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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진화의 무지개

Over The Rainbow

 

이 책에서 저자인 조안 러프가든이 궁극적으로 문제삼고 있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분류 체계이다. 무지개는 다양성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자연을 분류하려는 인간의 목표”의 불가능성을 지시하기도 한다. 무지개의 색은 명확한 경계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것을 분류하려 할 때 인간은 경계짓기의 폭력을 행사하게 된다. 무지개가 분류 가능해 지면, 그것은 더 이상 무지개가 아니게 된다. 무지개는 자신의 고유성을 박탈당하기 때문이다.

진 화생물학자가 쓴 이 책은 인문학자에게도 상당히 흥미롭다. 조안 러프가든은 동물들의 세계에서 크로스 드레싱, 트랜스젠더, 동성 섹슈얼리티, 성역할 바꾸기가 얼마나 흔하게 일어나는지 방대한 자료와 사례들을 가지고 증언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 책이 자연은 곧 선(善)이며, 자연에서 발생하는 일이기 때문에 동성애나 트랜스 젠더가 인간에게도 그만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녀는 오히려 선악을 판단하는 일은 과학의 영역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그녀가 성적 다양성을 옹호하는 것은 그것이 동물과 인간의 삶에 필요한 것이며, 긍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동물들의 성행위는 단순한 번식 외에도 재화의 분배, 갈등의 해소, 외부자의 융화, 공동체 형성 등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이것들은 이분화된 성 구분을 넘어선 기능들이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우리에게는 상당히 새롭게 느껴진다. 우리는(심지어 전문 학자들조차도) 동물계에 존재하는 성적 다양성에 대한 정보를 거의 접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특정한 (이성애중심주의라는) 과학적, 정치적 편견들이 그런 주제에 대한 연구에 제한을 가하기 때문이다. 조안 러프가든은 하나의 사례로 1992년에 있었던 “AIDS 확산을 막기 위해 실시된 미국인의 성 관련 습관에 관한 연구”를 제시하고 있다. 이 연구는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두 명의 상원의원과 하원의원에 의해 중지될 뻔 했다. 그리고 연구는 실제로 그런 검열 때문에 상당히 지연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그 연구를 “동성애 아젠다”로 여기고 “그 연구 대신에 혼전 순결을 장려하는 데에 돈을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과학적인 연구 프로젝트가 특성상 상당한 규모의 재정 지원 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런 식의 정치나 자본의 개입이 연구의 방향성을 규정하는데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러프가든은 동물 뿐 아니라, 인간의 성에 관한 편견들과도 힘겹게 대결해 나간다. 그녀는 성별적 차이, 즉 뇌의 구조, 호르몬 등에 대한 연구를 검토하며 결코 그 차이들이 사회적 차이를 만들어낼 만큼 대단한 것들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녀의 분석 중 흥미로운 지점은 심리학에 대한 부분이다. 그녀는 심리학자들이 “다양성을 병리 현상으로 여기는 의학 모형”에 따라 연구한다는 점을 지적하며, 차이를 병리화하는 경향을 비판한다. 그녀는 성적 다양성이 심리적 문제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 따라서 치유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 나아가 그것들이 하나의 범주로 분류될 수 없고, 다시 그 내부에서 수많은 개별성들로 분화되기 때문에 자의적인 분류가 불가능하다는 점에 대해 지적한다. 그럼에도 그녀는 성적 차이가 야기한 적대나 배제가 지극히 정치적인 문제임을 인식하는데까지 나가지는 못했다.

 

책 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면 스스로 MTF 트랜스젠더이기도 한 그녀는 ‘트랜스젠더 의제’라는 제목을 달고 자신들이 ‘원하는 것’의 목록을 제시한다. 거기에는 다양성에 대한 인정, 사회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권리, 품위 있는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권리, 고용, 교육, 결혼, 군복무 등의 영역에 대한 동등한 참여, 그리고 의료보험 혜택 등이 나열되어 있다. 이것들은 새로운 요구라기보다는 ‘다양성에 대한 인정’이나 ‘관용’이라는 이름으로 오랫동안 제안되어 왔던 요구들이다. 그런데 ‘다양성에 대한 인정’이나 ‘관용’은 성적 차이 때문에 발생한 수많은 적대와 불평등, 배제와 갈등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보다는, 그것들을 봉합하고 탈정치화하는 담론이기도 하다. 그것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차이를 가진 자들을 차별해 왔던 이들을 승인하고, (설사 그것이 투쟁의 결과라 할지라도)그들로부터의 시혜를 기다리는 것으로 귀결될 수 있다. 자! 진화의 무지개가 있다. 이제, 그 무지개만 보지 말고, 그 너머로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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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 저작권법 시행 후 첫 ‘계정정지’ 명령

우리나라 최초 3진 아웃 사례

http://korea.kr/newsWeb/pages/brief/categoryNews2/view.do?newsDataId=148701359&category_id=subject&section_id=EDS0303009&call_from=extlink&subjectName=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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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 저작권법 시행 후 처음으로 헤비업로더가 ‘계정정지’ 명령을 받았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저작권을 침해하는 불법복제물을 웹하드 등 3개의 온라인서비스에서 복제·전송한 11개 계정에 대해 계정정지 명령 처분을 내렸다고 3일 밝혔다.

이는 지난해 7월 23일, 개정 저작권법이 시행된 이후 첫 계정정지 명령 사례다.

이번 계정정지 대상 11개 계정은 경고 명령을 3회나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계정당 평균 약 200편의 불법복제물(영상, 음악, 소프트웨어, 게임 등)을 또다시 웹하드 상에 무분별하게 유통시킨 헤비업로더들이다.

이에 따라 계정정지 처분을 받은 3개의 온라인서비스제공자는 해당 헤비업로더에게 부여한 다른 계정도 포함(이메일 전용계정은 제외)하여 1개월 미만 동안 당해 계정을 정지시켜야 한다.

문화부에 따르면, 이번 행정처분은 저작권법 위반 경고 명령 3회를 받았음에도 또다시 불법복제물을 게시한 자들을 대상으로 한국저작권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확정됐다.

문화부는 이미 지난 3월부터 9월까지 한국저작권위원회의 시정권고를 불이행하거나 상습적으로 대량의 불법복제물을 복제·전송한 23개 온라인서비스제공자의 469개 계정에 대해 세 차례에 걸쳐 경고 명령 처분을 내린 바 있다.

문화부는 “웹하드·P2P 서비스 등을 통한 불법복제물 유통이 영화 부가판권 시장 규모 축소 등 문화콘텐츠 산업 성장의 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며 “단속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문화부는 불법복제물을 유통하는 웹하드·피투피(P2P)서비스 사업자와 ‘헤비 업로더’에 대해 기술적 조치 불이행 과태료 처분, 특별사법경찰의 기획 수사와 범죄수익금 환수 등도 더욱 강화한다는 계획이다.

한편, 한국저작권위원회도 개정 저작권법 시행 후부터 올해 3분기까지 164개의 온라인서비스제공자를 대상으로 83,519건(경고 42,217건, 삭제 41,246건, 계정정지 56건)의 시정권고 조치를 시행한 바 있다.

이 중에는 스마트폰용 불법 어플리케이션을 유통시킨 69개 온라인서비스제공자에 대한 8,554건의 조치도 포함돼있다.

