노동자들의 데이터가 다뤄지므로 사실상 전수조사나 다름없다. 
 
고용보험 DB를 활용하면 매월 피보험자 전체 규모를 1명 단위까지 정밀하게 파악할 수 있다. 아울러 고용보험 신규가입자, 피보험자격 상실자 수도 파악할 수 있어서 매월 노동시장에 진입하는 노동자, 해고·계약해지를 당하는 노동자 규모도 파악이 가능하다. 가입자들의 연령·성별·지역·산업도 알 수 있기에 통계자료를 연령별·성별·지역별·산업별로도 분류할 수 있다.
 
물론 이 통계자료에는 분명한 약점이 있다. 우선 ‘고용보험에 가입된 노동자’들만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경제활동인구 중 자영업자들이 기본적으로 빠지게 된다. 또한 고용보험 가입대상에서 제외되는 월 60시간 미만(주 15시간 미만)을 일하는 초단시간 노동자와 공무원들이 빠진다. (공무원이 고용보험 혜택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아는 분들이 의외로 많지 않다.)
 
아울러 여러 가지 이유로 고용보험에 가입하지 못한 노동자들도 있다. 사용자들이 4대 보험 납부를 꺼려 근로계약서조차 체결하지 않는 영세기업이나 사각지대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고용보험 행정통계는 전수조사에 가깝다는 장점이 있긴 하나, 자영업자·공무원·초단시간·사각지대 노동자들이 통계에서 제외된다는 분명한 약점과 한계를 갖고 있다.
 
하지만 앞서 살핀 것처럼 통계청의 경제활동인구조사 역시 표본조사라는 약점을 갖고 있지 않던가. 고용지표를 정확히 보여주는 완전무결한 통계자료가 있다면 좋겠지만, 각자 약점을 가진 자료들뿐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느 한 자료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자료를 동시에 참조하되, 각각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는 게 옳지 않을까.
 
고용보험 피보험자는 매년 30만 명씩 꾸준히 증가 
 
그래서 2개의 자료를 동시에 보기로 했다. 일자리 통계의 경우 계절적 요인이 있으므로 전월과 비교하는 것보다 전년 동월과 비교하는 것이 좋다. 가장 최근 통계가 2018년 7월 데이터이니 매년 7월 현재 취업자수(경제활동인구조사)와 고용보험 피보험자 수를 아래와 같이 나타내 보았다. 
 
자, 어떤가? 일단 눈에 들어오는 것은 2개 자료의 숫자 규모이다. 자영업자·공무원·초단시간 노동자가 빠진 고용보험 피보험자 수치가 취업자 수치에 비해 절반 가량으로 떨어진다. 이를테면 지난 7월 현재 취업자 수는 2708만 명인 반면, 고용보험 피보험자 수는 1318만 명이다. 이건 고용보험 행정통계가 가진 약점과 한계를 반영한다.
 
그러나 전년 동월 대비 증가율을 살펴보자. 취업자 수의 경우 1.13%, 1.79%의 증가율을 보이며 매년 약 30~40만 명씩 늘어나다가 갑자기 올해에 고작 0.02%, 작년 대비 5000명 늘어나는 것에 그쳤다. 하지만 고용보험 피보험자 수는 매년 2~3%씩 꾸준히 늘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니, 똑같은 일자리 관련 통계인데 결과치가 왜 이렇게 다른 걸까?
 
다행히 2개의 통계 모두 산업별 데이터를 함께 제공하고 있다. 전체 규모만 보는 것보다 산업별 세부 데이터를 보면 좀 더 변별력이 생길 것이다. 그래서 2개의 통계자료로부터 주요 산업별로 매년 7월 데이터만 추출해 아래와 같이 표를 만들어 보았다.
 
농림어업의 경우 당연히 대부분의 농민들은 피고용인이 아니라 자영업자로 분류될 것이다. 교육서비스업의 경우 대표적인 공공분야여서 공무원으로 분류되는 종사자들이 꽤 많을 것이다. 그래서 이 2개의 산업에서 피보험자 숫자는 취업자에 비해 훨씬 작게 나타나며, 이런 부분은 고용보험 행정통계가 가진 약점 중 하나이다. 
 
제조업을 한번 보자. 한국 제조업의 활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피보험자 수 증가율도 이를 반영하듯 느림보 걸음이다. 그런데 취업자 수 통계는 마이너스에서 3%대로 솟구쳐 올랐다가 다시 마이너스로 널을 뛴다. 제조업의 경우 취업자와 피보험자 수의 차이도 크지 않기에 전수조사에 가까운 피보험자 수의 변화가 좀 더 현실을 잘 반영한다고 보는 게 옳다. 이런 지점은 통계청 표본조사의 명백한 한계와 약점이라고 할 수 있다.
 
제조업 대신 서비스업, 특히 도소매와 숙박음식 분야에서 일자리 성장률이 높다는 것 역시 잘 알려진 사실이다. 물론 일자리의 질적 측면에선 따져볼 얘기가 많지만, 어쨌건 이 분야 일자리가 늘고 있다는 건 평범한 이들도 체감할 수 있는 내용이다. 그래서 피보험자 숫자 증가율은 매우 큰 폭인데 반해, 취업자 수는 제조업처럼 증가와 감소를 오락가락한다. 점점 이상해지는데? 
 
출판·영상·통신과 전문과학기술 분야 역시 2개의 통계자료가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피보험자 수는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반면 취업자 수는 -5%에서 8%까지 정말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널뛰기를 한다. 사업서비스와 개인서비스 등 일자리 성장을 가져온다고 알려져 있는 서비스업의 경우에도 2개의 통계자료는 아무런 상관관계를 보여주지 않는다.
 
보건복지 분야, 이것 하나만큼은 2개의 자료가 일치된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일자리가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사회복지 수요가 점점 증가함에 따라 보육시설, 복지관, 상담소 등이 포함되어 있는 비거주 복지시설이 꾸준히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고용 쇼크' 논쟁에 뛰어들며 
 
고용보험 자료만 봐서는 아무리 우울하게 해석해도 '고용 쇼크'라는 말을 하기가 어렵다. 게다가 피보험자 규모 역시 매년 30만 명씩이나 증가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고용 쇼크’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원인을 찾는 게 아니다. 도대체 왜 2개의 통계가 서로 다른 얘기를 하고 있는지부터 따져봐야 한다.
 
고용보험 행정통계만을 본다면 통계청 자료와는 정반대의 얘기도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작년까지는 두 자료 모두 매년 30만 개의 취업자 내지 피보험자가 늘어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일자리 성장을 선도하는 것은 고용보험 피보험자라고 단정지을 수 있다. 즉, 고용보험 가입조차 할 수 없는 영세한 일자리가 아니라 보험에 가입하는 상용직 일자리가 늘고 있다는 것이다. 
 
올해의 경우 전체 일자리의 ‘양’은 늘어나진 않았지만, 고용보험에 가입하는 괜찮은 일자리는 꾸준히 상승하고 있어서 일자리의 ‘질’은 좋아지고 있다는 분석도 가능하다. 실제로 2015년에 최저임금 제도를 다시 도입한 독일의 경우, 고용보험에 가입하는 괜찮은 일자리 71만3000개가 늘어난 반면, 고용보험 가입조차 안되는 ‘미니잡(Mini Job)’ 등 안 좋은 일자리 14만 개가 사라졌다는 통계도 나오지 않았던가! (☞ 관련 기사 : “독일서 최저임금 올렸더니, 깜짝 놀랄 변화가 일어났다”) 
 
<인사이드 경제>는 저런 자료들을 들먹이며 "한국의 고용 문제 전혀 없다"는 주장을 벌일 생각이 전혀 없다. 이미 평범한 이들도 체감하고 있듯이, 한국의 고용과 일자리 문제는 좋은 상태가 아니다. 하지만 도대체 그 문제가 어떻게 드러나고 있으며, 그 원인은 무엇이고 해법은 무엇인지 정확히 따져봐야 하지 않겠는가. 
 
아울러 <인사이드 경제>는 문재인 정권의 정책을 방어하거나 비호해줄 생각도 전혀 없다. 문재인의 ‘노동 존중’은 허상이거나 사기에 불과하며, 문재인의 경제정책은 박근혜 적폐정권의 것과 거의 완전히 일치한다. 한국의 고용과 일자리에 문제가 있다면 그건 이전 정권 탓이 아니라 이전 정권과 똑같은 길을 걸으며 똑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는 문재인 정권의 책임이다. 
 
아는 분은 알겠지만 <인사이드 경제>는 경제는 물론이고 어떤 학문이건 석·박사 학위 한 장 갖고 있지 않다. 무식하니까 용감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학위 하나 갖지 않은 필자의 눈에도 전문가들의 헛소리들이 보이니, 보이는 만큼 떠들어 보겠다는 것이다. 앞으로 평범한 시민들이 던지는 아래와 같은 질문으로부터 시작해 '고용 쇼크' 논쟁에 뛰어들고자 한다. 독자 여러분도 함께 해주시길 부탁드린다. 
 
▴ '소득 주도 성장'은 일자리 정책인가? 
▴ 정말 최저임금 상승 때문에 일자리와 고용에 문제가 생긴 걸까?
▴ 최저임금 말고 일자리와 고용, 소득에 영향을 미친 것은 무엇일까?
▴ 그렇다면 지금 일자리·고용 문제의 핵심 원인은 무엇이고 해법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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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양 면장댁 셋째’ 이해찬 다잡은 딱 세줄 아버지 엽서

‘청양 면장댁 셋째’ 이해찬 다잡은 딱 세줄 아버지 엽서

등록 :2018-08-25 19:44수정 :2018-08-25 21:35

 

 

성한용의 정치 막전막후 225
민주당 새 선장 이해찬 대표 들여다보기

“담백하고 가식 없는 삶” 아버지 큰 영향
민청학련·김대중내란음모 사건으로 옥고
6월항쟁 뒤 평민당 입당 13대 국회 출마

“성실하고 철저한 개량주의자가 진보에 기여”
“리더는 잘 맞지 않아···리더 도와주는 장기”

2010년 “2012년 정권교체는 어렵다” 예측
재단법인 광장 이사장 지내며 재집권 준비

“민주개혁진영 정체성·가치·비전 명확해야”
늦게 출마했어도 역량·경험은 ‘준비된 대표’
“한 표 줍쇼!”

 

“한 표 주소!”

 

“한 표 줘유!”

 

25일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가 열린 서울 올림픽체조경기장에 폭소와 박수가 터졌습니다. 기호 3번 이해찬 후보가 연설 말미에 예능 프로그램 <한끼줍쇼> 얘기를 하며 대의원들에게 표를 구걸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자존심 강한 저 사람이 표 구걸을 다 하네”라고 촌평했습니다.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에서 7선의 전직 국무총리 이해찬 의원(66)이 새 대표에 당선됐습니다. 어떤 정치인을 알고 싶을 때 그가 과거에 썼던 글과, 했던 말을 찾아보는 방법이 있습니다. 역사의 고비에서 시대 상황을 어떻게 인식했고 어떻게 대처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자서전이 있었습니다. <청양 이 면장댁 셋째 아들 이해찬>(2007, 푸른나무)입니다. 2007년 대통합민주신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섰을 때 쓴 책입니다. 책 표지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다는 발표를 한 뒤 나는 아버님 산소를 찾았다. 사람들 눈에는 으레 하는 ‘의식’이나 ‘절차’로 비쳤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진심으로 ‘청양 이 면장’께 고하고 싶었다. 당신의 짧지만 한없이 무거운 당부를 잊지 않겠다고. 정치는 그때나 지금이나 번잡스러울 수밖에 없지만 ‘이 면장 댁 셋째 아들’로서 그 속에서도 담백하고 가식 없이 살아보겠노라고.”

 

 

이해찬 대표는 1952년 7월 10일 충남 청양에서 출생했습니다. 청양초등학교, 덕수중학교, 용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1년 서울대 섬유공학과에 입학했다가 다음 해 사회학과에 다시 입학했습니다.

 

1974년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과 1980년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으로 두 차례 옥고를 치렀습니다. 그 뒤 민청련과 민통련(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에서 활동하던 재야인사였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자서전도 아버지 얘기로 시작합니다.

 

 

 

나는 서울대 사회학과에 재학 중이던 1974년 4월 이른바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 재판이 끝나고 대전교도소에서 징역을 살고 있던 한겨울의 어느 날 , 엽서를 한장 받았다 . 아버님이 보낸 엽서였다 . 아버님은 서대문구치소에 있을 때 한 번 면회를 오셨고 , 그 뒤 재판정에도 한 번 오셨지만, 교도소로는 한 번도 면회를 오지 않으셨다 . 엽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

 

 

추운 겨울에 동상 걸리지 않도록 해라 .

 

윗사람을 공경하고 아랫사람들에게 잘해라 .

 

애비 씀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딱 세 줄이었다. 나는 그 엽서를 보고 혼자 가만히 웃었다. 담백하고 가식 없는 삶···. 그 엽서는 아버님이 살아오신 모습 그대로였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살고 싶은 삶이기도 했다.

 

 

자서전에는 1987년 6월항쟁 이후 진로에 대한 고민도 담겨 있습니다.

 

 

 

나는 처음에는 <한겨레신문 >에 갈 생각을 했다 . 재야운동을 할 때 늘 정책이나 기획 분야를 맡아 정세 분석이나 글 쓰는 일에 익숙했고 , 예전부터 책이나 잡지 ·출판에 관심이 많아서 나한테 잘 맞을 것 같았다 . 그런데 평민당(평화민주당)이 재야인사들한테 영입을 제의해 왔다 .

 

 

 

이 대목을 읽으며 만약 이해찬 대표가 정치를 하지 않고 <한겨레신문>에 왔다면 뛰어난 논설위원이 됐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해찬 대표는 김대중 총재의 평민당에 입당했고 1988년 총선이 소선거구제로 바뀌면서 서울 관악을 지역구에 평민당 후보로 출마했습니다. 민정당의 김종인 후보, 통일민주당의 김수한 후보 등 거물들을 꺾고 당선됐습니다. 재야인사에서 정치인으로 신분이 바뀐 것입니다.

 

자서전에는 이해찬 대표 자신의 정체성이나 정치적 스타일에 대한 얘기가 많이 나옵니다. ‘정치인 이해찬’의 본질을 잘 묘사한 대목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개량주의자라고 설명했습니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근본주의적이거나 극단적인 주장에는 잘 끌리지 않는 개량주의자이다 . 사회학을 공부하면서 내가 가장 공감했던 말은 “가치는 역사에서 배우고 방법은 현실에서 배우라 ”는 말이었다 .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오가는 불성실하고 불철저한 근본주의자보다는 성실하고 철저한 개량주의자가 사회의 진보에 훨씬 더 기여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

 

 

 

김대중 전 대통령이 즐겨 쓰던 말 중에 “서생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 감각”이 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이해찬 대표를 좋아했던 이유가 바로 이해찬 대표의 이러한 가치관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재야 출신인 이해찬 대표가 처음부터 균형 감각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1989년 출판한 <이해찬 평론집 : 민주와 통일의 길목에서>라는 책에서 평민당 초선 국회의원이었던 이해찬 대표는 자신의 생각이 변화하는 과정을 꽤 진솔하게 써 놓았습니다. 통일민주당의 노무현 강신옥 의원, 평화민주당의 이해찬 양성우 의원이 ‘우리에게 정치는 무엇인가’를 주제로 좌담을 했습니다. 사회를 본 이해찬 의원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노 의원께서 말씀한 것처럼 정치에는 여러 가지 이해관계 집단들이 여러 가지 로비와 여론의 형태로 압력을 가해오기 때문에 단순히 이념만을 가지고 정치가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이념 이외에 이해를 대변하고 조정하는 문제가 우선 재야에서 하던 일과는 엄청나게 다릅니다. 재야에서는 어떤 이념이다 통일문제다 노동자들의 권익 문제다 하면 그 문제를 가지고 주저 없이 밀고 나가면 됩니다. 일이 해결되든 안 되든 하다 보면 일정한 성과가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는데 적어도 자기 운동으로서의 자기실현은 해 나가는 것이지요. 그리고 재야운동권에 대해서는 국민들이 많은 요구를 하지 않아요. 적어도 직접 일상적인 자기 문제를 호소하는 일이 흔한 게 아닙니다. 그런데 정당에는 엄청나게 많은 이해가 다 쏟아져 들어오는 곳이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그것을 선별하고 중점을 두고 하는 일이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고 중요한 문제가 있어도 그 문제만 열심히 추구하기 어려운 그런 구조상의 문제들에서 재야와의 차이를 느낍니다.(중략)

 

이렇듯 각 부문에서의 운동성과 정당의 노력이 불가분의 연관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한 것이 국민적 차원에서 자발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가능한 한 그러한 운동과 정당 간에 괴리를 줄이도록 하는 작업이 앞으로 계속되어야만 문제가 해결된다고 보고, 그동안에 국회가 여러 가지 부정적인 이미지를 빨리 극복하려면 이번 국회에서처럼 약간의 성과라도 국민들에게 바로바로 알려지고 그 반응이 돌아오고 하면 정당이나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성이 높아지리라 봅니다. 그리고 당내에서부터 그리고 국회 내에 새로운 정치문화를 형성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있어야 하고 재야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문제 해결에 앞장서야 되는 게 아닌가 합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
어떻습니까? 이해찬 대표는 다른 자리에서도 여러 차례 자신이 현실 정치를 하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제성장에 대한 생각을 바꾸었으며, 재야에서 받아들였던 민족경제론이 현실과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고백했습니다.

 

다시 2007년 시점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이해찬 대표는 처음으로 자서전까지 써가며 2007년 대선후보 경선에 출마했지만 패배했습니다. 정동영-손학규-이해찬 후보가 겨룬 경선의 승리자는 이해찬 대표의 친구였던 정동영 후보였습니다. 정동영 후보는 2007년 대선에서 참패했습니다. 이해찬 대표는 2008년 총선에 출마하지 않았습니다. 2008년 5월 “고맙습니다”라는 제목의 의정보고서를 냈습니다. 의정보고서에는 이런 글이 있습니다.

 

 

 

저는 올해 20년간의 관악구 국회의원 생활을 마감하고 총선에 출마하지 않았습니다 . 관악주민 여러분의 과분한 사랑에 대한 보은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마는 관악이 길러낸 정치인 이해찬으로서 좀 더 큰 시야에서 나라를 위한 일을 하는 것이 여러분께 보답하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 그래서 민족사의 정기를 되살리기 위해서 독립투사 운암 김성숙 선생님의 기념사업회 일을 맡았습니다 . 아울러 한국 개혁진영의 정체성과 노선을 복원하고 서민을 위한 정책을 개발하는 재단법인 광장을 설립하고 운영하는 일에 힘을 쏟기로 하였습니다 . 관악의 명예에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일할 것을 관악주민 여러분께 약속드립니다 .

 

 

 

2010년 1월 이해찬 대표는 재단법인 광장 이사장이었습니다. 이때 출판된 <문제는 리더다>(2010, 메디치)라는 책이 있습니다. 방송인 정관용씨가 남재희, 김종인, 윤여준, 이해찬 네 사람과 나눈 대담을 묶은 것입니다. 이 시기 이해찬 대표의 생각을 엿볼 수 있어서 흥미롭습니다. 우선 자신의 정치적 자질에 대한 냉정한 평가가 나옵니다.

 

 

 

나는 리더가 잘 맞지 않아요 . 리더를 도와주는 데는 대단한 장기 ( 長技 )가 있어요 . 김 대통령도 그렇고 노 대통령도 그렇고 , 내가 두 번 선거에서 모두 기획본부장을 했는데 , 두 번 다 쉬운 전술이 아니었어요 . 그리고 굉장히 용의주도하게 해야지 허술하게 해서 되는 게 아니었어요 .

