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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전선언·제재해제!” 함성, 미대사관을 흔들다


‘판문점선언 실천 8.15자주통일대행진’

서울시청에서 광화문 미국대사관까지 진행하는 ‘판문점선언 실천 8‧15자주통일대행진’이 11일 8천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종전선언, 대북제재 해제’의 함성을 울리며 진행되었다.

폭염을 뚫고 전개된 이날 행진은 노동자 통일선봉대와 학생 통일선봉대를 비롯 4.27판문점선언 이행에 뜻을 같이하는 각계 시민사회가 함께했다.

박석운 8·15추진위원회 상임대표는 대회사에서 “한반도 평화와 번영을 약속한 판문점선언 이행의 출발은 종전선언부터다”면서 “오늘의 자주통일대행진은 전쟁국가 미국에 저항하고 민족의 자주권을 쟁취하는 투쟁이다”고 강조했다.

9월 초 평양에서 조선사회민주당과 만날 예정인 김창한 민중당 상임대표는 “여름이 아무리 뜨거워도 오는 가을을 막을 수 없듯 평화와 번영으로 가는 4.27판문점 시계는 한 순간도 멈출 수 없고, 단 1초도 거꾸로 갈 수 없다”며, 판문점선언을 재확인한 북미정상회담을 역행하는 트럼프 행정부 행태를 규탄했다.

이날 대행진에는 재일동포들도 함께했다. 김승민 재일한국청년동맹(한청) 위원장은 “미국이 타국을 위해 스스로 선행을 쌓은 적은 없다. 미 대사관으로 향하는 오늘의 행진이 미국에 공동성명 이행을 강제하는 힘이 된다”며, 판문점선언 이행에 한청이 함께하겠다고 다짐했다. 함께 무대에 오른 니시야마 나오히로 일한평화연대 사무국차장은 “한국의 노동자, 민주적인 사람들의 힘처럼 우리들은 일본에서 아베정권을 무너뜨리고 동아시아의 평화의 길을 여러분과 함께 쌓아나가겠다”며 우리말로 “투쟁”을 외쳤다.

박행덕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 최진미 전국여성연대 대표, 최영찬 빈민해방실천연대 공동대표가 결의문을 낭독했다. “평화의 대세는 확정적이나 판문점선언, 북미정상선언 이행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서, “민족자주의 기치 아래 민족 구성원 모두가 땀과 노력을 바치자”고 호소했다.

사전 행사를 마치고 미국 대사관까지 행진한 참가자들은 ‘종속적 한미동맹’과 ‘대북제재’가 적힌 현수막을 뛰어넘는 퍼포먼스도 진행했다. 길게 이어진 행렬은 미 대사관까지 닿았다.

8.15자주통일대행진 결의문

자주와 평화의 시대, 예속의 적폐를 청산하자!

한반도에 깊이 뿌리내린 미국의 패권정책은 평화와 자주통일을 향한 우리 민족의 투쟁에 의해 결정적으로 무너지고 있다.

이제 예속과 분단의 낡은 틀을 모두 청산하고, 평화와 통일의 새 시대를 맞이하자.

남과 북, 북과 미국이 새로운 관계를 선언한 조건에 주한미군은 누구를 위해 필요한가.

전쟁의 군대 주한미군을 이대로 두고 평화의 새 시대를 열 수 없다.

70년 낡아빠진 종속적, 반민족적 한미동맹을 이대로 두고서는 주권도 번영도 통일도 이룰 수 없다.

판문점 선언 정신에 따라, 민족자주의 기치에 따라 평화의 새 시대를 우리 힘으로 열어젖히자!

평화협정 체결하라! 주한미군 떠나라! 종속적 한미동맹 폐기하라!

분단 적폐 청산하자!

촛불항쟁, 그리고 판문점선언과 북미정상선언으로 분단적폐 청산의 결정적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

일시적 우여곡절 속에서도 남북관계는 우리의 상상을 넘어 빛의 속도로 발전할 것이며, 4.27통일시대는 곧 현실이 될 것이다.

남북관계의 전면적 발전과 자주통일이 실현되는 시대에, 민족을 적으로 규정하는 낡은 법과 제도부터 하루빨리 청산해야 한다.

분단에 기생해 민주주의를 억압해 온 국가보안법을 비롯하여, 상호 불신과 대결을 조장하는 낡은 법과 제도를 하루빨리 폐지해야 한다.

또한 분단 적폐세력에 핍박받은 모든 양심수를 즉각 석방해야 한다.

분단적폐 청산하여 4.27통일시대를 활짝 열어나가자.

분단적폐 청산하자! 국가보안법 폐지하라! 양심수를 석방하라!

6.12 북미정상선언 이행 않는 미국을 규탄한다.

4.27 판문점선언 이행 가로막는 미국을 규탄한다.

남북정상은 역사적인 4.27 판문점선언을 통해 ‘전면적인 남북관계 발전’과 ‘종전선언,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노력’을 7천만 겨레 앞에 엄숙히 선언하였다.

북미정상은 6.12북미정상회담을 통해 적대관계를 끝내고 평화와 신뢰의 관계로 전환하기로 전 세계 앞에 약속하였다.

그런데 불과 100일이 지난 지금, 미국은 대북제재 해제, 종전선언 등 합의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있다.

나아가 제재니 압박이니 하면서 남북관계 발전을 위한 판문점 선언 이행까지 난폭하게 가로막고 있다

평화의 대세는 확정적이나 판문점 선언, 북미정상선언 이행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민족자주의 기치아래 민족 구성원 모두가 땀과 노력을 바치자.

판문점 선언을 따라 거족적인 자주통일대행진을 만들어 가자.

판문점선언 이행하자! 대북제재 해제하라! 종전을 선언하라!

 

강호석 기자  sonkang11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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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만 함성 속 열린 남북노동자축구대회, “이것은 단순히 축구가 아니다, 통일이고 평화다”

11일 오후,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남북노동자통일축구대회 개최

이소희 기자 lsh04@vop.co.kr
발행 2018-08-11 19:48:10
수정 2018-08-11 19:5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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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남북노동자 통일축구대회에서 한반도 단일기가 경기장 중앙에 게양되고 있다.
11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남북노동자 통일축구대회에서 한반도 단일기가 경기장 중앙에 게양되고 있다.ⓒ김슬찬 인턴기자
 
11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 월드컵 경기장에서 ‘판문점 선언 이행을 위한 남북노동자 통일 축구대회’가 열렸다. 35도에 달하는 폭염 속에서도 상암월드컵경기장 좌석을 채운 노동자, 시민 3만여명은 남북노동자 축구팀을 응원하며 민족이 평화, 번영의 길로 나아가길 바라는 마음을 한껏 표현했다.

이번 남북노동자통일축구대회는 4.27판문점선언 이후 이루어지는 첫 민간교류이다. 오랜만에 남북 민간이 만나 서로 교류하는 만큼 주최 측이나 참여하는 시민들이나 열기가 더없이 뜨거웠다. 경기장 밖에는 지방에서 올라온 노동자, 시민들의 버스들이 북새통을 이뤘고, 착석한 시민들은 ‘우리는 하나다’가 쓰인 하늘색 응원봉을 흔들며 한시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4시 정각이 되자 남북 주빈단 및 대표단이 좌석에 착석했다. 그라운드엔 민주노총 팀, 조선직업총동맹(이하, 조선직총) 건설노동자축구팀, 조선직총 경공업노동자축구팀, 한국노총 축구팀이 입장해 관객들에게 인사를 했다. 양 측은 악수를 하며 공정한 경기를 다짐했다. 함께 기념사진을 찍는 선수들의 얼굴엔 긴장감보다는 차분함이 감돌았다.

11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남북노동자 통일축구대회 개막식에서 한반도 단일기와 선수들이 입장하고 있다.
11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남북노동자 통일축구대회 개막식에서 한반도 단일기와 선수들이 입장하고 있다.ⓒ김슬찬 인턴기자

오후 4시 2분이 되자 개막식이 시작했다. 개막식 사회는 최은철 민주노총 서울본부 본부장, 홍광효 조선직총 중앙위원회 통일부위원장, 서종수 한국노총 서울본부 본부장이 맡았다. 세 사람은 번갈아 준비된 멘트를 해 가며 식을 매끄럽게 이어갔다.

4시 5분경, 세 사회자는 “남북노동자들의 의지를 모아, 판문점 선언 이행 북남노동자 통일 축구대회를 시작한다”라고 개막선언을 했다. 이어 한반도기가 상암월드컵경기장에 게양됐다. 경기장 내 모든 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한반도기가 하늘 높이 오르는 모습을 지켜봤다.

 

이어 민주노총, 조선직총, 한국노총 대표자들이 대회사를 하며 대회 개최의 감격과 특별한 소회를 밝혔다.

11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남북노동자통일축구대회에서 남북노동자 3단체 민주노총 김명환 위원장, 조선직업총동맹 중앙위원회 주영길 위원장, 박원순 서울시장, 한국노총 김주영 위원장이 한반도기를 흔들며 입장하고 있다.
11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남북노동자통일축구대회에서 남북노동자 3단체 민주노총 김명환 위원장, 조선직업총동맹 중앙위원회 주영길 위원장, 박원순 서울시장, 한국노총 김주영 위원장이 한반도기를 흔들며 입장하고 있다.ⓒ김철수 기자

민주노총 김명환 위원장이 첫 순서로 대회사에 나섰다.

김 위원장은 “일촉측발의 전쟁위기와 대결정세를 걷어 낸 4.27 판문점 선언의 확고한 이행을 위해 노동자들이 먼저 만났다. 4.27판문점선언은 73년 분단체제를 끝나고 조국의 평화와 자주통일 시대를 열기 위한 또 하나의 역사적 이정표다. 민주노총은 분단된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실현한다는 강령에 맞게 판문점 선언 이행을 위해 누구보다 앞장서 실천해나가겠다고 약속한다”라고 말했다.

이어 “승패에 앞서 ‘우리는 하나다’ 함께 응원하고, ‘조국 통일’을 외치며 통일의 열정을 함께 확인하기 위해 이 자리에 왔다”라며, “이번 대회는 어떤 장애와 난관이 있더라도 남과 북이 하나임을 확인하는 대회, 남과 북의 노동자들이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통일운동에 주도적으로 나서자는 약속과 다짐의 대회”라고 행사의 의의를 밝혔다.

김 위원장은 대회사 말미 “이것은 축구가 아니다, 이것은 통일이다”, “이것은 축구가 아니다, 이것은 평화다”라고 외쳐 관객들의 큰 환호를 받았다.

11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남북노동자통일축구대회에서 조선직업총동맹 중앙위원회 주영길 위원장이 축사를 하고 있다.
11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남북노동자통일축구대회에서 조선직업총동맹 중앙위원회 주영길 위원장이 축사를 하고 있다.ⓒ김철수 기자

주 위원장은 “8월의 폭염보다 더 뜨겁고 열렬한 환호로 우리를 맞아주고 환영해 준 남녘의 노동자들과 서울시민들, 그리고 여기 모인 각계 인사들에게 북녘 노동계급을 대표하여 동포애적 인사를 보낸다”라며 사의를 표했다.

이어 “북과 남의 노동자들이 펼치게 될 통일 축구는 민족사의 새 시대를 맞이한 크나큰 기쁨과 평화롭고 번영하는 통일조국건설에 한 몸을 기꺼이 내댈 북남노동자들의 억센 기상과 의지를 힘있게 과시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 “우리민족끼리 뜻을 모으고 힘과 지혜를 합쳐 하나 된 위력으로 위대한 역사를 창조해나가자. 바로 그 선두에 민족의 맏아들이며 기둥인 우리 노동자가 설 것이다. 노동자가 있는 그 어디서나 판문점선언 이행운동을 힘 있게 벌려 겨레의 통일대진군을 기운차게 견인하자”라고 참여자들을 격려했다.

마지막으로 대회사에 나선 한국노총 김주영 위원장은 “서울을 찾아주신 조선직총 주영길 위원장과 모든 성원들, 6.15 북측위원회 양철식 부위원장께 뜨거운 감사와 연대의 인사를 전한다. 대회의 성사를 위해 함께 해주신 6.15남측위원회 이창복 상임대표의장님과 모든 성원들께 감사 인사를 드린다. 이 상암구장을 제공해주고 남북노동자통일축구대회를 격려하려 와 주신 박원순 시장님께도 감사하다”라고 고마움을 표했다.

이어 “자주적이고 평화로운 노동자의 삶을 위해, 남북 노동자의 연대와 단합을 더욱 적극화해야 한다. 단결된 힘을 하나로 모아 판문점선언을 이행한다면 비로소 노동자가 존중받는 새로운 통일의 시대가 열릴 것이다. 긴 시간 떨어져 살아왔으나, 노동자는 함께 해왔고 또한 함께 할 것이다”라고 다짐했다.

11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남북노동자 통일축구대회 개막식에서 한반도 단일기와 선수들이 입장하고 있다.
11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남북노동자 통일축구대회 개막식에서 한반도 단일기와 선수들이 입장하고 있다.ⓒ김슬찬 인턴기자

이어 6.15 남측위원회, 북측위원회 상임대표들의 축사가 있었다.

이창복 6.15남측위원회 상임위원장은 “판문점 선언 이후 처음으로 정부가 아닌 민간이 주최가 되어 규모있는 공동행사가 진행되고 있다”라며, “더 다양한 장소에서 더 다양한 계층이 다양한 주제로 만나서 토론하고 손 맞잡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어 “민주노총, 한국노총 북의 조선직총이 협력하면 우리 시대의 주인공으로 우리 민족의 미래와 희망을 담보해낼수 있다. 우리 겨레가 공존공영하는 통일의 길 전세계에 보여주자. 세계사적 사변이 될 평화와 번영 통일의 새로운 역사를 함께 만들어 가자”고 민간교류협력의 물꼬를 튼 노동자들의 격려했다.

양철식 6.15남측위원회 부위원장은 “역사적 판문점선언 실천 고수 의지가 각자의 좁은 울타리를 젖히고 당파와 소속의 차이를 넘어 통일 애국의 길에서 마음과 뜻을 합쳐가게 한다. 민족 우선, 민족 중시의 입장에서 굳게 단결해야 한다. 계층, 부문 연대와 단합을 시동하고 그것을 민족의 대단합으로 이어 가야 한다”라고 남북이 마음을 모아가는 일의 중요성을 짚었다.

이어 “북남노동자통일 축구대회가 민족의 단합을 힘있게 추동하고, 통일로 가는 민족사의 큰 자욱을 남길 걸로 확신한다. 대회의 성과적 개최를 진심으로 환영한다”고 축하의 뜻을 밝혔다.

11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남북노동자통일축구대회에 앞서 박원순 서울시장이 축사를 하고 있다.
11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남북노동자통일축구대회에 앞서 박원순 서울시장이 축사를 하고 있다.ⓒ김철수 기자

서울시는 상암월드컵경기장 사용을 허가하고, K Water등을 지원하며 물심양면으로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날 박원순 서울시장은 대표단과 함께 앉아 경기를 관람하며 통일을 바라는 노동자, 시민들과 함께 했다.

축사에 나선 박 시장은 “평화 특별시 서울에서 이런 뜻깊은 행사가 열려 너무 행복하다. 평화의 마음을 가득 담고 분단의 경계를 넘어온 조선직총과 북측대표단께 서울시민을 대표해 뜨거운 환영인사를 건넨다”라고 첫 인사를 했다.

이어 “다양한 분야에서 연대와 협력을 강화해 나가야 한다. 전세계 시민과 소통, 공감해야 분열과 대립으로 얼룩진 분단사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 민족의 화합과 통일, 남북공동선언 판문점선언 실천을 위해 부단한 노력과 정성을 다하자. 남북노동자들의 선구적 노력을 기대한다”라고 말했다.

또 “저와 서울시는 어려움 속에서 남북공동선언을 지키고 그 정신을 살리려고 노력해왔다. 앞으로도 서울시민과 함께 평화 공동번영의 새 시대를 열겠다. 남북이 함께 할 일을 협의하고 고민할 것을 찾겠다”라며, “통일에 겨레의 미래가 있다. 저와 서울시도 멈추지 않겠다. 오직 평화를 위해 달리자”라고 연설을 끝맺었다.

11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남북노동자 통일축구대회를 찾은 시민들이 축구 경기를 관람하고 있다.
11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남북노동자 통일축구대회를 찾은 시민들이 축구 경기를 관람하고 있다.ⓒ김슬찬 인턴기자

개막식 말미에는 축하공연이 이어졌고, 바로 남북 노동자들의 몸풀기가 시작됐다. 경기 시작전부터 “통일조국” “우리는 하나다”를 외치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경기장을 꽉 채웠다.

이날 먼저 한국노총과 조선직총 건설노동자축구팀 경기가 전후반 30분씩 열렸고, 이어 민주노총과 조선직총 경공업노동자축구팀 경기가 이어졌다.

한국노총과 경기하는 건설노동자축구팀(붉은색 유니폼 착용)은 김정현 감독 지도하에 13명의 선수가 뛰었다. 민주노총팀과 경기하는 경공업노동자축구팀(백색 유니폼 착용)도 백명철 감독 지도하에 13명의 선수가 출전했다. 민주노총과 조선직총 경공업팀 경기에서는 북측에서 내려온 장철진 심판이 주심을 봤다. 한국노총과 조선직총팀 경기는 MBC 스포츠 플러스에서 생중계 됐다.

경기 후 대표단과 선수단은 남측 대표단 및 선수단과 함께 워커힐 호텔에서 환송만찬을 하며 서울에서의 마지막 밤을 정리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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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족을 파멸시킨 수사관, 훈장 받고 별 일 없이 산다

[잔인한 훈장 ③] 간첩 조작 사건으로 망가진 서창덕씨 가족의 삶

18.08.12 11:47l최종 업데이트 18.08.12 11:47l

 

큰사진보기 군산 성산공원에 잠들어 있는 고 서창덕 어르신
▲  군산 성산공원에 잠들어 있는 고 서창덕 어르신
ⓒ 정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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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벽 안에 잠들어 있었다. 작은 유리문 너머로 납골함이 보였다. 여기에 무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옆으론 웃고 있는 가족사진이 놓여 있다. 거기엔 아들이 쓴 편지가 있었다.

"아버지 저 잘살게요. 어머니, 엄마, 잘 모실 테니 그곳에서 아프지 마시고 지켜봐 주세요. 아빠! 사랑해요."