문의 : 문화체육관광부 저작권보호과 02-3704-9683

 

 | 문화체육관광부 저작권보호과 | 등록일 : 2010.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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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 모두스 비벤디(지그문트 바우만)

견고한 것에서 유동하는 것으로

 

바우만의 글들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그것은 ‘모든 것이 유동한다’가 될 것이다. 그는 유동성에 관한 일련의 연작들을 발표해 왔다. <유동하는 근대>, <유동하는 사랑>, <유동하는 삶>, <유동하는 공포>가 그것들이다. 이 책은 이 시리즈 중 <유동하는 시대>를 옮긴 것으로, <모두스 비벤디>라는 타이틀은 이탈리어판에서 따온 것이다.

 

바우만에게 유동성이라는 개념은 당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처해 있는 삶의 불확실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것은 곧 바로 공포와 결부된다. 부정적 지구화로 인해 위험은 전지구적 수준에서 발생하는데, 개인들은 이 위험을 통제하기는커녕 제대로 인식할 수조차 없다. 불투명한 세상과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개인들은 무기력할 뿐이다.

 

그럼에도 개인들은 편재하는 위험 속에서 그 위험을 최소화시키기 위한 전략들을 수행한다.궁극적으로 통재 불가능한 그런 위험들은 전문가의 지도 아래 몇 가지 회계 기법들과 더불어 계산 가능한 위험, 즉 리스크로 환원된다. 그것들이 계산 가능해 지는 순간, 개인들은 그 위험에 대처할 수 있게 된다. 개인들은 환경오염을 막을 수도, 치안을 강화 할 수도 없지만, 보험을 통해 환경오염이 야기시키는 병에 대처할 수 있고, CCTV를 설치하고 사설 경비업체에 등록함으로써 안전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이런 전략들 자체가 공포에 근간을 둔 하나의 상품이라는 점은 더 이상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개인의 통제를 벗어나 있는 위험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해주던 것이 국가의 역할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변했고, 국가는 더 이상 그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 바우만은 국가가 “사회(복지) 국가”에서 “개인 안전 국가”로 변해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민족-국가의 “힘은 전지구적 공간으로 증발하고 있으며 … 규모가 작아진 국가는 개인의 안전을 겨우 책임지는 국가로 명맥을 유지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바우만은 여기서 개인화를 재론한다. 그는 “새로운 개인주의의 등장과 인간적 유대의 소멸”을 강조하면서, 과거에는 “공동체와 조합들이 보호의 규칙을 정하고 그 규칙이 적용되는지 감시하는 역할을 했지만, 이제는 개인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살피며, 스스로를 보호하고 구제해야 하는 상황으로 바뀌”었다고 진술한다. 이를 근거로 바우만은 “공동체라는 말이 이제 점점 공허”한 말이 되어 가고 있으며, 민족-국가 형태에서도 민족과 국가가 결별을 눈앞에 두고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자본주의 국가를 유지케 했던 개인들의 공동체로서의 민족이 해체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몇 가지 질문을 던져 볼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지구화는 그가 부정적 지구화라고 부른 측면만을 가지고 있는가? 나아가, 진짜 ‘지구화’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있는가?(혹시 지구화라기보다는 일국적 단위를 넘어선 지역적 층위의 문제는 아닌가?) 과연 지구화라는 것은 국가 주권을 침식하고 있는가? 민족-국가라는 기초 단위 없이 지구적 경제나 정치는 불가능한 것은 아닌가? 국가가 변형되고 있을지언정 쇠퇴하기 보다는 어떤 측면에서는 강화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국가와 결합되어 있는 민족/국민 역시 해체되고 있다는 주장은 재평가 되어야 하지 않는가? 그리고 난민은 민족/국민 국가의 쇠퇴나 해체의 징후가 아니라 그것들이 변형/강화되는 과정의 필연적 산물은 아닌가?

 

만약 이런 질문들이 유효하다면, 모든 것이 유동하고 있다는 바우만의 주장은 상당부분 수정 될 수 있을 것이다. 바우만은 이런 질문들을 세밀히 분석하고 평가하기보다는, 어떤 결론들을 미리 가정한 채 자신의 논의를 전개시켜 나가는 듯하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그에게 근대란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미리 가정된 상상의 대상인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그가 탈산업사회론이나 정보사회론 그리고 지구화론과 너무 쉽게 영합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 있을 것이다. 견고한 것들이 유동하는 것으로 대체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견고하다면, ‘유동성’은 현대사회를 설명하는 견고한 보편 개념이 아니라, 특수한 상황의 국면들을 분석할 때 쓰일 수 있는 유동적인 정세적 개념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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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표절자

이 글은 사과문이다.

지금까지 내 글을 읽고 최소한의 신뢰를 보내온 독자들이 '있다면', 그분들께 보내는 사과문이다.

그리 대단한 글쟁이는 아니기에 이런 글까지 써야할까도 싶지만, 그래도 공부하는 학생의 양심상, 그리고 몇몇 매체에 글을 써온 사람으로서 제대로 반성해야 겠기에 글을 남긴다.

뭐냐하면...

표절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그 표절 말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남의 글을 인용 표시 없이 썻다.

그것이 실수인지, 의도한 것인지는 중요치 않다. 내가 경솔했던 것이고, 무책임했던 것이다.

한 번이라도 내 글을 읽어 본 적이 있는 모든 분들께 이 자리를 빌어 말씀드린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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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뜬금 없이 무슨 소리인가 싶기도할거 같다. 

그 분들을 위해서는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계속 기억하면서 곱씹어야 하는 일이기에 어딘가에 뭍혀 사라지기 전에 기록해 두려 한다.

얼마전, 그러니까 정확히 2010년 10월 26일 한통의 메일을 받았다.

대학원 신문의 독자라는 분이었다.(현재 나는 중대 대학원 신문 서평란에 한 학기 정기 기고를 청탁받고 쓰고 있는 중이다)

그 분은 나의 인용표시 없는 인용, 즉 표절을 문제삼고 있었다.

다음은 10월 26일 받은 편지의 전문이다.(메일을 보낸 분과 실명이 거론된 다른 분의 이름을 제외한 전문이다).

허민호님, 안녕하세요.
<대학원신문> 독자의 한 사람인 000이라고 합니다.
이메일 작성 의도는 첨부된 사진을 통해 파악하실 수 있을 듯합니다.
상식이 있는 "대학원생"이라면 기고자의 표절 전력을 지적, 제보하면 이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할 줄 알았는데 현직 편집위원이 표절 작가의 기고를 중단하는 일도 없고 표절 여부에 독자에게 사과하는 일도 단연코 없어서 무척 놀랐습니다.
아무래도 문제 당사자가 알지 못하고 있는 듯하니 직접 이야기하는 편이 낫겠지요. ^^
다 른 사람도 아니고 000 선생님 지도 하에, 다른 주제도 아니고 지적재산권에 관한 논문을 쓰고 이른바 진보 운동을 하시는 대학원생의 양심과 이름 있는 대학교의 대학원신문이 표절 시비에 관해 충분한 조치를 취하지도 않고 다음 호를 내는 모습이 감탄스럽습니다. ^^
상황 파악이 안 되시는 경우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 가운데 '홀로코스트' 챕터의 재독을 권합니다. ^^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한 게 다섯 군데인데 두 문장만 따옴표 안에 들어가 있는 게 많이 신기하네요.
박사과정을 무사히 마치시길 바라며,
독자 000 드림.
 
 
이 글에는 2006년 석사 1차 때, 대학원 신문사에서 일하며 쓴 기사 하나가 캡쳐되어 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당연히 나의 잘못이고 해서 반성 겸 해서 그 분께 답장을 보냈다.
다음은 당일 저녁 내가 쓴 답장의 전문이다.

안녕하세요 

허민호입니다.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지적하신데로, 제 경솔함으로 인해 발생한 문제입니다.