 

 

 

흥미로운 대목은 2010년 시점에서 내다본 정치 전망입니다. 이해찬 대표는 2012년 정권교체 가능성을 매우 낮게 봤습니다. 2017년에나 반전이 올 수 있다고 전망했습니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2012년 대선에서 야당이나 진보진영의 집권은 생각보다 쉽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 혹 2017년에는 가능할지 모르죠 . 민심의 역사적 반전 ( 反轉 )이 오는 시점이 있는데 , 그냥 오진 않아요 . 현재 이쪽 진영의 인물이나 역량으로 보면 2012년에 반전을 기대하긴 어려워요 . 그런데 한 십 년 하고 나면 국민들의 정서나 마음이 달라질 수 있으니까 , 2017년에 가서는 도저히 이대로는 안 되겠구나 하는 반전이 올 가능성이 있어요 .(중략 )

 

우리에게도 그런 식의 정권교체 내지 새로운 역할이 요구될 때가 올 텐데 그것에 맞춰서 2017년 후보는 키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 거기에 누가 가장 적합할 건가를 생각하지요 . 7년 후면 우리 사회가 많이 변할 텐데 , 그 시대와 국민들의 요구를 생각해보면 , 지금 40대 초중반에서 50대 중반 정도의 나이에 , 앞으로 십 년을 앞두고 자기 관리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하는데 ···. 유시민 전 장관과 박원순 씨가 가시적인 후보고 , 2022년쯤이면 민노당의 이정희 의원도 가능하다고 봐요 . 상당히 야무지고 열정도 많고 , 2022년이면 나이가 50대니까 , 지금 페이스로 십 년만 열심히 하면 제 2의 노무현이 나올 수도 있어요 . 노 대통령이 초선을 40대 초반에 해서 13년 만에 대통령이 된 거거든요 . 이정희 의원은 능력도 있고 , 품성도 훌륭하고 , 제가 보기에는 유시민 , 박원순 , 이정희 정도가 2017년 , 2022년 후보로서 가능성이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

 

 

 

어떻습니까? 2010년 시점에서 이해찬 대표는 유시민, 박원순, 이정희 세 사람을 장래의 대통령감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유시민, 이정희 두 사람은 정치를 아예 그만뒀으니, 이제 박원순 서울시장 한 사람만 남았네요.

 

이해찬 대표는 공직에서 물러나 있는 기간에도 쉬지 않았습니다. 재단법인 광장 이사장으로 수많은 좌담, 토론, 출판을 기획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이런 활동이 모두 민주·개혁 세력의 재집권 준비였던 것 같습니다.

 

 

“나쁜 정치를 바로 잡고 나라를 바르게 이끌기 위해서는 몇 가지 지켜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선 국민이 선택할 수 있는 좋은 대안을 만들어야 합니다. 아무리 현 집권당이 무능하고 사심이 가득하며, 오만하다 할지라도 대안이 되어야 할 비판 진영이 지리멸렬하다면 국민은 좌절하고 무관심하게 됩니다.

 

대안을 만들기 위해 첫 번째로 할 일은 민주개혁 진영의 정체성과 가치, 그리고 비전을 명확하게 하는 일입니다. 자신들이 어떤 사람들이며 어떤 가치를 실현하려 하고 내가 실현할 가치가 어떤 미래를 만들 수 있는지를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국민이 선택할 근거가 마련됩니다.“(2011, 광장에서 길을 묻다 : 이해찬과 진보 지성 23인의 대화)

 

 

“저는 주로 정책을 다룬 사람인데, 그러다 보면 사회가 굉장히 복잡하게 얽혀 있음을 자주 느낍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의 구조적 특성을 분명히 인식하지 않으면 자꾸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그 특성 가운데 핵심은 분단입니다. 분단된 나라는 지금 우리나라밖에 없죠. 분단 때문에 전쟁도 터지고, 각종 음해도 일어나고, 국방비도 많이 써야 하는 등 별일이 다 생기는 겁니다. 분단이 우리 사회의 가장 큰 구조적 제약입니다.

 

두 번째는 지역주의입니다. 지역주의 때문에 정상적인 정치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세 번째가 개방형 통상국가입니다. 우리는 수출 위주로 경제성장을 추진하다 보니 구조적으로 개방형 통상국가가 돼버렸어요. 이 구조를 조금 벗어나기 시작하면 경기가 불황으로 빠져버립니다. 네 번째는 사회의 양극화입니다.(중략)

 

이 구조 때문에 사회의 안정을 이룰 수가 없는 겁니다. 남북분단, 지역주의, 개방형 통상국가, 사회적 양극화, 이 네 가지는 쉽게 고칠 수 없습니다. 제도 몇 가지를 고친다고 해서 금방 바뀌지 않거든요.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민생경제를 안정시키고 한반도의 평화를 정착시켜야 합니다. 굉장히 어려운 과제죠. 김대중 대통령은 5년 동안 왜 못했는가, 노무현 대통령은 5년 동안 왜 못했는가,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주장했잖아요. 5년, 10년 안에 고칠 수 있는 것이었으면 벌써 고쳤죠.”(2011, 10명의 사람이 노무현을 말하다)

 

 

이해찬 대표는 2012년 19대 총선에서 지역구를 세종시로 옮겨 다시 국회의원이 됐습니다. 그리고 민주통합당 6·9 전당대회에 박지원 원내대표와 이른바 ‘이-박 연대’로 출마해 대표에 당선됐습니다. 하지만 12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당내에서 퇴진론이 터져 나와 대표직에서 물러났습니다.

 

이해찬 대표는 2016년 20대 총선에서는 더불어민주당 공천을 받지 못했습니다.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됐고 복당했습니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대표직에서 물러난 뒤 그는 세종시 국회의원 이외에는 특별한 활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2018년 발간된 ‘국회의원 이해찬 의정보고서 제 6호’는 세종시 관련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동안 국회 상임위원회에서도 전직 국무총리로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세종시 관련 정책 질의에 치중했다는 것이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의 전언입니다. 이번 전당대회 대표 출마 결정이 갑작스럽게 이뤄졌다는 정황 증거들입니다.

 

 

아무튼 이해찬 대표가 이제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됐습니다. 출마는 갑작스럽게 이뤄졌지만 그의 인생과 가치관, 정치적 역량과 국정 경험 등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준비된 집권여당 대표’라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문재인 정부의 한 축을 담당하는 더불어민주당 대표로서 국정과 정치를 잘 이끌어주기를 기원합니다.

 

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

 

2007년 자서전 표지
2007년 자서전 표지
이해찬 대표의 가족
이해찬 대표의 가족

 

이해찬 대표의 어릴 때 모습
이해찬 대표의 어릴 때 모습

 

13대 총선 평민당 후보 벽보
13대 총선 평민당 후보 벽보

 

 

 

1989년 이해찬 평론집
1989년 이해찬 평론집

 

1989년 이해찬 평론집
1989년 이해찬 평론집

 

2008년 의정보고서
2008년 의정보고서

 

2010년 <문제는 리더다> 책 표지
2010년 <문제는 리더다> 책 표지

 

2018년 의정보고서
2018년 의정보고서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bar/859206.html?_fr=mt1#csidxd3eb83cf8972d61966be37f4032c92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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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또 만날까'…이산가족 오늘 눈물의 이별

南가족, 작별상봉으로 마지막 인사한 뒤 버스로 귀환 예정

 

이 눈물로 그리움이 잊혀질까
이 눈물로 그리움이 잊혀질까(금강산=연합뉴스) 이지은 기자 = 제21차 이산가족 상봉행사 2회차 둘째날인 25일 오후 금강산 이산가족면회소에서 열린 단체상봉에서 남측의 박춘자(77)씨가 북측의 언니 박봉렬(85) 할머니의 눈물을 닦아주고 있다. 2018.8.25 jieunlee@yna.co.kr

 

(금강산·서울=연합뉴스) 공동취재단 백나리 기자 = 이산가족 2차 상봉 행사 마지막 날인 26일 남북의 가족은 작별 상봉을 마지막으로 다시 긴 이별에 들어간다.

이들은 이날 오전 단체로 작별 상봉을 하고 함께 점심을 먹는다.

재회의 기약이 없는 작별이라 1차 상봉단의 작별 상봉 때처럼 곳곳에서 눈물을 쏟으며 헤어짐을 아쉬워할 것으로 보인다.

작별 상봉이 끝나면 남측 가족들은 오후 1시 30분께 버스를 타고 금강산을 떠나 남측으로 귀환할 계획이다.

이로써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4·27 정상회담에서 합의했던 8·15 계기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마무리된다. 앞서 1차 상봉단이 20∼22일 금강산에 가 북측 가족을 만났고 이어 24∼26일 2차 상봉이 이어졌다.

이번 상봉행사에서는 65년 넘게 헤어졌던 남북 가족이 호텔 객실에서 가족만의 식사를 했다. 개별상봉은 상봉행사마다 있었지만, 개별식사를 한 것은 처음이다.

'눈물 흘리는 남매'
'눈물 흘리는 남매'(금강산=연합뉴스) 제21차 이산가족 상봉행사 2회차 둘째 날인 25일 오후 북한 금강산이산가족면회소에서 열린 단체상봉에서 북측 안길자(최성순에서 개명, 85) 할머니가 남측 동생 최성택(82) 할아버지 등 가족들과 눈물을 흘리고 있다. 2018.8.25 [뉴스통신취재단]
photo@yna.co.kr

 

nari@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18/08/26 06:00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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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대한민국 리콜 시스템을 망가뜨렸나

누가 대한민국 리콜 시스템을 망가뜨렸나

반기웅 기자 ban@kyunghyang.com

입력 : 2018.08.25 14:48:01

2013년 6월 26일 교통안전공단 자동차안전연구원에서 연구원들과 관계자들이 급발진 공개 재현실험을 하고 있다. / 서성일 기자

2013년 6월 26일 교통안전공단 자동차안전연구원에서 연구원들과 관계자들이 급발진 공개 재현실험을 하고 있다. / 서성일 기자

 

자동차 결함 조사에 제작사들 비협조… 심평위 위원은 자동차 회사와 ‘긴밀한 관계’
 

“(자동차) 제작 결함을 연구하는 연구원은 13명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가 후진적이고 많이 모자란다.” 

8월 21일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이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업무보고에서 한 말이다. BMW 화재로 국내 자동차 안전관리체계를 들여다본 김 장관은 ‘시스템이 없다’고 토로했다. 이제 막 취임 1년이 지난 장관도 한눈에 파악한 시스템의 문제점을 여태껏 아무도 몰랐을까. 아니면 문제를 알고도 그동안 방치하거나 감춰온 것일까. 

대한민국은 2017년 기준 연간 411만대를 생산하는 세계 6위의 자동차 생산국이자 세계적인 고급차 시장이다. 국내 자동차 등록대수는 올해 2300만대를 넘어설 전망이다. 외형은 자동차 대국으로 성장했지만 국민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국가의 안전관리체계는 후진국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게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그리고 이 후진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안전관리체계의 이면에는 로비와 회유로 잘못을 입막음하려는 기업과 이에 호응해온 소수의 전문가집단이 자리잡고 있다.
 

연구원 13명이, 하루 20~30건 처리 

문제를 살펴보려면 국내 자동차 결함 신고 과정부터 차근차근 따져봐야 한다. 자동차 결함이 발생하면 국토부 산하 자동차리콜센터에 신고하게끔 돼 있다. 지난해에만 5400건이 넘는 차량 결함 신고가 자동차리콜센터에 들어왔다. 대부분 차량 이상 증상으로 사고가 나거나 사고위험을 느낀 운전자들이 넣은 신고다. 

접수된 신고는 한국교통안전공단 자동차안전연구원으로 전달된다. 자동차안전연구원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공인된 결함조사기관이다. 한국소비자원에서도 결함 신고를 받아 조사할 권한이 있기는 하지만 안전운행과 관련된 사안은 자동차안전연구원 결함조사실 결함조사처에서 전담한다. 김 장관이 언급한 ‘연구원 13명’이 이곳 소속이다. 

원칙대로라면 연구원은 신고내용을 토대로 결함조사를 진행해야 한다. 자동차 결함 문제에 있어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작업이다. 하지만 연구원들은 결함조사에 착수하기 전부터 온갖 난관에 부딪힌다. 13명의 연구원이 하루 20~30건이 넘게 접수되는 결함 신고를 받아 현장조사에 나서는 것 자체가 일단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연구원에서 조사에 착수할지 여부를 정할 권한도 없다. 어떤 상황에서 조사에 나서야 하는지의 기준도 없다. 조사를 하려면 일단 국토부로부터 결함조사에 착수하라는 지시부터 받아야 한다. 문제는 국토부 지시를 받고 나가보면 너무 늦은 터라 제대로 조사를 못한다는 것이다. 조사가 지연된 사이 자동차업체들이 결함에 대해 미리 손을 써두기 때문이다. 말끔히 고친 차를 갖고 결함조사를 해봐야 나오는 게 있을 리 없다. 익명을 요구한 연구원 관계자는 “문제가 발생했을 때 바로 가야 결함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며 “며칠 지나서 가면 제작사가 고장코드를 삭제하고 블랙박스까지 지우기 때문에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조사에 착수해도 제대로 된 조사는 잘 이뤄지지 않는다. 결함을 조사하려면 자동차업체의 협조가 필수지만 업체들이 조사를 돕지 않는 탓이다. 연구원에서 자료를 요청해도 주지 않거나 필요한 내용을 다 뺀 ‘껍데기’ 자료만 제출한다. 자동차관리법을 보면 업체들은 조사기관에서 요청받은 자료를 15일 이내에 제출하도록 돼 있다. 하지만 이를 어겨도 과태료는 한 회차당 고작 100만원에 불과하다. 그나마 최근 10년간 국토부가 수입·국내 완성차 업체에게 자료 미제출 및 지연, 조사 방해 등의 이유로 과태료 처분이나 벌칙을 부과한 사례는 단 한 건도 없다.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이 8월 8일 한국교통안전공단 자동차안전연구원에서 BMW 차량의 결함 부품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 김기남 기자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이 8월 8일 한국교통안전공단 자동차안전연구원에서 BMW 차량의 결함 부품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 김기남 기자 

담당자 바뀌자 말 달라지는 제작사 

권병윤 한국교통안전공단 이사장이 지난 21일 “(BMW에) 수차례 기술자료를 요청했지만 BMW는 자료를 회신하지 않거나 누락한 채 제출했다”고 볼멘소리를 한 배경이다. 소비자들은 정부가 안전문제를 파악하고 이를 해결해 줄 것으로 믿고 신고를 하지만 실제 대부분의 결함 신고가 신고접수 그 자체로만 그치는 셈이다. 

연구원들이 조사에 착수해 증거와 소신을 가지고 결론을 내도 ‘윗선’에서 무마되는 경우도 있다. 자동차안전연구원 스스로 자동차업체들의 눈치를 보는 탓이다. 2015년까지 연구원 제작결함조사실에 재직했던 박진혁 서정대 자동차과 교수는 2013년에 벌어진 현대차의 ‘제네시스’ 리콜사건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지적한다. 

박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2013년 1월 자동차리콜센터로 한 건의 결함 신고가 접수된다. 제네시스의 ABS 제동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연구원에서 제작결함 조사업무를 담당했던 박 교수는 현대차 전주서비스센터에 내려가 결함 조사를 벌였다. 제동페달에서 이른바 ‘스펀지 현상’과 제동시 차량쏠림 현상이 확인됐다. 운전자의 주장대로 ABS 제어장치에서 결함이 발생했다는 증거였다. 이를 방치할 경우 브레이크 오일이 부식을 일으켜 브레이크 성능이 떨어지고 결국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박 교수는 리콜을 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리콜을 할 경우 2009년 12월부터 2012년 3월까지 제작된 10만3214대의 제네시스가 리콜 대상이었다.

현대차는 이미 결함 내용을 인지하고 있었다. 2012년 1월부터 해당 차량을 대상으로 비공개 무상수리를 진행해오고 있었다. 무상수리는 불만을 제기한 차주에 한해서 이뤄지는 조치로, 제조사는 결함과 관련해 차주에게 알릴 필요가 없는 조치다. 현대차는 이를 들어 “일단 무상수리를 진행하고 이후 차량에서 문제가 발생되면 공식적인 리콜 절차를 밟겠다”고 연구원에 알려왔다.

연구원과 현대차 간 한창 리콜 얘기가 오가던 시기에 연구원에 대규모 인사가 났다. 제네시스를 조사했던 담당 실장과 팀장이 바뀌었고, 조사인력도 교체됐다. 박 교수는 계속 결함조사실에 남아있었지만 인사가 난 뒤 갑자기 현대차는 말을 바꿨고 리콜도 진행하지 않았다. 박 교수는 “현대자동차 이모 이사와 정모 부장이 문제 부품을 교체하겠다고 해서 리콜을 합의한 상태였다”며 “하지만 연구원 인사이동으로 조사 책임자가 바뀐 뒤에 갑자기 입장을 바꿨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현장조사 결과를 근거로 재차 현대차에 리콜할 것을 권고했다. 하지만 현대차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연구원과 국토부에서도 제네시스 리콜 시행 관련 지침은 내려오지 않았다. 결국 박 교수는 2013년 2월 미국 고속도로교통안전국(NHTSA)에 제네시스의 문제점을 제보했다. 정부 산하 소속 연구원이 미국 정부에 손을 내밀어 문제 해결에 나선 것이다.

미 교통안전국은 박 전 연구원의 신고를 받기 전부터 23건의 미국 소비자 신고를 근거로 내부 조사를 벌이고 있었다. 2013년 10월이 되자 미 교통안전국이 “공식적으로 제네시스 결함에 대해 조사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그러자 현대차는 즉각 2009년부터 2012년 생산해 미국에 판매한 제네시스 4만3500대와 한국에 판매한 10만3214대에 대해 ‘자발적 리콜’을 실시했다.

현대차의 리콜 조치에도 미국 정부는 현대차에 1735만 달러(약 179억원)의 벌금을 부과했다. 현대차가 제네시스 제동장치 이상 사실을 2012년에 발견하고도 미국 정부 조사가 들어가고 난 뒤에야 리콜을 했다는 이유에서다. 미국 연방법에는 제작자들이 안전 관련 결함을 5일 이내에 정부에 보고하도록 돼 있다. 

미국과 달리 당시 박근혜 정부는 늑장 리콜과 관련해 아무런 제재나 처벌을 하지 않았다. 자동차안전연구원이 정부에 제출한 ‘제네시스 제동장치 작동불량현상 조사결과 보고서’를 통해 “현대차의 시정방법이 적정했다”고 밝힌 덕분이었다. 국토부는 이를 근거로 현대차가 늑장 리콜을 하지 않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지난 9일 BMW피해자모임 대표자들이 서울 남대문경찰서에서 김효준 BMW그룹 코리아 회장을 자동차관리법위반 혐의로 고소하고 있다. / 김창길 기자

지난 9일 BMW피해자모임 대표자들이 서울 남대문경찰서에서 김효준 BMW그룹 코리아 회장을 자동차관리법위반 혐의로 고소하고 있다. / 김창길 기자

심평위 관계자 자녀 수입차 업체 재직 

제네시스 리콜 사태로 자동차안전연구원은 발칵 뒤집혔다. 연구원에서는 누가 미 교통국에 제보를 했는지를 놓고 색출작업이 시작됐다. 연구원에는 현대차에서 제보자가 누군지 궁금해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압박이 심해지자 박 교수는 결국 자신이 신고한 사실을 시인했다. 당시 연구원 제작결함실 책임자는 박 교수에게 “이 사안이 얼마나 큰일인 줄 아느냐”며 “현대차가 널 고소하면 파면될 뿐 아니라 우리 연구원이 없어질 수 있다”고 질책했다. 

박 교수는 “결함을 조사하는 자동차안전연구원이 자동차업체 손 안에 있는 셈”이라며 “심지어 결함 조사결과가 담긴 보고서를 미리 업체에 보내주라는 지시를 받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 사건을 시작으로 연구원 측과 갈등을 빚던 박 교수는 결국 연구원을 떠나야 했다. 최영석 선문대 스마트자동차학부 교수는 “실무를 담당하는 연구원이 문제를 지적해도 위에서 압력을 가한다는 사실은 업계에서 공공연히 알고 있는 사실”이라며 “아예 결함 조사를 하지 말라고는 못하지만 우회적으로 결함 조사를 제대로 하기 어렵게 한다”고 말했다. 

자동차 리콜 여부를 심사하는 제작결함심사평가위원회(이하 심평위)의 경우 연루 차원을 넘어 자동차업체들과의 유착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심평위는 25명으로 구성된 국토부 자문기구다. 당초 국토부 자동차정책과장과 자동차운영보험과장, 첨단자동차기술과장과 한국소비자원 위해정보국장 등 당연직 4명과 전문가 16명을 더해 모두 20명이 심평위원직을 맡았는데, 올해 4월 규정이 바뀌면서 25명으로 늘어났다. 