지난 1일, 군산에 있는 성산공원을 찾았다. 이른 아침, 납골당은 텅 비어 있었다. 여기에 그가 있었다.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간첩이 됐던 사람이다. 서창덕(71)씨다. 지난 5월 15일, 그는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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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뵐 때마다 고문 수사관을 처벌해야 한다고 했다. 최근엔 고문 수사관의 훈장이 취소되지 않을 거 같다며, 화를 내셨다. 결국 다 못 보고 하늘나라로 가셨다."

함께 납골당을 찾은 변상철 '지금여기에' 사무국장의 말이다.

고 서창덕씨가 말한 '고문 수사관'은 보안사 수사관 A(65)씨다. 지난 1985년, 그는 서씨를 간첩으로 검거한 공으로 '보국훈장광복장'을 받았다. 조작한 간첩 사건으로 훈장을 받은 거다.

머리에 총 겨누며 위협... 끔찍한 기억
 
큰사진보기 오른쪽이 서창덕. 고문후유증으로 병원을 찾는 일은 일상다반사가 되었다.
▲  오른쪽이 서창덕. 고문후유증으로 병원을 찾는 일은 일상다반사가 되었다.
ⓒ 변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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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다. 서씨는 마지막까지 '고문 수사관' A씨의 처벌을 바랐다. 끔찍한 기억이 있어서다. 훈장이 취소되지 않아 화를 냈던 것도 이 때문이다. 그건, 고문과 구타의 기억이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의 조사결과 보고서에 적힌 그의 증언은 이랬다. 발췌한 내용을 그대로 싣는다.

"포승줄로 손을 묶더니 양쪽 기둥에 쇠막대기를 걸고서는 양손을 그곳에 매달아 저의 몸이 그 쇠막대기에 대롱대롱 매달린 꼴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매달아 놓고서는 수사관이 야전침대 각목으로 저를 사정없이 두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약 20여 분간 가슴이고 다리고 마구 구타하여 나중에는 피를 토할 정도였습니다.

수사관이 '이런 새끼는 본을 보여줘야 해'라면서 때렸습니다. 그렇게 맞다가 결국 기절하게 되었습니다. 깨어 나보니 참 창피한 이야기지만 제가 똥을 다 쌌더라고요(이때 진술인은 한참을 울먹이다) 그러더니 보안대 놈들이 군인 팬티를 갖다 주면서 갈아입으라고 하고는 주는데, 똥 씻을 물도 주지 않아서 그냥 팬티에 쓱쓱 닦았습니다."


이게 다가 아니다.

"한번은 제가 허위사실을 인정하지 않자, 저의 머리에 총을 겨누며 '야, 이 새끼야, 너 같은 새끼 하나 죽여도 누가 눈 하나 깜짝할 것 같아? 너 같은 새끼 토막을 내 죽여서 바다에 던져도 뭐라고 할 사람 아무도 없어, 에구, 총알도 아까워서 못 쏘겠다' 하면서 겁을 주는데 정말 저를 죽일 것만 같아 너무 무서워 벌벌 떨기만 하였습니다.

수사관이 구둣발로 사타구니(고환 부위)를 걷어차 너무나 고통스러운 부상을 당하였는데, 이 부상으로 온몸이 오그라들어 한동안 제대로 걷지 못하였으며, 나중에 재판을 할 때에도 교도관이 부축을 하여 재판정을 출정하였고, 몸을 움직이지 못하여 교도소에서 병사에 있었습니다."


지난 2008년, 법원은 서창덕씨에게 무죄를 판결했다. 그가 '고문과 구타로 만들어낸 조작된 간첩'이란 게 밝혀졌다. 국가폭력 피해자는 그렇게 사건이 발생한 지 24년 만에 죄를 벗었다.

남편이 '간첩'이라고 따라다니며 감시... 아들은 삐뚤어졌다
 
큰사진보기 최옥선 씨가 일하는 다방에 '정 형사'는 주기적으로 찾아왔다.
▲  최옥선 씨가 일하는 다방에 '정 형사'는 주기적으로 찾아왔다.
ⓒ 정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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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이 드러났으나 고문 수사관은 처벌받지 않았다. 서창덕씨의 삶만 망가트린 게 아닌데도 그랬다. 아내 최옥선(65)씨도 '간첩 남편'을 둔 죄로 고단한 인생을 살아왔다.

성산공원을 떠나 군산 시내에 있는 다방에서 최씨를 만났다. 그는 돌아오지 않은 남편을 찾아 헤매던 때를 이렇게 기억했다.

"생전 어디 가서 자고 오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어요. 세 살배기를 등에 업고 온 동네를 뛰어다녔죠. 그렇게 물어물어 찾아간 게 전주보안대에요. 거기 가서 서창덕씨 혹시 있냐고 물으니 있다고 하데요. 반갑더라고요. 그래서 얼굴 한 번 볼 수 있냐고 하니 안 된데요. '땡깡' 놓다시피 했죠. 그랬더니 '아주머니도 여기서 조사를 받아야 하는데, 아기가 있어 집으로 돌려보낸다'면서 서류를 내밀데요. 무섭더라고요. 쓰라는 대로 다 썼어요.

어느 날, 전주북부경찰서에 갔어요. 부대에서 거기로 가보라고 하데요. 가서 서창덕씨 있냐고 물으니 거기 있던 사람이 그래요. 어쩌다 그렇게 됐냐고. 사람이 아침에 질질 끌려갔다가 저녁이면 피투성이가 돼서 온대요. 그리고 아침에 또 질질 끌려가고. 끝내 얼굴은 못 봤죠. 그러다 부대에 다시 찾아가니 며칠에 군산 법원으로 오래요. 거기서 봤어요. 수인번호 333을 달고 있던 남편을. 10년을 '땅땅땅' 때리데요."

"진석 아빠"는 그 길로 교도소로 갔다. "진석 엄마"는 먹고살기 위해 막노동판에 뛰어들었다고 했다. 철근도 엮으러 다니고, 합판에 박힌 못을 빼는 일도 했단다. 하지만 문제는 겨울이었다. 소일거리도 없었단다. 지인의 소개로 그때부터 다방에서 일하게 됐다고 했다. 이때, 그 사람이 찾아왔단다.

"하루는 다방으로 '정 형사'라는 사람이 찾아왔어요. 남편이 교도소에 가기 전에도 이따금 집에 찾아와 남편의 행방을 묻던 사람이었죠. 가슴이 철렁했어요. 주방에서 일하고 있으면, 잘 보이는데 앉아 한참은 있다가 가요. 그런 게 일주일에 한두 번은 됐죠."

최씨는 다방을 그만뒀다. "정 형사"의 눈을 피해 다른 다방에 취직했단다. 감시가 끝나지 않았다. 며칠 뒤, 정 형사가 다방에 찾아왔다고 했다. 이번에도 주방이 잘 보이는 의자에 앉아 최씨를 지켜봤단다. 주인에게 말을 붙일 때도 시선은 최씨에 고정돼 있었다고 한다. 이번에도 최씨는 견딜 수 없었다. 다시, 다방을 나왔다. 그런 일이 몇 차례 반복됐단다.

마지막으로 정 형사를 본 건, 이혼하고 나서란다. 최씨는 정 형사가 "이혼하면, 안 쫓아다닌다"고 했단다. 그 말대로 했단다. 먹고살려면 일을 해야 했고, "진석이"를 키우려면 돈이 필요했단다.

감시에서 풀려났으나 마음고생은 끝나지 않았단다. 최씨의 말이다.

"셋방살이 할 때에요. 동네에서 무슨 안 좋은 일만 터지면, 사람들이 찾아와요. 우리 애가 '말짓'(해서는 안 되는 나쁜 행동)한 거라고. 다른 집 애가 말짓해도 우리 애만 혼내고 소리 지르고 그랬어요. 아빠가 교도소 간 집 아들내미라고.

'진석이'도 어디서 듣고 왔는지 '아빠가 간첩이냐'고 했다고 막 소리를 질러요. 엄마는 아빠 외국으로 돈 벌러 갔다고 하더니 다 거짓말이었다며. 그러더니 애가 삐뚤어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애들도 선생님도 "간첩 자식"... 아버지가 미웠다
 
큰사진보기 진실화해위원회가 조사한 '납북어부 서창덕 간첩 조작 사건'의 보고서
▲  진실화해위원회가 조사한 '납북어부 서창덕 간첩 조작 사건'의 보고서
ⓒ 정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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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석(37)씨도 말을 쏟아냈다. 군산 시내 커피숍에서 인터뷰하면서 '간첩 자식'으로 살아온 날들을 끄집어냈다. 죄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고 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간첩 새끼'라고 왕따를 심하게 당했어요. 애들한테 엄청 두들겨 맞았죠. 선생님도 저를 많이 때렸어요. '간첩 자식'이라고. 이때는 괄시받고 무시당했던 기억만 있어요.

저한테도 형사가 따라 다녔어요.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일주일에 한두 번은 제 뒤를 쫓아다녔죠. 답답하대요. 학교에 가면 맞고 안 가도 동네 형들이 때리고, 형사들이 따라 다니고. 살 수가 없더라고요. 나쁜 친구들과 어울렸죠. 그 애들은 저를 버리지는 않았거든요. 그러다가 소년원도 가고 교도소도 가고..."


- 아버지와 사이가 어땠나요?
"정이 없었어요. 제가 아버지 때문에 너무 당했거든요. 중학교 때인가? 제가 복싱을 했어요. 어릴 때부터 하도 맞아서 배운 거죠. 그때는 아버지가 감옥에서 나와서 같이 살 때인데, 어느 날 저를 때리더라고요. 쇠파이프로. 손뼈가 다 으스러져 운동을 그만뒀어요. 제가 소년원에 갔을 때도 아버지는 면회 온 적도 거의 없었어요. 아버지가 정말 미웠어요."

- 가장 힘들었던 기억이 있나요?
"한 번은 제가 아버지한테 물었어요. 왜 우리는 짜장면 한그릇도 밖에 나가서 못 먹느냐고. 아버지가 그러데요. 무섭다고. 또 잡아갈까봐 무서워서 밖에 못 나가겠다고. 아버지는 거의 밖에 나가지 않았어요. 항상 아버지 뒤에는 사람이 있으니까. 저는 저대로 힘들었죠. 초등학교 때부터 가출을 반복적으로 했고, 나쁜 길로 빠지게 됐죠."

- 납골당에서 다정하게 찍은 가족사진과 편지를 봤어요
"제가 교도소에 있을 때 아버지가 엄마랑 면회를 왔는데, 처음으로 우시면서 그러더라고요. 사랑한다고. 그때 정말 죽고 싶었어요. 내가 왜 여기에 있나 이런 생각도 들고. 이게 다 내 탓이구나. '나가서 아버지한테 잘해야겠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5년 만에 집에 왔는데, 아버지가 아팠어요. 제가 전주로, 서울로 병원을 모시고 다녔어요. 서울서 병원 생활 할 때는 한 달간 옆에서 병실 생활도 했죠. 그때 아버지랑 밥도 같이 먹고, 이야기도 많이 했어요. 어느 날은 이불 없이 자는 저한테 점퍼를 덮어주는데, 행복하더라고요. 그 뒤로 항암치료를 받으러 여기저기 다니셨는데, 그때마다 모시고 다녔죠. 그러다가 가족사진도 찍게 됐어요. 제 인생에 가장 행복한 날이었죠."

- 아버지의 새로운 모습을 찾은 게 있나요?
"사실 아버지는 저한테 굉장히 폭력적인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아버지를 더 미워했죠. 근데 나이를 먹으면서 알겠더라고요. 그게 다 저를 생각해서 그런 거란 거. 제가 피해를 볼 까봐 그런 거라고요. 그래서 아버지 주위 사람들은 아들이 있는지도 몰랐어요. 제가 '아들'이라고 하면, 다들 놀랐죠. 아버지가 누명을 쓰고 '간첩'이 됐다가 무죄 판결받았으나, 어찌 됐든 '간첩 자식'이란 소리를 들을까 봐 그러셨던 거를 나중에 알았어요."

끝나지 않은 국가폭력

끝으로 서진석씨와 헤어지며 약속한 게 있다. 그가 행정안전부에 가는 날, 함께 가기로 했다. 서창덕씨의 삶을, 최옥선씨의 인생을, 그리고 서진석씨의 미래를 뒤바꿔 놓은 A 때문이다. A의 훈장은 아직 박탈되지 않았다.

지금도 '고문 수사관' A는 보훈 혜택을 누리며, 살고 있다. 국가폭력은 끝나지 않았다.

[관련기사] 간첩 조작해 받은 두 개의 훈장, 취소는 한 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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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공단' 1호 공장, '남북경협 이곳에서 시작될 것'

[포토뉴스] 무더위로 하나된(?) 평양과 서울은 하나
평양=이승현 기자  |  shlee@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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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8.11  19:4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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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유소년축구대회 참가를 위해 도착한 평양의 한 여름은 무더위에서 만큼은 이미 서울과 하나였다.

대회 출전 선수들이 대회장인 김일성경기장에서 연습을 하는 사이 시내 참관에 나선 참가단은 이동중 연신 땀을 닦으며 하루 종일 더위와 사투를 벌였다.

중간 중간 기온을 묻는 참가단에게 안내를 맡은 북측 관계자들은 손전화로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보더니 34도라고 알려준다.

오후 4시가 조금 넘은 시각. 김일성광장으로는 흰색 와이셔츠 차림에 남녀 학생들이 모여들고 큰 공터에서도 부문별로 연습하는 장면이 눈에 띄었다. 

9월 9일 '공화국창건' 70돌을 맞아 예전 '아리랑'을 모체로 새로 창작한 대집단체조 '빛나는 조국'의 막을 올리기 위해 막바지 땀을 흘리고 있다.  

고 김일성 주석의 생가인 '만경대 고향집', '개선문'과 '김일성경기장', '옥류관' 등 그다지 낯설 것도 없는 참관지이지만 10년만에 다시 가본 그곳에는 세월의 변화가 조금씩 비껴 있었다.   

이번에 특별히 참관하게 된 국제유소년축구대회를 공동 주관하는 4.25체육단의 실내 종합체육관과 축구훈련장, 그리고 남북체육교류협회와 함께 최근 가동에 들어간 '4.25체육기자재공장은 남측에는 처음 소개되는 곳이다.

   
▲ 양각도호텔에서 내려다 본 미래과학자거리 뒷편으로 류경호텔이 뾰족히 솟아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미래과학자거리는 지금도 건설중이다. 멀리 평양화력발전 굴뚝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개선문 뒷편으로도 고층 아파트가 올라가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고 김일성 주석의 생가인 만경대고향집의 해설강사.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만경대고향집' 가까이 우물에서 물을 떠 먹는 여학생들. '정중성을 보장해야 한다'며 사진 촬영을 금지했지만 학생들을 찍는 건 괜찮다는 눈치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개선문 해설강사는 열띤 해설에 이어 노래솜씨도 뽐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김일성경기장 앞 남녀. 유난히 뜨거운 올 여름 평양 여성들이 들고 다니는 화려한 양산이 눈에 띄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오는 15일 국제유소년축구대회가 열릴 김일성경기장으로 들어가는 길.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김일성경기장 운동장. 보조의자를 깔았을 경우 10만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하며, 관중석은 6만석이다. 트랙이 깔려있는 종합운동장이지만 국제축구연맹(FIFA)로부터 승인을 받은 경기장으로 앞으로는 월드컵 지역예선이 이곳에서 열릴 수 있다고 한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김일성경기장 본부석.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무더운 여름 더 생각나는 시원한 옥류관 냉면.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봉사원들의 날렵하고 익숙한 냉면 봉사 모습.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경기도 연천군 선발팀을 이끌고 대회에 참가한 임재석 연천군의회 의장(오른쪽에서 두번째) 등 임원진들이 '우리는 하나다' 구호로 '통일 연천' 의지를 과시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옥류관 테라스에서 본 대동강 풍경. 주체사상탑.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옥류관 테라스에서 본 대동강 풍경. 왼쪽 아치형 자색 건물은 청년문화회관, 그 옆으로 물결치는 지붕 모양을 한 건물이 류경원이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옥류관 테라스에서 본 능라도 5.1경기장. 15만명 규모로 오는 9월 9일 '공화국창건일' 대집단체조 '빛나는 조국'이 펼쳐질 곳이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4.25체육단이 연습과 경기를 위해 운영하고 있는 실내 종합체육관. 농구, 배구, 핸드볼은 물론 특설무대를 설치해 권투, 레슬링 경기까지 진행할 수 있다고 한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김기혁 4.25체육단 단장.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11년 5월 4일 현지지도하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그때부터 2014년 8월 9일까지 5차례에 걸쳐 현지지도한 표식비가 있는 4.25체육단 실내 종합체육관 전경.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4.25체육단에서 쓰고 있는 보조 축구경기장에서 벨라루시 선수들이 한낮 땡볕에 잠깐 집중 연습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4.25체육단 옆의 평양시 사동구역에 소재한 '4.25체육기자재공장'. '국가경제발전 5개년전략목표 수행을 위한 증산돌격운동을 힘있게 벌이자'는 구호가 눈길을 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최문순 강원도지사(왼쪽)와 김경성 남북체육교류협회 이사장이 '4.25체육기자재공장'에서 참가자들에게 공장 설립 취지와 의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이 공장은 사단법인 남북체육교류협회가 북측으로부터 50년간 사용권을 받은 35만 평방미터 규모의 '평양공단'에 처음 지은 1호 공장이다. 북측 4.25체육단과 남북체육교류협회가 만든 경협기업인 (주)남북경협이 합영으로 설립한 이 공장은 2008년 준공해 우여곡절을 겪다가 최근 완공하고 가동에 들어갔다. 당초 모든 체육용품을 생산하기로 했지만 대북제재 등의 이유때문에 지금까지는 스포츠 의류를 주로 생산하고 있다.