앞으로 좀 더 신중하고, 책임감 있게 글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대학원신문에 확인해보니, 나름 논의가 있었고, 기고를 중단할 사안은 아니라고 판단한 모양입니다.

선생님께서도 한사람의 입을 가로막기 위해 이런 지적을 했다기보다는, 한 사람의 연구자이면서 학생의 입장에서 좀 더 책임감 있게 글을 써야한다는 말씀을 하고 싶으셨던 것으로 이해됩니다.

앞으로도 좋은 지적 부탁드립니다.

 

허민호 드림
그리고 일주일 정도가 지난 11월 1일 다시 그 독자분께 답장이 왔다.
다음은 그 전문이다.
안녕하세요.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제가 글을 쓴 의도를 곡해 없이 파악하시고 솔직하게 인정하고 해명해 주셔서 마음이 놓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허민호님께서는 기고 중단 건에 대해서만 말씀하셨지 공식적으로 표절 건을 해명할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입장도 밝히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허민호님을 어떠한 사적 감정 때문에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표절 문제 자체의 비윤리성을 인정하더라도 표절을 하게 된 과정을 고려하면 결국 개인이 저지른 하나의 실수로 이해할 수 있는 측면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저는 당장 허민호 기고자의 기고를 중단해 달라고 요구할 생각이 없으며, 신문을 만드는 편집위원들의 논의 결과를 경시하려는 의도도 없습니다.
저는 오히려 중앙대학교의 <대학원신문>의 독자적 권한은 물론 내부 필자와 외부 기고자가 글쓸 권리를 존중합니다.
하지만 원론적으로 말해서, 기고를 유지하고 중단할지의 여부는 표절이라는 중대한 문제를 독자들이 접하고 판단한 뒤에 결정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절차상으로 편집위원들이 외부 필자의 기고 여부를 결정할 편집권을 가진다는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큰 일과 작은 일을 비유하는 일이라 조심스럽지만, 국민 대다수의 반대를 무릅쓰고 국회가 어떤 사안을 비준한다면 법률의 절차상으로는 하자가 없으나 결코 의원들이 타당한 절차를 밟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저는 중앙대학교에 소속된 학생이 아닙니다. 따라서 해당 언론이 학내에서 얼마나 읽히는지 파악할 길이 없습니다. 웹상으로도 얼마나 많은 독자 피드백이 진행되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다만 많지 않은 덧글과, 학생 언론의 영향력이 강력하지만은 않다는 상식에 비추어 어느 정도 짐작해 볼 뿐입니다.
표절 건에 대한 허민호 님의 해명이 소수일지 모를 독자들에겐 그다지 큰 관심사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문제의 기사가 2006년에 쓰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각에서 기억으로 나아가려는 의지로써,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의식하든 관계 없이 학문 세계에서 용인하기 힘든 과거의 과오를 스스로 인정하는 허민호님의 글을 볼 수 있다면 저로서는 더없이 기쁘겠습니다.
이런 바람을 전하면서 두서 없는 글을 마칩니다.
안녕히 계세요.
 
000 드림.

 

그러니까 요는 개인의 반성으로는 충분치 않고, 공적인 반성과 사과를 요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학원 신문의 지면에 내 사정을 봐줄만한 공간은 없어 보인다.

현재 편집위원들의 판단과 계획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대학원신문이기 때문이다.

문제의 글이 대학원 신문에 실린 글이긴 하지만, 그 글로 인해 현재의 대학원 신문을 그 책임의 주체로 내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대학원 신문은 한겨레 신문이나 경향신문 혹은 동아일보 같이 하나의 지속적인 입장을 가진 신문이 아니다. 그것은 매 학기 새로운 편집위원을 선출하는 공간이다. 그것은 새로운 편집위원의 손에서 매번 새롭게 만들어지는 종류의 신문이다. 때문에 내 개인의 잘못을 대학원 신문이라는 공간을 통해 반성하지는 못할듯 하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바로 이 공간이다.

문제가 된 그 때의 글은 여기 올라와 있지는 않지 않고, 전부는 아니지만, 외부에 기고한 글의 대부분이 이 곳에 모여 있다. 이 공간이 내 글을 읽는 분들이 가장 많이 찾아오는 곳이다.

이 공간에서 반성과 사과를 하는 것, 이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공개적인 방식의 사과와 반성인듯하다.

유명한 글쟁이도, 정치인도 아니기에 내 이런 이야기를 신경쓰는 이들이 얼마나 되겠냐만은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그리고 이 곳에서 내 글을 읽는 분들께는) 의미 있는 작업일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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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지젝이 쓴 21세기의 공산당 선언!

 

지 젝은 놀라운 철학자다. 쉴새없이 글을 써내는 그의 필력이 놀랍고, 프랑스 혁명과 오바마 정부를 연결시키고, 칸트와 헤겔을 거쳐 빌 게이츠에 다가가는 사유의 폭도 놀랍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놀라운 것은 그의 오지랖이다. 그는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할리우드의 영화부터 사소한 정치적 사건까지 그의 분석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사건의 정치철학적 의미가 궁금하다면 조금만 기다려라. 얼마 후 나올 지젝의 책에서 그 의미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농담이 나올 정도다).

 

그런데 그의 편집증적이고 강박적인 분석이 단순한 오지랖은 아닌듯하다. 지젝이 모든 것을 알고 있고, 어떤 사건들이 그의 사유망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사건들이 있고, 그것을 분석하면서 그의 사유망이 형성되어 간다. 그런데 그가 분석하고 있는 사건들은 무엇인가. 그것은 파국으로 향하는 사건들이다.

이 책의 제목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는 비극적 역사가 나중에 희극으로 반복된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그가 마르쿠제의 말을 빌려 강조하고 있듯이 희극의 외피를 쓴 반복이 원래의 비극보다 더 끔찍한 파국으로의 초대일 수 있다는 의미이다. 명백한 파국으로의 노정임에도 우리는 그 파국을 인식할 수 없다. 2008년 금융붕괴가 우리에게 “예측불가능한 놀라운 사건”으로 인식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자 본주의는 언제나 현실의 위기를 별거 아닌 것으로 만들고, 발생한 위기도 대처가능한 것으로 둔갑시킨다. 현재의 위기에서 지배이데올로기의 중심과제는 붕괴의 책임을 자본주의 자체가 아니라 느슨한 법적 규제나 거대 금융기관의 타락 등의 부차적인 것으로 만드는 서사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이데올로기는 또 얼마나 쉽게 받아들여지고 있는가. 그래서 지젝은 외친다. “멍청아, 그건 이데올로기야”. 이 말에는 한치의 과장도 없다. 그 외침은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지젝이 감지하고 있는 어떤 절박함이다.

 

그 렇다면 이 혼잡한 이데올로기와 결부되어 있는 파국의 시대를 어떻게 살아나갈 것인가(지젝이 이 책 다음으로 쓴 책이 바로 <종말의 시대에서 살아가기>이다). 지젝은 여기서 다시 공산주의를 해답으로 내놓는다. 그러나 그에게 그것은 위기의 해결책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문제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지젝은 공산주의라는 이념에 충실하기만 한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말한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이 “이념에 실천적 긴박함을 부여하는 적대를 역사적 현실 안에서 찾아내는 것”이다. 그는 네 가지의 적대―생태적 파국, 지적재산과 관련된 사유재산 개념의 부적절함, 새로운 기술과학적 발전의 함의, 그리고 새로운 장벽(Walls, 월가)의 생성―를 언급한다.