‘자문’을 하는 집단이지만 실제 리콜 여부는 이들의 심사에 따라 결정된다. 자동차안전연구원에서 아무리 리콜 결정을 내려도 심평위에서 거부하면 리콜은 무산된다. 국토부 역시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심평위의 결정을 수용한다. 국토부 관계자는 “심평위의 결정을 정부가 뒤집은 사례는 아직까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실제로도 심평위 결정을 거스르기 힘든 구조”라고 밝혔다. 심평위가 리콜 결정을 내릴 경우 자동차업체들은 막대한 리콜 비용을 지출해야 한다. 이 때문에 자동차업체들 입장에서 심평위는 ‘절대갑’이자 특별관리 대상이다. 

심평위의 전문가 16명 대부분은 자동차 관련학과의 교수들이다. 심평위원 중 일부 교수들은 각 대학에서 산학협력단을 이끌고 있다. 교수들이 연구하거나 산학협동으로 진행하는 프로젝트들의 주제도 물론 자동차 분야다. 문제는 이런 프로젝트 진행에 필요한 비용을 정부나 기업에서 따와야 하는데 교수들에게 지원을 해주는 기업들이 현대차와 한국GM, 쌍용자동차 등 자동차업체들이라는 점이다. 

자동차업체들은 이들 교수와 아예 업무협약(MOU)을 맺고 정기 지원을 하거나 연구에 필요한 비싼 장비를 기증하기도 한다. 익명을 요구한 자동차회사 내부 관계자는 “회사에서 심평위 소속 교수들에게 산학협동 과제를 빌미로 재정지원과 졸업생 취업을 시켜주면서 관리를 한다”며 “당연히 리콜 여부를 심사할 때 제작사 입장을 봐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재정지원뿐 아니다. 업계에서는 업체들이 심평위원들을 대상으로 해외연수를 보내거나 골프 모임을 갖는 등 각종 편의를 제공하며 관계를 이어간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나돈다. ‘김장철이 되면 각 회사 담당자들이 심평위원들 집에 김장을 해다가 바친다’는 소문도 돈다. 심평위원 자녀들을 자신들의 회사에 특채로 ‘모셔’오기도 한다. 심평위 한 관계자의 자녀도 모 수입차업체에 다니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심평위 관계자는 “국내 자동차산업 생태계 구조상 학계와 기업, 정부가 연결될 수밖에 없다”며 “자동차업체의 지원을 받았다고 해서 심평위에서 교수들을 제외시키면 심평위의 전문성이 떨어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또 “기업의 연구용역을 수행하고 있는 교수들은 사안에 따라 스스로 심평위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심평위의 해명과 달리 심평위의 심사가 공정치 못하다는 의혹은 여러 차례 제기된 바 있다. 지난해 2월 알려진 현대차 핸들 잠김 불량부품(MDPS) 리콜 축소 의혹이 대표적이다. 현대차에서 판매한 ‘아반떼’ 차종에서 이른바 ‘파워핸들’ 기능에 문제가 생긴 게 발단이었다. 파워핸들이 안 되면서 아반떼의 조타력이 무거워지는 현상이 발견됐다. 이 증상이 해당되는 차량은 아반떼와 ‘i30’ 2종, 45만8662대로 집계됐다. 

하지만 현대차는 대상 차량 중 9%에 불과한 4만705대만 자발적으로 리콜하겠다고 정부에 신고했다. 반면 미국에서 판매된 동일한 아반떼와 i30의 경우 리콜 대상을 더 넓여서 미국 정부에 신고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때문에 현대차가 국내 차량의 리콜 대상 기간을 축소해 리콜 받아야 할 차량 수를 줄였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연구원의 권고 결정 뒤집는 심평위 

이에 대한 자동차안전연구원의 판단은 어땠을까. 당초 연구원은 미국과 같은 기준을 적용해 45만8662대에 대한 리콜을 진행할 것을 국토부에 권고했다. 보고를 받은 국토부는 심평위에 안건을 올렸다. 그러자 심평위는 연구원의 권고를 뒤집고 현대차가 당초 신고한 차량 4만705대만 자발적으로 리콜하면 된다고 결정했다. 심평위는 “자동차 핸들에 대한 부품 기준을 충족해 강제리콜이 어렵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심평위의 논리대로라면 사실상 리콜할 이유가 없는 현대차가 자발적으로 ‘착한 리콜’을 한 셈이 된다. 심평위의 ‘부품 기준을 충족했기 때문에 강제리콜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도 자동차관리법에 어긋난다. 자동차관리법 제31조 1항에는 ‘안전운행에 지장을 주는 결함이 있는 경우 제작 결함을 시정(리콜)해야 하며 무상수리(사전점검)는 불가하다’고 명시돼 있다.

현대차 엔진 결함 문제를 폭로해 공익제보자로 인정받은 김광호 전 현대차 부장은 지난 6월 공익제보자 신분으로 심평위 회의에 참석한 바 있다. 김 전 부장은 “심평위가 아니라 제조사 임원회의에 들어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며 “자동차회사 입장에서 회사를 대변해주는 발언을 서로 쏟아내고 있었다”고 전반적인 회의 분위기를 전했다. 

심평위가 그간 리콜조치에 대해 소극적이었다는 사실은 수치로도 확인된다. 리콜 심사가 시작된 이래 국토부가 내린 강제리콜 명령은 지난해 현대차를 대상으로 한 5건이 전부다. 2003년부터 2016년까지 국내 평균 리콜 대상 차량은 54만5000대로, 리콜 은폐 의혹과 관련한 내부 고발이 시작된 지난 한 해의 221만대와 비교하면 4배 이상 차이가 난다. 

심평위와 자동차업체 간 유착의혹은 국회 차원에서 관심을 갖고 조사에 나설 예정이다.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박재호 의원은 “제작결함심사평가위원회가 개인의 사사로운 이해관계에 얽혀 국민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판단을 해왔는지 여부를 면밀히 살펴보고 있다”며 “심사과정의 투명성도 들여다보고 문제점이 발견되면 법에 따라 처리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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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발찌 대상자 120명 가석방, 피해자들은 두렵다"

[현장] 안희정 전 충남지사 1심 무죄 판결 규탄 집회

18.08.25 20:29l최종 업데이트 18.08.25 20:50l

 

큰사진보기 25일 시민모임 '헌법앞성평등'이 마련한 '5차 성폭력, 성차별 끝장집회'에 참석한 시민들.
▲  25일 시민모임 '헌법앞성평등'이 마련한 '5차 성폭력, 성차별 끝장집회'에 참석한 시민들.
ⓒ 조선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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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에 많은 죄수들이 가석방됐습니다. 120명의 전자발찌 대상자도 포함됐습니다. 그 피해자들은 충분히 안전할까요?"

25일 시민모임 '헌법앞성평등'이 마련한 '5차 성폭력, 성차별 끝장집회'에서 나온 말이다. 이날 서울 종로구 서울역사박물관 앞에서 열린 집회에서 마이크를 잡은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언론노조 서울경기지역출판지부 소속 탁수정씨가 발언을 이어갔다.

그는 "그들(가해자)이 감옥에 가기까지 피해자들이 했을 노력, 피해자들의 정신적 고통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탁씨는 "최소 120명의 피해자들이 광복절에 무슨 생각을 했을까"라며 "그들에게는 그날이 광복절이 아니었다"고 덧붙였다.

 

이어 그는 "모든 인간은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는 내용이 헌법에 있다"며 "국민의 절반인 줄 알았던 우리는 예외인 것 같다, 조국의 법이 상식적으로 작동하길 바란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이날 지지발언에 나선 김지예 법무법인 태율 변호사도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측근으로부터 변호를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으며 겪게 된 사연을 털어놨다. 아래는 김 변호사의 말이다.

김지예 변호사 "안희정 사건 후 손해배상 전제로 변호 맡겠다 했더니 배제돼"

"이제와 고백해보자면 저는 사실 안희정 지지자였습니다. (성폭력 피해를 호소한) 김지은씨의 미투(Me Too, 나도 고발한다)가 있고 난 뒤 (안 전 지사의) 사퇴 얘기가 나왔습니다. 그 다음날 지지자들의 모임에 있던 여러 변호사들과 대책을 논의했습니다. 그러던 중 안희정 측근이 '김지예 변호사가 변호를 맡아달라'고 제안했습니다.

저는 기꺼이 맡겠다고 했습니다. 다만 (안 전 지사가) 자백하고, 반성하고 김지은씨에게 손해배상을 하고, 합의를 시도한다는 전제 아래 변호인이 되겠다고 했습니다. 그 순간 주위에 있던 모든 다른 변호사들이 정말 무슨 미친X 보듯 (저를) 바라봤습니다. 자연스럽게 그런 논의에서 배제됐고, 이후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김 변호사는 "(선배 변호사에게) 이 사건은 유죄 결과가 나와야 한다고 설명했더니 논리적으로는 맞지만 (가해자를) 처벌할 수 없다는 대답을 들었다"고 말했다. 더불어 김 변호사는 "이번 안희정 사건의 1심 판결을 보며 여전히 법이 여성에게는 지배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고 털어놨다.

이어 그는 "법원이 법에 없어 판결을 못하겠다는 비겁한 변명을 하지 말고, 법 조항을 제대로 적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항소심에선 인정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정부, 미투 관련 신고센터 예산 줄여... 여성들 목소리 좌시해선 안될 것"
 
큰사진보기 25일 시민모임 '헌법앞성평등이 마련한 '5차 성폭력, 성차별 끝장집회'에서 사회자들이 성폭력 사건에 대한 경찰의 방조와 편파 수사에 항의하는 의미로 폴리스라인 테이프를 자르고 있다.
▲  25일 시민모임 '헌법앞성평등이 마련한 '5차 성폭력, 성차별 끝장집회'에서 사회자들이 성폭력 사건에 대한 경찰의 방조와 편파 수사에 항의하는 의미로 폴리스라인 테이프를 자르고 있다.
ⓒ 조선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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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예 녹색당 서울시당 공동운영위원장도 이날 집회에 참석해 연대발언에 나섰다. 신 위원장은 "불법 촬영물 문제는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 드러났다"며 "소수 몇 명이 촬영물을 온라인에 올리는 것이 아니라 웹하드 산업이 피해 촬영물을 기반으로 공고해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웹하드 업체가) 한 달에 9억 원을 벌고, 헤비업로더(대량으로 영상을 올리는 사람)는 한 달에 500만 원씩 벌어들이는 산업구조"라고 설명했다. 이어 신 위원장은 "정부가 대책을 낸다고 했지만 오히려 약속과 달리 미투 관련 신고센터 예산을 감축했다"고 덧붙였다.

또 신 위원장은 "사법기관과 정치권, 행정부의 권력을 갖고 있는 50~60대 기득권 남성층은 여성 문제를 해결하려는 게 아니라 여성 피해를 방임하는 데 앞장섰다"고 꼬집었다. 이어 그는 "(정부 등은) 여성들의 목소리를 결코 좌시해서는 안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안희정 판결, 불평등 길 터줘... 미투 입법 추진돼야"

이날 집회에 참석하지 못한 정치인들은 영상메시지를 통해 지지의 뜻을 전했다. 금태섭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영상에서 "그동안 가해자 시각에서 성폭력 문제가 다뤄져 왔다는 것은 비밀이 아니다"라며 "(사법부는) 피해자가 피해를 입증하도록 요구해왔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무수히 많은 누리집에 여자대학교 몰래카메라 영상이 수도 없이 올라왔을 때 과연 경찰은 무엇을 했나"라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금 의원은 "(경찰이) 신속하게 대응하고 피해자들을 보호했나, 우리가 분노하는 지점이 여기에 있다"고 덧붙였다.

이와 함께 금 의원은 "이번 (안희정) 판결로 미투 운동이 위축돼선 안 된다"며 "피해자들이 2차 피해를 받는 일은 절대 있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더불어 그는 "피해 사실을 폭로한 모든 분들과 집회에 나온 모든 분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앞으로도 함께할 것"이라고 했다.

"편파 판결 항의하는 사람들 있다 보여주고 싶어 참석"

홍미영 전 부평구청장은 "미투 운동으로 새로운 변화가 진행되는 이때 (안희정) 판결은 성폭력 불평등의 길을 터주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비판했다. 이어 그는 "우리는 아직도 동일범죄, 동일처벌을 외치고 있다"며 "잘못된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미투 관련 입법은 강력히 추진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은 최근 성폭력 사건 판결을 계기로 직접 참여하게 됐다고 밝혔다. 이아무개(30)씨는 "안희정 사건이나 최근 기사를 보면 데이트폭력 등 비슷한 사건에도 가해자가 여성이면 징역 10개월로 (처벌이) 세게 나오고, 남성이면 집행유예가 나오더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이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공유만 하다가 직접 집회에 나오게 됐다"고 덧붙였다.

유아무개(28, 여)씨도 "동일범죄, 동일처벌이라는 당연한 말이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쉽지 않다"며 "앞으로도 이런 집회에 참석해 사법부와 경찰의 편파성에 항의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이날 집회 참가자들은 "동일범죄 동일수사 그게 그리 어렵더냐", "성범죄자 무죄판결 사법부도 공범이다", "피해자를 재판 말고 가해자를 재판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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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임 여당 대표 이해찬과 다시 충돌할 조선·동아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8/08/26 07:59
  • 수정일
    2018/08/26 07:59
  • 글쓴이
    이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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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총리시절 조선·동아 겨냥 “역사에 반역” 소신… 6년전에도 “수구언론이 가장 기피하는 정치인” 자평

김도연 기자 riverskim@mediatoday.co.kr  2018년 08월 26일 일요일

지난 25일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신임 대표의 전당대회 정견발표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저 이해찬, 수구세력과 보수언론이 가장 불편해하는 사람입니다. 제가 당대표가 되면, 당이 안 보인다는 말은 사라질 것입니다. 당의 존재감이 커지고 보수의 정치공세를 단호히 막아낼 것입니다.”

자유한국당 역시 이날 이해찬 대표 당선에 “‘수구세력이 경제위기론 편다’, ‘최근 악화된 고용지표는 이명박·박근혜 정부 탓’이라고 하는 등 보수를 향한 날선 인식은 전환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 대표가 25일 당대표 수락 연설문에서 “주제와 형식에 상관없이 5당 대표 회담을 조속히 개최하면 좋겠다”며 ‘협치’를 강조했지만 과거에 비춰보면 보수언론 공세는 거셀 것으로 예상된다. 

 

▲ 25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제3차 정기전국대의원대회에서 이해찬 당대표 후보가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그는 이날 민주당 신임 당대표로 선출됐다. 사진=민중의소리
▲ 25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제3차 정기전국대의원대회에서 이해찬 당대표 후보가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그는 이날 민주당 신임 당대표로 선출됐다. 사진=민중의소리
 
‘광고시장’ 언급에 발끈 조중동

 

이 대표가 과거 보수언론과 크게 충돌했던 때는 노무현 정부 국무총리 시절이었다. 거침없는 발언은 연일 보수언론 지면에 오르내렸다.  

2004년 9월16일 당시 이해찬 총리는 대한상공회의소 주최 조찬간담회 초청강연에서 “언론들이 계속 경기 부양을 하지 않느냐고 볶아대는데 경기 부양을 시켜야 광고시장도 돌아가겠지만 우리 경제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한 뒤 “외국인 투자가 줄고 노사 분규도 심각한 것처럼 보도됐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일부 언론에서 경제 문제를 극단적으로 보도하면서 말로는 경제 활성화를 위한 것이라지만 실제로는 사실을 오도하고 심리적 위축을 가져오는 경우도 있다”고 비판했다. 언론이 경제 위기를 과도하게 부풀린다는 지적이었다.  

 

다음날 보수언론의 공세가 이어졌다. “‘언론이 경기부양 볶아대는데 그러면 광고는 돌아가겠지만…’”(동아일보), “‘언론이 경기부양 볶아대는데 그래야 광고시장 돌아가겠지’”(조선일보), “‘언론이 경기부양 볶아대는데 그래야 광고시장 돌아가겠지만…’”(중앙일보)등의 제목이 달렸다. 

이들 신문의 보도는 “‘좌파적 이념갖고 정책집행 안한다’”(국민일보), “이총리 ‘참여정부는 좌파아니다’”(서울신문) 등 정책 방향에 초점을 맞춰 보도한 타 신문과 차이를 보였다. 특히 조선일보는 ‘총리는 대통령의 악역 보조에 나섰는가’라는 제하의 사설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짝을 맞춰 국민들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말만 골라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밤의 대통령’ 시대 끝났다” 

이 대표는 조중동 가운데 특히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반감을 드러냈다. 유신 시절 기자들을 강제 해직했던 언론 탄압 역사와 관련 있다. 이 대표는 2004년 10월18일 독일 베를린에서 한국 특파원들과 가진 간담회에서 “전두환·노태우 군사정권은 용서해도 지금도 계속되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역사에 대한 반역죄는 용서 못한다”고 말해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나라를 흔들던 시대는 지나갔다. 조선과 동아가 심지어 나라 인사를 좌지우지한 일도 있으며 박정희 시대엔 안기부 정보로 특종하기도 했으나 한 번도 역사 발전에 기여한 일 없다”며 “그러나 이젠 ‘밤의 대통령’의 시대는 끝났다”고 주장했다.

조선·동아는 맹공을 가했다. 조선일보는 사설에서 “이 총리의 발언이 과연 ‘말씀’ 대접을 받는 국무총리의 발언인지 의심스럽다. 총리의 말이 아니라 노사모의 발언이라면 그런 사람들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하겠지만 말이다”라고 주장했다. 또 “이 총리의 조선·동아를 향한 적개심은 이 총리 개인만의 것이 아니라 최고 권력자를 포함한 정권 전체의 정서라는 이야기”라며 당시 열린우리당이 당론으로 확정한 언론개혁법과 이 대표 발언을 한데 묶어 비판했다.  

당시 이종원 조선일보 정치부장대우는 칼럼에 “조선·동아는 총리가 태어나기 32년 전에 창간돼 지금까지 온갖 풍상을 겪어 왔습니다. 이민족의 압제를 견디고, 우리도 잘 살아보자고, 우리도 민주주의 해보자고, 나름대로 싸워온 것이 두 신문의 역사”라며 “조선·동아도 교언영색(巧言令色)으로 세태에 영합하며 정권 입맛에 맞는 기사를 쓰는 언론이 되기를 바라십니까. 그렇게 될 수는 없습니다. 조선·동아가 무슨 힘이 있고, 까불어서가 아닙니다. 그 순간 독자들의 외면으로 두 신문의 84년 역사는 그날로 막을 내릴 것”이라고 썼다. 

 

▲ 2004년 10월21일자 조선일보 34면 조선데스크 칼럼.
▲ 2004년 10월21일자 조선일보 34면 조선데스크 칼럼.
 
동아일보도 사설에서 “‘민주화 세력’을 내세워 집권하고 ‘개혁’을 빌미로 자유민주주의를 거꾸로 돌리는 정부여당이야말로 역사에 반역하는 게 아닌가”라고 비판했다. 동아일보는 10월21일자에서 “동아일보 84년 역사에 권력자를 비롯해 그 어느 특정인에게서도 이런 폭언을 들은 적이 없다”면서 ‘공개 질의’ 형식을 빌려 이 대표 발언을 반박하고 해명을 요구했다.

 

중앙일보도 사설에서 “도대체 여권이 지향하는 사회는 어떤 것인가. 정부와 권력에 대한 비판과 견제는 없고 무조건적인 맹종만 있는 ‘동물농장’과 같은 사회를 바라는가”라며 “노동신문·민주조선·평양신문 등이 입을 모아 ‘경애하는 지도자 동지’를 찬양하는 북한의 언론체제를 닮기를 원하는가”라고 비판했다.  

이 대표는 이 같은 논란에도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2004년 10월28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이 대표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30년 전 1974년 유신 긴급 조치 때 자유 언론을 주장한 수많은 기자들을 집단 해고하고 다시 복직시키지 않았다. 이런 점을 종합적으로 볼 때 시대에 반하는 행위이자 역사의 반역”이라며 보수신문을 두고 나온 발언이 “평소의 소회”라고 강조했다.

이후에도 보수언론과 총리시절의 이 대표 사이에 갈등과 불화는 계속됐다. 이 대표는 2006년 3월 ‘3·1절 골프 파문’으로 취임 21개월 만에 국무총리에서 물러났다. 언론은 연일 ‘골프 로비’ 의혹을 제기했고 이 대표는 대국민사과 뒤 자리에서 물러났다.  

