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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년 춘천행.

#1. 춘천가는 기차,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

   그냥 바람이나 쐴까 하고는 무작정 경춘선을 탔다.  예전에는 2500원으로 통일호 열차를 타고 맘 편하게 하루 다녀왔는데,  간만에 탄 경춘선은 무궁화로 대체되서는 5000원이나 하는 시츄에이션~. 사람도 변하고, 기차도 변하고, 기차역도 변하고, 강산도 변해버린 듯한 상황.

그래도 변하지 않은 건 오랜 친구와 여행을 떠나기 전 느꼈던 설레임.

 그 정도로 해두기로 했다.

 

▶ 몇 년전에 공사중이던 김유정 문학관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철도청 홈페이지에 신남역을 찾았는데, 그런 역이 없다고 해서 화들짝 놀랐다. 알고보니 역 이름도 '김유정'으로 변해있었다. 이제는 어엿한 문화관광촌으로 자리잡은듯한 실레마을. 폐결핵으로 죽으면서 닭한마리가 먹고 싶다던 김유정은 훗날 자신의 이름으로 기차역이 생긴다는 사실을 상상이나 했을까?

 

 

신남역이 김유정으로 역명이 바뀌기 이전에는 조그마한 간이역으로 기차도 하루에 세, 네번만 정차했다. 마을 사람들도 김유정 생가를 물으면 희한한 사람으로 보던 눈빛이었는데, 이제는 그런 마을 분위기를 찾을 수 없을 것 같다.

 

 옛것은 새것으로 빠르게 대체되는 시대.

사는 것이 느린 나는 새것보다는 옛 것이 마냥 그리워지는 시간 속에서만 살고 있는 것 같다.

 

 

 

 

#2. 강안개, 물은 물이다.

 

희뿌연 날씨에 좀 더 좋은 날씨였으면 좋았겠다는 말을 뱉은 순간.

시 하나가 생각났다. 도종환의 시인데, 개인적으로 난 도종환을 좋아하지 않는다.

"새벽 강안개 세상을 씻으며 하늘에 오르듯
내 마음도 당신을 향해 늘 오르고 있다" (-이제 당신과의 사랑은 中 - 도종환)는 표현이.

 

강은, 물은 우리가 눈으로 보지 못하는 순간에도

자신을 가볍게 혹은 무겁게 변화시키며 우리를 에워싸고 있다는 사실.

가장 낮은 곳으로 흐르고 흘러 더러운 것들과 함께 간다는 표현도.

 

▶ 고소공포증으로 인해 정해진 철장을 넘어서지는 못하고. 절대!!!

손만 뻗어 그저 내가 볼 수 있는 가장 낮은 위치에서 강을 보고 싶었다.

 

 

 



 

 


 

 ▶뱃길은 정해진 것도 없고,  흔적을 남기다가도 이내 사라지고 만다.
물살을 가르며 달리는 파도에 물은 거품이 일다가도 금새 잔잔해지며 바람만 맞아줄 뿐.
그게 물이다.

 

 

 역시 한 1년만에 배를 타봤다. (요즘 모든게 1년만이다.) 바다에서 타는 배와는 다르게

바람은 짜지도 않고, 수분은 충분해서 폐까지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 춘천 닭갈비. 명동 골목에서 이리저리 아주머니들의 유혹을 뿌리치고 손님이 가장 많은 가게를 들어갔다. 알고보니 여행사 단체손님이었으나, 뭐, 그냥 맛있었다고 기억하기로 했다.

배가 터질 때까지 국수, 닭갈비, 음료수4잔에 봉평 동동주까지 먹었으니까. 지금보니 남긴 저 떡들이 먹고싶어졌다. ㅠ.ㅠ

 

춘천 여행이 닭갈비가 먹고 싶다던 친구 때문이기는 했으나, 문득 의문이 든 건 사실.

왜 춘천은 닭갈비가 유명할까? 이 질문에 나는 "아마 아현동에 가구단지가 유명한 이유와

흡사할꺼다"라고 답은 했으나,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 내 친구 네이버를 찾았다.

 

"춘천 닭갈비의 유래는 약 1,400년전 신라시대에서 비롯되었다는 '설' 이있고 50년대 지금의 강원은행 본점자리에서 김씨라는 사람이 닭불고기집을 시작했다는 이야기와 70년대초 요선동에서 시작했다는 말이 있다.
   좀더 확실한 것은 70년대 초부터 명동 닭갈비골목을 중심으로 4개업소가 본격적으로 닭갈비요리를 발전시킨 점이다."닭갈비" 란 말은 원래 흥천에서 먼저 사용되었고 그 흥천의 닭갈비는 냄비에 육수를 넣고 닭요리를 한것인데 , 흥천과 태백에서 지금도 이 음식이 남아 있다.
  춘천에서 숯불위에 석쇠를 얹어 닭고기를 요리했던 숯불닭갈비가 있었는데 71년부터 닭갈비판이 등장하면서 춘천 닭갈비가 태어난 것이다. 
 춘천에서 닭갈비가 발달한 배경중의하나는 춘천지역이 양축업이 성했고 도계장이 많았던 이유다.
 닭갈비는 지금도 그 맛과 양에 비해 가격이 저렴하지만 대단히 싸서 (70년대초 닭갈비 1대값은 100원 이었다.)그 별명이 '대학생갈비 '서민갈비'였다.

 

네이버는 모르는게 없는 내 친구. 물론 항상 정답만 알고 있는게 아니라서 그렇지 ㅋㅋ

 

#4. 친구, 길


 

 

▶청평사가는 길목에서 찍은 한 장. 배 못탈까봐 열심히 뛰는 도중이다.

가는 길 내내 유독 느린 걸음으로 계속 뒤쳐진 달팽이와 여우비.

 

 

20년이 넘게 우리는 우리가 남들보다 빠르지 않은 건 알고 있었지만 패배자와 비슷한 이미지로 뒤쳐지는 걸음을 지닌지 몰랐나보다.

가면서도 포기와 도전사이를 줄다리기하면서 결국 완주를 했던 까닭.

뭐, 입장료 때문만은 아니고^^;; 함께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다.

 

혼자였다면 끝까지 갈 것인가 도중에 포기할 것인가를 가지고 그렇게 몇번을 고민할 필요는 없었겠지. 내 컨디션을 봐가면서, 마지막 배시간을 철저하게 계산하면서 갔을테니까.

둘이였기에 끝이 보이지도 않고 38.5도의 언 경사길을

도중하차를 결심했다가도 이내 곧 한번 가보잔 말에 서로를 설득하며 갈 수 있었던 것 같다.

 

누가 길을 인생 길에 비유했던 건지. 기막히게 느꼈던 하루.

끝도 보이지 않는 길에서 때로는 지치고 포기하고 싶다가도 누군가가 있기에 갈 수 있다고.

사람이 있기에 갈등도 하도 보듬어 주며 때론 곧게 때론 돌아가며 사는 거라는 말.

덕분에 마음은 뿌듯한데, 발목이 저리다.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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