 

이 중 네 번째 적대(배제된 자와 포함된 자를 가르는 간극)가 핵심적이다. 이 네 번째 적대가 없다면 생태학은 지속가능한 발전의 문제로, 지적재산권은 복잡한 법률적 사안으로, 유전자공학은 윤리적 쟁점으로 변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직 배제된 자와 관련해서만 공산주의라는 용어의 사용이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는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트 개념을 ‘배제된 자’라는 개념으로 대체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 개념의 폐기가 아니라 유지이며, “마르크스의 상상력을 뛰어 넘어” 그 개념을 실존적 차원으로 진화시키기 위한 도약이다(물론 그것이 도약인지 비약인지 평가하는 것은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다). 그리고 지젝에게는 그것이 마르크스를 보다 마르크스적인 방식으로 사유하는 과정이다.

 

이 책은 21세기에 쓰여진 ‘공산당 선언’이다. 이 책은 현재의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이지만, 동시에 비판이며 선언이기도 하다. 지젝은 공산주의 이념이 오늘날 여전히 적실한가를 물을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곤경이 공산주의 이념의 관점에서는 어떻게 보이는가”를 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조금 나아 보이는 개혁된, 개선된 새로운 자본주의(사회주의!)에 손쉽게 타협하지 말고 공산주의로 시작하라고 독려한다. 비록 실패할 운명일지라도 “출발점으로 돌아가”라고. 지젝은 베케트의 입을 빌어 말한다. “다시 시도하라. 또 실패하라. 더 낫게 실패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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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이 떳다 : 정치적 스캔들을 넘어 해적들의 정당으로

해적이 떳다 : 정치적 스캔들을 넘어 해적들의 정당으로

 

해적이 떳다. 만화 <원피스> 이야기는 아니다. 뭐 굳이 따지자면 아주 아닌 것도 아니다. 해적이 한 나라의 국경에 얽매이지 않고, 때문에 한 국가나 정치 단체를 통해 강제된 법적 구속으로부터 탈주하려 한다는 점에서 인터넷의 해적과 <원피스>의 해적은 다르지 않다. 다만 사적 목적을 위해 타인에게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는가 아닌가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지금 내가 이야기 하려는 해적은 정보와 지식 그리고 문화 생산물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활용하는 이들을 가리킨다.

 

이런 해적들이 모여 정당을 만들었다. 소위 말하는 해적당이 그것이다. 오는 17일 유럽의회 의원인 아멜리아 앤더스도터가 한국에 찾아온다. 그녀는 스웨덴 해적당의 일원이다. 그녀는 거칠게 이야기 하자면 몽키 D. 루피 보다는 몽키 D. 드래곤에 가까운 해적이다(물론 세계정부의 입장에서는 루피 같은 해적이나 드래곤같은 혁명가 모두 골치 아픈 해적일 뿐이겠지만). 법적 구속력에서 벗어나 지식과 정보의 자유를 갈구하는 이들을 위해 기존 법적 체계에 저항한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역사적으로 해적은 현실 정치의 실패 지점에서 난무해 왔다. 일부의 해적들은 엄청난 사적 부를 축적하고 잔학한 살인, 강간, 방화, 약탈을 일삼았었다. 그러나 다른 부류의 해적들은 정치적 억압이나 사회적 안전망의 부재로 인한 위협으로부터 탈피하는 방식으로 형성되었다. 요컨대 그들은 생존을 위해 해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사회가 혼란스럽고 정치에서 정의가 사라지는 때가 되면 그에 비례해 해적들도 늘어났다. 정보와 지식이 점점 중요한 사회적 자원이 되고 있는 시점에서 해적이 늘어나고 있는 것도 그런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정보와 지식을 공유하는 테크놀로지가 급속히 발전해 가는 상황에서 그에 부합하는 정당한 규율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해적은 늘어날 수 밖에 없다. 지금 상황에서 정보나 문화 생산물을 공유하는 대부분의 해적들은 자신들이 해적질을 하고 있다는 사실 조차 모르거나, 설사 안다고 할지라도 해적질을 중단할 수 없다. 자신들의 행동이 지극히 정당한 것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들을 해적으로 호명하는 것은 악소조항이 가득한 저작권과 특허에 관한 법률들이다.

 

해적당은 이런 문제적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 최초의 해적당은 스웨덴에서 출현했다. 2006년 미국 정부와 거대 영화 기업의 사주 아래 스웨덴 정부는 세계 최대 규모의 인터넷 파일 공유 업체인 ‘파이럿베이(www.thepiratebay.org)’를 탄압했고, 언론은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를 계기로 스웨덴에서는 저작권 침해를 의미하는 ‘해적’의 이름을 전면에 내건 정당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해적당은 마침내 2009년 유럽의회 선거에서 7퍼센트가 넘는 득표를 기록하며 2명의 유럽의회 의원을 배출하게 되었다. 이번에 방한하는 안더스도터는 이 때 비례대표로 의원이 되었다. 그리고 해적당은 다른 나라에도 급속히 퍼져나가 설립되기 시작했다. 현재 20여 개 국가에 해적당이 있으며, 준비중인 나라까지 포함하면 40개가 넘는 국가가 해적당과 관련을 맺고 있다. 올해 4월에는 해적당 국제 모임이 개최되었고, 그것을 계기로 해적당 인터내셔널까지 만들어졌다.

 

해적당은 현재 저작권이나 특허 문제와 함께 프라이버시 침해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인터넷이 널리 보급되고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되면서 발생하는 문제가 해적당이 다루고 있는 주요 정치적 이슈인 것이다. 정확히 이야기 하면 해적당이 다루고 있는 문제는 인터넷 자체가 발생시키는 문제가 아니라 국가나 특정 정치 세력이 인터넷을 통제하려고 시도하면서 발생하는 문제이다. 때문에 그것들은 테크놀로지의 문제라기 보다는 정치의 문제가 된다. 정치적 강제로부터 탈주하려던 해적들이 정당을 만든 것은 아이러니한 것이지만, 현실 정치에 개입함으로써 그 상황을 변화시키려는 시도는 정당한 것처럼 보인다.

 

사실 해적당 이전에도 저작권이나 특허, 프라이버시 등과 관련된 운동의 여러 흐름들이 있어왔다. 해적당이 흥미로운 지점은 그 문제를 직접적인 (정당)정치 운동으로 확장시켰다는 것이다. 근대 국가에서 정보 통제와 민중 감시는 국가 형성과 존립의 근본적 조건이었다.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정보 통제와 민중 감시는 더욱 강화되었으며, 이는 지극히 정치적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인터넷을 둘러싼 문제는 정치적인 성격의 문제로 접근되어야할 필요성을 가진다. 해적당의 정치 운동이 의의를 가지는 것은 바로 이러한 지점이다. 스웨덴 출신의 요한 소더버그는 해적당의 급속한 의회 진출의 배경을 파이럿베이에 대한 탄압과 함께 군사감시법안에 대한 민중들의 분노를 들고 있다. 이 법안은 스웨덴군사정보국(우리나라의 국정원에 해당)에서 기존의 감시 대상인 전파통신과 함께 인터넷 트래픽까지 감시할 수 있도록 한 법안이다.

 

이런 맥락에서 해적당의 활동은 보다 적극적인 정치적 운동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그런데 해적당은 스스로의 정치성을 제한하며 활동하고 있다. 예를 들어 그들은 스스로를 좌파도 우파도 아닌 것으로 규정한다. 이는 해적당이 이념적 편향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할 테지만, 현실 정치에서 실질적 힘을 발휘하는 구체적인 정치적 지향을 가지지 않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런 흐름은 스웨덴 해적당의 지침에서도 드러난다. 그들은 정당이긴하지만, 직접 정권을 잡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자신들의 정책을 수용하는 정당을 지지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들은 구체적으로 한 정당이 해적당의 정책을 수용할 때, 아무 정당도 그들의 정책을 수용하지 않을 때, 그리고 두 개의 정당이 그들의 정책을 수용할 때 등 각각의 경우에 따른 지침을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하고 있다.