 

▲ 2012년 6월9일 오후 일산 킨텍스에서 민주통합당 임시전국대의원대회가 열린 가운데 새 당대표가 된 이해찬 대표가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사진=민중의소리
▲ 2012년 6월9일 오후 일산 킨텍스에서 민주통합당 임시전국대의원대회가 열린 가운데 새 당대표가 된 이해찬 대표가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사진=민중의소리
 
6년 전에도 “거친 발언으로 국민과 멀어져

 

향후 조선일보를 필두로 한 보수언론은 어떠할까. 이 대표가 어떤 모습을 보여주느냐에 달린 것이지만 그가 2012년 6월9일 당시 민주통합당 대표로 선출됐을 때 언론 보도로 짐작해볼 수 있다. 그때도 이 대표는 선거 공보물에 “수구언론과 새누리당이 가장 기피하는 정치인”이라는 문구로 자신을 소개했다. 당시 민주당 당대표 경선에 보수언론이 개입한다는 비판은 적지 않았다. 조선일보는 당대표 당선 이튿날 사설에 다음과 같이 썼다. 

 

“이 대표 당선 후 민주당 지지도가 올랐다는 자료는 없다. 당 밖 분위기는 그 반대라는 게 정확할 듯하다. 설사 이 대표의 그런 판단이 옳다 하더라도 이 대표의 거친 발언으로 일반 국민과 민주당의 거리는 더 멀어졌고, 어두운 대선 전망은 조금도 밝아지지 않았다. 대선 승패를 좌우할 중도층 유권자는 민주당과의 거리를 더 실감할 것이다.”(조선일보 6월11일자 사설 ‘이해찬의 민주당, 집권에서 더 멀어지나 가까워지나’)

 

문재인 정부는 야당 협조가 뒷받침된 개혁 입법 통과가 절실하다. 이해찬 신임 대표가 25일 당선 직후 “5당 대표 회담을 조속히 개최하면 좋겠다”고 말한 까닭이다. “수구세력과 보수언론이 가장 불편해하는 사람”인 그도 ‘협치’ 중요성은 인식하고 있다. 반면 이 대표를 바라보는 보수언론 시각은 좋을리 없다. 불과 2년 전 “친노좌장 이해찬 잘라낸 더민주 공천이 새누리당보다 낫다”(동아일보 2016년 3월15일자 사설)던 그들이다. 이 대표가 보수언론의 공세를 어떻게 풀어갈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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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은 박쥐 회피 위해 진화했다

조홍섭 2018. 08. 24
조회수 603 추천수 1
 
반딧불과 느린 비행으로 박쥐에게 ‘위험한 먹이’ 경고
박쥐 출현 이후 발광 진화, “박쥐가 반딧불이 발명했다”
 
ff1.jpg» 배에서 빛을 내는 북아메리카 반딧불이. 발광으로 박쥐를 회피한다는 가설이 제기됐다. 스티픈 마셜 박사 제공.
 
여름밤 하늘을 수놓는 반딧불이의 발광은 짝을 찾는 사랑의 신호이다. 그러나 애초 발광이 출현한 까닭은 한밤의 포식자인 박쥐를 피하기 위해서라는 주장이 나왔다. 반딧불은 남아메리카 열대림의 독개구리처럼 포식자의 눈에 잘 띄는 경계 신호라는 얘기다.
 
브라이언 리벨 미국 보이스 주립대 생물학자 등 미국 연구자들은 과학저널 ‘사이언스 어드밴스’ 22일 치에 실린 논문에서 북아메리카 반딧불이와 갈색 박쥐(우리나라의 문둥이박쥐와 같은 속)를 이용한 실험에서 이런 결론을 얻었다고 밝혔다. 북아메리카 반딧불이는 박쥐 등 포식자가 먹기에 맛이 없을뿐더러 독이 있어 자칫 삼켰다간 1시간 안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맛 없는 먹이를 박쥐는 어떻게 알까.
 
ff2.jpg» 반딧불이 회피 실험을 한 북아메리카 갈색 박쥐. 우리나라 문둥이박쥐와 가깝다. 앤 프로샤우어, 미국 어류 및 야생동물국 제공.
 
연구자들은 먼저 캄캄한 실험실에서 박쥐 3마리 앞에 반딧불이를 날려 보았다. 박쥐는 한 번도 반딧불이를 접해보지 않은 개체였다. 박쥐는 날아오른 반딧불이를 공중에서 포획했지만 곧 뱉어냈다. 그러나 며칠 지나지 않아 박쥐는 반딧불이를 기피하는 것을 배웠다. 반딧불이와 함께 날린 다른 딱정벌레는 날리는 족족 잡아먹었다. 
 
이번에는 반딧불이의 발광기관에 두텁게 페인트를 칠해 빛을 내지 못하게 한 뒤 날렸다. 박쥐 한 마리는 발광하지 않는 반딧불이를 대조군인 일반 딱정벌레와 마찬가지로 포획했다. 반딧불이의 시각적 신호가 포식자에 단서가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다른 한 마리의 박쥐는 빛을 내지 않는 반딧불이를 여전히 기피했다. 이 박쥐는 시각 이외에 무슨 정보를 얻는 걸까.
 
연구자들은 박쥐가 밤중에 비행하고 사냥할 때 쓰는 초음파 음향 정보에 주목했다. 반딧불이는 다른 딱정벌레와 다른 방식으로 날았다. 독성물질을 보유해서인지 반딧불이는 느리고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태연하게 비행했다. 박쥐는 반사한 초음파를 통해 먹이의 크기, 형태, 재질 등을 알아낸다. 박쥐는 먹이를 붙잡기 직전 초음파를 빠르게 발사하는데, 반딧불이임을 알아챈 며칠 뒤에는 아예 초음파를 내지 않았다.
 
ff3.jpg» 반딧불이는 느리고 예측가능한 비행을 함으로써 유독 곤충임을 표시한다. 스티픈 마셜 박사 제공.
 
연구자들은 “박쥐가 맛이 없는 먹이인 반딧불이를 피하기 위해 시각 또는 초음파를 이용한 반향정위를 이용하며, 두 가지 정보를 통합할 때 더 빨리 회피법을 배우는 것으로 밝혀졌다”라고 논문에서 밝혔다. 연구자들은 또 불나방 같은 다른 야행성 곤충도 비슷한 방어술을 펼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추정했다. 
 
나아가 반딧불이의 발광이 이런 포식자 회피를 위해 기원했을 가능성도 제시했다. 반딧불이의 조상 종들은 애벌레 때만 발광을 하고 성체는 발광 대신 페로몬 분비를 통해 짝짓기한다. 연구자들은 낮에 활동하던 반딧불이가 야행성으로 바뀌면서 당시 새롭게 등장한 포식자인 박쥐에 대응하기 위해 발광을 진화시켰을 것으로 보았다.
 
ff4.jpg» 박쥐의 초음파를 들으면 자신이 만든 초음파를 발사해 혼선을 일으키는 불나방. 시각적 방어에 치중하던 곤충은 청각을 무기로 내세운 박쥐의 등장으로 큰 위기에 빠졌고 진화적 대응을 서둘렀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실제로 반딧불이 성체의 발광은 여러 종 사이에서 6번이나 독립적으로 진화했다. 반딧불이가 지구에 출현한 것은 7500만년 전이고 박쥐는 6500만년 전에 나타났다. 연구자들은 “반딧불이의 계통분화 시기가 정확히 밝혀진다면 발광이 박쥐가 출현하면서 나타났으며, 결국 박쥐가 반딧불이를 발명했음이 드러날 것”이라고 논문에서 밝혔다.
 
박쥐 생태 연구자인 김선숙 국립생태원 박사는 “우리나라 박쥐와 반딧불이 사이에 이런 포식자-피식자 관계가 있는지는 아직 연구가 이뤄진 적이 없다”라고 말했다.
 
 기사가 인용한 논문 원문 정보:
 
Brian C. Leavell et al, Fireflies thwart bat attack with multisensory warnings, Science Advances, 2018;4: eaat6601
 
조홍섭 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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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따를 왜 두려워하나…외롭게 사는 것이 더 가치 있다”

“왕따를 왜 두려워하나…외롭게 사는 것이 더 가치 있다”

등록 :2018-08-25 09:14수정 :2018-08-25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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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인터뷰
르네상스적 지식인 박홍규 
“육십 평생 살아오면서 가장 잘 한 건 시골에서 산 거다. 자연과 더불어 느리게 사니까 책도 많이 쓸 수 있었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가 지난 17일 낮 경북 경산시 압량면 당음리 자택 인근 텃밭에서 자신의 삶과 인생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경산/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육십 평생 살아오면서 가장 잘 한 건 시골에서 산 거다. 자연과 더불어 느리게 사니까 책도 많이 쓸 수 있었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가 지난 17일 낮 경북 경산시 압량면 당음리 자택 인근 텃밭에서 자신의 삶과 인생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경산/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 네트워킹의 세상에서 각종 인연을 가능한 끊은 채 시골에서 느리고 홑지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그러면서도 인류의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책을 쓴다. 올초 정년 퇴임한 뒤 평화주의자로서의 삶을 더 밀어부치고 있는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다. 지난 17일 오후 경북 경산에 있는 그의 집에서 만났다.

 

 

 

경산역에서 탄 택시가 경북 경산시 압량면 당음리 마을 입구에 멈췄다. 똑같은 모양의 집 10여 가구가 골목길 양쪽에 들어서 있었다. 어느 집이지? 평일 낮시간 햇볕 쨍쨍한 골목을 오가는 사람이 없어 물어볼 데도 없다. 현대 문명에 너무 뒤처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터여서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휴대전화의 지도 앱을 열어 번지수를 찍었다. 목적지까지 125m. 길은 짧았지만, 온라인의 길을 오프라인에 맞추고 방향을 찾는데 시간이 필요했다. 그때 길 끝에서 덥수룩한 수염의 사람이 느릿느릿 걸어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멀리서도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66·이하 호칭 생략)임을 금방 알았다. 때로는 디지털보다 아날로그가 더 편리하고 정확하다.

 

박홍규는 철저하게 아날로그적 인간이다. 자동차도 운전면허증도 없다. 자전거를 타거나 웬만하면 걷는다. 먼 곳을 오갈 때는 고속열차(KTX) 등 빠른 것보다는 무궁화호 등 느린 것을 좋아한다. 해외여행도 가급적이면 비행기보다 배를 이용한다. 휴대전화는 아예 없고, 인터넷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이번 인터뷰도 섭외부터 만남까지 모두 이메일로만 연락을 주고받았다. 느리긴 했지만, 불편함은 없었다.

 

 

여생의 과제, 초암평화사상연구소

 

집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그와 부인이 가꾸는 텃밭을 먼저 가자고 요청했다. 1999년 이 곳으로 이사온 뒤 쌀을 제외한 거의 모든 식재료가 나오는 박홍규 삶의 터전을 보고 싶었다. “매년 산에서 낙엽 썩은 부식토를 가져와서 땅에다 넣었다. 이제는 완전 유기농으로 자리잡았다. 땅 속에는 지렁이와 두더지 천지이다. 인근 논밭은 농약을 치고 비료를 주니까 동네 두더지가 전부 이 밭으로 몰려드는 것 같다. 하하.” 그의 말이 아니더라도 검은 빛이 감도는 흙은 이 땅이 얼마나 건강한지를 알려주는 듯했다. 호박, 박, 오이, 고추, 땅콩, 고구마, 들깨 등 서로 어울리거나 따로 자기 자리를 잡은 다양한 작물들로 인해 600평의 밭이 그다지 넓게 느껴지지 않았다.

 

600평은 그가 정한 소유의 한계다. 우리 국토에서 경작 가능한 땅을 7천만 인구로 나눴을 때 한사람에게 300평씩 돌아가는 것으로 계산되자, 자신과 부인 몫을 합한 크기만큼만 땅을 샀다. 밭 입구에 있는 허름한 농막도 그가 손수 지었다. 황토 흙을 개어 벽돌을 만들고, 버려진 목재를 주워 틈틈이 만들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책더미 속에 양파와 마늘 등 수확한 농산물이 여기저기 놓여 있다. “책은 보관할 데가 없어 가져다 놓았다. 양파와 마늘은 여기에 보관하면서 1년 내내 먹는다.”

 

본격적인 인터뷰를 위해 집 안으로 옮겨 자리를 잡자, 부인(서현숙·67)이 직접 만든 음료를 내왔다. 부부가 텃밭에서 키운 매실과 비트로 만든 효소라고 했다.

 

-지난 2월 정년 퇴직을 했는데 요즘도 늘 학교에 가나.

 

“낮에는 매일 학교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는다. 오늘은 공영형 사립대와 관련한 회의에 참석했다. 제가 오랫동안 관여해온 문제여서 빠질 수 없었다.”

 

영남대는 상지대, 조선대 등 문제가 많았던 다른 사립대처럼 문재인 대통령이 공약한 공영형 사립대로 전환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최근 기획재정부가 내년도 공영형 사립대 예산을 전액 삭감함에 따라 이들 대학이 크게 낙담하고 있다. 박홍규는 정부의 이러한 조처에 대해 “공영형 사립대는 어빠진 사립대를 조금이라도 건강하게 만들 수 있는데 사립대 개혁이 완전히 수포로 돌아갈까봐 걱정스럽다”며 비판과 우려를 표시했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가 17일 낮 경북 경산시 자택에서 <한겨레>와 인터뷰 도중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있다.  경산/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가 17일 낮 경북 경산시 자택에서 <한겨레>와 인터뷰 도중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있다. 경산/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명예교수로 강의는 맡고 있나?

 

“아니다. 시간강사가 50%를 넘는데 퇴직 교수가 강의하겠다고 하는 것은 젊은 사람들 자리를 뺏는 것이다.”

 

그는 요즈음 경산 압량을 평화사상 연구의 메카로 만들 꿈에 부풀어 있다. 그동안 혼자서 주로 공부해왔다면 앞으로는 연구소를 만들어 뜻맞는 사람들과 평화에 관한 연구를 할 계획이다. ‘초암평화사상연구소’라고 이름도 지었다. 선친의 호(초암)에서 따 왔다. 교사였던 아버지가 남긴 작은 유산의 일부가 종잣돈으로 쓰인 때문이기도 하지만, 평생 성실한 교육자로 살다간 평범한 보통사람의 삶이 갖는 평화정신을 기리는 뜻도 담았다. 집 옆 공터나 텃밭에 40평 규모의 2층짜리 연구소 건물을 세워서 1층에는 연구실과 강의실, 2층에는 자료실과 전시실을 꾸밀 계획이다. 전시실에는 간디와 톨스토이, 마틴 루서 킹, 본 회퍼 등 평화사상을 고민하고 실천했던 주요 인물들의 초상화를 직접 그려서 걸 생각이다.

 

-왜 하필 평화사상이냐?

 

“사실 가장 기본은 자유다. 평소 제 생각이나 철학은 자유로운 개인이 모여서 자율적인 사회를 만들고, 자연과 함께 살아가자는 것이다. 그런데 자유라는 말은 너무 진부하고, 또 자유사상연구소라고 하자니 우익단체처럼 들리더라. 제가 강조해왔던 삼자주의 즉, 자유와 자치, 자연을 포괄하는 게 뭘까 생각했더니 평화로 집약되더라. 물론 전쟁과 평화라는 식의 정치학적인 논의에는 저는 관심이 없다. 진정한 평화를 이루기 위한 기본적인 사상에 관심이 많다. 앞으로 평화사상 저널도 발간할 계획이다.”

 

-연구소에 연구원도 있어야 하고, 그러자면 돈도 꽤 들텐데.

 

“제 꿈은 베트남과 인도의 친구 하나씩을 포함해 서너명의 동학을 여기에 모으는 것이다. 그들이 여기 앉아서 대화하고, 사람들과 만나 공부하는 것이다. 돈은 없지만, 뜻이 있으면 길이 열리지 않을까 기대한다. 이반 일리치가 멕시코에서 일종의 학문공동체를 만들어 운영했던 것처럼 말이다. 일리치의 공동체에서는 강의를 들으러 오는 사람뿐만 아니라 강의를 하는 사람도 오히려 돈을 냈다. 그런데도 전세계의 진보인사들이 몰려들었다. 일리치처럼 사람들을 모을 능력도 없고, 그동안 인간관계를 너무 소흘히 해서 걱정이긴 하다.”

 

학교와 병원 등 우리에게 익숙한 시스템과 체제를 비판했던 이반 일리치(1926~2002)는 1960~70년대 멕시코 쿠에르나바카에서 대안 학문공동체인 ‘문화교류문헌자료센터(CIDOC)’를 운영했다. 여기서 함께 생활한 폴 굿맨과 도스 산토스 등이 2000년대 미국이나 유럽, 남미의 진보 사상을 주도했다.

 

-인간관계는 일부러 안 맺지 않았나.

 

“그렇다. 하하. 이런 거 할려니 사람도 필요하고 돈도 필요한데 별안간 변신은 안 되고 어려움이 있다.”

 

-변신하면 선생님의 본질을 잃을 수도 있지 않나.

 

“그렇다. 하하. 연구소도 소박하게 하겠다.”

 

 

20년전 시골로 거처 옮긴 뒤

 

왕따 자처한 박홍규 명예교수

 

혈연 지연 학연 등 끊고 살아

 

밭농사 지으며 글쓰기 전념

 

“외톨이 생활도 나쁘지 않아”

 

 

“시스템적인 인간이 아니어서 사회 변화를 위한 대안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사람들이 가능한 소박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박홍규 명예교수가 인터뷰 도중 환하게 웃고 있다. 경산/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시스템적인 인간이 아니어서 사회 변화를 위한 대안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사람들이 가능한 소박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박홍규 명예교수가 인터뷰 도중 환하게 웃고 있다. 경산/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나는 고독사를 꿈꾼다”

 

박홍규의 삶은 소박하고 단촐하다. 새벽 2~3시쯤 일어나면 아침까지 글 쓰고, 밥 먹기 전에 텃밭에 가서 일한 뒤 아침을 먹고는 학교로 간다. 저녁에는 돌아와서 밥 먹고 보통 8시쯤 잔다. 혈연과 학연, 지연의 줄은 찾지 않는 정도가 아니고, 아예 끊어버리고 산다. 가족이나 친족 안에서도 ‘이단아’다. 각종 동창회나 회식 등 사교 모임에도 일절 가지 않는다. 책 친구, 생각 친구는 있어도 죽마고우니 동창 친구는 없다.

 

-선생님은 삼자주의 가운데 자유로운 개인이라는 측면에서는 누구도 흉내내지 못할 정도의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다.

 

“관혼상제에 안 가고, 동창회 안 가고 하는 정도일 뿐이다. 일부러 그런 곳에 안 끌려가고 혼자 산다. 그런데 혼자 사는 것은 굉장히 쓸쓸한 것이다.”

 

-외롭다는 뜻인가?

 

“외롭다는 표현은 안 맞다. 외로우려면 심심해야 하는데 제가 할 일이 워낙 많고 재밌는 게 많아서 전혀 심심하지는 않다. 책이나 영화 볼 것도 많고, 외국 다닐 일도 많다. 사람들을 안 만나서 외롭다는 생각은 안 든다. 오히려 사람을 만나면 더 외롭고 괴로운 거 아니냐.”

 

-보통 사람들은 동창회나 회식 등을 썩 좋아하지 않더라도 빠지려고 하지 않는다. 무리에서 떨어지면 왕따가 될까봐 두렵기 때문이다.

 

“젊은 학생들을 보면 친구가 없는 것이나 왕따를 굉장히 두려워하는 것 같더라. 집단 속에 들어가야 안심이 되고, 사는 느낌을 가지는 것 같다. 나는 언젠가 그런 책을 쓰고 싶더라. ‘친구 없어도 괜찮아. 불알친구 없고, 계 없고, 동창회 안 가고, 에스엔에스 안 해도 괜찮아. 혼자서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얘기를 하고 싶다. 얼마 전에 중학생이 에스엔에스에서 따돌림을 당했다고 자살을 했다고 하던데 제발 그런 것 때문에 소중한 삶을 포기하지 말라고 하고 싶다. 흔히 친구 친구 하는데 로마 철학자들은 우정에 대해 매우 회의적이었다. 또, 사람들이 고독사를 굉장히 문제시하는데 나는 고독사하고 싶다. 집사람한테도 ‘나중에 아프면 집을 나가 산꼭대기에 가서 고독사할 것이니 찾지 말라’고 가끔 말한다.”