김경성 이사장은 앞으로 국제환경이 나아지면 당초 계획했던대로 모든 체육용품을 생산하는 '대동강1호공장'으로 확대시키고 '체육부지'로 받은 애초 토지 성격에 맞게 27홀 규모의 골프장, 스포츠센터 겸 호텔, 축구 전용경기장 건설 등을 계획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 이사장은 "남측 내수 또는 제3국 수출을 전제로 한 개성공단과 달리 평양에서 직접 소비할 수 있는 내수용 스포츠용품을 생산하기 때문에 진정한 남북경협의 완성품이라고 할 수 있다. 아직 국제환경이 미치지 못해서 그렇지만 이곳에서 본격적으로 남북경협이 시작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 과학기술중시 구호 아래 스포츠의류 생산에 여념이 없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공장 외벽에 걸린 '세계와 경쟁하라, 세계에 도전하라, 세계를 앞서 나가라!', '사회주의 경제건설에 총력을 집중하여 우리 혁명의 전진을 더욱 가속하자!'구호.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수정-12일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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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한 나는 아오키, 이복순, 청목항

한·일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한 나는 아오키, 이복순, 청목항

등록 :2018-08-11 09:35수정 :2018-08-11 09:35

 

 

[토요판] 커버스토리/ ‘잊힌 이름’ 재한일본인 처 ① 내 이름은 무엇입니까  

광복 뒤 남편 따라 조선 온 일본인 여성들
한국·일본 양국서 모두 잊힌 그들의 이야기
다시 8·15가 돌아왔다. 73번째 광복절을 맞이해 는 조금 다른 방향에서 그 의미를 새기고자 했다. 광복의 두 주인공은 대개 피해자 조선과 가해자 일본이었다. 제국주의와 식민지배의 역사에서 가해자와 피해자 어디에도 딱 들어맞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재한일본인 처.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조선 남성을 만나 가정을 꾸리고, 1945년 해방 직후 남편을 따라 조선에 온 일본 여성들이다. 한국전쟁과 가난, 가해 국가 출신이란 정체성은 그들의 한국살이를 고단한 시간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들은 한·일 두 나라의 역사에서 모두 잊힌 존재가 됐다. 한국의 피해자 민족주의와 일본의 패배한 제국주의 역사관 모두 그들의 삶을 기억하려 하지 않았다. 주로 남성의 관점에서 조명하고 기록해온 전쟁과 식민지배의 시대를 이들 ‘소수자 여성 집단’은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3차례에 걸쳐 그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카카오스토리펀딩(storyfunding.daum.net) 페이지에서는 총 8화로 구성된 이야기가 8월10일부터 시작됐다. 기획·글 팩트스토리 박상연·박희영·강민혜·서지연, 사진 아오키 츠네·김종욱 제공

 

 

 

 사진은 2000년대 중반에 찍은 70대의 아오키 츠네(오른쪽)와 또 다른 재한일본인 처인 쿠도 치요(1918~2010)의 결혼식 장면. 기획·글 팩트스토리 박상연·박희영·강민혜·서지연, 사진 아오키 츠네·김종욱 제공
사진은 2000년대 중반에 찍은 70대의 아오키 츠네(오른쪽)와 또 다른 재한일본인 처인 쿠도 치요(1918~2010)의 결혼식 장면. 기획·글 팩트스토리 박상연·박희영·강민혜·서지연, 사진 아오키 츠네·김종욱 제공

 

아오키 츠네(90)가 서울역 안내센터 앞 의자에 손깍지를 끼고 앉아 있었다. 수요일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간인데도 서울역은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아오키는 가만히 앉아 왼손에 낀 반지 두 개를 만지작거렸다. 그는 가장 좋아하는 빨간색 점퍼를 입고 알록달록한 번짐 무늬가 새겨진 하얀 스카프를 맸다. 5년 동안 보지 못한 친구, 가츠라 시즈에(97)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아오키 오른발 옆 종이가방에는 친구에게 줄 선물이 한가득이었다. 점심 식사도 잊고 오후 1시 경주행 케이티엑스(KTX)를 기다렸다. 지난 4월4일, 일기예보는 전국에 비가 온다고 했지만 서울 하늘은 아직 맑았다.

 

“광복절만 되면 아들이 나 보고 공원도 나가지 말라고 해. 엄마 돌 맞을까봐….”

 

아오키가 별 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그는 전라도와 충청도 사투리를 섞어 말했고, 가끔 경상도 억양으로 발음하는 단어들도 있었다. 일본인으로 태어난 아오키는 전북 진안과 대전에서 30년 가까이 살았다. 부산과 경남 김해에서도 10년 정도 머물렀다. 그는 ‘재한일본인 처’라고 불리며 한국에서 70년 넘게 살았다.

 

 

조선인과 결혼한 일본인 아내

 

 

재한일본인 처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인과 결혼해 살다가 광복 후 남편과 함께 한국에 정착한 일본 여성들이다. 이들은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조국 대신 사랑을 선택했지만 한국에서는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일본에서는 조선인과 결혼했다는 이유로 한일 양국에서 외면 받았다.

 

현재 재한일본인 처의 수는 정확한 기록이 없어 파악이 어렵다. 논문 ‘재한일본인 처의 생활사’(1999년 김응렬)에 따르면 1977년 771명, 1991년 744명이 ‘부용회’(재한일본인 처 모임) 부산·영남지부에 가입해 있었다. 같은 논문에선 부용회 임원의 말을 인용해 전국 회원을 1983년 1500여명, 1996년 1천여명으로 추산했다. 차별을 피하기 위해 출신을 숨겼거나, 부용회에 가입하지 않은 이들도 적지 않았다.

 

아오키는 1928년 1월16일 일본 홋카이도에서 태어났다. 고향 야쿠모는 섬의 잘록한 서남단 지역에 위치했고, 서쪽과 동쪽 모두 바다를 접했다. 그는 고향을 “눈이 많이 오는 곳”으로 기억했다. 자기 어깨 언저리에서 손을 휘휘 저으며, 그만큼 눈이 왔다고 알려줬다.

 

“대나무가 있으면 끄트머리만 조금 나올 정도로 눈이 높이 쌓였어. 그래서 스키 파는 장수가 있었어. 나무로 만든 스키 사서 고거 타고 학교 댕겼잖아. 그 눈이 4월이나 돼야 녹았어. 요즘 눈은 눈도 아니야.”

 

어린 시절 아오키의 주특기는 ‘스키점프’였다.

 

아오키가 고등학생이던 1940년대 초, 탄광과 공장 사이에 있던 그의 집에는 20여명의 조선인 하숙생이 있었다. 그들 대개는 전쟁 중인 일본의 부족한 노동력을 메우러 바다를 건너온 사람들이었다. 아오키의 남편 남점암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조선에서 농부였던 점암은 일본에서 탄광 광부로 일했다.

 

한일 강제병합 이후 많은 조선인이 일본에서 하급 노동자로 전락했다. 1939년 이후에는 강제 징병에 따른 이주도 급격히 증가했다. 1945년 5월 기준으로 일본에 머물렀던 조선인은 210만 명으로 추산된다. 소수 유학생을 제외한 대다수가 가난한 노동자였다. 1945년 3월 일본 탄광 노동자 41만여 명 가운데 조선인 노동자는 30%에 달했다. 지역에 따라서는 조선인 노동자가 더 많은 경우도 있었다. 아오키의 고향 홋카이도가 대표적이었다.

 

점암은 아오키 집에서 가장 오래 하숙한 사람이었다. 3년 정도 함께 생활했다. 가끔 저녁에 시간이 나면 두 사람은 ‘조선말’을 공부했다.

 

“사람이 순진하고 참 좋았어요. 우리집 농사일, 가축 기르는 일도 많이 거들어 줬어.”

 

아오키는 조선 사람이 낯설지 않았다. 둘째 언니도 조선인과 결혼했다. 둘째 형부는 경북 안동에 살던 양반댁 자제였다. 아오키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집에서는 자연스럽게 점암과의 혼인 이야기가 오갔다.

 

일제강점기 일본의 공장과 탄광 지대에서는 조선인들과 일본인들의 결혼이 자연스러웠다. 일본 내무성 기관지 <특고월보>에 실린 집계에 따르면, 1939년 12월 말 일본 전국 47개 지역 중 조선-일본인 부부가 가장 많이 거주하는 곳은 도쿄와 홋카이도였다.

 

아오키의 부모는 혼사를 서둘렀다. 남성 대다수가 전쟁에 징집된 1940년대 일본에서 여성들은 결혼 상대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부모는 점암이 아오키보다 10살 많았지만, 오랫동안 하숙집에 함께 살아 식구 같고 성실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아오키의 아버지는 결혼을 앞두고 점암의 고향 전북 진안에 편지를 보내 그의 호적을 확인하기도 했다. 한국에 본처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으나 점암은 미혼이었다. 아오키는 1944년 겨울에 점암과 결혼식을 올렸다. 전쟁통이라 혼례는 일본 전통식으로 간단하게 치렀다. 아오키는 기모노를 입고 머리 모양을 내기 위해 가발을 썼다.

 

결혼 뒤 1년도 지나지 않은 1945년 조선은 식민지배에서 놓여났다. 아오키는 첫 아이를 가진 상태에서 조선의 광복 소식을 들었다. 점암은 아오키에게 조선으로 가자고 했다. 점암은 조선에 가도 “목욕탕도 있고 화장실도 있고 다 있다”며 아오키를 설득했다. 아오키가 어머니에게 조선에 가겠다고 하자, 어머니는 반대했다.

 

“혼자 가라고 하고 너는 여기서 살아라. 아이 키우면서 새로 시집가면 된다.”

 

1945년 10월14일 아오키는 아이를 낳았다. 그는 자식 걱정이 앞섰다. 당시 일본인들은 조선인을 낮잡아 ‘한토진(반도인, 半島人)’이라고 불렀다. 자신은 이혼하고 살 수 있어도 아이가 한토진 소리를 들으며 자랄 게 걱정됐다. 아오키는 남편 점암을 따라 아이와 함께 조선으로 가겠다고 결심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인 남자와 결혼한
일본인 아내들의 고단한 한국살이
광복 뒤 남편 따라 5천여명 한국행
한국에선 일본인이란 이유로 외면
일본선 한국인과 결혼했다며 외면

 

40년대 홋카이도 고향집 하숙생이던
조선인 광부와 혼인한 아오키 츠네
아이 ‘한토진’ 소리 안 듣게 하려고
한국 생활 시작해 남편 호적 입적
6·25때 핏덩이 막내 잃고 직접 매장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서 조선인 남성과 결혼한 뒤 광복과 함께 남편을 따라 한국 살이를 시작한 아오키 츠네. 2000년대 중반 70대의 그가 태극기를 들고 사진을 찍었다. 아오키 츠네 제공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서 조선인 남성과 결혼한 뒤 광복과 함께 남편을 따라 한국 살이를 시작한 아오키 츠네. 2000년대 중반 70대의 그가 태극기를 들고 사진을 찍었다. 아오키 츠네 제공

 

 

1945년 12월, 눈 내리는 일본 홋카이도 하코다테항에서 출항한 조선행 배가 가다 서기를 반복하며 보름이 걸려 부산항에 도착했다. 갓난아이를 안은 17살의 앳된 아오키와 남편 점암도 그 배에 타고 있었다. 광복 후 남한을 통치한 미군정은 혼란스러운 부산항을 강력히 단속했다. 낯선 조선 땅을 밟은 아오키를 가장 처음 맞은 건 덩치 크고 파란 눈을 가진 미국인이었다.

 

“미국 사람을 그때 처음 봤어. 남편이 옆에 있는데도 나를 번쩍 들어 올려서 빙그르르 도는 거야.”

 

160㎝도 안 되는 작은 체구의 아오키는 낯선 이의 무례한 행동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전쟁통에 남편 폭력 피해 도망

 

 

남편을 따라 하얀 눈을 맞으며 부산에서 전주를 거쳐 전북 진안의 시댁에 이르는 고단한 여정을 아오키는 묵묵히 견뎠다. 흩날리는 눈발을 피해 아기에게 젖을 물리려 잠시 들어간 주막 안에서 처음 만난 할머니 대여섯 명이 신기한 눈으로 기모노 입은 아오키의 손을 잡았다가, 아기 물린 가슴을 찔러보고, 얼굴도 쓰다듬었다.

 

고생 끝에 도착한 곳은 시집이 아닌 남편의 외숙모 집이었다. 점암은 아오키와 갓난아기를 2~3일간 외숙모에게 부탁하고, 자신의 집을 수리하러 다녀왔다. 일본의 아오키 집과 비교하면 한국에 있는 점암의 집은 변소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열악한 곳이었다. 점암은 집 주변 울을 다시 치고, 변소의 나무판자도 새로 깔았다. 남편없이 외숙모 집에 남겨진 아오키는 예상보다 더 열악한 한국 상황, 낯선 음식과 문화 때문에 입국을 후회했다. 점암의 외숙모가 밥상에 올린 검은 밥에선 알 수 없는 냄새가 났다. 팥을 넣어 지은 밥 냄새가 익숙지 않았다. 조선간장은 너무 짰다. 배가 고팠지만, 동치미 국물을 조금 마실 수 있을 뿐이었다. 밤에는 어디선가 기어 나온 빈대가 아오키와 겨우 잠든 아이를 물어뜯으며 괴롭혔다.

 

아오키는 남편 점암의 아내로 혼인신고를 해 남편의 호적에 입적됐다. 광복 전 한일 관계상 ‘동일국가’ 내에서의 결혼이었기 때문에, 아오키의 일본 국적은 유지된 상태였다. 아오키는 결혼 생활 6년 동안 아이 셋을 얻었다. 낯선 땅 조선에서 기댈 사람은 남편 점암 뿐이었다. 시어머니와 큰형님 등 대가족이 한 집에 살았다. 낮에 작은 돌무더기 위에 앉아 아이에게 젖을 물리던 아오키는 이웃들이 흉보는 것도 몰랐다. 아기가 죽으면 작은 돌무더기를 쌓아 무덤을 만든다는 사실을 남편이 알려줬다.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 발발 뒤 진안에 북한군이 들어온 것은 7월22일 무렵이었다. 가족들은 피난길에 오르며 뿔뿔이 흩어졌다. 아오키 부부는 어린아이 셋을 데리고 피난길에 나설 수 없어 진안군 주천면 일대를 전전했다.

 

“전쟁 때는 니꺼 내꺼 없잖아. 아무 빈집이나 막 들어가서 살았어. 인민군도 농사짓는 사람 해코지는 안 했어. 먹을 거랑 옷, 이불을 다 빼앗아가서 고생했지만.”

 

피난 생활 중에 아직 핏덩이였던 막내아들을 잃었다.

 

“죽은 막내를 내가 파묻고 왔지. 눈이 많이 오는 날이었는데, 군용 담요에 싸서 그냥….”

 

아오키는 한 손엔 죽은 아이를 안고 다른 한 손에는 괭이를 들고 눈 덮인 산으로 올라갔다.

 

“파고 보니까 조금 깊이가 모지래(얕아). 그래서 다시 꺼내 가지고 더 파서 다시 묻고 그랬어. 가(막내)가 살았으면 지금 예순여덟인가 아홉인가.”

 

엄마 아오키는 아흔이 넘어서도 죽은 막내 나이를 헤아렸다.

 

전쟁 중 장티푸스가 유행했다. 점암이 장티푸스에 걸리자 가족 모두가 병에 옮았다. 점잖고 성실했던 점암이 돌변했던 것도 이때였다. 그는 술독에 빠져 지내며 걸핏하면 아오키에게 손찌검을 했다.

 

“나무 베개 있잖아. 그걸로 그 새끼는 얼굴만 때렸어. 하도 맞아서 코가 없어졌어. 맞아서 피투성이가 됐어.”

 

아오키는 목침으로 얼굴을 맞아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코가 깨졌다. 눈이 퉁퉁 부어 손으로 눈꺼풀을 벌려야 겨우 앞을 볼 수 있었다. 전쟁이 한창이었지만 점암의 폭력을 피해 금산까지 50여㎞를 걸어서 도망쳤다. 도망 길에 어린 아들 둘을 데려갈 순 없었다.

 

재한일본인 처들 대부분은 한국에서 불행한 삶을 살았다. 일본 외무성 관료였던 모리타 요시오의 <전쟁 중 재일조선인의 인구 통계(1968)>를 보면, 1938년부터 1942년까지 일본에서 조선인 남성과 결혼한 일본인 여성은 5242명이다. 그 중에서 5천여명의 여성이 1946년 3월까지 남편을 따라 한국으로 왔다. 이들 중 상당수는 남편으로부터 버림받거나 자식을 빼앗기고 내쫓겼다. 이방인으로서의 삶을 견디지 못해 자살한 사람도 많았다.

 

무작정 도망 나온 아오키는 금산을 거쳐 대전에 닿았다. 당장 배고픔을 해결할 돈이 없었던 아오키는 대전의 한 이발소에서 3년 간 머물며 일을 돕고 잠자리를 해결했다. 이발소 주인 할머니는 조용하고 성실한 아오키에게 바닥 쓸고 닦는 일과 머리 감기는 일을 맡겼다. 하루는 이발소에 평소 왕래가 잦아 안면을 튼 ‘보이’(심부름하는 소년)가 와서 아오키를 찾았다.

 

“누님, 일본 무역회사 사장이 있는데 누님이 가서 말 좀 해주실라요?”

 

아오키는 일본인 무역회사 사장의 통역을 도와주고 일본에 있는 큰언니 아오키 스우에게 보낼 편지를 부탁했다.

 

“남편한테서 도망 나왔다고는 말 못하고, 남편이 죽었다고 했지.”

 

 

다시 아들을 피해 도망

 

 

며칠 뒤 언니한테서 답신이 왔다. 한국 생활을 접고 무역회사 사장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오라는 내용이었다. 보름 뒤 한 학생이 아오키를 데리러 왔다. 사장 아들이려니 짐작했다. 이발소 주인 할머니는 “남자들 다 도둑놈이니까 가지 말라”며 아오키를 붙잡았지만, 일본에 돌아가고 싶었던 아오키는 그를 따라나섰다. 사장의 집은 서울 동대문 근방이었다. 그는 며칠 동안 집을 비운 상태였다. 아오키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사장의 집안일을 도우며 하염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한 사흘인가 있으니까 사장 집에 어떤 군인이 찾아왔어. 사장 조카 된다더만. 한밤중에 내방에 들어왔어. 아이고….”

 

아오키는 사장 조카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그때 25살밖에 안 됐으니까…. 무서워서 그날 밤에 도망쳤어. 기차 소리 나는 곳으로 막 뛰었어. 짐칸 있잖아. 거기 탔어.”