 

해적당은 좀 더 적극적이고 급진적인 정치 활동을 할 필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내걸고 있는 몇 가지 정책안에만 머물러 있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그들이 강력하게 문제 제기 하고 있는 의약품 특허(단적으로 말하자면, 거대 독점 제약회사의 제약 특허가 가난한 나라의 의약품 공급을 가로막고 있는 문제)는 기존 정당을 지지하는 방식으로는 결코 폐기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다국적 제약회사는 결코 특허제도의 폐지나 약화를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엄청난 이윤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국가의 정당은 자신들의 의료제도를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자본과 권력을 가진 다국적 제약회사들의 입장을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요컨대 기존 정당은 해적당이 내걸고 있는 의약품 특허 제도의 폐지 정책을 결코 수용할 수 없을 것이다. 유독 의약품 특허가 아니더라도, 다국적 기업과 국제 협정으로 얽혀 있는 저작권 문제나 국가 안보와 연관된 프라이버시 문제도 기존 정당을 매개로는 완전히 해결될 수 없다. 때문에 해적당은 기존 정당에 의존하는 방식으로는 자신들이 문제제기 하고 있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할 것이다. 필요한 것은 보다 적극적인 정치성이지, 그 정치성의 유보가 아니다.

 

요한 소더버그는 해적당 지도부의 정치 성향을 언급한 바 있다.(소더버그의 글은 http://www.nettime.org/Lists-Archives/nettime-l-0906/msg00038.html에서, 그리고 그에 대한 간략한 한글 소개는 http://hack.jinbo.net/?p=90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해적당 지도부의 핵심 인물인 릭 폴크빈지(Rick Falkvinge)와 크리스티앙 엥스트롬(Christian Engström)은 이미 자유주의 우파 정당에 관여 했던 인물들이다. 특히 당 대표인 릭 폴크빈지의 경우 스웨덴 보수 우파 정당(Moderata Ungdomsförbundet)의 청년조직 회원이었는데, 그 당이 너무 ‘사회적 자유주의’로 경도되었다는 이유로 탈퇴한 바 있다. 물론 이는 스웨덴 해적당에 한정된 이야기 이지만, 해적당이 탈정치화된 조직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얼마나 큰지, 그리고 보다 급진적인 정치성을 획득하기 힘든 기반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 이기도 하다.

 

이와 더불어 해적당에 관련된 또 하나의 문제를 간략하게 짚고 넘어가야 겠다. 해적당이 상당히 많은 국가에서 호응을 얻고 확산되고 있다는 점은 앞에서 지적했다. 그런데 그 확산 분포가 상당한 편향을 가지고 있다. 해적당은 유럽과 남미, 북미 지역에서 상당히 활성화 되고 있는 반면, 동아시아, 인도, 서남아시아, 아프리카로 이어지는 지역에서는 해적당 활동이 거의 없다. 그나마 네팔과 남아프리카 공화국 정도에서 논의가 진행중일 뿐이다. 여러 연구들은 이 지역들이 유럽이나 북미에 비해 해적질의 규모도 크며, 정보 통제나 민중 감시 그리고 정보 기술을 활용한 프라이버시 통제가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앞으로는 좀 더 개선될 것이겠지만, 현재 보여지고 있는 해적당 활동 유무의 극단적인 지역적 차이는 해적당의 활동 네트웍이 얼마나 서구 중심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내 준다. 그들이 의약품 특허 문제를 이야기 할 때 항상 거론되는 지역(아프리카나 남아시아 지역 등)에서는 정작 해적당 활동이 전무한 상황이다. 그 지역에 저작권이나 특허와 관련된 운동을 하는 이들이나 단체가 없기 때문만도 아니고, 활동이나 운동의 정치적 탄압이 극심하기 때문만도 아니다. 거기에는 여전히 시혜의 대상과 연대의 대상을 분할하는 어떤 인식들이 작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해적당은 광범위한 대중적 분노로부터 출발했지만, 보다 급진적인 정치성의 획득으로 나아가기보다는 기존 정치 안에 안착하면서 그 힘을 잃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아직 시작된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해적당이 계속 현재 상태를 답습하며, 보다 근본적인 문제제기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그것은 21세기에 발생한 하나의 정치적 스캔들로 치부되며 사라질 가능성이 커 보인다. 정보 통신과 관련된 운동에서 해적당 활동은 상당한 의의를 가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정치적 스캔들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넘어야할 난관이 꽤나 많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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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 가지 힘

교양으로서의 역사와 정치

 

짧은 한 권의 책에 (세계)역사를 정리하는 것은 불가능한 기획이다. 역사가 과거에 대한 기록이라면, 그 과거란 획정될 수 없는 무한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세계)역사를 대상으로 하는 수많은 책들을 접해 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저자가 취하고 있는 독특한 관점이다. 이런 류의 책은 특수한 관점을 매개로 과거의 사건들을 선택하고 배제하는 과정 속에서 완성된다. 이 책에서 저자인 사이토 다카시는 (세계)역사를 관통하는 다섯 가지 힘을 제시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역사를 재구성하고 있다.

 

인간은 역사적 존재다. 인간은 역사적 소여를 준거로 언어를 습득하고, 소통하며, 그 안에서 지식을 얻고, 행위의 근거가 되는 사회적 합리성을 형성시킨다. 다시 말해 특수한 문화적 요소들의 전승을 통해 인간은 역사적 존재가 된다. 이에 반해 사물 혹은 사건 그 자체는 역사를 갖지 않는다. 사물 혹은 사건은 그냥 존재하는 것이지, 스스로는 어떠한 의미도 전달하지 않는다. 그것은 역사적 존재인 인간의 의미망 속에 포착됨으로써, 인간에게 인식되고 언어를 부여받음으로써 ‘역사화’ 된다. 때문에 우리는 역사(라고 불리는 것)와 마주할 때, 그것을 소환한 주체의 의도와 입장이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 이때 한 가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그 의도와 입장의 이면에 직접적인 배후와 음모 혹은 치밀한 이데올로기적 공작이 항상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 책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 책에서 저자가 왜 (세계)역사를 다섯 가지 키워드로 엮어 내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그러나 아쉽지만, 저자는 그 키워드를 고도의 정치적 계산 위에 배치시키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이 다섯 가지의 키워드들은 비일관적이며, 우연적인 것처럼 보인다(어떤 일관성을 찾아내기에 이 책은 너무 허술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이토 다카시가 선택한 다섯 가지 키워드 대신, 그 자리에 폭력, 시공간, 혁명, 합리성, 매체, 전쟁 등등 갖가지 키워드를 삽입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이 책은 전문 학술서가 아니라, 흔한 하나의 교양서일 뿐이라고 말하며 이런 비판을 회피할 수 있을 것이다. 학술서도 아니고 교양서가 이정도면 됐지라고 말이다. 그런데 이건 그리 중요한 변명이 되지 못한다. 교양이라는 것 자체가 근대 부르주아 사회가 만들어낸 정치적 범주이기 때문이다. 교양 있는 사람은 시민(문명)화 되고(civilized), 문화화 되고(cultured 혹은 cultivated), 교육 받은(educated) 사람이다.(civilized, cultured, educated는 모두 '교양있는'이라고 번역되는 언어이며, 이는 부르주아 시민을 구성하는 세 영역, 즉 문명, 문화, 교육을 지시하는 언어들이다.) 교양은 시민사회의 구성원이 받아들여야 하는 미덕인 것이다. 교양은 시민이 당연히 알아야 하는 상식이며, 상식(common sense)은 시민들의 공통 감각(common sense)을 형성함으로써 그들에게 각인된다. 교양이나 상식은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지평 위에서 작동하고 있다.