 

-선생님이 생각하는 고독사는 다른 차원 아닐까?

 

“물론 그렇다. 그러나 죽음의 미학을 논할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는 혼자 사는 것을 두려워 말아야 한다. 다만, 꼭 무리지어야 하고, 그게 아름답고 도덕적으로 가치있는 양 하는 것은 황당하다. 더구나 어린 학생들까지 그런 문제로 고민한다는 것은 어른으로서 얼마나 창피한 일이냐.”

 

-고독해도 괜찮아라는 말은 이해는 되지만, 보통사람이 행하기는 쉽지가 않다.

 

“그러나 외롭게 사는 게 훨씬 더 가치가 있고, 외로운 것도 해볼만 한 일이라는 얘기를 누군가는 해야 한다. 특히 아이들한테는 말이다. 그 점에서는 아나키스트들이 할 말이 많다. 아나키스트들은 그런 외로움을 즐기고, 혼자 사는 방법을 아는 데는 도사들이다.”

 

어릴 적 사진 몇장 구할 수 있겠느냐는 요청에 그는 24일 “찾을 수가 없다”면서 아래와 같은 이메일을 보내왔다.

 

“중고교 때 별명이 ‘데카당’이었고, 미술실에 처박혀 외톨이로 살았어요. 그 뒤로도 평생 외톨이로 살았네요. 후회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자랑할 것도 없지만, 외톨이로 사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라고 아이들에게 말하고 싶어요. 더러운 세상에서 자발적 왕따로 살라고 용기를 주고 싶어요.”

 

 

150권 이상의 대중서적 펴내

 

전공인 법학보다 문학 예술 등

 

다양한 분야 망라한 책 쓰기

 

에드워드 사이드 등 국내 첫 소개

 

“학문 권위 아닌 교양에 만족”

 

 

박홍규 명예교수 자택의 거실 양쪽에는 다양한 분야의 책들이 꽂힌 책장이 놓여있다.  경산/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박홍규 명예교수 자택의 거실 양쪽에는 다양한 분야의 책들이 꽂힌 책장이 놓여있다. 경산/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원고료 안 받는 저자

 

박홍규는 흔히 무정부주의자라고 번역되는 ‘아나키스트’다. 중고교 시절 읽은 신채호의 책에서 영향을 받고, 아나키스트 철학자 하기락(1912~1997)을 만난 게 계기였다. 당시 경북대 교수였던 하기락은 고등학생에 불과하던 박홍규를 동료처럼 “정중하게” 대했을 뿐 아니라 본질적으로 평화주의인 아나키즘을 알게 해줬다. 지금은 탈퇴했지만, 한국 아나키즘학회 회장도 한때 맡았다.

 

-고등학교 때 형성된 생각이 지금까지 사상의 지주로 있는 건가.

 

“그렇다. 학창 시절에 민주화 운동과 노동운동을 하면서도 정권에 대한 저항 이런 차원의 것 말고, 좀 더 근본적인 게 뭘까를 고민했다. 주변에서 사람들이 변하는 것을 많이 봤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아버지도 그랬다. 일제시대 때는 사회주의에 대한 고민을 하고, 해방 이후에는 교원노조 운동을 했던 분이 박정희 정권이 출범한 이후에는 보수적으로 변하더라. 사람들이 왜 저렇게 변할까 고민하다가 저한테 잡힌 게 아나키즘이다. 아나키즘은 근본적인 얘기같은 느낌이 들었다. 또, 국가보안법과 노동관계법 등 사상에서의 국가주의나 교육에서의 국가주의가 우리나라에서는 너무 강해서 공부를 할수록 아나키즘 쪽으로 쏠리더라.”

 

-변하지 않고 일관된 생각을 갖고 있는 비결이 뭔가.

 

“일관됐다는 표현은 맞지 않고, 나름대로는 굉장한 부침이 있었다. 예를 들어 니체든 톨스토이든 그들에 대한 제 인식은 싫어했다가 좋아했다가 욕했다가 등등의 변화가 많았다. 또, 지금도 이게 답인가에 대해 굉장히 회의한다. 아나키즘은 딱 정해진 것이 없고, 사상가 나름대로 스펙트럼도 다양하다. 그 중에 제가 가깝게 생각하는 사람은 톨스토이나 간디, 러시아의 크로포트킨 정도다. 그들은 폭력주의를 배격했다.”

 

-비폭력 평화주의자로서의 아나키스트인가.

 

“그렇다. 아직도 일부에서는 아나키즘을 무질서하고 무책임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아나키즘은 무법이 아니라, 인간에게 필요한 법이나 도덕 등 규범과 오히려 잘 통한다. 전제 군주나 지배층의 폭력에 저항하다가 불법이나 무법자라고 낙인찍힌 아나키스트는 있지만, 스스로 살인이나 폭력을 저지른 사람은 전혀 없다. 오히려 아나키스트일수록 철저히 평화와 질서를 끔찍하게 지킨 사람들이다.”

 

 

박홍규 명예교수는 자동차 대신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다닌다. 먼 길을 갈 때도 가능하면 무궁화호나 배 등 느린 교통수단을 이용한다. 박 명예교수가 2005년 6월 자전거로 등교하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박홍규 명예교수는 자동차 대신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다닌다. 먼 길을 갈 때도 가능하면 무궁화호나 배 등 느린 교통수단을 이용한다. 박 명예교수가 2005년 6월 자전거로 등교하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평화주의자로서의 박홍규의 삶은 책이다. 그는 <윌리엄 모리스 평전> <왜 다시 마키아벨리인가> <오리엔탈리즘>(에드워드 사이드 저, 번역) <학교 없는 사회>(이반 일리치 저, 번역) 등 지금까지 모두 150권이 넘는 책을 쓰거나 번역했다. 분야도 다양하다. 자신의 전공인 노동법이나 법학과 관련된 책은 오히려 소수다. 동서양의 철학과 사상, 문학, 예술 분야를 망라한다. 프랑스 철학자인 미셸 푸코, <오리엔탈리즘>으로 유명한 에드워드 사이드를 국내에 처음 소개했으며, 플라톤과 니체, 그리스 로마 신화 등을 민주주의 관점에서 재평가했다. 가히 통섭의 지식인, 르네상스형 인간이라고 부를 만하다.

 

-우리나라에서는 번역서든 저서든 책이 교수 평가의 척도가 아니어서 논문 쓸 시간만 잡아먹는 방해물로 취급받기 일쑤다. 대개의 교수들은 할당된 논문을 채우느라 대중을 상대로 한 책은 쓰고 싶어도 못 쓰더라. 그런데 선생님은 매년 평균 3~4권을 썼더라.

 

“제 책이 다 시시하다. 하하. 교양적이고 계몽적인 차원의 책이다. 그래서 저는 어떤 책에 대해서도 학문적인 권위나 가치를 인정받고 싶지도 않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물론 베스트셀러가 되기를 바라지도 않고, 그렇게 된 적이 한번도 없다. 그냥 읽어주는 사람이 한두명이라도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책을 냈다. 출판 불황에도 써달라고 요청하는 출판사가 다행히 있으니 앞으로도 제 힘 닿는 데까지 쓸 생각이다.”

 

-선생님의 책은 사상의 지평을 넓혀주고, 일반 통념과 다른 관점에서도 볼 수 있다는 식의 비판적인 읽기를 가르쳐준다는 평가를 받는다. 전공이 아닌 분야의 책을 낼 생각을 어떻게 했나.

 

“제가 원래 잡독을 한다. 어려서부터 책을 가지는 것을 좋아했고,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었다. 읽다 보니, 국내에도 꼭 소개가 됐으면 싶은 사람들이 생겼다. 사이드나 윌리엄 모리스 등이 대표적이다.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읽고는 이 책을 번역 좀 하라고 영문학 전공자들한테 얘기를 했는데 바빠서 그런지 아무도 안 하더라. 할 수 없이 나라도 해야겠다고 해서 나섰다.(1991년 첫 출간) 특별한 계기라기보다는 필요에 의해 그렇게 됐는데, 그때부터 전공이 아닌 분야도 과감하게 뛰어들게 됐다. 하하.”

 

그는 인세나 번역료 등 원고료를 챙기지 않는 저자로도 유명하다. 한 두 권 빼고는 모두 작은 출판사에서 책을 냈으며, 그 경우 대부분 원고료를 받지 않았다.

 

-원고료를 안 받은 것은 출판사를 돕기 위해서인가.

 

“그렇게 말하면 교만한 것이다. 나야 월급 받는 교수니까 원고료가 없어도 살 수 있다. 그리고 처음에 책을 낼 때는 노동자를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제가 1980년대 창원대학에 있을 때 밤에는 노동자를 대상으로 노동법 강의를 했다. 그때 강의 중간 중간에 비틀스의 ‘이매진’이나 김민기의 ‘공장의 불빛’을 들려주고, 고흐의 그림도 보여줬다. 실제로 고흐는 노동자를 좋아했고, 자기 그림이 노동자들의 거실에 걸리는 것을 평생의 소원으로 여겼다. 베토벤도 마찬가지다. 그런 얘기를 하면서 나도 노동자를 위한 책을 쓰자고 결심했다. 그들이 책을 사 보려면 가격이 조금이라도 싸야 하지 않겠나.”

 

 

비폭력평화주의 아나키스트

 

자유·자치·자연 3자주의 실천

 

자동차·휴대폰 없이 느린 삶

 

“체제변화 이룰 대안 아니나

 

지구 위해 소박하게 살아야”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왼쪽)가 17일 경북 경산 자택 인근의 텃밭을 둘러보면서 기자에게 작물을 설명하고 있다. 경산/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왼쪽)가 17일 경북 경산 자택 인근의 텃밭을 둘러보면서 기자에게 작물을 설명하고 있다. 경산/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전태일과 5·18에 대한 속죄의식

 

-그렇게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책을 쓸 수 있었던 원동력은 뭔가.

 

“많이 쓰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 대단한 일이라고 할 수는 없다. 굳이 이유를 찾는다면 시골에서 조용하게 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도시에서 번잡하게 살면 글 쓸 시간이 없겠지만, 여기서는 매일 새벽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박홍규의 독서는 중학교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고향 구미를 떠나 중학교(대구중)를 대구로 진학한 그에게 헌책방은 지적인 파라다이스였다. 살림이 넉넉지 못한 부친은 그에게 용돈 없이 통학 버스비만 줬다. 박홍규는 달성공원 뒤쪽에 있는 고모집에서 학교까지 먼 길을 걸어서 아낀 버스비로 중고책을 한권씩 샀다. 중학교 1학년 때 처음 사서 읽은 책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당시 책 제목은 <운명의 별이 빛날 때>)였다. 어렸을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그는 유명 화가들의 일본어판 화집도 열심히 샀다. 그 화집을 보기 위해 혼자 사전을 들고 일본어를 익혔다.

 

고교(경북고)에 들어가서는 친구들과 함께 아예 학교 앞에 아틀리에를 차려놓고 그림을 그리면서 각종 책을 읽었다. 책으로 세상의 부조리에 눈뜬 그는 고 3 때(1969) 박정희 정권의 3선 개헌에 반대하는 시위를 주동했다. 이 때문에 경찰에 잡혀가기도 했다. 결국 대학 입시에 두번이나 실패했다.

 

재수 때도 교과서나 수험서가 아닌 철학과 사상, 문학, 예술서를 끼고 살았다. 책이야말로 스승이었다. 1971년 영남대 법대에 입학했을 때 그는 이미 스스로 성장한 운동권이었다. 책과 함께 독재정치가 빚은 암담한 현실이 그를 키웠다. 경상도의 젊은 청년을 아무도 공부하지 않았던 노동법 전공으로 이끈 것은 근로기준법을 들고 분신한 전태일이었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당시 캠퍼스 분위기에 따라 노동법보다 마르크스를 더 열심히 읽었다.(<젊은 날의 깨달음>, 2005, 인물과사상사) 각종 학생 시위에 적극 가담했던 그는 4학년 때 민청학련 사건의 영남대 총책으로 지목돼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기도 했다.

 

—학생운동의 거물이었나.

 

“전혀 아니다. 민청학련에 연루됐던 사람들과도 아무런 관계가 없었는데 사건을 키우기 위해서 그들이 엮은 것이다. 영남대는 학생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몇명 안 돼서 제가 눈에 띄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학생운동에 제 딴에는 열심히 참가했고, 4학년 때부터는 노동자의 의식전환이 필요하다고 보고 노동야학 운동에 뛰어들었다.”

 

1980년 광주의 5·18 비극도 그의 삶에 많은 영향을 줬다. “(1982년 오사카시립대에서 공부할 때) 지금 뚜렷이 기억하는 것은 그 곳에서 만난 전라도 친구들에게 무조건 경상도 군인들(전두환 노태우 등)이 저지른 5·18의 용서를 울면서 빌었다는 점이다.”(<젊은 날의 깨달음>)

 

그러나, 박홍규는 기본적으로 행동가가 아니라 고뇌하는 지식인이었다. 혁명가나 사회운동가가 아니라 학자의 길이 그에게는 자연스러웠다.

 

“이 사람은 대학 때부터 직접적으로 리더가 되는 성향의 사람은 아니었다. 제가 학보사 기자를 했었는데, 학교 신문에 이 사람이 논문이나 시국에 관한 긴 글을 자주 실어서 꽤 유명했다. 학생으로서 글을 아주 잘 썼지만, 그 때도 자기 세계에 빠져 있었다. 데이트할 때 한번은 제가 프랑스 화가인 로렌셍을 좋아한다고 했더니 여러 화집에서 로렌셍 부분만 찢어서 책을 만들어줬다. 또, 사르트르를 얘기하면 사르트르에 관한 수십권의 책을 가져다주면서 읽어보라고 권했다.”(부인 서현숙)

 

박홍규는 1981년 모교의 노동법 전임 교수 모집에 최종 후보로 올라갔지만, 박근혜가 새 이사장으로 취임한 영남대는 시위 전력을 들어 그를 탈락시켰다. 마침 그해 4년제로 승격한 창원대가 이 젊은 학자를 전임교수로 채용했다. 그는 박근혜가 떠난 영남대로 돌아올 때(1991년)까지 10년간 노동자 도시인 창원에서 대부분 활동했다. 낮에는 학생들을 가르쳤지만, 야간에는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노동법 강의를 하는가 하면 노조 결성을 도왔다. 노동자들을 위한 대중서를 쓰기 시작한 것도 창원에 있을 때였다. 텃밭 가꾸기 등 생태운동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도 창원에서였다.

 

—1999년 대구의 집을 정리하고 경산으로 이사올 때는 단순한 주거 이동이 아니라 삶의 방식을 바꾸겠다는 결심에 따른 것이라던데.

 

“그렇다. 올해도 몇십년 만에 가장 덥지만, 1998년에도 제 기억에는 몹시 더웠다. 그 여름을 지나면서 지구 온난화를 막기 위해서는 작은 실천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전셋집을 정리하고 이 곳으로 들어왔다. 그때는 정말 한적한 시골이었다. 시골에서 차 대신에 자전거를 타고, 동물을 키우고, 주경야독을 하자는 생각이었다. 자유와 자치, 자연이라는 삼자주의의 실천을 꿈꿨다. 60평생 살아오면서 가장 잘 한 건 시골에서 산 거다.”

 

그는 지금도 수염을 한달에 한번씩 가위나 바리캉으로 스스로 자른다. 머리도 집에서 가끔 깎는다. 목욕도 자주 하지 않고, 씻을 때는 비누만 사용한다. 그의 부인도 평생 화장을 하지 않는다. 자기 몸을 가꾸는데 시간을 들이는 것은 유한계급이 남긴 나쁜 유산이라는 생각도 있지만, 조금이라도 지구 생태계에 피해를 주지 않겠다는 윤리적 삶의 실천이다.

 

—삼자주의 중에 자유로운 개인, 자연과 어울리는 삶은 누구보다 철저하게 실천하고 있는 것 같은데, 자치는 어떤가.

 

“처음에 여기 올 때는 마을도서관을 열고, 일종의 대안학교인 자유학교 운동을 하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마을 공동체를 이루는 데까지는 가지 못했다.”

 

—학교 일 때문에 바빠서 그랬나.

 

“그것보다는 마을사람들과 친해지기가 참 어려웠다. 새로 조성된 이 마을은 거의 외지인으로 여기서 잠만 자고 대구로 일하러 가는 사람들이어서 서로 얼굴 보기도 어렵다. 또, 저쪽의 원래 마을은 농사짓는 사람들인데 만나면 ‘공주님’(박근혜) 얘기만 하니까 대화가 안 된다. 처음에는 막걸리를 사들고 가서 대화하려고 노력했는데 솔직히 힘들더라. 앞으로 연구소를 짓고 나면 동네 사람들이 와서 영화도 같이 보고 음악도 듣고 얘기도 할 수 있을지 않을까 기대를 하는데 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박홍규 명예교수의 유기농 텃밭 입구. 오른쪽 건물은 그가 직접 빚은 벽돌과 폐자재로 손수 지은 농막이다. 안에는 책과 올 봄에 수확한 양파, 마늘 등이 보관돼 있었다.   경산/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박홍규 명예교수의 유기농 텃밭 입구. 오른쪽 건물은 그가 직접 빚은 벽돌과 폐자재로 손수 지은 농막이다. 안에는 책과 올 봄에 수확한 양파, 마늘 등이 보관돼 있었다. 경산/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중학생때부터 버스비 아껴

 

헌책 사모은 책벌레로 유명

 

스스로 성장한 ‘운동권’이었지만

 

사회운동가·리더 성향 아니야

 

“다르게 사는 사람 많았으면”

 

 

“다들 서울로 모이는 게 새 문제”

 

 

—올초 영국의 사회민주주의자인 웹 부부의 책(<산업민주주의>)과 함께 그 두 사람 평전을 펴냈다. 사회민주주의나 복지국가를 대안으로 찾은 건가.

 

“하나의 대안이긴 한데 우리한테 맞을지는 잘 모르겠다. 저는 사회 체제를 바꾸는 정책적인 대안에는 솔직히 관심이 없고, 그런 시스템적인 사고에 익숙하지도 않다. 아나키즘에 대해서도 한번도 이게 대안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물질에 미친 사회에서는 오히려 삼자주의가 공소하고 황당하게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지구 온난화가 가속화하기에 우리는 누구나 생태와 환경문제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 결국 대안이라는 것은 가능한 이렇게 소박하게 살고, 가능한 걷고, 가능한 낭비하지 않고 사는 게 아닐까. 그러면서 문화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삶이면 좋지 않을까 싶다.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할지언정 조금씩이라도 대안적 생활방식으로 사는 사람들이 많아야 한다. 그런 사람들이 꽤 나오기는 하는데 다들 서울로 모인다는 게 또다른 문제다.”

 

두어시간 남짓이면 충분하겠지 했던 인터뷰가 4시간을 훌쩍 넘겼다. 준비한 질문 하나는 꺼내지 않았다. 영남지역 진보인사 일부가 제기하는 ‘말만 진보이지 행동은 하지 않는다’는 비판에 관한 물음이었으나, 꺼낼 필요를 못 느꼈다. 주류에 편승하지 않고, 책으로 또 삶으로 평화와 민주주의를 그만큼 치열하게 고민했던 사람을 만나본 적이 언제던가 싶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왕따를 즐기는 지식인이 더 많이 나오기를 기원하면서 그의 집을 나섰다. 글 경산/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사진 경산/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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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미 대통령 폼페오 조선방문 전격 취소

  •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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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018/08/25 16:08
  • 수정일
    2018/08/25 16:08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드럼프 미 대통령 폼페오 조선방문 전격 취소
 
이용섭 기자 
기사입력: 2018/08/25 [08:27]  최종편집: ⓒ 자주시보
 
 

트럼프 폼페오 평양방문 전격 취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조선반도 비핵화에 대한 충분한 진전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에 이번에는 조선에 가지 말라고 지시하였다(원문-요청).”고 그의 트위터 계정에 올렸다. 

 

그는 자신의 트위터 계정에 

나는 마이크 Pompeo 국무 장관에게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충분한 진전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번에 북한에 가지 말 것을 요청했다.

(I have asked Secretary of State Mike Pompeo not to go to North Korea, at this time, because I feel we are not making sufficient progress with respect to the denuclearization of the Korean Peninsula...)

라고 첫 번째 내용을 올렸다.

