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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회록

 참회록

-윤동주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滿)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 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윤동주의 시를 다시 보고 있다.

늘 윤동주의 시를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건 부끄러움.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 시대에 대한 부끄러움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

아마, 이런 것들 때문에 윤동주의 시를 읽으면 읽는 이 역시 작가와 마찬가지로 부끄러움을 느끼고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것 같다. 묘한 매력이다.

 

윤동주는 자신의 삶을 내일이나 모레, 가까이 올 그 어느 즐거운 날을 생각하며

지금을 되돌이켜본다.

많지도 않은 이십사년 일개월의 삶.

어찌보면 참회록을 쓰기에는 너무 젊다고 생각되던 때,

 

시인은 식민지 치하라는 현실을 너무나도 민감하게 인식하고 있었고,

그리고 그 안에서 고민했고, 또 행동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자신의 내면과 현실의 자기를 이어주는 거울을 시인은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로 보았다.

 

많지도 않은 이십사년 일개월을 살고 있는 나.

나는 내 거울을 생각했다.

스물 넷의 수줍은 청년 윤동주가 살았던 그 시대만큼 폭압적일지는 아니더라도,

그 시대처럼 힘든 삶을 살아가야하는 시대에는 살고 있다.

하지만 그 청년만큼 민감하지도 않은 것 같다.

내 거울은 어떤 거울일까?

그리고 밤이면 밤마다 손바닥 발바닥으로 열심히 닦고 나면

내 거울은 무엇이 보일까.

 

스물 넷의 동갑내기 동주에게 물어보고 싶은데,

한편으로는 그의 시에서 보이는 온화한 이미지대로 웃으면서 말해줄 것도 같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섭게 화를 낼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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