 

사이토 다카시는 자신의 책이 시중에 널려 있는 “통사류의 세계사 책”과는 “차원이 다른” 책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역사 기술이나 대안적 역사 인식에 이르는 길을 보여주기 보다는 보편화된 편견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들만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이 비판했던 역사(기술)의 지점들을 반복하고 있다. 이 책은 세계사라는 이름으로 (간혹 일본사가 언급되는 것을 제외하고는)서구의 역사에 대해서만 기술하고 있으며, 제국주의를 남성들의 정복 욕망으로 환원하고 있다. 또한 이 책에서는 “인공적” 사회주의에 대한 “자연 발생적” 자본주의의 궁극적 승리가, 나아가 “자본주의의 미래가 인류 전체의 미래”가 될 것임이 선언되고 있다.

 

일관성 없는 관점이나 치밀하게 계산되지 않은 (역사적)사건들의 나열은 역사 기술에서 가치 개입이 배제되어 있을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그것은 교양서의 보편성을 가능케 하는 비정치성(처럼 보이는 것)과 연루되어 있다. 그러나 서구의 역사가 세계의 역사라고 가정하고, 남/여의 성 역할과 특성을 고정시키고, 대체될 수 없는 자본주의의 영속성을 주장하는 것만큼 정치적인 것이 또 있을까. 이런류의 역사 교양서와 마주할 때 우리는 고도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시민에게 요구되는 교양으로서의 역사, 그 역사 속에서 무엇이 계승되고, 무엇이 반복되고, 그리고 무엇이 망각되고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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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 대학원 신문 기고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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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유감스런 후유증

명절 유감, 불안에 대처하는 가족의 자세

 

추석 연휴가 반갑지 않았다. 육감같은 것이 아니다. 기습 폭우로 도시가 잠겨 수많은 이재민이 생겨날 것을 미리 알게된 예지력 같은게 아니었다.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었다. 지금까지 축적되어온 경험을 통해 몸이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역시나 정확했다. 유독 나만의 이야기도 아니다. 선후배나 동료를 통해 들려오는 이야기도 비슷한 것들이다.

 

민족 고유의 명절, 풍요롭고 아름다운 전통의 명절. 추석 앞에 붙은 수식어들이다. 그래도 사실 추석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민족 대이동이라는 표현이다. 그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도로로 쏟아져 나온다. 뭐 개인적으로야 대부분 고향이나 부모님을 찾아 가는 발걸음이겠지만, 그 도로의 풍경을 볼 때면 야릇하고 수상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것은 때로 종교적 의례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 때로는 전쟁시의 피난민처럼 보이기도 한다. 대체 그 풍경의 정체는 무엇일까.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을 가족과 함께 보내는 전통, 근대화로 인한 핵가족화, 기형적 도시화가 야기한 탈향민의 급증 등이 이런 현상의 원인으로 거론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명절이 되면 멀리 떨어져 거의 다른 공간에 살던 사람들이 갑자기 무슨 변신로봇마냥 합체를 한다.

 

추석을 맞이할 때 느껴졌던 불안한 예감은 그곳에서부터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그렇다. 나이는 찼는데 번듯한 직장도 없고, 아이도 없고, 결혼도 안하고, 심지어 배우자가될 예비 후보마저 자신있게 거론할 수 없는 사람에게 명절은 괴로운 것이 된다. 변변한 대화한번 해본적 없는 친적(촌수가 멀건 가깝건 상관없다)이 지나가며, 갑자기 남의 직장과 연애 사정을 걱정한다. 마치 어릴적 “그래 공부는 잘 하고 있냐?”라고 묻던 어느날 문득 찾아온 삼촌(실제 촌수로는 사실 3촌도 아니다)의 느낌, 평소에 내 생각따위 한 번도 해본적 없을 뿐만 아니라 사실은 내가 공부를 잘하건 말건 전혀 상관없이 살아가던 그 삼촌의 느낌으로 말이다. 사실 그들은 내 직장이나 연애, 내 공부에는 별 관심도 없고,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나와 다른 공간에 자신들만의 삶을 살고 있다. 그 무관심한 관심이 듣는 당사자에게는 상당한 자괴감을 안겨준다는 사실을 아는걸가 모르는 걸까.

 

자격지심일 수도 있다. 아마 그것이 맞을 것이다. ‘실업은 이미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결혼 늦게 하는것도 트렌드로 여겨지는 세상 아닌가’라고 생각해봐야 3초짜리 위안도 되지 못한다. 그들에게도, 나에게도 그것은 내 문제인 것이다. 취직도 잘하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번듯하게 사는 엄친아는 어디든 있게 마련이니까 말이다. 남들 취직하고 결혼할 나이에 대학원에 다니는 사람이나, 고시 공부 하는 사람, 대기업 직장인만큼의 월급을 받지 못하는 단체 활동가들에게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들은 ‘제대로’된 월급을 받는 ‘제대로’된 직장에 다니고 있지 않은 만큼, ‘제대로’된 삶을 살고 있지도 않은 것으로 취급된다.

 

예전에도 어느 집안에나 한두 명쯤은 ‘제대로’된 삶을 살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왔다. 그들은 그냥 그런 사람들이었다. ‘못난놈’ 취급을 받거나 기분나쁜 혓소리(쯧쯧~)를 들어야 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좀 다른 듯하다. 두 번의 거대한 경제 위기를 겪고, 신자유주의가 국가 통치 전략의 기본 기조가 되고 있는 상황에서 사회적 안전망은 급속히 해체되어가고 있다. 삶의 불안, 불확실성, 불확정성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가족은 안전망의 최후 보루 역할을 해야 한다. 사회적 안전망이 급속히 파괴되고, 삶의 불안정성이 증가하는 만큼 개인이 짊어져야할 삶의 무게, 가족에 대한 책임감도 증가한다.

 

이제 우리(나와 그들)는 기분나쁜 혓소리 대신 ‘고생하는 엄마’를 생각하라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자기네들과는 별 상관없는 오지랖이겠지만, 그렇다고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가 아닐 수 있는 것 같다. 혈연이라는게 그런 측면이 있다. 누구하나 잘못되면 도움을 주진 못하더라도, 부채감이나 죄의식 같은걸 만들어낸다). 이것은 부모를 봉양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넘어 전면적인 삶의 불안정에 대처하기 위해 너도 동참해야 한다는 명령처럼 들린다. 여기에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지는 것을 넘어 마지막 남은 안전망으로서의 가족을 재강화해야 한다는 가치관, 즉 삶의 불안정성의 유래 없는 확산에 대응해 가족주의를 강화해야 한다는 독특한 가치관이 담겨 있는 것 같다. 이제 취업과 결혼은 전통이나 당위가 아니라 생존이 되어가고 있다.

 

명절 주간이 되면 복권 판매량이 증가한다. 그것은 실현될 수 없는 희망이지만, 거기에는 어떤 간절함이 항상 함께 하고 있다. 그 절박함이 극단화된 삶의 불안을 보여준다. 명절 후유증은 연휴로 인한 업무 부적응, 과도한 음식 섭취 때문에 불어난 뱃살, 주부들의 시집살이만 나타내는게 아니다. 그 목록에 ‘제대로’된 삶과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혹은 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의 스트레스와 삶의 공포가 추가되어야 한다.