 

 

▲ 나는 마이크 Pompeo 국무 장관에게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충분한 진전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번에 북한에 가지 말 것을 요청했다.     © 이용섭 기자

 

 

계속해서 트럼프는 

더해서 중국과의 무역거래에서 우리의 입장이 매우 강경하기 때문에, 나는  그들(중국)은 (과거의 유엔 제재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비핵화 과정을 돕고 있다고 믿지 않는다.

《...Additionally, because of our much tougher Trading stance with China, I do not believe they are helping with the process of denuclearization as they once were (despite the UN Sanctions which are in place)...》

라고 두 번째로 그의 트위터에 올렸다.

 

▲     © 이용섭 기자

 

트럼프는 세 번째로 그의 트위터 계정에 아래와 같은 내용을 올렸다.

폼페오 국무장관은 가까운 머지않아 조선을 방북할 것으로 보며, 중국과의 무역관계가 해결 된 이후에 조선을 방문한 가능성이 가장 크다. 그동안 나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따뜻한 인사와 존경의 마음을 전해드립니다. 나는 조만간(원문-곧)에 그를 만나기를 기대합니다.

(...Secretary Pompeo looks forward to going to North Korea in the near future, most likely after our Trading relationship with China is resolved. In the meantime I would like to send my warmest regards and respect to Chairman Kim. I look forward to seeing him soon!)

 

▲     © 이용섭 기자


 

한편 트럼프가 이번 마이크 폼페오의 조선방문을 전격적으로 취소한데 대해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트위터를 통해 한반도 비핵화와 관련해 충분한 진전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고 미국의 소리방송(VOA-Voce Of America)dl 보도하였다. 미국의 소리방송은 《또한 대중 무역과 관련한 미국의 훨씬 더 강경한 입장으로 인해 중국이 이전처럼 비핵화 절차를 돕고 있지 않다고 믿는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유엔 대북 제재가 유지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라고 적었다.》다고 전하였다.

 

“아울러 폼페오 장관은 머지 않은 미래에 북한을 방문하는 것을 고대한다며 이는 중국과의 무역 관계가 해결되고 난 후일 가능성이 높다고 강조했다.”고 미국의 소리 방송은 트럼프의 트위터 계정에 올린 내용을 보도하였다.

 

“이어 김정은 위원장에게도 가장 따듯한 안부와 존경을 보내고 싶다며 그를 곧 만나게 되기를 고대한다고 덧붙였다.”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그의 트위터 계정에 올린 마지막 내용을 전하였다.

 

미국의 소리방송은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북한의 비핵화 어떤 부문에서 충분한 진전이 이뤄지지 않고 있는지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면서 “하지만 미 국무부는 전날 VOA에 북한의 핵 활동 중단 조짐이 없다는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관측이 정확하다고 평가한 바 있다.”고 8월 24일 미 국무부 대변인실이 “북한의 핵 활동 중단 조짐이 없다는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관측을 ‘정확하다’고 한 내용을 재차 전하였다.

 

계속해서 미국의 소리 방송은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3일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대중 무역과 관련해 더욱 빠르게 조치를 취하지 않은 이유는 북한 때문이었다며 북한에 대한 중국의 도움을 원했었다고 밝혔다. 아울러 중국은 북한에 대해 큰 도움이 돼왔다며 그들이 계속 그러길 바란다고 강조했습니다.”며 조선의 비핵과가 이행되지 않는 이유가 중국이 조선을 경제적으로 돕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도널드 트럼프의 말을 보도하였다.

 

“도널드 트럼프는 로이터 통신과의 20일 인터뷰에서는 중국이 북한 문제에서 과거처럼 미국을 돕지 않고 있다고 했으며, 지난 16일에는 미-북 관계가 아마도 중국 때문에 약간 타격을 받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고 미국의 소리 방송이 보도하여 마치나 조선의 중국의 경제적인 속국이 되는 것처럼 믿고 있는 트럼프의 생각을 전하였다.

 

하지만 미국의 소리 방송은 “한편 미국과 중국의 차관급 통상 협상은 22일부터 23일까지 이틀 동안 워싱턴에서 진행됐으나 아무런 합의 없이 끝났으며 향후 협상 일정도 잡지 못했다고 미 당국자들이 전했다.”고 보도하였다.

 

미국의 소리 방송이 전한 이와 같은 내용은 이번 폼페오 미 국무부장관의 조선방문 전격적인 취소의 배경에는 중국과의 무역협상을 유리하게 이끌지 못한데 대한 반발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살 수밖에 없다. 그리고 자신들은 조선과의 6월 12일 싱가폴 《정상회담 합의》내용을 전혀 지키지 않으면서 조선과의 관계에 있어 자신들 뜻 대로 이어지지 못한 원인을 중국에서 찾으면서 그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 이 역시 전형적인 미국 더 나아가서 서방세력들이 써먹는 수법이다. 즉 자신들이 져야할 책임을 피해자에게 뒤집어씌우는 적반하장의 행태를 이번에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미국의 소리 방송은 곧바로 이어진 기사에서 미 전직 관리들 “폼페오 방북 취소는 ‘빈손 귀국’ 우려 때문”이라고 말한 미국의 전직 관료들의 말을 전하였다. 미국의 소리 방송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마이크 폼페오 국무장관의 4차 방북 계획을 취소한 이유는 또 한 번 빈손으로 돌아오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미 전직 관리들이 진단했습니다. 미 행정부 내에서 의견이 엇갈리거나 일종의 전략일 수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면서 구구절절 도널드 트럼프가 자신의 트위터 계정에 올린 내용이 폼페오 국무부장관의 조선방문 취소의 진짜 이유가 이나라 혹여라도 지난번 조선방문에서 아무런 성과는커녕 오히려 조선에게 냉대 그리고 그 후 약속을 지키지 않는 미국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과 비난을 받은 것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그와 같은 일이 벌어질까 우려하였기 때문이라고 진단한 미 전직 고위관료들의 분석을 전하였다.

 

미국의 소리방송이 후속 보도한 미국의 전직 고위 관리들의 분석 내용은 상당히 일리가 있다. 미국의 소리 방송이 전한 전직 고위 관리들은 대부분 올바른 판단을 한 것으로 본다. 

 

먼저 로버트 아인혼 전 국무부 비확산.군축담당 특보는 “폼페오 장관이 다시 북한을 방문했음에도 불구하고 빈손으로 돌아온다면 정치적으로 너무 수치스러울 수 있다는 판단을 했을 수 있다다. 조선은 현 시점에서 폼페오 장관에 많은 것을 건네줄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다며 지난 번 처럼 조선을 방문한 뒤 빈손으로 돌아오는 상황을 막은 것은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폼페오 조선방문 전격적인 취소를 평가하였다.

 

계속해서 로버트 아인혼 특보는 지난 방북에서 제시한 제안이 거절당했기 때문에 새로운 제안을 들고 갔어야 했고 이런 제안에 대한 내부 합의를 이루지 못한 것 같다. 또 방북 전 진행해 온 북한과의 물밑 협상에서 타협점을 찾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 현재 북한이 핵과 미사일 프로그램을 지속하고 있다는 충분한 증거가 있으며 이를 더 이상 숨기기는 어려웠을 것이다.이런 상황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다며 문제를 김 위원장의 책임으로 몰기로 결정했을 수 있다고 진단하였다. 아인혼의 이 같은 진단은 미국이 조선과의 관계가 제대로 진척되지 못하고 있는데 대한 책임을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넘겨씌우려는 전술일 것이라고 정확히 진단을 하였다.

 

미국의 소리방송의 기사를 보면 또 다른 미국 전직 고위 관리인 마이클 푹스 전 국무부 동아태 부차관보는 “이번 결정을 트럼프 대통령이 조-미 정상회담을 한 차례 취소했던 사례와 비교하면서 당시처럼 지금도 존 볼튼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등 행정부 내 일각에서 폼페오 장관의 방북에 반대하는 의견이 나왔을 수 있다.”고 진단하였다. 계속해서 폭스는 아울러 큰 진전을 이루기는 어렵다는 언론 보도를 접한 뒤 이런 상황을 우려했을 가능성, 혹은 과거 정상회담을 취소한 뒤 다시 만나기로 했던 전술을 다시 사용하는 것일 수 있다고 진단하였다. 폭스의 이런 진단은 그동안 미국이나 그 연합세력들이 걸핏 하면 조선이 “벼랑끝 전술”을 사용하느니 뭐니 하면서 실제로는 자신들이 써먹고 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밝히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푹스 전 부차관보는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에 “따듯한 안부”와 곧 만나고 싶다는 말도 전했기 때문에 강경 정책으로 선회할 것 같지는 않다고 하여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대조선 관계개선 더 나아가서 정상화라는 큰 틀은 변함이 없이 지속될 것이라고 분석하였다.

한편 미국의 소리방송이 보도한 바에 의하면 크리스토퍼 힐 전 차관보는 상황이 악화될 것 같다며 미국은 중국과 만남을 갖는 등 역내 전략을 구상하는 데 진지해질 필요가 있다고 분석하였다. 힐의 이와 같은 분석은 미국이 조선과의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좀 더 진지한 자세를 가지고 조선과 중국 등 주변국들과의 관계를 합리적으로 풀어가야 한다는 조언을 하는 것이다.

 

사실 지금까지 조미관계가 지난 6월 12일에 있었던 <싱가폴 조-미정상회담 합의문>의 내용에 맞추어 이행되지 못한 이유는 바로 미국이 내부적으로 강경파와 온건파강의 갈등 그리고 보이지 않는 세력들의 교묘한 방해책동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조선에서도 끈임없이 그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런데 이번 마이크 폼페오 미 국무부장관의 조선방문마저 전격적으로 취소를 한 것은 미국은 국제적인 외교관례에서 커다란 무례를 범한 것이다. 그러니 조선이 미국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으며, 자신들이 그처럼 외우는 <조선의 완전한 비핵화>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그건 망상일 뿐이다. 이제라도 미국은 지금까지 견지해왔던 대 조선 자세를 버리고 과감하게 새로운 길로 나서야 한다. 그것은 다름이 아닌 미국의 입장에서 미국의 이익만을 앞세운 외교나 협상이 아닌 상호존중의 원칙에 입각해서 서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상생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그럴 때만 조미관계가 정상화 될 것이며 자신들이 그토록 염원하는 조선으로부터의 핵위협, 국가안보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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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층건물 속 평양, 10년 새 어떻게 바뀌었나

<2018년 8월 평양취재>평양은 건설중...'과학으로 비약, 교육으로 미래 담보'
이승현 기자  |  shlee@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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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8.24  12:0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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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일부터 19일까지 9박 10일동안 평양에서 열린 '제4차 아리스포츠컵 15살 미만 국제축구대회' 참가를 위해 평양에 다녀왔다.
선수단과 기자단, 참관단 모두 합해 147명의 대표단은 남북교류협력 역사상 처음으로 서해 육로, 평양개성고속도로를 통해 서울에서 평양으로, 평양에서 서울로 이동하는 감격적인 순간을 함께 했다.
지난 10년간 가볼 수 없었던 평양은 어떻게 변해 있을까? 그동안 간간히 전해지기도 했지만 초고층 건물 숲과 깨끗하게 정리된 도로, 전에 없던 택시와 교통체증,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결 여유있어 보이는 시민들의 모습속에 평양의 지난 10년이 비껴 있었다.
유례없이 무더웠던 올 여름. '공화국창건 70돌'을 앞두고 한낮 더위를 피해 대집단체조 '빛나는 조국' 연습에 분주한 와중에 들려온 9월 남북정상회담 소식을 환영하는 평양시민들과 슬쩍 여름나기도 함께 해 보았다.

2018년 8월 평양에서의 열흘을 차례대로 소개한다.

평양으로 가는 길, 서울로 가는 길...평양개성고속도로를 달리다
②초고층건물 속 평양, 10년 새 어떻게 바뀌었나 
③2018 평양의 여름나기
④한발 더 들어가 본 평양의 이모저모

 

   
▲ 미래과학자거리 야경. 김정은 시대 평양을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자료사진-통일뉴스]

개성, 원산에서 평양으로 진입하는 중 멀리서부터 눈에 들어오는 조국통일3대헌장 기념탑. 남과 북의 여성이 한반도가 그려진 지구의를 떠받들고 있는 높이 30미터, 너비 61.5미터의 웅장한 탑을 지나 평양 시내에 들어서면 10여년 전 느림보 공사 중이던 고층 아파트가 진한 주황색과 푸른색으로 칠을 한채 우뚝 서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대동강을 향해 조금만 더 나아가면 오른쪽으로 곧게 뻗은 통일거리 양 옆으로도 고층 아파트가 쭉 늘어서 있다. 그렇지만 여기까진 맛보기에 불과하다.

형형색색 초고층 건물, 평양은 건설중

충성의다리를 건너 대동강을 넘으면 접어들게 되는 평천구역. 기존 평양지도에 평천강안거리라고 쓰여 있는 이곳이 '김정은 시대 대표적 건축물'로 꼽히는 '미래과학자거리'이다.

지난 2014년 5월 인근 중구역에 있는 김책공업종합대학 교육자들을 위한 살림집 건설을 지도하던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확장 건설을 지시한 이후 2015년 11월에 준공했다. 나선형으로 휘감으며 올라가는 듯한 53층의 아파트는 '북의 기상'을 상징하는 건축물이 되어 있다.

북한 매체의 소개에 따르면, 미래과학자거리의 총 부지 면적은 38만9,500여㎡, 연 건축 면적 87만6,750여㎡의 단지에 2,584세대의 주택 19개 호동, 상업시설 17개 호동 153단위, 공공건물 11개, 하부시설 43개가 들어섰다. 살림집 16개 호동, 공공건물 5개가 개건·보수되었으며, 1,540여m에 달하는 대동강변 호안공사가 진행됐다. 주택단지 건설에만 시멘트 30만 3,700여 톤이 사용되었고 공사 금액으로는 북한 원화로 99억5,940여 만원이 투입되었다.

광화문광장(면적 1만8,840㎡)의 약 20배에 해당하는 부지에 새 시대의 상징적인 건축물을 건설했지만 북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 미래과학자거리 전경.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종합봉사선 무지개호에서 바라 본 대동교. 다리를 둘러싼 불장식(네온사인) 뒤로 양각도호텔이 보인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지난 2016년 4월 대북제재가 본격화되는 시점에서 추진하는 전시성 사업이며 북 전체의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일각의 비난에 아랑곳하지 않고 평양 북동쪽 대성구역 김일성종합대학이 있는 룡남동과 룡흥동을 끼고 금수산태양궁전까지 미래과학자거리 건설의 2배가 넘는 방대한 공사를 벌여 '려명거리'를 조성한 것.

착공 1년만인 지난해 4월 준공식을 한 려명거리는 90여 정보(약 89만2,562㎡)의 부지에 4천여 세대, 44동의 초고층·고층·다층 주택과 탁아소, 유치원 등을 비록한 40여 동의 공공건물을 신축하고, 70여 동의 주택과 공공건물을 재건축했다. 에너지절약형의 녹색기술을 적용해 1년이라는 짦은 기간에 완공한 려명거리를 '인민의 이상거리'라고 부르고 있다.

이에 앞서 북은 지난 2012년 6월 만수대의사당 앞 네거리에서 김일성광장으로 통하는 창전거리 준공식을 진행하면서 김정은 시대 '평양의 번영기'를 구가하기 시작했으며, 2013년 9월 평양시 외곽 룡성구역에 1,000세대 규모의 은하과학자거리를 준공하고 2014년 10월 룡성구역 북동쪽 은정구역 은정과학지구에 위성과학자주택지구 공사를 끝내면서 건설속도를 계속 높여왔다.

2018년 8월 평양 시내 미래과학자거리 뒷편으로 고층 건물 건설공사가 계속되고 있고 모란봉구역 개선문 뒷편으로도 타워크레인이 올라가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국립교예극장의 둥근 돔을 개건하는 공사에 건설자들이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고 김일성광장 주변에도 크고 작은 건물들을 리모델링하는 것이 다수 목격됐다.

올해 대대적으로 준비하고 있는 '공화국창건' 70주년을 위한 준비인 것으로 보이는 건물 도색 미화 작업은 도심에서 다소 떨어진 만경대구역 등 평양 시내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김일성광장 주변과 강건너 주체사상탑을 비추는 조명은 밤새 꺼지지 않았고 미래과학자거리를 비롯한 고층 건물들에서 나오는 빛도 잠들지 않는 평양을 웅변했다. 대동강변을 달리는 차량에서 나오는 헤드라이트 빛은 평양의 야경을 돋보이게 했고 중구역과 동대원구역을 잇는 대동교에는 '불장식'(네온사인)이 밝혀져 눈길을 끌었다.

(무)궤도전차, 택시, 자전거... 평양은 달리고 있다.

   
▲ 미래과학자거리를 달리는 무궤도 전차. 최근 개발한 흰색 바탕에 빨간색 디자인을 가미한 '새형'의 무궤도전차는 올 가을 이후 평양시내를 운행할 것으로 보인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어느 것 하나 같은 모양을 한 것 없는 초고층 건물과 낮고 아담하거나 웅장한 건물들 사이로 '삼천리내강산', '내나라 제일좋아' 글귀가 써 있는 단층 버스와 2층 버스, 흰색·노란색·주황색 택시, 승합차와 짚차, 트럭 등 다양한 종류의 차량이 도심을 누비고 있었다.

평양 U-15 국제축구대회 참가단이 머물던 8월 10일부터 19일까지 북측은 선도차량이 경광등을 울리며 이동할 수 있도록 배려를 했지만 간간히 출퇴근길 시민들이 창문을 열고 부채질을 하며 더위를 식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가장 눈에 띠는 교통수단은 궤도전차와 무궤도전차. 그 중에서도 무궤도전차를 이용하는 시민들이 많아 보였다. 과학기술의전당에서 평양교원대학, 평양역에서 만경대 등 여러 노선으로 사람들을 실어나르는 (무)궤도전차가 평양시내를 종횡무진 누비고 있다.

북측 관계자들은 최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평양무궤도전차공장과 버스수리공장에서 개발한 '새형의 무궤도전차와 궤도전차'를 보고 '하늘의 별이라도 딴 듯 기분이 들뜬다'고 언급한 흰색 바탕에 빨간색 디자인이 가미된 새 전차에 대해 묻자 오는 9.9절 무렵 시내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내비쳤다.

열흘간 평양에 머무는 동안 인파가 밀리는 중구역 평양역과 평양제1백화점 등은 물론이고 평양시내를 다니면서 택시가 다니는 걸 언급하는 건 어느새 촌스러운 일이 되어버렸다. 타보진 못했지만 우리의 카드택시처럼 충전식 나래카드로 결제도 된다고 한다.

유난히 더운 올 여름에도 시민들의 발이 되어 준 자전거도 빼놓을 수 없는데, 차체 사이에 총전식 배터리가 장착되어 있는 듯한 전기자전거를 타고 경사로를 힘들이지 않고 시원하게 쌩 달리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올해 초부터 평양시내에서 서비스를 시작했다고 한 공공자전거 무인 대여 시스템 '려명자전거'를 이용하는 시민들의 모습도 보였고 검은색 또는 붉은색으로 구분한 자전거 전용도로도 운영하고 있었다.

어디나 태양빛전지판, 손전화·카드결제는 일상

   
▲ 대동강수산물식당 건물 옥상에 즐비하게 서 있는 태양광 패널.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자세히 살펴보면 평양의 가정용 태양빛전지판은 창가에 가로 또는 세로 방향으로 부착되어 있거나 베란다 안쪽으로 기대 놓은 듯 세워진 것도 있고 베란다 바깥 벽에 설치대를 만들어 걸어 놓아 위태로워 보이는 모습까지 참으로 '자유분방'(?)하게 설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설치되어 있지 않은 집들이 더 많은 것 같아 물어보니 북측 관계자는 초고층·고층 아파트뿐만 아니라 3~4층의 낮은 살림집 어디에서도 태양빛전지판(태양광패널)을 설치해 전력을 자가 공급하고 있다고 했다.

"당신 집에도 설치했느냐"고 다시 묻자 "우리 집에는 국가에서 전기를 잘 공급해 주기 때문에 설치하지 않았다"는 희한한 답변을 한다. "국가가 전기를 무상으로 준다고 해서 자연에너지를 이용해 스스로 전기를 생산하지 않은 건 애국적이지 못한 것 아니냐"고 하자 머쓱한 듯 지적이 옳다며 태양빛전지판을 설치하겠다고 한다.