 

 

1940년대 일본에서 결혼 전의 아오키 츠네(오른쪽 두번째)와 친구들. 아오키 츠네 제공
1940년대 일본에서 결혼 전의 아오키 츠네(오른쪽 두번째)와 친구들. 아오키 츠네 제공
1945년 10월 부산항을 통해 일본에서 귀국하는 사람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5년 10월 부산항을 통해 일본에서 귀국하는 사람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전염병 앓은 뒤 점잖던 남편 돌변
피난 생활 중 남편 폭력 피해 도망
남편으로부터 버림받고 내쫓기거나
이방인 삶의 고통으로 목숨 끊기도
재한일본인 처들이 견뎌온 시간들

 

이혼 절차 못밟아 귀국 못한 아오키
이번엔 아들 폭력 피해 다시 도망
바느질·청소일 등으로 생계유지하며
일본 귀국 포기하고 살아온 70여년
외로운 시간 견디게 해준 ‘부용회’

 

 

 

아오키는 일본에 가고 싶은 마음이 더 절실해졌다.

 

1951년 일본 귀국을 희망하며 부산항에 모인 일본인 ‘부녀자’는 450여명(그해 1월25일 <동아일보>)이었다. 연합군 총사령부에 일본 입국허가를 받기 위해서는 호적 초본이나 경찰서장의 인증 등 일본인이라는 증거서류가 필요했다. 일본은 1952년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체결을 계기로 조선인 호적에 입적한 일본인 아내들의 일본 호적을 소멸시켰다. 아오키의 일본 호적도 이때 소멸돼 한국 국적만을 보유하게 됐다. 남편 점암의 한국 호적에 올라있는 아오키가 일본 입국 허가를 받기 위해서는 이혼 절차를 밟아야 했다.

 

1960년대 초 한일 수교를 위한 회담이 결렬을 거듭하고 있었다. 아오키는 일본으로 가는 ‘야메배(밀선)’를 구해 타기 위해 부산 부전시장에서 건어물 장사를 하며 뱃삯을 모았다.

 

“배 타기가 쉽지 않았어.”

 

미국 국적의 선박이 아니거나 연합군 총사령부, 또는 일본상선관리국으로부터 운항 허가를 받지 않고 38도선 이남의 조선반도를 오가는 해운은 불법이었다. 많은 일본인과 조선인이 쓰시마 해협과 조선 해협을 건널 때 밀항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운항 요금은 비쌌다. 조선인 한 사람당 75엔에서 150엔을 받았지만, 귀국을 원하는 일본인에겐 한 사람당 150엔에서 200엔(미군정기 자료를 토대로 펴낸 <주한미군사>)을 받았다.

 

1965년 6월22일 한일 정부는 14년 동안 끌어온 국교 정상화 협상을 마무리 짓고, ‘한일 양국의 국교 관계에 관한 조약’을 조인했다.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십수년을 부산에 머무르며 건어물 장사를 하던 아오키는 이 무렵 김해 출신 남자 김태우를 만났다. 그는 불도저 운전사였다.

 

“나보다 3살 아래야. 그 사람은 일본말도 잘하고, 글도 잘 쓰고, 담배나 술도 안 하고. 사람이 괜찮았어.”

 

부인과 사별한 김해 남자는 슬하에 아들과 딸을 두고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아오키는 김해로 내려가 밭일을 도우며 함께 살았다.

 

김해 생활 6년째에 태우가 사우디아라비아로 출장을 갔다. 그 사이 아오키는 장티푸스를 앓았다. 태우의 어머니는 시름시름 누워 있는 아오키가 짐스러웠다.

 

“동네 사람이 그러는데, 누룽지 썩은 걸로 나를 멕이더래. 시어머니 되는 사람이 나 죽었다고 사우디에 편지를 했어.”

 

아오키가 죽었다는 편지를 받고 태우는 급히 집으로 돌아왔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남자가 밭일하던 아오키 앞에 섰다.

 

“내가 죽었다는 얘기 듣고 온 거야. 와서 자기 엄마한테 집에서 나가라고 하더라고. 죽지도 않은 사람을 죽은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1970년대 초반 40대에 들어선 아오키는 남편 점암과의 이혼 절차를 밟기 위해 진안으로 갔다. 진안에서 마주한 두 아들은 아오키의 기억 속 4살, 6살이 아니었다. 군대에 다녀온 첫째 아들은 한번에 알아보지도 못했다. 남편 점암은 다른 여자와의 사이에 딸 둘과 아들 하나를 두었다. 새 살림을 차린 점암은 아오키와 이혼하려 했지만 아들이 반대했다. 동네 사람들이 “엄마를 일본으로 보내주면 평생 못 본다”며 겁을 줬다. 아들은 “이혼 도장을 찍어주지 말라”며 아버지를 막아섰다.

 

“어머니는 내가 잘 모실게요.”

 

진안에 묵은 지 보름이 지날 무렵 아오키를 데리러 온 태우 앞에서 아오키의 아들이 엄마를 붙잡았다. 아오키는 김해에 있는 태우의 자식들을 돌보는 것보다 피붙이인 자식들과 사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태우는 사우디에서 번 돈 500만원을 아오키에게 주며 “잘 살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일본으로 돌아가는 뱃삯을 마련하기 위해 부산 부전시장에서 건어물 장사를 할 때(1965년)의 아오키 츠네. 아오키 츠네 제공
일본으로 돌아가는 뱃삯을 마련하기 위해 부산 부전시장에서 건어물 장사를 할 때(1965년)의 아오키 츠네. 아오키 츠네 제공
1974년 당시 “일본인은 승차 거부”라는 문구를 써붙인 전북 군산 지역 택시.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74년 당시 “일본인은 승차 거부”라는 문구를 써붙인 전북 군산 지역 택시.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일본행을 포기하고 한국에서 아들과 살기로 한 아오키는 진안에 작은 막걸리집을 열었다. 진안 사람들은 아오키를 ‘이복순’이라고 불렀지만, 이름만큼 복 많고 순하게 살 순 없었다. 동네 사람들은 농사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아오키의 가게에 들렀다. 술 취한 남자 손님들의 농담과 추행이 잇따랐다. “일본댁 연애 한 번 하자”며 손을 덥석 잡거나 무작정 끌어안았다. 못하던 욕만 늘어갔다.

 

“시불놈들, 미친놈들.”

 

한 동네에서 살림을 따로 살던 남편 점암은 일흔을 갓 넘긴 나이에 죽었다. 아오키를 향해 동네 사람들은 “일본댁 한국 남편 죽었는데 얼마나 우나 보자”며 쑥덕거렸다.

 

 

40년 만에 되찾은 이름 ‘청목항’

 

 

전라북도 진안군 주천면 대불리 12**번지. 고된 장사 생활 15년 만에 쌀 17가마니를 주고 산, 한국 땅에서 아오키가 소유한 첫 번째 집이 됐다. 그 집에서 작은아들이 술만 먹으면 남편 점암처럼 폭력을 행사했다. 가게에서 술 항아리를 깨부수고, 몇 십 통 떼어다 놓은 수박을 집어 던지곤 했다.

 

“술이라면 정말 지긋지긋 해.”

 

한국에 남은 이유였던 아들 때문에 예순을 넘긴 나이에 아오키는 다시 ‘도피생활’을 시작했다. 자식이라 어디 말할 데도 없이 아오키는 홀로 속앓이를 했다. 무작정 서울행 기차를 탔다. 1980년대 서울 변두리엔 판자촌이 즐비했다. 아오키가 가장 먼저 자리 잡은 곳은 미아리 산 중턱의 초가집이었다. 바느질, 인형 만들기, 청소도우미 등 아오키는 생계를 위해 어떠한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외롭고 고단한 삶에 한줄기 위안은 있었다. ‘부용회’. 아오키와 같은 재한일본인 처들의 모임이었다. 아오키가 1960년대 초 부산에 살 때 부용회 부산지부가 수정동에 있었다. 부용회를 찾아간 그가 일본 가는 방법을 물었을 때 “합의 이혼을 해서 호적을 정리해야 일본에 갈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일본행은 무산됐지만 진안에 돌아갔을 때 부용회 전주지부에서 잠시 활동했었다. 아오키가 본격적으로 부용회 활동을 한 건 서울살이 때부터였다. 1970년대 말 그가 처음 서울 부용회에 갔을 때만 해도 50여 명의 회원이 있었다. 부용회는 유일하게 아오키를 반기는 ‘집’이었다.

 

동네 친구로 가족처럼 정을 나누던 가츠라상, 사람 좋기로 소문난 나가시마상, ‘한 성깔’ 하던 마츠모토상, 잘 웃던 고마다상…. 서울 부용회 마지막 회장인 구마다 가츠코는 어려운 살림의 아오키를 챙겼다. 일본대사관은 일본 국적의 재한일본인 처에게 소정의 생활보조금을 지급했으나, 아오키는 한국 국적이라는 이유로 받지 못했다. 구마다는 아오키에게 생활보조금 지원을 해달라고 일본대사관에 요청했다. 아오키가 자원해 매달 부용회 식구들의 식사를 책임지던 수고를 보상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서울 부용회 건물이 노량진동에서 대방동으로 이동하고 회원들이 하나둘 세상을 달리해 문을 닫기까지 아오키는 개근 회원이었다.

 

정부 차원에서 재한일본인 처 지원책을 강구하기 시작한 건 한일 국교정상화(1965) 이후인 1969년이었다. 한일 정부는 일본인 처들을 일본으로 송환하기 위한 계획에 합의했고, 일본 정부는 ‘재한일본인의 보호대책비’ 명목으로 1억3000만엔(13억원)을 지원했다. 그 과정에서 1960년대 한국에 머물러 있던 일본인 처의 절반 이상이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돌아가길 희망한 가장 큰 이유는 한국인의 반일감정과 궁핍한 생활 때문이었다.

 

1970년대 한국 생활 30여년 만에 처음 일본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만난 40대의 아오키 츠네(윗줄 오른쪽 세번째). 아오키 츠네 제공
1970년대 한국 생활 30여년 만에 처음 일본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만난 40대의 아오키 츠네(윗줄 오른쪽 세번째). 아오키 츠네 제공
2000년대 중반 서울 동작구 대방동에 위치한 부용회 서울지부 앞에서 아오키 츠네(오른쪽 두번째)가 재한일본인 처 친구들과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아오키 츠네 제공
2000년대 중반 서울 동작구 대방동에 위치한 부용회 서울지부 앞에서 아오키 츠네(오른쪽 두번째)가 재한일본인 처 친구들과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아오키 츠네 제공

 

국내 유일의 재한일본인 처 복지시설인 경주 나자레원(원장 송미호)은 일본인 처 147명의 일본 귀국을 도왔다. 나자레원은 한국 국적을 가진 일본인 처들도 돌아가길 희망하면 호적 정리를 통해 귀국 절차를 밟도록 지원했다. 아오키는 그 정보를 접하지 못했다. 40여년 전은 지금처럼 정보가 빠르게 공유되는 시대가 아니었다. 귀국 시도가 번번이 좌절된 아오키는 아들을 피해 서울로 올라온 뒤부터 일본으로 돌아가겠다는 생각을 접었다.

 

“아이고, 그냥, (귀국한다는) 생각도 못했어요.”

 

대신 아오키는 ‘고향 방문’(단기 비자) 목적으로 일본을 꾸준히 찾았다. 아오키가 일본의 가족을 다시 만난 것은 1970년대 들어서였다. <재한일본인처 고향방문 후원> 프로젝트(한국인 단체인 ‘부용회 후원회’ 지원)로 아오키는 한국에 온 지 30여년 만에 일본으로 건너가 가족들을 만날 수 있었다. 첫 방문은 안동으로 시집온 둘째 언니와 함께였다.

 

“버선발로 뛰어오시는 아버지를 보는데, 내가 일본말을 잊은 거야. 부둥켜안고 눈물만 흘렸잖아.”

 

그날은 온 집안이 야단법석이었다. 연신 고개만 끄덕이며 울었다.

 

아오키 츠네의 한국 이름은 ‘청목항’(靑木恒)이었다. 츠네를 한국식으로 표기했다. 1985년 이후에야 아오키는 ‘복순이’ 대신 ‘청목항’을 얻을 수 있었다. 1984년 12월 유엔여성차별철폐협약이 비준되어 이듬해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발휘하게 되면서 호적법이 개정되었다. 이때 한국 국적을 취득한 외국인도 고유의 성과 본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조항이 추가되었다.

 

2000년대 중반 서울 성북구 월곡동에서 친자매처럼 지내던 아오키 츠네(왼쪽)와 가츠라 시즈에. 아오키 츠네 제공
2000년대 중반 서울 성북구 월곡동에서 친자매처럼 지내던 아오키 츠네(왼쪽)와 가츠라 시즈에. 아오키 츠네 제공
지난 4월 경북 경주시 나자레원에서 5년 만에 다시 만난 90살의 아오키 츠네(오른쪽)와 97살의 가츠라 시즈에. 박희영 제공
지난 4월 경북 경주시 나자레원에서 5년 만에 다시 만난 90살의 아오키 츠네(오른쪽)와 97살의 가츠라 시즈에. 박희영 제공

 

5년 만에 만난 두 친구

 

 

서울에서 경주는 고속열차로 2시간15분이 걸렸다. 아오키는 자리에 앉아 선물 꾸러미와 가방을 창 쪽 벽에 가지런히 뒀다. 그는 잠도 청하지 않고 창문 밖 풍경만 바라봤다. 신경주역을 빠져나왔을 때는 흐린 하늘에서 부슬비가 흩날렸다.

 

아오키가 90살이 된 지금 서울 부용회(‘부용회 본부’ 역할을 해온 부산지부도 이름만 유지될 뿐 사실상 활동 중단)는 사라졌다. 2004년까지만 해도 12명에 달했던 회원 대부분이 세상을 떠났다. 남은 이들 중에서도 다리가 불편한 가츠라 시즈에는 5년 전 나자레원에 들어갔다. 가츠라는 나자레원으로 가기 전까지만 해도 아오키의 반려견 ‘삐삐’와 ‘딱지’를 돌봐준 유일한 동네 친구였다. 두 사람은 서울시 월곡동에서 10m를 사이에 두고 살았다.

 

짙은 청색 기와지붕을 얹은 나자레원으로 들어갔을 때 가츠라가 휠체어를 타고 아오키를 맞았다.

 

“얼굴이 왜 이렇게 안 좋아. 그렇게 건강하던 사람이….”

 

만나자마자 얼굴을 부비며 가츠라는 아오키 걱정부터 했다.

 

“난 괜찮아요. 언니는?”

 

“2년만 있으면 100살이야. 나 예쁘지?”

 

5년 만에 만난 두 친구는 서로를 깊이 끌어안았다. 아오키가 차고 있던 하얀 진주 팔찌를 풀어 가츠라 손목에 채웠다. 건물 밖에서 벚꽃이 지고 있었다.

 

 

기획·글 팩트스토리 박상연·박희영·강민혜·서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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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부경기 아니다, 통일경기 시작하자” 손맞잡은 남북 노동자 대표들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남북노동자단체대표자 공동기자회견

이승훈 기자 lsh@vop.co.kr
발행 2018-08-10 17:15:54
수정 2018-08-10 17: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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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노동자 3단체 한국노총 김주영 위원장·조선직업총동맹 중앙위원회 주영길 위원장,·민주노총 김명환 위원장이 10일 오후 서울 광진구 워커힐호텔에서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남북노동자단체 대표자 공동기자회견에 앞서 손을 잡고 들어보이고 있다.
남북노동자 3단체 한국노총 김주영 위원장·조선직업총동맹 중앙위원회 주영길 위원장,·민주노총 김명환 위원장이 10일 오후 서울 광진구 워커힐호텔에서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남북노동자단체 대표자 공동기자회견에 앞서 손을 잡고 들어보이고 있다.ⓒ김철수 기자

 “북과 남의 노동자들이 진행하게 되는 통일축구경기는 결코 누가 이기고 누가 지는가 하는 승부경기가 아닙니다. 마음과 뜻을 합쳐 통일의 대문을 앞장에서 열어나가려는 우리 노동자들의 드높은 통일의지를 과시하는 민족적 단합과 화해를 위한 통일지향경기입니다.” (주영길 조선직업총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

10일 남녘의 땅을 밟은 주영길 조선직업총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과 양대노총 위원장이 환한 미소를 머금고 손을 맞잡은 채 ‘남북노동자통일축구대회’ 행사의 시작을 알렸다.

주영길 위원장과 김주영 한국노총 위원장,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은 이날 서울 광진구 워커힐 호텔 4층 아트홀에서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남북노동자단체대표자 공동기자회견’을 열고 남북 노동자들의 통일을 향한 의지를 과시했다.

이 자리에서 주영길 위원장은 “내일 여기 서울의 상암경기장에서 온 겨레의 커다란 기대와 관심 속에 북남로동자통일축구대회가 진행되게 된다”며 “역사의 창조자, 시대의 개척자들인 북과 남의 우리 노동계급은 조국통일을 위한 길에서 이루어지고 굳건히 다져진 연대단합의 위력을 남김없이 떨치며 역사의 새 시대를 열어놓은 판문점선언을 고수하고 이행해 나가는데서 선봉적 역할을 다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남북노동자 3단체 한국노총 김주영 위원장·조선직업총동맹 중앙위원회 주영길 위원장,·민주노총 김명환 위원장이 10일 오후 서울 광진구 워커힐호텔에서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남북노동자단체 대표자 공동기자회견에서 김명환 위원장이 북측 주영길 위원장 마이크를 바로 잡아주고 있다.
남북노동자 3단체 한국노총 김주영 위원장·조선직업총동맹 중앙위원회 주영길 위원장,·민주노총 김명환 위원장이 10일 오후 서울 광진구 워커힐호텔에서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남북노동자단체 대표자 공동기자회견에서 김명환 위원장이 북측 주영길 위원장 마이크를 바로 잡아주고 있다.ⓒ김철수 기자

“따뜻하게 맞아준 양대노총에 깊은 사의”
“물러서지 않고 통일축구대회 개최에 노력”

 

이날 남북노동자단체 대표자 공동기자회견장에는 수많은 취재진이 몰렸다. 100석 가량 마련된 기자석에는 기자들이 빼곡하게 앉았다. 기자회견 시작 직전에는 스피커 앞에 설치해 놓은 방송사 마이크들이 우르르 떨어져 관계자들이 급하게 수습하는 해프닝이 발생하기도 했다.