 

어떤 측면에서는 명절 때면 찾아오는 더부룩함과 소화 장애의 원인이 기름진 음식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 삶의 불안과 공포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그리고 굳이 친절하게 꼬치꼬치 그것들을 드러내고, 따져주시는 그 친지분들 때문인 것도 같다. 이제 연휴도 끝났다. 남은건 후유증 뿐이다. 명절 때 남은 음식 다 먹어치울 때쯤 같이 사라지면 좋겠지만, 아마도 다음 명절 때까지 어지간히 우리를 괴롭힐 것이고, 다시 명절이 오면 혹시 우리가 잊어먹을까 걱정되 누군가 다시 확인시켜줄 것이다. 그렇게 삶도, 아름다운 우리 고유의 전통 명절도, 친척들의 오지랖도 지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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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스 기고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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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바람에 사라져가는 교육의 공공성과 창작(물 이용)의 자유

저작권 바람에 사라져가는 교육의 공공성과 창작(물 이용)의 자유

 

얼마 전 문광부에서는 보도자료를 통해 대학에 ‘수업 목적 저작물 이용 보상금’제도를 도입하겠다고 예고했다. 이 제도는 이미 2006년 저작권법 개정을 통해 예비되어 있었다. 문광부는 이 제도가 “저작권자들과 대학들 간의 보상금 기준에 대한 합의가 지연”되고, “대학들의 재정부담” 등의 문제를 고려하여 시행을 유보해 왔었지만, “지난 2009년 전국 4년제 및 2년제 50개 대학 실태조사를 실시, 저작물 종류별(어문, 음악, 영상 등) 보상기준을 마련”했고, “2010년부터는 전국 대학교를 대상으로 수차례 공청회 및 의견조회를 실시”하며 어느 정도 의견이 수렴되었기에 이 제도를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대학 측에서는 이 제도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으며, 여전히 제도 자체가 가진 문제도 산재해 있어 논란이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고려대 이대희 교수는 ‘수업 목적 보상금’제도의 도입을 찬성하며, “저작물 이용에 대한 이용료를 지급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어서 이용료 지급에 대해 논란을 벌이는 것은 합당하지 않”고, 저작물에 대해 “일일이 이용허락을 받아야 한다면 교수 행위가 위축되고 수업시간에 활용할 수 있는 저작물은 제한될 수 있”기 때문에 이 제도의 시행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인식은 많은 문제을 안고 있다.

 

우선 저작권을 통해 창작물이 개인의 소유물로 전유된 것은 저작권법이라는 특수한 법이 만들어진 이후 발생한 현대적 현상이다. 특히 한국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미국과의 통상 협정을 통해 기존의 유명무실했던 저작권법이 전부개정되며 효력을 발휘한 것이 불과 25전이다. 또한 대학에서 학술적 목적으로 자료를 공유하는 것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서적의 경우 한국의 출판 시장의 기형적 구조로 인해 학술 서적은 출간되거나 번역된지 몇 년만 지나도쉽게 품절되어 구할 수 없게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이를 보충할 수 있는 도서관의 수준도 열악할 뿐 아니라, 중고 서적 시장도 크게 활성화 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다. 교육과 학술은 사회적이고 공적인 가치를 지닌 것이다. 그것은 “문화의 향상 발전”을 위해 필수적인 영역이다. 저작권법의 목적이 “문화의 향상 발전”에 있다면, 그러한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행위는 공정이용으로 보아야 한다.

 

다음으로 이대희 교수는 저작물의 사용에 대해 일일이 허락을 받아야 한다면 교수 행위가 위축될 것이기 때문에, 이 제도의 도입을 통해 교수 행위의 위축을 막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는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교수 행위에 문제를 발생시킨 것 자체가 저작권법이기 때문이다. 없던 문제를 만들어 놓은 후에 다시 해결하겠다는 것은 (자유주의자들이 좋아하는 용어로 따지자면) “비합리적인 것”이다. 처음부터 문제를 만들지 않으면 된다. 교육이나 학술의 영역과 같은 공적 영역에 대해서는 저작권을 제한하는 것이 더 쉬운 해결책인 것이다.

 

이 제도의 도입을 반대하는 대학 역시 문제적이다. 대학에서 이 제도를 반대하는 이유는 이제도의 도입이 등록금 인상의 빌미가 될 것이기 때문에 그 피해를 학생들이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학생들을 위해서라도 이 제도를 시행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대학에서 저작물을 사용하는 경우는 교육의 교보재로 활용하는 것이다. 대학은 교육을 하는 곳이고, 교육을 위한 수단들은 대학에서 제공해야 할 서비스의 하나이다. 현재 한국의 대학생들은 이미 자신들이 받는 교육 서비스를 훨씬 넘는 수준의 등록금을 지불하고 있다. 학교에 지불한 금액 대비 학생들이 제공받는 교육 서비스의 수준을 고려하면, 그것은 등가 교환의 원리조차 적용되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들이 당연히 제공해야할 서비스를 학생들에게 전가시키면서, 짐짓 학생들을 위하는체 하고 있는 것이다. 대학 측에서 이 제도를 반대한다면 그것은 교육의 공공성이라는 입장에서의 반대여야 하며, 공적 영역으로서의 교육에 시장논리를 도입하려는 시도에 대한 반대여야 한다.

 

수업목적 보상금 제도와 관련하여 우리는 다시 창작과 보상이라는 오래된 문제와 마주하게 된다. 창작 노동에 대해 일정정도의 보상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의 보상 시스템은 소수의 창작자에게 부여되는 과잉 보상 혹은 대부분의 창작자에게 부여되는 과소 보상의 형태로만 나타나고 있다. 적절한 보상이란 어느정도 수준인가라는 문제는 여전히 논쟁적이지만, 소위 말하는 대박 혹은 쪽박 형태로 이루어지는 현재의 보상 체계는 분명 문제가 있다. 어떤 측면에서 보상 체계는 보상 자체가 아니라 분배 체계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 문제는 이번에도 여실히 드러난다.

 

문광부에 따르면 대학은 문광부 고시 기준에 따라 (사)한국복사전송권협회와 개별약정을 체결해야 한다. 그런데 복사전송권협회는 대학에서 사용되는 다양한 창작물들, 즉 영화, 음악, 도서, 공연, 방송, 미술, 사진 등 다양한 창작물들의 전체 권리자를 대표하는 단체가 아닐뿐더러, 획득된 보상금을 공정하게 분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단체인지도 명확하지 않다. 분배 체제가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현재 수업목적 보상금 제도는 사적 단체를 매개로 대학으로부터(정확히는 대학생들로부터) 국가가 저작물 보상금을 갈취하는 형태를 취하게 된다.