거리와 건축물의 가로등에는 영락없이 태양빛전지판이 달려 있고, 새로 지은 건물의 옥상에도 예외없이 태양빛전지판을 설치해 필요한 전력을 자체 생산해 쓰고 있었다.

지난 14일 참관한 만경대구역 류원신발공장. 1988년 11월 세워진 첫 사출 운동화 공장으로 1만 평방미터의 규모이다.

공장 기사장은 지붕마다 설치한 1,200장의 '태양빛전지판'으로 공장에서 사용하는 300kW를 상회하는 월 400kW의 전력을 생산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 류원신발공장에서 운영하는 컴퓨터통합생산체계 화면.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컴퓨터통합생산체계(Computer Integrated Manufacture, CIM)에 대해서는 생산과 관련된 모든 활동들이 컴퓨터에 기초한 계획화(ERP, Enterprise Resource Planning), 관리(MES, Manufacturing Execute System) 및 자동조종체계(ACS, Automatic Control System)로 통합된 체계라고 설명한다.

화면 왼쪽 상단에는 △기업자원계획화 △생산관리체계 △자동조종체계 메뉴가, 오른쪽 상단에는 △일정관리 △공정관리 △품질관리 △추적관리 △동력관리 메뉴가 있다. 동력관리 메뉴가 활성화된 가운데 오른쪽 화면 아래에는 년, 월, 일 단위로 국가전력망을 통해 들어오는 전력량과 공장에서 생산하는 태양빛 발전량이 따로 표기되고, 왼쪽 화면에는 6개로 나뉘어 관리되는 태양빛전지판의 출력과 전류 크기가 실시간으로 표시되고 있다.

손전화(휴대폰) 사용과 관련해서는 400만대를 웃도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미 3~4살 유아때부터 손전화로 만화영화 '소년장수'를 보겠다고 떼를 써서 걱정하는 건 어디나 똑같은 것으로 보인다.

북측 관계자에게 기온을 물어보면 휴대폰을 찾아 곧 몇 도라고 알려주고 무언가 다른 질문이라도 할라치면 '조선백과사전' 앱을 열어 몰래 보고는 돌아서서 척척박사인양 대답을 내놓았다. 양산을 받쳐들고 뜨거운 거리를 걸으면서도 여성들은 휴대폰으로 쉴새없이 통화를 하고 대동강수산물식당에서 날다람쥐처럼 뛰어다니는 세 아이를 쫓아다니면서도 엄마는 휴대폰을 포기하지 않았다.

소학교(7~12살) 학생들까지는 학교에서 엄격하게 통제를 하기도 해서 사주지 않지만 초급중학교(13~15) 학생들부터는 손전화를 들고 다니는 경우가 꽤 많다고 한다.

풍부한 물산과 적극적인 판매, 여유로운 표정

   
▲ 대동강수산물식당 2층 가공품 판매점에 가득한 여러 수산물 가공식품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릉라도를 가로지르는 청류다리 남단 문수물놀이장 인근 대동강수산물식당은 지난달 말 영업을 시작한 이래 하루 1,000여명의 손님이 찾아오는 등 성업중이다.

1층에는 철갑상어와 룡정어(독일산 가죽잉어), 연어, 칠색송어를 비롯한 고급 어족과 조개, 자라 등이 있는 실내못(대형 수족관)이 여러 곳 있고 2, 3층에는 수산물 가공품을 판매하는 매장과 가족식사실, 민족요리 식사실, 초밥식사실 등 여러 형식의 식당이 있다.

2층 수산품 가공품 매장에는 여러 냉동생선과 통조림, 훈제 등 가공식품, 일본산 양념류 등 다양한 제품을 판매하고 있다. 대략 북한 원화 100원에 1 USD로 환산해 결제하고 유로나 위안화도 받는다. 철갑상어는 냉동 kg당 650원, 통조림 305원, 훈제 730원이고 세계 미식가들을 사로 잡았다는 철갑상어 알 캐비어는 50g에 5,000원.

이름이 낯선 룡정어(독일산 가죽잉어)는 냉동 kg당 240원, 통조림은 151원이다. 러시아대게 1마리당 8,000원, 가자미 kg당 157원, 서해 대합조개 kg당 200원, 낙지(오징어) kg당 169원, , 왕새우 kg당 865원, 칠색송어 kg당 324원, 대규모 양식에 성공한 것으로 알려진 메기는 냉동 kg에 54원에 팔리고 있었다.

마요네즈와 BBQ소스, 혼다시. 토마토 케첩 등 일본 글씨가 쓰여있는 양념류들도 한 코너를 차지하고 있었다.

판매도 적극적이다.

개선문 앞 모란봉기념품상점에서는 평양을 찾은 손님들이 우황청심환이나 곰혈(웅담) 등을 많이 찾는다. 그러나 제일 많이 찾는 기념품은 역시 술.

지난 16일 찾은 모란봉기념품상점에서는 손님이 주문한 수량대로 종이 박스에 완충재를 하나씩 끼워 가면서 술을 담고 테이프로 꼼꼼하게 마무리해 주었다. 걱정이 많은 사람들은 병뚜껑과 병사이를 봉인해 달라고 하는데, 미리 준비한 고무재질의 소재로 야무지게 묶어주었다.

달러와 유로, 위안화 그 어떤 화폐를 내놓아도 판매원은 계산기로 환율 계산을 뚝딱 해치워 계산을 도왔다. 손님 한명 한명에게 최선을 다하느라 우왕좌왕하기도 하지만 여기선 손님도 기다릴 줄 안다.

점점 기다리는 손님이 많아지고 포장과 계산이 늦어지면서 정신없는 상황이 되어도 매장 책임자는 단 한명의 손님도 결코 빈손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겠다는 듯 단호하게 종업원들에게 업무를 하나씩 지시해 상황을 수습해 나갔다. 그런데 사실 호텔에서 2~3달러에 파는 평양주 500ml 한병이 여기선 5달러이다. 그런데도 물건이 없어서 못판다.

나중에 북측 관계자에게 그때의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보기에 나쁘지 않았다"고 하자, 그는 "우리 사회주의가 몇 십년되면서 식의주 문제를 비롯해 교육, 의료 등 기본적인 생활을 전적으로 국가가 책임지다보니까 사람들이 안일에 빠지는 경향이 있을 수 있다. 솔직히 일하지 않아도 사회주의에서는 살 수는 있지만 열심히 일하는 기풍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달라진 구호...평양은 미화중

   
▲ 미래과학자거리 '최첨단을 돌파하라' 구호.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북한은 구호의 나라이고 과거 평양에서 가장 많이 접하게 되는 구호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였다. 지금 그 구호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와 김정일동지께서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로 바뀌어 있다.

2011년 12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 이후 4.25문화회관 앞 사거리 등 평양시내 여러 곳에 건립되어 있는 '영생탑'의 기본 골조는 그대로 두고 글씨를 새긴 판을 일일이 교체하고 다시 써서 그렇게 고쳤다고 한다.

그런데 건물 외벽마다 붉은 글씨로 구호를 새기던 때와는 무언가 분위기가 다르다. 새로 지어진 미래과학자거리 고층건물에 부착한 구호는 '과학중시', '인재중시', '과학기술강국화', '최첨단을 돌파하라'는 구호가 전부이고, '과학으로 비약하고 교육으로 미래를 담보하자'는 구호가 거리에서 자주 보였다.

'당중앙위원회 4월전원회의 결정을 철저히 관철하자' 등 선전화를 출판할 정도로 집중하는 구호라고 하더라도 대로변 건물 외벽보다는 거리 구호판을 이용해 이동식으로 활용하는 것으로 보였다.  '사회주의 경제건설에 총력을 집중하여 우리 혁명의 전진을 더욱 가속화하자', '국가경제발전 5개년 전략목표수행을 위한 증산돌격운동을 힘있게 벌리자!'는 등의 구호는 눈에 띄는 숫자도 적었지만, 기관의 성격과 요구에 맞추어서 밖을 향해서가 아니라 내부 관계자들이 잘 볼 수 있도록 한 것 같았다.

대립하고 투쟁하는 구호보다 스스로의 노력으로 미래를 개척하자는 각오와 자신감이 느껴졌다면 제대로 읽은 것일까.

   
▲ 려명거리 전경. [자료사진-통일뉴스]
   
▲ 종합봉사선 무지개호에서 본 주체사상탑. 뒤편 일심, 단결이라는 네온사인은 아파트.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평양단고기집 앞 통일거리 모습.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평양시 광복거리 자전거 대여소에 세워져 있는 '려명'자전거. 시내에 타고 다니는 사람이 제법 눈에 띄었다. [자료사진-통일뉴스]
   
▲ 미래과학자거리 모습.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왼쪽부터 미래과학자거리 선경식당 앞 가로등 태양빛전지판, 만수대창작사 가로등 태양빛전지판, 대동강수산물식당 앞 화단에 설치된 태양빛전지판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태양빛 도로청소기. 전동자전거 앞에 청소 부분품이 달려있으며 뒷좌석에 가림막 형식으로 태양빛전지판이 설치되어있다. 작업속도는 6~7㎞/h이며 연속작업시간은 4시간. 통일거리에서 여러 대 실제 가동되고 있었다. [자료사진-통일뉴스]
   
▲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대동강체육기자재공장 정문 위로 '위대한 김일성동지와 김정일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구호가 있고 건물 3층 외벽에  '자기 땅에 발을 붙이고 눈은 세계를 보라!', 정문 왼쪽엔 '백두의 혁명정신으로 체육강국 건설에서 새로운 전성기를 열어나가자!' 구호가 이채롭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류원신발공장 전시장.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대동강수산물식당에서 판매하는 상품 종류.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나래전자결제카드로 물품 구매는 물론 시내 택시 요금 결제도 가능하다고 한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류원신발공장 외벽의 '2018년 사회주의 경쟁도표'. 사출, 제화, 재단 등 직장별로 정치사업과 생산 및 생활문화, 전투동원준비 등을 구분해 월별 평가를 막대 도표로 그려넣었다. 옆에는 전월 기업 재정을 종업원에게 공시하는 '7월 기업소 재정공시'판. 총수입을 현물지표와 금액으로 각각 표시하고 원가와 국가기업이득금, 지방유지금, 기업소기금, 상금 및 장려금, 과학기술 도입 상금 등 항목별로 꼼꼼히 기재하도록 되어 있었다. 직장별로 현물지표 계획 수행률과 노동용량 계획 수행률을 따져 노동보수와 1인당 노동보수액까지 기입해 공개했다. 제화 직장이 35,139원으로 1위, 준비 직장이 14553원으로 7개 직장 중 최하위였다. 그 옆은 설비점검 검열 평가판.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류원신발공장 옥상의 태양빛전지판.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평양교원대학 옥상의 태양빛전지판.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대동강수산물식당 2층 가공식품 판매소. 마요네즈와 BBQ소스, 혼다시. 토마토 케첩 등 일본 글씨가 쓰여있는 양념류들도 한 코너를 차지하고 있다[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문수강안거리 능라동 아파트 채색 미화 작업이 되어 있고 층마다, 가정마다 태양빛전지가 눈에 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대동강수산물식당 1층 수족관. 2미터 넘는 철갑상어가 헤엄치는 모습이 마냥 신기한 아이들. 엄마는 날다람쥐처럼 돌아다니는 아이들 챙기랴 손전화로 통화하랴 정신이 없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능라곱등어관에서 공연을 즐기는 평양시민들의 모습.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문수물놀이장 내 미용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문수물놀이장 내 이발소.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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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화해시대, 대북 벤처사업가 구속… 왜?

[기고] “국정원이 北공학자 ‘탈북 공작’ 종용”… 거부하자 간첩 누명 씌우려
 
강진욱  | 등록:2018-08-24 17:00:55 | 최종:2018-08-24 17:10:35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북한 IT 기술을 활용해 세계 최고 수준의 안면 인식 프로그램을 개발한 벤처기업 OOInovation 김 호(49) 대표가 간첩 혐의로 수감됐다. 국가정보원이 김 씨를 시켜 김 씨가 접촉한 북한 김일성대 유명 공학자 박두호 씨를 빼오려다 김 씨가 거부하자, 김 씨를 박두호의 지령을 받는 간첩으로 몬 것이 분명하다. 혐의는 무슨 정보를 북측에 전달했다거나 북한 기술진 인건비 명목으로 달러를 건넸다는 정도이다. 사람을 부렸으면 마땅히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또 한낱 중소 벤처기업가가 어디가서 무슨 비밀 정보를 빼내 북측에 전달했겠나? 주고받은 것으로 치면 우리가 감히 넘보기 힘든 북한의 소프트웨어 기술을 빼 온 공로가 100배 1000배 더 크지 않나? - <1983 버마> 저자 강진욱 -

북한의 IT 수재들과 세계 최고 수준의 안면인식 기술

OOInovation과 북측 IT 기술진이 함께 만든 안면인식기술은 미국 실리콘밸리에 갖다 내 놔도 전혀 꿀리지 않을 정도라 한다. 특허 출원도 여러 건 했다. 여러 언론 매체에도 그의 회사가 소개됐다. OOInovation의 남북 합작사업이 얼마나 큰 잠재력을 갖고 있는지부터 보자.

2014년 2월 <파이낸셜뉴스>는 OOInovation이 얼굴인식 기술을 활용한 자동문을 개발했다고 보도했다. 언론 보도는 모두 OOInovation이 제공한 보도자료지만, 회사 측은 확인된 사실에 기초해 자료를 만들었다 한다.

『카메라 한 대만 있으면 얼굴을 인식해 문이 열린다. 얼굴이 등록되지 않으면 문이 열리지 않는다. 이 자동문은 얼굴인식 솔루션 전문개발업체 OOInovation이 개발했다. 얼굴인식 기술을 자동문에 도입한 것. ... 기술의 정확도와 우수성은 KISA(한국인터넷진흥원)로부터 평가인증을 받았다. ... 이 시스템을 개발한 김 호 대표는 “기존 제품은 지문인식단말기처럼 가까이 다가서서 얼굴을 대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이에 비해 우리 제품은 인식의 정확도와 속도의 우수성으로 자연스럽게 걸어와도 문이 열리는 장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2017년 3월 21일 자 <온라인 중앙일보> 기사.

『OOInovation이 자사의 얼굴인식 기술이 국내를 뛰어 넘어 해외에서 세계 유수의 얼굴인식 기술사들과의 경쟁에서 수주를 받고 있다고 밝혔다. 지난해 해외 유수의 공항 보안관제용 얼굴인식에 높은 기술력을 인정받아 채택된데 이어, 올해에는 더욱 큰 규모의 신 공항건설에 적용되는 신규계약을 연이어 맺은 것이다.

특히, 이번 신규 계약에서는 까다로운 얼굴인식 요구조건 하에서 일본의 NEC, 독일의 cognitec 등 세계 최고의 얼굴인식 업체들과의 공개 입찰 경쟁에서 수주가 확정된 것 ... 현재 입찰 진행 중인 아랍에미레이트 아부다비 신공항 등의 수주에도 좋은 경쟁요소가 될 전망이다.

OOInovation의 ‘인공지능 이미지인식 기술’은 2년여의 평가기간을 통해 2017년 3월 최종 발표된, 미국 NIST-National Institude of Standards and Technology, US Department of commerce- (미국 상무성, 미국국립표준기술연구소) 산하에서 세계 최초로 실시한 ‘Face in video Evaluation’(영상에서의 실시간 얼굴인식 평가)에서 세계 유수의 업체들과 더불어 상위권의 평가테스트를 통과하였다. 미국정부 인증을 통과한 것은 국내 최초로서… 홍콩 온페이스와 공동으로 안면인식단말기를 개발해 미국 ADT, 일본 SECOM, YKK 등으로 수출을 준비 중에 있으며, 특히 2020년 동경올림픽에도 관련 위원회를 통해서 제안된 상태이다.』

OOInovation의 기술적 성과는 계속 이어졌고 <전자신문>과 <머니투데이> 등 여러 매체들이 그 성과를 보도했다.
 
『국내의 한 중소기업이 얼굴인식을 주제로 한 세계무대에서 상위권 성적을 거둬 주목받고 있다. 얼굴인식 인증 전문기업 OOInovation은 최근 NIST(미국표준기술연구소, National Institute of Standards and Technology)가 DNI(미국국가정보국, Ditector of National Intelligence) 산하 IARPA(정보 고등 연구 계획청, Intelligence Advanced Research Projects Activity)과 공동으로 개최한 ‘제1회 얼굴인식상챌린지’(FRPC: Face Recognition Prize Challenge)에서 16개국 중 6위로 상위권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2017년 6월부터 9월까지 열린 얼굴인식상챌린지는 ...
OOInovation은 지난 10년 동안 얼굴인식개발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진행해 왔으며, 2015년부터는 딥러닝 기술을 이용해 얼굴인식기술을 한 차원 도약시키기 위한 연구에도 힘써 왔다. 2012년에는 한국인터넷진흥원 및 KISA, 2015년 미국 상무성 NIST FIVE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바 있다.』

이 정도 기술력이면 세계적인 상품 가치는 충분하지 않은가? 십여 년간 고생고생해서 이 정도로 기업을 키웠다면, 우수 중소기업인상과 벤처기업가상을 먼저 줘야 마땅하지 않을까? 물론 제 아무리 탁월한 기업가라도 ‘개똥같은’ 국가보안법에 걸리지 말란 법은 없다. 학생운동권 출신인 그는 대북 접촉의 위험성을 늘 인지했고 조심했다. 그리고 늘 국정원 요원들이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고, 그들의 요청에 의해 여러 차례 만나기도 했다.

▲‘김호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조작 및 증거 날조 허위영장 청구 사건’ 변호인단의 장경욱 변호사가 8월 16일 서울지방경찰청 보안수사3대 2티 수사관들에 대한 고소 취지를 설명하고 있다. (뉴시스 배훈식 기자)

남북화해에 토악질하는 적대와 적의의 사도들

그런 그가 왜 체포됐을까? 이 나라 대통령이 북한 최고지도자를 만나 악수하고 포옹하고 희희락락 이야기꽃을 피우는 때에… 그런데 어떤 자들에게는 이런 때가 바로 추악한 대북공작을 벌일 절호의 기회다. 대결과 질시, 반목과 적대를 생리로 사는 자들이 그들이다. 이들은 남북 최고지도자가 부둥켜안고 파안대소하는 것을 보면 토악질을 하고, 남북화해와 단합, 평화니 통일이니 하는 소리를 들으면 뒤돌아 가래침을 뱉는다. 그래서 이들은 늘 간첩(선)사건을 조작하거나 북한의 고위급 인사를 탈북시키는 등의 ‘북퐁 공작’을 벌여서라도 화해국면이 도래하는 것을 막으려 한다.

가깝게는, 박근혜 정권 시절인 2016년 4월 중국 내 북한 식당 여종업원들 기획납치, 같은 해 8월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공사 태영호 가족 망명 등이 대표적인 북풍공작 사례들이다. 그렇게 저들은 북한에 대한 적의를 북돋우고 남북간 화해를 종북좌파들의 얼간이놀음 정도로 폄훼하면서 여론을 조작한다. 새 정부가 들어섰어도 위와 같은 일을 하는 조직은 여전히 건재하며, 이들은 어떻게든 남북화해의 기운을 파탄내기 위해 다양한 공작들을 준비했을 것이다 그 중 하나가 바로 OOInovation 사건이다.

저들이 어떻게 사건을 조작했는지는 김 호 대표가 변호사를 통해 밝힌 ‘간첩조작 음모 및 영장 위조에 대한 피의자 김호의 입장’(8월 15일 작성)에 잘 나타나 있다. 그의 ‘입장문’에 근거해 이번 사건을 재구성해 보자.

사업 파트너 김일성대 공학박사가 ‘지령자’?

김 대표는 2002년부터 통일부에 북한접촉 신고를 하고 북한 측과의 경제협력 사업을 공개적으로 진행해 왔다. 영장에 제시된 반국가단체 구성원 박두호 및 중국 중개인 양성일은 김 대표가 2007년부터 통일부에 정식으로 접촉신고를 한 접촉대상으로, 이들과 공개적으로 만나 북한 IT 기술을 활용한 사업을 펼쳐 왔다.

국정원은 북한의 프로그램 개발책임자인 박두호가 ‘반국가단체 구성원’(북한 국적자)로서, 김 대표에게 ‘지령’을 내리는 공작원이라고 규정했고, 법원으로부터 발부받은 체포영장에도 그렇게 기록돼 있다 한다.