오후 3시가 조금 넘자, 주영길 위원장이 앞장서서 기자회견장으로 들어섰다. 그 뒤를 김주영·김명환 양대노총 위원장이 따라 들어왔고, 세 사람은 환하게 웃으며 손을 맞잡아 들어 보였다. 카메라 플래시가 번쩍였다.

간단한 소개를 마치고 곧바로 기자회견이 시작됐다. 주 위원장은 먼저 양대노총 환영단의 환영식에 감사를 표하며 2015년 이후 3년 동안 열리지 못했던 남북노동자통일축구대회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주 위원장은 “2015년 10월 평양에서 4번째로 개최되는 북남노동자통일축구대회를 성대히 진행한 뒤, 2016년 5·1절을 계기로 서울에서 통일축구대회를 개최하기로 발표했었다”며 “그러나 아쉽게도 서울에서의 통일축구대회는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북남 사이의 왕래와 접촉은 완전히 차단됐으며, 적대와 불신의 골은 나날이 깊어만 갔다. 하지만 우린 결코 포기하거나 물러서지 않았으며, 오히려 통일축구대회를 반드시 개최하기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 왔다”고 지난 시간을 회고했다. 그러면서 “우리들의 노력은 판문점북남수뇌상봉으로 북남관계가 극적으로 전환되면서 오늘 이렇게 현실로 이뤄지게 됐다”고 강조했다.

또 그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말을 빌려 “북과 남이 자주 오가면 분리선은 낮아지고 아예 없어지게 될 것”이라며, “조선직총 대표단의 이번 길은 북과 남의 각계각층 사이의 접촉의 길을 넓히고 통일의 대로를 더욱 든든히 다지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남북노동자 3단체 한국노총 김주영 위원장·조선직업총동맹 중앙위원회 주영길 위원장,·민주노총 김명환 위원장이 10일 오후 서울 광진구 워커힐호텔에서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남북노동자단체 대표자 공동기자회견에서 북측 주영길 위원장이 발언을 하고 있다.
남북노동자 3단체 한국노총 김주영 위원장·조선직업총동맹 중앙위원회 주영길 위원장,·민주노총 김명환 위원장이 10일 오후 서울 광진구 워커힐호텔에서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남북노동자단체 대표자 공동기자회견에서 북측 주영길 위원장이 발언을 하고 있다.ⓒ김철수 기자

“기호지세(騎虎之勢)로 내달릴 출발”

주영길 위원장의 발언 뒤엔 곧바로 김주영 한국노총 위원장과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의 발언이 이어졌다.

김주영 위원장은 “오늘 통일축구대회의 개최는 지난 시기 남북의 노동자가 함께 노력한 결실”이라며 “노동자가 앞장서서 통일시대를 열어내자는 약속을 지키기 위한 실천의 결과물”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이제 우리 남북 노동자 앞에 놓인 과제는 역사적인 판문점선언의 중단 없는 이행일 것”이라며 “판문점선언이 열어놓은 새로운 평화번영의 시대, 자주통일의 새 시대를 실현하는 길에, 어제보다 더욱 힘 있게 나설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명환 위원장은 “이것은 축구가 아닌, 통일”이라고 강조했다.

이같이 정의한 이유에 대해 김 위원장은 “남북의 노동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민족애를 나누는 것이 바로 통일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남북노동자가 함께 뜀박질한 상암 월드컵경기장에 흘릴 땀방울은 조국통일을 앞당기고 키워가는 숭고한 값진 거름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또한 김명환 위원장은 “오늘부터 진행되는 노동자통일축구대회가 역진불가능 한 조국의 평화와 번영, 통일시대를 위해 남북노동자들이 호랑이 등에 함께 올라 기호지세(騎虎之勢)로 내달릴 출발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기자회견은 별다른 질의응답 없이 종료됐다. 남북노동자통일축구대회 조직위원회 관계자는 기자회견 시작에 앞서 “3개 단체 대표 발언 뒤 별도의 질의응답은 갖지 않을 예정”이라며 양해를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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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마피아를 위한 ‘소설’이 도를 넘었다

[기자수첩] 英이코노미스트 기사에 등장하는 단 한 줄로 “한전 경쟁력 상실” 창작한 문화일보·한국경제신문

정철운 기자 pierce@mediatoday.co.kr  2018년 08월 11일 토요일
 
한국경제신문은 8월7일자 ‘英이코노미스트 “한전, 脫원전 탓에 경쟁력 잃어가고 있다”’란 제목의 기사에서 “영국 이코노미스트지가 한국의 원자력발전이 국제적인 경쟁력을 잃고 있다고 분석했다. 탈(脫)원전 등 원전에 대한 반발에 직면했다는 이유에서다”라고 보도했다.
▲ 게티이미지
▲ 게티이미지

 

한국경제신문에 따르면 이코노미스트는 “글로벌 원전시장에서 러시아의 경쟁자는 거의 없다”며 “러시아원자력공사가 한국전력 등 원전 기업을 제치고 세계 원전시장의 지배자로 떠올랐다고 분석했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이어 “한전은 한때 아랍에미리트(UAE) 원전 수주 성공 등으로 세계 원전시장의 신흥 강자로 떠올랐지만 탈원전 등으로 경쟁력을 잃었다고 이코노미스트는 지적했다”고 보도했다.  

 

▲ 한국경제신문 8월7일자 기사.
▲ 한국경제신문 8월7일자 기사.
 
그러나 이코노미스트는 그런 지적을 한 적이 없다. 위와 같은 보도내용도 없다. ‘Russia leads the world at nuclear-reactor exports’(러시아가 세계 원전수출을 이끌다)란 제목의 해당 이코노미스트 기사를 보면 한전이 언급되는 부분은 전체 기사에서 단 한 문장 밖에 없다. “KEPCO, South Korea’s energy company, is facing a domestic backlash against nuclear power.” 번역하면 “한국의 에너지 회사인 한전은 원자력 발전에 대한 국내의 반발을 사고 있다”정도다.

 

이코노미스트 기사의 취지는 러시아가 세계 원전 수출의 리더가 됐다는 내용이다. 한국경제신문은 기사에 단 한 줄 언급된 이 문장을 거의 왜곡에 가깝게 본인들 입맛대로 확대해석했다. 원전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있다는 대목을 두고 어떻게 “한국 원전이 경쟁력을 잃었다”로 해석할 수 있을까. 이 정도면 소설이라 봐도 무방하다.

 

 

▲ 문화일보 8월6일자 기사.
▲ 문화일보 8월6일자 기사.
 
한국경제신문은 문화일보 8월6일자 ‘“러, 원전시장 절대강자…한전은 경쟁력 상실”’이란 제목의 기사를 보고 다음날 지면에서 인용 보도했을 가능성이 높다. 문화일보 역시 ‘영국 이코노미스트지 분석’이란 부제를 달고 한전이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탈원전 흐름 속에서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는 상태”라고 보도했다. 마치 영국 권위지 해석처럼 보이지만 문화일보의 각주에 불과하다.

 

이코노미스트 기사를 인용하고자 했다면 방점을 잘못 찍었다. 이코노미스트는 “1980년대부터 침체에 빠져 있던 원자력 산업은 2011년 쓰나미가 일본의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를 집어삼켰을 때 엄청난 타격을 입어 결국 붕괴를 초래했다”고 보도하며 “전 세계적으로 원자력 발전으로 발생되는 전기량은 2년 만에 11% 감소했고, 그 이후로는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이코노미스트는 “이 쇠퇴하는 산업 내에서, 한 국가(러시아)는 현재 원자력 발전소의 설계 및 수출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우리가 주목할 대목은 바로 이 ‘쇠퇴하는 산업’에 미래가 없다는 사실이다. 러시아와 중국처럼 언론이 원전 공포와 우려를 제대로 보도 못하는 소위 독재국가들만 이 산업에 발을 빼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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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차 금요행동, 아베정권 규탄 1110명 국제선언 발표 (전문)

모리모토 씨 “분노와 부끄러움과 한탄스러움 느낀다”180차 금요행동, 아베정권 규탄 1110명 국제선언 발표 (전문)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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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8.10  17:4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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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학교와 아이들을 지키는 시민모임’은 10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180차 금요행동’을 개최, ‘재일동포와 조선학교를 탄압하는 아베정권 규탄 국제선언’을 발표했다. 시민모임 공동대표 정태효 목사가 여는말을 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1948년, 일본정부가 재일동포들의 민족교육을 대대적으로 탄압하며 급기야 한 소년을 사망에 이르게 한 ‘한신교육투쟁’이 발생한지 7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일본정부의 재일동포 탄압은 계속되고 있다.”

국내는 물론 해외동포들까지 1차로 1,110명이 서명한 ‘재일동포와 조선학교를 탄압하는 아베정권 규탄 국제선언’이 10일 낮 12시 서울 율곡로 일본대사관 앞에서 ‘우리학교와 아이들을 지키는 시민모임’(시민모임)이 개최한 ‘180차 금요행동’에서 기자회견 형식으로 발표됐다.

참석자들은 정영이 전여농 사무총장이 낭독한 ‘재일동포와 조선학교를 탄압하는 일본정부를 규탄한다’는 제목의 국제선언을 통해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는커녕 재일동포와 조선학교를 노골적으로 탄압하는 일본정부를 강력히 규탄한다”며 4가지 요구사항을 발표했다.

   
▲ 정영지 전여농 사무총장이 국제선언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일본정부는 식민지배 사죄하라! △대북적대정책 및 독자제재 즉각 철회하라! △재일동포에 대한 탄압을 즉각 중단하라! △조선학교에도 고교무상화 제도를 적용하라!

사회를 맡은 조원호 시민모임 기획위원장은 “국제선언에 참여하신 분들은 총 1,110명이다. 여기에 일본, 미국, 독일, 카나다, 호주에 계신 우리 동포들이 많이 마음을 같이 하셨다”고 소개하고 “2차, 3차 계속 이어질 예정”이라고 밝혔다.

시민모임 공동대표 정태효 목사는 여는말을 통해 “브라질 학교까지 지원하는데 우리 조선학교 아이들에게만 고교무상을 허용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아이들에게 정당하게 고교무상화를 적용하라는 이야기다”라며 “일본이 고교무상화 정책을 할 때까지, 그리고 또 일본이 식민정책을 사죄할 때까지. 그리고 더 이상은 헤이트 스피치나 더 이상 많은 일본에 가 있는 사람들이 학대받지 않고 규탄받지 않는 그런 사람다운 세상에 살 수 있을 때까지 우리는 함께 할 것”이라고 말했다.

   
▲ 방한 중인 모리모토 다카코 고교무상화연락회 사무국원이 발언하고 있다. 일한민중연대전국네트워크 가토 마사키 씨가 통역을 맡았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와타나베 켄쥬 일한민중연대네트워크 대표 등이 8.15행사 참가를 위해 방한해 금요행동에 함께 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모리모토 다카코 고교무상화연락회(고교무상화제도에서조선학교배제를반대하는연락회) 사무국원은 “이 자리에 지금 서 있으면서 아주 부끄럽다. 그것은 일본 정부가 지난 식민지시대에 대한 사죄도, 반성은커녕 아직도 재일 코리안 분들에게 차별정책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운을 뗀 뒤 “이미 고교무상화가 8년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외국인 43개 학교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유독 조선학교만 배제가 돼 있다. 저는 정말 이런 배타적이고 반식민적인 이런 행동에 분노와 부끄러움과 한탄스러움을 느낀다”고 심경을 밝혔다.

이날 180차 금요행동에는 8.15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한 일한민중연대네트워크 와타나베 켄쥬 대표 등이 자리를 함께 했고, 일한민중연대전국네트워크 가토 마사키 씨가 통역을 맡았다.

모리모토 사무국원은 “일본의 문부과학성 앞에서도 금요행동이 진행되고 있는데 오후 4시부터 1시간에 걸쳐서 진행된다. 여기에는 조선대학교 학생들, 조선학교 고교생들, 일본인 지원자들이 참여하고 있는데, 무려 300회가 넘었다”고 소개하고 “유엔의 인종차별철폐위원회에서 이미 일본 정부는 차별을 시정하라는 권고를 받은 바 있다”고 지적하고 “차별정책을 진행하는 아베 정권이 북일회담을 한다고 하는데, 그런 회담을 할 자격도 없다. 아베는 당장 퇴진하라”고 외쳤다.

1930년대 증조할아버지 세대가 제주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정착한, 재일동포 량대륭 씨는 “재일교포 3세인데 잘하지는 않지만 이렇게 민족의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고 반문하고 “일본에는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재일교포 학교가 있다. 조선총련 학교가 있다. 저는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다녀서 이 정도 말을 한다”고 밝혔다.

량대륭 씨는 “이제 시대가 많이 변하고 있는데 어떻게 새로운 시대, 새로운 역사 흐름에 맞게 우리 민족의 재산으로서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역사에 맞게 조선학교를 봐야 되느냐는 것”이라며 “앞으로 탄압, 차별이 없어지고 더 좋은 세상이 만들어질 때까지 다 같이 힘 합쳐 나가리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 국제선언을 일본대사관에 전달하려다 경찰에 가로막히자 조원호 시민모임 기획위원장이 규탄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금요일행동 참가자들은 일본대사관측을 규탄하고 다음 번에는 일본대사관측과 사전협의를 거쳐 문건을 전달하기로 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기자회견을 마친 대표들은 국제선언을 일본대사관 측에 전달하려 했지만 경찰들이 막아나서 전달하지 못했고 일본대사관 측은 사전협의가 없었다는 점을 들어 접수를 거부했다. 기자회견 참석자들은 “일본 대사 나와라” 등을 외치다 다음 번에는 사전협의를 거쳐 전달하겠다며 마무리했다.

앞서, 정태효 공동대표는 여는말에서 “우리는 세 차례 일본대사관에 우리의 서명받은 것과 우리가 목적하는 바를 전달했다. 받아주지 않았다. 들어가지 못했다. 그리고 우편으로 하라고 해서 우편으로 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한 번도 답을 듣지 못했다”며 “오늘도 우리는 전달할 거다. 그리고 계속할 거다”라고 말했다.
 

[재일동포와 조선학교 탄압하는 아베정권 규탄 국제선언 (전문)]
재일동포와 조선학교를 탄압하는 일본정부를 규탄한다

1948년, 일본정부가 재일동포들의 민족교육을 대대적으로 탄압하며 급기야 한 소년을 사망에 이르게 한 ‘한신교육투쟁’이 발생한지 7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일본정부의 재일동포 탄압은 계속되고 있다.

일본정부는 자국 내 모든 고등학교에 적용하는 ‘고교무상화’제도에서 유일하게 조선학교만을 배제하며 평등하게 교육받을 권리가 있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차별적 조치를 강행했다. 그에 따라 일부 지자체는 기존에 지급하던 교육보조금마저 중단하며 초급, 중급학교까지 재정적 압박을 가하고 있다.

또한 일본정부가 가하는 대북독자제재로 인해 재일동포들은 북측에 있는 가족,친척들과 제대로 된 왕래, 물자교환마저 차단당하는 피해를 입고있다. 얼마전 북으로 수학여행을 다녀온 조선학교 고급부 아이들의 수학여행 기념품을 일본세관이 모조리 압수한 사태가 발생했다. 금지품목이나 위험품목이 아닌 개인의 물품까지도 몰수해가는 일본정부의 반인권적 행태에 경악을 금할 수 없다.

조선학교는 일본의 식민지배 시절 강제로 일본에 끌려가 정착하게 된 우리 동포들이 “조선인은 조선말을 배워야 한다”는 당연한 이치로 설립한 민족교육기관이며, 재일동포들은 일본정부로부터 보호받을 권리가 있는 일본사회의 구성원이다.

그러나 일본정부가 가하는 노골적인 차별정책은 우익단체들의 헤이트스피치와 재일동포건물에 대한 총기 난사 등의 충격적인 폭력행위로 이어져 재일동포들을 증오범죄의 대상으로 내몰고 있다.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는커녕 재일동포와 조선학교를 노골적으로 탄압하는 일본정부를 강력히 규탄한다. 우리는 동포들의 정당한 권리를 위해 끝까지 연대해 싸워갈 것임을 선언하며 아래와 같이 요구한다.

1. 일본정부는 식민지배 사죄하라!
1. 말로만 북일관계 개선, 북일정상회담 운운말고 대북적대정책 및 독자제재 즉각 철회하라!
1. 재일동포에 대한 탄압을 즉각 중단하라!
1. 조선학교에도 고교무상화 제도를 적용하라!

2018년 8월 10일

* 재일동포와 조선학교를 탄압하는 아베정권 규탄 국제선언 (1차-1110명)

Bowm Kim, Chan Gok Kim(Wisconsin), CHO,Haeng-Lae(JAPAN), Debbie Kim(London UK), Ejay Kim(New Jersey, USA), Esher Yi(NY), Heidi Johnstone(Sydney), Hyun Choi(Ottawa. Canada), Hyun Song(TN, USA), Iksoo Han(NY), Jinju 최(Florida), Kelly Lee(Canada), Keumjoo Armstrong(USA), Kitamura Megumi(Hiroshima Japan), KSY(S. Korea kyungju), Lacey Kim(NY, USA), Lee in sook(LA Torranc), M.S.Lee, Max Kwak(New Zealand), Misuk Nam(CA, USA), Peter Kim(CA, USA), Rippel, Young Sook(Germany), Roy S Kim(Milton, WA), Sam Song(NY, USA), Seo, Eui Ok(Berlin-Germany), SungAe Ha(California), Susan Lee(Sydney, Australia), Susan Lee(Australia), ubong kim(japan tokyo), Yong lee(San diego(CA), Yongsoon Yun(Germany), Young Soon Kim(CA, USA), Young Tai Han(Berlin), Yulgoo Lee(서울), 가은경(밀양), 간은균(화성), 강유사(일본 이바라키현), 姜裕聖(日本), 姜スルギ(東京), 강경란(광명), 강다복(김제), 강동균(서울), 강란솩(고양), 강륭정(日本 兵庫県), 강미현(수원), 강민정(서울), 姜福美(日本), 강사용(당진), 강선래(경주), 강성봉(안산), 강성운(전북), 강성주(제주), 강성준(광주), 강신우(안산), 강영경(경남), 강영숙(제주), 강유선(東京), 강윤식(진주), 강인석(창원), 강인식(공주), 강재형(서울), 강정숙(서울), 강정연(서귀포), 강주수(서울), 강행옥(광주), 강형구(서울), 강호석(울산), 강훈식(전주), 고선미(전주), 고성준(수원), 고은영(서울), 고은하(전주), 고재성(진도), 고정호(화성), 공연배(광주), 곽노진(서울), 곽다원(서울), 곽미예(고양), 곽분이(경기 광주), 구복이(부산), 구용기(광주), 구자숙(김천), 구태희(서울), 국주영은(전주), 권계영(서울), 권낙기(서울), 권말선(용인), 권미강(서울), 권수희(부여), 권영국(경주), 권영제(화성), 권영준(전주), 권오혁(서울), 권용덕(고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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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라아 테러분자들이 남긴 두 개의 대규모 무기창고 발견-사진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8/08/11 09:51
  • 수정일
    2018/08/11 09:51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다라아에서 미, 이스라엘제 무기 대량 발견
 
번역, 기사 이용섭 기자 
기사입력: 2018/08/11 [06:06]  최종편집: ⓒ 자주시보
 
 

탈환된 다라아에서 테러분자들이 남긴 두 개의 무기창고 발견

 

아래 사나통신 보도에 대해서는 분석은 하지 않는다. 해당 기사에 올라온 여러 장의 사진들을 함께 올려준다. 사진은 영문 원본 아래에 올려준다.