 

그렇다면 분배 체계만 갖춰지면 이 제도의 타당성이 인정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우선 하나의 사적 단체가 국가 전체의 저작권자를 대신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될 수 있다. 또한 앞에서 제시한 교육의 공공성 문제를 고려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 더해 현재 문화산업의 구조도 직접 창작자에게 보상이 돌아가는 체계가 아니다. 거대 문화 산업 기업은 개별 창작물의 유통 통로를 장악하고 있고, 이 유통망에 진입하기 위해서 창작자들은 자신의 창작물에 대한 권리의 일부 또는 전부를 기업에 양도해야 한다. 그리고 이 양도 절차, 즉 거대 기업과 개별 창작자 사이에 이루어지는 저작물 권리에 대한 양도 절차는 철저하게 창작자에게 불리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때문에 창작물에 대한 보상은 개별 창작자에게 돌아가기 보다는 거대 문화 산업 기업에게 돌아간다. 요컨대 창작물에 대한 보상이 창작자에게 직접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이는 창작자에게 적절한 보상을 보장함으로써 창작에 대한 인센티브를 부여하여 문화의 향상발전에 이바지 한다는 저작권법의 목적과 배치되는 것이다. 저작권법이 최소한의 올바름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이 상황을 악화시키는 수업목적 보상금 제도와 같은 것을 만들어낼 것이 아니라 창작물에 대한 보상과 보상금 분배의 체계를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끝으로, 이 제도가 가진 법리적 문제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물론 법의 기술적 실효성에 관한 문제는 아니다. 문제적인 것은 법과 그것의 적용 사이에서 나타난다. 현재 시행예정인 이 제도는 기본적으로 모든 학생을 잠재적인 저작권법 위반자로 상정하고 있다. 또한 대학에서는 분과학문의 특성에 따라, 강의의 특성에 따라, 그리고 강의를 진행하는 교수의 특성에 따라 강의에 활용하는 저작물의 이용 빈도와 정도가 상이하다. 일괄적으로 저작료를 학생에게 전가할 경우(문광부 산정 1년에 1인당 3580원) 어떤 학생들은 사용하지도 않은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단순히 저작물을 사용한 사람이 그에 대한 대가를 부담해야 한다는 원칙을 내세우기 위한 말이 아니다. 문제는 이러한 기초적인 (자유주의적) 불공정이 아니라 저작물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저작권법 앞에 세우고, 경유하게 하는 이 제도의 특수한 측면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저작권법은 (창작자가 원하지 않을 때 조차) 모든 창작물에 (경제적)권리를 부여하고(무등록주의), 모든 이용자에게 창작물 이용에 대가를 지불하게 한다. 요컨대 저작권법은 창작과 문화적 생산에 있어서 모든 사람들(창작자이든 이용자이든)을 법 앞의 개인으로 호명하고, 그들에게 권리와 의무를 부과해야 한다. 심지어 창작물을 생산하지 않고, 이용하지도 않는 사람조차 이런 원칙에 포섭시켜야 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법은 무지를 용납하지 않는다. 저작권법을 몰랐다는 말은 그것의 위반에 대한 핑계가 되지 않는 것이다. 때문에 일괄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제도의 경우에는 특정 집단인 대학생들을 저작권법 앞에 세우고 저작권법의 적용 대상으로 만드는 것이 이 제도의 궁극적인 효력이다. 이 제도가 시행된 후에 그들은 자유롭게 창작하고 창작물을 이용하기 보다는, 저작권법과 그것의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규제 테크닉들을 매개한 후에 창작(물의 이용)을 해야 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앞으로 그 수많은 규제 테크닉들 아래에서, 문화의 향상 발전을 위해 자유롭도록 강제당해야 한다. 이제 대학에도 저작권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그 바람에 날려 학술과 교육의 공공성도, 창작(물 이용)의 자유도 어디론가 날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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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스 기고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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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샌델의 정의론, 실패한 정치철학

 

정치철학이라는 타이틀을 전면에 내세우고 이처럼 유래 없는 인기를 얻은 책이 또 있을까.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3달 만에 30만부가 팔려 나갔다. 최근에는 그 인기에 힘입어 ‘친히’ 저자까지 초청되어 여기저기서 강연을 하고 있다. 사실 이 책과 관련해서 제기되어야할 질문은 ‘이 책이 가진 가치가 무엇인가’가 아니라 ‘한국사회에서 이 책이 이렇게까지 유행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일 것이다. 그것은 하버드대라는 명함 때문일 수도 있고, 미국의 시각으로 세계를 보아온 우리의 익숙함 때문일 수도 있으며, 한국의 천박한 자본주의 환경에서 일말의 윤리를 찾아내고자 하는 열망일 수도 있다(혹은 또 다른 무엇일 수도 있다). 이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제공된 이 지면의 목적이 아닐뿐 아니라 필자가 아직 그에 답할 만큼의 통찰을 가지지 못한 관계로 생략하도록 하겠다. 곧바로 책으로 들어가 보자.

 

이 책은 자극적인 사례와 흥미로운 질문들로 독자를 유혹하고, 곧바로 권위 있는 철학자들을 배치시킨 뒤 그 철학자들의 논리적 난점들을 (지나치게)쉽고 통쾌하게 폭로한다. 그리고 그곳의 핵심에는 개인과 사회 그리고 국가의 윤리가 놓여 있다. 샌델은 정의의 문제를 “단지 개인이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를 묻는 것”에 한정된게 아니라 “법은 어떤 역할을 하며, 사회는 어떻게 조직되어야 하는지”를 묻는 것으로 확장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샌델은 (그것이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특정한 상황에서 판단해야 하는 개인을 상정한 후, 그 개인의 판단이 가진 윤리적 정치적 함의를 분석한다. 여기서 개인들은 판단의 근거가 될 수 있는 독특한 합리성을 가지는 것으로 전제되는데, 그것은 단순한 도구적 합리성이 아니다. 그는 오히려 도구적이고 계산적인 합리성이 인간이 가진 보편 윤리에 근본적으로 대립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그는 공리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이 가진 논리적 결함과 문제점을 상세히 분석하며 논의를 진행시킨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샌델은 특정한 상황에서 개인의 판단은 공동체 의식에 준거해야 하며, 이를 통해 “미덕을 키우고 공동선을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요컨대, 정의에는 “어쩔 수 없이 판단”의 문제가 제기되며, 그것은 “올바른 가치 측정”의 문제이기도 한데, 여기서 가치 측정의 준거가 바로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공동체는 국가와 거의 구분되지 않는다(샌델은 유독 결론 부분에서 공동체 주의에 대한 자신의 결론을 이끌어 내기 위해 미국의 대통령들과 정치인들을 자주 언급한다.) 지구화의 흐름과 더불어 민족국가의 경계가 유동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공동체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삶의 위협이 될 수 있는 외부적 환경을 차단하기 위해 공동체의 경계를 강화해야 한다는 보수적인 정치적 입장과 맞닿아 있다. 또한 샌델의 논의에서 가장 문제적인 것은 그가 분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분석하고 있지 않은 것에서 발견된다. 그는 개인들 간의 관계와 사회, 나아가 국가의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거기에 계급(class)도, 민족(nation)도, 종족(ethnic)도 없다. 그의 논의에서는 구조적인 층위에서 사회적 적대를 만들어내는 어떠한 심급도 발견되지 않는다.

 

정의란 완성된 하나의 실체가 아니다. (샌델의 말을 빌리자면) 그것은 법의 작동과 사회의 조직 형태와 관련되어있다. 때문에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법의 작동과 사회의 조직에 대한 사유가 선행되어야 한다. 하지만 샌델은 법이나 사회 혹은 국가에 대한 어떤 근본적인 질문도 제기하지 않는다. 그는 정치에 대해 논하지만 정치가 형성되는 근본 조건에 대해 논하지 않으며, 윤리적 사유에 대해 논하지만 그것들을 가능케 하는 인식론적, 존재론적 조건들에 대해 사유하지 않는다. 철학이란, 특히 정치철학이란 현실의 문제를 괄호치고 관념론적 사유에 빠지는 것이 아니다. (정치)철학은 현실의 문제가 발생하는 핵심에서 그것의 한계 지점을 사유해야 한다. 샌델이 누락시키고 있는 것은 몇 개의 개념이 아니라 우리 삶이 놓여 있는 정치적 현실 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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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 대학원 신문사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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