도대체 박두호는 어떤 인물일까? 그는 북한을 대표하는 유능한 이학박사로 현재 김일성대학 정보기술연구소 소장이다. 북한의 여러 매체들을 통해 소개됐으며, 2013년 구글(google)의 에릭 슈미츠 회장이 사업차 평양을 방문했을 때 그를 만난 북한의 IT 기술과 사업 문제를 토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또한 2017년 2월 착공한 김일성종합대 첨단기술개발원 건설과 이후의 사업 추진의 책임을 맡고 있으며, 김 호 대표의 제안에 따라서 이 개발원 건물 8-9층에, ‘코리아인공지능센터’를 설립해 세계적인 인공지능 센터로 발전시킬 계획이었다. 이렇듯 박두호 소장과 김 호 대표는 장차 남북의 IT 기술과 인력이 결합해 세계 시장을 석권할 꿈에 부풀어 있었다.

김 대표는 이와 관련된 사업계획안을 올 7월 IBK기업은행에 공식 접수했고, 이를 바탕으로 구체적인 협의를 위해서 9월 베이징에서 박 소장을 만날 예정이었다 한다. 국정원과 경찰청 보안수사대는 이처럼 두 사람의 인연이 곧 찬란한 결실을 맺을 찰나에 김 대표를 잡아간 것이다.

북 IT 인재 탈북 공작·친북단체 와해 프락치 역할 종용

왜 그랬을까? 우선 국가정보원이라는 조직은 남북 간 IT 협력 사업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집단이 아니다. 저들은 어떻게든 북한에 악살을 먹이고 궁지에 몰아 궁극적으로는 궤멸시킬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세력이다. 그것을 ‘국가와 민족을 위한 애국’으로 여긴다. 국정원 내 그런 조직이 있다.

국정원은 김 대표의 IT 사업을 북한 내파 공작에 활용하려 했다. 앞에서 밝혔듯이 국정원 요원들은 김 대표에게 수시로 만남을 청했고 사업 초기에는 만남이 잦았다 한다. 처음에는 그저 김 대표가 만나는 이들이 누구인지, 이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려 달라 했을 것이다. 그러다 김 대표가 만나는 이가 북한을 대표하는 공학자라는 사실을 알고는 그를 탈북시키는 공작을 꾸몄을 것이다.

“2014년까지 저를 감시해온 이 실장, 권 이사, 최 이사, 난 그들의 얼굴을 너무나 선명하게 기억합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있었던 자신들과의 관계를 비밀로 할 것을 협박하며 누설 시  민·형사상 책임을 진다는 서약서 체결을 2014년 여름에 강요 체결하였습니다. 이 실장은 심지어 박두호 탈북공작을 저에게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국정원은 김 대표를 북한 김일성대학의 유명 공학자 탈북을 위한 공작원으로 활용하려 했다는 말이다. 김 대표는 물론 이를 거절했다. 그는 “그럴 능력도 없는 저는 일만 하게 해 달라고 은자의 심정으로 피해갔다”고 밝혔다.

국정원은 또 범민련, 통진당을 간첩이 암약하는 조직으로 규정하고 김 대표에게 옛 인맥에 대한 접근을 요구했다 한다. “죽으면 죽었지 그럴 수 없었던 저는 더욱 그들과 멀리하고 살아왔습니다. 당시 전후로 해서 이석기 사건과 유우성사건 등이 발생한 것으로 봐서 이들은 이러한 조작사건에도 깊숙이 연루돼 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국정원은 김 호 대표를 북한 고위 인사 탈북 공작원으로, 국내 친북단체 및 진보정당 와해 공작의 프락치로 활용하려 했고, 김 대표가 이를 거절하자 그를 국가보안법을 어긴 간첩행위자로 몰았음을 알 수 있다.

문재인 정부 사법부엔 여전히 극우반북 세력 ‘똬리’ 

더 놀라운 것은 국정원 및 국정원과 한통속인 경찰청 보안수사대의 행태가 아니라 - 이들은 늘 이랬으니까 - 영장실질심사를 한 판사의 행동이다. 그 역시 남북화해 시대와 전혀 다른 딴 세상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김 대표는 그 판사의 태도에 절망감을 느꼈다고 술회했다. 

“영장실질 심사를 진행하던 판사는 또한 영장실질 심사 심문에서 북한을 아예 적으로 규정하고 심문하였습니다. 2018년 대한민국 법원에서 ‘북한을 이롭게’가 아니라 적을 이롭게 한다고 표현하였습니다. “적”이 개발한 “적의 기술”, “적에게 송금” 등을 운운하며 국적이 어디냐고 물어볼 정도였습니다. 당시 판사의 입에서 적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저는 정말 온몸이 얼어붙는 줄 알았습니다.”

이 판사는 김 대표의 20년 전 학생운동 경력을 들춰 “피의자는 과거 북한의 대남적화혁명노선 NLPDR을 추종 이적단체 한총련 대의원 겸 서총련 투쟁국장으로서… 범죄 경력…” 운운하며 그가 도주할 우려가 있으니 구속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한다. 20여 년 전 학생운동을 하다 처벌된 경력이 ‘북한의 지령’을 받을만한 사람으로 판단할 근거가 될 수 있나?

이 판사 역시 반북적대 이데올로기에 빙의됐음이 분명하다. 마치 1970.80년대 군사독재정권이 써 주는 대로 판결하는 ‘개판사’들을 보는 듯하다. 그만의 잘못은 아닌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정권의 개 노릇하며 승승장구, 대법원장.법무장관.검찰총장.대통령 비서실장, 국회의원을 해 먹고 앉아 있는 자들이 어디 하나 둘인가? ‘촛불혁명정부’를 자칭하는 문재인 정부가 제 힘을 못 쓰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경찰과 검찰, 정보당국과 사법부까지 권력 내부에는 여전히 정신병자급 극우반북 세력이 똬리를 틀고 앉아 있기 때문이다.

“(국정원의) 이 실장, 권 이사의 이메일과 주고받은 연락처 등이 공개되고 조사하면 저와 같은 공개 증언이 많이 나올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듯이 북한 공민 박두호에 대한 유인 탈북공작을 음모했던 세력과 지금 저를 박두호의 지령을 받는 간첩으로 조작하기 위해 영장을 조작하는 세력, 이들은 간첩을 잡는 조직이 아니라 간첩을 조작하는 세력입니다. 선량하고 무고한 남북의 민간인을 간첩과 공작원으로 조작하는 아주 흉악무도한 세력입니다.”

남북 IT 협업을 바라지 않는 미국

김 호 대표 구속의 신호탄을 쏜 것은 미국이었다. 미국 정부가 운영하는 라디오방송인 NPR이 5월 17일 ‘확산방지 연구 제임스마틴센터’ 보고서를 인용해 북한이 안면인식기술을 팔고 있다고 보도한 것이 그것이다. 북한이 유령 기업을 통해 다수 국가들의 사법당국을 위한 안면인식 소프트웨어를 생산하고 개인이나 기업을 위해 홈페이지를 개발했다는 내용이었다. NPR은 퓨쳐테크그룹이라는 회사가 “안면인식 소프트웨어를 터키와 다른 나라의 사법당국에 판매했다”고 밝혔다.

이 나라에서 평화통일을 갈구하는 이들이 겪는 온갖 크고 작은 불행 뒤에는 반드시 미국이 있다. 이는 철칙이고 진리다! 남북의 화해와 단합, 평화통일을 바라지 않는 국정원 등 이 나라 국수주의 조직의 힘과 이념의 원천은 바로 미 군산복합체 자본가 세력이다. 전쟁과 테러, 전복과 살육을 부추기며 자본을 불리는 자들이 세계 최고의 화약고이며 최대의 무기시장인 한반도에 화해와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는 것을 바랄 리 없다.

철통 같은 봉쇄와 압박 속에서도 미국의 심장부를 겨누는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만들어 낸 북한과, 세계 어떤 나라보다 빨리 경제성장을 이룩한 남한이 힘을 합치는 날이 오기를 바라지 않는 것이다.

또 OOInovation의 노력으로 김일성종합대학 첨단기술개발원이 세계 IT 시장에 발을 들여 놓는 꼴을 보고 싶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미국은 남북관계가 급진전돼 유엔을 앞세워 벌이는 대북 제재의 틀이 서서히 허물어지는 상황에서 뭔가 수를 내야 했을 것이다. 제재를 무시하고 얼마간의 달러를 북한에 보낸 OOInovation은 대북 제재의 마법을 되살릴 제물로 쓰기에 충분했다.

한-미 정보당국은 이미 OOInovation이 중국에서 진행하는 대북 사업에 대해서도 소상히 파악하고 그 정보를 공유하고 있었으며, 언제고 필요할 때 이 회사를 걸고 넘어갈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김 대표가 북한의 김일성대 정보기술연구소 박두호 소장의 탈북 공작 을 거부한 이상, 그에게서 본전을 뽑을 수 있는 방법은 간첩 누명을 씌우는 것뿐이다. 
서총련 투쟁국장 출신인 김 호 대표에게 ‘간첩(질)’ 혐의를 씌울 수 있다면, 문재인 정부를 80년대 운동권 정권이라고 매도하기도 수월해진다. 그가 청와대에 가 있는 운동권 선배와 한 두 번 접촉했다는 사실만 슬쩍슬쩍 흘려도, 하이에나같은 무리들이 ‘북한의 지령을 받고 청와대 동향을 파악했다’며 악을 쓸 테니.

그런데 그리 되기가 쉽지는 않아 보인다. 누가 봐도 조작 사건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사회 각계에서 석방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비등하고 있고, 급기야 4대 종단 종교인 모임인 종교인협의회 성직자들까지 나서 김 대표 구속 철회와 국가보안법 철폐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다. 며칠 뒤에는 각계 주요 인사들을 망라한 대책위원회가 발족할 예정이다.  

▲ 실천불교전국승가회, 원불교사회개벽교무단, 전국목회자정의평화협의회,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등 4대 종단 성직자들은 8월 23일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김 대표의 석방을 촉구했다. (미디어오늘 손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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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과 맞바꾼 이윤, 사고로 얼룩진 현장

포스코 무노조 경영의 흑역사(4) - 또 하나의 산재왕국

‘무노조 경영’ 하면 흔히 삼성재벌을 떠올린다. 하지만 무노조 경영은 잘 드러나지 않을 뿐 우리 사회 곳곳에서 횡행하고 있다. 대표적인 기업이 포스코다. 포스코는 연 매출액이 60조원에 이르는 국내 6대 기업이다. 지난달 27일 포스코 이사회는 신임 회장으로 최정우 대표이사를 선임했다. 한편으론 “사외이사들의 반란”이라 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에선 “포스코 비리의 공범이자 정준양-권오준 전 회장 시절 적폐의 핵심”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세계 철강 수요 축소와 미국 등 보호무역주의 확산, 중국의 추격 속에서 한국 철강산업 역시 기로에 섰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특히 제조업의 위기를 노동자와 함께하고 국민과 소통하면서 헤쳐 나가야 하는 숙제를 최정우 회장 체제가 어찌 풀어갈지 관심사다.

금속노조는 최 회장 취임을 전후해 포스코 무노조 경영에 대해 집중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그 자료를 바탕으로 5차례에 걸쳐 포스코 무노조 경영의 흑역사를 조명한다.

1.포스코 노동자들이 바라본 포스코
2.포스코의 노동탄압의 역사
3.포스코, 감시받지 않은 경영-뿌리깊은 권력유착
4.포스코, 또 하나의 산재왕국
5.포스코 최정우 신임회장에게 바란다

 

▲ 사진 : 포항MBC뉴스 캡처

안전 실종, 산재 왕국 포스코

비리와 부정이 끊이지 않는 부실경영에 이어, 포스코 무노조 경영이 빚은 또 다른 참사는 바로 노동자의 생명을 빼앗는 중대재해의 연속이다. 뜨거운 쇳물과 거대한 철재가 가득한 제철소는 그 자체로 고위험 시설물이다. 안 그래도 산업안전의 필요성이 높은 공장이지만 노동력을 전근대적인 방식으로 착취하는 포스코의 기업문화로 인해 각종 사고는 은폐되기 일수다. 사고가 드러나도 돈으로 해결하면 된다는 포스코의 태도는 인명을 우습게 여기는 포스코의 단면을 여실히 드러낸다. 그래서 현장의 노동자들은 자조적으로 포스코 용광로의 재료 중 하나가 사람 목숨이라고 한탄한다.

포스코 홍보물을 보면 스마트팩토리 최초 구현, 완전자동화, 연매출 수조 원에 이르는 포스코ICT 등 온갖 첨단기술 이야기가 넘쳐난다. 이것만 보면 포스코는 꿈의 공장을 실현했다. 그러나 현실은 노동자들,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계속 죽어 나가는 절망의 공장이다. 작업장의 특성상 한번 사고가 나면 말로 옮기기 힘들 지경의 끔찍한 일들이 벌어진다.

이런 중대재해가 발생해도 포스코는 생산 차질, 주가 하락, 이미지 손상만을 걱정한다. 생명이 아닌 소모품이기에 사고를 예방하는 비용을 아껴 사고를 덮는데 들어가는 비용을 충당한다. 포항이건, 광양이건 재해가 발생하면 포스코는 안전조치를 강화했다는 홍보성 기사로 매체를 도배해 사고 기사를 밀어낸다.

무노조 경영은 안전에 둔감한 괴물 포스코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전시행사에 낭비하지 말고 산안법을 준수하고 근본적인 현장 안전대책을 수립하는 포스코가 되어야 한다. 노동조합을 인정하고 노동조합과 함께 정기 현장 안전점검 및 현장 안전체계를 만들자는 외침을 이제는 외면하지 말고 깨끗하고 안전한 포스코로 다시 태어나야 할 때다.

▲ 상경투쟁 중에 포항 산재문제 규탄 인증샷에 동참하고 있는 양산 이원정공 조합원들[사진 : 금속노조 노동안전보건실 제공]

산재사고·죽음의 역사

포항제철소 사고로 죽거나 다친 사람은 대부분 외주 하청업체 노동자다. 때문에 ‘위험의 외주화’라는 사회적 비판이 거세게 일어났다. 2013년 3월 포항제철소 파이넥스 1공장 내 용융로(용해로)에서 폭발사고와 함께 불이 나 1명이 다쳤다. 12월에는 파이넥스 3공장 주변 플랜트 산소설비 현장에서 외주 하청업체 노동자 2명이 사망했으나, 포스코는 3월 사고와 마찬가지로 ‘원인을 알 수 없다’며 사고 책임을 회피하였다. 사실은 플랜트 산소설비(66m) 내 60m가량 높이에 설치된 콜드박스(공기 중에 있는 산소와 질소, 아르곤 등을 분리해 인근 파이넥스 공장 등으로 공급하는 장치)를 점검하다 현장에서 노동자 스스로 의식할 새도 없이 질식사한 것이다. 2014년 5월에는 2고로(용광로) 안에서 가스 밸브를 교체하는 작업 중 남아있던 가스가 압력으로 인해 폭발하고 밸브가 튕겨 나가면서 일어난 사고로 하청 외주업체 비정규직 노동자 5명이 중상을 입었다.

2014년 7월 광양제철소 3연주공장(액체 상태인 쇳물에 압력을 가해 강판으로 응고시키는 공장)에서 폭발사고로 작업하던 포스코 직원 2명과 하청노동자 1명이 잇달아 사망하였다. 업무상 과실치사와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혐의로 포스코(대표이사 권오준)와 포스코 간부 2명이 기소됐으나 법원은 2016년 무죄로 판결하였다. 위험의 외주화는 늘어나도 중대재해·산재사망사고의 책임을 져야 할 대기업은 법망을 피해가는 현실이다.

2016년 포항제철소에서 1열연공장에서 압연롤 볼트 융단작업 중 유압유가 가열되면서 폭발사고가 발생해 작업 중이던 김모씨가 전신에 2도 화상을 입고 서울 성심병원으로 이송되었다. 하청업체 노동자 권모씨도 1도 화상을 입고 포항기독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경북소방본부 관계자는 "포항제철소에서 전신화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하여 피해자를 서울로 후송했으나 포스코가 협조하지 않아 정확한 사고 개요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오전 10시 중대재해 발생했음에도 오후 3시가 되도록 "사고발생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며, 아직 신원이 파악되지 않아 확인해 줄 수 없다"며 포스코는 사고를 숨기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였다.

2016년 5월 광양제철소 외주파트너사 노동자가 코일카(코일을 이동하는 장치로 5~10톤 코일의 하중을 견디는 장비)에 들어가는 부품을 교체하던 중 뒤집힌 코일카에 깔리는 중대재해가 발생했다. 인근 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았지만 결국 사망하였다.

2016년 12월 광양제철소에서 터널 구조의 내화벽돌(생석회 제조설비)을 교체하는 과정에서 상단부가 붕괴하여 작업하던 노동자 2명이 현장에서 즉사하였다.

2017년 최악의 살인기업 선정식에서 2016년 한 해 동안 산재사망이 가장 많이 발생한 기업으로 포스코(7명 사망), 포스코건설(5명 사망)이 현대중공업과 함께 1위에 선정되었다. 매해 최악의 살인기업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형국이다. "노동자의 산재사망은 기업에 의한 살인"이며 "반복적인 노동자 죽음의 행렬을 멈추기 위한 기업살인법(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이 시급하나 포스코도 정부도 방관하고 있었다.

▲ 포항 산재규탄 인증샷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금속노조[사진제공 : 금속노조 노동안전보건실]

2018년 1월 포항제철소 냉각탑 충전재 교체작업을 하던 중 포스코의 안전조치 소홀로 인한 질소누출사고 발생하였다. 비정규직노동자 4명이 보호장구를 착용했음에도 한꺼번에 사망했다. 사망자들은 한 달에 150∼200시간 근무한 적도 있을 만큼 장시간 저임금 노동에 시달렸다. 3월 중순 광양제철소 원료부두 내에서 일하던 협력업체 노동자가 흙더미에 맞아 어깨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4월 광양제철소 하청업체 공장동 사일로 작업현장에서 일하던 노동자가 작업 도중 발생한 사고로 손가락 4개를 잃었다. 6월 포스코 광양제철소 2제강공장 철강반제품 정정라인 현장에서 작업중이던 비정규직 노동자가 가동 철강반제품 정정라인 3톤짜리 크레인 설비에 끼어 사망하였다.

2018년 1월 질소누출 산재사망 사고 후 특별근로감독 실시 결과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사법처리 대상 414건(하청 13개소 38건), 과태료 146건 5억2935만 원(하청 36개소, 87건, 1억4790만 원), 작업 중지 10곳, 사용중지 25대, 시정지시 725건’이 확인되었다. 이는 포스코가 말로만 안전제일을 외치고, 보여주기식 안전행사만 개최하며 정작 노동자들의 현장 안전요구와 시스템 개선 요구를 수용하지 않고 배제한 결과라는 것을 말해준다.

2018년 1월 인천 송도 주상복합 더샵 센트럴시티 공사현장에서 노동자 1명이 추락 사망하였다. 2018년 3월 포스코건설 해운대 LCT A동(최고 85층) 공사현장 55층에서 노동자 3명이 작업 중이던 공사장 구조물(안전작업발판)이 200m 아래 지상으로 추락해 4명이 즉사하고, 다른 4명이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실려갔다. 포스코건설 현장소장은 담당공무원에게 지속적으로 접대와 향응을 제공한 것으로 밝혀졌다. 같은 달에는 인천 송도 포스코 센토피아 현장 펌프카 타설 중 아웃트리거 지반 침하로 전도사고가 발생해 타설 작업 중이던 건설노동자가 사망했다. 또다시 포스코건설이 시공 중인 부산 화명동 산성터널 현장에서 콘크리트 구조물인 슬라브가 일부 파손되면서 신호수 역할을 하던 노동자를 가격해 사망하였다. 5월에는 서산 포스코건설 현장에서 일하던 노동자가 사망했다. 5개월 동안 중대재해로 하청노동자 12명이 목숨을 잃거나 다친 것이다.

포스코건설은 민주노총 등 노동계에서 선정하는 최악의 산재기업에 매년 이름을 올리고 있다. 노동부 산재보험 통계 및 중대재해 보고 자료 등에 따르면, 포스코건설 현장에선 2005년부터 2014년까지 10년 동안 모두 59명의 노동자가 사망하였다.

김장호 기자  jangkim212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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