 

 

----- 번역문 전문 -----

 

다라아의 테러분자들이 남긴 두 개의 대규모 무기창고 발견

▲ 미국과 이스라엘에서 생산된 엄청난 량의 무기와 탄약이 수요일 다라아 북서부 외곽에 있는 알-하라 도심에 대한 정리 작전을 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수리아 관할관청의 공무원들은 현지인들과 협력하여 정확한 정보를 기초로 수색작전을 벌여 테러분자들이 무기와 탄약을 은신하기 위해 사용을 했던 8~12m에 이르는 지하 동굴 주변지역과 알-하라도심 등 테러조직들이 사용하였던 두 개의 대규모 무기저장고를 발견하였다.     ©이용섭 기자

 

2018년 8월 8일

 

다라아, 사나통신-미국과 이스라엘에서 생산된 엄청난 량의 무기와 탄약이 수요일 다라아 북서부 외곽에 있는 알-하라 도심에 대한 정리 작전을 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한 관리는 관할관청의 공무원들은 현지인들과 협력하여 정확한 정보를 기초로 수색작전을 벌여 테러분자들이 무기와 탄약을 은신하기 위해 사용을 했던 8~12m에 이르는 지하 동굴 주변지역과 알-하라도심 등 테러조직들이 사용하였던 두 개의 무기저장고를 발견하였다고 사나통신에 말하였다.

 

노획된 무기의 종류들(원문-포함한): 자동소총 탄알(원문-탄약), 기관총, 탱크발사용 포탄, 충전기가 장착된 휴대용 대전차 미사일 발사기(Rocket Propelled Grenade launcher-RPG), 수류탄들, 미국과 이스라엘에서 생산된 23mm 대공포 및 반탱크 미사일 들이다.

 

노획된 것 중의 하나는 가스 마스크, 방호복과 현대적인 통신장치를 포함한 소위 말 하는 “하얀 철모(화이트 헬멧)”들이 사용한(원문-위한) 군수품들이 포함되어 있었다.(화학무기는 하얀 철모들이나 테러분자들이 사용을 했다는 간접적인 증거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 원문 전문 -----

 

Two weaponry caches of terrorists’ remnants discovered in Daraa

▲ 미국과 이스라엘에서 생산된 엄청난 량의 무기와 탄약이 수요일 다라아 북서부 외곽에 있는 알-하라 도심에 대한 정리 작전을 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수리아 관할관청의 공무원들은 현지인들과 협력하여 정확한 정보를 기초로 수색작전을 벌여 테러분자들이 무기와 탄약을 은신하기 위해 사용을 했던 8~12m에 이르는 지하 동굴 주변지역과 알-하라도심 등 테러조직들이 사용하였던 두 개의 대규모 무기저장고를 발견하였다.     © 이용섭 기자


8 August، 2018

 

Daraa, SANA-Large amounts of weapons and ammunition, some of which are US and Israeli made, were discovered on Wednesday during the sweeping operations in al-Hara town in Daraa northwestern countryside.

 

An officer told SANA that members of competent authorities, based on accurate intelligence in cooperation with the locals, found two caches for terrorist organizations in al-Hara town and the area surrounding it about 8 to 12 meters under the ground which were used by terrorists to hide weapons and ammunition.

 

The seized weapons included: ammunition for automatic rifles and machine guns, tank shells, RPG launchers with their fillings, grenades, mines, 23mm anti-aircraft machineguns and anti-tank missiles manufactured in US and Israel.

 

One of the caches included munitions for the so called “White Helmets”, including 

gas masks, protective clothes and modern communication devices.

 

다라아의 테러분자들이 남긴 두 개의 대규모 무기창고에서 발견된 무기 사진들

 

사진, 1

▲ 무기 사진, 1     © 이용섭 기자


사진, 2

 

▲ 사진, 2하얀 철모들이 사용했던 무장장비들로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 이용섭 기자

 

사진, 3

 

▲ 사진, 3하얀 철모들이 사용했던 각종 장비들. 그 중에는 화학무기방지용 마스크도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 이용섭 기자

 

사진.  4

 

▲ 사진. 4기관총, 대포 등 발견된 무기들이 엄청나다. 한 갓 테러집단들이 사용했던 무장장비라고는 도저히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그 규모가 엄청나다.     © 이용섭 기자

 

사진, 5

 

▲ 사진, 5대포, 포탄알, 통신장비 등 발견된 무기와 무장장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다양하고 대규모이다.     © 이용섭 기자

 

사진, 6

 

▲ 사진, 6다라아 두 곳의 병기창고(병참)에서만 발견된 무기 및 무장장비가 이 정도이다. 참으로 어마어마한 무기와 무장장비들이다.     © 이용섭 기자

 

사진, 7

 

▲ 사진, 7놀랍다고 밖에 더 이상 할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이다.     © 이용섭 기자

 

사진, 8

 

▲ 사진, 8     © 이용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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갯끈풀 ‘갯벌 사막화’ 불러, 조개·게·낙지 사라진다

갯끈풀 ‘갯벌 사막화’ 불러, 조개·게·낙지 사라진다

육근형 2018. 08. 09
조회수 1791 추천수 1
 
연 50% 성장, 퇴치 어려워 세계적인 골칫거리
문제는 시간 싸움, 미국에선 제초제 살포 결단
 
g0.jpg» 국립해양생물자원관과 해양환경공단 직원들이 7일 충남 서천군 송림갯벌에서 갯끈풀 제거작업을 벌이고 있다. 갯끈풀의 성장속도가 워낙 빨라 시급한 대책이 요청되고 있다. 국립해양생물자원관 제공.
 
우리의 경제발전이 세계 어느 나라보다 빠르게 진행되었던 만큼 환경관 또한 급변했다. 여기에는 굵직한 환경 사건이 자리 잡고 있다. 2000년 초반 새만금 간척사업이, 후반에는 4대강 사업이 논란을 불렀다. 갯벌과 강이 그 과정에서 상처를 입었지만, 우리 사회가 자연자원을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행히 새만금 간척 이후 우리나라에서 갯벌은 더는 매립이나 간척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다. 2003년 갯벌 면적이 2550㎢, 2008년 2489㎢였고, 가장 최근인 2013년 조사에서 2487㎢로 지난 10년 사이 불과 2.5%만 줄었다. 더욱이 최근 두 번의 조사에서 나타난 면적 변화는 2㎢로 매우 미미하다. 
 
2001년 무안 갯벌을 습지보호지역으로 처음 지정한 이후, 올 초 기준으로 총 14곳을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했다. 그동안 연평균 1개소꼴로 지정해 왔고 습지보호지역의 총면적은 235.81㎢에 달한다. 우리나라 갯벌 전체 면적의 약 9.4% 수준이다. 환경부에서 지정한 낙동강하구 습지(34㎢)나 갯벌이 대부분인 가로림만에 지정된 해양생물보호구역(91㎢)까지 합하면 이미 갯벌의 10% 이상이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최근에는 서남해안의 갯벌 1200㎢를 추가로 지정할 예정이고, 세계자연유산 지정까지 추진 중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 갯벌의 40% 이상이 보호구역으로 지정되는 셈이다. 
 
대서양 원산 갯끈풀, 애초 해안 침식 방지용 도입
 
갯벌에서 간척이 줄어들고 보호구역이 늘어난 것은 중요한 성과이다. 하지만 최근 갯벌에는 반갑지 않은 손님도 나타났다. 그 손님은 아쉽게도 전 세계적으로 악명이 높은 ‘외래생물 100종’에 이름을 올린 종이다. 바로 갯끈풀이다. 이미 작년부터 우리 언론에도 종종 등장하던 이 생물은 영국갯끈풀(Spartina anglica)과 갯줄풀(Spartina alterniflora) 두 종인 것으로 확인된다. 본래 대서양 연안에 자생하던 종이었으나 지금은 중국을 비롯해 아시아와 태평양 연안까지 분포한다. 뿌리가 깊고 기수 지역에 밀집해 분포하는 특성 덕분에 영국이나 중국에서는 해안 침식을 방지할 목적으로 의도적으로 들여오기도 했다.
 
g2.jpg» 원산지인 영국의 갯끈풀. 다른 나라에서 생태계를 심각하게 교란시키는 침입종이 되고 있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g3.jpg» 갯줄풀.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갯끈풀이 들어서면 단순히 새로운 종이 하나 늘어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갯끈풀은 워낙 생장력이 왕성한 데다 뿌리와 잎이 매우 밀집해서 자란다. 이른바 갯벌을 ‘녹색 사막’으로 황폐화시키는 수준이다. 녹색으로 된 경관을 제공하지만 갯벌의 1차 생산과 먹이망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기 때문이다. 
 
갯벌에는 육상의 산림처럼 나무와 풀이 없다. 갯벌에도 칠면초 같은 염생식물이 일부 있지만, 대부분의 1차 생산은 갯벌 표면에 있는 미세 규조류가 담당한다. 작은 미세조류가 뜨거운 햇볕을 받아 광합성을 한다. 조개나 게는 이를 먹이로 삼으면서 먹이그물이 형성된다. 문제는 갯끈풀이 자라면 이 먹이망이 처음부터 단절되고 만다. 조개나 게, 갯지렁이가 먹을 것이 없어지기 때문에 낙지나 바닷새 역시 갯벌을 찾을 필요가 없다. 하물며 조개와 낙지를 채취하는 어민들에게는 더 치명적이다. 갯벌의 생태계 전체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꼴이다. 우리나라에서 갯끈풀이 아직 어업면허가 있는 양식장까지 본격적으로 침투하지는 않았지만, 이들의 놀라운 확산속도를 보면 수산업에 미칠 영향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기하급수적인 확산속도와 끈질긴 생명력
 
갯끈풀은 얼마나 빠르게 번질까? 갯끈풀이 처음 보고된 진도에서 진행된 박정원 외(2015)의 연구1)를 보면, 2008년 처음 나타난 갯끈풀의 면적은 11.5㎡였는데, 2009년 21.85㎡, 2011년 239㎡이다가 2015년에는 약 6400㎡로 늘어났다. 강화 화도면 동막리 앞 갯벌에서도 2015년 400여㎡가 발견되었는데, 이후 2년 사이 1만9791㎡로 늘었다. 가히 기하급수적이다.2)
 
갯끈풀은 씨앗을 바람에 날려 먼 지역까지 퍼트리기도 하고, 제자리에서는 대나무처럼 뿌리를 옆으로 뻗어 개체를 늘려 간다. 때문에 갯끈풀의 뿌리까지 제거하지 않고 잎만 잘라내면 곧 살아남은 뿌리에서 잎이 올라온다. 갯끈풀을 뽑아내더라도 이를 태우거나 다른 곳으로 옮겨 처리하지 않고 해안가에 그대로 두었다가는 밀물에 휩쓸려 더 먼 곳에 정착하기에 십상이다. 중앙정부나 지자체가 돈을 들여 일일이 제거하기 시작했지만 이를 막기 쉽지 않은 형편이다. 
 
캘리포니아, 2000년대 이후 갯끈풀 제거에 총력 
 
갯끈풀이 우리에게는 최근에 유입한 외래종이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어떨까? 갯끈풀이 비록 미국에 접해 있는 대서양 연안이 원산지이지만, 북미 대륙 반대편 태평양 연안의 캘리포니아 해안에서는 갯끈풀이 외래 침입종에 해당한다. 캘리포니아의 태평양 연안에 본래 있던 생물이 아니다. 캘리포니아에서는 2000년 주 내의 관련된 정부 및 비정부 기구들이 모여 ‘침입 갯끈풀 프로젝트(Invasive Spartina Project, ISP)’를 시작했다. 종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는 주 내 전 지역에서 협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프로젝트의 재원은 캘리포니아 주 정부의 ‘만과 삼각지 프로그램(CALFED Bay-Delta Program)’이나 미 연방 해양대기국(NOAA) 산하의 ‘어류 및 야생 생물국(US Fish and Wildlife Service Coastal Program)’을 비롯해 ‘캘리포니아 연안보전 단체(California State Coastal Conservancy)’ 등 여러 기관에서 확보했다. 이 프로젝트에 따라 연방정부와 주 정부로부터 광범위한 업무를 위임받아 갯끈풀의 확산범위를 모니터링하거나, 제거 방식별로 환경 영향을 검토하고, 이에 따라 연간 방제 계획을 수립해 갯끈풀을 제거하고 있다. 
 
프로젝트 초기에는 주로 해역별로 어떤 종이 어디에 얼마나 분포하는지 조사해 이를 지도에 표시하는 모니터링 활동에 주력했다. 아래 그림처럼 샌프란시스코만을 대상으로 출현하는 종과 서식밀도까지 포함된 상세한 모니터링 결과가 지도에 표시되어 있다. 그 결과 갯끈풀 모니터링을 처음으로 완료한 2005년 기준으로 캘리포니아만 안에는 132개 사이트, 1200에이커(약 4.9㎢)에서 갯끈풀 군락이 확인됐다. 캘리포니아 만에서 갯끈풀 분포를 모니터링하는데 약 3년간 160만 달러, 한화 약 20억 원의 비용이 들었다.3)
 
g4.jpg» <그림> 2004 샌프란시스코 하구 갯끈풀류 분포 지도. 붉은 부분이 갯끈풀 분포 지역. 침입 갯끈풀 프로젝트 제공.
 
모니터링을 통해 샌프란시스코만에서 갯끈풀의 확산범위를 확인했지만 정작 문제는 어떤 방법을 쓰고 어디부터 제거하느냐다. 갯끈풀을 제거하는 가장 기초적인 방법은 삽이나 트랙터, 굴착기와 같은 장비를 동원해 갯끈풀을 뿌리까지 뽑아내는 것이다. 또는 햇빛을 막을 수 있는 덮개로 갯끈풀 군락을 덮어 고사시키거나, 꽃이나 씨가 퍼지기 전에 태우거나 베어 버리는 방법도 있다. 이런 물리적인 제거방법은 제거율이 90% 이상으로 높지만 일일이 사람이 하다 보니 제거 작업의 속도가 매우 더디고, 특히 인력과 장비를 사용해야 해서 비용도 매우 많이 든다. 
 
뜻밖의 평가 결과, 제초제 사용이 환경 영향 더 적다
 
한편 캘리포니아에서는 물리적인 제거방법과 함께 화학적인 방법도 고려했다. 미 환경보호청(EPA)은 물론 캘리포니아 살충제 규제부서(California Department of Pesticide Regulation, CDPR)에서는 갯끈풀 방제용으로 국내에서도 사용 중인 제초제인 글리포세이트와 이마자피르를 허가했다(우리나라에는 ‘식품의 기준 및 규격’에 잔류허용기준이 설정되어 있다.4) 
 
이 두 제초제는 모두 잎을 통해 뿌리까지 성분이 전달되고, 갯끈풀의 특정 효소와 단백질 합성을 막아 세포 성장을 방해한다. 갯끈풀에 미치는 효과는 비슷하지만 제초제가 잎에 잘 도달하는지에 따라 갯끈풀 제거율에 차이가 난다. 이마자피르는 차량에서 뿌리거나 헬기로 뿌려도 약 80%의 제거율을 보이지만, 글리포세이트는 헬기에서 뿌리면 제거율이 30%까지 크게 떨어진다. 일반적으로 갯끈풀의 확산속도를 연간 50%까지 잡는 것과 비교할 필요가 있다. 
 
캘리포니아에서는 어떤 제거방법을 쓸지 결정하기 전에 제거방법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비교했다.5) 특히 지역 대표 생물인 캘리포니아 뜸부기에 끼치는 영향을 제거방법별로 살펴보면서 갯끈풀 확산속도와 비교하여 제거방법의 효과를 종합적으로 살펴봤다.  
 
평가 결과는 필자의 예상과 달리, 아니 대부분의 예상과 달리 화학적인 방법이 물리적 방법보다 환경에 끼치는 영향이 오히려 적다는 것이다. 제초제를 뿌리면 단기적으로는 영향이 있으나, 갯끈풀의 빠른 확산속도를 줄여 장기적인 영향을 제거하는 이득이 더 크다고 봤다. 또한 물리적 방법으로 갯끈풀을 제거할 때 발생하는 물리적인 교란이 갯벌에 더 크고 오래 영향을 준다는 점, 그리고 물리적 방법으로는 제거 속도에 한계가 있어 갯끈풀의 확산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물론 캘리포니아의 환경이나 관리여건이 우리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캘리포니아에서는 갯끈풀 제거방법의 환경 영향을 검토하면서 지형과 수문학적 영향, 수질, 생물자원, 대기질, 소음, 인간 보건, 경관, 토지이용, 문화 자원, 사회경제학, 환경정의, 누적영향 등을 분야별로 고려하여 결론을 내렸다는 사실은 고려할 필요가 있다.
 
캘리포니아에서 갯끈풀 제거의 기본전략은 가능한 한 빨리, 그리고 전 영역에서 동시에 제거한다는 것이다. 갯끈풀은 연간 50% 이상 분포범위가 늘어나고 심지어 초기에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캘리포니아에서는 갯끈풀의 확산속도에 주목해 갯끈풀을 ‘생물학적 오염’으로 정의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어떤 방법이건 갯끈풀을 즉시 제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봤다. 
 
