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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연휴를 며칠 앞둔 9월 어느 날이었다. 일거리는 마치 씹다 뱉은 껌처럼 책상과 머릿속에 눌어붙어 퇴근하려는 내 뒤통수를 끈덕지게 바라보고 있었지만, 단호히 칼퇴근을 해버렸다. 집에 일찍 가는데도 기분이 개운치 않아 이나영의 사진이 붙어 있는 빵집에 갔다. 그곳에는 내가 좋아하는 'UFO 빵'이 있다. 어리석고 소용 없는 생각이지만, UFO 빵은 UFO라서 왠지 힘이 난다. 지구의 평화로운 종말을 기도하며 빵을 씹을 것이다. 나만 들을 수 있는 내 머릿속 카세트에서는 "날아와 머리 위로~" 하고 패닉의 노래가 흘러나올 것이다. 아무튼 나는 그 빵을 사러 간 건데 옆에 있는 작은 빵이 눈에 들어왔다. 계피가루 범벅이 된 작은 만주. 같이 샀다. 빈 집에 들어가 이불에 기대고 앉아서 빵을 먹었다. 계피향이 참 좋다.
초등학교 4학년 때는 아빠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환상이라기보단 우리 아빠가 대단한 사람이길 바라는 마음이었을 거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빠로서는 그냥 견학을 다녀왔을 뿐인데, 난 그때 우리 아빠가 엄청 대단한 일을 하느라고 독일도 가고 일본도 가는 줄 알았다. 아빠가 독일을 다녀온 어느 날, 무거운 빵을 사왔다. 엄마는 그게 계피빵이라고 했다. 그러나 한 입 베어 물고는 "이게 무슨 '빵'이야? 퉤퉤퉤" 하고 말았다. 그건 빵이라기보단 한약을 뭉쳐놓은 것 같았다.
그땐 그렇게 싫었는데, 난 지금 계피가 참 좋다. 그리고 계피향을 맡으면 반드시 그 고약한 맛의 계피빵이 생각난다. 계피빵은 자연스럽게 아빠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진다. 계피향은 좋지만 아빠는 싫었고 지금도 나와는 안 맞는 사람인데, 그 둘의 관계는 긴밀하다. 아마 그때까지도 그가 그 자신이 되기보다는 '우리 아빠' 라는 신이 되어주길 바라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계피빵을 지금도 기억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때 내가 그를 '내가 원하는 이미지대로'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난 아빠를 인격적으로 알 거나 이해하지 못했다.
마침 며칠 뒤면 추석이었고 아빠는 혼자 할머니댁에 가거나, 텅 빈 집에 혼자 있거나 할 것이었다. 아빠한테 갈 용기도 없고 대면하려면 더 오랜 세월이 필요할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없었고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계피향 덕분에 그냥 잠시 그를 생각할 뿐이었다. 어느새 일에 대한 걱정이나 다른 생각은 다 잊어버린 채, 잘 지내셨으면 좋겠다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빵을 천천히 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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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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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나는 스물여덟의 겨울이ㅠ부가 정보
루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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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고/ 정말, 푸석푸석한 겨울.부가 정보
무한한 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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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에게 "익숙한 것"은 안타깝게도 약간의 불면이라네(ㅠ_ㅠ)......부가 정보
루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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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연/ 저런, 불면이라니- 나는 시간만 주어진다면 끝없이 잠의 나락으로 떨어지는데- 무연, 며칠 밤새서 놀면 잠이 오지 않을까? ㅋ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