캘리포니아에서는 갯끈풀의 공간분포, 그 영향을 고려한 제거 전략, 환경 영향을 고려한 제거방법을 확정하고 난 후 지역별로 상세한 제거 계획을 세워 실제 제거 작업을 시행했다. 특히 갯끈풀의 분포 외곽지역이나 갯끈풀이 다른 바다로 퍼져 나가는 병목 지점을 우선 고려했다. 또한 제거 계획에는 지역별로 어떤 방법을 쓸지도 고려했는데 제초제를 살포하는 화학적 방법이 전체의 90% 이상에서 적용되었고, 일부 보호 생물이나 민감한 환경에서만 물리적 제거방법을 사용했다.  
 
우리나라에 침입한 갯끈풀, 확산경로와 공간 분포도 불분명
 
g5.jpg» 강화도 남단 동막리 갯벌에 갯끈풀이 번성한 모습. 지난해 7월 촬영한 사진이다. 김정수 선임기자
 
국내에서 갯끈풀은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전라남도 진도를 시작으로 북으로는 강화도 남서쪽 해안, 그리고 작년부터는 충남의 서천 앞바다에도 나타났다. 문제는 이들이 어디서 처음 나타났고, 어떻게 전파되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퍼져 나갈지를 짐작하기 매우 어렵다. 더욱이 어디까지 갯끈풀이 퍼져 있는지에 대한 분포 조사 역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진도에서는 국립공원관리공단의 전문가들이 확인했고, 강화에서는 보호구역 지정을 위해 노력하던 지역대학과 민간단체에서, 그리고 서천의 군락은 인근에 있는 국립해양생물자원관의 전문가들이 발견했다. 갯끈풀의 심각성을 아는 전문가들이 본격적으로 찾아 나선다면 더 많은 곳에서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캘리포니아에서도 갯끈풀 통제 프로그램에서 처음 한 일은 갯끈풀이 얼마나 퍼져 있는지를 확인하는 일이었다. 사실 갯끈풀은 유사한 갈대나 지체와 같은 종을 구분하는 간단한 교육만 받으면 어렵지 않게 구분할 수 있다. 적어도 종 구분에 대한 지침이나 갯끈풀 확산의 심각성을 담은 자료를 연안의 지자체나 전국의 어촌계에 배포해 주변의 바닷가에서 확인하는 일부터 시작할 수 있다. 의심스러운 곳은 전문가들이 가서 확인하면 될 일이다.
 
g1.jpg» 수작업으로 갯끈풀을 제거하는 것은 매우 힘들다. 갯끈풀의 확장 속도가 제거 속도를 앞지른다면 갯벌 보호를 위해 특단의 대책을 세워야 할지 모른다. 국립해양생물자원관 제공.
 
정부는 작년부터 수작업과 장비를 동원해 갯끈풀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지금과 같은 수작업에 기초한 제거 작업으로 갯끈풀의 확산속도를 잡을 수 있는가이다. 개인적으로 강화의 제거 작업에 참여해 보니, 발이 푹푹 빠지는 갯벌에서 삽을 들어 땅을 파고 갯끈풀을 골라내기 쉽지 않았다. 요즘 같은 찌는 더위와 작렬하는 햇볕 아래에서 작업은 더욱 힘들 것이다. 굴삭기 같은 장비가 있으면 땅을 뒤집어 놓기는 조금 수월하지만, 결국 그 안에 있는 갯끈풀을 골라내고 해안가로 옮겨야 한다. 갯끈풀이 갯벌 아래쪽까지 퍼져 있고 땅이 무르다면 무한궤도로 움직이는 굴삭기도 무용지물이 되기 쉽다. 인력만으로 제거하려면 많은 인원이, 오랜 기간 작업할 수밖에 없다. 
 
우리 갯벌에는 워낙 어장이 많다. 어업면허를 내준 면적이 갯벌 면적의 40%에 달할 정도다. 갯골이거나 토질이 안 맞는 곳을 빼고 웬만한 곳은 바지락과 같은 패류의 양식장으로 쓰인다. 그러다 보니 갯끈풀 제거방법에 화학물질 사용을 배제한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갯끈풀의 확산속도다. 갯끈풀이 일단 들어온 곳은 양식장으로 사용하기 어렵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당장 갯끈풀이 들어서면 패류가 살기 어려워지는 것은 물론이고, 빽빽하게 자라는 갯끈풀의 생육 특성 때문에 퇴적물이 그 사이에 쌓이면서 땅의 높이도 올라가 육지화한다. 한번 들어왔을 때 빨리 제거하지 않으면 이제 그곳은 더는 우리가 알던 갯벌이 아니다. 
 
무엇보다 갯끈풀이 확산하는 초기에 대응하는 것이 중요하다. 군락이 작고 둥근 조각일 때는 삽이건 장비를 가지고 제거하기 쉽다. 그런데 작은 조각이 커지고 다른 조각과 합쳐지면 접근로조차 확보하기 어려워진다. 갯벌이 넓어서 갯끈풀 군락이 작아 보일지는 몰라도 막상 갯끈풀 군락 앞에 서보면 엄청난 물량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단독주택의 작은 마당을 가진 사람에게 가장 큰 곤욕은 잔디밭 사이에 난 잡풀을 제거하는 일이다. 갯끈풀은 잔디밭 가꾸는 일과는 차원이 다르다. 
 
쉽지 않은 제거방법, 갯벌을 갯끈풀에 내줄 것인가?
 
05798464_P_0.JPG» 강화도 갯벌에 점점이 분포하는 갯끈풀. 정확한 실태조사가 먼저다. 해양수산부 제공.
 
제초제를 쓰면 수작업으로 일일이 제거하는 것에 비하면 비용도 적게 들뿐더러 한두 사람이 드론과 같은 장비만 있으면 넓은 면적에서 빠른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문제는 갯벌에서 아무리 조심해서 제초제를 뿌린다고 해도 주변 양식장에 흘러들어 가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결국 무엇을 선택할지에 관한 문제가 된다. 예를 들어 갯끈풀이 퍼지더라도 이 역시 또 다른 생태계이니 그대로 둘 수도 있다. 과거 생태계와는 다르겠지만 우리가 알 수 없는 새로운 생태계를 구성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갯끈풀을 경관적으로 좋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만약 갯끈풀을 제거하고자 한다면 어떻게 제거할지 선택해야 한다. 제초제의 영향을 무릅쓰고라도 갯끈풀을 빠르게 제거하고 장기적으로 갯벌을 유지할 것인지, 아니면 갯끈풀의 확산 우려를 안고 가더라도 물리적으로 뽑아내는 방법을 선택할 것인가? 이를 위해서는 감당하기 힘든 수준의 비용 부담도 같이 고려해야 한다. 
 
어떤 결정이건 사실 가장 중요한 당사자는 갯벌을 지금 이용하고 있고 앞으로도 이용하려는 사람들이다. 갯벌을 소중하게 여기는 많은 사람들 역시 간접적으로 그 결정에 영향을 미치겠지만 결국 갯벌을 어떻게 관리할지에 대한 우리 사회의 입장이 중요하다. 또한 그 결정에 수반되는 인력과 경비와 같은 자원의 양에 관해서도 결정해야 한다. 갯벌의 상당한 면적을 보호구역으로 지정했지만, 정작 지금 갯벌에서 중요한 사실은 갯끈풀 같은 종 하나를 어떻게 관리할지에 달려 있다. 중요한 것은 디테일에 있다.
 
글·사진 육근형/ 한국해양수산개발원 연구위원, 환경과 공해연구회 운영위원

1) 박정원, 김하송, 장성건, 천숙진, 육관수, 2015, 지상라이다를 이용한 미기록 외래종 갯쥐꼬리풀(Spartina alterniflora)의 분포특성과 관리방안 연구, 한국도서연구, 27(3): 161-177. 

2) 해양수산부 바다생태정보나라(유해교란생물) (http://www.ecosea.go.kr/haanglica/marineharmful/marineharmful09.do)

3) https://nrm.dfg.ca.gov/FileHandler.ashx?DocumentID=5221

4) 글리포세이트와 이마자피르는 ‘식품의 기준 및 규격’ 상 ‘농약 잔류허용기준’과 ‘축수산물의 잔류물질 잔류허용기준’ 등에 포함돼 있으며, 작물의 종류에 따라 글리포세이트는 0.05~20ppm까지, 이마자피르는 대두에 3.0ppm까지 허용기준이 설정되어 있다.

5) http://www.spartina.org/Spartina_Final_EIR/Spartina_Final_EIR.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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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전화요금 폭리 취했던 SK텔레콤의 착각

[取중眞담] 국가 기간통신망 두고, 정부지원땐 ‘공공재’, 규제땐 ‘민간기업’

18.08.10 07:57l최종 업데이트 18.08.10 07:57l

 

 

[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롭게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큰사진보기 녹색소비자연대와 소비자공익네트워크 등 6개 통신.소비자 시민단체 회원들이 16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통신비의 선택약정 할인율 25% 상향조치를 신규 가입자 뿐 아니라 약 1300만명에 달하는 기존 가입자에 대해서도 소급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  녹색소비자연대와 소비자공익네트워크 등 6개 통신.소비자 시민단체 회원들이 지난해 8월 16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통신비의 선택약정 할인율 25% 상향조치를 신규 가입자뿐 아니라 약 1300만 명에 달하는 기존 가입자에 대해서도 소급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 최윤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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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 기업의 (제품)원가를 공개하라는 것 자체가 적정한가요?"

휴대전화 요금 원가 공개 법안과 관련한 입장을 묻자 SK텔레콤 기업PR팀 직원은 신경질적으로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민간 기업의 영업 비밀은 보호받아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게다가 휴대전화 요금 원가는 통신사들에겐 핵심 정보입니다. 공개를 꺼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논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긴 어렵습니다. 통신(유무선 통신망 등을 말함)은 공공재입니다. 이동 통신이 공공재냐 아니냐를 놓고 논란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법원은 지난 4월 이동통신사들의 휴대전화 요금 원가를 공개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리면서 '통신의 공공재적 성격'을 인정했습니다.

 

대법원은 "이동통신 서비스가 전파와 주파수라는 공적 자원을 이용해 제공되는 만큼 합리적인 가격에 제공돼야 할 공익이 인정된다"고 했습니다. 공공재이기 때문에 휴대전화 요금 원가도 공개해야 한다는 것이죠.

한 가지 더 있습니다. 통신은 국가 기간산업입니다. 이 때문에 SK텔레콤과 KT, LG유플러스 등 통신사들은 통신 기술을 연구, 개발할 때, 정부의 정책적 지원을 받습니다.

'통신 기술개발' 막대한 예산 지원받으면서, 요금 원가 공개 요구에 '영업비밀'

현재 서비스 중인 LTE(4G)를 비롯해, 향후 상용화될 5G 이동통신 개발에도 통신사에 대한 정부 지원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SK텔레콤의 경우, 양자암호 통신 등을 개발하면서 막대한 정부 예산을 지원 받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 때문에 통신사들이 보유한 통신기술도 순수하게 민간 기업의 것으로 볼 순 없습니다. 만약 통신 서비스에 시장경제 논리를 적용해야 한다면, 정부의 각종 지원도 끊는 게 맞습니다. 시장경제 논리로 돌아가는 분야에 정부가 지원을 한다는 건 '특혜'니까요.

정부 지원을 받을 땐, 가만히 있다가 정부가 규제를 하려고 하면 '시장 경제' 논리를 외치는 업계 행태도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휴대전화 요금 원가공개 법안을 발의한 김경협 의원실의 한 관계자는 "통신원가정보가 민간기업 정보라는 것은 대법원 판결의 취지를 무시하는 행태"라고 꼬집었습니다.

이 관계자는 "사실 통신은 공공재지만 실제 사업은 민간이 하고 있어 구분이 애매했는데, 대법원의 통신원가 공개 판결은 이런 부분에 대해 결론을 내린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이동통신사들은 그동안 휴대전화 요금 원가 정보를 숨기면서 폭리를 취해왔습니다. 참여연대가 지난달 공개한 자료를 보면, 지난 2004~2010년 이동통신사들의 원가 보상률은 기본 100%가 넘었고, 최대 140%에 달하는 곳도 있었습니다.

통신 3사 중 SK텔레콤, 2G 원가보상률 최대 140% 폭리
 
큰사진보기 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는 5일 오후 서울 종로구 통의동 참여연대 강당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기본료 폐지를 비롯한 최근 통신비 현안에 대한 정책 대안을 발표했다.
▲  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는 지난해 7월 5일 오후 서울 종로구 통의동 참여연대 강당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기본료 폐지를 비롯한 최근 통신비 현안에 대한 정책 대안을 발표했다.
ⓒ 김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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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원가 보상률이란 원가 대비 영업이익입니다. 원가 보상률이 140%이라면, 통신서비스 제공을 위해 통신사가 투자한 돈이 100원이라면, 소비자들에게 휴대전화 요금으로 140원을 챙긴 겁니다. 100원의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40원을 받았으니 폭리라고 해도 무리가 없습니다.

통신 3사 중 가장 비싸게 원가보상을 가져간 곳은 업계 1위, SK텔레콤입니다.

SK텔레콤의 2004~2010년 2G사업 원가 보상률을 보면, 2006년 123.08%, 2008년 134.99%로 증가했고, 2010년에는 무려 140.65%를 기록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100원짜리 물건을 140원 받고 팔았다는 겁니다.

그럼 다른 통신사들은 어떨까요? 같은 기간 KT의 원가 보상률은 95.46~111.72%였고, LG유플러스도 91.30~105.60% 수준이었습니다. 경쟁사인 SK텔레콤보다는 훨씬 낮은 수준입니다.

참여연대 관계자는 "SK텔레콤의 경우 2G서비스를 통해 매년 17~40%의 영업 수익을 걷었다"면서 "소비자들로부터 과도한 요금을 통해 폭리를 취한 것"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시장논리가 그대로 통용됐다면, SK텔레콤은 일찌감치 소비자들의 외면을 받았을 겁니다.

이렇게 보면 SK텔레콤이 휴대전화 원가 정보를 '민간 정보'라며 예민해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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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특활비 공개거부에 시민단체 국가배상청구 소송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8/08/10 12:57
  • 수정일
    2018/08/10 12:57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세금도둑잡아라’ “형법상 직무유기 고발도 검토”… 하승수 변호사 “문희상 의장, 항소 철회하라”

강성원 기자 sejouri@mediatoday.co.kr  2018년 08월 10일 금요일
 

국회 사무처가 20대 국회 특수활동비 등을 공개하라는 1심 법원 판결에 불복하고 항소하자 소송을 제기한 시민단체가 국가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하기로 했다.

예산감시 전문 시민단체 ‘세금도둑잡아라’는 10일 “국회가 두 차례에 걸친 대법원 판결을 무시하고 2014년 이후의 특수활동비 집행내역을 비공개하고 있는 것에 오는 14일 국가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하겠다”고 밝혔다.

하승수 세금도둑잡아라 공동대표(변호사)는 “대법원 확정판결이 두 차례나 내려진 정보에 대해 공개를 거부하는 것은 명백한 불법행위”라며 “과거에 행정심판위원회의 결정을 무시한 서울시의 정보공개거부에 대해 국가배상 책임을 인정한 판결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하 대표는 지난 2009년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 소장으로 있으면서 그해 4월 서울시의 광고비 관련 정보공개 청구를 했다. 이에 서울시가 비공개하자 하 대표는 행정심판을 제기했고 2010년 2월 중앙행정심판위원회가 정보를 공개하라고 결정했다.

하 대표는 행정심판과는 별개로 ‘공무원의 위법적인 비공개 결정으로 청구인에게 정신적 피해를 줬다’는 취지로 국가배상청구소송(위자료청구소송)을 제기했는데, 2011년 2월17일 서울중앙지법(민사14단독)은 청구인의 정신적 피해 인정해 서울시와 담당 공무원에게 100만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 지난 8일 SBS ‘8뉴스’ 리포트 갈무리.
▲ 지난 8일 SBS ‘8뉴스’ 리포트 갈무리.
 

세금도둑잡아라는 20대 국회 특활비 등 정보공개 소송 건과 관련해 국회가 끝내 공개를 계속 거부할 경우 국회 관계자들을 형법상 직무유기로 고발하는 것도 검토할 방침이다.

 

앞서 지난달 19일 하 대표가 국회사무처를 상대로 낸 정보공개거부처분 취소 소송에서 서울행정법원은 “2016년 6월부터 12월까지의 국회 특활비와 업무추진비, 예비금, 의장단 및 정보위원회 해외출장비 세부집행내역을 공개하라고 판결했다.

하지만 지난 9일 국회는 법원에 항소장을 제출했고, 이에 하 대표는 “많은 언론과 시민이 국회가 항소를 포기하고 정보를 공개할 것을 촉구했음에도 국회가 끝내 항소한 것은 자체 개혁을 할 능력도, 의지도 없는 기관이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라며 “항소에 들어가는 비용도 국민 세금이라는 점에서 국민의 알 권리 실현을 가로막기 위해 세금을 마음대로 쓰는 국회의 행태는 파렴치하다”고 비판했다.

하 대표는 문희상 국회의장을 향해서도 “이런 식의 소송전을 계속할 것인지 판단해야 한다. 우리는 국회가 지금이라도 잘못된 결정을 철회하고 정보를 공개하기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정보를 철저하게 공개하게 할 것이며, 관련자들에 대해서는 법적 책임까지 물겠다”고 밝혔다. 

[관련기사 : 문희상 의장, 국회 특수활동비 공개 불복해 항소]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http://www.mediatoday.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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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도기로 밀어낸 듯...하늘에서 본 제주 비자림로 '황량'

[언론 네트워크] '비자림로를 지켜달라'는 국민 청원도 등장
2018.08.10 10:31:53
 

 

 

초록빛을 머금은 채 잘려나간 삼나무 이파리들은 숲 한 구석에 볼썽사납게 널브러져 있었다. 갓 베어진 나무 밑둥에 칠해진 파란 페인트, 일정한 간격에 맞춰 꽂힌 붉은 깃발은 푸른 숲과 부조화를 이뤘다. 

지난 2002년 '천혜의 자연경관이 잘 보존됐다'는 평가를 받으며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로로 선정된 제주 비자림로의 낯선 풍경이다.
 

▲ 도로확장 공사로 삼나무가 베여진 제주시 구좌읍 비자림로 공사 현장. ⓒ제주의소리


9일 오전 찾은 제주시 구좌읍 대천교차로 옆 지방도 1112도로. '비자림로'로 더 잘 알려진 이 곳은 왕복 2차선 도로를 4차선으로 넓히는 공사로 인해 예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 곳은 곧게 뻗은 삼나무가 길 양 옆으로 병풍처럼 늘어서 관광객은 물론 제주도민들의 사랑을 받았던 도로다. 동부지역 주요 관광지를 찾아가다 한 번쯤은 경유하기 마련이어서 이용자들에게 뜻밖의 힐링 선물을 안겨주곤 했다. 
 

▲ 공중에서 내려다 본 제주시 구좌읍 비자림로 확장공사 현장. ⓒ제주의소리(김제남)

 

▲ 아름드리 삼나무가 잘려나간 제주시 구좌읍 비자림로 확장공사 현장. ⓒ제주의소리



 

▲ 아름드리 삼나무가 잘려나간 제주시 구좌읍 비자림로 확장공사 현장. ⓒ제주의소리


그러나 지난주 시작된 도로 확장 공사로 인해 아름드리 삼나무가 하나둘 잘려나갔다. 

하루 100그루씩, 300그루의 삼나무가 사라지는데는 3일 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미 현장 곳곳에는 일정한 길이로 잘린 나무 기둥들이 켜켜이 쌓여있었다. 흙더미 속에 생기를 잃고 엉켜있는 뿌리는 어수선함을 더했다. 

계획대로라면 총 2000여 그루의 삼나무가 잘려나가게 됐다. 총 2.94km의 도로를 넓히는 이 사업은 현재까지 약 350m 구간에서 공사가 진행됐다. 

공중에서 내려다본 이 구간의 모습은 더욱 처참했다. 면도기로 밀어낸 듯 푸른 숲 한켠을 밀어젖힌 모습은 흉측하기 까지 했다.  
 

▲ 아름드리 삼나무가 잘려나간 제주시 구좌읍 비자림로 확장공사 현장. ⓒ제주의소리

 

▲ 아름드리 삼나무가 잘려나간 제주시 구좌읍 비자림로 확장공사 현장. ⓒ제주의소리

 

▲ 공중에서 내려다 본 제주시 구좌읍 비자림로 확장공사 현장. ⓒ제주의소리(김제남)


경관 훼손 논란이 제주를 넘어 전국적인 이슈로 번지자 공사는 급히 중단됐다. 굴삭기 엔진이 멈춰선 것은 사흘째다. 현재는 이미 잘린 삼나무를 정리하는 작업만 진행되고 있다.

관계 당국은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이날 현장에는 제주도청 고위 간부가 찾아와 그간의 추진 상황을 보고받고 있었다. 그는 취재진이 다가가자 "내 사진은 찍지 말라"며 다소 예민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제주도 관계자는 "한 쪽은 (공사를)중단하라 하고, 한 쪽은 계속하라 하니 고충이 크다"며 "양쪽의 의견을 충분히 듣고 고민을 해서 앞으로 공사를 어떻게 진행할 지 공식적인 입장을 발표할 때가 올 것"이라고 말했다. 

두 시간 남짓 삼나무숲 현장에 머물러 있는 동안 느낀 온도차는 해결 과제로 남아있다.

인근을 지나다가 차량을 멈춰세운 관광객 정상영(38)씨는 "삼나무 숲길을 쭉 타고 오면서 감탄하고 있다가 갑자기 휑해져 놀랐다. 이 곳이 뉴스에 나왔던 그 곳인가 싶더라"며 "꼭 숲을 훼손하면서까지 도로를 확장할 필요가 있나 싶다. 이미 잘린 나무들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남아있는 숲을 보존할 방법을 찾았으면 좋겠다"고 바람을 드러냈다.
 

▲ 공중에서 내려다 본 제주시 구좌읍 비자림로 확장공사 현장. ⓒ제주의소리(김제남)

 

▲ 아름드리 삼나무가 잘려나간 제주시 구좌읍 비자림로 확장공사 현장. ⓒ제주의소리

 

▲ 아름드리 삼나무가 잘려나간 제주시 구좌읍 비자림로 확장공사 현장. ⓒ제주의소리


실제 제주도내 환경단체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비자림로를 보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지난 8일과 9일 이틀간 '비자림로를 지켜달라'는 취지로 10개의 청원이 올라왔고, 이중 대표적인 글은 하루만에 청원인원이 1만명에 육박할 정도로 반응이 뜨겁다.  

반면, 이 구간의 상습적인 교통체증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도로 확장이 불가피하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이날 현장을 찾은 인근 지역구의 한 도의원은 "지역 주민들의 요구로 지난 7년간 준비해 온 숙원사업이다. 환경영향평가 등 정당한 절차를 거쳐 진행된 것인데 왜 이제 와서 (뒤늦게)문제를 제기하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볼멘소리를 냈다. 

인근 지역 주민들은 사업이 중단될 경우 집단행동까지 불사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프레시안=제주의소리 교류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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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 어쩌면 그렇게 잔인할 수 있느냐”

민가협 목요집회, 4주 연속 청와대 앞에서 '광복절 특사' 촉구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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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8.09  17:5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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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183차 민가협목요집회가 4주째 탑골공원에서 옮겨와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열렸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무슨 시간이 필요한가. 옥문을 열면 된다. 옥문 여는데 1초면 된다. 열고 내놓으면 된다. 오늘, 이제 며칠 안 남았다. 청와대는 지금이라도 모든 양심수 전원 석방, 국가보안법 철폐, 공안기구 해체 당장 실시할 것을 다시 한 번 촉구한다.”

8.15 광복절을 앞두고 9일 오후 2시, 4주 연속 탑골공원이 아닌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민가협 목요집회가 열렸다. 청와대는 올해 광복절에 대통령 특별사면복권을 실시할 계획이 없다.

광복절을 앞두고 마지막 열리는 제1183차 민가협목요집회는 권오헌 민가협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의 여는 말로 시작됐다. 권오헌 명예회장은 “목요집회는 93년부터 탑골공원 앞에서 계속했었는데 오직하면 장소를 옮겼겠느냐”며 “2004년 여의도에서 한 번 목요집회를 한 이후에는 처음이다. 이렇게 오늘 상황은 급박하다”고 말했다.

권오헌 명예회장은 “문재인 정부 출범 1년이 지났다. 이제는 늦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부끄러울 정도”라며 “양심수를 두고 무슨 새로운 정부, 건전한 나라, 민주주의와 인권이 발전하는 나라를 얘기할 수 있겠느냐”고 강한 어조로 비판했다.

   
▲ 권오헌 민가협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이 여는 말을 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특히 “오늘 또한 놀라운 소식이 하나 있었다. 옛날 한총련 투쟁국장을 했었고, 양심수후원회 회원이기도 했던 김호 회원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오늘 강제연행돼 조사받고 있다”며 “국가보안법 철폐 시대에 국가보안법을 다시 적용하는 이런 역사를 후퇴시키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지적하고 “요새 공안기구들이 제 기구의 보전을 위해서 이따위 짓을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든다”고 말했다.

권 회장은 “한상균 위원장이 가석방으로 나왔다. 사면이 되지 않았다. 한 사람도 양심수로 인정도 않고 사면을 하지 않았다. 이것은 박근혜 이명박과 똑같은 거다”라며 “말로는 인권과 민주주의를 주장한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거기에 가장 참혹한 피해를 당한 양심수들이 갇혀있다”고 비판했다.

내란선동 등으로 9년형을 선고받고 수원구치소에 수감 중인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의 누나 이경진 씨는 “참담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며 “작년 8월 1일 노숙을 시작해서 작년 여름도 뜨거웠지만 그 뜨거운 여름 지나고, 작년 겨울 눈바람 맞아가며 청와대 농성을 시작했다. 영하 20도 삭풍을 견디다가 이젠 40도가 넘고 50도가 넘는 이 폭염 앞에서 버티고 있다”고 말했다.

이경진 씨는 “380일 동안 청와대에서 누구 한 명 찾아온 사람 없다”며 “뻔히 알면서도 저는 그림자처럼 없는 사람 취급당해왔다”고 토로하고 “문재인 대통령, 어쩌면 그렇게 잔인할 수 있느냐”고 대통령을 겨냥했다.

특히 “양승태 등 일련의 진실들이 모두 밝혀진 지금, 억울하게 구속된 것이 백일하데 드러났는데도 이석기 의원은 석방 안 하면서, 김기춘은 구속 만료로 석방시키느냐”고 항변하고 “이석기 내란음모사건을 조직한 사람이고 또한 통합진보당 강제해산을 공작한 사람, 김기춘을 재구속하고 이석기 의원은 석방해줘야 하지 않겠냐”고 촉구했다.

   
▲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의 누나 이경진 씨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통합진보당 국회의원직을 상실했던 김미희 민중당 경기도당위원장이 발언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목요집회 사회를 맡은 이종문 한국진보연대 대외협력위원장은 “이석기 의원 대법 판결에서 양승태 대법원장이 사법농단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며 “2심 판결 판사가 행정처 기조실장이었던 이민걸이다. 양승태의 오른팔이다. 그리고 대법 판결에서는 사채업자한테 2억 6천만원 받은 판사의 비리를 감추기 위해서 이석기 의원 판결을 한 달 앞당겼다고 한다”고 적시하고 “구속되어야 할 사람은 바로 양승태”라고 주장했다.

통합진보당 국회의원직을 상실했던 김미희 민중당 경기도당위원장은 “통합진보당이 해산된 지도 만으로 4년이 돼가고 있다. 그리고 이석기 의원이 감옥에 갇힌 지 만으로 5년이 거의 다 되었다”며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된 지 1년 3개월이 다 되도록 아직까지도 양심수를 석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 국민들이 들으면 들은 분마다 믿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한다”고 밝혔다.

김미희 위원장은 “지금 문재인 대통령에 대해서 실망하고 등돌리고 있는 민심을 다시 돌아오게 하는 지름길”이라며 “양심수를 석방하는 것은 정리가 다 되어 있고 도장만 찍으면 된다. 빨리 사인하시라”고 촉구했다.

   
▲ 진보대학생넷 자주통일실천단 ‘통일로 통크게 가자’ 통통 단원들이 기자회견 직후 포즈를 취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진보대학생넷 자주통일실천단 ‘통일로 통크게 가자’ 통통 단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수민 학생은 “통통실천단은 한반도를 가르고 있는 분단적폐를 해소하고 평화통일을 불러오고자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고 있다”며 “지금 한반도를 가르고 있는 이 많은 적폐들을 철폐하려면 국가보안법 철폐가 시급하다. 지금까지 몇 년이 지나도록 정확한 죄명도 없이 잡혀있는 우리 양심수들 전원 석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순덕 민가협 상임의장은 “우리가 유례없이 목요집회을 4주째 이곳 청와대 앞에서 이석기 의원을 비롯해서 모든 양심수를 석방하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아무런 대답이 없다”며 “문재인 대통령이 꼭 이번에 양심수를 내주기를 우리 모두가 바란다”고 요구하고 “16일부터 다시 탑골공원 앞에서 목요집회를 2시에 한다”고 공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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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철수 통일선봉대, 사드배치 강행 문재인정부 규탄한다

미군철수 통일선봉대, 사드배치 강행 문재인정부 규탄한다
 
 
 
김영란 기자 
기사입력: 2018/08/08 [16:32]  최종편집: ⓒ 자주시보
 
 

 

▲ 8일 오전 '미군철수 통일아라리' 통일선봉대 대원들이 성주 소성리 마을회관 앞에서 '판문점선언 시대, 미국의 눈치보며 사드배치 강행하는 문재인 정부 규탄' 기자회견을 열었다.     © 자주시보

 

미군철수 통일아라리’ 소속 통일선봉대 대원들이 8일 성주 소성리 마을회관 앞에서 <판문점 선언시대 미국의 눈치 보며 사드배치 강행하는 문재인 정부 규탄한다>는 제목의 기자회견이 열렸다.

 

국민주권연대청년당()과 10대 청소년들로 구성된 20여 명의 통일아라리 대원들은 평화협정 체결과 주한미군 철수의 구호로 외쳤다아울러 판문점선언 역행하는 사드배치 철회하라사드배치 강행하는 문재인 정부를 규탄한다며 목소리를 하나로 모았다.

 

기자회견 참가자 일동은 문재인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은 대선 이전 사드배치를 반대한다고 했지만문 대통령 당선 이후 달라졌다며 한목소리로 문재인 정부와 여당을 강하게 규탄했다.

 

사회를 본 권오민 통일아라리 부대장은 사드 반대를 호언장담했던 문재인 정부는 미국의 눈치만 보고 사드배치를 강행할 것이 아니라 지금이라도 사드배치를 철회하고 한반도평화의 길로 나아갈 것을 촉구한다고 성토했다.

 

▲ 정달성 통일아라리 부대장은 성주 소성리는 판문점시대에도 전혀 변화가 없다며 문재인 대통령을 규탄하는 연설을 했다.     © 자주시보

 

정달성 부대장은 한반도를 보면서 세계 인류의 평화에 대한 이야기들이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2018년 이었다며 하지만 이곳 성주 소성리에 오면 대체 무슨 변화가 있었나 묻지 않을 수가 없다고 성토했다.

 

배주연 대원은 우리는 미군이 우리 땅을 짓밟고 행패부리는 지역을 방문하면서 주한미군 철수를 외치고 있다며 “2년 전 국민들의 외침에 귀를 막고 있는 정권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작년 봄 기적처럼 정권이 바뀌고 성주에도 당연히 찾아오리라 믿었지만 성주에 달라진 게 있었습니까?”라고 성토했다이어 배 대원은 우리는 또 뉴스를 국민들이 붙잡히고 눈물 흘리고 이들 앞으로 미국이 사드를 들고 들어오는 모습을 봐야했다면서 정부는 도대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지 의문스럽다고 말했다.

 

 

▲ 미군철수 통일아라리 통일선봉대는 국민주권연대, 청년당(준), 어린이청소년단체 세움이 함께 하고 있다.     © 자주시보

 

김지영 부대장은 평택에 매향리에 강정에 소성리에 의정부에 동두천에, (한반도어느 지역에 정말 피눈물 나지 않는 역사가 있었습니까라며 사람이 먼저라고 얘기했던 대통령이면 제발 사드철회 그리고 이 모든 땅에 미군철수가 반드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제발 노력해주셨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이날 집회는 사드배치 철회에 나서지 않는 문재인 정부를 풍자하며 사드배치 철회를 촉구하는 상징의식을 끝으로 마무리됐다한 여성참가자는 성주 할머니들과 비슷한 복장을 갖춰 입고 찌푸린 표정을 지으며 대통령님사람이 먼저요사드가 먼저요참말로 답답하오라고 적힌 손 선전물을 들어 시선을 사로잡았다.

 

한편 활동 중반을 맞은 통일아라리 대원들은 오는 12일까지 대구경산코발트수원평택서울 등을 찾아 평화협정 체결과 주한미군 철수를 촉구하는 국민서명운동상징의식를 이어갈 예정이다.

 

▲ 문재인 대통령에게 사람이 먼저인지, 사드가 먼저인지 묻고 있는 미군철수 통일아라리 통일선봉대 대원들     © 자주시보

 

아래는 기자회견문 전문이다.

 

----------------아래------------------------------------------------

 

[판문점선언시대 미국의 눈치보며 사드배치 강행하는 문재인 정부 규탄한다]

 

문재인 정부는 미국 눈치 보지 말고 사드를 즉각 철수하라!

판문점선언 시대사드 배치 강행하는 문재인 정부 규탄한다!

 

남과 북은 올해 판문점선언 합의로 자주통일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 만찬장에서 "김정은 위원장과 나는 진심을 다해 대화했다마음이 통했다"며 "이제 이 강토에서 사는 그 누구도 전쟁으로 인한 불행을 겪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제 그 누구도 전쟁으로 인한 불행을 겪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한 문재인 정부는 정작 북한이 반발하는 사드 배치를 강행하고 있다.

 

남과 북이 판문점선언에서 한반도 비핵화를 합의한 마당에 문재인 정부는 사드 배치를 강행할 필요도 명분도 없다.

 

무엇보다 사드는 배치 장소인 성주의 주민들과 국민에게도 반발을 사고 있다.

 

사드는 한반도 군사 갈등을 고조시킬뿐만 아니라 주민들의 평화와 건강에도 위협이 되는 것이다.

 

정부는 국민에게는 해롭고 평화를 위협하며 판문점선언에도 위배되는 사드 배치를 도대체 왜 강행한단 말인가!

 

문재인 정부가 사드 배치를 강행하는 것은 다름아니라 미국 때문이다.

 

사드가 한국이 아닌 미국을 위한 무기라는 것은 자명하다.

 

왕이 중국 외교부장은 2016년 2월 12일 "사드 체계의 한국 배치는 '중국을 겨냥한 미국의 칼춤'"이라고 지적했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 또한 2017년 6월 26일 사드 배치는 "한미 동맹 차원에서 약속한 내용"이라고 밝혔다.

 

한국이 사드 배치를 강행한 탓에 미국과 중국 사이의 군사 갈등 한복판으로 뛰어든 꼴이 되었다민감한 미중 갈등에 끼어들어 우리가 얻을 이익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사드 배치를 강행한 대가는 사드 보복으로 인한 10조원 이상의 경제 피해였다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애꿎은 우리가 피해를 본 것이다.

 

그런데도 문재인 정부는 사드가 대한민국에 필요하다는 듯이 변명을 늘어놓으며 미국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에게는 국민의 뜻보다 미국의 이익이 중요하단 말인가.

 

판문점선언 시대자주통일과 평화번영 시대에 문재인 정부는 미국의 눈치를 볼 것이 아니라 국민을 뜻을 따라야 한다.

 

미군철수 통일아라리는 문재인 정부에 요구한다.

 

미국 눈치 보며 국민을 배신하는 문재인 정권 규탄한다!

문재인 정부는 판문점선언 시대에 맞게 사드를 즉각 철거하라!

사드 배치 강요하는 주한미군 철수하라!

 

2018년 8월 8

미군철수 통일아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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